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추스르지 못하는 남자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스스로 파괴한다. 그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 동떨어진다.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쓰레기통과 같다. 패악을 자행하는 이들은 역겹고 그들에게 복무하듯 살아가는 약자들의 무기력도 꼴사납다. 그 분노의 뿌리는 개인적인 사연에 닿아 있다.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상실의 뿌리가 그의 화를 부추긴다. 메울 길이 없다. 그런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났다. 울화가 치민 채로 들이닥쳤던 어느 가게의 한 구석에서 무너져있던 그에게 그녀가 말을 걸었다. 조셉(피터 뮬란), 한나(올리비아 콜맨)를 만나다.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던 두 남녀의 만남은 모든 인연과 마찬가지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된다. 좀처럼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던 조셉은 그 모든 화를 스스로 감내하듯 받아들이는 한나를 만나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한다. 한나에게 마음을 열어나가던 조셉은 그녀의 미소 뒷면의 극악한 현실을 대면하게 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종종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해내야 할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디어 한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한 남녀에 관한 사연이다. 자신의 삶을 채우던 절반의 희망을 잃어버린 조셉은 남은 자리에 절망을 한 가득 채우며 살아간다. 자신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폭압으로부터 자유롭길 갈망하는 한나는 매일 같이 그 무기력한 현실을 체감하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이란 언제부턴가 요원해진 단어였다. 두 사람은 거칠고 성기게 조우하지만 결국 애틋하고 절실하게 서로를 당긴다. 거대한 결핍으로 자라난 가시를 세우던 남자와 끔찍한 폭력의 공허에 시달려 텅 빈 삶에 움츠려 들던 여자는 서로를 통해서 가시를 꺾고, 몸을 세운다.
두 남녀의 만남, 비극 속에서 샘솟는 희망의 여지, 이는 사실상 암담한 터널 같은 여정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어줍잖게 희망이나 긍정을 논하지 않는다. 지독한 비극에 내몰린 이들에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범위의 선택을 담담하게 내민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라는 희망만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비극의 질곡으로 인물을 내려 보낸다. <디어 한나>는 비극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희망을 직시하는 영화다. 운명적인 태도로서 희미한 긍정으로 비극을 덮는 대신, 그 비극을 돌파하는 방식으로서 비극을 극복해낼 수 있음을 직시한다.
어쩌면 충격적인, 허나 지극히 그러할 수 밖에 없는 결말부의 한 대목에 다다른 대부분의 관객들은 무너져 내린 마음을 쓰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비극이라기 보단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디어 한나>는 비극을 뛰어넘기 위해서 맞불 같은 비극을 선택한 여인의 용기와 그 용기를 북돋아준 한 남자의 새로운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끔찍하게 처연하지만 아연하게 아름다운, 마음을 후려갈기는 힐링 무비다.
“내 이름은 빅터 매이너드(빌 나이), 나이는 54세, 직업은 청부 살인업자, 커피 한 잔 하겠소?” 소음기 달린 총의 방아쇠를 주저하지 않고 신속하고 정중하게 당기는 남자, 매이너드는 명문 킬러 가문의 후손으로 타겟을 놓친 적 없는 프로이자, 미혼의 싱글남이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여자에 대한 청부살인 청탁을 받게 된다. 그 여인의 이름은 로즈(에밀리 블런트), 부동산 업자로 위장한 갱단 두목에게 가짜 렘브란트 자화상을 팔아 거액을 챙겼다. 그녀를 죽일 기회를 엿보며 미행하던 매이너드는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주시하던 중, 제멋대로인 그녀를 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 저항감을 느낀다. 심지어 그녀를 구하려다 죽을 위기에 빠진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럽게 등장한 청년 토니(루퍼트 그린트)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한다.
1993년에 제작된 동명의 프랑스 영화를 리메이크한 <와일드 타겟>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선 ‘레옹’의 사연을 그린 듯한 로맨틱 코미디다. 목표물을 사랑하게 된 킬러, 킬러가 사랑한 말괄량이 그리고 순진한 청년, 이 세 캐릭터가 뒤엉켜 이루는 좌충우돌의 전복적 상황과 끝 모를 사연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기 생활에 엄격하며 결벽이 있는 중년의 킬러와 밥 먹듯 소매치기를 하고 무책임하게 주의를 벌려놓는 여인 그리고 때때로 모자라 보일 정도로 순진하지만 킬러를 꿈꾸는 청년,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세 인물이 같은 배를 탄 운명이 되어 벌이는 우여곡절의 항해는 우스꽝스러운 가운데서도 귀엽고 훈훈한 감정을 발화시킨다.
