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오랜 역사는 폭력과 맞물려 왔다. 야만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진입한 현대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폭력의 상흔이 발견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폭력적 역사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연출된 스크린 너머의 풍경엔 인간이, 인간의 신념이, 인간의 신념이 잉태되는 시대가 있다. 신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리는 인간은 추구하는 신념에 따른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때때로 폭력을 발화시키며 시대를 덥힌다. 폭력을 등에 업은 신념이 시대를 가열시킨다. 기록된 폭력은 역사가 되고 인간과 함께 끊임없이 사유된다. 폭력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가치인가. 그리고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어떻게 기억될 수 있을까. <바더 마인호프>의 화두는 분명 그렇다.
1967년, 이란의 전제군주인 ‘팔레비 샤’왕가가 서독을 방문한다. 베를린에서 그들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발생하고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적 진압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한 대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폭동에 가까운 시위를 일으키고 극단적인 테러를 자행하는 반정부적 조직 ‘독일적군파(RAF: Red Army Faction)’가 창설된다. 안드레아스 바더(모리츠 블리입트로이)와 그의 연인 구드룬 엔슬렉(요한나 보칼렉)을 주축으로 한 이 청년단체는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 폭탄테러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본격적인 조직의 방향성을 알린 뒤 시민들의 지지마저 얻는다. 이 사건으로 투옥됐지만 이듬해에 가석방된 이들은 본격적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이들을 지지하는 진보적 언론인 울리히 마인호프(마르티나 게덱)는 독일적군파를 행위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연방경찰국장 호르스트 헤롤드(브루노 간츠)는 이들의 뒤를 쫓는 동시에 그들의 심리를 추적한다.
2시간 30여분의 시간이 증명하는 건 폭력의 전진이다. 이란의 전제군주를 맞이하는 서독 정부가 시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폭력을 선택한 것처럼 정부에 반발한 시민의 일부는 폭력에 대항한다는 명분아래 폭력을 자행한다. 대립의 형태로 맞선 신념의 구도는 점차 극단적 행위의 대결로 번져나간다. 폭탄 테러를 자행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시민들의 암묵적 동의를 거치는 독일적군파는 점차 그 행위적 명분을 둘러싼 내부적인 갈등에 시달린다. 극단적 행위를 통해 신념을 관철하려는 바더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직을 장악하며 테러리즘에 가까운 행위적 목표를 추구하지만 이성적인 방식의 설득을 중시하는 마인호프는 이를 경계하고 우려하며 바더와 대립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올가미에 걸려 검거되거나 이에 맞선 총격전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는 단원이 늘어가고 조직은 점차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바더 마인호프>는 혁명과 테러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위치를 점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역사의 몸통 위로 카메라를 들이민다. 혁명가와 테러리스트 사이에서 자리한 독일적군파에 대한 가치평가를 걷어내고 건조하고 묵묵한 다큐적 질감의 영상을 가미하며 의문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한다. 물론 <바더 마인호프>를 온전한 리얼리즘 필름의 시선으로 주장될 수 있는 작품인가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인 ‘슈테판 아우스트’의 저서 ‘신화의 시간(국내 출판명, 원제 ‘The Baader Meinhof Complex’)’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온전한 역사의 현장을 관통하기 보단 그 주변부에서 제기된 하나의 가설적 형태로서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으로서 인정받을 때 보다 정당해진다. 동시에 <바더 마인호프>가 역사적 증언을 목표로 둔 영화라기 보단 그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서 논의의 진전을 꾀함으로써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작품이라 정의할 때 이런 배후에 대한 설득력이 보다 힘을 얻을 가능성도 크다. 자국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지표를 외부자가 온전히 파악하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윤리적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기록에 근거를 둔 형태의 역사를 스크린에 재현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건 그 역사에 대한 새로운 증인들을 양산해낸다는 점이다. 그 시대를 바라보고, 현장을 지켜보는 행위를 통해 역사적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가치에 대한 논의를 진전한다는 것이 <바더 마인호프>의 궁극적인 가치다. 혁명과 테러를 오가는 역사적 정의 가운데서 사실에 대한 평가를 배제하고 현상의 근본을 탐구하게 만든다. 특히 <바더 마인호프>가 그리는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이 단지 그들에게 국한된 역사적 장면이라고 대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더욱 중요하다. 혁명이냐, 테러냐,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쉽게 논하기 어려운 건 그 시대가 머금은 광기가 선의를 악의로 잠식하고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게 진전시키는 까닭이다.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청년들이 폭력의 또 다른 주체가 되길 결심하고 죽음과 파괴를 전시하는 광경을 지켜볼 때 커다란 대의의 전진이 아닌 세계의 또 다른 몰락이 목격된다. 양극단으로 몰린 세계의 두 축이 강하게 맞부딪히는 순간 또 한번 세상은 어지럽게 들뜬다.
시민들의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정부의 강압적 정책과 이에 반발한 청년들이 자행하는 반국가적 테러를 묘사하는 영화적 시선엔 당위를 따져 묻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관객들은 혁명의 기운에 도취되다가도 테러의 현장 가운데서 깨어나야 한다. 그 가운데 발생하는 물음표에 매달릴 수 밖에 없지만 영화는 그저 혼란의 도가니로 관객을 끌어들이고 방치한 채 무심하게 서사를 전진시킬 뿐이다. <바더 마인호프>는 그 역사의 가치를 설득하거나 부정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 시대의 광기를 먹고 자란 괴물의 형태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자신들의 가치관을 관철하려는 인간들의 대립은 가치판단의 영역을 넘어 대상의 파괴로 변질되어 나간다. 본질은 훼손된 채 극악하게 가중되는 상황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만약 <바더 마인호프>의 곳곳에서 기시감을 느낀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1970년대 독일의 살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건 분명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가치관의 명분과 동떨어지게 발생하곤 하는 극단적 성질의 폭력은 좌우의 개념으로 편을 가른 이념의 극단적 대치 상황이 예감되는 대한민국의 현재와 쉽게 연결될만한 풍경이다. 거기서 무엇을 찾을 것인가는 결국 개인의 권한이다. 무엇이 괴물을 잉태했나. <바더 마인호프>가 발생시킬 궁극적 가치는 그 물음에 도달할 수 있는가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독일을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기이하게도 그 현장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이미 우리 주변에 잉태되고 자라나기 시작한 괴물의 흔적들을 인지하게 되는 까닭은 아닐까.
달콤한 막대사탕처럼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풍선이 한 가득 하늘을 메운다. 푸른 잔디가 자라는 작은 정원 위로 떠오른 아담한 집 모양 그림자가 드리운다. 방 안에 앉아 비행선을 타고 세계를 모험하는 꿈을 꾸던 소년의 상상처럼 집이 날아오른다. 빌딩 숲을 지나 구름을 스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을 타고 모험을 시작한다. <업>은 거짓말 같은 꿈을 진담처럼 그려내는 작품이다. 내려앉은 집 안에서 하늘을 날아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모험을 꿈꾸던 소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자신의 피앙새와 다짐했던 꿈을 띄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 꿈은 이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집단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픽사(PIXAR)’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수많은 풍선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집과 그 집에 사는 노인, 그리고 그 집을 찾은 소년의 모험담이다. 세계에서 유래 없는 성공담 <라따뚜이>와 우주 최강의 SF로맨스 <월-E>까지, 픽사의 근작들은 CG 애니메이션을 회화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해도 손색이 없는 장관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탄탄하고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연출력을 통해 수려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픽사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모험담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이다.
비행선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떠난 모험가 찰스 먼츠를 동경하던 소년 칼 프레드릭슨은 마찬가지로 모험을 동경하는 소녀 엘리를 만나게 된다. 우정으로 시작된 소년, 소녀의 인연은 로맨스로 거듭나고 백년가약의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결혼 후에도 파라다이스 폭포로의 모험을 기약한 채 꿈을 저축해나가던 칼과 엘리는 먹구름처럼 일상으로 끼어드는 예측불허의 일상 속에서 꿈을 미루고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저금통을 부수고 또 부수다 얼굴 가득 세월의 흔적만 고스란히 쌓아나간다. 칼의 유년시절에서 출발해 칼과 엘리의 서사를 압축한 무성 시퀀스를 지나 노년이 된 칼의 모습에 다다르는 <업>은 비로소 본격적인 말문을 연다.
칼과 엘리의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여정을 간략하게 넘겨가는 무성 시퀀스는 짧은 순간에 진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농축시킨다. 그 짧은 서사는 <업>의 서사를 본격적으로 부양시키는 풍선과도 같다. 풍선에 매달린 채 하늘로 떠오르는 집이라는 비현실적 광경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건 그 광경 자체가 주는 동화적 아름다움, 혹은 그 광경을 둘러싼 실제적 풍경의 생생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이루기 위한 인물의 결심이 설득력 있는 진심을 전달하는 덕분이다. 비현실적인 동화적 소재에 감정적 색채를 입히고 스토리에 현실성을 주입함으로써 영화를 부양시킨다. 짧은 순간만으로 뚜렷한 정서적 감동이 각인된다.
사별한 부인과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모험을 결심하는 칼과 우연찮게 이에 합류하게 된 탐사대 소년 러셀을 중심으로 전진하던 모험담은 말하는 개 더그를 비롯해 희귀 새 케빈까지 끌어안으며 예상 경로를 이탈해나간다. 사실상 <업>의 서사는 명확한 만큼 단순하다. 하늘을 나는 집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칼과 러셀의 여정을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건 재기발랄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다.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집, 그리고 풍선처럼 떠오른 집을 몸에 매달고 다니는 인물들, 통역기를 부착한 덕분에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개 등, <업>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차례로 등장시키며 창의적인 설계도면을 마련한다. 모험을 동경하던 유년시절을 잊지 않은 노인의 모험담은 요리하는 쥐의 성공담이나 미래로봇들의 로맨스만큼이나 순수하고 창의적인 스토리와 세계관을 품고 있다. 동심 어린 소년의 꿈처럼 순진하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기 발랄한 유머, 형형색색의 캐릭터로 치장한 스토리는 달콤하면서도 풍요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이미지 역시 <업>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다. 알갱이 하나하나에 컬러를 입힌 듯 다채롭고 선명한 색감을 자랑하는 포도 모양의 풍선이 푸른 하늘을 수놓으며 날아오르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탐스럽다. 자연적인 색채 감각과 사실적인 이미지를 누비는 캐릭터들은 그 활약상만으로 실사적 현장감과 만화적 개성을 아우른다. 한편 픽사에서 최초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업>은 사실상 3D기술을 시각적 자극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단 이미지의 표현방식으로서 수용한다.-여기서 '3D'란 단지 3D렌더링 과정을 통해 공간감을 획득한 CG애니메이션을 손쉽게 지칭하기 위해 국내에서 와전된 형태로 통용된 '3D 애니메이션'이란 용어와 다른 의미인 입체 상영 방식의 3D영화를 지칭하는 의미로 활용됐다.- 즉물감을 부르는 입체효과를 관객의 시각적 눈요기로서 내보내기 보단 공간감을 확보하고 이야기의 생동감을 보좌하는 촉매로서 장치한다. 매 작품마다 이야기를 최우선의 가치로 우대하는 픽사의 모토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산업의 새로운 개척지로 지정된 3D 애니메이션의 세계관 안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업>은 그 방향성을 짐작하게 하는 나침반이나 다름없다. 또한 <업>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한국어 더빙의 사례로 꼽혀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외국산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의 한국어 더빙이 대부분 아동들을 배려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과 달리 <업>의 더빙은 되레 또 다른 형태의 매력을 가미했다 해도 좋을 만큼 탁월하다.
순수한 에너지를 동력으로 사뿐히 날아오르는 <업>은 선명한 꿈을 꾸는 영화다. 현란한 스펙터클도, 빠른 속도감도, 대단한 긴장감도, 거대한 스케일도, <업>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업>에 엄지손가락을, 아니, 두 손을 번쩍 들어 지지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실로 투명한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유년시절의 모험을, 순수했던 한 시절에 가능했던 상상의 나래를, 지극히 순수하게 눈 앞에 그려낸다. <업>은 감동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명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픽사는 또 한번 관객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선물한다. 사랑할 수 있는 영화를 선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백을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픽사가 지닌 로맨틱한 재능이다.
<두사부일체>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색즉시공>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1번가의 기적>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이 질문에 수렴할만한 정답은 <해운대>. 단지 제목은 변경돼야 한다. 또한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었을 때 가능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나미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테헤란 거리 한복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구덩이로 빠뜨리면 그 영화 제목은 <테헤란>이 될 지도 모른다. 농담이냐고? 글쎄.
적어도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쓰나미를 기대하고 <해운대>를 찾은 관객이라면 1시간 30여분의 드라마를 견뎌야 한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파괴적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건 분명 그 이후에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 1시간 30여분을 채우는 건 옴니버스적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드라마다. 서사의 시작은 이렇다. 내륙에서 먼 바다까지 어업을 나섰던 배 한 척이 거센 폭풍우에 휘말렸고 그 배에 탑선해 있던 연희(하지원)의 아버지가 무거운 철망에 깔려 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안간힘을 쓰지만 무거운 철망은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 구조헬기에 탑승하게 된 만식(설경구)은 죽음을 방조했다는(, 그리고 그와 함께 병행되는 본질적) 죄책감과 연희를 향한 모종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연민으로 연희의 삶을 돌본다.
<해운대>는 서사적 할당량에서 우위를 점한 만식과 연희의 사연 외에도 평행 나열되는 둘 이상의 관계를 확보하며 드라마의 너비를 벌린다. 쓰나미를 경고하는 지질학자 김휘(박중훈)와 그의 전부인 유진(엄정화), 만식의 동생인 해양구조대원 형식(이민기)과 서울에서 내려온 삼수생 희미(강예원), 그리고 연희의 동창이자 동네 백수건달인 동춘(김인권) 등, 다양한 인물의 서사가 평행적인 시선으로 나열된다. 다양한 인물들이 제 각각의 사연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드라마의 너비는 확장된다. <해운대>는 다분히 전략적으로 사연을 확장해 나간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쌓여 올린 드라마가 일거에 초토화되는 순간, 신파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우호와 갈등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아나가던 캐릭터들이 쓰나미 한방에 서로의 손을 잡고 뛰거나 부둥켜안으며 끝을 예감하거나 죽음을 각오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해운대>가 의도한 궁극의 드라마다.
쓰나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파괴를 위해 축조된 건물이나 다름없다. 진전되는 인물의 관계 속에서 한발씩 전진하는 사연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일거에 전복되는 비극적 참상은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분명 효과적이다. 서사의 층위를 쌓아 올리고, 관계의 너비를 확장하던 드라마가 파괴적 재난 앞에서 일순간 무너지는 광경은 참담한 심경을 부른다. 특히 ‘부산’과 ‘해운대’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국내 관객에게 이색적인 기시감을 부를 만하다.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를 통해 이국적 풍경을 바탕으로 둔 재난 스펙터클을 감상해온 국내 관객들에게 <해운대>가 선사하는 국내 입지의 재난 광경은 보다 생동적인 감정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파괴적 이미지가 클라이맥스로서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발생시킨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혹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위용처럼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투자한 대작이다.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한 CG는 분명 할리우드의 수준과 비교하자면 보다 떨어지는 결과물임에 틀림없지만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다면 배려가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들여 만든 드라마다. <해운대>에서 쓰나미의 역할이란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를 전복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기능한다. 생각해보자면 그 전까지의 서사는 너비를 벌릴 뿐, 어떤 갈무리가 없다. 그저 한방의 이미지를 통해 서사적 구조가 일거에 무산되는 형식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거대한 자본을 투영해서 만들어놓은 인위적 이미지가 사실상 드라마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는 건 어딘가 괴상하다.
<해운대>는 일상적 풍경의 파괴를 통해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쓰나미로 인해 초토화되는 해운대의 모습 속엔 거센 물살에 밀려나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비극적 파토스로 가득하다. 일상적 공간이거나 특별한 휴양지로서 ‘해운대’가 지닌 보편성의 특성 안에서 펼쳐지던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침몰되고 수장된다. 가학적인 유머와 서민적 풍경으로 가득했던 1시간 30여분의 서사가 침몰된 이후로 몰아치는 비극적 신파는 지난 서사의 광경들을 모조리 추억으로 치장해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쓰나미 이전까지의 서사가 지닌 단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건 엄연히 반칙이다. 후반부를 위해 직조된 것에 틀림없는 재난 이전까의 드라마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직됐다기 보단 너비를 벌리기 위해 이어 붙인 형태적 사연으로서 종종 선명한 틈새를 드러낸다. 평행적인 비중으로 나열되는 캐릭터 역시 각자 부여 받은 사연의 완성도 안에서 매력의 편차를 발생시킨다.
사실상 <해운대>의 드라마가 뛰어난 밀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오락)영화가 뛰어난 밀도의 드라마로서 오락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의 형태를 통해 평가를 얻기 마련이다. <해운대>는 자신이 설계한 드라마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그 평가로부터 한 발 달아난다. 만약 <해운대>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이름으로서 자부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해운대>는 단지 파괴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이미지를 통해 드라마의 약점을 눈속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례를 드러낼 뿐이다. 사실상 한국적 환경을 제외하면 <해운대>가 ‘한국형’이라고 불려야 할만한 이유도 막연하다. 단지 그것이 할리우드 대비 저예산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감안해야 결과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해운대>는 할리우드 재난영화들, 혹은 블록버스터들이 곧잘 발휘하는 장점과 곧잘 범하는 단점마저도 하나의 상투성으로 끌어들인 기성품처럼 보인다. 때때로 전시적 욕망을 위해 소모되는 시퀀스가 눈에 띄고, 상황에 걸맞지 않은 유머들이 껑충거린다.
