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타려던 회사 직원들이 최(최민식)를 보더니 멈칫하고 돌아선다. 최는 막 책상을 비우고 회사를 떠나는 참이다. 처량한 실직자의 몰골로 돌아온 집에서도 그는 혼자인 기러기 아빠다. 최가 동생의 공장에서 일하다 교통사고로 숨진 티벳의 이주노동자 도르지의 유골을 안고 히말라야로 향하게 된 건 그런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외로움조차 방치해버린 적막한 삶에 있어서 현실은 어떤 애착도 발생시키지 못한다. 그의 히말라야행은 일종의 현실도피에 가깝다. 다만 결코 한적한 휴양이 되지 못하리란 예감을 짊어지고 오르는 고행의 도피가 될 것임을 짐작할 따름이다.
도입부를 비롯한 초반부 서울의 몇 장면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분은 험준한 히말라야의 경관으로 채워지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이하, <히말라야>)은 극영화적인 연출이라기 보단 다큐멘터리적인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고 이해될만한 작품이다. 고산지대의 희박한 공기가 감지되듯 무겁게 옮겨지는 최의 산행과 이를 무심히 비추는 카메라의 롱테이크는 인물보다도 인물이 한 점처럼 끼어든 장관의 풍경에 관심이 많다. 시간이 멈춘 듯 세월이 보존된 자연적 풍광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람과 바람뿐이다. 그 바람은 마치 인간의 업을 실어 나르듯 부단히 오가며 히말라야로 향하는 카트만두를 오르는 최에게 고행의 무게를 얹어놓듯 시종일관 거세다. 바람에 흔들리는 카메라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내 고산병으로 쓰러져버린 최의 모습을 지켜보는 광경은 연출된 장면이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실제적이다. 실제로 최민식은 고산병에 시달리면서 촬영을 강행했다고 한다.
사실 <히말라야>에서 최민식의 모습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라기 보단 카메라 너머에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 인식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최라는 이름도 사실상 최민식의 성을 가져다 붙인 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히말라야 고지대에 놓인 자르코트의 티벳인들 사이에 놓인 최민식은 마치 자연 가운데 놓인 인간의 한 점처럼 이질적이며 그만큼 그 환경에서 동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히말라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차지한다. 탈문명의 인간이 친자연적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깨달아가는 성찰이란 지극히 뻔한 것임에도 <히말라야>가 전시하는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지극히 뻔할 수 없는 감정을 도모한다. 그건 <히말라야>가 연출된 양식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과 다른 비연출적 양식의 자연스러움을 상당 부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영화인 까닭이다.
현지인으로 구성된 비전문연기자들의 모습은 자연주의적인 풍광을 전시하는 카메라와 함께 <히말라야>가 극영화라기보단 다큐멘터리적인 접근법에 따르고 있다는 증명을 더한다. <히말라야>는 문명에서 탈출한 현대도시인의 황폐해진 정서가 자연주의적 풍경과 인간들 사이에서 평온한 치유를 얻어가는 과정을 찬찬히 살핀다. 문명에서 달아나듯 히말라야로 온 최가 통과의례를 겪듯 고산병을 앓고 이내 도르지의 가족으로부터 병간호를 받은 뒤 자르코트의 티벳인들 사이에 어울린 채 일상을 보내는 모습은 그 자체를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리게 만든다. 그 자연주의적 풍경을 목도할 도시의 누군가는 분명 그 광경에 매혹되거나 자신의 현실을 작게나마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결코 현실을 망각하거나 온전히 그로부터 탈피하기란 어렵다. <히말라야>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 결과에 있다. 도르지의 유골을 은폐했던 최의 의도가 발각되는 순간, 최의 여정도 함께 끝이 난다. 선의에서 비롯된 의도라 해도 결과적으로 최가 얻은 성찰은 본래의 의미를 망각한 착취적 형태로 잔존하기 때문이다.
결론의 형태까지도 평온을 유지하지만 <히말라야>는 모든 과정을 지나쳐 결말에 다다랐을 때 묵묵한 카메라의 시선이 시니컬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 사실상 그 중립적인 카메라의 태도는 단지 자연을 비추기 위한 롱테이크의 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을 무감정의 시선으로 장악하고 있는 관찰자의 위치를 점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이질적인 방문자는 은폐하다 이내 망각해버린 제 목적을 뒤늦게 이루고, 떠밀리듯 황급히 자르코트를 떠나간다.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역시나 비판적인 태도와 무관하다. 지친 듯 무기력한 모습의 최가 고산병으로 쓰러져 자르코트에 올랐던 것과 달리 그는 스스로 걸어 내려가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방인으로서의 휴가를 마치고 다시 제 세계로 나아간다. 최는 평온하고 자연주의적인 타인의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대자연의 장관 앞에서 황폐해진 마음을 정화시킨 최는 다시 한번 도시에서 제가 얻을 억겁을 짊어지고 살아갈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이 희망이다. 제 자리에서 살아가는, 그리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서로 다른 것이 다시 제 모습에 걸맞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순리에 가까운 행위다. 그것이 무기력이든, 의지든, 산을 내려가 다시 살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을 결국 희망이라 인식할 수 밖에 없다. 다만 묵묵히 제 자리에 선 히말라야의 풍경에 황폐한 마음의 먼지가 걷힌다. <히말라야>는 현대인을 위한 치유의 풍경을 선사함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온전히 부지하게 만든다.
충남 예산면 운곡리의 조필성(김윤석)은 한적한 시골에서 치안 유지보다도 집안의 경제난 해소가 더 고민스러운 한량 형사다. 만화방을 운영하며 남편의 쥐꼬리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내(견미리)의 바가지는 득달같고, 두 딸에겐 매일같이 면목이 없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행운이 찾아온다. 소싸움 대회를 주관하던 중, 불현듯 찾아온 예감에 아내의 통장을 훔쳐다 판돈을 걸자 열 배의 배당금이 쏟아진다. 하지만 행운은 곧 불운으로 돌변한다. 친구에게 맡긴 배당금을 찾으러 가던 중, 희대의 탈주범 송기태(정경호)를 만나고, 돈도, 자존심도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리고 추격이 시작된다. 거북이 달린다.
<살인의 추억>은 시골이란 정체된 정서의 공간에 스펙터클한 서스펜스를 채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추격자>는 추격의 대상을 숨기지 않고도 긴박한 추격전을 만들 수 있음을 (한국의 영화적 토양에서) 증명했다. 신분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격자>와 유사한 구도를 보유한 <공공의 적>은 형사로서의 제도적 처벌보다도 개인적인 복수심에 근간에 둔 주먹질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결말을 그린다. 앞서 나열한 세 영화의 공통분모는 무능한 경찰력이다. 과학수사를 운운하거나, 직감을 따라가거나, 혹은 불법을 자행하거나, 범인들은 항상 형사들을 제치고 능수능란하게 빠져나간다. 이는 <거북이 달린다>도 다르지 않다. 다만 여기서 ‘거북이’는 형사를 겨냥한 단어가 아니다. 구체적인 언어를 동원해 설명하자면 ‘시골’의 ‘서민’‘가장’형사다.
향토적 풍경을 바탕으로 축조된 수사물이란 점에서 <거북이 달린다>는 <살인의 추억>과 <추격자>를 연상케 하는 장르적 환경과 구조를 지닌다. 동시에 그 추격의 주체와 객체가 형사와 범인이라는 공적 신분을 벗어나 개인과 개인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피날레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공공의 적>이 떠오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거북이 달린다>는 앞선 세 영화와 활성화된 에너지의 유형이 다르다. 앞선 세 영화가 고체처럼 단단하게 응축된 서스펜스를 기본적인 영화적 질량으로 삼은 장르물이라면 <거북이 달린다>는 액체처럼 유연하게 출렁이면서 종종 넘쳐흐르는 방식의 코미디에 가깝다. 눈에 띄는 건 스토리보다도 캐릭터이며 전반적인 분위기보다도 순발력 있는 리듬이 관건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날렵한 탈주범과 그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시골의 느슨한 형사 사이엔 좀처럼 메울 수 없는 빈틈이 보인다. 공권력을 농락할 정도로 두뇌가 비상하고 운동신경 또한 발군인 송기태에게 조필성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적수다. 이는 ‘토끼와 거북이’의 토끼처럼 방심하기 좋은 상대인 셈이다. (동화의 관계를 염두에 둔 제목처럼) <거북이 달린다>는 방심하는 토끼를 쫓아 달리는 거북이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다. 그리고 그 거북이는 시골에 사는 서민이자, 가장이며, 아버지다. 형사의 추격전이라기 보단 촌놈의 사투에 가깝다. 촌스럽고 느슨한 루저의 승리를 연출하기 위한 서사를 그린다. 이성적으로 직조된 것이라기 보단 감정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그만큼 선악의 관계는 배제되고 개인적인 사연이 중시된다. 형사도, 범인도, 제 나름의 사연이 있다. 다만 그 사연의 비중이 다르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편애가 형성된다.
드라마틱한 감정을 주조하는 코미디로서 좀 더 효율성이 뚜렷한 <거북이 달린다>는 장르적 동선을 밟아나가는 덕분에 장르적 기시감을 부르지만 종종 느슨하게 풀리는 속도감을 활용해 유머를 발생시키고 드라마틱한 감정을 주조하는데 좀 더 효율성이 뚜렷한 작품이다. 장르적 비범함보단 평이한 드라마로서의 야심이 짙다. 추격전의 구도에 곁가지를 치는 가족주의의 감성으로 이뤄진 <거북이 달린다>는 지극히 단순한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지만 종종 명확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함으로써 일관성 있는 리듬감에서 벗어나곤 한다. 하지만 연주력의 공백을 메우는 건 배우라는 악기다. 주연과 조연 가릴 것 없이 <거북이 달린다>의 캐릭터를 이루는 배우들은 제 역할에 충실하다. 특히 김윤석은 마치 악센트와 같은 강세를 찍으며 단조로운 이야기에 특별한 음색을 새긴다. 다만 대비를 이루는 캐릭터의 세기가 좋은 형태를 이루지 못해 종종 사연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인상이 감지되고 그만큼 결말부를 장식하는 쾌감이 약해진다.
그럼에도 <거북이 달린다>는 환경을 잘 응용한 코미디이자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오락영화다. 과하거나 부족한 지점이 눈에 띄지만 마이너스와 플러스의 총합의 균형이 적절하다. 무엇보다도 캐릭터가 얻는 마지막 성취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촌놈을 위해 배려된 작위적 송가라지만 그 소박한 에너지가 온전히 전달되는 기분이다. 그 순박한 자질이 밉지 않다.
로나(아르타 도브로시)와 클루디(제레미 레니에)는 한 집에서 살아가는 부부다. 하지만 충만한 애정의 발로에서 시작해 제도적 합의로 나아간 부부가 아닌 그저 제도적으로 계약된 부부 관계에 불과하다. 벨기에 시민권을 얻기 위해 알바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클루디와 위장 결혼한 로나는 자신의 약물중독을 끊고자 도움을 요청하는 클루디를 번번히 외면한다. 정작 사랑하는 연인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전화통화로서 애정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로나는 이혼과 재혼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다. 역시나 벨기에 시민권을 얻으려는 러시아 남자와의 혼인을 통해 거액을 지불 받을 예정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애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며 정착하리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
모든 사건의 출발점은 개인의 욕망이다. 개인의 욕망은 때때로 어느 개인의 의지로 돌파구를 만들거나 그렇지 못하면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이 제도적 결함을 이용한 조직적 대응과 결합할 때 윤리는 심각하게 훼손된다. 알바니아에서 벗어나 벨기에에서 새로운 삶을 정착하려는 로나의 욕망은 위장결혼을 알선하는 전문조직에 의해 성사되고 또 다른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절차로 나아간다. 약물중독자인 클루디는 그 과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그는 제거하기 쉬운 수단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욕망은 양심과 충돌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죄의식은 윤리적 양심에 의해 죄의 발생을 억누른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이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닐 때, 타자와의 협의를 통한 공통분모의 잠재적 자산이 될 때, 개인의 양심은 공모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건조하고 서늘한 카메라는 인물에 대한 어떠한 감정을 발생시키지도, 주입하지도, 포착하지도 않는다. 온전히 감정이 결여된 관찰자의 시점에서 사건 속에 놓인 인물을 관찰할 뿐이다. 물론 대부분 로나를 향해있는 카메라는 희미하게 감지되는 그녀의 심리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포착하며 극적인 변화를 가늘게 끌어당긴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최대한 인물의 심리에 관여할 가능성은 없다. 단지 객관적인 판단과 관찰의 합의를 통해 상황이 발생시키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분석하거나 판별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객관성의 눈높이가 <로나의 침묵>을 숭고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숨죽이듯 정적인 카메라의 고정적 시야를 통해 대상을 관찰하는 일차원적인 시선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인물의 심리를 관통한다. 마치 다큐적인 화법으로 인물에 대한 관찰을 도모하고 스크린과 객석의 너비를 인식시킬 만큼 감정과 거리를 둔 시선을 통해 적극적인 감정적 몰입을 배제한다.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환경의 테두리를 점차 확보해나간다. 인물에 대한 관찰을 도모하는 건조한 스크린은 관객의 시야를 그 인물들의 심리를 결정짓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도달하게끔 만드는 수단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로나의 침묵>은 그 절제된 화법을 통해 종종 서스펜스를 발생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느와르에 가까운 범죄적 소재를 차용한 결과값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와 함께 과장을 배제하고 현실적인 초점에 가까운 카메라의 시선과 연출이 영화의 현실감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음향 등의 효과를 배제한 채 무감정한 시선으로 사건의 과정을 응시하는 담담한 태도가 사건의 흐름 자체에 대한 예상이나 암시의 가능성을 가로막음으로써 연이어질 상황에 대한 충격을 무방비 상태로 체감하게 만든다.
