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2D 셀애니메이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젠 3D CG애니메이션이 대세다. 하지만 시대가 끝났다 하여 시대의 주인공까지 사라져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명맥이 끊어졌던 디즈니의 전통적인 2D 셀애니메이션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전성기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가치를 증명할만한 유산의 상속은 가능하다. 디즈니의 49번째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오랜 명맥의 가치가 무엇인지 대변하는 작품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그리고 <라이온킹>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향수 그 자체일 것이다.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에 쌓인 묵은 세월을 털어내고 닦아낸 결과물이다. 기본적으로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지닌 <공주와 개구리>는 사실상 ‘신데렐라’스토리를 끌어들이며 동화를 변용한다. 동시에 흑인 여주인공을 앞세우고 1920년대 재즈의 고장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삼아 보다 현대적인 형식의 동화로서 이야기를 착안하는데 주력했다.
<공주와 개구리>는 딱히 새롭다 말할만한 여지가 없는, 디즈니의 지난 작품들과 다를 바 없는 궤도 위에 탑승한 작품이다. 선악의 대비는 뚜렷하고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캐릭터들의 역경과 모험은 해피엔딩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조건들은 그 동안 디즈니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동원됐다. 진정성과 상투성이라는 백지장 차이는 동일한 요소들을 표현하는 방식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지녔거나 참신한 기법이나 창의적 방향성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하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의 장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선과 악, 노래와 춤, 꿈과 희망, 역경과 모험, 단순하지만 특별한 동화의 세계로부터 구현하는 그 모든 것들이 유쾌하고 즐거운 퍼레이드와 같이 진전된다. 마법과 모험의 세계관과 춤과 노래의 향연이 볼거리를 이루지만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로맨틱한 무드다. 어드벤처와 뮤지컬은 러브스토리를 이루기 위한 소스가 된다.
1920년대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흑인공주를 그리고 있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인종차별과 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생각이 없다. 그건 마치 오바마 시대를 기념하는 팬서비스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인물들은 그런 현실적 편견이나 불합리와 무관하게 동화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순수한 낭만을 노래하는 역할로서 충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낭만은 유아적인 낙관이라기 보단 동화적 순수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감동의 원형에 가깝다. 디즈니의 새로운 2D 애니메이션은 테크놀로지의 중심에서 아날로그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대변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란 존재하는 법이다. 능수능란한 픽션의 파도 속에서도 순수한 동화적 감동은 떠내려갈 수 없다. 기술은 변해도 감동은 변하지 않는다. <공주와 개구리>는 망각했던 동화적 세계를 복원하는 장인과의 반가운 재회나 다름없다.
달콤한 막대사탕처럼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풍선이 한 가득 하늘을 메운다. 푸른 잔디가 자라는 작은 정원 위로 떠오른 아담한 집 모양 그림자가 드리운다. 방 안에 앉아 비행선을 타고 세계를 모험하는 꿈을 꾸던 소년의 상상처럼 집이 날아오른다. 빌딩 숲을 지나 구름을 스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을 타고 모험을 시작한다. <업>은 거짓말 같은 꿈을 진담처럼 그려내는 작품이다. 내려앉은 집 안에서 하늘을 날아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모험을 꿈꾸던 소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자신의 피앙새와 다짐했던 꿈을 띄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 꿈은 이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집단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픽사(PIXAR)’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수많은 풍선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집과 그 집에 사는 노인, 그리고 그 집을 찾은 소년의 모험담이다. 세계에서 유래 없는 성공담 <라따뚜이>와 우주 최강의 SF로맨스 <월-E>까지, 픽사의 근작들은 CG 애니메이션을 회화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해도 손색이 없는 장관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탄탄하고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연출력을 통해 수려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픽사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모험담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이다.
비행선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떠난 모험가 찰스 먼츠를 동경하던 소년 칼 프레드릭슨은 마찬가지로 모험을 동경하는 소녀 엘리를 만나게 된다. 우정으로 시작된 소년, 소녀의 인연은 로맨스로 거듭나고 백년가약의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결혼 후에도 파라다이스 폭포로의 모험을 기약한 채 꿈을 저축해나가던 칼과 엘리는 먹구름처럼 일상으로 끼어드는 예측불허의 일상 속에서 꿈을 미루고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저금통을 부수고 또 부수다 얼굴 가득 세월의 흔적만 고스란히 쌓아나간다. 칼의 유년시절에서 출발해 칼과 엘리의 서사를 압축한 무성 시퀀스를 지나 노년이 된 칼의 모습에 다다르는 <업>은 비로소 본격적인 말문을 연다.
