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첨단 로봇의 시대. <써로게이트 Surrogate>는 본래 단어의 의미처럼 ‘대리자’로서 기능하는 로봇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인간을 대신한 로봇의 육체가 주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집에 누운 채 두뇌활동만으로 로봇을 조종한다. 덕분에 인간이 자취를 감춘 거리엔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인공피부를 두른 로봇들로 가득하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얼짱이 될 수 있고, 다이어트와 운동에 신경 쓰지 않아도 몸짱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단순히 대리적 행위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정적 교감마저 주인과 공유할 수 있는 써로게이트는 자신을 조종하는 주체의 삶을 완벽하게 대신하는 대리인이다.
취재와 인터뷰 영상을 거칠게 편집해 서사적으로 배열한 도입부는 <써로게이트>가 주창한 세계관에 대한 객관성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과 같다. 써로게이트를 혁신이라 일컫는 생산자와 몇몇 과학자, 그리고 써로게이트의 반대편에 놓인 세력들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영상은 <써로게이트>에 내포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부각시킨다. 써로게이트가 개발되어 인류의 범죄율이 완벽히 사라졌다는 17년 간의 서사를 간략히 정리하는 도입부를 넘어 현재에 다다르며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가는 <써로게이트>는 정체불명의 살인사건을 묘사하며 의문스럽게 본론으로 들어선다.
주인과 교감하되 피로나 충격을 전달하지 않는 로봇의 형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만약 이 기술이 현존한다면 인류의 삶은 질적으로 풍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사상 가능성이 높은 고난이도 작업에 인간 대신 써로게이트를 조종시킨다면 일의 정밀도는 높아지고 인간이 위험에 노출될 확률도 현저히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써로게이트>에서의 써로게이트는 특정한 기능적 작동을 위해 마련된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온전히 인간의 삶을 대신하다 못해 장악해버린 로봇의 도시에서 집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일상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써로게이트>는 고의적으로 비관적인 감상을 도모하는 작품이다.
자신의 행동범위를 온전히 기계에게 양도해버린 인간들의 삶은 편리라기 보단 일종의 포기처럼 보일 정도로 기계에 예속된 삶을 산다. 그건 어쩌면 기계라는 숙주에게 육체를 강탈당한 채 에너지 공급원으로 사육되는 인간들의 비관적 미래를 그린 <매트릭스>를 응용한 버전처럼 보일 정도다. 궁극적으로 써로게이트는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문명에 의해 점령당한 인간들의 미래를 그리는 SF묵시록과 궤가 다르다. 타의적으로 삶을 빼앗긴 인류의 양상과 달리 자의적으로 삶을 양도한 인간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대리적 삶을 향유한다. 이는 직접적인 육체적 행위를 배제한 채 온전히 정신적 활동에 기댄 인간의 삶이 과연 완전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써로게이트’는 그 상상력에 제기되는 현실성의 의문을 집요하게 따져 묻지만 않는다면 흥미로운 문제제기를 이루는 소재라 할만하다. 혈색 없는 표정으로 인간의 움직임과 감정마저 대신하는 기계적 육체는 그로테스크한 감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그 존재적 형태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인간의 뇌파를 통해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로 작동하는 써로게이트가 인간의 모든 대리적 행위를 가능케 한다는 <써로게이트>의 설정은 개인적 범위와 사회적 범위에서의 접촉과 고립을 통해 다양한 감정적 양상을 발전시켜나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 만한 것이다. 다만 그 자질을 <써로게이트>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건널 수 있다면 말이다.
인간의 일상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써로게이트에 대한 기술적 가능성에 품을 만한 의심을 묵과한다 해도 그 기술이 완벽하게 보편화된 인류의 풍경은 지나친 허풍에 가깝다. 현실적 여건에 대한 물음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행적 풍토가 현상을 넘어 보편적인 삶의 풍경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영화적 설명에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설정에 대한 의문은 스토리의 진전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될만한 것이다. 범죄수사물의 형태에서 음모론의 양상으로 발전해나가는 스토리는 적절한 설득력을 등에 업고 진전된다. 결국 기이하게 통용돼버린 기이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개인, 그리어(브루스 윌리스)의 감정적 자각과 충동은 정착된 세계관의 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건한 것이라지만 실상 그 감정을 세계관의 전복으로 활용하는 영화적 태도가 지나치게 안이한 탓에 특별한 의미 자체를 무마시킨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부서 버리는 광경을 설득력 있는 것처럼 관람하길 강요하는 느낌이다.
<써로게이트>는 세계관에 대한 디자인에 심취해 그럴듯한 이미지를 구사할 뿐, 그 구동방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아이디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건 표면적인 설정에 대한 강요만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기본적인 설정에 적절한 설득력을 내장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껍데기를 만끽하는 권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인류와 대비되는 대리 로봇의 존재를 통해 휴머니즘적 성찰까지 경유하고 액션영화로서의 묘미까지 내달리곤 하는 <써로게이트>의 재원적 야심은 부실한 설계도 덕분에 일거에 무마된다. 설득력이 부족한 세계관 덕분에 기초적인 아이디어로부터 얻어지는 흥미는 손쉽게 휘발된다. 특히나 상투적인 결말은 <써로게이트>가 지극히 안일한 영화임을 인증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주름이 선명한 브루스 윌리스의 얼굴만이 추억을 자극할 뿐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사실 애기 가지려고 쉬고 있었다. 그래서 살도 쪘고, 여러모로 홍보하기 적절한 시기는 아닌데 홍보하러 다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웃음)
아무래도 <날아라 펭귄>이 인권위 영화인 덕분에 인터뷰 중에 영화 외적인 질문이 많았을 것 같다.
내가 사교육 열풍에 관련된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거기에 대한 혜안이나 결론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사견에 불과하지 않나. 내게 어떤 집행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담이야 나눌 수 있지만 그런 질문을 받게 되면 아무래도 대답하기 버겁다. 엄마로서 어떻게 자식을 교육할 거냐, 물으시는데 사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지금 낳아본 적도 없고, 일단 그냥 엄마나 됐으면 좋겠는데. (웃음) 계속 그런 질문을 받았는데 나도 내가 아직 어떤 엄마가 될진 모르겠다. 대충 넘기듯 대답하고 있긴 한데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인 거 같다. 워낙 큰 문제이기도 하고, 내가 아직 현실로서 맞닥뜨린 부분도 아니니까.
어쩌면 <날아라 펭귄>을 통해 간접경험을 얻었다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처음 들어본 단어가 많았다. ‘선행학습’.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선행학습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는 엄마들 얘기는 처음 들어봤다. ‘태글리쉬’ 이런 용어도 처음 들어봤고. 정말 아빠 말대로 민족의 혼이 담긴 우리나라 운동을 왜 영어로 가르치니? (웃음) 어쨌든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물론 <날아라 펭귄>이 굉장히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고 주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라서 많이 공감하면서 찍을 수 있었다.
아이를 낳는 건 최근에 와서 결심한 문제인가?
그 전엔 일을 하면서 출산까지 겹치는 것이 버거울 거 같아서 피했는데 요즘엔 낳아봐야겠다 싶어지더라. 그래서 남편한테 “낳을까요?” 물으니까, “예. 낳읍시다.” 해서 결정했다. (웃음)
아무래도 예정에 없던 작품을 한 셈인데.
계획했던 작품은 아니었지. 드라마 하는 와중에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캐스팅도 안되고, 제작비도 없는 상황이라 같이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게 됐다. 주말 드라마는 일주일에 5일 정도 촬영하고 이틀 정도 쉬니까 그때마다 가서 촬영했다.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나?
있었지만, 사실 드라마에서 내 분량이 조금 적어서. (웃음) 무엇보다 마음의 부담이 없었고 스트레스도 별로 없었다. 그냥 연기하기 전에 약간의 긴장감이나 의심들이 조금 있었지만 내게 압박을 줄 만큼은 아니었지. 오히려 현장이 즐거워서 가고 싶고, 가면 편안했다. 촬영 준비할 때 옆방에서 쪽잠을 자더라도 재미있고 그랬다.
<날아라 펭귄>은 사실 옴니버스적 형태에 가까운 영화다. 결국 주부이자 직장인으로서 가정과 회사를 배경으로 한 두 가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셈인데 그 두 환경은 본인에게 생소한 풍경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 회식 문화를 겪어본 적이 없다. 영화 현장에도 어른들이 있지만 직장의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아니니까,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할 순 없었다. 게다가 영화 하는 여자들은 담배도 많이 피니까 회의할 때 보면 위 아래 막론하고 다 꺼내 물잖아. 부장님 있다고 담배 못 피우고 이런 거 없지. 그래서 그런 모습이 생소하긴 했다. 그래도 배우들이 전부 돈도 받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모여서 그랬는지 찍을 때마다 분위기가 좋았다.
에피소드가 변하면서 주연에서 조연으로 비중이 이동된다. 같은 인물이지만 다른 역할을 하는 셈인데 그 와중에서도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사실 처음엔 감독님께서 조금 걱정하셨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유명한 사람이 조연 캐릭터로 나오니까 관객 입장에선 뭔가 해주길 바랄 수도 있고, 앞선 에피소드와 캐릭터가 연결돼야 할 텐데 완전히 분리된 환경에서 캐릭터를 어떻게 연결시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 그런데 좋은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하게 된 거 같다. “요즘 애들은 진짜 용감하다.”, “과장님, 한잔 하세요.” 이런 대사들이 원래 대본에 있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커트하면서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나오더라. 물 흐르듯이 분위기가 흘러가서 재미있었다. 게다가 누구 하나가 애드립을 쳐도 거슬리지 않았다. 자기 캐릭터에 맞게 적재적소에서 소박한 애드립을 치고 개인적인 욕심으로 균형을 깨뜨린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고맙더라.
아무래도 그런 애드립을 잘 받아주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것 같다.
누구라도 이 작품에 좋은 걸 해야겠다 싶었을 거다. 그러니 상대방이 충분히 납득할만한 상황을 연출하려 했을 테고. 사실 개인적인 분량이나 캐릭터에 대한 욕심으로 나오는 애드립은 다 알거든. 전체 흐름을 깨니까. 다들 진짜 직장 동료들처럼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매번 상을 잘 차려주는데 궁합이 잘 맞아야지. (웃음) 우리가 개런티는 못 받아도 밥상은 잘 받는다면서 항상 즐겁게 촬영했고 그런 분위기에서 어깃장 놓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최근에 홍상수 감독님의 <하하하>에도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고 들었는데.
전부 감사패만 받았다. 물론 통영에서 촬영할 때 숙박이나 숙식은 제공해줬지. 그거 말고는 받은 건 없었다. 돈이 너무 없으셔서 안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웃음)
작품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은데.