새로운 시도와 모험은 중요하다. 다만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환경에서 빚어질 결과물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그 방식을 모방하고야 마는 욕망은 도전일까, 허세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연 실제적 가치인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쌓아온 데이터 안에서 장단점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모방해버린 결과물은 과연 한국적인가. 파괴적인 후반부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위한 볼모로서 쌓아올린 1시간 30여 분의 서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미명을 위한 제물인가? 드라마를 덮쳐버리는 스펙터클의 쓰나미가 결국 '한국형' 방식인가? 자본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만들어낸 결과물의 목적은 무엇인가. 매년 여름마다 국내 극장을 독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지 못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면 과연 그 용도는 무엇에 있나. 그렇다면 과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드라마를 파괴하는 스펙터클, <해운대>는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1시간 30여 분짜리 임시방편 드라마의 제단이다. 그게 '한국형 재난영화'라 불릴 만한 결과물이라고? 글쎄.
바야흐로 6번째 시리즈,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배우며 모험을 거듭하다 호그와트 6학년 상급생이 된 해리포터는 이제 시리즈의 졸업 관문까지 나아간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이하, <혼혈왕자>)는 결전을 향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트리위저드’ 대회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던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비극적 엔딩 이후로 급격하게 다크 판타지로 선회하기 시작하던 시리즈는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과 <혼혈왕자>에 이르러 더욱 어둡고 예민해진 낯빛을 드리운다.
사실 <해리포터>시리즈를 영화화한다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150여분의 긴 러닝타임을 투자한다 해도 따라잡기 어려운 스토리의 절대량을 줄여나가면서도 긴밀한 흐름을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해리포터>가 큰 사건의 맥락 외에도 아기자기한 소품적 에피소드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시리즈란 점에서도 서사의 여백 자체가 영화적 손실이 될 수 있다는 건 영화화 작업의 난관 중 하나에 가깝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짧은(!) 137분의 러닝타임을 투여했던 <불사조기사단>이 원작의 하이라이트 영상 편집본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얻었던 전례를 떠올린다면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혼혈왕자>의 연출자로 낙점된 데이빗 예이츠가 메가폰이 아닌 마법 지팡이라도 쥐고 있기를 바라는 심정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불사조기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혼혈왕자>에도 150여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할애됐지만 분명 원작이 지닌 미니멀한 장점들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희생양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혼혈왕자> 역시 <해리포터>의 영화화 작업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선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혼혈왕자>는 서사의 선별이란 측면에서 좀 더 과감한 선택이 뚜렷한 작품이다. 부분 3D로 제작된 <혼혈왕자>는 도입부부터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선사하며 원작의 서사를 의식하지 않은 듯 호기롭게 출발한다. 물론 <혼혈왕자>은 온전히 원작소설을 밑그림으로 두고 완성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원작의 서사를 따라가며 작은 맥락들을 절제하는 단순 작업방식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서사의 생략과 도치, 혹은 접합을 통한 재구성의 방식으로서 영화를 원작의 동의어가 아닌 유의어 수준으로 격상시킨다. 지금까지 시리즈가 소모해왔던 마법적 세계관의 눈요기가 더 이상 <혼혈왕자>의 장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듯 이미지의 과장을 절제하고 세계관의 진전에 주력한다.
8년 동안 여섯 번의 시리즈를 거듭한 만큼 <해리포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몰라보게 성장한 아이들이다. 성숙하고 농밀한 로맨스까지 연출이 가능해졌을 정도로 <해리포터>는 아동들의 모험담에서 2차 성징 판타지로 무르익었다. 더 이상 풋풋한 성장판타지가 아닌, 다크 판타지의 색채를 자랑한다. 그만큼 채도가 낮아진 <혼혈왕자>는 (지금까지 영화화된)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불길하고 암담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상 마지막 관문으로 가기 위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는 <혼혈왕자>는 궁극적으로 서사적 연결고리의 기능적 목적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를 테면 어느 정도 전작들을 복습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염두에 둔 감상자로서 상영관을 찾을 때 만족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란 의미다. 그만큼 원작의 흐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감상적 호의를 베풀 공산이 크다. 원작의 흐름을 잘 이해한 이들에게 <혼혈왕자>는 이유 있는 여운이 되겠지만 그와 동떨어진 관객에겐 어지러운 미로가 될 것 같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와 맞서야 하는 해리포터의 운명은 현재진행형에서 완료형으로 달린다. 해리포터도, 론(루퍼트 그린트)도,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도 자랐다. <혼혈왕자>는 성숙한 아이들의 2차 성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혼혈왕자>의 볼거리는 속도감을 자랑하는 ‘퀴디치’경기도, 번쩍거리는 신비한 마법지팡이도, 기억을 재생하는 ‘펜시브’도, 심지어 ‘어둠을 먹는 자’들과의 긴박한 결투도 아니다. 마법부의 기억상실 주문에 걸리는 ‘머글’이 아닌 <해리포터>의 충직한 관객들에게 <해리포터>의 세계는 더 이상 낯선 볼거리가 아니다. 이는 분명 <해리포터>가 선사하는 이미지가 그만큼 놀라운 볼거리로서 위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혼혈왕자>의 관건은 로맨스다. 더 이상 애들이 아닌 호그와트의 상급생들은 마음껏 키스하고 부둥켜 안으며 연애를 즐긴다. <혼혈왕자>에서 스펙터클의 공백을 대체하는 건 농밀한 로맨스의 예감이다. 성장한 아이들은 암울해지는 세계 속에서도 성징(性徵)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나름의 생기를 확보한다.
책 한 권 분량의 절반 가량을 덜어내며 비극적 의미를 강화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질풍노도의 운명론은 더욱 비장해질 가능성이 크다. 2편으로 나눠질 마지막 스크린 시리즈는 사실상 <혼혈왕자>를 포함한 트릴로지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혈왕자>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서사의 서막으로서 제 기능에 충실한 작품이다. 적절한 변주를 통해 서사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나름대로의 몫을 해낸다. 다만 시각적 묘미의 감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2시간 30분은 지루한 여정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결국 감상의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대한 문제는 애정과 관심의 무게를 얼마나 얹어놓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 <해리포터>가 애들이 보기엔 어둡고 무거운 시리즈가 됐다는 것. 더 이상 어리다고 놀릴 수 있는 성장 판타지가 아니란 말씀.
유일하게 제 시기에 정상적으로(?) 개봉되는 첫 영화다.
사실 다른 감독들에겐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이겠지만 나로서는 유일하게 처음으로 제 때 개봉되는 영화라서 감개무량하다.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 내 팔자가 그랬던 건데 어쨌든 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이를 잠식하는 두 가지 사건이 생겨서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맞았고, 뜻하지 않게 안티 <반두비> 세력들이 엄청난 악성 댓글을 올리는 바람에, 그래도 일단 개봉된다는 건 좋은 거지. 이번 계기를 통해서 다음 작품들은 이제 시차를 두지 않고 완성될 때마다 제 때 개봉했으면 좋겠다. (웃음)
<반두비>가 친구란 의미의 방글라데시 단어라고 들었다.
사실 현지 발음대로 부르면 ‘반도비’가 맞다. 그런데 <반도비>라고 쓰면 반도에 내린 비? (웃음) 아무래도 굳이 ‘반두비’라는 발음을 선택한 건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어감 때문이다. 이미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반두비’라는 제목의 동화책이 나왔더라. 어느 초등학교에 전학 온 방글라데시 출신 어린이와 한국 아이들의 우정을 다룬 내용인데 그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그 친근함에 필이 꽂혔다. 미국에서 ‘어륀지’라고 부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오렌지’라고 하는 것처럼, ‘머다나’보단 우리나라에선 ‘마돈나’가 익숙한 것처럼 ‘반두비’라는 어감이 내겐 느낌이 왔다. 이게 비록 외국어라서 처음 듣는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제목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유니버셜한 느낌이 나한테 와 닿아서 과감하게 제목으로 선택했다.
밝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네이밍 단계에서 이미 실현된 것 같다. (웃음)
욕심인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느낌이다. 전작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열 명 중에 한 명도 제목을 제대로 기억하는 분이 없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콤마(,)가 있다는 건데 민용준 기자도 항상 그거 안 넣더라. (웃음) 사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어려운 제목이긴 한데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My friend & his wife>, 상당히 시적인 음율이 가진 제목이 된다. 어쨌든 이번만큼은 발음하기 편한 제목을 붙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지.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영화지만 <반두비>는 그보다 적나라한 대사나 행위를 통해 현실정치를 손가락질한다.
내 작품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건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고. (웃음) 작품을 만들 때 난 항상 시대의 공기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자세를 염두에 둔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 작품을 만드는 상황이 영화에 반영된다. <반두비>를 촬영하기 직전에 격렬한 촛불 시위가 있었고, 서울시 교육감 선거도 있다 보니 그런 게 자연스럽게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배경으로 자리를 하게 되더라. 애초부터 정치적인 메타포를 넣고자 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작품을 만드는 상황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그 상황을 보는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 들어서 그렇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완성된 영화를 보다가 나도 놀라는 경우가 있고. (웃음)
<반두비>가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라고 들었다. (신동일 감독은 한 여고생이 자신이 다니던 학원선생님과 함께 부모를 살해하고 학원비를 탈취했던 사건이 <반두비>의 배경이 됐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부터였나.
정확히는 2001년 한 11월 즈음에 어느 지하철 안이었던 것 같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스포츠신문을 우연히 보다가 그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걸 무조건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긴 했지만 그걸 바로 추진할 순 없었다. 그 당시는 내가 <신성가족>이라는 단편을 만들었지만 장편영화로 데뷔하기 전이었고 그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실이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주변 여건이었으니까. 그러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완성하고 나서야 이제 본격적으로 만들어야지 싶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가능하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계속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다고 내 마음 언저리에 계속 묻어뒀던 소재가 된 거지.
그 실화가 당신에게 흥미를 부여한 지점이 궁금하다. 그 사건인가, 그 사건을 둘러싼 환경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자극적인 사건이었는데 무엇보다 내가 주목했던 건 그 사건을 일으킨 여고생을 그렇게까지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렇게까지 상황을 어긋나게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죄악을 저지른 여학생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소재에 대한 흥미보단 사회현실에 대한 분노와 개인에 대한 애처로움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 셈이지.
그런데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없었던 건가? 결국 모티브가 된 그 사건을 그대로 영화화시키진 못한 셈이다.
내가 포기했지.
그 모티브로부터 전혀 다른 형태의 <반두비>가 완성된 건 어느 연유인가?
불과 17~18살 밖에 안된, 꿈과 이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나이의 여학생이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작용해 영화를 만든 건 맞지만 실제로 영화는 그 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비록 2001년도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지금도 입시 문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걸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영화를,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극적으로 여고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라도 응원과 격려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왔지만. (웃음)
여고생이란 소재는 결국 그 실화에서 발췌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 캐릭터를 연결하게 된 착상의 시작이 궁금하다. 둘 사이엔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궁금할 거다. 실화를 재현의 소재로 다뤄서 영화로 만드는 건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 때문에 포기했지만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둔 영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반두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두 여고생 얘기로 풀자고 결심했지. 한 명은 지금의 민서처럼 가난한 아이, 또 한 명은 유정이라는 아이인데 아버지가 학원장이라서 학원 선생들이 집에 와서 개인교습을 해주는 유복한 부잣집 아이였다. 그리고 둘은 절친한 친구인데 어쩌면 여성판 예준과 재문 같은 관계라 볼 수 있는 우정 얘기로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정이라는 애는 앞날이 보장된 애다. 반면 민서라는 아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과외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용돈도 넉넉치 않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아이다. 요즘 서울대 진학하는 애들 대부분이 안정적인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들이더라. 개천에서 용 나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할 정도지. 어쨌든 내가 얘를 대학 보낼 방법을 고민하면서 찾다 보니까 사회 봉사활동으로 포인트를 얻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아이디어가 생각났고 거기서 카림이라는 제3의 인물이 나왔다. 그런데 이대로 시나리오를 썼다가 제작은 포기했다. 작품 활동 몇 번 해보고 나니까 직감적으로 이 이야기는 현재 한국에서 만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어째서?
유정이는 좀 있는 집 아이니까 있어 보이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미술비용이 많이 들 거 같았고, 그만큼 제작비가 더 들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예 유정을 날려버리고 민서와 카림 얘기로 집중하자 생각해서 카림이 남자주인공이 됐다. 그러니까 우연히 드라마의 필요성에 의해서 대상이 된 인물로 생각했던 이주노동자가 작품이 더 구체화되고 심화되는 과정에서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신과 전혀 무관한 본질은 아닐 것 같다. 사회적 약자를 캐릭터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미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본적으로 나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가 민서와 카림을 주인공으로 얘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카림이 존재적으로 아웃사이더라면 민서는 시기적으로 아웃사이더다. 카림 같은 경우는 이방인으로서 한국사회 하층민의 존재를 대변한다. 민서 같은 경우, 가장 에너지틱하고 젊음을 발산해야 할 십대 후반 사춘기 시기에 입시 이데올로기에 젊음을 저당 잡힌 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아웃사이더라는 동질성이 형성하는 드라마적인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더라. 덕분에 이렇게 전무후무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원래 시나리오대로 두 여고생을 중심으로 한 영화였다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비슷한 관계를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반두비>의 민서와 카림은 마치 <방문자>의 호준과 계상의 관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가 형성되고 방향성을 얻는다.
언뜻 봐서는 전혀 무관한 사이처럼 보이는 관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다 연관돼있다고 생각한다. 또 내 나름대로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연관시킬 수 있는 거 같다. 물론 그 관계는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적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우호적인 관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주노동자보단 여고생이 한국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고, 거기서 둘 사이의 갈등도 발생한다. 하지만 자신은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라 생각하는 민서가 자기에게도 속물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이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자각하면서 변모하는 모습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 보여진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변화가 그려진다는 게 중요했다.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카림과 같은 이주노동자 외국인에 대해 보편적인 포비아를 공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당신은 어땠나?
나도 포비아가 있었던 거 같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때문인지 몰라도 강한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었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내츄럴 본(natural born)’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이 좀 강하게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주인공인 영화도 거리낌없이 만들 수 있었던 거 같고, <나의 친구>에서 다룬 미용사나 요리사는 서민, 노동자 계급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반두비>도 후진국 유색인종이나 무슬림처럼 타자화된 사람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거부감은 애초에 없었던 거 같다. 이주노동자 문화제 같은 곳에서도 친절함을 느낀 적은 있지만 경계심이 든 적은 없었으니까. 안타까운 건 그런 편견들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영화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제노포비아 현상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펼쳐진다는 것에 놀랐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잠재적 수준이 있었음에도 예상보다 높은 수위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직접적인 체감의 강도차도 다를 것 같고.
내 자신이 잘 났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덜 떨어진 인간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적이었다. (웃음) 너무 안타깝지. 친절하게 대사로도 나오지만, <반두비>의 주제는 ‘Open your mind. 마음의 문을 열어’다. 상대방은 마음을 열려고 하는데 굳이 그런 걸 절대적으로 거부하거나 외면하려는 분이 계시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분들도 소통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 분들을 만나보고도 싶다. 만나서 서로에 대한 오해나 선입견을 허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분들께서 꼭 영화를 보셔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매도하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여주면 내 진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분들에게 <반두비>가 조금이나마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2001년도의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배경은 엄연히 현재다. 여고생들의 실상에 대한 취재도 필요했을 것 같다. 2001년도에 알게 된 그 사건과 도입부 여고생들의 방과 후 시퀀스가 좀 맞닿아 있는 거 같다. 일종의 맹아라고 할까. 그 사건엔 서울대에 가야 한다는 여고생의 강박관념과 이에 갈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부추긴 학원장의 역할이 있었다. 짧은 시퀀스지만 현재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고생의 모습은 실제 사건의 여고생을 짓누르던 강박관념을 연상시킬만한 짧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학생들이 주고 받는 대사들은 내가 특별히 지정한 대사가 아니라 내가 준 모티브를 바탕으로 그 아이들끼리 직접 만든 대사였다. 나는 방학 되면 뭐할지, 학원과 관련해서 스스로 너희가 대사를 만들어봐, 라는 간단한 가이드만 제시했다. 리허설하면서 들어보니까 그 친구들의 보편적인 정서나 가치관을 반영하는 대사처럼 들려서 생동감이 느껴지더라. 실제 고등학생들의 영어점수에 대한 고민이나 방학기간 학원 문제가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방학이면 학생들이 여행을 가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기 정신을 살찌워야 되는데 오히려 방학에 더 집중적으로 입시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안타깝고 비극적이지. 민서가 돋보이는 건 그런 안타까움에 저항하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 도입부에서 친구들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민서의 행동 자체가 드라마가 되는 셈이지.
드라마적으론 비논리적 상황을 연출하지만 논리적 형태의 현실참여적 발언들이 그 비논리를 중화시키는 역할로서 작동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작품이 불균질하게 느껴진다.
브레히트는 연극 도중 관객이 몰입하는 순간에 디테치(detach), 이화를 시켜버린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버린다던가, 엉뚱하게 노래를 부른다던가, 결국 영화로 따지면 관객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영화 속에 담긴 세계가 단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거다. 나에게도 영화보다 중요한 건 현실이라는 걸 환기시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그런 걸 느끼면서 거리감을 두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을 느끼면서 뭔가를 곱씹거나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런 것들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균열을 일으키거나 혼돈을 발생시켜서 극적 몰입을 방해하거나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게 내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단점 같기도 하고, 장점 같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반응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작품이 불균질한 건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해서 당신에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허구적인 영향력을 미친 작가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영향을 받았다기 보단 내가 관심 있었던 작가라면 두 명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내가 2년 전쯤에 프라하에 들렀던 적이 있는데 카프카 박물관에서 카프카에 대한 상징적 유물들을 보면서 카프카가 지닌 기괴함이나 기묘함을 느꼈다. 언캐니(uncanny)하다고 할까. 대학교 때 카프카의 부조리한 태도에 미세하게나마 비이성적인 측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히트는 당시 주된 흐름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사이론과 정반대에 가까운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와 같은 서사 이론을 창립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습니다, 라는 걸 인지하게 만드는 건 지극히 이성적인 방식이다. 나는 내 작품이 이성과 감성이 혼재된 형태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만든 강이관 감독과 친분이 있는데 내 세 작품을 다 보고 내 작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작품이라 규정하더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거 같지만 난 내 작품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정리하기엔 오묘한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의외지만 데이빗 린치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든 적은 없고, 만들기도 힘든 작품이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데이빗 린치의 기괴한 세계관이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내 작품의 엉뚱함은 분명 그런 취향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또라이나 변태 같은 면도 있는 거 같고. (웃음)
사실 <반두비>에서 선정적이라고 지적될만한 문제적 장면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의 신과 민서와 카림의 침대 신이 아닐까 싶다. 그 부분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었나?
