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함은 힘을 필요로 하고, 배신은 피를 부른다.” 닌자를 양성하는 비밀 집단 ‘오즈누’의 수장 오즈누(쇼 코스기)의 대사처럼 그곳은 약육강식의 세계다. 그리고 라이조(정지훈/비)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자 체제에 대한 반역자다. 일종의 신고식이라 할만한 첫 번째 살인 임무 이후, 조직에 등을 돌리게 되는 라이조는 자신의 삶이 있는 곳이라 믿었던 ‘오즈누’를 떠나 진짜 자신의 삶을 찾아 달아나고 조직에 맞선다. <닌자 어쌔신>은 폭력적 강압을 강령처럼 받아들이며 유지되던 조직 체제에 저항하는 개인의 투쟁을 선혈이 낭자한 살육적 이미지로 담아낸 B급 취향의 액션물이다.
<닌자 어쌔신>이 묘사하는 닌자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초인이나 다름없다. 유년시절부터 고아들을 모아 살인병기로 키워내는 비밀집단 오즈누는 닌자라는 존재감에 신비를 덧씌워 리모델링한 가상적 세계관이다. 은둔과 잠입을 장기로 뛰어난 암살적 능력을 발휘한다는 닌자의 베일적 존재감 자체를 도화지 삼아 상상력을 덧칠하고 스크린에 전시한다. 사실 이는 서양에서 제작된 오리엔탈리즘 소재의 영화들이 범하는 자아도취적 환상에 가깝게 보인다. 다만 그것이 만화적이고 게임적인 세계관 안에서 펼쳐낸 과장이라고 납득했을 때 그 착시적 환상을 인정할만한 수준은 된다. <닌자 어쌔신>을 비현실에서 펼쳐지는 허구적 캐릭터들의 피범벅 액션물이라 이해하고 납득했을 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충분조건이 성립된다.
사실 낡은 유물과 같은 닌자를 현대시제 안에서 재현했다는 점만으로도 <닌자 어쌔신>은 이미 시대적 현실감을 거부하는 판타지다. ‘오즈누’가 ‘명성황후’시해에도 관여했으며 현대에서도 암암리에 중요한 암살사건에 관여하고 있다는 ‘유로폴(Europol)’ 수사관의 발언은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하는 구시대의 유물의 존재적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한 수순에 가깝다. 비밀조직의 활약상을 구체화시킴으로써 조직의 연원적 깊이를 설명하고 은밀한 활동범위를 인지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허구적 환상을 실제적 세계관에 이입시킬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다. 다만 ‘명성황후’시해 사건, 일명 ‘을미사변’이 유로폴 수사관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손쉬운 예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물론 그것을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은 할리우드 영화가 배려한) 이벤트로서 마련된 의도적 삽입이라 인식한다면 심각하게 진지해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등장하는 TV속 한국사극은 일종의 애교다.
물론 <닌자 어쌔신>에 조준된 기대감의 팔할은 액션에 놓여 있을 것이다. 피칠갑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닌자 어쌔신>은 상업영화의 포맷 안에서 기획되고 제작되는 안전한 액션영화라고 하기엔 강력한 취향을 드러내는 영화다. 도입부부터 고어적 수준의 신체훼손 이미지를 노출하며 그 이후로도 잔인한 장면들을 더러 연출해 보인다는 점에서 B급 취향을 과감히 전시한다. 물론 도입부의 살육신을 포함해 라이조와 오즈누의 일대 다수 대결을 묘사하는 대부분의 액션 시퀀스들은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장치적 효과보다도 육체적 스턴트의 흔적이 두드러지는 <닌자 어쌔신>은 아날로그적 역동성을 만끽하게 만드는 올드한 감성의 액션영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액션신이 밤시간과 어두운 실내를 배경으로 묘사되고 빠른 몸놀림을 따라잡지 못하는 카메라엔 잔상이 가득한 경우가 많아 시각적 제약이 뒤따른다. 또한 지나치게 건조한 톤의 감정을 일관적으로 밀어붙이는 탓에 액션을 구경한다는 것 이상의 흥분감이 동원되기 어렵다. 건조하게 스크린 너머의 액션을 담담하게 지켜보게 될 공산이 크다.
