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보고 싶다는 인물의 머리 위 하늘에 코끼리가 날아다닌다. 일순간 망각을 더듬어 기억을 재생하는 인물의 머리 속 두뇌 피질의 형태가 화면에 드러난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무의식적 추상을 이미지적으로 구체화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점철된 것만 같은 작품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라는 제목에 내포된 허상처럼 영화는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속박된 인물들의 공허한 심상을 끊임없이 겉돌아 나간다.
사진작가 현우(장혁)와 성형외과 전문의 민석(조동혁), 그리고 외국계 금융 전문가 진혁(이상우). 유년시절의 추억을 공유한 세 남자를 중심으로 사건을 확대해나가는 영화는 개별적인 사연을 진전시키는 동시에 종합적인 형태로서 사연들을 엮어나간다. 실연의 상처에 시달리는 동시에 코끼리를 찾아 헤매는 현우와 질환적 수준으로 성적 집착과 여성 편력에 빠진 민석, 그리고 12년 간 외국으로 떠났다 친구들 곁으로 돌아와 사랑을 갈구하는 진혁까지, 세 남자의 사연이 평행하게 전시되듯 흘러간다. 그 와중에 남편과 첫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연(이민정)과 불현듯 등장해 실연당한 현우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정신과 의사 장선생(황우슬혜) 등의 여성캐릭터가 세 남자의 사연에 깊게 연관되어 사건의 형태를 벌려나가기 시작한다.
시쳇말로 시크와 엣지라는 허세적 단어가 떠오를 만큼 스팽글하고 럭셔리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세 남자들은 저마다 여유로운 삶 속에서도 공허와 허무라는 사치를 떠돈다. 텍스트로 기록된 상상적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듯 직설적으로 시각화된 이미지들이 적나라하게 활용된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말 그대로 인테리어에 공을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중요한 건 그 인테리어적 디자인과 이미지의 기능성이다.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그 공들인 디자인과 이미지가 무엇을 위해 영화에서 복무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좀처럼 답을 주지 못하는 영화다. 단지 전시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강박적으로 추상(抽象)을 구상(具象)으로 변주해나가는데 치중한다.
동시에 두서 없는 145분 간의 사연은 장황함을 넘어 지난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낭비다. 물질적 욕구가 팽배한 가운데 정신적 허무에 시달리는 오늘날 젊은이의 삶을 그렸다, 라는 박제적인 문구가 떠오르는 영화의 형태는 정작 그 삶의 본질이 무엇을 갈구해야 하는가라는 지표를 드러내지도 못한 채 이미지만 둥둥 띄워 스크린에 드러내기에 급급하다. 흡사 자신의 미술숙제를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은 유아적 욕망처럼 칭찬받고 싶어서 안달 난 느낌이랄까. 흡사 영화적 스크린이 아니라 시각디자인 전시장의 쇼윈도 너머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이미지적 강박만큼이나 세 인물을 둘러싼 사연의 흐름 역시 허세로 가득하다. 뭔가 비범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잡히는 알맹이는 없다. 구조적으로 불완전하고, 내용적으로 지나치며, 의미적으론 모호하다. 그저 허상에 갇힌 전시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채 와 닿지 않는 선문답처럼 코끼리만 찾아 헤맨다.
아이러니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영화와 무관하게 장자연의 얼굴이다. 대담하고 발칙한 홍보문구 따위가 낚시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육체적으로 착취되는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장자연의 이미지는 살아있는 자의 감상을 숙연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유작이 돼버린 이 영화에서 그녀가 남길 이미지들은 좀처럼 안쓰러워 보는 이를 침통하게 만들만한 것이다. 심지어 영화는 때때로 그녀를 비춘 앵글을 낭비적으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녀의 캐릭터가 자살한 채 욕조에 몸을 누운 시퀀스에서 지나치게 그녀를 앵글에 수집해 넣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장면을 삭제할 순 없었겠지만 그 이미지가 그렇게나 자주 스크린에 잡혔어야 했을지 모를 일이다. 불순함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그만큼 <펜트하우스 코끼리>는 뭔가를 더 보여주고 싶은 강박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화일 뿐이란 이야기다. 그 강박이 지나치다. 그리고 지난한 사연은 질식할 만큼 길고 더디다.
결혼을 하루 앞둔 신부가 예기치 않은 죽음에 터진다. 우발적인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 예비신부 히로코(우에노 주리)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시체를 유기하기로 결심한다. 히로코는 평생 꼴찌로 살아왔다는 열등감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이상형과의 결혼식을 포기할 수 없다. 결국 시체를 트렁크에 담아 집을 나선 히로코는 그 와중에 길에서 빠친코 전단지를 돌리던 코미네(코이데 케이스케)의 차를 탈취해 산에 오르지만 자살을 희망하는 여자 고바야시(키무라 요시노)의 엉뚱한 동행을 받아들인다.
산으로 가는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시종일관 엉뚱한 인물들의 등장을 통해 이야기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범위로 틀어댄다. 뮤지컬적 특성이 강하게 반영된 도입부 시퀀스를 비롯해 때때로 스릴러나 호러적인 연출이 가미되는 등 다양한 장르적 형태가 순열적으로 전시되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기본적으로 코미디를 목적으로 둔 산만한 소동극이다. 새로운 삶을 꿈꾸던 여자가 우발적인 사건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많은 사건을 겪은 뒤 비로소 성장을 맞이한다는 성장담이기도 하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두 여자의 버디무비이자 캐릭터 무비이기도 하다.
두서없이 진전되는 산만한 전개와 과장된 감정을 표출하고 상황을 연출하는 캐릭터들은 고의적으로 의도된 코미디의 양식에 가깝다. 시종일관 비현실적인 태도로 일관되는 상황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 현실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품었다는 사실로부터 멀리 달아나기 위한 방편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도 백치미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하는 우에노 주리의 캐릭터 소화능력은 영화적 과장마저 자연스러운 설정으로 이해시키는 윤활유에 가깝다. 사실상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우에노 주리의 매력에 기대고 있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낙관에 대한 강박이 지나친 영화다. 소재적으로 <달콤, 살벌한 여인>을, 캐릭터적으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앞선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허구적 사연에 현실적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형식적 열거에 치우친 나머지 본질적인 감정의 밀도를 채우는데 실패한 영화처럼 보인다. 감정이 탈색된 백치미적 사연의 끝에 자리한 성찰적 태도마저도 또 하나의 형식적 나열처럼 보일 뿐, 그에 앞서 전개된 사연의 총합이 이루는 결과적 에너지로서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엉뚱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매 시퀀스마다 순간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지만 저마다 파편화된 형태로 굴러가는 시퀀스들은 결과적으로 응집된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고 곧장 휘발되듯 소모된다. 결국 여정의 나열 끝에 걸리는 캐릭터의 성찰은 딱히 인상적인 감상을 남기지 못하고 어색하게 자리할 뿐이다. 좀처럼 와 닿지 못하는 낙관의 비현실성이 마음에 걸린다. 우에노 주리를 비롯해 과장된 상황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결국 그 과장된 상황의 연속적 나열이 부여하는 소동극이 나름의 재미를 부여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통해 농익어야 할 성찰은 헐겁다. 백치미적인 웃음을 나열하는 것도 좋지만 낙관적 성찰마저 백치미적이라 너무 가볍다.
