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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8.05.31 김인권 인터뷰
  3. 2008.05.31 유지태 감독 인터뷰
  4. 2008.05.31 김윤석 인터뷰
  5. 2008.05.31 류승범 인터뷰
  6. 2008.05.31 김성령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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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8.05.31 엄지원 인터뷰
  10. 2008.05.31 이안 감독 인터뷰

이영훈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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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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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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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권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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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데뷔한지 10년이 넘었다. 스스로 뭔가 달라졌다는 게 느껴지나?
아무래도 영화에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좀 더 잘 보이는 거 같다. 내가 해야 될 부분과 하지 말아야 될 부분도 보이고. 예전 같으면 그걸 잘 몰라서 무조건 플러스 알파를 더 얹어서 하거나, 더 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도 멍청하게 안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젠 그에 조금 더 맞추게 된 거 같다. 물론 아직도 멀었지만! (웃음)

캐릭터에 접근하는 게 좀 더 수월해졌다는 말처럼 들린다.
기술적으로는 조금. 그래도 매번 역할을 만날 때마다 절대 호락호락하진 않지. 작품마다 감독님도 매번 다르고.

작년 한해는 정말 바빴을 거 같다.
2년 동안 쉬었던 걸 몰아서 했으니까. (웃음)

제대하자마자 바쁘게 출연하더라. 그래도 한동안 공백이 있었는데 캐스팅 제의가 꾸준히 들어왔나 보다.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 걱정되는 일이었을 법한데.
죄다 거절하지 못해서 많이 하게 된 것도 있지. 거의 시간되는 대로 출연했다. 근데 나도 많이 바랬다. 군대 있을 동안 나가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굉장히 컸으니까. 고마운 일이지.

연예사병을 한번쯤 염두에 두진 않았나?
군대에 있을 때는 자기 생각이 있을 수 없지 않나. 하나마나, 까라면 까야 되니까.(웃음) 나도 전투경찰로 가라니까 간 거지. 아니요. 저 연예사병갈래요. 이럴 수는 없는 거고. 병장 말년, 전경 식으로 말하자면 수경이나 되야 자기 의사표현이나 하고 말 좀 하지. 훈련소에서는 뭘 알았겠어.(웃음) 단지 내게 군대 2년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에 빨리 덜어낸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실 좀 더 일찍 가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캐스팅 제의가 들어와서 결국 애초 생각보다 늦게 가게 된 걸로 알고 있다.
사실 난 입대영장 받고 배우를 시작했다. 영장 받고 이제 군대가야지 했던 게 이제 스물 한 살 때, 98년도니까 10년 전이다. 그래서 군대 가기 전에 재미난일 없을까 하다가 학교 조교로 있었던 매형 권유로 오디션 봤다가 결국 그로 인해 배우생활을 하게 됐다.

그게 바로 <송어>?
그렇지. 그렇게 <송어>로 시작해 군대라는 짐을 계속 어깨에 얹고 배우 생활을 하다가 결국 <신부수업>까지 끝나고서야 이제 겨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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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가면 그만큼 고생인데.
나이 먹어서 가면 안 좋다.(웃음) 군대는 아무것도 모를 때 일찍 갔다 와야겠더라. 그냥 고등학교 끝나고 대학에서 자유를 조금 맛봤다 싶을 때쯤이나. 자유가 완전히 몸에 배어버린 뒤에 가면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군대 가기 직전에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공연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학 시절 이후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고 있다. 혹시 더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건가?
아니. 없다. 사실 내가 연극영화과 나오긴 했지만 전공은 영화연출이다. 동국대학교 연영과는 입학하면 2년 동안 커리큘럼이 같다. 영화로 들어왔어도 일단 무대 작업부터 먼저 해야 하고, 선배들 연기할 때 못질부터 먼저 해야 된다. 4학년이었던 이성재 선배님이나 김주혁 선배님이 무대에 오를 때 난 밤새도록 못질해서 세트 만들고, 의상 만들고 그랬다. 하지만 솔직히 난 연출 전공이라 연극에 뿌리를 둔 배우라고 말하긴 빈약한 게 사실이다.

예전에 농담처럼 주인공 친구 전문배우라고 스스로 말했다. 아무래도 조연배우로 인식된 자신의 상황에 대한 우회적 발언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인터뷰할 때마다 김인권씨는 조연인데 주연하고 싶지 않느냐, 주연배우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질문을 상당히 많이 듣게 된다. 그에 대해 내 마음을 솔직히 말하자면 주연은 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마치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느껴진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게 누구나 지닌 생각이듯, 내가 주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그것과 비슷한 거 같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하늘을 못 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주연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갖고 있지만 단지 현실적으로 이에 대한 복잡한 문제들이 있고, 내가 아직 갖추지 못한 부분도 스스로 알고 있다 보니까 그건 아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은 조금 깊이 생각해야겠지. 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김인권 씨가 주연을 해줘야 되겠다, 이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물론 주연이 아닌 조연이라도 굳이 김인권 씨 아니면 안되겠다고 하면 그것도 어디겠냐.

조연이라고 같은 조연은 아니다. <숙명>에서도 캐릭터의 선은 상당히 굵은 편이었으니까.
시나리오에 세 번째 주인공이라 명시되어 있는 만큼 주연급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비중은 된다. 하지만 난 주연이 확실히 있는 상황에서 도와주는 게 조연이라고 본다. 이번 영화에서 송승헌 씨가 연기한 우민이 확실한 주연 역할이고, 난 주인공 친구 역할로서 모든 사건에 동기부여를 해주는 거니까 말하자면 도와주는 역할로서 조연이 맞지. 우민 역할이 더 동기를 가질 수 있도록, 우민이가 더 불쌍하고 더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게 그가 처한 상황을 더 암담하게 만드는, 그래야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우민이가 끌고 가는 힘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했으니까.

도완은 작년에 연기했던 캐릭터들보다 입체적인 성향을 지녔다. 데뷔작이었던 <송어>의 태주나 <플라스틱 트리>의 수처럼 어떤 트라우마가 보이기도 하고.
일단 그 트라우마가 상처, 결함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까?

상처를 지니게 된 근본적 이유라고 할까, 단순히 말하자면 응어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연기를 할 땐 내가 배우로서 풀어볼 수 있는, 정확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내공을 끌어내는 어떤 주머니가 있는 거 같다. 그런 트라우마가 나도 모르게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러다가 인물과 가까워지면서 그게 나왔을 수도 있고. <송어>에서도 정신 없게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그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뭐랄까, 연기를 통제한다기 보단 그 통제를 벗어나 어느 순간 극단적 흐름을 타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데서 인간의 본 모습이 보이기도 하잖아. 나도 트라우마가 있긴 있는 거 같다. 사람은 누구나 다 비슷하니까.

그런 극단의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신과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인간도 동물이다. 사회에서 묻혀 살면서 도덕에 대한 교육, 학습을 거치고 그것이 몸에 배면서 동물적이고 야생적인 면은 거세당하는 거지. 게다가 요즘 시대가 남성성을 최대한 거세하려는 시대니까. <숙명>도 시대적으로 보자면 가위 들고 잘라버리기 위해 덤벼들만한 것이다. 그건 이 시대에 있어서는 안될 만한 것이거든. 여배우도 마찬가지지만 남자배우라면 자신의 야생성이나 동물적인 무의식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못하면 연기를 할 때 난해해진다. 연기를 해도 자기 안에 있는 그런 부분과 연결을 못하면 재미없어진다. 근데 김해곤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자기 속에 있는 남성성, 야생성하고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우 출신 감독으로서 배우로서의 직업병이 작용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 동물성과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멜 깁슨 감독이 만든 <아포칼립토>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짐승처럼 잔인한 인간의 동물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래서 종종 (송)승헌이 형이나 (권)상우 형한테도 멀쩡하게 좋은 역할 다 놔두고 왜 지저분하고 망가진 역할 하냐, 이러는데 사실상 그분들도 자신의 야생성을 끌어내주는 걸 보면 거기에 매혹되고 매료 당하는 거겠지.

사실 <숙명>의 캐릭터 중 도완이 가장 잔인하게 느껴진다.
나 같은 경우는 피가 나오니까. 도완은 자기 몸을 막 그어버리고 그러기도 하고, 솔직히 푹 찌르는 거 보단 쪼잔하게 살짝 그어버리는 게 더 잔인해 보인다. 그렇다 보니까 지저분해 보이는 것도 있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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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칼로 미진의 얼굴을 긋는 장면은 섬뜩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섬찟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그렇게 한다는 게 그 자체로 상당히 끔찍한 거니까. 물론 그게 감독님이 이야기하는 방식이고 그걸 통해서 감독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뭔가가 있었으니까 이해했다. 미진을 놓고 봤을 때, 이 여자도 도완이 못지 않게 밑바닥이다. 술집 나가서 맨날 담배나 뻑뻑 피고, 술이나 마시고, 그 와중에 남자친구라고 하나 사귀는 게 약쟁이지. 그런 상황에서 도완이는 자기도 밑바닥이지만 도완이는 너무 좋으니까 자기 입장에서는, 너 그렇게 살 바에는 내가 네 얼굴 긋고 내가 보살피고 살겠다. 차라리 네가 다른 남자 만나면서 지저분하게 살지 않게 하겠다. 나랑 있자, 는 진심이 포함된 거지. 아무 생각 없이 그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진실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여자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진짜 동물적인 남성의 마지막 결단이니까.

그 애정의 근거가 더 필요할 것 같다.
이렇게 하기 전에 했던 도완은 이미 자기가 죽으려고 했지 않나. 그럼 그건 아마 도완이에게 자기가 죽는 것보다 더 하기 힘든 행동이었을 거다. 만약에 그게 더 쉬웠다면 먼저 여자의 얼굴을 그었겠지. 그리고 그래도 안되면 죽었을 테고. 근데 자기 배를 찔렀는데도 우민이가 와서 살려놓으니까, 안되겠다. 내가 살아있는 이상 미진이가 없으면 안 된다. 미진이를 저렇게 지저분하게 살게 하는 것도 안되고. 난 도완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느꼈다.

김해곤 감독은 상당히 거칠고 센 입담을 구사하는 편으로 유명하다. 그런 성격에 적응하는 것부터가 중요했을 것 같은데 어땠나?
겁나는 개가 짖기도 잘 한다고, 속으로는 알몸이라 여린 사람이 약점을 가리기 위해 겉으로 화를 잘 내고 욕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욕하는 것만 봤다면 저 사람 무서운 인간이다, 이렇게 단정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서 감독님 욕은 그렇게 지저분하게 들리지가 않는다. 굉장히 동정심이 가는 욕이다. 그래서 난 감독님이 굉장히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숙명>에서도 부분부분 느껴지지 않나? 진짜 밑바닥에서 살아온 사람들만의 어떤 끈끈한 인간애라던가, 삶에 대한 집착이라던가, 이런 게 욕에 묻어나니까. 사실 예전부터 김해곤이라는 배우 때부터 감독님을 좋아했고, 덕분에 현장에서 만났을 때는 매료가 됐지. 지금 어떤 영화평을 떠나서 김해곤이란 사람이 써내는 대사만 봐도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사실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다작하는 경우가 많다. 작년에도 그랬던 것 같고. 그런 경우에는 캐릭터의 다양성을 극복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배우가 캐릭터와의 관계를 놔버리면 영화에 도움이 되게끔 연기가 나오긴 나온다. 그러나 그런 연기는 그 배우를 잊혀져 버리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조연을 하더라도 그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필요하다. 연기하는 배우가 그걸 이화(異化)시켜 버리면 비호감이 된다. 그저 이 캐릭터가 이런 거 아니겠어?, 이렇게 대충 보여주게 되면 배우로서 생명력이 짧아지는 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게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가벼워진다, 망가진다, 란 것이 될 수 있는데 사실 그렇더라도 그걸 자신과 동화시켜서 끌고 가면 그건 배우로서 발전적인 연기라고 본다. 근데 그걸 자기로부터 이화시켜버리니까, 놔버리니까, 그럼 결국 관객이 똑같이 느끼는 거지. 저 사람에게 어떤 인생이나 인간미가 느껴져야 되는데 그냥 주연을 위해 도와준답시고 자신을 젖혀놓게 되면 그 배우도 젖혀져버린다. 다양한 역할을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이 캐릭터에 내 자신을 동화시켜서 현장에 가져가야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자신을 캐릭터와 동화시킨다는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연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거다. 내가 아는 것 내에서 연기해야지, 내 연기가 아니라 나 이외의 것을 끌어다가 연기해버리면 그건 그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정말 그 캐릭터를 사랑한다면 이 캐릭터가 보여주는 것 중 나에게 있는 것만 남겨놓고 나머지 제 성격을 버리는 거다. 그런 식으로 연기하면 그건 내 모습이지. 내 어딘가에 있는 내 모습이 되는 거거든. 그럼 관객도 그렇게 느낄 테고, 결국 저 배우가 보이는 거다. 내가 그 캐릭터를 놔버리면 애정과 이해를 놓아버리는 것과 다를 게 없고 그 순간, 위험해진다고 봐야지. 어쩌면 그에 비해 조연보다 주연이 편할 수도 있겠다. 시나리오 책 한 권에 캐릭터의 역사가 다 나오잖아. 물론 그대신 그만큼 책임이 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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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은 어떤 전사를 배제하는 것처럼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그 흐름에 대해서 유추해내는 게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도완이란 역할에 대해서도 스스로 포인트를 잡아가야 했을 것 같은데.
도완이 같은 경우에는 내게 없는 부분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있었다. 사실 도완이는 객관적으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70%를 내게서 가져갔지만 한 30%는 놔버린 게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있고 종종 감독님이 원망스러운 부분도 있다. 물론 내가 감독님을 너무 좋아하지만 날 좀 잡아주지, 하는. 현장에서 내가 너무 힘에 부쳐서 힘들어 하니까 아예 그냥 놔버리고 가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런 게 이제 나는 보였지. 그리고 관객들도 분명히 그걸 느낄 거다. 물론 거기서는 이제 100% 다 내게서 가져가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도 했지만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내게 없는 걸 가져다 놓고 스스로, 그냥 이런 거 아니겠어?, 했던 것도 없진 않았었다는 거지. 그래도 한편으로 많이 가져갈 수 있었던 건 감독님이 잡아준 덕분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내 멋대로 했으면 더 많이 가져갈 수 없었을 텐데 감독님이, 그건 아니다. 도완이는 이거다, 라면서 현장에서 많이 교정해줬거든. 만약에 나대로 했다면 그 캐릭터를 내 맘대로 가져갔을지 몰라도 감독님이 원하는 도완이가 아니었겠지. 하지만 감독님을 내가 이해한다고 해도 서로 완전히 100% 같을 수는 없는 거다. 그걸 끝까지 물고 늘어질걸,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못한 부분도 있지. 만약 그럼 너는 뭐했냐고 하면 나도 나름대로 하긴 했지만 나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다.

약물 중독에 대한 연기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 과정도 있었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약이 나오는 영화는 죄다 봤다. 다른 배우들은 약 먹은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 심지어 약을 해본 경험자하고도 만나려 하니까 안 만나 주더라. 그래서 전화통화라도 해봤다. 일단 중독된다는 게 또 사람마다 다르더라. 약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르고. 그걸 외형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 의 문제 때문에 영화를 굉장히 많이 봤지. 한 40편 봤나? <레퀴엠>이나 <트레인스포팅>이라던가. <사생결단>에서 추자연 씨가 연기를 정말 잘 했더라. 그래서 상도 받았겠지만, 약에 취해서 씨익 웃는 게 정말 뭔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했다. 약을 먹었을 때의 어떤 흥분이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걸 디테일 하게 알아야 했거든. 막 약하고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이 정말 최고조의 기쁨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게 끝난 뒤 찾아오는 금단 현상도 마찬가지였지. <친구>의 유오성 씨처럼 추워서 몸을 떠는 식이기도 하고, 장이 뒤틀리듯 속이 쓰린 사람도 있고. 도완이 같은 경우는 장도 아프고, 뼈도 쑤시고, 그래서 밥도 안 넘어가고, 그런 걸 이제 내가 다 가지고 가는 거지.

도완은 칼을 잘 다루는 캐릭터로 묘사되기도 한다.
도완이는 자기 배도 가르고, 여자친구 얼굴도 가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도완이는 상처를 입는다던가, 몸에 피가 난다는 거에 대해 굉장히 익숙한 애다. 우리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잖아. 주사바늘 하나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 병원에 안가는 사람도 많으니까. 근데 도완이는 그게 아니거든. 도완이는 그 공포를 이미 스스로 넘어선 놈인 거지. 그리고 일단 도완이는 송승헌 씨나 권상우 씨처럼 키도 크지 않고, 근육도 좋지 않다. 그래서 면도칼로 쓱 그어보고 피 나는 걸 찍어 먹어보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거지. 쟤는 함부로 건들면 안되겠다는, 당장은 저놈을 두들겨 팰 수 있다 해도 언제 내 뒤통수에 저놈이 뭘 들이댈지 모르겠구나, 라는 걸 인식시키는 거다.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극복한 거지. 한편으론 잃을 게 없는 거다. 그래서 남들이 봤을 때는 도완이를 잔인하고, 미친놈이고, 꼴통이라고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도완이는 그런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내가 죽이기를 했어, 목을 따기를 했어, 동맥을 끊었어, 살짝 얼굴에 그냥 몇 바늘 꿰매면 그만인데,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도완이는 면도칼이 방패였을까?
걔는 사실 그거 말곤 방패가 없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측은하다. 그 작은 면도칼을 방패 삼아 살아가는 인간처럼 비루한 인생도 없을 테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뭐 특별한 게 있어서 배우 하는 것도 아니고, 몸뚱어리 하나로 연기하는 거니까. 당신도 펜으로 사는 거고. 다들 자기가 가진 재주 하나로 사는 거지. 그게 도완이는 면도칼이었던 거지. 하지만 남한테 피해가 가니까 다수에게 통용되기 힘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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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에서 네 남자의 공통점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거다. 결국 남자의 숙명이란 자신의 가족을 위해 비루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싶더라.
나도 그렇지만 남자는 대부분 가족을 위해서 산다. 가족을 위해서 돈 벌어오는 거 아닌가. 자기 꿈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돈하고 연계될 수 밖에 없으니까 나가서 돈을 획득해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24시간 자유가 주어진 인생을 다 털어서 돈 벌기 위해 열심히 사는 거지. 물론 하고 싶은 일 하는 사람은 그나마 행운이지만 하기 싫은 일 하는 사람은 처자식을 위해서 여자와 어린이들을 위해서 참고 사는 거겠지.

역시 남자라서 가족에게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건가.
처자식은 끝까지 지켜야 된다. 남자가 밖에서는 아무리 칼 들고, 발 들고 해도 부모님과 처자식은 지켜야지.

결혼이라는 건 남자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책임감을 부여하기도 하는 거 같다.
가장이 되는 것도 모 아니면 도로 가야 한다.(웃음) 가족한테 끌려가면서 허덕이면서 살던가, 확실하게 벌어서 가장으로서 당당히 끌고 가던가. 하지만 애매하게 일 핑계로 가장 못하고, 가장 핑계로 때문에 일 못하고, 이러면 안 되지.

아내를 두고 입대한다는 건 부담이었겠다.
(한숨을 쉬고) 부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았다. 군대 있을 동안 아기까지 태어났고,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2년 동안 마음은 집에 있었다. 그러니 군생활이 어땠겠어.

제대 이후,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한만큼 다시 연기의 감을 찾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은데.
<외과의사 봉달희>(이하, <봉달희>)로 다시 시작해서 다행이었지. 드라마는 바로 반응이 보이니까, 내 연기를 바로 체크할 수 있었다. 만약 일주일에 몇 커트가 있는 영화였다면 익숙해진 연기로 감을 찾는 게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봉달희>처럼 빠른 리듬으로 막 흘러가는 드라마의 호흡을 내가 쫓아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이렇게 빨리 됐나 싶더라.

<봉달희>를 통해서 드라마의 대중적 파급력을 실감했을 것 같다.
일단 지명도가 높아지니까 도움이 될 수 밖에 없다. 드라마를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니까 나도 함께 유명해지고 호감을 얻게 되고. <봉달희>의 김형식 감독님은 내겐 은인이다. 내가 제대하자마자 그 역할을 주셨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요즘처럼 영화시장이 어려울 때는 드라마가 나름대로 기회의 연장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일단 지금은 영화를 하고 싶다. 드라마가 싫다는 건 아니고, 캐릭터를 따라가고 싶어서. 물론 대본을 봤을 때 진짜 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그걸 연기하게 되겠지. 안성기 선배님 말씀대로 인기나 돈을 쫓아가기 보단 일을 쫓는 배우가 되고 싶다. 쉽게 말해서 이거 된다고 하는 말을 쫓기 보단 일을 쫓는 배우 본연으로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드라마보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강한 덕분이기도 하겠지.
아무래도 난 영화를 되게 좋아하나 보다.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서 나를 관객과 이어준다는 걸 사랑한다. 영화라는 공정이 내가 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시나리오도 써보고, 연출도 해봤고, 그래서 그런지 이 매체를 굉장히 사랑할 수 밖에 없겠지. 깜깜한 극장에서 나 혼자 즐길 수 있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깜깜하니까 나 혼자 즐기는 듯한 즐거움이 있지 않나. 편안하게 발 뻗고 온 가족이 보는 것도 좋지만 아무한테도 말걸 수 없는 깜깜한 곳에서 스크린을 보면서 꾸는 꿈이 좋다. 물론 악몽이 될 수도 있지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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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드라마보다 영화에 친숙한 탓이기도 할 것 같다.
내가 추구하는 캐릭터도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에 가깝다. 그게 때로 TV를 통해서는 방영불가 될지 모를만한 것이기도 하다.(웃음) 그리고 TV가 선호하는 배우는 잘 생기거나 예뻐야 하는 경우도 많고, 재미난 이야기를 그만큼 건전하고 밝게 전달해줄 수 있는 캐릭터도 많으니까, 거기에서 오히려 난 돋보이기 힘든 탓도 있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영화가 좋다. 영화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배우가 될 수 있었고, 영화가 없었으면 오히려 배우를 할 수 없었겠지. 내 감성을 이용해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어서 영화가 좋다. 그리고 지금 영화가 힘들다고 쉬운 길 찾아가면 말 그대로 내가 내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는 거지. 난 내가 영화를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다. 사실 한국영화가 가장 흥행했던 2년 동안 난 군대에 있었으니까 그 혜택도 못 누린 거다. 그런데 만약 지금 내가 드라마에 치중하면 오히려 나도 같이 거품이었다고 말하게 될 수 있는 상황이니까, 내가 거품이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다. 당분간은 군대에서 벼려왔던 2년이 아까워서라도 남아있어야지.

공백이 길었지만 작년에 드라마 하나에 영화 세편에 출연했다. 그리고 사실 <숙명>도 작년부터 촬영했고, 스스로 힘에 부치는 상황도 있었을 것 같다.
역할을 기다리듯 하는 사람, 그러니까 강한 동기가 생겨서 하는 사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 거 없이 그저 끌려가듯이 연기하게 되면 에너지가 딸릴 수 밖에 없지. 이건 체력이 딸리는 것과는 다른 거다. 그래서 배우는 갈급함을 모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모아두지도 않은 채 관객이나 대중들, 시청자들 앞에 서면 그건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요즘 <온에어>에서 송윤아 선배님을 보면 그 연기가 잘했네 못했네 자체를 떠나서 대사 치는 게 바로 그런 거다. 사실 그게 리얼리티 수준을 굉장히 떨어지게 만드는 대사톤이라서 정말 엄청나게 연습하지 않고서는 저렇게 나올 수 없는 대사인데 그걸 끝까지 유지하는 거다. 그게 눈에 보인다. 진심이 보이는 거지. 저분이 이번에 저 캐릭터를 하고자 하는 갈급함이 느껴지는 거다. 그리고 그게 에너지로 느껴지는 거고,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절실함이 있어야 된다는 건가?
그런 게 없으면 강렬한 캐릭터도 소용없다. 뭘 하더라도 관객을 감동시키는데 힘이 부치는 거지.

본인에게 그 갈급함은 얼마나 됐을까.
2년간의 갈급함이었지.(웃음) 그런데 네 작품이나 하니까 이제 많이 떨어지더라. 아직도 남아있는 게 없진 않지만 그걸 몰아서 풀어버리다 보니 오히려 위기감이 올 수도 있겠더라. 그래서 다시 좀 더 모아야 될 것 같다. 게다가 지금 영화판이 힘들다고 해서 냉큼 편한 자리 찾아서 가면 그게 모이지도 않는 거라 다른 생각도 배제하게 되는 거고.

영화가 김인권이라는 배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지금쯤이면 과거에 자신이 했던 연기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도 있을 텐데. 특히 군대 있을 때는 생각도 많았을 테고.
저거 진짜 못했네. 왜 저렇게밖에 못했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지. 나는 영화든 드라마든 작품을 찍고 내 연기를 관객입장으로 보기까지 한 10년 정도 걸리는 거 같다. 그 정도는 되야 완전히 당시 그 기분이 기억의 용량에 밀려서 갱신되고 잊혀져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희망이 있지 않나. 앞으로 또 10년 뒤에 도완이가 과연 어땠을까, 하고 다시 보면 왜 저거밖에 못했을까, 이런 생각을 할 테니까. 그렇다면 난 분명 옛날에 했던 거보다 나아졌다는 거 아닐까. 그런 식으로 발전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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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어도 그 연기가 그 당시 자신에겐 베스트였을 텐데.
그 당시엔 그랬지. 그런데 그때도 비슷하다. 지금 도완이가 한 30%를 대충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때도 최고에 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초창기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 뒤 뒤돌아서 그걸 생각하지 말자고 되뇐 적도 있다.(웃음) 물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어느 순간, 이건 됐어, 이렇게 100%만족스러운 경우도 있고, 아쉬울 때는 한번 더 가자, 는 얘기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못해놓고, 혼자 속으로 씩씩거리다가 말았지. 모든 배우들 그런 경우 있을걸. 감독이 컷! 오케이!, 하면 (속으로) 오케이 아닌데, 이러는 거.(웃음)

사실 자신의 연기를 만족한다고 말하는 배우를 보기란 드물다.
만족하기란 쉽지 않지. 근데 요즘은 어떤 커트를 해놓고 너무 힘들어서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 이런 경우도 있다. 정신 차려야지. 에너지가 없으면 그렇게 되는 거더라. 에너지가 있으면, 감독님, 한번만 더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데 그걸 다 써먹고 채우질 못하니까 힘에 부치는 거다.

