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것까진 알 수 없지만 이거 하난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3D디지털 이미지에 심취한 저메키스는 이제 더 이상 실사적 세상을 뷰파인더로 관찰하지 않는다. 북유럽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양각의 세계로 구현한 저메키스는 이제 디지털 세계의 조물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크루지(짐 캐리)는 마주선 이들을 질색하게 만드는 지독한 수전노다. 그에게 크리스마스란 놀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 만들어낸 혐오적 하루일 뿐이다. 그에겐 크리스마스 파티는 낭비고, 웃음은 사치이며, 길거리의 찬송가마저 소음일 뿐이다. 그런 그의 삶에 대단한 반전이 찾아온다. 언제나처럼 홀로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을 보내던 스크루지는 7년 전 죽은 동업자 말리의 혼령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3명의 유령이 찾아올 것이란 말을 전해 듣게 된다. 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세 유령과 스크루지의 만남을 다룬 <크리스마스 캐롤>의 플롯은 동화적 교훈극의 온화함이 깃들어 있던 원작과 달리 호러와 판타지가 뒤엉킨 환상적 이미지로 재현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마냥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그와 반대로 디지털 캐릭터의 불완전한 형태에 실제적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체계를 응용해 실제적 이미지를 허구의 세계관에 실현시키고자 한 이입적 시도였다면 후자는 실사적 표현력을 허구적 세계관에 어울리는 이미지로 리모델링하는 디지털 부호의 변환적 시도에 가깝다.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에 함몰된 실제적 배우의 외양은 희미한 형태를 간직하거나 온전히 자취를 감춘 채 영화적 세계관에 철저히 복무한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는 언제나 저메키스의 영화를 혐오하게 만들거나 폄하하게 만드는 한계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언캐니 밸리란 음산한 작품의 톤에 어울리는 적절한 장치적 효과로서 성과를 발휘한다. 시체의 눈이라는 비아냥을 얻는 디지털 캐릭터의 눈과 얼굴은 역설적인 효과적 표현력을 얻는다.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기본적인 요소로서 삼아 호러적 이미지를 확장하는 한편, 판타지적인 입체감을 덧씌운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기술적 한계마저도 작품을 위한 표현적 질감으로서 설득시키는 적절한 맞춤형 선택처럼 보일 정도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이 종종 과욕적 이미지를 선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입체적 이미지를 감상하기 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적인 쾌감이 이를 적당히 보충하는가라는 질문에 확답을 내리기 어렵다. 동시에 저메키스가 <크리스마스 캐롤>을 위한 맞춤형 효과로서 3D디지털 비주얼을 활용했다기 보단 지난 실험의 연장선상의 연결고리에서 시도를 거듭하는 가운데 <크리스마스 캐롤>의 효과를 후발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닌가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적이며 그것이 집착을 넘어선 발전적 지향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불가피하다. 중요한 건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이다. 그 여부에 따라 저메키스가 꾸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 역시 가치적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디지털 캐릭터 아래 놓인 짐 캐리의 흔적이다. 그는 3D디지털 부호의 숲 안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기본기를 설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화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용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에 올인 중인 로버트 저메키스는 북유럽 영웅 서사시를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부호로 재생시킨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을 떨치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자신이 혐오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7년 전 사별한 동업자 말리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3명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된다는 플롯은 저메키스를 통해 환상적인 디자인을 입고 재생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인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 안에 실제 배우의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을 가상에 안착시키기 위한 극사실적인 전이적 실험이었다면 후자는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적 형태를 지워내고 새롭게 창조된 가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변환적 실험에 가깝다. 전자가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했다면 후자는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한 셈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성공적 방식이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조차도 음울한 영화의 톤에 어울리는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크리스마스 캐롤>은 허구적인 가상성에 어울리는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구축하고 이미지의 입체적 환상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3D비주얼이 필수적인 의상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 때때로 과욕적 활용처럼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 전체적인 형태가 과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을 설득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상이 단순히 <크리스마스 캐롤>에 대한 맞춤형 효과로서 3D 비주얼과 디지털 캐릭터를 활용했을까, 라는 의문도 동원될 필요하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이며 때때로 그것이 집착을 넘어서는 발전적 지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답하기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에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꿈 역시도 판단가치를 얻을 만한 산물인 셈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짐 캐리다. 그는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의 숲 속에서도 유효한 아날로그적 기본을 설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보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효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2005년에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쉐인 액커는 이를 통해 팀 버튼과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었고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서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자체가 생략됐으며 캐릭터의 대사조차 동원되지 않는 탓에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계관이지만 폐허와 같은 이미지 위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의 탁월한 액션신이 담긴 11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에 대사를 입히고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암시를 동원한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됐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창조된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한다. <9: 나인>(이하, <9>)은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와 같은, 기계문명에 의해 공격받는 인류의 비관적 묵시록을 스팀펑크(steampunk) 이미지에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 남은 건 인간을 말살한 기계들과 피부대신 천을 두르고 살아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인형들이다. 멸종된 인간이 남긴 문명의 잔해 위에서 인간을 말살한 인공지능 기계로봇에 맞서 생존적 저항을 펼치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활약을 묘사한다.
등에 적힌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는 9개의 인형 캐릭터는 제각각의 뚜렷한 개성을 통해 상대로부터 차별화된다. 인간만큼이나 부조리한 반면, 현명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저마다 이성과 감정의 양면성을 갖추며 사고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인간의 세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처참한 풍경이지만 이는 딱히 불행을 인식시키지 않는다. 이는 그 폐허 위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인간들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이 사라진 영토를 차지한 존재들은 인간의 비극을 감지할 수 없는 로봇과 인형에 불과하다. <9>은 마치 인류가 사라진 묵시록의 대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창세기처럼 보인다. 폭력적 진화 속에서 멸망을 자초한 인류는 자신들이 건축한 세계로부터 퇴장 당하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멸망 당한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적 존재들이다.
<9>은 비범한 서사보다도 가벼운 묘사를 통해 매력을 어필하는 작품이다. 세계관의 기원과 캐릭터의 근원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고 암시조차 소극적이다. 하지만 문명에 대한 비관적 뉘앙스로 그려진 세계관은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치장하는 거대한 소품에 가깝다. 인류는 그저 사라져버린 종에 불과하며 이는 <9>에서 딱히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폐허가 된 문명 위에서 인류가 남긴 폭력적 문명에 대항하며 생존을 위한 대결을 펼쳐나가는 새로운 종의 투쟁 그 자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포착된다.
물론 <9>에선 인류의 문명에 대한 비관과 조롱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9>에서 그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기란 어렵다. 이는 <9>이 그 세계관을 병풍처럼 두르고 방치하는 덕분이다. 암울한 세계관을 인테리어처럼 두른 채 창조적인 캐릭터들이 이루는 동선을 따라 구사되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고차원적인 해석의 의욕을 차단하는 동시에 일차원적인 시각적 묘미를 부여한다. 인류의 흔적을 지워버린 묵시록적 세계관을 스팀펑크의 이미지로 디자인하고 테크놀로지 기계 문명과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의 대결 구조를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확보해나간다. 비관적인 세계관은 낡은 천을 두른 인형 캐릭터들의 창작적 개성을 통해 암울함을 잊은 채 서스펜스를 구사하기 위한 응용적 배치로서 소모될 뿐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구현하는 <9>에서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건 <9>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끽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여건에 가깝다. 창의적인 이미지가 구현하는 시각적 묘미를 부담 없이 즐기면 그만이다. 거창한 이미지를 통해 비범한 의미를 치장하지 않고 빠르고 신속하게 제 위치를 선점해나간다. 그런 면에서 <9>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의 오락적 너비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라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면 시리즈가 보장된다. 특히 캐릭터의 매력이 중시되는 애니메이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드림웍스가 자사의 프랜차이즈 캐릭터들을 우려먹으며 시리즈를 거듭해나갈 수 있는 것도 그런 덕분이다. 하지만 최근 <슈렉3>, <마다가스카2>와 같은 기대 이하의 속편을 공개하며 도태되는 드림웍스의 작품들이 증명하듯 단지 잘 나가는 캐릭터의 인기 하나만으로 시리즈를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은 망상에 가깝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캐릭터의 매력도 함께 닳고 닳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이스 에이지3: 공룡시대>(이하, <아이스 에이지3>)는 의미 있는 속편이다. 의미 있는 애니메이션을 창작해내는 픽사의 정반대의 영역에서 나름의 의미를 추구했다 해도 좋을 만한 <아이스 에이지3>는 순수 엔터테인먼트의 야심으로 점철된 코믹 어드벤처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두 편의 전작이 보유했던 캐릭터들의 매력이 고스란히 보존되는 동시에 새로운 캐릭터를 수혈하며 새로운 스토리를 보충한다. 물론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이스 에이지3>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러 가는 이들의 모험담에서 가족주의적 서사는 지극히 뻔한 사연에 불과하다.
