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숙이 배우라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어쩌면 이미숙이란 배우를 아무도 모른다. 배우이기에 그녀는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스스로를 위해서.
<최고다 이순신> 1회 시청률이 20%를 넘겼다.
내 복이지, 뭐(웃음).
<최고다 이순신> 1화에 송미령이 자신의 오래된 출연작을 보는 장면이 있다. 자세히 보니까 <겨울 나그네>(1986)던데, 얼마 만에 본 건가?
그 영화가 한 27년 됐지? 사실 내 작품을 다시 볼 일이 없지. 새롭더라. 문제는 그 세월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거야. 그저 엊그제 같다. 지금도 그런 감정으로 연기해보고 싶지만 들어오는 건 엄마 역할밖에 없으니까 새삼 현실적인 비애가 느껴졌다.
이젠 특별히 하고 싶은 캐릭터도 없을 것 같다.
맞다. 내게 맡긴 역할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난 사전에 감독이나 작가와 상의하면서 그들과 생각을 조율한다. 이미숙이라면 이 정도는 해줄 거라 생각하는 사람과 작업하면 오히려 내가 나한테 갇히니까 손해다. 내 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내게 있는 거지.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들자’는 각박한 캐릭터인데 밉지 않더라.
항상 강하고 억센 캐릭터에겐 해학이 보여야 미워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삶은 해학이다. 삶의 코드는 유머라고. 힘든 일을 하다가도 누군가의 한 마디에 킥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것처럼. 억척스런 캐릭터에게 유머가 보이지 않으면 너무 뵈기 싫을 거다. 그래서 들자처럼 억척스러운 엄마 역시 나름의 행복을 느끼는 부분이 있을 테고, 그 캐릭터 안에서 웃음을 발휘할 수 있는 게 과연 뭘까 고민했다.
완벽주의자인가?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하지 못하니까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거다. 죽을 때까지 연기해도 완벽이란 건 없을 거다. 그래서 노력하는 거고.
그런 사람이 결국 조직에서 악역을 도맡더라.
살다 보면 인내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형평성이 어긋나는 건 누군가 잡아줘야 된다. 결국 강한 사람이 잡아주고 어떤 체계나 선례를 만들어나가야지. 그냥 한번 하고 마는 건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책임한 거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일만 한다면 그런 상황을 또 만들 수 있다는 거고. 난 그런 상황에서 일하는 방법을 모른다. 할 건 하는 거다. 그건 성질의 문제가 아니잖아.
연기한 걸 후회한적 없나.
후회해본 적 없다. 열심히 연기했고, 연기를 위해서 나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배우로서 한 점 부끄럼이 없다. 다만 배우로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선 회의가 있지. 하지만 그 회의감이 연기에 대한 마음을 이기진 못하는 거 같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 거냐고 물어보면 그렇다.
운명적이란 말인가.
연기하길 정말 잘했다. 연기하는 순간 모든 고통과 아픔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배우가 직업인가? 내겐 그렇지 않은 거 같다. 직업이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데, 그런 논리로 연기하진 않았다. 30년 넘게 연기했지만 많은 자산을 축적하지도 못했고, 작품을 많이 한 편도 아니다. 그저 캐릭터의 삶이 나를 통해서 어떻게 투시될까 생각만 했다. 그냥 지금의 내가 연기하는 지금의 캐릭터가 중요하다는 거지.
연기하는 캐릭터마저도 당신의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배우로서 송미령이란 배우를 연기하는 건 어떤가.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송미령의 아웃라인에 대한 소스는 지금의 내게서 얻어낸 부분이 있다. 50대임에도 잘 나가는, 워너비가 될 수 있는 배우.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은 달라지겠지. 송미령의 심각함 속에도 부드러운 감정이 있을 거다. 그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송미령은 배우로서 신뢰해왔던 매니저와 갈등을 겪고 실망하기 시작한다. 사람에게 실망한 경험 없었나.
연예인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 부류다. 이 사람들의 세계가 그만큼 단순하다.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이 단순하고, 이성적이지 못하지. 그런 배우와 가장 근접한 건 매니저 같은 사람들인데 매니저는 이득을 위해서 일을 취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배우는 그들에 의해서 움직여야 되는 사람이다. 그런 관계에서 갑자기 신뢰하던 사람이 돌변하면 대처하는 능력은 배우가 월등히 떨어진다. 그것까지 그 사람들이 해줬으니까.
사실 송미령이란 캐릭터가 최근에 좀 시끄러웠던 송사를 연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캐릭터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놀랍더라.