그 장면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는 구실이 된 장면 같긴 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관객들의 몫이다. 드라마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그 장면들은 상당히 긴장할만한 장면이다. 로맨틱코미디처럼 진행되는 영화를 무장해제된 상태로 관람하다가 충격을 먹을 수 있는 장면이랄까. 세대를 막론하고 낯설고 불편해질 수 있는 장면 같은데 나이가 많을수록 더 불편할 가능성이 크겠지.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성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수록 충격적일 거다. 여고생이 얼굴 시커먼 남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서 같이 밥을 먹고 침대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사실 그 동안의 드라마 흐름을 다른 느낌으로 전환시키거나 벽을 형성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왜 들어갔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민서가 그런 행동을 한 이면과 배경을 관객들이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관객들이 메워줘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쩌면 신동일표 영화가 그래서 그런 거 같다. (웃음) 보기엔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무엇이 있다고 할까.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강렬한 현실이 영화에 반영되는 거 같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가 상당히 불균질하지 않나. 갑자기 이야기와 관계없는 유머나 농담이 어처구니 없게 튀어나오기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이긴 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그 분에 대해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완성된 모양새나 형태에 대해서 괜히 시비 걸고 싶거나 스스로 파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어서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고 봤을 때 나 역시도 드라마 공식이라 할만한 것들을 죽비로 내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랄까.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이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듯 여러 감정을 겪게 만들지만 난 그 사이에 멈춰서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스톱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분들은 반갑기도 하고, 신선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완성도에 흠이 생긴다고 지적하기도 하더라.
민서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선생님을 만난 뒤 함께 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시퀀스가 재미있었다. ‘이게 첫 번째 상담인 거 아세요?’라는 민서의 대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불순한 신 뒤에 되레 긍정적인 방향의 드라마가 형성된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평범하고 안정돼 보이는 현상이나 관계의 수면을 뒤집어 보면 때때로 그 아래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결국 임계점이나 비등점에 달하면 터질 거다. 난 창작하는데 있어서 전복적인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잠깐 뒤집어보고 의심해보면 새로운 이면이 보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 만난 두 사람이 그 불편한 사건 직후에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상황에서 코미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뒤집어서 관계를 바라보면 인생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엉뚱하다고 볼 수 있고, 단순히 유머러스하다 말할 수 있지만 평온해 보이는 관계의 이면에 포진한 끓는 점을 표출시켜보고 싶었다. 평범한 수위의 비범함이 있고, 비범한 수위의 평범함이 있는 것처럼.
전복적인 상황을 통해서 창작적 영감을 얻는다면 요즘 같은 세태는 정말 창작을 부추기는 텃밭이나 다름없겠다. (웃음)
내가 요새 상당히 기시감을 많이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격동기였던 87년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이이자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지금 왜 그때로 돌아간 거 같을까? (웃음) 지금 87년이 다시 돌아온 거 같다. 그 당시 정치적 민주화 정도나 사회적 성숙 정도가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22년을 쇠퇴했다고 할까. 그 당시 집회나 데모 현장에서 느꼈던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금도 든다면 지난 20여 년간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됐다는 우리 나름대로의 성취감이 착각이나 신기루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훼손되고 붕괴되는 실정이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거의 ‘파시즘X’, ‘유사 파시즘’이라 불릴만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의 내가 대학생 당시 느꼈던 감정을 느끼다 보니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웃음) 그렇다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사고수준이 22년 전으로 후퇴했다는 것도 아니라면 이 사회가 지금 22년 전 현실을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이겠지. 한마디로 비극적인 코미디다. 다만 비극인지 코미디인지 분간이 잘 안될 뿐이지.
웬만한 부조리극은 명함을 내밀 수 없는 현실이랄까. (웃음) 지금 현 대통령이시고, 알고 보면 학교 선배님이신 청와대의 그 분이, (웃음) 어제 중도라는 표현을 하셨지만 아마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얘기하신 것 같지가 않더라. (웃음) 보수라는 분이 자신의 실용주의를 중도라고 말씀하시는 거 보면 얼마나 불안하고 스스로 몰렸다고 생각해면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분을 좀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3년 반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편치 못하게 사시는 것보단 차라리 그 분께서 안락함을 찾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아마 그 힌트가 담긴 <반두비>를 보면 마음의 위안을 찾지 않으실까. (웃음) 그래서 그 분이 좀 보셨으면 좋겠는데. <방문자> 만들 때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 그 당시 전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였던 부시가 <방문자>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 은근히 있었는데, (웃음) 이번에도 좀 그렇다. <반두비>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대통령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물론 제가 지금 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건 아니다. (웃음) 나름대로 이렇게 얘기했지만 이게 다 그 분 잘못은 절대 아니거든. 그 분을 뽑은 천만 명의 어리석은 선택이 더 문제지.
사실 제스처만 봐도 당신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감하고 급진적이다.
내가 현실에서 풀지 못하고 상상만 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것들이 영화 속에서 구체화되거나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내가 현실에 만족하고 있거나 생각했던 욕구가 풀어지는 상태라면 굳이 작품을 만들 동기부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세 작품은 현실사회의 부조리나 모순, 인간사이의 질곡 같이 계속 심화되고 산재하는 문제들, 즉 내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부분들이 종종 세고 강렬하게 묘사될 뿐, 사실 나 자신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다. (웃음)
백진희 씨를 만났었다. 상당히 주관이 뚜렷한 친구더라.
그렇게 똑부러지는 면 때문에 내가 캐스팅한 거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외국인을 배우로 캐스팅했는데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작품은 캐스팅부터 모험이었다. <방문자>에서 계상 역할하는 강지환 씨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지숙을 연기한 홍소희 씨나 주연들을 당시 신인배우로 캐스팅했으니까. 세 번째 작품 <반두비>도 두 친구가 아마추어다. 두 친구를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고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 둘을 캐스팅하는 것도 나에겐 모험이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외국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보니 굉장히 리스크(risk)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마붑이라는 친구가 똑똑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진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더 힘들었지. (웃음) 그건 아무래도 마붑이 맡은 카림이라는 캐릭터가 마붑에게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매치가 되는 덕분에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거 같다.
양해훈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몇몇 내 지인들이 카메오 출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항상 양해훈 감독을 언급하는 걸 보니 효과적인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웃음) ‘내수 시장을 살려야 된다’는 명대사도 만들어졌고. (웃음) 나도 듣는 순간 센스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두비>를 찍고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왔다. 그 위기의 대안은 내수시장을 살리는 거 아닌가. 알고 보니 상당히 선견지명이 들어간 대사였다. (웃음)
사실 최고의 카메오는 당신이 아닐까. 엔딩 즈음에 당신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진짜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웃음) 종종 우디알렌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직접 연기를 해볼 생각은 없나?
만약 그러면 한국영화계에 쿠데타적 사건이 되는 거지. 결국 배우들의 세계가 균열이 생기고, 세력 판도가 바뀌는 거라서, 농담이고! (웃음) 적절하다 싶을 때 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기는 말 그대로 쿠데타이기 때문에 난 그저 작품의 맛깔스런 양념이 되면 그만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웃음)
전작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행히 나는 배우들 운은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배우들 입장에선 감독 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웃음) 어느 작품을 하건 충돌은 딱 한번씩 있었다. 오히려 그 충돌이 전화위복이 돼서 서로 힘을 모으고 좋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충돌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비논리적인 흐름을 서사에 익숙한 기성 배우들에게 설득한다는 게 어려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백진희 씨와 같은 신인 배우를 설득하는 작업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신인들은 백지 상태니까. 감독이 어떻게 리드하는지, 어떻게 힌트를 주느냐, 에 따라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닐 수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 백지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신인이 더 자유롭게 자기의 끼를 표출하거나 재능을 발산할 수 있는 것 같다. 괜히 어줍잖게 경험한 친구들한테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 자기가 가진 경험의 한계에 막혀버리곤 하더라. 진희나 마붑 같은 경우, 백지 상태라는 게 오히려 풍성한 가능성을 끌어내기 좋았던 거 같았다. 겉멋든 연기자보다 경험이 없더라도 열정에 충만한 신인을 더 선호할 수 있는 건 이런 덕분이다.
두 인물의 버디무비라는 형식에서 <반두비>는 <방문자>와 비슷한 관계구도를 그리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발생시키는 개개인의 변화를 전체적인 방향성으로 전환한다는 점에 있다. 그 방향성은 단지 영화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객석과 상응하려는 시도로서 이뤄지곤 한다.
또 다시 변증법 얘기가 나오는데 민서라는 ‘정’ 혹은 ‘반’과, 카림이라는 ‘정’ 또는 ‘반’이 충돌하고, 교감하고, 화합하는 ‘합’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인물들마다 다 그런 방향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인물과의 관계나 드라마를 만들 때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역할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고 서로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긍정적으로 전환해나간다. 나는 내가 그리는 인물 캐릭터들에 대해서 양존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한 편에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그들에게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응시하기도 한다. 사실 관객들을 한 인물에게 감정이입시켜서 롤러코스터처럼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게 그리기 쉬운 방식일 수도 있지만 내 작품은 그 인물에 대해서 잠시 돌이켜보게끔 하는 장치들이 장착되고 그런 이질적인 리듬을 통해서 인물을 바라보거나 인물이 관객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의 교차가 발생하는 것 같다. 사실 내 작품은 스펙터클을 강화할만한 여건이나 제작 토대가 열악한 편이기 때문에 인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형성되는 드라마가 중요하다. 그만큼 인물을 그린다는 건 나에게 흥미로운 작업이다.
관계는 항상 당신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어떤 소재의 작품이라도 인간관계를 다루는 것만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편의상 지금까지 내 작품을 관계 삼부작이라고 했지만 계속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 같다.
<방문자>나 <반두비>처럼 가장 먼 관계를 이야기할 땐 긍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키지만 <나의 친구, 그의 아내>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이야기할 땐 부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예준과 재문 같은 경우는 10년에 걸친 우정이라지만 둘 사이엔 계급의 벽이 자리한다. 예준은 승승장구하는 외환딜러로서 자기 자리가 계속 상승하는 친구지만 재문은 그럴 수 없는 존재고 결국 둘 사이의 친근함을 가로막는 권력이란 문제가 대두되고 이런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부모, 형제, 친구 같은 사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솔직히 내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만큼 나로선 당연히 그런 관계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반면 전혀 맺어지지 않을 것 같은 관계지만 같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갈 수 있는 관계라면 여지없이 관계를 맺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관계지만 서로의 차이가 존재할 뿐, 공통분모가 있다. 변증법적으로 비적대적 모순관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해주는 이해와 연민의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로 관계를 만들고자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현실적 필요성이 무의식적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닌가 싶다.
변화 역시 항상 당신의 테마다.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당신 영화를 성장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자면 왠지 불순한 태도 같다. 성장은 결국 그것을 말하는 대상과 그것을 통해 말해지는 대상 간의 이해관계가 우열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강제적 용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당신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보다 나은 사람이 아닌 바에야 그 캐릭터들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을 듣고 보니까 성장이란 말은 왠지 강제적인 느낌이 들고, 상대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변화라고 봤을 때 적절한 표현인 거 같다. 어쨌건 내가 쓰는 표현이지만 드라마 자체에서 인물은 세 가지 변화 구도를 지닌다. 스스로 변하거나, 변절되거나, 혹은 여전하거나. 민서는 분명 스스로 변하는 인물이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먹거나 그게 익숙지 않아서 때때로 포크를 쓰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자기 스스로 삶에 적응하거나 인생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신에서 관객들이 그렇게 느껴준다면 좋겠다. 민서가 변했고 관객도 변했다고,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변화되길 갈망하길 바란다.
당신 영화는 항상 그 변화를 통해 희망을 모색하는 느낌이다. 전반적인 비관으로 가득 찬 느낌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결말만큼은 그 무거운 공기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연출자나 감독들은 인간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비관적이거나 비극적으로 인물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내 스스로가 삶이나 인생, 사람에 대해서 낙관적이고자 하는 생각이 비관보다 강하다. 어떻게든 희망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싶어진다. 그래야 삶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런 가치가 조금이라도 존중되고 공유될 수 있을 때, 이 빌어먹을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웃음)
<반두비>와 <방문자>에서 민서와 호준은 변하는 사람들이고, 계상과 카림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물들이다. 역할을 달리해서 말하자면 계상과 카림의 역할을 하는 건 당신이고 궁극적으로 민서와 호준과 같은 변화의 몫은 관객인 셈이다.
<반두비>가 예전영화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불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이 관계를 맺는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인 만큼 소재 자체가 주는 무거움을 경쾌하게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만들고자 했던 건 대중들이 <반두비>를 훨씬 편하게 받아들이고 그만큼 영화가 관객에게 쉽게 다가갔으면 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서가 식사하는 엔딩신에서 캐릭터의 변화를 감지하는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던 자기 자신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얻거나 일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나는 내 영화를 통해 최상의 성취를 이룬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이 사회적 제도나 분위기에 대한 환기였다면 <반두비>는 보다 공격적인 정치적 구호의 뉘앙스가 보다 강하게 피력된다. 특정인물을 적확하게 적시하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한 호불호가 <반두비>에 대한 장단으로 맞서는 것 같다.
특정인물이 영화에서 묘사되거나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 반응이 엇갈리더라. 직설적이라서 통쾌하고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지만 그런 실제인물에 대한 언급을 통해 완성도에서 시비를 얻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더라. 굳이 누군가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이나 묘사가 안돼도 충분히 정치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인데 오히려 그런 묘사가 작품에 마이너스를 불렀다고 보시는 분들이 계신다. 사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는 없으니까 내 영화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봤을 때, 내가 왜 그런 특정인물을 굳이 영화에 넣었는지에 대한 고민만이 내겐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그만큼 예민해졌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일부로 넣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시대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날 그렇게 부추긴 거지. 민서가 몸담고 있는 공간과 배경의 배후에 특정인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보니 이게 자연스럽게 묻어간 것뿐이지, 무조건 넣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지녔던 건 아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시대가 문제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웃음) <반두비> 시나리오의 초고가 난 건 사실 고 노무현 대통령 말기였지만 <반두비> 제작이 가시화된 건 MB정권 초기였고, 이제 정권이 2년 정도 지나는 중에 영화가 개봉됐다. 내 작품이 시대적 공기와 호흡한다고 본다면 시나리오를 쓸 때와 영화를 만들 때 분위기가 워낙 달라지기 때문에 되게 시대적 공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내 작품에 그런 파격을 가져다 주신 현직 대통령님과 현 정권에 감사와 유감을 동시에 표합니다. (웃음)
사실 영화에 현실적 지표들을 온전히 투영했을 때 장단점은 명확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성을 명확히 적시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반두비>에서 시대성을 분명하게 느끼는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거 같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고 아쉬움을 느꼈던 분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놀라더라. 시나리오엔 잘 표현되지 않는 부분들이 영화를 찍을 때 자연스럽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나 자신도 시나리오를 보고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영화에서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상하게도 시나리오보다 완성된 영화가 더 느낌이 좋다는 말을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는데 왜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뭘 넣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었던 걸로 보아서 무언가를 넣게 만든 시대가 나에게 선사한 선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웃음)
<반두비>를 비롯한 당신의 작품들은 항상 정치적인 시선이 강하게 인지되는 탓에 장르적 자질이 많이 가려진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장르에 입각한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장르를 굉장히 경멸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변했다. 우리나라에서 종종 상투적으로 ‘당신 작품의 장르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난 그런 질문이 정말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장르로 수렴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인생에서 어떤 날은 공포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코미디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멜로 같은 나날이 된다. 인생 자체가 장르적 혼합이라고 본다면 영화도 이렇게 풍성한 장르가 될 수 있는데 꼭 하나의 코미디, 스릴러, 액션,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방문자>는 코미디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스릴러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다. 이번에 <반두비>는 하이틴 로맨스나 로맨틱 코미디, 넓게는 휴먼드라마로도 불린다. 내가 본능적으로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내가 잘 풀 수 있는 장기가 코미디는 아닐까 싶어지더라. 어떤 특정 장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장르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위트, 해학과 같은 유머로서 인물을 다루고, 관계를 그려나가는 방식에서 남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 두 가지 장점을 장르와 결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다음 작품 얘기를 하자니 좀 그렇지만, (웃음) 다음 작품은 그래서 뭔가 다른 형태의 결과가 나올 거 같기도 하다.
차기작에서 지금의 생각들이 깊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다음 작품 같은 경우는 좀 더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장르의 요소가 더 강화될 순 있겠지.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장르를 경멸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감독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코엔 형제 영화를 편차 없이 선호한다. 코엔 형제 영화는 블랙코미디적이면서도 어떤 작품은 스릴러가 강하고, 어떤 작품은 로맨스가 강해지고, 그렇게 장르가 자유자재로 변형되지 않나. 나도 내가 가진 특성이 장르와 결합할 때 결과물이 나로서도 궁금하고 보다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정치적 의식은 차기작에서도 배제될 순 없을 것 같다.
내 작품의 주제는 심플하다. 내 작품에 미학적 야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서로 연대하자는 주제의식이 강할 뿐이지. 그 토대가 우정과 환대라는 거고, 그만큼 소박한 건데 사람들에게 서로의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자고 말하는 게 단순 명료하면서 쉬운 거 같지만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생각들을 전하는 게 오히려 힘들다. 그래서 그런 걸 호소한다는 게 보다 절실한 가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반두비>의 주제는 ‘마음을 열어’라는 대사로 압축된다. 사실 이는 <방문자>를 비롯해 당신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나 다름없다.
