우디 앨런과 함께 필름 뉴요커로 자리해온 마틴 스콜세지는 전세계 영화의 수호자다. 일흔에 다다른 나이에도 녹슬지 않는 열의와 애정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발굴한다. 언젠가 영화가 될 그 삶에 대하여.
“내 모든 삶은 영화와 종교에 머물러 있다. 어쩌겠나. 그뿐인걸.” 마틴 스콜세지의 유년시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뉴욕 맨하튼 동부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스콜세지는 가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밀집한 그곳에서 언제나 죽음과 맞닿은 폭력을 목격하거나 내몰리며 자라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란 스콜세지에게 일종의 동아줄이었다. 영화란 그 ‘비열한 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꿈이었고, 그는 그 꿈을 향해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할리우드의 6~70년대는 영화광들의 시대를 맞이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와 같은 흥행사들을 비롯해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브라이언 드 팔마 등 작가주의적인 성향의 감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영화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영화학과 출신 세대들, 즉 아카데믹한 씨네필들이자 테크니션이었다. 뉴욕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스콜세지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단편을 감독하며 연출자로서의 경력에 시동을 걸던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문 출신의 고백적인 작품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스콜세지의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1968)는 여성을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카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 청년의 잠재적 폭력과 이중적인 심리를 다룬 문제적 수작이다. 스콜세지에게는 시대적인 공기를 파악하고 현상의 근원을 살피는 능력이 있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강압적인 불평등 처우로 가난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무법자가 되어 벌이는 사건을 그린 <공황시대>(1972)를 비롯해서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 그리고 <갱스 오브 뉴욕>(2002)까지, 뉴욕의 이민자 출신 갱단들과 남루한 뒷골목 소시민들을 비춘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가난과 차별이라는 담보로 상환한 비극적 폭력성을 담아냈다. 무엇보다도 스콜세지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해나가기 위해서 폭력 그 자체를 유전자에 새긴 듯 살아가는 비열한 갱단들의 이미지를 강렬하고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그 특별한 방식의 삶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해나가는 이 세계의 일부로서 편입시킨다.
스콜세지는 이주민들로 채워진 뉴욕에 깃든 폭력의 역사를 탐구해낸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면들을 발췌해온 진정한 필름 뉴요커다. 1920년대 뉴욕의 사교계를 배경으로 그린 은밀한 삼각관계에 관한 <순수의 시대>(1993)는 시대극이란 점에서 이례적이나 유럽과 같은 뉴욕 사교계 문화의 풍경을 들춘다는 점에서 그답다. 무엇보다도 뉴욕 상류층의 향락을 살핀 이 작품은 미국의 근간을 이룬 그들 역시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의 이주민이란 사실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또한 스콜세지의 이례적인 작품 <특근>(1985)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밀어붙인다.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끌려서 한밤중에 집을 나선 한 남자가 처음 마주한 뉴욕의 이방인 같은 여성들과 거듭 만나며 미궁과 같은 하룻밤을 보낸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좀처럼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을 만큼 혼란한 도시의 현실 그 자체를 패닉에 가까운 과장된 스토리텔링으로 녹여낸다.
<쿤둔>(1997)과 <비상근무>(1999)로 쇠퇴의 기미를 지적 받던 스콜세지는 다시 한번 폭력의 역사로 들어선다. 혹독한 뉴욕 이민자들의 역사를 그린 <갱스 오브 뉴욕>은 괴물의 탄생을 그린 영화다.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안착한 갱단들의 비열한 정서를 그린 스콜세지의 초기작과 달리 폭력 속에서 생존을 터득하고자 본능적으로 체득해 나가는 폭력성, 즉 폭력의 계승을 그린다. 미국의 미스터리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의 전기물 <애비에이터>(2004)는 뉴욕의 이주민들이 꿈꾸던 환상, 아메리칸 드림에 근접한 어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진취적인 도전을 거듭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뛰어난 수완을 거둔 남자는 끝내 스스로의 욕망으로 자신마저 불사른다.
스콜세지에게 비로소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긴 <디파티드>(2006)는 홍콩의 <무간도>(2002)를 보스턴의 풍경으로 변환한 그의 탁월한 접근 방식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비정한 정서가 짙게 드리운 <무간도>와 달리 비열한 거리의 물리적 폭력이 체감되는 <디파티드>는 명분을 중시하던 <무간도>의 인물들과 달리 사적인 지배욕으로 팽배한 사내들의 생존 전장으로 변환된다. 무간지옥의 윤회 대신 비열한 거리 위에서의 구원을 행하는 사내들의 정조는 태평양을 건넌 리메이크작의 진수를 드러낸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을 영화화한 <셔터 아일랜드>(2010)는 <케이프 피어>(1991) 이후 처음 연출한 장르물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마치 생존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스콜세지의 괴물들이 끝내 분열증과 망상증으로 내몰려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되묻는 과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물의 태도는 폭력을 관찰해온 스콜세지가 보다 적극적인 답변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보다 새롭다.
