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박원순 시장에 대한 지지는 여전하다. 그건 행정가 혹은 정치가 박원순 시장에 대한 입장 안에서 그의 쓸모가 아직 유효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그 사람에 대한 개인적 애정이나 기대 따윈 없다. 그가 얼마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기대 따위를 가질 이유도 없고. 다만 만약 박원순 시장이 이번 인권 헌장 사태에 관해서 사과하지 않았다면 지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어쩌고를 떠나서 박원순이 서울시를 잘 이끌어 왔다는 신뢰엔 변화가 없으므로 그 사람에게 불거진 당장의 오류를 추처럼 매달아 바다 밑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듯 매장해 버릴 생각이 없다. 다만 자신의 오류를 지적하는 시민의 목소리에 어떻게 응대하는가가 그 사람을 지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래서 나는 박원순의 사과를 받아냈다는 게 일단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행정가와 정치가의 태도는 시민의 항의에 응답하는 방식으로서 드러난다. 최소한 시민으로서 의사를 전달하고 주장했을 때 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행정가가 지금 시대엔 너무 중요하다. 개인적인 도덕심이나 윤리성 따위는 정치적 입장 안에서 쉽게 변절되고 무시당할 수 있는 시대에서 시민의, 국민의 의사를 떠받들 수 있는 최소한의 개념이 있는 행정가, 정치가가 필요하다. 그들은 꼭 국민의, 나의 수족이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원순은 아직까지 보존할 가치가 있는 행정가 혹은 정치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박원순이란 사람을 지키는 것보다도 최소한 시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는 박원순을 옳은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시민의 의무이기도 할 것이다. 그건 강렬한 비판으로서도 가능한 일이다.
막말로 경남도지사 홍준표에게 이런 걸 기대할 수나 있겠나. 심지어 이명박의 서울에선 가능하기나 했던가.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의 요지는 박원순이 홍준표보다 나은 사람이라서 지지를 유지한다는 말이 아니다. 최소한 국민의 손가락질에 눈치를 보고, 반성하는 제스처라도 취할 줄 아는 이가 국민의,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가 돼야 한다. 그들은 우리 머리가 아니라 우리 수족이기 때문이다. 우린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보다 영리하게 그런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시민이 돼야 한다. 그건 뜨거운 화 너머의 이성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지금 시청 앞에서 항의를 하고 있는 이들도 그런 의미에서의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행정가나 정치가를 사랑하는 유권자들의 사모곡은 이제 신물이 난다. 투표란 자신에게 보다 유리한 행정가나 정치가를 선택하는 행위이다. 사랑을 주고 배반 당했다고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러니 박원순에게 실망을 했다는 말은 아직 이르다. 박원순을 지지한다는 말이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거둘 필요가 있다. 그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행정가이자 정치가일 수 있는지 판단할 필요성은 아직 유효하다. 고로 나는 아직 박원순을 지지한다. 그가 이번 사태에서 좋은 교훈을 얻고, 변화를 가져갈 수 있길 기대한다.
건축가는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집을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건축가에게 물었다. 건축가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 책지성 팀장. <두 남자의 집짓기> 저자.
구승회 디자인크래프트 대표이사. <건축학개론> 제주도 ‘서연의 집’ 설계.
김찬중 더_시스템 랩 대표.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 설계.
전숙희 와이즈 건축 소장. 다세대 주택 ‘Y하우스’ 설계.
‘건축’이라는 단어가 발견되는 두 편의 영화 <건축학개론>과 <말하는 건축가>에 대한 남다른 감상이 있을 것 같다.
구승회(이하 ‘승’):약간의 의무감으로 <말하는 건축가>를 봤다. 마지막 장면이 짠하더라. 목욕탕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아줌마한테 “이거 지으신 분 아세요?” 물어보니, “그걸 어떻게 알아~.” 대답하는데 그 옆에 정기용 선생님이 앉아 있다. 건축가가 열심히 만들어놓은 공간을 일반인들이 잘 쓰면서도 정작 같은 공간에 있는 건축가의 존재는 모른다니 찡했다. 한때 윗세대 건축가들이 국제적이지도 않고 디자인도 못한다고 폄하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분들만큼의 퀄리티를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걸 깨닫는 순간처럼 울컥하더라.
김찬중(이하 ‘찬’): 정기용 선생님께 개인적인 신세를 져서 어떻게 갚아야 할까 생각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화를 보면서 좀 울었다. <건축학개론>은 건축이 지역과 얼마나 밀접한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감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공간에 대한 사소한 경험이 기억의 인자로 어떻게 자리잡는지 잘 보여준다. 두 영화는 건축가들이 ‘어떤 기억을 선물할 수 있는가’라는 직업적 소명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았다.
