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었다고 했다. 마치 자신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오랜 대화라도 나눈 사람처럼, <미생>을 말한다. <미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택시에서 스마트폰으로 <미생>을 보다가 울컥했다. 눈물을 훔치니 택시 기사가 사연을 물었단다. 말해봤자 알겠나 싶었지만 <미생>이란 만화를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택시 기사가 ‘허허!’ 웃더니 물었단다. “아니, 그 <미생>이란 만화가 대체 뭐요? 얼마 전에 한 여자도 뒤에서 갑자기 펑펑 우는 거야! 그래서 뭔 일 있냐고 물었더니 아, 글쎄 그 <미생>인가 뭔가를 봤다네? 아니, 그게 뭔데 그리 울어?” 친구의 소주잔을 채우면서 전해들은 경험담이다. <미생>이 연재된 포털사이트의 댓글 게시판엔 이 같은 사연이 차고 넘친다.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넋두리를 쏟아낸다. 자신의 이야기 혹은 주변의 이야기를 한다. <미생>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미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본다.
<미생>은 어느 실패자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바둑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에 바둑연수생이 된 장그래는 입단에 실패한 뒤 7년 만에 프로바둑기사라는 꿈에서 이탈한다. 낙오한다. 돌을 던진다.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던 소년이 고졸의 낙오자가 돼서 사회로 나온다. 바둑판에서 추방된다. ‘열심히 안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해서인걸로 생각하겠다.’ 아픈 말로 자신을 누른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킬만한 핑계는 많지만 그 핑계마저 자신을 찌르는 일이니 차라리 스스로를 짓누른다. 실패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란 대부분 성공으로 역전되는 희망의 송가로 귀결된다. <미생>도 희망을 찾는 작품이다. 하지만 ‘성공’에 관한 드라마는 아닌 것 같다.
어머니의 지인을 통해서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입사한 장그래는 2년 간의 계약직 사원 근무 끝에 정직원이 되지 못한다. 그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고졸이기 때문이다. 그가 머물렀던 조직의 규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장그래가 회사에 적응하고,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일 때, 독자들은 뜨거워졌다. ‘이만하면 장그래도 정직원 자격이 있네! 정직원 되겠네!’ 응원했다.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는 단순히 이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되레 현실을 직시했다. 장그래는 ‘정직원이 되기 힘들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말했다. “작품이 리얼리티만을 담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기만이다. 특히 <미생>이 많은 지지를 얻은 건 독자들이 당면한 실질적인 고민을 대변했기 때문인데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면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독자에게 말을 건다. 뜨겁기만 한 빈말보단 차가운 척 따뜻하게, 정말로.
<미생>이 그리는 건 이 사회의 전형적인 관료제다. 겉으로 보기엔 언뜻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인 듯하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체계와 질서의 합의와 균형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맹점을 지적하고 질타하기 보단 그것이 합리화되고 안착할 수 있는 배경을 살핀다. 그 끝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사람에서 시작돼 사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람을 얻고, 사람을 쓰고, 사람을 통해서 계획이 수립되고, 정책이 시행되고, 결과가 완성된다. 제도가 완전해도 사람은 불완전하고, 결국 체계도 불완전해진다. 오류가 발생한다. 오류를 막기 위해서 제도는 보완되고 방파제처럼 강건해진다. 예외란 좀처럼 사용하기 힘든 단어다.
“이대로 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장그래에게 직속 상사는 답한다. “안 될 거다.” 이유란 이렇다. “세상은 원래 불완전한 거니까.” 불공평이나 불평등이 아닌 불완전함. 본래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말은 절망이다. 하지만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희망이다. 단지 그곳이 당신의 세상이 아닐 뿐이란 말이니까. 거기서 다시 <미생>은 말을 건다. 장그래에게 어쩌면 당신에게. ‘지금의 회사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야.’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은 대단히 이상적인 팀이다. 직속 팀장인 오차장은 “일은 뺏겨도 사람은 안 뺏겨”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직위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부조리가 없으며 체계가 원활하다. 서로를 존중한다. 홀로 작은 바둑판 위에 집을 짓고 부수던 장그래는 사회로 나와 바둑알 같은 존재가 돼서 스스로를 구축한다. 자신과 함께 집이 되는 바둑돌들을 마주한다. 기대고, 부딪히고, 마주본다. 사람을 얻는다. 세상을 익힌다. 삶을 내다본다.