영국 배우의 관록을 대변하는 빌 나이를 비롯해서 스타로 떠오른 신예 에밀리 블런트와 루퍼트 그린트 그리고 <셜록>을 통해서 보다 확실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마틴 프리먼까지, 실력 있는 영국 배우들로 채운 캐릭터들은 영화에 다양한 감정을 채색하고, 영화는 이로써 감상적인 흥미를 확장해낸다. <와일드 타겟>은 비범한 야심작이라기 보단 깜찍한 소품에 가깝다. 로맨틱 코미디가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액션과 스릴러의 잔가지가 쏠쏠하게 영화를 장식한다.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이야기의 예상범위를 곧잘 벗어나곤 하는데 때때로 스토리텔링의 논리를 어긋나게 만드는 우연적인 상황이 발견되긴 하나 그마저도 위트로 연결된다. 그 모든 요소가 깨알 같은 애정을 부르는, 깜찍한 로맨틱 코미디다.
유려하다가도 몰아치게, 고요하면서도 가열차게, 조 라이트는 특유의 감각적 재능으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초월한다. 사운드와 비주얼의 공감각적인 여정, 조 라이트의 길을 돌아본다.
1972년 런던에서 조 라이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65세였다. 그는 아들이 19세가 되던 해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은 라이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꼭두각시 인형극 극단을 설립하고 극장을 운영했다. 그 극장에서 본 인형들의 연기는 살아있는 라이트의 삶을 흔들었다. 사실 소년 라이트는 책상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 될 수 없었다. 소년에게는 난독증이 있었다. 그럴수록 소년은 슈퍼 8미리 카메라로 세상을 비추며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결국 예술학교에 진학한 라이트는 미술과 영화를 전공한 예술대학에서 첫 연출작인 단편영화 <크로코다일 스냅>(1997)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서 주목을 얻기 시작한다. “나는 카메라맨이나 디자이너, 혹은 배우가 될 수 없었다. 내가 감독이 된 건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것들 덕분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평범한 삶에 어울리는 법을 잘 알 수 없었던 대신 촬영장에 나가서 영화를 찍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행운을 얻고 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 말이다.”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행운은 2000년 무렵에 시작됐다. TV미니시리즈로 연출 경력을 쌓으며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2003년 BBC에서 방영된 4부작 시대극 <찰스 2세>로 영국 아카데미 2관왕에 오르며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오만과 편견>(2005)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려한 문체로 시대를 풍자한 당대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는 어떤 구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는 말한다. “내게 각본이 보내지기까지 그 책을 본 적이 없었다.”놀랍게도 그는 잘 모르는 제인 오스틴을 필사하는 대신 각본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각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했다. 라이트는 대학시절의 수업에 대해서 이처럼 말했다. “매우 이론적이고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를 만들길 원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론 수업에 의지하기 보다 방과후와 주말마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현역 배우들의 강습에 참여하며 경험과 감각에 의지하는 법을 깨우쳐 왔다. 원작에 비해서 자립적인 현대의 여성성이 강하게 투영되고, 보다 로맨틱한 감수성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오만과 편견>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이런 자질 덕분이다. 특히 서정적인 음악과 고풍스러운 영상의 결합은 로맨틱한 기운을 한껏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는 결국 원작의 유명세보다도 라이트의 이름을 눈여겨보게 만들었다.
성공적인 필름 데뷔 이후, 그의 두 번째 행보는 다시 한번 유명 원작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의 영화화 작업은 제인 오스틴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일이었다. 교과서에 등장할만한 고전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과 달리 명성이 자자한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건 “나는 내 심리의 등에서 뛰어다니는 피해망상을 얻었다”고 할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심리를 압박하듯 일정한 속도로 반복되는 타자기 소리, 발자국처럼 찍히는 활자의 행렬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현해낸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감에서 출발하는 <어톤먼트>(2007)는 사운드와 비주얼을 융화시키는 라이트만의 공감각이 빛을 발한 작품이다. <어톤먼트>의 오스카 음악상 수상의 공은 일차적으로 음악감독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에게 돌려야 마땅하겠지만 음악과 영상을 능수능란하게 접목시킨 라이트의 재능도 간과할 수 없다. 서정적인 운율의 클래식한 넘버 위가 흐르는 가운데 투명하게 떨어져 분산되는 자연광은 파국적인 로맨스에 깃든 처연함을 더욱 애잔한 여운으로 밀어 보낸다.
