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앞두고 산통에 시달리는 산모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한다. 휠체어를 탄 채 분만실로 향하는 산모는 당장 맞이한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에 설렘이 가득하다. 하지만 곧 잉태의 축복은 사산의 저주로 돌변한다. 갑작스런 출혈과 함께 유산을 알리던 의사는 곧이어 태아의 주검을 꺼내기 위한 절제술에 돌입한다. 비명을 지르는 아내 앞으로 뒤늦게 분만실에 들어온 탓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남편이 캠코더를 들이민다. 순간 의사가 말한다. “아이가 살아있어요.”온 몸에 피에 젖은 아이가 아내의 얼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한번 날카로운 비명으로 분만실을 뒤흔들던 아내는 비로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난다.
아내의 악몽에서 시작되는 <오펀: 천사의 비밀>(이하, <오펀>)은 진짜 악몽 같은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 한 가정의 비극을 담보로 한 스릴러다. 세 번째 아이를 유산한 부부가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영민하고 착한 여자아이를 입양하지만 딸이 된 입양 소녀는 어느 순간부터 괴물 같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점차 의심에 빠져드는 아내, 이를 부인하는 남편은 지난 날의 비화를 꺼내 들고 갈등에 빠져들며 아이가 계획한 파국으로 발을 담근다. 친절한 이방인의 유입이 갈등을 부르고 감춰진 속내가 파국을 모색하는 과정은 어느 스릴러 영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주요한 설정 가운데 하나란 점에서 <오펀>이 활용하는 서스펜스의 장치들은 딱히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악마적 영악함을 지닌 아동 캐릭터로부터 강력하게 발산되는 서스펜스는 <오멘>과 같은 오컬트 무비의 기시감을 부른다. 동시에 입양아가 평화로운 가정을 뒤흔든다는 설정은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 지키기 스릴러에서 활용하던 전술과 유사한 것이다. <오펀>은 ‘낯선 자의 친절을 경계하라’는 스릴러적 규칙에 입각한 캐릭터 장르물이다. <오펀>이 새 술을 담은 부대는 아니란 의미다. 하지만 <오펀>은 뛰어난 응용력을 선보이는 호러이자 스릴러다. 사악한 본능을 고스란히 선보이는 아동 캐릭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매력을 선사하며 이는 <오펀>이 곳곳에 매복해둔 장치들과 더불어 장르적 착시를 이룬다. 순진무구한 아동 캐릭터를 악의 근본처럼 묘사하는 동시에 호러적인 연출방식을 더하며 전략적으로 초자연적 예감을 부른다.
캐릭터의 완성도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만큼 어린 배우의 영민한 연기가 관건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펀>에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는 높게 평가 받을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노골적인 본심을 드러내는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할 때마다 긴장감이 새어 나오고 이는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축적되며 영화 안에서 지속적인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또한 <오펀>은 순진무구한 아동 캐릭터를 절대악의 대상에 국한시키지 않고 아동 특유의 유약한 심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궁극적인 장르적 목적성에 접근한다. 이기적인 아동의 심리를 전시함으로써 절대적인 신비에 기대지 않고 이성적인 병리학으로서 범죄적 논리를 설득시킨다.
말미에 다다라 밝혀지는 진실은 사실 <오펀>이 야기시킨 모든 서사적 이해를 온전히 전복시키는 반전 그 자체다. 아동 캐릭터라는 정보를 통해 이해되던 심리적 구조를 일거에 전복시키는 동시에 스토리의 흐름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반전으로서의 쾌감을 부른다. 물론 추격과 난투로 점철되는 후반부의 단순화된 흐름은 심리적 긴장감을 유지하던 그 이전까지의 흐름과 배반적인 감상을 부르지만 그 상황을 통한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휘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서스펜스를 구가하고 있다고 인정할만하다. 정서적 긴장감의 양태가 달라질 뿐, 흐름의 양상은 훼손되지 않으며 서스펜스의 절대량은 보존되거나 더욱 상승한다.