<미생>의 끝, 정확하게 1부의 끝에서 장그래는 다시 자리를 찾는다. 불완전한 세상을 가르쳤던 오차장이 둔 포석에 합류한다. 미생이 모인다. 완생을 꿈꾼다. 2부는 거기서 시작된다. 바둑연수생을 포기하고 기원에서 나오던 장그래와 계약직 만료 메시지를 받고 회사에서 나오는 장그래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패배감이 사라졌다. 더 이상 스스로를 짓누르지 않는다. 그것이 패배만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인프라는 나 자신이었다.” 단단하게 여문 장그래를 통해서 당신도 어쩌면 성장했다. 막연한 희망을 품었을 때 현실은 가혹해진다. 정확한 대안을 찾을 때 현실은 생생해진다. 깨닫는다. 깨달아야 한다. 어차피 나도, 당신도 미생이니까. 꿈꿀 수 있다. 살아야 한다.
예상치 못한 결말이란 이런 건가. 슬프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렇게 진한 애정이 있진 않았다. 차라리 애증이랄까. 무엇보다도 안타깝다는 말이 언어가 아닌 한숨으로 나온다는 건 분명 진심이다. 죽음이란 찰나의 쓸쓸함으로 위안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두고 기억나는 일이다.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얼굴이었건, 누군가의 술자리에서 씹어대기 위한 안주거리였건, 누구나 알만한 이의 죽음은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다.
사고도 아닌 자살이란 말이 조금은 낯설었다. 누군가는 지금쯤 말하고 있겠지. 그 정도 가지고 자살씩이나. 현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들, 그리고 고위 공직자까지 포함해 연병장에 일렬로 세워서 깔끔하게 통장 관리해온 사람들 순위를 매겨보면 노무현은 몇 번째에 해당될까. 누구 말대로 인물이 아니었군. 그래, 인물이 아니었어. 돈 받아먹고 입 씻고 뻔뻔하게 살아갈만한 위인이 아니었던 거지. 나약했다. 지금까지 누구라도 그러했듯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사람들도 살아갔을 텐데 정작 스스로는 참을 수 없었던 걸까. 참 쓸쓸한 일이다.
드라마틱한 사건인 건 분명하다. 이 드라마를 보고 느낀 감정이 도대체 어떤 형태의 결론으로 굳어질지도 잘 모르겠다. 더 참혹한 건 그 이후의 세상이다. 종로나 청계천, 시청, 그리고 심지어 대학로까지도 경찰들이 쫙 깔렸다는데 난 이 현장에 분노를 느낀다. 물질적 요구로 마음이 황폐해진 사람들이 함께 손을 부여잡고 체온을 나눌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이 세태에 난 분노한다. 이 죽음 이후의 감정이 분노로 연결된다는 것이 참혹하다. 어째서 애도하지 못하는 건가. 어째서 이 상실감을 연대하지 못하게 하는 건가.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 가장 무능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현명함을 억누르는 꼴이라니, 마치 기르는 개에게 물린 것마냥 마음이 심란한 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자살해야 한다고 당당하게 홈피에 끄적인 김동길이란 작자나 현재 서거가 아닌 자살로 수정해야 한다며 입방정 떨고 있는 조갑제 같은 위인은 뭘 아는지 모르겠다. 댁들의 죽음이 얼마나 세상을 상쾌하게 만들지, 남의 죽음을 함부로 지껄이는 이들의 삶이란 얼마나 무가치 한 것인지. 관심이 사치인 인생이란 이런 것들이다. 정작 자살해도 좋을 위인들이 성질이 뻗치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되레 호통치고 살아가지. 나 잘났다고.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티끌이 부끄러워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감동이 된다.그리고 아픔이 된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티끌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란 없기에 자신의 삶을 순수한 방식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난 이 죽음을 애도하련다. 노무현이 티끌 하나 없이 청정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의 양심적 채무가 누군가의 짐이 되길 원치 않았던 사람이라서다. 그게 바로 사람이다. 사람 구실 못하는 짐승의 우리 같은 세상에서 사람이 되길 원하는 사람의 죽음이란 이처럼 절절하다. 명복을 빈다. 서거든, 자살이든, 부디 편히 눈 감길. 의미 있는 삶이었어. 적어도 사람 냄새가 났지. 그러니 이제 사람의 빈자리를 추모합니다. 잘 가세요. 노무현 아저씨.