만약이란 말은 부질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뒤집어 가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불필요한 첨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현실이 아닌 허구 안에서 가정이란 유효한 착상이다. 논픽션이 아닌 픽션의 세상을 그리는 이야기꾼들에게 가정이란 발칙한 야바위이자 무궁무진한 떡밥이니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하, <바스터즈>)은 픽션으로 디자인된 논픽션의 세상, 다시 말하자면 영화로 이입된 현실의 역사를 전복시키고 깔깔거리는 유희다. 어쩌면 메가폰을 쥔 당사자가 쿠엔틴 타란티노란 사실만으로도 알만한 사람들에게 <바스터즈>는 싹이 노란 영화일 것이다. 그리고 <바스터즈>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를 뒤흔들어 능수능란한 유머로 발화시키는 타란티노적 시네마천국이다.
총 다섯 챕터로 구성된 <바스터즈>는 중심인물을 달리하는 챕터의 나열을 통해 사건을 범위를 빠르게 넓히고 영화적 세계관을 급속도로 확장해낸다. 1941년, 유태인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치는 독일군 나치의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의 악랄한 만행과 유태인 소녀 쇼샤나 드레이퍼스의 탈출을 그리는 첫 번째 챕터는 나치를 살해하는 임무를 띠고 독일로 파견되는 미군, 일명 개떼들(Basterds)이라 불리는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의 특공대의 활약상을 그리는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간다. 그리고 성인으로 자라 파리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쇼샤나(멜라니 로랑)가 등장하는 1944년 6월의 세 번째 챕터에 다다라 앞선 두 챕터에서 별개의 동선으로 활동하던 캐릭터들의 교점을 형성하고 뒤따를 두 챕터를 통해 캐릭터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접합하던 영화는 궁극적인 본색을 드러내는 피날레를 향해 가속을 올려나간다.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이탈리아어와 영어까지, 총 4개국어가 동원되는 <바스터즈>는 그만큼 수다스럽고 떠들썩한 영화다. 브래드 피트를 제외하면 대부분 독일과 프랑스에 주둔한 현지 유명 배우들로 이뤄진 캐스팅은 <바스터즈>의 현실성과 허구성을 이루는 양면적 자질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캐릭터들의 발성과 화음이 격차를 이루고 교차되거나 변환을 이룰 때, 유머와 서스펜스의 도화선에 불이 붙고 방류되듯 불거지는 사연은 급류처럼 진전된다. 또한 과감하게 전시되는 악의적 성격의 이미지는 예나 지금이나 타란티노의 영화다운 블랙코미디적 취향을 돈독히 다져나간다. 히치콕의 맥거핀 이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몇몇 시퀀스는 비범한 서스펜스로 신을 지배하다가도 순발력 있는 제스처와 언어를 발휘해서 영화적 공기를 찰나에 변주해나간다.
“우리의 임무는 나치를 잡아들이는 게 아니라 싸그리 죽이는 거야.”알도 레인의 대사처럼 <바스터즈>는 정말 나치를 싸그리 죽여버리는 영화다. 허무맹랑한 허풍에 가까운 영화적 장면들은 근엄한 표정을 버리면서도 유희적 의식을 치르듯 진지하게 허구적 상황을 대면하고 펼쳐 보인다. <바스터즈>의 나치들은 역사적 죄인으로서 복합적인 죄의식의 형태를 드러내는 악인으로서 존재하기 보단 명확한 선악의 패가 나뉜 유아적 만화 속 악당처럼 단순하며 때때로 우둔하고 어리석거나 교활하다. <바스터즈>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게 되는 알도 레인과 쇼샤나의 목표가 어느 수순까지 다다르는가를 지켜보는 것보다 그 목표에 접근하는 행위적 수단과 방식이 어떤 수순을 밟아나가는가에 관심을 둘 때 보다 유희적인 쾌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선악의 경계가 명확하면서도 장난끼가 다분한 인물들이 이루는 난장의 연속은 서사적 예측 범위에서 한 발자국씩 벗어난 결과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거짓된 역사를 과감하게 묘사해나간다.
<바스터즈>는 영화광이라 불리는 타란티노의 영화적 유희가 무엇을 동경하고 겨냥하는가를 저돌적으로 드러내는 하이퍼 픽션이다. 스크린이 녹아 내린 극장에서 연기에 영사된 쇼샤나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마치 호러적 광기를 연출하고, 극장을 채운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아비규환에 빠진 관객들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난장을 부추기다 거대한 허구적 단죄로 승화된다. 물론 <바스터즈>를 나치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이루는 비범한 작품이라 치장할 필요까진 없을 것이다. 다만 <바스터즈>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유희'라는 말을 영화로 증명하는 타란티노의 비범한 역작이란 것 정도는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화적 세계관으로 이입된 현실적 부조리를 마음껏 쥐고 흔들며 조롱하는 <바스터즈>는 결국 타란티노가 지닌 영화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결과물이다. 피칠갑의 난장 속에서도 과장과 비유로 상황을 비틀고 뒤흔드는 능수능란한 타란티노식 유머는 <바스터즈>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연극적 단죄마저 유쾌하게 거둔다. “아무래도 나의 최고 걸작이 되겠는걸.”알도 레인 중위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 자뻑마저도 유쾌할 정도로, <바스터즈>는 분명 재치 있는 야바위꾼 감독의 유쾌한 저항을 그리는 결과물인 셈이다.