전숙희(이하 ‘숙’): <말하는 건축가>는 실제 건축가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반가웠지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봤다.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정기용 선생님 회고전을 출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 이전부터 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단 말을 들었는데 회고전 준비에 관해 듣고 마음이 덜컹했었다. 건축계가 이분을 보내드릴 준비를 한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회고전이 많은 건축가들을 묶어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살아생전에 메이저 갤러리에서 회고전을 했다는 것도 건축계만의 파티가 아니라 건축계 밖의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했다. <건축학개론>은 아직 못 봤지만 구승회 소장님의 작품이 나온다니 궁금하다.
구본준(이하 ‘본’):사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다른 때보다 높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느낀 건 건축영화제였다. 건축영화제 1회가 1주일이나 더 연장상영을 했다. 지난 2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왔다. 그래서 두 영화가 절묘해 보인다. <말하는 건축가>는 공공건축을 다루지만, <건축학개론>은 사적으로 건축을 다루니까 두 작품을 같이 보면 좋을 거 같다.
한국에서 건축가란 어떤 존재인가?
찬:만약 집이라는 결과물만 중요했다면 <건축학개론>이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일을 맡겼더니 어느 날 집이 완성됐더라, 이런 건 소위 집장사라면 모를까, 건축가에게 어려운 일이다. 건축주가 집 짓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즐기고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건축가의 역할이다. 의사나 변호사도 그렇지 않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의뢰인이나 환자로부터 좀 더 많은 부분을 끌어내는 거니까. 그 과정에 참여시키고 그에 대한 기억까지 함께 넘겨야 된다.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런 과정의 기억 또한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본:예쁜 집을 짓기 전에 하자 없이 지으려면 시공업자가 건축가의 설계를 잘 지키면서 짓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게 감리라는 영역인데, 시공업자가 설계해서 짓고 검사해서 괜찮다고 넘어가는 건, 자기가 문제 내놓고 100점 맞았다는 거다. 건축가가 건축주를 대신해서 튼튼한 집이 나오도록 시공업체를 견제하고 압박을 가해서 완성도를 높여야 된다. 무엇보다도 집을 짓고 나면 건축사가 영세해서 없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A/S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 지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건축가한테 맡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 지을 때 복덕방부터 간다.
숙: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건축가가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 여름에 우리가 만든 금호동 다세대 주택이 보도되면서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의뢰가 있었는데 정작 성사되는 건 없었다. 대부분 건축가가 직접 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건축가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건축주의 요구사항에 맞는 시공자를 만나도록 돕는다. 시공자는 최대 이익을 원한다. 그럼 건축주가 원하는 그림 내에서 최대한 값싼 재료를 쓰고 쉬운 방식대로 짓는다. 건축가들은 그 돈이 제대로 쓰일 수 있게 전체를 봐주는 거다, 그게 돈을 잘 쓰는 방법이다.
찬: 사실 수많은 아이템이 들어가는 큰 덩치의 건축물이 30년 동안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완성한다는 건 어렵다. 재료의 속성도 변할 수 밖에 없으니 분명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구나 건축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아카데믹하게 접근하지 않아도 생활 속의 공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 대부분 불만을 말한다. 그 불만들을 긍정으로 바꾸긴 힘들다. 사실 문 손잡이가 흔들거려도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따진다. 종합적인 책임자로서 건축가의 위치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 없을 때 아버지 집을 설계했었는데 덕분에 평생의 욕을 먹고 있다. 하물며 전구 나가는 것도 내 탓이니.(웃음)
승: 이사가면서 돈 좀 아껴보겠다고 우리 집 인테리어를 직접 했는데 지금까지도 매일 혼난다. 와이프가 건축주라서.(웃음) 자문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건축가에게 어떤 믿음을 싣는 경향이 있다. 아플 때 찾아가는 의사가 명의이길 바라는 것처럼. 그래서 움찔하다가 ‘저는 공사는 안 합니다’ 하면서 책임소재에서 빠져 나온다. 많이 얽힐수록 힘든 게 사실이니까. 소비자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이가 알아서 잘 해주고, 되도록 싸게 하면서도 좋은 퀄리티를 바라는 건 당연하긴 하다. 요즘은 그런 분들이 바라는 바를 건축가로서 잘 듣고 있는지 고민한다. 단순히 액수를 깎아주는 게 아니라 대안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외국도 많이 다녀서 본 것도 많고 좋은 재료나 디테일은 많이 아는데 막상 그것들을 조합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 잘 모른다.
본:우리나라 건축가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디자인 감각이 워낙 다르니까.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인테리어에 길들여져서 공간을 꾸며본 적 없는 사람이 90%니까. 솔직히 자기가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다. 취향도 없고. 아파트는 편리한 대신 디자인 감각을 거세시킨다.
