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유치한 스토리와 조악한 설정이 또렷하게 보이지만 산만한 캐릭터들의 수다스런 조합이 플롯의 빈곤함을 메운다. <슈렉>과 함께 드림웍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로 등극한 <마다가스카>의 속편 <마다가스카2>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마다가스카2>는 그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더 이상 ‘마다가스카’를 중심에 둔 사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제목이 다시 한번 활용되는 건 이 타이틀의 기시감이 시장성이 유효한 브랜드 네임밸류를 지닌 덕분이다. 전편의 대단한 성공에서 잉태된 기획상품에겐 새로운 자기 정체성보다도 자기 기반의 뿌리가 중요할 따름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속편 역시 일종의 모험담이다. 모험 속에서 캐릭터들은 성장한다(고 묘사된다). 뉴욕의 왕이라 자처하던 동물원의 사자 알렉스(벤 스틸러)가 친구인 하마 글로리아(제이다 핀켓 스미스), 기린 멜먼(데이빗 쉼머)과 함께 동물원을 뛰쳐나간 얼룩말 친구 마티(크리스 락)를 쫓아 담을 넘었다가 마다가스카 섬까지 표류하게 되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연의 이후로 덧붙여진 사연이다. 새로운 행선지는 아프리카다. 뉴욕을 향해 출발한 비행기가 불시착하면서 그들은 지명이 묘연한 아프리카 대륙으로 떨어진다.
동화적인 <슈렉>의 세계와 우화적인 <마다가스카>의 세계는 의인화를 통해 공통적으로 각자의 세계관을 지탱하고 있다. 인간과 공존하는 동시에 인간과 별다를 바 없는 비인간 캐릭터들의 행위엔 모순을 뛰어넘는 위트가 담겨있다. 물론 <마다가스카>는 <슈렉>보다도 캐릭터에 대한 의존도가 강한 작품이다. 디즈니 동화의 클리셰를 전복시키는 이야기적 태도로 풍자적 웃음을 발생시키는 <슈렉>과 달리 <마다가스카>는 특유의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들의 수다와 슬랩스틱에 가까운 연기적 액션을 통한 유머로서 관객을 적극 공략한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속편의 장기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네 동물 캐릭터의 성격은 여전하고 그들의 행위는 과거와 별다르지 않다. 장점은 전작만큼의 너비를 유지한다. 캐릭터들은 여전히 수다스럽고 산만하게 뛰어다니며 유희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에 비해 단점은 좀 더 덩치가 커졌다. 캐릭터의 개성과 조합으로 가려지던 이야기의 열악함이 예전보다 커진 군살을 가리지 못한다. 알렉스의 사연을 축으로 사연의 맥락을 집중시키던 전작과 달리 비해 이번 작품은 각자의 캐릭터를 줄기로 삼아 이야기에 가지치기를 시도한다. 이야기의 유치함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산만함이 예전에 비해 더욱 활발해졌다. 네 캐릭터의 비중을 각자 키워나가다 보니 전체적인 조합이 흐트러진다. 동시에 저마다 가벼운 사연들이 자신의 경로를 고집하는 것처럼 비효과적인 태도도 없다. 질적으로 발전되지 못한 이야기가 양적으로 팽창했다. 결국 극심하게 산만해진 이야기를 작위적인 감동으로 메우려 하나 이 역시 효과적이지 못하다. 전작의 인기에 편승한 기획의 한계가 여실하다.
물고기라곤 하지만 물고기처럼 보이진 않는다. 인면어라고도, 금붕어라고도 불리지만 엄밀히 말해서 물고기 흉내를 내고, 그렇게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캐릭터다. 심지어 생의 비밀에 대한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다. 포뇨의 아버지를 자처하는 후지모토가 인간임에도 어떻게 물 속에서 온전히 사는 건지, 흡사 바다의 여신처럼 보이는 그란만마레가 포뇨의 어머니라는 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건지 막막하다. 실상 별반 상관없다는 듯 그렇다. 답 없는 수수께기처럼 묘연하지만 신화처럼 비범하다. 67세를 넘긴 재패니메이션의 거장 야마자키 히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는 단순한 유아적 발상을 통해 순수의 경지를 선사한다.