물론 아동 캐릭터를, 그것도 입양아를 악의 이미지로 치환하고 공포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일부 특수한 계층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불순함이 감지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장르적 완성도를 염두에 두자면 감안할 수 있는 성공적 투자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정도의 의도적인 필요악쯤은 충분히 감안하고 장르적 성취를 즐기는 것이 타당하다. 그만큼 <오펀>은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르는 스릴러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면 시리즈가 보장된다. 특히 캐릭터의 매력이 중시되는 애니메이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드림웍스가 자사의 프랜차이즈 캐릭터들을 우려먹으며 시리즈를 거듭해나갈 수 있는 것도 그런 덕분이다. 하지만 최근 <슈렉3>, <마다가스카2>와 같은 기대 이하의 속편을 공개하며 도태되는 드림웍스의 작품들이 증명하듯 단지 잘 나가는 캐릭터의 인기 하나만으로 시리즈를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은 망상에 가깝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캐릭터의 매력도 함께 닳고 닳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이스 에이지3: 공룡시대>(이하, <아이스 에이지3>)는 의미 있는 속편이다. 의미 있는 애니메이션을 창작해내는 픽사의 정반대의 영역에서 나름의 의미를 추구했다 해도 좋을 만한 <아이스 에이지3>는 순수 엔터테인먼트의 야심으로 점철된 코믹 어드벤처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두 편의 전작이 보유했던 캐릭터들의 매력이 고스란히 보존되는 동시에 새로운 캐릭터를 수혈하며 새로운 스토리를 보충한다. 물론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이스 에이지3>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러 가는 이들의 모험담에서 가족주의적 서사는 지극히 뻔한 사연에 불과하다.
그 뻔한 바탕에 특별한 묘미를 새겨 넣는 건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유머와 시각을 공략하는 이미지다. 특히 디지털 3D로 제작된 이번 작품은 입체적 영상의 묘미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노골적인 이미지가 곳곳을 메우고 있다. 또한 빙하기 동물 캐릭터들의 입심 좋은 유머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은 쏠쏠한 오락적 묘미 그 자체다. 특히 새로운 시리즈에 걸맞게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 벅(사이몬 페그)은 기존의 캐릭터와 함께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새로운 사연에 어울릴만한 필연적 매력을 발생시킨다.
순수한 오락물이라는 측면의 의미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가치가 없다고 평할 수 있는 <아이스 에이지3>는 말 그대로 자신의 의도 자체를 명확하게 관철시키는 작품이다. 세 편의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가운데서도 좀처럼 도태되지 않는 오락적 감각은 분명 이 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매력이자 동시에 이 시리즈의 존재 이유를 위한 설득적 가치에 가깝다. 전작들로부터 물려받은 순수 엔터테인먼트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새롭게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최소한 자신의 장기가 녹아 내리지 않게 만드는 동시에 새로운 매력으로 더욱 두터워진 시리즈란 점에서 미덕이 있다.
선혈이 선명한, 상흔이 뚜렷한, 공포에 질린 소녀가 공장지대에서 발견된다. 신체 곳곳에 학대의 흔적이 가득한 소녀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는다. 소녀가 발견된 공장지대 건물 내부엔 가학적 증거들이 즐비하다. 의문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과연 그 안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큐적 질감의 영상 너머로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사연이 펼쳐진다. 본격적인 사연은 다시 한번 충격과 공포를 동반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의문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의문을 증폭시키고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물음표의 미로를 만들어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에 봉쇄한다.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잔혹한 이미지가 전시되는 스크린을 응시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라는 물음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하, <마터스>)은 실로 잔혹한 영화이기 전에 강한 의문을 발생시키는 영화다.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가학적 사연을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 이후로, 역시나 근본을 알 수 없는 무참한 학살신이 시선을 장악하고 그 지점부터 충격이 고스란히 쌓여나간다. 모든 의문의 주체인 루시(밀레느 잠파노이)가 눈물을 동반한 학살을 자행하고, 정체불명의 괴인으로부터 근본을 알 수 없는 공격을 당하고 쫓기게 되는 순간까지, 관객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을 공략하는 서스펜스에 난도질 당해야 한다.