홍상수 감독님에겐 영화를 만드는 자신만의 완벽한 시스템이 있다. 작품에 대한 신뢰도 신뢰지만 그런 독창적인 시스템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작품 자체가 <하하하>잖아. 한 여름의 흥겨움 같은 거랄까. 그런 기분으로 한 달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물론 슛 들어가니 술도 세게 먹어야 했고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사실 홍상수 감독님 영화가 겉보기엔 가볍게 찍은 것 같지만 상당히 계산적이고 집요하게 촬영된다고 들었다. 현장에서 아침마다 대본을 주신다. 물론 그게 미루고 미루다가 방송 전날 주는 드라마 쪽대본 같은 건 아니고. 이건 매일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거니까 조급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아침마다 쓰시는 건데 매일 하나씩 받을 때마다 너무 놀랍다. 앞뒤의 엮임, 짜임, 구성, 뒤깎기, 이런 것들이 너무 절묘하다. 그래서 지금 대사 하나를 다르게 하고 싶다가도 다음에 이게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연결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감독님이 써준 대사 하나하나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오고 그 상황 속 행동들에 신중하게 접근하게 된다. 카펫 짜는 거 보면 그냥 착착착 짜는 거 같지만 정교한 그림이 나오잖아. 그런 느낌이다. 마치 슥슥 찍는 거 같은데 그 안에 짜여짐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정교하지.
예전에 김태우 씨와 유준상 씨를 인터뷰했는데 비슷한 말을 하더라. 아침마다 대본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릴 정도로 설렌다. 뭐가 나올까, 이러다가 딱 나오면 제일 먼저 받아가지고 정말 푹 빠질 정도로 반해서 그걸 싹 빨아들이고 싶어진다. 그날 그날 재미가 있다.
마치 재미있는 연재소설 다음 편을 기다리는 기분일 거 같다. <날아라 펭귄>도 이야기가 재미있더라. 인권위에서 만든 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는 다른 사람이 봐도 재미있어 할까 걱정되더라. 너무 여러 인물이 나오고 클라이막스가 확실한 것도 아니라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시사 반응이 좋은 거 같다. VIP시사 때는 아무래도 다 영화에 애정을 갖고 오신 분들이 오시니까 호의적일 수 있지만 뒤풀이에서 새벽 2시 반까지 얘기가 끊이지 않는 거다. 집안 얘기는 하지 않던 사람들도 자기 자식 얘기, 부모 얘기, 요즘 교육문제 얘기, 이런 이야기로 자리가 파할 줄 모르더라. 사실 뒤풀이 분위기를 보면 그 영화를 점칠 수 있는데 분위기가 참 좋더라. 그래서 약간 헷갈린다. 이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나, 이 분위기로 보면 되게 재미있는 건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하나 이상씩 공감할만한 지점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번에 임 감독님한테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여자들이 전부 다 드세냐고 했다던데. (웃음) 남자들이 다 안쓰러울 정도로.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감독님은 지금까지 영화에서 항상 남자 편이었잖아요.” 막 이랬다. (웃음) 옛날에는 남자다움이 한 가지 모습이었다면 요즘 남자들은 돈만 벌어와선 안되고 다양한 걸 요구 받고 그만큼 다양한 대처가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남자들도 어려움이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 교육이나 이런 측면에 대해서는 대부분 엄마들의 파워가 센 것 같기도 하고.
“요즘 엄마들이 문제야.” 라는 대사를 할 때 재미있었다.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서 그렇지, 우리는 누구나 인권문제에 있어서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내가 나도 모르게 어떤 사람의 인권을 침해한 적 있고, 내가 침해당하고도 모를 수 있는 거다. 사실 조금만 신경 쓰고 배려하면 서로 존중해줄 수 있는 부분인데 그걸 못하다 보니까 집단적으로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엄마가 악착같이 그려지지만 사실 아이만큼이나 엄마의 삶도 고단하다.
엄마도 자기의 다른 모든 것들을 접고 아이에게 올인하는 거니까. 그래서 부부의 인권도 이야기를 만들어서 넣어야 된다는 말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자기랑 방에 들어가서 자자 그러는데 와이프는 계속 애만 잡고 늘어지고, 둘째를 낳자는데 둘째 교육비는 어떻게 감당하냐면서 아내가 남편과 잠자리를 거부한다던가, 이런 부부의 인권문제도 넣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러자니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줄였지.
요즘처럼 육아가 힘든 일이 된 시절도 없는 것 같다. 지금 애를 낳기로 결심한 마당에 두렵진 않나? 정말 어려운 일 같다.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낳아보는 거지, 그런 생각 다하면 못 낳을 거다. 많은 것들이 변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결혼으로 환경이 좀 변하더라도 서로 잘 맞춰서 배려하면 기존의 자신을 많이 바꾸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다는 건 기존의 나를 엄청나게 바꿔야 되는 일이다.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환경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변화 없인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을 것 같다. 그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거 같아서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친구분이나 지인들 가운데 엄마가 된 사람도 많을 텐데.
많지. 친구들, 선배들.
그런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괴리되는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나?
엄마들끼린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서 밤이 새도록 얘기한다. 정보를 주고 받고, 받아 적고, 그리고 또 한참 또 얘기하고, 자기 자식 한탄하다가, 공교육 환경 욕하기도 하고. 난 그런 대화에 끼지 못하고 그냥 옆에서 맥주나 마시거나 안주나 만들어주고 그랬지. 그런데 나 역시도 많이 들어왔던 부분이라 그런 걸 무시할 순 없다.
아직은 실감나지 않는 일이겠지만 자식을 어떻게 기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나마 해본 적은 없나?
자세히는 안 해봤다. 그냥 음악도 좋아하고, 책도 좋아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아니면 너무 경쟁관계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도? 만약 아빠 닮으면 음악 좋아하고 엄마 닮으면 책 좋아하겠지. 우리 둘 다 누군가를 이기거나 1등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아이도 그렇게 컸으면 좋겠다. 이 정도만.
막상 아이를 기르다 보면 욕심이 커질 수도 있을 텐데.
막상 닥쳐보면 모르는 거니까. (웃음)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서 남편인 장준환 감독과 많은 상의를 한 건가?
이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게 잘하는 짓이냐, 이런 얘기부터 시작해서 몇 명을 낳을 것인지도 생각했다. 유명한 사람의 아이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부담주진 않을까 싶어서 아이한테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불리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도 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했지.
아이를 낳고 배우로서의 활동에 제한이 생길 수도 있다.
이미 워낙 제한이 많았기 때문에. (웃음) 애 낳기 전에 이미 애 엄마 역할도 많이 했고, 여러 가지를 했기 때문에 하기 나름이지, 뭐.
멜로영화 주인공으로서 기회도 확연히 줄어들지도 모른다.
사실 나한테 로맨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되는 정통 멜로도 별로 없었잖아. 그런데 이젠 좀 해보고 싶더라. 예전엔 욕심도 없었다. 그런 작품보단 다른 작품이 좋았고. 그런데 이제는 사랑을 알 거 같기도 하고, 물론 완전히 아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생각하던 20대 초반의 설레고 앞뒤 모르는 사랑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 같다. 이젠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가슴 아파하는 그런 표현들을 할 수 있겠다고,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으로 1년은 쉬려고 하니까 모르겠네. (웃음)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30대 중반이 되니까 멜로가 생각이 난다.
성숙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을 꿈꾸나 보다.
사랑에도 깊이가 있겠지. 사랑은 늘 철없는 거고, 늘 이기적인 거라지만 이렇지 않을 수도 있는 다른 사랑?
결혼은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줬다고 생각하나?
글쎄, 사실 결혼하고도 계속 일을 했고, 내가 살던 환경에서 계속 살게 됐으니까 그렇게 큰 변화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하도 결혼 안 한다 그래서 최대한 변화 없게 했나? (웃음) 물론 이런 생각은 든다. 결혼하고 나서 아직까진 웃는 시간이 더 많았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더 부드러워진 거 같다고 얘기하는 거 보면 결혼하길 잘됐네 싶어진다. 그리고 노인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노인문제?
시어머니를 모시는데 시어머니 연배가 80세가 넘으셔서 나한테는 할머니나 다름없다. 그런데 노인문제는 정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거 같더라.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문제인데 너무 개인적으로만 해결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더라. 육아나 교육도 그렇듯이 노인문제도 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공공의 영역에서 해결돼야 할 사안들마저 개인들에게 떠맡겨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이런 생각도 해봤는데, 나라에서 시립, 공립유치원 많이 만들잖아. 유치원을 만들 때 법적으로 노인시설도 같이 만들게 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허가를 안 내주는 거지. 아침에 애들이 유치원에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버스 타고 갔다가 오후에 같이 오는 거다. 프로그램 따로 하더라도 밥은 같이 먹고. 그럼 애들이 뭘 먹는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볼 수 있고, 애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충분히 볼 수도 있을 테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그 영화 뭐였더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근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거기 보면 양로원이랑 유치원이 같이 있는 시설이 나온다. 그걸 보고 ‘내가 생각하던 게 저건데! 저런 게 정말 만화에 나오다니 일본은 저런가?’ 생각했다.
교육학과를 전공했다.
맞다. 그런데 교육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웃음) 내 손으로 레포트를 써본 적도 별로 없고.
교육학 전공자가 연기를 하게 된 경위가 궁금한데.
다들 의아해한다. ‘사카모토 준지’라고, <KT>라는 영화를 만든 일본 감독을 만난 적 있는데 그 분도 교육학과 출신이라더라. 그 분도 교육학과 출신을 영화계에서 만나기가 어렵다면서 놀라던 게 기억난다. (웃음) 사범대 나온 사람만의 특징이 있는데 처음부터 교사가 되려고 마음먹고 온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제도에 순응을 잘한다. 도덕, 법률, 규범을 어기는 사람도 별로 없고 성향적으로 착하다. 그래서 MT같은 데 가서도 놀아도 밀가루에 찹쌀떡 넣어서 빼먹고, 2인 3각 게임 경기하고, 이러고 논다. 덕분에 문과대나 다른 과 사람들이 보면 우릴 애 취급하면서 되게 비웃고. (웃음) 분위기가 좀 다르긴 하지. 그런데 나는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이며 국악반이며 하는 게 많았다. 다른 공부들에 관심이 더 많다 보니까 대학생활에서 그런 게 주가 됐고, 교육학이 부가 됐지.
만약 전공대로 직업을 선택했다면 <날아라 펭귄>에 나오는 회식 문화를 경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텐데.
학교 회식도 만만치 않다더라. 거기도 나이별로 쫙 이렇게, (웃음)
<태왕사신기>로 드라마 데뷔를 했는데 당시 연기적 논란이 많았다. 사실 지금까지 작품 활동하면서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당황스럽지 않았나?