<닌자 어쌔신>은 대중적인 할리우드 메인스트림 영화라기 보단 마이너적인 B급 취향의 액션영화라고 칭하는 게 보다 어울려 보인다. 게임이나 만화적 세계관에 심취했다는 워쇼스키 형제의 취향도 배제하기 어렵다. 오즈누에 반발한 라이조가 그에 맞서 조직을 붕괴시켜나가는 과정은 흡사 스테이지를 돌파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의 활약상을 스크린에 묘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스테이지마다 적절한 미션을 수행하고 그 끝에 다다라 최종 보스를 격파하면 게임은 끝난다. 그만큼 <닌자 어쌔신>은 단순하고 명확한 영화다.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액션신의 향연은 볼거리를 이루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순차적인 수순 안에 놓여있기에 능동적인 예상을 무마시킨다. 예상범위 내에 명확히 갇힌 이야기처럼 그 사연의 진전을 통해 얻을만한 감흥은 얕은 수준이다. 덕분에 클라이맥스가 이루는 감흥의 세기도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롤플레잉 게임처럼 디자인된 세계관을 품은 내러티브는 단지 게임적 세계관을 작동시키기 위한 에피소드적 장치에 불과하다.
만약 <닌자 어쌔신>을 할리우드 표준 규격의 대중적 액션영화로서 기대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방향를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B급 취향의 하드고어 이미지를 저돌적으로 제공하는 영화로부터 취향의 소통불가적 배신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선 그럴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취향을 적절히 감내할 수 있는 관객에게 <닌자 어쌔신>은 적절한 킬링타임을 제공하는 액션영화로서 유효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정지훈의 할리우드 주연작이란 사실에 기대감을 품은 국내관객에게 팁을 하나 주자면, 터미네이터적인 무표정을 일관하고 감정적으로 봉인된 캐릭터 라이조를 연기하는 정지훈은 묵묵한 액션 캐릭터로서 <닌자 어쌔신>에 철저히 복무하고 있다. 영화적 의도에 적합한 성과를 드러내지만 그 이상의 ‘연기’를 원했을 관객이라면 이 역시 기대적 방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땅이 갈라지다 이내 꺼진다. 달아날 곳조차 없을 정도로 지반 전체가 요동을 친다. 캘리포니아주 전체가 마치 기울어진 접시 위의 팬케이크처럼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다. 화산도 폭발하고, 쓰나미까지 밀려온다. 지구상의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사람이 발붙이고 설 땅이 없어진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재앙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2012>는 재난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미지들의 합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재앙 블록버스터의 총아다. 재난이라면 보여줄 만큼 보여준 할리우드가 아예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마냥 보일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전시하는, 진정한 블록버스터다.
지구의 멸망, 더 나아가서 인류의 멸망을 그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2012>는 바티칸 궁전을 붕괴시키고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을 무너뜨리는 등,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재난적 이미지를 전시해내며 묵시록적 기운을 과시한다. 재난 블록버스터는 현실에서 비극으로 점철될 만한 재앙을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오락적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2>는 분명 대단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눈 앞에 생생하게 전시되는 파괴적인 장관이 즐비한 <2012>는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상을 지배할만한 거대한 시퀀스를 품고 있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재난의 이미지를 연결하기 위한 교각이나 다름없다. 예감하지 못했던 재난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달리고 비행하며 헤엄친다. 물론 그 이전에 재앙을 미리 점지하는 과학자들과 이를 보고받는 세계적인 권력가들의 침통한 표정을 통해 묵시록적인 엄숙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차피 <2012>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 무비라는 것을 인지한 관객에게 <2012>에서 이미지 이외의 영역을 차지하는 요소들의 역할이란 그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엄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2012>는 압도적인 이미지의 너비에 비해 감정적으로 와 닿는 충격적 강도가 기이할 정도로 얕은 영화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2012>는 규모 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 볼거리에 불과한 탓이다.
재앙으로부터 탈출하는 인물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보다도 되레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의 아찔함처럼 감정을 표출한다. 그것이 때때로 재앙에 놓인 이들의 사실적 비극을 간과하게 만든다. 재앙 앞에서 생존적 본능을 곤두세우기보단 비범한 휴머니즘을 역설한다. 그것은 감동적이라기 보단 허세적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허술한 탓이다. 디테일한 CG를 통해 실물감이 대단한 재앙적 이미지와 달리 재앙을 목전에 두고 대의를 주창하는 인물들의 뻣뻣함이 스펙터클마저 느슨하게 만든다. 서스펜스적인 연출 감각도 부재하다. <2012>의 재난적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말 그대로 지켜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 상황이 야기할만한 긴장감이 좀처럼 객석으로 전이되지 못하고 스크린 안에서 증발된다. 단지 전인류적 위기와 다수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는 침통한 감상이 영화와 무관하게 개인의 심상을 지배하고 말 뿐이다.
