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야구가 어렵다고 말했다. 어려워서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야구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그랬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쿠바와 맞붙은 대한민국 대표팀은 한 점 차 스코어로 승기를 잡은 채 9회말 마지막 수비에 들어갔다. 차세대 국보급 투수로 꼽히는 류현진이 마운드에 올랐다. 승리를 예감했다. 첫 타자로부터 좌전안타를 맞았다. 동점주자가 나간 상황, 두 번째 타자의 희생번트로 주자는 2루까지 진루했다. 안타 하나로도 동점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두 타자 연속 볼넷으로 1사 만루 상황까지 맞이한 뒤 류현진은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의 마지막 투구는 스트라이크에 가까웠지만 볼 판정을 내린 히스패닉계 주심은 담담했다. 포수 강민호는 격렬한 항의 끝에 퇴장 명령을 받고 덕아웃에 포수 미트를 내던졌다. 마운드를 이어받은 건 마무리 투수로 정평이 난 정대현이었다. 투수와 포수 즉 배터리가 모두 교체된 채 맞이한 9회말 1사 만루 상황, 정대현의 손 끝에서 볼이 뿌려졌다. 유격수 앞 땅볼! 유격수 고영민이 이를 잡아서 2루를 밟은 뒤, 1루로 송구했다. 대한민국 야구팀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이었다.
스피드건에 150km는 찍혔을 거라던 강민호의 터프한 미트 던지기 덕분인지, 무심하고 시크한 정대현의 ‘차도남’ 투구 덕분인지 몰라도 52%의 시청률을 기록한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의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야구장에 모여들었다. 2009년 프로야구 관중은 520만 명을 넘겼다. 전년 대비 100만 명 이상이 늘어난 수치다. 그게 다가 아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년보다 눈에 띄게 여성관중이 늘었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 이후로 경기당 여성 관객 비율이 30% 수준이라고 밝혔다. 2008년 이전까지는 15% 안팎에 머무르던 수준이었다. 680만 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중수를 기록한 지난해에는 40%에 육박했다. 롯데 자이언츠 홍보팀의 임채무 씨가 전한 부산 사직구장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환기되는 사례가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의 ‘축’ 자도 몰랐던 대부분의 여성들이 레드카펫처럼 넘실대는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길거리 응원을 즐겼고, 축구를 알게 됐다. 문제는 월드컵이 끝난 뒤, 그 열기를 이어갈 공간을 찾지 못했다는 것. 프로축구에는 그녀들이 기대했던 월드컵의 열기가 없었다. 쉽게 말해서 프로축구는 인기가 없었다. 프로축구 구장의 텅 빈 관중석에서 월드컵 당시의 열기란 겨울 한파 속에서 떠올리는 한여름 무더위 같았다. 월드컵 무대에서 반짝거리던 태극전사들도 프로축구 안에서는 존재감을 잃었다. 프로야구는 달랐다. 출범 30주년을 맞이한 프로야구는 일찌감치 한국의 국민스포츠 자리를 꿰찼다. 팬덤의 스케일과 문화적 저변이 달랐다. 야구장은 만원이었고, 응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야구장에서 한번 놀아봤다는 여성들은 그 매력에 마구마구 빠져들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그라운드를 생전 처음 본 그녀들은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파도타기에 합류하기도 하고 입에 붙는 선수들의 응원가에 목청을 높여보다가 야구장에서 먹는 ‘치맥’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야구장의 단골손님이 됐다. 뒤늦게 발견한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베이징올림픽 야구경기를 지켜본 여성들은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러했듯이 다부진 선수들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에 열광했다. 스포츠 스타의 탄생은 곧 그 분야의 관심으로 이어진다. 1994년도 농구대잔치 당시,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부는 실업팀들을 꺾으며 파란을 일으켰다. 장동건과 손지창 등 당대 청춘스타들이 대학농구선수로 출연했던 <마지막 승부>에 열광했던 소녀팬들은 농구장을 찾아 젊은 농구스타들에게 드라마의 팬덤을 이입할 수 있었다. 스타성은 곧 상품성이다.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에서 태극기를 달고 활약했던 선수들은 스포츠 스타는 스포츠 마케팅의 최전선에 배치된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 사이에 여성의 신체사이즈에 맞춰서 출시된 유니폼 판매율이 4배까지 뛰었다. 