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연희(김윤진)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딸로 인해 걱정을 멈추기 어렵다. 딸이 희귀한 혈액을 지닌 탓에 좀처럼 이식이 가능한 심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그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뇌사 상태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 실려 오고, 그녀의 혈액형이 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희는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휘도(박해일)의 등장과 함께 기대는 불안으로 뒤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 사로잡힌 채 양아치 같은 삶을 살던 휘도(박해일)는 뒤늦게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한다. 그리고 연희는 이를 막고 딸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다다른다.
<심장이 뛴다>는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나는 연희와 휘도의 관계를 통해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화로부터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이는 당연하다. <심장이 뛴다>는 모정이라는, 고전적으로 신파로서의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유용한 소재를 취하며 이야기의 근본을 이룬 작품이다. 그만큼 장르적인 쾌감보다는 드라마틱한 감정선이 보다 와 닿는 영화인 셈이다. <심장이 뛴다>의 특이점은 그 지점에서 나온다. 각자 딸과 어머니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결코 중첩될 필요 없었던 두 삶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 필연적인 관계로 거듭난다는 과정을 다이나믹한 추격전과 심리전의 양상으로 그려나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장이 뛴다>는 이런 특이점을 단점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본다는 건 분명 절박한 감정으로 발전해야 할 터인데 <심장이 뛴다>에서는 좀처럼 그런 어머니의 행위나 감정이 모성이라는 진심으로 와 닿지 못한다. 일찍이 <마더>에서 보여준 것처럼, 본능에 가까운 어미의 본능이란 결코 이성적인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심장이 뛴다> 역시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낸다. 문제는 모성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어미의 모성이 지독하다기 보단 지나치게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타인의 심장을 훔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면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묘사해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면모라는 것이 때때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의 감정 변화도 이해될 뿐, 깊게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어머니의 진심을 깨닫게 된 양아치가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위한 무언가를 하려 든다는 상황 자체는 온당하다. 문제는 그가 취하는 방법론이 딸의 심장을 구하려는 엄마만큼이나 비상식적이며 딱히 설득력 있는 과정 안에서 연출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납득은 더디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무디며 영화가 의도하는 모든 결과적 감상도 얕아진다.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처럼 착각한 듯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는 기분이란 불쾌함과 멀지 않은 것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화에서 영상기술의 발전은 장르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SF와 판타지 장르에서 거둔 성과들은 이런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례일 것이다. CG기술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을 형이하학적인 표현력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장르 개척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해졌다. 1982년에 공개된 <트론>의 속편격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 2>) 역시 바로 이런 영상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어진 표현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악한 이미지의 결과물처럼 보여지는 <트론>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실험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미지화한 8비트 게임 영상 수준의 그래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작품으로서 평가 받았다. 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둔 아이디어가 표현 기술의 발전 속도를 앞서 구현된 사례로서도 유용하다. 마치 10년 전에 <아바타>가 나온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이는 결과적으로 실험적인 도전으로서의 가치를 벗어나서 그 조악한 이미지가 이룬 결과적인 성과, 즉 도스 체계로 운용되는 8비트 컴퓨터의 베이직한 프로그램 원리를 비유적인 이미지로서 치환한, 가상의 평행우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조악한 영상이 되레 단순명확하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론>(이 제작된 시대)에 비해 진일보된 영상기술을 활용한 <트론 2>는 그런 장점을 통해 전작과 차별화된 감상의 묘미를 발생시킨다. 서사적으로 속편에 가까운 <트론 2>는 전편의 바탕을 이루던 컴퓨터 체계의 평행우주 세계관 ‘그리드’를 비롯해서 ‘광선 바이크’ 레이스나 ‘디스크 배틀’과 같은 볼거리의 이벤트를 동일하게 등장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화려해진 이미지의 미장을 통해 리메이크의 의미를 부여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완성했다. 어두운 무채색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조도가 높은 형광색 띠가 곳곳에 배치한 ‘그리드’의 이미지는 과장된 빛의 황홀경에 가까운 감상을 부여함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며 언어 그대로 레이저쇼를 구경하는 듯한 관람의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트론 2>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심한 영화다. 말 그대로 구경에 가까운 재미라는 건 <트론 2>의 장점이라기 보단 단점에 가깝다. <스피드 레이서>가 연출해낸 비현실적인 레이싱 경기와도 비교해봐도 좋을 <트론 2>의 광선 바이크 레이스는 바이크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을 구경하게 만들면서도 레이스의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차단해버린다. 이는 곧 그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쾌감의 속성으로 연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트론 2>를 두른 모든 이미지의 결과적 감상과 연결된다. <트론 2>는 <트론>의 시대보다도 진화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체계를 포섭하며 보다 광활해진 전자신호 시스템의 세계를 보다 화려해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전작의 야심에서 보다 나아간 기획물이다. 보다 진일보된 영상은 이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론 2>는 조악했던 전편이 얻어낸 컬트적인 의미로부터 차단된, 발전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평범한 공산품으로서 퇴보된 작품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의 세계관을 설계하고 구상했으나 그 모든 이미지마저도 결국 전작이 마련한 세계관의 발전적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속에는 감흥이 결여돼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도 비교할 만한 기계와 인간의 대립, 혹은 정보를 독점하는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정보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현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론 2>는 전작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하지만 딱히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하기 힘든 전작만큼이나 속편의 기승전결 역시 세심하게 세공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극적 긴장감의 결여는 전시적 용도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클라이맥스의 구심점을 마련하지 못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론>의 속편으로서 ‘트론’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롤타이틀 무비가 정작 ‘트론’이라는 제목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일 것이다.