그때는 뭐, 경황이 없었지. 현장 자체도 경황이 없었고. 매일 대본도 바뀌고,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르고, 그래도 온에어(on air)는 100% 이뤄져야 하니까 촬영은 해야 됐고, 그렇게 쉼 없이 넘어갔다. 후반에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까지 같이 작업하느라 바빴지. 사실 <태왕사신기>현장은 보통의 드라마 현장이나 영화 현장과도 달리 좀 특별했다. 박상원 선생님 말에 따르자면 제3의 현장이랄까. “네가 지금 드라마를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 말 듣고 나니까 ‘난 드라마를 해보려고 한 건데 억울하네’ 생각되더라. (웃음)
<내 인생의 황금기>를 통해 다시 한번 브라운관 연기에 도전했다. 끝까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적응할 때까지 해볼 거다. (웃음) 아직 내가 좋아하는 작품, 나랑 잘 맞는 작품을 못 만났다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고. <내 인생의 황금기>때 감독님이 나한테 그러시더라. 남들 드라마 30년 하면서 겪을만한 안 좋을 일들을 어떻게 드라마 두 편에서 다 겪어보냐고. 이럴 정도로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어쨌든 내가 선택한 거니까 이렇게 겪다 보면 나중에 좋은 날 오겠지. 아마 또 하게 될 거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 작품에 대해서 미리 알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사실 정보를 많이 안 주거든. 늘 바뀔 수 있는, 제대로 되지 않은 정보만 주고. 그래서 내가 미리 좋아하는 마음을 듬뿍 담을 수 있는, 마음 붙이려고 뒤늦게 노력하지 않고 시작부터 애정을 듬뿍 갖고 시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다.
드라마 현장에서 얻은 신선한 자극은 없었나.
있었지. 신선한 자극이라기 보단 약이 되는 부분이랄까. 선생님들께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면서 도와주시기도 했고, 가르쳐주시기도 했고. 덕분에 선생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건 6개월 동안 일주일에 5일씩 어떤 작품에 출근하듯이 레이스 하나를 끝냈다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나한테는 큰 경험이었다.
연기 잘한다는 남자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는데, 항상 상대배우의 연기를 눙치듯 연기한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느 영화 메이킹에서 보니까, ‘모건 프리만’이 그랬던가? 연기의 본질은 리액션이라고. 내 연기는 상대 배우에 따라서 편차가 큰 거 같다. 이건 상대방 탓은 아니고, 내가 상대방을 많이 탄다고 해야 될까? 만약 10번 슛을 들어간다고 하면 그때마다 상대방의 연기가 변하지 않아도 내 리액션은 계속 변할 거다. 감독님들도 나한테 그런 얘기 정말 많이 한다. 내 샷이 아니어도 변할 때가 있다고.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내 분량을 따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걸 잘 못한다. 맥을 놔버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게 내 단점이다.
그만큼 상대의 기운에 따라 어떤 능동성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대되는 면도 있지 않을까.
그 기운에 굉장히 좌지우지되는 거 같다. 조금 덜 그래도 될 거 같은데, 그걸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직 거기까진 기술이 없나 보다. 앞으로 더 좋아지겠지.
사실 남들보단 당사자니까 민감하게 느껴지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연기파 배우라고 인정받지 않나. (웃음)
누가 그러더라. 연기파 배우 그게 얼마나 웃긴 말이냐고. 요리파 주방장? 이런 말과 똑같다고. (웃음) 주방장은 당연히 요리를 해야 되는 거고, 배우는 당연히 연기를 해야 되는 거잖아. 연기파 배우란 말이 그만큼 웃긴 말이라고 누가 써놓은 글을 보면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고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만큼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10년 정도 매년마다 한 작품 이상씩은 작품 활동을 해왔는데 아무래도 애를 낳고 나면 지금보단 자중하게 될 공산이 크겠다.
쉬면서 한번 앞으로의 10년도 한번 생각해봐야지. 대학졸업하고 스물여섯에 시작해서 한 10년 했으니까 서른 여섯부터는 다시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이걸 계속 할건지 말 건지도 생각해보고, (웃음) 계속하면 어떻게 할건지 고민해보고.
지난 시절을 자주 돌이켜보나?
많이 돌이켜보진 않는데 그런다 해도 정말 좋은 기회가 많았으니까 아쉬움이 남거나 그렇진 않을 거 같다. 별다른 욕심은 없다. 많은 작품을 하지 못하더라도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좋은 작품 한편 하면 그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고, 후반 작업하고, 홍보하고, 개봉하는 몇 달 동안 계속 그 작품의 영향을 받는다. 작품 자체나 그 작품을 함께 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나중에 또 어디서 상영이 돼서 누군가 그 영화를 보면 피드백도 많이 오게 된다. 아무리 큰 상을 받아도 순간이다. 즐거운 것도 순간이다. 그런데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 작품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게 진짜 소중한 거 같다.
연기자로서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뒤늦게 얻은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에 대한 변화를 느낄 때가 있나?
옛날엔 이렇게 생각했다. 프리(프로덕션) 때 준비하고, 슛 가면 연기하고, 홍보 끝나면 쉬어야 된다고.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다. 난 촬영할 때가 제일 즐겁고 행복하니까 그때 제대로 노는 거고, 촬영하지 않을 때 일해야 되는 거 같더라. 준비하는 일. 좋은 작품을 만나기까지 준비를 게을리 하면 안되겠단 생각이 이제서야 좀 든다. 그 전에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모르겠다. 무조건 쉬어야 되고, 심지어 제발 날 그냥 방치해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긴 작품을 하면서 나를 너무 괴롭혔으니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촬영할 때가 진짜 재미있게 노는 순간이란 걸 알았고, 더 재미있게 놀 순 없겠더라. 그러니까 이젠 그 사이에 열심히 준비하고, 준비가 됐을 때 좋은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다.
이제 당분간은 아이 생각만 해야 할 텐데, 아이는 딸이 좋겠나, 아들이 좋겠나? (웃음)
나는 아무나 괜찮은데 시어머니께서 아들을 바라시니까 삼신 할머니께서 참조해주셨으면 좋겠다. (웃음)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무대에서 이를 입증한 이만이 명성을 얻고 성공이란 단어를 거머쥔다. 80년대 동명작품을 리메이크한 <페임>은 성공을 꿈꾸는 청춘남녀의 스토리를 담보로 춤과 음악적 묘미를 발산하는 뮤지컬 영화다. 무엇보다도 80년대의 <페임>과 2009년의 <페임>은 대중문화의 시대적 변화를 통해 큰 차별점을 둔다.
알란 파커의 80년대 원작에서 들려진 타이틀 넘버 ‘페임(fame)’을 변주한 동명타이틀곡만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페임>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대중문화적 패러다임을 적극 반영한 작품이다. 엠비언트 뮤직이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 힙합 등 현대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비롯해 현대무용까지 포괄한 대중문화의 변이를 대거 활용한 <페임>은 80년대 원작과 전혀 다른 포장지를 활용함으로써 리메이크물로서의 차별화를 이룬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페임>은 뉴욕의 유명 예술고 입학 오디션에 무수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기까지의 진급과정을 서사적 줄기로 밀어간다. 오디션과 매학년 시기, 그리고 졸업까지, 이 모든 과정을 서사적 챕터로 구분한 <페임>은 학생들의 성장과 관계적 진전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그만큼 청춘의 감수성을 밑천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인물 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묘미가 마련된다.
다양한 학생들의 단계적 성장을 지켜보는 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까닭에 집중력 있는 성장담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건 <페임>이 성장드라마로서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분절된 챕터로 구성된 입학과 진급, 졸업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의 진전을 방해하고,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서사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는 건 일면 아쉬운 측면이다. 그럼에도 <페임>은 분명 뮤지컬 영화로서 즐길만한 순간들이 자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빠른 컷으로 시선을 잡아 끄는 초반부 오디션 장면부터 즉흥적인 연주로 다양한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식당 시퀀스, 그 밖에도 무도회를 비롯한 다양한 가무의 향연이 곳곳에 배치되어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든다. 특히 피날레를 장식하는 졸업공연은 분명한 볼거리다.
혈기왕성한 도전과 낭만이 깃든 예술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청춘의 일상을 그려나가며 에너지를 확보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의 덕목은 성취만큼이나 좌절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단지 성장하는 학생의 사연에 집중하기보다도 어린 학생들의 재능을 다스리고 바른 길로 이끄는 교사들의 진실된 표정과 솔직한 조언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프로 댄서가 되길 원하는 제자의 실력이 부족함을 냉정하게 조언함과 동시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주는 교사의 얼굴은 경쟁의 본질이란 단지 누군가를 이겨내는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끝없는 극복임을 일깨운다. 단지 타인보다 위에 서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바로 경쟁의 본질임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엄격한 교육문화와 자발적이고 여유로운 경쟁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타인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경쟁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결국 그 체제에서의 낙오는 좌절보단 새로운 도전을 낳는다. 줄세우기를 통해 성공하는 자와 낙오하는 자 사이에 선명한 금을 그어버리는 사회에서는 결코 꿈꿀 수 없는 낭만이 실로 부럽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그것이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때때로 전체적인 관습처럼 오용되어 개인의 특수한 취향을 제한하고 보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강압으로 작동한다. <날아라 펭귄>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들을 드라마투르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4번째 영화 <날아라 펭귄>은 다양한 감독들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시선 시리즈들과 달리 임순례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한 첫 번째 장편 인권위 영화이기도 하다.
교육열이 대단한 엄마(문소리)덕분에 과도한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들 승윤이(안도규)는 자상한 아빠(박원상)를 통해 종종 출구를 찾는다. 구청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장에선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못 마시는 신입사원 이주훈(최규환)이 들어와 상사들의 공분을 산다. 그런 부하직원들을 아래에 둔 권과장(손병호)은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자식들과 이를 돌보기 위해 함께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기러기 아빠다. 그리고 황혼에 접어든 권과장의 아버지 권선생(박인환)은 뒤늦게 제 삶을 찾겠다는 아내 송여사(정혜선)의 선언에 분개한다.
<날아라 펭귄>은 가정에서 사회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 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가치관의 불협화음을 전시하는 동시에 개인적 범위의 삶을 옥죄면서도 무분별하게 방치된 부조리를 들춘다. 영어교육열풍 속에서 지나친 학습량을 요구당하는 초등학생 아이와 이를 강요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고단함, 자녀의 교육 때문에 아내마저 외국에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의 고독은 이 땅에서 무분별하게 방치되는 개인들의 비극이나 다름없다. 삼겹살과 소주 회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신입사원의 식성을 다수의 취향에 반한다며 비정상적 존재라 치부하거나 반평생을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오길 강요했던 남편이 뒤늦게 제 삶을 즐기겠다는 아내의 변화에 발끈하는 풍경 역시 부조리한 관습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던 이들의 폭력적 관성이다.
<날아라 펭귄>은 에피소드로 분절된 시선 시리즈와 달리 장편으로 제작됐지만 사실상 4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이어 붙이듯 구성됐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유사한 형태를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관된 관점을 유지시키며 에피소드를 나열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진전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행들을 열거하고 문제의식을 축적해나간다. 하지만 <날아라 펭귄>은 날을 세운 주장보단 유연한 드라마로서 문제의식을 아우른다.