야구중계 화면에서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여성팬의 이미지가 심심찮게 포착됐다. 야구장에 놀러 갔던 그녀들은 야구팬이 돼서 돌아왔다. 프로야구 신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그녀들에게 각 구단들의 구애가 시작됐다. 여성팬을 겨냥한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고 활발히 진행한다. 두산 베어스의 ‘퀸즈 데이’가 대표적이다. 한 달에 한번 핑크색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는 두산 베어스 선수들은 그날만큼은 팬들을 위해서 뛴다. 스킨십 전략을 통해서 친밀감을 높여나간다. 야구장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사실 야구는 즐기기 위해서 학습이 필요한 스포츠다. 즉각적인 액티비티가 뚜렷하게 체감되는 축구와 농구 등과 달리 룰을 먼저 숙지해야 비로소 액티비티가 보인다. 그만큼 확고한 흥미가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일찍부터 야구에 흥미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견고한 야구팬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래서 흥미로운 변화다. 본래 한국에서 야구장은 수컷들의 놀이터였다. 1982년,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을 했건 말건, 고교야구의 인기를 이어받은 프로야구는 출범 초기부터 대단한 팬덤을 구축했다. 지역 감정이 팽배하던 1980년대의 정서를 확실하게 긁어댄 덕분이기도 했다.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목포의 눈물’을,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부산 갈매기’를 불렀다. 응원하는 팀의 패배로 격분한 어떤 홈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물병을 던지고, 상대팀 선수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야구장은 분리와 단절의 정서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심리가 체감되는 바로미터의 현장이었다. 그만큼 과격했다. 정치적 부조리로 인한 갈등이 스포츠의 팬덤으로 위장한 듯한 불편한 진실.
야구장을 찾는 젊은 여성팬들이 늘어난다는 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낡은 시대성을 극복해나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젊은 남녀 커플이 각자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나란히 앉아있는 야구장의 풍경은 이 사회의 취향과 여유가 한 뼘 늘었음을 증명한다. 서로 다른 취향을 인정하고 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다. 각자 다른 방향을 응원하면서도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그녀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태생적 의무감을 얹지 않는다. 그저 잘생긴 선수의 플레이가 좋아서 응원하는 팀을 결정했다니,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인가. 지역갈등 따위는 그녀들에게 중요치 않다. 여자는 야구의 미래다.
덥다라는 말까지 녹아내렸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뜨니 중천에 뜬 해가 이마에 땀방울을 만들어냈음을 알고 구부정하게 등을 뗐다. 박태환이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44년만의 쾌거니, 대한민국 만세니, 일단 닥치고 박태환 선수 수고했어요. 남은 경기 일정도 최선을 다해서 많은 노력만큼이나 좋은 성과 거두길. 지구 한편에서는 축제분위기로 떠들썩한데 어느 한편에서는 죽음 앞에 대면한 사람들의 비명과 흐느낌으로 아비규환이 됐다 한다. 쑥대밭이 따로 없다. 죽은 이는 차라리 말이 없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과 고통이 절절하게 남아서 떠돌 뿐. 베이징 올림픽 슬로건이 One World. One Dream이란다. 하나의 세상이라,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실상이 이렇다. 이 순간에도 세상은 각자의 초침을 돌리고 있다. 어떤 이는 새로운 희망을 탐닉하지만 어떤 이는 지독한 좌절을 맞이한다. 해가 뜨는 반대편에서는 해가 진다. 하나의 세상이란 것이 말처럼 쉽다면 올림픽 따윈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합과 평화라는 슬로건은 그 반대편에 선 무언가를 경계하는 좌표인 것을, 우린 얼마나 직시하고 있을까. 눈 앞의 유희를 탐닉하고 있을 때, 저 너머에선 그것이 본래 두려워하던 비극이 비웃듯 도사리고 있다.
