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퇴직연금 상담을 해주는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와의 통화를 소일거리처럼 즐기는, 은퇴한 CIA요원이다. 그런 어느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프랭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모종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를 퇴치한 뒤, 과거 자신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함께 있을 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일명 ‘레드(RED)’라 불리는 동료들을 규합해 나간다.
<레드>는 최근 개봉됐던 <익스펜더블>과 비교하고 싶어질 만한 영화다. 사실 내용적으로 두 영화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없다. 두 영화가 비교군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건 영화 외적인 문제에 있다.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그리고 헬렌 미렌이 등장하는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레드>는 실베스터 스탤론과 이연걸, 돌프 룬드그렌, 미키 루크 등이 출연하는 <익스펜더블>의 캐스팅에서 느꼈던, 유사한 향수가 감지된다. 하지만 그 향수에는 명확한 성분의 차이가 있다. <익스펜더블>의 액션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판단된 노장 액션스타들의 분투가 연민을 자아내는 것과 달리 <레드>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노년기 배우들의 일탈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부르는 까닭이다.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레드>는 근래 개봉된 <A특공대>와 <나잇&데이>등과 같은 첩보액션물의 성분을 추출해서 적당히 흔들어 섞어놓은 듯한 유사품이기도 하다. 음모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얻게 된 스페셜리스트 팀이 서로 힘을 합쳐서 제도적인 음모를 분쇄하고 되레 상대를 위협한다는 큰 줄거리를 비롯해서 도주와 작전을 거듭하는 스파이와 우연히 연루되어 동행하게 되는 여인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상되는 영화가 많다는 건 일단 <레드>가 그만큼 새로운 전형으로서의 이력으로 이해될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DC코믹스의 동명인기만화를 원작으로 둔 <레드>는 만화적인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조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재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다이하드’한 액션스타 브루스 윌리스를 축으로 존 말코비치의 정신 나간 카리스마가 모건 프리먼이 자아내는 차분한 긴장감과 어울리고 헬렌 미렌이 기관총을 발포해대는 보기 드문 신들까지, <레드>가 발생시키는 강력한 오락적 쾌감의 팔할을 책임지는 건 바로 그 배우들의 묵직한 관록이 일탈적 행위를 자행하며 이루는 아이러니로부터 얻어지는 묘미에 있다.
액션영화로서 적절한 만족감을 부여하는 <레드>의 스토리에 장치적으로 설치된 두 갈래의 로맨스 역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재미를 부여한다. 배우들의 대사에는 유머러스한 활력과 직관적인 무게가 잠재돼 있으며,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오락영화로서의 쾌감을 배가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볍게 뛰면서도 묵직하게 한 방을 날리는 노장 배우들의 모습은, 마치 하드록의 장인이 연주하는 스트레이트한 훅을 듣는 느낌과도 같다고 할까.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최철기 반장(황정민)이다.