가정과 직장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의 풍경은 일차원적인 실생활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이다. 동시에 그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사건들은 평면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문제의식을 관통하되 유연한 드라마로 극적 흥미를 돋운다. 다만 지나치게 현실성을 반영한 플롯을 나열하는 <날아라 펭귄>이 기존의 시선 시리즈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지는 평면적 기획이라 이해된다는 점은 아쉬움을 부르는 측면이다. 하지만 보다 선명한 현실적 문제의식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날아라 펭귄>의 성과는 분명하다.
사실 <날아라 펭귄>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문제들은 사회가 개인들의 불행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엄마가 아들의 영어교육에 고단할 정도로 관심을 쏟아야 하고 자식들과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며 홀로 고독한 생활을 감당하는 아빠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개인들에게 그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영어교육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입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빠의 반목은 개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적 불행이라기 보단 사회적 시스템이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해주지 않고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암묵적인 규율처럼 굳어진 집단적 논리는 개인의 권리와 취향을 손쉽게 무시하고 억압한다. 이런 부조리한 조직적 풍토는 사회 전반적인 조직 문화를 장악하고 개개인의 스트레스를 축적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의무화된 조직적 강압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발언권을 축소시킨다. 소주 한잔 못하거나 2차 회식에 동참하지 않는 이를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몰락시킨다. 개인의 선택권을 전체라는 이름 아래 무시하는 풍토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위 일방적인 명령체계로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업무적인 창의성마저 떨어뜨린다. 결국 이는 잠재적인 충돌과 갈등 자체를 무마시키고 조직의 부조리를 더욱 강권하게 다져나간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스트레스를 심화시키면서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한다.
비극으로부터 개개인을 구출하는 방법이란 개개인들의 성찰과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개별적인 숙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작은 변화들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토의 변화를 통해 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날아라 펭귄>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불행이 무엇에서 야기되는가를 드러내는 영화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의 형태들은 문제의식을 떨어뜨리지 않는 동시에 그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는 끈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날아라 펭귄>은 분명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개개인을 불행한 일상에 방치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날아라 펭귄>은 그 작은 행복을 위해 가능한 변화들을 말하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꼭 인지해야 할 가능한 변화들을 말한다.
(홍보사로부터 선물 받은 포뇨 인형을 보는 최강희 씨에게) 이런 만화 캐릭터들을 좋아하나 봐요.
예. 이거 잠깐 보고 있어도 될까요? 어제 이거 봤거든요. ‘포뇨’.
어제요?
DVD 나왔길래 빌려봤어요.
애니메이션을 원래 좋아하시나 봐요.
이런 캐릭터 중에서 욕심나는 역할이 많아요. <벼랑 위의 포뇨>를 보면서는, 소스케 엄마 기억나세요? 막 차 거칠게 몰고. (웃음) 그런 엄마 캐릭터가 탐났고요. 옛날에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나오는 주인공도 탐났는데 아무래도 제 나이도 그렇고, 아무도 그걸 안 만들어줘서……(웃음)
예전 인터뷰에서 캐릭터가 끌리면 작품도 끌린다는 말을 했더군요.
지금도 그래요.
어떤 캐릭터가 주로 끌리세요?
일단 제가 봤을 때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건데요. 그래서 제가 소수의 인물을 많이 연기한 거 같아요. 결핍이 있다던가, 그런 게 매력적으로 보이니까요. 사실 <애자>도 내용은 보편적이잖아요. 어쩌면 캐릭터에 끌렸다고 볼 수 있어요. 엄마 캐릭터나 제 캐릭터나 다 세잖아요. 그런 점이 많이 끌렸어요. 그러면서도 사람들한테 공감을 줄 수 있고. 그런데 <달콤한 나의 도시>에선 오은수가 끌리지 않았어요. 그건 그냥 제 나이를 연기해보고 싶어서 선택했죠. 제 나이대의 속물이 되어가는 과정을 연기해보고 싶어서.
<애자>에서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지금 자신의 나이와 비슷하게 다다를 정도로 성장해가는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그만큼 학생시절에 어울리는 생기발랄함 같은 것들까지 표현이 되는 배우가 애자를 연기했어야 했겠죠. 아무래도 최강희 씨가 캐스팅된 건 그런 부분에서의 기대감이 반영된 것일 테고요.
그렇겠죠. 그리고 그런 묘사는 가능하지만 사실 전 그렇게 생기발랄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묘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그리고 저는 그렇게 들어오는 선에 맞춰서 결정하고 따라가는 거고요.
사실 캐릭터로서의 최강희 씨는 상당히 생기발랄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관객들도 최강희 씨에 대한 이미지를 그렇게 인식하는 경우가 적잖은 거 같고요. 그런데 정작 최강희 씨는 스스로가 생기발랄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시나 봐요.
못 느껴요. 사실 제가 가진 생기발랄함은 좀 거칠어요. 아직 제가 봐도 그렇고 남이 봐도 그렇고, 표현방법에 있어서 서투른 사람인 거 같아요. 그게 다른 사람에게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고, 그래서 제 주변에서 저를 선택해준 사람도 있지만 아직 좀 거칠거나 서툴어서 오류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자신과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을 거 같은데요.
저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연기생활을 시작해서 사회경험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저는 보통 사람들을 연기해야 하니까 제 일부의 모습을 과장해서 막 하는 거죠. 착한 역을 맡으면 제 착한 모습을 과장시켜서 연기하고, 엉뚱한 캐릭터를 맡으면 엉뚱한 연기를 하고, <달콤, 살벌한 연인>같은 경우에서도 제 숨겨진 모습을 연기했고요. 그런 것 외에 나머지는 다 다르다고 느끼죠. 그래서 경험을 많이 해보려 해요. 책을 읽기도 하고, 한 5~6년 전에는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봤고요.
아르바이트요?
예. <맹가네 전성시대>끝나고.
사람들이 많이 알아봤을 텐데요.
귀찮으면 그냥 아니라고 그러면 돼요. (웃음) “최강희 씨 아니세요?” 그래도 아니라고 그러면 “닮았네요.” 그러고, 그럼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듣는다고 말하고. (웃음) 이런 분도 있었어요. “최강희 씨 보다 예쁘네.” 그럼 감사하다고. (웃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면서 스스로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그전에는 그렇게 많이 느끼지 못했는데 <애자>보면서 느꼈어요. <애자>에는 제 모습을 과장시킬 게 없을 정도로 저와 많이 달랐으니까요. 과연 최강희가 가능할까, 스스로 자문하고 시작한 작품인데 결과를 딱 봤을 때 다르다고 느끼기도 했고요. <애자>를 보고 집에 왔는데 <달콤한 나의 도시> 재방송을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걸 보니까 두 사람이 다른 거에요. 얼굴은 똑같이 생겼잖아요. 머리 짧은 것도 비슷하고. 그런데 너무 달라서 그때는 스스로도 놀랐죠. ‘아, 그래도 내가 헛수고 하지 않았구나’ 생각했어요.
<애자>에서는 캐릭터의 생활력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도 기존의 캐릭터와 다른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선택한 바는 없었나요?
이전까진 변화나 변신에 대한 계획은 없었어요. 제가 보여드릴 수 있는 걸 최대한 다 보여드리는 게 1번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렇게 보여드린 다음에 나에게 나올 게 없어서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면 이 일을 그만 해야지 그랬는데 <애자>로서 용기가 좀 생겼어요. 그러니까 <애자>가 첫 도전인 거에요. 옛날에는 저한테 있는 것 중에 지금 해볼 수 있겠다 싶은 것만 선택했지만 이번엔 다른 걸 선택했잖아요. 덕분에 자신감이 좀 생겼어요. 앞으로도 제게 있는 것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저한테 없는 것도 선택해서 다양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졌죠. 말 그대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이 배우라고 했을 때 지금 제가 배우랑 좀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도전이라는 단어가 확고하게 들립니다. 아무래도 스스로 어울리지 않다고 느끼는 캐릭터를 선택하기까지의 각오가 와 닿은 단어이기도 하고요.
그래요. 도전한 거 맞아요. <달콤한 나의 도시>때도 도전이었지만 <애자>는 제게 완벽히 없는 모습이니까요.
그에 앞서 말씀하신 자신감은 캐릭터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느낀 건가요, 아니면 영화를 끝내고 난 뒤에 얻어낸 감정인가요?
선택하는 데선 자신감이 있을 수 없죠. 용기가 필요하죠. 진짜 고민 많이 했어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것도 많고, 멋진 역할이고, 제가 이렇게 표현하는 거 우리 엄마한테도 보여드리고 싶고, 이런 제 연기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거 같아서 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그 수간 안 하면 후회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질러놓고 본 거에요. 그 다음에 생각하자. 그래서 그 다음부턴 그냥 노력만 열심히 했어요. 사투리도 배우고, 주변에 애자 같은 사람들 있으면 그 캐릭터의 거친 행동이나 표정을 눈에 담아놓고. 그러면서도 반신반의했죠. 이걸 흉내 낸다고 되겠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일상을 전부 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분을 떠서 드러내는 거니까 세분화해서 표현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재미도 느꼈고요.
사실 <애자>는 모녀 관계를 다룬 신파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죠. 하지만 일반적인 신파에 비해 웃음이 많이 동원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 웃음은 대부분 엄마와의 일상적인 대면 가운데 발생하고요. 어쩌면 실생활에서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많이 돌이켜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있었죠. 저도 엄마랑 툭탁툭탁 하니까요. 딸은 기본적으로 다 그래요. 아들은 덜 그러죠. 대신 아들보다 딸이 더 깊어요. 사사로운 정들, 미운 정, 고운 정,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쓸데 없이 말해서 싸우는 거. 불필요한 말 같은 거. 나가면서 괜히 궁시렁궁시렁. 애자도 그러잖아요. “절간에 돈 쳐다 바른다고 뭐 죽은 사람이 살아나길 해, 뭘 해?”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엄마 속을 건드려놓고 엄마가, “네 지금 뭐라 그랬노?” 화내면, “아무 말 안 했다.” 그러고. 그런 과정들이 남이 보기엔 웃기지만 누구나 일상적인 일이죠. 서로 사랑하기도 모자란 판에 굳이 서로를 자극한단 말이에요. 그게 우리나라식 모녀 관계의 특징 같아요. 자극해놓고 미안해하기. 알고 보면 서로 제일 많이 미안해하잖아요. 저도 많이 그러거든요. 엄마가 맨날 차 뒷좌석에 타요. 애자 엄마처럼. 아무렇지 않게 ‘음.’하시면서 뒤에 딱 앉아있어요. 사모님처럼. 그럼 전 기사고. (웃음) 친구처럼 타면 되잖아요. 그래서 “엄마는 옆에 타면 되지, 왜 맨날 뒤에 타?” 툭 던지죠. 사실 이것도 그냥 가면 되는 건데 꼭 그렇게 돼요. 부모님들은 항상 말해주지 않는 게 많으니까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긴 해요. 어쨌든 엄마는 아직도 항상 뒤에 타요. (웃음)
<애자>에서처럼 앞자리가 무서우셔서 그런 건 아니겠죠?