스콜세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녹을 닦아온 거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가족영화이자 3D로 촬영된 작품인 <휴고>(2011)는 분명 의외의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휴고>는 가족을 위한 영화도, 3D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한 영화도 아니다. 뤼미에르가 촬영한 달리는 기차 이후로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관람의 대상이 된 영화에 스토리텔링이라는 영혼을 불어넣은 영화의 진정한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에 대한 내용이 담긴 원작은 스콜세지의 마음을 당길만한 것이었다. 특히 뤼미에르의 달리는 기차 영상을 비롯해서 다양한 무성영화의 레퍼런스들을 3D로 체험한다는 건 진귀한 체험에 가깝다. <휴고>는 움직이는 그림이 영화라는 예술이 되기까지, 무성영화가 오늘날의 디지털 3D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역사를 스크린에 집약시킨다. 영화 그 자체를 오마주한다.
스콜세지는 말한다. “영화는 역사다. 영화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문화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각자 서로와 자기 자신을 향한 연결고리를 잃게 된다.” 70세에 이른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는 스콜세지는 전세계 필름의 발굴과 복원 사업에 힘쓰며 끊어진 필름의 역사를 이어나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 그 자체를 스크린에 투영하며 대중을 영화라는 마술로 인도하고자 한다. 결코 녹슬지 않는 감각과 애정으로, 영화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영화와 함께 하는 그 삶이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침체된 독일 영화계는 ‘오버하우젠 선언’이라 불리는 뉴저먼시네마의 시대를 주창한다. 전통적인 공업도시 오버하우젠은 필름의 혁명 지대로 거듭났다. 그리고 서독단편영화제에서 출발한 오버하우젠 국제단편영화제는 올해로 57회를 맞이하는 최장수 국제단편영화제로서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데이비드 린치 등, 영화적 혁명을 지지하고 발굴해 왔다. 5일부터 10일까지, 40개 국가에서 모인 470편의 새로운 혁명이 공개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좁은 열도에서 세계로 눈을 돌렸다. 일본영화계의 이단아라 불렸지만 결국 세계영화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한계와 편견을 베어내고 세계로 나아간, 그는 전설이다.
<라쇼몽>은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감독 개인에게 세계적인 거장으로서의 이력을 부여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일본영화의 황금기를 개척한 작품으로서도 의의를 지닌다. 당시 일본영화계를 이끄는 건 유미주의 형식을 중시하던 미조구치 겐지와 오스 야스지로였다. <라쇼몽>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은 동시대 일본영화계에도 큰 충격이었다. 심지어 미조구치는 12살이나 어린 새까만 후배가 자신이 얻지 못한 대단한 영광을 일찍 차지했다는 사실에 울분을 삼켰다. 결국 술도 끊고 작품에 전력한 미조구치는 이듬해 <오하루의 일생>을 통해 베니스영화제 본상을 수상한다. 이는 미조구치의 뛰어난 재능에서 기인한 사례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구로사와의 <라쇼몽>이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을 활짝 열어놓은 덕분이었다. 실로 ‘라쇼몽 효과’라 불릴 만한 사건이었다.
친문학적인, 반시대적인
구로사와의 <라쇼몽>은 아쿠타가와의 <라쇼몽>으로 이야기의 입구와 출구를 세우고 <덤불 속>으로 통로를 확보해내듯 각색된 영화다. 세찬 폭우가 내리는 ‘라쇼몽(羅生門)’을 다각도로 비추는 몽타주 컷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아래 앉아 있던 나무꾼과 승려가 비를 피하는 행인을 만나 자신들이 겪은 어떤 사연을 고백하는 이야기다. 그 사연인즉슨 이렇다. 백주대낮의 깊은 숲 속에서 어떤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리고 용의자로 붙잡힌 도적과 현장에 있었던 남자의 부인, 그리고 죽은 남자를 몸 안에 빙의한 무녀, 그리고 이를 목격한 나무꾼은 차례로 자신이 체험하거나 목격한 사건에 대해 진술해 나간다.
아쿠타가와의 소설에 기반한 <라쇼몽>과 같이 구로사와는 다양한 고전문학 위로 자신의 창작적 뿌리를 내렸다. 사실 구로사와는 화가를 꿈꾸던 미술학도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슈샤 서양화학교에 입학한 뒤,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마르크시즘 대신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러시아 문학에 심취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이나 <맥베스>를 일본의 정서로 해석한 <란>과 <거미집의 성>을 비롯해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을 영화화하는 등 다양한 고전문학 작가들의 작품에서 얻은 영감을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에 투영해내곤 했지만 그 중에서도 “나를 그렇게 부드러운 방식으로 매혹시킨 작가는 없었다”고 밝힌 도스토예프스키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실제로 <라쇼몽>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영화화하기 위한 준비였음을 고백한 바 있는 구로사와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인물들의 고통에 천착하듯 기술해나가는 것처럼 인물들의 고통을 면밀히 살피는데 주력한다.