도완같은 캐릭터에 몰입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힘들어지는 순간도 있었을 거다. 심리적으로 날을 세운 캐릭터에 동화되는 연기를 하다 보면 그게 자신에게 전이되기도 할테니까.
오히려 그렇게 했어야 되는데 도완이가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내가 몰입을 많이 못했다. 내 집에 딸이 있고 걔한테 영향을 미치면 안되니까. 건달도 처자식 생기면 건달 끝이라고, <넘버3>에서 나오는 말이잖아. 배우도 조심해야 된다.

아무리 그래도 몰입하지 않고서야 연기가 가능하나?
컷이 끊어지고 연기가 끝나고 감독님한테 돌아갈 때, 저 어땠어요?(호들갑스럽게), 이런 식으로 바뀌는 버릇을 들이는 거지. 바뀌지 않고 거기에 계속 몰입해서 집까지 가져가면 감당이 안 된다.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추격자>의 하정우 씨 인터뷰를 봤는데 흰자에 핏발이 서 있더라. 그거 조심하셔야 된다.(웃음) 빨리 빠져 나와야 돼. 관상학적으로 핏발이 선 게 사람 죽이는 건데, 걱정되더라.

캐릭터와 일체화되는 메소드 연기를 지양하나?
아니, 지향하지. 사실 더 그렇게 했어야 했다. 배우가 준비기간까지 포함해서 연기하는 동안, 캐릭터에 녹아 들어서 얼굴의 관상이 바뀔 정도가 돼버리면 가장 좋은 거지. 그러니까 <추격자>가 그런 에너지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게 에너지죠. 그런 갈급함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다만 캐릭터로부터 빨리 빠져 나오는 기술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으면 현장에서 들어가는 게 더 수월한데 그 합일점을 찾는 게 쉽지가 않거든.

대신 입구는 찾기 쉽지만 출구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출구가 없으면 안 된다. 특히 그런 역할은 출구가 없으면 더욱 안되고. 나도 옛날에 했던 역할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굉장히 많다. 그때마다 다 빼내지 못해서.

어쩌면 도완이란 역할의 출구를 만들어준 건 가족일 수도 있겠다.
(잠시 생각하다가)그렇네. 가족을 통해서 잊는 방법이 있네. 매일같이 가족을 만나서 잊게 되는 거니까. 근데 그게 기본적으로 적당한 시간도 필요하겠지. 그건 또 문제다. 하여튼 난 그런 합일점을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 내 연기가 집에 영향을 주면 안되니까.

<추격자>의 흥행은 고무적이지 않나. 인기에 편승하지 않아도 영화적 완성도와 배우들의 연기력이 훌륭하면 관객들에게 어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 아닌가.
그 동안 투자자나 제작자가 인기에 편승해왔는데 그건 아니지. 이젠 나도 그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물론 영화는 상업예술이기도 하지만 상업을 하는 사람이 감독예술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감독이 작품에 자기 영혼을 담아서 진짜 에너지를 쏟아 붓고, 그 역할에 맞는 캐스팅을 하고, 그렇게 해서 작품의 완성도를 이룰 수 있는 영화만의 신성함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나머지 테두리는 그걸 도구로 해서 돈을 버는 분들이 열 배를 벌던, 백배를 벌던 상관없지만 감독예술이라는 영화자체만큼은 건드리면 안 된다. 물론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으되, 감독이 주도권을 잡아야 되고, 감독이 맞추고자 하는 일관성은 건드리면 안 된다. 그리고 감독님들도 그에 맞는 책임감을 확실히 기르고 그 외의 것을,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서 돈을 번다던가, 그런 걸 생각하시면 안되겠지. 난 배우니까 철저하게 감독님이 원하는 연기를 하면 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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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위기 상황이란 게 그런 의식의 부재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위기가 감독예술이라는 본연의 의미를 찾아가는 기간이 됐으면 좋겠다. 그걸 찾으면 우리도 할리우드가 부럽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걸 못 찾고 계속 이대로 그냥 살아남겠다고 상업적인 돈의 논리로 인지도 높은 배우 쓰고, 작가 뭐야, 감독 뭐야, 그런 식으로 하면 답이 없겠지만. 하지만 완성도를 찾아갈 거라 믿는다. 만약 그래서 결국 다 떨어져나가고 C급만, D급만, 분야별로 최하급만 남더라도 상관없다. D급 배우에 D급 감독, D급 투자, 이렇게만 모여도 영화에 일관성이 생기니까 거기에 스피릿이 생기고 그 영화의 완성도가 생긴다.

가장 열악한 밑바닥까지 내려앉더라도 진정성을 찾으면 된다는 말인가?
A급 배우에, C급 뭐에, D급 뭐에, 이렇게 일관성이 없어지면 오히려 관객이 진정성을 못 느끼지. 그래서 그냥 최하급만 남더라도, 그 일관성 때문에 빛이 난다고 생각하는 거다.

원래 연출을 지망해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던 만큼 그에 대한 관심도 남다를 것 같다.
연출적 마인드로 연기를 하면 도움은 많이 된다. 감독을 더 이해할 수 있고, 감독이 나를 이해시키기가 굉장히 쉬워지니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정도의 연출적 마인드만 지니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감독이 되겠다고 하기엔 아직 재주가 없는 탓이기도 하고. 시적인 표현이든, 내러티브가 있는 이야기든, 이 시대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적인 차원의 재주가. 난 배우로서 내 역할 하나 하기에도 아직도 부족하다.

졸업작품으로 예전에 <쉬바스키>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나름대로 제작환경을 이해하는 좋은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
그냥 맨땅에 헤딩하듯이 내가 제작부터 배우까지 다 했으니까. 그때 같이 했던 재승이라는 친구는 시네마서비스에서 <강철중>PD를 맡고 있는데 가끔 전화할 때면 지금도 그때가 좋았다고 한다. 참 좋은 경험이었지. 가장 순수한 걸 해봤다는 그런 만족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소꿉장난으로 의사놀이를 해봤던 아이가 의사가 되는 것과 칼싸움했던 아이가 살다 보니 의사가 괜찮은 직업인 것 같아서 의사가 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 어렸을 때 영화가지고 한번 놀아봤다는 게 내겐 남은 거지.

배우 경험이 많은 김해곤 감독과 다른 감독의 차이가 있었나.
다르지. 김해곤 감독님은 현장이나 무대에서도 그러잖아. 우리 배우들만 돋보이면 된다. 욕하려면 나를 욕해라. 굉장히 배우를 중심적으로 캐릭터에 염두를 둔다. 게다가 혹시나 감정 상할까 봐 배우들한테 함부로 하지도 않고. 배우한테는 더 없는 감독이지.

오래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종종 자신은 배우가 아니라고 했더라.
사실 배우가 쉽게 되는 게 아니거든. 너무 이상적인 생각인가? 내가 영화에 대해서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배우도 마찬가지다. 배우도 그냥 되는 게 아니지.

여전히 스스로를 배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건가?
멀었지.

어느 정도의 연기를 해야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까?
꿈이 이뤄지는 것만큼 허황된 것이 없다. 만약 내가 요절하면 남들에 의해서도 배우로 평가될 수 있겠지만 살아있는 이상,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나도 그냥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하고, 일에 대해서 뭔가를 추구할 뿐이지. 언젠가 이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기 보단 그저 열심히 살려고 한다.

차기작으로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란 작품에 캐스팅된 걸로 알고 있다.
영진위에서 시나리오 공모전 1위를 한 작품인데 영진위로부터 6억이 투자된 상태다. 캐스팅은 거의 됐고, 시나리오도 고치는 중이다. 감독님이 투자를 더 받아서 영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고 싶어하는데 돈줄이 말라버렸다. 대본이 너무 좋다. 매력이 있더라. 일단 일정이 좀 늘어지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진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데 잘 안되나 보다. 그래도 진심은 통하니까, 어떻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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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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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에 대한 감상이 궁금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리얼하게 나왔다는 걸 알겠더라. 특히 바짝바짝 붙여 찍은 클로즈업이 많은데 그런 것들이 우리 영화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 큰 화면에서 보니까 굉장히 세고 라이브한 날것의 느낌이 잘나와서 좋았다.

시사회 후 반응이 좋다. 평단은 물론이고 시사회를 본 일반 관객들도 호평이 많더라. 고무되지 않나?
아직은 그런 걸 편안하게 못 본다. 왜냐면 개봉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직까진 긴장상태가 남아있기 때문에. 물론 이제 처음으로 약간 긴장이 풀리고 짜릿한 느낌이 왔던 건 기자시사 때였다. 기자간담회를 하면 기자분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떤 기운들이 느껴진다. 근데 그때 이 양반들이 제법 뿌듯한 걸 본 것 같아하는 느낌이 들어서,(웃음) 일단 합격이 됐구나. 일단 기분 좋구나. 관심들을 갖네, 싶었지. 그리고 VIP시사 때 동료들이 너무 좋아해주고.

최근 4편의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로 호평을 얻었다.
내가 작품 복이 좋은가 보다. 배우 한 명이 온전히 연기를 잘한다 해서 연기 잘한다는 말이 안 나오거든. <천하장사 마돈나>나 <타짜>나 <즐거운 인생>이나, 영화적인 퀄리티가 있고 분명한 내용이 있는 영화고 거기서 내가 맡은 캐릭터의 몫을 다했을 때, 온전히 연기력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굉장히 운이 좋았지. 앞으로의 길이 부담스럽다거나, 사실 뭐, 난 이런 건 별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나이가 30대도 아니고, 이미 40인데 생각해봤자 별 수도 없고.(웃음) 그냥 계속 주어지는 대로, 나에게 다가오는 좋은 배역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다시 생긴다면 좋을 것 같다.

부상이 있진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과감한 액션이 많았다. 특히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 가장 격렬한 작품이기도 했고.
우리가 사실 실제로 다친 건 한번인데, (하)정우가 뛰다가 미끄러진 씬 있지. 그 씬은 실제로 미끄러진 거다. 그래서 정우가 찰과상 입은 거 외에는 한번도 다친 적 없다. 그래서 우리가 환상의 호흡이라고 사람들이 그러더라. 찍는 사람들도 보면서 놀라는 게, 우리가 싸우는 장면 봤겠지만 쉽게 말해서 사실 막싸움이잖아. 이건 완벽한 합을 짜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대충 30%정도의 큰 너비만 짜놓고 나머지는 즉흥이었거든. 거기서 이제 감독의 주문은, 정말 리얼하게 싸워달라. 근데 한군데도 안 다친 건 두 배우가 초긴장상태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신뢰했다는 거지. 목을 조를 때도 보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조르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여지를 남겨서 이 친구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숨통을 튀어주고. 계속 그걸 반복했는데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감만으로 게임 끝냈지. 일사천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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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는 상극이지만 배우들끼리는 호흡이 상당히 중요했다. 특히 서로 상대 캐릭터의 비중을 잘 보좌해주는 것도 중요했을 것 같은데 그런 면에 있어서는 하정우의 연기가 상당한 도움이 됐을 법하다.
하정우는 진짜 120% 이상 잘해줬다. 후배지만 정말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 아닌가. 이 친구는 매 순간 가식적인 연기를 정말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그 힘은 하정우라는 인간이 가진 어떤 정서의 힘일 것 같은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대단하지. 사실 난 옛날부터 하정우란 배우를 정말 좋아했다. 하정우가 찍었던 <용서받지 못한 자>와 <시간>도 보면서 한국남자배우 중에 저렇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누군가 싶었거든. 그런데 지영민으로 캐스팅됐다는 얘길 듣고 속으로, 잘됐다! 만나고 싶었는데, 했지.(웃음) 그런데 하정우도 역시나 윤종빈 감독하고 사석에서 김윤석 선배님과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하더라. 서로 잘 됐지.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일단 우린 감독을 만나기 전에 시나리오를 먼저 만난다. 난 일단 시나리오에 합격점을 줬다. 스토리가 굉장히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문도 별로 없고 대사도 간결한데 그 사이의 여백에서 굉장한 게 보이더라. 그건 이 시나리오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게 아니라 정말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반복한 정성스러운 시나리오라는 거, 이건 휴양지에 앉아서 쓴 게 아니라 정말 발로 뛰면서 오랜 기간을 통해서 만들어진 숙성된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감독할 사람을, 이 시나리오를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만나봤더니 역시나 한 작품을 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의 모습이 느껴졌다. 신인감독답지 않은 소신과 직관력, 밀고 나갈 수 있는 힘, 그게 다 느껴졌다. 이 사람, 이 친구한테. 진짜 해보고 싶었지. 그래서 같이 해보자고 결심했고. 사실 <추격자>를 결정한 건 조금 일찍이었다. <즐거운 인생>을 하기 전에, 2006년도 12월 달에 이미 만나서 출연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잠깐 갖다 올 테니까 기다려라,(웃음) 그랬더니, 가능하다. 어차피 우리는 8월 달부터 들어가니까, 이러더라. 그래서 3월 달부터 5월 달까지 <즐거운 인생>을 찍고 돌아와서 <추격자>를 찍었지.

촬영에 난관이 많았을 거 같다. 대부분 밤 촬영이었고, 비 내리는 장면도 많았고. 게다가 대부분 인적이 있는 실제 공간을 이용했고.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지. 그래서 거의 야전이었다, 야전.(웃음) 사람들은 아마 밤마다 나타나서 저렇게 우리를 괴롭히는 저들은 누구인가, 싶었겠지.(웃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지만 고마운 에피소드도 많다. 어떤 분들은 밤에 추우니까 따뜻한 차를 보온병에 끓여와서 나눠먹으라고 주시기도 했다. 물론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친 점도 있었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영화에 대한 신뢰감이 돈독했기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감수한 것이 아닐까.
당연하지. 그렇게 피곤하게 달리기를 하고 나서도 그걸 붙여놓은 현장 편집본을 보면서, 잘 나오고 있다. 이 느낌이야, 이렇게 되니까. 고생했는데 막상 나오는 게 이상하면 그 때부터 바로 브레이크가 들어가는데,(웃음) 찍을수록 더 신뢰감이 생기고 나중엔 안돼, 한번 더 가야 돼, 서로 이렇게 되고, 이렇게 해서 만든 영화다. 이 영화가.

아까 말했던 하정우의 미끄러지는 장면은 <추격자>에서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우리도 보면서 놀랐으니까.(웃음)

특히 본인은 뒤에서 전력을 다해 쫓아가는 중이었을 텐데, 많이 놀랐겠다.(웃음)
움찔하고 놀라서 뛰다가 섰다. 어떡하지, NG인가, 생각하는데 벌떡 일어나길래 다시 뛰었지.

그런데 액션에서도 애드립이 있었나?
항상 120%준비해놓고 허물어서 그 허문데다가 즉흥을 집어넣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허설이 굉장히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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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본능이 상당히 중요시됐을 것 같다.
그걸 요구했지. 그래야지만 처음에 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본 생날것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다고 느껴서 우리도 동의했다. 즉흥이 주는 순간적인 부딪힘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파장을 안 놓치려고 노력했었다. 두 배우 모두다.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집중력 뿐만 아니라 끈기와 인내, 체력.(웃음)

매일같이 에너지를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갔겠다.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있지.

그렇게 지쳐서 들어오면 부인께서 걱정하시지 않나.
밤새도록 작업하고 아침에 들어가면 일단 내방에 잠자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낮에 진공청소기를 못 돌린다.(웃음) 그 소리 때문에 깰까봐.

갑자기 <즐거운 인생>의 성욱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고단함이야말로 김윤석이란 배우에겐 ‘즐거운 인생’이겠다.
그럼. 그리고 뭐 나만 고생했나.(웃음) 우리가 뛰는 걸 보고 사람들은 정말 저 배우들 고생했다고만 하지만 그걸 담아내는 사람들은 세배로 더 고생한다. 조명이야 뭐야 그 무거운 걸 들고, 그러니 우리가 힘들다는 말을 못하지. 정말 걔들 뛰는 거 보면 미치겠는데, <추격자>는 스텝의 승리다.

기교보단 뚝심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화려한 기교 이런 건,(손을 휘저으며) 결국 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건 아날로그적인 센 날것의 힘, 끈기, 믿음, 이런 거였다.

일단 김윤석이라는 배우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 이유가 <타짜>가 될 가능성이 많다.
<타짜>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덕분이기도 하지.

덕분에 악역 이미지로 많이 어필됐는데, 본인이 매력을 느끼는 악인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인간은 다층적인 동물이잖아. 악역이라고 해서 골빈 짓만 하는 건 매력이 없지.(웃음) 나름대로의 자기 기준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정면으로 부딪혀서 자신만의 노하우로 이겨나가는 방법, 그러나 사람들이 봤을 땐 그것이 결국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정도. 그 정도의 다양한 비하인드가 깔릴 수 있는 정도가 돼야 매력 있는 악역이지.

한편으로 악역을 선호하는 연기자가 아닌가라는 오해를 형성시킬 수도 있을 거 같다.
우리나라 시나리오 작가들이 악인은 굉장히 잘 묘사한다. 반대로 선인은 희한하게도 어정쩡하다. 그러니 아무래도 악인에 더 눈길이 가지. 디테일한 묘사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싫어하는 인물은 그렇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봐. 그 이유가 뭔가 분석해본 결과, 소위 악인의 요건이 치사하고 이기적이고 야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본데 난 그게 넌센스라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안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나? 그런 건 악인이란 기준에서 빼야 된다. 모든 사람이 졸렬하고 치사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이걸 악인이라 적용했기 때문에 반대로 선인의 기준은 이런 게 없어야 되는 거다. 야비하고 치사하고 졸렬한 게 없어야 된다. 그걸 빼니 재미가 하나도 없어지는 거다. 난 현실성 있는, 땅바닥에 발을 딛고 사는 이 시대의 인물에 더 매력이 간다. 그러다 보니 선택하는 게 자연스럽게 소위 악역이라 지칭하는 과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지.

확실히 선한 캐릭터보단 악한 캐릭터들이 매력을 주는 경우가 참 많다.
리얼리티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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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대립구도는 선과 악이 아니라 악과 악이다. 최악과 차악의 싸움이다.
우리식대로 쉽게 얘기하면 선을 넘지 않은 자와 선을 넘은 자의 대결이지. 시나리오를 보고 엄중호가 후반에 가서 도덕적인 성찰을 나타내거나 정의로운 인물로 변화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찍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단지 선을 넘지 않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양심과 인간의 생명이란 존엄성에 대해서만큼은 포기하지 않은 놈이다. 그리고 지영민은 뛰어넘은 놈이고. 일단 이렇게만 놓고 가자, 그 대신에 2시간 동안 길을 가며 만나는 순간순간마다 발생하는 최소한의 코드를 모아보자, 거기서 이놈이 만나서 어떻게 변하는가,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 이렇게 열어놓고 갔다.

결국 엄중호의 심리적 변화가 상당히 중요한 관건이었다.
그 부분은 관객이 <추격자>와 의사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부분이 억지스럽다거나 감동을 날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엄중호가 개과천선의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감정선을 유지하면서 미묘하게 변하는 심리를 표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냥 그것도 순서 없이 찍었잖아. 여건상 그렇게 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5개월 동안 정말 끊임없이 대화했다. 대화를 안 할 수가 없다. 내 첫 촬영분량이 십자가 바라보는 부분이었다니까, 첫 테이크를 가는 게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이잖아. 아무 일도 겪지 않고 그걸 찍으라면서 눈빛으로 담아내라고 하니,(웃음) 그걸 하기 위해서 계속 대화하는 거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만약에 이해가 안 가면 두 번, 세 번 찍어보자. 그럼 마지막에 편집하면서 퍼즐을 붙일 때 맞는 조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안 걸릴 수가 없지. 5개월 동안, 85회 차 찍었다. 블록버스터야.(웃음) 제작비가 블록버스터는 아니고.

엄중호는 특정한 악인의 표상이라기보단 사회에 만연된 전형적인 악인이다. 하지만 지영민과 같은 최악의 존재가 그런 차악에 기생해서 은둔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악의 본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악의 존재는 궁금하지 않았다.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 수많은 연쇄살인범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얘들이 왜 이랬는지 누구 한 명도 나서서 밝혀본 적이 없고 늘 실패한다. 싸이코패스라는 게 원래 유전자가 이렇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게 없잖아. 보통 이론 같은 건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는 거지. 문제는 이런 본능을 행동으로 옮겨서 실제로 해내는, 살인을 저지르는 걸 100%방치했던 이 시스템에 대한 문제에 <추격자>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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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호가 사냥개라면 지영민은 하이에나다. 숙련된 사냥개의 욕망과 방치된 하이에나의 욕망은 본능적이지만 근원적인 기질이 다르다.
두 사람 중 사회적인 때가 누가 더 많이 묻었냐고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엄중호를 찍겠지. 지영민은 때가 안 묻어서 더 무서운 거다.

마치 나쁘다는 걸 모르는 어린아이의 잔인함처럼.
내 칼은 좀 무뎌졌다. 오래 써서. 하지만 얘는 너무나 신선한 칼인 거야.(웃음) 무섭지, 그래서.

혹시 본인이 지영민을 연기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처음에 내가 그랬다. 둘 중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난 내 식대로 표현했겠지. 정우와는 다르게.

만약 본인이 연기했다면 지금과 무엇이 달랐을까.
글쎄, 일단 하정우란 사람이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긴 못 할 거 같다. 만약에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역시 이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래 버리면 그건 실례잖아, 실례.(웃음)

오래 전에 연기를 한번 접으려 했다가 동료들의 권유로 다시 재개했다고 들었다. 그 뒤로 혹시 다시 연기를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나?
없다. 한번 갔다 왔기 때문에. 막차다. 막차. 막차를 탔기 때문에 하차를 못해.(웃음)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젠.

지금은 영화에 주력하지만 사실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거기서 오랜 경험을 축적했다. 영화의 중심에 선다는 것과 연극의 중심에 선다는 것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연극과 영화의 공통점은 종합예술이라는 거, 그 속에서 연기자라는 건 부품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뭔가의 중심에 서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굳이 그 역할을 해나가면서 연극과 영화의 장르적인 어떤 흑백을 마땅히 얘기해야 한다면 연극은 정말 하고자 하는 얘기가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만의 즉흥적인 무대 위 상황에서 벌어지고 난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한 연습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영화에는 연습이 없지만 연극에는 연습이란 것이 있고 그걸 통해 계속 본인의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왜냐면 희곡이 내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개인이 작품전체의 메시지 안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이 연극에서는 굉장히 크다. 영화도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보다 훨씬 크지. 연극은 소위 슈퍼아줌마, 길가는 사람1 이런 게 없으니까. 반드시 필요한 몇몇의 인물들이 적확한 역할을 가지고 등장하고 거기서 다른 뭔가를 해버리면 균형이 흐트러지지. 그래서 연극이 잘 통제된 예술이라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더 열려있는 예술이고, 그런 부분에서 연기자가 임하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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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보다 연기자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건 연극 쪽일까?
난 둘 다 똑 같은 비중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영화는 뼈 속까지 그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게 있다. 눈빛 하나로 이 인물이 인생에서 느끼는 허탈함을, 슬픔을, 공허함을 표현해야 할 때 클로즈업이 들어오잖아. 연극은 그런 게 없지. 연극은 말로서 표현하지. 표현하는 방식에서 확연하게 구분이 가지만 그 나름대로 둘 다 굉장한 집중을 요구하는 거다.

연극 연출을 몇 번 했고, 대학시절에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었다. 차후 연출에 대한 계획은 없나.
연출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쉬고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쉬고 있으면 못 따라간다. 끊임없이 연출을 하고 준비를 해야 된다. 굉장히 많은 지식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 연출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연출을 놓은 게 몇 년이 되니까 다시 하려면 공백의 한 다섯 배 시간을 할애해야 된다. 연출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얘기해야 되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여야 하니까 공부할 게 너무 많다. 책 다 읽어야 돼.(웃음)

배우가 좋은 연출자를 만나는 것도 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나도 운이 좋은 편이고.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배우에게 기회도 따를 리가 만무하다. 나름대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요즘은 과거의 오랜 경험들이 좋은 자산이 됐음을 스스로 실감할 것 같다.
연극을 하면서 작품 분석에 매달렸다. 어떤 연극은 3시간 40분 공연하기 위해서 한 6개월 동안 연습한 적도 있었는데 그 6개월 중에 2개월을 내내 작품 분석에 바쳤다. 훈련극의 번역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원본을 가져와 아예 다시 번역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작품 분석을 통해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각이 나한테 굉장한 도움이 됐다는 걸 느꼈지. 다른 건 몰라도 연기를 연극으로 시작했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탄탄하게 나를 받쳐주는 좋은 계기가 됐으니까.

무대에서 활동할 당시 송강호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들었다. 송강호가 실력을 인정받고 주목 받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본인에게 좋은 자극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가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돌다리를 두드려볼 수 있는 여유가 좀 있다는 거지.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정말 그래. 저랬을 때는 저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라는 걸 (송)강호를 보고 느끼는 거지. (웃음)

함께 고생한 만큼 동료애가 돈독하겠다.
같이 고생했던 내무반 사람들과 말이 필요 없는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는 일단 가까워질 수 밖에 없다. 알고 있으니까. 힘들었을 때의 느낌도 알고 있으니까 서로의 심리상태도 잘 이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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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기했던 캐릭터의 골격이 마초였다면 정서는 아버지에 가까웠다고 본다. 그건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내면적인 정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도 추측된다.
맞다. 아버지라는 정서가 난 강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거다. 남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나이가 40이니까, 아버지의 모습이 언제나 남아있게 되지.

그건 실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미진이 딸과 밥을 먹는 장면이 있잖아.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딱 앉아있었고, 갑시다, 하더니 컷을 하는 거다. 그러더니 (나홍진 감독이) 저기, 선배님. (그래서 내가) 왜요? (그러니까) 아버지 같아요. (그래서)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지금. (그러자) 그런데 아버지 같아요. (이래서) 아니, 내가 딸아이 아빠라는 걸 아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가? 하지만 그런 게 결코 보여선 안됩니다. 그랬던 에피소드가 있다. 그래서 (내가) 알았어. 야박하게 할게. 야박하게, 이랬지. (웃음) 그런데 이 나이 되는 남자와 그 나이 되는 여자애를 함께 세워두면 누가 봐도 피해갈수 없다.