제목 그대로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거래와 정경유착을 소재로 둔 범죄영화 <부당거래>는 먹이사슬처럼 얽힌 캐릭터들이 벌이는 첨탑 쟁탈전과 같은 영화다. 광역수사대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도 경찰대 출신의 동기에게 밀려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는 최철기를 축으로 진전되는 <부당거래>의 서사는 최철기에게 빌붙어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처벌을 면하는 사업가 장석구(유해진), 뇌물공여를 비롯한 정치적 공작까지 서슴지 않는 비리검사 주양(류승범)을 통해 극적 개연성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공생과 적대를 오가는, 겉과 속이 다른 제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업윤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공적인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부당거래>는 기초적으로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원작자인 동시에 자신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완성한 <혈투>의 연출자인 박훈정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연출력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당거래>의 초석이었을 것이다. <부당거래>는 다층적인 캐릭터 구조와 다단한 플롯을 품고 있음에도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매듭을 묶고 풀어내듯 감정의 결자해지가 확실한 작품이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기업 스폰서와 언론의 공생관계를 엮어내는 <부당거래>는 그 불미스러운 관계의 이면을 탁월하게 살피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사실적 폭로로서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액션 연출의 대가로 분류되던 류승완이 탄탄한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부당거래>를 통해 기승전결의 완곡을 조율해내는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건 발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사안일 것이다. <부당거래>는 액션이라는 장기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류승완의 입지를 새롭게 인식시켜줄 대전환과 같은 작품이다. 류승완 특유의 호쾌한 액션 시퀀스를 대체하는 건 우위를 점하려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공방전이다. 또한 그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각축을 거듭하는 관계의 우위는 대회전을 이루는 상황을 연속으로 이어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 활기를 주입한다. 물론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모든 결과물의 배후이자 근본적인 자질로서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부당거래>가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풍자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하는 우화처럼 보이는 동시에 극대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처럼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권력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채 진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고 수사의 종결을 위해 사건을 위조하는 경찰, 사회적 정의를 위해 법을 집행하기 보단 법적 해석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아 자본에 결탁한 채 범법을 자행하는 검사,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정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기업가, 그리고 이 일그러진 구조에 기생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장하는 언론까지, <부당거래>는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의심될 만)한 거대한 부조리를 통렬하게 겨냥한 폭로극과 같은 작품이다. 만약 <부당거래>를 보고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데자뷰를 발견한다면 그건 착시일까. 하지만 당신의 데자뷰에는 죄가 없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갈 뿐.
‘스케이트를 타거나 죽거나’라는 제목 그대로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스케이트를 타고 사선을 넘나 드는 두 소년의 도주를 그리는 작품이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줄거리는 간단명료하다. 우연히 살인 현장을 목격한 두 소년이 스케이트 보드에 의지한 채 자신들을 추격하는 범인들로부터 달아나고 경찰의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그들을 쫓는 적의 정체를 알게 된 뒤, 자신들이 믿을 만한 상대가 경찰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
음모론의 플롯을 아우른 범죄영화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는 장르물이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특이점은 서사가 아닌 묘사에 있다. 무엇보다도 <스케이트 오어 다이>가 실제로 스케이트 보드를 잘 다루는 어린 배우들을 캐스팅함으로써 사실적인 스턴트 액션을 연출해낸다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어디에 놓여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대변하는 바나 다름없다.
추격과 도주의 도구가 되는 스케이트 보드는 단순히 이 영화의 소재 이상의 존재감을 자랑하는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킥 플립과 같은 기본적인 기술을 비롯해서 다양한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는 배우들의 스케이트 보딩을 본다는 건 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묘미이자 이 작품의 핵심적 의도나 다름없다. 스케이트 보드를 이용한 스피디한 추격전과 지형을 이용한 스케이트 보드 액션은 볼거리로서 유용한 결과물이다.
동시에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또 다른 특이점은 이 영화의 배경이 프랑스 파리라는 사실이다. <택시> <스틸> <13구역> 등 파리를 배경으로 둔, 파리에서 제작된 스피디한 액션 영화들의 새로운 계보를 이루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프랑스 상업영화들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소재로 둔 스턴트 액션에서 꾸준히 소재를 발굴해내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파리라는 고도시를 배경으로 삼아 펼쳐지는 스피디한 추격전은 동류의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한다.
하지만 <스케이트 오어 다이>는 유사한 소재를 활용한 동류의 장르물 가운데 신선하다고 평할 만한 위치를 차지할만한 작품은 아니다.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장점과 단점은 그 지점에 놓여 있다.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둔 익스트림 스포츠 킬링타임 무비라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으나 활극적인 재미의 자극이 떨어지는 후반부에 다다르면 서사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시에 음모론을 축으로 둔 범죄영화로서의 내러티브가 탄탄하거나 깔끔한 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한 흠이다. 결국 <스케이트 오어 다이>의 성패는 영화 속에서 질주하는 스케이트 보드와 ‘함께 달아나거나 멈춰서 구경하거나’에 달렸다는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빠른 속도감도 결국 익숙해지기 마련이라는 것.