<로나의 침묵>은 벨기에를 배경으로 두고 있으며 카메라의 이동이 지극히 제한적인, 분명 다르덴 형제의 인장을 찍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전작들이 현실성을 등에 업은 인간적 가치, 즉 용서라는 테마로 마주한 인간의 화해를 담았던 것과 달리 <로나의 침묵>은 종교적 신비에 다다르는 구원의 경지로 나아간다.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던 클루디를 가엾게 여기다 끝내 애정으로 품게 된 로나가 결국 그의 못다한 삶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결말은 실로 비범하다. 비인간적인 욕망을 낙태시키고 인간적인 사랑과 윤리적인 신념을 새롭게 잉태하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감상적 깊이를 선사한다. 연약한 육체로 강인한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의 몸처럼 정적이고 차분한 응시 속에서 발견되는 강인한 의지는 역설적이라 더욱 강렬하다. 그 차가운 시선이 피어내는 의지가 놀랍도록 따스하고 아름답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메종 드 히미코> 등,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 각본가 와타나베 아야의 각본과 <내 청춘에게 고함>을 통해 장편 데뷔했던 김영남 감독의 조합으로 이뤄진 한일합작영화 <보트>는 좌충우돌 에피소드에 담긴 청춘의 연대를 그린다. 국경과 언어가 다른 양국의 청년은 정서적 거리감을 초월할만한 동병상련의 연민을 각자로부터 발견하며 연대의 발판을 마련한다.
혈기왕성한 청춘은 축복이라지만 가진 것 없어 비참한 시절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형구(하정우)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떠안고 살아가는 토오루(츠마부키 사토시)는 현해탄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한 삶을 떠도는 청춘이다. <보트>는 머무를 곳 없이 처량하게 떠도는 청춘의 방황하는 감수성을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동극으로 버무리며 희망을 역설한다. 하지만 결국 청춘을 쓸쓸한 뒤안길로 내모는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고 이내 비극으로 내던지는 느와르필름이다.
보트 위에서 나른하게 망중한의 낮잠을 자는 형구는 매번 현해탄을 건너 자신의 은인이자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보경 아저씨(이대연)에게 다양한 물품과 김치를 배달한다. 그렇게 매번 보물처럼 김치를 전달하던 형구는 바다에서 묘연한 기습을 당해 김치를 망가뜨리고 중간에서 형구와 보경 아저씨를 중계하던 토오루로 인해 자신이 옮기던 김치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후, 형구는 결박된 채 정신을 잃은 묘령의 여인 지수(차수연)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고 결국 후에 정신을 차린 그녀의 도주로 인해 형구와 토오루는 예상치 못한 기회이자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형구는 유년 시절 자신을 버리고 남동생과 함께 사라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기억엔 의문이 섞여있다. 왜 자신은 버리고 남동생을 택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어머니에 대한 부정과 향수라는 배반적 감정과 함께 뒤엉켜 나아간다. 자식을 버린 혈육에 대한 희미한 애증이 식물적인 삶 사이로 무심히 새어나간다. 반대로 토오루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에 짓눌려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미혼모로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동생, 그리고 어린 조카들까지, 자신의 현실을 비관으로 덧칠하는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회한을 무표정에 감춘 채 뒤로 조소하며 살아간다. 상반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두 청년은 지수의 돌발적인 제안을 통해 연대를 이룬다.
<보트>는 엉뚱한 사건의 연속적인 에피소드를 밟아나가며 예측불가의 방식으로 전진하는 이야기다. 참신하고 신선한 발상이 때때로 돋보이며 그 사이에서 튕겨져 나오는 유머도 제법 쏠쏠하다. 특히 하정우의 연기는 새삼 대단하다. 특유의 넉살과 야생적 기질의 혈기가 어우러진 하정우의 표정과 대사는 <보트>의 생동감을 발생시키는 원천과 같다. 또한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눈에 띄는 츠마부키 사토시의 어울림도 나쁘지 않다. 두 배우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견제하듯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적절하게 뒤엉키고 구르며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동일한 목표를 합의한 관계가 진심 어린 우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소통이 불가한 캐릭터의 부조화를 극복할만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다만 두 남자와 함께 부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지수의 캐릭터는 때때로 감정 과잉의 상태를 자제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며 특별한 매력을 남기지 못하는 느낌이다.
느와르적인 결말에 도달하기까지의 영화적 과정은 때때로 배반적이다. <보트>는 일본청춘드라마의 골자에 장르적 유머와 구성을 결합시킨 형태의 영화다.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엇박자 상황의 유머로서 동력을 끌어올린다. 두 캐릭터의 연대는 중심맥락을 차지하며 인물에 대한 흥미를 돋운다. <보트>는 사실 캐릭터영화라 해도 좋을 만큼 인물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영화다. 다만 구조적으로 평등하게 설계된 듯한 캐릭터가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종종 편애적이다. 동시에 느와르적인 결말은 영화가 지속시키던 정서와 무관하게 단독적인 느낌을 준다. 스토리의 흐름으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온도차가 발생한다. 관객의 입장에선 강한 허무를 인식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청춘의 표류 가운데 허구적 희망을 감지했던 이라면 활기 가득한 무용담 너머로 내려앉은 절망적인 결말 앞에 당황할 가능성이 녹록하다. 물론 포스터나 전단지를 통해 해양액션영화 따위를 기대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지독한 저주를 퍼부으며 상영관을 박차고 나갈 확률이 더 크겠지만.
칸 영화제는 잘 다녀오셨나요? 만만치 않은 일정을 소화하셨을 것 같은데요. 칸에 가서 당일 하루는 쉬고, 그 이튿날 시사하고요. 그 이튿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15분 간 딱딱 끊어서 인터뷰 쭉 했고요. 영화를 보고 어찌나 박수를 쳐주는지, ‘나를 되게 좋아하나 보다’ (웃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 다음 이튿날에 한국 와서 하루 뒤에 언론시사회 하고, 오늘은 VIP시사회한다고 하는데 내가 이걸 하고 있다는 게 완전히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 하고 있네요.
체력적으로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건강 관리가 중요할 것 같은데요.
힘들어요. 되게 힘든데, 평소에 건강 관리는 하죠. 운동을 조금씩 해요. 러닝 머신도 하고, 아령 같은 걸로 하는 운동도 하고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운동은 하루마다 하는 건 아니고, 종종 할까, 말까, 한 시간쯤 고민하다가 슬슬 걸어가서 한 시간 반쯤 놀다가 쉬다가 그렇게 하고 오죠. (웃음) 그래도 하고 나면 '난 운동했다' 그런 기분 때문에 하지 않은 것보단 훨씬 기분이 좋아져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은데요.
전 무조건 자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서요. 그냥 무조건 자요. 자지 않으면 펑펑 터질 것 같아요.
나이에 비해 피부도 너무 고우세요. (웃음)
왜 그럴까. 일단 담배피지 마세요. (웃음) 난 이제 담배 끊은 지 12년 째 됐는데요. 그때부터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20일에 한번씩 피부 케어도 받아요. 적어도 한 달은 넘기지 않아요.
봉준호 감독의 전작을 보셨나요?
<살인의 추억>은 봤어요.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저는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니까 영화를 극장에서 잘 안 봐요. 비디오 테이프로 나온 다음에 보니까 1년 뒤에나 영화를 보게 되는데 뒤늦게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저런 불란서 영화 같은 영화가 있네, 멋있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즈음에 봉준호 감독과 얘기하게 되고, 정말 좋았죠. 내가 좋아했던 영화의 감독이 저에게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니.
봉 감독 별명은 아세요? 봉 테일이라고 하는데.
저도 처음 알았어요. 스태프들이 이야기해주더라고요. 본래 봉 테일이라고. 그러니까 그건 디테일하다는 말이잖아요. 정말 빈틈없는 사람이에요. 예를 들어서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어요. 이렇게 저기에 무슨 소품 하나라도 빠진 게 (머리를 가리키면서)이리로 느껴지나 봐요. 제가 많은 영화감독들하고 일해보진 않았지만 드라마도 많이 했으니까, 그냥 제 느낌으로 보자면 정말로 막 촉수가 이리저리 다 뻗쳤는데도 그게 산만하지 않게 정확히 제자리로 뻗치는 것처럼 보여서 놀랐어요.
봉준호 감독과 영화를 찍게 된다 하니 주변에 계시는 분들의 반응이 어떻던가요?
김수현 씨가 옛날에 내가 영화 하려고 할 때 “혜자씨, 영화 하지 마. 영화는 드라마와 달라서 심플하지 않은 것 같아”, 그랬는데 이번에는 봉준호 씨가 감독하니까 하면 좋겠다고 하는 거에요. 내가 특별히 누구하고 얘기한 게 없어서 그것밖에 들은 게 없어요.
단편드라마 <여>에 출연했던 김혜자 씨를 보고 봉준호 감독이 <마더>를 구상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봉 감독이 어려서부터 TV를 많이 봤더라고요. <전원일기>도 아주 다 꿰고 있어요. 식구들이 TV를 즐겨보는 가족이었대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TV많이 보고, TV에 나오는 배우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그리고 그렇게 연극을 많이 보러 다닌다고 해요. 그래서 낯 익히지 않은 새로운 배우가 필요할 때 캐스팅하죠. 좌우간 일에 대해서 열정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부지런한 감독인 거 같아요.
봉준호 감독이 본격적으로 김혜자 씨에게 러브콜을 보낸 건 <살인의 추억> 이후부터라고 들었어요. 배우 입장에서는 마치 열렬한 구애를 받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행복한 일이죠. 정말 촉망 받는 젊은 감독이 저를 갖고 어떤 영화를 기획한다는 말 자체가 배우로서 저를 너무 행복하게 하는 말이었어요. 실현이 되든, 안 되든, 그랬어요. 전 항상, “5년 전에 생각해놓고 중간에 나한테 말한 거 부담 느껴서 자꾸 진행시키려고 무리하지 마라. 난 나한테 말해준 것만으로 고맙다.” 그렇게 몇 번이나 얘기했어요. “너무 시간도 많이 가고, 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어떻게 내가 20대 아들의 어머니를 할 수 있겠냐.” 그런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 아니면 전 이 영화 덮어요.” 그러면서, “선생님 보이는 대로 찍을 거에요.” 그렇게 얘기했어요. 사람들은 김혜자 씨가 안 하면 이거 누구 시킬 거냐고 물었다는데, 그거 다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김혜자 선생님 때문에 떠오른 생각이고 만약 안 된다면 없었던 걸로 하겠다고 했다네요. 자기가 계획했던 걸 절대로 바꾸지 않더라고요.
보이는 대로 찍겠다는 말처럼 영화에서 적나라하게 얼굴이 클로즈업되곤 하더군요.
영화를 보니까 어떤 때는 너무 나이 들게 나오고, 어떤 때는 너무 젊게 나오고. 그런데 이 영화가 그냥 한 장면에 머물러서 저 여자를 관찰할 틈을 안 주는 영화에요. 그렇죠? 엄마의 나이가 상관이 되지 않는 영화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도 별로 개의치 않았던 거 같아요.
자신의 표정을 구상해본 적은 없으셨나요?
거울 보고 그럴 틈은 없었어요. 수시로 감정이 변해야 되는 상황에서 거울보고 연습할 새가 있어야죠. 끝나고 나서 방에 들어와서 아까 한 걸 가만히 생각해보면서 ‘내가 아까 어떻게 했지’ 하고 가끔 본적은 있어요. 자기 전에 세수하고 와서 그걸 해보자고, 거울을 이렇게 보고 그래 봤지만 그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됐어요.
김혜자 씨만이 이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봉준호 감독의 공언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실감나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니까 그 의미를 알겠더군요. 진짜 알았어요? 아이, 좋아라. (웃음)
스크린에 쏟아져 나오는 김혜자 씨의 표정 자체만으로도 영화가 놀라웠어요. 그런데 그런 표정의 가능성을 봉준호 감독이 이미 예감하고 접근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워졌어요.
저도 무섭다니까요. 얼마나 영리하고 천재적인 사람일까, 어떻게 나한테서 저런 게 나올 거라 예상했을까. 저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나오게 상황을 몰고 가는 거에요. 그게 일부로 거울 보고 연습해서 지어낸 표정이겠어요? 아니지. 난 깜짝 놀랐다니까. 제 눈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보고, ‘어머나!’ 이랬다니까. (웃음) 왜 사람이 환장하면 눈이 돈다 그러잖아요. 진짜 눈이 돌더라니까. 모니터보고, ‘어머나, 진짜 눈이 뒤집히는구나’ 그랬지.
<마더>는 언제 처음 보셨나요.
정식으로 본 건 칸에서였어요. 여기선 떨려서 못 보겠더라고요.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모니터도 제 방에서 혼자 했거든요. 내가 나오는데 누가 옆에서 한눈 팔고 딴짓하면 다 느껴지잖아요. 이러면 막 짜증나고 신경질 나기 때문에 혼자 문 꾹 닫아놓고 보고 그랬지. 근데 이제 좀 많이 둥그래져서 같이 보긴 하지만 이번에는 같이 못 보겠더라고요. 특히나 기술 시사에선 거의 완성본을 보여준다는데 불 켜고 난 다음에 사람들 표정이 어떨까 무섭고 민망해서 못 봤어요.