물이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간다. 상륙하듯 육지로 들이치던 바다는 잠자코 머물다 다시 수평선 너머로 끌려나간다. 대륙과 반도 사이를 메운 갇힌 바다는 해안선이 비좁다는 듯 육지를 넘보다 해수면 저편으로 사그라진다. 한반도의 서편, 중국의 동편에 자리한 황해는, 그래서 탁한 바다다. 끊임없이 육지를 꿈꾸듯 해수면을 밀고 올라오다 흙을 머금고 미끄러져 사라지는 바다는 탁하지만 아련하게 출렁거린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역할을 하는 입구와 출구를 제외하면 총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황해>는 마치 해수면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닷물과 같이, 한국으로 밀항한 조선족 청년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사건을 휘몰아치는 풍랑처럼 묘사하는 영화다. 탁한 해수면과 같은 현실을 묘사하는 영화의 끝에서 발견되는 건 그 밑바닥에 침전된 진한 농도의 드라마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 택시운전사 구남(하정우)은 한국으로 돈을 벌러 떠난 뒤 소식이 끊어진 아내로 인해 채무에 시달리며 마작까지 손을 댄다. 그런 그를 마작 업소에서 발견한 청부살인 브로커 면가(김윤석)는 그에게 한국에서 사람 하나만 죽이고 오면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노라 제안한다. 충무로의 신예 나홍진이 연출한 <추격자>에서 괄목할만한 연기적 호응을 이끌어냈던 하정우와 김윤석이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황해>는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두 배우의 연기적 면모만으로도 대단히 주목할만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외적으로 연기적 사투를 펼쳤다고 해도 좋을 지난 사례와 마찬가지로 <황해>에서도 두 배우는 가히 지독하다는 말을 온전히 긍정적인 수식어로 얻어낼 수 있을 만큼 경이적인 연기적 성과를 만들어냈다.
<추격자>와 달리 <황해>에서 두 배우의 출연비중은 동등하지 않다. 하정우가 연기하는 구남이 <황해>라는 영화를 긴 선처럼 이어나가는 캐릭터라면 김윤석이 연기하는 면가는 그 선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인물이다. 모든 사건 위를 달리는 건 구남이지만 그 사건을 구상하는 건 면가의 몫이다. 물리적인 출연량의 차이는 딱히 두 배우의 중요성을 가늠하는데 주요한 단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만큼 <황해>가 하정우라는 배우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리고 그의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의 내공을 상상케 만든다는 점에서 경이롭다. 동시에 김윤석이 만들어낸 끔찍한 세계-이건 단순히 어느 캐릭터를 넘어선 공포적인 세계에 가깝다.-를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는 기억이 될 것이다. 마치 괴물처럼 연기하는 두 배우는 <황해>에서 가장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장점이 될 것이다.
물론 <황해>는 단지 두 배우의 연기만으로 논할 수 없는 영화다. 나홍진은 탁월한 집을 지었고, 배우들은 그 위에서 좋은 포석이 되어 자리하고 있다. 156분에 다다르는 <황해>의 러닝타임이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거친 이미지를 가득 품고 있는 이 영화가 감상을 지배할 만큼 가공할만한 리듬감 위에서 진행되는 까닭이다. 4개의 챕터로 구성된 <황해>의 내러티브는 문학적인 중후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장르적인 흥미를 발동시키며 숨통을 죄는 서스펜스의 틈새로 종종 위악한 웃음의 틈새를 열어놓기도 한다. 살과 피가 튀는 잔혹한 이미지들을 더러 담고 있는 이 영화가 어느 장르영화들에 비해서 지나치게 앞서 나가는 잔인함을 묘사하고 있다고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해>는 폭력성의 강도가 만만찮은 작품이다. 이는 정형화된 장르적 연출에 대한 기시감을 거세함으로써 관객에게 충분한 감상의 대비, 일종의 안전거리를 허락하지 않는 까닭이다. 연출적인 긴장감을 조성하고 찌르고 베어내는 살육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여타의 장르영화들과 달리 <황해>는 그대로 으깨고 곧장 찢어낸다. 어떤 대비감도 없이 폭력들이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되고 관객의 심리에서 체감된다. 실로 무자비한 폭력성이다. 이 지점에 대한 호불호와 무관하게 영화는 온전히 폭력성의 체감이라는 선상에서 리얼리티라는 쾌감을 일궈낸다.