“여기 이렇게 변한 지 오래 됐어.”들뜬 어조로 무례하면서도 심드렁하게 말을 뱉는 택시기사, 그리고 옆에 앉은 여자. 그녀가 바라보는 창 밖의 파주는 예전에 그녀가 자리하던 그곳이 아니다. 그건 그곳이 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곳에서 보낸 시절로부터 멀리 돌아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욱하게 길을 메운 안개로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풍경에 내밀한 긴장감이 차오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연과 속내를 점치기 어려운 인물의 표정으로부터 호기심이 예민하게 출렁인다.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서듯 서늘한 적막을 유지하다가도 날카롭게 찌르고 거칠게 흔드는 찰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올리는 작품이다.
타이틀 시퀀스 이후 플래쉬백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사를 진전시키는 <파주>에서 김중식(이선균)이 보는 TV화면에 비춰진 ‘범민족대회 연대사태’광경을 제외하면 시대적 연원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부재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명확한 연도에 대한 표기나 언급이 단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는 가운데 서사적 진행과정을 예감할 수 있는 건 과거를 지칭하는 몇 번의 서술적 자막과 대사뿐이다. <파주>는 실제적 서사의 현실적 배경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연출자의 본 의도를 떠나서) 그 형태는 마치 <파주>가 어떤 시공간에 놓여있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방치해버리는 것마냥 보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를 배경으로 둔 <파주>는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영화다. 심지어 서브 플롯에 가까운 철거 신은 근래 재개발 철거 문제로 참상을 빚은 용산의 비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파주>가 낙후된 지방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덕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지방성으로 감지되는 풍경의 특성이란 게 도시에 비해 낙후된 발전적 척도로 가늠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그만큼 영화의 외부에 놓인 세상의 변화가 부조리한 탓이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적극 활용되는 <파주>는 플롯의 서사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적 난이를 유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단지 서사의 배열과 플롯의 접목을 차례대로 밟아가는 행위 자체가 불친절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흐름이 감정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단 되레 내밀하게 감정을 감춰둔 채 그 외면적 상황만으로 관객의 판단과 추리를 도모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까닭이다. 실질적인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스크린으로 묘사되는 상황과 그 이미지와 서사적 추이를 통해 제시되는 근거만으로 조합되고 추리되는 예감과 의심은 결과적으로 <파주>가 뒤늦게 드러내고 공개하는 사연 속에서 오해와 착오로 전복된다. 오해와 착오는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에게 쌍방간의 영향력을 미치는 <파주>의 특성적 기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속내를 감춘 채 홀로 감정을 삭히다 소통의 불가해가 발생시킨 오해와 착오 속에서 사건을 엉뚱한 구석으로 밀어붙이다 과오적 찰나로 상대마저 밀어내곤 한다. 동시에 서사적 미궁을 만들어 관객의 오해를 유도하고 이를 묵살할만한 근거지를 뒤늦게 밝힘으로써 인물의 밀폐된 심리를 보다 강렬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서사적 짜임새를 절묘하게 다지며 극적 흥미를 유도한다.
<파주>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하고 밀어붙이는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멜로적 복선을 밑바탕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양면적 기질을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해내는, 멜로로서 현격한 가치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내밀한 인물의 심리가 과거로부터 전진해 나가다 또 다른 회상으로의 이탈을 반복하곤 하는 서사적 플롯이 서서히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와 함께 첨예하게 발전해나가는 남녀의 관계는 기민한 오해와 착각을 건너 안도와 불안의 감정에 두 발을 각각 디디고 선 채 파국의 심상을 농밀하게 축적해 나간다. 지속적인 불길함을 자각하게 만드는 외부적 지표들의 환기를 통해 인물의 서사적 전후를 끊임없이 구성해나가고 이를 통해 정보적 차단과 접근을 조율해 진실과 진심의 격차를 벌리다 이내 좁혀버린다. 단순히 은모(서우)와 김중식의 치정으로 위장됐지만, (그리고 물론 그게 가장 중요한 뼈대이기도 하지만,) <파주>는 단순히 파격적인 멜로라 불릴만한 소재의 단순한 외벽에 단단한 서브플롯의 내면을 켜켜이 쌓아 넣으며 거대한 심상을 구축해 냈다는 점에서 보다 인상적이다.
운동권 출신으로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도피 중이던 김중식을 중심에 두고 연이어지는 비극적 연애담을 통해 불길한 뉘앙스를 뻗어나가던 영화는 끝내 파국적 형태를 그려나가되 결코 비관적 선언으로서 사연을 매듭짓지 않고 진전적 여운을 남겨 둔다. 끝내 불길한 기대심리를 미세하게 벌려둔 채 시선을 거둔다. 사랑의 파괴적 본능을 대변하듯 낙관적일 수 없는 멜로적 파국을 징검다리처럼 건너던 영화는 그럼에도 그것이 끝끝내 손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속박임을 증명하듯 위태로운 관계를 생의 억겁처럼 끈질기게 이어내려 한다. 은밀한 응시와 묘연한 관찰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금기를 맴도는 감정적 욕망은 세상의 살풍경 속에서 연약하게 움츠리면서도 덧없이 자라난다. 금기와 욕망이라는 이중성 안에서 갈등과 불안에 휩싸이던 은모가 중식의 확신적 태도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되레 그것을 밀어내는 광경은 그 상황 이전에 영화에서 제시된 사회적 단면들을 거듭 경험한 은모가 그 테두리에 대한 불안감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란 방어적 본능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파주>는 단순히 감정을 교류하는 쌍방간의 감정적 진폭을 벗어나 사회적 알고리즘 안에서 개개인이 발생시키는 감정적 진동이 초래할 암묵적 파장을 면밀하게 살피고 이를 통해 사연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간다.
재개발 철거를 앞두고 이에 저항하는 철대위 주민과 이를 진압하는 용역깡패의 대립 과정을 그리는 과정에서 과감한 철거 몽타주를 동원하며 감상을 거칠게 압도하고 흔들어대기도 하는 영화는 때때로 서사의 일부를 직설적인 묘사 대신 간접적인 대사나 상황의 연결만으로 짐작하게 만드는 모호한 국면으로서 강렬한 잠상(潛像)을 심어두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파주>의 주요한 언어는 표정이자, 눈빛이고, 인물 그 자체다. 그만큼 배우들의 호연은 <파주>에서 주요한 장치이자 필수적인 여건으로 기능한다. 칼날을 잡은 것마냥 위태롭지만 그만큼 강인한 심리를 표출하는 은모 역의 서우는 인물의 중의적 표정과 눈빛을 무기로 내밀한 심리를 탁월하게 객석에 전달해낸다. 서우가 연기하는 은모가 쭈뼛하게 선 <파주>의 긴장감을 대변하는 칼 끝이라면 반대로 이선균의 김중식은 단단한 반석이다. 담담한 표정만으로 안정적인 감정으로 속내를 위장한 김중식을 대변하는 이선균은 일관된 표정과 목소리 톤으로 철저히 위장된 삶을 밀어나가다 잠재된 감정을 일거에 방출시키며 강렬한 진동을 발생시킨다. 그 밖에도 극적 감정의 중요한 매개가 되는 최은수 역의 심이영은 헌신과 열연을 통해 영화에 일조하며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조연들이 저마다 적절하게 제 역할로 영화의 토대를 이룬다.