그 장면은 딸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구도였다.
제3자의 시각에서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봐도 아버지가 데리고 온 딸처럼 보이겠지. 남의 딸이라고 상상 못한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술도 참 많이 마실 것 같다.
당연하지. 우리는 모든 자리가 다 술이다. (웃음) VIP시사회 끝나고 뒤풀이를 커피숍 가서 하겠어?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해야지.(웃음) 그리고 술 못하면 손해지. 그런 데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는데. (웃음)

술을 한번 마시면 어느 정도로 마시는 편인가. 끝을 보나?
우리는 노련하다. 노련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 선에서 딱 정리하지. 왜냐면 과하게 되면 내일은 먹을 수 없잖아. 그러면. (웃음) 이게 생활화되려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하면 안되지. 절제가 있어야지 말이야.(웃음)

최동훈 감독이 <타짜>에서 아귀를 맡긴 건 본인도 의외라고 했었다. 실제로 <범죄의 재구성>에서 이형사 역을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유해진이 맡았던 고광렬 역이 더 적합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의외였다. 나는 사실 나한테 그저 짝귀 정도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귀를 하라는 거다. 그건 이 사람이 나에게서 뭘 봤다는 이야기거든. 아마 감독들 중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최동훈 감독일 거다. 물론 지금까지는. 나홍진 감독하고 5개월을 그렇게 보냈으니 이제 나홍진 감독도 알지 모르겠지만.(웃음) 어쨌든 이 친구가 그렇게 얘기했다면 뭔가 있다, 나한테 뭔가를 봤다, 이렇게 생각했고 그럼 오케이지. 사실 감독이 배역을 줬을 때 배우가 못해내면 둘 다 슬프잖아. 근데 해냈을 때는 캐스팅한 감독이나 출연한 배우나 둘 다 서로 탄탄해질 수 있는 판단이 되는 거지. 결국 빛나는 만남이 됐다.

<즐거운 인생>은 마치 놀면서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도 오랜 친구처럼 보였고 여러 가지로 즐거운 추억이었을 것 같다.
난 성욱이란 역할을 굉장히 좋아한다. 힘이 쫙 빠져있는 그런 느낌, 실제 내가 성욱의 그런 상태를 즐기는 편이라서. 성욱이 나보단 더 우울한 편이지만 약간 나른한 듯한, 그런 몸 상태나 정신상태가 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님하고 맨날 놀면서 장난치고.(웃음) 재미있는 작업이었지. 아쉬운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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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스스로도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동료 배우들 중에 어떤 사람은 성욱이가 제일 좋다더라. 자기는 성욱이의 그런 모습이 내가 한 연기 중에서 가장 백미라고 생각한다고. 대중들에게 강렬한 캐릭터로 인식되다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던 계기이기도 했지.

거의 한달 반 만에 베이스를 연마했다고 들었다. 어쩌면 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우리 자랑이 아니라, 일단 세 배우가 다들 음감이 있더라. 나 같은 경우도 라이브 연주를 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란 작품을 계속 해봤기 때문에 악기와 친숙했고. 물론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 당시 우린 정말 죽었었다.(웃음) 달리기는 그냥 뛰면 되지만 이건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사실 진짜 괴로웠지. 솔직히 웃으면서 손가락 다 부러뜨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진짜 때려부수고 싶더라. 그런 좁은 곳에서 악보를 보면서 베이스를 뎅뎅거리는데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발전속도가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작업이라 더욱 절실했을 것도 같다. 진전이 안되면 그만큼 답답한 거니까.
딱 보면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 누가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다 드러나는데 빼도 박도 못하지.(웃음)

아무래도 아귀 역할 이후로 인상이 강한 캐릭터 제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성욱을 선택한 건 사실 의외였다.
그 때 들어왔던 시나리오 중 <즐거운 인생>이 제일 좋았다. 내 맘에 들었지. 물론 그전에 <추격자>를 먼저 선택하긴 했지만.

결국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시나리오인가보다.
일단 시나리오 없이 감독을 먼저 만날 수는 없다. 사실 감독도 나한테 시나리오를 통해서 연애편지를 쓴 거 아닌가. 그 연애편지를 보고 이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한번 해봐도 되겠구나를 생각하지. 결국 시나리오지.

강렬함 속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넉살이 유머스럽게 느껴진다. 코미디 연기도 해보고 싶지 않나?
<즐거운 인생>에서 성욱이란 애가 우울하고 어깨에 뭔가 얹혀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성욱이도 사실 말하는 거 보면 웃긴 놈이거든. 난 그 정도만큼의 코미디를 좋아한다. 드라마를 뛰어넘는 코미디는 체질적으로 그렇게 와 닿지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 코미디는 좋아한다. 우디 알렌의 영화를 보면 얼마나 웃겨. <브로드웨이를 쏴라>보면 ‘햄릿이 누구야?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인가?’ 이런 대사들이.

위트 있는 코미디를 좋아하나 보다.
그러니까 어떤 만남과 만남이 주는 코미디. 둘 다 옳은 사람이다. 어느 한 사람이 이상한 건 아닌데 여기서 만났기 때문에 웃기는 거, 이런 것들이 재미있지.

상황의 아이러니 같은?
상황이 주는 코미디가 그렇지. 캐릭터가 주는 코미디보단.

지금까지 나름대로 강한 캐릭터를 많이 어필했고 이제 관객들도 점차 이를 인지하게 됐다. 그런데 본인이 지향하는 캐릭터는 뭘까?
난 아까도 얘기했지만 현실감 있는, 발바닥을 땅바닥에, 지금 여기 땅 위에 붙이고 사는 모습이면 된다. 그게 캐릭터를 육화시키는데 있어서 제일 기본적인 첫 번째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현재 연기를 인정받고 있는 영화배우들 중 본인을 포함해서 연극무대 출신이 많다. 무대가 영화의 산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런데 현재 연극 무대의 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근본적인 문제가 뭘까?
세계 어디에서도 연극이 혼자 올곧게 클 수 있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그러니까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연극에 국가적인 지원이 어마어마하지. 그 반면에 연극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지원이 어마어마하게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어떤 것보다도 연극은 종합예술의 제일 밑바닥, 초석이기 때문에 사회나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지원이 받쳐주지 않는 한, 일시적이고 단발적인 금액적 지원은 아무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장기적인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그건 교육화와도 관계가 있는 거다. 교육적으로 초등학교부터 연극시간을 할애하면서 그런 인구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끊임없이 국가적으로 지원을 해줘야 되는 거다.

과거 열악한 환경에서 연극을 했던 선배로서 지금도 그런 환경에서 연기를 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정말 본인이 원했던 기회라는 것이 정면으로 왔다고 성급하게 나서버릴 수 있다. 기회가 정말 올 때까지 차근차근 준비하고 매 순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즐겨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걸 했다는 자부심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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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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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류승범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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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듸오 데이즈>의 로이드는 기존의 류승범을 기대했다면 배신감 느낄 정도로 단순한 캐릭터다. <라듸오 데이즈>를 선택한 건 배우로서 터닝포인트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라듸오 데이즈>를 해보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배우 류승범이 보여주는 것, 사실 그게 처음에 <라듸오 데이즈>를 선택했던 의도는 였던 것 같다. 연기를 위한 캐릭터가 아니니까. 그리고 영화도 독하지 않아서, 관객들에게 감정을 호소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착한 영화.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제각각 자기 일을 하고, 난 옆에서 도와주고, 그런 느낌들이 난 좋았나 보다. 그 전의 영화들은 캐릭터 중심적인 것들이 많았고, 확 지르거나 튀는 그런 영화들이었는데 이 시나리오상에서는 편안한 느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냥 가벼운 산책하는 느낌, 그래서 좋겠다 했지. 근데 자칫 심심한 것 같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조금 된다.

처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류승범이란 캐릭터를 도전적으로 내밀었고 그 이후의 캐릭터들도 그 연장선상처럼 보이는 면이 많았다. 그런데 <라듸오 데이즈>는 류승범이란 배우의 연기가 보이더라.
사실 이게 관객들한테 어떻게 보여질지 궁금하다. 사실 배우는 연기를 하지만 연기가 걸리면 안 되는 직업이다. 물론 어떤 것이 더 맞는 건지,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이전작품에서의 그런 모습들이 내가 원래 내 안에 담고 있었던 것인지, 혹은 내 안에 있었던 것들이 거기 담긴 건지 모르겠지만 사람마다 각자가 여러 가지 모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라듸오 데이즈>에서 난 연기를 했다는 것보다도 내 안에 무수히 많은 감정들의 일부분까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걸 느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두고 싶다. 그리고 그게 본래 내 안의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작품들을 통해서 내 안의 것이 될 수 있는 거다.

아무래도 그 동안 맡은 캐릭터들이 대중들에게 이것이 류승범이다라고 말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것이 본인에겐 어떤 괴리감이었나?
사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맘이 편해졌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나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가끔 내가 날 숨기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 숨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이 맞을 수도 있다.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그냥 이런 게 아닐까 싶더라. 내 안의 일부가 어떤 사람에게 드러났을 때, 감추고 싶다거나 아니면 한발 물러서게 된다. 그래서 자신에게 아니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내 스스로 이런 갈등들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이라 생각하기보단 내가 배우로서 임했을 뿐이었던 영화의 이미지가 내가 되어버린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갈등들이 내 안에 있었는데 이젠 그냥 편안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어쨌던 내가 선택했고, 내가 행했고, 내가 연기하고, 내가 표현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비춰지는 그런 모든 것들이 나인데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거듭 말하자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 그게 다라면 나라는 배우는 생명력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미래가 없어지는 거고. 그게 다라는 생각이나 이미지가 고정되지 않는 것. 그게 참 중요한 거 같다. 무채색, 무색인 게 좋다. 너무 한쪽으로 강해진다는 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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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결국 <라듸오 데이즈>는 그 다양성을 고려한 선택인가.
솔직히 항상 캐릭터 중심의 영화만 할 수는 없다. 막연히 그런 생각들이 있었다. 편안하고 따뜻한 영화, 착한 영화, 캐릭터를 항상 중심에 둔 영화가 아니라 어우러질 수 있는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라듸오 데이즈>가 된 거지. 앞으로의 계산이 딱 맞아떨어졌다기 보단 그냥 그랬던 거 같다. 사실 좀 독하게 말씀 드리면 잘되던 못되던,(웃음) 이런 느낌이 들 정도로 그렇게까지 마음을 비웠다. 내가 저평가를 받거나 말거나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해? 그런 느낌.

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그냥 그런 게 내 인생에 뭐가 중요하겠어, 그런 생각도 들었다. 가끔 너무 지독하게 살아온 거 같아서. 물론 지금도 열심히 하지. 열심히 하는데, 가끔 그게 작품 한편이 내 인생의 한편을 좌지우지한다고 믿으며 그렇게 살아온 건 아닌가 싶었다. 영화랑 내가 친구가 될 순 없을까. 그렇기 위해선 내가 한발 물러날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했다.

<라듸오 데이즈>이전까진 밑천을 드러내는 작업이었다면 <라듸오 데이즈>는 자신을 비워내는 작업이었던 거 같다.
정확하게 얘기한 것 같다. 배우가 항상 외면적인 표현을 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가끔 확 다 비워야 담을 수 있잖아. 진짜 그런 생각까지 했다.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전부이거나 마지막이 아니고, 배우인생을 길게 보자면 나도 내 스스로의 어떤 준비과정이 필요하고 내가 어떤 도약의 시점에서 실패를 맛보더라도, 혹은 어떤 비난을 듣더라도 한발을 어딘가에 디뎌야 되고. 어딘가에 새롭게 발을 딛는 그런 과정이었던 거 같다.

<라듸오 데이즈>는 아마추어가 프로가 되는 내용이다. 7년 동안 배우라는 길을 걸어오면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선에서 어느 지점에 머물렀다고 생각하나?
프로데뷔전을 이미 오래 전에 치렀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오래전에 허물어진 것 같다. 하지만 프로 중에서도 일등들이 있다. 프로 안에서도 아마추어다운 프로들이 있고, 프로다운 프로가 있고, 여러 유형들이 있다. 난 그 안에서 계속 돌고 있는 거 같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건 어떻게 보면 내가 찾는 거 보단, 내가 날 느끼기 보단, 사람들이 느끼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를 평가하는, 나를 보는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내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생각할 때도 있고, 내가 보기에도 나 자신이 프로다울 때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 나라는 사람의 생각보다는 제3자가 보는 것이 어떻게 보면 더 정확하지 않을까. 난 프로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아마추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어떤 음악을 들으면서 이거 진짜 잘 만들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되게 저평가할 때도 있고, 아마추어의 음악이라고 할 때도 있고. 어떻게 보면 개개인의 입맛,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도 그 기준에 따라 구분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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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프로의 기준도 있을 텐데.
다른 논리로 정리를 해보자면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 상업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프로가 되야 하는 거다. 그건 이미 그 그라운드에 있는 것 자체가 프로인 거지. 내가 선택한 프로, 내가 헤드기어를 쓰고 아마추어 경기를 하느냐, 아니면 그걸 벗고 프로경기를 하느냐는 내 선택일 수 있다. 내가 어떤 경기를 뛰느냐, 이미 그건 내가 선택하면서 당연히 주어진 임무랄까. 그러니까 이미 그 배우가 상업영화를 한다면 자체가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사람이 어떤 방식을 선택하느냐인데 어떤 배우는 홍보할 때 방송을 열심히 한다. 어떤 배우는 그와 달리 현장에서만 열심히 한다. 그걸 가지고 어떤 배우가 더 프로페셔널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게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니까. 어떤 것을 취하건 이미 그 사람들은 다 프로다. 내가 당신에게 되려 질문을 한다면 기자회견에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하러 왔다고 하자. 그 중에 어떤 기자가 질문을 좀 이상하게 했다. 그런데 내가 그 기자를 아마추어라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게 이미 거기 앉아있는 자체가 프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미 초대를 받았을 거고, 그 사람이 기자로서 초청된 거 아닌가. 다만 그 사람이 말을 잘 못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를 본 뒤에 비평하고, 뭔가 정확하게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그런 사람들만 프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그 영화를 보고 그 기자회견장에 있는 사람들은 다 프로지. 개개인마다 느끼는 감성이 틀리고 영화를 보는 시선이 틀릴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누는 것이 맞지 않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링에 올라온 이상은 일단 프로다?
중요한 건 내가 승리를 하느냐, 패배를 하느냐, 이런 큰 문제들과 나와의 갈등을 비롯한 다른 문제들이겠지.

그 승리와 패배라는 게 단순히 말하자면 흥행과 비흥행일 수 있고, 배우 자체로 보자면 연기에 대한 평가일 수 있다. 당신은 그런 과정을 어느 정도 겪었고, 지금쯤이라면 과거 전적에 대한 정리가 한차례 정도 필요했을 거 같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할 수 있는 것, 배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임무들을 충실히 하는 것이 다라는. 그 이외의 것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채 벌어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더라. 사실 흥행이란 건 배우가 선택할 문제는 아니지. 물론 내가 했던 작품들이 내 스스로 흥행작이라고 생각하고 했을 텐데 그 중에서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고. 그리고 내가 내 캐릭터를 다 사랑했음에도 어떤 캐릭터는 호평을 받고, 어떤 캐릭터는 평가 저하를 받고. 그런 것들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임무에서 벗어나는 일들, 배우라는 지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들, 그런 전제들을 보고 그것을 그냥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되는 거지. 이건 또 이렇게 받아들여지는구나, 이렇게. 그리고 그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무서워하지 말아야죠. 나 스스로 당당하고, 나 스스로 내게 지지 않는 것. 그것만 있으면 된다.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저런 사람들과 내가 같이 사는 거니까. 나와 다른 사람들과 사는 거니까, 그냥 그걸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거 같다. 자꾸 얘기가 링 경기처럼 흘러가는데,(웃음) 링 위에서 경기를 할 때 누구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한대 맞고 질 경우가 있잖아. 정말 복병의 순간으로 다운되는 경우가 있는 거지. 하지만 그래도 훈련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다. 작업을 하는 당시나 준비하고 만드는 공정의 과정에서. 훈련은 모든 배우의 임무이자 내가 해야 될 몫이다. 그리곤 링 위에 올라가서 경기 땡 하는 순간에 마음 비우고, 내가 쌓아온 만큼 경기를 멋있게 펼치는 거다. 자꾸 그런 얘기가 되지만,(웃음) K-1도 누가 이길 것 같은 경기는 재미없다. 하지만 그냥 질 거 알면서도 남자답게 파이팅 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좋다. 그 순간에 내가 질 수도 있지만 내 기량을 맘껏 뽐내는 게 보는 사람도 좋잖아. 그러니까 어떤 결과에 대한 건 운명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맡기고, 내가 참 바라는 것, 참된 나를 보여주는 것이 이제 중요한 과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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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이란 비유가 류승범이란 배우에겐 어울려 보인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도 자신의 인생을 찾기 위한 데뷔전처럼 보였고, 그 동안 마치 치열하게 영화와 싸워오며 여기까지 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랑 친해지기가 힘들었다. 영화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이제 좀 편한 친구가 된 거 같다. <라듸오 데이즈>를 선택했던 것도, 이제 좀 편해지자, 이만큼 왔는데,(웃음) 이런 심리가 있었지. 솔직히 내가 널 이겨먹어야 되고, 네가 날 이겨먹어야 되고 그럴 필요 있냐. 그냥 우리 그냥 동지인 거 같다. 다른 배우들과 작업하는 방식도 그랬다. 굳이 내가 주인공이어야 돼? 우린 동지야. 같이 가자. 같이 버무려 보자. 내가 안보여도 돼. 당신이 더 보였으면 좋겠어. 우린 동지니까. 아군. 이렇게 우린 현장에선 같이 전쟁터에 나간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선 되게 마음이 편했지. 그리고 이건 <라듸오 데이즈>가 주는 혜택인 거 같다. 다른 영화들은 또 치열하게 해야 되는 영화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내가 나를 괴롭혀야지만 되는 것들, 그건 그런 작품들은 캐릭터가 매달려야 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캐릭터가 끝까지 가야 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또 그 영화에 맞게 그런 투쟁을 해야 되는 거다. 내가 만약 <라듸오데이즈>에 <사생결단>같은, 아니면 <주먹이 운다>같은 영화를 했던 방식을 그대로 갖고 오면 이 영화에 틀린 걸 준비한 거다. 배우는 가공의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이 진짜 인생, 진짜 삶이라고 자신을 숨기고 그것을 믿으며 사는 존재다. 근데 그 세상이 어디냐에 따라 다른 거 같다. 여기가 서울이냐, 미국이냐, 우주냐, 혹은 여기가 경성이냐, 30년대냐, 누구와 함께 하느냐,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들이 다르잖아. 그러니까 그 위치에 맞게 그걸 믿고 따라서 사는 거지.

전작들에서는 마치 다른 캐릭터들과 끊임없이 부딪히며 경쟁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라듸오 데이즈>에서는 마치 다른 배우들에게 기대는 것처럼 보였고 그게 편해 보였다.
기대고 흡수해버리지. 예전엔 누가 실수했다던지 그러면 너 왜 그래?(격양된 말투로), 그랬다면 이젠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기대고, 어깨도 빌려주고, 편안하게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내가 가장 연기를 안 한 영화일 수도 있다. 한 게 없잖아. 맨날 사장 말대로 커피만 마시거나 웃고 앉아있고, 뭐 한 게 없다.(웃음) 방송국에서 배우들은 연기하는데 박수치고, 웃긴 모습보고, 지쳐있으면 같이 술이나 한잔하고, 정말 그렇게 생활했다. 현장에서.

그 동안은 자신을 돋보이는 연기를 했다면 이번엔 남을 돋보이기 위해서 연기를 한 셈이다.
그러니까! 참 희한하다! <만남의 광장>같은 경우도 남을 돋보여야 되는 역할인데 어떻게 의도하지 않게 내가 튀었다. 그래서 내가 인터뷰할 때 되게 조심스러운 거다. 어떻게 보면 내가 감히 실례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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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에 했던 인터뷰들을 보니 심경의 변화가 느껴졌다. 많이 안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스스로 뭔가를 많이 버렸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그냥 내 스스로가 편해진 거 같다. 예민함이 조금 무던해진 거 같고. 근데 그게 배우로서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서 갈등이 있긴 하다. 사람들은 행복한 환경에서 행복을 누릴 줄을 모르는 거 같더라. 나도 그렇고. 그러니까 거기서 그냥 그걸 즐기면 되는데, 즐기면서 또 불안해하고 많은 생각들을 하고, 이런다. 나 역시도 지금 그런 거 같은데, 편안하면 좋은 거다, 사실! 그런데 편안하면 편안하다고 이게 신경 쓰인다. 난 배우니까 예민하고 이래야 되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래도 예전보다 시간이 지났고,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가고 그러니까 스스로가 안정되고 그렇게 날 찾아가는 거 같다. 진짜 나를. 그리고 내가 나를 이제 사랑하는 거 같다. 아끼고 싶다. 내가 나를. 나에 대해서, 나를 좀 아끼고 싶다. 사실 예전엔 배우 류승범을 많이 생각했다면 이젠 인간 류승범을 아끼고 싶고. 예를 들어 그냥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냥 난 이런 사람이라고 진솔하게 살고 싶다. 그래서 내가 갖고 있는 끈들을 몇 개 놨다. 최근에 읽은 ‘내려놓음’같은 책처럼. 내려놓으니까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잡고 있었더라. 그래서 놓아보니까 마음이 편안해진다. 영화가 실패할 수도 있고, 실패해도 열심히 살면 되고, 다시 좋은 작품 하면 되고. 최선을 다했는데 안절부절못하는 것보단, 편안하게 잘할 수 있다고 믿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머지는 운명이니까. 내가 갖고 있는 욕심들이나 그런 것들을 다 비우고, 내가 살고 있는, 처한 환경을 넓히려고 생각하지 않고 좁히니까 행복하더라. 줄이니까 행복해지더라. 넓히려고 생각하면 불안하고, 힘들고, 안정이 없지만 조금만 줄이면 가벼워지니까 좋다. 다이어트도 뚱뚱했을 때보다 가벼워지고 그래서 좋은 것처럼. 생각해보면 줄인다는 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줄이니까 생활하는 게 편하더라. 마음에 안정이 오니까.

자신을 치장했던 것들이 무겁다는 걸 의식하기 시작하게 됐나 보다.
내가 나한테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나한테 솔직한 사람이 되고 싶고. 알고 보니까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더라. 아무것도 아닌데 있는 척하고, 아는 척하고, 뭐 하는 척 하고,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도 누군가에게 귀감을 주는 배우일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그건 이제 인간 류승범이기 전에 배우 류승범. 물론 이런 게 날 비하하는 느낌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날 채우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내가 진짜 뭐 있는 사람처럼 만들고 싶다는 거지. 하다못해 영어도 잘하고 싶고, 춤도 잘 추고 싶고, 몸도 유연해지고 싶고. 배우로서의 자질들이 리모컨 누르면 탁 나올 수 있는. 근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이제 공부하고 싶고, 배우고 싶고, 준비하고 싶고,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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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당시 동영상 인터뷰하는 걸 찾아봤는데 이때는 류승범이란 배우가 어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는 스무 살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류승범이란 배우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게 더 실감나게 느껴진다.
사람들이 내가 나이 먹는 건 모르더라.(웃음) 맨날 다른 사람 나이 먹는 것만 알고, 나한테는 네가 벌써?, 막 이런다. 아직도 스물 하나, 둘 인줄 알고.(웃음) 물론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가고 있고, 영화 외에 내 인생에 있어서도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고, 마음에 들어오거나 느껴지는 감정들이 많다. 그렇다고 내가 철이 들었나 봐, 이건 아니고. 난 진지해졌어, 이것도 아니고. 그냥 내 나이에 맞게, 지금에 처한 상황에 맞게 사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는 참 왜 그렇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가 보다.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스물세 살의 나는 세상과 싸우려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지도 않고, 세상을 막 집어먹으려 그랬지. 돈도 벌고 싶고, 욕심도 많고, 이것도 해야 됐고, 저것도 해야 됐고. 그런 면에서는 나이 먹는 게 참 좋은 거 같다. 더 먹고 싶기도 하지만 억지로 더 먹을 순 없고,(웃음)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게 참 좋다. 그리고 흘러가는 데로 내버려두고 싶다. 예전에는 나이 먹은 형들이, 난 지금이 좋다, 서른이 되니까 너무 좋아, 결혼하니까 너무 좋아, 애 낳으니까 너무 좋아, 이런 이야기하면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 뭔가 응수하지 않으면 열정이 사라질 텐데, 저렇게 그냥 정체되는 것 아닐까, 이런 간단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반응하고, 그렇게 더 많이 알아가고, 더 많이 느껴지고, 그러니까 더 많이 표현할 수 있고, 더 많이 담을 수 있고, 이렇게 흘러가는 게 참 좋더라.