과거 시제의 두 작품을 통해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라이트는 <솔로이스트>(2009)를 통해서 현대극에 도전한다. 실화에 기반한 이 작품은 정신적 질환으로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을 발견한 <LA타임즈>의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가 관찰자로서 그를 찾아가다가 끝내 그와 교감을 이루고 서로의 치유를 돕는 과정을 기술한 칼럼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단조처럼 우울한 삶 속에서 무기력과 피로감을 느끼는 탓에 쉼표 같은 삶을 찾던 스티브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착란에서 헤어나올 마침표가 필요한 나다니엘,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그린 <솔로이스트>는 영화와 실화의 협연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사실 라이트의 비범한 전작에 비해서 <솔로이스트>는 상대적으로 범작에 가깝다. 하지만 콘트라베이스의 현 위에 떨어진 몇 줄기의 빛을 포착해낸 감각적인 클로즈업 샷과 결을 따라 흐르는 듯한 현악기의 유리 같은 선율, 베토벤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표현해낸 환상적인 컬러는 라이트만의 진수를 드러낸다.
마치 경력의 전후를 가르듯 라이트는 연이어 현대적인 작품을 선택한다. 그러나 <어톤먼트>로 데뷔한 시얼샤 로넌을 타이틀 롤로 앞세운 <한나>(2011)는 그의 전력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한나>는 그의 지난 작품들에 비해서 다른 문법을 지닌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한나>는 서사적인 개연성보다는 공간의 변화와 이동을 통해서 극을 전개하고 진전시키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무엇보다도 원작 소설도, 실화적 모티프도 없는 오리지널 각본으로 완성한 라이트의 첫 영화라는 점에서도 새롭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선택한 건 라이트가 아니었다. 바로 캐스팅이 확정된 로넌의 추천을 통해서 라이트가 보다 늦게 합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에서 라이트는 자신이 지닌 공감각을 폭발시키듯 분출해낸다. 특히 노이즈와 전자음에 어울리는 만화경 비주얼은 사이키델릭 그 자체다.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는 라이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악랄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란 점에서도 중요하다. 자신의 한계를 깬다는 것, 이는 가능성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 시대성을 초월하는 공감각적 재능을 지닌 연출가다. 그리고 라이트는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그것이 내게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기회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운명과도 같았던 영화는 여전히 그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다. 그의 공감각적 여정은 그렇게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있다.
이 마지막 편은 (원작을 읽었다면) 누구나 아는 그 결말로 나아간다.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필생의 적 볼드모트(랄프 파인즈)가 자신의 영혼을 나눠 숨긴 호크룩스들을 찾아내 파괴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신변의 위기를 느끼는 볼드모트는 자신의 수하인 ‘죽음을 먹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해리 포터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압박해 나가고 그 위협은 호그와트까지 번져나간다. 그리고 해리 포터와 그를 위시하는 마법사들은 호그와트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해리 포터>시리즈는 영웅적인 면모를 타고난 해리 포터의 성장통을 다룬 어드벤처 판타지물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
바야흐로 10년이다. <해리 포터>시리즈가 스크린에 살아 움직이는 실물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그 10년 사이, 솜털 보송보송한 소년은 거뭇거뭇한 수염이 제법 눈에 띄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10년이란 세월 동안 어린 마법사들을 성장시킨 호그와트의 풍경도 어둡고 음산한 세기말적인 기운에 지배당했다. 그 호그와트를, 그리고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청년이 된 소년들이 악과 맞선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바로 그 대단원의 결전을 향해 나아가 닿는 시리즈의 마지막 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해리 포터라는 아이콘을 기다릴 수 없는, 작별의 인사를 던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영화화된 여섯 번째 시리즈까지와 달리 2부로 나뉘어진 마지막 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이 시리즈 안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확보해낸 작품이다. 영화화된 <해리 포터>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장점이라면 (최소한 원작을 먼저 섭렵한 독자들에게) 스포일러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때때로 단점으로 작동하기도 했는데, 이를 테면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세밀한 요소들의 재미가 서사의 축약 안에서 손쉽게 손실되는 과정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저마다 장대한 서사를 지닌 각 시리즈들이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된 것과 달리 시리즈의 마지막을 상하로 나눈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긴밀한 호흡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야심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상품성이 막대한 이 시리즈의 유효기간을 보다 넓게 확보하겠다는 의도로도 읽힌다.)