<투모로우>를 통해 전지구적 재앙을 그렸던 롤랜드 에머리히는 <2012>를 통해 보다 파괴적인 인류적 미래를 그려낸다. <2012>는 어쩌면 대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위력을 대변하는 과시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 동안 할리우드가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전시하는 욕망의 분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12>는 말 그대로 그 이상의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영화다. 이미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안에서 이뤄진 모든 것들을 조합해놓은 편집영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두뇌가 작은 공룡들처럼 창의력도, 상상력도 부족하다. 물론 재난의 종합전시관이란 측면에서 볼거리는 분명하다. 결론은 (어떤 식이든 <2012>를 보고야 말 관객에게) 스크린이 큰 상영관이 진리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그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디지털 캐릭터의 꿈을 꾼다. <폴라 익스프레스>이후로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에 올인 중인 로버트 저메키스는 북유럽 영웅 서사시를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한 <베오울프>에 이어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을 디지털 부호로 재생시킨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을 떨치는 스크루지(짐 캐리)가 자신이 혐오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7년 전 사별한 동업자 말리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3명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된다는 플롯은 저메키스를 통해 환상적인 디자인을 입고 재생된다. 배우의 실제적 외모를 스크린의 디지털 캐릭터에게 이양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베오울프>의 편집증적인 시도와 달리 <크리스마스 캐롤>은 디지털 캐릭터의 특성 안에 실제 배우의 외모를 함몰시켜버린다.
전자가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을 가상에 안착시키기 위한 극사실적인 전이적 실험이었다면 후자는 디지털 부호를 통해 현실적 형태를 지워내고 새롭게 창조된 가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킨 변환적 실험에 가깝다. 전자가 재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했다면 후자는 창조를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을 활용한 셈이다. 이는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성공적 방식이다. 디지털 캐릭터에 대한 혐오를 의미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조차도 음울한 영화의 톤에 어울리는 효과처럼 인식될 정도로 <크리스마스 캐롤>은 허구적인 가상성에 어울리는 디지털 캐릭터의 음산함을 구축하고 이미지의 입체적 환상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다만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3D비주얼이 필수적인 의상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 때때로 과욕적 활용처럼 보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입체적 이미지로서 탁월한 감상을 부여할만한 장면들이 존재하지만 그 전체적인 형태가 과도한 시각적 피로감과 맞바꿀 만큼의 기회비용을 설득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이상이 단순히 <크리스마스 캐롤>에 대한 맞춤형 효과로서 3D 비주얼과 디지털 캐릭터를 활용했을까, 라는 의문도 동원될 필요하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실험은 여전히 과도기이며 때때로 그것이 집착을 넘어서는 발전적 지향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답하기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 도전적 의지를 존중할 수 있는가, 라는 지점에서 로버트 저메키스의 꿈 역시도 판단가치를 얻을 만한 산물인 셈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눈에 띄는 건 짐 캐리다. 그는 디지털 캐릭터와 3D비주얼의 숲 속에서도 유효한 아날로그적 기본을 설득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은 진보보다도 답보란 측면에서 유효한 몽상가의 꿈인 셈이다.
<어떤 방문>은 매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기획하는 ‘디지털 삼인삼색’의 2009년 판본이다.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와 한국의 홍상수, 필리핀의 라브 디아즈가 참여한 이번 시리즈는 방문이란 소재를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둔, 세 감독의 시선과 역량이 차별적으로 반영된 세계관의 합집합이나 다름없다.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와 홍상수의 <첩첩산중>,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까지 세 단편을 나열한 단편 옴니버스 <어떤 방문>은 그만큼 작품간의 감상적 편차가 큰 작품인 셈. 세 작품 중 유일하게 핸드헬드가 적극 활용된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는 전반적으로 느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흐름 끝에 멜로적 심상이 깊게 걸리는 작품으로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무래도 세 편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영화라 할만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홍상수의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여자의 시점과 나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여지 없는 홍상수 작품이다. 얽히고 설키는 남녀관계 속에서 속물적 본성과 이중적 태도가 수다스럽고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소동극은 말 그대로 홍상수스럽다. 마지막으로 가장 지난한 감상을 부를 만한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은 없다>는 척박한 필리핀의 현재적 세태를 반영하듯 롱테이크와 흑백필름의 질감을 통해 지독하게 건조한 정서를 화면에 담아냈다. 디지털이라는 매체적 속성에 대한 탐구와 하나의 소재를 다양한 양식으로 완성한 감독들의 개별적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수집하고 목격할만한 체험이라 할만하다. 물론 말 그대로 그 반대편에 놓인 관객에겐 일종의 고문이 될 확률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파주>는 <질투는 나의 힘>이후로 7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내가 참 오랜만에 영화를 찍긴 찍었나 보다. (웃음) 이런 생각이 제일 크게 남는다. 그리고 그게 이상해. 내가 7년 만에 영화를 찍는다는 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인데 그걸 남들이 막 말해주니까 오히려 나중에 내가 너무 오랜만에 찍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게 이상하다. (웃음) 나는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거든. 요즘 감독하겠다는 사람도 많고, 기회가 금새 오지 않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오랜만에 영화를 찍느냐고 그러니까. (웃음) 그게 신기하더라.