과거를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나도 이십 대 친구들 보면 예전에 형도 나를 저렇게 봤겠구나, 라고 느껴지는 게 있다. 하다못해 어릴 땐 튀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래서 요즘 어린 친구들을 보면 나도 놀래는데 형은 날보고 어땠을까 한다.(웃음) 자신들의 철학이 어쩌고 하면, 그래, 나도 한땐 그랬다, 하고.(웃음) 하다못해 이젠 추우면 멋 부리기보다 옷을 따뜻하게 입으려고 한다. 옛날엔 어른들이 멋 내다가 얼어 죽어, 그러면 아니에요, 하고 넘겼는데 이젠 내가, 너 추워 옷 좀 입어, 이렇게 된다.(웃음) 그렇게 패션을 좋아했던 놈이 무던해지더라. 옷은 그냥 사람이 입으려고 만들어지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삶에 여유가 생긴 덕분에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건 아닌가.
사실 나같이 환경적으로 어렵게 살았던 사람이 아직도 어려우면 그만큼 여유가 있을까라는 질문도 받는다. 생각해보면 맞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니까 규모를 줄이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지, 어려운 사람한테 더 줄이라고 하면 그게 사실 행복할 수 없지. 그런데 어렵게 사는 환경에서 더 어려움을 보고, 어려움을 돕고,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럴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걸 못했지. 그리고 사실 대부분 그걸 잘 못하잖아. 그래서 지금은 그런 예전보단 안정됐고,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에 대한 필요성이 느껴져서 나름대로 그런 여유가 생긴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더 주위를 돌아보게 되고 안쓰러울 때가 많지.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여유를 논할 수 있겠나. 삼시세끼 밥 먹는 게 최우선이지. 내가 여유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겐 모순이고, 날 같잖게 볼 수 있잖아. 그러니까 여유로움도 조심스러워야 할 것 같다. 내가 여유로우면 나 혼자 여유로운 게 아니라는 거지. 진짜 그 사람들과 여유를 같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하는 거고. 내가 나 혼자 좋자고 규모를 나눠서 그걸 저금하는 게 아니고 줄여서 남한테 베푸는 거다. 내가 10억짜리 집에서 살다가 5억짜리 집으로 옮겨서 5억짜리 차 사면 똑 같은 거잖아.(웃음) 그게 아니라 5억짜리 줄였으면 5억은 더 좋은데, 진짜 필요로 하는데 나눠서 같이 살면 그래야 진짜 행복해지는 거 같다.

그런 생각을 하기까지 구체적인 계기는 없었나?
최일동 목사님이라고 청량리에서 거지들이나 행인들한테 밥 퍼주시는 분이 있다. 예전에 그분을 만나서 얘길 했는데 그분이 처음 청량리에서 거지들한테 밥을 줄 때, 그냥 딱 한끼 줄 것밖에 없었단다. 근데 그게 지금 20년 가까이 지켜져 올 수 있었던 건 청량리에서 야채 팔던 할머니들이 야채 팔다 남은 거라도 먹이라고 주고, 생선 팔다 남은 것도 주고, 그랬던 덕분이다. 부자들이 도운 게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한 사람들 도운 거다. 그걸 들으면서 세상은 아직도 참 따뜻하구나, 난 못난 놈이다,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구나. 그 때 그런 걸 느꼈다. 난 진짜 뭐하고 사나. 난 거의 다 손에 움켜쥔 채, 앞만 보고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데 가려고만 했지. 내가 진짜 어려웠을 때, 내가 정말 힘들고 어렵게 살았을 때를 잊어버리려고만 했고,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지금도 힘들고 소외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참 못난 놈이구나. 그러고 내가 신앙인이라 할 수 있고, 종교를 가졌다고 얘기할 수 있나. 내가 남 앞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부끄럽더라. 사실 아직도 잘 지키진 못한다. 노력하려고 하는데 지금도 말뿐인 내 자신이 역겹고, 그리고 또 이렇게 각성하면서 한번 더 노력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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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는 게 일종의 자기 다짐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봉사해야지, 봉사해야지 얘기를 많이 하고 다니는 게, 우린 얘기하면 지켜야 되니까.(웃음) 그래서 일부로라도 얘기한다. 얘기해놨으니까 안 하면 이거 왜 말해놓고 안 해? 이렇게 되니까. 그런 말 없애려고 더 하게 되겠지.

당신은 본인의 형인 류승완 감독 작품에서 주동적인 인물로 존재할 때면 항상 상환이란 이름을 썼다. 그런데 류승완 감독은 자신이 직접 영화에 출연하면 항상 석환이란 이름을 쓰더라. 마치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형제라는 끈이 강하게 느꼈다.
그걸 내가 형한테 한번 물어봤었다. 왜 상환이란 이름을 쓰고, 석환이란 이름을 쓰냐고. 근데 감독들마다 페르소나가 있잖아. 우리형뿐만 아니라 감독들에게 쓰여지는 이름들. 장진 감독님도 동치성이란 이름을 쓰는 것처럼. 그냥 우리들끼리 얘기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그걸 좋아한다고 한다.(웃음) 근데 그걸 다른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하면서 뭔가 있나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 이름이 처음에 좋았고, 그 이름으로 시작했던 느낌이 있으니까.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석환, 상환이라는 인물로 시작했고 자신의 단편영화를 처음 탄생했을 때 애착 같은 거, 내가 보기에 우리 형은 그런 거에 가까운 거 같다. 그리고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도 상환이었고, <주먹이 운다>에서도 상환이었는데, 그 인물들이 갖고 있는 상환이라는 이미지가 있는 거 같다. 약간의 루저고 뭔가 좀 모자란듯한, 그런 이미지가 있는 거 같다. 그리고 석환이라는 이미지도 있는 거 같고. 근데 그것을 연계해서 보면 석환은 좀 더 맏형 같고 책임감 있는 이미지인 거 같고, 상환은 좀 철부지 동생이면서 좀 루저같은 느낌이다. 감독이 갖고 있는 어떤 이름, 마치 우리가 친구 이름만 딱 떠올려도 그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상환, 석환에 담긴 류승완 감독님의 그 느낌을 해치고 싶지 않다. <주먹이 운다>때도 내가 상환이란 이름이 싫어서 다른 이름을 하자고 했다가 그게 어느 순간 느껴지더라. 아, 상환이라는 이미지가 우리 형은 친구 같을 수도 있겠구나. 자기에게 둘도 없는 친구.

그런데 아무래도 형과 동생의 관계에 있다 보면 조심스럽기도 할 것 같다. 형제끼리 다 해먹는다는 눈총을 살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류승완 감독이 배우 류승범에게 시나리오를 넘길 때는 되려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류승완 감독도 시나리오에 배우 류승범을 출연시키기 전까지 확실한 검증이 있었을 것이고, 당신에게도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 출연을 승낙한다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항상 류승완이란 사람이 내 인생에 영향을 많이 줬다. 하지만 이젠 한 일을 하는 동지다. 그만큼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일 적으로 뒤쳐지면 힘들어진다. 나도 배우로서의 존재감이 계속 살아 움직여야 감독도 쓸 수 있는 거고. 그러니까 서로 더 열심히 하는 거 같다. 서로의 임무를. 왜냐면 만약 류승완 감독이 류승범이란 배우를 자신의 작품에서 기용하고 싶어도 상업영화 시장에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류승범이 평가 저하되는 배우였을 때 못쓰는 거다. 그러니까 언제라도 같이 일할 수 있을만한 동지가 되어있어야 된다는 자세. 나 스스로 준비돼있어야 한다. 그건 꼭 류승완 감독님한테 뿐만 아니라 어떤 감독님한테도 우린 승인 받아야 하니까,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한다. 결국 똑같다. 영화적으로 같은 동지고, 예전에는 내가 표현이 어떤지 몰랐었으니까 이제 형한테 의지하고, 더 많이 기대고, 배우고 이랬지만 다른 감독님들과 작업하면서 다른 작품들도 하고, 나도 배우로서 성장통을 겪게 되고, 성장을 스스로 시작하게 되고, 그러면서 뭔가 배우게 되고. 형제 이전에 배우와 감독으로서 인정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자 세 아이의 아빠라는 한 남자로서 내가 모르는 인생을 인정하고. 그렇지만 어느 정도 비슷하게 가는 것도 있다. 이런 힘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힘들다. 아까 말했듯이 프로 데뷔전을 치른 이후부터는 이젠 더 이상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같이 일한다는 건 힘들잖아. 순수예술이 아닌 이상, 상업예술이니까. 그래서 서로가 그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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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각자 자신의 영역을 잘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겠다.
그런 균형들이 골고루 이뤄져야 류승완, 류승범을 떠나서 서로가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으니까. 하기호 감독님은 <라듸오 데이즈>로 만났지만 나중에 다른 작품으로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내 번째 첫 주연작인 <품행제로>의 조근식 감독님도 그게 입봉작이었는데 몇 년 뒤에 <그해 여름>했고, 우리 임순례 감독님도 지금 흥행하고 계시고. 이렇게 같이 조금씩 성장해가고, 아픔도 겪게 되고, 또 다시 일어나고 다들 그러니까, 어떤 배우나 어떤 감독이 잘 되면 매일같이 행복할 때가 있다. 예전에 <사생결단>찍을 때 (황)정민이 형하고 그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6년 만에 영화에서 만나는 구나. 너무 기쁘지 않냐고. 정민이 형이 잘 되는 게 내일 같고 내가 잘돼서 정민이 형이 너무 기뻐하고 그러는 게 너무 좋다. 근데 만약 어디 하나가 잘못 돼서 그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솔직히 마음 아프고, 괜히 만나면서도 미안해지고, 이럴 때가 생긴다. 어렸을 때 친구들 만날 때도 난 그래도 이렇게 내생활 잘 꾸리고 있는데 아직도 어려운 친구들은 잘 만나주지 않고 그렇잖아요. 도와주고 싶어도 어떻게 도와줄지 모르겠고. 어떻게 보면 나도 사회 구성원의 한 명으로서 살고 있고, 그건 류승완 감독님도 마찬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그렇게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된다라는 게, 감정만 내세워서 될 일은 아닌 거 같다. 각자 자기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 되지. 물론 여러 가지로 일을 잘하고 프로 중에서 일등이라고 해도 얘가 기초적인 인간적 덕목이 깨져버리면 또 그것도 안 된다. 서로서로 비슷한 성장들을 유지해야 계속 친구로 남을 수 있는 거 같다.

정말 의지할 수 있는 짝패가 되야 한다는 건가.
그렇지. 그렇다고 그걸 너무 자격처럼 보자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힘이 없지만 나보다 덕목이 좋아서 그 친구에게 그런 걸 배우려고 친구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이 힘의 균형인 거 같다. 똑같이 나도 연봉 1억, 너도 연봉 1억, 너도 성격 이 정도고, 나도 성격 이정도. 이건 너무 달콤한 만남이고, 너무 나 편한 만남이다. 이 사람은 내가 갖지 못한 이런 것도 갖고 있으니까 이런 걸 서로 채워줄 수 있으면 힘의 균형이 딱 맞겠다는, 사람 관계 안에서는 그런 것들도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최근에 ‘시네마테크와 친구들’에서 <아이다호>를 추천했던데, 구스 반 산트 감독을 원래 좋아하나?
아니. 구스 반 산트 감독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닌데, 그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앞에 2라는 숫자가 올해로 마지막인 스물 아홉 살에, 삼공(30)이 되기 전에 청춘영화를 하고 싶었다. 도심 한가운데 서있는 청춘의 그런 모습을 담은 영화를 꼭 하고 싶다. 물론 서른이 됐다고 청춘 영화를 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있지 않나. 그리고 사람들도 봤을 때, 서른 하나, 서른 둘이 청춘영화를 하는 것보단 아직 스물아홉 살의 배우가 하는 게 실제 그 간극을 줄이는 셈이다. 그래야 좀 더 느껴지는 것도 있고. 그런 청춘 영화 중에 <아이다호>를 참 좋아한다. 내가 어렸을 때 봤는데 잘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막연하게 보면 청춘영화라는 느낌이 나에게 있다. 그리고 어쨌거나 당대 최고의 청춘 스타인 리버 피닉스를 탄생시킨 영화고.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갖고 있는 그런 느낌과 생각들을 통해 청춘 영화를 할 수 있을까, 내가 아직도 그런 청춘의 감성을 충분히 느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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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이런 느낌이라면 공격적인 느낌보단 방어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청춘 영화가 나올 것 같다.
그러고 싶다. 그래서 때는 지금이라고 생각되는 게, 여기서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조금 더 흘러가면 청춘의 치기 같은 게 안 나올 것 같고. 예전엔 무조건 공격만 했다면 이젠 방어도 하면서 공격도 한다는 그런 막연한 느낌이 나한테 있다. 예전에는 도시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게 여기 있는 도시를 다 집어먹고 싶어하는 드글드글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서있고 싶다. 막막한 청춘으로 외롭게 홀로 서있는, 네온사인들이 깜빡깜빡 거리는 그런 느낌. 화려한 도심을 걷고 그 안에서 웃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마치 나 혼자 도시에서 떨어져 나온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 든다.

데뷔 당시 ‘나이 서른 되기 전에 집세 걱정안하고 차도 살 정도의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결국 모든 걸 이뤘는데 왜 다시 반대로 그것을 놓으려 하는가?
가져보니까 살면서도 굳이 필요하지 않은데 욕심 낸 것이 많더라. 물론 지금도 월세 걱정하시고 내 집장만하고 싶어하시고, 그런 분들 충분히 난 이해한다. 왜냐면 그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것들이니까. 의식주, 먹고, 자고, 기본적인 안정을 취하고 싶어하는 것들. 그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꾸준한 안정을 위해 나도 사람인지라 찾고 있다. 다만 50평짜리, 100평짜리, 200평짜리 집에서 살 필요가 없다라는 걸 느낀 거지. 지금 집이 어떤 집이든 안정적인 집, 그리고 월세나 그런 것에 각박하지 않은 집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차? 나도 벤츠타봤다. 벤츠타보니까 뭐가 좋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 벤츠타면 사고 나도 안 죽나?(웃음) 비행기 타고 가다가도 죽는데. 더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난 차가 필요해지면 다시 살 거다. 하지만 이제 이동수단으로서 차라는 것에 대한 본질을 알게 됐다. 어딜 가야 될 때 우리에게 대중교통은 솔직히 불편한 게 있으니까. 다만 필요하니까 타는 거지, 벤츠를 타야 되고, 명차를 타야 되고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거다. 차 매니아라면 모르겠지만, 일주일에 몇 번이나 탄다고 차 보안해야 되고. 넓은 평수에서 살면 방은 다 비어있고, 불필요한 거 사서 채워야 하고. 나한테 필요한 거, 내가 필요한 걸 하나씩 하나씩 넓혀나가는 재미가 있어야지. 그 동안 그냥 사놓고 재어놓기만 하고 그런 거 이제 재미없는 거 같다.

그 동안의 자신의 인생을 드라마라고 한다면 뭔가 완성하고 싶은 드라마가 있을 거다. 지금 시점에서 류승범이라는 드라마를 어떻게 완성하고 싶은가?
앞으로? 난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는 당신을 포함해서 오늘 만난 사람들을 내년에 만나거나, 내후년에 만났을 때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배우로서 성장은 어떻게 될지 솔직히 불확실한 거 같다. 그런데 이제 또 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또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고. 근데 사실 항상 좋은 위치에서 있으리란 보장은 없잖아. 하지만 나를 보면 그냥 기분 좋은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솔직한 성격이다, 쟤 뭔가 쿨해, 이런 게 아니라 진솔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진솔하다는 느낌을 요즘 참 좋아한다. 착한 느낌, 날 봤을 때 뭔가 착해지는 것 같고, 얘기하고 싶어지고. 내 얘기를 하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 있잖아. 류승범한테는 왠지 내 얘기해도 될 것 같다는. 예전엔 술 먹고 거하게 놀고 싶은 그런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옆에 있으면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느낌이고 싶다. 나이 서른을 준비하면서 서른 살이 되고, 서른 두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되고, 점점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점점 편해지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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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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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김성령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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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2007년) 인터뷰 많이 했더라.
<궁녀>때문에 많이 했지. <가면>도 잘 되야 할 텐데. (웃음)

<가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다.
범인을 헷갈려 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더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이해서’는 마치 사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예감을 주더니 그냥 척일 뿐이더라. 하지만 그것이 맥거핀처럼 반전을 돕는 효과를 내는 것 같았다.
초반에는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시는 분들이 몇몇 있을 것 같다. 물론 뒤로 갈수록 사건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아니라는 걸 알겠지만 초반에는 나도 무척 범인처럼 의심스러워 보이잖아.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나를 통해서 약간 반전을 꾀하는 측면도 있지.

얼마 전에 <세븐 데이즈>를 본 사람이라면 김미숙 씨의 역할 때문에 그런 추측을 할 가능성도 있을 거라고 본다.
아, <세븐 데이즈>에 김미숙 선배가 나오나? 그랬구나. 그 분은 영화도 잘 찍으시네. 부러워라. (웃음)

본인도 두 편이나 찍었으면서.(웃음) 어쨌든 덕분에 올해의 재발견이란 말을 많이 듣게 됐다. 일단은 기분 좋은 말처럼 들리는데.
어떤 분은 기분 나쁜 말 아니냐고 묻던데?

마찬가지다. 왠지 본인에겐 억울한 수식어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좋은 건데 어떻게 보면, 뭐야~, 이제 데뷔 20년인데.(웃음) 어찌됐건 나쁜 얘기는 아니니까 좋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 동안 세상이 나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게 아닌가 싶은 야속함은 없던가? (웃음)
내가 그 동안 TV활동을 주로 하다 보니까, 영화 찍은 게 신기했나 보지. (웃음)

92년도 <숲속의 방>출연 이후로 <가면>은 15년 만의 출연작이다.
91년도에 <용의 발톱>(<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나?>)하고 나서 연달아서 바로 92년도에 <숲 속의 방>을 했으니, 15년 만이지.

그런데 <가면>의 개봉이 밀리면서 그 이후에 찍었던 <궁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양윤호 감독님이 15년 만에 저를 영화계로 끌어준 은인인데, 개봉이 늦어지는 바람에 어떻게 그렇게 됐지.

영화로 연기에 입문한 배우가 15년 만의 영화 출연이라니 아이러니하다.
그러니깐! 내가 뭐 밉보였나 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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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에 본인이 영화를 외면한 건 아닌가?
사실 전혀 섭외가 없었던 건 아니다. <용의 발톱>을 찍고 나서 영화제 세 곳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내가 약간 기고만장했던 거지. 그래서 들어오는 역할마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차츰차츰 영화를 안 하고, TV활동을 시작하니까 이제 영화는 안 하나보다, 라고 생각하게 된 분들이 많아진 거 같다. 이번에 내가 영화를 다시 하니까, 영화도 하는구나, 하는 거지 그 전에 내가 영화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어? 영화도 하고 싶다고요? 영화를 할 마음이 있으세요?, 이렇게 물어보더라. 그때마다 너무나 영화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지. 물론 구체적으로 영화를 하고 싶다고 한 건, 불과 한 2년, 3년 전? 그때부터 다시 기획사하고도 의논하고. 물론 다시 영화를 해야겠다고 얘기한 건 불과 얼마 안됐지만 그 전에 나도 시나리오 몇 번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떤 작품은 무산되기도 하고, 왜 영화계가 그런 일이 많잖아. 그래서 오케이 다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무산된 것도 있고, 내가 거절한 것도 있고, 까인 것도 있고. (웃음)

첫 작품이었던 <용의 발톱>으로 호평을 받았던 게 독이 된 부분도 있었나 보다.
그때는 멋모르고 연기를 시작해서 너무 철이 없었다. 내가 원래 영화를 하고 싶어서 따로 준비하다가 촬영을 들어가게 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작품이 너무 좋다 보니까 나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고 그런 걸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거지. 아주 옛날 얘기긴 하지만 그 땐 그랬던 거 같아. 지금은 오히려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고, 한 편으론 간절히 바라고 있고. (웃음)

두 편의 영화 뒤로 처음 했던 드라마가 <해뜰날>인가?
그 전에 <고래사냥>이라는 미니시리즈를 했었다. 최진실 씨 동생인 최진영 씨하고 나하고, 또 한 분이 있었는데……오래돼서 생각이 잘 안 나네.(웃음) 그렇게 세 사람이 TV용<고래사냥>을 했었다. 그래서 난 첫 드라마부터 벙어리 역할을 했고.(웃음) 내가 맡은 춘자가 벙어리였다가 나중에 말이 트이는 역이라서 그때 청각장애자 분들과 미팅하고 설정잡고, 그렇게 해서 연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해뜰날>을 했지.

<해뜰날>에서 이병헌 씨도 출연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 그 친구의 드라마 데뷔작이 <해뜰날>이었을 거다. 그 이후로 일일 드라마 주인공을 했었는데, 처음인데도 잘 했었고.

그런데 한국 여배우들은 남자 배우들에 비해 연기자로서 여건이 불리한 것 같다. 남자 배우들은 30대가 되도 캐릭터가 풍성한데 여배우들은 한정되는 느낌이니까. 특히나 결혼을 하게 되면 더욱 그런 것 같다.
요즘은 많이 나아지긴 했다. 그런데 그건 여자는 결혼을 하고 나면 출산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일단 결혼 자체가 내 생활에 큰 변화를 주진 않는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출산은 어떤 변화가 있다. 그런 변화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배우로서 긴장을 푼다고 할까? 또 다른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에너지가 분산되는 게 있는 거지. 그에 반해 남자들은 자기 직업이고 천직이니까 계속 꾸준히 연기할 수 있잖아. 물론 요즘은 출산했다고 해서 아줌마 같다던가, 꼭 그렇지 않더라. 물론 하나일 때, 둘일 때 또 틀리긴 해.(웃음) 가끔씩 케이블TV에서 하는 타이라의 슈퍼모델 뽑기(‘도전! 슈퍼모델’)인가? 그걸 보는데 거긴 배우가 아니라 모델을 뽑는 거니까 외모가 굉장히 중요하겠지. 그런데 출전하는 친구들이 애 엄마도 많더라. 우리 같은 배우는 애를 낳고 늙어가도 거기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지만 모델은 그런 면에 있어서 약간 불리하겠다 생각했는데 거기 나오는 외국여자들은 애가 하나 정도 있는데도 여전히 아름답고, 몸매도 좋고. 시대가 좋아서 그런지, 잘 먹고 잘 살아서 그런지,(웃음)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하더라.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도 점차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이요원같은 친구는 애도 있는데 권상우랑 드라마도 하잖아. 부러워라.(웃음)

젊은 층에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만 양산되는 까닭에 캐릭터적인 기회가 드문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면도 있지. 그런데 영화계에서는 그런 이야길 하고 싶어도 쓸만한 배우가 없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에 반해 배우는 우리가 할 역할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누군가가 깨주겠지. 내가 깰까?(웃음)

이미 증명하는 중이라고 생각된다.(웃음) 그런데 그 동안 드라마에서 왕비로 살다가 <궁녀>때문에 신분 하락을 경험해야 했는데.(웃음)
묘했다. 누가 문 열어주면 들어갔는데, 이젠 내가 열어줘야 했으니까.(웃음)

사극이라 비슷하게 보이지만 <궁녀>는 기존에 했던 사극 드라마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사실 나한테는 여러 가지 부담감이 있었다. TV드라마를 통해 사극을 많이 했지만 어쨌든 영화였고, 스릴러 장르인데다가, 그리고 궁녀 얘기가 주된 얘기였으니까. 감찰 상궁을 맡았으니까 고민이 많았죠. 기존에 왕비 했던 건 이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웃음)

아무래도 기존에 했던 사극들과 캐릭터적 접근 자체가 달랐을 것 같다.
어차피 그녀도 궁녀를 거쳐서 감찰 상궁이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겪고 그 자리에 올랐을 테니까 그 애들을 마음속으로 충분히 이해해도 감찰해야 하는 입장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양면성을 이해하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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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후배들과 함께 했다는 점도 차이를 느끼게 된 요인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TV사극에서는 좀 연륜이 있는 선배 배우 분들과 호흡을 맞추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내가 드라마에서 사극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거다. 미니시리즈 같은 건 젊은 친구들이 많이 하지만 사극 같은 데에는 대선배님께서 많이 계시잖아. 선배님들 밑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하거든.(웃음) 사실 그래서 <궁녀>는 대부분 어린 친구들하고 있으려니까 마음이 진짜 부담스럽더라. 못하면 어떡하나, 이런 걱정도 앞서고. 하지만 감독과 배우들이 충분히 상의하고, 논의하고, 호흡 맞춰볼 수 있고, 그렇게 서로에 대한 벽 같은 걸 충분히 허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거쳐서 작업을 시작하니까, 그런 면 때문에 다들(배우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건가 싶더라. 사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대본 연습 때 얼굴 한 번 보고 촬영 끝날 때까지 못 보는 배우들도 있고, 가끔 부딪히는 배우들도 촬영장에서 잠깐 잠깐, 뭐 그런 식이니까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지. 그렇지만 영화는 가족 같아서 좋았다.

젊은 배우들의 기에 밀리지 않기 위한 노력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극 안에 존재하는 캐릭터들이 풍기는 포스가 다들 강한 편이었으니까. 물론 그 중에서 감찰 상궁이 압권이었지만.(웃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영화에는 절제된 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왜냐면 관객들이 커다란 스크린을 집중력 있게 보고 있는 만큼 너무 과장되면 오버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점에 신경을 많이 썼지. 내 편견일지 모르지만 TV드라마는 약간 그런 경향이 있거든. 특히 사극에서는 조금 오버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감찰 상궁은 알듯 모를듯한 느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감찰 상궁이 모든 상황을 알고 저러는 건지, 몰라서 캐묻는 건지 관객들이 헷갈려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재미가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런 느낌을 살리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지. 그래서 일부로 목소리 톤을 좀 낮게 깔기도 했다. TV상에서 왕비로서 권력 암투에 휘말리는 상황이 많았는데 그럴 땐 겉으로 표현하는 게 대수라 에너지가 있어야 하지. 뭐라고!(격양된 목소리로), 막 이렇게 소리도 지르니까.

강한 눈빛에 비해 말투는 절제된 것 같다. 게다가 사극인데 현대적인 말투를 구사하더라.
그런 부분에 신경 많이 썼지. 사극 말투를 버리려고 했는데 사실 어려웠다.(웃음)

어쨌든 15년 만에 영화 촬영 현장에 서니 어땠나?
봐서 알겠지만 <궁녀>보다 <가면>은 씬이 많지가 않다. 4회 차나 5회 차 정도밖에 촬영 분량이 없었거든. 그래서 감독님이 내 입장을 많이 배려해주셔서 내 촬영 분을 하루에 몰아서 찍었다. 오랜만에 영화를 찍는다는 걸 충분히 아셨기 때문에 현장에서 쑥스럽고 어색해하지 않게 배려해주신 거지. 덕분에 편하게 찍어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극 중에서 내가 조울증 환자 연기를 해야 하니까 조울증 환자 한번 만나서 관찰해보라는 주문도 하셨다. 그래서 진짜로 정신과 병동에 찾아가서 조울증 환자를 만나서 얘기도 나눠보고 그랬다.