지난 시리즈들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 마지막 시리즈 역시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해내는 작업에 가깝다. 그리고 전작들에 비해서 보다 너른 러닝타임을 확보한 이번 시리즈는 이를 바탕으로 원작을 텍스트를 보다 충실하게 이미지로 세워 넣는다. 결말을 위한 전초전으로 완성된 지난 1부를 잇는 이번 작품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음울하며 비장하게 정해진 결말로 걸어나간다. 그 비장함을 상기시키는 건 어둡고 음울해진 세계 속에서 외롭게 임무를 수행하는 아이들이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예이츠는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스크린에 불길한 심리 속에서도 성숙해진 아이들의 비장한 면모를 새겨 넣는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호그와트에서 펼쳐지는 격전은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전 시리즈를 관통하는 클라이맥스다. 그 가운데서 볼드모트와의 숙명적인 대결을 벌여야 하는 해리 포터가 자신의 생을 걸고 그와 맞서야 하는 외로운 임무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한 소년의 통과의례적인 통증으로 와 닿는다.
제각각 완성도의 편차를 지닌 이 일곱 편의 시리즈가 비로소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이벤트다. 그리고 해리 포터를 지켜보며 성장한 팬들에게도 이는 남다른 의미를 품게 만든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크린 진출을 가능케 했던 것이 할리우드 자본의 동원이기 이전에 전세계적인 팬덤으로 이뤄진 시장의 형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한다면 이 마지막 편을 목도할 팬들의 심정이란 제 자식을 떠나 보내는 어미의 마음과도 비교할만하다. 호그와트에서 마법에 입문한 아이들은 이제 그곳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로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 스스로 골고타 언덕에 올라선 아이들은 끝내 자신들의 의지로 세계를 구하며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완성해낸다. 비로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영국의 가난한 싱글맘 조앤 K. 롤링을 전세계적인 판타지 작가로 등극시킨, 마법 같은 태생 실화를 지닌 이 소설이 영화화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머글들은 그 세계를 동경하듯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고 자란 이들의 감상이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들이 애정을 담았던 그 세계와 진짜 이별을 고하고 안녕을 기원해야 하는 애틋함 덕분일 것이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그 애틋한 안녕을 고하는 팬들을 위로하는, 진정한 유종의 미다. 마법은 끝나도, 추억은 남는다.
배우의 얼굴만큼이나 그 표정을 둘러싼 풍경으로 기억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와 그녀의 사연이 담긴, 방이 있는 영화 속 풍경으로 당신을 안내한다.
맘마미아!
<맘마미아!>는 전설적인 스웨디시 팝그룹 아바의 명곡들로부터 모티프를 삼아 기획된 뮤지컬이다. 1999년 런던 초연 이후로 브로드웨이 진출을 거쳐 현재까지 160여 개국에서 공연된 롱런 뮤지컬로 거듭났다. 그림 같은 지중해 가운데서도 백미에 가까운 그리스 해변가를 배경으로 주옥 같은 넘버들이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치장하는 이 작품이 동명의 뮤지컬 영화로 기획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상의 뮤지컬 무대가 자아내는 환상을 살아있는 풍경으로 전시해내는 일이었다. 제작진은 촬영 한 달 전부터 최상의 무대를 찾고자 그리스 전역을 뒤졌고, 스포라데스 제도의 스키아토스 섬과 스코펠로스 섬, 다무하리 섬이 최고의 병풍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 중에서도 스코펠로스 섬은 <맘마미아!>가 선사하는 진경의 핵심지다. 푸른 지중해를 병풍처럼 두른 스코펠로스 타운은 붉은 지붕을 쓰고 하얀 회벽으로 몸을 감싼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능선을 따라 얼굴을 내밀고 앉아 있는 고지대 마을이다. 온화한 아치형 창문으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하는 이 주택들은 춤과 노래의 향연을 위한 천혜의 무대였다.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눈에 띄는 복식 구조의 주택은 경쾌한 가무에 입체적인 동선을 치장한다. 집 안팎 곳곳에 자리하며 일상을 영위하던 인물들은 계단을 오르고 내리거나 창문을 여닫고 때때로 뛰어내리며 스크린을 역동적인 뮤지컬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그림 같은 카스타니 해변을 비롯해서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세 아버지들과 처음 마주하는 아그논다스, 그리고 소피의 결혼식을 위해 긴 계단을 오르던 도나(메릴 스트립)가 옛 연인의 고백을 애절하게 뿌리치는 아기오스 요다니스 성당,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조망하는 영화 속 그 집에 머무를 수 있다면 스스로 인생의 승자가 됐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만 같다. 