<마더>에서 묘사하는 어머니는 일반적인 모성상으로 이해될만한 평범한 어머니가 아니죠. 어쩌면 그 지점이 <마더>에 대한 흥미가 생길만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그런 어머니였기 때문에 하고 싶었어요. 이제 일상적인 어머니를 너무 많이 했잖아요. 물론 <엄마가 뿔났다>같은 경우는 자기를 찾으려고 애쓰는 조금 다른, 아직도 우리나라 사회에선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깨인 엄마를 연기했잖아요. 그래서 사실 <엄마가 뿔났다>하기 전까진 굉장히 공백 기간이 길었어요. 그 정도로 하고 싶은 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마더>도 이런 엄마였기 때문에 한 거죠.
사실 <마더>에 나오는 어머니는 어미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짐승 같죠. 애미도 아니고 어미에요. 그 여자가 화장터에서, ‘우리 아들이 안 그랬거든요’ 이러면서 눈이 이렇게 뒤집어지는 걸 모니터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내 눈이 어떻게 저렇게 되냐고. (웃음) 그니까 그건 어미죠. 개나 짐승이 새끼 낳고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으르르하잖아요. 그런 것과 똑같이 자기 새끼를 해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 거의 짐승 같았어요, 이 엄마는.
이성적인 합리를 먼저 정립하는 것보다도 본능적인 에너지에 대한 필요성을 먼저 자구할만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니까 아마 전 크게 병 날 거에요. 어느 영화보다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연기였기 때문에. 그런데 정신은 굉장히 맑아졌어요. 육체는 피곤할지 모르지만 정신은 맑아지고, 새로워졌다고 할까요.
뭔가 새로운 기운을 얻었다고 느끼시는 건가요?
땅을 일군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 영화를 하면서 그 동안에 저한테 딱딱하게 굳어져있던 속을 다시 일군 거 같아요. 비료도 주고, 나한테 고착돼있던 어떤 생각들,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것들이 다시 이렇게 새로워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머니로서 <마더>에서 연기한 인물의 모성에 대해서 이해하실 수 있으세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이 있잖아요.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건 엄마밖에 없다고. 그 말은 곧 자식을 위해 죽을 수도 있지만 자식을 해치려 그러면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돼요. 그만큼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말이 되거든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론 관객들은 좀 놀라겠죠. 그렇지만 놀라면서도, ‘그래, 자식이니까 저러지’ 그러실 거 같아요. 그리고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란 애니까 측은하고, 내 목숨하고 바꿨으면 좋겠다 싶은 자식이니까. 저도 정말 걔만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책을 읽으면서부터 도준이란 인물이 너무 가슴 아픈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친구라고는 동네 건달인 진태밖에 없잖아요. 정말 인간 말종이라고, 종자부터 틀렸다고 엄마가 표현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고마운 거에요. 내 아들의 친구가 돼주니까.
연기를 오랫동안 해오셨지만 <마더>에서의 김혜자 씨는 기존에 보여주셨던 연기와 차원이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김혜자 씨께서도 처음이라 할만한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처음 해본 게 많아요. 정말. 사실 국내에서는 얼굴을 알아보니까 외국으로 여행을 많이 가도 국내에선 어디 여행을 잘 못 다녀요. 이게 서울에 있는 스튜디오에서만 찍은 게 아니고 영화팀과 같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찍었잖아요. 관광지가 아닌 곳인데도 ‘우리나라 산천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라는 걸 느꼈고, 공기도 맑고, 인정도 좋고, 그런데 사니까 두통도 없어지더라고요. 전 평생 두통을 달고 살았는데 두통도 없어지고, 서울에 있을 땐 배고픈 지도 모르고 그러는데 배도 고프고, (웃음) 그래서 밥 언제 먹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열정이 저한테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저는 저한테 열정이 죽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한테 감사해요. 저한테 불씨만 남아있던 열정을 다시 타게 해줬으니까.
<마더>는 <마요네즈>(1999)이후로 10년 만에 출연을 결정한 영화에요. 그 사이에 작품 제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한 작품도 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같이 하자고 그러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지만 내가 TV에서 너무 많이 했던 비슷한 역할들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에요. 내가 우선 그런 역할에 싫증이 나는데 누가 그걸 극장까지 보러 오겠어요. 그러니까 차라리 내가 아닌 사람이 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그 분들한테, “이건 사람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사람에게 시키던가 하지, 내가 나가서 하면 무슨 흥미가 있겠느냐”, 그랬어요.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처음부터 이건 선생님에게서부터 영감을 얻어서 기획한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안 하신다 그러면 이건 그냥 덮어버린다, 그랬어요.
결국 10년 만에 스크린으로 자신의 얼굴을 본 셈이에요. 그런 점에서도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웃음) 예. 감회가 남다르네요. 정말로. 이제 막 생각하게 됐어요.
오랜만에 영화 현장에서 작업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드라마 같이 쫓기지 않아서 좋았어요. 말하자면 배우의 창의력이 발휘되기 좋다는 점이 달라요.
아무래도 생각처럼 항상 연기가 잘 되는 건 아니었을 텐데요. 촬영하지 않을 때는 쉬라고 캠핑카가 마련돼있었거든요. 잘 표현이 안될 때는 그 속에 들어가서 울었어요. 답답해서. 내가 이렇게까지 밖에 표현이 안되나 싶어서.
사실 영화 속에선 우는 연기가 거의 없잖아요. 감정을 안으로 눌러 담으면서도 그걸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답답한 부분도 적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내야 되는 거에요. 물론 우는 것도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우는 건 울면 되니까. 눈물 없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라는데 잘 안되잖아요. 그래서 차에 가서 막 울었어요.
그럴 때 봉준호 감독의 반응은 어땠나요?
감독이 달래주러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나가라고 그랬어요. 해줄 말 있으면 문자로 해주라고. (웃음) 그랬더니 문자를 했더라고, 진짜. ‘아무리 부인해도 세상에 화날 땐 인정하세요’ 괜히 나 위로하려고 그러는 거지. 잘 안된 건 자기가 제일 잘 알잖아요. 그렇게 생각했어요. 많이 배려해주지만 자기 맘에 안 드는 연기는 추호도 봐주는 게 없었어요. 마음에 안 들면 다시 하고, 다시 하고, 그런 점이 저하고 같았어요.
문자도 하실 줄 아세요?
제가 <마더>때문에 처음으로 이 핸드폰을 썼어요. 하도 답답하니까 영화사에서 사줬거든요. (웃음) 그리고 봉 감독이 핸드폰에 취미를 갖게 하려고 문자 하는 법도 알려주고 그랬죠.
인터넷은 할 줄 아시나요?
인터넷은 잘 몰라요. 대신 우리 아들이 좋은 얘기 나왔을 땐 와서 보여줘요. “엄마, 여기 재미있는 얘기 있어. 와봐.” 그래서 읽어주다가, “이거 보려면 쑥 내려.” 그리고 딴 데 가요. 그런데 저는 내리다 보면 다른 게 나와요. 그래서, “얘!” 부르면 “아이, 참, 엄마, 그냥 보지 마세요.” 그러곤 하죠. (웃음) 그런데 나쁜 얘기는 안 보여주겠죠. 좋은 얘기만 보라고.
봉준호 감독이 아들처럼 느껴질 때는 없었을까요?
아~니, 전 그 사람 존경해요. 나이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도 그 사람 하는 거 보면 존경할 수 밖에 없어요. 정말 똑똑한 사람을 보면 존경해요. 그 분은 굉장히 천재적이고요, 정확한 사람이에요. 자기 머리 속에 확실한 그림이 서있어요. 우물쭈물하는 법이 없어요.
봉준호 감독이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걸 느낄만한 주문이 있었나요?
"다 좋은데 한번만 다시 해보세요." (웃음) 나도 찍으면서 봉 감독이 오케이 할 때, “아니, 나도 한번만 더해보고 싶어요” 그래도 자기가 됐다고 생각하면, “아니요, 됐어요”, 그래요. 정말 못 됐어. 진짜로. (웃음)
어쩌면 뭔가 그 이상을 끌어낼 수 있는 기대감에 계속해서 연기를 요구한 건 아닐까요.
봉 감독이 여러 버전으로 해보길 원해요. 그러니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러다 보면 저도 모르는 좋은 게 나와요. 어쩌면 틀에 박힌 듯이 할 수 있는 걸 이렇게, 저렇게 해보고 그러니까 더 재미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더라고요.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으셨나요? 소통이 불가한 고립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그만큼 배우 스스로도 캐릭터의 고립감을 느끼면서 연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맞아요. 그런 점에서 그랬어요. 나하고 소통되는 사람이 없잖아요. 말은 하지만 누구와 말을 주고 받는 게 아니고 나 혼자 중얼거렸다가 무시당하고 그러지, 그러니까 허공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체력적으로도 소모가 많았을 텐데요. 연기적으로 힘들다고 느꼈던 고비가 있으셨나요?
제일 힘들었던 건 뛸 때도 아니고 내 맘대로 연기가 안될 때. 아까 말한 것처럼 형언할 수 없는 표정 지으라고 써 있는데 그게 안될 때 감독은 ‘그게 바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에요’, 라고 말하지만 어떡하란 말이야, 도대체, 지가 한번 해보라지! (웃음)
영화 안에 모호한 표현이 많더군요. 완전한 정답이나 확신을 주지 않고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많잖아요.
저는 책보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책 읽을 때 행간을 읽는다고들 그러잖아요. 그런 것처럼 여기 참 숨은 그림이 많구나 싶었어요. 제 역할에 대해서, 그리고 아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애매하게 표현된 점이 있어요. 그냥 저 사람들은 모자관계일까, 아니면 모자관계이상일 수 있을까, 그런 것도 아주 그렇게 안개 속같이 표현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약간 그리스 비극 같은 생각도 들고. 남편에 대해서도 아무 언급이 없잖아요. 골방에 들어가서 사진을 찢을 때도 그 옆엔 애 아빠가 있었겠구나, 이런 암시만 남잖아요. 그러니까 이 남자를 무지무지하게 사랑한 여자였나, 아니면 어떤 사랑을 했길래 저러나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너무너무 많은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구상이 점점 추상으로 가는 것처럼 뭔가 구체적으로 많이 생각했다가 붓 하나 찍 긋는 것처럼 연기는 심플하게 한 거죠.
칸에서도 <마더>를 통해 다양한 평을 얻으셨을 텐데요. 아무래도 김혜자라는 배우에 대한 인식과 선입견이 뚜렷한 국내 관객의 기대나 감상과 다른 신선한 반응을 목격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달라요. 그 분들은 <전원일기>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선입견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원빈의 엄마로 받아들이는 거야. 아마 우리나라 분들은 ‘원빈이 아들이야? 봉준호가 아들 뻘 아닌가’ 그런 선입견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기자 분들 책임이야. 꼭 이름 옆에 가로치고 나이를 적어서 그렇다니까. (웃음) 나이가 배우를 결박 씌우는 거에요. 그 분들은 오히려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영화에서 굉장히 늙어 보일 때가 있지만 어떤 때는 굉장히 젊어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 나이를 너무 잘 알죠. 기자들이 자꾸 써주니까, 친절하게. (웃음) 그러니까 배우 나이는 안 쓰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냥 짐작하는 것과 자꾸 이렇게 적어놓은 걸 보는 것하곤 틀리거든요. 제가 몇 살쯤 됐다는 거야 다 알겠죠. 언제적 김혜자인데. 근데 그걸 못박아서 써줄 때와 아닐 때는 또 다를 거 같아요.
사실 중년 배우들을 주인공으로 다룰만한 작품이 우리나라에선 드물기도 하죠.
그렇죠. 그런데 자꾸 이렇게 나이 밝히고 그러니까. (웃음) 이건 농담이고요. 사실 젊은 사람들 얘기가 예쁘잖아요. 보고 나면 재미있고. <마더>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연기가 요구되는 경우는 흔치 않겠죠. 그렇죠?
작품을 마치고 난 지금은 마음이 어떠신가요?
저는 꼭 작품이 끝나면 아파요. 지금은 아직 시사도 있고, 기자 분들 만날 일도 있고, 개봉하면 인사도 다녀야 되니까 그때까진 안 아플 거에요, 아마. 그런데 그게 다 끝나면 아플 거에요. 많이 아플 거에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신 적은 있나요?
맥을 놔서 그럴 거에요. 이 엄마가 떠나가면 아파요. 떠나가면서 나를 병이 나게 하고 갈 거에요. 지금은 아직도 이 엄마가 내 속에 있기 때문에 괜찮은 거겠지.
최근 인터뷰에서 레드 카펫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고 밝히셨더군요. 사실 칸 영화제 레드 카펫이라면 배우로서 한번쯤 꿈꿀만한 자리일 텐데요.
저는 이번에 <엄마가 뿔났다>하기 전에 활동한지 너무 오래돼서 백상예술대상이나 KBS 연말 대상 시상식 같은 데서도 레드 카펫을 까는지 몰랐어요. 그 때도 ‘여기 뒷문 없어?’ 그래서 뒤로 들어왔어요. 무안해서. 그건 그냥 젊은 사람들이 예쁘게 입고 관객들 즐겁게 해주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지. 저한테 그런 환상은 별로 없으니까요.
올해는 시상식에서 정문으로 들어오시겠죠.
