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내 곁에>를 띄운 건 김명민이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백업이 조화를 이룬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공헌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사의 함량 미달이다.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자꾸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김명민)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지나친 오용이다. 합의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진전되는 로맨스를 깎아지른 절벽마냥 드러내며 출발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을 진전시키기보단 변이하듯 전시한다. 쉽게 웃고 쉽게 울다가도 곧잘 정색한다. 마치 신파지만 신파로서 기능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듯 비극적 감수성에 발을 담그다 이내 달아난다. 사랑과 죽음을 무게중심으로 둔 플롯을 평행선처럼 대치시키며 멜로적 감수성을 확보해나간다. 일종의 평행선처럼 대치한 두 플롯이 각자 감정의 영역을 확보하며 이야기의 영역을 확대해나가지만 좀처럼 접목되지 못한 채 별개의 영역을 맴도는 두 플롯은 <내 사랑 내 곁에>의 감정을 분열시켜나간다.
루게릭병에 걸려 사지가 굳어가는 남자와 시체 닦는 여자의 로맨스. 죽음과 밀접한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내 눈물을 부르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사랑 내 곁에>가 자아내는 멜로적 감수성의 출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사랑의 언약과 운명적 파기보다도 인상적이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죽을 것이고, 여자는 망자가 된 연인 생각에 눈물지을 것이 빤하다. 결국 그 눈물을 얼마나 식상하지 않게 포장하고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가 <내 사랑 내 곁에>의 관건인 셈. (궁극적으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 할만한) 로맨스를 도입부에서부터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쉽게 웃고 쉽게 울면서도 곧잘 정색하는 영화다. 좀 더 농익을만한 감정들이 인위적인 수순에 의해 절제되고 감정적 고양을 차단당하며 인색할 정도로 얕은 수위의 감정을 허락 받는다.
모친상을 당한 종우(김명민)와 장례대행사에서 일하는 지수(하지원)가 만나 곧 연인이 되는 과정은 감정선의 설득력을 배려하지 않은 것마냥 급작스럽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의 무르익음을 설명하며 감정선의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마냥 멜로의 시작을 무뚝뚝한 단면처럼 잘라내듯 내보인다. 그 이후로 농밀하게 진전되는 로맨스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환경을 외면하듯 생기 있게 그려진다. 전후반부의 감정적 격차를 통해 신파적 깊이를 우려내는 <너는 내 운명>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전후반의 감정적 격차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감정선을 조절한다.
감정이란 것이 매번 설득력 있는 서사를 담보로 서서히 우러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급작스런 감정적 변화를 선보이는 서사적 흐름에 설득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가 선택한, 본질적으로 박진표 감독이 선택한 감정의 급변이 그 방식의 활용면에서 효율적인가를 의심해볼 여지는 있다. 그것이 박진표식 멜로라는 이름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그런 감정적 절제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직접적인 대사와 나레이션 독백까지 동원하며 감정을 직접 실어 나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스크린 밖에 놓인 관객의 감정이 무르익기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영화다. 관객 스스로가 그 감정선에 들어서기 전에 스크린은 감정을 뚝뚝 떨어뜨리다 일거에 방류한 뒤 곧잘 표정을 바꿔버리고 지난 감정을 탈색시킨다.
최루성 신파를 지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인정할만한 방식이지만 그 의도 내에서도 거둬내야 할 감정적 수긍이 있었다면 그 방면에서는 실패한 형식이다. 멜로적 감수성을 통해 승부수를 띄우는 <내 사랑 내 곁에>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의 상투성을 포기한 건 도전적이나 그 의도 안에서 숙성시켜야 할 감정적 키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건 역시나 식상한 일이다. 동시에 로맨스와 죽음에서 비롯되는 멜로적 감수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보단 별개적으로 괴리되는 인상이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처럼 서로 마주선 두 형태의 멜로적 플롯을 끝내 이어 붙이지 못한 <내 사랑 내 곁에>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맥락을 접목시키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말해도 될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인상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설득력 있게 그려나가는 과정에 있다. 현실적인 좌절감을 외면하기 위해 비극을 외면하고 희망을 연기하던 인물들이 비극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짓눌리는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삶은 좌절로 급격하게 내려앉는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부각시키는 건 김명민의 헌신이겠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적절한 백업이 조화를 이루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연기적 공헌과 별개로 그들이 던지는 대사에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전적으로 대사의 함량 때문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종종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명백한 오용이다. 신파로서 지나친 감정적 고양을 자제하려 한 의도는 존중할만하나 그 의도 안에서도 실패의 흔적이 역력하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무대에서 이를 입증한 이만이 명성을 얻고 성공이란 단어를 거머쥔다. 80년대 동명작품을 리메이크한 <페임>은 성공을 꿈꾸는 청춘남녀의 스토리를 담보로 춤과 음악적 묘미를 발산하는 뮤지컬 영화다. 무엇보다도 80년대의 <페임>과 2009년의 <페임>은 대중문화의 시대적 변화를 통해 큰 차별점을 둔다.