피할 이유는 없잖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이 지금의 결과다. 지금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법이란 건 지금까지의 경험과 다른 세계더라. 나는 지금까지 감성적으로, 인간적인 관계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았는데 법이란 종이 한 장 차이로 움직인다. 사실 법을 몰라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법을 들이미니까 당황스럽더라. 결국 내 자신의 떳떳함을 읽어주는 건 대중이다. 물론 대중들은 진위와 무관하게 자극적인 말을 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사생활이 어떻든 간에 내가 배우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확하게 보는 인식은 있단 말이다.
배우로서 충실히 살아왔다는 자신감 덕분인가.
배우니까 기본적으로 연기를 잘해야 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 사실 배우의 사생활을 평가하거나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건 대중의 역할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할 일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가 말미를 주니까 허를 찔리는 거다. 결국 배우로서의 평가가 중요한 거다. 그런 자신감을 얻을 수준이 되지 않는 배우에게 사람들은 간섭하거나 참견하고 방향까지 제시하려 든다. 결국 중요한 건 행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가장 정확하게 있느냐는 거지.
<미라클 코리아>의 MC를 맡았다. 연기 외의 방송활동도 늘어난 것 같다.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 방에서 TV로 볼 땐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분야든 그만의 고통이 있다. 물론 힘들지 않으면 일이 아니겠지.
<기적의 오디션>에서 탈락자를 발표하고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이미숙이란 사람을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를 심사한다는 건 이성적인 일인데 나는 너무 감성에 치우진 사람이더라. 조직의 인사개편엔 미흡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했다(웃음). 이런 취약점이 있다는 걸 <기적의 오디션>으로 느꼈다. 능력은 없었어도 내 감정만큼은 진짜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미숙이 자신과 다르다고 느낀 적 없나.
아마 사람들은 이미숙이라면 세고, 냉정하고, 어렵고, 무섭고, 뭐 이런 수식어들을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일적으론 그렇다. 나는 프로니까 받은 만큼 해내야 하고, 더 받기 위해서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정에 약하고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사실 50세를 넘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늙어가는 건 피해갈 수 없을 거다. 그만큼 맡을 수 있는 배역의 가짓수도 줄어들 거다.
순응해야지. 발버둥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면 역효과가 일어난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고. 살짝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면 되는데 사실 그렇기가 조금 힘들더라. 나도 그로부터 편해진 건 불과 2~3년 정도 밖에 안됐다. 그렇다고 나를 놓는다는 게 아니다. 받아들인다는 거지. 그러니까 방법이 생기더라. 내가 해야 할 일이 나타난다. 그래서 지금은 편하다. 다만 배우로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건 숙제 같다. 어쨌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배우로서 잘할 자신이 있다. 열심히 살아가면 되니까, 정말 그렇게 살 자신 있다.
내 감각에 포커스를 맞추려 했다. 내가 느끼는 공간과 냄새, 시야, 용의자를 바라보는 심정까지, 나로서 캐릭터 안에 들어가는 거다. 한번은 컷을 하고 모니터를 확인하는데 내 입장에서 도저히 쓸 수 없어서 다시 한번 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내가 공감해야 움직일 수 있었다.
본인의 연기를 쉽게 만족하지 못하나?
평생 그럴걸.
이제 오디션이 필요 없는 배우 아닌가?
오디션이 필요 없는 배우는 없다. 최소한 리딩이라도 하면서 현재의 컨디션을 알려야 된다. 당락의 의미를 떠나서 진짜 내가 해도 되는지 질문해야지. 지난 작품에서 이 정도 했으니까 이번에도 그 정도 할 거란 기대만으로 작품에 들어갔다가 무너지면 서로 낭패다. 서울보증보험에서 내 연기를 공증해주는 것도 아니고.
처음 카메라 앞에 설 때는 어땠나?
연기 자체는 동일하지만 영화적 기법에 적응하긴 쉽지 않았다. 각 장면에 어울리는 에너지를 안배하면서 작품 전체의 호흡을 유지해야 한다. <용의자 X>에서도 그 호흡을 놓쳐서 한 컷을 버렸다. 한 장면 찍을 때마다 시나리오를 여러 번 읽어야 했다.
롯데 자이언츠 팬이라고 들었다. 부산 토박이?
나고 자랐지. ‘구도 부산’의 핏줄이 어디 가겠나?
언제 서울로 올라왔나?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족 모두 올라왔다.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다.
서울에서 제일 멀어서 부모님한테 안 걸릴 줄 알았다.
연극영화과를 영문학과로 속인 거?
속인 건 아니다. “아버지, ‘경성대 영흐여하과(발음을 뭉개면서)’입니다.” 그랬더니, “뭐? 영어? 그래? 괜찮네! 알았다!” 그리 된 거지(웃음). 딱히 반대하신 건 아니고, 한 2~3년 하다 관둘 줄 알았다 하시더라.
지금은?
영화에 입문할 때,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로 아버지 성함 좀 빌려 쓰면 안되겠나 여쭸더니, “집에서 가져갈 게 없으니 별 걸 다 가져간다. 맘대로 해라, 마!” 하셨다. 요즘은 항상 로열티 얘기하신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공식석상에서 내 이름을 되찾아야지(웃음).