쏘고, 베고, 찌르고, 가르는 고문적 이미지가 생생하게 눈앞을 오가는 광경은 치가 떨릴 만큼 잔인한 감상을 부른다. <마터스>가 핸드헬드로 포착한 혼란의 도가니를 통해 캐릭터의 공황적 심리에 동참하고 있다고 믿게 됐다면 공포에 질린 캐릭터의 얼굴을 관찰하는 외부자의 위치를 문득 깨닫고 캐릭터가 내지른 비명과 함께 저만치 다른 편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말 것이다. 폭풍우처럼 거세게 몰아치는 서스펜스의 여정이라 할만한 중반부까지의 과정은 장르적 연출 면에서 가히 탁월하다 칭해도 좋을 만한 수준을 일관하는 동시에 극한적인 체험에 가까운 공포를 깊게 각인시킨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정체를 드러내는 극악한 세계관은 앞선 시각적 자극을 잊게 만들 정도로 참담한 심경을 안긴다. <마터스>의 본질은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탁월한 장르적 연출과 극한의 가학적 이미지를 동원한 중반부까지의 과정은 사실상 후반부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수련과 같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편적인 이미지즘의 총합을 통해 전가되는 서스펜스의 즉물적 자극을 넘어서 좀처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만드는 공황적 충격이 엄습한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의문에서 시작해 감정을 후벼 파는 서스펜스가 거칠게 휘몰아치고 나면 후두부를 강타하듯 충격적인 세계관이 머리를 들고, 밑도 끝도 없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마터스>는 불순하게 여겨도 무방할 정도로 극악한 영화다. 의문을 품게 만드는 극단적인 참상이 거칠게 전시되고 나서야 베일을 벗는 끔찍한 세계관의 정체는 결과적으로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적 빌미를 전혀 제공하지 않으면서 제 스스로 물음표를 파기한다. 그것은 선의의 여운이라기 보단 악의적 도피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대체 뭘 본거냐. 하지만 끝난 영화는 말이 없다. 참혹한 기분과 어지러운 심정이 모든 감정이 휘발되듯 창백해진 심리 안으로 어지럽게 맴돈다.
끝없는 의문 사이로 감탄과 탄식이 명확히 동반되는 <마터스>는 어떤 의미로든 분명 놀라운 영화다. 장르적인 방식 안에서도 뛰어난 연출적 자질을 선보이고,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서사의 저력이 대단하다. 동시에 그 끔찍한 이미지를 전시하는 방식 역시 관습을 잘 따르면서도 창의적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깊게 파고 드는 참담함 너머로 내려앉은 의문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게 좀 마음에 걸린다. 공포를 넘어 극한의 불순함을 선사한다. 그 불순함을 좀처럼 잊을 길이 없다. 그래서 더더욱 끔찍하다.
사람 잡는 식인멧돼지를 쫓는 사람들의 분투. <차우>는 명확히 답이 나오는 영화(처럼 보인)다. 괴수도 나오고, 살육신도 등장하고, 추격도 펼쳐지고, 사투가 벌어진다. 누구라도 예상하기 좋은 형태의 장르적 자질을 품고 있는, 괴수영화에서 재난영화를 포괄할만한 이미지가 선연해지기 쉬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물론 명확한 예감처럼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내달리는 추격전과 액션신은 등장한다. 하지만 8할이 코미디로 채워진, 그것도 평범한 방식의 코미디로 이해되기 쉽지 않을 취향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에 이끌려 상영관으로 향한 관객들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덫에 걸렸다는 평을 얻기 좋은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시골로 전향된 김순경(엄태웅)을 비롯해 교수 임용을 위해 멧돼지에 관한 거창한 논문을 기획하는 변수련(정유미), 손녀의 복수를 위해 식인멧돼지 사냥에 나서는 천일만(장항선), 최고의 포수로 가오가 대단한 백만배(윤제문),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신형사(박혁권)까지, <차우>는 각자 캐릭터의 축을 이루는 다섯 인물을 통해 서사의 밑그림을 그린다. 한강괴물을 연상시키기 좋은 거대식인멧돼지와 함께 그 뒤를 쫓는 캐릭터 머릿수까지 <괴물>의 가족과 엇비슷하게 이뤄진 <차우>는 분명 <살인의 추억>과 <괴물>의 중력에 놓인 작품처럼 보인다. 괴수영화로서 <괴물>과 비교될만한 소재를 취하고 있으며 시골이라는 환경을 무대로 둔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의 활용에서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킬만한 자질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는 유사한 소재와 환경적 구조를 선점한 두 작품의 후발주자로서 비교 대상의 운명에 놓였을 뿐, 봉준호의 두 작품이 <차우>를 포괄하는 영역으로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그 기시감이 명백할 따름이다.