<질투는 나의 힘>에는 장난끼가 배어든 듯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선 듯한 긴장감이 지속된다. 캐릭터의 내밀함은 두 영화의 유사한 지점이라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옛날 영화들 보면 배우들이 진지하게 말한다. 그런데 요즘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약간 낄낄거리듯 말한다. 좀 더 풀어진 듯 보여져야 자연스러운 걸로 인식된다. 옛날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다 정중하지 않나. 그런데 요즘 영화들에선 꼭 그렇지 않다. 그런데 난 그냥 요즘에 만든 영화지만 정중하게 꼭 할말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파주가 영화의 배경이 된 건가?
파주는 안개가 많이 핀다. 어떤 한정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그 곳의 정서를 대변하는 자연적 풍광이 이미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파주에 안개가 많이 피는 걸 보고 파주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개는 <파주>의 심리적 밀폐성을 대변하는 미장센이자 전체적으로 내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드는 장치다. 그 안개로부터 어떤 감흥을 받았나?
그렇게 짙은 안개는 생애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봤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안개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경험해봤으니까. 그런 안개를 화면에 담으면 마치 사막에 살던 사람이 영화를 통해서 눈이라는 걸 처음 보듯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짙은 안개를 처음 보겠구나 싶어졌다. 그러니 꽤 담을만한 게 아니었을까. (웃음)
그 물리적인 형태 자체로서 감흥을 얻은 건가, 아니면 그 형태를 통해 표현적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흥을 얻은 건가.
내가 경험했을 때 그것이 내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에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듯이 영화 안에 그걸 끌어왔을 때 보는 사람도 그렇게 작용 받길 기대하는 게 있었다. 다만 거기에 어떤 상징이나 의미를 내 스스로 붙여본 적은 없다. <파고>(1997)를 보면 눈이 아주 많이 나오는 것처럼. (웃음) 그냥 그 장소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인상이랄까? 그런 거지.
멜로적 복선이 정서적으로 밑바탕에 놓여있지만 꽤나 미스터리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꽤나 흥미로운 서브 플롯들이 가지를 치고 있기도 하고 서사의 이동이 잦다. 그 덕분에 이야기를 쫓아가는 긴장감도 발생하는 것 같다. 단순히 멜로영화라고 생각했을 땐 상당히 독특한 지점의 구성이다.
멜로영화라는 게 두 남녀가 사랑하는데 장애가 있고, 그 장애를 어떻게 넘어서기도 하고, 못 넘어서기도 하는 그런 것 아닌가. 이 영화에서도 장애가 등장하고, 역시 장애를 못 넘어서는 그런 멜로영화 범주 안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대부분의 멜로영화는 그런 장애를 하나 정도만 설정해놓지만 <파주>에선 그렇지 않다. 서브 플롯도 두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메인 플롯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면 서브는 언니가 어떻게 죽었나, 와 철거 현장에 관한 플롯이다. 결국 결말에서 두 남녀가 어떤 식으로든 잘 살 수 있도록 뭔가 해결되고 풀어내야 할 부분이 잘 풀려지지 않는 건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남자는 절대 말할 생각이 없고, 여자는 일단 그걸 알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철거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꽤나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재개발 철거에 관한 서브플롯이 원래 구상된 소재였던 것인가, 아니면 후발적으로 끌어들이게 된 소재였나.
결말을 원래 이렇게 상정했다.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의 핵심 인물인데, 여자가 다 같이 하는 그 일을 망쳐놓는다. 그래서 이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이 여자와 관련된 개인적인 일을 선택할 것인지, 의 갈래에서 다 같이 하는 일을 망쳐놓더라도 개인적인 일을 선택한다. 이게 이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큰 구상이었다. 철거 투쟁도 그래서 들어온 거다. 둘의 관계에서 이 남자가 자기가 해왔던 커다란 대의적 일도 포기할 만큼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철거 투쟁 자체가 둘의 관계를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수단이다. 그 남자가 어떤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커진다 해도 결국 그 여자를 위한 선택을 먼저 염두에 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멜로드라마 범주 안에 있는 거니까.