좋은 햇살을 받고 정제된 소금과 맑고 깨끗한 천연의 물, 기름진 토양 위에서 자란 콩. 깊은 맛이 우러나는 좋은 된장을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재료들. 하지만 이 모든 재료들이 마련된다 하여 꼭 좋은 된장이 빚어질 수는 없는 법. 이 모든 재료를 빚어낼 손의 정성도 중요하고, 오랜 시간 제 몸에 된장을 품을 장독대가 튼실해야 하며 풍부한 햇살과 적절한 바람을 맞을 시간이 필요하다. 그 모든 조건을 완벽히 갖춘다면 필히 깊고 풍부한 맛이 담긴 된장을 빚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모든 조건을 다 갖췄다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궁극의 맛을 선사하는 특별한 된장의 비결 그것은 무엇일까.
탈옥 후 5년 동안 잡히지 않았던 희대의 살인마 김종구는 결국 경찰에게 검거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를 검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강력반 김형사도, 이형사도 아닌, 된장이다. 그러니까 사연인즉슨 된장찌개를 먹다가 자신을 검거하러 접근하는 형사들도, 자신을 겨눈 총부리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저 된장찌개를 밑바닥까지 긁어먹고서야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수갑을 찬 채 경찰차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사연을 전해들은 특종PD 최유진(류승룡)은 이를 취재 조사하던 중, 그 신비한 된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된장녀, 장혜진(이요원)의 존재를 알게 된다.
너무도 익숙하기에 낯선 제목인 <된장>에서 ‘된장’은 일종의 미끼이자 핵심이다. 희대의 살인마의 경계를 일순간 해체시켜버린 된장찌개의 비밀을 쥔 여인의 정체를 탐문해나가는 영화의 내러티브는 곧 그 된장에 얽힌 물음표의 실체에 접근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의문 너머에 자리한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수순으로 관객의 흥미를 이어나간다. 마치 후각을 통해 얻어진 식욕이 미각적인 만족으로 이어져 나가듯 <된장>은 소재 자체가 발생시킨 일종의 흥미를 이야기 본연의 감동으로 승화시켜나가는데 성공했다. 이는 단지 소재를 통해 완성해낸 이야기의 완성도가 탄탄한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된장이라는 소재의 특성을 이야기에 착안해낸 기획력과 그 기획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낼 것인가라는 구성력이 이를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된장이라는 소재를 되레 심오하고 세심하게 다룸으로서 소재에 의외적인 특이성을 부여하고 흥미를 유발시킨 뒤, 이를 내러티브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간다. 기본적으로 완급조절이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능수능란한 연출로 구사하는 <된장>은 안정적인 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이야기가 품고 있었던 가능성을 실현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된장을 만드는 비결이 단순히 이상적인 환경 조건을 공식처럼 더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성과 기다림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된장>은 뛰어난 이야기란 것이 단지 좋은 소재와 완결성의 구조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맛있는 이야기는 많아도 숙성된 감동을 지닌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질려도 감동은 질리지 않는다. 그리고 <된장>은 질리지 않는 감동을 맛있게 이야기하는 진국과 같은 작품이다.
절대무공을 자랑하던 고수 라마가 죽어서 남긴 시신을 소유할 수 있는 자는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된다는 소문과 함께 강호에 피바람이 분다. 두 조각으로 나뉜 그의 시체를 소유하고자 절대고수들이 쟁탈전을 벌이기 때문. 그 가운데 잔인한 고수 문파로 알려진 흑석파가 시신을 보유한 한 가문을 급습해 부자를 죽이고 시신의 절반을 얻는데 성공하지만 그 시신을 소유하게 된 여성 검객 세우는 자신의 그런 삶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고자 도주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바꾸는 성형에 성공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흑석파는 그녀의 뒤를 좇게 된다.