사실 그 동안 캐릭터 자체로 한정되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그랬기 때문에 철저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이해서란 역할이 새로웠을 것 같다.
그런 느낌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더 집중을 요하게 하고 궁금증을 유발시킬 수 있으니까 매력 있지. 처음 시나리오 받았을 때도 씬은 얼마 없었지만 이해서가 충분히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그런데 촬영 중엔 감독님한테 맨날 협박했었지. 내 씬 얼마 안되니까 손대거나 자르면 그 때는 두고 보자고~. 편집할 때 찾아가서 보겠다고~. 그런데 내가 하도 그래서 그랬는지 진짜 안 자르셨더라.(웃음)

전문 장르에 출연한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이해서가 직접적인 사건을 만드는 대상은 아니라도 심리적인 의혹을 형성한다는 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사실 내가 이런 연기를 그전에 즐겨봤다던가, 관심 있었다던가, 그렇진 않았다. 난 로맨틱 코미디나 해피엔딩 같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영화를 통해 처음 했는데 이런 작업들이 재미있더라. 그리고 나한테도 잘 맞는 거 같아.(웃음) 내가 전혀 그런 걸 몰랐지만 막상 해보니까 그런 패턴의 연기라던가, 영화가 내 감성하고 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앞으로 좀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웃음)

비중은 적지만 상당히 집중력이 요구되는 캐릭터라 피곤했을 것 같다.
좀 그랬지. 역할 자체가 환자였기 때문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돼서 의사 선생님과 상담도 많이 했다. 사실 우울증 환자가 다 그렇게 우울하지만은 않더라. 사실 좋았다가 나빴다가 이래서 그걸 표현해보고 싶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전체적인 느낌이 너무 튀는 거다. 그래서 감독님께서 그냥 우울모드로 가자고 해서 그냥 그렇게 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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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의 감찰 상궁이 활동적이었던 반면 <가면>의 이해서는 독립적이었다.
이해서는 느낌 자체가 굉장히 애매모호하고, 어떻게 보면 신비스럽지. 감독님은 초반에 이해서가 범인 같으면 성공이라고 했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범인 같을까 고민했지. 물론 이제 연출적으로도 그런 느낌을 많이 살려서 찍었었고. 만약 내가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면 그런 신비감도 많이 떨어졌겠지. 그래서 촬영 장소도 주로 집이었고, 덕분에 아주 편하게 찍었다.(웃음)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이하, <완벽한 이웃>)의 정미희처럼 가벼운 역할도 생각보다 참 어울리는 것 같더라.
왜 어울리냐 하면, 내가 원래 그래! 나도 조울증인가 봐.(웃음) 난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땐 굉장히 유쾌하게 분위기를 리드하기도 하지만, 낯을 너무 가려서 불편한 자리에선 한 마디도 안 할 때도 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나도 그런 양면성이 있는 거 같더라.

그 동안 쌓여왔던 차갑고 무뚝뚝한 이미지를 전환시켜 줄 수 있는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새로운 면을 봐서 좋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그래도 김성령이란 배우는 뭔가 우아했으면 좋겠는데 너무 망가진 것 같다며 실망스럽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물론 내가 꼭 어떤 캐릭터의 작품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단지 어떤 작품이 들어왔을 때, 여러 가지 조건이나 상황이 맞으면 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못하는 것일 뿐이지.

시트콤에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종종 했다.
우울한 연기를 하면 아무래도 일상적인 생활이 많이 우울하다. 그런데 애들 키우는 입장에서 엄마가 우울해 있으면 마음에 걸리지. 그런데 시트콤을 하면 평상시에도 기분이 업될 테니까 일단 나한테 좋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트콤을 하고 싶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완벽한 이웃>이 시트콤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발랄한 연기를) 했잖아. 그런데 그것도 쉽지가 않더라. 그것도 연기니까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는 거다. 사실 시트콤은 그냥 신경 안 쓰고 하는 건 줄 알았거든. 그냥 재미있기만 하면 되는 건 줄 알았더니 그것도 그게 다가 아니더라. 그래서 이것도 어렵다는 걸 알았지. 시트콤을 내가 너무 만만하게 봤다.(웃음)

사실 05년 말에 했던 연극 ‘아트’때도 비슷한 캐릭터였다.
‘아트’때문에 내가 <완벽한 이웃>을 할 수 있었던 거다. 왜냐면 <완벽한 이웃>감독님이 ‘아트’ 연극을 보러 오셨다가 거기서 망가지는 연기를 보고 내가 저런 역할을 해도 괜찮겠다는 걸 머릿속에 담아두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감독님이 <완벽한 이웃>시나리오를 낼 때, 정미희는 아예 나한테 맞춰놓고 만들었단다.(웃음) 그래서 전체 캐스팅 1순위, 첫 번째였다. 그건 아예 내가 할 역할이니까 예약해놓고 그걸 준비하고 있으라고, 그래서 그걸 하게 된 거지.

연극이 기회가 된 셈인데 만약 그 전에 그런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만약 그런 역할이 들어왔다면.
부담스러울 수 있었을 거다. 사실 ‘아트’할 때도 내 역할이 그 역할이 아니었다. 처음에 나한테 그 희곡이 들어왔을 때, 난 피부과 의사 역할이었다. 늘 TV에서 하던 돈 많은 피부과 의사 역할이었는데, 내가 연극에서조차 이런 역할을 해야 하나 싶더라. 그래서 연출자하고 제작자하고 얘기했지. (조)혜련이가 문방구 주인이었고 내가 피부과 의사였는데, 우리 한번 바꿔보자, 그랬더니 혜련이도 흔쾌히 좋다고, 자기도 늘 웃기기만 했는데 연극에서는 뭔가 진지하게 해보고 싶다, 그래서 역할을 싹 다 바꾼 거다. 대본연습 하던 와중에. 그랬더니 오히려 반응이 더 좋았다. 혜련이도 더 좋아했었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캐릭터를 역전시키는 재미가 컸나 보다.
상당히. 연극에서는 충분히 그런 게 가능하니까. 사실 연극도 지금 굉장히 하고 싶은데......

이번에 조재현 씨가 기획한 ‘연극열전2’에 출연 제의도 승낙했었다고 하던데.
내가 하도 대학로를 잘 나가니까 이제는 대학로 사람들이 내가 연극을 하고 싶어하는 걸 안다. 내가 가끔 대학로 나가서 만나는 분들한테 연극하고 싶다고 말하면 ‘성령씨, 연극 할 수 있어요?’ 막 이러는 거다. 그리고 난 ‘그럼요. 저 연극 할 수 있어요’ 이러고. 그런 얘기가 들려 들려 조재현 선배한테까지 들어가서, ‘너 연극하고 싶으면 이번에 내가 이런 프로젝트를 하는데 같이 참여할래?’ 그래서 ‘당연히 참여하죠!’ 그래서 참여하겠다고 약속을 한 거다. 그렇게 약속했는데 내가 지금 드라마 찍고 있고, 이런 것 때문에 작품이 결정나진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제작발표회도 참석하고 그렇게 했지만 하게 될지 못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저 팀에 끼어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연극을 하는 게 중요하지, 굳이 지금 당장 저기에 끼는 게 중요한 건 아니라는 그런 생각도 들고. 왜냐면 이미 작품이 정해져 있고, 날짜가 정해져 있는 상황인데 연극은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어쨌든 고려해서 할 거다. 꼭 하긴 할 거다.

기대가 된다.
그럼 보러 오세요.(웃음)

2007년은 정말 바빠 보였다.
진짜 바빴다. <완벽한 이웃>이 2월 달에 방송 편성 예정이었다. 그런데 알겠지만 방송 편성이 계속 바뀐다. 2월 달에 들어간다는 작품이 기약 없이 미뤄진 상태에서 아침드라마(<걱정하지 마!>) 섭외가 들어왔고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완벽한 이웃>이 들어간다는 거다. 게다가 그 때 난 이미 <궁녀>를 찍고 있었고. <궁녀>와 미니시리즈와 일일 아침 드라마를 함께 준비했으니 삼사 개월 정도는 잠도 안 잤다고 보면 된다.

그 정도면 연기가 헷갈릴 정도 아닌가? 만약 하루에 세 촬영이 모두 들어가면 하루에 삼 인분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셈인데.(웃음)
나도 이건 큰일났다 싶었다. 그렇지만 나도 경험해보니까 알게 됐지만 사람이 닥치면 한다.(웃음) 그리고 다행인 건 캐릭터가 확실히 구분되는 덕분에 안 헷갈릴 수 있었고 오히려 더 좋았다. 너무 비슷한 역할이면 좀 그랬겠지만 확연하게 틀렸기 때문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때는 15년 만에 영화도 하고 미니시리즈에서 내가 좋아하는 역할이 들어왔고, 아침 드라마는 막 시작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집에서 뭐 먹냐고, 어떻게 저렇게 건강할 수가 있냐고 그러더라. 어떤 선배님도 ’너 뭐 먹니? 아직도 안 쓰러졌니?’(웃음) 이럴 정도로 난 정말 기운이 났고 더 재미있게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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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했던 걸 한번에 이룬다는 것이 좋았나 보다.
물론 이제 그런 게 바람직하진 않다. 사람이 마음은 있어도 체력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삼사 개월은 버텼지만 이게 육 개월이 넘어갔다면 뭔가 문제가 있었을 거다. 그렇게 여러 작품을 동시에 하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다만 내가 너무나 하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힘이 났나 보다.

사실 종종 작품에서 캐릭터를 위해 배우가 소비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배역을 채우는 게 중요할 뿐, 캐릭터를 염두에 둔 캐스팅은 아닌 경우가 있다. 그런데 확실히 캐릭터의 특성을 염두에 둔 이해서같은 역할은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배우에 대한 욕심이 있기 때문에. 사실 최근 촬영이 들어간 <일지매>란 드라마에서 내가 이준기 엄마다.(웃음) 처음엔 내가 어떻게 이준기 엄마야. 좀 너무한데, 그랬다가 충분히 이해하겠더라. 일지매가 그렇게 되기까지 과거로부터 단이라는 역할이 이야기 속 시발점의 중심에 딱 서있다. 초반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지. 그런 역할은 상관이 없다. 그리고 지금 찍는 <대왕 세종>에서도 김상경 씨와 박상민 씨가 내 아들로 나오는 윤영준 씨랑 비슷한 또래로 나오니까, 어떻게 보면, 어머, 김상경이 내 아들? 박상민이 내 아들? 이렇게 된다.(웃음) 물론 사극이니까 그런 게 가능하겠지. <주몽>에서 오연수 씨가 송일국 씨의 어머니를 해서 룰이 약간 깨지기도 했고. 그런데 촬영장에서 커다란 세 남자들이 나 앞에 딱 서는데, 내가 엄마라니 숨이 탁 막히면서 부담스럽지.(웃음) 이런 건 한 5년 뒤에나 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웃음)

아까 말한 것처럼 여러 작품을 하느라 그렇게 바빴는데 또 여러 편의 드라마를 동시에 하게 됐다.
9월 달까진 조금 정신 없이 바빴고, 10월, 11월에 조금 여유가 있었다. 12월부터는 <대왕 세종> 찍고 있고, <일지매>도 들어가고.

<뉴하트>에도 출연한다는 기사가 있던데.
<뉴하트>는 잘못된 거다. 그걸 다들 정정을 안 하네.

어쩐지 드라마 홈페이지를 가도 출연 정보를 찾아볼 수가 없더라. 그래서 이상했다.
물론 초반에 우리한테 제의가 있었지만 이미 드라마 두 편을 계약한 상태에서 도저히 시간이 안 될 것 같다고 했는데 거기에 출연한다는 기사가 이미 방송에 나갔더라. 그 뒤로 출연하냐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지. <뉴하트>가 반응이 좋은 건지, 어딜 가나 사람들한테 그 말을 들어서 그때마다, <뉴하트>는 아니거든요. 저 지금 다른 거 하고 있거든요.(웃음) 이렇게 맨날 얘기해야 한다. 지금 이응경 씨가 촬영하고 있는데 왜 그걸 정정하는 않는 거야. 다들 너무 게으른 거 아닌가?

나도 속았다.(웃음) 그런데 두 편의 드라마가 또 모두 사극이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됐다. 사극을 그냥 피하고 싶었는데 요즘은 워낙 사극 제작이 많으니까. 그런데 사실 <일지매>는 퓨전 사극이고, <대왕 세종>은 대하드라마다. 그리고 남자들 이야기가 많다 보니까 출연은 하지만 그렇게 씬이 많지는 않다.

어쨌든 사극에 많이 출연했던 만큼 일단 사극에 출연하게 되면 부담은 덜하겠다.
도움이 될 수 있겠지. 지금은 사극 현장에 가면 낯설지가 않다. 옛날에 왕비였나 봐.(웃음) 어떤 작품은 시작부터 부담을 갖게 되는데 사극은 기본적으로 내가 편하다. 사극의 어떤 감성들이 나하고 좀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드는 재미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이게 발판이 돼서 난 반드시 영화계에서 다시 일어서야 된다.(웃음)

시나리오도 많이 들어오지 않나?
전혀…….<궁녀>인터뷰할 때도 주변 사람들이 김성령 씨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반응이 굉장히 좋더라,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오시겠다, 이러는데 도대체 그 시나리오가 다 어디에 있을까?(웃음) 시나리오는 안 들어오던데, 왜 그럴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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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기다리면 좋은 소식 있을 거다.
그럴까? 주변에 소문 좀 내 줘.(웃음) 심지어 내가 <대왕 세종>을 안 하려고 했었다. 영화가 들어올 것이다. 내가 시간을 빼놔야 된다. 이렇게 나 혼자 김칫국 마시면서.(웃음) <일지매>는 어차피 하기로 한 거니까 그냥 하고, 대신 드라마 두 편하면 또 영화 하기 힘드니까 시간을 빼놓으려 그랬는데 전혀 들어올 기미가 없어서 그냥 <대왕 세종>을 해야겠더라.(웃음)

그런데 이렇게 연기와 가정 생활을 함께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자제분도 둘이나 되는데.
사실 아직은 어려서, 이번에 큰애가 초등학교 들어간다. 유치원생들은 그다지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없다. 유치원만 보내면 되니까. 이제부터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애들이 학교 다니면 엄마 역할도 크니까. 그래도 친정 어머니께서 집에서 도와주시고, 남편도 내가 일하는 걸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때문에 내가 일하는 것에 있어서 그다지 부담되는 건 없다. 그리고 애들도 너무 예쁘게 잘 자라줘서.

집안에서 상당히 배려를 해주나 보다.
그런 거 없으면 자기 일하기 정말 쉽지가 않지. 여자는 어디든 그럴 거다. 요즘은 남자들도 같이 살림한다고 하지만 두 가지 일을 한다는 게 쉽지 않지. 난 주위에 도와주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큰 행운이지.

여전히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점이 많이 기억되는 거 같다. 88년도에 있었던 일인데. 물론 어린 친구들은 많이 모르겠지만.
30대 초반 분들까지는 다 알겠지.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도에 미스코리아가 돼서 미스코리아 타이틀을 가지고 활동한 게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기억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래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더라.

그런데 그 당시에 비해서 지금은 미스코리아라는 타이틀의 사회적 지위가 많이 희석된 것 같다.
너무 볼거리가 많아졌기 때문이지. 그때만 해도 미스코리아 대회가 나라 행사처럼 온 가족이 다 보던 행사였으니까. 사실 어제가 미스코리아 송년회 행사의 날이었는데 이젠 나보고 회장을 맡으라는 거다. 회장할 때도 됐다고 그래서 그냥 됐거든, 아니라고 그랬지.(웃음) 근데 어제 보니까 올해 미스코리아 애들도 다 왔더라. 그런데 나도 누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더라.

그 당시엔 미스코리아 출신들이 방송계로 많이 진출하기도 했다. 그런 게 용이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사실 본인이 연기자가 된 것도 그런 케이스라고 본다.
정말 아주 어렸을 때, 굳이 따져서 얘길 하자면 그런 기억은 난다. 어렸을 때 토요명화가 보통 밤 열 시 열한 시에 했는데 엄마가 일찍 자라고 그러면 이불 속에서 자는 척하고 몰래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 당시에 외국 영화를 많이 했는데 뭘 안다고 앤소니 퀸 같은 외국영화배우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다녔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내 소극적인 성격상, 단 한번도 내가 연기를 한다거나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 직업을 가질 거라고 생각도 안 했지. 물론 미스코리아 역시 더더욱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의 뜻인지, 미스코리아를 통해서 나한테 이런 기회를 주더라. MC든, 연기든, 미스코리아가 되면 그때 당시엔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것이기 때문에 사실 미스코리아가 아니었으면 이런 기회가 없었겠지. 내 의지가 없었으니까. 주위 사람들은 내가 그런 걸 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하다가 그만 둘 것이다, 더군다나 결혼을 하면 안 할 것이다, 그랬는데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걸 보면 너무 신기하다고 그러더라.(웃음) 내가 그다지 끼는 없지만 우리 아버지를 닮아서 성실하다.(웃음) 성실한 거 하나로 밀고 나가는 거 같다.

그런데 그런 소극적인 성격에 어떻게 미스코리아 대회를 나가게 된 건가? 그것도 지금보다도 보수적이었던 그 시절에.
사실 우리 어머니께서 생활력이 좀 강하시다. 그런데 내가 맨날 멍청하게 있으니까,(웃음) 어떻게 하면 뭔가 만들 수 있을까, 했던 거지. 그런데 내가 리포터 같은 일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아나운서 시험을 보자니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엄마 친구분 중에 그 당시 굉장히 유명한 연예인들이 의상 협찬을 많이 해 입었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가 있었다. 그래서 엄마 생각에 그 분을 찾아가면 어떤 연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분의 샵에 찾아 갔지. 그런데 그 분이 나를 보자마자, 너는 미스코리아야, 그 말씀을 첫 마디에 하시더라. 내가 명동까지 나가서 미용실을 다닐 형편은 아니었는데, 나 따라와, 하더니 셰리 미용실을 딱 데려간 거다. 그래서 셰리에 갔더니 원장님이 수영복을 입혀보고 오늘부터 훈련 들어가자고 하더라.(웃음) 그때 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게 4월 28일인가가 미스 서울 예선이었는데 내가 4월 1일 날인가, 2일 날 거기 갔으니까 남들 몇 달 전부터 준비하는 대회를 20일 준비하고 나간 거다. 내가 만약 긴 시간이나 여유가 있었으면 고민하다가 안 나갔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정신 없이 막 하다 보니까 나가게 된 거지. 그 때 기도도 했었다. 하느님, 이게 내 길이 아니면 지금 당장 내가 이 길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라고. 그런데 그 당시에 셰리 미용실에서 출전했던 모든 후보들이 다 떨어지고 나만 붙은 거다. 그렇게 나만 단독 후보로 나갔는데 진이 된 거지. 셰리에서 첫 번째로 진이 나온 거에요. 그 전엔 다 마샬 미용실이었거든.(웃음) 그 다음부터 셰리가 줄곧 1위를 했다. 나 다음엔 오현경 씨가 됐고, 아무튼 내가 스타트였다.(웃음)

영화에서 보면 갑작스럽게 주인공의 인생이 확 달라지는 순간이 있지 않나. 마치 그런 것 같다.
그 때 당시엔 여러 가지로 큰 축복을 많이 받았던 거지.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한 순간에 너무 큰 것들이 다가오니까 자만했던 부분도 있었고. 그래서 내가 그러잖아. 누구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데 나는 위에서부터 내려간다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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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시작했고, 그 뒤로 첫 데뷔작을 통해 신인상까지 휩쓸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일들이 쉽게 주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었지. 내가 너무 철이 없었다. 근데 이제 나이도 들고, 때로는 어떤 위기감들도 느꼈었고, 내 스스로 나 자신을 돌아보니까 너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 시점이 있었다. 그 시점에서 내가 뭔가 정신을 차리게 됐지. 그래서 이젠 나름대로, 많이는 아니지만 배우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부도 하고, 조금씩 트레이닝도 받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다.

혹시 연기자가 아닌 가정 주부로서의 평범한 삶을 생각해본 적도 있었나?
사실 나는 그렇게 살려고 부산으로 시집을 간 거다. 결혼하고 그냥 살림하는 것도 괜찮다고, 그게 편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우스운 거다. 내가 한참 잘 나가서 내 의지대로 일을 그만 뒀으면 미련이 없을 텐데, 대체적으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나를 외면하는 분위기로 가더라. 미스코리아 후광이 없어지고,(웃음) 물론 이제 나도 노력을 안 한 부분도 있지만. 그랬을 때 뭔가 이렇게 마음속으로 솟는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더 화가 나더라. 그래서 정말 이를 악물고 했던 작품이 <왕과 비>였다.

폐비 윤씨 역할을 했던?
맞다.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을 때, 또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그런 역할이 들어왔다.(웃음) 정말 폐비 윤씨는 무조건 열심히 했던 연기였다. 정말 연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내가 지금도 그때만큼 이렇게 열심히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그게 나한테 전환점이 됐다.

최근에 <왕과 나>에서도 폐비 윤씨가 나온다.
구혜선 씨가 하는?

본인이 했던 연기를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는 것도 묘한 느낌이 들 것 같다. 게다가 구혜선 씨의 폐비 윤씨 캐릭터는 본인이 연기한 것과 다르게 묘사되기도 하고.
일단 연출자의 의도와 맞아야 되는 거지. 배우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것도 있지만 전체적인 극의 흐름이란 게 있으니까. 내가 나 혼자만 새로운 캐릭터를 만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니까. 나도 나름대로 그 당시에 나이 많이 드신 선배님들께서 그 전에도 폐비 윤씨의 역할은 누군가가 많이 했었지만 그 중에 네가 제일 잘 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혜선 씨가 그렇게 하니까 새롭지. 본인 이미지에 맞게 캐릭터를 새롭게 만든 거 같다. 만약 구혜선 씨가 그 선한 얼굴로 괜히 기존의 폐비 윤씨의 이미지를 살려내려고 눈 독하게 뜨고, 말 독하게 한다면 어울렸을까? 서로 마이너스지. 감독님이 정확하게 구혜선이라는 배우한테 맞는 캐릭터를 만들어주신 거지. 난 그런 시도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출자들은 모험하지 않고 쉽게 가려고 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그런 새로운 의도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배우가 좋은 연출자를 만나는 것도 복이다.
하지만 좋은 연출자도 본인과 안 맞으면 안 된다. 좋은 배우도 자기하고 잘 맞는 연출자, 자기하고 잘 맞는 역할과 작품, 이렇게 잘 맞아 떨어졌을 때 좋은 거 같다.

경영대학원 마케팅과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1년 됐다. 이제 3학기 들어간다.

또 무슨 욕심이 생긴 건가? 하고 싶은 게 참 많다.
그러니까. 배우는 거에 대한 욕심이 정말 계속 생긴다. 나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젊었을 때는 시간적 여유가 많다고 생각해서 너무 나태했었고, 이젠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급해져서.(웃음) 난 지금도 배우고 싶은 게 많다. 승마도 배우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시간적 여유가 없다. 마케팅도 너무 재미있다. 그래서 너무 즐겁게 배우고 있다.

친분 있는 배우 분들 중에서 드라마에서만 뵐 수 있는 분들도 있을 텐데, 그런 분들 중에서도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있지 않나?
당연하지. 다 하고 싶어하신다. 배우라면 난 꼭 TV만 한다, 난 꼭 영화만 한다, 이런 건 없는 거 같다. 어느 배우나 다 욕심이 있기 때문에 연극도 하고 싶고, 내가 빛이 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든 다 하고 싶지. 그런데 이제 본인한테 얼마나 잘 맞는지, 내가 얼마나 잘 살수 있는지, 그런 상황적인 면들을 고려하니까 딱 아귀가 안 맞아서 그런 거지. 영화 제의도 많이 받는 연기자도 있지만 상황이 늘 맞지가 않은 경우도 있고.

어쨌든 한해 동안 참 많은 시도를 했다. 드라마를 통해 이미지 변신도 했고,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그리고 제각각 좋은 평가까지 얻었다. 한 해를 돌아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사람은 늘 감사해야 하지만 그 감사함이 어떤 부담감이 되기도 한다. 내년엔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 그리고 영화는 또 왜 안 들어올까? <궁녀>가 반응 좋았다는데 왜 안 들어오는 거지?(웃음) 이런 마음도 있고. 물론 나는 천천히, 어차피 오래 할 거니까 급하게 생각 안 한다. 이러면서 집에 가서는 또 고민한다.(웃음)

지금까지 오래 기다린 만큼 좋은 일 많았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또 좋은 소식 있을 거다.
봄이 되면 좋은 소식이 오려나.(웃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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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김강우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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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잘 빠지는 편 아닌가?
놀면 금방 찐다.

예민한 성격처럼 보인다.
맞다. 예민해서 일을 하거나 신경을 많이 쓰면 살이 금방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출연작들이 개봉됐다. 올해 초중반엔 조급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생각은 안 가졌다. 만약 내가 생각하기에 작품의 질이 떨어지거나 메리트가 없어서 개봉이 연기됐다면 불안했었을 텐데, 그런 건 없었기 때문에.

올해 개봉한 작품들은 사실 하나같이 개봉이 미뤄진 작품들이었다.
작년에 찍었거나 찍기 시작했던 영화가 다 올해 개봉을 했는데, 글쎄, 뭐 그건 내가 의도했던 것도 아니니까. (웃음) 작년부터 올해까지 영화 시장이 힘들었던 것도 있고, 그래서 개봉이 미뤄진 탓이 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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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같은 경우는 원작에 대한 기대도 어느 정도 있었을 거라 짐작되고, <타짜>의 흥행을 지켜본 입장에서도 어떤 예감이 있었을 법하다. 나름대로 기대될만한 작품의 개봉이 미뤄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
아무래도 인지도가 있는 작품이다 보니, 우리가 어떤 노력을 더한다고 해도 한편으론 부담이 있더라. 원작이 워낙 많이 팔렸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일간지에 연재까지 됐던 만화이기 때문에 기대되는 한편으론 부담감이 생기지. 기존에 작품을 좋아했던 팬이 많은데 우리가 그에 대한 기대치만큼 할 수 있을까라는 부담감. 그리고 우리가 <식객>을 찍기엔 다소 적게 느껴지는 예산을 가지고 촬영에 들어갔기 때문에 보여지는 면들이 좀 미흡하지 않을까라는 나름대로의 고민들은 있었다.