칸에서 그랬으니까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해야겠죠. 그렇죠? 이번에도 뒷문으로 가면 저 여자는 해외에서만 저러고 국내에서는 안 그런다고 하겠죠. (웃음)
스스로 자식들에게 어떤 어머니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나요? 자식들한테 약간 폐가 되는 엄마일 걸요. 맨날 한심한 말 하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있고, 밥 좀 먹으라고 몇 번씩 말을 해야 그래, 그러면서 먹고.
보통 어머니들께서 자식에게 밥 먹으라고 하시는 게 보통인데 말이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배가 안 고픈 걸 어떡해. 그러니까 제가 대표적인 엄마상이라는 게 약간 어폐가 있죠. 사람들은 누구나 무엇을 하든 허상이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그 동안 어머니 역을 잘 했으니까 그렇게 얘기하겠죠. 내 사생활은 엉터리였어도.
최근 출연하셨던 <엄마가 뿔났다>의 한자도 집을 나가서 안식년을 갖겠다고 선언하죠. 사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당연한 삶처럼 여겨지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한자도 상당히 이례적인 어머니 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자는 상당히 선구자적인 엄마에요. 그런데 보통 자기 친구들도 만나면서 가끔 자기 즐거움을 찾는 주부들도 정말 안식년을 가져야 된다고 그러는데 전 거기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달리해요. 안식년을 요구할 수 있는 엄마는 정말 가족을 위해서 자기는 하나도 없었던 엄마에요. 이렇게 저처럼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무슨 안식년이 필요 있어요? 이게 안식이지. 오로지 집에서 식구들을 위해 정말 자기를 다 바쳤다고 말할 수 있는 엄마들만 쉬는 시간을 달라고 요구할 자격이 있는 건데 너도 나도 다, ‘집 잘 나왔어’ 이러는 거에요. 물론 어떤 분들은, ‘아니, 그만하면 살지’ 그러시더라만. (웃음) 어쨌든 저는 그래서 김수현 씨가 앞서가는 선구자적인 작가라고 생각해요. 이젠 그런 시대가 올 거에요. 가족만을 위해서 헌신하는 엄마는 점점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작품활동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시나요?
공상해요, 공상. (웃음) 아니면 자요. 복잡하면 잠 오고, 깨 있으면 졸 거 같으니까 그냥 자요. 그렇게 자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니까 그 때부터 책도 보고 음악도 듣고. TV도 재미있는 건 보는데 어떨 땐 그냥 안 키죠. 켜면 쓸데없이 하루가 휙 가버리더라고. 얻은 것도 하나도 없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다니까. ‘뭐했을까, 하루 종일’ 이러면서. 그런데 그것도 버릇이더라고요. 눈 뜨면 TV켜버릇하면 그렇게 되요. 그런데 눈 뜨면 좋은 음악을 딱 틀어버리면 또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습관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 같아.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단 혼자 보내시는 시간이 많으신가 보네요.
원래 사람들 많이 있는데 가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라 그냥 혼자 있는 걸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친구가 없으면 참 불행하다는데, 저는 그런 면에서 보면 불행한 사람인 거죠. 제가 혼자 이렇게 있는 걸 좋아하니까 옆에 친구가 별로 없어요. 그런데도 전부 다 저를 보호해주려고 그러는 거 생각하면 난 참 인복이 많구나, 하나님께 감사하다, 이럴 때가 정말 많아요. 내가 이렇게 나밖에 모르고 내 안에만 갇혀서 사는데도 사람들은 날 이렇게 치유해주려고 하니까. 진짜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봉사활동도 활발하시잖아요.
저는 세상을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을 만나면 힘들어요. 그런데 애들은 모르잖아요. 애들은 배고픈 거, 아픈 거, 그런 것만 알잖아요. 애들하고만 있으면 내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는다고요. 아픈데 약 발라주면 되고, 그런 것만 해주면 되지, 내가 그 사람 생각에 맞춰서 머리 굴려야 되고 그렇지 않잖아요. 전 그런 걸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앞에 가면 기운이 쑥 빠지면서 졸려요, 금방. 그러니까 사람들 많은데 가면 왜 그렇게 졸린 지 몰라. (웃음) 지금은 인터뷰하는 자리니까 말을 많이 하지. 말도 많이 하면 에너지가 굉장히 소진돼요. 그래서 저는 말도 잘 안 해요. 지금 내가 안 하면 안되니까 하는 거지. 잘 써달라고. (웃음)
연기자라는 직업도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일이지만 그 불편함을 상쇄할만한 가치가 있으니 유지가 가능한 것이겠죠?
저에겐 배우가 직업이기 보단 곧 저의 삶이에요. 물론 ‘어큐패이션(occupation, 직업)’ 란에는 ‘액트리스(actress, 여배우)’라고 써요. 그렇지만 전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삶의 일부지.
연기가 삶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니까 제 존재의 의미에요. 제가 연기를 안 하고 보이지 않을 때는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요. 살아있어도 제가 작품에 나오지 않으면 그건 그냥 반쪽의 저만 있는 거에요. 아이들 만나고 다니고, 그렇게 반쪽의 삶은 사는 거지만 배우로서의 저는 죽은 거에요.
김중만 작가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종종 말씀하신다고 들었어요.
나, 그 말 젊었을 때부터 했어요. 예쁜 사진만 보면 이거 영정사진으로 해야지. (웃음)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녀서 우리 애들이 질색을 해요. 엄마는 맨날 잘 나온 사진 보면 영정 사진 쓴다고 해서.
영정 사진을 준비한다는 건 사실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거잖아요.
저는 그러니까 항상 마지막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리고 언제가 돼도 상관없어요, 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건가요?
저는 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오래 사는 게 이상하다니까요. 저희 애들은 아주 질색해. 엄마는 왜 맨날 그러냐고 그러는데 사실이 그러니까. 김중만 씨는 옛날에 한 20년 전에 알았을 때부터 사진을 잘 찍었는데 항상 그 사람이 찍어준 사진보고 이걸로 영정사진 해야지, 그랬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매년 영정사진을 바꾼다고 얘기하는 거에요. (웃음)
벌써부터 김혜자 씨의 여우주연상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더군요.
저는 그런 말을 참 잘해요. 이거 찍어서 그냥 우리끼리만 봤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보는 게 두려워요. 그냥 제가 연기를 좋아하니까 우리끼리 찍어서 우리끼리만 보고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만약 나중에 상을 준다면 상 탈 때는 행복하죠. 그런데 상이 저한테는 그렇게 큰 의미는 없어요.
사실 <마더>까지 단 세 편의 영화를 했지만 그때마다 상복은 있었던 것 같아요.
첫 번째 영화 <만추>도 마닐라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탔고요. <마요네즈>는 케라라국제영화제에 갔는데 거긴 여우주연상이나 남우주연상이 없었고 작품상만 있는 영화제였어요. 그런데 말하자면 우리나라 지방영화제 같은 거니까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거기서 <마요네즈>가 그랑프리 탔어요. 유인호 감독님이 가서 타오셨는데 그쪽 신문 1면에 한 장면이 크게 나왔더라고요. 감독님이 그 신문 갖고 와서 저한테 줘서 어디다 잘 간직했는데 지금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미안해.
허벅지에 침 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요. 그 장면이 다양한 해석을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신의 기억을 봉인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요.
내가 스스로를 찌르는 고통스러움을 통해 마음 속의 아픔을 잊음으로써 그 기억 자체를 잊으려고 한다고, 그냥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것만으로 나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아마 허깨비처럼 살 거에요. 마음은 절벽에서 이미 투신했다는 김남조 시인의 시처럼 그 아들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그냥 허깨비로 살겠죠.
결국 이 어머니 역시 김혜자 씨 본인에게 봉인되는 캐릭터가 될 거 같네요. 그러다가 언젠가 이 캐릭터를 다시 꺼내 생각할 때가 오지 않을까요.
저는 흘러간 건 잘 안 떠올리는 편이거든요. 떠올리면 자꾸 잘못했던 것들만 생각나요. 그래서 괴로우니까 안 떠올려요. 그런데 <마더>는 다른 작품보단 저에게 좀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뭐라고 설명드릴 순 없지만 앞으로도 떠오를 것 같아.
시를 많이 읽으시는 편인가요? 저는 시를 좋아해요. 짧은 단어 속에 너무 많은 뜻이 있어서.
2004년도에 출간된 저서인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에서 헤르만 헤세의 ‘행복해진다는 것’의 시-인생에 주어진 의미는 다른 아무 것도 없다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를 인용하면서 이를 반박하셨던 기억이 나요.
예.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행복해질 의무가 있다는데 이런 애들을 못 봤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천상병 시인의 시에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아이가 대문 앞에 울고 있다. 오줌을 싼 벌일까. 이렇게 다섯 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가 울고 있다. 그러면서 넌 왜 우니.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그런 내용의 시가 있어요. 제가 그 시를 적고 그 밑에다가 ‘선생님, 다섯 여섯 살에도 인생이 뭔지 아는 애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썼어요. 다섯 여섯 살에 지네 엄마 아빠가 총맞아 죽는 걸 본 애들도 있고, 이 분도 그 아이들을 못 봤기 때문에 이런 시를 쓰셨구나 했죠. 얼마나 당신이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시를 쓰셨을까.
사실 천상병 시인도 상당히 비극적인 삶을 살았죠.
그렇죠. 그 분 시가 얼마나 비참해요. ‘아이론(iron) 밑의 와이셔츠 같았다’고 하셨잖아요. 아이, 끔찍해. 정말로. 그게 다리미로 다져질 와이셔츠 같다니.
사실 그만큼 남들이 끔찍하다 말하기 쉬운 삶을 사셨죠. 하지만 한편으로 당사자의 시점에서는 그 삶을 부정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그렇죠. 하늘로 돌아갔다고, 즐거웠다고 이야기하겠다고 하셨으니까.
결국 자신의 이해에 따라 삶의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마더>의 혜자가 취한 선택 역시도 타인에게는 극악한 선택이지만 당사자에게 있어선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방편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게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때때로 자신이 이해하는 자신과 타인이 이해하는 자신의 차이를 느낄 때도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가면의 생’이라는 소설 있잖아요. 그런 게 생각날 때도 있어요.
CF를 통해 어필한 어머니 이미지도 강했던 거 같아요. 요즘엔 사실 출연하시는 CF는 없으신 것 같은데 제의는 꾸준히 들어오나요?
맨날 하기 싫은 CF는 끝없이 들어오는데 저는 안 하는 게 좋으니까 별로 관심은 없어요.
CF를 많이 하는 젊은 배우들이 종종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글쎄요. 다 생각이 있어서 하겠죠. CF만 많이 하는 배우도 그게 맞는 사람이 있어요. 많이 해도 별로 싱겁지 않은 사람이 있고, 많이 하면 왜 저러냐, 그런 사람이 있고 그렇잖아요. 그냥 자기 생긴 대로 사는 거 같아요. 그게 누가 충고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요. 전 누구 충고할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도 충고 받는 거 싫어하고, 그냥 저도 생긴 대로 사는 거 같아요. 자기 생긴 만큼 사는 거니까.
꽃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꽃 좋아하죠. 저는 정말로요. 봄에 땅이 아직도 꺼뭇꺼뭇하잖아요. 커다란 소나무 밑에 시커므리한 곳에서 어쩌다 수선화가 노랗게 펴있는 거 보면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 그늘 밑 시커먼 땅을 뚫고 네가 나왔구나, 싶어서 걔하고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하는지 몰라요. ‘너 정말 애썼다. 기특하다. 정말로.’ 예전엔 겨울이라 복도에 들여다 놓은 자스민 한 송이가 펴서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계단 밑에서 자스민 향기가 얼마나 많이 퍼지는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화단도 가꾸신다면서요?
화단 정말로 예뻤는데. 우리 아들이 개를 좋아해요. 개도 조그만 개가 아니고 맹인견하는 레브라도 리트리버 같은 종이니까 걔네 들이 한번 화단을 왔다 갔다 하면요, 꽃들이 다 누워요. 그래서 아들하고 맨날 싸우다 싸우다 제가 포기했어요. 꽃보다는 아들이 중요하지. (웃음) 그래서 한번은 아침에 나가서 봤더니 밤새 개를 풀어놔서 꽃들이 다 짓밟혀 있길래 제가 부은 채로 앉아서 하도 울었어요. 그랬더니 “내가 다 다시 심어줄게.” 그러더라고요. 우리 아들이. 그래서 “다시 심는 게 문제가 아니야. 얘네들도 다 생명이 있고, 생각이 있어. 짓밟혔을 때 생각 좀 해봐.” 그리고 제가 어떤 시인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러더라고요. “개들을요. 돌아다니는 나무라고 생각하세요.” (웃음) 그래서 그 다음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돌아다니는 꽃이라고. 그 대신 정원은 황폐화됐어요.
OBS에서 <김혜자의 희망을 찾아서>란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셨는데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천연덕스럽게 질문하시는 모습이 어떤 인터뷰어라도 답변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기분이 들더군요.
어머, 그걸 봤어요. 고마워요. 진짜. (웃음) 주철환 씨가 자꾸 그걸 하자고 했어요. 주철환 씨와 20대부터 친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걸 어떻게 해요. 그랬더니 할 수 있대. 그런데 제가 어떤 때는 ‘알았어, 할게요’ 그랬다가, ‘아니, 못해요’, 이걸 수 십번 반복했더니 나중에 내일 신문 보래. ‘주철환, 김혜자에게 배반당해 자살’ 이런 기사 날 테니까. (웃음) ‘진짜로 그러면 어떡하나. 에이, 설마.’ 이러면서도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한번 해보지 싶어서 했어요. 그런데 게스트 오시는 분들에게 항상 부탁하죠. “제가 원래 말하기도 싫어하는데 MC를 하라네요. 그런데 제 말을 못하니까 저 대신 재미있게 얘기 좀 많이 해주세요.” 이렇게 미리 부탁하고 그러니까 그 분들이 오히려 안쓰러워서 얘기를 더 많이 한 거죠. 물론 작가가 있었지만 그 작가가 적어준 건 이분이 이런 일을 했다는 거니까 그걸 참고만 하고 제가 아무 거나 되던 말던 물으니까. (웃음)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무장해제를 시키는 재주가 있다고. 그런데 그건 재주가 있다기 보단 그냥 궁금한 걸 물은 거에요. 끝나고 나니까 봤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네요.