그렇진 않으세요. (웃음) 그리고 가만히 앉아계시면 괜찮은데 막 다 뒤지고, 쓰레기 정리하고, 이러면 진짜 또 막 신경 쓰이는 거에요. 난 그냥 이렇게 편한 게 좋다고, 내가 치울 거라고 해도 엄마는 다 치우고, 그렇게 치우고 나면 내가 뭔가 찾으려 보면 또 없어지고. 그렇게 투덜투덜하는 게 영화에서 좀 과장되게 나타나는 거죠. 사실 전 애자보다 착해요. (웃음) 그리고 저도 공감이 가는 그런 모습이 일반 사람들에겐 더 공감이 가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리고 약간 겸연쩍잖아요. 영화에서 엄마랑 딸 얘기 나올 때 너무 착한 딸 나오면 좀 그렇잖아요. 그런데 <애자>는 보러 와도 일단 자신감이 생긴단 말이에요. 내가 쟤보단 나으니까. (웃음) 그러니까 좋을 거 같아요. 피부로 드러나는 감정들이 좋은 거 같고요. 진지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희 누나에게 엄마랑 같이 보라고 했더니 못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왜요? 쑥스럽다고?
찔릴 거 같대요.
아~~! (웃음) 엄마랑 딸이랑 보면 좀 그럴 거 같긴 하죠. 그런데 저희 엄마나 저희 엄마 또래 정도 되시는 배우 분들도 <애자>를 많이 보셨는데 다들 자기 엄마 생각난대요. 그래서 괜찮은 거 같아요. 그 연세에도 자기 엄마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성장기 시절의 엄마, 자기가 못해줬던 엄마, 이런 모습들.
밖에서는 다들 어른이지만 막상 집에 들어가서 엄마 앞에 가면 다들 애가 되는 것 같아요. 엄마도 때때로 자식 앞에선 애처럼 투정 부리시는 거 같고요.
우리가 지금은 이렇게 점잖게 있지만 집에 들어가면 정말 누가 볼까 봐 창피하잖아요. (웃음) 별거 아닌 걸로 막 싸우고. 그런 가족간의 비밀은 누구나 있는 거 같아요. 그만큼 가까운 관계니까.
이전까진 어머니께 방송에 나오는 것조차도 귀띔해드리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애자>는 처음으로 어머니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라고 말씀하셨더군요.
대본 선택할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애자>를 통해 딸로서의 진심을 담아서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맞아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예. 예전에 돌아가셨죠.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애자와 최강희 씨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고 느꼈어요. 애자 역시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으니까요.
아, 그러네요?
그런 부분에서 캐릭터와 모종의 공감대를 이룬 적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
초반에 애자가 엄마를 진짜 싫어하잖아요. 엄마도 애자가 보기도 싫다고 하고요. 그런데 엄마와 누워서 화해할 때가 많이 생각났죠. 제가 엄마를 생각하면서 찍기도 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저희 아빠가 많이 겹치는 유사 경험이 있거든요. 제가 청소년드라마 <나>를 찍던 스물한 살에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두 달 정도 아프셔서 아빠 곁을 지켜야 할 때가 있었죠. 영화에서 엄마랑 애자가 병원에서 탈출해서 회 먹으러 나가잖아요. 그런 것처럼 저도 병원에서 몰래 아빠를 빼내서 바람 쐬고 그런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안 됐는데. 사실 아빠랑 되게 어색한 사이였어요. 그런데 아빠가 돌아가실 때가 가까워져서 그러셨는지 몰라도 저한테 병원 침대에 올라와서 같이 자면 안되겠냐고 하시는 거에요. 전 너무 싫었죠. 지금 거기에서 병수발 드는 것도 싫었는데. 좋아하는 관계도 아니고, 아빠를 잘 알지도 못해서 어색한 상황에서 그러고 있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아빠랑 같이 자면서 처음으로 대화도 해보고 아빠가 미안해하는 만큼 저도 미안해하다 휠체어를 타고 같이 나왔어요. 그렇게 화해한 거죠. 그러면서 하루 동안 좋은 추억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기억이 없었다면 아빠에 대한 기억도 달라졌겠죠.
부모자식은 아무리 미워도 끊을 수 없는 사이 같아요. 영화에서 엄마가 애자한테 사고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만약 엄마가 심각하게 잘못해서 집안이 아주 큰일을 당했고 그걸로 인해서 엄마와 관계를 의절하겠다 결심하더라도 그런 결심은 한번에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지울 수 없는 관계인 거 같아요. 사실 제가 우리엄마를 생각하고 대입시키면서 연기에 몰입하려고 하진 않았어요. 아빠를 특별히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대기하면서 눈물이 많이 났던 거 같아요. 우는 신이 아니었는데도 그냥.
지금은 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지만 언젠가 엄마가 된다면 엄마로서의 입장도 더욱 잘 알게 되겠죠. 나이가 더 든다면 엄마를 연기할 날도 올 거고요. 막연한 질문이지만 한번이라도 엄마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자신에 대해서라도 생각해 본적 없나요?
없어요. 못할 거 같아요. 새댁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웃음) 그건 제가 할 수 있을 때 할 거 같아요. 애자도 할 수 있을 때 한 거니까요. 상상도 안 되고.
도저히 가늠할 수 없나 보죠.
예. (웃음)
대부분 최강희 씨를 말할 때 4차원이라는 수사를 동원합니다. 본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말을 듣게 됐을 때 기분은 어떤가요?
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짓을 했으니 그런 말을 듣나 싶어요. 오해할 수 있겠다 생각하죠. 그리고 나쁘게 부르는 건 아닌 거 같고, 귀엽게 봐주시는 거 같아서 다행이고요. 지금은 제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쉽게 우울해지는 성격이라고 들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생각도 많아진다고 들었고요.
저는 혼자 있을 때 생각을 많이 하고 그만큼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우울한 감성을 좋아해서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요. 등 따시고 배부르면 아무 생각도 안 나잖아요. 그럼 약간 섭섭할 때도 있죠. 그래서 그런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앞으로 다시 또 못 올지도 모르는 순간이잖아요. 물론 힘들었던 때로 돌아가긴 싫죠. 하지만 그 순간은 그때뿐이고 그때에만 얻을 수 있는 감성들이 있으니까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빨리 누릴 수 있는 감성들은 미리 누려놓자고. 지금처럼 깨끗한 집이 아니라 옛날에 단칸방 같은 곳에 모여 살면서 다같이 잠자고 그럴 땐 좀 싫었죠. 그래도 그 때 맡았던 냄새나 온기는 잊을 수 없단 말이에요. 지나고 나면 다 소중한 거 같아요.
어려운 과거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니까요.
대신 돌아가긴 싫죠. 그러니 그것도 누려야 할 때 누려야 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이 많은 만큼 혼자만의 공간에 대한 애착도 클 것 같습니다.
저 작업실 생겼어요. 친구 작업실에서 한 평만 빌려서 제가 꾸며놨거든요. 그 한 평에 텐트를 쳐 놓은 적도 있었고요. 지금은 TV를 갖다 놓고 DVD를 가득 쌓아놨어요. 제 공간이 생긴 거죠.
무엇을 위한 공간일까요?
(한참 생각하다가) 그러게. (웃음) 그냥 상징적으로 좋던데요. 제 공간이 있다는 게.
그냥 그 누구에게도 구애 받을 필요 없는 한 평짜리 자유군요. (웃음)
전 독립해서 살 생각이 추호도 없는 사람이에요. 엄마가 나가라 그래도 싫은 사람이거든요. (웃음) 그냥 엄마랑 계속 사는 게 좋고, 계속 살고 싶고, 그러면서도 개인공간은 갖고 싶잖아요. 그래서 그냥 내 공간이 있다는 게 좋아요. 그냥 갈 데가 있다는 거? 월세인데요, 한 평에 15만원. (웃음)
주변에 친한 분들이 몇 분 있잖아요. 몇 달 전에 압구정CGV에서 김숙 씨와 송은이 씨와 함께 있는 걸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제가 누구와 같이 있는 걸 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분들과 목격될 가능성이 커요.
누구나 자신에게 편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당연하지만 최강희 씨는 편애하는 지인들도 정해져 있을 것 같습니다.
그냥 정하는 건 아닌데 편한 사람만 만나다 보니까 반복적이에요.
최강희 씨에게 편한 분들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저희 언니들하고 만나면 진지한 대화를 아예 안 해요. 속 얘기를 잘 안 하죠. 그냥 만나서 노는 거에요. 그게 너무 좋아요. 속마음 물어보고 안 그래요. 제 힘든 얘기하면 개 무시당하고 막 놀려대거든요.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그런 집단이 아니에요. 그래서 좋아요.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면 답답해지진 않나요?
사실 잘 털어놓기도 했고, 예전에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어요. 언니들은 놀려서 안 하고. (웃음) 그런데 점점 못하겠어요. 자꾸 털어놓다 보면 말이 다른 데서 자꾸 이상하게 변하니까요. 추측이 많은 사람들은 제가 말을 안 했겠거니 생각하시는지 제가 하지도 않은 행동조차 앞서서 고민해주는 경우도 있고, 그런 게 조금 걸려서요. 그래서 요즘은 잘 얘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미니홈피를 많이 좋아해요. 알듯 모를 듯 음악으로 대신 얘기할 때도 있고 그래요.
고민을 직접적으로 공유하기 보단 간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덜어내는 게 편한가 봅니다. 우울한 감수성이 짙은 음악도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직접적인 대화보단 그런 매체에 감정을 담아서 흘려 보내는 것에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맞아요. 해소가 돼요. 나름대로 공유도 되는 것 같고. 그리고 종교.
종교요?
기독교를 믿는데요. 요즘 자꾸 통일교라는 사람이 많아서, 4차원이라고 생각하셔서 그런지 최강희 통일교가 검색어에 뜨는 거에요. (웃음) 그런데 기독교고요. 매주 교회에 가요. 저는 원래 눈물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친구들하고 그런 진지한 얘기도 잘 안 하고요. 그런데 교회 가서 한번씩 비워내는 거 같아요. 욕심도 비우고, 화내보기도 하고. 만약 그런 신앙이라도 없었으면 꽤 갑갑했을 거 같아요.
교회는 언제부터 다녔나요?
원래 어렸을 때부터 다녔어요. 그런데 지금은 같이 다니는 사람이 많아져서 더 열심히 다녀요.
원래부터 독실했던 건가요,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종교를 통해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느낀 건가요.