결과적으로 흥행이 됐다. 더욱 기쁜 일이 된 셈이다.
흥행하면 당연히 배우들은 기분 좋다.

앞서 올해 개봉한 두 편의 영화들이 나름의 보답을 해준 것 같다. <경의선>으로 토리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식객>은 흥행배우의 타이틀을 줬으니까.
찍을 때 마음고생을 했던 작품들이 보답해준 것 같다. 물론 흥행이나 수상 같은 건 내가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어쩌면 적은 예산 때문에 주목 받지 못할 수 있었던 영화나 저 예산 영화였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했던 것도 있는 것 같고.

예전에 인터뷰했던 기사에서 언제쯤 기회가 오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봤다. 올해 그 기회가 왔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식객>에 캐스팅될 때도 난 아무것도 없었다. 메인으로 주인공을 맡았던 것도 전작인 <경의선>밖에 없었고, <가면>도 <식객>촬영 중에 캐스팅됐으니까 어떻게 보면 아무 것도 없는 나를 써줬다는 자체부터 운이 좋았던 거다. 그게 나한테 기회였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래도 지금까지 뭔가를 해왔기 때문에 내가 노력해서 잡은 기회일 수도 있겠지. 그냥 해나가는 과정 안에서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란 생각을 하긴 했는데……글쎄, 잘 모르겠다. 이게 그 기회인지. 물론 나를 더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기회인 건 맞는 것 같다.

데뷔작이었던 <해안선>을 비롯해서 차기작이었던 <실미도>까지 초기 출연작 두 편이 군대와 관련된 영화였다.
내가 아무것도 없는 신인배우로서 영화를 고를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두 작품이 공개 오디션이란 기회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신인 배우들을 공개 오디션으로 뽑는 영화이기에 나한테는 그나마 기회가 있는 거였다. 처음 두 작품 이후로 하게 된 드라마 <나는 달린다>도 그런 식이었다. 보통 드라마는 신인들의 공개 오디션을 보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달린다>는 신인이건 기존 배우건 망라하고 그냥 공개 오디션을 통해 실력으로 캐스팅하는 특별한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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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되는 신분이고, 동시에 자신의 결정권이 없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원숙하게 자리잡지 못한 청년의 과도기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경의선>이전까지는 위태로운 청년의 내면을 드러내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아마도 초반에 출연했던 작품들의 영향력이 아닐까 싶더라.
우연히 하게 된 <나는 달린다>의 이미지가 굉장히 독특했던 것도 있었다. 치기 어리지만 자기 의지대로 가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듯한. 그 이후로 <태풍 태양>도 그랬고, 그런 이미지들이 쌓여오게 되더라.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서른이란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느낌이다. 물론 동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웃음) 캐릭터를 통해 드러낸 이미지의 응축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이를 먹어도 눈동자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건 특히 남자배우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한데, 소년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야 나이를 먹었어도 예전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려고 노력한다. 사람은 모든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감정 표현을 가장 잘 한다. 그런데 교육 과정과 사회 생활을 거치면서 감정을 하나씩 없애버리게 되고 점점 나이 들면서 감정은 단순해져 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난 그 느낌만큼은 버리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까지의 캐릭터들이 청년기의 불안함이었다면 <가면>의 조경윤이 지닌 불안함은 어른의 것이었던 것 같다. 이전의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불안을 충돌로서 극복했지만 조경윤은 도피하려고 했으니까. 그 불안으로부터 달아나서 안주해버리려는 태도는 어른의 습성에 가깝다고 본다. 그래서 조경윤은 지금까지의 캐릭터 중 어른에 가장 가깝게 느껴지더라.
내 생각에도 <가면>이라는 영화가 나한테 주는 의미는 나에게 소년과 청년의 중간 사이에서 성년으로 뛰어넘는 과정이다 싶었다. 또한 그 역할을 하게 된 것 같았고. <식객>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까지 내 이미지에 풋풋한 모습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가면>을 통해 그에 반(反)하는 이미지를 가하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얻을 수 있을 거다. 나 역시도 그걸 어느 정도 염두에 뒀으니까.

그 동안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표정을 토대로 연기한다는 느낌이었다면 <가면>은 새로운 표정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가면>이 스릴러 장르라서 힘들었다. 일단 그렇게 느꼈다면 내겐 성공인 것 같다. 왜냐면 캐릭터 자체가 어떤 과거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현재에 지니고 있는 어떤 생각을 눈을 통해서 얘기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면>이전의 영화들은 다른 상대 배역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캐릭터를 구축해나가는 것이었다면, 조경윤은 내 스스로의 눈으로 모든 걸 말해야 되는 캐릭터라서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러한 것들이 읽히게끔 만들어야 했다. 동시에 오히려 그걸 어느 정도 숨기기도 해야 했고. 그런 것들이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었다.

<가면>의 엔딩은 출연작 중 <실미도>와 함께 가장 극단적이었다.
속이 후련했다. 왜냐면 조경윤이란 캐릭터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운명에 이끌려서 그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하지만 결국은 그 상황으로 다시 가서 자기 의지로 풀어버리니까. 어떻게 보면 <태풍태양>과도 비슷하게 뛰어들지만 그건 결국 도피였다. 결국 모기라는 아이는 결말을 짓지 못한 거다. 그게 바로 청춘, 청년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할 수 있고, 내 스스로에게도. 하지만 <가면>은 다른 이상향을 찾아서 결말을 지어버린다. 이젠 자기 의지대로 삶과 죽음을 가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는 거지. 그냥 내 개인적으로도. 물론 그것도 운명일 수 있지만 마지막에 악셀을 당기는 건 자기 의지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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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만으로 보면 언해피엔딩이지만 인물들의 뉘앙스는 해피엔딩처럼 보였다.
둘은 행복한 거지.

어쩌면 지금까지 출연작 중 가장 절절하면서도 유일한 로맨스 영화 아니었을까?
맞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조금 특별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라는 점이다. 둘은 그렇게 손가락질 받지 않는 세상으로 떠나는 거지. 둘만 있으면 그게 남자건 여자건 뭐가 중요하겠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는데.

하지만 그게 너무 특별한 사랑이라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이야기를 접했을 때도 본인에게도 어떤 당혹감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올해로 서른이니까 아직 나이가 그렇게 많지도 않지만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쌓인 고정관념이라는 게 무시할 수 없더라.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조금 충격 받긴 했다. 배우는 ‘내가 만일’이라는 개념으로 연기를 시작하게 되는데 절대로 이해가 안가는 경우가 있으니까 고민하게 됐고, 그 지점에 대해서 감독님과도 제일 많이 얘기했다.

결과적으로 작품을 선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뭐였나?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이건 새로운 소재이고 내가 연기할 새로운 꺼리가 있는 캐릭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본인을 납득시키는 과정도 필요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더라. 남자, 여자라는 성별을 떠나서 본능적으로 끌리는, 인생 단 한번의 대상인 거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매몰차게 버리고 갔더라도 나이를 먹고 다시 우연히 만났을 때, 상황이 바뀐 것에도 불구하고 다시 끌리는 거지. 그래서 본능적으로 끌리는 운명에 따라가게 됐지만 또 그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찾아간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도 결국 자기도 모르던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다. 그리고 그걸 감추려고 더 남성적인 직업인 형사를 택하게 됐고, 마초적으로 살아갔던 게 결국은 이중적인 모습인 거다. 그리고 그게 비로소 조경윤의 가면이라는 거지.

그런 과정이 본인에게 극복이었나, 포용이었나?
도전의 대상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모습 중에서 하나를 꺼내 부풀려놓은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가면>은 나한테, 어떤 남자도 대부분 지니지 못한 요소를 만들어내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도전의 대상이고, 처음에는 두려웠었다.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그런데 그만큼 성취감도 있었다. <식객>같은 경우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이미지에서 플러스 마이너스였을 뿐이지만 <가면>은 지금까지 해왔던 그런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가는 거니까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더라. 이걸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하나, 내가 잘 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이런 두려움이 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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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이중성에 염두를 뒀을 것 같다. 이전까지의 캐릭터들은 직설적으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에 비해 조경윤은 자신을 감춘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게 어른들인 거 같다. 연령이 낮은 친구들, 어린 친구들은 자신을 솔직 담백하게 드러낸다. 흔히 대표적인 예로 정치인들만 봐도 너무 이중적이지 않나. 그건 정치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회 생활을 겪은 모든 성인들이 결국은 그렇게 이중적으로 변해갈 수 밖에 없는 거 같다. 자기의 약점들을 감추려고 들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겉모습으로 드러내는 거지. 그래서 센 척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약한 것처럼. 조경윤도 마찬가지다. 그도 성인인 거지. 그렇지만 본연의 순수함이 남아있었던 거다.

그런 의미에서 <경의선>의 만수는 청년에서 성인으로 가는 길목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 왜냐면 자기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기까지만 하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것뿐이지, 그걸 생계수단으로 이용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와 자꾸 부딪히게 되는데 만수는 악몽을 꾸면서까지 생계 수단에 담근 발을 빼지 못한다.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다. 그리고 난 <식객>의 성찬도 초반에서 후반으로 가는 동안 완벽한 성인으로 성장했다라고 가정하고 싶다. 결국은 자기의 목표를 이룬 거고, 새롭게 꿈을 실현한 거니까. 그러나 그전의 모기는 그렇지 못했다.

조경윤은 다른 의미에서도 이중적이다. 평소엔 껄렁껄렁하게 곧잘 장난도 치다가 내면적인 혼란 속에서 진지함도 엿보이고.
나 역시도 그렇다. 사실 모두 다 그런 면들이 있지 않나? 양아치 같은 모습도, (웃음) 진짜 한없이 진지해질 때도.

아웃사이더의 느낌이 드는 캐릭터가 많았다. 그게 어쩌면 본인의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게 내 성향인 거 같다. 주류를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그런 성향. 솔직히 잘 하고 싶다, 나도.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것들이 보여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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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밖으로 드러내는 걸 많이 꺼려하나 보다.
난 남들이 내 사생활을 알거나 나에 대해서 알려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 가족들한테도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얘기하지 않는다. 한 2~30년쯤 후,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모르거나 관심 없어도 상관없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캐릭터로서 남는 거다. 물론 내가 만약 그때까지 스무 편의 영화를 했다면 스무 편의 영화를 다 본 관객은 별로 없겠지. 많아야 세네 편일 텐데, 그 영화 속의 이미지가 각자에게 남는 이미지였으면 됐다. <식객>의 성찬이 각자의 머릿속에 남아준다면 그건 배우로서 정말 해피한 삶이 될 거다.

베드씬 같은 경우도 처음이었다. 긴장되지 않던가?
긴장되지. 사람이 가장 민망한 게 자기 알몸을 보여주는 순간인데. 배우들이 연기의 일부분이라고 얘기했을 때, 이해하지 못했는데 많이 수긍하게 됐다. 물론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 베드씬이 들어간다면 그건 얘기를 해봐야겠지만 <가면>에서 베드씬은 초반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장치이기 때문에, 이건 당연히 가야 하는 씬이니까 긴장은 됐지만 수긍하게 됐지.

기자시사 이후, 포털 사이트에서 <가면>을 검색해보면 그 베드씬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어있더라.
좀 부담스럽다. 하지만 <가면>은 참 홍보하기 애매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기자 분들한테도 숨겨야 할 부분이 많고, 일반 관객에게도 공개를 감춰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건 그냥 반사적으로 다른 걸 찾게 된 상황에서 베드씬이라는 게 튀어나온 거 같다. 그래서 그거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진 않겠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연기했던 캐릭터들이 나름대로 본인과 잘 어울렸던 건 기존에 자신의 이미지를 특별하게 각인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나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가 없다는 게 좋고, 계속 그렇게 살고 싶다. 만약에 내가 대중들에게 많은 노출이 되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고정적인 이미지가 생겼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배우가 관객들에게 캐릭터에 대한 이입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이 영화를 보러 온다면 날 보러 오는 관객은 소수다. 결국은 영화 속의 캐릭터를 보러 오는 건데, 내 대중적인 이미지로 인해서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떨어뜨린다면 그건 분명 그 배우의 책임이라고 본다.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면을 많이 드러내긴 싫다. 어떻게 보면 저만의 전략이지.

그런 면에 있어서 같은 소속사(나무 액터스)에 속한 김태희 같은 배우가 반대의 케이스로 느껴진다. CF를 통해 쌓아온 스타 이미지가 작품 내의 캐릭터적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몰입도에 있어서 떨어지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하는 거다. 그건 본인도 굉장히 속상할 거다.

사실 <가면>은 불쾌한 영화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건 영화의 적나라한 태도 때문일 수도 있고 어떤 혐오감을 드러내는 시선을 배치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을 인식하는 관객의 무의식적인 고정관념을 자극하는 탓일 수도 있다.
어떤 사실이 분명히 있는데 모두가 그것을 소외시하고, 꺼내지 마, 덮어, 들추지 마, 하는 것이 있다. 분명 우리나라에서도 백년 전이나 이백년 전에 존재했던 사실이다. 예전에 발견된 오래된 화첩에도 동성애가 묘사된 그림이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신문에서 봤다. 하지만 유교 문화에서는 더더욱 터부시됐겠지. 외국은 그런 성향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는 정도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초기 단계인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런 문제는 우리보다 어린 세대들이 봤을 땐, 별거 아니라고 느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걸 받아들일까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해가 지날수록, '이게 뭐가 세?' 라는 반응이 나오는 게 더 무서운 것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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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은 현재 우리 사회가 소수의 취향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시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들과 다른, 평범하지 않은 특별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씹히기 좋은 가십거리가 분명히 된다. 게다가 성경의 기독교 사상에도 그에 대해서 죄를 치러야 된다고 명시되어 있고, 더군다나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했던 우리나라는 더더욱 그렇겠지. 물론 그에 대해서는 나도 확실히 말하긴 힘들다. 외국은 지금 동성결혼을 허용하느냐, 마느냐까지 발전이 됐지만 나도 역시 대한민국 남자고, 30년이란 세월을 그 틀에서 살다 보니까 그걸 깨는 게 쉽진 않을 것 같다.

데뷔 초기에 인터뷰했던 내용들을 보면 자신만만한 포부가 많이 드러났던 것 같다. 아마도 그건 그만큼 긴장이 돼서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게 아니었나 싶더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자신감밖에 없었던 거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거라도 없으면 나의 장점이 뭐라고 말할 게 아무 것도 없는 거다. 그러면 주문처럼 외우는 거지. 촬영이 들어가면 나는 최고다라는 주문을 외우는 거다. 그 기사를 보면서도 자신감을 되찾는 거지. 지금도 그 때 마음 그대로 똑같다. 지금 내가 연기가 나아져봤자 얼마나 나아졌겠어. 그냥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다시 도전하게 되는 거지. 그래, 할 수 있어, 이렇게. 나한테 모두 다 없는 면들이거나 있는 면들일 수도 있다. 다만 자신감이 없다면 내가 몰랐던 그런 면들을 꺼내놓지 못한다. 일종의 주문이지. 나에 대한 주문.

결국은 그것들이 자신을 위한 기록이 되는 셈이다. 마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일기장 같은.
난 인터뷰는 최대한 솔직하게 하려 한다. 가끔 어떤 분들은 자신을 꾸민다는 느낌을 많이 받게 된다. 사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냥 인터뷰는 그 당시 자신의 생각이 잘 묻어나는 게 가장 중요한 거라 생각한다. 물론 내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지금은 예전에 비해 어느 정도 안정감이 생긴 것 같다.
그냥 대처하는 법이 늘었을 뿐이지, 항상 두렵다. 작품 할 때마다 항상 무섭고, 항상 대본이 옆에 없으면 잠을 못 잔다. 정신적으로 굉장히 디테일하게 가야 하는 편이다. 항상 갖춰져 있어야 하고, 준비되어 있어야 되고, 긴장해야 되고. 그래서 작품 하면 살이 쭉쭉 빠지게 된다. 그래서 살이 안 찌냐는 질문도 받게 되는 거겠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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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올해 초에 촬영 현장에서 봤을 때보다 지금은 살이 쪘다.
그때는 의도적으로 음식도 안 먹었었고, 더 예민해져 있었고. <식객>끝나고 7kg 정도를 뺐으니까.

그런 예민한 성격은 <경의선>의 만수를 많이 닮았다.
거기에 내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 초 단위로 살아가면서 굉장히 괴로워하는, 그런 면이 있었지.

연출을 배우기 위해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고 들었는데 결국 배우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배우라는 삶을 굳히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 4년 동안 정신 없이 연극을 하고 나니까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거밖에 없더라. 결국 이제 사회에 슬슬 나가야 되는데,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었던 거지. (웃음)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어쩌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제 내 용돈은 내가 벌어야 될 나이가 돼버렸는데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이고, 남자라면 이해되지 않을까.

용접공이나 요리사, 지하철 기관사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쉽게 묘사되지 않는 전문직업에 종사하는 인물을 종종 연기했다. 그런 분야의 연기를 위해서는 나름대로 그 직업에 대한 탐구도 선행됐어야 했을 텐데.
탐구보단 먼저 중요한 게 이해더라. 그래서 나는 어느 한 곳에 안 꽂히려고 노력한다. 그러니까 어떤 걸 너무 좋아하지도 않고, 너무 싫어하지도 않고. 솔직히 난 특별한 취미도 없다. 예전엔 난 왜 그럴까 그랬는데, 이젠 오히려 그게 좋더라. 어디든 쉽게 동화할 수 있다.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지도 않고, 누가 좋지도 않고, 누가 싫지도 않고. 배우는 어떤 편에 들어야 되는지, 또 어떤 직업군을 갖게 될 지 모르는 거 아닌가.

<세잎클로버>나 <야수와 미녀>같은 작품을 선택했던 건 상업적인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고 종종 피력했던 걸 봤다. 아무래도 한때 배우로서 지명도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올해는 그와 반대로 흥행 배우의 타이틀을 얻게 됐다. 어떤가?
물론 그것도 나한테 중요한 과정이었고, 그 덕분에 여러 가지 느낌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건 나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다 내 작품이니까. 모두 그 당시 내 모습이다. 다만 조급할수록 그런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는 걸 느꼈지. 그때는 그게 나한테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저것 고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선택 받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마음가짐을 조금 더 길게 가져가야 한다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

사실 초반에 출연했던 작품들이 대중에게 나름대로 어필됐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출연작이 흥행에 실패하고 캐릭터에 대한 비판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있었을 것 같다.
색깔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다. 나한테 어떤 옷이 맞는 건지, 나도 나에 대해서 몰랐으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배우를 그만 두기 전까진 계속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 같다. 지금에 와서 그것들이 안 맞는 옷을 입었던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또 아닌 거 같다. 또 한번 그런 과정들이 다시 반복될 것 같다. 지금 작품이 흥행됐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옷이라고 인식하는 숫자가 많은 것뿐이지, 또 다시 계속 순환될 것 같다. 그리고 난 또 계속 찾아나갈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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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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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한예슬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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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미니홈피에 ‘Falling slowly’ 가사를 포스팅 해놓았던데.
좋았다. 최근에 봤는데 좀 꽂혀서, 내가 원래 아이리쉬 음악 밴드를 좋아한다.

나도 좋아한다. 그래서 미니홈피를 자세히 볼 생각은 없었는데 음악을 듣다 보니까.
자세히 보게 됐구나!

<원스>OST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데미안 라이스(Damien Rice)까지 나오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 (웃음)
그렇구나. 나랑 음악 취향이 비슷한 것 같다.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음악을 좋아하나 보다.
그렇지만 일렉트로니카 계열은 말고, 조금 더 약간 기타음이 들어간 음악이 좋다.

쟁글거리는 기타팝 부류의?
맞다. 그런데 음악 취향이 아주 좋으시네. (웃음)

사실 옛날엔 약간 과격한 음악을 좋아했었다.
나도, 얼터너티브(alternative) 락 같은.

나도 한때 그런지(grunge) 풍의 음악 많이 들었다. 너바나(Nirvana)는 지금도 좋아하고.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

시애틀 그런지(Seattle Grunge)!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나이 먹으니까 좀 서정적인 쪽으로 가는 거 같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는 게 막 느껴지는데. (웃음)
조금 더 가면 완전 올드팝으로 빠질 지도 모른다.

아, 누가 보면 음악 매거진인 줄 알겠네. (웃음) 그런데 본인의 히트곡도 있지 않나. ‘그댄 달라요’같은. 난 사실 그 노래를 군대에서 줄기차게 들었다.
진짜? (웃음)

고참들이 너무 좋아해서 말이지. (웃음) 그런데 음악 매거진 인터뷰도 아니고, 이젠 음악 얘긴 그만. (웃음) 미니홈피를 보고 얼마 전, 청룡영화제 사건에 관련된 스타일리스트 분의 글을 보게 됐고, 본인의 코멘트도 읽게 됐다. 사실 말로만 들었었는데.
아, 그 해프닝에 대해서?

그에 대해서 감동적이라는 말이 많더라. 어떻게 보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덕분에 그런 후일담 같은 사연까지 노출된 것인데 사실 사생활이 노출된다는 게 흔히 말하는 공인으로서 꺼려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자신의 이미지를 상품화하는 배우라면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서 대중들과 간접적으로 만난다 해도 결국 직접적인 대상은 나인 셈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삶과 사생활의 선을 긋는다는 건 진짜 힘든 일이다. 공인으로서 활동하는 연예인이나 배우들은 다 짐을 짊어지고 가야 되는 게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런 대중들의 관심이 자신의 커리어와 이어지는 것이니까.사적인 대중들의 관심도 없다면 그건 무관심일 테고, 그렇다면 커리어를 지켜나갈 수 없는 거다. 물론 너무 관심을 갖고 사랑하다 보면 아무래도 그 선을 조금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당연히 짊어가야 할 짐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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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야심만만에 출연했는지 인터넷에 기사가 도배됐더라. 내용으로 봐선 상당히 솔직하게 대답을 한 것 같던데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리낌이 별로 없나 보다.
물론 그런 면에 대해서 굉장히 조심해야 된다는 건 안다. 배우로서 너무 많이 드러내는 것도 바람직하거나 똑똑한 대처법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쇼 프로그램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친근함을 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인상이 대중들에게 있어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토픽(topic)이라면 굳이 드러내도 상관없겠다고 느껴졌다. 물론 내가 사생활을 드러낸다고 해서 남자친구와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몇 년을 사귀었는지, 그런 아주 사적인 내용들을 얘기한 것까진 아니니까, 그냥 내 일상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개인의 세계관 같은?
맞다. 대중들한테 예전에 있었던 해프닝 정도를 얘기하는 것까지 크게 숨겨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너무 숨기는 것도 좀 그렇잖아.

그런 솔직함이 어떻게 보면 한예슬의 숨겨진 매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은 그런 단면이 잘 드러난 캐릭터라고 생각된다. 확실히 <환상의 커플>은 한예슬이란 배우에게 캐릭터라는 정체성과 환상을 동시에 만들어 준 작품인 것 같다.
배우들이 좋은 역할을 많이 맡고 싶어하는 건 대중들이 그만큼 공감해주기 때문이란 필요성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역할을 소화하는데 있어서는 그런 색깔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한테는 정말 둘도 없는 애정이 가는 역할이었지. 나도 그 순간만은 나상실로 살면서 행복했던 거 같다.

배우로서 그런 캐릭터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그런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났다는 건 좋은 운이라고 생각한다.
축복이지. (웃음)

사실 나상실은 한예슬이란 배우에게 타이밍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용의주도 미스신>은 나상실의 연장선상처럼 보인다. 이미지 굳히기 같아 보이기도 하고.
나상실처럼 <용의주도 미스신>의 신미수도 겉으론 못마땅한 구석이 많아 보일 수 있다. 좀 도도하고, 용의주도하다는 면이 어떻게 보면 꼴불견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때문에 불쾌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나상실이 갖고 있었던 어떤 순수함처럼 신미수에게도 그런 매력이 있다. 나름대로 신미수로 하여금 그렇게 용의주도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의 상처가 있고, 내면에 여린 마음도 있고,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굉장히 귀엽고, 상큼하고, 그런데 한편으론 덤벙거리기도 하는 부족한 여자다. 사실 <용의주도 미스신>의 영화적 포인트는 신미수가 많은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이다. 그게 재미있는 건 이 여자가 용의주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너무 완벽하게 용의주도하면 뻔하지 않나. 이 여자는 용의주도하려고 무진장 노력하지만 다 어설픈 거다. 그리고 이제 관객들이 봤을 때 그런 신미수의 어리버리함으로 빚어지는 에피소드 속에서 재미를 느끼는 거지.

결국 나상실처럼 신미수도 양면성이 있는 캐릭터다. 어쩌다 보니 그런 캐릭터를 계속 연기하게 된다.
내가 그런 걸 좋아한다. 뭔가 약간 특별한 색깔이 있는 역할을.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맡은 역할들을 보면 굉장히 다 정상적이지 않은 거 같더라. (웃음) 알다시피 정상적인 멜로라던가, 그런 역할을 한번도 해본 적 없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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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작부터가 정상은 아니었다. (웃음)
<논스톱4>에서부터 그랬지. 한 색깔로 꾸준히 지속되는 역할보단 복합적인 성향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재미있다.

사람들이 나상실에 열광했던 건 뒷면이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론 도도하고 새침하지만 뒤로는 소심하고 때론 천박스럽기도 하다. (웃음) 자장면을 게걸스럽게 먹기도 하고. 그런데 그게 한예슬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로 어필되는 거 같기도 하다. 화려한 스타와 평범한 일반인의 입체감을 동시에 형성한다고 할까.
맞다. 나 정말 평범하다. (웃음) 실제 생활도 정말 평범하고.