숙:어떤 공간을 좀 강조한다면 그 건너편은 조용한 것이 들어가야 되는데 대부분 강조되는 것만 고른다. 종합적인 공간을 보지 못하는 거지.
취향은 삶의 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취향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숙: 최근에 집 짓는 것에 대한 문의가 많다. 시공사들이 공급하는 아파트가 아니라 자신들이 짓는 집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최근에는 한 시공사에서 찾아왔는데 아파트가 아닌 다른 걸 개척해보려 한다는 거다. 적당한 규모의 땅이 있기 때문이라지만 결국 그 수요계층에 대한 판단이 있다는 거다. 주거 문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터닝 포인트라 생각한 게 아파트를 쫓지 않는 세대들이 나왔다는 거다. 사실 집값이 비싸다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절망을 준다. 특히 아파트는 재산 정도를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어느 건설사가 지었는지, 어느 지역인지, 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수준을 단정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주거 형식은 다양성의 가치와 깊게 연관돼 있다.
본: 제일 중요한 건 일상에서의 건축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된다. 외국에서 본 골목길은 예쁘던데 우리 동네는 왜 이런지, 쓰레기통 같은 건 좀 더 괜찮은 디자인일 수 없는지, 길에 분전함은 왜 저렇게 많은지, 이런 것들. 가로수길이 좋은 이유는 길에 구조물이 별로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길 위에서 액티비티가 발생하고 길에 붙어있는 건물과의 상호작용도 좋아진다. 지금까지 한국은 도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저 내 집이 중요했는데 주택 하나가 예뻐지면 그 동네에 또 예쁜 집이 들어서고, 이런 건 의외로 쉽게 번질 수 있다.
찬: 역사적으로 건축이 선발 산업으로 등장했던 적은 없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건축은 후발 산업에 가깝게 포지셔닝된다. 산업, 문화, 예술을 포괄한 종합적 성격이 강해지는 탓이다. 건축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문화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다. 그런 시점에서 아까 말했던 두 영화가 때를 잘 맞춘 셈이다. 어쩌면 지금 시점이기 때문에 그런 시장성을 인정받았을지도 모르고.
본: 의사나 변호사는 인생 최악의 순간에 만나지만 건축가는 인생에서 제일 행복할 때 만난다. 일생 동안 집을 두 번 짓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게다가 아직도 대부분 건축가가 아니라 시공업체를 찾아가서 집을 짓는다. 정기용 선생님도 목욕탕이나 마을 공설운동장 같은 걸 만들었는데 건축가가 하니까 확실히 좋다는 걸 알려준다. 2003년에 정기용 선생님께서 순천에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기 이전에는 부모들이 어린애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없었다. 건축가가 하니까 그런 배려들이 생긴 거다. 심지어 순천시청 안에 처음으로 도서관을 전담하는 행정과가 생겼다.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기용 선생님께서 거기까지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도서관 하나가 굉장히 많은 걸 바꿨고, 공공건축이 이렇게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다. 실제로 건축은 많은 걸 바꿀 수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의 특성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승: 서울의 특성은 아파트다. 어떻게든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독특한 물리적 환경이 아닌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나올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건 안 좋으니 쓸어버리자는 건 결국 지저분한 집들 다 쓸어버리고 반듯하게 짓자고 하는 무대포 마인드와 다를 게 없다. 요즘 가로수길 말 많지 않나. 이제 옛날 가로수길 아니라고, 너무 상업화됐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게 정상이다. 예술가들이 모여서 좋은 분위기를 형성했고, 사람들이 모이고, 가치가 올라가니, 대기업들이 몰려와서 꼭지를 잡고, 그 사람들이 이동한다. 내 생각이 이상적인 건지 좋아지는 곳이 있으면 쇠락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서울시 모든 곳이 다 좋을 수는 없지 않나. 흥망성쇠가 이어지는 생태계가 있다는 건 도시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닐까.