그 뻔한 바탕에 특별한 묘미를 새겨 넣는 건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유머와 시각을 공략하는 이미지다. 특히 디지털 3D로 제작된 이번 작품은 입체적 영상의 묘미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노골적인 이미지가 곳곳을 메우고 있다. 또한 빙하기 동물 캐릭터들의 입심 좋은 유머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은 쏠쏠한 오락적 묘미 그 자체다. 특히 새로운 시리즈에 걸맞게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 벅(사이몬 페그)은 기존의 캐릭터와 함께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새로운 사연에 어울릴만한 필연적 매력을 발생시킨다.
순수한 오락물이라는 측면의 의미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가치가 없다고 평할 수 있는 <아이스 에이지3>는 말 그대로 자신의 의도 자체를 명확하게 관철시키는 작품이다. 세 편의 시리즈를 이어나가는 가운데서도 좀처럼 도태되지 않는 오락적 감각은 분명 이 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매력이자 동시에 이 시리즈의 존재 이유를 위한 설득적 가치에 가깝다. 전작들로부터 물려받은 순수 엔터테인먼트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새롭게 발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최소한 자신의 장기가 녹아 내리지 않게 만드는 동시에 새로운 매력으로 더욱 두터워진 시리즈란 점에서 미덕이 있다.
드림웍스가 자사의 프랜차이즈 캐릭터들을 우려먹으며 속편 증후군에 빠진 것과 달리 폭스의 <아이스 에이지3: 공룡시대>(이하, <아이스 에이지3>)는 다시 한번 캐릭터의 위력을 톡톡히 이어나간다. 의미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의 정반대 영역에 놓인 듯한 <아이스 에이지3>는 순수 엔터테인먼트의 야심으로 점철된 코믹 어드벤처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두 편의 중심캐릭터들이 여전한 매력을 과시하는 가운데 새로운 캐릭터가 신선함을 더한다. 단순한 스토리에 양념 같은 유머를 가미하고 효과적인 이미지를 치장시킨다. 특히 3D 방식으로 제작된 이번 시리즈는 그만큼 이미지를 통해 건져 올린 오락적 묘미가 쓸만하다. 입심 좋은 캐릭터란 면에서 성인에게 어필할만한, 빙하기의 동물 캐릭터의 귀여운 이미지는 아동들에게 어필할만한, 단순한 스토리에 딴지를 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만큼 순수한 오락적 자질이 충만하다. 무엇보다도 기존 시리즈로서의 매력이 녹아 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속편이라 할만하다.
과거 드라마나 영화 더빙 경력이 많으셨으니까 더빙 자체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 자체엔 어려움이 없었어.
그렇지만 혹시 애니메이션 더빙과 실사영화 더빙 사이의 어떤 차이를 느끼신 바가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이제 만화영화에서의 표현은 조금 과장되거든. 인물이 소리지르거나, 호흡한다거나, 과장이 많죠. 그래도 <업>은 사실적인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 공상과학영화나 치고 받는 액션 영화는 외형적인 걸 중시하니까 좀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영화 같은 경우, 과거의 고전이나 명화 같은 작품은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실질적으로 과거의 명배우들이 나와서 표현하는 건 개인적인 톤 깊이가 있으니까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에요. 그러니 후시 녹음에서 그런 걸 보완할 수 있겠느냐란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런 건 오히려 자막을 흘려서 관객들에게 배우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하는 것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정서를 부여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만화는 그렇지 않고, 약간 과장하면 되는 거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표현이 단순하니까, 아마 그런 차이가 있을 거에요.
애니메이션 더빙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나요?
처음에는 하지 않으려 그랬지. 무슨 만화 더빙까지 하라고 그러냐 싶었어. 그런데 주최측에서 상당히 간곡하게 요청을 하더라고. 캐릭터가 성격상 나하고 비슷하다, 영화가 아주 좋다, 그러면 한번 보자. 그래서 봤더니 아주 좋아. 특히 요즘 어린이용 만화라는 게 죄다 살벌하고, 삭막하고, 거칠고 좀 그렇더라고. 어린이용 만화는 좀 환상적이어야지. 그래서 어린애들이 그 만화를 보고 꿈을 그릴 수 있어야 돼. 맑고 깨끗하고 고운 정서를 집어넣어야 되는데 거칠고 전투적인 것들이 횡행한단 말이야. 지금도 텔레비전 보면 여러 만화가 나오는데 그림도 이상하고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어. 메시지도 없고. 그런데 <업>은 환상적이면서도 사랑이 있고, 교훈적인 메시지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대단히 감동적이고 상당히 좋은 영화란 생각이 들어요.
웬만한 실사영화보다도 디테일한 표현력을 구사하기도 하죠.
그럼, 표현이 아주 디테일하잖아요. 대단히 사실적이죠. 내가 우리 학교 아이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요. 이런 만화영화는 봐라. 거기에 연기의 기본이 담겨있다. 2중, 3중 적인 연기의 깊이가 나오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연기의 개념은 이 작품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고 있다. 표정이라던지, 제스처라던지, 발성이라던지, 이런 부분을 심도 있게 보면서 연기의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얘기란 말이에요. 애 표정도 그렇고, 영감 표정도 그렇고, 인형이 나올 뿐이지 사람이 나오는 것과 똑같아. 아주 기본에 충실한 영화란 말이에요.
작년에만 드라마 세 편을 하셨고, <라이프 인 더 씨어터>라는 연극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끼신 적은 없으셨나요.
사실 우리 부계 쪽은 (체질이) 좀 약해요. 그런데 다행히도 강한 모계 체질을 타고 나서 내가 우리 어머니한테 감사하고 있지. 매일 같이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정이 과제처럼 나오는데 아직까진 한번도 그 과제들을 빼먹은 적이 없어요. 거의 다 수용했단 말이죠. 오늘 같은 날도 어제 (새벽) 4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촬영이 끝났단 말이에요. 지금 내 파트가 3개 정도 남았는데 내 앞에 임시 파트를 찍고 나서 2시 반부터 촬영을 시작했다가 한 3시 50분 정도에 끝났나. 그런데 내가 오늘 8시에 MBC 골프동호회 때문에 필드에 나가야 된단 말이에요. 약속이 돼 있으니까, 못 가면 안되지. 그래서 거의 못 자고 거기 가서 골프치고 온 다음에 지금 여기에 온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책임감이 중요해요. 내가 맡은 일은 쓰러지기 전까진 충실히 이양해야 된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그렇게 하게 되는 거지.
<굿모닝 프레지던트> 촬영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영화도 정말 오랜만이십니다. 2006년도 즈음에 <모두들, 괜찮아요?>와 <파랑주의보>로 오랜만에 영화에 복귀하셨죠. 그 이후로 다시 첫 영화입니다.