<황해>는 풍랑처럼 휘몰아치는 서사의 리듬감과 거칠게 밀고 올라오는 연출력을 통해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영화다. 사실 영화의 호흡이 급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황해>의 서사로부터 압박을 느끼게 되는 건 그 서사를 구성하는 이미지와 캐릭터들의 에너지 덕분일 것이다. 거친 조선족 사내들과 조직폭력배들이 더러 등장하는 탓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한국적(인 현실이라고 믿어지는) 리얼리티를 온전히 믿게 만드는 사실적인 연출을 기반으로 영화가 만들어낸 모든 상들을 관객들에게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러닝타임의 너비를 심리적으로 압축해낸다. 물론 이 영화의 서사가 완벽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결정적인 몇몇 단서를 전시하는 순간들은 우연에 천착하고 있으며 모든 인과 관계를 구성하는 캐릭터간의 심리가 명쾌하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에너지를 완전하게 이용하게 있다. <황해>는 스크린에서 출렁이는 그 에너지만으로도 관객을 압도해내고 있는 영화일 게다. 이는 <추격자>의 연장선상에서 나홍진의 야심을 더욱 세차게 드러내는 측면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거대한 컨테이너 차량이 곤두박질치는 장면만으로도 <황해>의 스케일은 고스란히 증명된다. 그리고 <황해>는 자신이 담보한 폭력성을 단순히 거칠게 밀어붙이는 영화이기 이전에 탁월하게 설계되고 정제되어 연출된 액션신들로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카체이싱은 한국영화에서 두고 두고 회자될만한 시퀀스라고 장담해도 좋다. 또한 살인을 준비하는 구남이 현장을 둘러보며 이를 준비하고 사건에 맞닥뜨려 싸움을 벌이는 장면을 비롯해서 <황해>의 액션은 실제적인 체감을 가능케 하는 동시에 장르적인 긴장을 함께 전달한다는 점에서 탁월하게 위태롭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모든 이미지의 끝에 걸리는 감정적인 결과물은 실로 깊은 허무다. <황해>는 지금 우리가 발붙인 현실을 탁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느 누군가의 시선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닌, 실로 탁하게 어지럽혀진 현실을 스크린에 거대한 상으로 띄워 올린 것처럼 끔찍하다. 그 끔찍함이 <황해>의 본체다. 나홍진은 이제 서울의 골목에 드리운 피비린내를 넘어 한국이라는 세계를 채운 거대한 욕망이 내려앉은 암담한 밑바닥을 그려낸다. 그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에게 남는 건 지독한 느와르다. 현실은 탁하다. 그래서 슬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아니면 체념하거나, 지독하고 또 지독하다.
젊은 시절 스타를 꿈꾸며 무대에 오르던 폴 매든스(마틴 프리먼)의 꿈은 과거로 흩어진 지 오래다. 한때 같은 꿈을 꾸던 친구 고든 셰익스피어(제이슨 워킨스)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의 성탄극 기획자로 호평을 얻었고, 역시 함께 무대에 오르던 애인 제니퍼(애슐리 젠슨)는 새로운 꿈을 좇아 할리우드 제작사로 떠나간 지 오래다. 평범한 마을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별 일 없이 살던 매든스는 어느 날, 급작스럽게 떠맡겨진 성탄극 감독직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성탄극의 조력자로 등장한 파피(마크 우튼)의 돌발행동에 울화를 참지 못한다.
제목만으로도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임을 광고하고 있는 듯한 <크리스마스 스타!>는 아이들의 성탄극 준비를 주제로 연출된 일종의 소동극에 가깝다. 최소한의 인과를 빨랫줄처럼 길게 늘어뜨린 뒤, 돌발적인 사건들을 주렁주렁 널어놓는 이 영화의 서사적 형태에 걸맞은 감상이란 논리적인 개연성보다도 돌발적으로 뛰쳐나오는 상황들을 거듭 수습해나가고 이로 인해 불거져나가는 후속적인 사건의 연속을 주시해야 하는 쪽에 가깝다. <크리스마스 스타!>의 스토리는 마치 도로 위로 갑작스럽게 뛰쳐나오는 야생짐승들을 피해가는 아슬아슬한 주행을 떠올리게 만들만한 것이다. 사연의 진전에는 긴밀하게 밀착된 근거가 부족하고 단지 그 상황만이 제시되며 이를 통해 극은 굴러간다.
물론 이를 <크리스마스 스타!>의 핵심적인 단점이라 지적하는 건 마땅치 않다. 이는 사실 <크리스마스 스타!>의 서사가 치밀한 서사적 개연성을 요구할 만한 사연을 지니고 있지 못한 까닭이다. 다시 한번 간단히 정리하자면 <크리스마스 스타!>는 자신의 꿈을 상실한 어느 어른이 예기치 못한 여정에 밀려들어가 뒤늦게 자신의 삶을 회복해나간다는, 일종의 크리스마스 동화처럼 기획된 성장담과 같다. 다만 덩어리의 조각처럼 나뉜 서사와 서사의 간극을 유연하게 연결할 만한 접착제를 마련하지 못한 채 사건을 나열하는, 즉흥극과 같은 느낌의 이야기랄까. 결과적으로 사건 자체로서의 흥미가 대단하다면 그 과정의 논리는 어느 정도 무시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 스타!>는 탈출구를 찾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마스 스타!>가 찾은 해법은 급작스런 사건의 마련과 이 사건을 더욱 큰 사고로 연결하는 돌발적인 성향의 인물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사고를 일으키는 인물의 행동이 딱히 큰 자극을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탄극 감독 직책을 맡게 된 매든스가 조력자로 임명된 파피의 등장과 함께 겪게 되는 소동극들은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사건으로서 작동하기 보단 이야기 자체의 개연성 결함을 보다 부각시키는 단점으로서 극대화되는 인상이다. 이는 이 영화가 서사적인 결함을 선택한 것이라기 보단 서사적인 결함을 스스로 진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단점을 품고 있는 이 영화에도 일말의 장점은 있다. 수많은 아이들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소동극답게 영화는 천진난만하며 나름대로 소란스럽다. 이 자체의 활기를 감상적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여줄 수 있는 관객에게 <크리스마스 스타!>는 크리스마스를 위한 무난한 시즌용 영화 정도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런 영화적 성격은 해피엔딩을 그리는 이 영화의 무리수조차도 낭만적이라 이해시킬 만한 여력을 낳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말 그대로 이 모든 부연은 모를 일이다. 아쉽지만 착하다 하여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이 세상의 논리가 아닌 것이니까. 누구나 다 착한 이의 민폐 앞에 너그러워질 수 있는 성인이 아니듯이, 심심한 영화에 너그러워질 수 없는 것도 관객의 기본적인 심리다.