찬:다양성이 인정되는 도시라는 면은 좋다. 다만 흑백논리로 구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사는 동네가 있으면 못 사는 동네도 있고, 지저분한 동네도 있으면 깨끗한 동네도 있다. 이런 다양한 문제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도시가 서울이다. 우리가 성격이 급해서인지 그 각각의 영역들은 정체돼있지 않고 늘 변한다. 적응력도 굉장히 빠르다. 좋은 걸 인정하거나 나쁜 걸 바꾸려는 의지도 강한데, 그런 양면을 잘 순화시켜서 조화로운 관계성으로 정립하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브랜드 파워를 가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숙: 뉴욕은 볼거리가 집중된 맨해튼이 있지만 그 밖은 험악하기 이를 때 없다. 지하철 타면 누군가 뒤통수 후려칠 것 같기도 하고, 다리 밑은 악취도 심하다. 거기에 비하면 서울에는 산재된 풍경들이 있고, 살만한 공간으로 확산된 도시다. 다만 최근에 양산된 건물들이 많아서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다이나믹함을 따라올 수 있는 도시가 없다. 뉴욕에서 일할 때는 대부분 인테리어였다. 건축물을 지어볼 기회는 없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다들 혈안이 돼서 달려든다. 그만큼 서울은 건축가들에게 좋은 영역이다. 다만 오랫동안 계획하고 짓기보단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들이 변하는 만큼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 서울에는 아파트가 맞다. 서울에서 어떻게 단독주택을 짓겠나. 땅값도 비싸고. 다만 기왕 짓는 아파트라면 조금 더 합리적이어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다세대주택은 단독주택을 헐고 지은 거라서 많은 가구수를 고려하지 못한 도로와 붙어있다. 그래서 차도 많이 밀린다. 좀 걸어 다닐만한 길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는 도시 좀 예뻐해 보자는 생각이 필요하다. 서울의 가장 큰 매력은 제멋대로의 도시라는 점이다. 뭘 해도 이상하지 않다. 얼마나 재미있나? 모든 실험이 가능한데. 나는 서울이 좋다.
특별히 관심이나 애정을 지닌 지역이나 공간을 꼽는다면?
본: 종로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지역이지만 아직까지 대표할만한 건물도 없고, 분위기도 성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래된 거리의 매력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이런 특징이 거리 특유의 분위기로 발전되면 좋겠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건축이 중첩되며 공존하는, 상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거리로 발전하길 기대하고 있다.
숙:소년기를 강남에서 보냈고 유학을 마치고 2년 전 강북에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조직이나 경관에 끌리는 편인데, 지리, 지형적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강북의 도시조직이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몽촌토성에서 도시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승: 한강 둔치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답답할 때마다 찾아갔다. 성수동 일대나 홍대, 가로수길, 이태원에 관심이 있다. 문화적 환경이 도시 공간의 변화를 끌어낼 지역이 아닐까 본다.
찬:고등학교 때부터 가로수길의 변화를 경험했다. 물리적인 변화는 크지 않지만 상권과 땅값, 사람들의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도시의 진화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해외 건축가들의 국내 영입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 모인 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본: 외국건축가를 들여오는 인식이 문제다. 명품백 사듯이 유명 작가를 부르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성격에 맞는 외국 건축가를 잘 고르면서 국내 건축가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고 최선의 경쟁을 시켜야 한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프로젝트 등을 보면 외국 건축가의 이름값에만 매달린 느낌이 강하다. 최고의 작품을 철저하게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찬: 해외건축가들의 국내영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큼 역동적으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 해외건축가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다만 우리 문화에 대한 단편적 사고로 완성한 결과물을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건 이상하다. 건축은 단편적인 일상의 기억을 유지시켜주는 틀로서의 속성이 있다. 브랜드 파워라는 이유로 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에게 우리의 공간을 맡긴다는 건 잘못된 거다. 국내 건축가들의 수준이 그들보다 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조직적인 대응과 관리는 떨어진다. 고질적인 문화적 사대주의와 국내 건축가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연동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승: 건축주의 눈이 확실히 높아졌다. 그러니 해외 건축가에게 의존하던 시기는 지나갈 거라 생각한다.
<말하는 건축가>는 대중들에게 건축가 정기용을 알렸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나 건축물이 있을까?
본:이일훈 씨와 주대관 씨의 사회적 건축. 제한된 조건을 어떤 아이디어로 풀어냈는지, 어떤 생각을 펼치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축가들의 참여가 어려운 저예산 건물과 일상의 건축에서 이뤄낸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이 축적되는 것이다.
승: 김성홍 교수가 <길모퉁이 건축>에서 언급한 ‘중간건축’을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건축물을 성실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숙: 건축가들이 사랑하는 조성룡 선생님의 재생건축도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 선생님의 동료건축가로 등장하시는데 그 정도로는 아쉽다.
찬: 능력 있는 건축가 대부분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인식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설계비는 창피한 수준이다. 공사비를 아끼면 건물이 나빠지니 설계비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건물은 도면 10장으로도, 100장으로도 지을 수 있다. 다만 고민과 검증의 무게가 다른 만큼 고스란히 공사비의 차이로 연결된다. 고민과 검증이 치열할수록 공사비 운영도 정확해지고 절감 효과와 품질 향상이 따라올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원래 지속적이었지만 요즘에 이르러 보다 활발한 것 같다.