소박한 표정 너머로 흉악한 인상이 감지되는 시골성의 전복적 기운과 거대 괴물의 출몰과 함께 그려지는 아수라장의 이미지까지, 한국의 토착성을 부조리하게 수식하는 사건들이 열악한 지방성의 감춰진 욕망과 함께 뒤엉켜 구른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의 소굴이자 기형적인 욕망으로 비뚤어진 인간들의 늪처럼 쇠락한 도시인이 모여들고 상승의 욕구로 팽배한 지방인들이 자리한 삼매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의 풍자를 위해 가공된 부조리의 공간이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과 포악한 기질을 응축한 다큐적 질감의 오프닝 시퀀스는 <차우>가 본질적으로 휴머니즘과 반대적 목적성에 사로잡혀 있음을 노골적으로 증명한다. <차우>는 인간의 일그러진 욕망이 낳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이자 되레 그 괴물을 포획하는 인간의 잔혹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안티-휴머니즘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예측불허의 슬랩스틱부터 엉뚱한 경로에서 끼어드는 캐릭터들의 난동극까지, B급 취향에 근접한 마이너 코드의 코미디를 구사하는 <차우>는 식인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영화의 기대감을 철저하게 배반하는 영화다. 순수제작비 60억 대의 메이저 상업영화로서는 무모하고도 과감한 유머가 도처에 널려있다. 이는 <차우>를 불순하게 수식하는 동시에 특수하게 치장하는 배반적 장기로서 활용된다. 종종 위태로운 이음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플롯의 공백과 무뚝뚝하고 성긴 액션신의 연출이 매끄럽지 못한 장르적 자질을 인식하게 만들고, 연출력의 공백을 감지하게 만들지만 예측불허의 지점에서 난입하듯 발생하는 유머가 상황을 불식시킨다. 엉뚱하지만 때때로 기발하며 종종 효과적이다.
괴수영화로서 영화적 기대감을 품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해하자면 <차우>는 분명 배반적인 결과물에 가깝다. 멧돼지와의 추격신과 액션신이 후반부에 집중된 건 CG예산과 관련된 집중력 문제에 있겠지만 ‘리얼 괴수 어드벤처’라는 카피의 기대감을 양적으로 충족시키지 못하는 건 분명 불만을 얻을만한 지점이다. 그럼에도 분명 <차우>는 쏠쏠한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괴수물로서의 위용과 B급 유희가 맞물리는 조합은 컬트적인 호응에 다다를만한 근사값을 이룬다. 대자본을 활용한 메이저 상업영화로서의 중압감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마이너 코드의 결과물은 무모함과 과감함의 너비를 확보한다. 위태롭지만 흥미롭다. 대중적인 반응이 심히 궁금해질 정도로.
관능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노출뿐이라 생각한다면 빈곤한 상상력을 탓할 필요가 있다. 직관적인 이미지는 자극의 잠재적 성과를 되레 반감시킨다. 선명한 이미지의 관찰보다도 불투명한 실루엣이 발생시키는 상상력이 감상적 욕구를 자극하곤 한다. 이미지가 발생시키는 자극의 충만보다도 잠재적인 욕구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매혹적이다. 여인의 나신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관능적인 티저포스터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감도>는 분명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에로티시즘의 상상을 예상케 한다.
변혁의 <his concern>, 허진호의 <나 여기 있어요>, 유영식의 <33번째 남자>, 민규동의 <시작과 끝>, 오기환의 <순간을 믿어요>까지, 에로스라는 주제에 차례로 내걸린 다섯 개의 시선을 내건 옴니버스 <오감도>는 분명 적확한 기대감을 부르는 기획영화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한 여인에게 이끌린 남자, 섹스리스의 일상 속에서 비극적 예감을 참아내는 부부, 서투른 신인배우와 관록 있는 중견배우의 충돌과 이를 조율하는 명감독의 기이한 삼각관계, 남편의 부음과 외도 사실을 함께 알아버린 아내의 미스터리한 동거, 발랄한 10대들의 속을 알 수 없는 파트너 체인지. 다섯 편의 작품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장르적 탈을 쓰고 에로스의 수위를 오르고 내린다.
로맨틱코미디, 멜로, B급호러, 미스터리, 하이틴로맨스, 각기 다른 장르의 탈을 쓴 <오감도>는 저마다 야심적인 방식으로 개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오감도>는 작품을 거쳐나갈수록 방식의 차이에 따른 자극적 성취를 선보이기보다 권태를 축적해나간다. 옴니버스라는 형식으로 내걸린 다섯 편의 작품은 분명 에로스라는 관능을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공유하고 있으나 다섯 편의 작품은 어느 하나도 이를 관통하지 못한다. 차분한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캐릭터의 심리적 흐름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에피타이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저마다 다양한 장르적 욕망을 선보일 뿐, 결과적으로 권태를 쌓아나간다. 저마다 좀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각인시키지 못하는 결과물이 연속적으로 전시된다.