예나 지금이나 저는 항상 제가 어느 곳에서 무얼 하든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어떤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 공익광고를 봤는데 리와인드로 진행되는 광고였어요. 자전거가 점점 뒤로 가다가 갑자기 여자가 교복을 입고, 어느 순간 더 어려져서 초등학생, 유치원생이 되더니 어느 순간 뒤를 딱 보면 엄마가 손을 잡고 있는 거에요. 항상 뒤에 있었다는 거죠. 전 제 엄마랑 보이지 않는 신이 제게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이 우울하지 않았던 거 같고. 제가 어떻게 살아도 나쁘지 않게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살 수 있는 건 엄마가 저를 위해 기도해준 탓이라고 생각해요.
나름대로 긴 경력을 유지하며 배우로 살아오고 있어요. 배우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가요?
좋아요. 제 성격에 해소도 많이 되고요. 그러니까 해소라 하는 건, 사실 제가 그 사람을 웃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더라도 연기로 이 사람을 웃기면 이 사람이 웃기로 되어있고, 울고 싶은 적은 없어도 울어야 하는 연기가 있다면 속을 끄집어내서 한번 울 수도 있고요. 그런 부분에서 제가 해소되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당장 잘할 수 있는 게 연기이기도 하고요. 어떻게 굴러오다 보니까 아직 여기 있는데 사실 <애자>하면서 연기를 때려 칠까 했던 적도 있었어요.
왜요?
잘 안 되는 거 같아서요. 그래서 고민했죠. 내소사 신에서, 엄마랑 싸우는 장면 찍을 때 아침에 찍고, 해질 때 즈음에 다시 찍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 동안 쉬어야 되는데 쉬면서 꼼짝달싹할 수 없는 거에요.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앞에 부분에서 잘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싶은 거에요. ‘내가 이걸 잘 표현하고 있는 건가’ 싶고, ‘이건 너무 어려운 직업이구나’ 생각이 들어서 ‘끝나고 다른 걸 알아볼까, 내가 뭘 잘하나’ 생각해봤는데 잘 하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거에요. 보니까 그나마 제가 할 줄 아는 것 중에서 연기를 제일 잘 해요. 그래서 죽기 살기로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열심히 찍었죠.
예전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나요?
한번도 없었죠. 아니, <달콤한 나의 도시>때 한번. <달콤한 나의 도시>때부터 전 사춘기였던 거 같아요. 제 나이 때 역을 맡으니까 오히려 되게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거에요. 제가 어디 속해있는지도 모르겠고. 연예인인지, 배우인지, 어른인지, 중간인지, 다 헷갈렸어요. 연기도 기술인지, 순수함인지, 다 섞여버려서 혼란스러웠죠. 그래서 그때 한번 욱해서 고민했던 적이 있는데 아마 당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을 거에요. 당장 때려 칠까 했는데 돈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부터 하는 건 제 선택이에요. 이게 참 좋은 직업이구나 깨달았으니까요. 좀 더 얘기하자면 주변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다들 고민이 많더라고요. 다른 걸 하고 싶어도 현실상 모아둔 돈이 없으니까 다른 걸 할 수 없고,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다 해도 회사원이니까 섣불리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참 좋은 직업을 갖고 있구나 싶어졌어요. 할 줄 아는 걸 좋아서 하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죠.
98년도에 <여고괴담>으로 스크린에 데뷔하셨죠. 그 전에 95년도부터 청소년드라마로 연기를 시작했고요. 그 당시에 자신의 모습은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더 좋아요. 더 맘에 들어요! (웃음) 연기는 좀 못했는데요. 잘했던 건 지금보다 더 잘했어요. 아무 것도 없는 순수한 진정성 같은 거, 그런 건 다시 하래도 못할 걸요. 그건 그때만 가능한 거 같아서 지금도 저는 그것들이 너무나 소중해요. 지금도 분명 지금뿐일 거에요. 나중에 연기를 더 잘한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달고 살 순 없을 거에요.
예전 생각은 자주 하시나요?
저는 작년에도 데뷔작을 다시 봤어요. 저는 작품을 모으는 타입이 아니라서 하나도 가진 게 없어요. 그래서 제가 자료를 가진 게 없어서 팬들한테 동냥해서 봤지만 볼 때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빛난 시절이란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저한테 되게 소중한 것이라 의심치 않고요.
큰 욕심은 없어도 작은 집착이 커 보입니다.
집착이 너무 크죠. (웃음)
언젠가 <애자>를 다시 보게 될 날도 오겠죠.
그럴 거 같아요. 사실 전 엄마보다는 제가 빨리 죽었으면, 아니, 같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저보다 먼저 가실 거 아니에요? 그런 생각하면 겁나요. 그게 너무 무서워요. 가끔씩 전 그래요.
아무래도 엄마가 최강희 씨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되는 만큼 애착도 대단하겠죠.
집착해요. (웃음) 지금 <애자>얘기 하시니까 느끼는 건데 나중에 <애자>를 다시 보게 되면 되게 슬플 거 같아요. 지금부터 잘 해야겠어요.
<애자>를 지난 최강희 씨에게 남은 변화는 무엇인가요?
용기가 좀 생긴 거? 자신감이 좀 생긴 거? 그리고 엄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좀 많아진 거. 그리고 관객 분들도 이런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애자>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는 거 같거든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 기회가 있을 때 해야 된다는 거?
2005년에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쉐인 액커는 이를 통해 팀 버튼과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었고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서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자체가 생략됐으며 캐릭터의 대사조차 동원되지 않는 탓에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계관이지만 폐허와 같은 이미지 위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의 탁월한 액션신이 담긴 11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에 대사를 입히고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암시를 동원한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됐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창조된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한다. <9: 나인>(이하, <9>)은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와 같은, 기계문명에 의해 공격받는 인류의 비관적 묵시록을 스팀펑크(steampunk) 이미지에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 남은 건 인간을 말살한 기계들과 피부대신 천을 두르고 살아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인형들이다. 멸종된 인간이 남긴 문명의 잔해 위에서 인간을 말살한 인공지능 기계로봇에 맞서 생존적 저항을 펼치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활약을 묘사한다.
등에 적힌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는 9개의 인형 캐릭터는 제각각의 뚜렷한 개성을 통해 상대로부터 차별화된다. 인간만큼이나 부조리한 반면, 현명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저마다 이성과 감정의 양면성을 갖추며 사고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인간의 세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처참한 풍경이지만 이는 딱히 불행을 인식시키지 않는다. 이는 그 폐허 위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인간들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이 사라진 영토를 차지한 존재들은 인간의 비극을 감지할 수 없는 로봇과 인형에 불과하다. <9>은 마치 인류가 사라진 묵시록의 대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창세기처럼 보인다. 폭력적 진화 속에서 멸망을 자초한 인류는 자신들이 건축한 세계로부터 퇴장 당하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멸망 당한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적 존재들이다.
<9>은 비범한 서사보다도 가벼운 묘사를 통해 매력을 어필하는 작품이다. 세계관의 기원과 캐릭터의 근원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고 암시조차 소극적이다. 하지만 문명에 대한 비관적 뉘앙스로 그려진 세계관은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치장하는 거대한 소품에 가깝다. 인류는 그저 사라져버린 종에 불과하며 이는 <9>에서 딱히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폐허가 된 문명 위에서 인류가 남긴 폭력적 문명에 대항하며 생존을 위한 대결을 펼쳐나가는 새로운 종의 투쟁 그 자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포착된다.
물론 <9>에선 인류의 문명에 대한 비관과 조롱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9>에서 그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기란 어렵다. 이는 <9>이 그 세계관을 병풍처럼 두르고 방치하는 덕분이다. 암울한 세계관을 인테리어처럼 두른 채 창조적인 캐릭터들이 이루는 동선을 따라 구사되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고차원적인 해석의 의욕을 차단하는 동시에 일차원적인 시각적 묘미를 부여한다. 인류의 흔적을 지워버린 묵시록적 세계관을 스팀펑크의 이미지로 디자인하고 테크놀로지 기계 문명과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의 대결 구조를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확보해나간다. 비관적인 세계관은 낡은 천을 두른 인형 캐릭터들의 창작적 개성을 통해 암울함을 잊은 채 서스펜스를 구사하기 위한 응용적 배치로서 소모될 뿐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구현하는 <9>에서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건 <9>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끽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여건에 가깝다. 창의적인 이미지가 구현하는 시각적 묘미를 부담 없이 즐기면 그만이다. 거창한 이미지를 통해 비범한 의미를 치장하지 않고 빠르고 신속하게 제 위치를 선점해나간다. 그런 면에서 <9>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의 오락적 너비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라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
편모 아래 자란 딸은 어려서부터 제 어미 속을 썩이는데 이골이 났다. 남다른 글솜씨로 작가를 지망하는 애자(최강희)는 공부도 잘하지만 땡땡이도 잘 치는, 고무공처럼 튀는 아이다. 비만 오면 학교는 나 몰라라 부산 앞바다로 뛰쳐나간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경고에 엄마(김영애) 속만 까맣게 탄다. 애자 역시 저보다 제 오빠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공부도 못하는 제 오빠는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유학 가고 싶다고 보채는 자신에겐 되레 역성인 엄마가 미덥기만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년이 돼서도 애자는 여전히 엄마 속을 태운다.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좀처럼 시집갈 생각은 없고 작가가 되겠다며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딸래미를 보는 엄마는 속이 탄다.
예나 지금이나 애자는 엄마에게 ‘눈엣가시 같은 년’이다. 하지만 눈엣가시 같아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순 없다. 평행선과 같은 거리감을 두고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모녀는 특별한 계기와 함께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여나간다. 서울에 홀로 사는 애자가 잠결에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다 엄마의 앓는 소리를 듣게 된 후, 득달 같이 엄마가 사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될 때, 애자의 마음에 침잠(沈潛)해있던 진심이 동요를 일으킨다.