알란 파커의 80년대 원작에서 들려진 타이틀 넘버 ‘페임(fame)’을 변주한 동명타이틀곡만으로도 새로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페임>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대중문화적 패러다임을 적극 반영한 작품이다. 엠비언트 뮤직이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 힙합 등 현대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을 비롯해 현대무용까지 포괄한 대중문화의 변이를 대거 활용한 <페임>은 80년대 원작과 전혀 다른 포장지를 활용함으로써 리메이크물로서의 차별화를 이룬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페임>은 뉴욕의 유명 예술고 입학 오디션에 무수한 경쟁률을 뚫고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기까지의 진급과정을 서사적 줄기로 밀어간다. 오디션과 매학년 시기, 그리고 졸업까지, 이 모든 과정을 서사적 챕터로 구분한 <페임>은 학생들의 성장과 관계적 진전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룬다. 그만큼 청춘의 감수성을 밑천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인물 관계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묘미가 마련된다.
다양한 학생들의 단계적 성장을 지켜보는 묘미가 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까닭에 집중력 있는 성장담을 그려내지 못한다는 건 <페임>이 성장드라마로서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분절된 챕터로 구성된 입학과 진급, 졸업까지의 과정이 드라마의 진전을 방해하고,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이 서사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한 인상을 준다는 건 일면 아쉬운 측면이다. 그럼에도 <페임>은 분명 뮤지컬 영화로서 즐길만한 순간들이 자리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빠른 컷으로 시선을 잡아 끄는 초반부 오디션 장면부터 즉흥적인 연주로 다양한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식당 시퀀스, 그 밖에도 무도회를 비롯한 다양한 가무의 향연이 곳곳에 배치되어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든다. 특히 피날레를 장식하는 졸업공연은 분명한 볼거리다.
혈기왕성한 도전과 낭만이 깃든 예술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생기발랄한 청춘의 일상을 그려나가며 에너지를 확보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의 덕목은 성취만큼이나 좌절의 과정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단지 성장하는 학생의 사연에 집중하기보다도 어린 학생들의 재능을 다스리고 바른 길로 이끄는 교사들의 진실된 표정과 솔직한 조언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프로 댄서가 되길 원하는 제자의 실력이 부족함을 냉정하게 조언함과 동시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주는 교사의 얼굴은 경쟁의 본질이란 단지 누군가를 이겨내는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끝없는 극복임을 일깨운다. 단지 타인보다 위에 서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바로 경쟁의 본질임을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도 <페임>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엄격한 교육문화와 자발적이고 여유로운 경쟁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타인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경쟁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결국 그 체제에서의 낙오는 좌절보단 새로운 도전을 낳는다. 줄세우기를 통해 성공하는 자와 낙오하는 자 사이에 선명한 금을 그어버리는 사회에서는 결코 꿈꿀 수 없는 낭만이 실로 부럽다.
조선말기, 질곡의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허구의 로맨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실존인물을 밑그림으로 허구적 로맨스를 채색한 작품이다. 기록적 역사에 근거를 둔 재현이 아닌, 실존인물을 통해 뻗어나간 상상을 스크린에 입힌다. 비극적 역사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인물을 비극적 멜로의 주인공으로 재생산한다. 이런 사연이 있었다면 어떨까, 정도의 가벼운 거짓말을 실제적 삶에 덧칠한다. 논픽션의 캐릭터에 픽션의 삶을 입힌다는 건 나름대로 쓸만한 설정이다. 그런데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영화가 추구하는 픽션의 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명(조승우)의 순애보에 동화되기엔 그 얕은 사연에 감정을 담그기 망설여지고, 대원군(천호진)과 명성황후 민자영(수애)이 벌이는 심리전까지 어지럽게 날뛰는 통에 감정이 산만하다. 그 가운데서 판타지에 가깝게 연출된 CG액션신이 종종 스크린을 채운다. 분명 멜로적 플롯이 주가 되는 것 같은데 멜로에 집중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들고, 역사적 플롯에 눈을 돌리자니 영화를 볼 이유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이건 멜로드라마도, 역사스페셜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명성황후를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치환해서 얻어낸 값어치가 고작 이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고작 이걸 해보자고 92억이나 되는 제작비를 썼단 말이다. 덕분에 미술은 꽤나 볼만하다만, 스크린을 전시관 윈도우로 착각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이걸 어쩐담.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그것이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때때로 전체적인 관습처럼 오용되어 개인의 특수한 취향을 제한하고 보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강압으로 작동한다. <날아라 펭귄>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들을 드라마투르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4번째 영화 <날아라 펭귄>은 다양한 감독들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시선 시리즈들과 달리 임순례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한 첫 번째 장편 인권위 영화이기도 하다.