칼과 엘리의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여정을 간략하게 넘겨가는 무성 시퀀스는 짧은 순간에 진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농축시킨다. 그 짧은 서사는 <업>의 서사를 본격적으로 부양시키는 풍선과도 같다. 풍선에 매달린 채 하늘로 떠오르는 집이라는 비현실적 광경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건 그 광경 자체가 주는 동화적 아름다움, 혹은 그 광경을 둘러싼 실제적 풍경의 생생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이루기 위한 인물의 결심이 설득력 있는 진심을 전달하는 덕분이다. 비현실적인 동화적 소재에 감정적 색채를 입히고 스토리에 현실성을 주입함으로써 영화를 부양시킨다. 짧은 순간만으로 뚜렷한 정서적 감동이 각인된다.
사별한 부인과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모험을 결심하는 칼과 우연찮게 이에 합류하게 된 탐사대 소년 러셀을 중심으로 전진하던 모험담은 말하는 개 더그를 비롯해 희귀 새 케빈까지 끌어안으며 예상 경로를 이탈해나간다. 사실상 <업>의 서사는 명확한 만큼 단순하다. 하늘을 나는 집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칼과 러셀의 여정을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건 재기발랄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다.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집, 그리고 풍선처럼 떠오른 집을 몸에 매달고 다니는 인물들, 통역기를 부착한 덕분에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개 등, <업>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차례로 등장시키며 창의적인 설계도면을 마련한다. 모험을 동경하던 유년시절을 잊지 않은 노인의 모험담은 요리하는 쥐의 성공담이나 미래로봇들의 로맨스만큼이나 순수하고 창의적인 스토리와 세계관을 품고 있다. 동심 어린 소년의 꿈처럼 순진하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기 발랄한 유머, 형형색색의 캐릭터로 치장한 스토리는 달콤하면서도 풍요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이미지 역시 <업>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다. 알갱이 하나하나에 컬러를 입힌 듯 다채롭고 선명한 색감을 자랑하는 포도 모양의 풍선이 푸른 하늘을 수놓으며 날아오르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탐스럽다. 자연적인 색채 감각과 사실적인 이미지를 누비는 캐릭터들은 그 활약상만으로 실사적 현장감과 만화적 개성을 아우른다. 한편 픽사에서 최초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업>은 사실상 3D기술을 시각적 자극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단 이미지의 표현방식으로서 수용한다.-여기서 '3D'란 단지 3D렌더링 과정을 통해 공간감을 획득한 CG애니메이션을 손쉽게 지칭하기 위해 국내에서 와전된 형태로 통용된 '3D 애니메이션'이란 용어와 다른 의미인 입체 상영 방식의 3D영화를 지칭하는 의미로 활용됐다.- 즉물감을 부르는 입체효과를 관객의 시각적 눈요기로서 내보내기 보단 공간감을 확보하고 이야기의 생동감을 보좌하는 촉매로서 장치한다. 매 작품마다 이야기를 최우선의 가치로 우대하는 픽사의 모토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산업의 새로운 개척지로 지정된 3D 애니메이션의 세계관 안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업>은 그 방향성을 짐작하게 하는 나침반이나 다름없다. 또한 <업>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한국어 더빙의 사례로 꼽혀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외국산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의 한국어 더빙이 대부분 아동들을 배려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과 달리 <업>의 더빙은 되레 또 다른 형태의 매력을 가미했다 해도 좋을 만큼 탁월하다.
순수한 에너지를 동력으로 사뿐히 날아오르는 <업>은 선명한 꿈을 꾸는 영화다. 현란한 스펙터클도, 빠른 속도감도, 대단한 긴장감도, 거대한 스케일도, <업>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업>에 엄지손가락을, 아니, 두 손을 번쩍 들어 지지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실로 투명한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유년시절의 모험을, 순수했던 한 시절에 가능했던 상상의 나래를, 지극히 순수하게 눈 앞에 그려낸다. <업>은 감동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명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픽사는 또 한번 관객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선물한다. 사랑할 수 있는 영화를 선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백을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픽사가 지닌 로맨틱한 재능이다.