숙: 소비자들에게 자기 브랜드에 대한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를 조직하기 위해서 궁리하는 것 같다. 다른 비즈니스 영역으로 넘어가고자 할 때 이미 구축된 브랜드 가치가 보여지는 공간을 이용한 비즈니스가 효과적이다. 패션과 건축을 소비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경험의 소비’란 점에서 공통적이다. 기능적 필요를 넘어서 이미지 소비의 영역에서 패션과 건축은 분명 비슷한 양상이 있다.
본:장 누벨이나 안도 다다오, 프랭크 게리, 요즘은 팝스타가 된 건축가가 많다. 그들의 명성이 브랜드에 부여됐을 때 얻어지는 상업적 작용이 있다면 건축가 입장에서는 기능에 구애 받지 않고 럭셔리하게 작업하면서도 조형성이나 파격성, 추상성을 강하게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구성이야 기본적인 공간의 원칙만 지키면 되지만 데코레이션은 얼마든지 화려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오모테산도와 아오야마에 있는 건물들이 스타 건축가와 럭셔리 브랜드의 욕망이 딱 맞아떨어진 사례다. 일반인들도 오모테산도 프라다 매장 앞에 가서 사진도 찍고 좋아하는 거 보면 그런 화려하고 장식적인 건물이 도시에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건 바로 그 극소수의 스타 건축가들이다. 건물의 부가가치도 높이면서 대중의 주목까지 끌어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럭셔리 브랜드들은 건축에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찬: 1900년대 중반에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라는 건축가가 남긴 사진 한 장이 있다. 자기가 설계한 집의 공간을 찍었는데 자기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와이프의 뒷모습도 나온다. 내가 받아들인 건 공간과 의상, 집기들까지 포괄한 토털 아이덴티티, 종합적인 공감각이었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스페셜리티의 공감대와 종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다루는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의 전반을 대변한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거다. 사실 인더스트리의 속성에서 건축이 훨씬 오래됐지만 패션은 보다 대중적이다. 그리고 건축에도 트렌디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자하 하디드의 팬시한 폼이 그렇다. 심지어 그녀는 패션 분야에서도 리터치를 하고. 건축물이라는 게 엔지니어링이기도 하지만 표피적으로 트렌디해서 패션과 잘 어울린다. 사실 요즘 건축계에서 ‘서피스(surface)’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질감이라는 고유 영역은 패션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다.
본: 사실 오래 전에는 건축이 모든 것이었다. 건축의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라 조각공이었다. 화가라는 개념도 16세기까지 없었다.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건축의 개념에 다 포함돼 있었다. 근대적인 개념 안에서 회화, 아트, 디자인으로 쪼개진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어쩌면 본래의 총합적인 형태로 돌아간 건축일 수 있는 거다.
건축이란 분야가 복합적인 만큼 건축가라면 다양한 분야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둬야 할 것 같다.
중: 학생들에게 늘 건축 외의 것도 많이 봐두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일상부터 사회현상까지 살펴야 한다. 건축가를 마스터의 개념으로 규정한 교과과정이 있는데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사람이 사는 공간과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아니라 형태적인 관심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니 실제로 일을 하면 너무 힘든 거다. 실버 하우스를 짓거나 유치원을 짓겠다는 사람이 노인이나 아이들 심리는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설계해선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자기 영감에 의존해서 혼자 죽여주는 걸 만들면 대중과의 괴리가 생긴다. 그런 엘리트주의로 건축주를 가르치려 드는 악순환들이 있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 건축가들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탈피하고 있다.
본: 건축은 20년 뒤를 내다봐야 한다. 설계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거다. 미래 사회의 모습이나 건축주의 이래도 예측해야 한다. 예지력이 필요하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집이 뭔가를 고민해야 된다. 그게 인문학이다. 건축가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개발된 기술을 조합하는 코디네이터다. 어떤 식으로 기술을 채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니 인문학이 중요하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철학책 읽으라 한다고 짜증내지만 건축은 항상 사람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건축은 예술적인 기술이다. 자주 쓰는 예인데 추상주의 화가 몬드리안과 유사한 건물을 만드는 건축가가 있었다. 한번은 몬드리안 추상화와 똑 같은 의자를 만들었는데 그 의자 가격이 몬드리안 그림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예술은 쓸모가 없어서 비싼 거다. 쓸모를 초월하는 거다. 건축은 쓸모가 있다. 결국 예술이 될 수 없는 거다.
찬: 건축에서 쓰는 소재 대부분은 건축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다른 산업에서 넘어온 거다. 알루미늄이나 컨테이너 조립식 주택 같은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부유물들을 재활용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결과다. 건축이 자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긴 어렵다. 요즘 등장한 미디어 파사드(Media Façade)도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에서 끌어온 방식인데 다른 장르에서 10년 정도 활용된 방식이 건축적으로 전용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단열 개념도 그랬고. 어쩌면 배와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그런 인더스트리의 사이클을 잘 알았다고 본다. 이런 사이클을 이해해야 장기적인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다. 트렌드는 영속적이지 않지만 트렌드의 흐름은 긴 방향을 알려준다.