교육열이 대단한 엄마(문소리)덕분에 과도한 스케줄에 시달리는 아들 승윤이(안도규)는 자상한 아빠(박원상)를 통해 종종 출구를 찾는다. 구청에서 일하는 엄마의 직장에선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못 마시는 신입사원 이주훈(최규환)이 들어와 상사들의 공분을 산다. 그런 부하직원들을 아래에 둔 권과장(손병호)은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난 자식들과 이를 돌보기 위해 함께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기러기 아빠다. 그리고 황혼에 접어든 권과장의 아버지 권선생(박인환)은 뒤늦게 제 삶을 찾겠다는 아내 송여사(정혜선)의 선언에 분개한다.
<날아라 펭귄>은 가정에서 사회까지, 대한민국이라는 지정학 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크고 작은 가치관의 불협화음을 전시하는 동시에 개인적 범위의 삶을 옥죄면서도 무분별하게 방치된 부조리를 들춘다. 영어교육열풍 속에서 지나친 학습량을 요구당하는 초등학생 아이와 이를 강요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고단함, 자녀의 교육 때문에 아내마저 외국에 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의 고독은 이 땅에서 무분별하게 방치되는 개인들의 비극이나 다름없다. 삼겹살과 소주 회식에 어울리지 못하는 신입사원의 식성을 다수의 취향에 반한다며 비정상적 존재라 치부하거나 반평생을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오길 강요했던 남편이 뒤늦게 제 삶을 즐기겠다는 아내의 변화에 발끈하는 풍경 역시 부조리한 관습 안에서 주도권을 차지했던 이들의 폭력적 관성이다.
<날아라 펭귄>은 에피소드로 분절된 시선 시리즈와 달리 장편으로 제작됐지만 사실상 4개의 단편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이어 붙이듯 구성됐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유사한 형태를 감지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일관된 관점을 유지시키며 에피소드를 나열함으로써 주제의식을 진전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적인 조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관행들을 열거하고 문제의식을 축적해나간다. 하지만 <날아라 펭귄>은 날을 세운 주장보단 유연한 드라마로서 문제의식을 아우른다.
가정과 직장의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 영화의 풍경은 일차원적인 실생활의 단면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분히 현실적이다. 동시에 그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사건들은 평면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문제의식을 관통하되 유연한 드라마로 극적 흥미를 돋운다. 다만 지나치게 현실성을 반영한 플롯을 나열하는 <날아라 펭귄>이 기존의 시선 시리즈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지는 평면적 기획이라 이해된다는 점은 아쉬움을 부르는 측면이다. 하지만 보다 선명한 현실적 문제의식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날아라 펭귄>의 성과는 분명하다.
사실 <날아라 펭귄>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문제들은 사회가 개인들의 불행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엄마가 아들의 영어교육에 고단할 정도로 관심을 쏟아야 하고 자식들과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며 홀로 고독한 생활을 감당하는 아빠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개인들에게 그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요구하는 까닭이다. 영어교육을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입장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아빠의 반목은 개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적 불행이라기 보단 사회적 시스템이 이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해주지 않고 개인의 몫으로 방치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암묵적인 규율처럼 굳어진 집단적 논리는 개인의 권리와 취향을 손쉽게 무시하고 억압한다. 이런 부조리한 조직적 풍토는 사회 전반적인 조직 문화를 장악하고 개개인의 스트레스를 축적한다. 전체라는 이름으로 의무화된 조직적 강압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발언권을 축소시킨다. 소주 한잔 못하거나 2차 회식에 동참하지 않는 이를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몰락시킨다. 개인의 선택권을 전체라는 이름 아래 무시하는 풍토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위 일방적인 명령체계로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업무적인 창의성마저 떨어뜨린다. 결국 이는 잠재적인 충돌과 갈등 자체를 무마시키고 조직의 부조리를 더욱 강권하게 다져나간다는 점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 전반적인 스트레스를 심화시키면서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한다.