70년대 중반까지 하고서 거의 못했으니까 한 20년 동안 공백기가 있었던 거지. 그 다음부턴 한국영화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 이후에 생긴 영화들은 너무 젊은 영화라 우리가 출연하기엔 적절치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한 3~4년 전에 잠시 나와서 한국영화의 현상 변화를 봤더니 너무 많은 변화가 왔다라는 거에요.
아무래도 공백이 길었던 만큼 현장 시스템의 변화를 절실히 체감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럴 정도로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건 아무래도 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 바가 크지 않았나 싶은데요.
7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영화가 주저앉아버렸던 거지. 그리고 80년대 들어서 제작되는 작품이 적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당시 흥행감독들조차 안되겠다 싶어서 작품 세계를 바꾸면서 자기 변신을 시작하던 때란 말이죠. 그렇게 성공한 케이스가 임권택 감독인데 어쨌든 난 그 무렵이 한국영화의 변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무렵에 상대적으로 텔레비전이 바빠지기 시작하니까 영화 쪽에 신경 쓸 수도 없었고, 이상하지만 그 동안에 프로포즈도 없더라고. 내가 인위적으로 기피한 건 아니야. 그런 조건 때문에 영화에 뜸했던 거지. 게다가 아무래도 테레비 드라마 작업 조건 때문에 스스로 찾아 다니면서 영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래서 생긴 공백이었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아무래도 요즘 한국영화가 작품성보단 흥행성에 기준을 두고 제작되고, 그렇기 때문에 젊은 주인공 위주의 영화를 만들게 되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던 거지. 물론 TV도 마찬가지지만. 그런데 근래 와서 한 명, 두 명, 나이 먹은 배우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얻게 되니까 점점 참여 폭이 넓어지는데 아무래도 나 역시 이런 일환으로 이번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최근에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 씨가 있기 때문에 <마더>가 가능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배우를 존중하는, 그리고 배우의 관록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감독이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니었을까요?
그럼. 그런데 외국에서는 다 그렇잖아. 영화의 영역이 다양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역량 있는 배우들을 가지고 연기 중심의 영화도 만들 수도 있는 거고, 메시지를 만들 수도 있는 거고, 그럴수록 화제가 다양해지니까. 서양에서는 아직도 그런 가치가 공존하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유행하는 소재가 하나 생기면 다 그 쪽으로만 몰려가서 어느 한쪽이 비어버린다고. 그 동안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낄 수 있는 영역이 없었지. 한 땐 텔레비전도 그랬으니까. 젊은 배우들 고액 출연료를 주다 보니 출연료 문제도 생기고, 그러니까 다른 부분은 다 빼버리게 되는 거에요. 무슨 홀어머니, 아니면 홀아버지, 이런 식으로 구성하는 경향도 생기고. 그런데 요즘 많이 달라진 게 그것만 가지곤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현시점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 같아. 요즘 텔레비전에서도 다양한 소재가 생기고 영화에서도 생기고, 이런 것들이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가운데서 우리도 뭔가 진로를 모색해야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요.
미스터리 스릴러 같은 영화에서 노수사관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셨던 적이 있었죠.
김성종 씨의 미스터리 작품들을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싶은데, ‘어느 창녀의 죽음’같은 작품에서 나오는 오영수라는 캐릭터가 상당히 재미있단 말이에요. 외국에서도 나이 먹은 배우들이 노련미를 발휘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들이 있잖아요. 그런 경향에서 요즘 젊은 친구들의 다이나믹한 액션도 필요하겠지만 노련한 수사관의 관록을 보여주면서 신구(新舊)가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데, 과거 불란서에서 장 가방(Jean Gabin)이 알랭 들롱(Alain Delon)과 같이 출연한 갱 영화-<암흑가의 두 사람>(1973)-처럼 말이죠. 관록 있는 배우의 노련미가 관객에게 신뢰를 주고 영화를 버텨나가게 만드는 믿음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미스터리라는 게 사실 대단히 과학적이고 계산적인 분야라서 나름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만큼 쉬운 장르는 아니겠지만 배우로서 한번 해볼만한 재미있는 조건이 아닐까 싶은 거에요.
요즘 각광받는 후배 배우들 가운데 연극 무대 출신 배우가 많습니다.
당연한 건 지금 화술들이 다 엉망진창이라고.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젊은 친구들 보면 말이 안 돼. 말을 못해. 말은 못한다는 게 벙어리란 뜻이 아니라 일상용어가 그런대로 통할 뿐 캐릭터가 구축이 안 된다는 말이야. 왕을 하면 왕이 나와야 되는데 왕 같지가 않고 모자라고 바보 같은 왕이 나온단 말이지. 그런데 그 왕들이 그런 왕들이 아니란 말이야. 인물을 표현하고 해석할 땐 이중, 삼중의 깊이를 가지고 표현해야 되는데 단순히 표피의 일면식만 가지고 표현해버린단 말이야. 껍데기만 보인단 말이지. 결국 시늉만 하고 마는 거야. 학예회 수준이라고. 그런 건 누구나 다 해. 변호사면 변호사답게, 젊은 대학생이면 대학생답게, 수준에 어울리는 지적 표현이 나와야 할 텐데 그게 안 된단 말이야.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 좋은 조건을 가진 주인공들이 나와서 뭔가 얘기하는데 맨날 지적 표현이 안 되고 있어. 쉽게 얘기하면 깡패나 양아치는 잘 하는데 그 외의 캐릭터는 잘 안 된단 말이야. 본인들도 의식해. 그게 왜 그러냐. 화술이 안되기 때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배우의 필연적 조건은 언어구사력이란 말이야. 그런데 이게 요즘 무시되고 있다고.
아무래도 배우로서의 경험적 내공보다도 자신의 이미지를 돋보이게 할만한 캐릭터에 치중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보다도 그런 사람들을 선발해서 쓰는 조건이 잘못된 거에요. 충분한 훈련을 시켜서 화술을 터득시키고 이만하면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설 때 등장시켜야 되는데 이건 초벌구이도 안하고 그냥 나온단 말이야. 과수원에서 과일 따다가 농약도 안 닦고 그냥 내놓는 거란 말이지. 사과 하나를 따더라도 일일이 포장하고 이만하면 먹음직스럽겠다 싶어서 내놨을 때 팔리는 거지, 농약 묻은 거 그냥 따가지고 내놓으면 팔리겠냔 말이야. 우리가 지금 드라마를 그런 식으로 만들고 있는 거야. 사실 우리 젊은 친구들이 좋은 능력과 자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훈련을 안 시킨 거란 말이야. 기초가 취약한 바람에 그렇게 된 거야. 그건 본인들에게도 상당히 안타까운 문제고, 시청자들을 위해서도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지.
대학교 강단에도 서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내 수업시간은 일주일에 하루 4시간이에요. 단지 내가 그것만 하려면 학교 나가는 의미가 없어요. 그걸로는 가르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래서 내가 너희들이 정 필요하다면 내 시간을 할애하마, 그렇게 한 7년 전부터 워크샵을 시작한 거야. 한 학기 동안 레퍼토리를 준비해서 석 달 동안 매일 연습합니다. 저녁 10시부터 밤 11시까지. 일단 화술부터 진행해. 말부터 시작하는 거야. 내가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석 달을 매일 연습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도가 6~70% 밖에 안 돼. 그 때 말하지. 봐라, 연기란 게 이렇게 어려운 거란 말이야. 너희들 TV보고 그게 연기의 다라고 생각하면 안 돼. 이번엔 다시 학부 3학년들을 데리고 똑 같은 작업을 가을에 해야 돼요. 그걸 7년째 하고 있다고.