이런 경향은 구로사와의 현대극 안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데루스 우잘라>, <산다는 것>과 같은 구로사와의 현대극 속 인물들을 두고 일본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이처럼 말했다. “그들은 누구와도 연대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방식을 스스로 정한 뒤 자신만의 고뇌 속에서 혼자 고통 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는 인간들이다. 그 극단적인 폐쇄적 태도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대세순응적이라 불리는 일본인들의 태도에 대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주장이 담긴 것 같다.” 일본 최고의 문호로 꼽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가운데 <라쇼몽>과 <덤불 속>을 각색해 영화화한 <라쇼몽>에서도 이런 태도는 깊게 드러난다.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진술을 펼치는 네 인물은 저마다 설득력 있는 개연성을 획득함으로써 되레 진실을 미궁으로 밀어 넣어버린다. 결국 ‘진범은 누구인가’라는 후더닛 구조의 의문에서 출발하는 <라쇼몽>은 진술의 나열과 함께 시작점의 의문을 희석시키고 같은 사건을 진술하는 인물들의 입장 차이에 대한 심리적 의문에 초점을 맞추게 만든다. 사실 각자의 진술 과정은 저마다의 죄의식을 무화 시키기 위한 변명이자 합리다. 이는 곧 당시 전후 일본 사회에 만연된 가치판단의 부재를 직시하는 것이었으며 대세순응적인 태도에 반발한 구로사와의 반시대적 심리와 깊게 연관돼 있다. 이런 인물들의 태도는 ‘라쇼몽 효과’라 일컫는 진리의 상대성에 대한 예시로서 자리잡았다.
동서양을 녹인 세계적 경지
구로사와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무성영화 변사로 일하는 셋째 형 헤이고의 영향이었다. 헤이고는 구로사와를 곧잘 극장에 데려갔고 그곳에서 구로사와는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체험했다. 무성영화가 자신의 영화적 기초임을 종종 밝혀온 구로사와는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 “<라쇼몽>은 내가 무성영화를 연구하면서 얻은 생각과 의도를 적용시킬 시험장이 될 것이다”라며 제작 당시의 태도를 소회한 바 있다. 절제된 대사 속에서 인물의 표정이나 행위만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은 무성영화에 대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아쿠타가와의 <라쇼몽>은 어떠한 결말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으며 부조리한 형태의 현재적 현상을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를 영화화한 구로사와는 원작의 태도에서 벗어나 부조리한 상황의 나열을 통해 유머를 발생시키고 끝내 휴머니즘을 각성시키는 작품으로 완결된다. 이는 시대와 풍경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한가운데서 인물의 위선을 고발하고 이를 통해 설득력 있는 웃음을 연출하며 끝내 희망적인 가치를 주장하던 오손 웰즈나 존 포드와 같은 대가들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면 <라쇼몽>에서 나무꾼의 마지막 진술을 통해 재현되는 도적과 사무라이의 우스꽝스러운 결투는 이에 앞서서 세 인물들의 진술이 각기 다른 양상을 재현하면서도 스스로를 비범하게 치장하던 태도와 대치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역설적인 코미디를 발생시킨다. 실제적이고 진지한 상황에 놓여 있던 인물의 태도가 위선적인 과장으로 드러날 때, 그 역설적인 찰나가 희극적인 활기로 발전된다. 또한 윤리적인 몰락에 대해 개탄하던 인물들이 라쇼몽 아래서 발견한 어린 아이의 생을 거두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시대적 희망을 거머쥐게 만들고 이를 통해 휴머니즘을 각인시킨다. 이는 시대를 관통하는 원작의 염세적인 시선을 수용하는 동시에 보다 따뜻한 시대적 체온을 갈망한 구로사와의 입김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서구 고전영화들이 발전시킨 다양한 스타일이야말로 <라쇼몽>을 수놓은 영감의 보고다. 구로사와는 이를 통해 노와 가부키 같은 전통적인 일본연행의 형식을 고집한 당대 일본영화계의 풍토와 대척점에 섰다. 당시 일본영화에서 좀처럼 활용되지 않던 클로즈업을 비롯해서 깊은 숲 속까지 파고드는 과감한 트래킹 샷,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숙련된 몽타주 기법, 일정한 간격을 지닌 플래쉬백의 반복적인 변주 등은 그 영향력을 대변한다. 또한 이를 정중동의 인물 배치, 명상적인 리듬감이라는 일본 연극의 전통적 형식으로 포장하며 동서양의 요소를 절충해낸다. 영화학자 노엘 뷔르시는 “내용에 봉사하는 서구 주류의 형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간 미학”이라며 구로사와를 예찬했다. 그의 영화가 단순히 서구 영화에 대한 모방을 넘어서 동서양의 특성을 융화시키는 새로운 경지로서의 발전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은 구로사와가 동서양에서 각기 상대적인 평을 얻게 만들었다. 이는 자신의 관점에 따라 상황을 합리화시키는 <라쇼몽>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나는 일본을 향해서가 아니라 전세계를 향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구로사와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세계적이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1990년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 수상자로 연단에 오른 구로사와는 말했다. “영화는 진정 놀라운 표현 수단이지만 본질을 꿰뚫어 핵심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지금까지 5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어 왔지만 나는 아직도 영화를 잘 모르겠다.” 그러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지 등 할리우드의 후세대 거장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통해 그의 가치를 지지하고 대변해 왔다. 그렇게 구로사와의 이름은 그가 태어난 지 한 세기에 이른 지금까지도 선명한 빛을 밝히고 있다. 열도의 한계를 이겨내고 서양의 편견을 베어내며 세계로 나아간 구로사와 아키라, 그는 전설이다.