소스케로부터 포뇨라는 이름을 얻은 뒤, 포뇨는 브륀힐테-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참조-라 부르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절한다. 그리곤 인간이 되려 한다. 종래엔 인간이 된다. 목소리를 팔지도 않고, 마법의 힘으로 한계를 넘어선다. ‘인어공주’처럼 동화적이지만 천진난만하게 비극을 넘어선다. 순수하되 거창하지 않다. 포뇨는 인어공주가 아니다. 물거품으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19세기 안데르센 동화에서 비극적 색채를 탈색시키며 희망을 염색한다. 비극적 클리셰를 배제한 채 경쾌하게 모험을 완성한다.
정체불명의 캐릭터 관계가 상상력을 부채질하지만 이야기는 되려 단명하다. <벼랑 위의 포뇨>는 소년의 사랑을 얻은 물고기가 소녀로 변하기 위한 모험담이다. 이 단명한 스토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연친화적 상상을 구현한 회화적 색감을 의상처럼 입고 있다. <벼랑 위의 포뇨>는 동화적 발상에서 비롯된 순수한 낙관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세상이 물에 잠기는 위기 속에서도 천진난만한 소년과 소녀는 심각한 어른들의 리얼리티와 동떨어진 세계다. 미지의 모험, 마법과 전설, 유아적 자질과 연동되는 기발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독창적인 이미지의 물살을 타고 이야기는 매끄럽게 구연된다. 지극히 유아적인 색채와 디자인으로 구성됐지만 경이적인 장면들이 천진난만하게 순간을 지배한다. 거부할 수 없는 비현실의 순수가 스크린을 가득 적시고 객석을 머금는다.
<원령공주>를 비롯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출한 전작에 감동했던 어떤 이라면 <벼랑 위의 포뇨>에 불만을 토로할지 모를 일이다. 숭고한 이미지에 철학적 깊이마저 담아낸 전례에 비춰보자면 원론적이고 동화적인 순수를 일관되게 채워낸 <벼랑 위의 포뇨>는 백치스럽게 안일한 우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상 현실을 살아가는 어른들의 백치적 일상을 떠올린다면 <벼랑 위의 포뇨>는 되려 숭고하다. 바다 밑바닥을 긁어내는 그물더미로 가득한 쓰레기는 현실에서도 유효한 풍경이다. 바다를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만들어버린 채 제 주변의 깔끔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현실의 인간이야말로 실로 지독한 낙관에 젖은 채 살아간다. <벼랑 위의 포뇨>는 당신의 순수를 시험대에 올릴만한 작품이다. 당신의 순수는 얼마나 잔존하는가. 현실이 순수하지 않다 해서 순수의 경지를 폄하해선 안될 일이다. 사랑과 평화. 그 실질적인 미덕이 아름답고 경이롭게 공존한다.
적어도 자녀를 둔 부모라면 꼭 <벼랑 위의 포뇨>를 보여줄 것. 당신이 좋은 부모라면 분명 깊은 순수를 머금은 자녀의 행복한 웃음을 물거품으로 만들만한 푸념을 던질 리 없을 것이므로. 어쩌면 아이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 포뇨 좋아! 그만한 행복이 또 있을까. 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만화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더 바라고 있나. 어쩌면 그건 어른이라는 오만이 아닐까.