주철환 대표도 봉준호 감독처럼 김혜자 씨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낸 셈인데, 누군가가 자꾸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것이 당사자에겐 때때로 놀라운 일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어떨 땐 웃겨요. (웃음) 근데 난 주철환 씨가 한번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김혜자는 어머니 역도 잘 하는 배우다. 난 그렇게 써주는 게 좋아요. 무슨 제가 국민엄마에요, 국민엄마는. 솔직히 국민 들어가는 게 너무 많아서 싫어요. 국민오빠, 국민 아버지, 왠 국민이 이리도 많은지. 이 역 저 역 다 잘하는데 엄마 역도 잘한다, 이런 평가가 더 감사하죠.
10년 만에 <마더>로 스크린에 복귀하셨으니 차후에 영화제의가 들어올지도 몰라요.
아직 그런 생각은 안 해요. <마더>가 아직도 꽉 차있기 때문에 충분히 앓고 난 다음에 이게 어느 정도 흥행이 돼서 어느 분께서 제의를 해주신다면 그 때 가서 생각해볼지 몰라도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누가 알아. (웃음)
그러니까 건강 검진도 꾸준히 받으셔야,
싫어. 병 있다 하면 어떡해. 아이, 귀찮아요. (웃음) 난 괜찮아. 우리 아들이 이러면 질색해요. 그래도 할 수 없지. 난 별로 죽는 게 무섭지도 않고, 그냥 내 인생을 언제쯤 잘 끝맺었으면 좋겠어요. 그립다, 김혜자, 그 배우, 그렇게만 끝맺었으면 좋겠어. 일찍 죽고 늦게 죽고 이런 건 별로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거고, 그러면서 항상 작품을 하죠. 그리고 사실 몰라요. 진짜 내가 5분 후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안담? 그런데 자꾸 이런 얘기하니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내가 이러다 백 살까지 살면 어떻게 하나? (웃음)
서울시로부터 밤섬에서 8회 차 촬영만 허가받았다고 들었다. 밤섬과 비슷한 공간을 찾아낸다는 게 관건이었을 거 같다. 연출부와 제작부에서 밤섬과 비슷한 공간을 찾기 위해서 한국에 있는 강이란 강은 모두 다 뒤졌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 중요했다. 모래사장과 모래사장 뒤로 울창한 숲이 있어야 되며 촬영여건을 따지자면 섬보단 차 진입이 가능한 강변이어야 됐다. 그리고 여자의 시점샷을 고려하자면 어느 정도 망원렌즈를 붙여서 찍을 수 있는 거리감이 확보되는 조건도 중요했고 해변이 너무 넓어도, 너무 좁아도 안됐다. 그런 조건들을 찾기 위해서 정말 강이란 강은 다 뒤져서 충주의 주 촬영지를 찾아냈다.
사실 어떤 장면은 밤섬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밤섬 자체의 생태를 설명하는 영화는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이 사람의 심리를 통해 보여지는 밤섬의 모습들이 더 중요했다. 김씨는 밤섬에 처음으로 떨어진 경계의 대상이므로 처음엔 낯선 이방인을 거부하는 날카롭고 뾰족한 느낌의 숲처럼 보이다가 김씨가 점차 밤섬을 자기 공간으로 인식하고 살기 시작하면서 작은 성취감을 이루고 보금자리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숲의 이미지가 연출돼야 했다. 그래서 이제 그런 숲의 이미지에 따라서 각자 다른 숲으로 돌아가면서 촬영을 했다. 밤섬 자체를 모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이 남자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공간의 필요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천만 인구의 대도시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의 무인도 밤섬에서 표류를 한다. 이 독특한 소재의 시작이 밤섬이라고 들었다. 사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미지였을지도 모를 밤섬에 대한 목격을 관찰로 진전시키고 허구의 살을 붙여 나가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일단 보는 순간, ‘아, 저기 섬이 있구나’라고 생각했고, 동시에 그 어둑한 섬이 딱 보아하니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무인도 같아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런 곳이 있다라는 건 얼핏 알았지만 그게 여기라는 건 그때 보고 알았지. 공간 자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밤섬 주변에 서강대교에 허락된 가로등을 제외하곤 일체 조명을 못하거든. 그래서 그 주변이 굉장히 어둡다. 그런데 그 백(back)엔 화려한 시티라이트가 있고, 그 가운데 어둡게 자리잡은 섬이라니 공간의 재미가 오더라. 지금 저기에 한 남자가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고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거의 동시에 들었는데 차를 타고 가는 내가 그 남자를 발견했을까, 혹은 발견했더라도 그 남자의 구조신호를 인지했을까, 아니면 그냥 사람이 있네 이러다 말고 지나갔을까. 이런 무심한 속도감 속에서 그 사람과 나와의 거리감, 그 관계성, 그런 생각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남아있더라.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결국 밤섬을 이야기의 척추로 삼아 캐릭터의 뼈대를 잇고 다양한 설정의 살을 붙여나간 셈이다. 그리고 남자 김씨의 자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몰락한 루저가 밤섬이란 모티브와 연결되는 첫 번째 지점이었나.
글쎄, 분석적이고 전략적으로 ‘루저를 등장시켜야지’ 이렇게 접근한 건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그렇기 때문인 거 같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내가 루저라면 루저고, 그렇게 오랫동안 살았으니까 내가 잘 아는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 항변하고 싶어지는 거고. 내가 우울하거나 그렇게 이해될 존재는 아니고 그냥 남들과 똑같이 사는 사람일 뿐이지만 다른 친구들이 보기엔 번듯한 직장도 없고, 돈도 있다가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뭐 저렇게 무책임하게 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볼 거란 말이지. 그렇게 내 스스로를 항변하고자 하는 이해심을 조금 더 발휘하면 이해되지 않을 존재가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소년이 아님에도 그런 얘기를 꺼내고, 자살을 실제로 해보지 않았음에도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냥 이 사람들도 누구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존재라고.
현실적인 세태를 대변할만한 설정이 등장한다. 특히 친절하게 채무액을 알려주는 대출업체의 코멘트, 서비스 가입을 권하는 끈질긴 이동통신사 상담원 안내와 같이 겉보기에 친절하지만 진심이 인색한 세태에 대한 은유가 노골적이다. 내가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조난 문자를 관심 있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속도감과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을 때 징표처럼 떠오른 이미지다. 그게 그런 전화통화나 유람선에서 손 흔드는 장면과 같은 에피소드로 이어진 거다. 표류라고 하지만 표류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다. 말하자면 먹고 살고 생존하는 이야기 후에 찾아오는 어떤 욕망으로부터의 고립감. 그런데 그런 얘기는 <로빈슨 크루소>나 <캐스트 어웨이>같은 훌륭한 작품들 속에서 이미 했고, 내가 그걸 다시 반복할 이유는 없다. 그런 마당이니 일단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돼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 안에서 써야 하니까 일단 내 자신이나 가족들, 친구들과 같이 내 주변 사람들이 안고 가는 고민과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자연스럽게 투영되더라. 빚 때문에 힘들어 하는 친구도 많고, 내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너무 낯설다 생각했던 경험도 있고, 그런 이야기들에서 확장된 셈이다.
처음 남자 김씨가 섬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부분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섬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결심에 안착하려면 섬에서 나오지 못하는 과정을 설득시키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사실 남자가 섬을 못 나오는 상황보단 그 섬에 남는 게 중요하다. 이 남자가 그 섬을 못 나오는 게 아니라고 관객들도 이해할 거라고 믿었고. 이 섬에서 남고자 하는 욕망이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열망과 욕망에 맞닿을 수도 있는 지점이 있겠다고 봤으니까. 만약 수영을 잘해서 이 섬에서 나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그 섬에 남았을 것이다. 이 영화가 시작된 계기는 거기서부터라고 봤고. 다만 섬에서 나오지 못하는 20여분의 상황을 코미디로 끌고 갈 수 있겠다고 봤다. “정말 저게 말이 돼?”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일지 모르지만 그 상황을 일종의 은유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서 부담없이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 섬에 남아야지, 하는 순간부터 저 사람의 입장과 욕망에 대해 관객들도 동의해주고 출발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밤섬이 모티브고 시작점이라면 여자 김씨와 그녀의 방은 추가적으로 나열된 캐릭터와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써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두 가지 정도의 전제를 갖고 시작했다. 이게 단순한 표류 영화가 아니라 요즘의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것과 이 남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일단 로빈슨 크루소보다 더 로빈슨 크루소 같은 존재가 아이러니하게 등장한 다음엔 표류의 고립감을 어느 순간 희석시키기 보단 그 고립감을 안으로 더 파고 들 수 있는 상황의 존재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히끼꼬모리를 떠올리게 됐다. 다만 그게 표류기라는 이야기의 단순한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진 전제가 된 건 아니다. 일단 이야기 목표가 표류가 아닌 관계성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태어난 캐릭터였던 거다.
모티브가 밤섬이고 그 밤섬에서 살아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니 결과적으로 여자 김씨는 이야기의 입체감을 배려하기 위해 후발적으로 창작된 캐릭터와 공간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처음부터 관계성과 소통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봤으니까 두 인물로 시작했다. 표류하게 된 남자라는 아이디어에서 아이템들을 떠올렸지만 태생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로 설정해서 출발했기 때문에 후생적이라 말할 순 없다. 다만 장편 상업영화를 찍는 감독으로서 얼마만큼 표현하고 얼마만큼 포기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늘 있었다. 연출가로서 보는 즐거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협소한 상황을 이래저래 돌파하고자 하는 작가적 욕심이 생기더라. 단지 내가 생각하는 사실감을 통해 나의 만족을 얻고자 하면 그게 보는 사람의 즐거움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자연이 보존된 밤섬의 원시적 풍경과 달리 여자 김씨의 방은 인공적이고 현대적이다.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의 공간이 대비적으로 설계됐다.
내가 그렇게까지 분석적으로 뭔가를 계획할 인간은 못 된다. 물론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지만 보는 분들의 재미를 위해서 대차점이나 대비를 이루는 상황의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걸 정확하게 목표해서 반대개념이나 대비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았던 건 아니다. 그보단 기본 목표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대비되는 요소가 떠올랐고, 그런 만큼 이런 대차점에 주목해서 포장이 가능했던 거지. 다만 그 공간이 서로에게 의미를 준다는 지점이 중요했다. 특히 여자는 이 남자를 발견하면서 컴퓨터의 윈도우가 아니라 진짜 윈도우를 보고 이를 통해서 가상의 친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상대를 보게 된다는 기본 개념이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컴퓨터 모니터의 블루로 가득했던 방이 창이 열려서 옐로우로, 따뜻한 빛의 공간으로 변하고 이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있던 색도 살아나고 공간이 생기를 얻는 과정으로 변하는 게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채로운 소품들이 저마다 의미를 발생시키며 이야기에 입체감을 이룬다. 다양한 소품들이 영화를 패셔너블하게 꾸미는 것만 같다. 마치 편집증적인 성향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소품을 수집한 것 같다. (웃음)
일단 패셔너블하다라는 것에 동의할 순 없다. (웃음) 어쨌든 나는 소품 하나하나가 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고 놓칠 수 없는 것들이라 봤다. 궁극적으로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지. 사소해서 별로 눈 여겨 보지 않는 것들 가운데 어쩌면 본질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말과 물질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오히려 그런 게 부족한 사람들이 그 안의 어떤 의미들을 상기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스태프들에게도 소품 하나하나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을 세심하게 놓치지 말고 끝까지 가자고 당부했고, 그렇게 코미디를 위한 배치나 활용도에서 신경 써나간 측면이 있다.
사소한 소품들을 활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디테일한 느낌이었다.
표류 얘기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핵심은 이 사람이 뭘 이용해서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더라. 그렇다면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과 비슷한 공간감을 유지하면서도 소품의 본래 활용 방식을 뒤집는 전복의 방식을 활용하면 보는 재미를 줄 수 있다. (커피잔을 가리키며) 사실 이 커피잔은 우리에게 커피를 담는 용도로서 규정된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단정을 물려받지만 어떤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는 사람은 이걸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 규정된 물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쓰레기를 갖고 처음부터 재조립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화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느낌이 소품적으로 작용했으면 했다. 버려진 오리배를 갖고 집으로 활용한다거나 뚜껑을 갖고 선글라스를 만들어 쓴다던가, 자신만의 생활방식으로 모든 걸 다 재조립하는 진화의 단계랄까.