앞선 문맥은 <검우강호>의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기까지의 여정을 설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검우강호>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 시퀀스와 CG컷을 동원한 오프닝 시퀀스가 포함된 10분여의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이를 설명해낸다. 이는 빠르고 효율적인 선택이다. <검우강호>는 무협물로서 기초적으로 빤한 소재나 줄거리를 공들여 설명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다소 유치한 무협물 특유의 설정을 비범하게 포장하지 않은 채 단지 내러티브의 정보로서 전시되는 이 압축적인 도입부는 <검우강호>가 오락물의 하위 장르로서의 기능성에 충실한 작품임을 기대하게 만든다.
<검우강호>는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작품이다. 무협의 코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고전적인 웨스턴 무비의 정서와 특정한 스파이물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캐릭터와 플롯까지, 단연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감지되는 영화다. 오우삼 자신의 작품인 <페이스오프>의 흔적부터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와 같은 스파이물의 영향력이 깊게 감지되는 <검우강호>는 현대적 소재의 장치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기도 하는 작품이다. 동시에 비범한 대의를 표방하는 무협물의 정서와 달리 물질적인 욕망과 개인적인 삶에 천착하는 인물들의 태도가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지는, 무협물의 포맷 안에서 이례적인 정서적 묘사를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빼어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검우강호>는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파악하고 목적지에 다다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의의를 전파하기 보단 자신의 기능성을 확실히 인지하고 그 역량을 전시하는데 능한 가공품으로서 유용하다. 다양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욕망을 표현하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내러티브의 소모품으로서 유용하게 등장하고 퇴장한다. 시종일관 거듭되는 유려한 액션신을 기대했을 어떤 관객에게는 <검우강호>의 액션신이 양적으로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나 후반부를 장식하는 액션신의 완성도는 분명 즐길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검우강호>는 레일을 깔고 그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은 작품이다. 기차가 지나는 역을 살피기 보단 전진하는 기차의 방향이 보다 뚜렷하게 눈에 띈다. 어떤 특별한 철학적 의미를 발췌해내기 보다는 영화가 발생시키는 장르적 쾌감과 이야기의 진전에 방점을 둔 작품이다. 대단한 장르적 성취를 이뤘다거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작품이라기 보단 제 목적을 이루고 오락적 성과를 제공하는 무협물로서 유효하다. 취향의 문제만 아니라면 딱 눈감고 시간을 죽일 만한 유용한 롤러코스터적 무협물일 따름이란 말이다.
전세계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은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영국에서 살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난 선남선녀다. 그리고 베로나는 실존하지도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인물들의 덕분에 실존의 전통을 얻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바로 그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남긴 실물적인 전통을 소재로 둔 현대적 로맨스물이다.
뉴욕의 출판잡지사에서 팩트체킹, 즉 기사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근거를 조사하는 기자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개업을 앞둔 약혼자와 함께 이탈리아 베로나로 여행을 떠나지만 다양한 음식과 와인에 정신이 팔린 약혼자와 떨어져 자신만의 일상을 보내던 중, 줄리엣에게 자신의 구애상담을 전하는 편지 이벤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줄리엣의 비서들이라 불리며 그 편지에 답장 업무를 행하는 이들과 함께 누군가의 절실한 구애에 선의의 거짓말을 답신하던 중, 50년이 지난 편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에 답장을 보낸 뒤, 예상치 못한 방문을 맞이하게 된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허구적인 로맨스를 통해 현실적인 이벤트를 발생시킨 베로나의 관습을 이어받은 허구적인 로맨스다. 셰익스피어의 허구로부터 발생한 문화적 전통이 <레터스 투 줄리엣>의 기반이 됐다는 사실은 허구와 실재의 전이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식상하듯 흥미로운 지점이다. 물론 이는 영화 외적인 문제다. 단지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결과물을 놓고 말하자면 이런 접근은 사족이다. 이 영화는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로맨스물이라기 보단 진정한 사랑을 논하는 전형적인 로맨스물들의 궤 안에 놓인 또 하나의 낭만적 일탈극일 따름이다.