본명이?
원준이다. 조원준.
야구 영화를 두 편이나 했다.
<글러브>에선 야구선수로 나온 게 아니니까. 어느 연말 파티 중에 최동원과 선동렬이 나오는 <퍼펙트 게임>이 제작된다고 들었는데 그 자리에 박희곤 감독님이 있었다. 무작정 가서 “나 야구 잘 안다!” 그랬지. 대뜸 해태 타이거즈 역할을 말하길래 유니폼만 입어도 좋으니 롯데 단역을 하겠다 했다(웃음). 촬영할 때 야구 못하니까 화내더라. “너 야구 잘한다며?” 그래서 말했지. “잘 안다고 했지, 잘 한다고 안 했는데(웃음).”
광주에서 군생활을 했더라.
그래서 서울말만 썼다(웃음). 어차피 롯데가 맨날 꼴찌하던 때라 군생활에 집중했다.
<솔약국집 아들들>에서 브루터스 리, <글러브>에서 찰스, <맨발의 꿈>에서는 제임스, 외국인 이름의 캐릭터를 자주 맡았다.
그렇네. <솔약국집 아들들> 할 때 영어를 못해서 작가님께 맨날 빌었다. 2형식 이상 쓰면 안 된다고(웃음).
예전에 비하면 정말 샤프해졌다.
살을 빼고 있을 땐 괴롭다. 조절해야 하니까. 작품이 없으면 살이 찐다. 그냥 놓고 지내니까. 스스로 어떻게 변해야지, 라는 건 없다. 뚱뚱해지거나 샤프해지는 건 그 작품에 존재하는 이유가 그렇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당위성을 쫓아가는 거지.
배우들이 체중을 조절하는 건 항상 경이롭다.
솔직히 다이어트는 징글징글하다. 처음 한 달은 배가 고파서 자다가도 욕 나온다. 한 달이 지나면 새벽에 <식신로드>를 봐도 괜찮다(웃음). 어느 정도 목표량을 달성하면 스스로에게 상을 줘야 된다. 그 상을 먹겠다고 달리는 거지.
배우에게 다이어트란 캐릭터의 갑옷을 입는 과정이다.
즐기지 못하면 불가능하지. DNA 구조를 바꾼 게 아닌 이상 몸으로 거짓말하는 거잖아. 연기란 빙의도 접신도 아니다. 이성과 감정을 평행하게 두고 항상 외줄을 탄다. 주목 받는 게 부담스러운 건 그래서다. 잘될 수도 있고, 잘 안될 수도 있는데 일정한 기대가 있다는 건 부담스럽지.
<뿌리 깊은 나무>의 무휼이나 <범죄와의 전쟁>의 김판호는 천차만별의 캐릭터인데, 연기 범위가 넓더라.
사실 무휼의 준비 기간은 짧았다. 시놉시스를 보고 딱 꽂혀서 뭐라도 하고 싶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섰다가 칼도 많이 써야 된다 하니, 아차, 싶었지. 결국 중요한 건 무휼이 왜 거기 존재하느냐는 물음이었다. 왕의 호위무사라는데 겉치레로 경호원 노릇만 하는 인물은 아니니까. 무휼에게 이도, 세종이란 사람은 대체 무어냔 말이다. 작가님과 얘기하면서 무휼에게 세종은 곧 조선이란 결론에 닿았다. 그런 마인드로 현장에 가니 무휼이 될 수 있었다. 다양한 의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이성과 정서를 넓히는 게 중요했다. 현장엔 연기를 돕는 스태프들도 많으니 그들을 믿어야 된다. 정답은 작품에 있다.
경험하지 않곤 모를 것 같다.
운 좋게도 트레이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부산엔 배우 인프라가 적다. 서울말을 할 줄 아는 배우도 없으니 번역극을 하면 무조건 무대에 섰다. 덩치 큰 배우도 없고, 자연히 공연을 많이 했지. 많이 한 놈한테 당할 놈 없지 않나. 그래서 20대엔 나이 마흔 다섯이 되는 게 꿈이었다.
마흔 다섯?
그 나이가 된 선배님들의 호흡은 아무리 훈련해도 나오지 않거든. 늙고 싶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막상 나이 서른 되니 30대라 우울해하고(웃음).
나이 서른은 어땠나?
사람들 이야기가 들렸다. 뭔가를 흉내 내기 보단 물 흘러가듯 스스로를 받아들여야 된다는 걸 알았지. 거대한 강의 흐름에도 부딪히는 바윗돌 하나 즈음은 있으니까. 욕심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막연히 자연스럽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내 마음이 무엇으로부터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했다.