아득하게 잠재된 감정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고, 천천히 극적 열기를 높여 감정을 데우던 영화는 그 끝에서 감정의 끓어오름을 묘사하기 보단 결코 끓어오를 수 없게 차디찬 현실과 직면한 감정적 갈등의 진화를 포착한다. 안개가 자욱한 길처럼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던 인물이 일순간 안개가 걷힌 길 위에서 목도한 선명한 풍경에 되레 압도당하듯 미궁과도 같은 감정적 혼란 속에서 짐짓 안도하던 은모는 중식의 고백과 함께 명료해진 감정적 정리 앞에 되레 돌아선다. 파주로 돌아온 은모는 결국 파주에서 등을 돌린 채 다시 길을 나서지만 은모가 발을 딛는 곳은 더 이상 안개가 사라진 또 다른 파주일 것이다. 안개와 같이 불안정한 감정에 미혹되던 소녀는 무례하고 삭막한 세상 속에서 자라난 뒤, 선명해진 감정적 확신을 되레 뿌리치고 달아난다. 연민적 이타와 결핍적 이기로 맞붙어 자란 사랑은 결국 금기를 넘어서지 못한 채 유배되고 한편으로 보존된다. 결국 안개처럼 희뿌옇게 감정을 숨긴 채 주변을 살피던 남녀는 비로소 마주선 뒤에야 자신에 대한 끝없는 부정으로 내달린다. ‘해서는 안 될 말’과 ‘할 수 없는 말’사이에서 방황하는 남녀에게 <파주>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광야이며 그 안에서 사랑은 속박으로 농익어 서로를 당긴다. 뜨겁게 끓어오르기 보단 차갑게 식어내리는 감정적 여운이 인상적인 <파주>는 그래서 그만큼 더욱 애절하고 절실한 감정을 무겁게 침전시키는 고밀도 멜로다. 마치 안개처럼 피고 지는.
크랭크업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영화가 개봉됐는데 기다려지지 않았나?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께서 모니터를 많이 못 보게 하셨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너무 궁금증이 커진 상태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 새로운 면도 보이고 저 때는 내가 저런 감정으로 연기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선하더라.
제목부터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부르는 작품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어떤 감상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색다른 이야기라 이걸 감독님이 과연 어떻게 표현해내실지, 그리고 만약 내가 메이를 연기한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증으로 시작했다. 항상 내게 들어왔던 시나리오와 너무 다른 류의 영화였고 기존에 내가 해왔던 캐릭터와 상반된 면도 있어서 그런 호기심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주지홍 감독은 연기적인 요구가 많은 편이었나?
시나리오 상에는 디테일한 설정이 많았지만 일단 현장에 나오시면 어떤 게 편하냐고 물어보시곤 했다. 배우들에게 가장 편안한 현장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하셨다.
한국에 온 메이는 고모에게 자신을 왜 미국으로 보냈냐며 따진다. 단순히 메이가 미국으로 보내진 것에 대한 불만을 고모에게 토로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미국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억울함이 발생한 게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메이의 미국 생활에 관해서 결코 묘사하지 않는다. 배우로선 조금 답답할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시나리오 읽으면서 감독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부분이 그 고모와의 대화였다. 일단 감독님은 메이 스스로 그게 고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단지 고모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왔던 아픔을 세상에 표출하는 것이라 하시더라. 그게 고모에 대한 원망으로 그려져선 안되니까 뻔한 오열 같은 신파적 표현이 동원돼서도 안됐다. 그런 감정을 잘 절제해서 보여주는 게 내 숙제였지. 그래서 이 신을 찍고 나서 다시 찍어보고 싶다고 얘길 드리니까 감독님은 이게 좋다고, 100%라고 하시는 거다. 그때 조금 아쉬웠는데 나중에 편집된 걸 보니까 감독님께서 만족하신 그 선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메이가 미국에서 겪은 삶이나 양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감독님께 여쭤봤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아닐지라도 학대나 홀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아닌, 보통 가정의 평범한 유년을 보낸 아이지만 항상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지닌 채 한국에 살아있을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남들과 다른 아픔 때문에 항상 스스로가 벽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메이는 상당히 히스테릭한 캐릭터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어나간다 해도 그 정서에 스스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히스테릭한 부분도 그렇지만 메이가 항상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메이가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답답함을 한국에 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어떤 해결책이나 돌파구가 없다는 답답한 느낌이 연기를 하면서 점점 더 나에게도 전이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가끔씩은 촬영이 끝나고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도 그 기분이 해소되지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있었을 텐데.
3일 동안 세트장에서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서 말 한마디 안하고 계속 답답한 기분으로 연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너무 답답하더라. 어둡고 침침한 세트장에 있다 보니 밖은 햇살이 비치는 낮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로 메이의 감정에 빠져 있다 보니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졌다. 그래서 세트장 문을 박차고 햇빛 아래에서 30분 정도 앉아서 마음을 다스린 적이 있다. (웃음)
큰 사건들이 펼쳐지기 보단 두 남녀의 감정적 충돌과 교감이 중요한 영화였으니까 장혁 씨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 나름대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회사가 같아서 오고 가면서 인사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 전에 내게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던 거 같다. 감성적인 부분보단 이성적인 부분이 강할 것 같다는 느낌? 마초적인 느낌도 강하다 생각했고. 그런데 실제로 함께 연기를 해보니까 감수성이 예민하고 작품에 대한 열의도 강하시더라. 초반엔 감독님이 장혁 씨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기해서, (웃음) 처음엔 되게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데 영화의 흐름처럼 점점 더 친해지다 보니까 내가 몰랐던 매력들이 하나씩 발견됐다. 개인적으론 장혁 씨의 재발견?