옴니버스는 다양한 시선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발견한다는 귀납적 묘미와 하나의 주제로 다채로운 해석을 만끽할 수 있다는 연역적 묘미가 가능할 때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해진다. <오감도>는 옴니버스의 다양성을 악재로 몰고 나가는 두서 없는 기획이다.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지 못하는 동시에 저마다 하나같이 피곤한 감상적 결과를 부른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기대감은 파격이란 단어를 낯설게 만드는 이미지와 창의적 해석과 무관하게 장르적 과욕에 사로잡힌 스토리텔링의 거듭된 난국 속에서 빠른 속도로 낡아간다. 도전적이라기 보단 과욕적이며 창의적이라기 보단 자만에 가깝다. 짧은 단편들이 마치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암담해진다. <오감도>는 에로티시즘이 증발된 에로스의 만찬이다.차린 건 많아 보여도 좀처럼 잡히는 게 없다. 그저 티끌처럼 쌓여나가는 권태가 끝내 태산처럼 쌓여 식욕을 감퇴시킬 따름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이 길을 선택하는 순간, 너희는 많은 것을 잃게 돼.”각오와 경고가 한 몸에 담긴 언어가 필사적인 절박함을 드러낸다. 영광보단 고난을 명확히 관통하는 스승의 언질 앞에 제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피땀 흘린 노력의 과정이란 성공이란 방파제를 쌓지 않고서야 쉽게 허물어질 모래성 같은 영예나 다름없다. <킹콩을 들다>는 역도선수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과 금메달에 도전했다 동메달에 머무르고 부상까지 얻은 비운의 역도선수의 삶을 사제라는 관계에 뒤엉켜 넣은 신파다.
금메달에 도전했다 실패한 동메달리스트 이지봉(이범수)은 심각한 부상과 잠재적 질병까지 진단받은 후, 역기를 놓고 은퇴한다. 그에게 동메달이란 애증의 영광이며 무관의 짐이나 다름없다. 1등을 놓친 3등은 예선탈락보다도 더욱 비참한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런 어느 날, 매일 노역을 통해 밥벌이를 하던 그에게 전직 국가대표 감독이자 옛 스승(기주봉)이 찾아와 제안을 던진다. 보성의 여자중학교에서 역도를 교육시킬 것을 권한다. 마지 못해 보성으로 내려간 이지봉은 한적하게 낚시나 하며 시간을 죽이려던 중 역도에 관심을 보이는 모종의 소녀들을 만나고 점차 그네들에게 마음을 연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제 때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영자(조안)가 눈에 밟힌다. 점차 새로운 결심이 생긴다.
<킹콩을 들다>는 스포츠 영화의 외양을 지니고 있지만 한없이 여리디 여린 신파의 마음을 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킹콩을 들다>는 단지 스포츠 도전기라는 페어플레이 정신만으로 몸통을 이룰 수 없는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다시 한번 들추는 스포츠 신파다. 가난하거나 촌스러운 시골의 고학생들이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채 구타와 욕지거리를 견디며 세워 올린 스포츠 강국의 ‘7전8기’적인 전설적 외피의 속살에 담긴 피와 땀의 잔인한 내면이 공분을 부르고 그 안에서 학대 받는 학생들의 눈물과 신음을 페이소스로 건져 올리는 공식적인 신파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처우가 열악한 대한민국의 속성을 극복한 여성들의 연대기란 점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상시키는 바도 없지 않다. 최고가 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는 현실이 금메달에 대한 집착과 영광에 대한 속박으로 드라마를 이끈다.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듯 엘리트 체육의 금메달 지상주의가 득세하는 국내 체육계의 현실은 스포츠 신파를 위한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다. 연금을 보장하는 금메달에 목숨 걸지 않고선 버틸 재간이 없는 비인기종목 스포츠 선수들의 현실은 스포츠강국 대한민국의 얄팍한 신화를 지탱하는 열악한 기자재다. 아이러니하지만 21세기가 지나도 이런 기자재가 꽤나 쓸만한 소품이 된다. 먹히는 신파를 만드는 도구가 된다. 이건 시대착오적인 영화가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영화의 현실이다. <킹콩을 들다>는 이 열악한 시대에 담긴 근본적 자질이 노골적으로 활용된 현실적 신파다. 가녀린 소녀들의 몸에 구타의 이미지를 새겨넣고 가난한 루저의 슬픔을 묘사하면서도 중간중간 소박한 웃음을 매복하는 <킹콩을 들다>는 정직하다기 보단 적확한 기획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채워 넣은 드라마의 완성도가 빼어난 건 아니지만 분노가 자각되고 슬픔이 인정되는 수순을 거칠 때 <킹콩을 들다>는 효과적인 신파의 탈을 쓰고 객석을 공략한다. 배우들의 열연도 볼만하지만 가장 큰 볼거리는 여전히 촌스러운 대한민국이다. <킹콩을 들다>는 그 촌스러운 현실의 열악함을 영화적 감정으로 치환하는, 얄팍하지만 효과적인 신파인 셈이다.