의외로 수다쟁이 같다. 무휼처럼 과묵한 캐릭터는 어떻게 참았나?
뭐, 컷하고 떠들면 되니까(웃음). 사실 연기하는 게 어려웠지. 존경하는 선배님들도 많이 계셨고.
술도 많이 먹었나?
어디 가서 술로 안 밀리는데, 선배님들 뵈니까 사람 아닌 사람 많더라. “내가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으니 조금만 먹자.” 그런데 회 한 접시 나오기도 전에 소주 네 병을 까(웃음).
개구진 성격 같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하니까 상대가 먼저 거부감을 느끼기 전에 먼저 분위기를 풀어보려 노력하게 된다. 사실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도 불편했다. 여름에는 땀도 많아서 버스 옆자리에 누가 앉으면 괜히 일어났다. 겨울에 만원 지하철 타도 내 탓인 거 같고. 어쩔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상황이 아니면 걸어 다녔다. 소심했지.
극단에서 무대 연출도 했다던데.
연기를 위한 기능적 역할로서였다. 배우가 자유롭게 노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을 해체시키는 작업이 연출이라 생각했지. 배우가 되기 위한 워크샵이랄까? 연출할 생각은 죽어도 없다. 하면 안 되는 직업 같다(웃음).
무대에 다시 서고 싶은 생각은?
항상 한다. 태생과도 같은 곳이니까. 잠시 쉬고 있는 것뿐이지.
놓쳤으면 후회했을 것 같은 영화는?
첫 영화였던 <말죽거리 잔혹사>. 길가다가 우연히 만난 군대 고참이 연출부에 있어서 단역을 주더라. 한 장면만 세게 등장했다 사라지는 역할이 있고, 지리하게 병풍처럼 출연하는 역할이 있었다. 이 일을 길게 해야 될 거 같으니 현장에 오래 있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항상 어깨에 걸리거나 저 뒤에 서있는 식이더라(웃음). 부산에서 연극할 땐 너무 열악해서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했다. 조명도 만지고, 분장도 하고, 의상도 맞추고, 글도 써야 된다. 영화 현장의 파트 포지셔닝은 경이로웠다. 현장 스태프들한테 이거 저거 묻고 다니면서 많이 배웠다. 연극적 본질이나 영화적 본질은 달라도 연기적 본질은 똑같다 이거야. 그렇다면 갈 수 있겠다 생각했지.
첫 수업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돈 받으면서 했지.
아직도 그때 생각나나?
요즘엔 ‘이 정도 뛰고 힘들어? 이 정도도 못 따라가?’ 생각한다. 그렇게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 결국 내가 계속 할 일이니까.
초심이 중요하다?
작품에 대한 고민이 부담으로 변하지 않길 바란다. ‘이런 걸 또 해야 돼?’가 아니라, ‘이거 재미있을 거 같은데!’ 할 수 있어야지. 작품 속 캐릭터를 흥미롭게 생각하고 꾸준히 도전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준비라는 게 그런 거 같다.
박진희는 배우로서의 삶이 남다르긴 하지만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게 배우 박진희와 자연인 박진희는 한 줄기의 인생을 유영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흐름을 타고.
들고 있는 책은 제목이 뭔가요?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네요. 여기 놓여 있길래 생각 없이 펼친 페이지에 일탈의 사전적 의미가 나왔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또는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재미있네요.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에서 연기한 선주는 평생 일탈을 꿈꿔보지 못한 여자였거든요.
솔직히 박진희 씨도 일탈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요.
사실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개성 있는 배우들이 많아서 나만 너무 평범해 보이니까. 그래서 일탈을 시도했다가 심장이 떨려서 포기하고, 결국 일탈과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았죠.
일종의 성장통 같네요.
20대 초반에는 항상 20대 중반 정도가 되면, 20대 중반에는 30대가 되면 성장할 거라 믿었어요. 어느 한 순간 어른이 될 거라 생각한 게 아니라 그 나이면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철없는 아이였죠. 그런 탓인지 성장영화를 좋아해요. 그래서 <청포도 사탕>도 좋아요. 서른이 돼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거니까.
어른이 되길 바라는 이유가 있었나요?
좀 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면 보다 좋은 연기를 할거라 생각했어요. 결국 원하는 만큼 잘되진 않았지만.
예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지 않아요?
옛날에는 작품 외부의 이유를 보기도 있었어요. 상대 배우라던가, 그냥 타이밍이 맞아서라던가. 그런데 이젠 작품 자체만 보게 돼요. 진짜 하고 싶은 걸 알게 된 기분이죠.
선주는 좀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요. 본인은 어때요?
옛날엔 저도 그랬어요. 참는 게 사랑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죠. 그렇게 꾹 참다가 폭발해서 이전 사건까지 생각하며 싸움을 크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말할 거면 확실히 하고, 말하지 않을 거라면 완전히 터는 것이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란 걸 알았죠.