<파주>에선 구체적인 연도나 연원을 알리는 근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초반부 TV에서 흘러나오는 범민족대회 연대사태에 관한 뉴스 보도를 제외하면 그 시대성을 가늠할 방편이 부재하다. 단지 서사를 감지하게 만드는 자막과 짧은 대사가 몇 번 등장할 뿐이다. 처음에는 편집본에 자막으로 연도를 넣었다. 그 버전으로 모니터를 했더니 더 헷갈려 하고 혼란스러워하더라. 처음 등장하는 게 1994년인데 그 다음에 ‘몇 년 후’ 자막이 나오니까 자꾸 계산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냥 현재 시제를 기준으로 8년 전, 7년 전, 3년 전, 해주는 게 이해하기 편하겠다는 결론이 났다.
시대상에 대한 적확한 적시가 등장하지 않는 덕분에 몇몇 장면은 되레 현대적이란 느낌을 준다. 범민족대회 장면은 얼마 전 촛불시위 같고 철거위 장면은 얼마 전 용산 사태를 보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은 그 뉴스 장면 보고 촛불시위 때문인지 알았다 하더라. (웃음)
구시대적인 지표를 영화에 반영했을 뿐인데 그것이 되레 현대적인 감상을 부른다니 시대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가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보시는 분들이 원래 설정한 연도보다 더 최근으로 봐도 상관없고, 심지어 그걸 촛불시위라고 보더라도 상관은 없다. 나에겐 단지 아까 말했던 다 같이 하는 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중요했을 뿐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가 철거 투쟁을 설정하게 됐다. 내 생각엔 한국에서는 늘 짓고 부수기 때문에 그런 게 계속 진행되는 일이고, 앞으로도 한참 계속될 거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쓸 당시에 사람들은 너무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더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 용산에서 불행했던 그 사건이 있고 나서야 사람들이 지금도 이런 일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조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파주>를 후일담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후일담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금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자주 활용되는데 그 안에서 인물의 오해를 그려나가고 그 오해를 객석의 감상적 오해로 전이시킨다. 서사적 배열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서사가 긴 영화는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게 할 수 밖에 없다. 서사에 단절을 시켜줄 수 있어야 어떤 이야기를 점프시킬 수 있는 건데 서사가 단선적으로 흐를 때는 점프시키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그러니까 긴 시간대를 다룬 이야기에서 현재와 과거가 넘나드는 건 불가피한 방식 같다. 일종의 추리극 같은 경우가 아니고서야 그 방식 안에서 조금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건 어렵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결과가 있고 그 결과를 추적해가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추리극을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니까. 그리스 비극 중에 오이디푸스 왕에 관한 이야기처럼 현대에서 과거의 일을 추적해나가고 분석하면서 조합하는 형태가 나에겐 재미있고 흥미로운 방식이라 생각되더라. 물론 그게 흥미롭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웃음)
서사적 이동이 잦기 때문에 플롯을 쫓아가는 감상 자체에서부터 묘한 긴장감이 유발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 긴장감 자체가 멜로라는 장르 안에서 특이점을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
보통 어떤 남녀의 사랑에 장애가 있으면 보통 부모의 반대거나 주변의 역경인데, <파주>는 그보단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에 대한 이해적 차이가 장애가 된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남자는 밝히려 하지 않고, 여자는 그걸 알아야겠다고 하는 심리가 장애로서 결말까지 이어지는 거다. 그냥 내 생각엔 평범한 거 같다. (웃음)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이원상(박해일)의 전 애인이 한윤식(문성근)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겠다고 협박하다 실제로 그것을 행했을 때 그 이후로 뭔가 엄청난 파국이 벌어질 것 같지만 정작 상황은 담담하다. <파주>에서도 은모가 중식의 속내를 알게 된 순간 뭔가 파격적인 상황이 펼쳐질 것 같지만 오히려 상황이 무마되는 동시에 시퀀스 자체가 종료된다. 어떤 면에서는 관객이 품고 있던 상상이나 기대할만한 긴장감을 무마시킴으로써 파격적인 감상을 부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지만 말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말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달라지진 않는다. (웃음) 현실은 원래 그렇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것이 대단한 비밀처럼 그려지고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도록 보는 사람에게 훈련이 돼있다고 할까? 만약 비밀이 밝혀지면 복수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너도 사랑했니, 나도 사랑했다, 이러면서 울고 불고 좋아해야 하거나, 꼭 그래야 하나. (웃음)
최은모의 캐릭터가 <파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단지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내밀하게 감정을 이끌어가면서 전체적인 영화적 분위기를 조율하는 인물이랄까. 그런데 서우에게 그 캐릭터를 맡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어디서 얻은 것인가?