17살이 되는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맞이하는 건 죽음조차 불사해야 하는 고난이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 볼드모트(랄프 파인즈)를 상대할 희망이라 믿었던 호그와트의 교장 덤블도어(마이클 갬본)는 죽었고, 호그와트는 볼드모트를 추종하는 ‘죽음을 먹는 자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마법부의 존립마저 장담할 수 없는 마법세계로 언론과 권력을 장악한 볼드모트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만 간다. 그리고 해리포터와 론(루퍼트 그린트),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는 볼드모트를 제거하기 위해 덤블도어가 남긴 표식을 따라 볼드모트의 영혼이 담긴 ‘호크룩스’를 파괴하는 여정에 나선다.
J.K 롤링이 집필한 판타지소설 <해리 포터>시리즈의 완결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어둡고 암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마법세계를 어드벤처처럼 즐기던 호그와트의 소년, 소녀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난에 대한 갈등에 맞서며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채 세상의 눈을 피해서 고립된 신세다. 볼드모트의 등장과 해리포터의 주변인의 죽음을 묘사하는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결말부터 서서히 시리즈 위로 드리워지던 암울한 기운은 이번 마지막 시리즈를 통해 절정과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로 승화된다.
결말의 전초전이라 할만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이하, <죽음의 성물 1>)은 덤블도어의 유지를 이어나가는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담고 있다. 지난 6편의 전작에서 나름대로 천진난만한 마법 세계의 병풍이 되던 호그와트의 보호막이 사라진 <죽음의 성물 1>은 그만큼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일관된, 심정적인 진통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이 시리즈와 함께 성장하며 자신의 캐릭터의 역사를 몸소 증명하는 배우들의 외모와 같이 결말에 이르러 확실하게 시리즈의 성숙을 증명해내는 이번 편은 그만큼 이 시리즈에 대한 애정의 여부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최종관문이 될 것임에도 틀림없다.
일단 역대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의 시리즈를 두 편의 영화로 나누어 제작했다는 점에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서사적으로 보다 탄탄한 주행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그만큼 이번 영화는 지난 전작들에 비해서, 특히 <죽음의 성물>과 유사한 텍스트량을 지니고 있었던 몇몇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스토리의 집중과 선택이란 측면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혜택을 얻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에 다다른 이야기라는 건 곧 이 시리즈가 쌓아온 모든 역사와 정보가 총집결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전작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을 얼마나 잘 기억해내는지에 따라서 재미는 그만큼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도 전작들에서 설명됐던 어떤 장면들이 단순히 보는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말부의 서사를 수식하기 위한 복선의 요소로서 일찍이 장치된 것들이었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번 마지막 시리즈는 전작들에 대한 기억력에 따라 보다 많은 재미를 누릴 수 있는 팬서비스의 기능성을 품고 있다. 수많은 인물들이 언급되거나 등장하고 이내 사라진다는 점에서도 이는 보다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동시에 내년에 후속편의 개봉을 예고하고 있는 이 불완전한 작품이 끝까지 고통과 번민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이미 원작을 예습한 독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곧 이어질 후속편의 클라이맥스에서 선사할 반전의 롤러코스터를 위해 마련된 ‘골고타의 언덕’임을 명심해야 한다.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과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를 연출한 데이빗 예이츠는 지난 전작이 얻었던 호불호와 무관하게 나름대로 이 세계관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일관성을 확보한 듯한 인상이 든다. 또한 결말로 치닫는 시리즈의 연출을 한 감독에게 연속적으로 맡긴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수순을 밟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끔 만든다. <죽음의 성물 1>은 전체적으로 암울해지는 마법 세계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 안에서 이 세계를 주시해온 팬들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고 있으며 시리즈 자체의 흐름 안에서도 원숙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만한 위치에 놓여 있다.
물론 이 방대한 정보량을 품은 결말 시리즈를 고스란히 묘사하기 위해 140여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두 편의 시리즈를 마련했다는 것마저도 완전한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러닝타임의 한계에서 보다 여유로워진 만큼 서사의 운용력은 확실히 나아진 인상이며 서사에 대한 이해도 한층 간결해진 인상이다. 특히 호그와트의 대전투를 그릴 최종 클라이맥스를 앞둔 이번 작품이 묘사하는 몇 번의 대결신은 적절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캐릭터와 함께 성장한 어린 배우들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 캐릭터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다 할만한 표정을 선보이고 있으며 이런 정서에 밀착하듯 표정을 잡아내는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 이 시리즈의 성숙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소년은 성장했고, 운명에 다다랐다. 달아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갈등하는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기구한 팔자가 비범한 숙명 안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멈출 수 없는 여정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소년의 숙명과 그 숙명을 둘러싼 환경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먹구름과 같이 세계 위로 악은 쉽게 드리운다. 그 아래서 고군분투하는 작은 선이 서서히 빛을 밝힌다. 악에 잠식당한 세계가 불안에 떨 때, 작은 선이 서서히 불을 밝힌다. 어두운 세상에서 소년은 홀로 빛을 옮긴다. 이미 소년의 운명은 자명하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로 그 대단원으로 이야기는 옮겨가고 있다.