영화 속 그 노래, “The winner Takes it all”처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한 여인이 행복을 찾아 나서는 3막 3장 여행기다. 영화는 그 일탈의 경험이 기록된 활자를 영상으로 치환하며 일탈의 충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부추긴다. 뉴욕에서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던 리즈(줄리아 로버츠)는 그 편안한 삶이 자신을 서서히 풍화시키고 있다는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결혼을 비롯해서 손에 쥐고 모든 것들을 과감히 놓은 채 1년 간의 순례를 결심한다. 풍요로운 진미가 넘치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먹고, 명상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인도의 아쉬람에서 기도한 뒤, 소박한 일상을 영위하며 새로운 운명을 발견해내는 발리에서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 모든 여정은 영혼의 허기를 채우고자 떠나는 순례나 다름없다. 그 모든 여정의 종착지 발리는 새로운 삶을 위한 약속의 땅이다. 현대적인 물질 문명의 침입이 상대적으로 덜한 발리의 자연적인 경관으로 둘러싸인 리즈의 집은 안온한 인상을 부른다. 목재로 건축된 친자연적인 이 주택 곳곳에 놓인 창과 문은 자연을 향해 마음껏 열려있으며 이는 곧 자신을 놓고, 새롭게 가다듬던 리즈의 여정이 비로소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차례에 놓여 있음을 대변한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더 큰 균형’을 찾아간 그녀는 비로소 발리에서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며 그 앞에서 다시 한번 고민하고 갈등하지만 두려움 속에 머물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새로운 사랑 앞에서 뒤돌아서지 않길 다짐한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치스럽게 보이는 고민이겠지만 쳇바퀴 도는 삶 속에서 지쳐가는 현대인 누구나 한번 즈음은 꿈꿔봤을 진짜 일탈이 담긴 이 영화는 대리만족으로서가 아닌, 당신에게 진짜 일탈을 촉구하는 일종의 안내서다.
언 애듀케이션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닉 혼비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술가 린 바버가 한 잡지에 기고한 짧은 회고록 에세이에 사로잡혔다. 이를 바탕으로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한 그는 끝내 영화 제작까지 관여했다. 바로 그 영화가 <언 애듀케이션>이다. 17세 소녀 제니(캐리 멀리건)는 옥스포드 진학을 기대할 정도로 뛰어난 학업성적을 자랑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보수적인 부모와 엄격한 학교에 갇히듯 살고 있다 여기며 작은 일탈로 숨통을 열어두길 원한다. 딱딱한 라틴어 공부보다는 첼로 연주와 샹송을 즐기고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을 염원한다.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중년남자 데이빗(피터 사스가드)과 만남을 거듭하던 제니는 그로부터 제공 받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학교와 집을 오가던 일상에 대한 필요성을 잊기 시작한다. <언 애듀케이션>은 전통적인 영국드라마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전쟁 직후인 1960년대 영국의 일상적인 풍경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샹송과 재즈, 올드팝을 즐기던, 테일러드 복장의 말쑥한 청년들과 심플한 스타일과 짙은 눈화장의 첼시룩 여성들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의 풍경이 재현된다. 빈티지한 데코와 장식들로 가득한 실내 인테리어들도 눈에 띈다. 오늘날 오랜 멋과 정취를 지닌 스타일로 인식되는 빈티지풍의 실내 정경은 단아하고 소박한 1960년대 영국의 현실을 대변한다. 고리타분한 가치관 속에 갇혀있다 믿는 제니에게 그 모든 것은 벗어나야 할 낡은 풍경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 잘못된 선택으로 삶이 뒤틀린 이후, 제니에게 그 풍경은 곧 새로운 기회를 되찾기 위한 안식처가 된다. <언 애듀케이션>은 안온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자극을 꿈꾸던 소녀가 백일몽과 같이 짧고 강렬한 경험을 거친 뒤 얻게 되는 큰 깨달음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제목에서 명시하는 ‘교육’이란 바로 그 시행착오조차 품어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배려이자 덕목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가르치고 있다.