관객 입장에서 의미를 수집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통해 소품을 마련하는 입방에서도 그런 수집의 단계가 선행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직업시나리오 작가로서 어떤 정확한 이야기 설계가 되지 않고선 작업을 하지 않았었다. 포스트잇을 쫙 붙이고 모든 과정을 나열하는 방식이었지.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지난 작품을 보면서 조금 반성한 결과랄까.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 훨씬 더 생기와 생동감이 넘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 갑갑하게 찍었구나 느꼈거든. 그 이유는 뭘까 생각하다 보니 역시 그런 방식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싶더라. 그래서 이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단초들만 갖고 무작정 써보자고 마음먹었다. 그저 인물이 가는 대로 받아 적어야 되겠다, 그런 결심으로 시작했고 그냥 남자 김씨의 욕망이 곧 나의 욕망이었다. 캐릭터와 일치된 상태에서 썼다고 할까. 그러니까 김씨의 절실함이 나의 절실함이었다.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니 물고기를 먹어야 되는데 어떻게 잡아야 할까, 그러면 포대기에 나무를 연결해서 해야지, 이런 김씨의 방법이 동시에 나의 방법이었으니까. 고기를 다 잡고 나면 또 무엇이 먹고 싶어지고 욕망하는 게 뭘까, 이런 욕망도 내 욕망이었다.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것도 순전히 이야기적 구성요소로 궁리한 게 아니라 내 욕망을 끌어온 거다. 그렇게 나와 일치된 김씨의 욕망을 그때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표류하듯이 따라간 결과인 셈이다.
결국 자신의 욕망이 이야기를 똑똑하게 만든 셈일까. (웃음)
욕망이 사람을 똑똑히 만든다. (웃음) 어쨌든 이야기를 전진시키고 싶은 내 욕망이 수를 써내게 하더라.
그런데 여러 가지 음식이 정말 많은데 왜 자장면이었을까. 자장면이 어디든 배달되는 음식이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자장면을 원하니까, 내 욕망이 진짜 자장면을 먹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자장면을 통해 이야기를 진전시키다 보니까 배달도 할 수 있겠다 싶었던 거고. 그냥 정말 발상의 진전대로 이야기를 쓴 거다. 이야기가 가는 대로 따라갔다. 예를 들면 김씨가 자장면을 먹고 싶어서 면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할 때 김씨가 한동안 방법을 못 찾을 땐 나도 방법을 못 찾았다. 이야기를 한달 동안 쓰지 못했다. 자장면이 먹고 싶은데 면을 어떻게 만드나, 미치겠네. 이런 김씨의 고민이 곧 나의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김씨가 우연히 새똥을 발견한 것처럼 나도 어느 순간 ‘똥이다!’라고 외치듯이 방법을 떠올렸고, 다시 이야기를 진전시켜서 써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어떤 계획적인 방식으로 써나간 건 아니었다.
‘농심’에서 협찬 받은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웃음) 사실 그런 상표명을 가릴 때 뭔가 실제적인 상표명이나 상호가 주는 리얼리티가 훼손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그게 참 억울한 측면인데 PPL은 고사하고 허가를 받아야 되는 입장이었거든. 어떤 영화인지도 모르는 영화에 자사의 대표적인 브랜드와 상표를 허가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더라. PPL얘기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결국 허가까지 받아가면서 써야 했던 건 다들 그 짜파게티의 맛을 아니까, 그 즉물감을 무시하거나 포기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SK텔레콤’이라던지, ‘오뚜기’ 얼굴이라던지, ‘짜파게티’, 우리가 사는 공기 중의 일부분이라 말할 수 있는 그 물리감이 이야기를 받쳐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지.
밤섬에서 김씨가 살아가는 모습은 인류의 진화 과정을 압축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수렵과 채취에서 사냥으로 이어지고, 결국 농경사회로 진입한다. 이런 과정의 설계도 역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방식 안에서 단계적으로 착안된 건가?
그건 약간 계획이 있었다. 애초에 이 이야기가 코미디를 빌려 쓴 인류학 보고서의 모양새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왜냐면 김씨는 사회성을 다 내던지고 다시 밤섬에서 새롭게 사는 거니까 그러려면 자신만의 방식에서 비롯된 삶이 진화적 과정을 밟을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은유가 되길 바랬다. 작지만 다른 의미의 진화랄까. 먹을 것을 구하고, 욕망을 성취하고, 어떤 일에 보람을 느낀 다음의 욕망은 뭘까. 그 다음의 욕망은 결국 사람을 원하지 않을까. 이런 과정들이 일종의 진화에 가까운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도 예측은 있었다.
남자 김씨가 섬에 표류했을 때, 119에 신고하고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구조를 요청한다. 부모나 가족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그래서 그럴까. 그것도 내 욕망인데, (웃음) 내가 만약 자살했다가 실패해서 밤섬에 떨어졌다면 가족한테 전화할 거 같진 않거든. 걱정도 되실 테고, 내가 자살을 포기한 상태도 아니니까. 그리고 애초에 가족을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그 상태로 거기에 있지도 않았겠지. 어쩌면 가족이 편한 상대가 아닐 수 있지 않나. 혹은 자신의 그런 상황을 알리고 싶은 상대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니까 타인인 119를 통해서 가장 먼저 시도해본 게 아닐까.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119의 도움을 받고 밤섬에서 나가서 다시 자살을 시도해보자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가장 가까운 친구나 친척, 가족에게 자기가 자살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는 건 불편하지 않나.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동구가 여자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마지막 허들은 아버지다. <김씨표류기>에서 남자 김씨의 유년시절이 잠시 등장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의 강압적인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고 여자 김씨는 온전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같은 집에 사는 부모와 완전히 단절돼서 살아간다. 폐쇄적인 가족 구조가 <김씨표류기>에서도 은연중에 감지된다. 나에게 있어서 가족이란 그런 문제처럼 이해돼서 그런가 보다. 가깝지만 가깝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지긋지긋하게 계속 화해해야 되는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닐까. 내가 조금 비뚤어져서 그럴지도 모르고. (웃음)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나 <김씨표류기>의 남자 김씨나 타인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이라 할만한 삶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성소수자에 대해 관대하지 않은 사회에서 여자가 되고 싶은 소년이라던가,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사회적 자살을 선택하는 남자니까. 하지만 정작 그 삶을 드러내는 방식은 비관과 거리가 멀다. 상황의 비극을 유희로 역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건 아닌가. 예를 들면 자살하려는 상황에서 변의를 느낀다거나. (웃음)
인간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기본적으로 항상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내 취향상 뭔가 하나의 감정을 100%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부분이 있다. 감정이란 복잡한 문제를 싹 여과해서 어떤 감정에 100% 집중해서 이것만 보라고 하는 게 진심을 다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가 슬프게 오열하는 가운데서도 똥이 마려울 수 있는 거 아닐까. 거부할 수 없는 똥. (웃음) 그 감정이 놓인 공간 안에 다른 사람들이 보면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셈이다. 그 장면에서 눈물 같은 설사라고 설명을 해서 배우가 기겁을 하긴 했는데, (웃음) 눈물보다 설사가 중요했고, 눈물보단 침이 더 중요했다. 며칠간 물을 못 먹다가 달콤한 액체를 삼키면서 입안에 도는 침이 그를 다시 살게 하는 거니까. 실제로 측면의 클로즈업으로 봐도 눈물은 없다. 콧물과 침, 설사, 이렇게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것들을 다 쏟아내고 다시 산다는 것에 주목한 장면이라서 눈물만 흐르는 장면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
남자 김씨의 위생상태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불결함이지만 여자 김씨의 불결함은 선택에 가깝다. 결벽적인 인간으로 그려볼 생각은 없었을까.
여자가 무엇을 방치하고 무엇을 지키느냐라는 게 공간에서 확실히 대비되길 바랬다. 이 여자는 결벽증이 있다. 그런데 모든 사안에 관한 결벽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에만 결벽이 있는 거다. 나에게도 그런 시점이 있는데 그러니까 자기에게 관심 없는 건 완전히 방치하고 자기가 매달리는 것들에 대해서만 맹목적인 습성을 보이는 여자의 절실한 상태를 보여주고자 했다. 방은 그렇게 어지럽지만 자판은 매일 청소하고, 쓰레기는 널브러져 있지만 그 가운데 가지런히 정리된 것들이 있고, 그런 풍경 속에서 본인의 입장과 태도, 감정을 설명해보려 했다. 계획적으로 삶을 방치하는 여자다. 삶을 방치하는 인간이지, 방치된 인간은 아니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주도 면밀하고 계획적이기까지 하다. 기본 생활을 방치할 뿐이지, 자신의 삶은 다른 방식으로 교묘하고 철두철미하게 관리한다.
여자 김씨가 너무 예쁜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던데.
어느 선에 맞춰서 표현해야 할지, 예를 들면 상처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까, 와 같이 관객과 내 입장 사이를 염두에 두는 모양새의 고민이 있었다. 히끼꼬모리가 왜 저렇게 예쁘냐, (웃음) 이런 얘기도 나올 수 있다는 걸 예측했지만 그 상황에서 적절한 예쁨이란 이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떻게든 예쁘지 않게 보일 방법을 못 찾을 정도로 뭘 해놔도 여배우가 예쁘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웃음)
사루비아라던가, 민방위 훈련 같은 과거적인 이미지가 등장한다. 반대로 로그인이라던가, 젊은 세대와 소통이 용이한 용어들도 함께 등장하고. 시대적 정서가 먼 용어들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현대적인 스타일을 두르고 있음에도 과거지향적인 감성을 지녔다고 할까.
이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가 훨씬 다양하고 입체적이고 풍부했으면 좋겠다는 작가적 욕망이 있었다. 단순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그런 단순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다층적이길 바라는 욕심이 있었다. 본질적으로 대비되는 요소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나오는 건 그 때문이다.
태풍으로 인해 섬이 황폐화되는 장면은 <김씨표류기>에서 유일하게 영화의 비극적 감정이 직설적으로 노출하는 부분이다. 캐릭터에겐 가장 가혹한 순간이기도 하고.
태풍은 한국에 살면서 겪어야 할 과정이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사전조사를 해보니까 밤섬에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에 보통 공익근무요원과 해병전우회 분들이 정화작업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 사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까 이 사람이 지금까지 끌고 온 이야기와 충돌되는 요소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쓰다 보니까 맞닿은 지점이 있었던 데다가 일종의 이격화 같은 게 필요했다. 밤섬은 김씨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싸늘한 시선으로 보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김씨의 왕국과 성취감에 감동하고, 김씨의 고군분투를 응원하듯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차가운 현실이 휙 다가왔을 때 갑작스럽게 냉정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좀 보여주고 싶었다.
고립을 선택한 인물의 삶을 응원하게 만들다가도 결과적으론 그 고립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 고립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고립에서 인물이 벗어나는 장면을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남자는 자장면이 희망이라고 얘기했지만 자장면을 다 먹은 다음엔 어떡하나. 결국 희망은 자장면이 아니라 사람한테 있는 거 아닌가. 결국 지치고 힘들게 볶는 관계라 할지라도 결국 사람간의 관계에서 풀고 발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아는 한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걸 김씨가 알아가는 과정일 수 있겠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도 그렇고 <김씨표류기> 역시 주인공의 미래가 드러나지 않는 영화다. 사실 두 김씨 남녀의 만남이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삶이 더 비참해졌을지 모를 일이다.
김지운 감독님이 영화 보시고 나서 말씀하시더라. “너무 멋 부린 결말 아니야?” (웃음) 자기는 좋지만 관객들은 뭔가 후일담을 더 원할 거 같고, 그에 대해서 더 친절한 결말을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에도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냐 마냐에 상관없이 나는 그 다음을 보여줄 엄두가 안 났다. 둘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지만 앞으로 닥쳐질 삶이 마냥 행복할지, 아니면 어려울지 모른다. 아니면 마냥 행복하다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려나. 쉽지도 만만치도 않은 앞길을 남겨두고 끝내는 게 나에게 있어서 최선의 책임이었다. 내 마음에서 보자면 그 이후에 둘이 버스에서 내려서 손을 잡고 자장면을 먹으러 가는 건데 뭔가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규정 같아서 꼭 그렇게까지 한쪽으로만 볼 수 없는 미래가 펼쳐지는 걸로 그냥 남겨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마치 캐릭터의 조물주나 다름없는 창작자가 그 삶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창작자라고 해서 내가 한 사람을 단정하고 규정하는 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봤다. 비단 결말 이후의 얘기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시작도 그렇다. 남자는 최소한 빚이 있어서 자살하려는 건지 알지만 저 여자는 왜 벽장에 틀어박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인물의 전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없었던 것도 이 사람들에게 사실 이런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히끼꼬모리가 됐고, 자살을 선택했다는 단정을 할 자격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적어도 이 이야기가 그런 방식의 이야기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대신 두 사람의 현재를 다루는데 있어서 현실의 공기를 충실하게 다룸으로서 각자의 바람대로 두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유추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게 내가 짊어진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천하장사 마돈나>같은 경우는 에필로그라도 있어서 최소한 그 인물에 대한 희망이 감지되는 지점이 있지만 <김씨표류기>는 그냥 두 사람의 만남과 동시에 이야기가 끝난다. 어떻게 보자면 동구에 비해 남녀 김씨의 미래에 긍정적인 힘을 실어줄 필요가 없다고 느꼈던 건 아닐까. 동구는 어리기도 하고, 혼자 헤쳐나가야 하니까. 일단 두 사람의 맞잡은 손만한 게 없겠다는 생각도 했고. 앞으로 어려움도 있겠지만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 사실 그 인서트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처음 계획은 남자 김씨의 얼굴로 시작해서 다시 남자 김씨의 얼굴로 끝내는 거였다. ‘클로즈업된 남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가 점점 퍼지기 시작하고 그 미소가 더 퍼지다가 가차없이 암전되면서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이게 원래 시나리오 문구였는데 영화를 찍는 순간 그렇게 끝내선 안되겠다는 걸 알게 됐다.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은 투샷에서 끝내야겠더라. 두 사람이 쏟은 애정을 생각하면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지도 못하고, 손 한번 잡지도 못한 상태에서 끝내는 건 할 수 없겠더라고. 찍는 도중에 거기서 조금 더 가는 결말로 약간 수정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바라보는 투샷이 우리가 낼 수 있는 결말이란 걸 느꼈지.