본:실내 건축 같은 경우 차용이 더욱 쉽다. 티타늄 강판을 건축소재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행기나 안경에 먼저 쓰이고 건축으로 왔다. 건축은 보수적이라 안전하게 검증된 것들만 채택한다.
건축가에 대한 로망을 말하는 여자들을 종종 봤다.
승: 난 잘 모르겠는데. 혹시 내게 호감을 보인 여자들이 단지 직업 때문에?(웃음)
찬: 우리 집사람이 내가 <엘르>에서 토크한다니까, 자기를 하라더라. 피부에 와닿는 말 다해준다고.(웃음) 공대생들 가방에서는 공학용 계산기나 공학 관련 책이 나오는데 건축공학과는 스케치북도 나오고 철학책도 나온다. 로우테크와 하이테크가 결합된 느낌이라 인간적이다. 치명적인 단점은 고집이 세다. 아마 건축가의 DNA가 그런 것 같다. 그 정도 고집도 없으면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가기 힘들다. 직업인으로 봤을 때는 집중도도 높고 낭만이 있어서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생활인으로 봤을 때는 나이 들면서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고생 밖에 없다.(웃음) 고집이 센 반면 어느 순간 탁 놔버리는 경우도 있다.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 데리고 살기에는 살얼음 같이 불안한 느낌이 있을 거다. 게을러서 옷도 맨날 까만 색만 입고.
본:그런데 또 말은 그럴싸하게 한다. 원래 무채색은 모든 색에 코디가 가능하다고, 모든 색을 함유한 색이라고(웃음).
남자의 눈은 충혈됐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대출금을 전화로 확인하는 중이다. 발 밑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자살을 계획 중이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뛰어내린다.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이, 남자도 사라진다. 넓은 수면 위로 점 같은 파문이 인다. <김씨표류기>는 한 남자를 옥죈 절망적 피로감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남자가 예감한 생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된다. 남자의 자살은 실패했다. <김씨표류기>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한강 한복판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남자 김씨(정재영)와 그를 지켜보게 된 여자 김씨(정려원)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김씨표류기’다.
사실 한강의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라는 설정은 사실 어딘가 무색한 지점이 있다.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한강의 밤섬에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리 무인도라지만 버젓이 섬 위를 활보하고 불까지 피우는 그 생활이 어느 누구에게 방해 받지 않은 채 몇 개월 간 유지될 수 있다는 설정엔 모종의 설득력이 필요해 보인다. 단지 그 상황의 리얼리티보다도 그 상황 자체를 합당하게 인식할만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강에서 표류 중인 남자라는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활용하기 전에 그 참신함을 온전히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합리적 설득이 선행돼야 한다.
<김씨표류기>는 심플한 아이디어를 상징적 컴플렉스로 치환한다. 도시 한복판에 고립된 남자, 김씨는 이미 사회로부터 유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정지된 카드로 채워진 지갑, 대출상환을 독촉하는 전화, 일방적인 해고 통보와 희박한 취업가능성, 무능력을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애인까지, 김씨의 삶 자체가 죽음을 결심할만한 계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밤섬에 떠밀려와 죽음에 실패한 김씨는 말한다.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자신을 몰락시킨 도시의 한가운데로 도피해 혼자만의 자급자족적 삶을 꾸려나간다. 하이레벨의 개그나 다름없던 아이디어에 현실적 생기가 돈다. 게다가 그 남자의 고립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사회적 무관심과 도시의 무심함이 읽힌다. 남자가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보다도 남자가 섬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와 그 남자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정서가 부각된다. 이는 아이디어에 설득력을 마련하는 날개나 다름없다.
남자 김씨의 밤섬 표류기가 자리를 잡을 때 즈음, 여자 김씨(정려원)가 등장한다. 여자 김씨는 흔히 말하는 히끼꼬모리에 가깝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방과 폐쇄적인 일상은 그녀를 규정하기 쉽게 만든다. ‘몇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웹 안에서 ‘회원가입’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아바타처럼 살아가는 그녀는 ‘하루를 열심히 산 것 같은 착각’을 위해 만보기 운동에 열중하기도 하며 세상과 자신을 단절해주는 방안에서 규칙적으로 부팅되고 로딩되듯 일상을 반복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창문을 여는 건 일년 중 단 두 번,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DSLR 망원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하고 그의 표류기를 꾸준히 관찰해나가다 결국 그 삶에 접촉을 시도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영화의 중추는 단연 아이디어에 있다. 아이디어의 기반은 고립과 진화다. 도시 한복판에서 원시적 자급자족의 삶을 연명하기 시작하는 김씨는 수렵과 채취, 사냥을 거듭하다 종래엔 농경의 단계로 삶을 발전시켜 나간다. 밤섬은 마치 인류의 진화를 대변하는 소우주와 같다. 물론 이 과정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진지함보다도 대사와 행위를 통한 유머다. “어류보단 조류가 맛있다”며 “진화는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해석을 펼쳐내는 대사와 나레이션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좌하는 효과적 유머가 된다. 밤섬을 무대로 상대배우 없이 혼자 극을 끌어가는 정재영의 연기도 탁월하다. 마치 일인극 무대를 이끌어가듯 독백에 가까운 대사를 홀로 주고 받는 정재영의 연기는 설정의 한계를 연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실험적 상상력에 보편적인 설득력을 입히는 건 세심한 스토리와 리드미컬한 연출력이다.