이는 어떤 지적의 의미가 아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이 품은 전형성이 영화를 해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자신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이와의 여정 속에서 결핍을 겪게 되는 여인이 우연과 필연의 경험 끝에서 새로운 결심을 품게 된다, 라는 일종의 판타지를 허구적인 세계 위에서 적절한 낭만을 곁들이며 담백하게 진전시켜 나간다. 덕분에 <레터스 투 줄리엣>은 운명이라는 단어가 발생시키는 환상성과 함께 그 특별한 성격 자체의 전형성을 동시에 설득시키는 작업으로서 적당한 성공을 불렀다 말할 수 있는 동시에 장르적 기성품으로서 제값을 해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되는 동시에 그 허구적 명성을 실제적인 전통으로 승화시킨 베로나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피렌체 인근에 자리한 시에나 와이너리의 풍요로운 자연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미하기 좋은 식단처럼 풍성한 시각적 만찬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이루는 신구의 조화는 영화의 균형감각을 이루는 자질과도 같다. 딱히 새롭거나 빼어난 영화라 추켜세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허구적인 환상과의 타협은 적절하며 기본적인 현실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마치 허구로부터 새로운 현실적 가치를 창출해낸 베로나의 오늘처럼 환상과 현실의 접점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타협을 성사시킨 느낌이랄까.
2006년에 출간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와 인도, 발리를 도는 1년 여간의 여행을 거친 원작자의 기행적인 감상과 성찰을 담은 이 작품은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이하, <먹기사>)라는, 원작과 동명으로 발표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원작에 담긴 작가의 자전적 깨달음에 대한 독자들의 공감대가 영상 안에서도 유효한 감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었을 것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자유기고가인 리즈(줄리아 로버츠)는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적 믿음을 품으며 살아가지만 점차 어떤 결핍을 느끼게 된다. 그 안정적인 삶 속에서 스스로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흔들 때 즈음, 그녀에게 확고한 결심을 내리게 만들 사건이 발생한다. 교육자를 꿈꾸는 남편은 직장을 그만 두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학위를 따겠다고 전하고 그녀는 결국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에게 집과 많은 재산을 양도한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한 1년 간의 여행을 계획하고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한다.
이탈리아와 인도, 발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먹기사>의 서사는 마치 3막으로 된 연극과 같은 내러티브로 구성된 작품이다. 그리고 실제로 3국의 풍요로운 풍광을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이 영화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는 바로 3국 현지의 그림 같은 이미지와 각 지역의 특색이 묻어나는 정서적 감흥일 것이다. 피자와 파스타를 비롯한 다양한 진미들이 가득한 맛의 나라 이탈리아와 인도의 아쉬람 사원에서 보여지는 기도와 명상의 정적인 풍경들, 그리고 풍요로운 자연 경관 속에 놓인 발리의 여유로운 정취는 <먹기사>의 매력 3종 세트나 다름없다.
라이언 머피가 연출한 이 영화는 사실 주연을 맡은 배우의 이미지가 보다 눈에 띄는 작품이기도 하다. ‘귀여운 여인’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변신한 줄리아 로버츠는 세월의 무상함보다도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인간이 수확할 수 있는 성숙미를 느끼게 만든다. <먹기사>의 모든 서사를 관통하는 중심 캐릭터 리즈의 개인적인 경험은 궁극적으로 영화가 제시하고자 하는 삶에 대한 성찰과 자의식의 발견으로 발전하고 확장될만한 것이어야 한다고 볼 때, 혹은 그것이 진짜 그럴 만한 것이라 느껴지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할 때, 줄리아 로버츠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만한 결과물을 선보인다.