네버랜드의 피터팬이 아니라면 깨달아야 한다. 젊음은 영원하지 않음을. 제임스 딘이나 리버 피닉스처럼, 죽음만이 젊음을 보존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죽지 않았다. 그의 젊음도 저물어간다. 하지만그는 성장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중후한 삶을 피워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신중하게 말했다. “올해는 내 스스로에게도 정말 조심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난 35살이 됐고 많은 것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가끔은 너무 심각하다 싶을 정도지. 내가 다음으로 하게 될 무엇이라도 확인해보고, 나를 위해 진짜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다다른 곳을 보게 될 것이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어느 덧 30대 중반의 남자가 됐다. 디카프리오의 과거를 알지 못하는 젊은 관객들에게 그의 현재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디카프리오의 현재란 분명 놀랄만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1974년생인 디카프리오는 1990년대의 출발과 함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아역배우들의 그것처럼 디카프리오의 경력의 시작도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몇 편의 TV시리즈나 시트콤 등에 출연한 디카프리오는 번번히 영화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있었다. 당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해 나가던 토비 맥과이어와의 인연을 맺게 됐다는 것 정도가 뒤늦게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할까. 게다가 첫 스크린 출연작이었던 B급 호러영화 <크리터스3>(1991)는 주목을 얻지 못한 채, 비디오 시장으로 직행했다.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경력은 1993년에 찾아왔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참여한 오디션을 통과한 디카프리오는 <디스 보이스 라이프>에서 로버트 드니로와 알란 버킨과 같은 대배우들과 한 공간에서 연기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길버트 그레이프>에 출연했다. <디스 보이스 라이프>가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자양분과 같은 작품이라면 <길버트 그레이프>는 디카프리오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만든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니 뎁과 형제로 출연한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디카프리오는 정신질환이 있는 동생을 연기하며 인상적인 평가를 얻어냈고,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불과 열 아홉 살의 나이였다.
진 해크만을 비롯해 샤론 스톤, 러셀 크로우가 출연한 서부극 <퀵 앤 데드>(1995)는 디카프리오에게 하이틴 스타로서의 운명을 제시한 작품이다. <퀵 앤 데드>에서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소년은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총부리를 겨누며 맞서지만 끝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반쪽 짜리 오이디푸스나 다름없었다. 소년의 여린 얼굴 위로 우수에 찬 눈동자가 덧씌워질 때, 캐릭터의 비극적인 운명은 보다 낭만이란 수식어를 얻는다. 그 뒤로 디카프리오는 혈기왕성한 청년의 비극적인 무용담과 로맨스를 본격적으로 활보하기 시작한다. 같은 해에 출연했던 <토탈 이클립스>에서 아더 랭보 역할에 내정된 건 리버 피닉스였다. 하지만 리버 피닉스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그 빈자리는 디카프리오의 것이 됐다. 이는 리버 피닉스의 적자로서 디카프리오가 선택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는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운명을 온전히 다지는 작품이었다. 뉴욕 출신의 뮤지션이자 시인이기도 한 짐 캐롤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바스켓볼 다이어리>는 가난과 폭력에 갇힌 10대 소년들의 비극적인 무용담을 담아낸 수기다. 이 작품에서 디카프리오는 특유의 반항아적인 기질과 예민한 감수성을 마음껏 분출시킨다.