비극으로부터 개개인을 구출하는 방법이란 개개인들의 성찰과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개별적인 숙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작은 변화들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적 풍토의 변화를 통해 큰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날아라 펭귄>은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불행이 무엇에서 야기되는가를 드러내는 영화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의 형태들은 문제의식을 떨어뜨리지 않는 동시에 그 현상들을 목격할 수 있는 끈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날아라 펭귄>은 분명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개개인을 불행한 일상에 방치하는 사회적 부조리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보다 나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주 작은 변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리고 <날아라 펭귄>은 그 작은 행복을 위해 가능한 변화들을 말하는 영화다. 지금 우리가 꼭 인지해야 할 가능한 변화들을 말한다.
세상 어딘가엔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남자가 있을 거라 믿는 여자. 남자란 모름지기 여자와 침대에 올라갈 생각만 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남자.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여자와 그 믿음을 허구라며 깨부수는 남자의 만남. 남녀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공식을 내세우며 반대의 이미지로 뻗어나가는 그래프로 대칭된다. <어글리 트루스>는 남녀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정반대의 공식을 통해 대칭적 그래프처럼 거리감을 두던 남녀가 다시 한 점에서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로맨틱코미디다.
아침 뉴스쇼 PD 에비(캐서린 헤이글)는 품격 있는 방송을 추구하지만 나날이 바닥을 긁는 시청률에 임원진의 압박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야간 케이블 방송에서 ‘어글리 트루스(The ugly truth)’라는 성 카운셀러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고 직설적인 발언으로 순수한 사랑을 짓밟는 마이크(제라드 버틀러)를 보고 격분해서 전화연결까지 시도하지만 결국 모욕만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오전, 마이크를 아침 뉴스 쇼에 영입한다는 국장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지령을 받게 된 에비는 이에 질색하지만 결국 임원진의 압박에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뉴스 쇼에 출연한 마이크는 직설적인 발언으로 방송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지만 시청률은 상승하고 에비는 더욱 발만 동동 굴린다.
갈등선이 뚜렷한 남녀가 반목을 거듭하다 우연히 서로의 진심을 들추는 기회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호감을 이루다 종국에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로맨틱코미디라 불리는 대부분 영화들이란 남녀의 관계변화를 줄기로 로맨스의 진전을 그려나가는 작품이다. 어쩌면 그만큼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는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관습적 영화란 말이기도 하다. 그건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특별하게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식상한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로맨틱코미디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건 그 전형성이 갖춘 쏠쏠한 재미에 있다. 그리고 그 재미의 원천은 로맨틱의 배후에 놓인 코미디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어글리 트루스>는 스크루볼 코미디로서 탁월한 묘미를 자랑한다. 저마다의 생각과 속내를 거침없고 장난끼 가득한 수사에 담아 속도감 있게 주고 받는 캐릭터들의 입담은 <어글리 트루스>에서 오락적 재미를 자아내는 첫번째 묘미다. 또한 입담이 뛰어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자랑하는 동시에 상황에 적절한 슬랩스틱을 구사하며 유머를 강화한다. 특히 캐서린 헤이글의 진동(?) 연기는 인상적인 웃음을 발생시킨다. 동시에 남녀 관계에 대한 적나라한 믿음을 표현하지만 연애 카운셀러로서 인상적인 조언을 던지는 마이크와 이를 통해 감정적 변화를 감지하는 에비의 관계 변화를 바라보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긴밀한 연인 관계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간다는 점에서 <어글리 트루스>는 성공한 로맨틱코미디라고 할만한 여지가 있다.
결말은 뻔하다. 누구나 예상하듯, 원수는 연인이 된다. –이건 스포일러도 아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결말을 확인하는 일이란 그만큼 식상하다. <어글리 트루스> 역시 그 식상함의 혐의에서 온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그 뻔한 결말을 연출하기 위한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분명하다. 마초남과 순진녀가 만나 애정관의 차이를 확인하지만 이성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감정에 이끌리게 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섹스어필한 입담을 통해 사랑에 대한 순진한 감상을 날려버리고 실제적인 감정에 치중한다는 점도 현실적이다. 무엇보다도 근육만큼이나 입담도 탄탄한 제라드 버틀러와 우아하면서도 깜찍한 캐서린 헤이글의 앙상블이 <어글리 트루스>의 매력을 온전히 보장한다.
불과 2살의 나이에 백혈병에 걸린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를 위해 엄마 사라(카메론 디아즈)와 아빠 브라이언(제이슨 패트릭)은 맞춤형 아기를 낳는다. 안나(아비게일 프레슬린)는 케이트를 위해 생을 얻은 아이다. 당연히 케이트를 위해 골수를 채취하고 신장 하나를 넘겨줄 운명이다. 그러나 안나는 유명 변호사인 알렉산더 켐벨(알렉 볼드윈)을 찾아가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소송장을 받아 든 사라는 안나의 태도에 격분하지만 브라이언은 안나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안나를 인정하고 오빠인 제시(에반 엘링슨)는 말은 아낀다. 그리고 병세가 심각해지는 케이트로 인해 가족의 시름은 깊어져 간다.