26마리의 개가 사납게 내달린다. 사나운 개떼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린다는 친구의 고백을 듣는다. 청자는 감독 자신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과거 이스라엘 군인으로서 레바논 전쟁에 참전했던 아리 폴만 감독의 자전적 성찰이다. 동시에 그 잔인한 기억에서 상실로 도피한 자의 뒤늦은 참회이자 치유다. 영화는 전쟁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의 현재 고백을 통해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기억을 복원해나간다.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취하는 건 <바시르와 왈츠를>이 재현하고자 하는 리얼리티가 어떤 이들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착시와 연동된 까닭이다. 비극을 목도한 이들의 심리적 공황과 정신적 상흔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환상과 실존의 이미지로 구현된다. 총격전이 펼쳐지는 도심의 도로 한가운데서 스텝을 밟으며 기관총을 사격하는 병사의 모습 위로 왈츠가 흐른다. 우아한 이미지 사이로 비통한 정서가 유유히 새어 나온다.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의 결과가 담긴 실제적 풍경이 등장하는 말미에 도달하면 그 모든 이미지의 정보가 얼마나 끔찍한 현실이었는지 적나라하게 환기된다. 승자도 패자도 소용없다. 살아남은 자는 지울 수 없는 업보의 여생을 떠안게 될 뿐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은 그 거대한 비극에 압사당한 인간 그 자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진심이다.
낭만적인 선율과 함께 우주의 황홀경을 비추던 스크린이 중력에 이끌리듯 인공위성들의 잔해를 헤치고 지구상으로 돌입한다. 빈 깡통이 된 빌딩 사이사이를 메우는 각종 폐기물. 생명이 말소된 듯 인적이 사라진 그 거리의 쓸쓸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황량하게 물들일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만적인 멜로디가 그 쓸쓸한 적막을 밀어낸다. 캐터필러(caterpillar)로 전진하는 작은 로봇 ‘월ㆍE(WallㆍE: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class)’는 트랜지스터 오디오 기능을 겸비한 자신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도처에 널린 폐기물을 압축해 차곡차곡 쌓는다. 그 모든 것은 <나는 전설이다>에 버금갈만한 썰렁한 대도시의 적막함을 명랑하고 낭만적으로 밀어내는 월ㆍE로부터 그렇게 시작된다.
강아지의 눈망울처럼 호기심이 충만한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월ㆍE는 유일하게 정을 붙이며 키우는 바퀴벌레 한 마리와 매일같이 아기자기한 일상을 지속해나간다. 그것은 종종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가 듦에 따라 상실해버린다는 맑고 순수한 눈빛을 닮은 두 렌즈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로봇 주제에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낡은 테이프로 재생되는 오래된 영화를 감상하던 월ㆍE가 ‘사랑이란 그런 것(to be loved a whole life long)’이란 로맨틱한 가사를 품은 감미로운 멜로디 앞에서 납작한 두 손을 모은 채 동그란 렌즈를 글썽거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겐 실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외로움이 전해진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 ‘이브’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월ㆍE에게 깃드는 어떤 간절함이 허망해 보이지 않는 건 그 덕분이다. 감정을 품은 로봇, 그것은 흡사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우화적 답변처럼 순진무구하지만 설득력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변변찮은 언어가 발견되지 않는 <월ㆍE>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빽빽하게 채운 웬만한 극영화보다도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건 이 말 못하는 로봇, 월ㆍE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이 형성되는 까닭이다. 그저 두 개의 커다란 렌즈로 이뤄진 얼굴과 네모난 몸통, 가늘고 납작한 팔, 다리를 대신한 두 개의 캐터필러, 이토록 단순한 형태를 지닌 월ㆍE가 세심하면서도 완전한 감정을 전달하는 건 그 행동에 대한 진심이 온몸으로 발견되는 덕택이다. 구시대적 아날로그 기능성을 겸비한 로봇 월ㆍE는 그 인공적인 형태를 통해 되려 역설적으로 순수한 낭만을 극대화시킨다.