<애자>는 좀처럼 서로의 본심에 접근하지 못하던 모자의 오랜 갈등 속에 잠재돼있던 애틋한 속내를 드러내고 이로써 심금을 울리는 가족 신파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던지며 뒤돌아 서다가도 다시 서로를 향해 뒤돌아보게 되는 가족의 진심을 비춘다. 모정을 연출하고 죽음으로 방점을 찍는 <애자>는 분명 강력한 파토스를 전달하고 마는 영화다. 비극적 피날레를 예감하게 만드는 중반부부터 페이소스를 축적해나가다 그 끝에 다다라 어김없이 강력한 신파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애자>는 분명 모정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눈물로서 방점을 찍는 영화다. 켜켜이 쌓아나간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 뒤 눈물의 방류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애자>는 주체할 수 없는 페이소스를 넘쳐내며 관객을 비극적 심상으로 밀어 넣는 최루성 신파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애자의 학창시절을 발랄하게 묘사하는 도입부처럼 <애자>는 심심찮게 캐릭터의 개성을 적극 활용한 가족적 코미디를 연출하며 신파를 가늠하기 어려운 생기를 감지하게 만든다. <애자>는 가족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이어 붙인 영화처럼 전후반부의 양상이 다른 작품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온도차는 신파적 형태로 귀결되는 <애자>의 전반적인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전후반부의 감정적 대비 속에서 결과적인 감정을 더욱 짙게 물들이는 보색적 효과를 낳는다. 물론 때때로 상황에서 지나치게 엇나가는 코미디가 안일하게 동원되어 감정의 수순을 방해하는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애자>가 연출하는 웃음과 눈물의 수위는 안정적인 편이다. 무엇보다도 색채가 다른 두 정서의 융화를 통해 결정을 이루는 클라이맥스가 감정적 자극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 이해를 더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애자>에서 중요한 건 비극의 주체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 연민을 깨닫는 이의 변화다. 고통을 맞이하는 자에 대한 동정만큼이나 이를 지켜보는 자가 뒤돌아 흘리는 눈물의 심정이 마음을 울린다. 엄마와 원수처럼 지내던 딸이 엄마의 죽음을 직감하고 그 삶을 좀 더 연장하려 할 때, 모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묵혀둔 진심을 일거에 방출한다. 무엇보다도 결말부에서 죽음을 묘사하는 형태는 <애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면모다.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감정적 고양을 이루는 <애자>는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을 통해 비범한 면모를 드러낸다.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과감한 선택을 이행한다. 누군가의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자는 그 삶이 계속되는 동안 끝을 체감할 수 밖에 없다. <애자>는 죽음에서 모든 감정을 방출하기 보다 그 순간을 이겨내고 그 너머의 삶을 비춘다. 엄마의 빈 자리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제 삶을 채워나가는 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부모가 될 모두에게,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가 될 여자들에게, 엄마란 이름은 쉽게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지고, 뒤돌아 후회하는 건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 사이를 채우는 관성적인 버릇과 같다. 특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적 모정을 공유하고 있을 이 땅의 대부분은 <애자>와 같이 모성애를 담은 영화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다. 엄마는 신파다. <애자>는 그런 현실적 감정을 스크린에 옮겨 담는다.
무엇보다도 두 배우의 어울림은 <애자>를 빛내는 가장 큰 수훈이다. 추와 같은 무게를 얹는 김영애와 풍선처럼 분위기를 띄우곤 하는 최강희는 <애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갈등과 화해로 나아가는 모녀의 감정적 소통은 두 배우의 앙상블을 통해 진심을 확보한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감정의 진전 역시 예상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애자>에서 중요한 건 그 뻔한 이야기에 얼마나 진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캐릭터의 관계변화를 통해 현실성을 얻고 진정성마저 확보하는 <애자>에서 두 배우는 확실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다.
가족은 운명이자 속박이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깨이면서도 벽처럼 서로에게 다가서기 어렵다. 그래서 가족은 때때로 지옥이 되고, 폭력이 되고, 상처가 된다. 애정은 편견으로 이해되고 연민은 간섭처럼 지겹다. 예기치 않게 쌍방향에 놓인 구성원 모두를 파괴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운명공동체라는 이름 하에 뿌리내린 유대감은 때때로 덜어내기 힘든 부채처럼 버거운 의무감을 준다. 그래서 가족이란 슬프고 아픈 것이다. 버겁다고 덜어낼 수 있는 짐이 아니라서, 귀찮다고 내칠 수 있는 타인이 아니라서, 미워도 다시 한번, 끝없는 애증을 삭이며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로즈(에이미 아담스)는 고교 시절 치어걸 리더로서 화려한 전력을 지녔지만 아들 오스카(제이슨 스페벡)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청소대행업체에서 받는 푼돈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여동생 노라(에밀리 블런트)는 매번 직장에서 잘리는 탓에 백수 생활을 이어나가는 천덕꾸러기다. 그녀들의 아버지 조(알란 아킨) 역시 항상 변변찮은 사업을 기획하고 번번히 말아먹는 탓에 두 딸의 걱정을 산다. 그 가운데 오스카의 사립학교 입학비가 필요해진 로즈는 보다 큰 수익을 기대할만한 일을 찾던 중, 범죄현장 청소라는 고액의 업종을 추천 받고 동생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게 된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공통 분모처럼, <미스 리틀 선샤인>과 <선샤인 클리닝>은 유사한 주제를 끌어안은 작품이다. 콩가루처럼 흩어져 부유하던 가족이 끈끈한 반죽처럼 덩어리를 이루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내는 작품이다. –두 영화는 심지어 제작진도 같다.- 가족을 비극적인 진창으로 몰아넣는 건 가난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하루벌이로 먹고 살 듯 박복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세 가족은 일상은 그 자체로 팍팍한 심경을 전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가족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공유한다. 좀처럼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회상 신을 통해 파편화된 기억을 문득 내보이곤 하는 영화는 결말부에 다다라 아물지 못한 상흔을 선명히 비춘다. 좀처럼 보이기 어려웠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기까지의 갈등과 충돌을 그리는 영화적 여정은 성장통처럼 구성원의 성숙을 도모한다.
‘범죄현장 청소’라는 특별한 소재를 통해 보편적인 가족애로 그려나가는 <선샤인 클리닝>은 창의적이고도 탄탄한 선댄스표 영화에 걸맞은 모양새를 자랑한다. 끔찍한 죽음이 남긴 악취와 핏자국은 노라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마음에 봉인한 상처와 대면하게 만들고, 로즈에겐 새로운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아버지 역시 한동안 소통할 수 없었던 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찾게 된다. 세 가족의 성장을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샤인 클리닝>은 사실 소재로부터 발생할만한 특별한 흥미에 비해 적막한 가족드라마다. 충돌과 갈등을 건너 끝내 화해를 이루는 캐릭터 간의 어울림이 대단한 절정을 선사하지도 않거니와 세 가족을 비추는 영화적 시선이 시종일관 담담한 감정을 유지하는 탓이기도 하다. 인물마다의 비중적 편차가 크고 인물간의 정서적 교류가 선명하게 구축되지 못한 탓에 구성원간의 화합을 묘사하는 결말부의 감흥도 낮아지는 인상이다.
<선샤인 클리닝>에서 돋보이는 지점은 소재의 착상이다.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이들로부터 남겨진 끔찍한 흔적을 지우는 범죄현장 청소는 기발한 소재로서의 흥미를 넘어 드라마로서 훌륭한 매개를 이룬다는 점에서 보다 특별하다. 루저로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인물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물들의 희망을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비극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떤 이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동시에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참신한 이야기를 위한 자격을 지닌다.
현실적 난관들이 빚어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당장의 희망을 체념하면서도 새롭게 현실적 활로를 모색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감정을 자아낸다. 거울을 바라보며 희망적인 주문을 외우는 로즈의 얼굴은 낙천적이라기보단 절박하며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 매달려 함성을 지르는 노라의 표정엔 기쁨보다 슬픔이 서린다. 에이미 아담스와 에밀리 블런트의 얼굴은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도 긍정의 끈을 놓지 않는 인물들의 절박한 심리를 드러내는 창과 같다. 대책 없는 낙관으로 끝없는 무능력을 드러내지만 결국 딸을 위해 헌신적 대안을 제시하는 아버지 조를 연기하는 알란 아킨의 심드렁한 표정은 속내에 감춰진 진심의 깊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묵묵하면서도 끈기 있게 인물들의 표정을 응시하며 감춰진 속내까지 포착하는 <선샤인 클리닝>은 현실적 한계를 체감하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휴먼드라마다. 척박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가족사업은 결국 현실에서 거대한 빚을 남기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게 만든다. 누군가가 남긴 생의 흔적을 지워나가며 현실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는 가족은 자신들의 묵은 상처를 지우고 이는 과거를 극복하는 현실적 대안이 된다. <선샤인 클리닝>은 행복을 쟁취하기보단 그 기준점을 제시하는 영화다. 커다란 변화가 아닌 보편적인 삶의 테두리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삶이란 이렇게 작은 변화를 통해서 큰 울림을 얻곤 한다. <선샤인 클리닝>은 그렇게 작은 변화 속에서도 깊게 자라나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다. 명료하고 깔끔한 여운이 돋보이는.
미운 정이 무섭다. 대립적 관계에 놓여있던 남녀가 필연적인 계기를 통해 운명적 공동체를 계약하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갈등하다 이내 정들어 로맨스를 낳는다.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이토록 닳고 닳은 관계적 갈등을 기본적 골조로 삼아 로맨스를 축조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닳아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재생산되는 건 낡고 낡아서 앙상할 것만 같은 로맨스의 골조를 풍성하게 치장하는 코미디 덕분이다. 로맨스의 진심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적절한 기능성을 갖춘 코미디는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를 풍요롭게 만드는 자질이다.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의 형식으로 대변되는 <프로포즈>도 마찬가지다.
마가렛(산드라 블록)은 사내에서 마녀라 불릴 만큼 악명이 자자하지만 업무적인 능력을 인정받는 뉴욕의 출판사 중역이다. 그녀의 손에 출판사의 주요 업무가 결정되거나 누락된다. 게다가 웬만한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 그녀 덕분에 보좌관 앤드류(라이언 레이놀즈)는 출근길부터 분주하다. 마녀는 스타벅스를 마신다. 마가렛이 출근하기 전까지 저지방 두유 라떼를 책상에 올려놔야 한다. 커피를 엎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자신의 커피도 같은 것으로 통일한다. 마가렛의 완벽주의에 앤드류의 회사생활은 엣지있게 돌아간다. 그런 어느 날, 마가렛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캐나다 출신인 마가렛의 비자 발급이 중지됐으며 이에 따라 출국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사장으로부터 통보된 것. 그러나 불통은 앤드류에게 튄다. 강제출국을 막기 위해 앤드류와의 혼인 사실을 밝힌 마가렛 덕분에 앤드류는 위장 약혼의 공모자가 된다.
<프로포즈>는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진전되는 사연엔 두서가 없다. 지나친 우연성에 기대어 직조된 스토리는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방식이라기 전에 내러티브의 열악함에 가깝게 이해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포즈>는 즐길만한 매력이 다분한 로맨틱코미디다. <프로포즈>를 휘청거리게 만들 구조적 결점을 단단하게 다지는 건 온전히 캐릭터의 매력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심캐릭터부터 주변부에 산재된 다양한 캐릭터들이 발생시키는 매력이 작위적인 우연을 연출하고 전형적인 공식에 기대는 스토리에 활력을 발생시킨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우연에 기대어 굴러가는 사연에 필연성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생애 처음으로 누드를 선보였다는 사실까지 일례로 들 필요도 없이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다 할만한 공헌도를 드러낸다. 과감한 슬랩스틱과 디테일한 제스처, 풍부한 표정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변화를 설득시키는 산드라 블록은 매력적인 웃음을 밑천으로 로맨스의 자질을 구축한다. 상대역을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 역시 적절한 리액션으로 산드라 블록을 보좌하며 빼어난 앙상블을 이룬다. 두 남녀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신경전은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뤄진 <프로포즈>에서 단단한 이음새 역할을 하는 동시에 탁월한 웃음을 발생시키는 코미디의 속성에 어울린다. 암묵적 합의 속에서 혼인 빙자 사기 연극을 펼치는 두 남녀의 주변부에 자리한 다양한 조연들은 저마다 제 역할에 걸맞은 코미디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웃음을 숙성시킨다.