새벽 1시경, 마감을 핑계로 컴퓨터 앞에 붙어서 산만하게 노닥거리고 있을 즈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영화를 봤다고 했다. <왓치맨>을 봤다는데 재미없다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질식할 것 같아 내게 구원을 요청했다. 난 물론 흥미롭게 봤다. 재미있었다. 녀석은 좋아했다. 원래 이 친구랑은 말이 잘 통했다. 항상 영화를 같이 보고 나면 긴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어쩌면 지금 내 삶에 끼친 영향력의 7할 정도는 이 친구 몫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음악을 들었고, 영화를 봤다. 이야기를 했고, 글쓰기에 대한 고무를 가능케 했다. 때때로 이 녀석이 날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며 비아냥거렸다. 반쯤은 농담이고 반쯤은 진담이다. 내가 지금 날 새는 것도 어쩌면 이 녀석 탓이라니까. 하지만 나쁜 의미는 없다.반쯤의 진담보단 농담 쪽으로 좀 더 저울추가 기운다. 여러모로 힘이 되는 녀석이었다. 내 지루한 이야기를 꽤나 재미있게 들어주는 상대라면 내게 있어선 정말 괜찮은 녀석인 거다.
간만에 수화기를 경계로 대화를 나눴다. 광주에 있는 녀석을 만나기란 어렵다. 하긴 내가 절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의 9할 정도는 광주에 있다. 이 녀석도 그 중 하나고. 어쨌든 영화를 보고 나서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대화를 했고, 자연스레 시간이 흘렀다. 대화를 통해 시간을 이겨야 할 사람이 있는 반면, 대화와 함께 시간을 흘려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후자가 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후자의 입장에 있는 상대들과 멀어지고 있다. 사람을 잃는 느낌이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 대부분과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많지 않다. 추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인연은 쉽게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옛 친구들과 여전히 연대할 수 있는 것도 그 추억덕분이다. 그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일 테고. 그저 짧은 통화만으로도 멀어졌던 수많은 기억들이 다시 눈 앞으로 돌아온다는 거. 그거 대단히 즐거운 일이거든.
사람이 그립다. 옛 이야기가 하고 싶다. 나이 먹어간다는 건 이런 건가. 문득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오래된 친구의 전화만으로도 감상에 젖고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씁쓸해진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다. 안다. 그저 한번쯤 다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그 추억 위로 덮인 먼지들을 훅 불어내고 온전한 형체를 멀리서나마 한번쯤 되돌아보고 싶을 뿐이다. 다시 허물어질 언어라 할지라도 잔상은 거기서부터 다시 지속될 것이다. 그 당시보다 많은 시간을 지나왔음에도 그 시절보다 긴 추억을 만들어낸다는 게 어려운 나이이기도 하지 않나. 어른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쉽게 만들 수 없는 시절로 들어선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모르지. 어쩌면 내가 지금 마감을 앞두고 이 문장들 사이로 도피한 것일지도. 어쨌든 다시 마감이나. 일단 지금은 외로움 타령보다도 먹고 살 궁리를 할 시간. 아, 이렇게 적고 나니 진짜 없어 보이네. 나도 그럼 허세라도, 뉴욕 헤럴드 트리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