학생들이 힘들어하진 않나요. 일단 선생님도 힘든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나한테도 그래. “괜히 고생해서 할 필요 없지 않냐.” 사실 나도 월급이라고 주는 거 별거 없거든. 그런데 일주일에 하루 4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어. 소위 연기를 하려는 애들에게 보탬이 되지 않아. 내 양심에 비췄을 때는 그래. 내가 비는 시간은 매일 나가요. 그럼 일주일에 4~5번은 나가게 된다고. 최소한 3번 정도는 나간단 말이야. 내 작업 끝내고 밤 늦게라도 가니까. 사실 이 아이들도 일주일에 내 강의는 4시간만 때우면 되는데 매일같이 나와요. 그게 보통 힘든 게 아니란 말이야. 옆에서 그러지. “저녁에 놀기도 해야지. 괜히 시간 아깝게 이럴 필요 없지 않냐.”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야. 재미있는 건 석 달 동안 한 명도 빠지지 않는다는 거. 한 명도 안 빠져. 자기들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밤 새면서 같이 작업하는 거야. 이게 지금 7년째 내려오는 거야. 그러니까 2학년이 들어오면 나한테 하는 첫 인사가 이거야. ‘3학년 될 때까지 계실 겁니까’ 물어보는 거야. 왜? 지네 선배들한테 듣는 게 다 있거든. 그렇게 해야 연기를 좀 터득할 수 있는 거에요.
연기에 대한 기술적 지도와 함께 연기에 접근하는 자세를 함께 수업한다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연출자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화술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직접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새가 모이를 물어다 먹이듯 초보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설명이 필요한 방송이 있어요. 그걸 바탕으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란 말이죠. 그런데 그 기본이 안되면 창의력도 발휘될 수 없어요. 배우가 되겠단 아이들이 대사는 못하면서 괜히 춤추고 노래만 한단 말이야. 희곡이나 영화에서 지적이고 철학적인 캐릭터나 대단히 높은 수준의 인격체가 될 땐 대사만으로 그 캐릭터가 나와줘야 되는데 지금 이런 식으로 어떻게 그런 캐릭터가 나오겠냔 말이야. 그걸 석 달 동안 훈련하는 거야. 내 방식이 다 정확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배우니까 비슷하게는 가르칠 수 있단 말이지.
그래도 칭찬해주고 싶은 후배 배우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후배들 많지. 용모나 자질은 다 훌륭해. 다만 좀 더 구체적인 훈련을 더해서 연기에 대한 개념을 이해시키고 말하는 법, 표정 쓰는 법, 동선, 이런 것도 터득시켰으면 하는 거지. 이런 걸 뛰어넘는 게 문제라는 거에요. 한 6개월만 가르쳐도 좋은 재목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그네들 문제가 아냐.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인 거지. 그러다 보니 그 좋은 소재를 가지고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하고 한 두 작품 하다가 안타깝게 밀려나는 거란 말이야. 좋은 배우들은 많지. 여자 같은 경우는 여럿이 있지만 예를 들어서 고두심, 김해숙, 김영애, 이런 일련의 배우들, 김혜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더 아래로 내려오면 김희애, 그리고 하희라, 이런 애들, 아주 야무지게 잘한단 말이야. 제대로 연기를 해요. 남자들도 마찬가지고. <베토벤 바이러스>를 같이 했지만 김명민 같은 경우 캐릭터를 대단히 깊게 연구하고 만들어냅디다. 자세도 진지해. 그런 배우들이 좋은 배우가 되는 거야. 평생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거란 말이지. 단순히 돈 버는 스타의 개념하곤 다른 거야.
톱스타의 위치를 점하면서 좀처럼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 배우들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죠.
연예인도 수익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으니까 이것 저것 다 하긴 해야 되는데, 저게 배우인지 연예인인지, 모델인지 구별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아. 배우는 아무래도 텔레비전이든, 영화든, 연극을 하든, 출연해서 연기를 함으로써 그 진가가 나오는 거지. 광고만 하면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없단 말이지. 적절하게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제 연기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작품에 출연했으면 하는데 왜들 출연도 안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단 말이야. 결국 그러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한 40대쯤 되면 그 동안 쌓아왔던 게 다 없어져버리는데.
<업>처럼 좋은 애니메이션이 나올 수 있는 건 모든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에 결과가 중시되고 과정이 간과되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결과를 쫓아가면서도 과정을 무시하는 풍토가 그런 면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고요.
지금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그거야. 우리는 탁월한 자질을 가진 민족이야. 개체적으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나라 똑똑하지. 능력 있고 잠재력이 있어. 스포츠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도 대체적으로 걸출하잖아요. 삼성을 일부로 띄우는 건 아니고 산업적인 측면에서 삼성의 기술력은 확실히 세계적인 거 아니오. 이렇게 훌륭한 우리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되는데 거기에 정치가 뒷받침을 해줘야 된다고. 사실 그 동안 목표만 향해서 뛰다 보니까 그냥 지나친 데가 많단 말이야. 기본이 약해졌다 이거지. 이젠 그런 걸 착실하게 다져나가잔 얘기야. 그런 바탕을 다시 다지는 거지. 과거 우리 때는 여러 가지로 분배의 문제가 있었단 말이야. 분배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요령을 써서 뒷거래를 한다거나 해서 그걸 채워 넣으려 했거든. 그래도 지금은 차이가 느껴진다 해도 대체적으로 잘 나온단 말이야. 그러니 이젠 차분하게 하나씩 인성 같은 부분을 잘 다져서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선진국형 인격체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되지 않겠나. 늘 우리 대학생들한테도 얘기하는데 ‘너희들 시집, 장가 가면 애들 잘 키워라. 인성을 바탕으로 해서 제대로 키워라. 어른 보면 인사 꼬박꼬박 잘 하는 아이들, 사회 질서 잘 지키는 아이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들로 키워라’ 어려서부터 잘 가르쳐야 된단 말이죠.
교육에 대한 문제도 항상 개선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교육이란 게 사회 발전의 잠재력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서의 교육적 가치관은 지나치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이라는 건 학교와 가정이 일치가 돼야지, 학교 따로, 가정 따로 하면 안 돼요. 학교 선생한테 가서 애 벌 세운다고 따지고, 이딴 짓 하지 말란 말이야. 선생이 애를 특별히 미워하지 않는 이상, 그건 참견하는 소리나 다름없지. 어디 선생님 귓방망이 때리고 발로 걷어차고, 그딴 놈이 어디 있냔 말이야. 그런 놈이 사회에 나와서 뭐가 되겠어. 가까운 나라에선 다 그렇게 하고 있잖아. 일본 같은 곳도 백 년의 교육적 가치관이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고. 옳다고 생각하니까. 우리는 이놈의 입시교육으로 집약돼서 나머지 교육은 지나치게 무시되고 있어요. 얼마 전에 교육부 장관을 만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대학 가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게 기본 인성교육이다. 3살, 4살짜리 유아들의 인성교육부터 문제가 있다. 그러니 유치원부터 제대로 교육을 시켜서 초등학교로 가자 이거야. 이런 것도 관심을 좀 가지라고.
예전에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도 하셨습니다. 요즘 시국이 어지러운데,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안타깝지. 지금 나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하나의 문제점을 느끼고 있단 말이에요. 과연 국회가 저렇게 극단적인 두 개의 평행선으로 달려야 되는 건가. 한국의 정치 현실이 그런 건가. 지금 우리의 위상이 그 정도 밖에 안되나. 안타깝기 그지없단 말이에요. 중요한 부분은 뭐냐. 어쨌던 간에 우리가 사는 터전은 대한민국이고, 정치의 궁극적인 몫은 대한민국의 번영과 대한민국 국민의 복지라고. 난 그 가치관엔 여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조건을 두고 왜 타협을 못하고 조정이 안되냔 말이야. 왜 무조건 상대한테 반대만 하려 하고, 왜 무조건 밀고 나가야 되느냔 말이야. 이젠 그 놈의 정치가 좀 선진화돼야 될 거 아니야. 과거엔 국민들이 정치 수준을 못 따라간다고 판단했지만 지금은 정치가 우리 수준을 못 따라오는 거 같아요. 이런 부분에서 심각한 자기 반성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아무래도 정치권과 국민들과의 소통이 좀처럼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몇 가지 정책들이 논쟁 사항이 되고 있습니다.