그런데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건 직업상 요하기 때문에, 당신도 만약에 배우 생활을 한다면 많은 변화가 있을 거다. 사람은 직업에 따라서 풍기는 아우라가 틀려지는 것 같다. 그렇지 않나? 선생님은 선생님 같고, 사기꾼은 사기꾼처럼 생겼고, 음악가는 음악가처럼 아티스틱(artistic)하게 생겼고. 이렇게 직업에 따라서 풍겨지는 이미지가 틀려지는 거 같다. 당신도 계속 일하다 보면 더욱 기자스러워지는 면이 있을 거다. 배우도 신인 때는 배우로서 2% 부족한 느낌이 난다. 하지만 커리어를 쌓아가다 보면 나중에 언젠가 배우다운 아우라가 나올 때가 있겠지. 나도 그렇게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점점 배우 같은 이미지가 조금씩 소화되는 거 같다. 하지만 내가 학교 생활하던 학생이었다면 지금 같은 이런 느낌은 안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 외모가 어디 가겠나? (웃음) 외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혹시 한국에서 느꼈던 문화적 차이는 없었나?
난 나만의 성격이 있다. 나만의 색, 나만의 스타일이 있다. 얘길 할 때도 그래서 솔직하게 표현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게 신인이었었을 때는 너무 솔직하고 당당한 것에 대해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쟤는 뭘 믿고 당당할까, 건방지다, 아니면 도전적이라서 기분 나쁘다. 이렇게 오해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요즘에는 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오랫동안 일하다 보니까 이젠 사람들이 그걸 다르게 해석한다. 쟤는 프로 정신이 있는 것 같다, 당당하면서도 노력하는 모습이 예뻐 보인다. 그런 식의 변화가 있었는데 그렇게 위치에 따라서 사람들의 시선이 천차만별인 거 같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그런 점들을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내가 미국에서 받은 교육 방식은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합리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일을 할 땐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그거 해!’ 이런다고 하는 게 아니다. 왜 그걸 해야 하는지 설명해주고, 들어야 하고, 그 일을 해야 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한 후에 일을 시작하는 거지. 그런데 신인 때는 내가 꼭 ‘왜 이걸 해야 해요?’ 이렇게 캐묻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었던 거 같다.

체계에 대한 하위적 일방성을 강요하는 문화가 강한 게 사실이다.
한국은 항상 어른들 말씀하실 때는 대답 짧게 하거나 자제하고, 그저 조용조용히 있는 게 미덕이다. 하지만 미국은 항상 주위에 반대의견을 낼 수 있도록 분위기가 열려있다. 그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있고,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있고, 선배와 후배의 관계가 있다. 미국에서는 좀 낯선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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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동안에는 가족이 있는 미국에 머무른다고 들었다. 그런 면에서 충분히 자신의 개인 생활을 하고 배우로서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아지트처럼 보인다.
맞다. 한국에 있다 보면 배우들이 자유자재로 활동을 못하게 되고, 심지어 집에서 잘 나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내가 외국으로 더더욱 나가려는 이유는 배우라면 자꾸 감성 훈련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생을 통해서,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서, 내가 기뻐하는 것, 내가 행복해하는 것, 내가 슬퍼하는 것, 내가 외로워하는 것, 이런 걸 충분히 만끽하면서 인생에 대해서 자꾸 배워나가야 된다. 왜냐면 나중에 배우로서 성숙한 역할을 표현해야 할 때, 인생을 모른다면 그걸 표현할 수 없지 않을까. 단세포적으로 아주 일차원적인 역할이나 어린 아이들이 하는, 아이돌 역할만 할 수 없잖아. 그렇지 않기 위해선 자꾸자꾸 커져야 한다. 그런 인생 공부를 하기 위해선 내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넓은 영역을 갖고 시야를 넓히는 게 중요한 거 같다. 물론 그게 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난 직접 느끼는 걸 더 좋아한다. 사람들 관찰하는 것도 좋아하고.

생각보다 감성적인 성향이 짙어 보인다.
감성적인 면도 강하고, 또 직업상 감성적인 면도 훈련해줘야 되는 것이고.

상당히 말을 조리 있게 한다. 평소에 대화를 즐기는 편인가?
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사람들과 말을 많이 하진 않는데, 다만 내 생각을 잘 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표현하는 건 좋다.

그렇다면 외로움을 많이 느낄 것 같다.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건 아니니까. 더욱이 지금처럼 한국에 와서 지내는 경우엔 더더욱.
외로움 잘 탔지. 예전에 20대 초반 때, 한국에 와서 혼자 활동하고 그럴 때는 아무래도 어리니까 굉장히 외로웠는데 그게 하나의 훈련이 된 거 같다. 지금은 그런 외로움을 어떤 일을 하거나 작품을 완성하고, 그에 대한 성취감으로 충족시킨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역할을 맡고 일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친구 삼아 사는 거 같다.

한국에 와서 좋은 사람은 많이 만난 것 같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다.

이번에 스타일리스트와 관련된 일도 결국 사람간의 문제였다. 어쨌든 관계를 돈독히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발전적인 결과가 된 셈인데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강한 것 같다. 자기 컨트롤에 능하다고 할까.
그것도 항상 잘했던 건 아니다. 사회 생활하면서 훈련을 통해서 이뤄진 거지. 처음부터 자기 컨트롤 잘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거다. 얼마만큼 훈련하고, 얼마만큼 자제하고,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틀려진다. 난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한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훈련을 성공적으로 한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 생활 속에서 성공한다는 게 쉽지 않겠지. 그 반대로 자기 컨트롤이 안 된다는 건, 가장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노력한 만큼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들은 많아질 텐데 그것들을 감당할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면 상당히 곤란하다. 컨트롤할 수 있는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행운이 오거나 큰 일들이 주어진다 해도 모두 흩어져버리고 오히려 내가 그것들에게 삼켜지는 꼴이 될 테니까. 때론 갑자기 큰 관심을 얻었다가 그걸 힘들어해서 망가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성공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고 계시는 대부분의 분들은 그런 절차를 성공적으로 밟았다고 생각된다. 자기 어떤 컨트롤이지. 참아야 될 건 참아야 되고, 인내해야 될 건 인내해야 되고, 넘겨야 할 건 넘겨야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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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같은 경우도 배우로서 하나의 사생활인데, 그것이 종종 인내해야 할 것처럼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 본인도 TV에서 그에 대한 질문도 받기도 했다.
연애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겠지. 때로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데이트도 할 수 있는 건데, 단지 함부로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위치가 있고,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사실 진실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힘든 일이다. 난 연애를 대충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그냥 기다리는 것뿐이지, 난 배우니까 아직 연애하면 안돼, 이런 건 아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왜 못하겠어. 그렇지만 내가 일을 하면서 연애를 같이 감행할 경우엔 그에 대한 어떤 충분한 가치가 있어야 된다. 쓸 때없이 그냥 연애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

사실 연애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거지! 특히 배우의 감수성에 있어서 사랑은 더더욱 중요한 거다.

<용의주도 미스신>은 출연작 중 가장 많은 남자를 만난 케이스고, 앞으로도 이런 경우는 드물 것 같다.
그렇겠지. 그런데 난 신미수란 여성을 정말 이해할 수 있었다. 신미수는 굉장히 사랑 받고 싶어하는 여성이지만 그 사랑을 찾지 못하는 거다. 사람이 정말 먹고 싶은 건 없어도 배가 고프면 먹어야 된다. 이 여자도 외롭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했지만 사랑을 만나고 싶은 거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여러 남자들을 만나면서 자기의 사랑을 합리화시키고 싶은 거다. 내가 이 남자를 왜 만나야 되지? 그렇게 사랑이 없으면서도 사랑해야 되는 이유를 찾는 거지. 그래, 얘는 재력이 있잖아, 모든 사람들이 재력을 좋아하고 또 존경해주잖아,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랑 연애를 해도 정당성이 있는 거다. 그리고 사법고시 고시생이랑 연애할 때도, 장래성이 있는 예비 검사니까 날 지켜줄 수 있을 거야, 그런 조건도 사랑을 합리화시키는 거지.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면 신미수가 처음부터 갈등할 이유는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성을 만날 때 조건을 따진다는 게 굳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하고, 이 남자를 사랑해야 될 어떤 정당성을,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거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 중,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태를 풍자한 캐릭터 같다. 요즘 애정이나 사랑을 조건시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감정을 이성으로 해결하려 든다.
특히 한국 사회는 결혼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은 거 같다. 외국 같은 경우는 개인과 개인의 결혼이지만, 한국 같은 경우는 집안과 집안의 결혼이라 해야 맞는 거 같다. 한국은 시어머니, 시아버지, 오누이, 며느리, 친정 아버지, 친정 어머니, 이렇게 챙겨야 할 가족 시스템(system)이 워낙 많기 때문에 개개인이 결혼해서 행복하자고 해서 쉽게 행복해질 수 없다. 왜냐면 모든 가족이 다 융화가 되야 하니까.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조건을 생각하게 되는 거 같다. 왜냐면 나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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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맞아, 그런 거. 혼수 문제 때문에 얽히고 설키다 보면 또 서로에게 자꾸 섭섭한 게 생긴다. 아무리 우리 엄마가 그랬다고 해도 우리 엄마한테 너 이럴 수 있어? 이런 식으로 감정상하다 보면 그렇게 되겠지.

<환상의 커플> 이후로 공백이 있었다. 사실 배우로서 상종가인 시기에 기회가 상당했을 텐데, 오히려 몸을 추슬렀다는 게 다소 의외였다.
난 오만 방자하기 싫었다. <환상의 커플>로 사랑을 받게 돼서 캐스팅 섭외가 많아졌고 자칫하면 그릇된 초이스(choice)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발자국 물러서서 지금 내가 있는 정확한 위치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정확한 위치에서 나한테 가장 걸맞은 역할을 하고 싶었다. 왜냐면 내가 <환상의 커플>로 대중들에게 심어주었던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대중들에게. 그리고 거품에 쉽게 휩싸이지 않는 그런 배우로 남고 싶었다.

결국 자기 보호를 위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관된 이미지의 캐릭터를 연기하다 보면 그런 이미지로 각인될 위험도 크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배우로서 어떤 이미지를 각인시킨다는 건 일종의 모험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지금 한 색깔을 고집하는 배우들 중에서도 훌륭한 배우들이 많다. 로버트 드니로나 알 파치노도 있고, 미쉘 파이퍼도 그렇고. 훌륭한 배우들은 자기만의 색깔을 뚜렷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배우들도 많지만 대부분은 그런 것 같다. 또한 역할의 변신에 따라서 몰입도가 각각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만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난 단지 나만의 카리스마로 여러 역할을 소화해보고 싶은 거다. 그래서 그 어떤 일정한 캐릭터에 갇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대중들이 날 볼 땐 한예슬의 색깔을 보겠지만 그것도 다른 인터프릿(interpret), 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색깔로 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당한 자기 신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난 대중들이 날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에 묶여서 배우 생활을 하는데 좌지우지되고 싶지 않다. 난 배우로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그러면서 대중들과 어떤 영감이 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고 싶다?
교감하고 싶은 거지. 그리고 난 다음 작품에서 다른 역할을 했을 때, 굳이 변신이라고 하지 않아도 그 역할로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전에 일단 난 배우이기 때문에 그건 내가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름의 태풍>같은 시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극적인 캐릭터도 언젠가 다시 도전해야 할 산이 아닐까.
좋다. 어떤 하이라이트나 악센트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원스>같은 영화라면. 정말 물 흐르듯이, 그런 잔잔한 역할도 너무 좋다. 어떤 역할에 대한 복합적인 느낌보다는 그 영화 자체가 주는 복합적인 느낌도 좋다.

단순히 어떤 두드러지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두드러져 보이기 위한 일부처럼 느껴질 수 있어도 좋다는 말인가?
그 영화는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르잖아. 왜 두 사람이 맺어지지 않았는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잔잔하게 흘러가 버리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영화. 그런 것들이 너무 좋다. 그런데 솔직히 영화는 영화마다 너무 매력이 많다. 그렇지 않나? 물론 드라마도 좋지만 드라마는 아무래도 영화보다 완성도가 떨어진다. 영화라는 장르는 나로 하여금 다른 세계에 살 수 있게끔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배우 활동을 함에 있어서 외로울 틈이 없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다양한 삶을 인생에서 여러 번 사는 것도 바쁜 거지.

마치 여행을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는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랄까. 마치 운명처럼 느껴진다.
난 솔직히 처음엔 연기가 싫었다. 내가 왜 연기를 해야 되는지 몰랐는데, 그냥 끌리는 거 있잖아.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 수 없게 끌리는, 그래서 난 처음에 연기할 땐 정말 울면서 연기했다. (웃음) 정말 싫은데, 그걸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이해가 안가는 거다. 그래서 엄마한테 매일 전화해서, 엄마, 나 미국 갈 거야, 미국 갈 거야. 그랬었다.

뭐가 그렇게 싫던가?
모르겠다. (웃음) 그게 왜, 신 내리면 무당이 하기 싫어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잖아. 그런 걸 운명이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나 같은 경우는 일단 한 작품이 끝났고 지금은 한창 영화 홍보에 바쁘지만 솔직히 6개월 정도 쉬면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할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벌써 다음 작품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푹 빠져버린 거 같다.
헤어날 수 없는 거 같다. (웃음) 내가 정말 너무 연예인 생활이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다고 해도, 이미 정신적으로 헤어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은 일과 사랑에도 중독되기 쉽다던데, 그렇게 일에 중독됐나 보다.
그런 가봐. 어떡해~. (웃음) 내가 예전에 인터뷰 할 땐, 항상 내 개인적인 삶과 일의 밸런스를 맞춰서 행복한 여자로 살 수 있도록 정말 균형 있는 삶을 유지하며 살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이 얼마나 좋으면 내 개인적인 행복을 희생해서라도 하고 싶을 만큼 이게 더 좋은 거다. 그건 위험한 거지, 솔직히. 그건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선을 넘는 순간인데, 그만큼 일이 좋아진다는 건 정말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그 선에 가까이 가고 있구나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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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연기에 대한 매력을 많이 느끼게 된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삶과 일반적인 삶에서 줄 수 없는, 그런 세계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너무 좋은 거 같다. 더 이상 그것만큼 내게 삶의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도 없는 거 같다. 너무 따분해지는 거 있잖아. 일상 생활이. 항상 다른 역할로 살다가 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매일 하는 식사와 그냥 주위 사람들과의 뻔한 대화와 일반 사람들과의 생활이 내게 더 이상 새롭지가 않은 거지.

그건 좀 위험한 것 같다.
예술가들 중 보통 왜 저렇게 살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분들이 많잖아. 이해가 갈 거 같더라. 왜 저렇게밖에 살 수 없는 것인지. 예를 들어 그림 그리시는 화가 분들 중 아예 사회와 교리를 끊고 정말 그림만 그리시는 분들 있잖아. 왜 저렇게 살까 하면 그분은 그 세상에서 하는 일이 즐거운 거겠지. 그런 게 있는 거 같다. 나도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선을......(웃음)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기에 용의주도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어떤 기사에서 읽었는데, 용의주도의 의미를 사전으로 해석했더라. 용의주도란 매사에 신중하게 꼼꼼히 따져서 일을 그르침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뜻으로 해석한다면 용의주도하다는 건 필요한 거 같다. 그릇됨이 없이, 그르침이 없이. 하지만 일반 생활에서 해석되는 용의주도함이란 어떻게 보면 잔머리 굴리고, 어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뭐든지 한다는 듯한 뉘앙스가 있다. 그런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항상 진실되지 않은 행동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득이라고 생각될지언정, 그것도 진실이 아니라 가상으로 만들어낸 어떤 거품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이 진실로 이뤄낸 모든 일들은 그 일들이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진실되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현실에서 용의주도한 삶이란 거짓 같은 인생에 가깝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본인은 용의주도한 편인가?
난 별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용의주도했다면 <환상의 커플> 끝나고 내게 들어왔던 CF에 모두 계약하고, (웃음) 그 다음에 섭외됐던 대작들을 모두 섭렵하고, 쉬지 않고 활동했을 거다. 나는 차근차근 수위를 높여가고 싶다.

배우가 된 뒤로 부모님의 반응은 어떤가?
처음에 저희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반대하셨다. 굉장히 보수적이시다. 사실은 내가 데뷔를 더 일찍 할 수 있었다. 길거리 캐스팅으로 먼저 손을 뻗는 경우 있잖아. 그래서 일찍 시작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 때문에 못했다. 그래도 일단 일을 시작하게 돼서 이젠 인정해주신다. 어머니 같은 경우는 굉장히 적극적으로 날 도와주시는 편이시다. 저희 어머니는 내가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고 꿈을 펼치라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시는 분이시다. 아마도 내가 그만 둔다고 그러면 어머니께서, ‘너 미쳤니? 왜 그 재능을 썩혀?’ (웃음) 그러면서 날 오히려 더 밀어 넣으실 거다.

<환상의 커플>로 많은 관심을 얻은 후, 그런 관심으로부터 다시 멀어질 수 있다는 부담감은 없었나?
난 그렇게 쉽게 사라지진 않을 거다. 밟아도 밟아도 뿌리 뻗는 잡초처럼. (웃음) 난 내가 잠시 얼굴을 안 비춘다고 대중들한테 잊혀지는 그런 배우였다면 이렇게 연기를 꾸준히 할 수 있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난 자신감 있기 때문에, 그리고 대중들한테 보여줄 게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고, 대중들이 내 모습을 보길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잡초치곤 너무 예쁜 거 같은데. (웃음)
밟아도 밟아도 라는 말이 너무 웃기지 않아? (웃음)

미니홈피에서 인상적인 글을 하나 읽었다. 난 우주인이며 이중인격자다. 하지만 난 나를 사랑해주는 지구인들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계속 이 별에 눌러 살아야지. 물론 거기서 지구인은 팬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지. 그건 내가 신인 때, 미니홈피 막 시작하고 썼던 글이다. 이제 삭제할 때도 됐는데, 그냥 그때 그렇게 내가 적어놓은 글을 보면 그 생각들이 너무 귀엽다. 나의 세계관을 풍자해서 적은 글이라고 보면 된다. 나의 세계관은 비록 다른 사람과 틀리지만 나의 이런 점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고맙다는 걸 재미있게 풀어 쓴 거다.

지워버리긴 아까운 거 같다.
그럴까?

그리고 역시나 우주인 치곤 너무 예쁘다. (웃음) 그리고 오랫동안 눌러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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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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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엄지원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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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개봉일인데 기분은 어떤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아, 오늘 개봉일이네? 무섭다.’ 막 이랬었다. (웃음)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다른 느낌이라도 있나?
내 전작의 어떤 배우나 감독님들 중 ‘우리는 잘될 거야. 우리는 몇만은 돌파해야지’ 이런 얘기를 하던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스카우트> 팀은 흥행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한다. ‘이건 몇 만 정도 갈 거야’ 이런 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저 사람들이 안 되면 어쩌려고 저런 얘기를 하나 싶더라. (웃음) 난 그런 분위기가 처음이라 낯설다.

하지만 출연작 중에서도 어느 정도 흥행성이 점쳐졌던 작품들이 있지 않았나?
그래도 그 전에 같이 했던 사람들 중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같이 나눈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근데 이 사람들은 왜 이러지? (웃음)

요즘에 질리게 듣는 이야기겠지만 나도 묻겠다. 야구 좋아하나?
맞다. 되게 많이 듣는다. 일단 잘 모르겠다. 경기 규칙과 야구는 볼 줄 아는데, 막 좋아해서 챙겨보진 않는다. 남자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만큼 정도는 아닌 거 같다.

개인적으로 양준혁 씨와 많이 친하다고 들었다.
많이 친하진 않은데. (웃음)

시구라도 하러 갔다가 친해졌나?
그건 아니고, 양준혁씨가 대구 분이고, 나도 대구 사람이다 보니까 그래서 인연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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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과거에 선동열, 이종범 광팬이었다. 두 분이 일본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야구 경기 다 챙겨봤었다.
어디로 가셨더라? 주니치였나?

생각보다 잘 아는 편이다.
그런 기본적인 건 안다. (웃음)

<스카우트>덕분에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혹시 <스카우트> 이전에 광주에 가본 적 있나?
예전에 <똥개>찍었을 당시 곽경택 감독님과 같이 광주영화제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처음으로 갔었다.

<스카우트>촬영으로 오랜만에 다시 찾으니 어떻던가?
이번에 <스카우트> 땐 세트 장에서만 촬영하고 숙소 주변에서만 머물러서 잘 몰랐다. 맨 처음에 갔을 때는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너무 좋았다. (웃음) 나에게 광주의 첫인상을 말하라고 한다면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는 거다.

그런데 사투리를 어찌나 잘 쓰던지.
아, 나 잘했나?

사투리도 사투리지만 그보다도 그 어정쩡한 표준어가 더욱 그럴 듯 했다.
(박수를 치면서)응~~! 그거! (웃음))

너무 유연하더라. 연습 좀 했을 것 같던데.
경상도 사람들은 서울에 와서도 그냥 경상도 사투리를 계속 쓰는 사람들이 많지만 광주나 전라도 사람들은 말씨가 완전히 달라져서 출신이 어딘지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정말 많더라. 예를 들면 김현석 감독님도 그렇고, 박철민 선배님도 그렇고. 세영이 같은 경우도 광주에서 왔다는 걸 티 안내고 싶어하고, 빨리 적응하고 싶어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서울에서 오래 살지 않은 이상, 빨리 적응하고 싶어도 쉽게 되는 건 아니니까 흉내를 내는 거에 불과했겠지. 그렇게 어색하게 표준어를 쓰다가도 본래 사투리가 드러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런 걸 혼자서 익혔을 리는 없고, 전라도 사투리에 능한 누군가가 도와줬을 것 같은데.
우리 매니저가 전라도 출신이다. 그래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랑께요~, 그랑께요~, 이게 맞아? 막 이러면서, (웃음) 저는~요, 이게 맞아? 아니면 저~는요, 이게 맞아? 이런 미묘한 것까지 하나하나 다 물어봤다.

<스카우트>에서도 노래를 부르더라. <극장전>에서도 했었는데, 솔직히 잘하는 편은 아니다.
잘 하지! (웃음) 왜~? 나는 나름대로 잘 한다고 생각하고 부른 건데.

그래도 박치는 아니더라. 고음 처리가 불안할 뿐. (웃음) 최근 박선주 씨한테 보컬 트레이닝도 받았다고 들었다.
그냥 내가 샤우팅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서, 물론 연기할 때 그런 캐릭터를 아직 한번도 못 해봐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스스로가 큰 소리를 낸다는 게 잘 안될 것 같다는 막연한 부담감이 있었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소리지를 일은 거의 없다, 정말 화가 나도. 하지만 배우라면 어찌됐건 앞으로 그런 게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샤우팅하는 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거든. 물론 노래 때문에 그런 걸 하게 된 건 아니고. 질러보려면 많이 질러봐야 잘 하게 되니까 그랬던 거 같다.

말할 때 비음이 많이 나온다. 덕분에 유약하고 섬세한 인상을 준다. 게다가 소리를 지를 때는 마치 울먹이는 느낌도 나더라. 마치 유리 같은 이미지랄까.
어차피 영화 속에서 보여준 캐릭터를 통해서 배우들의 이미지는 유추되는 거니까. 분명히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인 만큼 맞는 부분들도 있겠지만 내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앞으로 내가 하게 될 것에 대비시킨다면 정말 단면적인 캐릭터만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엄지원이 갖고 있는 10개 중에서 3개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 평들에 대해서도 별로 괘념치는 않는 거 같다. 오히려 난 원래 일상에서는 기운이 좀 있고, 평상시 말투는 애 같은 편이다. (웃음) 그런데 평상시에도 막 정확하게 발음하려 하면 힘든 것 같다. 그래서 일이 아닌 평상시에는 그냥 편한 대로 말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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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스카우트> 출연을 고사했었다고 들었다.
그 때는 시나리오상의 세영이 굉장히 단면적이고, 그렇게 비중도 많지 않았다. 꼭 그런 거 보내주고서 배우한테 잘 해달라 그러더라. (웃음) 처음부터 보여줄 게 많은 걸 써서 보여달라고 하면 하겠는데 써놓은 것도 없으면서 왜 자꾸 내가 스스로 해야 되는 것만 많은 책을 왜 자꾸 보내?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안 하려고 했었다.

시나리오가 맘에 안 들어서?
세영 자체만 그랬다. 시나리오 자체는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세영이가 좀 맘에 안 들어서 안 한다고 했었다. 그러다 내가 꿈을 꿨는데 영화가 너무 잘 되는 꿈을 꿔서 사양했던 세영이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김현석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했었다. (웃음)

현장 분위기가 재미있었을 것 같다.
너무 좋았다!

난 비광시 때 완전 자지러졌었다. (웃음)
김현석 감독님께서 현장에서 직접 쓰셨지. 그 때 거의 다들 쓰러졌었다. 그 전엔 시나리오상에 ‘비광’이라고 대충 있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추후에 쓰겠다고 하셔서 우리도 실질적인 내용은 본 촬영 때 감독님께서 쓰신 뒤에야 알게 됐다. 그렇게 재미있는 일들이 영화 촬영 동안 참 많았다.

노래까지 부르자는 아이디어는 누가?
감독님. 술 먹다가 우리 노래해요, 막 이래서. (웃음)

의외로 임창정 씨가 빠졌더라. 가수 경력이 있는 사람이 빠지다니 의외다.
그게 아무래도 곤태(박철민)의 비광시이고, 가사 자체가 호창(임창정)의 얘기는 아니니까. 이제 시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노래로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창정 오빠가 부를 수는 없고, 박철민 선배는 노래를 자기는 너무 하고 싶지만 노래를 너무 못해서 못하겠다고 하셨는데 감독님이 그럼 내가 노래할게, 형은 랩해, 지원씨가 코러스하면 되잖아, 그렇게 된 거지. 정확히 말하면 권태를 위해서 우리가 다같이 만든 테마송이다. (웃음)

그런데 권태처럼 여자에게 헌신을 다하는 비광같은 남자야말로 진정 여자에게 좋은 남자 아닐까?
그건 그 남자에게 너무 슬픈 거 같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여자는 늘 도움을 받아서 잘 해주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거니까. 그렇지만 그 남자는 여자가 잘 해주는 것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거잖아. 잘해주는 기쁨이라도 얻으려고. 남자 입장에서는 순애보적일지 몰라도, 여자로서 봤을 때는 불쌍한 거 같아. 안타깝지.

결혼 생각은 아직 없나?
없다.

배우로서의 욕심 때문에?
꼭 그런 건 아닌데, 결혼은 별로 (잠시 생각하다가) 그다지 하고 싶다는 생각해 본적은 없는 거 같아요.