물고기라곤 하지만 물고기처럼 보이진 않는다. 인면어라고도, 금붕어라고도 불리지만 엄밀히 말해서 물고기 흉내를 내고, 그렇게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캐릭터다. 심지어 생의 비밀에 대한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다. 포뇨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후지모토가 인간임에도 어떻게 물 속에서 온전히 사는 건지, 흡사 바다의 여신처럼 보이는 그란만마레가 포뇨의 어머니라는 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건지 막막하다. 실상 별반 상관없다는 듯 그렇다. 답 없는 수수께기처럼 묘연하지만 신화처럼 비범하다. 67세를 넘긴 재패니메이션의 거장 야마자키 히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는 단순한 유아적 발상을 통해 순수의 경지를 선사한다.
소스케로부터 포뇨라는 이름을 얻은 뒤, 포뇨는 브륀힐테-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참조-라 부르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절한다. 그리곤 인간이 되려 한다. 종래엔 인간이 된다. 목소리를 팔지도 않고, 마법의 힘으로 한계를 넘어선다. ‘인어공주’처럼 동화적이지만 천진난만하게 비극을 넘어선다. 순수하되 거창하지 않다. 포뇨는 인어공주가 아니다. 물거품으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19세기 안데르센 동화에서 비극적 색채를 탈색시키며 희망을 염색한다. 비극적 클리셰를 배제한 채 경쾌하게 모험을 완성한다.
정체불명의 캐릭터 관계가 상상력을 부채질하지만 이야기는 되려 단명하다. <벼랑 위의 포뇨>는 소년의 사랑을 얻은 물고기가 소녀로 변하기 위한 모험담이다. 이 단명한 스토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연친화적 상상을 구현한 회화적 색감을 의상처럼 입고 있다. <벼랑 위의 포뇨>는 동화적 발상에서 비롯된 순수한 낙관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세상이 물에 잠기는 위기 속에서도 천진난만한 소년과 소녀는 심각한 어른들의 리얼리티와 동떨어진 세계다. 미지의 모험, 마법과 전설, 유아적 자질과 연동되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독창적인 이미지의 물살을 타고 이야기는 매끄럽게 구연된다. 지극히 유아적인 색채와 디자인으로 구성됐지만 경이적인 장면들이 천진난만하게 순간을 지배한다. 거부할 수 없는 비현실의 순수가 스크린을 가득 적시고 객석을 머금는다.
<원령공주>를 비롯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출한 전작에 감동했던 어떤 이라면 <벼랑 위의 포뇨>에 불만을 토로할지 모를 일이다. 숭고한 이미지에 철학적 깊이마저 담아낸 전례에 비춰보자면 원론적이고 동화적인 순수를 일관되게 채워낸 <벼랑 위의 포뇨>는 백치스럽게 안일한 우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 현실을 살아가는 어른들의 백치적 일상을 떠올린다면 <벼랑 위의 포뇨>는 되려 숭고하다. 바다 밑바닥을 긁어내는 그물더미로 가득한 쓰레기는 현실에서도 유효한 풍경이다. 바다를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만들어버린 채 제 주변의 깔끔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이야말로 실로 지독한 낙관에 젖은 채 살아간다. <벼랑 위의 포뇨>는 당신의 순수를 시험대에 올릴만한 작품이다. 당신의 순수는 얼마나 잔존하는가. 현실이 순수하지 않다 해서 순수의 경지를 폄하해선 안될 일이다. 사랑과 평화. 그 실질적인 미덕이 아름답고 경이롭게 공존한다.
적어도 자녀를 둔 부모라면 꼭 <벼랑 위의 포뇨>를 보여줄 것. 당신이 좋은 부모라면 분명 깊은 순수를 머금은 자녀의 행복한 웃음을 물거품으로 만들만한 푸념을 던질 리 없을 것이므로. 어쩌면 아이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 포뇨 좋아! 그만한 행복이 또 있을까. 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만화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더 바라고 있나. 어쩌면 그건 어른이라는 오만이 아닐까.
서구의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20세기,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어느 식민지가 그러했듯 영국의 소유가 된 호주의 원주민들은 백인 정복자들의 하수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가 탄생했다. 원주민 여성과 이주백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백인사회로 편입시키기 위해 원주민과 격리된 수용소에서 길러졌다. 그리곤 백인들을 위한 종으로 팔려가곤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두에 등장하는 긴 자막이 가르키는 ‘빼앗긴 세대’에 대한 사연은 이와 같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들을 언급하고 말하려 한다. 일단은 그렇다.