가장 강력한 장기는 소품활용능력이다. 작고 큰 소품들이 더러 등장하는 <김씨표류기>는 귀여운 이미지를 통한 간결한 방식으로 의미로 전달한다. 특히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자장면은 <김씨표류기>를 위한 핵심적 소품이나 다름없다. 우연히 발견한 ‘짜파게티’수프를 통해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김씨는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는’욕망을 통해 삶을 진화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배달된 자장면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짜루’만들어낸 자장면을 먹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진솔한 감동을 일궈나간다. 자장면을 거부한 김씨가 ‘자장면이 희망’이라는 결의를 전할 때, 소유가 아닌 성취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결의라는 숭고함이 함께 전해진다. 소유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지다 빚더미에 오르는 도시에서 몰락한 김씨가 소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자장면은 소품의 기능성을 넘어 의미를 얻는다. 일상적인 소품들이 이색적으로 활용되는 형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지만 효과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생명력이 더해진다. 다양한 소품들은 의미를 발생시키고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두 개의 공간, 밤섬과 방은 고립과 폐쇄라는 심리를 통해 도시의 각박한 정서 그 자체를 대변한다. 전자가 작은 아이디어를 통해 발전된 무대라면 후자는 그 아이디어를 보충하기 위한 인위적 수단처럼 보인다. 남자 김씨의 밤섬과 여자 김씨의 방은 대비적이지만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건 아니다. 밤섬이 하나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과 달리 방은 인테리어처럼 배치된 느낌을 준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설득력은 다소 연약해 보인다. 그만큼 두 공간의 정서를 연결하는 캐릭터의 설득적 가능성 역시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두 공간은 고립을 결심한 이의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처지가 다르지만 정서적으로 연관된 두 사람의 로맨스가 성립되는 과정에 심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후자보단 전자의 공간에 흥미를 유발할 여건이 많다. 후자는 로맨스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위적 배치의 기능성이 강한 덕분이다.
<김씨표류기>는 결국 남자의 기구한 표류기로부터 기이한 방식의 멜로에 선착하는 영화다. 거짓의 자아를 내세운 웹페이지를 헤매며 지저분한 방에 자신을 가둔 히끼꼬모리 여자는 우연히 관찰한 ‘수줍음이 많으며, 더러운 걸 좋아하고, 모험을 즐기는 변태’에게 짧은 영어로 교신을 시도하며 고립의 보호벽을 차츰 무너뜨려나간다. 마찬가지로 섬에서의 고립을 받아들이고 지저분한 표류에 적응한 남자는 자신에게 접속을 시도하는 여자의 정체를 의식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김씨표류기>는 도시의 물질주의 정서 속에서 고립된 남자와 개인주의 정서 속으로 침전한 여자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역설한다. 그 희망은 극복의 대단원적 메시지가 아닌 단순한 마주침으로 얻어진다. 어떤 희망적 결과를 말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그 만남은 어떤 희망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다 때때로 뭉클해지고 결정적으로 벅차 오른다. 더럽게 웃기다가도 더럽게 슬퍼진다. 기교와 재치로 일궈낸 이야기는 소박한 감동을 수확한다. 그리고 이해준 감독 역시 <김씨표류기>를 통해 성공적인 독립이란 선명한 의미를 얻었다.
당초 예정됐던 8시가 조금 넘어서 오프닝 게스트인 태양의 공연이 시작됐다. ‘기도’와 ‘나만 바라봐’를 불렀는데 무대 연출에 어느 정도 능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곡의 절반이상을 립싱크로 잡아먹는 라이브는 그다지 매력이 없었다. 물론 여성 팬들은 엄청난 소리를 질렀지만. 라이브 연주가 아닌 MR이라 음향도 썩 좋지 않았다. 뭐 그저 오프닝 게스트일 뿐이었다. 흥을 돋우기엔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저 1집 솔로 가수일 뿐이다. 물론 유명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에 어폐가 있을 듯. 이것이 불만스러운 문장으로 보인다면 그저 오해요. 허허.