완벽한 가족계획을 통해 태어난 아이. 언니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연적인 운명을 타고난 동생. 유전자 조작에 의해 인간의 맞춤형 생산이 가능해진 현대에서 만물의 창조에 관여하는 건 단지 신만이 아니다.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시대에서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단순히 콘돔의 유무에 따라 가늠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유전자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를 가족의 갈등과 충돌로 치환한 뒤 화해적 드라마로 뻗어나간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딸의 치료를 위해 맞춤용 아기를 계획한 부모와 이런 태생적 운명을 뒤늦게 거부하는 딸의 충돌,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가족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문제작에 가까운 소재를 통해 논란을 발생시키지만 그 논란은 가족이란 범위 내의 갈등과 충돌로서 발휘되며 궁극적으로 그 갈등은 가족들의 상흔과 고민을 드러내는 매개로서 작동된다.
<쌍둥이별>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출간되어 인기를 얻었던 조디 피콜트의 원작소설을 스크린에 이양한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가족이라는 운명적 테두리에 귀속된 구성원 개개인의 속내를 들추고 이를 통해 그 테두리의 형태 너머의 본질을 들춘다. 집안에 소송을 거는 막내딸 안나의 독백을 통해 출발하던 1인칭 시점의 플롯은 다른 가족들의 시점으로 중심을 이동하며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 갇혀놓았던 개개인의 심리를 스크린에 나열한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고 믿었던 구성원들의 마음이 실은 조각처럼 나눠지고 저마다의 결핍과 고독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는 은연 중의 진실이 스크린 위로 조심스럽게 펼쳐진다. 투병 중인 케이트를 위한 온 가족의 헌신은 그 선택의 의미를 벗어나 때때로 가족 간의 상처를 방치하고 저마다의 불합리를 무시하게 만드는 계기로서 작동한다.
소재만으로 문제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과학 발전에서 비롯된 인간적 윤리를 가족의 안방으로 끌고 들어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궁극적으로 가족에 대한 성찰과 드라마틱한 감동을 거두는 작품이다. 원작의 명료한 문체를 감각적인 영상과 배경음악으로 치환하고 저마다의 1인칭 독백을 통해 수집된 개개인의 심리를 플롯으로 이어나가며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그 바탕이 되는 건 배우들의 열연이며 삭발 연기로 화제가 된 카메론 디아즈의 헌신적 연기만큼이나 아역들의 열연이 대단하다. 특히 소피아 바실리바와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연기는 훌륭하다. 투병 중인 케이트의 고통과 함께 성숙한 내면을 드러내는 소피아 바실리바의 연기는 의외적 결말을 선사하는 영화적 선택을 위한 설득력을 보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똑 부러진 연기 역시 영화의 본심을 감추기 위한 중요한 태도였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성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어린 배우들의 영특한 연기는 문제적 시선을 폭넓게 확장하는 동시에 영화적 흥미를 돋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류의 삶은 진보하지만 윤리적 가치판단은 나날이 어려워진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그 윤리적 논쟁을 실생활로 이끌고 들어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건드려 깨우치게 만든다. 삶이란 그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가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과 명확히 달라진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결말은 원작의 형태보다도 설득력 있는 형태로서 변주됐다. 그리고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죽음이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에 이성적으로 답변하는 동시에 감동마저 선사하는 작품이다. 가족은 결국 살아간다. 누군가의 빈 자리는 영원히 추억된다. 산 자는 살아야 한다. 대신 죽은 자의 꿈을 먹고 새로운 삶을 산다.
2005년에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쉐인 액커는 이를 통해 팀 버튼과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었고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서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자체가 생략됐으며 캐릭터의 대사조차 동원되지 않는 탓에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세계관이지만 폐허와 같은 이미지 위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의 탁월한 액션신이 담긴 11분 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은 캐릭터에 대사를 입히고 세계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암시를 동원한 80분짜리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됐다.
인간의 이기를 위해 창조된 기계문명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을 자초한다. <9: 나인>(이하, <9>)은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와 같은, 기계문명에 의해 공격받는 인류의 비관적 묵시록을 스팀펑크(steampunk) 이미지에 담아낸 애니메이션이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에 남은 건 인간을 말살한 기계들과 피부대신 천을 두르고 살아 움직이는 정체불명의 인형들이다. 멸종된 인간이 남긴 문명의 잔해 위에서 인간을 말살한 인공지능 기계로봇에 맞서 생존적 저항을 펼치는 새로운 존재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활약을 묘사한다.