어차피 20대 중학생 배역이랑 성인 배역을 같은 배우로 할 생각이었다. 같은 배역으로 한다고 치면 그 배우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어야 할 텐데 내가 생각할 때 지금 20대 초반의 배우들은 누구랑 해도 아직 다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험을 하더라도 서우 씨와 하는 게 제일 좋겠다 생각했다. 내 개인적인 느낌에 서우 씨 얼굴을 보면 되게 강인하다 느껴지는 면이 있다. 사실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성형을 하면 그 사람의 개성이 없어지고 어디서 많이 본듯한 보편적인 미인이 된다. 하지만 서우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게 있다. 워낙 자기 개인성이 강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서우 씨를 보면 마치 들짐승과 같은 본능이 떠오른다.
동물적이지.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압도당하지 않는 눈빛을 지녔다. 단순히 겁을 내기보단 마치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경계하는 것 같다고 할까.
음, 맞아. 되게 에너지가 높다. 기가 아주 높은 친구다. 어차피 어떤 20대 초반의 배우랑 해도 그 분들의 경험이나 경력은 다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피차일반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우 씨가 원래 가진 에너지가 다른 배우보다 더 커 보인다는 느낌이 막연히 들었다.
<파주>를 통해 서우라는 젊은 배우의 잠재력이 많이 발견됐다고 해도 좋을 거 같다. 그 동안 서우가 보여준 외향적인 캐릭터와 달리 <파주>에서 연기한 최은모는 은밀하고 내향적인 캐릭터다. 그만큼 디렉션의 역할도 중요했을 것 같다. 특별한 스트레스는 없었나.
서우 씨 연기는 깨끗하고 순간적이다. 순간적으로 되게 큰 에너지가 나온다. (손가락으로 책상 가운데를 짚으면서) 가끔 서우 씨가 이 정도 지점에서 표현을 하면,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겨서) 여기서 조금 이쪽으로 갔으면 좋겠다며 그 방향에 대한 코멘트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이만큼 간 게 아니라 (더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면서) 이만큼 갈까 봐. (웃음) 어떤 배우의 유동성이 좁으면 내 말이 잘못 들어가도 이렇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밀어낼 수 있는 폭이 있는데 차라리 서우 씨는 말을 해도 안 해도 불안한 거다. 워낙 순간적으로 강하게 뛰쳐나오는 에너지가 커서 어떻게 말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은 됐다. 잘못 말하면 확 튀어 올라서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한 느낌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딱 상태가 좋게 잡히면 그 지점이 너무나 좋으니까.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나 보편적인 형태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는 아니다. 어쩌면 보편적인 형태의 사랑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 흥미가 없어서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형태의 사랑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의 심리가 보다 흥미롭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사랑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경험이 많거나 깊은 감정을 잘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에선 왜 그런 형태를 끌고 오는가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해보는 연애니까, 누구나 다 해보는 일로서 그 형태를 갖고 오기가 쉽기 때문인 거 같다. 그냥 편의적으로 갖고 올 수 있는 소재를 다른 형태로 가져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의 결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희비에 대한 해석이 엇갈릴 만한 장면이다. 결과적인 형태 안에서는 비극 같지만 궁극적으로 점지되지 않은 미래적 상황에선 희망을 예감해도 무관할 것 같다. 어쨌든 김중식을 가둔 최은모는 파주를 떠난다. 과연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일까?
아마 여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라고 생각할 거 같다. 물론 일을 보러 언젠가 오겠지. 예를 들어서 부모님 집을 팔러 온다던가, 뒷수습을 하러 임시로 오는 경우는 있겠지만 인도에서 돌아올 때처럼 다시 파주에서 살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돌아오진 못할 거 같다. 그리고 모르겠다. 어차피 누구라도 모를 일이지. 그냥 떠날 때 심정이 그랬을 것 같다. 김중식 얼굴도 다시는 보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을 것 같고. 그 사람이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찾을 명목을 지워야겠다 마음먹지 않았을까.