마치 대각선에서 마주보듯 근접할 수 없을 것마냥 서로를 배척하던 캐릭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사연을 공유하며 반목을 거듭하던 가운데 좀처럼 알 수 없었던 상대의 속내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장르적 관습 안에서 묘사되는 캐릭터의 심정적 변화가 관계를 재구성하고 영화의 온도를 변모시킨다. 지속적인 활약을 펼쳐는 발군의 코미디 안에서 관성적으로 무르익어가는 로맨스는 적당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프로포즈>가 최소한 제 역할을 하는 로맨틱코미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뛰어난 장악력보단 능숙한 순발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르적 공식에 기대어 안이하게 진전되는 스토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열연은 <프로포즈>를 위한 특별한 수식어나 다름없다. 마흔을 넘어선 산드라 블록의 앙증맞은 슬랩스틱과 이를 보좌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든든한 지원은 어느 누구라도 분명 매력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절청풍운>은 <무간도>이후로 다시 홍콩 느와르라고 불리던 홍콩영화의 컨벤션을 복기하는 영화같다. 맥조휘(이하, '맥'): <무간도>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 홍콩 영화가 중국 시장에 진출하게 됐고, 중국과 합작으로 제작하게 되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만큼 중국 시장에 맞춰야 되겠지만 우린 홍콩 사람인 이상 홍콩 스타일을 추구할 수 밖에 없고, 홍콩인이기 때문에 홍콩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홍콩 스타일이 되살아날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절청풍운>은 금융비리를 주도하는 기업인과 공권력 사이의 충돌을 다룬다. 그 가운데서 물질주의적 욕망에 휩쓸린 개인적 갈등이 중요한 줄기를 이룬다. 금융 비리를 수사하던 형사들이 물질주의적 욕망에 현혹되어 범죄를 공모한다. 단지 영화적 분위기를 이루기 위한 소재적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현재 세태에 대해서 느끼는 지점을 반영한 스토리가 아닐까 궁금하다. 장문강(이하, '장'): 관계적 설정에 관한 부분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가져온 것들이 있다. 서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홍콩은 2007년에 주가가 폭등했다. 그래서 그 당시 홍콩에서는 주식을 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물질주의가 팽배했었다. 그리고 이런 물질주의와 공권력에 대한 문제는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이 매일 부딪히게 되거나 이미 부딪힌 문제다.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 아무래도 일단 우리가 관심을 가진 문제였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찍게 됐지만 만약 누군가 일찍 관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런 영화를 찍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맥: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 건 금융범죄다. 금융위기가 일어났는데 이 위기의 막후를 차지하는 세력이 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영화 속에서 은행을 턴다던가, 살인이라던가, 이런 것들은 다뤄지지만 진짜 심각한 금융범죄는 다뤄지지 않는다. 이건 현재 홍콩에서도 나타나는 문제다. 금융사범들은 당연히 감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은 만약 구금된다 해도 1~2년 후에 풀려나곤 한다. 이들을 정제하기란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어쩌면 작은 도둑 위에 있는 큰 도둑을 잡는 이야기이자 거대한 범위의 권선징악을 묘사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전에 비극적 형태의 결말을 묘사하는데 물질주의적 욕망에 이끌려 잘못된 선택을 한 소시민적 형사들의 비극을 묘사한 이후에 그 비극을 잉태한 거대한 배후에 대한 복수적 처단을 그린다. 소시민적인 인물들의 비극을 묘사하는 방식도 징벌적인 태도로 읽힌다. 장: 작은 도둑이나 큰 도둑이나 똑같다는 걸 먼저 강조하고 싶다. 범죄를 지었다면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된다. <절청풍운>은 세 형사의 시각을 통해 상황을 바라보는데 이를 통해서 사람들의 공감대나 동정심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실제 상황으로 보자면 이들은 범죄 행위를 저질렀으니 분명 벌을 받아야 된다. 물론 이 사람들은 작은 범죄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막후에 악한 세력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똑 같은 죄인이므로 영화에서 그런 악당들과 구별하지 않는다. 영화의 결말에서 그 소시민적 죄인과 막후의 세력들이 같이 떨어져 죽지 않나. 크던 작던 잘못은 잘못이라고 얘기하고 싶다는 동기에서 그런 결말을 만들었다.
<무간도>도 그렇지만 <절청풍운>도 인물이 관계적 엇갈림이나 우연찮게 사건에 휘말리는 인물의 딜레마를 묘사한다. 어떤 상황이나 관계에 휘말리는 인물의 심리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맥: 스토리가 재미있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보다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성 문제다.
<무간도>부터 지금까지 유위강 감독을 포함해서 세 사람의 공동작업이 많았다. 이렇게 세 사람이 지속적으로 공동 작업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드는 이유가 뭘가?
맥: 익숙해서? (웃음) 장: 금전적인 요인이 가장 크다. 최근 홍콩에선 금전적으로 영화 제작 규모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상적인 예산을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래서 영화 한편을 제작할 때, 몇 명의 감독이 함께 따라붙어서 제작하면 이를 분담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한 명의 감독이 제작하게 된다면 질적인 부분은 포기하고 가자, 이렇게 되지만 <무간도> 같은 경우엔 여럿이 같이 제작했기 때문에 28일 내에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한 명의 감독이 제작했다면 질적인 부분도 보장할 수 없고 속도도 맞추지 못했을 거다.
현재 한국도 제작비를 절감하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 중이다. 한국의 영화시장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나? 장: 구체적으로 한국의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예전에 한국영화가 굉장한 호황을 누렸을 때 <데이지>를 찍었는데 영화사 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1주일 찍었을 뿐인데 이걸로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이젠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현실을 직면해야 될 시기가 된 거 같다. 시장이 위축된다는 걸 느끼면 그만큼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해야 되는 현실을 직감해야 한다. 홍콩에선 스태프나 배우, 감독, 작가, 기계 설비를 맡은 인력들도 예전엔 어느 정도 최고 수준으로 받았지만 지금은 가격을 많이 줄여야겠다는 상황에 다다르게 됐고, 지금 홍콩은 가격이나 임금 수준을 내리기로 결정하자마자 바로 수준이 확 내려갔다. 맥 감독도 한때 조감독이었는데 예전에 조감독을 할 때 임금수준은 지금 조감독의 2배 정도였다. 그 때는 굉장히 쉽게 돈을 벌었다. 지금은 예전에 고용해서 쓰던 스태프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숫자로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조감독 시절엔 한 번에 2편의 영화를 찍고 있을 때도 있었고, 어떤 배우는 한 번에 7편 정도의 제작에 참여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럴 수 없다. 지금 홍콩은 그런 상황에 직면했는데 지금 한국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한국의 상황이 홍콩처럼 벌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한국이 직면한 현상도 홍콩의 90년대에 직면한 문제와 비슷한 문제가 많을지도 모른다. 사실 홍콩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이런 문제들을 직시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걸 직시하지 못한 사람들은 굉장히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 결국 그건 살상력이 큰 도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도태되지 않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맥: 사실 한국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홍콩 영화는 중국과 합작해야 되고 결국 중국상영을 염두에 둬야 된다. 중국상영을 고려하면 결국 소재 폭도 제한된다. 이런 문제를 겪지 않는 한국이 매우 부럽다.
그런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감독이자 제작자 입장에서의 자구책이 궁금하다. 장: 아까 임금 문제에 대해서 주로 얘기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를 동원해서 이 문제를 타계하려고 한다. 예전엔 좋은 시나리오를 써야겠다는 고민에만 집중했다면 지금은 여기에 돈이 얼마나 들어갈지, 이런 것들을 고려하면서 이 장면이 꼭 들어가야 하는 장면인지 생각한다. 될 수 있으면 간단하고 절약할 수 있는 방식의 시나리오를 쓰려고 한다. 어쩌면 그게 우리 팀의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 두 명이 있음으로 해서 전체적인 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만약 여기에 돈을 얼마나 들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지, 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면 돈을 아낄 수 있다. <절청풍운>만 해도 33일만에 영화를 완성했다. 분업이 잘돼있다는 건 분명 우리 팀의 장점이다.
지금 현재 홍콩 영화가 아시아 영화권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장: 사실 굉장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웃음) 갈수록 모르겠다. 1997년에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홍콩도 중국의 일부분이 됐다. 그러므로 영화를 구분할 때도 홍콩영화가 아니라 중국영화라고 해야 되는 셈이다. 예를 들어서 미국영화를 가지고 LA영화라고 하거나 뉴욕영화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90년대에는 홍콩영화, 중국영화 이렇게 구분했다지만 그 후로 10여 년간 이런 식으로 구별하지 않았다. 홍콩은 굉장히 자유로운 도시이고, 금융 허브라 할 수 있고 상조(相助)의 도시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많은 요소를 합쳐서 홍콩이란 지역적 위치를 정의할 순 있지만 아시아 영화권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선 내가 감히 뭐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자본의 문제가 많은 것을 좌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홍콩영화의 황금기라고 불리던 시절로부터 많이 멀어졌지만 현재 홍콩 영화의 최전선을 이끄는 건 앞의 두 사람을 비롯해서 유위강 감독이나 해외에서 거장이라 불리는 두기봉 감독 등이 있다. 홍콩영화가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할지 생각해본 바가 있나? 장: 홍콩은 지금까지 기술적인 문제에 많이 부딪혔다. 배급이나 마케팅이 부족했고 극장도 문제가 많았다. 홍콩은 부동산 가격이 매우 비싸서 극장사업을 해나가기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의 비전이라면 전세계인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거다. 오늘 극장에서 우리 영화를 상영하면서 반응을 살펴보니 홍콩이나 중국 관객의 반응과 매우 유사하더라. 그래서 내심 굉장히 기뻤고, 이는 우리가 고민해온 것들이 성과를 거두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이런 방향으로 작품을 완성해나갈 거다. 여전히 좁은 식견으로부터 얻은 비전일지 모르지만 이런 희망이 실제로 현실화되길 바란다. 맥: 최근 홍콩영화가 대륙으로 진출해야 되는 상황이지만 아무리 대륙이나 세계시장에 진출했다 하더라도 일단 홍콩 내 사람들이 우리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건 실패한 것이다 다름없다. 만약 우리의 비전은 우선 홍콩 시장에서 성공하고 외부로 나가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