<청포도 사탕>처럼 여배우들이 많은 현장은 어떤가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인지 여자들과의 작업이 편해요. 어릴 때는 예쁘게 나오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서른 살을 넘기고 나니 현장에서 내 포지션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돼요.
여자들끼리 대화는 많이 했어요?
박지윤 씨와 붙는 신이 많아서 지윤 씨랑 많이 나눴죠. 사실 팬이었어요. ‘성인식’처럼 도발적인 무대를 할 때도 멋있고, 후에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했을 땐 완전 반했죠. 지윤 씨와 출연 여부를 얘기 중이라고 들었을 때 같이 하고 싶었어요. 선주와 소라는 전혀 다른 아이잖아요. 그래서 저랑 상반되는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지윤 씨의 이미지가 영화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죠.
배우로서 스스로 평범하다 생각하나요?
사실 15년간 배우로 살아온 제가 지극히 평범할 순 없겠죠. 다만 독특한 배우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평범한 배우도 있어야 되니까요.
그런 생각이 정립된 과정이 궁금하네요.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엄마가 예전에 드라마도 찍었다고 자랑할만한 에피소드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활동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엔 인터뷰하면서, “저는 잘할 거에요, 더 잘할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20대 중반까지는 쉴새 없이 바빠서 어떤 위치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자연스레 여기까지 왔죠.
대학원도 졸업했는데, 공부 욕심이 많나 봐요.
공부 욕심은 분명 있었지만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면서 그 욕심을 다 소진했어요(웃음). 수업 듣는 건 좋았는데 논문을 쓰는 1년 동안 나랑 공부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거든요.
얼마 전 존 박 씨와의 스캔들이 있었는데, 워낙 스캔들이 없던 배우라서 되레 신기하더군요.
원래 방송 의도는 작곡을 하는 남자와 작사를 하는 여자가 만나서 곡을 하나 만드는 거였어요. 환경 문제에 관한 가사를 써보겠다는 취지로 수락했죠.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서 제작진이 봄에 어울리는 아련한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데 그냥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첫 주 방송을 보고, ‘어? 이게 뭐지?’ 싶다가 3주쯤 되니, ‘이건 아닌 거 같다’ 싶었지만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죠. 그냥 나만 아니면 된다, 싶기도 했고.
존 박 씨의 볼에 뽀뽀한 것도 불가피한 연출이었나요?
야구장에 간 건 두 번째였는데 그날 너무 추워서 5회까지만 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자꾸 한 회만 더 보자고 하는 거에요. 왜 그러나, 싶었는데 7회 정도가 끝나니 키스타임이란 걸 하더라고요. 갑자기 전광판에 저희가 비춰져서 당황했는데, 계속 비춰지니까 결국 존 박 씨가 ‘누나, 그냥 볼에 하고 끝내죠?’ 그렇게 된 거였어요. 예능을 몰랐고, 좀 순진했죠.
진짜 연애를 해야죠.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나지는 건 아니잖아요. 연애정보회사에 내놓을 수도 없고, 전단지를 뿌릴 수도 없고(웃음).
특별히 요즘 꽂힌 게 있나요?
요즘에는 스님 책들?
네?
작가가 스님인 책들 있잖아요. 최근에 혜민 스님과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라는 책을 쓰신 정목 스님 트위터를 팔로우했다가 그 분들의 책을 읽었어요. 생각이 확장되는 기분이었죠.
불교신자인가요?
무교에요. 그냥 참선이나 수행 같은 과정에서 와 닿는 부분이 있어요. 8월 초에 문경의 수련원에 일주일 정도 다녀왔어요. 명상하고 서로 묻고 답하며 생각하는 게 너무 좋았죠. 새롭게 리셋하는 기분? 지금까지 살아온 35년 안에서 그 일주일은 굉장히 짧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을 기준으로 지난 시간의 나와 앞으로의 나는 좀 다른 삶을 살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죠.
소라가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이 선주와 재회하는 계기가 되죠. 혹시 유명한 배우가 된 덕분에 오랜만에 재회한 사람은 없었나요?
20대 초반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갔다가 현지에서 사람을 소개받았어요. 유학을 갔다가 현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사는 언니였는데 초행이니까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해서 3~4일 정도 머물렀죠. 벌써 10년 전이네요. 그런데 며칠 전 트위터로 멘션이 왔어요. 너무 반가웠죠. 보고 싶네요.
트위터는 자주 해요?
