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수능이란다. 이제 수능이 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어김없이 추워지는 날씨는 망각을 일깨운다. 하아, 귀신 같은 날씨. 어쨌든 내일 이후로 누군가는 인생의 2막을 계획할 것이고, 누군가는 끝없는 절망을 체감하겠지. 단 하루로 삶이 판명되는 것 같은 억울함을 느낀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바로 이 나라의 병신 같지만 멋있는 입시교육 시스템이니까. 하지만 걱정은 마라. 수능 시험 못 봤던 내 친구는 애도 쑥쑥 낳고 잘 살고 있고, 대학도 나오지 못한 나도 밥벌이는 하고 산다. 물론 판검사, 의사, 적어도 삼성맨 정도는 꿈꾸는 이라면 좀 신경 쓰길. 그리고 시험 좀 못 봤다고 한강대교에서 인생의 끝을 경험해볼 생각은 말길. 어쨌든 좋은 결과를 바랍니다,수험생 여러분. 좋은 대학을 가던, 3류 대학을 가던, 재수를 하던, 삼수를 하던, 어떤 식으로든 인생은 돌아가요. 그러니까 내일 하루 잘 보내시길. 그리고 저녁엔 맘껏 놀아요. 엄마 몰래 술 먹어도 상관 없지만 길 바닥에서 자다가 얼어 죽지는 마시고. 고리타분한 꼰대처럼 말하자면 수능이라도 볼 수 있는 그 때가 그리울 날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즐기시길. 그 시절을. 그 젊음을.
수능시험날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아, 아직도 수능을 보는구나. 너무나 까마득해 나완 먼 세상이야기처럼 들렸다. 하긴 벌써 2008년이야.
그 날 아침엔 마음이 무거웠다. 몸이 뒤뚱거렸다.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지금 걷는 게 걷는 게 아니란 것처럼 수험장으로 향했다. 그 하루가 지나면 인생이 바뀔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땐 그랬지. 시험지를 받아 든 손은 바빴고, 한번 읽어 내린 문제가 잘 파악되지 않을 땐 낭떠러지 끝에 밀린 듯 절박해졌다. 그렇게 모든 시험을 끝내고 캄캄해진 밖으로 나설 때 즈음 마음이 가벼워졌다. 후련한 건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어떤 가벼움이 감지됐다. 하얗게 불태웠어. 그저 그 삭막한 공간에서 달아나는 것만으로도 쇼생크 탈출이었지. 그땐 알았을까. 나의 10대가 그딴 식으로 꺼져가고 있었다는 것을.
수능만 보면 세상 끝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렇듯 대충 난 이렇게 살 거야, 라고 생각하는 시절이 내게도 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나 한참 몰라서 모든 것이 막연했던 시절, 순진무구하다 못해 무지해서 창피함조차 알 수 없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교복을 입고 교과서를 펴 들던 그때 세상은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대학에 가서 누구나 그렇듯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그렇게 어른으로 살아가는 거라 생각했다. 친구도 많았던 시절이라 친구 없는 어른들이 이상했다. 축구도, 농구도 하지 않고 그냥 술만 마시고 사는 어른들이 기이했다.
난 꿈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잘 모르겠다. 의대에 가리라 열공하던 짝 옆에서 난 교과서를 보고 무엇을 꿈꿨나 모르겠다. 인생은 방정식처럼 간단할 거라 생각했을까. 2차든, 3차든, 4차든, 그저 해만 구해서 답만 적어 넣으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거라 생각했을까. 물론 난 딱히 수학을 좋아하진 않았다. 나름 못하는 편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때때로 어려운 문제 하나를 오기처럼 부여잡고 끙끙대다 답을 알아내곤 홀로 벅차 오르긴 했어도 그래서 수학이 좋아요, 라는 변태 같은 답변을 하고 싶진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춤도 추고, 담배도 피웠을까. 그 와중에 어쩌다 3년 동안 임원을 해먹었나. 정치에 자질이 있었나. 그 때 내 친구들은 날 보고 날라리 반장이라 불렀는데, 이 정도면 나도 여의도 입성할만한 자질이 있나요. 좀 더 등쳐먹은 경력이 필요할까요. 아, 싫음 말고. 뽑지 마! 식빵.
난 언제부터 글을 쓰고 싶었을까. 기억나지 않아. 그냥 남들이 넌 좀 글을 잘 쓰는 것 같아, 라는 말 따위에 그런가 싶다가도 글을 써야지, 라고 결심했던 적이 있기나 있었나. 역시나 기억나지 않아. 지금 내가 글쟁이가 된 걸 보면 인생이란 게 정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수능 날 뚫어지게 바라보던 시험지에 인생의 정답은 없었다. 적어도 내겐 말이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내게 수능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건 그냥 통과의례였을 뿐이야. 난 생각한다. 고로 수능은 중요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대학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염치는 없다. 좋은 대학을 나올수록 당신이 이 사회에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는 확률은 조금 높아지는 거라고,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정직할지 모를 일이다. 요즘 세상 꼴을 보면 더더욱. 고지를 점령해야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거니까.
다만 그게 끝이 아니야. 인생 최대의 고비에서 벗어난 것처럼 후련함을 느낀다면 곧 알게 될 거다. 인생 최대의 어려움에 직면한 것처럼 좌절감을 느낀다면 곧 알게 될 거다. 그건 그냥 지나간 어느 하루일 뿐이라고. 초등학교 6년을 지나, 중학교 3년을 거쳐, 고등학교 3년을 다 보낼 때 즈음, 대부분의 아이들은 수능을 치르고 그렇게 한 계절을 넘어선다.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 그 시절 무엇을 보고 배웠든 모두가 다 지나간 옛일이다. 언젠가 그때 좀 공부 좀 열심히 해놓을 걸 그랬지, 라며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것도 그땐 이미 그리 중요하지 않겠지. 어차피 그 게임은 업로드도 안돼. 리셋 따윈 꿈도 꾸지마.
그때 이미 당신은 연애도 해보고, 섹스도 해보고, 돈도 벌어보고, 어쩌면 결혼해서 애도 있을지 모를 일이지.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이야. 그러니 당분간 그 돌이킬 수 없는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길. 그대의 10대가 가고 있음을 그대들은 모를 일이겠지만. 하긴 나도 그랬어. 한심하지.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었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과연 있을까. 그래서 하는 말이야. 원래 지 앞가림 못하는 놈이 참견은 많은 법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