하이틴 스타로서 디카프리오의 절정을 이룬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1996)과 <타이타닉>(1997)이었다. 특히 21세기까지도 유효한 <타이타닉>의 기록적인 흥행은 곧 ‘레오 매니아(Leo-mania)’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킬 정도로 전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렀다. “<타이타닉>은 완전히 내 인생을 바꿔놨다.”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타이타닉>은 그의 인생을 풍랑으로 밀어넣었다. “운전하거나 걸어다니는 모든 일상의 공간에서 갑자기 너댓명의 파파라치들에게 뒤쫓기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됐다. 내가 갔던 어떤 공간에서, 누군가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새어내보내고 있었다.” 인기는 기회라는 백지수표와 같다. 한없이 누릴 수 있지만 그 끝을 예감하기란 어렵다. 디카프리오는 그 순간에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20대 중반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무엇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서 다른 경험을 얻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확실히 배울만한 경험이었다. 그 경험은 내가 배우가 되는 결정에 보다 집중하게 만들었다.”
<타이타닉> 이후, 알렉상드로 뒤마의 고전 <삼총사>에 바탕을 둔 <아이언 마스크>(1998)에서 출연했던 디카프리오는 뉴 밀레니엄을 맞아 모험을 감행한다. 대니 보일의 <비치>(2000)를 선택한 것. 심지어 디카프리오의 자발적인 지원으로 당초 캐스팅에 내정됐던 이완 맥그리거가 밀려났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2000년의 시작과 함께 디카프리오는 엄청난 혹평을 감당해야 했다. 심지어 태국의 환경단체로부터 생태계 파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영화사는 막대한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떠나 디카프리오의 선택은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어떤 욕망을 짐작하게 했다. 그 욕망을 해소해줄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조력자가 등장했다. 마틴 스콜세지였다.
“그는 강요당하는 것처럼 매우 이상한 통과의례를 관통해냈다.” 디카프리오와 함께 <갱스 오브 뉴욕>(2002)에 출연한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말처럼 디카프리오에게 <갱스 오브 뉴욕>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나는 대단한 너비와 디테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경험이었지.” 디카프리오의 말처럼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의 욕망을 발현시키는 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갱스 오브 뉴욕>은 디카프리오에게 스릴러의 거장이자 세계 영화사의 산증인 마틴 스콜세지와의 만남을 주선한 작품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낳았다. “그와 함께 일한다면 이걸 알아야 한다. 그저 모든 시간 동안 끝장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하지만 하루의 끝에 다다르면 그의 언어는 금처럼 귀중해진다. 그가 당신의 캐릭터를 위해 지켜본다는 것이 영화를 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신뢰해야 한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디카프리오에게 있어서 온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소년의 고독을 벗어나 진짜 생존을 위한 혈투로 내던져진, 일종의 피비린내나는 성인식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디카프리오가 로버트 드니로를 잇는 스콜세지의 적자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비에이터>(2004)와 <디파티드>(2006), 그리고 최근작인 <셔터 아일랜드>(2010)까지,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의 남자에서 스콜세지의 조력자로 성장해 나갔다.
스콜세지는 디카프리오에게 배우로서의 삶에 거대한 이정표가 된 인물이나 다름없다. <갱스 오브 뉴욕> 이후, 디카프리오의 행보는 심상찮은 것이었다. 스콜세지의 네 작품을 비롯해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과 에드워드 즈웍의 <블러드 다이아몬드>(2006),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2007), 그리고 샘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 그리고 현재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셉션>(2010)까지, 그는 지금 할리우드의 감독들이 선망하는 최전선에 선 배우다. 동시에 최근 그의 행보는 과거 하이틴 스타로서의 경력을 온전히 지워버리는 과정에 가깝다. 특히 현재의 디카프리오를 보여주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그는 스콜세지의 세계를 채우는 구성원이 아닌, 그 세계를 장악하는 표정을 구축해내고 있다. 폐쇄적인 인간의 내면을 심도 깊은 서스펜스와 너른 페이소스로 버무리는 <셔터 아일랜드>에서 디카프리오는 스콜세지가 창조한 혼돈의 세계관을 융용시키는 발화점이자 최고의 연기적 화력을 구사한다. 또한 스콜세지의 새로운 신작으로 예정된 루스벨트에 관한 영화에서도 디카프리오를 보게 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한다. 스콜세지 역시 디카프리오를 통해 새로운 영화적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곳은 어디나 가난하고 깨끗한 물이 충분하지 않지만 그들은 믿을 수 없을만큼 놀랍게도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 서구세계가 가능한 한 원조를 계속해 나가는 건 값어치 있는 일이다.그것이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 2004년부터 영화 제작에 참여해온 디카프리오는 2007년, 다큐멘터리 <11번째 시간>을 제작하고 직접 나레이션까지 도맡았다. 지구의 파괴와 환경의 오염에 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그의 관심사가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있음을 알렸다.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지는 서구 회사의 착취적인 다이아몬드 채굴 횡포를 고발하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출연한 이후, “다이아몬드에 얽힌 갈등과 그 사건들에 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의 진심도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는 최근 아이티섬의 구호를 위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2002년 USA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디카프리오는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지나도 나는 내가 영화에서 연기한 다양한 캐릭터들을 돌아보며 여전히 이에 관해 말할 수 있길 바란다.” 2년을 더 기다릴 것도 없다. 그는 이미 그 꿈에 도달했다. 우수에 젖은 눈빛과 맨주먹을 쥐고 세상에 부딪혀 쓰러지던 소년의 사춘기는 지난지 오래다. 세월을 지나 소년을 벗고 남자를 입은 디카프리오는 지금,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현명한 배우로서 삶을 전진시키며 어제를 돌아보고 내일로 간다.