유럽 각지를 연결하는 고속열차 ‘유로스타’에 앉아 베니스로 향하며 추리소설을 읽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던 남자 앞에 묘령의 여인이 나타난다. 그 남자에게 심상찮은 눈길을 던지던 여인은 남자의 맞은 편 빈 자리에 앉아 말을 건네고 남자는 점차 정체불명의 매력적인 여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여인은 치명적인 가시를 안고 있다. 그리고 그 가시는 그 남자를 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 여자의 가시에 한 번 찔리고도 자신의 감정을 두려움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저 여자에게 빠져들 뿐이다.
베니스를 병풍처럼 두른 안젤리나 졸리와 조니 뎁의 첩보액션물 정도의 기대감을 품었을 어떤 관객에게 <투어리스트>는 예상을 밑도는 결과물로 읽힐 가능성이 다분한 작품이다. 물론 <투어리스트>는 첩보액션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에 기반한 작품이다. 음모를 설계하는 여자와 음모의 제물이 되는 남자 사이에서는 묘연한 긴장이 흐르고 그 음모를 좇는 경찰들과 갱단의 어울림이 긴박하게 구른다. 카체이싱을 대신하듯 수상보트 추격전이 펼쳐지고, 베니스의 풍광은 좋은 그림이 되며 그 위를 바삐 움직이는 안젤리나 졸리와 조니 뎁은 자태만으로도 좋은 장식이다. 하지만 <투어리스트>는 그 모든 장점들의 물리량으로 관객을 압도해내는 작품이 아니다.
<투어리스트>는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안소니 짐머>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기초적으로 <안소니 짐머>의 서사적 결함을 염두에 둔다면 <투어리스트>의 가능성과 한계도 명확해진다. 일차적으로 <안소니 짐머>를 재가공한 <투어리스트>는 원작이 품고 있었던 장르적 기질을 고스란히 탁본해낸 작품이다. 이는 곧 <투어리스트>가 장르라는 혈액 안에서 신선한 피를 수혈해낸 작품이란 의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메가폰을 잡은 플로리안 헬켈 폰 도너스 마르크 감독은 이것을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처럼 보인다. <투어리스트>는 수없이 완성된 장르물의 예시들 속에서 반복되었던 서사들을 공식적으로 응용해낸 또 하나의 판본임을 부정하지 않은 작품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두 배우의 조합이 발생시키는 뉘앙스로부터 기인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건 <투어리스트>가 두 배우의 어울림에서 비롯되는 화학작용의 묘미 덕분이다. 이는 <투어리스트>가 전적으로 두 배우에게 의지하는 영화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투어리스트>는 두 배우의 앙상블이 영화적 재미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작품이다. 음모를 설계한 여자와 음모에 빠진 남자의 로맨스라는 빤한 흐름은 두 배우가 이룬 전형성과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의외성의 조합을 통해 감상적 흥미의 끈을 지탱해낸다. 스페셜리스트의 전형성을 끌어안고 있으나 강인한 여전사의 역할에서 벗어난 안젤리나 졸리와 로맨티스트로서의 전형성을 쥐고 있지만 마이너한 정서로부터 괴리된 듯한 조니 뎁의 출현이 어울리는 장면은 분명 묘한 감상을 야기시키는 지점이다. 최소한 대부분의 관객은 어떤 결말을 의심하면서도 두 캐릭터, 궁극적으로는 두 배우의 연기를 통해 자신의 의심을 끝까지 의심할 것이다. 두 배우는 <투어리스트>라는 영화의 서사가 벗어나지 못한 낡은 장르적 관성에 미묘한 긴장을 부여하는 심장의 양면과 같다.
물론 <투어리스트>는 이 영화가 섭외한 자질의 가능성에 다다랐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영화다. 좋은 요소들과 자질을 품고 있지만 <투어리스트>는 그 모든 조합이 인상적으로 결합된 결과물이라 주장하기에는 감흥이 떨어지는 측면이 없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반전이라 일컬을만한 결말의 임팩트를 주장하기에는 그 결말에 다다르기까지 이를 설득시켜야 할 근거들의 논리가 빈약하다. 동시에 화려한 외형적 요소들이 부추기는 오락적 기대감에 비해 영화의 자극적 강도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 역시 감상의 불만족과 연동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투어리스트>는 할리우드 첩보 블록버스터라는 스케일보다는 두 주연 배우가 캐릭터를 연기하며 발생시키는 캐릭터 영화로서의 묘미로서 장르를 겨냥한다. 거짓말과 같은 이미지를 구사하기 보다는 거짓말과 같은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가는 캐릭터의 본체를 구경하는 데서 재미를 얻어낼 만한 작품인 셈이다. 어쩌면 베니스의 낭만적인 풍경 위에 놓인 이 영화가 로맨스에 주력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그림을 지키기 위해 당장 자금이 필요한 만화가 정배(이선균), 성인잡지의 칼럼을 대필하며 푼돈을 버는 실업자인 탓에 동생의 집에 얹혀 사는 다림(최강희)은 거액의 상금이 걸린 성인만화 글로벌 프로젝트 공모전을 위해 손을 잡는다. 서로 의견을 교환하며 티격태격하던 남녀 사이에 점차 예기치 않았던 감정이 무르익는다. 계약적인 동료 관계가 어느새 감정적인 연인 관계로 거듭난다.