민서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동기부여의 존재는 카림이다. 내 작품이 불과 2억 2천짜리 제작비로 만든 작은 영화지만 보다 많은 분들이 보면서 뭔가 하나를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타자에 대한 깨달음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일 수 있고, 그것이 부담이 되기보단 하나의 즐거움으로써 유쾌하게 이 작품을 만끽하거나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아쉽게도 고등학생들이 볼 수 없게 됐지만 1시간 47분짜리 영화가 오히려 3년 동안 수업시간에 읽고 듣는 교과서보다도 자기 삶의 방향이나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회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바꿔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얻게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진심이 얼마 정도나마 느껴지는 셈일 테니 나로서는 작품을 만든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호수 위를 우아하게 유영 중인 백조는 부지런히 발을 젓는다. 겉으로 드러난 우아함은 실상 부단한 노력의 산물에 가깝다. 외모의 화려함에 가려진 내면의 절실함을 알아채기란 어렵다. 화려한 프로페셔널의 외양에 반해 그 자리를 동경하던 대부분의 초짜들은 가시밭길의 첫걸음을 체감하곤 한 바가지의 눈물과 한 대야의 땀을 흘리고서야 그 우아함의 정체를 파악하기 마련이다. 눈물과 땀을 먹고 자란 경험과 관록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진정한 프로로서의 신고식을 통과한다. 미운 오리새끼는 비로소 백조로 탈바꿈하는 노하우를 익히고 첫 번째 비행을 준비한다. <해피 플라이트>를 시작한다.
발랄한 소년, 소녀들의 도전을 담백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청춘물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야구치 시노부는 근작인 <해피 플라이트>를 통해 청년들의 세계에서 어른들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선다. 싱크로나이즈를 위해 물장구치는 소년들과 유쾌한 박자에 몸을 흔드는 소녀들의 긍정적인 도전기는 유년 시절의 추억담처럼 밝고 투명하며 보는 이에게 관대한 감동을 선사한다.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만큼이나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해피 플라이트>는 두 전작보다 좀 더 전문직드라마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첫 비행이자 마지막 실전심사를 앞둔 가상 비행 테스트에서 바다에 추락해 진땀을 흘리는 부기장 스즈키(다나베 세이치)와 첫 승무원 비행의 설렘을 앞두고 지각과 실수를 반복하다 상사로부터 질책을 얻고 눈물까지 흘리는 에츠코(아야세 하루카)는 마치 미운 오리새끼와 같은 존재다. 성취보다도 실패를 먼저 체험하고 좌절을 경험하기 전에 학습을 먼저 거친다. 폼 나는 이미지 속의 만만치 않은 실체를 체감한다. 그러나 만회를 위한 기회는 다시 한번 찾아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미운 오리새끼들은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우아한 날갯짓을 시도한다.
비행기 내부부터 관제탑, 통제실, 정비장, 활주로까지, 공항 대부분의 공간을 누비는 카메라는 모든 현장을 스케치하고 그 공간에 위치한 캐릭터들을 인상적으로 수집한다. 승무원과 관제사를 비롯해 비행기 한대를 띄우기 위해 자기 업무에 종사하는 공항의 모든 구성원들의 역할을 두루 살피고 개개인의 캐릭터까지 세심하게 돌본다. 공간마다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쏟아지고 이를 통해 분야의 전문성을 독립적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그 다양한 에피소드를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조합하는 방식은 <해피 플라이트>의 가장 훌륭한 장기 중 하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사건의 기승전결이 유연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들이 산만하지 않게 제 매력을 보존한다. 그 중간중간 명확하게 끼어드는 코미디와 드라마의 연출력도 탁월하다.
<해피 플라이트>는 낙관과 긍정을 연료로 채우고 이륙하는 유쾌한 코미디다. 디테일한 취재를 바탕으로 완성된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현장감과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자랑하는 다채로운 캐릭터의 매력으로 고도를 유지하고 균형을 잡으며 예정된 좌표를 향해 이야기를 순탄하게 비행시킨다. 물론 <해피 플라이트>는 기승전결의 과정을 지녔음에도 오차범위를 예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해피엔딩으로 착륙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그 해피엔딩이 선보이는 훌륭한 착지는 명확한 감동을 부른다. 우아한 백조의 활공을 꿈꾸는 미운 오리새끼들의 발버둥은 때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실패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성공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용감한 성장담을 지켜본다는 건 분명한 매력을 선사한다. 결국 미운 오리새끼는 백조가 되어 난다. 누구나 알지만 순수한 감동을 전하던 그 동화처럼 <해피 플라이트>도 날아오른다. 실로 즐겁고 아름다운 비행이다.
요즘 인터뷰를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장경아(이하, 장): 거의 매일매일. 송민정(이하, 송): 한 3주 째 계속 했나.
촬영 끝나고 나서 휴식기간은 좀 가졌나요? 손은서(이하, 손): 한 일주일 쉬었나? 오연서(이하, 오): 3월 달에 끝났는데 후시녹음하고 그러느라 계속 모였죠.
촬영장을 떠나서 이렇게 만나면 어떤가요? 유신애(이하, 유): 똑같아요. 오: 지겨워요. 이제 그만 만났으면 좋겠어요. (웃음) 손: 저희가 영화 준비하기 전부터 계속 함께 지냈기 때문에. 송: 기사에 쓰시는 거 아냐. ‘그만 만나고 싶다. 지겹다.’ 이렇게. (웃음)
아무래도 동갑내기 배우들끼리 모여서 촬영현장은 화기애애했을 것 같습니다. 송: 굉장히 화기애애했어요. 유: 완전 시트콤? (웃음) 장: 맞아. 시트콤이었어. 나이도 비슷하니까 즐겁게 촬영한 거 같아요.
<여고괴담> 전작들은 다들 봤나요? 장: 저희는 다 봤는데 (옆에 있는 오연서를 가리키며) 얘만 못 봤어요. 오: 예. 전 공포영화를 못 봐요.
공포영화를 못 보지만 자신이 출연한 공포영화는 봐야 되겠네요. 오: 그래도 저는 언제쯤 귀신이 나올지 대충 다 아니까, 그 때마다 적절히 피하면 되요.
일단 자기 연기를 보다 보면 영화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죠. 장: 맞아요. 맞아. 오: 자기만 보게 돼.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우울한 감수성이 짙어서 배우 스스로의 기분이 쳐지거나 심리적으로 지치는 순간들이 있었을 겁니다. 혹시 누군가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만한 분이 계시나요?
장: 아무래도 동갑내기 친구다 보니까 다들 화기애애했던 거 같은데요.
누구 가릴 것 없이 다들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았나 보군요. 오: 아무래도 나이가 같다 보니까 마음이 잘 맞아서. 송: 저희는 만나기만 하면 수다에요. 안 그래도 기자 분들 사이에 말 많다고 소문났다던데요. (웃음)
다들 또래 나이라서 친해지는 것도 어렵진 않았을 거 같습니다. 촬영장을 벗어나서도 서로 어울리는 일은 없었나요? 오: 만나서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그냥 대학생들이나 다름없어요. 송: 촬영이 없을 때도 따로 만나고, 커피도 마시고, 술도 먹고. (웃음) 오: 저희 여고생 아니랍니다! (웃음) 장: 촬영 들어가기 전에 두 달 전부터 이춘연 대표님이나 감독님이 저희를 모아 놓고 연기연습을 시키기도 했고, 지방에서 촬영을 하느라 방을 같이 쓰기도 했거든요. 그게 친해지는데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된 거 같아요. 오: 매일 연습실에 모여서 연습하다 보니까, 그리고 촬영할 때는 숙소를 둘이서 같이 써서 더 친해졌죠.
유신애 씨는 막내였는데 언니들이 잘 챙겨주던가요? 유: 오히려 저는 언니들이 많이 챙겨줬어요. 장: 그런데 신애는 은근하게 사람을 휘두르는 게 있어요. (웃음) 유: (깜짝 놀라면서)? 오: 경아 너한테만 그래. (웃음) 장: 연서가 어느 날 그러는 거에요.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숙소 사용할 때도 항상 리모콘은 신애 차지였어. 오: 자기가 졸리면, ‘언니 졸려?’ 이러고 불 꺼버리고 자고. (웃음) 송: 혹시 언니들한테 경쟁심 느꼈니? (웃음)
여자들은 질투가 심하다고 하잖아요. <여고괴담5>도 사실 여자들의 질투를 공포로 표현하기도 하죠. 이렇게 여자 다섯이 모였는데 혹시 경쟁심이 생기진 않았나요? 유: 그거 다 물어보시던데. (웃음) 장: 정말 항상 나오는 질문이지만 서로 너무 안쓰러워서 경쟁할 수 없었어요. 한두 명을 힘들게 몰아붙이는 촬영 스케줄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애들이 다 죽어가듯이 축 쳐져 있으니까 서로 불쌍했던 기억만 나요. (웃음) 오: 촬영을 한 사람에게 몰아줘요. 하루 종일, 아니면 3일에 걸쳐서 한 사람이 촬영 분량을 소화하니까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죠. 저희끼리 이 날은 소이 데이(day), 유진 데이, 은영 데이, 이런 식으로 불렀어요. 그 날은 하루 종일 걔만 촬영하는 날인 거죠. 송: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누군가가 있거나 캐릭터가 비슷하다면 경쟁심이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워낙 다들 개성이 뚜렷해서 그런 생각을 못했던 거 같아요. 오: 저는 고등학교 시절에 주로 같이 어울리는 친구가 열 명이었는데 다들 예고에서 연기를 지망하는 친구다 보니까 누구 한 명이 연기 성적을 잘 받으면 질투하고, 그런 게 미묘하게 있었던 거 같아요. 앞으로는 다 친한 척해도 뒤에서는 욕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때론 미워할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내가 너보다 더 못한 게 뭘까, 하고 자책하면서 그 친구가 미워지고. 유진이랑 은영이도 사실 소이를 끼워주긴 하지만 은근히 왕따시키잖아요. 그런 게 여자들 사이엔 다 있는 거 같아요.
오랜만에 다시 고등학교 교복을 입는 기분은 어떻던가요? 손: 전 이제껏 계속 맡았던 역할이 고등학생이라서 새로운 감흥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저희가 진주 내려갔을 때, 저희가 촬영장으로 쓰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보충수업 중이었어요. 그렇게 실제 여고생들도 보니까 옛날 생각은 났어요. 송: 좋았어요. 왠지 여고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고. 저 같은 경우는 머리까지 잘랐거든요. 원래 좀 긴 머리였는데 그렇게 자르고 교복까지 입으니까 여고생이 된 듯한 느낌? 외모부터 바꾸고 나니까 캐릭터에 빠지기가 쉬웠어요. 내가 더 은영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고. 오: 전 걱정이에요. 머리 잘랐을 때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영화 보니까 앞으로 시집은 다 간 거 같던데. (웃음) 송: 맞아. 우리 정말 너무 망가졌어. 나도 내가 나올 때 너무 싫었어. 극단적인 신이 많으니까 망가질 것도 충분히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로 망가졌을 줄은 몰랐어요. (웃음) 영화를 보고 나서 들었던 생각이, ‘나 어떡해’. (웃음) 오: 너는 귀여웠다니까. 송: 아니야~. 나도 정말 처참했어. 오: 너는 차라리 귀신이라도 되서 그러니까 그런가 보다 하겠지. 난 사람인데도 그랬잖아. 그리고 나는 살인미수라니까, 살인미수. (웃음) 우리 실장님이 영화보고 나서 그러시는 거에요. ‘연서야, 너 이제 CF 못 찍겠다.’(웃음)
학창시절에 본인들은 어떤 학생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와 비슷하거나 다른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오: 유진이랑 비슷했어요. 공부 열심히 하고, 욕심도 많고. 그런데 포기해야 할 부분은 포기한다는 점에선 다른 편이었죠. 그렇게 집착하진 않았으니까. 장: 솔직히 언주는 착하다기 보단 약간 못난 아이잖아요. 순수해서 더욱 무책임하고 자기가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고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맹목적인 아이랄까. 제가 어릴 때 언주처럼 좀 그랬던 점이 있거든요. 뭔가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걸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만 봤다고 할까. 그게 남한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생각 못하는 거죠. 순수함이 가져온 이기주의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분들은 시나리오만 보고 언주를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저는 막상 못났다고 생각했고요. 만약 영화를 보신 분들 가운데 언주한테 많이 화가 난 분들이 계시다면 제가 의도한 메시지가 잘 전달된 게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면 어떤 결과를 낳는지, 그걸 언주와 같은 학생들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손: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와 비교해보면 소이와 제가 별로 비슷하진 않았던 거 같아요.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친했던 애들이 같은 학교로 따라오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한두 명만 같은 학교로 가고 그러면 꼭 같이 올라왔던 친구랑 더 친해지고 그랬던 거 같아요. 송: 은영이는 유진이에게 굉장히 의지하는 아이잖아요. 친구 좋아하는 건 비슷해요. 그런데 악랄하게 누구 뒷담화를 늘어놓는다던가, (웃음) 아빠한테 그렇게 맞았다던가, 그런 건 다르죠. 유: 정언이는 화가 나면 다 표출하고, 언니들한테도 당돌하게 대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화가 나면 다 삼키고 표현을 안 하는 편이에요. 완전 상반된 성격이죠. 낯을 많이 가리면서도 완전히 친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다르고.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만큼 각자 자기 캐릭터에 대한 애정도 만만치 않게 쌓였을 것 같은데요.
오: 저는 유진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면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고등학생이니까 자아가 성립되기 전이잖아요. 자기에게 중요한 남자친구를 뺏기는 것도 큰 충격이었을 테고, 자기와 친한 친구가 임신까지 했잖아요. 들어보면 우리 그룹에 속한 것도 그 남자를 뺏기 위해서라고 나오기도 하고요. 제가 감독님께 인물분석표를 드렸는데 전 유진이가 가톨릭학교에 다니지만 무교일 거라고 썼어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유진이는 절실한 크리스찬이 아닐까’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왜요?’ 물었어요.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원래 하나님은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벌을 심하게 주신다고, 그러니까 유진이는 자기가 심판자로서 은서를 벌한다고 생각했다는 거죠. 그래서 성당에서 얘를 죽이려고 하는 거고. 나쁜 사람은 벌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 같아요. 송: 사람들도 가장 불쌍한 애라고 말하지만 저는 은영이가 너무 불쌍해요. 맨날 아빠한테 얻어터지고, 믿었던 친구한테 이용당하고, 결국엔 자살까지 하잖아요. 그렇게 은영이가 힘들어할 때 누군가 위로해주고 손을 내밀어 줬다면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까진 안 갔을 텐데. 자살을 할 때도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주는 사람도 없었고. 오: 왜, 내가 네 이름 불러줬잖아. (웃음) 송: 언주도 나만 따라다니잖아. (웃음) 장: 그래서 뭐야, 스토커야? 막 이러고. (웃음) 송: 못된 건 유진인데, 은영이가 제일 얄밉다나. 그래서 은영이만 따라다니고. 왜 은영이만 못살게 구냐고. 너무 불쌍해서 더 애착이 남는 거 같아요. 오: 그런데 은영이가 소문은 다 냈잖아. (웃음) 손: 소이에겐 복합적인 감정이 많아서 힘들었어요. 그리고 애들끼리 있으면, ‘소이가 제일 나빠’ 이렇게 결론이 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영화는 그렇게 끝나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소이가 가장 짠한 삶을 사는 친구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자기 대신 친구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살아남은 거잖아요. 이 친구가 계속 살아가는 동안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면 소이가 가장 불쌍하게 느껴져요. 송: 정언이도 살았잖아. 유: 나는 뭐야. (웃음) 오: 정언이는 혼자 행복할지도 몰라. 집에서 엄마 사랑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웃음) 장: 저는 실제로 연년생 동생이 있거든요. 정언이를 보고 동생이 많이 생각났어요. 학교에 같이 다니니까 집에서는 아무리 미친 듯이 싸워도 학교에서 동생이 어떤 애한테 당하고 있으면 진짜 돌아버리는 거죠. (웃음) 그래서 언주가 죽은 다음에 귀신이 돼서 정언이한테 함부로 하는 친구들을 죽이는 것도 이해가 갔어요. 제가 언주라도 그랬을 것 같고. 저는 정언이가, ‘우리 언니는 이제 다시 돌아올 수 없어’라고 말하면서 복도를 가로지르고 갈 때 솔직히 진짜 눈물이 많이 났어요. 그런 면에서 공감하는 바가 있었죠. 유: 저는 외동딸이고, 언니가 없어요. 그래서 언니가 있는 기분도 잘 모르고, 가족이 죽는 경험도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냥 주변 분들이나 언니들과 이야기도 많이 하고, 간접경험을 많이 얻어보려 했어요.
유신애 씨 말처럼 실제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부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을 겁니다. 그 밖에도 각자 느끼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오: 마지막 성당 장면을 찍을 때 한번은 낮 4시부터 다음 날 낮 2시까지 줄곧 제 신만 촬영했었어요. 그러다 보면 진짜 악이 나올 수 밖에 없어요. 정말 실제로 상대방을 바닥으로 끌고 가거나, 잡아 뜯기도 하고, 그렇게 다 실제로 감정이 이입되는 거 같았죠. 그 전엔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막상 극한 상황에 몰리는 기분을 느끼니까 뭔가 해야 될 거 같고. 송: 저는 감독님과 굉장히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사실 저보다 감독님이 은영이란 아이에 대해서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직접 쓰신 이야기니까. 저는 은영이가 자살할 때 불행하게 죽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감독님께서는 행복하게 죽어야 된다고 설명해주셨어요. 그렇게 신마다 제 머리 속에 딱 박히게 설명을 해주셨는데 덕분에 감독님 얘기가 다 끝나면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연기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손: 저희끼리 손을 잡는 신도 많았는데,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말보다 눈빛 하나로 소통하는 게 더 좋을 만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캐릭터에 대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은 없었나요? 장: 언주는 친구 때문에 죽잖아요. 그런데 언주는 소이에게 큰 은혜를 입은 것도 없고 뭔가를 받은 것도 없어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께 백만 번은 여쭤본 거 같아요. 그때마다 감독님께서 하셨던 말이, 만약에 어른의 시선으로 본다면 반드시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고등학생 때는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받지 않아도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순수한 시절’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일부로 특별한 의미를 넣지 않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이해가 안 갔는데, 보통 고등학교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해 보니 그게 진짜 맞는 거 같았어요. 만약 누군가에게 뭔가를 받아서 그렇다면 오히려 순수하게 죽거나 희생하진 못했을 거 같아요. 오: 저는 왜 유진이가 그런 들통날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웃음) 들킬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도대체 저런 위험을 안고 밤에 저런 짓을 하고 있을까 싶어서 좀 이상했죠. 정말 얘는 양심의 가책을 못 느낄까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언주도 제가 죽인 거나 다름없잖아요. 은영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과연 유진이 얘는 정말 죄책감이 없는 악마일까 생각했죠. 고등학생에게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은 어려운 일이잖아요.