칸, 베니스, 그리고 베를린은 시네필들의 메카다. 세 도시를 거점으로 마스터피스의 순례가 이어진다. 베를린은 그 첫 번째 관문이다. 2월 11일부터 21일까지 제60회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열린다.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2010)와 로만 폴란스키의 <고스트>(2010)같은 화제작이 처음 공개되고,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1927)도 특별상영된다. 황금곰의 환갑을 축하하는 하객들이 필름을 꾸려 베를린으로 향한다. 시네필들의 봄맞이가 시작된다.
출신성분으로 할리우드 배우를 소개하는 건 새삼스런 일이다. 다만 그 출신성분이 유명세를 탔다는 사실에서 다른 의의를 읽어야 한다. 맷 데이먼도 마찬가지다. 하버드 출신이란 그의 과거는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경력을 첨언하는 수식어로서의 의미에 불과하다.
“본드는 항상 1960년대의 가치관에 밀접해 있었다. 마이크 마이어가 자신의 스파이물 <오스틴 파워>로 부자가 되는 오늘날 세계에서 그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맷 데이먼의 코멘트처럼 이제 <007>의 제임스 본드는 낡은 유산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운 건 다름 아닌 하이퍼 리얼리즘 안티히어로 제이슨 본이다. <007>시리즈로 대변되던 기존의 스파이물과 달리 체지방 비율을 줄여버린 <본>시리즈의 담백함은 실로 신선한 것이었다. 심지어 21세기와 함께 마초적 환골탈태를 시도한 <007>시리즈가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는 추측엔 부인할만한 여지가 없다.
<본>시리즈는 스파이물의 전통적인 컨벤션을 뒤엎은혁신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건 제이슨 본, 그리고 맷 데이먼이었다. 묵묵한 인상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차분함, 낭비가 없는 동작의 신속 정확함, 단단한 육체에 비견되는 비범한 두뇌, 그리고 묵직한 양심적 고뇌까지, 맷 데이먼은 작은 제스처부터 커다란 동선까지 제이슨 본을 이루는 자질 그 자체였다. 양미간을 찌푸리다 쉴새 없이 내달리는 제이슨 본은 분명 섹시한 물건이었다. 질주와 고뇌의 <본>트릴로지를 완성하던 맷 데이먼은 다른 한 편에서 유쾌한 무용담으로 또 하나의 트릴로지를 키우고 있었다. 가볍고 유쾌한 캐릭터가 즐비한 <오션스>시리즈에서 맷 데이먼은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두개의 트릴로지 이후, 맷 데이먼는 완전히 다른 입지를 구축했다.
200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배우 35인으로 꼽힌 맷 데이먼은 같은 해 ‘피플’지가 선정한 ‘살아있는 가장 섹시한 남자(Sexist men alive)’로 선정됐다. “나는 매우 낮은 위치에 있었다. 브래드 피트, 조니 뎁,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같은 배우들이 지나쳐 보낸 대본이 남아야 오디션을 볼 수 있을 만큼.” 이제 오래된 문장처럼 낡아버렸지만 맷 데이먼의 말처럼 그의 과거는 분명 그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흥미를 갖는 아이였고 그것이 여전히 그의 삶을 유지시키고 있다.” 맷 데이먼의 어머니 칼슨 페이지의 말대로 맷 데이먼은 어려서부터 특별했다. 칼슨 페이지는 8살의 어린 맷 데이먼이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저는 제가자라면무엇이 되길 바라는지알아요.” 어머니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대답은 명확했다. “배우요.” 이 일화만으로도맷 데이먼이 4년간 다니던 하버드 대학을 그만 두고 배우로서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사실에 수긍이 갈만하다. <스쿨 타이>(1992)와 같은 청춘물로 경력을 시작한 맷 데이먼은 <제로니모>(1994)에서 큰 배역을 거머쥐며 청운의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단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커리지 언더 파이어>(1996)에서 아편에 중독된 군인을 연기하기 위해 100일 동안 40파운드의 체중을 감량해야 했다. 훗날 이에 대해 맷 데이먼은 말했다. “내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지혜를 얻었다.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이나 꿈이 아닌 이상그건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굿 윌 헌팅>(1997)은 거기서 시작됐다.