스스로가 장혁 씨에 대한 선입견을 지녔다 말한 것처럼 당신의 선입견을 지닌 누군가도 있을 거다. 특히 아이돌 가수 출신 연기자들에게 대중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최근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그런 배경에서 얻은 상처란 생각이 든다. 대중들의 손가락질이 거셀수록 스스로 연기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책임이나 강박도 커질 거다.
예전엔 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기가 정말 좋아지고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 자체에 감사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날 보시는 분들도 약간 변화된 느낌이 보인다고 하시는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방영했던 <태양을 삼켜라>가 본인의 8번째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주연 캐릭터를 거듭 맡아오고 있는데 작품의 얼굴로서 전면에 부각되는 게 부담될 때는 없었나?
처음엔 처음이기 때문에 봐주는 게 있지만 한 작품씩 해나가면서부터 대중들의 비판도 더 날카롭고 냉정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것 같다. 특히 작품마다 6~70명 정도 인원들의 노고가 담기는데 나 하나 때문에 그 노고가 퇴색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
그 동안 브라운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엔 익숙해졌겠지만 스크린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생소할 수도 있었을 거다.
일단 감독님께서 미묘한 감정선을 원하셨는데 아무래도 브라운관 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그런 연기는 뭔가 부족하거나 심심한 거 같고, 이 정도 표현으로 관객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약간 들었다. TV같은 경우 마음에 안 들면 채널을 돌릴 수도 있고 이런 저런 다른 일을 하면서 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일단 스크린 크기도 그렇고 모든 관객들이 스크린에 집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잖아. 그래서 그런 미묘한 감정선도 캐치가 되고 느껴지는 것 같더라. 감독님께서 왜 나에게 저런 밋밋하다 느낄만한 감정선을 요구하셨는지 스크린을 보니까 알게 됐다.
드라마로 배우 경력을 쌓아왔으니 영화 현장은 처음이었다. 준비기간을 비롯해서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땠나?
일단 드라마는 엔딩을 모르고, 심지어 다음 회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찍어야 되는 경우가 많아서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게다가 대중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라 배우입장에선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어서 배우에겐 보다 친절한 작업 현장이 되는 것 같다. 덕분에 내 스스로도 자신감이나 안정감이 있었던 거 같고, 다음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더 좋았다.
드라마는 현장 분위기가 상당히 타이트하다. 반면 영화는 좀 더 여유롭게 진행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된 느낌이 있었을 것 같다.
일단 스태프 분들의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배우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건 의무적이라기 보단 당연시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한 프로의식과 열정을 지닌 것 같다. 그런 부분은 존경하고 본받을만한 점이라 느꼈다.
사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부터 본인도 프로로 대중 앞에 섰다. 그렇지만 바로 프로로서의 자각이 생겼던 건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나는 처음부터 대중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그런 책임감을 가질 순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수가 자신의 무대를 즐기지 못하고 연기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정말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책임감이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앞서 있었던 거 같아서 그 어린 마음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다.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부분도 많다. 뒤늦게 남는 아쉬움은 없나?
그 당시엔 그게 너무 익숙했고 당연했다. 겁도 많았고, 그냥 당연히 지나가는 게 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놓치고 간 부분이 많다고 느껴져서 마음이 아픈 순간이 있다. 평범한 삶을 조금 더 즐기고 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 연기자로서도 그런 경험을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토끼와 리저드>는 운명적 관계를 되새겨 나가는 남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과거 가수로서 데뷔했고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본인의 인생 속에서 뒤늦게 스스로 운명적이었다 느낄 수 있는 계기나 과정의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그 삶에서 얻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됐을지도 모른다.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랑보단 상처가 익숙했던 그들,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연기가 내게 상처가 되기 시작했고 나의 아킬레스건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연기의 참 맛이나 기쁨을 알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여전히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밟아나가면 어느 순간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이런 과정이 힘들다기 보단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면이 더 많아진 거 같다.
“왜 내가 네 손을 잡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는 은설의 대사처럼 운명이란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배우로서 살아가는 것도 결과론적으로 본인의 운명인 셈인데 그 상황 속에서 어떤 목표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에게 연기가 어떤 것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연기는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정말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다가왔고 이로 인해 이런 저런 시련을 받았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벗어날 수 없게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젠 그 어떤 것보다 연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것 같아서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기에 대한 기쁨을 알고 내 길이란 확신이 생긴 만큼 내 스스로 연기를 즐기면서 보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목표다.
인기라는 건 마치 때때로 버거워서 버리고 싶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메이의 짐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데뷔 초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던 만큼 그 인기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어린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기를 얻어서 그런지 그런 인기에 대한 허와 실을 너무 빨리 알게 됐다. 그게 물론 나에게 중요한 건 안다. 다만 그게 삶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나한테 따라와주면 좋지만 따라와주지 못해도 너무 낙심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는데 원래부터 염두에 둔 선택이었나, 아니면 입시적 진로를 앞두고 결정한 문제였나.
솔직히 그 당시엔 학교에서 그때 내가 하던 것과 다른 부분을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다른 분야를 배우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연극영화과를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학교를 갈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체계적인 공부도 하지 못했고 그런 부분을 놓치고 가야 했던 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얻은 경험이 본인에게 실질적인 연기적 수업이 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의 시행착오도 겪어왔을 텐데,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 기분은 어땠나?
아마 카메라에 대한 공포가 없고 오히려 친밀감이 있다는 게 가수 출신 연기자의 장점이 아닐까. 반대로 우리 식구든, 멤버든, 매니저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왔던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수십 명의 스태프들과 몇 달간 동거 동락하듯 지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생기는 다양한 트러블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낯설고 힘들었다. 게다가 짧은 순간의 무대 공연에 익숙해 있던 내게 긴 호흡의 연기는 낯설고 힘든 일이기도 했다.
무대에선 짧은 순간에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되지만 현장에서는 에너지를 배분해서 끊임없이 방전과 충전을 거듭해야 한다.
가수가 무대에 서는 게 100m 달리기라면 연기는 마라톤 같은 느낌이다. 그땐 에너지를 배분하는 법에 익숙하지도 못했고 서툴렀다. 그래서 연기적으로도 들쑥날쑥 하고 논란의 여지가 생긴 거 같다. 기존에 그런 걸 배우고 어느 정도 인지가 된 상태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던 만큼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터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보니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핑클’ 시절 덕분에 여전히 ‘요정’소리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웃음) 그런 말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나?