사실 남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여자들만의 행위가 있죠. 예를 들면 손을 잡고 같이 화장실까지 간다던가. 송: 그건 여자들만 알 수 있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죠. (웃음)
그래서인지 여자들의 관계를 동성애로 그리기도 쉬운 거 같아요. 실제로 여고에 떠도는 동성애 소문도 많잖아요. <여고괴담5>에서도 소이를 향한 언주의 마음이 때론 우정이라기 보단 사랑이 아닐까 생각되는 지점도 있고요. 손: 여자들의 우정은 집착으로 번지는 경향이 있어요. 저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더 친한 모습을 보면 질투를 심하게 느끼기도 하고, 그게 결국 집착이 되기도 하는 거 같아요. 유: 남자들은 자존심을 가장 크게 생각하지만 여자들은 관계를 가장 크게 생각한대요. 그래서 그렇게 손잡고 가는 것도 자기가 관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더 집착하는 거래요. 장: 그런데 언주는 대사만 봐도 충분히 동성애스럽다고 느낄만한 구석이 있는 거 같아요. ‘죽는 날 같이 죽을 수 있을까’그런 것도 있고, 대학교 갈 때까지 함께 있자고 하고. 손: 사실 너무 닭살스런 대사들이 많아서 애들이 되게 힘들어 했었죠. 하는 저희도 너무 닭살스럽고. 오글오글. (웃음) 장: 그런데 저는 그런 상황을 만든 원인이 다 어른이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부터 남자들은 나가서 놀아야 된다고 하고, 여자한테는 집안의 유대를 강조하면서 키우잖아요. 명절 때도 여자들은 다 일만 시키고,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놀고, 아무래도 그런 걸 보면서 크니까 여자들끼리 끈끈하지 않을 수 없죠. 오: 외국사람들이 한국여자들끼리 손잡고 다니는 거 보면 이상하대요. 그렇게 보면 그것도 우리나라 여자들만의 고유한 습성인 거 같아.
피를 보는 영화다 보니 피 분장하는 장면도 많더군요. 그것도 사실 고역이지 않던가요?
송: 끈적거려서 몸에 묻으면 굉장히 신경도 예민해지고 짜증나요. 그리고 다른 사람 옷에 묻으면 잘 안 지워지거든요. 그래서 사람들도 다 기피하고. (웃음) 경아가 피 분장을 제일 많이 해서 고생했을 거에요. 저희는 처음에 언주가 그렇게 티를 많이 안 내길래 피 분장에 금방 적응되나 보다 그랬는데 마지막에 제가 피 분장을 해보면서 대체 그걸 어떻게 그걸 참았나 싶었어요. (웃음) 오: 머리를 내밀어서 피를 떨어뜨리는 장면이 있는데 피가 제대로 안 떨어지는 거에요. 계속 분장을 지웠다가 다시 하고 그러니까 나중엔 힘들어서 눈물이 막 나는 거에요. 그 피 분장이 굉장히 짜증나는 작업이에요. 송: 아, 그리고 나 죽을 때 피바다에 누워있었잖아요. 장: 나도 죽었어. (웃음) 송: 피가 차가워서 춥고, 계속 끈적거리니까 그냥 다들 쉬는 시간에 쉬는데 저는 그냥 누워있었어요.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유: 그래도 언니는 낮에 해서 다행이야. (웃음) 장: 맞아. 제가 떨어져서 죽은 걸 정언이가 발견하고 달려와서 죽은 저를 안고 오열하는 장면이었는데 전 그냥 누워있는 역할이었으니까 제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빨리 끝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잖아요. 신애 최고의 감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우는 장면이라서, (이빨을 꽉 깨물면서 위협적으로) ‘빨리 끝내라!’이럴 수도 없고. (웃음) 유: 그런데 원래 그 장면이 더 많이 나오기로 했는데 잘 안 나왔지. 처음하고 중간에 은서 언니가 양호실에서 생각하는 그 때 조금 나오고, 끝에 다시 조금 나와야 되는데. 장: 그게 조금 잔인하다고 편집됐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만 잠깐 나왔죠.
고생해서 찍은 장면이 영화에서 무심하게 지나가거나 잘 표현되지 않았을 땐 연기자 입장에서는 아쉽겠죠. 유: 저는 특히 머리를 가위로 잘랐던 신 있잖아요. 저는 그게 굉장히 소름 끼치고 무섭게 나올 거라고 기대를 했어요. 저희가 모니터로 볼 때는 굉장히 소름 끼쳤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보니까 뭔가 너무 어설프고. 송: 초딩이 막 폭발하는. (웃음)
진짜 자기 머리였나요? 유: 아니요. 가발. 오: 그런데 본인 머리도 조금 잘렸대요. (웃음) 때리는 신도 영화보다 훨씬 많았어요. 손: 저도 맞는 신이 더 있었는데 다 없어졌고. 오: 머리 잡고, 막 찍고, 뺨도 맞고. 손: 감독님께서 더 가자고 하셔서 더 맞았는데 다 편집됐어요. (웃음) 오: 유진이가 성당에서 격자 모양으로 된 고해성사실에 소이를 가두잖아요. 원래 나중에 문 열고 또 때려요. 손: 성모상으로 저를 또 때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것도 없어졌고. 오: 다행이었어요. 그것까지 나왔으면 큰일날 뻔 했지. (웃음) 장: 저는 정말 깜짝 놀랐던 게 제가 옥상에서 애들 백그라운드로 혼자 서 있다가 사라지는 건데, 그때도 피칠 다하고 옥상에서 혼자 서있었거든요. 그걸 스크린으로 보니까 제가 아니어도 되겠더라고요. 그냥 점같이 있던 애가 갑자기 사라지니까. 오: 게다가 언주가 모니터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 있잖아요. 그거 하나 찍으려고 경아가 서울에서 진주까지 내려왔었어요. 그 한 컷 때문에. 장: 한 5분 찍었나. 대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본인에게 너무 맞지 않아서 하기 싫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손: 처음에 소이 역할 맡았을 때 소이 전체가 다 힘들었어요. 그래서 처음엔 소이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감독님하고도 이야기도 많이 했고.
혹시 다른 캐릭터에 욕심이 나진 않던가요? 오: 처음엔 다 있었대요. 저도 사실 소이가 하고 싶었어요. 손: 전 오히려 유진이 하고 싶었어요. 저희끼린 그랬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어요. 오: 진작 알았으면 바꿔달라고 얘기했을 텐데. (웃음) 유: 전 정언이 빼곤 다 하고 싶었어요. (웃음) 저희가 오디션 볼 때 쪽대본이 나왔었는데 그때 제가 보기엔 정언이가 굉장히 당돌하고 화를 잘 내니까 저랑 성격이 너무 달라서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오디션 과정에서 서로 얼굴을 봤겠죠? 송: 1박 2일 때는 다 같이 합숙을 했기 때문에 계속 마주쳤죠. 오: 사실 오디션 기간은 짧았어요. 2주도 안 됐거든요. 처음 오디션 보고 한 이틀 인터미션 지나서 이틀 있다가 2차 오디션 또 보고, 3일 있다가 3차 오디션 보고, 그 뒤로 결과가 바로 나왔으니까. 송: 인터넷에 바로 바로 결과가 떠요.
인터넷으로 확인할 때 긴장되진 않던가요? 어쩌면 영화 보는 것보다 오디션 결과 확인할 때가 더 떨렸을 거 같습니다. (웃음) 송: 그럼요. 클릭할 때 얼마나 떨리는데요. 오: 그래서 찍을 때 더 친해진 거 같아요. 너무 살벌한 경쟁을 이겨냈기 때문에. 송: 전쟁이었죠. (웃음) 서로 같이 힘들었던 걸 아니까 더욱 가족같이 느껴지고, 내가 힘든 만큼 이 친구도 힘들게 왔으니까.
다들 대학생이니까 학교 얘기를 해봐도 좋을 거 같네요. 장경아 씨와 오연서 씨는 같은 학교 같은 과에 재학 중이시죠. 원래 서로 잘 아는 사이였나요? 오: 경아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해서 친해질 계기가 없었어요. (웃음) 장: 저도 얼굴만 아는 정도?
송민정 씨 같은 경우는 유일하게 다섯 분 중 연기 관련 전공이 아니더군요. 송: 영문학과 간 건 제가 외국에서 살다 와서 영어 특기자 전형으로 수능을 안보고 토익만 봐서 대학에 갈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대학 들어가고 연기를 바로 시작했어요. 원래 연극영화과를 갈까 생각했는데 더 멀게 봤을 때 영문학과를 가면 두 분야를 다 경험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두 개를 다 고려해서 그렇게 선택한 거죠. 오: 그럼 우리는 뭐가 되니. (웃음) 송: 너희는 그래도 예고 나왔잖아. (웃음) 오: 민정이는 인생이 ‘비비디 바비디 부’에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생이 다 이뤄져요. (웃음) 어렸을 때부터 인생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대요. 송: 운이 정말 좋았던 거 같아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꿈꿔온 건 아니었어요. 뉴질랜드 있을 땐 연기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 있었죠. 종종 거기서 <가을동화>같은 한국 드라마를 비디오로 봤는데 그럴 때마다 막연하게 연기에 대해서 생각만 한 거죠. 그렇다고 연기를 꿈꿔서 한국에 온 건 아니에요. 한국에 중3 말쯤 와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렇게 지내다가 길거리 캐스팅이 돼서 이쪽 일에 발을 딛게 된 거죠. 그렇게 모델부터 시작하게 됐고 점점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사실 송은정 씨 같은 경우는 <여고괴담5> 이전에 <아랑>이나 <외톨이>같은 공포영화 출연경력이 있죠. 공포영화만 세 번째 출연이네요. 송: 그런데 전편하고 <여고괴담5>에서 캐릭터가 워낙 달라요. 지난 번엔 굉장히 우울한 히끼꼬모리 역할을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밝은 신도 있고, 감정 신도 있고, 그래서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만큼 굉장히 좋았던 거 같고요.
나머지 네 분은 연기 관련 전공을 선택해서 진학하셨죠. 그만큼 자기 분야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만큼 불안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오연서 씨와 유신애 씨는 예고 때부터 연기 전공을 했죠?
오: 저는 예고 출신이라서 고등학교 때부터 그 생각을 했었는데 사실 저희 같은 예고 출신들은 뭔가 다른 걸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저와 같은 친구들이 걱정하는 부분은 일단 고등학교 때부터 연기 말곤 배워온 게 없으니까 굉장히 불안하다는 거죠. 연극영화과 나와서 옷가게 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는 사람도 많은데 정작 자신은 연기 말곤 도대체 뭘 해야 되는지 모르고. 장점이 있다면 이렇게 계속 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이것만 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거? 왜냐면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고, 제가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거 아니면 죽을 거 같다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죠. 유: 저도 어렸을 때부터 또래 친구들과 한 길만 바라봤고, 그렇게 제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그곳만 바라보니까 거기에 더 집중하고 매달리게 되는 거 같아요. 그렇게 매달릴수록 해야 될 건 더 많아지고, 가야 할 길이 더 뚜렷하게 보이고요. 그러니까 연기에 매진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정말 저는 한가지만 하기도 벅차요.
사실 오연서 씨는 다섯 분 중 작품경험이 가장 많습니다. 드라마 경력도 있고, 데뷔작도 <반올림>이었죠. 다른 분들에게 특별히 조언을 주거나 그랬던 적은 없었나요? 오: 다 같은 신인이고, 다 같이 배우는 입장이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서로서로 많이 배우는 거지, 누굴 조언해줄 입장이 아니니까.
오연서 씨는 유독 누군가를 때리는 장면도 많았죠. 사실 때리는 사람 마음이 더 불편한 법이죠. 오: 맞는 사람들이 저한테 하루 내내 정말 잘해요. (웃음) 그런데 저도 때리는 게 마음 아픈 일이잖아요. 그래도 거의 한번에 오케이 나서 다행이었죠. 최소한 두 번? 그런데 솔직히 못 때리겠어요. 처음엔 너무 살살 때려서 NG나기도 했죠. 송: 살살 때렸는데 신애는 오버 액션하고. (웃음) 오: 정말 살살 때렸거든요. 그냥 약하게 때렸는데 신애가‘악~!’하면서 날아가서. (웃음)
할리우드 액션이었군요. (웃음) 유신애 씨는 지난 출연작이 공포영화인 <고사: 피의 중간고사>였어요. 유일한 필모그래피가 공포였는데 또 한번 공포영화에 출연했네요. 유: 저는 있는 경험이라곤 공포밖에 없으니까, (웃음) 다른 장르가 어떤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워낙 다른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졌어요.
유신애 씨는 아역으로 드라마 <M>에 출연하기도 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도 공포였군요. 유: 말하기가 창피한 게 정말 조금 나왔고, 사실 그때 기억도 나지 않거든요.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기 때문에 그걸 말하기가 너무 창피해요. 송: <뽀뽀뽀>도 했잖아. (웃음)
손은서 씨와 장경아 씨는 연기나 방송 분야 전공을 선택해서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두 분이 연기를 지망하게 된 사연이 궁금한데요. 손: 저는 원래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제가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 관심사가 굉장히 달랐어요. 중학교 때는 성적이나 공부에 관심이 많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 제가 잘 하는 게 뭔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 싶은 거에요. 그래서 저한테 집중할 시간을 많이 가졌고, 3학년 때 진로를 연기로 정해서 학교를 갔어요. 그런데 연기를 준비하다가 광고 미팅도 가게 되면서 먼저 CF를 찍게 된 거죠. 처음부터 준비했던 건 연기였어요. 장: 전 원래 무용 전공이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목적이 없으면 굉장히 못 견뎠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예원이랑 서울예고 목표로 무용을 했고 결국 목표로 하던 학교에 들어갔었는데 사실 무용은 제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던 거에요. 초등학교 때는 개념이 없어서 제가 진짜 뭘 원하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저희 엄마가 무용하는 모습을 너무 예뻐하셔서 그 때부터 하게 된 건데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멋도 모르고 치열하게 한 거죠. 제가 딱 하나밖에 안 보는 성격이라서 그걸 왜 하는지도 모르면서도 불만 없이 굉장히 치열하게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서울예고 입학하니까 연기 커리큘럼이 있어서 수업을 받다 보니까 굉장히 무용이랑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무용은 무조건 선생님 스타일에 맞춰서 해야 되요. 이 선생님이 이게 좋다고 해도 저 선생님한테 가서 이렇게 하면 점수를 안 주기도 하고, 뭔가 예술적 자율성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 때 연기에 굉장히 많은 매력을 느꼈어요. 결국 예고를 고1까지 다니다가 자퇴하고 공부해서 동국대로 진학했죠. 사실 그 전에 집에서 쫓겨날 뻔도 했어요.
장경아 씨는 <여고괴담5: 동반자살>(이하, <여고괴담5>)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 셈인데 어땠나요? 스크린으로 자기 얼굴을 보는 것도 처음일 텐데. 오: (영화보기 전에) 되게 신나 있던데. (웃음) 장: 사실 언론시사회라는 게 기자님들이 영화를 보고 평가하는 자리인 줄 알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나온 영화를 드디어 본다는 마음에 마냥 신나있었거든요. 그런데 보는 내내 완전 떨렸어요. 연서 손을 꽉 잡고 봤는데 둘 다 떨면서 봤죠. 오: 자기가 나오는 거 보고 자기가 놀라고. (웃음)
귀신 역할이라 좀 놀랐나 보죠. 장: 촬영할 때는 (도수가 있는) 렌즈를 빼고 빨간 컬러 렌즈를 끼고 있느라 모니터링도 잘 못했거든요. 그래서 잘 모르고 봤는데 화면에서 갑자기 막 튀어나오니까 저도 놀란 거에요. 오: 실제 촬영할 때보다 무섭게 나온 거 같아.
손은서 씨는 최근 개봉된 <시선1318>에도 출연했죠. 다섯 분 중 근래 가장 가깝게 개봉된 영화에 출연한 배우라고 해도 되겠군요. 손: 사실 <시선 1318>은 2007년 12월에 3일 동안만 촬영했어요. 그래서 그 당시의 현장감을 <여고괴담5>으로 이어나갔다고 말하기엔 좀 무리가 있죠.
<시선1318>에서 이현승 감독이 연출한 <릴레이>에 박보영 씨와 함께 출연했는데 <여고괴담5>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느끼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여고괴담5>에서는 굉장히 우울한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고요. 손: 현장 분위기야 화기애애했지만 저는 감정 잡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소이를 연기하기 위해서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감정 잡느라 시무룩해져서 힘들어하니까 스태프 분들이 소이 씨는 뭔가 되게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우울해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대요. 그런데 저는 몸이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감정 때문에 그랬는데 다들 그렇게 이해하신 거 같더라고요.