이상과 다른 현실을 헤매던 맷 데이먼은 비로소”왜 내가 여기 앉아있지?”라는 생각을 품었고, “내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굿 윌 헌팅>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절친했던 벤 애플렉과 함께 각본을 써내려 간 <굿 윌 헌팅>은 할리우드의 언저리를 맴돌던 두 배우를 온전히 다른 궤도로 올려 보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역시 하버드 영문과 출신답게 작가적 재능이 있었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대본에 투영된 재능에 미래를 걸 생각이 없었다. “각본을 쓰는 건 말할 수 있는 내 길을 말하고 시스템을 비틀 수 있는 기회였다.” 같은 해 벤 애플렉과 함께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휩쓴 맷 데이먼은 그 기회를 배우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데 소진했다.
<굿 윌 헌팅>의 세트장에서 만난 스티븐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 맷 데이먼을 캐스팅했다. 비로소 오디션에서 벗어나 러브콜을 얻었다. 이윽고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1999)에서 살인마 톰 리플리를 연기하며 연기적 보폭을 넓혔다. 문제작 <도그마>(1999)에서 벤 애플렉과 다시 손을 잡은 뒤 구스 반 산트의 <게리>(2002)에선 각본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마치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듯 일했다.” 안소니 밍겔라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쉬지 않고 돌파해 나갔다. 정작 맷 데이먼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나는 그저 할 수 있을 만큼 한 것뿐이다.”
<본>시리즈와 <오션스>시리즈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서도 맷 데이먼은 배우로서 자신이 어떤 이력을 쌓아나가야할지 판단이 명확했다. “마틴 스콜세지가레오나르도와 함께 보스턴으로 가서할 일이 있다고 했을 때,나는 무조건 예스였다.” <디파티드>(2006)를 결정할 당시 맷 데이먼에게 출연료 협상은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에게 흥미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란 점이 주요했다. “빌 모나한의크레딧이 있는각본이라면을 통해 진짜 연기할만한 것이다.” 맷 데이먼은 자신의 가치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잘 아는 배우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출하고 연기까지 한 <굿 셰퍼드>(2006)에서 그와 함께 출연한 맷 데이먼은 한 토크쇼에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출연해 이와 같이 말했다.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할 수 있었던 이후로 나는 분명 더 나은 배우가 됐다고말할 수 있게 됐다.”
근래 공개된 스티븐 소더버그의 블랙 코미디 <인포먼트>(2009)에서맷 데이먼은 14kg가까이체중을 늘렸다. 소더버그의 <인포먼트>가 맷 데이먼에게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과 꿈’으로서 인정받은 셈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빅터스>(2009)와 폴 그린그래스의 <그린 존>(2010)에 주연배우로 이름을 올린 맷 데이먼은 최근존 쉐인의 서부극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 출연을 확정지었고,게이 피아니스트 ‘리버라치’의 실화를 다루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차기작에서 마이클 더글라스와 동성애 연기에 도전할 결심을 굳혔다.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이 무산됐다지만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도 여전히 건재하다. “만약 내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의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들은 안전한 선택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 나는 절대 그와 같은 길로 가길 원치 않는다.”오래 전 자신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결코 평범한 길을 걷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청년기를 거쳐 비로소 모두가 바라는 배우로 성장했다. 동시에 그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돈 치들 등과 함께 설립한 자선단체기구를 통해 아프리카의 수질 개선과 식수 공급에 앞장서고 있으며 지난 해엔 오마바를 지지하는 연설을 통해 매케인 진영을 초토화시키며 진정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천했다.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시도하기 보다 당신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제 꿈을 실현한 맷 데이먼은 이제 세상을 구한다. 그는 진정 차가운 두뇌와 뜨거운 심장을 지닌 하이퍼 리얼 히어로다.
‘롤링 스톤즈’가 길 바닥의 구르는 돌멩이만큼의 관심거리도 안 되는 이에게 이 영화를 권하기란 힘들지 모를 노릇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담긴 공연이 어떤 극영화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무대가 롤링 스톤즈의 것이기 때문이다. 1962년 런던의 클럽에서 데뷔해 ‘비틀즈(Beatles)’와 함께 브리티쉬 인베이션(British invasion)의 신화를 쌓아 올린 로큰롤의 악동들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단단한 팀워크를 자랑하며 여전히 패기만만하게 살아있다. 2005년, 13번째 정규앨범 타이틀 ‘A bigger bang’을 발표하며 이뤄진 월드투어이자 최다수익을 기록한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된 ‘Bigger Bang tour’ 중 뉴욕의 비콘 극장(Beacon Theater)에서 이뤄진 공연실황을 담아낸 <샤인 어 라이트>는 이 밴드의 거창한 역사를 뜨겁지만 담백하게 소개하는 스포트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9년, 마이클 워드라이가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촬영한 20시간 분량의 필름을 4시간 가량으로 편집해 <우드스톡>을 완성한 장본인이 마틴 스콜세지임을 제시한다면 <샤인 어 라이트>의 설득력은 더해진다. 게다가 밥 딜런의 도발적인 이미지들을 생생히 기록하며 뮤지션의 모호한 내면을 들춤으로써 그 아우라를 강건하게 재생하는 <노 디렉션 홈: 밥 딜런>(2005)을 경험한 누군가라면 소통이 난해한 뮤지션에 대한 탁월한 접근을 이룬 마틴 스콜세지의 내공을 이미 알고 있기에 <샤인 어 라이트>의 무대가 변변찮은 라이브 클립에 불과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할지도 모른다.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의 공연실황 라이브클립으로 치부(?) 당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싶다면 이 공연실황을 카메라에 온전히 담아낸 이가 뉴욕의 필름 거장 마틴 스콜세지라는 점이 든든한 근거가 되어줄 것이다.