피로 맺은 계약. 자살을 약속하는 소녀들. <여고괴담5: 동반자살>(이하, <여고괴담5>)은 부제처럼 동반자살을 약속한 동급생 여고 소녀들의 의식을 비추는 가운데 시작된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가운데 촛불을 어스름하게 밝힌 엄숙한 성당에서 각자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내고 피를 떨어뜨린 계약서에 손을 얹는 의식은 비장하다. 침묵의 제의를 지배하는 건 정적으로 대변되는 의문이다. 동반자살을 도모하는 소녀들의 사연에 물음표가 새겨진다. 그리고 의문에 휩싸인 정적을 부수는 커다란 울림을 통해 괴담은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여고괴담5>는 사춘기의 트라우마를 호러의 자질로 연동시키는 기존의 시리즈와 동력은 비슷하다. ‘여고’라는 환경이 머금은 ‘괴담’이라는 소재는 어딘가 설득력 있는 시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고괴담5>는 그 설정의 유효함을 소진하는 또 한번의 기획이다. <여고괴담5>는 정서적으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여기서 발생하는 기시감은 작품의 자질까지 평가된 결과가 아니다. 모호한 형태로 침잠된 정서적 분위기를 유지하는 태도가 그렇다. 아이러니하지만 공포스럽지 않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여고괴담>이라는 시리즈가 표방한 장르적 의도는 명백하다. 그만큼 그 의도를 기준으로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다. <여고괴담5>는 무섭지 않기로 따진다면 시리즈의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다. 몇 번 정도의 깜짝쇼가 때때로 움찔하게 만드는 요량은 있어도 근본적으로 공포의 수위까지 나아간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르적 특징이 열악하다. 스테레오 타입의 사연으로 치장된 캐릭터들도 아쉬운 대목이다. 개별적인 캐릭터 각자를 두르는 인과관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개개인의 갈등엔 적당한 당위가 존재한다. 그 갈등을 유발하는 사연의 깊이가 지극히 얕다.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그리고 그 평면적인 사연이 입체적인 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두꺼운 평면의 형태로 포개져 나열되는 느낌이다. 그만큼 충돌하는 사연들로부터 파생되는 감흥이 지극히 단조로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긴장감의 결여도 이 지점에서 비롯되는 느낌이다.
어둡고 흐릿한 인상을 유지하지만 그것이 싸늘하거나 으시시한 감정을 담보하지 못한다. 물론 귀신보다도 사람이 더욱 무섭다라고 이해되는 결과는 흥미롭다. 여고생이라는 예민한 시절의 풍경을 바탕으로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엇갈리는 관계의 침몰을 지켜본다는 건 나쁘지 않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진짜 사람이 귀신보다 무섭다는 건 장르적으로 끔찍한 패착이다. 나약한 장르적 해석과 빈곤한 상상력이 동원된 스토리는 <여고괴담5>이 기본적인 자산 관리가 불성실한 작품임을 인지하게 만든다. 신예 배우들의 연기엔 일장일단이 있다. 다만 그 연기를 온전히 평가하기엔 캐릭터의 설계가 안이하다. 이는 분명 캐릭터가 배려해야 할 기본적 요구가 불충분한 탓이다. 이런 결과가 경력이 짧은 어린 배우들의 자신감을 훼손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다. 10주년 기념작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시리즈의 가장 큰 고비를 맞이하는 인상마저 든다.
짧지만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드래그 미 투 헬>을 탐색하기 좋은 밑그림이다. 강력한 저주와 지옥의 이미지가 연동되는 오컬트 소재의 강림은 <드래그 미 투 헬>의 장르적 밑그림이 낡은 시절의 이미지에서 비롯됐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마치 쌍팔년도 호러 영화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다만 여기서 쌍팔년도의 어감은 ‘촌스럽다’가 아닌 ‘고전적이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요즘 보기 드물게 강렬하고 압도적인 정통 호러 영화다.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효과음과 이미지를 동원하는 <링>과 <주온>과 같은 일본산 스몰볼 호러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게 손이 크고 담대한 정통호러다.