<쩨쩨한 로맨스>라는 제목의 의미는 이 두 커플이 보이는 연애양상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는 서로에게 ‘쩨쩨’해질 수 밖에 없는 대부분의 연애를 겨냥한 비유에 가깝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관계가 긴밀해질수록 서로에 대한 구속적 욕망이 높아지고 점차 갈등을 빚게 되는 연애의 양상이란 자연스레 쩨쩨하지 않고 배길 수 없다. 직접적인 물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의심도 무언의 심통을 통해 확인하려 들기에 갈등으로 번져나갈 뿐이다. 그 과정이 거듭될 수록 진심은 휘발되어 나가고 감정은 통증으로 변모한다.
<쩨쩨한 로맨스>는 기초적으로 서로를 잘 모르던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갈등하며 위기를 건넌 뒤, 얻게 되는 관계의 성숙을 다룬 대부분의 로맨틱 코미디들과 다를 바 없는 작품이다. 그 빤한 연애담을 품고 있는 로맨틱 코미디들이 저마다 차별화된 소재를 발굴하며 관계맺기에 새로운 경로를 설정함으로써 독자적인 재미를 어필하려 들듯이 이 영화 역시도 두 사람의 빤한 관계를 수식하는 특별한 소재의 차용을 통해 개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쩨쩨한 로맨스>는 ‘성인만화’라는 소재를 통해 풋풋할 수 밖에 없는 로맨스의 출발점을 좀 더 농밀하게 치장한다.
특히 중간중간 만화의 이미지를 빌려 ‘야한’ 묘사를 끼워 넣는 아이디어가 <쩨쩨한 로맨스>에 ‘성인용’이라는 수식어를 첨가하도록 허한다. 만화적 이미지를 빌려 묘사한 에로틱한 이미지들의 액자구성 방식은 두 인물의 관계적 진전에 대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동시에 감상자에게 긴장감을 부여함으로써 영화의 형식적 측면에 주목할 만한 특이점을 불어 넣고 감상 자체를 자극하는 효과를 낳는다.
사실 <쩨쩨한 로맨스>는 서사적으로 유연한 작품이 아니다. 서로 각자의 사정을 지닌 남녀가 만나 같은 지점의 목표를 합의하는 과정은 일목요연하지만 이야기투르기의 기승전결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인상이 드는 대목도 여럿 발견된다. 긴장과 위기를 뛰어넘는 결말부 역시 영화가 벌려 놓은 이야기들을 다소 안이하게 봉합해버리는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기승전결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대목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 내리기 보단 인위적으로 조작된 상황처럼 이해된다.
하지만 캐릭터들이 이루는, 근원적으로 배우들의 화학작용에서 비롯되는 앙상블은 <쩨쩨한 로맨스>를 구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강희와 이선균의 어울림은 이 영화에서 가장 주요한 자원이나 다름없다. 언제나 그렇듯 ‘좀 떠 있는’ 최강희가 ‘눌러주는’ 이선균과 어울리며 캐릭터의 합을 이루는 과정은 <쩨쩨한 로맨스>를 보는 관객에게 분명 쏠쏠한 재미를 안기는 지점이다. 동시에 그 주변부에 놓인 조연 캐릭터들은 두 주인공이 이루는 화학작용을 탁월하게 촉매한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 안에서 배우와 캐릭터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증명하는 대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쩨쩨한 로맨스>는 이야기를 읽는 재미는 떨어지지만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로맨틱 코미디인 셈이다.
남편의 죽음 이후로 살림에 어려움을 느끼던 연주(김혜수)는 자신의 2층집에 세입자를 구하지만 좀처럼 방을 구하는 이가 없다. 그런 속도 모르고 딸 성아(지우)는 엄마에게 성형수술을 해달라며 조르기만 하니 엄마 속은 더욱 타 들어가고 매일 같이 잠 못 이루는 밤의 연속이다. 어느 날, 방을 보고 싶다는 남자가 찾아오고 연주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면서도 당장 집세를 지불하겠다는 그의 태도가 반갑기만 하다. 하지만 그 남자 창인(한석규)에게는 모종의 꿍꿍이가 있고, 그는 줄곧 연주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고자 안간힘을 쓴다.