이상형을 아직 못 만난 탓일까?
그런가 보다. (웃음)

세영은 순수한 여자다. 그리고 그런 순수함이 사회적인 불합리에 저항하는 에너지의 기반이 돼서 결국 운동권이란 행동으로 보여주는 여자다. 세영이란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나?
감독님께서 저에게 연기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신 건 거의 없지만 딱 한마디 하신 건 운동권 학생이라고 너무 운동권 학생처럼 연기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원래 세영이가 시나리오 자체엔 대사도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 현장에서 해나가야 되는 캐릭터라서 그런 부탁을 한 거 같다. 어떻게 보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면을 세게 표현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나도 세영이가 그런 의미의 강함보다 순수함과 연약함의 의미로 강한 것이 영화적 의미가 맞겠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간에 세영이가 10년이 지난 뒤에 좀 까칠해지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사람은 쉽게 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연기하고 싶었던 대학 시절의 세영이는 좀 더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였거든. 사람은 쉽게 본질이 변하지 않으니까, 그런 백치 같은 구석도 좀 남아있으면서 정신이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넘어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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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발랄한 캐릭터는 <똥개>이후로 처음이고, 닭살 커플 연기도 처음이었다.
재미있었다.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았나? (웃음) 너무 잘 맞는 거 같아, 나랑.

그 동안의 연기를 염두에 두자면 본인에게도 색다른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중은 날 잘 모르지만 나는 날 안다. 사실 그런 연기가 내겐 자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잘 할 수 있는 연기였던 거 같아서 별 생각 없이 쉽게 했던 거 같다. 다만 말한 것처럼 전작들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엄지원이란 배우가 저런 연기를 하면서 스스로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르지. 사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쩌면 김현석 감독이 그런 계기를 마련해준 셈 아닐까?
(정색하며)어! 그건 아닌 거 같아! (웃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전작들의 연기들이 내가 배우로서 가져야 할 어떤 조건들을 충족시켜줬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 지녀야 할 깊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요소들, 그런 것들이 내 스스로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전작들을 선택하게 된 것 같다. <스카우트>같은 연기에 대해서는 스스로 자신이 있었고 언제든지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안 했던 거뿐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순차적으로 보는 거니까 할 수 있는데 안 한 건지, 못한 건지 잘 모를 뿐이다. 김현석 감독님도 사실 나를 실제로 만나보곤 너무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성격 때문에. 그랬으니 감독님도 아마 내가 그걸 잘할 줄 모르고 캐스팅 하신 거겠지? (웃음)

그 말대로라면 스스로에게 자신 없는 연기부터 먼저 밟아나간 셈이다.
물론 <똥개>는 자신 있었지만, <주홍글씨>같은 경우는 정말 자신 없었다. 정말 스스로도 진짜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의 연기였으니까, 그런 면에서 자신이 없었던 거 같다. <극장전>은 정말 기회가 좋아서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 같고,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작품인 거 같다. 그리고 나서 만약 <가을로>를 선택하지 않고 좀 더 빨리 <스카우트>같은 작품을 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비슷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계속 맡아서 그렇게 보이는 면이 강한 것 같다.

연민을 부르는 캐릭터가 많았다. 그래서 영화마다 한번 이상씩은 우는 씬이 끼어있는 것 같더라. 평소에도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인가?
평소에도 잘 우는 편이다. 영화 속 눈물 연기도 정말 슬픈 감정이 전해져서 우는 건데, 사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안 슬프면 어떡해야 할까라는 스트레스가 있다. 어떤 감정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서 나에겐 안 슬플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똑 같은 코드로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그 인물이 직접 되기 전까지는 대본을 보면서도 울어야 되는 장면이 있으면 이거 할 때 안 슬프면 어떡해야 할까라는 스트레스가 있다. 물론 가짜로 울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실제로 본인은 대학 시절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지금이랑 똑 같은 성격이었다.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극장전>하던 시기에 어쩌다가 한 번 쭉 보게 됐는데, 그 때 나도 되게 깜짝 놀랐었다. 지금이랑 성격이 똑같고 생각하는 것도 되게 비슷했더라. 그래서 깜짝 놀랐었다. 이제 또 그 시기에 비해서 시간이 다시 흘렀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본질은 크게 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가정과 사회 생활을 겪고 세상을 살면서 좀 더 성숙해지거나 깊어지는 건 있지만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어떤 특성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대학시절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세영과도 비슷한 것 같다.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캐릭터니까.
비슷한 거 같다. 그래서인지 세영이 좀 연기하기가 굉장히 쉬웠나 보다. 너무 쉽게 촬영했으니까.

그럼 가장 힘들게 연기했다고 생각되는 캐릭터가 있나?
캐릭터에서 오는 무게감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냥 캐릭터에 시달림을 받았던 건 <주홍글씨>와 <가을로>였던 거 같다. 스스로는 그저 캐릭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가을로>같은 경우는 그래도 여행하는 기분이라 즐거웠을 것 같은데.
초반에는 그랬지만 나중에는 점점 길어지면서 고통스러웠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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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점에서?
한겨울에도 많이 찍었는데 사실 너무 추웠다. 막 칼바람을 맞으면서 가을인 것처럼 연기를 해야 되고, 그렇게 계절씬이 좀 길어지면서 힘들었던 거 같다. 그런데 오히려 요즘에 가을이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 아마도 <가을로> 촬영할 때는 가을의 풍광들에 대해서 많이 못 느끼고 무심히 지나갔었는데 이제서야 눈이 트인 걸 발견하게 된 거다. 그래서 지금 이 가을에 많이 느끼고 깨닫게 되는 거 같다. 결국 요즘 그 영화가 나에게 이런 선물을 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임창정 씨나 박철민 씨처럼 개그 캐릭터에 능한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그냥 재미있었다. 뭔가 풀어져있는 사람들과 연기하는 게. 물론 그렇다고 내가 풀어져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배우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 솔직히 내가 그런 연기 스타일에 호감을 보이는 취향은 아닌 거 같다. 그러니까 영화를 좋아하는 거나, 보는 거나, 해석하는 거나. 그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신선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아니면 혹시 5.18을 소재로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화려한 휴가>처럼 직접적인 건 아니지만 <스카우트>도 5.18에 관련된 이야기라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민감한 대사들도 있었고.
전혀 없었다. 내 생각엔 <화려한 휴가>가 그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소시민들의 이야기라면 <스카우트>는 그런 시대상 속에 평범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감독님도 그냥 그렇게 주문하셨고, 그래서 오히려 그런 부담 같은 게 없었던 거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영화에서 이렇게 됐다는 게 밝혀졌을 때 더 울림이 있는 거 같다. 작정하고 하는 것보단 그랬는데 이렇더라는 게 더 깊이 있게 다가올 수 있는 것도 그런 지점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땐 광주사람들조차 선동열이 누구냐고 하는 시절이었다. 이는 그들이 불과 며칠 뒤, 5.18이라는 무시무시한 참극을 맞이할 것이란 예감조차 못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그런데 세영이 호창에게 종종 광주를 떠나라고 재촉한 건 그런 예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세영은 그 상황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세영 자체는 영화 속에서 그런 걸 예감하고 가장 먼저 발 빠르게 행동하는 인물인 건 사실이다. 왜냐면 어쨌던 간에 전쟁으로 치면 최전방이랄까. 가장 가깝게 정보를 접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호창처럼 전혀 모르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고. 사실 내가 그 시절을 직접 겪었던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라던가 그런 걸 많이 찾아봤다. 그렇지만 어떤 개인적인 느낌 같은 걸 연기에 많이 반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연기에 임했다.

개인적으로 <스카우트>에서 가장 맘에 드는 장면을 꼽는다면?
과거 회상 장면에서 다시 현재로 넘어오는 씬. YMCA 사무실에 세영과 호창이 따로따로 앉아서 적막함이 흐르던 그 장면이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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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조실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호창과 주고 받는 대사 뒤에 순간적으로 세영이 머금던 미소가 아이러니했다. 그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의 속마음을 교감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 상황의 대사는 현장에서 김현석 감독님께서 갑자기 만들어 주신 거다. 원래 창정 오빠가 나한테 하는 대사도, 내가 창정 오빠한테 하는 대사도 시나리오에 없었고 호창이가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러 서울에서 왔다는 게 밝혀지면 그냥 취조실을 나가고, 세영이만 남겨지는 거였다. 그런데 김현석 감독님이 이런 대사를 해보는 게 어떨까라고 창정 오빠한테 제안했고, 창정 오빠가 그럼 세영이한테 한마디 하면 세영이도 한마디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해서 결국 나도 그렇게 대사를 하자고 동의했고 그렇게 현장에서 추가된 부분이다. 그냥 난 그 상황에서 서로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있음을 전달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 장면도 되게 좋아한다. (웃음)

평소에 외출은 자주 하시는 편인가?
외출?

<극장전>처럼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떨까 궁금했다.
그냥 혼자 잘 다니고, 알아보는 사람들 있으면 반갑게 인사하고 그런다. 그런 부분은 영실이와 비슷한 거 같다. (웃음)

영화에서 촬영했던 장소를 다시 가본 적 있나?
의도해서 찾아가진 않지만 어쩌다가 지나가게 될 때는 기분이 남다르지.

배우는 게 많다던데, 욕심이 많은 거 같다.
기본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에 투자하는 거다. 사실 배우들이 촬영을 안 할 때는 시간이 많다. 그런데 바쁠 때는 또 너무 바쁘기 때문에 뭔가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사람으로서 뭔가 발전적인 욕망이 커지는 거 같다. 그래서 그냥 하나씩 하게 되는 거 같다.

최근에 우정출연이나 특별출연도 많이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라도?
굳이 안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웃음)

어떻게 보면 배우로서 발을 넓히기 위한 어떤 전략 때문은 아닐까?
(고개를 흔들면서) 에이~! <기담>은 제작자이신 도로시 장소정 대표님이 저랑 너무나 친한 언니 사이고, 창립 작품이라서 제가 기꺼이 참여한 거고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같은 경우는 워낙 화제작이고 내가 참여해서 나쁠 이유가 전혀 없는 작품이지 않나. 특별 출연이라 씬이 별로 없지만 김지운 감독님께서 부탁하시고 특별히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까 하게 된 거다.

선동열이나 이종범은 야구팬에겐 전설 같은 존재다. 배우로서 본인에게도 그런 전설 같은 존재가 있다면?
많지. (웃음) 한국에서는 이미숙 선배님 좋아하고, 이자벨 위페르도 좋아한다. 역할 모델 롤이 된다고 생각하는 배우는 꽤 있는 거 같아요. 메릴 스트립도 좋아하고.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케이트 블란쳇도 좋아한다. 가끔씩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모르면 속상하더라. (웃음)

본인은 배우로서 혹은 인생에서 몇회정도 왔다고 생각하나?
3회~!

왜 3회인가?
일단 시작은 했으니까 1회는 아니고, 그냥 스스로 생각할 때 아직 크게 만족할만한 정도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니까 5회는 아닌 것 같고, 말년도 아니니까 8~9회는 더 아니고, 3회 정도 되지 않을까? (웃음)

그럼 공격 중? 수비 중?
수비할건 없는 거 같은데. (웃음)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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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

이안 감독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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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의 한국 개봉에 대한 소감이 궁금하다.
한국은 내 고향인 대만과 같은 역사를 지닌 나라라 형제 같은 느낌이 든다. 일제 점령기의 역사를 공유한 한국에서도 <색, 계>에 대한 역사적 공감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와호장룡>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7년 만에 다시 <색, 계>로 한국을 찾게 됐다. 게다가 두 편의 영화가 모두 중국영화란 점에서 특별한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본인의 영화가 어느 정도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나?
그렇게까지 큰 인기가 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내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관심도 있다. 어제 시사회와 레드 카펫에 참가하면서 한국의 여러 매체와 관객들로부터 따뜻하고 친근한 인상을 느꼈다. 그런 흥분과 열정을 극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라웠다.

한국에서 <색, 계>의 무삭제 상영이 결정됐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닐까 싶다.
일단 <색, 계>를 풀 버전으로 상영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싶다. 왜냐면 섹스씬을 단순히 선정적이라고 여기거나 나쁘게 해석될 수 있는데 그것을 삭제하지 않았다는 건 그 장면을 미술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라고 받아들이는 평가라고 생각돼서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게 될 수 있다는 것보다, 그런 기분은 내게 영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실이라서 굉장히 영광스럽다. 대만이나 홍콩의 경우, 영화 산업에 굉장한 붐이 일고 활성화되던 시기에 굉장히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반면에 영화 산업이 별로 활성화되지 못할 때는 배급에도 문제가 생겨서 감독이 직접 영화를 팔아야 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시아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서 <색, 계>가 호평 속에 개봉했고, 대만과 홍콩에서는 레코드를 기록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들었다. 또 이런 상황이 더욱 활성화돼서 내가 받았던 그런 환호를 배우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다.

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의 수상 전례로 예상하지 못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 당시 기분이 어땠나?
먼저 상을 받을 당시 너무 흥분됐다. 사실 그 전에 <색, 계>가 미국에서 NC-17등급을 받았고, 그 점이 여러 가지로 영화에 제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수상을 통해 <색, 계>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 같아 너무 기뻤다. 특히 7명의 심사위원들이 모두 감독들이었는데 그들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특히 기뻤다. 사실 전작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감독상을 받았고 그 당시도 흥분됐지만 그건 개인적으로 받는 상이라 부담이 됐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색, 계>는 작품 자체로 상을 받게 돼서 스텝들과 영광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기뻤다.

장아이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자 결심한 계기가 궁금하다.
장아이링은 중화권에서 워낙 사랑을 받는 작가이며 나도 개인적인 팬이다. 때문에 함부로 그녀의 작품을 각색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색, 계>는 그녀의 다른 소설과 달리 작가가 오랫동안 공들였던 작품이고, 28페이지의 짧은 단편이었지만 그녀가 표현하고자 했던 절망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담겨 있었다. 게다가 여성의 심리가 잘 표현된 것은 물론 항일전쟁시기의 강인한 여성의 사랑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이 없어 두려웠지만 한 번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여주인공 ‘왕치아즈’가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지만 작품을 아끼는 마음도 마찬가지로 컸다. 결국 이런 두 가지 마음을 담아 영화를 만들게 됐다.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두 작품 모두단편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허락되지 않은 금지된 사랑이야말로 더욱 로맨틱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그런 점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스무 살에나 받아들였어야 할 극적인 로맨스가 나이 오십이 돼서야 편해지고 다룰 수 있게 됐다는 게 다른 사람에 비해 남다르긴 하지만, (웃음) 난 지금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시간인 것 같다.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색, 계>의 원작은 굉장히 재능 있는 반면, 거친 문체를 가진 여작가들의 작품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서부시대를 바탕으로 펼쳐진 카우보이와 마초맨의 사랑이야기였기 때문에고 시대적으로 용납될 수 없었지만, <색, 계>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건 애국심과 여성의 성정체성을 서로 저울질한다는 위험한 발상이고 그건 시대적으로 더욱 타부(taboo)시되는 일이기 때문에 영화화를 머뭇거리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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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망설임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화를 완성하고자 했던 욕망의 근원이 뭔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탈 때 고속으로 깊게 떨어질수록 스릴이 커지는 것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파헤치고 그걸 들여다 봤을 때 나 역시도 그런 흥분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그런 새로운 소재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건 사실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그럼으로써 예술적으로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고 세상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그걸 해부하는 작업을 즐겨야 한다. 이런 작업은 내가 영화 감독으로서 항상 배역을 빌어서 내 연기를 보는 것과도 같다. 이번엔 왕치아즈를 빌어서 내가 연기를 한 셈이다.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고통과 욕망 혹은 욕정을 달리 생각하면 그건 색(色)이다. 모든 산물이 갖고 있는 모든 색깔이 색이니까 내가 보는 시야에 있는 모든 사물을 난 색깔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욕망할 때도 그 색을 떠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어떤 나의 욕망, 색을 자제하고 그것을 감시하는 계, caution이 항상 공존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영화상으로, 화면상으로, 스크린으로 옮겨서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것이 내가 <색, 계>를 통해서 하고자 했던 작업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색, 계> 라는 제목의 의미를 직접 듣고 싶다.
<색, 계>는 불가에서 말하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지칭하는 용어다. 장아이링의 소설은 늘 두 가지의 대조적인 심리들이 그려지곤 한다. 계는 모든 방법을 이용하여 욕망을 물리치는 것이고, 색은 색정의 색, 색깔의 색을 가리킨다. 특히 색은 인간이 눈으로 보는 동시에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도 가리킨다. 인생에서 원하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을 배척하고 항거해야 할 때도 있다. <색, 계>는 그런 의미에서 대조적이지만 하나로 관통되기도 하는, 한가지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의미다.

<색,계>에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강렬한 정사씬이 등장한다. 사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동성애도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계속해서 극단적인 방식의 사랑을 묘사하는 이유는 뭘까?
중년의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웃음) 난 과거에는 보수적이었고, 사랑에 대해서 평범한 느낌을 가진 사람에 불과했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평범한 가정생활을 통해 일반적인 사회적 의무들을 이행해 왔고, 상당히 정상적인 범주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협, 애니메이션 같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시도하게 됐고 중년 이후가 되어서 젊었던 시절,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색다른 것들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잡을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고, <색, 계>는 그보다 노골적인 수위로 표현했지만 마찬가지다. 표현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두영화는 자매와도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결말부에서 보여지는 두 인물의 대조적인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앞둔 왕치아즈(탕웨이)의 표정이 담담한 것에 비해서 살아남은 이(양조위)의 표정은 상당히 비극적인 슬픔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색, 계>는 마치 죽은 자의 비극처럼 포장돼있지만 오히려 살아남은 자의 비극이 아닐까 생각했다.
잘 본 것이다. 결말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언급하거나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관객들 스스로의 개인적인 해석을 열어두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에 나 역시도 동의한다. 한편으로 시대적 배경에서 생각해보면 누가 지배를 받느냐, 누가 지배를 하느냐라는 시대적 기로가 존재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곳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상하이에서 이가 왕차이즈를 성적으로 지배하는 포지션은 각각 먹이와 사냥꾼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다. 중국의 옛날 이야기 중, 호랑이와 청이라고 부르는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청은 항상 호랑이를 따라다니면서 호랑이를 지배한다는 귀신인데 그런 옛날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기도 했다. 결국 여주인공이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서 어떤 희열을 느꼈고, 오히려 그 남자 주인공은 귀신 같은 여자의 기억에 의해 계속 고통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맥락을 이루고 있으니까 말한 대로 산사람의 비극이고 지옥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전쟁 영화에서는 선한 사람은 항상 죽고, 살아남은 자는 그에 대해 가책을 느끼면서 죽은 자만 못하게 살아간다는 그런 형식을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징벌의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불공정한 시대적 기운과 결탁한 인물에 대한 단죄이거나 복수라고 말이다.
정확하게 그건 어떤 슬픔이라고 본다. 그 여주인공의 죽음은 남자주인공에게 있어서 자신이 정말 유일하게 사랑했던 자신의 내면의 영혼, 청을 죽여버린 셈이기도 하다. 그건 두 사람이 각자 자기 자신을 억압하는 시대 속에서 진짜 자기 영혼의 솔직한 모습을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서 자신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색, 계>는 시대의 어떤 애국심이나 도덕심, 아니면 개인의 행동에 대한 어떤 룰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시대가 개인의 인생에 끼치는 어떤 영향력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 사람과 사람간의 애매한 관계 속에 숨겨진 열정에 대해서 더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뭐가 맞는 건지, 뭐가 틀린 건지, 무엇이 정의로운 건지, 정의롭지 않은 건지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등장인물을 통해서 선이나 악, 삶이나 죽음을 아우르는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투영하고 싶은 의지가 있었다.

결국 결말을 열어둔 건 규정할 수 없는 인간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말처럼 들린다.
왕치아즈에 대한 어떤 견해나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도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가 애매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왕치아즈는 착한 여자가 나쁜 여자로 변장해서 그 삶을 살다가 결국은 그 나쁜 삶을 좋아하게 된 셈이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버리고 좋아하게 된 개인의 복잡한 내면이 내재하고 상황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관객들에게 열려진 결말로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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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복잡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하는 여배우를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애초에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여배우를 캐스팅할 때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다. <색, 계>는 여자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가는 영화이고, 원작자인 장아이링도 여성의 시각을 통해 항일전쟁시기의 강인한 여성상을 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 속 여주인공이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에 신선함 역시 캐스팅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중요한 역에 신인 여배우를 캐스팅하게 된 사연이 있을 법하다.
지금 현존한 어떤 배우도 왕치아즈의 역할로 마땅히 떠오르는 이가 없어서 결국엔 공개 오디션을 하게 됐다. 그 공개 오디션에 만 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는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탕웨이를 봤을 때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일단 리딩이 굉장히 좋았고, 어떤 세계관이나 자세를 살펴봤을 때 그녀가 왕치아즈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겉으로 순수하고 연약해 보이지만 내면은 강인한 소설 속의 여주인공의 모습과 빼닮아 있었다. 사실 왕치아즈의 역할은 내 자신의 분신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내 자신의 분신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큰 모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캐스팅은 최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니까 어떤 영화든지 다 위험성이 있는 작업이다. 사실 탕웨이를 캐스팅하고 연기훈련을 거치면서 반 이상의 작업을 진전시키기까지 확신이 없었다. 굉장히 순수한 사랑을 꿈꾸다가 그로부터 퇴락되듯 욕정에 빠져드는 모습을 왔다갔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끌고 갈만한 연기력을 조율하는 게 이 캐릭터에서 힘들었던 점이었다. 그러나 훈련을 거치면서 탕웨이는 잘 따라와줬고 내가 원하던 여주인공의 신선한 느낌까지 잘 살려주었다. 배우에 대한 선호도도 중요하지만 결국 항상 중요한 건 배우가 그 역할에 충실하면 관객들이 배우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탕웨이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라서 대단히 만족스럽다. 또한 그녀가 신인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유명배우를 캐스팅한 것 보다 더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 반해서 양조위는 상대적으로 감독이라면 신뢰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이라는 인물은 양조위를 염두에 둔 캐릭터였나?
항상 작품을 볼 때마다 대본을 먼저 보고 영감을 느끼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한번도 배우를 먼저 설정하고 캐릭터를 설정한 적은 없다. 물론 <음식남녀>의 아버지 역할을 한 랑웅(Sihung Lung)은 애초에 아버지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딱 한번의 예외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외엔 단 한번도 배우를 먼저 염두에 둔 적은 없다. 물론 양조위와는 늘 작업해보고 싶었고, 1년 전부터 언젠가 캐스팅해보고 싶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다.전체적으로 그의 역할은 여주인공보다 표현의 한계가 있었지만 그는 누구도 그보다 더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다. 양조위에게 이는 지금껏 자신이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악역으로서, 중국어 대사를 소화하고 중년남자를 연기하는 등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 도전을 이룬 양조위는 훌륭한 배우다. 그와 함께 작업하게 된 건 결국 내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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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가 지금껏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악역이란 기준에 대해서 더 듣고 싶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사람이 저지르는 죄와 정말 사악한 영혼을 갖고 태어났다고 느껴질 정도로 의도적인 범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내 기준으로 치자면 어떤 동정심을 부르는 죄인은 악역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양조위가 연기하는 이는 비틀어진 자아를 지닌, 문제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악역이지만 동시에 영혼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복합적이고 좀 복잡한 악역이라고 생각한다.

<색, 계>는 1930~40년대의 상하이, 홍콩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현 세대에겐 낯선 풍경인데 그 시대와 공간의 고증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색, 계>에 매료된 건 1930년대에 대해서 얘기하려 했기 때문은 아니고, 그 시대를 배경이 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하지만 고증은 중요하기 때문에 정확한 고증을 하려고 했다. 그 시대는 일본의 식민지였고 지금 중국을 살아가는 젊은 중국인 세대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치욕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다른 영화 감독들이 잘 다루지 못하는, 어찌 보면 금지된 이야기나 다를 바가 없는 시대다. 하지만 난 그 동안 영화를 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통과할 수 있다는 확신과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미술팀과 최선을 다해서 고증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세트의 상점가들은 그 시대에 있었던 상점가들을 고증해서 만들었다. 그 때 당시, 많은 해외망명자들이 그 상점가를 은신처를 삼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동서양이 교류하는 듯한 이상한 풍경을 그 시대에 발견할 수 있었다. 굉장히 매력적이고 화려한 그런 배경이 잘 다뤄지도록 노력했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다양한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이 넓다. 주로 어떤 것으로부터 흥미를 느끼는가?
한 개의 단순한 요소로 이뤄진 것으로부터는 흥미를 느낄 수 없고, 두세 개의 어떤 복합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것에 호기심을 느낀다. 항상 내게 신선하게 느껴지거나 호기심을 일으켜서 답을 찾고 싶게 만드는 것을 위주로 작업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서 답을 찾으려 하지만 반면에 답이 없는 결말을 만드는 작업과정이 즐겁다. <색, 계>처럼 여성의 성 정체성과 애국심을 저울질하는 두 가지 요소가 섞인 복합적인 이야기가 내게는 굉장히 흥미롭다.

처음 할리우드에 진출할 당시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한 상태에서 앞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은 영어가 많이 향상됐지만 <센스 앤 센서빌리티> 당시엔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가지고 영국 사람에게 가서 그들과 같이 일해야 했기 때문에 굉장히 큰 도전이었고 그 자체가 큰일이었다. 사실 그 이후로 모든 영화의 프로젝트를 할리우드에서 만들고 제작했기 때문에 어쩌면 내 모든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할리우드적인 영화는 <헐크>였는데 <헐크>는 내 생각에 예술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급 당시 힘들었던 점들이 있었다. 내가 추구하는 건 재료와 어떤 부분들만을 갖고 오되, 이것은 딱 이 장르다라고 할만한 영화는 만들지 않기 때문에 영화의 배급과 홍보를 하는데 있어서 나도 모르는 두려움이 있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배급이나 홍보 같은 메커니즘의 이해가 아닐까 싶다. 미국에선 비할리우드 영화는 독립영화고, 할리우드 영화는 주류영화다라고 나누기도 하는데, 난 그 중간지점(gray area)에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 또한 좋은 시나리오는 모든 것을 갖고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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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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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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