날씨가 덥다. 세상이 타오르듯 밤이 되도 땅은 식을 줄 모른다. 아이구, 더워. 하긴 나조차도 날 숨막히게 하는 더위가 먼 나라의 비극보다 가깝다. 하나의 세상이란 정녕 힘들다.
올림픽이 개막됐다. 장예모가 연출한 천이백억 짜리 개막식 공연이 화제다. 역시 중국은 쪽수면 장땡, 이란 반응부터 장예모의 블록버스터 클리셰라는 말까지, 물론 호화롭고 웅장했을 것이다. 물론 난 안 봤다. 관심이 없어서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인지 몰랐다. 맙소사. 그저 오늘 갑자기 잡힌 인터뷰 준비로 2시간 밖에 잠을 못 잤고 날씨가 미친듯이 더웠을 뿐이다. 알았으면 봤겠지. 혀를 차든 우와, 하든 간에 단 한번뿐인 볼거리는 일단 봐두는 게 상책이니까.
어쨌든 올림픽이 개막됐다. 애초에 말이 많았던 올림픽이었다. 베이징에서는 인공강우를 뿌려대고 공장의 생산을 중단하고 차량 2부제까지 철저히 실시함으로써 맑은 하늘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선수들은 심각한 대기오염에 투덜대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 이전엔 티벳 탄압으로 인해 올림픽의 평화정신을 훼손하는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 와중에 세계 각지의 성화 봉송엔 테러(?)의 물결이 있었다. 게다가 그것을 막겠다는 중국인민들의 몰지각한 타지거리점령 행위도 있었다. 우리도 크게 데였다. 시청 한복판에서 중국 애들한테 떡실신당한 한국인이 여럿 있었는데 경찰들도 속수무책이었단다. 자국인들이 자국에서 중국애들한테 멱살잡히고 다구리 맞고 있었는데 한국 경찰들 다 어디 갔었냐고? 성화 보호했다. 걔네 들이 지금 촛불 때려잡고 있는 거다. 어쨌든 이 글의 본론은 이게 아니고.
올림픽 개막식이 베이징에서 한참인 지금, 러시아는 전쟁을 선포했다. 올림픽은 세계 평화의 제전이라는 슬로건이 무색하다. 이미 그루지야 기지를 폭격한 러시아는 아마 군대를 몰고 제대로 밟아주겠다고 벼르는 양상이다. 그루지야의 친서방정책에 열받았던 러시아가 남오셰티아 공화국과 그루지야의 영토분쟁을 그루지야를 밟아줄 절호의 찬스로 삼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중요한 건 전쟁과 평화의 제전이 공존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란 물음이다. 이는 올림픽에 더 이상 평화의 제전이란 수식어가 일종의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선포하는 시대적 이미지가 아닐까. 올림픽이라는 매스게임은 이제 메달 따먹기의 장일 뿐, 혹은 말 그대로 스포츠라는 유희를 즐기고자 하는 빅매치일 뿐, 그것이 모토로 했던 전세계 화합의 수식어와는 무관해지는 양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되려 국가간의 경쟁 속에서 상대에 대한 손가락질이 오가는 형국이다. 자기 국가에 대한 자존심을 메달의 수로 증명하려 하고 그를 통해 상대방보다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의욕에 불타는 지금의 올림픽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무조건 1등의 단상에 올라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바라봐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작위적인 금빛 드라마가 감동적인가?