1949년, 멕시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40년 후로 점프컷된 영화는 미국의 한 은행에서 본격적인 서사를 다시 전진시킨다. 대출 업무를 상담하는 크리스틴(알리슨 로먼)에게 대출연장신청을 부탁하는 노파 가누시 부인(로나 가버)의 불결한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카메라는 <드래그 미 투 헬>이 전면에 내세운 공포의 근간이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잔혹한 이미지를 통해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기 보단 불결한 이미지를 통해 혐오를 자극하는 <드래그 미 투 헬>은 공포라는 감정을 두려움에 가두지 않고 우스꽝스러움으로 진전시킨다. 전형적인 B급 정서로 무장한 악취미의 이미지 속에서 공포와 유머가 절묘한 궁합을 자랑하듯 맞물려 굴러간다.
대출연장을 거절한 크리스틴에게 노파가 저주를 퍼붓는 광경은 현실적 리얼리티에 초자연적 공포가 주입되는 시작점과 같다. 노파가 크리스틴에게 내린 저주는 염소의 형상을 한 악마 라미아의 저주이며 이는 크리스틴의 일상을 점차 무시무시한 수렁으로 밀고 내려간다. 오컬트적 신비가 가미된 악마주의적 공포가 리얼리티의 풍경 안에서 고스란히 보존되는 광경은 단연 복고적이며 때때로 참신하다. 낡고 낡은 장르의 관습을 고스란히 차용하는 동시에 B급 유희의 이종교배를 통해 관습적인 리듬감에 새로운 활력을 형성한다. 신체훼손과 피칠갑의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이고 압도적인 긴장감을 전달한다.
동시에 압도적인 전율의 긴장감 사이로 순발력 있게 끼어드는 유머는 농담처럼 가볍지만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한다. 호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전형적인 B급 정서의 악취미와 연동시키는 방식은 오히려 장르적 전형성을 탈피하는 동시에 장르적 자질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효과적인 방식이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블 데드>시리즈로 대변되는 샘 레이미의 근본적 재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예감했거나 혹은 예감하지 못했거나, 어느 쪽의 입장에 놓여있다 해도 <드래그 미 투 헬>이 만들어내는 난장질의 풍경을 온전히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특히나 정치적으로 공정하며 압도적인 감상을 부르는 결말부는 오르가슴에 가까운 쾌감을 선사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공포가 극대화시킬 수 있는 쾌감의 극단적 너비를 실감하게 만드는 문제작이자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를 새삼 재확인하게 만드는 걸작이다. 21세기의 기념비적인 호러영화라 불려도 단연 손색이 없다.
밤이 되면 박물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 뼈대만 남은 공룡이건, 모형 사람이건, 크기나 재질에 관계없이 살아나거나 작동된다. 신묘한 힘을 지닌 이집트 아크라 석판의 힘 덕분이건 뭐건 간에 그렇다. 따지고 들수록 스스로에게 연민을 품어야 할 정도로 엉터리 같은 법칙이지만 그 세계가 만들어내는 소동극의 이미지는 분명 오락을 발생시킨다. 연대가 다르고, 종이 다르고, 생사가 다름에도 다들 그냥 어울려서 일으키는 소란이 장관이다. 엉터리처럼 구겨 넣은 레시피가 맛깔스런 잡탕으로 거듭난 형국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엉터리 같은 재료들을 긁어 모아 우려낸 국물이었지만 마시기 편하고 입맛에 너그러운 묘미가 있었다. 그야말로 킬링타임용 엔터테인먼트였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온전히 전작의 성공에 편승한 기획이다. 컨셉은 같다. 밤만 되면 오만 잡것들이 살아나는 박물관의 야간 소동극을 재현하는 것. 하지만 그건 딱히 장기적인 유효기간을 지닌 것이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란 간단하다. 내려갈 깊이 따윈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드니 너비를 넓힐 것. <박물관이 살아있다 2>를 다른 제목으로 대체한다면 ‘박물관이 넓어졌다’즈음 된다. 넓어진 만큼 채워 넣을 것도 많아졌다. 그만큼 더욱 두서가 없어지고 난장판의 범위는 제어가 되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다. 엉터리 같은 기획상품이 다시 한번 더 많은 엉터리를 끌어 모아서 대박을 노린다.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장점을 두루 갖춘 효과적인 영화가 됐다. 박물관이라는 실내 공간은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할만한 너비의 한계를 지님으로서 미니멀한 장르적 수용을 가능케 한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너비를 넓힌 속편이다. 넓어진 박물관은 플러스같지만 되레 마이너스다. 자신의 부실한 단점을 가리기 좋은 규모를 간과하고 오히려 곳곳에 한계를 명확하게 전시한다. 연대나 지표 따위와 무관하게 소통하는 캐릭터들은 더 이상 귀엽다기 보단 유치하다. 전작의 매력이 어디서 발생했는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다. 최소한 전작은 그 열악함을 눈감아 줄 정도의 아량을 발생시킬 정도로 적당한 매력을 구사할 만한 아담한 규모 속에서 소동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속편은 자신의 밑천을 깡그리 부수고 새집을 짓더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곳곳에 전시한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의 매력도 전혀 계승하지 못한다. 전작에서 매력을 발생시키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별 쓸모가 없다. 개체 수를 늘린 새로운 캐릭터들 역시 별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래리(벤 스틸러)의 변화를 설명할만한 단서 따위를 기대할 요량도 없지만 그의 성찰을 도모하는 진지함 자체가 지독하게 작위적이라 감동 대신 조소가 발생한다. 그나마 에이미 아담스의 귀여운 매력이 유일한 숨통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전형적인 속편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유일한 장기였던 전작의 성과가 계산된 결과가 아닌 우연한 취득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플러스 된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역시 머리가 커졌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다.