디스토피아를 정화하는 태생적 임무를 (700여 년간) 홀로 수행한 월ㆍE는 인간이 혐오하는 쓰레기를 자신의 몸에 주워담아 압축한 뒤,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또한 월ㆍE는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긴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것들을 발견해내는 재활용의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작은 로봇은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겨 버려진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향유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무분별한 소비 의식과 반대로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소비되는 인공지능의 로봇이 버려진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형태로 쌓아 올린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하다. 그건 단지 명령의 수행에 불과한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월ㆍE가 정사각형 형태로 압축한 폐기물들은 하나의 구조물로서 재탄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적 기능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행위에 가깝다. 가히 모방적인 창조 행위다. 월ㆍE는 인간과 유사하다.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을 지닌 것처럼 행동하며 인공지능의 산술적 결과로 부여되는 명령어적 단위의 2차적 행위이기 이전에 1차적인 본능의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월ㆍE>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로봇들이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명백히 인간의 행위와 닮았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초라해진다. 월ㆍE를 비롯한 로봇들은 인간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반대편에서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시엄(Axiom) 호에 탑승한 인간들은 감정조차 망각하고 판단력마저 상실한 채, 가상 윈도우에 시선을 고정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 인공지능이 부여하는 삶의 패턴에 수동적 형태로 사육되듯 살아간다. 심지어 책을 넘기는 것조차 잊어버린 선장의 모습은 아날로그 기능성을 상실한 디지털 인간의 퇴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지구를 버리고 우주 한복판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있는 액시엄 호에서 인간들은 비만적 퇴보를 거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명령(directive)에 철저히 따르는 기계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그들을 사육하는 통제관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한다. 아날로그 시스템의 명령어가 유명무실해진 디지털 오토매틱 시대의 인간들은 철저한 편의 속에서 자생적 능동 의지를 망각한다. 가스충전소도, 거대한 마트도, 심지어 고속터미널까지도 ‘BnL(Buy N Large)’이라는 통일된 브랜드가 지배하는 획일적인 미래세계의 풍경은 몰락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인간의 소비성만이 극대화된 세계는 결국 자생을 위한 비판적 의식마저 망각한 인간의 영토로부터 인간을 몰아낸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작동시키는 건 작고 볼품없는 로봇의 진실된 연정, 즉 로맨스의 태동이다. 미지와의 조우 앞에서 온몸을 덜덜거리고 떨면서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깊은 호기심으로 강아지처럼 ‘이브’의 뒤를 졸졸 쫓던 월ㆍE가 그 뒤를 쫓아 지구를 벗어난 먼 우주로 나아갈 때, 이 여정은 실로 우주적인 감동을 부른다. 기능이 정지된 이브에게 헌신적이던 월ㆍE가 이브를 소환하는 우주선을 쫓아 우주로 나아가게 되고 그 덕분에 월ㆍE는 지구를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대면한다. 자신을 부여잡던 중력권의 세계를 벗어나 거대한 무중력의 세계를 체감하는 월ㆍE의 탐험은 우주의 황홀경에 감탄하는 월ㆍE의 모험 자체만으로도 진귀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월ㆍE가 토성의 고리를 손으로 스치며 지나가고, 후에 소화기의 출력을 이용해 이브와 함께 우주공간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 폭의 회화처럼 실로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월ㆍE>가 감성을 자극하는 건 그 모든 여정이 월ㆍE의 헌신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의 눈처럼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눈(?)을 지닌 월ㆍE가 이브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가 종래엔 액시엄 호를 지구로 이끌어오는 과정이 실로 감동적인 건 그것이 애초에 의도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헌신적인 배려가 이룩한 거대한 결과였기 때문에 순수한 감동의 진폭과 여진이 더불어 거대해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을 따름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범우주적인 스케일의 감동을 야기시킨다. 결국 월ㆍE의 로맨스는 공존을 이룬다. 구시대적인 아날로그 형태의 청소로봇과 신세기적인 첨단 로봇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종래엔 그 모든 것이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시금 합리적인 질서를 되찾고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이룰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적인 엔딩과 같이.
순수한 창조력을 바탕으로 항상 수준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Pixar)는 <월ㆍE>만큼은 수준 이상을 넘어 감히 걸작을 완성시켰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월ㆍE>는 진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로맨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중력의 신비같이 황홀하면서도 태양처럼 따스하고 우주만큼 거대한, 형용할 수 없는 진경의 감동을 아로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