햇살이 안온하게 내리쬐는 산뜻한 외관의 풍경과 달리 깊게 그늘지듯 침침한 내부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이런 철창이 있을 곳은 세상에서 2군데 밖에 없다. 동물원과 여기.”대사가 지칭하는 그 ‘여기’란 곳은 바로 교도소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화시켜서 내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떤 범죄자는 그곳에서 걸어나갈 수 없다. 교도소는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기도 한 탓이다. 그리고 그곳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실행하거나, 확인한 이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집행자>는 제목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을 중심에 둔 영화다. 사형이라는 소재 내에서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제3자의 인권을 살핀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인 동정에 천착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심리적 채무와 그 끝에 남겨질 반영구적 상흔을 살핀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사형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사형이라는 제도가 심각한 건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반인권적인 처벌을 자행한다는 점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 제도적 차별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해버리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하다. 사형이라는 제도를 결정하는 건 헌법적 약속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의적 의사에 따른 법치적 행정은 어느 개개인들의 손끝을 통해 이뤄진다. 결과적으로 그 행위에 손을 담근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심리적 갈등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할만한 <집행자>는 베테랑 교도관과 신참 교도관을 대비시키고, 범죄자에 대한 냉소한 시각과 동정적 시선을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프레임을 영화에 장치하고 이를 통해 사건의 양상을 발전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체제에 적응해나가는 신참 오재경(윤계상)과 베테랑 배종호(조재현)의 관계는 버디무비를 보는 듯한 흥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체제 속에서 사람의 본성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어가는가라는 고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종종 자신이 짊어진 무게감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듯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가벼운 웃음을 매복시키기도 하며,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어색한 흐름이 발견되기도 하며 불필요하게 확장된 감정적 진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소재가 발생시킬 수 있는 다양한 논지들을 단계적으로 나열할 뿐, 창의적인 형태로 발전시켜나가지 못한다. 일차원적인 연극적 상황을 연출해서 단조롭게 의미를 부각시키고 캐릭터를 통해 직설적인 감정을 쏟아내지만 훈육처럼 뻣뻣해서 깊게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흔들어 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광경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압력은 대단하다. 특히나 사형수 이성환(김재건)과 오랜 벗이 된 김교위(박인환)가 직접 그의 사형집행을 실시하는 순간의 페이소스는 <집행자>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시퀀스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 외에 사족과 같은 서브플롯들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되레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느낌이다. 마치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의 경계처럼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중화시키지 못한 모양새가 흠이랄까.
플롯을 좀더 과감하게 정리했다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 같은 감상이 남는 건 결국 어떤 좋은 취지나 의미만으로 영화가 완전해질 수 없다는 문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좋은 발언만큼이나 좋은 발성도 중요한 법이다.
한류 붐에 편승해 ‘텔레시네마7’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TV방영을 목표로 제작된 7편의 TV영화가 국내 극장에 상영된다. <내눈에 콩깍지>는 그 7편 가운데 첫 번째 주자다. 그 내용인즉,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킹카 훈남인 강태풍(강지환)이 갑작스런 차 사고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시각장애를 겪고 덕분에 미의 법칙을 거꾸로 거슬러 (영화적 주장에 의하면) 폭탄과 같은 외모를 지닌 동물잡지기자 왕소중(이지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
좀처럼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단지 말이 되지 않음을 이유로 지구상의 모든 영화들을 쥐고 흔든다면 실상 남아날 작품이 몇이나 되겠냐는 비약적인 안도감을 안은 채 <내눈에 콩깍지>의 설정을 받아들인다면 못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그 인위적인 뻐드렁니를 앞니에 끼워넣고 주근깨도 좀 찍었다지만 이지아의 외모가 고스란히 보존된 왕소중을 탈레반적 폭탄 취급하는 것도 웃어넘길 수 있다. 동시에 강태풍의 제스처나 대사로부터 넘쳐흐르는 과도한 허세적 태도가 단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재미를 의도한 영화적 고의라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눈에 콩깍지>는 명백하게 극장용이라 내걸고 티켓값을 요구하기엔 부끄러운 작품이다. 흥미를 자아낼 가능성이 지극히 얕은 사연이 잘게 쪼개지고 늘여뜨려진 형태로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연을 방출하는데 여간 피곤한 느낌이랄까. 단순히 3~4편 정도로 나뉘어서 방영된 형태로서 관람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2시간 동안의 장기전에서 오는 지루함은 덜했을지 모를 일이다. 전반적으로 딱히 흥미롭게 관찰될만한 사건이 부재하며 인물들의 감정적 정리는 설득력이 완벽하게 결여된 느낌이다. 만화적인 캐릭터와 사연은 팬시하지만 그 가벼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태하고 안이하다.