정책이라는 걸 오픈해서 같이 검토하자는 거야. 지금 문제가 되고 있지만 비정규직법이나, 미디어법이라던가, 4대강 문제라던지, 그게 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따져보고 구체적으로 까보자는 거야. 국민들한테 구체적으로 설득을 해보라 이거야. 어느 한쪽의 논리만 주장할 수 없는 거 아냐. 상호간의 장단점이 다 있을 테니까. 국민을 설득하도록 만들자 이거야. 그렇게 가야지, 무조건 된다, 안 된다, 이게 뭐냔 말이야. 그러니까 이건 소위 A라는 시스템이 집권했을 때 어느 정도 이룬 발전이 있다면 그 다음에 정치 입장이 다른 B라는 시스템이 집권한다 해도 그 바탕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이게 도로아미타불이라고. 죄다 엎어버리면 맨날 제로섬에서 시작된단 말이야. 이건 국가발전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거지.
아무래도 사회가 발전하는 것과 반대로 정치는 더욱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히려 정치가 우리 사회 발전에 상당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이젠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란 말이야. 이젠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뤘어. 그럼 시야를 돌려서 밖으로 평정을 해나가야 될 시기란 말이야. 그러려면 인위적으로 어느 한쪽으로 몰고 가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다양한 역량 가운데 좋은 역량들을 결속하고 합의해서 다 같이 일률적으로 밀고 나가야 될 거 아니야. 거기에 정치가 뒷받침을 해줘야 될 텐데 뭐 하는 짓거리냐 이거야. 그것도 집권을 안 해봤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다 집권해 봤잖아. 이제 정권교체도 가능해졌단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정책 개발을 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라고 국민들이 선택한 거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국민들이 선택할 가치가 없어지고, 목표가 없어졌다면 이건 대단히 한심한 얘기가 돼버린 거란 말이야. 그러니 이제 정치가 좀 선진 수준으로 가야 하지 않겠냔 말이지.
한예종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실 한예종 사태에 대해서는 내가 내용을 잘 몰라서 큰 관심을 두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정부 차원의 자체적인 판단이 문제가 된 거지. 일단 나도 정치라는 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야. 그런데 그것도 사실 과거 정권에서 코드 정책으로 싹 입수해버린 결과의 후유증 가운데 하나라고. 앞의 정권에서 한 일도 따져야 한다 이거야. 과거 보수 언론에서도 문제를 지적했지만 한예종도 그렇고, 영화진흥위원회도 그렇고, 그게 예전에 잘 됐다면 누가 뭐라고 말 못한다고. 그런데 결국은 부실하단 말이지. 그러면 이제 새로운 정권에서 문제를 따진단 말이야.
경험적으로 느끼신 바라도 있나요?
내가 중랑구에서 문화원장을 할 때 얘기를 좀 해보자면 그 당시 구청장이나 위원들은 다 내 반대쪽이었어요. 내가 중랑구에서 아직까지 사회복지회 회장을 하면서 이 지역의 복지시스템을 총괄하고 있었지만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하는 것도 싫어해. 특히 이상수 (국회의원) 같은 사람은 내가 정치를 더 이상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얼씬거리는 것도 싫어한 사람이야. 내가 지역 도내이션(donation)으로 임기를 유지하면서 그때까지 5년을 하고 있었다고. 그러니까 구청장은 어쩔 수 없이 날 모신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래서 내가 성을 냈어. "염려하지 마라. 내가 이걸로 정치영향력을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랬지만 이미 내부적인 실무 인선은 자기 식구로 만들어 놨어. 사무국장부터 말단직원까지 자기 식구들로 다 박아놨다고. 나만 외톨이야. 그런데 내가 5년 동안 이 친구들하고 일하다 보니 이 친구들이 결국 나한테 다 동화되더란 거야. 그런데 구청장이 다시 내 쪽으로 바뀌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젠 이 친구들이 내 쪽에서 눈에 가시처럼 보이니까 또 다시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 내 아래 사무국장이 우리 쪽이 아니라고 쫓아내려고 드는 거지. 그래서 내가 동반으로 관뒀다고. 왜냐. 이 사람 열심히 했다 이거야. 나하고 정치 입장이 다르지만 열심히 하면 내가 분명히 알아줘야지. 내 밑에서 사명을 가지고 열심히 했는데 이제 우리 쪽에서 자기네 식구를 동원해야 한다고 싫어하는 거야. 새로 온 구의원 놈들이 뻣뻣하게 군다고 싫어하는 거야. 그래서 결국 씹어서 갈아버린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왜 갈았냐?’ 그랬더니 어쩌고, 저쩌고, 뭐라 그래. 그래서 “내가 5년을 데리고 있던 사람인데 그 사람한테 문제가 있으면 나한테도 문제가 있는 거다. 그러니 나도 관두겠다.” 이러고 나와버렸지. 나는 내 돈으로 밥 먹고, 내 교통비 가지고 다녔지, 거기서 판공비 백원 한 장 쓴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운영하는 나한테 하자가 없는데 왜 내가 5년을 데리고 있었던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자르냔 말이야. 사무국장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왜 나만 1년 더 하느냐고, 할 수 없다고 동반 사퇴했어. 그러니 지들이 깜짝 놀라지. 그럴 줄은 몰랐으니까. 오히려 내가 오냐, 그렇게 해라. 그럴 줄 알았지. 양심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실무적인 인사에 대한 개념 자체가 자리잡지 못하고 정치적 파워가 모든 구조를 좌우해버린다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 스스로가 코드 인사로 참여했다고 생각되면 정권이 바뀔 때 그냥 나와야 되는 거야. 임기가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앉아있으면 안돼. 자기 역량을 잘 판단해서 자리를 잡아야 된단 말이야. 과연 내가 여기서 적임자인가. 내가 지금 여기 순수하게 능력으로 들어온 것 같나. 만약 코드 인사로 들어왔다 싶으면 정권이 바뀌고 나서 스스로 물러나는 게 그 이전 정권하고 신의를 지키는 거지. 너는 나가도 나는 결단코 고수해야겠다. 이런 매너라면 좀 촌스럽다는 거야. 난 거기서부터 후유증이 나온다고 본다고. 새로 올라온 놈들은 바꾸고 싶지. 말 안 들으니까. 내각이 바뀌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임기제를 무시하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정권이 바뀌어서 코드가 안 맞은 사람이라면 그냥 나와야지. 그런 원칙이나 양식이 있으면 별 문제가 없다고. 지금 우리가 그 부분에선 정리가 안 된다는 건 소위 테크니컬(technical)한 실무진이 딱 정확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거야. 내가 볼 땐 윗대가리들이 갈려도 실무진은 그대로 있어야 된다는 거지. 그런 시스템으로 빨리 발전해야 된다고. 그러려면 적재적소에 인재를 쓰는 기준이 생겨야 되는 거야.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내가 늘 얘기하는 거라고. 저번에도 경기도에서 고위공무원 특강을 해달라 해서 그때 이런 얘길 했어. ‘삼국지’만 읽어봐도 거기 다 나와있다. 리더가 되려면 우선 용기가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지혜가 있어야 된다. 그 위에 필요한 게 덕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그리고 그걸 다 갖춘 뒤엔 운이 따라줘야 된다 이거야. 삼국지를 보면 다 나오잖아. 유비가 말이야. 자기를 죽이려던 적장이 붙들려와도 명장이면 잘 모시고 다스려서 자기 사람 만들잖아. 결국 그 사람이 평생을 같이 하고. 이게 치덕이라 이거야. 정치 논리? 전문적으로 공부하거나 박사 논문을 써도 그 이상의 답이 없다고. 제갈공명이 젊은 선비인데 일국의 지도자가 삼고초려를 하잖아. 우리 같으면 와라, 가라, 할 텐데 삼고초려를 해서 그 사람을 모신다 이거지. 이게 인재등용의 안목이라 이거야.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자꾸 모신다고. 그 사람이 칼싸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지만 그 덕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만드는 거야. 수호지도 마찬가지지. 송강은 조그마한 글방 선생이라고. 그런데 그 밑에 백팔호걸이 모이는 것도 덕으로 인재들을 끌어안은 거란 말이야. 옳은 일을 해서 나가는 거란 말이지. 원칙이 있어야 된다 이거야.