예전엔 별별 이야길 다 했죠. 요즘은 가끔 환경 이야기나 하는 편이에요.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머니 덕분인 거 같아요. 어머니는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집에 있는 양동이를 모두 마당에 내놓고 빗물을 받아요. 그걸로 세차하고, 마당 청소하고, 화분에 물도 줘요. 설거지 마지막에 헹군 물은 꼭 다시 쓰고. 어릴 땐 너무 귀찮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몸에 뱄어요. 얼마 전엔 저희 집 주차장에 채송화가 폈는데 어머니께서 채송화를 죽일 수 없다며 주차장을 사용하지 말라는 거에요. 다들 결국 동의했죠.
곧 유학을 떠난다고 들었어요.
첫 번째 목적은 여행이었고, 길게 머물 생각이라 어학공부도 계획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만류해서 그냥 긴 여행이나 다녀올 거에요.
얼마나 긴 여행이죠?
돌아오는 티켓을 끊지 않았어요. 이러다가 한 일주일 뒤에, ‘저 그냥 돌아왔어요!’할지도 모르죠(웃음).
목적지는 어디에요?
아일랜드요. 자연 경관이 좋은 나라라고 해서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어요. 너무 멀어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드디어 가게 됐네요. 심지어 혼자서. 이것도 하나의 일탈 아닐까요?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기대하는 건 없나요?
뭔가 기대했는데 얻은 게 없으면 실망하잖아요. 반대로 기대한 게 없는데 뭔가를 얻으면 기쁘겠죠? 그래서 기대 같은 거 잘 안 해요.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쉽진 않네요.
<피나>는 피나 바우쉬의 유산에 관한 영화이자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다. 피나 바우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김나영, 그녀가 말하는 피나와 나.
피나 바우쉬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우리 엄마를 제일 좋아해요. 제겐 독일의 엄마였죠. 인자하고 겸손하셨어요. 어느 위치에 있다는 생각보단 그저 자신의 것을 하시는 분이셨죠. 절대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으셨고요. 오히려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수용했어요. 그래서 새 시대로 나아가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바닥에 깔린 물을 흡수하는 스폰지 같은 분이셨죠.
피나가 급작스럽게 타계한 3년 전 기억이 궁금합니다.
당시 피나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했어요. 공연 후 관객 인사에서 보통 가운데 서계시는데 옆으로 빠져 계시더니 무대에서 내려오셔선 자꾸 앉아계셨죠. 피나는 모든 해외 투어에 동행하셨는데 예정된 투어를 앞두고 무용수들을 불러모아서 말씀하셨어요. 사실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휴식을 취해야 하니 함께 갈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요. 저흰 오히려 이 기회에 좀 쉬시라며 투어를 떠났죠. 폴란드 투어 중 어느 점심 시간 즈음이었어요. 무대 디자이너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죠. 1시까지 모여달라고요. 다들 피나가 너무 힘들어했던 걸 아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긴장하며 모였는데 돌아가셨다더군요.
단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무용수마다 리액션은 달랐지만 굉장한 충격이었죠. 하지만 당일 저녁에도 공연이 있었어요. 무대 디자이너는 말했죠. 주어진 공연을 끝까지 하는 게 우리 책임이고, 피나도 그걸 원할 거라고. 프로답게 공연을 마쳤고 피나를 추모하는 의미로 공연 후 관객 인사는 생략했어요. 무대 뒤는 울음바다였죠. 폴란드와 이탈리아 투어가 있었던 그 2주 동안이 장례식 같았어요. 피나가 기다리는 독일로 돌아와서 진짜 장례식을 했죠.
피나가 이끌던 ‘부퍼탈 탄츠테아터(Wuppertal Tanztheater)’가 지속될 수 있는 힘은 뭘까요?
피나는 각각의 무용수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했어요. 자기 식으로 사랑하는 대신 그 사람의 방식으로 사랑했죠. 그 사랑으로 무용단은 여전히 지속되는 거에요. 피나 혼자 모든 걸 했다면 무용단은 사라졌겠죠. 피나가 무용수들에게 원했던 건 본인들만 알아요. 그래서 공연은 이어질 수 있죠. 그 사랑으로 무용단은 여전히 지속되는 거에요. 40년이 되어가는 무용단이 하루 아침에 확 무너질 리 없잖아요. 모든 무용수들은 여전히 간직한 피나와의 사랑을 공연으로 보여주고 싶어해요. 피나가 무엇을 하고자 했을지 의논하면서 공연하고 있죠.
피나는 <피나>의 촬영 테스트를 이틀 앞두고 눈을 감았습니다. 영화 작업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피나는 항상 함께 해야 될 일들은 단원들과 의논했어요. 피나가 빔 벤더스 감독과 작업을 결정했을 때도 빔에게 저희와 논의하라 말씀하셨죠. 빔은 영화를 어떻게 진행하고 싶은지 저희와도 의논해왔어요. 피나가 돌아가신 뒤 영화를 그만둬야 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저희는 계속 하길 바란다고 빔에게 전했어요. 빔도 좋아했죠. 그리고 무용수들을 모아서 여러분들이 피나와 맺었던 인연과 인상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고 보여달라 하시더니 그걸 토대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완성된 <피나>를 본 감상은 어땠나요?