공연을 앞둔 롤링 스톤즈 멤버들의 여유로움과 공연 셋리스트를 기다리는 마틴 스콜세지의 초조함을 대비시키며 출발하는 <샤인 어 라이트>의 초반부는 긴 세월 동안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남은 뮤지션과 영화감독의 치열한 대립구도를 은밀하게 드러낸다. 밴드의 생존력을 여전히 무대에서 증명하는 뮤지션의 풍모와 필름을 관통한 시선으로 긴 세월을 관조한 영화감독의 치열한 자의식은 중후한 관록의 형태로 융합되어 영화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는 결국 공연을 기다리는 공연장의 관객들만큼이나 카메라를 통해 무대를 보게 될 관객들의 긴장을 불어넣는데 적합한 역할을 한다. 라이브 무대가 펼쳐지기 전, 마틴 스콜세지는 공연 이전의 풍경들을 끌어와 무대의 열기를 이루기 위한 발화점의 온도를 찾는다. 비로소 롤링 스톤즈의 무대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무대를 향한 객석의 열기는 적절한 온도로 상승하고 이내 마틴 스콜세지의 슛 사인과 함께 시작되는 첫 번째 넘버 ‘Junpin’ Jack Flash’와 함께 세차게 가열된다.
19곡의 셋리스트로 이뤄진 공연은 관객들의 열광만큼이나 멤버들의 나이를 믿기 힘들 정도로 무대에 넘치는 활력을 거침없이 분출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건 끝내주는 공연이다. 앙상하지만 섹시하게 하늘거리는 몸동작으로 열정적인 보컬을 선사하는 믹 재거의 무대 장악력과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조니 뎁이 연기한 잭 스패로우의 모델로 알려진 키스 리차드의 독특한 패션만큼이나 시선을 빼앗는 기타연주와 무대매너는 단연 훌륭하다. 또한 키스 리차드의 기타를 보완하는 로니 우드와 그들의 뒤에서 차분하게 드러밍에 집중하는 과묵한 찰리 와츠는 파수꾼처럼 무대를 든든하게 이룬다. 또한 '화이트 스트라입스(White Stripes)'의 잭 화이트, 블루스의 장인 버디 가이와 팝의 뮤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가 게스트로 등장하며 특별한 즐거움을 더한다. 총 16대의 카메라는 세련되면서도 박력 있게 무대 너머로 흐르는 열기를 생생하게 포착한다. 특히 곡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롤링 스톤즈의 과거 인터뷰 장면을 비롯한 기록들은 롤링 스톤즈의 오랜 여정을 서술하며 무대의 저력에 깊은 감상을 부여한다. 오랜 관록으로 카메라를 조율하는 마틴 스콜세지의 깊은 음악적 조예는 인물에 대한 탁월한 접근적 시선을 더하며 <샤인 어 라이트>에 깊이 있는 열광을 부른다. 게다가 그것은 관객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으면서도 그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의 표정을 예상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가 지켜봤던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스크린이 무대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샤인 어 라이트>는 그저 롤링 스톤즈의 명곡들이 담긴 라이브 실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스크린을 통해 무대를 재현하는 일종의 체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롤링 스톤즈의 무대와 그것을 바라보는 마틴 스콜세지의 시선은 거대한 관록의 시너지를 이룬다. 연륜 있는 필름거장은 위대한 라이브 제왕의 무대에 영원을 헌정한다. 그리고 그 무대를 바라볼 주체는 바로 관객이다. 비로소 2시간 여의 공연이 끝나고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밴드의 뒤를 쫓는 카메라는 하늘로 솟아올라 뉴욕의 거대한 야경을 비춘다. 그 풍경과 함께 흐르는 넘버 ‘Shine a light’의 가사, ‘shine a light on you’처럼 조명은 무대를 비추지만 그건 결국 객석에 앉은 당신을 위해 비춰지는 빛이다. <샤인 어 라이트>는 당신을 위해 마련한 VIP석이다. 실로 그 무대를 즐길 줄 아는 관객에게 <샤인 어 라이트>는 실로 비좁은 상영관의 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몸을 흔들며 환호하고 싶을 만큼 전율적인 흥분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