다들 파란만장하군요. 부모님과의 충돌이나 갈등은 없었나요? 오: 저는 많이 맞았어요. 저희 집은 서울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연기한다고 올라간다니까 자꾸 어린 게 서울 가겠다고 하니 엄마 마음이 너무 아픈 거죠. 그런데 얘가 말로 해선 듣질 않아서 많이 맞았던 거 같아요. (웃음)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요즘에는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저도 많이 힘드니까 새벽에 전화하고 그래요. 손: 저도 지방이거든요. 고등학교 때까지 부산에서 다녔는데 부모님 반대가 많이 심했어요. 부모님께서 반대하시는 걸, 수능 보고 바로 올라가서 입시 준비하겠다면서 아무것도 안 도와주셔도 되니까 그냥 시험만 보게 해달라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결국 대학교에 합격하고 계속 이 길로 오게 된 거에요. 부모님들은 불안하고 안쓰러우니까 반대하시겠죠. 그래서 저는 좀 더 믿음이 가게끔 노력했던 거 같아요. 송: 저희 엄마는 일단 대학만 제대로 가면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대학교 가고 나서 제가 연기를 시작한다니 굉장히 좋아해주셨는데 지금은 일하고 늦게 들어오니까 걱정도 많이 하세요. 제가 짜증날 정도로. (웃음) 그래도 반갑게 생각하시고 좋아하시는 편이죠. 장: 저는 아까 말한 것처럼 어린 나이지만 7년 동안 쌓아왔던 전공이 있는 거잖아요. 무용계에서는 솔직히 예원이랑 서울예고, 이대가 (엄지손가락을 들면서) 제일 이거거든요. 어떻게 보면 제가 그 상태에서 대학만 잘 간다면 앞날이 보장될만한 커리어를 쌓아온 건데 그걸 한 순간에 다 날려버리겠다고 하니까 부모님께서 굉장히 반대를 많이 하셨고,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학교에서도 선생님들께서 저한테 뭐라고 많이 하시고. 너는 왜 순수예술을 안하고 딴따라를 하려고 하냐,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제가 그 말 듣기 전까진 무용이랑 연기를 병행하자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 얘길 듣고 나서 자퇴를 하게 된 거에요. 제가 7년 동안 스스로 하고 싶지 않았던 걸 하면서 억눌려있었다고 생각했던 걸 그때 그냥 표출해버린 거 같아요. 그 전엔 엄마한테 그냥 착한 딸이었고, 사춘기 한번 없었거든요. 교복을 줄여 입는다던가, 그런 것도 해본 적 없었고, 그냥 굉장히 착한 딸이었어요. 그런데 그 상황을 계기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이번엔 좀 말해야겠다 결심했던 거 같아요. 유: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적극 밀어주셨어요. (웃음) 오히려 저희 엄마는 제 얼굴에 뭐 하나만 나도 저녁에 팩 들고 오시고. (웃음)
아무래도 대부분 진로에 대한 불안을 느끼거나 부모님과의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영화에서 묘사되는 인물들의 갈등에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지점도 있지 않았을까요?
손: 우리가 하고 싶은 것과 부모님 생각이 너무 다르니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예 서로 말을 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고민은 친구들에게 털어놓게 되니까 친구들과의 관계는 더 돈독해지죠. 그래서 모든 비밀은 친구들과 공유하게 되고. 저희 작품에 공감대를 느끼는 건 그런 점이었어요.
각자 경험차가 있기만 현재 다들 <여고괴담5>을 통해 가장 큰 경험을 얻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몇몇 분들은 처음이라서 겪었던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 같고요. 송: 맨 처음에 촬영할 때 카메라가 뒤통수에 있는지도 몰랐어요. 심지어 제 머리로 카메라를 가리기도 했죠. (웃음) 조명을 거꾸로 받을 때도 많았고. 장: 스태프 오빠가 카메라 초점을 잡아놔서 움직이면 안 되는데 그것도 모르고 멋대로 움직이다 보니까 혼난 적도 많았어요. 그래서 초반엔 친구들 촬영할 때 제 촬영이 없더라도 계속 촬영하는 걸 봤어요. 저는 처음이라 어떤 식으로 촬영해야 되는지 모르니까 좀 힘들었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많이 공부했죠. 연서가 연기하는 걸 보고 많은 걸 배운 거 같아요. 오: 왜 이래, 오늘? (웃음) 그런데 확실히 저희 촬영현장이 너무 좋았어요. 다들 빨리 현장에 적응한 거 같아요. 사실 저는 솔직히 이런 촬영현장이 처음이었거든요. 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빨리 찍어놔야 되는 거니까 상황이나 캐릭터에 대해서 이해할 틈도 없이 막 갈 때가 있어요. 그리고 저도 느꼈던 거지만 신인일 때 선배가 와서 뭐라고 혼내면 주눅들고 더 못하게 돼요. 그런데 저희 촬영현장은 그런 게 없으니까 일단 너무 좋아서 뭔가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보여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장: 연서가 마지막에 성당 신 찍을 땐 정말 구질구질하게 보일 정도로 열심히 찍었어요. (웃음) 진짜 너무 불쌍할 정도였죠. 귀신이 이렇게 죽이러 가기 위해 돌아보는 사이에 바퀴벌레처럼 막 기어가고. (웃음) 소이한테 고해소에 들어가자 그러면서 자기만 나와서 잠가버리고. 송: 비열해. (웃음) 오: 그땐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어요. 그런데 이거 우리끼리 너무 자화자찬하는 거 아닌가? (웃음) 경아는 연기가 처음이잖아요. 그런데 자기 힘든 걸 절대 내색 안 해요. 짜증낼 수 있잖아요. 사람들 앞에서 내지 않더라도 뒤돌아서 낼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깜짝 놀랬어요. 제가 경력이 조금 더 많다고 해서 이 친구들보다 연기를 잘 하거나 이런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친구들한테 많이 배운 거 같아요.
아시겠지만 <여고괴담> 시리즈를 통해서 성장한 여배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이 시리즈에 출연한다는 점 자체만으로 기대가 컸을 것 같고요. 손: 그래서 오디션이 치열했던 거 같아요. 송: 그런데 시사회 전날까지만 해도 기대감이 있었는데 영화보고 나니까 없어졌어. (웃음)
일동: 맞아! 맞아! 나도! 오: 영화 보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끼리 서로 칭찬하는 게 자연스러웠는데 일단 영화를 보니까 내 연기부터 시작해서, 진짜 충격 먹었어. 칭찬할 게 없잖아. (웃음) 송: 전 정말 머리가 새하얗게 됐어요. (웃음) 오: 사람들 머리 속에 저런 이미지가 너무 박힐까 봐 걱정도 앞서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세게 나와서.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슬펐어. (웃음)
첫 술에 배부를 순 없는 거죠. (웃음) 그래도 언젠가 이 작품을 다시 되새기는 날이 올 겁니다. 혹시 앞으로 자신이 해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오: 전 그냥 발랄한 역할하고 싶어요. 이번에 이런 역할을 했지만 저 원래 절대 이렇지 않거든요. (웃음) 다음엔 좀 사랑스러운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귀엽게 망가지기도 하고. 장: 저는 조금 히스테릭한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자기 감정을 배제하고 전문적인 직업에 대한 열의를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를 언젠가 해보고 싶어요. 굳이 예를 들자면 <하얀 거탑> 김명민 선배의 여자버전 같은. 손: 전 약간 중성적이거나 액션연기를 할 수 있는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사실 <여고괴담5>는 저한테 너무 힘들었어요. (웃음) 송: 저는 발랄하고 코믹하면서도 귀여운, <노다메 칸타빌레>나 <호타루의 빛>같은 드라마에서 나오는 캐릭터 있잖아요. 약간 망가지면서도 재미있고, ‘센빠이(せんぱい)’ 이러면서 선배 졸졸 따라다니는. 그런데 사실 <여고괴담5>에서 제 캐릭터도 발랄하지만 공포영화다 보니까 그런 모습을 부각시키기 어려웠잖아요. 그래서 다음 작품에선 그런 걸 좀 더 보여주고 싶어요. 유: <님은 먼곳에>에서 수애 선배님처럼 파란만장한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라비앙 로즈>처럼 파란만장하면서 굴곡도 많은 주인공의 일생을 다룬 영화도 좋고.
부모님께서도 영화를 보시고 싶어하실 텐데 걱정되겠어요. 송: 전 아까 전화 드렸어요. 죽는 거 보고 충격 받지 말라고. (웃음) 장: 난 처음부터 죽는데. (웃음) 오: 난 살인미수라고. (웃음) 송: 공범이잖아. 나는. (웃음)
화장실에 갇힌 호준(김재록)은 자신이 박대하던 계상(강지환)으로부터 구출된다. 아는 게 많은 호준은 ‘여호와의 증인’을 전도하는 계상을 박대하지만 정작 계상으로 인해 구원받는다. <방문자>는 결코 맞물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어떤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묘사하는 버디무비이며 코미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될 때, 우스꽝스러운 사연이 발생하고 그 안에서 인물은 변화한다. 사람을 둘러싼 정치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람을 본다.
계상을 멸시하던 호준이 계상에게 마음을 열고 영향을 받는 것처럼, 카림(마붑 알엄)과 ‘3m’떨어져 걷던 민서(백진희)도 어느 새 카림과 손을 맞잡고 걷는다.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인 <방문자>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영화다. 카림은 계상을 닮았고, 민서는 호준을 닮았다. 또래에 비해 조숙하고 똑부러지는 민서의 염세적인 표정은 지식인을 자처하지만 정작 냉소와 비관밖에 거듭하지 못하는 호준의 무력한 표정을 연상시킨다. 그런 민서에게 카림은 ‘방문자’다. 계상과 호준이 그랬던 것처럼, 민서와 카림도 ‘반두비’가 된다. <반두비>는 별개의 세상에 놓여있던 두 사람이 하나의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다는 점에서 <방문자>를 연상시킨다.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반두비>는 한국이라는 지정학에 나열된 정치적 부조리를 스토리텔링의 근간으로 둔다. 고액의 영어학원비를 벌기 위해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민서의 모습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 헤매는 재문(박희순)과 상사로부터 야간 출근을 통고 받은 예준(장현성)이 결국 아이의 죽음을 방조하게 된다는 과정만큼이나 부조리한 것이다. 신동일 감독은 영화적 허구라고 말하기엔 현실적 리얼리즘이 지독하게 녹아 들어간 살풍경을 곧잘 묘사한다. <반두비>도 마찬가지다.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떼먹고 부도를 낸 사장은 부유한 삶을 누리고 영어에 목맨 여고생들은 자신들을 희롱하는 백인 영어선생님 앞에서 방긋 웃는다. 비상식이 평온히 내려앉은 기이한 부조리는 정치적 메타포를 노골적으로 함유한 영화적 소재에 가깝다.
사실 현정권과 특정인물을 겨냥한 직설적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전작들보다 정치적 색채가 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물론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역시 정치적 메시지가 노골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전작들에서 의도한 정치적 발언이 스토리텔링에 녹아 든 메타포의 양식으로 밑그림처럼 삽입되던 것과 달리 <반두비>는 좀 더 직설적인 강변에 가까운 양식으로 정치적 발언을 던진다. 간접적인 매체와 사건을 통한 은유가 직접적인 행위나 대사를 통해 보다 쉽고 강하게 어필된다. 사실 <반두비>는 실상 징집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신도를 통해 파시즘에 가까운 보수적 강제성에 대한 저항적 신념을 직설적인 이미지에 담아낸 <방문자>와 비슷한 양식의 저항적 변화를 꿈꾸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문자>가 제도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개인의 소신을 정당하게 담아내는 것과 달리 <반두비>는 비난과 조롱의 수순에서 멈추는 느낌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 이미지 자체가 주는 쾌감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일면 퇴보적이다. 또한 여고생인 민서와 이주노동자인 카림의 신분은 <방문자>의 두 남자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상징성을 끌어안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어쩌면 <반두비>의 정치성이 전작들보다 민감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동시간대의 현실을 인식시킬만한 소품들을 영화적으로 이양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적 리얼리티가 강렬한 탓에 때때로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하는 듯한 감상이 부여된다.
신동일 감독의 작품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매력은 정치적 주제가 이야기를 잠식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치 피자빵에 얹혀진 모짜렐라 치즈처럼 정치적 컨텍스트와 스토리텔링이 자신의 영역을 보존하면서 서로에게 녹아 내리듯 밀착한 채 함께 진전된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만남이 버디무비의 속성을 발생시키는 동시에 정치적 상징을 연상시킬 때, 텍스트와 이미지에 입체적 풍요가 부여된다. 버디무비의 구도 안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자질까지 내포하는 <반두비>는 <방문자>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만큼이나 이야기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반두비>의 직설은 현실적 통쾌함이 보장되지만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잠식하고 있는 듯한 비효율적인 불편함이 감지된다. 이는 어쩌면 작가의 창작력을 침해할 만큼 현실의 정치적 공정성이 심각한 부조리의 수순으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반두비>가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여전히 그 이야기가 매력적인 탓이다. 직설적인 정치적 언어가 강하게 인식되는 탓에 허구적 자질이 때때로 잠식되곤 할 뿐, 스토리텔러로서 신동일 감독의 재능은 <반두비>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방문자>와 마찬가지로 단독 컷처럼 분리된 세계관에서 살아갈만한 두 인물을 투샷의 세계관으로 이끌어내는 이야기의 설득력은 <반두비>에서도 탁월하며 이는 신동일 감독의 정치적 뜨거움보다도 대단한 성과다. 하이틴 무비의 경쾌함을 밑천으로 버디무비의 유쾌함과 로맨틱코미디의 순수한 자질을 흡수하고 블랙코미디의 감수성으로 아우르는 <반두비>는 작지만 다부진 민서의 눈빛만큼이나 강단이 뚜렷한 영화다.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만한 백진희와 마붑 알엄의 기묘한 조합 역시 효과적인 앙상블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이 작품을 ‘반두비’라고 쓰고 ‘친구’라고 읽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두비’라고 읽고 ‘친구’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상 <반두비>라는 제목은 <친구>라는 제목으로 바꿔 넣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친구’가 아닌 ‘반두비’인 이유는 ‘반두비’는 ‘반두비’이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 ‘반두비’는 영원히 ‘친구’로 해석해야 할 과제인 셈이다. 단지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반두비>를 불순하게 인식하는 이라면 자신이 과연 ‘이주노동자’를 ‘인간’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불순하게 만드는 건 세상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런 것만 보니까 그 따위로’사는 거다. 때론 현실의 편견을 부수고 불편함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 개인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를 위한 밑천이 된다. 그리고 <반두비>는 그 가능한 변화들을 위한, 작지만 당찬 목소리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기분이 어떤가요?
제가 VIP시사회 때 어느 누구도 초대를 못했어요.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염려스럽고, 저도 그때에서야 처음으로 보는 거라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못했죠. 그래도 최고로 인정받는 윤석 씨와 짝을 해서 그런지 보시고 난 분들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조금 안심이 돼요. 그래서 이젠 다 돈 주고 보라고 하려고. (웃음) 5%정도 긴장감이 풀어지긴 했어요. 그래도 관객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니까 조금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는 중이죠.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일 텐데요. 그래서 더욱 특별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분에 대해선 생각할 수 없어요. 그저 어느 부분에서 연기가 좀 튀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했죠. 한두 군데 정도 캐릭터와 조금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었다라고 할까? 저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고. 남들이 몰라도 본인은 보이거든요. 아, 저기서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런 게 있죠. 늘 보여요. 그래서 한번도 연기에 만족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제작보고회 때는 데뷔하는 심정으로 연기했다고도 하셨죠. 아무래도 드라마 위주로 연기활동을 하다가 영화를 한다는 게 그만큼 부담이 되는 일이었나 보죠?
부담스럽죠. 이미 어느 정도는 다 보여준 느낌이고, 그만큼 다들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알고 있는 배우일 텐데 아무래도 스크린에선 괜히 달라 보여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역시 영화 촬영이 여러 방면에서 좀 더 섬세해요. 그래서 긴장을 받게 되는 것도 있고. 늘 어떠한 방면이든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무슨 얘기할까 고민되는데 영화 얘기만 나오면 일단 마음이 신인 같아. 제가 신인의 자세로 찍었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너무 농담처럼 얘기한대. 진짜라니까! (웃음) 이건 농담 아니에요.
신인이라는 단어엔 설렘과 부담의 중의적 의미가 포함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이번엔 너무 운이 좋았어요. 김윤석이란 배우와 같이 그냥 업혀가는 느낌이랄까? 거북이 등에 탄 느낌? (웃음)
김윤석 씨 때문에 영화를 선택했다는 말씀도 하셨죠.
제 연기가 대형스크린으로 보여진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영화는 거의 다 거절했어요.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는 상대배우가 김윤석 씨라고 하니 너무 혹하는 거에요. 그러면 대본이라도 좀 봐야겠다 했죠. 그래서 처음으로 이종용 감독님과 미팅을 하게 된 거고요. 만약 윤석 씨 얘기 못 들었으면 대본도 안 봤을 거에요.
대본을 보고 나서 거절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제 입장에서는 대본을 보고 거절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돼요. 자신의 작품이라면 누구라도 열과 성을 다하면서 뼈를 깎아가는 느낌으로 썼을 텐데 그걸 보고 나서 ‘저 안 해요’, 이러기는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작품 자체를 못할 거 같으면 아예 안 봐요. 사실 영화는 워낙 제가 해보지 못했던 장르잖아요. 그리고 오래 전에 한번 했다가 혼이 났던 기억도 있고요. 그 이후로 작업도 철저해야 하고, 집중력도 요하는 작업이라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도 아예 안 봤을지 모를 일인데 윤석 씨가 출연한다는 말에 보게 된 거죠.
김윤석 씨의 이전 출연작은 얼마나 보셨나요?