아무래도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그런 원칙을 얼마나 잘 뿌리내리느냐가 중요할 테니까요.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공직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당분간은 개인의 행복권을 포기해야 돼. 행복 누리고, 권세 누리고, 이런 모든 걸 포기하고 오로지 내 사명감과 애국심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자기를 희생해야지. 그렇게 국민을 감동시켜라 이거야.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도 단 한 명도 국민을 감동시킨 대통령이 없어. 노무현도 마찬가지라고. 51%로 당선됐지만 49%의 반대가 있다면 이게 절대적인 반대야. 편을 가르면 이게 평생 반대가 된다고. 그래서 고생을 한 거야. 그 중에서 10%라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는 거야. 대통령이 되면 나를 격렬히 반대한 놈도 국민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이런 안목에서 접근해야 된다 이거야. 지금도 그걸 못하고 있잖아.
지금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촬영 중이고, 가을 즈음에 <거침없이 하이킥 시즌2>도 시작할거라고 들었습니다. 올해도 계속 바쁘시겠네요.
그리고 아마 겨울에는 작년에 찍으려다 못 찍었던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거 들어가야 돼. 그것 때문에 내가 SBS프로그램도 하나 포기했거든요. 9월 초에 시트콤도 시작할 거고. 그렇게 두 작품을 하게 되면 거의 풀(full)로 뛰어야 돼. 그러면서도 이제 저녁에 비는 시간엔 학생들과 씨름해야지. 쉴 시간이 없어.
처음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시트콤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던 경험이 어쩌면 오랜 연기 인생에 있어서 파격적인 결심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어쩌면 이번에 애니메이션인 <업>의 더빙을 결정한 것도 파격적이라 느껴질 만한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이번에 했던 고민은 먼저 거하곤 또 다른 거란 말이에요. 구성도 다르고, 인물도 달라지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작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대본을 봐야 되겠지만 이전 것과는 달라져야 된단 말이야. 그걸 연구하고 있는 거니까. 시트콤이라는 게 아무래도 외형적 설정도 필요하고, 순수한 드라마와 달라요. 나중에 감독과 구체적인 상의를 해야겠지만 그런 부분에서 어떻게 외형의 변모를 가져올 것인지 고민이고, 결국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된단 말이야. 아무래도 잘못 표현하면 먼저 작품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그래서 되도록 예전과 달리 표현해야 되겠다는 생각부터 들어요.
작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작품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작가나 연출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있는 거에요. 그 동안에 그 사람들의 업적이 있고, 내가 <하이킥>을 하면서 충분히 상업적 코미디를 잘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내가 믿는 거지.
이제 연세가 고희(古稀)를 넘기셨는데 아직도 연기자로서 어떤 꿈을 꾸시나요?
지금은 아직까지 날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필요로 한다면 그 필요에 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맞춰나가야지. 그래서 아직은 쉬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어. 해야 될 과제들이 자꾸 있으니까. 다만 나이 먹었으니까 이제 앞날을 장담은 못하지만 지금 내 컨디션으로 봤을 때 아직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 나이가 되면 문제가 되는 게 대사 암기력이 급격히 떨어지기도 하고, 점점 이제 신호가 오는 거야. 녹화현장에 가서도 똑 같은 곳에서 4~5번 NG를 낸다거나 이러면 곤란하구나 싶어지겠지. 연극을 2시간씩 끌고 나갈 때, 혹시 이 대목을 다시 봐야 되나, 이런 위기를 느끼면 이제 관둬야 되는 거야. 그 전까진 필요하면 계속할 생각이야.
달콤한 막대사탕처럼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풍선이 한 가득 하늘을 메운다. 푸른 잔디가 자라는 작은 정원 위로 떠오른 아담한 집 모양 그림자가 드리운다. 방 안에 앉아 비행선을 타고 세계를 모험하는 꿈을 꾸던 소년의 상상처럼 집이 날아오른다. 빌딩 숲을 지나 구름을 스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을 타고 모험을 시작한다. <업>은 거짓말 같은 꿈을 진담처럼 그려내는 작품이다. 내려앉은 집 안에서 하늘을 날아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모험을 꿈꾸던 소년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자신의 피앙새와 다짐했던 꿈을 띄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집. 꿈은 이루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집단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픽사(PIXAR)’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수많은 풍선에 매달려 하늘을 나는 집과 그 집에 사는 노인, 그리고 그 집을 찾은 소년의 모험담이다. 세계에서 유래 없는 성공담 <라따뚜이>와 우주 최강의 SF로맨스 <월-E>까지, 픽사의 근작들은 CG 애니메이션을 회화적 경지로 끌어올렸다 해도 손색이 없는 장관의 이미지를 전시하고 탄탄하고 섬세한 스토리텔링과 연출력을 통해 수려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픽사의 1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은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모험담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이다.
비행선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떠난 모험가 찰스 먼츠를 동경하던 소년 칼 프레드릭슨은 마찬가지로 모험을 동경하는 소녀 엘리를 만나게 된다. 우정으로 시작된 소년, 소녀의 인연은 로맨스로 거듭나고 백년가약의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결혼 후에도 파라다이스 폭포로의 모험을 기약한 채 꿈을 저축해나가던 칼과 엘리는 먹구름처럼 일상으로 끼어드는 예측불허의 일상 속에서 꿈을 미루고 여행을 위해 준비했던 저금통을 부수고 또 부수다 얼굴 가득 세월의 흔적만 고스란히 쌓아나간다. 칼의 유년시절에서 출발해 칼과 엘리의 서사를 압축한 무성 시퀀스를 지나 노년이 된 칼의 모습에 다다르는 <업>은 비로소 본격적인 말문을 연다.
칼과 엘리의 만남부터 이별까지의 여정을 간략하게 넘겨가는 무성 시퀀스는 짧은 순간에 진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농축시킨다. 그 짧은 서사는 <업>의 서사를 본격적으로 부양시키는 풍선과도 같다. 풍선에 매달린 채 하늘로 떠오르는 집이라는 비현실적 광경을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건 그 광경 자체가 주는 동화적 아름다움, 혹은 그 광경을 둘러싼 실제적 풍경의 생생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이루기 위한 인물의 결심이 설득력 있는 진심을 전달하는 덕분이다. 비현실적인 동화적 소재에 감정적 색채를 입히고 스토리에 현실성을 주입함으로써 영화를 부양시킨다. 짧은 순간만으로 뚜렷한 정서적 감동이 각인된다.