물론 개인의 성찰이 모든 이의 삶에서 진리처럼 납득되기란 어려운 것일 게다. 동시에 어떤 이의 삶이 모든 이의 삶의 방향을 대신할 수 있을 만한 가치를 품었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수많은 삶 속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가는 이의 삶이란 분명 특별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먹기사>의 일탈적인 여정은 행복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을 되새기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물론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3막의 여정이 저마다 흥미본위의 편차와 기승전결의 흐름 안에서 이야기적 재미의 고저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 이 영화의 단점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여정 끝에 얻어지는 것이 빤한 ‘행복’이 아니라는 점에서, 동시에 그 삶이 어느 누군가가 쉽게 이루지 못한 용감한 일탈이자 선택이었음을 설득하는 <먹기사>는 행복을 위한 3막 3장 드라마로서 적절한 포만감을 주는 일탈의 간접경험으로서 가치를 전한다.
어느 날,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피라미드를 훔친 범인의 정체를 두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스스로 세계 최고의 악당이라 자부하는 그루의 뚜껑도 열렸다. 사실 자신의 비열함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 그루가 저지르는 악행이란 카페에서 자신의 앞에 선 이들을 얼음으로 얼리기, 주차된 차 사이로 끼어들어 도로 어지럽히기, 길 가는 꼬마 울리기 등과 같이 사소한 것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루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바로 달을 훔치는 것. 달을 훔치고 나면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의 악행을 널리 인정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수요가 늘어나면 공급도 따라 늘어나기 마련이다. 매력적인 슈퍼히어로의 수요가 올라갈수록 그에 상응할만한 능력을 지닌 슈퍼악당들의 공급도 따라야 한다. 영웅보다도 매력적인 악당이 늘어간다는 건 단지 우연이 아닌 셈이다. <슈퍼배드>는 그런 세태에 힘입어 기획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히어로의 망토 끝자락 따위조차 구경할 수 없는 이 작품은 오로지 누가 누가 더 나쁜 놈인가를 경쟁하는 천진난만한(?) 악명 배틀을 아기자기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슈퍼배드>는 단지 악당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왁자지껄하게 전시하는 액션 코미디로서의 카타르시스에 주력하고 마는 작품이 아니다.
달을 훔쳐내겠다는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라이벌 벡터가 강탈한 축소 광선 무기를 탈환해야 하는 그루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쿠키를 파는 세 소녀를 입양해서 벡터의 집에 위장 잠입시킨다. 자신들을 거두어줄 부모를 찾던 세 소녀와 단지 작전을 위해 아이들을 입양한 그루의 불협화음은 점차 묘한 가족애로 거듭나고 그 사이에서 그루도 점차 변화를 거듭한다. <슈퍼배드>의 서사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애정결핍의 트라우마를 품은 악당의 가족주의적 성장을 다룬 드라마다. 이 지극히 빤한 설정은 <슈퍼배드> 안에서 묘한 의외성을 발휘하는 요소이자 결정적인 감동적 찰나를 빚는 유효한 자질로 작동한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분위기 안에서 과장된 설정을 마음껏 악용하며 웃음을 빚어내는 가운데서도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감수성은 <슈퍼배드>를 단순한 일회성 유희로 몰락시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훌륭한 애니메이션이 그러하듯이, <슈퍼배드> 역시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릭터를 통해 승부수를 던진다. 무엇보다도 <슈퍼배드>에서 눈에 띄는 건 좀처럼 종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미니언’이다. 캐릭터의 정체에 대한 일말의 설명도 없이 시종일관 다용도(?)적인 쓰임새를 자랑하는 이 미니언들은 <슈퍼배드>의 소소한 재미를 책임지는 일종의 수식어 캐릭터나 다름없다. 익살스럽거나 귀여운 주요 캐릭터들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천진난만하면서도 장난끼 넘치는 활력을 자랑하는 미니언들은 어떤 식으로든 활용이 가능한, <슈퍼배드>의 슈퍼 길티 플레저로서 작품의 개성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무기로서 기능한다.