등에 적힌 숫자로 이름을 대신하는 9개의 인형 캐릭터는 제각각의 뚜렷한 개성을 통해 상대로부터 차별화된다. 인간만큼이나 부조리한 반면, 현명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저마다 이성과 감정의 양면성을 갖추며 사고하고 판단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인간의 세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 처참한 풍경이지만 이는 딱히 불행을 인식시키지 않는다. 이는 그 폐허 위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인간들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실상 인간이 사라진 영토를 차지한 존재들은 인간의 비극을 감지할 수 없는 로봇과 인형에 불과하다. <9>은 마치 인류가 사라진 묵시록의 대지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창세기처럼 보인다. 폭력적 진화 속에서 멸망을 자초한 인류는 자신들이 건축한 세계로부터 퇴장 당하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멸망 당한 인류가 만들어낸 인공적 존재들이다.
<9>은 비범한 서사보다도 가벼운 묘사를 통해 매력을 어필하는 작품이다. 세계관의 기원과 캐릭터의 근원에 대한 설명은 불충분하고 암시조차 소극적이다. 하지만 문명에 대한 비관적 뉘앙스로 그려진 세계관은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치장하는 거대한 소품에 가깝다. 인류는 그저 사라져버린 종에 불과하며 이는 <9>에서 딱히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폐허가 된 문명 위에서 인류가 남긴 폭력적 문명에 대항하며 생존을 위한 대결을 펼쳐나가는 새로운 종의 투쟁 그 자체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포착된다.
물론 <9>에선 인류의 문명에 대한 비관과 조롱이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9>에서 그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기란 어렵다. 이는 <9>이 그 세계관을 병풍처럼 두르고 방치하는 덕분이다. 암울한 세계관을 인테리어처럼 두른 채 창조적인 캐릭터들이 이루는 동선을 따라 구사되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고차원적인 해석의 의욕을 차단하는 동시에 일차원적인 시각적 묘미를 부여한다. 인류의 흔적을 지워버린 묵시록적 세계관을 스팀펑크의 이미지로 디자인하고 테크놀로지 기계 문명과 아날로그적인 캐릭터들의 대결 구조를 통해 화려한 볼거리를 확보해나간다. 비관적인 세계관은 낡은 천을 두른 인형 캐릭터들의 창작적 개성을 통해 암울함을 잊은 채 서스펜스를 구사하기 위한 응용적 배치로서 소모될 뿐이다.
스타일리쉬한 액션 이미지를 구현하는 <9>에서 세계관에 대한 비범한 해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건 <9>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순수하게 만끽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여건에 가깝다. 창의적인 이미지가 구현하는 시각적 묘미를 부담 없이 즐기면 그만이다. 거창한 이미지를 통해 비범한 의미를 치장하지 않고 빠르고 신속하게 제 위치를 선점해나간다. 그런 면에서 <9>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어느 정도의 오락적 너비를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라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
편모 아래 자란 딸은 어려서부터 제 어미 속을 썩이는데 이골이 났다. 남다른 글솜씨로 작가를 지망하는 애자(최강희)는 공부도 잘하지만 땡땡이도 잘 치는, 고무공처럼 튀는 아이다. 비만 오면 학교는 나 몰라라 부산 앞바다로 뛰쳐나간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경고에 엄마(김영애) 속만 까맣게 탄다. 애자 역시 저보다 제 오빠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공부도 못하는 제 오빠는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유학 가고 싶다고 보채는 자신에겐 되레 역성인 엄마가 미덥기만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년이 돼서도 애자는 여전히 엄마 속을 태운다.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좀처럼 시집갈 생각은 없고 작가가 되겠다며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딸래미를 보는 엄마는 속이 탄다.
예나 지금이나 애자는 엄마에게 ‘눈엣가시 같은 년’이다. 하지만 눈엣가시 같아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순 없다. 평행선과 같은 거리감을 두고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모녀는 특별한 계기와 함께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여나간다. 서울에 홀로 사는 애자가 잠결에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다 엄마의 앓는 소리를 듣게 된 후, 득달 같이 엄마가 사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될 때, 애자의 마음에 침잠(沈潛)해있던 진심이 동요를 일으킨다.