사별한 부인과의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모험을 결심하는 칼과 우연찮게 이에 합류하게 된 탐사대 소년 러셀을 중심으로 전진하던 모험담은 말하는 개 더그를 비롯해 희귀 새 케빈까지 끌어안으며 예상 경로를 이탈해나간다. 사실상 <업>의 서사는 명확한 만큼 단순하다. 하늘을 나는 집을 타고 파라다이스 폭포로 향하는 칼과 러셀의 여정을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건 재기발랄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다.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집, 그리고 풍선처럼 떠오른 집을 몸에 매달고 다니는 인물들, 통역기를 부착한 덕분에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개 등, <업>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차례로 등장시키며 창의적인 설계도면을 마련한다. 모험을 동경하던 유년시절을 잊지 않은 노인의 모험담은 요리하는 쥐의 성공담이나 미래로봇들의 로맨스만큼이나 순수하고 창의적인 스토리와 세계관을 품고 있다. 동심 어린 소년의 꿈처럼 순진하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기 발랄한 유머, 형형색색의 캐릭터로 치장한 스토리는 달콤하면서도 풍요로운 매력을 선사한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이미지 역시 <업>에서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다. 알갱이 하나하나에 컬러를 입힌 듯 다채롭고 선명한 색감을 자랑하는 포도 모양의 풍선이 푸른 하늘을 수놓으며 날아오르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탐스럽다. 자연적인 색채 감각과 사실적인 이미지를 누비는 캐릭터들은 그 활약상만으로 실사적 현장감과 만화적 개성을 아우른다. 한편 픽사에서 최초로 제작한 3D 애니메이션이기도 한 <업>은 사실상 3D기술을 시각적 자극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단 이미지의 표현방식으로서 수용한다.-여기서 '3D'란 단지 3D렌더링 과정을 통해 공간감을 획득한 CG애니메이션을 손쉽게 지칭하기 위해 국내에서 와전된 형태로 통용된 '3D 애니메이션'이란 용어와 다른 의미인 입체 상영 방식의 3D영화를 지칭하는 의미로 활용됐다.- 즉물감을 부르는 입체효과를 관객의 시각적 눈요기로서 내보내기 보단 공간감을 확보하고 이야기의 생동감을 보좌하는 촉매로서 장치한다. 매 작품마다 이야기를 최우선의 가치로 우대하는 픽사의 모토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산업의 새로운 개척지로 지정된 3D 애니메이션의 세계관 안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업>은 그 방향성을 짐작하게 하는 나침반이나 다름없다. 또한 <업>은 보기 드물게 훌륭한 한국어 더빙의 사례로 꼽혀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외국산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의 한국어 더빙이 대부분 아동들을 배려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과 달리 <업>의 더빙은 되레 또 다른 형태의 매력을 가미했다 해도 좋을 만큼 탁월하다.
순수한 에너지를 동력으로 사뿐히 날아오르는 <업>은 선명한 꿈을 꾸는 영화다. 현란한 스펙터클도, 빠른 속도감도, 대단한 긴장감도, 거대한 스케일도, <업>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업>에 엄지손가락을, 아니, 두 손을 번쩍 들어 지지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실로 투명한 감동을 전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유년시절의 모험을, 순수했던 한 시절에 가능했던 상상의 나래를, 지극히 순수하게 눈 앞에 그려낸다. <업>은 감동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증명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픽사는 또 한번 관객에게 로맨틱한 감정을 선물한다. 사랑할 수 있는 영화를 선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고백을 부끄럽지 않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픽사가 지닌 로맨틱한 재능이다.
한국에 자주 방문하는 편이다. 이번이 8번째 방문이다. 한국에 오는 건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CJ엔터테인먼트가 드림웍스(Dream works)의 초창기 투자 멤버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마치 가족을 방문하는 느낌이다.
한국영화산업에 대한 흥미와 이해가 어느 정도 인가?
한국시장에 대한 특이점이 몇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국이 국제적으로 탑 텐 시장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시장의 특성 중 하나는 영화 제작과 영화 상영 모두가 매우 중요한 시장이란 점이다. 한국영화 산업기반이 탄탄할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자체가 성공적으로 제작되고 외국영화들도 한국시장에서 매우 좋은 성과를 올린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매우 건실한 영화 산업과 시장을 함께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예슬 씨가 한국에서 더빙을 맡았는데 목소리 연기자 섭외에 직접 관여했다고 들었다. 캐스팅 기준이 궁금하다. 그리고 한예슬 씨를 실제로 만났는데 인상이 어땠나?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은 47개 언어로 더빙된다. 우리가 목소리 캐스팅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목소리의 멜로디다. 한예슬 씨는 훌륭한 배우이기 때문에 그 배역을 충분히 연기로서 소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멜로디가 아름답기 때문에 이 역할에 가장 접합했다. 물론 목소리만큼이나 인물도 출중하더라. (웃음) 유머 감각도 빼어난 편이다. 게다가 지금 캘리포니아에 가족도 있고, 본인도 거주한 경험이 있어서 이에 관해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몬스터 vs 에이리언>(이하, <몬스터>)에 사용된 ‘인트루 3D(Intru 3D)’란 어떤 기술인가.
우리가 3년 전 즈음에 발견한 첨단기술로서 우린 이것이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앞으로 모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이 기술로 제작하자고 결정했다. 과거엔 3D를 놀이공원에서 체험하는 매체로 생각했다면 이젠 이 새로운 기술이 3D를 영화상영체험과 영화제작방식에 혁신을 부를 것이라 예상한다. 우리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스토리텔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영화체험 자체를 바꿀 것이라 생각한다. <몬스터>가 이런 기술력을 활용한 첫 작품이 됐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천마디 보다 낫다는 말처럼 아마 내가 하는 삼천 마디보다 한번 직접 체험해보는 게 나을 거다.
드림웍스와 마찬가지로 경쟁 스튜디오라 할 수 있는 픽사(PIXAR)에서도 3D 애니메이션 제작에 착수할 것이라 밝혔다. 3차세대 매체로서 주목받고 있는 3D영상의 산업적 가능성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3년 반 전에 우리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아이맥스 3D로 제작했다. 그때 이 기술이 앞으로 우리의 미래적인 방향성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제작사들이 3D로 영화를 촬영하거나 제작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피터 잭슨’, ‘폭스(FOX)’, ‘디즈니’, ‘픽사’ 등 수많은 제작자나 제작사에서 3D를 활용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3D 기술의 미래가 상당히 밝지 않은가 생각한다.
당신이 말한 <폴라 익스프레스> 아이맥스 3D를 3년 전에 봤을 땐 눈이 많이 피로했다. 이번에 본 <몬스터>은 확실히 그런 불편함이 경감된 느낌은 있었다. 말한 것처럼 이번에 본 3D는 몇 년 전에 봤던 3D보다 훨씬 혁신적으로 개선된 상태다. <몬스터>는 고품질 디지털 영상으로 상영된다. 좌우 대칭이 이루어지고, 흐릿한 화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의 안 좋았던 부분이 최대한 개선했다. 이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의 이미지와 함께 스크립터나 스토리텔러들의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아마 1년 후에도 오늘을 되돌아보면 지난 1년 간 3D 기술이 많이 발전됐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이렇게 앞으로도 몇 년간 3D 기술이 계속 혁신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기대한다.
한국인을 비롯해서 전세계의 재능 있는 인력들이 드림웍스에서 일을 하고 있다. 드림웍스가 인재를 선발하는데 있어서 국적이나 문화적 제약이 없다는 건 얼마나 큰 장점이 되는가?
지금 1700명의 아티스트들이 캘리포니아에서 작업하고 있는데 이중 매우 재능 있는 한국 아티스트들도 많다. 그 뿐만 아니라 기술자와 애니메이터도 많으며 그 중 드림웍스에서 배운 기술을 한국에 와서 나누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드림웍스를 애니메이션의 UN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35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지금 드림웍스에서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방방곳곳에 있는 인재들이 지금 드림웍스에서 근무를 해주는 덕분에 우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3D기술이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을 차별화시키는 전략이 될까?
3D이전에 우리는 이미 차별화된 회사라고 생각한다. 영화 한편에 1억 5천만 불 정도 규모의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회사는 실질적으로 세계에서 한두 곳 정도밖에 없지 않나.
작년에 개봉된 <쿵푸팬더>는 2D애니메이션이지만 큰 인기를 모았다. 2D애니메이션의 시장성이 여전한데 3D애니메이션과 병행할 생각은 없나?