하나의 메모리 같았죠. 일단 피나도 나오고 저희가 피나와 맺었던 결실 그리고 형제 같은 저희 무용수들과 함께 겪은 과정들을 보면서 빔에게 영화를 찍자고 요청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피나>에서 본인의 솔로 신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무용수들은 피나에게 드리고 싶었던 것을 표현했어요. 제 독무는 무용단에 입단해서 처음으로 피나와 작업했던 도시 시리즈작 가운데 홍콩 작품에서 췄던 솔로였죠. 피나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는 드문데 예전에 한국에 오셨을 때,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춤을 말씀하셨어요. 자신은 그 춤이 너무 아름답고 좋다 하셨죠. 그걸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얼굴을 칠하는 장면은 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준 피나에게 드리는 마음이었어요. 브라질 작품에서 했던 건데 브라질의 한 원주민 부족 여자들은 우리가 연지 곤지 찍듯이 온몸을 빨갛게 칠해요. 그게 그들에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이래요. 몸 전체를 빨갛게 칠한 남자의 몸에 입과 눈과 얼굴을 갖다 대면서 제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건 결국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감사의 표현이었죠.
피나 바우쉬는 어떤 스승이었나요?
피나를 만나기 전에는 춤추기 위해 사는 것 같았어요. 피나랑 작업한 뒤로 춤은 나를 알아가는 도구가 됐죠. 피나 스스로의 물음을 저희한테 주면 저흰 답해나갔죠. 내 안의 것을 보게 하시고 스스로 찾게 만드셨죠. 자신을 표현하려면 진심이 필요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전달하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되니까요. 피나도 자신을 알아가는 중이었지만 생각하는 방법을 알았죠. 그걸 제게 일깨워주셨어요.
피나의 사진에는 항상 손에 담배가 들려있어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라 담배가 하나의 돌출 수단이었던 거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피나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정작 당신은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하셨죠. 카멜이란 담배를 피우셨는데 작업할 때 담배만 준비하는 어시스턴트도 있었어요. 가끔 불 붙인 담배를 재떨이에 올려놓고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했죠. 그리곤 ‘어? 담배가 여기도 있었네?’ 하시면서 마저 피셨죠. 처음에는 많은 무용수들이 무용실에서 담배를 함께 피웠대요. 다들 나이가 들면서 담배를 끊고 그런 분위기가 제한됐는데 피나 한 분에게만은 허락됐죠. 물론 공연보실 때는 안 피시죠.
빔 벤더스의 아내이자 사진작가인 도나타 벤더스의 사진전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그 중 본인의 컷도 하나 있더군요.
피나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찍은 사진이에요. 저희 무용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촬영한 사진가는 거의 없어요. 도나타는 피나의 허락 하에 저희 무대 공연까지 촬영했죠. 피나 무용수들과 함께 한 사진 작업을 책으로 내려는 계획이 있대요. 그 컷은 포트레이트가 필요하다 해서 저희 집에서 촬영했어요.
빔 벤더스와 도나타 벤더스는 피나와의 인연 덕분에 자연히 가까워진 건가요?
빔은 그렇죠. 도나타는 일본에서 빔과 도나타의 사진전을 진행한 일본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원래 친분이 있었지만 <피나> 작업을 통해서 가까워졌죠. 애기를 많이 나눠보니 공통점도 있었고, 그 계기로 더욱 친해졌어요. 빔에게 한국에 와서 <피나>의 홍보를 돕게 됐으니 전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으니 영화를 찍으면서 경험했던 것을 얘기하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도나타는 전시 때문에 방문하려 했는데 무산돼서 안타깝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했어요.
50세가 다 되셨는데, 육체적인 한계가 느껴지진 않나요?
젊은 시절에는 과격한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피나는 제게 항상 정적인 것들을 요구했어요. 처음엔 불만이었죠. 이런 열정이 있는데 왜 항상 저를 정적으로만 표현하려 하는 것일까, 그래서 작업할 때마다 피나 선생님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했었죠.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제 영혼과 육체의 밸런스가 이렇게 맞아 떨어질 수 없는 거에요. 피나는 각각의 사람이 지닌 에센스를 끌어내셨어요. 제가 지닌 정적인 에센스를 보신 거죠.
만약 독일을 가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전 독일에서 그냥 무용을 배운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의 인생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독일인들은 세련되고 예쁜 멋은 없지만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겸손하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투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에요. 가졌다 해서 드러내며 살지 않고, 도울 줄 알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처음에는 언어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르니 고생했죠. 철학자가 많이 나올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나라가 조용해요. 이 바쁜 나라에서 갔으니 처음엔 외로울 정도였죠. 비도 많이 오고. 그 모든 게 결국 저를 보게 만드는 생각과 계기를 만들어줬어요. 독일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제가 없었겠죠.