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통해 굴러간다. 박찬욱 감독이 택한 두 장의 카드는 박찬욱이라는 네임밸류 안에서 적절해 보인다. 특히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일면 타당한 느낌이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이 건장하고 본능에 충실한 남자를 만나 정욕을 깨닫고, 이는 흉악한 치정극을 성립시켜 살인의 공모에 다다르게 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던 공모자들이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던 관념과 의식들과 적나라하게 연관돼있다. 이는 온전히 개인의 취향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취향 그 자체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통제된 연출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된 표정과 격양된 몸짓을 통해 저마다 인공적인 양식에 철저히 복무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부터 거창한 미장센까지 하나 같이 기능적인 의미에 종속된 인테리어적 구실에 여념이 없다. 모든 상황이 인공적이다. 연출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때로 배우들은 본연의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노출하며 부조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상당히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가운데 아주 간혹 제 얼굴을 드러낸다. 본래 각인된 이미지가 강할수록 그 찰나는 자주 반복된다. 이는 연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영화가 얼마나 배우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인가를 드러내는 지점이라 흥미로울 따름이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한 직접적 수단이 되어 흉악하게 응용되고 때때로 빈틈을 찾아 웃음을 삽입하는 소품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뱀파이어가 <박쥐>의 날개라면 ‘테레즈 라캥’은 몸통이다. 날개와 몸통은 어떤 비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역할의 배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변주된 이미지로서 모티브의 흔적을 강렬하게 자각시키는 ‘테레즈 라캥’은 <박쥐>를 구현하기 위한 몸통 그 자체다. 특히 <박쥐>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를 확보했다고 말할만한 시퀀스의 대부분은 테레즈 라캥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때때로 시퀀스를 연결하는 매듭이 헐겁다. 구조적으로 불친절한 형태로 시퀀스가 이어짐을 지각하게 된다. 소설을 미리 접한 자는 분명 결핍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소설로부터 동떨어진 이는 의문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와 ‘테레즈 라캥’은 서로 잘 달라붙지 못하는 인상이다. 연상 자체는 기발하지만 효과적인 연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숭고한 파괴의 절정으로 치닫는 <박쥐>를 마주한 관객들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널 수 있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차이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 안에서 이뤄진 산물이라 믿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은 <박쥐>를 성스러운 복음이라 믿고 따르며 기꺼이 자신의 해석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결핍과 인공적 내음을 자각하고 지나친 과잉과 자만의 산물이라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지독한 악취미로 치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쥐>는 분명 존중할만한 취향이다. 비록 개인적인 영역 안에서 어떤 소통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명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성취 자체를 마냥 질시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적인 지지와 작품의 고유한 가치 사이의 함수를 따질만한 셈이 동원될 것이다. <박쥐>는 마치 욕탕의 수면처럼 뜨거운 작품이다. 그 표면의 뜨거움을 참아내는 관객은 누구보다 깊게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저 발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외면당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흥미로운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