아멜리에
소녀는 어려서부터 특이했다. 아니, 어쩌면 특별했다. 아버지의 손길에 심장박동이 빨라진 탓에 심장병 진단을 얻었고, 소녀는 쉽게 외출을 허락 받지 못한 탓에 자신의 외로움을 함께 견뎌줄 친구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 덕분인지 아멜리(오드리 토투)금붕어의 자살마저 눈치챌 정도로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남다른 재주를 얻게 됐다. 그런 어느 날, 화장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오래된 소지품을 발견한 그녀는 주인을 찾아나선 뒤 결국 그 물건들을 되돌려주는데 성공하며 대단한 보람을 얻게 된다. 누군가의 행복이 자신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체감한 그녀는 주변의 모든 이들이 행복한 감정을 얻을 수 있기를 갈망하며 그들이 모르는 선물을 준비한다. 프랑스가 배출한 귀여운 여인 아멜리는 사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여인이다. 어려서부터 혼자에 익숙한 그녀는 그 외로움을 달래고자 타인의 행복을 위한 대리만족의 일상으로 도피해나간다. 강렬한 레드톤으로 채워진 아멜리의 방은 그녀의 욕구불만을 간접적으로 발산시키고 이를 대리 충족시키는 공간인 셈이다. 화려하고 강렬한 컬러가 방 안에 가득하지만 소박하고 귀여운 도구들로 채워진 그 방의 정경은 아멜리의 마음을 대변한다. 타인으로부터 괴리된 자신만의 공간 속에 숨겨둔 욕망의 도피처이자 사랑 받고 싶은, 혹은 사랑하고 싶은 여자로서의 심리를 유일하게 보관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 결국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 사랑에 다가서길 망설이는 아멜리의 불안은 그 상대를 방 안에 들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진다. 남에게 결코 보여주지 않았던 강렬한 염원 속에 그토록 바라던 사랑이 찾아온다. 이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는 마음의 열쇠를 여는 남녀의 만남에 관한, 판타지 같은 러브스토리다.
알버트(콜린 퍼스)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말더듬이였다. 문제는 그가 사회지도층 혈통을 타고난 영국의 로얄패밀리였기에 종종 영국 왕실을 대표해서 국민들을 고무시킬 연설을 행해야 했다는 것. 부친이자 전왕인 조지 5세(마이클 갬본)는 이런 아들이 못마땅해 득달 같은 성화를 내곤 했지만 이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고쳐질 수 있는 버릇이 아니었다. 그의 자상한 부인 엘리자베스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 역시 남편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수소문을 해보지만 좀처럼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어느 날, 엘리자베스는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라는 언어치료사를 소개받고 그를 찾아간다.
<킹스 스피치>는 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으로도 잘 알려진 조지 6세의 자전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영국 왕실의 전기적 사연을 다룬 <더 퀸>과 같이 근현대사의 사회적 격변 속에서 앙상한 전통적 상징성만으로 부지하고 있는 왕가의 딜레마가 반영된 드라마다. 그렇지만 <킹스 스피치>가 단순히 왕실의 궁 안에 카메라를 밀어 넣는, 일종의 르포적인 간접 체험으로서의 흥미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작품이라는 말은 아니다. <킹스 스피치>는 라이오넬 로그의 손자 마크 로그가 보관하고 있던 라이오넬의 일기와 서신에 담긴 조지6세와의 사연을 바탕으로 집필된 전기적 저서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말더듬이로서 연설을 두려워했던 조지6세, 즉 알버트의 고뇌에 주목하지만 그 고뇌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그의 곁을 지켰던 언어치료사 라이오넬과의 관계에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는 작품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왕실의 권력은 무상한 옛말이 된 오늘날의 영국왕실에 남겨진 마지막 위엄이란 바로 역사적 정통성 자체다. “광대나 다름없어 졌다”는 조지5세의 말은 현대 영국사회에서 왕실의 자손들이 겪어내야 할 책임과 의무의 무게를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왕실의 갈등 속에서 연설을 하지 못하는 왕가의 자손이 느낄 강박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킹스 스피치>는 그런 현실 속에 자리한 왕가의 긴장과 그 속에 자리한 왕의 또 다른 긴장을 비추며 보다 입체적인 감정의 양상을 전달한다. 동시에 그 곁에 자리한 라이오넬의 개인적인 사연과 그를 두르고 있는 내외적인 환경을 세심하게 조명함으로써 영화가 품은 감정의 너비를 보다 풍요롭게 확장해낸다.