<이층의 악당>은 ‘적과의 동침’이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발전하다 결국 ‘가족의 탄생’으로 종착하는 기이한 로맨스 코미디다. 제목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이층의 악당>은 한석규와 김혜수의 조합만으로 눈길을 끌지만 그에 앞서서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재기발랄한 범죄 로맨스를 연출한 바 있는 손재곤 감독의 4년 만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보다 선명한 물음표를 쥐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층’이라는 구조와 ‘악당’이라는 캐릭터가 부각된 제목처럼 <이층의 악당>은 공간의 활용범위가 탁월하고 캐릭터를 매만지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치 캐릭터를 방아쇠로 당겨 스토리의 곳곳에 매복시킨 뇌관을 폭발시키는 것과 같다. 1층과 2층을 경계로 한 지붕 아래서 거주하게 된 창인과 연주의 관계는 그 자체로부터 새어 나오는 긴장감은 서서히 관객의 몰입을 유도하고, 관계의 전환을 통해 흥미를 지속시키며 그 관계를 통해 불거지는 갈등이나 예기치 못한 감정의 발화를 통해 폭발적인 유머를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이층의 악당>은 창인과 연주의 심리적 거리가 서로 공유하게 되는 동선의 확대와 함께 점차 묘한 심리적 연대로 변모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감정적 설득력을 통해 감상을 지배해나간다. 특별한 목적을 지닌 채 연주에게 접근해 나가던 창인이 연주와 특별한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은 비슷한 부류의 로맨스물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성이기는 하나 <이층의 악당>은 그런 관계의 변화를 물리적으로 묘사할 뿐, 화학적인 감정적 반응을 이야기 안에 구겨 넣지 않는다.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냉정하게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인물과 다소 백치미스러운 오해를 동반하면서도 그의 목적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인물 간의 줄다리기는 효과적인 유머의 기반으로서 손색이 없다.
정말 웃긴데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지하실 시퀀스’와 같이 <이층의 악당>은 두 인물 사이에 놓인 비밀과 접근성을 통해 얻어지는 예측 밖의 상황들을 연출해냄으로써 폭발력 있는 서스펜스와 유머를 찰나에 묶어둔 채 관객이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재미를 끊임없이 개발해 나간다. 시종일관 편차 없이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스토리텔링은 시작과 끝이 깔끔하며 의뭉스럽게 시선을 잡아 끄는 캐릭터들은 예측 불허의 긴장과 유머를 들이밀지만 저마다 쓰임새가 적절하다. 물론 소모적인 캐릭터가 일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층의 악당>은 전반적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안정적인 재미가 더부살이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올해의 물건이라 장담할만한 코미디의 발견이다. 한석규와 김혜수의 앙상블도 흥미롭지만 그에 앞서서 <이층의 악당>은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발견한 손재곤 감독의 검증을 이룬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확실한 의미를 짚게 만든다.
스웨덴 작가 욘 A. 린드크비스트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은 이에 앞서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바 있는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과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홍보에 따르면) <렛미인>은 <렛 미 인>의 리메이크작이 아닌, 동일한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렛미인>은 분명 <렛 미 인>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는, 비교군의 운명을 타고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스웨덴의 적막한 설원을 배경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페이소스와 은밀하게 새어 나오는 서스펜스가 공존하는 <렛 미 인>은 한 소년의 성장드라마이자 잔혹한 멜로이며 특이한 기질을 자랑하는 장르물이기도 하다. <렛미인> 역시 이런 범주의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다. 장르적 특성에 보다 접근한 결과물이라 말할 수는 있지만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은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으로부터 크게 차별화된 이미지를 그리려 노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되레 잔혹한 결말부는 원작보다도 스웨덴 버전의 작품으로부터 얻은 영향력을 감지하게 만든다.
하지만 <렛미인>은 <렛 미 인>과 분명히 다른 작품이다. 스웨덴을 배경으로 둔 <렛 미 인>의 정적인 감수성은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둔 <렛미인>에서도 유효하다. 하지만 두 정서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렛 미 인>이 반투명한 유리 너머의 이미지와 같이 불투명한 감정을 매개로 신비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라면 <렛미인>은 보다 뚜렷한 단선을 지닌 채 보다 감정을 위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보다 확실한 점을 찍어내는 영화에 가깝다.
이는 어린 배우들의 표현력과 기시감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의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감상자가 얻을 수 있는 간접적인 정보의 수집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감상을 완성해가는 전자에 비해 후자는 보다 직접적인 표현을 동원함으로써 영화의 의도를 보다 단단하게 전달한다. 이는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해석적 차이를 좁히고 이를 통해 보다 확실한 형태의 감정으로 관객을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렛 미 인>의 기준에서 <렛미인>은 보다 친절한 영화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협소한 결과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렛미인>을 보다 폄하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렛미인>은 나름의 성취를 품은 영화다. 무엇보다도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둔 <렛미인>은 <렛 미 인>에 비해 보다 정치적인 텍스트를 삽입하고 있다. <렛 미 인>이 감수성과 연동되는 이미지의 활용이 돋보이는 영화였던 것과 달리 <렛미인>은 보다 직설적으로 풍경 자체를 시대적 배경과 연동하며 영화의 해석적 방향성을 변화시킨다. 도입부부터 레이건의 연설을 비추고 이를 중간중간 삽입해나가는 모습은 <렛미인>이 서정적인 뱀파이어물로서의 특이성에서 벗어나 간접적인 정치적 메타포를 웅변하는 작품이란 사실을 예감하게 만든다. 물론 서사적 나열의 차이는 두 영화에서 가장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거리감일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두 영화의 정서적 차이에 한 몫을 거드는 요인이다. 특히 뱀파이어 소녀 애비를 연기하는 클로이 모레츠는 소녀와 여인의 경계를 오가듯 성숙한 감정을 전달하며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다. 이 역시도 스웨덴 버전과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결과인데, <렛 미 인>의 감정적 중심이 소년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에게 놓인 영화였다면 <렛미인>은 뱀파이어 소녀 애비에게 보다 많은 감정적 이입을 하게 되는 영화다. 이는 캐릭터로부터 드러나는 집중력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렛미인>은 <렛 미 인>과 많이 다른 영화는 아니지만 두 영화의 차이는 분명 유효하다. 그리고 두 작품은 감상의 고지를 선점한 작품을 뛰어넘을 만큼의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차기작을 완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체감하게 만드는 좋은 비교군이기도 하다.