태양의 공연이 끝나고 30분에 시작될 예정이던 알리샤 키스의 공연은 역시나 지체됐다. 내한 공연은 언제나 30분 정도 늦게 시작하는 게 관례라는 걸 이미 숙지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물론 실내는 살짝 더웠고, 스탠딩 좌석은 살짝 술렁였다. 8시 45분 즈음 스태프로 보이는 외국인 2명이 무대에 나와서 관객에게 파도타기를 유도했지만 그다지 큰 호응은 없었다.
9시 즈음, 드디어 공연이 시작됐다. 자리를 잡은 세션들의 연주가 시작됐고 관객석은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알리샤 키스의 등장! 엄청난 환호와 함께 메인 스테이지가 시작됐다. 전체적으로 음향에 대한 큰 결함은 없었다. 잠실실내체육관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괜찮은 사운드를 뽑아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알리샤 키스의 보컬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게다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그녀를 본다는 것 자체에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뭐 별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Intro와 중간 Interlude를 제외한 총 14곡의 셋리스트, 그리고 2곡의 앵콜은 1시간 30여분을 꽉 채웠다. 셋리스트는 올해 발표한 세 번째 정식앨범 ‘As I am’에서 가장 많은 7곡이 선곡됐고, 두 번째 앨범인 ‘The diary of Alicia Keys’에서 5곡, 데뷔앨범인 ‘Songs in a minor’에서 3곡, 그리고 Unplugged앨범에 수록됐던 Unbreakable과 어셔(Usher)의 앨범에 수록된 듀엣곡 My boo로 채워졌다. 확실한 건, 스튜디오 앨범보다 라이브에서의 보컬이 더욱 폭발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 소울풀(soulful)한 보컬링이란 막연한 단어의 의미가 체감됐다. 관객들의 호응도에 따른 무대의 리액션도 상당히 열성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반적으로 크게 흠잡을 구석이 없는 공연이었다. 국내 공연장의 열악함을 염두에 둔다면 현지에서 공수한 장비와 세션의 능력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평가할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리샤 키스의 실력과 무대매너는 가히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기에 탁월했다라 말할 수 밖에.
공연의 말미에 다다를수록 열기가 뜨거웠다. 셋리스트가 진행될수록 공연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지는 인상이었다. 특히 스탠딩석에서 볼 수 있었다는 건 꽤나 큰 수확이다. 상당히 대규모의 스탠딩석이 확보된 것이 아님에도 나름 무대와 가까운 곳에서 치이지 않고 여유 있게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그것도 알리샤 키스의 공연을 말이다! 특히나 공연의 말미에 다다라서 두 번에 걸친 앵콜은 작위적(?)인 의도를 통해 관객의 열기를 끌어냈다. 가히 탁월한 무대매너라 할 수 있다. 클라이막스를 만들어내는 능력도 중요한 무대매너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No one과 If I ain’t got you로 이어진 두 번의 앵콜은 정말 엄청난 희열을 부여했다. 물론 무엇보다도 곡이 적절했다. 전체적인 셋리스트부터 세션의 수준, 보컬의 상태까지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아무래도 한가지 지적당해야 할 부분은 알리샤 키스의 공연과 무관하게 티켓의 가격이다. 듣보잡 공연 기획사가 비욘세로 반짝하더니 갑자기 돈독이 올랐는지 터무니 없는 가격을 책정했다. 3층 사이드의 A석 가격이 십만 원대라는 게 말이 되나? 잠실실내체육관에 한번이라도 와서 공연을 본 관객이라면 아무리 그 누가 온다 한들, 정신 줄을 놓지 않고서 그 자리에 십만 원의 거금을 소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공연 당일, 인터파크에서 남은 좌석을 반값에 급매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결국 그럼 초반에 예매한 관객은 뭐가 되겠는가? 이런 식으론 악순환만 도모한다. 결국 제값을 받는 공연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근래 들어 대형뮤지션들의 내한이 이어지는 분위기 속에서 이런 이상한 외부적 잡음이 언젠가 발목을 잡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국내에 내한하는 톱뮤지션들의 공연 티켓가는 한번쯤 심각하게 조정 당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뮤지션들은 죄가 없다. 터무니없는 가격 책정에 열 올리는 기획사들에 뇌구조를 파헤쳐야 할 것이다. 특히 입장하는 부근에 널린 초대권 암표상들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딴 식으로 초대권 남발해서 헐값에 자리를 채울바에야 차라리 티켓가를 2~3만원 낮춰서 좀 더 실속을 챙기는 것도 그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관객도, 기획사도, 서로 윈-윈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