왕가의 권위 속에서 살아가는 알버트와 평범한 환경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라이오넬의 계급적인 차이는 두 인물의 관계에 갈등을 야기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계급적 차이를 뛰어넘어 끝내 서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동료로서 관계적 발전을 이룬다. 왕실의 권위를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견뎌내는 알버트와 아마추어 배우로서 연기적 꿈을 포기하지 않던 라이오넬이 언어치료사로서 왕의 한계를 돕고 끝내 자신의 삶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 과정은 그 사연만으로도 흥미롭다. 이 유려한 사연은 고풍적인 영상과 유려한 문체, 안정적인 연출력으로 대변되는 영국 드라마의 전통 속에 녹아 든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왕위 계승의 격변을 겪은 조지6세가 그 모든 위기 속에서도 왕으로서 첫 번째 연설을 행하는 라스트 신은 서사적 흐름 속에서 서서히 피어 오르던 영화의 감정이 명료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계급의 장벽을 극복하고 친밀한 우정을 쌓아나가는 두 인물의 신뢰적 관계는 연설을 행하는 왕 앞에 서서 연설의 리듬을 조율하는 언어치료사의 모습을 비추는 우아한 이미지만으로도 명확하고 깊게 마음에 와 닿는다.
무엇보다도 영화의 모든 출연진들은 훌륭한 악보를 탁월한 화음으로 소화해내는 명연주자들이다.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콜린 퍼스는 말더듬이라는 기능적인 연기를 완벽하게 완수해내는 동시에 캐릭터의 내면적 갈등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며 연주를 리드하는 솔리스트에 가깝다. 또한 범상치 않은 캐릭터를 거듭 연기해오던 제프리 러쉬와 헬레나 본햄 카터는 안정적인 연기적 리듬을 바탕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원숙하게 조율하는 앙상블을 선보인다. 가이 피어스와 마이클 갬본을 비롯한, 조단역 캐릭터들 역시 명확하게 제 음을 내며 연주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훌륭한 악보가 준비된 명연주자들의 공연. <킹스 스피치>는 저마다 좋은 소리를 내며 탁월한 화음을 이루는, 그런 영화다.
둥근 챙이 앞뒤로 달린 디어스토커를 쓰고, 어깨를 덮은 긴 케이프가 인상적인 인버네스 코트 안에 단정한 라운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지팡이를 쥔, 우리가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모습. 1887년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세기를 초월해 고전적인 추리문학의 아이콘이 된 셜록홈즈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영국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셜록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추리소설 ‘셜록홈즈’시리즈의 셜록홈즈란 분명 그런 남자다. 세련되고 지적인 이 영국탐정은 그가 등장하는 원작소설을 굳이 접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그 이미지를 어필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장르적인 아이콘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가이 리치가 연출한 <셜록홈즈>는 우리가 잘 알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해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소설과 함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스북을 참고해 제작했다는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활발한 두뇌활동 못지 않게 근육을 움직이길 즐기는 사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통해 이성적으로 사건의 꼬리를 좇는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와 달리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주먹질도 불사할 정도로 다혈질이며 호전적인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마초적 사내다. 물론 아서 도난 코일은 일찍이 그의 셜록홈즈 시리즈 초기작에서 그가 검도나 권투에 능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는 분명 원작의 그것을 통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궁극적으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탐정 아이콘을 고전적 세계관의 히어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테면 고전 소설의 캐릭터 자체를 영화적으로 리메이크해버린다고 할까. 원작 팬이라면 그것이 불순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고전아이콘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사실상 <셜록홈즈>는 셜록홈즈를 셜록홈즈라 쓰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 읽는다. 셜록홈즈의 이름을 빌렸을 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의 특성이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기괴한 악당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등장시키는 것에서부터 원작의 재현이 아니라 원작의 영화적 차용이라 불려도 좋을 자질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셜록홈즈의 단짝인 왓슨(주드 로)과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서도 다를 바 없다.