<타짜>도 봤고, <추격자>도 봤어요. <추격자>는 남편하고 둘이서 제일 마지막 걸 봤는데 보고 나서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너무 섬뜩한 거에요. (웃음) 사실 우리 애기 아빠도 영화를 좋아하는데, 남자 배우 둘 다 너무 매력 있다고 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서 이번에 같이 하는 배우가 ‘김윤석’, 그러니까 ‘정말?’ 되묻더라고요. (웃음)
좋은 연기자와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건 연기자로서 당연한 욕망이겠죠. (웃음) 반면 이연우 감독은 <거북이 달린다>가 첫 번째 장편 입봉작입니다. 오랜만에 찍는 영화에 신인감독이라니 불안한 점은 없었나요?
저를 정말 편안하게 해줬어요. 사실 제가 프로포즈를 받고 한달 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못한다고 했었거든요. 상대배우가 너무 좋아서 대본을 봤고 너무 작품도 좋았지만 그 땐 가족문제가 있었어요. 작년에 아이가 수능시험을 봐야 했고, 저도 개인적으로 쉴 기회가 한번도 없어서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였죠.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못하겠다 그랬는데 그걸 한달 동안 다 받아주셨어요. 제가 촬영장에 적응이 안 될 것 같다니까 자기가 적응하게 해 드릴 거라고. (웃음) 사실 저는 그래요. 일을 하기 전에 사람을 보고 반하거든요. 그래서 작업이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분명히 있어야 일하기가 참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이연우 감독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젊은 사람이 정말 마음을 편하게 해줬어요. 그래서 제가 ‘원래 배우한테는 이런 건가요?’ 물어보니까, ‘원래 배우한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게 영화’라며, ‘영화를 한편하고 나서 이 매력에 빠지면 다신 드라마를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런 설렘을 많이 줬죠. (웃음) 윤석 씨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 전에 이미 이연우 감독을 많이 믿게 됐고요. 좋은 사람들이 저를 이렇게 원한다니 같이 작업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냥 한번 해봐야겠다 마음먹었어요.
그렇다면 왜 꼭 자신을 선택하려 하는지 궁금하진 않던가요? 이연우 감독님께 한번쯤 여쭤보셨을 것 같은데요.
물어봤죠. 대본을 보고 왜 꼭 이걸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그런데 처음 한마디가 ‘예뻐서요’, 이래요. (웃음) 사실 그래요. 나이 든 아줌마한테 예쁘다고 하면 좋죠. 그래서 막 웃었지만 ‘그건 제가 썩 좋아하는 답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했더니 어쨌든 저 아니면 안된데요. 사실 저 아니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저 아니고도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충분히 다른 느낌의 조 형사 부인이 됐을 거에요. 그런데 그 쪽에서 견미리 아니면 안 된다, 라고 프로포즈를 하니까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조형사 아내가 어떤 걸까, 그들이 날 필요로 한다는데 도대체 날 어떻게 그리고 싶어하는 걸까, 내가 그걸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생각에 약간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고.
사실 대부분 시골의 아줌마를 연상한다면 조금 살도 찌고 느슨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의 아내는 오히려 그와 반대적인 이미지라 흥미롭더군요. 그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사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일상적으로 조금 더 변형을 줬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예를 들어서 다섯 살 연상이고, 생활에 찌는 아내라면 기미도 거뭇거뭇하게 올라와 보여야 되고, 머리도 좀 부시시한 파마머리로 갔어야 되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너무 통속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이 여자는 아이들 머리도 한 올 한 올 다 빗겨서 한 가닥도 새어 나오지 않게 딱 묶어주잖아요. 또순이 같이, 뭐 하나 흐트러지는 걸 못 보는 그런 느낌의 여자로 가면 어떨까 싶었어요. 좀 깐깐한, 깡 진 느낌? 제 나름대로 그렇게 바꿔보자고 했는데 조금 아쉬운 건 제 모습이 조금 고왔다는 거? 예뻤다는 게 아니라 조금 생각보다 곱게 보였어요. 사실 기본 메이크업만 하고, 라인 하나도 안 그릴 정도로 화장을 거의 안 했어요. 그런데도 화장기가 있어 보이는 게 좀 아쉬웠죠. 그래서 다음에는 저런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본래 얼굴이 어디 갈 순 없죠. (웃음) 하지만 어쩌면 그건 자신만이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그 동안 드라마에서는 세련된 도회지 여성의 이미지로 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고 느껴지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도 더 평범해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돼요. 체형 자체도 너무 슬림한 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 슬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엉덩이에 속옷도 더 넣고 그랬는데도 영화로 보니까 조금 그렇더라고요. 개인적인 제 생각이 이래요.
결과적으론 그런 외모를 통해서 억척스러운 여자라는 공감대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억척스럽다’는 단어가 표현이 강하게 들려서 그렇지, 사실 다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어요. 이런 형태에서는 이게 맞고, 저런 형태에서는 저게 맞을 뿐, 각자 거기에 잘 맞춰서 살다 보면 다들 억척스럽게 살 수 밖에 없죠. 보통 아줌마들을 보고 억척스럽다고 얘기하는 건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사는 아줌마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사실 개인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로서 그런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조형사가 주인공이라서 나중에 멋있어 지는 거지, 그게 실제 남편이라면 속 터져 죽을 거에요. (웃음) 생각을 해봐, 그게 무슨 형사야. 손가락 잘리고 들어오고, 무술 한답시고 어설프게 폼 잡는 거 보면 어처구니가 없죠. 정경호를 때리려다가 맨날 다른 곳을 찍잖아. 그래서 내가 너무 답답해서 영화를 보다가 (옆자리를 치면서) 진짜 남편한테 뭐라 그랬다니까. 정말 답답해서 저러고 살겠냐고. 너무 영화에 몰입한 거지. (웃음)
조형사의 아내야 말로 진짜 내조의 여왕이죠. (웃음)
진짜 그래요.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양말 뒤집어 가면서,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 (웃음)
조형사의 아내는 아내이자, 엄마이며, 여자입니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섬세하고 복합적인 내면을 지닌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경험이 요구되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겠죠.
굉장히 연기를 잘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20대 초반인데도 4~50대 감정을 다 표현하는 친구들이 있죠. 그런데 사실 그 친구들도 몸에 밴듯한 느낌으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순 없겠죠. 아무래도 저희 같은 나이의 배우들은 자신 자체가 그런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걸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내 남편이 누워있고, 내 새끼가 내 앞에 와 있고, 내가 부업을 할 때, 리액션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일상이니까.
상대배우의 안정감이 주는 시너지도 있었을 거고요.
저희가 하루 만에 만화방에서 세 신을 다 찍었는데 마치 드라마 촬영하듯이 드르륵 찍어서 굉장히 편했어요. 어려움이 없었죠. 그만큼 윤석 씨가 잘 받쳐줬고, 잘 맞았다고 할까. 스폰지 같은, 아니, 그보다도 체형에 맞춰서 흔들리는 물침대? 라텍스 침대에 누우면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 채워지는 느낌이잖아요. 상대가 어떻게 하든 갭이 없게 안착을 해주는, 그런 느낌의 배우였어요. <거북이 달린다>에선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를 은연 중에 보여주지만 사실 사이 좋은 부부처럼 보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심리적인 교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연기를 같이 해보고 싶은 배우였어요. 이번에는 정말 그저 거북이 등에 탄 느낌이었으니까.
영화에 대한 부담감을 적잖게 말씀하셨는데, 드라마와 비교하자면 어떤가요?
드라마는요. 오랜 시간 시청자들을 젖어 들게 해요. 그래서 처음엔 만약 영자로 시작을 했더라도 끝에 가서 견미리가 되죠. 오래하다 보면 다 제 화(化)되는 거죠. 제가 안 하고 다른 배우가 했다면 또 그 화(化) 되는 거에요. 그렇게 젖어 들어요. 제가 스크린이 무섭다는 건 농담이나 겸손한 말이 아니라 진짜 스크린이 무서워요. 드라마는 ‘쟤 왜 저래’, 그러다가도 그 다음 장면이 나오면 잊어버려요.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잘하면 되죠.
드라마는 매회마다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도 배우에겐 영화보다 좀 더 관대한 매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죠. 모니터를 꼭 하고 나서 이번 주 저 신에서 제가 너무 아니었더라도 다음에 만회할 수 있는 신이 있어요. 오늘 못했다면 내일 만회하거나 다른 신에서 강하게 임팩트를 주면 되고, 끝날 때쯤 평가를 한꺼번에 하거든요.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영화라는 건 깜깜한 공간에서 2시간 동안 집중해서 보는 만큼 들통나거든요.돈 내고 영화를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평가를 해버리기 때문에 만족을 못하면 한마디씩 꼭 하잖아요. 그런 순간순간의 평가가 다 오죠. 적어도 ‘누구 때문에’, 이런 소리 듣는 인물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거지! (웃음) 기왕이면 잘 봤다 소리를 듣고 싶죠. 그런데 오히려 연기가 너무 좋더라, 이런 말보단 전반적으로 다 좋았는데 그냥 뭐가 좋았는지 알 수 없을 때 저는 더 좋은 거 같아요. 너무 강해서 딱 보고 나면 뭐가 좋았는지 말할 수 있는 것보단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면 벌써 그 연기에 젖어 들었다는 거니까요.
드라마는 분절된 형태로 방영이 지속되는 만큼 연기톤의 변화도 어느 정도 수용되는 느낌이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연기톤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점과 단점이 있겠죠.
그런 것도 있어요. 그만큼 그 두 시간 동안 빠져들게 만드는 연기를 했을 땐 그 캐릭터에 젖어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거 같아요. 이번에 <거북이 달린다>를 해보고 나니까 다음엔 발랄한 거 내지는 그렇게 삶에 찌든 억척이 아니라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의 억척스러움을 해도 재미있을 거 같고. 그러니까 작품에 따라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좀 다르죠. 영화배우들이 이런 것 때문에 영화 하는 구나 싶기도 하고.
브라운관에 비해 스크린이 크다는 점도 영화가 두려워지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런 것도 있죠. 그러니까 결국 정말 잘해야 된다는 거, 공동작업인데 나 때문에 (한숨쉬면서)‘아~’, 이렇게 되진 말아야 되잖아요. 물론 어떤 일에나 그런 부담은 늘 있어요. 드라마에도 있고. 다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좀 더 큰 거죠. 그리고 스크린이 크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좀 더 섬세한 연기가 요구된다는 점도 있죠. 드라마는 약간 생방송 같다고 할까. 드라마는 원투쓰리(카메라)로 순발력 있게 탁탁탁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서로 약속하고 다짐하듯 디테일하게 들어가니까 장르적으로 요구되는 연기가 다르죠. 그런 면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는 장르적 느낌을 다르게 만들긴 해요.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로 두려움이라는 허들을 하나 넘은 셈이라 말해도 좋겠어요.
남의 등을 타서 넘었죠. 솔직히! (웃음) 저 혼자 막 달려가라고 하면 두렵겠지만 너무 푸근한 상대를 만났고, 그 사람이 리드하는 대로 몸만 흔들어주면 될 정도로 편했으니까요. 정말 해피한 거죠. (웃음)
사실 그 동안 영화 제의가 없진 않았을 텐데 그 제의를 20년 가까이 뿌리쳤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대단합니다. (웃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시나리오를 본 영화는 거의 없어요. 강제로 집까지 보내서 2~3개 정도 본 건 있지만 대부분 보기 전에 일단 거절부터 했으니까요.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스크린이니까 자신 없었어요. 핑계가 아니라 정말 자신이 없었던 거에요.
자신에게 제의가 들어왔던 작품의 완성된 형태를 보고 나서 아쉬웠던 적은 없었나요?
있었죠. 있었지만 저보다 괜찮은 배우들이 대신 하셨기 때문에 훨씬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건 드라마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 제의가 왔을 때, 제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못하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분이 했기 때문에 진짜 좋아졌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저도 기분이 좋아요. 그러면 전 그 감독한테 전화해요. 거보라고, 나 아니어도 너무 좋지 않냐고. 그건 진짜 필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욕심이 없다기 보단 그게 시청자나 관객을 위한 진짜 배려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배우에 대한 시선이 달라짐을 느낀 부분은 없었나요?
저는 몰랐는데 사람들이 제가 영화를 했다고 하니까 굉장히 신기해해요. “이번에 영화 했지? 보러 가야지.” 이러면 “그래, 봐.” 이러면서도 보면서 뭐라 그럴까 걱정이 앞서요. 그리고 ‘뭐, 늘 저랬는데’, 이럴까 봐 걱정되고요. 배우로서 차라리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좋아요. 그런데 ‘늘 똑같지’, 이러는 건 조금 섭섭하고 서운하죠. 제가 너무 많이 보여진 연기자이기 때문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런 것들이 좀.
사실 드라마에서 도시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 면에서 <거북이 달린다>의 시골 형사 아내는 그 이미지만으로 특별한 변화라 인지될 가능성도 적잖습니다.
제가 기존에 몇 년간 해왔던 캐릭터들이 야무지고 도시적인 느낌이 있었죠. 그리고 저는 모르겠지만 남들은 제가 사극에서 굉장히 무게감 있는 캐릭터를 맡았을 때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해요. <거북이 달린다>에서 아내는 그런 면에서 다른 역할이긴 하죠. 장르를 옮겼기 때문에 시청자가 아닌 관객들이 제 연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영화 계통에 계시는 분들이 어떤 평가를 할지, 그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기본적으로 저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이 정도만 돼도 전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아닌 다른 연기자가 했어도 윤석 씨가 잘 맞춰줬을 테고, 그만큼 다른 매력이 있었을 거에요. 저는 ‘나 아니면 안돼’, 이런 생각 별로 안 하거든요. 저희가 선택 받을 때, 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 행복하긴 하지만 막상 스스로 돌이켜 보면 저 아니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색깔이 달라지긴 하겠죠.
캐릭터의 이미지를 통해 배우의 성격을 가늠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역할에 따라서 사람을 멀게 느끼거나 가깝게 느껴는 거 같아요. 예전에 제가 <인현왕후>라는 사극을 할 땐 모든 분들이 다 저한테 착하다고 했어요. ‘아, 착한 사람 왔네’, 그랬어요. 왜 착한지도 모르게 착한 사람이 됐죠. 그런데 <대장금>을 하고 나니까, ‘어휴, 미워죽겠어! 어쩜 그렇게 독하게 해!’ 이러고. (웃음) 그러니까 역할을 잘 맡아야 돼요. 요즘은 우리 애들도 그래요. “엄마, 이젠 그렇게 악역 같은 거 하지마. 사랑 받는 역할만 해.”
자제 분의 수능준비 때문에 <거북이 달린다>를 고사하려 했다는 얘기도 하셨죠.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 악역을 맡지 말라는 자제 분들의 사소한 말이 어머니로서 마음에 걸릴 때가 있을 겁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본인에겐 큰 고민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요. 어쩌다 보니까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제 직업이 배우가 됐죠. 어느 순간에 제가 배우로 평가 받게 된 거에요. 직장인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군가 그런 사실을 평가해주겠죠.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지, 이런 게 아니라 그저 연기가 좋아서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배우로서 앞만 보고 뛰었더니 다른 사람들이 너는 연기자라고 평가해준 거에요. 그런데 아이들이 크니까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직업보다도 가정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속된 말로 그런 거 물어보시잖아요. “일이 더 중요해요? 가정이 더 중요해요?” 대부분 둘 다 중요하다고 대답해요. 하지만 전 가정이 더 중요해요. 이상하죠?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제 일도 중요하지만 제 가족들이 제가 일을 하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럴 때 제 일을 찾는 거지, 제 일을 하기 위해서 가족을 버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남편이나 아이들이 얘기하는 걸 조금씩 생각하게 돼요. 아이들이 조금 크다 보니까 점점 제 역할을 보게 돼요. 깍쟁이 같은 역할이라도 하면, 그런 역할 말고 집에 있는 평범한 엄마하라고. 그럼 이제 제가 설득을 시키죠. 악역이 있어야 주인공도 있고, 선악이 분명해야 드라마가 재미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게 이렇다니 나도 조금 그렇게 해볼까.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웃음)
(웃음) 그럼요. 집안이 편해야 나와서 일도 잘되죠.
84년도에 탤런트 공채로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84년 3월부터 입사를 한 걸로 됐지만 사실 83년도에 입사했어요. 제가 83학번이라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저는 연기의 ‘연’자도 몰랐죠. 원래 연예인에 꿈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때 저희가 가수 전영록하면 ‘와~!’하는 세대였는데 저는 그런데 무덤덤했고 오로지 무용밖에 몰랐거든요. 제가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오로지 무용만 생각하는 그런 아이였죠.
그런데 어쩌다 연기자로 입문하신 겁니까?
엄마가 우연히 원서를 갖고 와서 “얘, 한번 원서라도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이런 거 내면 큰일나.” 그랬더니, “얘는, 네가 되겠니. (웃음) 그냥 사진 하나 붙이고 한번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 빤빤하게 빗고, 엄마 블라우스하고 언니 큐롯(Culotte)바지 입고, 구두 하나 신고, 그렇게 원서 사진 찍어서 하나 붙여 보낸 게, 1차, 2차, 3차 다 통과해버린 거죠. 제 수험번호가 3316번이었어요. 그때 한 6천명 정도가 지원을 했고, 스무 명 정도를 뽑았거든요. 남자 10명, 여자 10명. 그런데 됐어요. 그래서 방송국에 가니까 여자 10명 중에선 저 하나, 남자 10명 중에서 딱 한 명만 연예인의 ‘연’자도 모르는 친구였던 거죠. 있어요. 그 친구도 지금은 그만 뒀는데, 그 친구와 저만 카메라나 연기 경험이 없는 친구였어요. 남들은 다 연극이나 CF경험이라도 있었거든요. 방송국에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다 어디론가 가요. PD중에 선배도 있고 그러니까 다들 찾아가는데 항상 둘만 그 자리에 앉아있어요. 만날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앉아있는 거죠. 오리엔테이션에서 워크샵으로 작품을 하나 해보는데 암기력만 좋지, 연기는 어떻게 하는 지도 몰라서 헤맬 때는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가 보다 싶었죠.