그 당시에 우리가 그렇게 불려졌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련한 추억이 되는 거 같다. 재미있다, 그냥. (웃음)
‘핑클’은 이제 당신의 삶에서 과거형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현재를 말할 땐 항상 핑클이라는 과거에서 시작된다.
‘핑클’이 큰 존재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사실 예전에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지만 지금은 ‘핑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한다. 덕분에 이제 ‘핑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픈 욕심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수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활동을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핑클 활동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가수 출신 연기자로서 끊임없이 비난을 받을 때마다 그런 고비가 있었다.
대중들의 비난에 항상 대응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도 간혹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본인에게 비난을 던진 불특정다수의 사람들 중 그 영상을 통해 미안함을 품었던 이들도 있을 거다. 일일이 항변하거나 변명할 순 없지만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때때론 좋은 소통 방식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아는 지인 분에게 이런 얘기들에 대해서 다 해명하고 싶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더라. “이 직업을 가진 이상,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이슈가 되거나,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돼 살아야 한다. 그런 오해와 구설수와 각종 루머에 대해서 네가 모두 하나하나 해명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라. 그러나 네가 해명하지 못한 그런 루머나 오해들은 사실이 돼버린다. 어떤 것을 선택할 거냐.” 내게 온 국민의 오해와 루머를 하나하나 해명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하는 법도 배워야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실은 분명 밝혀지는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돼서 해명할 기회가 되면 해명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젠 그런 지혜가 약간 생긴 것 같다.
‘핑클’ 시절 함께 활동했던 다른 멤버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제각각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함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로부터 10년 정도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 어떤 감회라 할만한 게 있을까?
항상 넷이었다가 혼자가 됐을 때는 각자 본인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저마다 본인의 분야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보이는 것 같고, 각자 분야에서 다들 인정받고 있는 거 같아서 좋다. 내가 제일 어려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자매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언니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잘 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요즘 새로운 10대 아이돌 그룹이 많은데 그런 후배들을 보면서 예전 생각을 할 때는 없나?
나는 그 당시에 우리 팬들이 우리 노래나 이미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를 좋아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단지 어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예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각자 개성도 뚜렷하고 재능도 뛰어나지만 그 나이 또래들만 누릴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면 새롭고 신기하고 그렇다. (웃음)
<토끼와 리저드>는 뒤늦게 찾은 운명적 상대에 대한 멜로다. 이제 데뷔 초에 비해 사랑에 대한 관념도 보다 깊어질 나이로 들어섰는데 운명적인 대상을 찾을 것까진 없겠지만, (웃음) 연애나 결혼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 볼만한 나이가 됐다.
어릴 때부터 너무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만나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그런 소망이 있다.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차태현 씨와 호흡을 맞췄다. <토끼와 리저드>에서도 차태현 씨가 출연하는데 본인과 호흡을 맞추는 신이 없어서 마주칠만한 일도 적었을 것 같다.
사실 포장마차 신에서 같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은설과 메이의 감정에 몰입하고 싶으시다고 편집하셨다. (웃음)
지난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를 새로운 작품에서 만나는 건 본인에게 몇 안 되는 경험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만났다는 점도 특별한 감상을 주지 않던가?
20대 중반의 내가 만난 태현 오빠와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태현 오빠는 참 많이 다른 사람 같더라. 그리고 태현 오빠도 이제 결혼했고 아이도 있는 만큼 보다 성숙한 느낌이 드니까 새롭기도 하고 그만큼 정감도 갔다.
방금 말한 대로 서른을 앞둔 나이인데 그만큼의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할 것 같다.
일단 20대엔 이런 저런 갈등이나 시련이 많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의 중심을 잘 세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20대 때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 목표가 생기고 중심이 잡힌다고 느껴지니까 오히려 30대가 좀 더 기대된다. 그 목표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이랄까.
최근에 한 다른 인터뷰에서 장혁 씨가 성유리 씨를 교양 있는 여자라고 했더라.
(웃음) 워낙 장혁 씨가 교양이 있으셔서 나도 거기 발 맞추어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동적인 부분보단 정적인 부분이 많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 발랄하고 활발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외란 말을 많이 듣게 되진 않았을까.
요즘 인터뷰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내가 되게 발랄하고 활발한 이미지로 많이 생각된다는 점이다. 내 스스로는 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는 점이 새로웠다.
메이의 히스테릭한 모습만 걷어내면 본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감정이라 오히려 편하게 봤는데 보신 분들은 색다르게 보시더라. 이런 부분이 내겐 강점이 될 수 있겠구나 느꼈다.
<쾌도 홍길동>이나 몇몇 드라마에서 백치미적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로 각인된 부분도 많을 거다. 어쩌면 정작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캐릭터들을 연기한 셈인데 자신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떤가?
그런데 내 안에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은 그런 캐릭터들이 평소 생각하는 나와 닮았다는 얘기도 하더라.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이 부각되느냐 차이인 거 같다. 이런 저런 역할을 하다 보면 나도 잊고 있었던 성격들이 나온다. 결국 스스로의 재발견이랄까.
때때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을 테고.
어제 영화를 세 번째로 봤는데 눈 모양이 신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 게 보였다. 각도에 따라서, 아니면 조명에 따라서 그렇기도 하고, 어떨 땐 조금 올라간 눈이 되거나 반대로 내려간 눈이 되기도 하고. 나도 몰랐던 그런 부분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쉽겠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10년여 동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런 관심 속에서 짓눌리지 않고 살아남는 건 말 그대로 그 삶을 즐길 줄 알 때 가능할 것 같다. 그 삶 자체가 일종의 도피처가 되는 거랄까.