병행하진 않을 거다. 모든 영화는 처음부터 3D로 제작될 거다. 다만 현재 대부분의 극장이나 가정 DVD로는 3D영화를 볼 수 없다. 그런 상영관과 가정을 위해서 원래 3D로 제작한 영화를 2D로 출시할 예정이다.
2D애니메이션을 3D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데 부가되는 비용은 얼마나 되나?
3D로 제작하는데 추가적으로 드는 비용은 1500만 달러 정도, 전체비용의 약 10%정도가 더 들어간다.
3D애니메이션에 주목하는 건 그만큼 시장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3D영상을 보기 위해선 물리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 많다. 특히 홈 비디오 시장에서 3D애니메이션은 현재 무용지물 아닌가. 이에 대한 대안도 마련하고 있나?
홈씨어터를 통해서 3D영상을 상영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TV모니터에서도 3D영상이 구현되고 편광안경으로 이를 관람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 중이다. 실제로 안경제작사에서도 3D전용안경을 제작한다고 들었다. 미래에는 아마 관객들이 자체적으로 자신만의 영화안경을 갖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실제로 선글라스를 제작하는 회사 ‘오클리(OAKLEY)’에서 개발하는 안경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할 땐 그냥 편광선글라스지만 영화관 실내로 들어와서 영화를 볼 땐 3D전용안경으로 자동 전환되는 안경을 제작중인 걸로 알고 있다. 지금 밖에 나가서 선글라스를 쓰듯이 극장용 안경을 쓰는 시대가 올 거라 기대하고 있다.
3D는 현재 시청각적 자극에 있어서 최종적인 단계에 가깝다. 혹시 그 다음단계라 할 수 있는 공감각적 자극을 활용한 단계로서의 개발을 생각하진 않나? 예를 들면 의자가 움직인다던가.
그런 단계까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공감각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관객들이 이를 지나치게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3D를 사용하는 건 관객이 스토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우리가 나가서 실제로 뭘 만지거나 이동시키면 관객 자체가 거기에 너무 의식해서 스토리텔링에 집중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거라 생각한다. <몬스터>이 시작될 때 라켓에 달린 페더볼(featherball)이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것처럼 장난을 쳤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다. 거기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이런 것도 가능하지만 <몬스터>에서 보여주고 싶은 건 이런 특수효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효과에 집중하다 보면 결국 관객을 스토리로부터 탈피시키기 때문에 효과마저도 하나의 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놀이공원에서는 그런 것이 적용돼도 상관없겠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것들이 적용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주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운석이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결혼식 날 거인이 된 수잔(리즈 위더스푼, 한예슬)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기지에서 선배(?) 몬스터들과 함께 ‘거대렐라’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채 격리된다. 그러던 어느 날, 외계로부터 정체불명의 거대로봇이 또 미국 땅에 떨어져(!) 무차별 공격을 감행한다. 전군이 동원됐지만 거대로봇에게 맞서긴 역부족이다. 결국 비밀리에 격리돼있던 몬스터들이 출격한다. ‘거대렐라’가 된 수잔과 함께 미씽 링크와 닥터 로치, 밥은 작전에 성공하면 자유로운 신분을 주겠다는 워 딜러 장군(키퍼 서덜랜드)의 약속과 함께 거대로봇을 제압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온다.
간단한 줄거리만으로 보자면 박진감 넘치는 SF액션물의 외피가 예상돼지만 <몬스터 vs 에어리언>(이하, <몬스터>)은 나사 빠진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러운 행위와 대사를 통해 유머로 발생시키는 스크루볼 코미디에 가깝다. 특히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라는 혈통을 입증하듯 의인화된 몬스터 캐릭터들이 해학적인 위트를 구사한다. 스토리 라인 자체는 결과적으로 단조로운 것이 사실이다. 주지하는 정서적 감흥이 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식상한 스토리는 어떤 면에 있어서 <몬스터>의 야심에 어울리는 배경이다. 인간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몬스터들이 지구를 구하고, 되레 인간의 혐오를 극복하며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존재로 변태되는 성장스토리엔 나름대로 제 크기에 걸맞은 의미가 있다. <몬스터>의 야심은 심오한 스토리텔링과 어울릴만한 것이 아니다. 스토리는 조연에 가깝다.
주연은 영상이미지다. ‘인트루 3D(Intru 3D)’라 지칭되는 3D영상기술을 통해 구현된 입체적 영상이 <몬스터>의 야심 그 자체다. 시각적 기술의 진일보를 통해 새로운 차세대 엔터테인먼트의 자극을 체험하고 만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순한 이야기일수록 이미지는 단명해진다. 거대로봇과 맞서는 몬스터들의 에피소드는 거대한 사물의 등장을 통해 스케일을 넓히고 스펙터클을 확장하려는 기술적 성취의 전시적 욕망의 부산물에 가깝다. <몬스터>는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시킨 3D영상의 엔터테인먼트적 자질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가를 알리는 현대의 지표란 점에서 일단 흥미롭다. 이미 역치의 수준이 실무율의 단계에 들어선 영상의 오락적 기능성을 대체할 입체영상의 현대적 지표가 어느 수준에 다다랐는가를 증명하는 기술적 성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몬스터>는 되레 자신의 야심과 다른 지점의 사실을 증명하는 영화 같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을 담보로 한 혁신적인 이미지를 장착하고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떤 수준 이상의 이야기와 함께 맞물리지 못한다면 영화적 만족도를 주지 못한다는 것. 뛰어난 효과는 뛰어난 영상의 기반이 되지만 그것이 영화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창작적인 스토리를 기반으로 삼지 못한 이미지는 결국 영화로서의 가치에 도달할 수 없다. 때때로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인상적인 매력이 있지만 그것 또한 <몬스터>를 권할 만큼 강력한 매력이라 정의 내리기도 쉽지 않다. <몬스터>는 창작과 기술의 조합에 있어서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우주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운석은 한 여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다. 거인이 된 수잔(리즈 위더스푼, 한예슬)은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운영하는 지하기지에 격리된 채 ‘거대렐라’라 불리며 선배(?) 몬스터들과 조우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나 외계에서 날아온 정체불명의 거대로봇이 또 미국 땅에 떨어져(!) 무차별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맞서기 위해 비밀리에 격리돼있던 몬스터들이 출격한다. 간단한 줄거리만으로 보자면 박진감 넘치는 SF액션물의 외피가 예상돼지만 <몬스터 vs 에어리언>(이하, <몬스터>)은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라는 혈통을 입증하듯 나사 빠진 캐릭터들의 행위와 대사를 통해 위트를 유발하는 해학적 작품이다.
주지하는 정서적 감흥이 뻔한 수준을 맴돌지만 단순하다고 폄하할 수 있는 수준의 스토리까진 아니다. 인간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몬스터들이 지구를 구하고, 되레 인간의 혐오를 극복하며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존재로 변태되는 성장스토리엔 나름대로 제 크기에 걸맞은 의미가 있다. 다만 <몬스터 vs 에어리언>(이하, <몬스터>)은 그보다 다른 의도가 명확한 작품이다. 스토리는 조연에 가깝다. 주연은 ‘인트루 3D(Intru 3D)’라 지칭되는 3D영상구현기술을 통한 시각적 자극의 진일보를 체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엔터테인먼트에 가까운 속성이다. <몬스터>는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시킨 3D영상의 엔터테인먼트적 자질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가를 알리는 현대의 지표란 점에서 흥미롭다. 다만 그 자극이 뛰어난 창작력을 기반으로 삼지 못했을 때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때때로 블랙코미디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들이 귀엽지만 그것이 이 영화를 권할 만큼 강력한 매력이라 정의 내리긴 쉽지 않다. 기술도 과도기지만 이야기 수준도 과도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