이쑤시개 꼬나 물고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쌍권총 손에 들고 폭풍 킬샷 날리던 주윤발의 <영웅본색>은 홍콩 느와르의 전설이다. 하얀 비둘기 날리며 홍콩 느와르의 간지를 창출해낸 오우삼의 <영웅본색>은 홍콩이라는 지정학적 입지를 특유의 장르적 분위기로 승화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시대를 선도하는 작품이었다기 보단 그 시대적 공기와 함께 호흡함으로써 얻어진 훈장과 같은 장르나 다름없다.
1986년작인 <영웅본색>은 오늘에 이르러 분명 낡은 추억과 같은 유물이나 그것이 자신의 시대 안에서 이룬 성취는 분명 간과할 수 없는 매력임에 틀림없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을 리메이크한 송해성의 <무적자> 속에 담긴 <영웅본색>의 흔적이란 그래서 조금 낯설다. <영웅본색>의 캐릭터 구도를 이어받은 새로운 얼굴들, 그리고 그들이 펼쳐 보이는 유사 이미지의 액션은 <영웅본색>에 빚진 것임에도 그 뉘앙스와는 조금 동떨어진 것들처럼 보인다.
<영웅본색>이 그러했듯이 <무적자> 또한 범죄 조직의 비정함에 맞서는 수컷들의 의리를 앞세워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액션 느와르를 표방한 작품이다. 팽배한 물질주의와 대륙으로의 반환을 앞둔 공황적 심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홍콩의 입지를 사내들의 느와르적 정서로 연동한 <영웅본색>은 시대에 깃든 아이러니한 정서를 낭만적인 기운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만의 멋을 입힌다. <무적자>는 탈북자라는 신분과 부산이라는 지정학을 통해 <영웅본색>의 국산화를 시도하고 보기 좋은 젊은 배우들의 캐스팅을 통해 혈기를 보충한다.
<무적자>는 스토리텔링의 흐름 안에 있어서 눈에 띄는 결점이 발견되는 영화가 아니다. 인과관계는 적절하며 관계 설정의 변주와 갈등의 양상에서도 큰 흠이 드러나지 않는다. 부산을 근거지로 연출한 느와르적 풍광도 근사하다. 다만 그 내러티브의 흐름을 흔드는 울림이 약하다. 강한 의리와 애틋한 형제애로 묶인 원작의 인물들이 펼쳐내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무적자>의 인물들은 감정의 이입을 이끌어내기 보단 그 감정적 상태를 거듭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것만 같다. 다단한 플롯을 통해 복합적인 감정선을 구축했으나 감정의 진전이 더디고 끝에 다다라 닿는 폭발력이 약하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기능적으로 나쁘지 않다. 다만 그것이 말 그대로 기능적인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정서적 공감대를 이룰만한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할까. 젊은 배우들의 갈등과 이해로 도모되는 <무적자>의 감정선은 강렬한 혈기가 존재하나 이를 녹록하게 묵혀줄 관록이 눈에 띄지 않는다. 표독스러운 눈빛과 멋스러운 자태가 공존하지만 그것들을 진짜로 승화시킬 내공이 부재한다. 나름대로 대단한 물량공세를 자랑하는 피날레의 액션신은 나름의 볼거리를 이루지만 그 상황 위를 날고 뛰는 인물들의 감정선은 객석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정서적 연대에 빠져드는 것 같다고 할까. 이미 낡은 것이 된 원작의 영광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무적자>는 딱히 인상적인 작품이 아니다. 원작의 본색은 물론 자신의 본색조차 얻어내지 못한 범작에 불과하다. 존경심을 표하기 이전에 자립심부터 챙기고 볼일이랄까.