<렛미인>을 통해 굳이 <렛 미 인>과의 우월성을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렛미인>은 <렛 미 인>만큼이나 나름의 결정을 품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토마스 알프레드슨에 앞서서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을 먼저 봤다면, 혹은 이 영화가 보다 앞서서 제작됐다면 감상은 얼마나 달라졌을지에 대한 의문은 어쩔 수 없겠지만.
눈빛만으로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이름 모를 남자, 그리고 유일하게 그 눈빛에 통제 당하지 않는 남자 임규남(고수), 두 남자가 만났다. <초능력자>는 그래서 시작되는 영화다. 세상 누구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필요도 없이, 어쩌면 드러낼 수도 없이, 급류처럼 인파가 흐르는 서울 한복판에서 외딴 섬처럼 살아가던 초인(강동원)은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으로 대부업자들의 돈을 탈취해내며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유유히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처럼 돈을 얻어내기 위해 들어선 대부업자의 사무실에서 규남을 만나게 된다.
초능력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을 통해 이미 익숙한 소재가 된지 오래다. 할리우드는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초인들의 운명에 선과 악의 갈등을 입히며 이를 신화적인 이야기로서 발전시켜 왔다.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거나 후천적으로 능력을 얻은 이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악에 대항하는 피로한 삶의 딜레마와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을 토로하지 못하는 고민으로 연동되며 점차 비범한 운명론으로 발전됐다. 적어도 할리우드에서는, 세계의 중심을 자부하는 팍스아메리카나에서는 그렇다.
<초능력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그것처럼 초능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의 눈빛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초인은 그 능력을 통해 세상에 숨어들어간 듯 살아간다. 그에게 그 특별한 능력이란 자기 마음대로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수단으로서 유용할 뿐이며 그는 평범한 타인들과 섞이며 살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진지하게 비관하기 보다는 누구와도 어울릴 필요 없는 삶을 방관하듯 살아간다. 그의 삶에서 체감되는 건 단지 고독이다. <초능력자>의 특별함은 그 특별한 능력을 활용하는 미니멀리즘의 특성에서 발견된다.
이는 대자본으로 기획되는 할리우드의 스케일과 다른 충무로의 입지를 고려한 아이디어의 순기능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창한 슈퍼히어로 서사를 완성하기에는 자본의 너비가 좁은 충무로에서 초능력을 지닌 인간의 대단한 활약상을 전시하기란 무리수다. 이런 여건이 블록버스터의 소재로서 평준화된 상상력 안에서 매몰되어 가던 소재 자체의 특이성을 이끌어내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초능력자>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 외적인 추리를 벗어나서 <초능력자> 안에서 소재가 활용되는 방식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도 <초능력자>는 호러적인 방식을 통해 두 인물의 대립을 긴장감 있게 연출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초능력자>에서 초인에게 조종당하는 인간들이 등장하는 신들은 매번 탁월한 호러적 긴장감을 발생시킨다.
선악의 이분법적 관계를 밀고 나가는 가운데서 두 인물의 연대감이 모호하게 감지되는 건 두 인물이 이 세상과 괴리됐거나 그 사회에서 천대받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능력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듯 사는 초인과 사회의 하층민 청년으로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지내는 규남에게는 연대할 만한 루저로서의 동일한 세대의 감수성이 저절로 엉킨다. 또한 좇고 좇기는 구도로서 대립각을 그리는 두 인물이 서로를 인식한다는 측면에서 두 인물은 서로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인식하는 상대로서 서로에게 역설적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두 인물의 대립각 구도에는 서사적인 개연성이 충분하지 않다. 특히 <초능력자>가 초인과 규남의 대립구도를 덩어리 삼은 뒤, 이를 시퀀스의 조각처럼 나누어 굴려나가는 영화라고 생각했을 때 초인을 좇는 규남의 태도에는 보다 긴밀한 개연성을 위한 설득이 가미되어야 마땅하다. 그가 단지 ‘순진하고 착한 청년’이라고 쉽게 건너뛰기에는 치열한 추격전의 양상이 만만치 않다. 캐릭터 관계를 통해 서사를 밀고 나가는 만큼 그에 대한 설득력이 약해진다는 건 곧 이야기 자체의 설득력도 동시에 약해짐을 의미한다. 그 결함을 다분히 우연에 기대어 메우려는 시도가 종종 엿보이는데 이런 무리수는 소재 자체가 발생시키던 흥미를 떨어뜨리고 극적 몰입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에 가깝다. 초속은 좋은데 가속이 약하다.
하지만 <초능력자>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히든카드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한국어를 더빙시킨 것처럼 유창하게 한국말을 구사하는 두 명의 외국인 배우다. 두 배우는 강동원과 고수의 결합에 주목했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의외의 발견이 될 것이다. 존재만으로 극적 흥미를 배가시키고 보다 차별화된 웃음 코드를 제공함으로써 소재 자체의 특이성과 함께 영화 자체에 묘한 흥미를 돋운다. 농담 섞어 말하자면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직업 창출에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랄까. 물론 그것이 영화적 한계를 보완할 정도라는 의미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