일시적인 시각적 장애란 소재도 딱히 설득적이지 않지만 그것을 간과한다 해도 그 너머로부터 진전되는 감정적 갈등과 진화가 좀처럼 설득력 있는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하게 과장된 대사와 제스처조차도 그 끝에 다다라서는 그냥 손발이 오그라든다. 좀처럼 끝나야 할 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사족이 굴러다닌다. 나름대로 적정량의 역할을 충당한 배우들에게 동정심이 배어날 정도로, 게다가 순차적으로 개봉될 6편의 차기 작품에 대한 불신지옥에 빠질 정도로, 그렇다.
땅이 꺼진다. 화산이 폭발한다. 쓰나미가 밀려온다. 지구 전체가 요동을 친다. 사람이 발붙일 곳은 없다. <2012>는 해볼 만큼 해보다 못해 끝장을 보는 재앙 블록버스터다. 아마 지구에서 재앙이라고 할만한 이미지들은 죄다 나올 거다. 그것도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시원하고 화끈하게 파괴적 장관들을 그려낸다. 마치 큰 스크린이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라 훈수 두는 것마냥 그렇다. <2012>가 그려내는 무지막지한 이미지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볼거리다. 그럼에도 그것이 심심함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는 <2012>가 규모 외에 내세울 것이 없다는 상대적 초라함 덕분이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거대한 이미지를 이어나가기 위한 교각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교각이 부실해 다음 이미지로 건너가는 과정이 순탄치 않다는 점이다. 재앙의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생존적 리얼리티보다도 휴머니즘을 구현하겠다는 연기적 일념으로 충만하듯 인위적 상황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그 파괴적인 장관들은 볼거리 이상의 긴장감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들 뿐,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 서스펜스에 대한 연출적 감각이 부재하다. 물론 인류의 멸망적 위기를 관람한다는 건 묘하게 침통한 감상을 부른다. 그건 <2012>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를 묘사하는 이미지의 우월함 덕분이다. 말 그대로 <2012>는 CG팀의 공헌도가 팔 할인 영화다. 딱히 롤랜드 에머리히를 칭찬할 구석은 많지 않다. 마치 부모 잘 만난 자식의 사치를 보는 것 같다. 돈 있는 할리우드나 되니까 이 정도로 무모한 짓도 가능하단 말이다. 그만큼 그 막대한 자본을 좀 더 현명한 곳에 쓸 수 없었을까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딱히 2시간 40여분에 육박해야 할 만큼 필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스토리는 명백한 필름 낭비다. 다 떠나서 (어차피 볼 당신이) 큰 화면에서 봐야 한다는 건 진리다.
작두 타고, 굿판을 벌이며 온몸으로 귀기를 발산하던 전통무속과 달리 요즘 점집은 캐주얼하고 멀티플렉스적이다. 무당과 타로 마스터가 한 건물에 입주해서 팀웍을 이룬다. <청담보살>은 그런 트렌드를 소재적으로 반영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운명적 배필을 만나야만 삶이 풀린다고 믿는 미녀보살 태랑(박예진)은 비전이 전무해 보이는 백수 승원(임창정)이 자신의 운명적 상대임을 알게 되고 작업(?)에 착수한다. 사실상 과장된 상황극이 주를 이루는 <청담보살>은 연출력이나 개연성보다도 순발력에 의존하는 코미디다. 덕분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멜로적 감정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감정은 좀처럼 와 닿지 않으며 전반적인 사연 역시 유치하게 건들거리는 탓에 로맨스 자체가 사족같다. 재치를 발휘하는 배우들의 애드립에 의해 유머가 작동하지만 그 찰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운명적인 상대에 천착하던 보살이 결국 그 운명을 스스로 극복하게 된다는 외피적 설정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후반부는 온전히 넌센스다. 단지 몇몇 배우들의 애드립에 만족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관객에게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은 좀 길어 보인다.
사형은 그 제도적 처벌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하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다. 사형이라는 제도의 존폐가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3자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행자>는 분명 특별한, 그리고 중요한 시각을 제시하는 영화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 동정에서 벗어나 사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인권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는 <집행자>는 종종 그 무게감을 떨쳐내려는 듯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과한 웃음을 짊어지기도 하고, 지나치게 의미를 확장하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벌려나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되레 영화는 상투적이다. 무언가 해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해진다. <집행자>는 분명 의미 있는 영화다. 동시에 체제에 적응해가는 신참과 그 체제에 신참을 훈육시키는 베테랑의 관계가 흥미롭게 묘사되는 버디무비적 영화이기도 하다. 단지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만큼이나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잘 중화시키지 못했다는 게 흠이랄까. 보다 심플하게 서브 플롯을 자제했어야 하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과 같은 감상이 남는 건 의미만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