전직 형사였던 강태식(설경구)은 좋은 말로 하자면 ‘범죄연구소’, 속된 말로 하자면 ‘흥신소’나 다름없는 사무실을 운영하는, 일명 해결사다. 모텔의 불륜 현장을 급습해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대가를 얻는 그의 일상적인 활약(?)을 펼쳐 보이려던 어느 날, 그는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이하고 그것이 스스로에게 엄청난 덫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곧 그것이 자신의 과거와 깊게 연루된 일임을, 동시에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이런 덫을 풀어놓고 자신을 조종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 음모의 핵심을 찾아 나선다.
일단 류승완이 기획하고 정두홍이 무술감독을 맡았다는 점만으로도 <해결사>는 분명 호쾌한 액션을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일단 그런 기대감을 품은 어떤 이가 있다면 그 방향을, 혹은 그 기대감의 정도를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해결사>는 ‘액션’영화로서의 오락적 기능성만큼이나 액션‘영화’로서의 이야기적 완결성에도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음모에 휘말려 누명을 쓴 전직형사의 고군분투를 그린 <해결사>는 시종일관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 안에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애쓰는 인물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영화다. 하지만 <해결사>는 단순히 그 활약상을 묘사하기 위해 이야기를 최소의 수단으로 삼으려 들지 않는 영화다.
개인에게 얽힌 음모의 실체가 실상 이 사회 전반에 걸친 부패와 폐악의 범위로 확장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인물이 얻게 될 충격은 곧 관객에게 전이돼야 할 문제의식으로 발전될만한 것이다. 실제로 <해결사>는 현실정치를 직시하고 풍자하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이 명쾌하게 해결되는 클라이맥스로 점철될 때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풍자의 의미를 더할 때, 쾌감은 분명 배가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해결사>는 풍자라는 작품의 의미적 성취와 함께 말 그대로 이야기로서의 완결성 안에서도 분명한 파급력을 얻어낼 수 있는 구조적 특성을 지닌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해결사>라는 결과물 안에서 딱히 이로운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르적 재미를 넘어 정치적 풍자까지 끌어안고자 한 내러티브의 야심은 되레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채 되레 산만한 인상을 남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해결사>에서 가장 기대하고자 한 스트레이트한 활극 액션은 지나치게 의미에 매달린 영화의 야심에 매몰된 것처럼 보이며 궁극적으로 그 야심 또한 그 의미에 근접해내기 보단 극의 흐름에 있어서 발목을 잡는 낭비적인 욕심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해결사>는 클라이맥스의 쾌감이 부재한다. 음모를 뒤집어 쓴 인물이 끝내 이루는 건 단순한 폭력적 응징에 불과하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설경구라는 주연 배우 탓일지 몰라도) <공공의 적>을 연상시키는 엔딩이기도 한데 두 영화의 결말이 클라이맥스라는 용어 안에서 대조군을 이루는 건 말 그대로 중심인물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태도 덕분일 것이다. <공공의 적>이 강철중이라는 인물의 활약을 거칠지만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반면 <해결사>에서 강태식의 활약이란 고작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의 룰렛 안에서 돌고 돌다가 운 좋게 타인의 도움에 구제받는 식이다. 음모에 빠진 인물의 감정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못할 때 영화의 클라이맥스도 부재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방점을 고민하지 못한 채 어떤 이야기적 구성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자아낸다.
주연배우들이 주도하는 액션신은 배우들의 육체적 노고가 느껴질 뿐, 탁월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이는 사실 <해결사>에서 가장 아쉬운 측면이 될 것이다. 적어도 액션을 통해 어떤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는 건 <해결사>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결점이 될 것이다. 최근 <아저씨>와 같이 특별한 성과라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액션신을 연출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해결사>의 액션은 어떤 스타일도 어필하지 못한다. 특히 후반부의 카체이싱은 대단히 공허하다. 몇몇 조연배우들은 대사나 행위를 통해 간헐적인 웃음을 제공하지만 이는 영화의 공백을 메울만한 거리가 아니다. 이야기는 버겁고, 액션은 무디며, 디테일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대체 <해결사>라는 제목을 단 이 영화에서 해결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가장 큰 의문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