<김씨표류기>는 일말의 희망을 찾아가는 두 인물의 연대를 통해서 관객에게도 모종의 희망을 전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에게도 이 영화가 어떤 희망이라 할 수 있나?
내가 사실 그렇게 희망적이거나 낙관적인 인물은 못 된다. 그래서 희망을 더 갈구하고 얘기하는 것일 수 있겠다. 사실 나나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어려운 소리만 하고, 희망이 희망처럼 들리지 않는 요즘이니까 나와 그런 사람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삶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희망 얘기하니까 갑자기 내 자신이 턱 막히는데. (웃음)
결국 영화가 자신의 갈증을 해갈하는 도구가 되는 셈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든 시나리오가 유머스러웠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지만 내 자신은 그렇게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갈증과 욕구들을 작품을 통해서 찾으려 하는 거 같다.
자신이 생각했던 3~4개의 구상 가운데 <김씨표류기>가 가장 비대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고 하던데, 아이러니하지만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해야겠다는 용기를 얻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파울로 코엘류의 ‘오, 자히르’라는 소설 덕분이다.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열차의 선로를 보면서 저 열차의 선로 간격이 과연 몇 미터일지 갑자기 궁금해하다가 역무원에게 물어본다. “저 열차의 선로 간격이 얼마나 되죠?” 역무원이 자신있게 143.5cm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왜 열차 선로가 143.5cm인지 궁금해서 다시 물어보니까 그건 기차 폭에 맞춘 거라고 답한다. 그럼 왜 기차 폭이 그렇게 된 거냐고 묻자 역무원이 드디어 짜증을 낸다. 결국 집에 돌아오는데 그 궁금증이 계속 되니까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된 거다. 찾아보니까 그게 중세 마차의 바퀴 폭이란 걸 알게 된다. 중세 마차와 이 열차의 메카니즘엔 하등의 관계가 없는데 불구하고 마차의 폭이 143.5cm라서 기차의 폭이 143.5cm인 거다. 그럼 왜 마차 폭이 그런 걸까 찾아보니 그건 더 거슬러 올라가서 로마시대까지 닿는다. 로마시대에 말 세필이 끄는 마차가 있는데 말 세필을 일렬로 세우면 폭이 그 정도가 되는 거다. 그러니까 로마시대 말 세필로부터 만들어진 메카니즘이 열차를, 선로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거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지금 로켓의 연료통 모양과 설계도 거기서 출발한다. 로켓의 연료통을 나사에서 출발대까지 기차로 옮겨야 되니까 그걸 기차 폭에 맞게끔 길게 제작된 거다. 로마시대의 메카니즘이 로켓으로 이어진 거다. 뭔가 대단한 메커니즘처럼 보이지만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수 있는 일이지. 결국 그게 그냥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적으로 로켓까지 규정해버리는 우스꽝스런 내용을 전하는 내용이 있다.
거기서 무슨 용기를 얻었다는 건가?
상업적이다, 비상업적이다, 라는 구분이 나에게 143.5cm의 허울처럼 보였다. 상업영화라는 메커니즘은 사실 할리우드가 백여 년 만에 만들어낸 것일 뿐인데, 이걸 믿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이걸 근거로 삼을만한 것인지 헷갈리더라. 맹신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요즘 시스템이 우울한 건 창작자로서도 스스로 과연 이게 상업적으로 될까라는 생각에 얽매여야 한다는 거다. 지금 시스템은 영화 한편 찍어서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장될 수 있는 각박하다. 내가 생각하는 여러 모양의 영화를 여러 루트로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확보된 게 아니라 지금처럼 몇 개의 투자사와 제작사가 산업적으로 차지하는 파이가 큰 상황에서 거기서 143.5cm같은 허울 같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대로 찍어야 관객이 좋아하는 거라고 요구하는 것들을 스스로의 고민을 포기한 채 수용해야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으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걸 온전히 지키고 표현하는 감독들은 이런 상황에서 몇이나 될까. 물론 관객이 즐겁게 보길 바라지만 관객이 즐겁게 보는 영화의 공식은 누가 무슨 근거로 쥐고 있는 건지, 우린 왜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 건지, 그런 고민을 부르는 지점이 있다.
어쨌든 공동작업이었던 전작과 달리 개인으로서 이름을 올린 첫 작품인 만큼 의미가 남았을 텐데. 다른 건 모르겠고 이런 거 하나는 있는 거 같다. 언젠가 해영이도 똑같이 느낄 건데 사실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설득이다. 아무리 힘들고 지난해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설득 당하는 과정 속에서 좋은 작품이 나온다. 그래서 그 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둘이서 작업할 때는 그 과정을 우리끼리만 한 거 같다. 그게 한편으로 좋고,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대부분을 우리 안에서 만족하고 끝내버리면 다른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나누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소홀함이 발생할 수도 있다. 어쨌건 나는 그 대상들과 다 함께 소통해야 되는데 두 사람의 소통이 너무 강력하니까 이미 설득의 과정을 둘에서만 해소하게 된다. 이번 영화는 어쨌거나 편한 설득의 대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내가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노력을 배우와 스태프들과 나누게 됐다. 덕분에 영화를 찍는 과정이 이래야 되는 거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둘이나 하나나 외롭긴 매한가지더라.
아무래도 혼자가 됐다는 게 오히려 더 열릴 수 있는 계기가 됐나 보다.
그전엔 감독의 고민은 감독들끼리 알아서 하고 있을 거라고 느꼈다. 지금은 감독의 고민과 방향에 대해 스태프들이나 배우들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어느 지점까지 가고 있는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어느 지점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 이런 걸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게 된 거지.
강우석 감독이 제작에 관여했다. 사실 강우석 감독은 상업적인 마인드가 강한 감독이다. 반면 <김씨표류기>는 실험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강우석 감독의 선택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아까 그 143.5cm의 허울을 근거라고 계속 제시하는 제작사 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석 감독님은 투자자이기 전에 선배감독님이기 때문에 이야기나 영화 본연의 재미를 봐주셔서 투자가 이뤄지고 제작이 가능해진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실 믹싱 때 즈음 내가 오히려 배우와 흥행의 압박을 느끼고 원래 계획되지 않았던 것 가운데 더 해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음향적인 뭔가를 더 추가했었다. 그런데 그걸 딱 보시더니 영화 잘 만들어놓고 너무 쓸데없는 요소를 많이 넣었다고, 왜 코미디의 품위를 스스로 떨어뜨리냐고 하시더라. 개봉 직전에 코미디의 품위를 말할 수 있는 한국의 유일한 투자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투자자와 과연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정말 많은 용기가 됐다.
<김씨표류기>외에 영화화를 생각하는 다른 이야기가 3개 정도 더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이야기였을까.
시나리오도 아니고, 시놉시스가 있었던 것도 아닌 구상 단계라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건 아니다. 다만 앞으로도 좀 다양하고 많은 걸 해보고 싶다. 지금 슬슬 너무 아기자기하고 영화의 묵직한 힘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듣고 있는데 덕분에 콤플렉스 같은 것도 쌓이기 시작했다. 직업감독으로서,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판단의 요구를 받게 될 때가 온 거 같다. 뭔가 다른 걸 할 수 있는 감독으로 정형이 되야 할 시점이다.
<천하장사 마돈나>나 <김씨표류기>와 전혀 다른 영화에 도전해야겠다는 건가?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직업감독으로서 ‘이런 건 못하잖아’, 아니면 ‘계속 또 그것만 해’, 그런 시점들이 생길 거다. 내가 작가가 아니라 직업감독으로서 영화 일을 하고 싶은 만큼 어떤 프로젝트든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시킬 수 있는 직업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조금 다른 방식의 경험도 해봐야 될 거다. 나도 진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천하장사 마돈나>에 소재의 제한이 있었다면 <김씨표류기>는 형식의 제한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속 왜 이렇게 제한을 두고 할까, 이런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 없이 애초에 남들이 다 좋아할만한 요소를 갖고 남들이 다 좋아할만한 즐거움이 담겨있는 영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욕망도 한편에 있다. 내가 아까 말하지 못했던 구상 가운데 몇 가지는 더 말도 안 되는 제한 속에 놓여있거나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전에 재영 선배와 우리 김정수 촬영감독과 술 마시면서 그런 아이템을 잠깐 얘기했더니 쌍수를 들고 반대하더라. (웃음) 물론 일종의 오기도 있다. 앞으로 점차 넓혀지겠지, 라고 남들이 생각한다면 오히려 청개구리처럼 나는 조금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갈만한 무지막지한 아이템들을 꺼낼 수도 있거든. 일단 두고 보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인간인지 더 살펴봐야겠다.
경쾌한 멜로디가 선명한 음악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김혜자의 춤사위를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절망과 안도가 체증처럼 내려앉은 얼굴에선 공유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극단적 너비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다 살풀이하듯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이는 팔은 축 져진 듯 늘어지면서도 강약을 맞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심정을 유추할 수 없게 중의적인 동작으로 절묘하게 음악과 어울리며 몸을 흔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당혹스럽지만 고요하다. 마치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전의 잔잔한 수면처럼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위태롭게 감정을 동요시킨다.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서적인 진동을 도모함으로써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과 평온의 중의적 상태 가운데서 몰입을 도모한다.
살인마로 몰린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비추는 이야기. 누구라도 분명 모정이 끓어 넘치는 신파를 예감하기 좋은 문장이다. 하지만 애초에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 신에서조차 괴담을 통해 교묘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켰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경험한 이라면 절절한 신파로 무장한 작품을 기대할 리 만무하다. 모두가 살인마라고 낙인을 찍은 아들 도준(원빈)에 대해 어머니 혜자(김혜자)는 말한다.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어미에게 모성은 숙명이다. 이성적 믿음을 판별하는 의식을 거치기 이전에 직관적인 보호본능이 둘러쳐진다. 어미의 본능이란 이성을 통해 가늠하기 어려운 본능의 영역이다. 동물적으로 유전된 습성이다. 숭고한 사명이기 이전에 무거운 십자가다. 그리고 <마더>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진범을 추적하는 스릴러이기 전에 어미의 심정을 따라잡는 심리극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잡고 울기 보단 타이르고, 진범을 뒤쫓거나,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들의 결백을 향해 전진해나간다. 누구도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모든 수순을 동원한다.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모습엔 헌신적인 페이소스보다 광기에 가까운 컴플렉스가 서려있다. 모성이란 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마더>는 서사적으로 나아가나 서정적이며 심리적 밑바닥까지 헤집는 표정으로 감정의 옆모습까지 그려낸다. 암전된 공간과 배경에서 밀려난 여백은 때때로 서스펜스의 은신처가 되며 배우들은 수집된 감정의 개체 수를 가늠할 수 없게 너른 표정을 드러낸다. 특히 김혜자는 <마더>가 김혜자의 얼굴에서 시작됐다는 봉준호 감독의 고백을 온전히 증명한다. 순수한 광기는 맹신으로 나아가 착란에 도달하고 이내 잔인한 절망의 수순으로 돌입한다. 그 모든 과정의 합리가 김혜자의 얼굴을 통해 이뤄진다. 김혜자의 얼굴은 <마더>를 위해 마련된 최적의 자질이자 유일무이한 시작이고 끝이다.
수없이 흩어진 별개의 지점처럼 인식되는 스토리가 결국 단계적인 복선으로서 재차 의미를 발생시키며 하나의 맥락을 구성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물론 발화점의 온도를 붙이기까지의 시간이 길게 요구된다는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온도가 상승한 이후로 이야기는 급격하게 가속을 시작하고 이내 극한까지 내달린다.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개별적인 지점의 사건들을 하나의 맥락에 놓인 복선으로 꿰어가는 이야기 구조가 탁월하다. 동시에 <마더>는 사실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스릴러에 가까운 형태로 직조된 이야기지만 실질적으론 ‘누구’보단 ‘무엇’에 의문의 무게가 실리는 영화다. 어머니는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따라 걷지만 관객은 끊임없이 아들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예상과 동떨어진 모자의 전사가 드러나기도 하고,-박카스- 그 관계에 대한 불순한 관점이 동원될만한 중의적 언어가 동원되기도 한다.-잔다-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러의) 비범한 결단에 가까운 결말의 태도를 확정 짓게 만드는 계기 역시 그 목격에서 비롯된다. 지독한 어미의 본능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기 파괴의 행위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과정을 이끄는 믿음의 기반이 어떤 진실에 맞닿았고 이를 통해 어머니가 무엇을 결심했는가를 지켜보게 된다는 의미와 같다. 그 결심은 객석에 충격을 전하지만 관객이 비명 지르기 보단 숨을 멎게 만든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이례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영화다. 로케이션 비중을 극대화시킨 <마더>의 광활한 풍경은 풍요롭기에 더욱 예민하다. 때때로 혜자의 걸음을 수평선의 구도로 원경으로 찍어낸 광경은 애환적이며 인물을 측면에 밀어 넣은 채 온전히 배경을 삼킨 카메라의 구도는 거대한 배경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소외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이에 곧잘 상반되게 인물의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메워 넣곤 하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역동적인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보다 깊고 너른 감정의 영역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특히 인물과의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구도적 변화는 개별적인 영역에서 좀 더 세심한 관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의 극적인 몰입을 가중시킨다. 처음으로 2.35:1 와이드 비율의 화면 비를 선사하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는 <마더>는 그만큼 풍요롭고 섬세한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자리한 인물의 예민한 심리를 더욱 모나게 드러낸다. 특히 대비적인 움직임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도입부와 결말부는 <마더>의 입구와 출구로서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음악의 기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오프닝 신을 비롯해 음악과 시퀀스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답습이라 지적될만한 결과라기 보단 참신한 복기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사건이 얼마만이냐.”라는 대사처럼 한적한 도회지의 형사들은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뻔뻔하진 않아도 여전히 직감에 의존해 사건을 마무리 짓는데 급급하며 졸속적인 수사방식으로 무능을 전시한다. 동네 바보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강압적 회유는 되풀이되고 용의자의 바지를 벗기는 지하실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범인의 현장검증은 여전히 난장판이다.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반대말의 의미로 해석될만한 상황이다. <살인의 추억>의 경찰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무능을 가리려는 시도를 보인다면 <마더>의 경찰들은 무지의 소산으로 밀어붙인 불확실성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무능력을 또 한차례 노출한다. 결국 그 반대말의 끝은 <살인의 추억> 못지 않게 무게가 엇비슷한 정서적 허탈감으로 도달한다는 점에서 동일해진다.