<애자>는 좀처럼 서로의 본심에 접근하지 못하던 모자의 오랜 갈등 속에 잠재돼있던 애틋한 속내를 드러내고 이로써 심금을 울리는 가족 신파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던지며 뒤돌아 서다가도 다시 서로를 향해 뒤돌아보게 되는 가족의 진심을 비춘다. 모정을 연출하고 죽음으로 방점을 찍는 <애자>는 분명 강력한 파토스를 전달하고 마는 영화다. 비극적 피날레를 예감하게 만드는 중반부부터 페이소스를 축적해나가다 그 끝에 다다라 어김없이 강력한 신파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애자>는 분명 모정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눈물로서 방점을 찍는 영화다. 켜켜이 쌓아나간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 뒤 눈물의 방류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애자>는 주체할 수 없는 페이소스를 넘쳐내며 관객을 비극적 심상으로 밀어 넣는 최루성 신파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애자의 학창시절을 발랄하게 묘사하는 도입부처럼 <애자>는 심심찮게 캐릭터의 개성을 적극 활용한 가족적 코미디를 연출하며 신파를 가늠하기 어려운 생기를 감지하게 만든다. <애자>는 가족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이어 붙인 영화처럼 전후반부의 양상이 다른 작품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온도차는 신파적 형태로 귀결되는 <애자>의 전반적인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전후반부의 감정적 대비 속에서 결과적인 감정을 더욱 짙게 물들이는 보색적 효과를 낳는다. 물론 때때로 상황에서 지나치게 엇나가는 코미디가 안일하게 동원되어 감정의 수순을 방해하는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애자>가 연출하는 웃음과 눈물의 수위는 안정적인 편이다. 무엇보다도 색채가 다른 두 정서의 융화를 통해 결정을 이루는 클라이맥스가 감정적 자극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 이해를 더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애자>에서 중요한 건 비극의 주체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 연민을 깨닫는 이의 변화다. 고통을 맞이하는 자에 대한 동정만큼이나 이를 지켜보는 자가 뒤돌아 흘리는 눈물의 심정이 마음을 울린다. 엄마와 원수처럼 지내던 딸이 엄마의 죽음을 직감하고 그 삶을 좀 더 연장하려 할 때, 모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묵혀둔 진심을 일거에 방출한다. 무엇보다도 결말부에서 죽음을 묘사하는 형태는 <애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면모다.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감정적 고양을 이루는 <애자>는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을 통해 비범한 면모를 드러낸다.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과감한 선택을 이행한다. 누군가의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자는 그 삶이 계속되는 동안 끝을 체감할 수 밖에 없다. <애자>는 죽음에서 모든 감정을 방출하기 보다 그 순간을 이겨내고 그 너머의 삶을 비춘다. 엄마의 빈 자리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제 삶을 채워나가는 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부모가 될 모두에게,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가 될 여자들에게, 엄마란 이름은 쉽게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지고, 뒤돌아 후회하는 건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 사이를 채우는 관성적인 버릇과 같다. 특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적 모정을 공유하고 있을 이 땅의 대부분은 <애자>와 같이 모성애를 담은 영화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다. 엄마는 신파다. <애자>는 그런 현실적 감정을 스크린에 옮겨 담는다.
무엇보다도 두 배우의 어울림은 <애자>를 빛내는 가장 큰 수훈이다. 추와 같은 무게를 얹는 김영애와 풍선처럼 분위기를 띄우곤 하는 최강희는 <애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갈등과 화해로 나아가는 모녀의 감정적 소통은 두 배우의 앙상블을 통해 진심을 확보한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감정의 진전 역시 예상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애자>에서 중요한 건 그 뻔한 이야기에 얼마나 진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캐릭터의 관계변화를 통해 현실성을 얻고 진정성마저 확보하는 <애자>에서 두 배우는 확실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다.