166분이라는 방대한 러닝타임만으로도 서사적인 너비가 느껴진다. 서사는 전후반의 구조로 나뉜다. 두 맥락의 서사를 관통하는 건 일관된 정서다. 박애와 사랑. 휴머니즘과 로맨스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거대한 천장과도 같은 서사를 떠받드는 정서적 기둥 역할로 구축된다. 거대한 스케일의 이미지들은 빛 좋은 포장지와 같다. 화려한 이미지가 벽화처럼 영화를 두른다. 롱숏에 담긴 거대한 풍광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드넓은 평원을 스크린 가득 담아내는 절경이 호화스럽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병풍을 두른 영화다. 유채색에 가깝게 대비된 색감의 톤이 더욱 적극적인 제스처를 발생시킨다. 카메라가 비추는 모든 것은 그림이 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절경 안에 인물을 담고 사건을 발생시킨다. 텍스트 이전에 삽화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책과 같다.
호주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남편을 쫓아 영국에서 날아온 새라(니콜 키드먼)는 남편의 유지를 받아들여 1500마리의 소를 항구까지 몰고 가야 한다. 지체 높고 고상하기만 하던 새라가 문명의 이기를 깨닫고 로맨스에 이끌리는 과정은 전형적인 클리셰로 읽힌다. ‘몰이꾼’ 드로버(휴 잭맨)와 함께 1500마리의 소를 끌고 항구로 나아가는 여정은 서부 개척지로 나아간 영국 젊은 남녀의 모험과 로맨스를 그린 <파 앤드 어웨이>를 닮았다. 일본 전투기들의 대규모 공습이 펼쳐지는 후반부는 <진주만>을 연상시킨다. 이별남녀의 애틋한 로맨스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가로막히는 과정은 지극히 전형적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에 가깝다.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도 정서적으로 평이하다. 풍광의 스케일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이루지만 이야기에 더해진 감정적 울림은 정해진 너비를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일정하다. 비극도 희극도 그 간격을 철저히 유지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공적으로 조율된 풍경이다. 넓은 평원과 호수 위를 미끄러져 날아가는 카메라의 숏엔 전시적 욕망이 철저히 반영됐다. 측면에 밀어 넣은 인물 너머로 그림 같은 풍경을 펼쳐놓은 컷엔 좋은 밑그림에 대한 욕심이 팽배하다. 이미지에 대한 욕망 위로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이야기는 정직하게 진행된다. 그만큼 볼거리는 충분하며 이야기는 순탄하다. 휴 잭맨과 니콜 키드만의 앙상블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감흥이 얕다. 감정의 진폭이 좁다. 이미지에 눈이 돌아가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영화라기보단 화보에 가깝다. 아름다운 회화적인 색감에 담긴 이야기는 깊은 공명을 부르지 못하고 찰나를 채울 따름이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이야기임을 노골적인 자막에 실어 직시했지만 성찰의 여력은 앙상하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시선이 영화의 전반을 관장하는 주제라면 모험과 로맨스는 각기 전반과 후반을 지배하는 주요소재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사선을 넘고, 사활을 걸며, 희생을 불사하지만 그 과정의 긴장감을 도출하는 기능적 효과 이상을 넘지 못한다. 반라의 원주민 캐릭터를 내세워 영험한 신비를 전시하려 하지만 기이한 현상 이상의 설득력이 없다. 되려 맥락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연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동시에 백치미스럽게 타자화된다.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로 캐릭터를 장치해버린 인상이다.
사랑과 전쟁, 자연과 인간, 자유와 박애, <오스트레일리아>는 거대한 대륙의 너비만큼이나 방대한 대서사를 펼쳐 보이지만 그만큼 산만하며 개별적인 요소들의 집중력도 미약하다. 풍경은 아름답고 배우들은 훌륭하며 스케일은 거대하지만 정작 감흥이 없다. 방대한 서사엔 지극히 평범한 인상으로 가득하다. 물론 구도 자체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다양한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호주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영상이 아니란 점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어떤 비범함을 발견할 때 감흥도 커지는 법이다. 화려하고 거대한 무대와 좋은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진다고 해서 항상 훌륭한 연극을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호화롭지만 어울리는 주인을 얻지 못해서 텅 빈 집처럼 허망하다. 물론 그 호화로운 집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주인 없는 집에서 손님 노릇을 하는 것처럼 어색한 것도 없다. 값비싼 장신구도 과도하게 착용하면 제 빛을 낼 수 없는 사치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저마다 반짝이지만 제 능력을 지나치게 뽐내고 싶어하는 것처럼 어울릴 줄 모른다. 비범한 것들이 저마다 지나친 빛을 내다 보니 되려 빛을 보지 못하고 평범하게 한데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