<마더>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정황을 지니고 있다면 인물이 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중압감은 간접적으로 <괴물>에 맞닿아있다. 현서를 찾아 괴물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가족과 진범을 찾기 위해 의심스러운 단서의 현장을 몰래 탐색하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의 혈육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가족이 어머니 개인으로 축소됐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동선이 단선적으로 뚜렷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잠입한 어머니의 은폐가 어떤 목격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괴물의 본거지인 하수구에 끌려온 현서가 괴물을 피해 하수구 구멍에 은둔하며 괴물을 관찰하는 상황과 비슷한 긴장감을 이룬다. 또한 어두운 음영을 통해 도진이 바라본 것을 관객으로부터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 단서의 은폐를 확보함으로써 의문의 지속을 유지하고 사각지대의 음산한 서스펜스를 확보한다는 점에서도 출몰의 위협을 물리적으로 구사하던 <괴물>의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란 점에서 동일하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고,(<플란다스의 개>) 살인마를 수사하고,(<살인의 추억>)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괴물>) 진범을 추적한다.(<마더>)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애완견과 보지 못한 살인마, 그리고 구할 수 없었던 딸을 맞이했던 것과 달리 <마더>는 유일하게 자신이 쫓는 상대를 목격하게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동네에서 혈혈단신으로 진범을 찾아 나서는 어머니의 본능적 결의는 결국 결실을 이룬다. 어미의 본능만이 유일하게 제 목적을 이룬다. 뒤늦게 자신이 짊어진 어미라는 십자가가 자신을 골고타 언덕으로 이끌어 채찍질하고 못박히게 만들었음을 뒤늦게 체감한다 해도 만신창이가 된 제 심정을 억누르고 제 새끼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본디 그 어미의 본능에 걸맞은 숙명이라는 것을 육체적 행위로 증명한다. 동시에 사건의 주변부에 놓인 이미지를 통해 시대와 정치적 풍자를 거두던 야심도 <마더>에선 최대한 배제됐다. 무능한 경찰의 이미지는 <살인의 추억>처럼 시대적 열악함과 정치적 불공정을 겨냥하는 수단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위트의 수단이 되고 사건의 전개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될 뿐이다. 지난 세 편의 전작이 동맥과 정맥 주변부의 모세혈관의 흐름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마더>는 오로지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다. 정맥의 판막을 거쳐 멈춰서면서도 서서히 전진하던 이야기가 비로소 심장을 거쳐 동맥으로 뻗어나가듯 가속적이다.
창문은 <마더>에서 종종 관객과 인물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중계 창처럼 활용된다. 관객은 그 창을 통해 영화적 상황으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그 상황의 목격자로서 자리잡아야 한다. 창 너머엔 함께 식사하는 모자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비추는 저편의 진실이 걸어나가는 풍경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두 광경은 모두가 진실이다. 백숙을 찢어 아들에게 먹이려는 어머니의 모습도, 창을 따라 걷는 살인자의 얼굴도 거짓이 아니다. 관객은 두 번의 식사광경을 양 끝에 두고 그 가운데 살인의 목격자가 된다. 양 끝의 이미지는 동일하다. 구도까지 일치한다. 하지만 그 풍경은 대비적이다. 더 이상 온전히 같은 풍경으로서 인식되지 않는 생소한 광경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창 너머의 모자는 같은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간다. 모든 것을 감당한 어머니는 구태의연하게 아들을 위해 어미로서의 본능으로 제 부서진 삶을 가다듬고 일상을 반복한다. 아들을 위해 흐르는 오줌을 지우는 것도, 피를 닦아내는 것도 그 어미의 몫이다.
여기서 모성애는 숭고하다거나 찬사를 얻을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평생을 짊어져야 할 어미의 업(業)처럼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형(刑)과도 같다. 어미는 결국 괴물이 되어 제 자식을 구하고, 평생 살인의 추억을 한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 ‘새끼 잃은 어미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한다.’하지만 정작 어미는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저 제 새끼의 체취를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감히 그 삶이 어떠하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다 제 어미의 삶을 밟고 살아온 그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마더>는 모성애라는 숭고함을 벗겨낸 어미들의 상처와 같은 삶에 바치는 지독하게 순수한 헌사다. 무엇보다도 국민엄마라는 박제 같은 타이틀로 치장된 이미지를 부수고 김혜자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닌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것만으로도 <마더>는 이미 훌륭한 성과로 시작된 작품인 셈이다.
일 때문에 바쁘기만 한 부모의 무관심이 원망스러운 코렐라인(다코타 패닝)은 새롭게 이사온 집을 구경하던 중 작은 문을 발견한다. 벽으로 막혀있던 문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코렐라인은 결국 그 문이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임을 알게 되고 그 곳에서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인형 눈의 부모를 만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인형눈을 한 그 곳은 코렐라인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된 세계다. 일에 매달리는 진짜 부모와 달리 가짜 부모는 코렐라인에게 헌신적이고 자상하다. 하지만 단추를 단 눈은 때때로 기괴하며 음침한 예감을 부른다.
인형을 새롭게 봉제하는 바느질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출발하는 도입부는 인형과 바늘의 이미지를 통해 순수함과 불길함이라는 양면성을 재단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코렐라인: 비밀의 문>(이하, <코렐라인>)의 상상력을 온전히 대변한다. 팀 버튼의 원작을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연출한 <크리스마스 악몽>의 헨리 셀릭 감독의 새로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인 <코렐라인>은 <크리스마스 악몽>만큼이나 불길하고 순수한 악몽의 세계다. 세계적인 작가 닐 게이먼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코렐라인>은 동화적 세계관을 구술하는 텍스트를 표현력이 풍부한 이미지로 치환하고 새롭게 각색한다.
닐 게이먼이 창작한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완성된 <코렐라인>은 이미지만큼이나 독창적인 세계관을 품은 스토리텔링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이다.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는 코렐라인이 현실로부터 느끼던 결핍을 우연히 발견한 비밀의 문 너머의 충족시켜나간다는 사연은 오늘날 어린이들을 고립시키는 어른들의 무관심과 맞닿아있으며 이에 대한 부모들의 책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계몽적이다. 그러나 마치 음침하게 변주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판타지 버전같기도 한 <코렐라인>은 자연적이고 순수한 동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괴하고 음흉한 괴담의 기운을 그려넣는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을만 하다. 부모의 애정을 갈구하며 현실 안에서 결핍을 쌓아나가던 코렐라인이 우연히 발견한 비밀의 문 너머의 세계에서 부모와 빼 닮은 단추눈의 부부를 만나 그들이 제공한 환상적인 공간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과정은 순수한 아이들의 꿈을 대변한다. 그러나 친부모 몰래 매일같이 비밀의 문을 건너 대리만족을 만끽하던 코렐라인의 미소는 점차 위협적 예감으로 일그러진다. 단추눈의 불길함이 흉악한 송곳니를 드러내는 순간, 동화적 모티브에 가려 있던 악몽의 채색이 짙어진다. 코렐라인의 긴장감이 이미지를 타고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된다.
상반된 공간의 특성을 대변하는 대비적 이미지는 <코렐라인>의 세계관을 수식하는 미사여구로서 탁월한 기능성을 발휘한다. 특히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틀에 3D입체영상의 날개를 단 이미지는 기능적인 효과보단 입체적 감각 그 자체가 중시될만한 독창적인 이미지의 카니발을 선사한다. 스톱모션의 분절된 연속성은 물리적인 입체감을 구현하는 동시에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보존한다. 물리적 특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비주얼은 호러적인 긴장감을 연출하거나 캐릭터의 심리적 두려움을 생동감 있는 물리적 형태로 반영하는데 있어서도 효과적이다. 다만 아동 취향의 동화적 색채가 강한 소설을 원작으로 두는 만큼 이야기의 기본 맥락은 지극히 단순하고 지극히 교훈적인 결말도 상투적인 감상을 부른다. 이미지의 입체감에 비해 스토리의 평면성은 완전히 극복되지 못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코렐라인>은 수공예적인 제작방식만큼이나 풍부한 감수성으로 이뤄진 이미지의 체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통해 완벽한 인공적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요즘의 애니메이션의 월등함을 제치고 <코렐라인>의 진보된 투박함을 권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동화와 판타지를 아우르는 순수한 상상력이 황홀한 이미지의 날개를 달고 악몽의 카니발을 선사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균형이 황금비율을 이루는 <코렐라인>의 황홀경은 감성적 체온이 느껴지는 기술의 진보를 설명할 수 있는 성과 그 자체다.
헤비메탈의 하위장르 중 하나인 데쓰메탈은 죽음과 악마 숭상의 뉘앙스를 연출하는 가사와 퍼포먼스라는 외부적 형태가 특성으로 정착된 장르다. 흉악한 가사와 극악한 무대 매너를 통해 광적인 팬덤을 형성한 세기말적인 장르는 그 폭력성을 방출하는 의식적 행위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발생시킨다. 메탈 음악이 메인스트림을 석권한 핀란드나 동유럽의 국가 중 실질적으로 죽음을 추앙하는 데쓰메탈 그룹이 존재한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뮤지션 대부분은 무대와 일상이 분리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디트로이트 메탈시티>(이하, <DMC>)는 그런 현실성에 착안한 설정을 허구적 캐릭터와 스토리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특히 장르적 구별 없이 음악산업의 인프라가 전방위적으로 구축된 일본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에서 이를 소재로 둔 만화가 등장했다는 것도 딱히 놀랍지 않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과 같은, 자칭 스위트 팝 가수를 꿈꾸는 네기시 소이치(마츠야마 켄이치)는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도쿄에서 가수가 되기 위해 기획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스위트 팝이 아닌 데쓰메탈 밴드 ‘디트로이트 메탈시티(DMC)’에서 극렬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악명을 떨치는 ‘크라우저 2세’로 활동하며 신분을 속이며 살아간다. 지극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네기시 소이치가 짙은 분장으로 제 얼굴을 감추고 무대에 올라 크라우저 2세로서 과감한 퍼포먼스를 펼쳐낸다는 설정은 욕망과 현실이 괴리된 캐릭터의 부조리를 유머로 치환한다. 특히 와카스키 키미노리의 동명 원작만화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영화적 상황으로 반영한 <DMC>는 유치하듯 쾌활하고 황당하듯 기발하다. 물론 때때로 지나치게 진지한 척을 하며 간지러운 페이소스를 주입하는 광경이 발견되기도 하나 전반적으로 엉뚱하게 전개되는 상황의 위트가 독창적인 매력분포도를 이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마츠야마 켄이치다. <데스노트>영화판에서도 L을 연기했던 전력이 있는 마츠야마 켄이치는 <DMC>에서도 소심한 네기시 소이치와 과격한 크라우저 2세를 오가며 만화캐릭터 전문배우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탁월하게 캐릭터를 소화했다. 만화적인 독창성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영화적 사실감을 만족시킨다. 자칫 잘못하면 코스프레 수준의 유치함으로 몰락하기 좋은 캐릭터를 영화적 형태로 구현한다. 결국 <DMC>의 특이성을 보장하는 캐릭터가 성공적인 표현력을 갖춘 덕분에 영화적 설정 역시 힘을 얻는다. 또한 영화는 원작의 주요한 에피소드를 영화화에 고스란히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서사의 변주를 통해 영화적 가능성을 그려나간다.
물론 <DMC>는 유치한 슬랩스틱 개그처럼 가볍고 산만한 웃음을 주는 영화다. 여기서 가볍고 산만한 웃음은 깊이에 대한 지적이라기 보단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다. 대단한 교훈에 도달하거나 걸출한 각본으로 승부하는 영화라기보단 재기발랄한 캐릭터와 황당한 소동극으로 무장한 개그콘서트나 다름없다. 원작과 달리 과하게 변주된 드라마가 종종 간지럽지만. 흉폭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과격한 퍼포먼스를 구사하는 크라우저 2세와 순진하지만 소심한 우엉남 네기시 소이치 사이를 오가는 에피소드는 효과적인 웃음을 제공한다.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적 형태의 드라마로 변주된 영화는 매니악한 소재를 보편적인 드라마로 엮어낸 원작만큼이나 즐겁다. 취향의 제한이 엄격하지 않다면 음악영화로서의 묘미도 만끽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