예전엔 사생활을 구속 당하는 느낌이 싫다는 막연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 사생활이라 할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일상 속의 내 삶은 딱히 스펙터클하지 않고 재미있다기 보단 지루하다. 그런데 연기를 통해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이젠 기꺼이 다른 부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의향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이젠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은 사생활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아서 그 일상을 절충하는 게 가능한 것 같다.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김정호(이순재), 젊고 잘 생긴 최연소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국책을 수행하던 중, 한 청년의 개인적 바람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차지욱(장동건),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남편 최창면(임하룡)의 돌발적 행동으로 곤혹을 치르게 되는 한경자(고두심)까지, 세 번의 정권교체 속에서 세 대통령이 겪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나열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그 주요한 사건을 통해 대통령이라는 틀에 감춰진 인간을 발췌하려 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차지욱의 혈기왕성한 발언처럼, 때때로 과도하게 격양된 국가적 자부심을 웅변하거나, 매 에피소드마다 내재된 개별적 클라이맥스에서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며 감정적 고양을 조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장진의 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특이성을 거세한듯한 코미디와 평이한 이야기 전개를 연출한다는 건 작가적으로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장진이라는 개인적 범위의 퇴보적 결과물이란 평을 떠나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영화가 지닌 대중적 고려는 시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다만 그 판타지가 현실을 대변한다고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현실적 이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공익적인 우화일 뿐이다. 타인을 짓밟고 권위를 누리는 현실의 뻔뻔한 누군가들과 결코 무관한 이상적 대통령들이 사는 그곳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므로.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에 의지한 채 감춰진 과거를 찾아 서울공항에 내려선 메이(성유리)는 길가에서 차에 등을 기댄 채 쭈그려 앉은 택시기사 은설(장혁)에게 손을 붙잡힌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은설의 손을 뿌리치려던 메이는 은설이 심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누군지 알 길이 없는 택시기사 은설은 심장이 언제 멈출지도 모를 ‘민히제스틴 증후군’이란 보기 드문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 죽음과 직면하듯 살아가는 남자와 본의 아니게 상실한 과거를 되찾고픈 여자, 기구한 현실에 놓인 남녀는 운명적으로 손을 잡는다.
핸들을 붙잡고 고통에 신음하는 남자의 간절한 표정이 의문을 자아낸다. <토끼와 리저드>는 결말부의 한 조각을 떼어내 전진배치하고 이를 통해 유효해진 물음표의 정답을 찾아가는 멜로적 여정이다. 형태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토끼와 리저드>란 제목은 두 남녀의 트라우마와 연관된 두 마리의 동물을 나열한 것이다. 유년시절 기억에 남겨진 ‘빨간 토끼’를 찾아달라는 은설이나 어깨 뒤에 ‘도마뱀(lizard)’모양의 긴 흉터를 지닌 메이에겐 쉽게 치유되지 못하는 고통이 존재한다. <토끼와 리저드>는 두 남녀의 트라우마에 얽힌 운명론적 인연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그 상처마저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궁극적으로 결말부에 다다라서야 모든 의문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토끼와 리저드>는 결국 숨겨놓은 서사의 한 단면을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지속적인 극적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 해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우연한 만남 뒤 필연적인 재회를 거듭하며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남녀의 인연은 결국 운명적 관계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정체된 듯 미약하게 진전되는 남녀의 관계가 망각된 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결말부는 <토끼와 리저드>가 다다르고자 하는 성취적 결과나 다름없다. <토끼와 리저드>의 관건은 사연의 핵심이 드러날 결말부에 다다르기까지 암시적 상황을 제시하며 극적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놓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토끼와 리저드>는 답보적으로 진전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캐릭터들의 감정을 설득시키는데 미숙한 멜로다. 영화는 온전히 캐릭터의 행위나 태도만으로 그 순간의 감정을 곧잘 묘사할 뿐, 캐릭터의 감정에 조언적 역할을 하는 상황을 제시하거나 연출적 뒷받침을 가미하지 못한 채 온전히 캐릭터가 자아내는 순간의 감정들을 방치하고 휘발시켜버린다. 사실 <토끼와 리저드>는 극적 의문을 해결할만한 결정적 서사를 감춰두고 서사적 진전과 함께 공개되는 기억의 너비를 늘려나가고 이를 통해 결말부에 등장할 결정적 순간의 목도까지 기다릴 관객의 인내심을 확보해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대단한 감흥을 부를 만큼 인상적인 사건을 전개하지 못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단순히 두 인물간의 감정적 마찰만으로 러닝타임을 채워나가려는 듯 단조롭고 심심한 영화다.
자연광을 적극 활용한 투명한 이미지와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화보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종종 희미한 감정에 홀로 도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운명적이란 수사는 무색하고 사연은 지극히 작위적이며 감정은 얕아서 마음을 담기 어렵다. 제목의 모호함만큼이나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영화에서 두 남녀 배우는 적절히 제 몫을 다 한다. 다만 두 배우의 기능적인 연기를 좀처럼 감정적으로 보좌해주지 못하는 영화 덕분에 캐릭터마저 겉도는 인상을 준다. <토끼와 리저드>는 서사적 배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적으로 확장하지 못한 채 그 단편적 찰나에 기댄 채 사연만 늘려나간 형태로서 감상을 느슨하게 만드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그 지난한 운명적 예감을 실체로서 공개하는 결말부도 딱히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좀처럼 설득력 없는 감정들이 느슨하게 전시되다 뒤늦게 정체를 드러낸 실체가 별다른 파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명백히 실패한 멜로드라마다.
우에노 주리의 백치미적 연기가 인상적인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뮤지컬 성향까지 가미된 만화적 취향의 코미디다. 기시타니 고로가 자신의 첫 연출작으로 코미디를 선택했다는 건 일면 의외다.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를 통해 현장 경험을 시작한 기시타니 고로는 그 이후로 만만치 않은 사내이거나 진중한 남성으로서 각인돼왔다. “내 안에는 <개 달리다>의 강렬한 캐릭터도 있고 그 밖에도 배우로서 연기했던 다양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배우로서 좀처럼 드러내지 못했던 기시타니 고로의 또 다른 취향을 드러낸 결과물이다. 무엇보다도“내가 보고 싶은 걸 찍는 방식”으로 작업에 임한 기시타니 고로는 “내 안에 있는 엔터테인먼트 요소들을 다 이끌어내서 1시간 40분 동안 완전히 달려보자는 생각”으로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을 완성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는 예기치 못한 살인에 휘말리며 시체 유기를 계획한다. 하지만 생각대로 하면 된다는 모CF카피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증명하듯 그녀를 기다리는 건 엉뚱한 소동극의 연속이다. 비현실성이 강하게 자각되는 영화적 상황의 나열 속에서도 설득력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관건이었다. 기시타니 고로는 명확한 연출적 목표를 지니고 현장을 통제했다. “기상천외한 스토리를 지닌 이 작품을 보통의 영화 찍듯 리얼하게 표현하면 도저히 성립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그래서 기시타니 고로는 모든 상황을 “오버액션으로 끌어올렸고”, 덕분에 “춤과 노래가 들어가는” 방식이 강구됐다. 과할 정도로 감정을 조장하는 매 상황은 취향이 반영된 결과라기 보단 확실한 연출적 목표를 품고 스토리에 어울리는 표현을 선택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 작품을 찍으려고 생각해서 준비하고 시작하게 된 건 2년 전이다.” 기시타니 고로가 갑작스럽게 연출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이외에도 기획을 고려할만한“다른 후보들”도 많이 있었다. “난치병에 걸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던지, 차분한 심리묘사가 요구되는 영화”를 구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시타니 고로가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을 자신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택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일본에 없는 타입의 영화를 만드는 것.” <마츠코의 혐오스러운 일생>만큼이나 기구하고 <달콤, 살벌한 연인>만큼이나 엉뚱하지만 보다 낙관적인 웃음과 여운을 전달하는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차분한 드라마타이즈 형식의 여운을 맺거나 적막한 개그를 구사하는 일본 코미디들과 분명 궤가 다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그런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갈 여배우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리고 기시타니 고로는 “아슬아슬하게 밸런스를 조절하지 못하면 너무 오버가 되거나 분위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역할”로서 “우에노 주리 이외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시타니 고로가 “연기에 있어서 최고”라 생각한다는 우에노 주리는 그 기대를 충분히 보상할만한 연기를 선물했다.