올림픽의 기원이 된 그리스의 올림피아제 기간엔 이에 참가하는 폴리스 간의 전쟁행위도 중단됐다. 적어도 올림픽이란 이런 것이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평화를 일깨우는 깊은 잠재력이 있다고 비약할 수는 없지만 잠시라도 폭력의 창을 거두고 서로의 육체적 경쟁을 통해 인간적 유대감을 도모하고자 하는 인간적 화합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게 올림픽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올림픽은 그것과 상당히 먼 것이 돼버렸다. 그게 베이징올림픽 탓이냐고? 아, 그건 아니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라면 우리가 바라보는 올림픽은 무엇인가란 말이다.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고, 한국축구가 16강을 넘어가길 간절히 고대하고, 적어도 우리가 일본보단 금메달 수가 많아야 할 텐데 걱정하는 것이 올림픽이라면 이미 우리도 글러먹었다는 거다. 물론 이기는 게 뭐가 나빠? 라고 한다면 그건 나쁘지 않다. 단지 뭐가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금메달 따먹기에 혈안이 됐다는 게 문제란 거지. 결국 메달 따는 편이 우리 편, 못 따면 듣보잡. 이것이 우리가 처한 무한경쟁체제의 현실 아닌가. 결국 인간들의 땀내나는 경쟁의 의미는 퇴색되고 누가 이기고 지는가라는 성적표만이 중요해질 뿐. 우리에게 올림픽은 이 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 정신차려야 하지 않을까?
지난 27일 시청을 점거한 중국인 폭도들이 성화봉송의 출발지인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한국인을 집단 폭행했다고 한다. 폭행당한 그는 '티벳 평화연대'에서 나눠준 홍보용지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든 중국인들에게 바닥에 내팽개쳐진채 발길질을 당했다고 한다. 필자도 한국인을 구타하는 사진을 보고 엄청난 분노를 머금었다. 이는 사람이기에 엄연히 당연한 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팩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들 잡아 족치자, 가 아닌 것이다. 감정에 감정으로 대응하자면 끝없는 반복의 악순환에 시달리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성을 찾아 대응해야 한다. 일단 색출이 가능한 중국인들에게 적절한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중국에 유감을 표명한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단의 최선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제관계의 역학에서 취해야 할 존비적 정책에 불과하며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제스쳐에 불과하다. 그것이 지난 일요일 시청에서 길길이 날뛴 오만한 중국인 유학생들에 대한 메시지로 작용될 가능성은 없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건 물리적 대응책이다. 경고적인 대응을 끝냈으면 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분명 그들이 저지른 형사사건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 단지 중국 정부에 대고 유감을 표명하는 건 그저 국가적 의무의 수순일 뿐이다. 발본색원해서 시위에서 과격한 행위를 한 자들을 잡아서 그에 마땅한 처벌을 해야 할 것이다. 그건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을 때리고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신경질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들이 범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이 앞서는 문제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단지 인터넷에 올라온 얼굴을 보고 비방의 댓글 다는 수순으로 끝나거나 혹은 그들을 마주친 누군가가 멱살잡이를 해서 끌고 가는 것으로 해결되서는 안될 문제다.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은 공권력을 동원해서 그 무질서한 현장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는 법치국가인 대한민국의 존엄성을 세우는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사안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단지 이성을 잃은 무지한 분노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성적인 가능성이자 그들과 다른 우리의 차별성이기 때문이다. 시위라는 민주적 방식에 대항한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준법으로 다스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폭도들의 몰지각을 일깨울 우리의 이성적 포용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추후에 이 땅에서 비슷한 일련의 사례를 방지할 수 있는 적절한 대응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용을 넘어선 그들의 행위가 어디서든 통할 수 있다는 무례함을 다스릴 수 있는 최선책이기도 하다.