그래도 어떻게 그만 두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땐 1년 전속계약을 해서 월급을 줘요. 한편 출연하면 5천원을 의무적으로 주는 거죠. 1년 동안 월급을 받고 이걸 하기로 했으니까 학교는 휴학했고 1년 동안 열심히 다녀야겠다,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안 해본 역할이 없었거든요. 1년 동안 단 하루도 안 쉬었어요. 왜냐면 그땐 집전화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밤에 갑자기 전화하면 집에 있는 사람이 몇 명 안됐어요. 제가 항상 연락이 되는 사람 중에 껴 있었던 거죠. 그렇게 가면 뭘 시켰느냐, 더빙을 시켰어요. 그때만 해도 드라마가 대부분 후시녹음이었잖아요. 군중 박수, 이런 것까지 나가서 해야 되는 거에요. 초인종 ‘딩동’소리 듣고 ‘누구세요’, 이런 것까지 입맞춰서 이펙트를 넣어주고. 제가 사실 더빙의 천재에요. 그때 1년 동안 다 배웠거든. (웃음) 그리고 그 1년 동안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그걸로 제가 연기를 배웠죠. 그렇게 1년이 지나서 전속이 풀렸는데 365일 바쁘던 애가 이젠 일이 없는 거에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싶었죠. (웃음)
그게 20년이 넘는 연기자 경력의 시작이었군요. (웃음)
만약 제가 하고 싶었던 무용을 계속 했다면 아마 사랑 받는 무용가가 돼있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분명한 건 제가 그냥 욕심이나 생각 없이 주어지는 대로 앞만 봤다는 거죠. 어떤 사심이 없었다는 거에요. 동기들이 주인공을 할 때 어쩌면 어린 마음에 아무래도 부럽기도 했겠지. 그런데 막상 질투하기 보단 내가 저기까지 가기 전에 일단 이걸 잘해야 될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저를 연기자라는 자리에 있게 만든 거 같아요. 그리고 당시에 일에 욕심내면서 스타가 되고자 했던 하던 사람들은 지금은 오히려 다 없어졌어요.
사실 연기의 ‘연’자도 모르고 배우 생활을 시작했던 만큼 아무래도 처음엔 배우로서의 가치관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연기자로서 삶을 지속하고 있는 만큼 배우로서의 자각이 자리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그게 주기적으로 와요. 딱 십 년 된 해였는데 그 전까진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연기를 했거든요. 일단 대본을 받으면 너무 예민해지고 두려웠어요. 맨날 대본을 껴안고 잤죠. 한 십 년간 정말 일하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욕심도 없어지죠. 그런데 십 년 차엔 뭐랄까, 내 연기가 가짜구나 싶었어요. 그 때 45일 동안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밤 무대에 서는 게 도살장에 올라가는 기분이었어요. 관객들 눈이 너무 무서웠고 미치겠는거지. 이건 가짜 연기인데, 이 연기를 갖고 매일 이 관객들 앞에 서는 게 옳은 일인가, 정말 몸살을 했죠. 그래서 그 연극이 끝나고, 그 다음에 들어온 드라마를 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이 일을 그만 둬야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아마 본능적으로 열심히 했을 거에요. 그 전까진 제 연기를 모니터할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 때부터 조금씩 생각했죠. ‘아, 그래. 너도 조금 가능성이 있는 아이구나.’ 그렇게 십 년을 넘겼어요. 그런데 또 한번 십 년 차가 되니까 또 그게 오더라고요. 예전에 <사랑공감>이라는 드라마를 할 때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때 또 한번 느꼈죠. ‘아, 이게 또 나한테 오는구나.’ 정말 잘해야 된다는 느낌. 그걸 지내고 나니까 그 다음이 다시 좀 쉬워졌어요. 그래야만 마음이 조금 편해져요. 같은 일을 이십 년 정도 하니까 좀 익숙해지는 거 같아. (웃음)
그런데 <사랑공감>덕분에 상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웃음) 그런 것 때문에 용기를 얻어서 계속 할 수 있는 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인생이 아이러니할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자신의 평생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어느 날 밤에 문득 창가에서 제가 여태껏 어떻게 연기자 생활을 했는지 생각해보니 너무 우스운 거에요. 사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버릴 수도 있었는데 어쩜 그렇게 싹싹 잘도 빠져 나왔는지, 어쩜 그렇게 잘 버텼는지, 참 아무 생각 없이 버텼네 싶어서요. 어쩌면 욕심이 없어서 버텨진 거 같아요. 최고가 돼야겠다, 연기를 잘 해야겠다, 스타가 돼야겠다, 이게 아니고 그냥 주어진 걸 한 계단씩 오르다 보니까 가능해진 거죠. 자기가 밑바닥부터 올라갔으면 몇 계단쯤 올라온 줄 알잖아요. 그런데 내려가는 건 쉬워요. 그렇게 어느 순간 딱 떨어지면 어떡해요. 그 괴로움을 참기 힘들죠. 그런데 학연이나 혈연, 지연이 없이 제가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게 지금까지 오히려 저를 연기할 수 있게끔 해준 거 같아요.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다가도 어느 틈엔가 인기 없이 내려올 때도 잘 내려와요. 그냥 툭, 툭, 툭 내려오면 되지, 뭐. (웃음)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을 과소평가하면서도 왜 자꾸 자신에게 연기적인 기회가 주어지는지 의아한 적은 없었습니까?
저는 우리 아이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해요. “지금 당장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앞만 보면서 열심히 가다 보면 누군가 너를 최고로 만들어주고 있더라. 그걸 너 혼자 만든다고 생각하지마. 주변에서 함께 만들어주는 거야. 주변에서 너 최고야, 라는 소리가 나와야 최고지. 네 자신이 너 혼자 아무리 최고라고 해 봤자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네가 최고가 되겠니.” 지나고 보면 참 운 좋았다 싶어요. 저도 자신이 없는데 누가 저를 선택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사장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누군가 늘 찾아줘서 행복하게도 늘 그 일을 하게끔 만들어줘요.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순간순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픽 나요. ‘어머, 네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연기를.’ (웃음) 사실 여기까지 왔다는 걸 늘 감사해요. <사랑공감> 때는 주인공을 맡고 상까지 받았지만 그 다음에 주연급이 아닌 조연급의 연기를 하니까 어떤 분이 저한테 그랬어요. 저보다 훨씬 스타였던 분인데, “야, 너 이제야 그런 거에서 벗어났는데 왜 그런 역할을 해?”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랬어요. “저는 그냥 견미리니까요. 인기 있는 스타가 아니라 그냥 배우니까요.” 제가 그 맛을 한번 봤다지만 그거 아닌 다른 걸 또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냥 배우라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지, 그 역할에 대해서 크기나 질, 양을 따지겠어요. 질이나 양은 제가 만드는 거죠. 5분을 나와도 5분 동안 제가 충실하면 아마 남을 거에요.
그런 생각들도 사실 당시엔 몰랐지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그 과정에서는 알기 어려운 사실일지도 모르죠. 다만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게 아닐까요.
십 년 지나고 이십 년 지나니까 이런 말을 하지, 십 년 차 되는 해에도 너무 아팠고, 이십 년 차 되는 해에 또 아팠고, 그래서 한편으론 두려워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두려움이 다시 오면 그 땐 어떻게 극복할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때도 또 힘들어 지겠죠. 아마 그때마다 힘들 거 같아요. 그래도 그 때 아팠던 게 지금은 너무 많이 도움이 되니까 앞으로도 참아야겠죠.
나이에 따라 연기할 수 있는 역할에 제한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아뇨. 그런 것보단 곱게 나이 들고 싶어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연기자는 너무 나이 먹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고, 너무 젊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죠. 참 맞추기 힘들어요. (웃음) 그래도 저는 주름진 얼굴이 친숙하고,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인상으로 비춰지고 싶어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사실 사생활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편이 아닐까 싶은데요.
인터넷이 무서워요. 그런데 저는 어차피 공인이라 그런 무서움을 감수하지만 아이들이 크니까 그게 아이들에게 많은 피해를 줘요. 그래서 어느 때는 인터넷 사이트에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다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죠. 걔들은 굉장히 괴로워하거든요. 그리고 차라리 있는 얘기만 하면 괜찮아요. 어느 때 보면 제 딸도 아닌데 제 딸이라고 올라와있을 때도 있다니까요. (웃음) 다만 기분 좋게도 예쁜 애들만 올라와있어서 다행이지. 내 딸보다 훨씬 예쁜 애들이야. 그냥 추측해서 올렸나 보죠. (웃음) 그런데 어쨌든 걔들도 불편할 거 아니에요. 제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저는 연기자일 뿐이지, 스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이슈가 되는 게 별로 재미없어요. 그냥 저에게 주어진 걸 잘 하면 되는 거죠.
<거북이 달린다>가 본인에게 준 특별한 변화가 있을까요?
이제 영화배우가 됐으니까 영화 시나리오는 다 받아서 읽어봐야지! 이런 자신감을 줬어요. (웃음)
다음 드라마에 대한 기사가 벌써 났더군요. 주인공이라던데.
아, 그렇게 나갔더라고요. 사실 해볼까 생각하다가 안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홍보가 먼저 나가버렸죠. 연령대가 조금 안 맞더라고요. 영화 개봉했으니까 이제 조금 더 쉬어야겠다 싶어요. 이렇게 몇 달 지나가고 찬바람 불 때쯤 다음 작품 생각해보려고요. 이번엔 좀 많이 쉬고 싶어요. 그런데 또 그러다가도 생선가게 아줌마라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전 후딱 해버리니까요. 제 마음 저도 몰라요. (웃음)
<트랜스포머>가 이룬 시각적 성취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로봇의 철판을 CG로 구현하는 건 크리쳐나 생물의 피부를 재현하는 것보단 손쉬운 작업이다. <트랜스포머>의 성취는 사실상 이미지의 구현 자체에 있다기 보단 그 이미지가 정신적 편견에 가까운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지점에 있다. 테크놀로지의 혁명이라는 흔해빠진 수사보다도 중요한 건 거대변신로봇들이 실사적인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오락영화가 시장성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다. 그러니까, ‘아마, 우린 안될 거야’를 ‘꿈은 이루어진다’로 변화시킨 저력이랄까. 이는 디스토피아적 예감을 등에 업고 스릴러적 감각을 바탕으로 두른 액션 시퀀스를 선사하던 <터미네이터>의 인간형 로봇과 전혀 다른 재질의 쾌감을 두른 본격 로봇 블록버스터의 출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은 전작의 성공에 힘입은 속편이다. <트랜스포머2>도 상업적인 성공을 밑천으로 컨텐츠의 자가증식을 거듭 반복하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을 고스란히 차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트랜스포머2>가 선택한 세일즈 포인트는 양적 팽창이다. 어느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속편들이 그렇듯 <트랜스포머2>에서도 물량공세적 팽창이 단연 눈에 띈다. 일단 로봇의 개체수가 현저히 늘었다. 그리고 액션 스펙터클의 규모도 전작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너비를 확장했다. 심지어 2시간 30여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은 <트랜스포머2>의 덩치를 가늠하기 좋은 요건이다. 러닝타임의 확대는 서사보단 묘사에 대한 팽배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LA도심을 비롯해 미국을 무대로 벌어지던 로봇들의 활약상은 속편에 이르러 상하이와 이집트 등 전세계적인 랜드마크를 점령하듯 펼쳐지고 나열된다.
로봇의 개체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작보다 눈에 들어오는 로봇 캐릭터는 현저히 줄었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범블비’를 제외한 나머지 로봇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소모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매력이 없다. 물론 ‘스타스크림’이나 ‘메가트론’과 같이 악의 축에 선 로봇들도 비등한 자태로 그 맞은 편에 온전히 존재감을 알리지만 무채색의 디자인으로 통일성이 두드러진 ‘디셉티콘’로봇들은 하나같이 몰개성적이다. 심지어 컬러풀한 색채감으로 개성을 자아내는 ‘오토봇’로봇들도 딱히 명확한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새롭게 가미된 트윈스 로봇, ‘스키즈&머드플랩’은 인상적이라기 보단 눈에 밟히다 마는 수준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닥다리 로봇 ‘제트파이어’정도를 제외하면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매력을 전달하는 로봇 캐릭터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개체수가 증가했을 뿐, 하나같이 일회용에 가깝다. 물론 그만큼 질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만큼 소모적인 감상을 부추긴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물론 후반부에 등장하는 초대형 합체로봇 ‘디베스테이터’나 ‘옵티머스 프라임’의 합체버전은 새롭게 ‘득템’했다 할만한 볼거리를 추가한다. 게다가 중반부에 다다를 즈음엔 <터미네이터>를 직설적으로 겨냥한 듯한 인간형 로봇조차 등장한다. <그렘린>을 모방한 듯 방정맞게 움직이는 소형 로봇들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로서의 활용도가 낮아보인다. 늘어난 숫자만큼 출연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는 로봇이 많아 보인다.
빠른 속도감을 자랑하는 컷의 흐름은 전작만큼이나, 혹은 전작보다 더 현란하다. <트랜스포머2>는 마치 눈에서 뇌로 시각적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와 경쟁하듯 컷을 구겨 넣은 이미지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그 와중에 고속촬영을 모방한 슬로모션으로 거대한 속도감 사이에 작은 심호흡을 마련하기도 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밀고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는 두뇌적 판단을 흐린다. 정신 없음 자체를 만족의 요건으로 유도하는 양상이다. 사실상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활유적이며 의인화된 강철피부의 유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의 인정할만한 성과는 스크린에 구현된 로봇의 육중한 자태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로봇의 육체에 인간적 감수성을 투영했다는 지점에 있다. <트랜스포머2>는 이런 감수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부각시킨다. 로봇간의 격돌 과정에서 파편이 떨어져나가고 윤활유를 내뿜는 옵티머스 프라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마치 인간의 피부조직과 피로 대입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인상마저 든다. 로봇의 파괴가 아닌 살해처럼 인식된다. 그것은 엄연히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 따위와 무관한 별나라 생명체들이다. 인간이 창조한 유사 생체가 아닌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종족인 셈이다. 인간 캐릭터, 즉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나 미카엘라(메간 폭스)의 매력이 전작에 비해 반감됐음에도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로봇 캐릭터들이 그 공백을 대신할만한 자질을 지닌 덕분이다. 엄밀히 말해서 <트랜스포머2>의 주인공은 로봇이다. 오히려 인간이 조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G로 구현된 가상의 존재가 인간의 연기를 압도한다. 이는 호불호의 영향력을 떠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중량감이 늘어난 액션신은 시각적 정보가 층위를 형성할수록 지독한 기시감을 부른다. 변신과 난투의 동어반복 속에서 그 특별한 매력이 점차 반감되는 느낌이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서 로봇의 육박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드라마의 밀도보다도 광활하다. 항공모함을 부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로봇들이 몸을 던진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사이, 한낱 손바닥만한 인간들은 발에 땀나게 뛰고 달릴 뿐이다. 명확히 의미를 전달하자면 늘어난 부피에 비해 질량은 축소된 느낌이다. 오락적 밀도가 감소됐다. 로봇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 활용했던 전작의 유머는 좀처럼 활용되지 않는 반면 입담도 느슨해졌다. 전작보다도 비범한 역할을 자처하지만 오히려 전작에 비해 활용도가 낮아 보인다. 그만큼 캐릭터의 대비를 통한 시너지가 약해진 느낌이다. 인간과 로봇의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활성화되어야 할 입체적 구조가 헐겁다. 그만큼 감흥의 유효시간도 짧아진다. <트랜스포머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현란한 영상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블록버스터다. 이는 분명 유효하다. 하지만 그 유효함이 끝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동어반복적인 액션신, 몰개성적인 캐릭터로 구축된 장시간의 러닝타임은 결말에 임박할수록 과감한 물량공세를 아끼지 않음에도 지켜보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단순한 시각적 감흥에 기댄 너비의 확장만을 앞세워 2시간 30여분을 채우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인다. 물론 전작에 비해 좀 더 암담해진 분위기는 비범한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완구로봇 엔터테인먼트의 수준에 가깝던 <트랜스포머>를 성인 취향의 오락물로 끌어올렸다 할만한 변화다. 때때로 그것은 만화적 취향의 로봇 대전이 아니라 장르적 서스펜스가 가미된 잔인한 혈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옵티머스 프라임과 디셉티콘 3종 로봇이 펼치는 중반부의 전투신은 <트랜스포머2>의 액션신 가운데 백미라 꼽을 수 있는 장면이다.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마냥 생생한 질감으로 스크린에 투사된 로봇의 현란한 움직임을 지켜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엔터테인먼트다. 망막을 피로하게 만드는 컷의 속도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마냥 포기할 수 없는 유흥일지도 모른다. 말초신경이 마비될 것 같은 시각적 압도감을 감상한다는 건 분명 흔한 기회는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각적 욕망에 비해 느슨한 농담과 육중한 액션의 동어반복 가운데 사족이 남발되는 스토리를 긴 시간 동안 감내할 수 있다는 것도 그것을 충만 시켜줄 것이라 믿어지는 시각적 자극이 존재한다는 전제 덕분일지 모를 일이다. 어지럽고 산만하게 돌아가는 과잉적 이미지 가운데 로봇이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이 선명하게 판별되진 않아도 변신을 거듭한다는 것에 현혹된다면 <트랜스포머2>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영화라 추켜세울만한 요건을 갖춘 셈이다. 빈 깡통임에 틀림없지만 깡통 디자인이 압도적인 건 사실이므로, 그 디자인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결코 무시하기 힘든 결과물이다. 하지만 <트랜스포머2>는 분명 적정수준의 역치를 넘어선 과잉의 자극을 내보내는 중독적 엔터테인먼트다. 즐기고 있다기 보단 홀리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과다한 자극적 세기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실은 긴축되고 자극은 증폭됐다. <트랜스포머2>의 장기적인 흥행성패도 그 지점에 대한 호불호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그 결과는 어쩌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자극적 세기를 조율할만한 새로운 지표로서 참고될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물론 테스트베드 대한민국의 이상기후적인 열광이 보편적인 기초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