가족은 운명이자 속박이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깨이면서도 벽처럼 서로에게 다가서기 어렵다. 그래서 가족은 때때로 지옥이 되고, 폭력이 되고, 상처가 된다. 애정은 편견으로 이해되고 연민은 간섭처럼 지겹다. 예기치 않게 쌍방향에 놓인 구성원 모두를 파괴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운명공동체라는 이름 하에 뿌리내린 유대감은 때때로 덜어내기 힘든 부채처럼 버거운 의무감을 준다. 그래서 가족이란 슬프고 아픈 것이다. 버겁다고 덜어낼 수 있는 짐이 아니라서, 귀찮다고 내칠 수 있는 타인이 아니라서, 미워도 다시 한번, 끝없는 애증을 삭이며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로즈(에이미 아담스)는 고교 시절 치어걸 리더로서 화려한 전력을 지녔지만 아들 오스카(제이슨 스페벡)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청소대행업체에서 받는 푼돈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여동생 노라(에밀리 블런트)는 매번 직장에서 잘리는 탓에 백수 생활을 이어나가는 천덕꾸러기다. 그녀들의 아버지 조(알란 아킨) 역시 항상 변변찮은 사업을 기획하고 번번히 말아먹는 탓에 두 딸의 걱정을 산다. 그 가운데 오스카의 사립학교 입학비가 필요해진 로즈는 보다 큰 수익을 기대할만한 일을 찾던 중, 범죄현장 청소라는 고액의 업종을 추천 받고 동생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게 된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공통 분모처럼, <미스 리틀 선샤인>과 <선샤인 클리닝>은 유사한 주제를 끌어안은 작품이다. 콩가루처럼 흩어져 부유하던 가족이 끈끈한 반죽처럼 덩어리를 이루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내는 작품이다. –두 영화는 심지어 제작진도 같다.- 가족을 비극적인 진창으로 몰아넣는 건 가난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하루벌이로 먹고 살 듯 박복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세 가족은 일상은 그 자체로 팍팍한 심경을 전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가족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공유한다. 좀처럼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회상 신을 통해 파편화된 기억을 문득 내보이곤 하는 영화는 결말부에 다다라 아물지 못한 상흔을 선명히 비춘다. 좀처럼 보이기 어려웠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기까지의 갈등과 충돌을 그리는 영화적 여정은 성장통처럼 구성원의 성숙을 도모한다.
‘범죄현장 청소’라는 특별한 소재를 통해 보편적인 가족애로 그려나가는 <선샤인 클리닝>은 창의적이고도 탄탄한 선댄스표 영화에 걸맞은 모양새를 자랑한다. 끔찍한 죽음이 남긴 악취와 핏자국은 노라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마음에 봉인한 상처와 대면하게 만들고, 로즈에겐 새로운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아버지 역시 한동안 소통할 수 없었던 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찾게 된다. 세 가족의 성장을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샤인 클리닝>은 사실 소재로부터 발생할만한 특별한 흥미에 비해 적막한 가족드라마다. 충돌과 갈등을 건너 끝내 화해를 이루는 캐릭터 간의 어울림이 대단한 절정을 선사하지도 않거니와 세 가족을 비추는 영화적 시선이 시종일관 담담한 감정을 유지하는 탓이기도 하다. 인물마다의 비중적 편차가 크고 인물간의 정서적 교류가 선명하게 구축되지 못한 탓에 구성원간의 화합을 묘사하는 결말부의 감흥도 낮아지는 인상이다.
<선샤인 클리닝>에서 돋보이는 지점은 소재의 착상이다.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이들로부터 남겨진 끔찍한 흔적을 지우는 범죄현장 청소는 기발한 소재로서의 흥미를 넘어 드라마로서 훌륭한 매개를 이룬다는 점에서 보다 특별하다. 루저로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인물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물들의 희망을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비극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떤 이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동시에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참신한 이야기를 위한 자격을 지닌다.
현실적 난관들이 빚어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당장의 희망을 체념하면서도 새롭게 현실적 활로를 모색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감정을 자아낸다. 거울을 바라보며 희망적인 주문을 외우는 로즈의 얼굴은 낙천적이라기보단 절박하며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 매달려 함성을 지르는 노라의 표정엔 기쁨보다 슬픔이 서린다. 에이미 아담스와 에밀리 블런트의 얼굴은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도 긍정의 끈을 놓지 않는 인물들의 절박한 심리를 드러내는 창과 같다. 대책 없는 낙관으로 끝없는 무능력을 드러내지만 결국 딸을 위해 헌신적 대안을 제시하는 아버지 조를 연기하는 알란 아킨의 심드렁한 표정은 속내에 감춰진 진심의 깊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묵묵하면서도 끈기 있게 인물들의 표정을 응시하며 감춰진 속내까지 포착하는 <선샤인 클리닝>은 현실적 한계를 체감하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휴먼드라마다. 척박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가족사업은 결국 현실에서 거대한 빚을 남기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게 만든다. 누군가가 남긴 생의 흔적을 지워나가며 현실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는 가족은 자신들의 묵은 상처를 지우고 이는 과거를 극복하는 현실적 대안이 된다. <선샤인 클리닝>은 행복을 쟁취하기보단 그 기준점을 제시하는 영화다. 커다란 변화가 아닌 보편적인 삶의 테두리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삶이란 이렇게 작은 변화를 통해서 큰 울림을 얻곤 한다. <선샤인 클리닝>은 그렇게 작은 변화 속에서도 깊게 자라나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다. 명료하고 깔끔한 여운이 돋보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