P.S1>참고로 사진상에 등장한 전경들의 정지된 컷은 그들의 안일한 대응이라기 보단 1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벌어진 상황을 촬영한 카메라에 담겨지지 못한 그들의 대응이 생략된 팩트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손가락질 해야 하는 상대는 그들이 아니다. 또한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았을, 성화 봉송에 8000여명의 인원 배치를 지시했음에도 정작 중국의 인해전술을 방관하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지시 책임자의 윗선에게도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P.S2>어떠한 이유에서라도 티벳의 독립은 응원되어야 한다. 엄연한 주권국가에서도 저리 날뛰는 중국인, 그것도 유학생들의 태도가 저리할 정도면 현재 티벳의 상황은 무시무시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에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 용기에 무의식적으로나마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목격한 무례한 그들의 태도에 맞서는 또다른 정당성이기 때문이다.
이건 중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엄연히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무시무시한 광경이다. 오성홍기를 휘날리는 중국인들이 위풍당당하게 한국에 체류하는 티벳인을 폭행하는 장면이다.이들은 그와 함께 미국, 캐나다인 6명을 오성홍기를 앞세워 구타했다. 27일 시청 앞 광장에서, 백주대낮에, 우리는 단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깡패짓을 일삼는 중국인 무리들에게 아무런 저항없이 구타당하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봐야했다.
개같은 짱개들, 이라고 분노를 피워올리기 전에 당신은 한가지 생각을 먼저 품어야한다. 어째서 이들이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마음껏 난장판을 벌일 수 있는 것일까. 같은 시각 중국 베이징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지는 도로변에는 8000여명의 경찰 특공대가 파견되어있었다. 그들은 '성화봉송을 저지하는 시위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서' 성화봉송자 1인의 주변을 겹겹히 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서울 한복판에서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는 무리들을 응징하는 중국인들의 무법천지를 국가는 방관하고 있었는가. 그건 아니다. 현장에도 경찰은 투입됐다. 약 10여명의 경찰들이 중국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인해전술에 맞서고 있었다. 다만 숫자가 열악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10여 명 남짓의 경찰과, 8000여명의 경찰특공대라는 어마어마한 부등호를 그리게 만든 동시간대의 다른 상황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혐의를 부른다.
중국의 성화봉송을 안전하게 이루기 위해 8천명의 경찰이 배치된 상황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중국에 대한 반대를 용인하지 못한다는 폭력의 공포를 온몸으로 대면했다. 국가가 보호한 건 국민이 아니라 성화였다. 공권력은 중국에서 벌어질 베이징 올림픽을 무사히 치르는 것에 총력을 기울였으되, 그 반대편에서 중국인들의 알력적 폭력에 마치 의도적인양 무관심했다.
국가의 이해관계는 경제적인 관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성화봉송을 위해 8000여명의 특수경찰을 투입한 건 중국과의 이해관계에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완연한 의지에서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바가 아니다. 다만 경제적 관념을 떠나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누려야 마땅할 국가적 존비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연 이 나라의 실용주의가 누구를 위해 국가의 이해관계를 유력하게 생각하는 건지 의심스럽다. 성화를 보호하기 위해 동원될 공권력은 존재하지만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공권력은 없단 말인가? 동시에 자국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듯한 외국인의 무분별한 난동을 방관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인가?
대한민국 정부가 티벳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하지 못하거나 베이징 올림픽에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미친 듯이 난립하는 중국인들을 두 눈 멀겋게 뜨고 바라봐야했을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모르겠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기이한 사건은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물론 그 정체성을 표방하는 건 실권자들이다. 대한민국의 실권자들에게 중요한 건 성화봉송이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보호받고 살 권리가 있는 국민들은 시청 앞 대낮에서 벌어진 공포의 도가니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아야 할 것이다. 지독한 민족주의를 구호로서, 그리고 폭력적 행위로서 도출하는 중국인들의 몰지각한 행동양식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건, 그것을 방관하는 대한민국 실권자들의 몰염치한 사대주의적 근성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실용적이라고 믿는 것이라면 더더욱 침통할 수 밖에 없다. 제 국민의 안위를 버리고 밖으로 나갈 이익에 눈먼 정부의 방침은 결국 집을 돌보지 않고 외도하는 남편에 대한 불신감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믿고 있는 힘이라면 그만큼 어리석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