<셜록홈즈>는 추리극이라기 보단 액션활극에 가까운 버디무비로 완성됐다. 셜록홈즈와 왓슨과의 관계를 그려나가는데 러닝타임의 절반 가량을 할애하는 <셜록홈즈>는 사건의 해결과정에 주목하는 추리적 묘미보다도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적 감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동시에 셜록홈즈의 유일한 연인이라 추측되곤 했던 아이린 애들러(레이첼 맥아담스)를 등장시키며 그의 순애보적 감정마저 묘사하는 <셜록홈즈>는 간접적으로 유추되던 캐릭터의 감정적 단서마저도 적극적인 사건의 형태로서 구체화시킨다.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현장에 자리한 미세한 단서들을 통해 사건을 따라 걷는 영민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사건보다 앞서 달리는 행동파 탐정이다.
만약 셜록홈즈가 아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에 호감을 지닌 관객에게 <셜록홈즈>는 즐길만한 캐릭터적 묘미를 품은 오락영화로서 유용하다. 또한 <셜록홈즈>의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셜록홈즈의 원형은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셜록홈즈>는 가이 리치의 스타일보다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 팔 할인 작품이다. 첨언하자면 왓슨을 연기하는 주드 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조합이 이루는 캐릭터적 재미가 큰 맥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좌하는 내러티브의 묘미가 탁월하다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특히 셜록홈즈가 상대하는 블랙우드는 <셜록홈즈>에서 마치 셜록홈즈의 탐정적 활약을 그리기 위해 단순하게 배치된 소비적 악당처럼 보인다. 동시에 사건의 해결방식에서도 셜록홈즈의 능력은 다소 과장돼있다. 이성적인 방식의 추리를 차분히 따라잡기 보단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움직이는 셜록홈즈의 모습은 실로 파격적이라기 보단 안이하다. 만약 추리극의 형태로서 <셜록홈즈>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 이전에 셜록홈즈라는 본래적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고 영화에 접근했을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안고 상영관을 나서게 될 정도로 <셜록홈즈>는 분명 셜록홈즈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의 결말이 조커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나는 것처럼 <셜록홈즈>의 결말도 (셜록홈즈의 최대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난다. 히어로 캐릭터로 재생산된 셜록홈즈는 자신의 성공을 장담하듯 차기 시리즈의 제작마저도 가시화시킨 셈이다. 고전적인 탐정을 히어로로 탈바꿈한 시도 자체를 불순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가 가상의 캐릭터인 이상,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상성을 거부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그만큼 효과적인 가치를 품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캐릭터 시리즈를 위한 습작처럼 보이는 <셜록홈즈>가 딱히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물론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 이를 만회할 수 있다면 <셜록홈즈>는 그 시리즈의 방아쇠로서 재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를 위한 가장 훌륭한 밑천이란 점에서도 이 가능성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품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에 올인 중인 로버트 저메키스는 북유럽 영웅 서사시를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부호로 재생시킨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을 떨치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자신이 혐오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7년 전 사별한 동업자 말리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3명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된다는 플롯은 저메키스를 통해 환상적인 디자인을 입고 재생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인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 안에 실제 배우의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을 가상에 안착시키기 위한 극사실적인 전이적 실험이었다면 후자는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적 형태를 지워내고 새롭게 창조된 가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변환적 실험에 가깝다. 전자가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했다면 후자는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한 셈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성공적 방식이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조차도 음울한 영화의 톤에 어울리는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크리스마스 캐롤>은 허구적인 가상성에 어울리는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구축하고 이미지의 입체적 환상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3D비주얼이 필수적인 의상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 때때로 과욕적 활용처럼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 전체적인 형태가 과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을 설득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상이 단순히 <크리스마스 캐롤>에 대한 맞춤형 효과로서 3D 비주얼과 디지털 캐릭터를 활용했을까, 라는 의문도 동원될 필요하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이며 때때로 그것이 집착을 넘어서는 발전적 지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답하기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에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꿈 역시도 판단가치를 얻을 만한 산물인 셈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짐 캐리다. 그는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의 숲 속에서도 유효한 아날로그적 기본을 설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보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효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