배우로서 오랫동안 현장을 누빈 중견배우가 메가폰을 잡고 현장에 서는 느낌은 어색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반대다. “배우일 때는 오늘 촬영할 신에서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해서 언제나 현장에 가기 싫었다. 그러나 오히려 감독으로서 현장에 갈 땐 신나서 뛰어갔다.”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기시타니 고로에게 현장의 새로운 재미를 만끽하게 만든 작품이다. 어쩌면 앞으로 기시타니 고로의 연기를 만날 기회가 현저히 줄어드는 건 아닐까. “배우로서 가끔 어떤 역할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게 되면 그 방향으로 가게 된다. 감독과 배우로서의 밸런스도 마찬가지 아닐까. 연출적 갈증이 생기면 아마 다시 연출을 하게 되겠지. 결국 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결과론적인 일이다.”물론 기시타니 고로에겐 “찍고 싶은 영화가 많다”. 그러나 현재 기시타니 고로는 “내년에 공연할 연극 대본에 대한 생각으로 매진”돼 있다. 아직 차기 연출작에 대해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기시타니 고로는 예감한다. “만일 다음 영화를 찍게 된다면 이번 작품과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지 않을까 싶다.” 또 한번 기시타니 고로가 메가폰을 잡으면 그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가방을 끌면서도 즐겁게 뛰어가는 우에노 주리의 라스트신을 위해 찍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어쩌다 보니까 다시 사람을 죽이게 된 여자가 어두운 상황에 처했음에도 내일 다시 즐거운 일을 만날지 모른다는 긍정적 기대를 품고 뛰어가는 상황을 그리고 싶었다.” 기시타니 고로의 말처럼 <신부의 수상한 여행가방>은 비극 속에서도 긍정을 쫓아가는 역방향의 희망을 그리는 영화다. 사실 이런 기시타니 고로의 긍정적 태도는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 희망에 대한 끈을 놓지 않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20대엔 굉장히 가난했지만 연극배우를 꿈꾸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까지 연극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번도 연극을 그만 두겠다고 생각한 적 없다. 그 가난했던 20대가 내겐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시타니 고로는 어두웠던 과거의 환경 속에서도 미래적 빛을 향한 집념으로 오늘을 이뤘다. 어쩌면 그가 선택한 감독으로서의 길은 어떤 특별한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행복을 꿈꾸는 긍정의 발전으로 이뤄진 자연스런 결과가 아닐까. “훌륭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후회가 필요 없는 소중한 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다.”그렇게 기시타니 고로는 어제를 넘어 오늘로 소중한 순간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어쩌면 볼 수 없는 세 명의 대통령이 등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명백한 판타지다. 장동건과 같은 오로라적 외모를 지닌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가설만으로도 이미 명백한 판타지지만 전임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을 격려하는 그 세상은 이미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닌 거다. 그렇다고 그것을 손가락질할 필요는 없다. 때로 영화란, 혹은 예술은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혹은 보고 싶어하는 것을 묘사하는 도구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렇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꿈꿀만한 거짓을 현실처럼 위장한 영화다. 특히 올 한 해 두 명의 전임 대통령을 잃은 우리에게 뼈에 사무칠만한 감상을 부를 정도로 ‘인간적’인 대통령을 그리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분명 우리가 보고자 하는, 혹은 봤으면 싶은 이상적인 지도자들을 나열한다. 그 판타지가 때때로 과잉적인 감정을 유발하고 지나치게 전형적인 타입의 이상을 그려나감에도 감히 그것이 잘못 됐다 말하기 힘든 건 그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분명 어느 정도 위안이 될만한 손길로서 기능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다만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장동건의 코믹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이기 이전에 장진이라는 네임밸류를 걸고 나온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일면 아쉬움이 남는다. 전형적인 예상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수순으로 나아가는 소동극의 양상은 장진 영화라고 부르기에 지나치게 평범하다. 물론 현실정치에 던지는 발언이 미묘하게 감지되는 가운데 대중적 공감대를 이룰만한 코미디 연출은 무난한 웃음을 부를만한 것이다. 그러나 재기발랄함이건, 치기어림이건, 취향적인 호불호를 감안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감각적으로 낡은 영화다. 세 대통령의 임기 중 굵직한 세 사건을 각각 나열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마치 인터미션이 없는 연극 세 막을 연달아보는 것과 같은 옴니버스적 장편영화다. 매 에피소드마다 나름의 클라이막스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나름의 특이성을 확보하지만 그 순간마다 과잉된 음악으로 감정적 공감대를 자극하려는 영화의 태도는 오히려 소재로부터 발생하는 기본적 흥미를 반감시킨다. ‘인간적인 대통령’이라 제시되는 세 인물의 성격 또한 지나치게 보편적이다. 주제나 소재의 압박에 작가적 취향을 양보한 인상이다. 때때로 절묘한 소동극을 자아내긴 하지만 해피엔딩을 직조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 경직된 스토리는 대통령 훈화를 듣는 것만큼이나 식상하다. 지나치게 공익적 의무에서 자유롭지 못한 느낌이랄까. 무엇보다도 대중적 평준화를 지향하는 장진 영화는 호불호의 기준을 떠나 분명 심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