Who’s Pina Bausch?
독일 출신의 현대 표현주의 무용의 대가. 4개 대륙의 28개국 105개 도시에서 공연.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탄츠테아터’ 장르의 선구자. 전세계 도시들에서 영감을 얻은 <세계 도시 시리즈>로 각광받았다. 2009년 6월 30일 암투병 중 향년 68세로 타계했다.
운명은 언제나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나 뒤늦게야 필연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김고은이 ‘배우 김고은’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그랬다. ‘책 욕심이 많아서 당장 보지 않더라도 일단 사고 보는’ 김고은은 ‘심심하면’ 집 인근의 서점으로 향했다. 그 날도 그랬다. 재미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를 집어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재학 중인 학교 무대에서 단 한번 자신의 연기를 봤던 학교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김고은은 알고 있었다. <은교>가 영화화될 것이며 은교 역에 어울리는 신인배우 오디션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적도 있다. ‘은교 역할을 맡게 될 여배우 꽤나 마음 고생하겠네.’ 하지만 몰랐다. 마음 고생할 그 여배우가 자신이 될 줄은. <은교>의 의상 감독을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정지우 감독을 만나는 자리로 바뀐 뒤 모든 상황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너무 재미있어서 2시간 만에 읽어버렸던’ <은교>는 탐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앞길이 창창한 20대 초반의 배우 지망생이 만만치 않은 노출신이 예정된 작품을 데뷔작으로 선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욕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작품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한 거에요. ‘그렇게 밖에 못해?’라는 생각도 들고.”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했다. 부모님의 동의도 필요했다. 아버지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10분 뒤, 방에서 나와 딸의 고민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노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작품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어. 하지만 그때 또 다른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네가 그걸 이겨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 그 한마디에 김고은은 스스로가 우습다고 느꼈다. “이렇게 욕심이 나는데 두려움 하나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하는 제가 용서가 안되더라고요.” 의심과 욕심 사이에 놓여있던 김고은이 확고한 의지를 쥐게 된 순간이었다.
원래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녀는 현장 적응력도 남달랐지만 카메라만큼은 낯설었다. 정지우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방법을 찾았다. “카메라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엉덩이로 이름도 쓰면서 망가져보는 거였어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었다. “낯선 집을 혼자 둘러보는 신이었는데 카메라가 바로 앞에 있는 게 느껴졌어요. 갑자기 카메라가 무서웠고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그 장면만 20번 정도 갔어요.” 김고은은 8시간의 분장을 마친 박해일이 자신으로 인해서 당일에 계획했던 분량을 촬영하지 못했다는 것에 ‘죄송스러워서 속이 다 문드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집중력을 높여주고자 ‘카메라 밖에서 시선을 맞춰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격려하는’ 박해일의 배려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잘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배운다는 입장으로 갔어요. 그러다 보니 많이 편해졌죠.”
작품 경력 하나 없는 22살 남짓의 신인배우 김고은은 <은교>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주목 받고 있다. 어쩌면 검증된 배우 박해일과 김무열 사이에서 트라이앵글의 한 각을 차지한 신인배우를 향한 관심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렷하게 자기 주관을 드러낼 줄 아는 김고은에게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은교는 겉으로 봤을 때 굉장히 순수함을 가진 아이다운 아이에요. 천진난만하게 행동하고 이야기하고 잘 웃잖아요, 하지만 자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고민했죠.”
김고은은 호기심이 강한 소녀 은교를 닮았다. 박범신 작가는 은교의 눈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맑은 재기로 반짝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아득하다. 단순히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눈빛이다.’ 20대 초반의 앳된 외모에서 싱그러운 젊음이 전해지지만 다양한 의문을 머금은 까만 눈동자는 순수와 관능의 파도가 철썩거린다. “제가 호기심이 많다는 걸 몰랐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제 눈 안에 호기심이 가득하대요. 저도 궁금한 거에요. 그 눈이 뭘까.” 이제 갓 연기에 입문한 신인여배우에게 대단한 상찬은 어쩌면 독이다. 하지만 김고은은 만개할 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꽃봉오리처럼 눈이 가는 배우다. 가혹한 부담감을 되레 ‘일상적인 연기를 보다 훌륭하게 해내야 한다’는 야무진 각오로 승화시킨 그녀는 <은교>를 관통하며 긴 야심을 품었다. 단단한 줄기를 뻗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꽃은 그렇게 피어 오른다.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사실은 진짜 첫 번째 영화 <건축학개론>이 완공되기까지, 그 긴 기다림에 대하여.
(아래 기사는 지면 상의 분량 사정으로 삭제된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는 건 일종의 판타지다.
판타지지.
첫사랑은 언제였나?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아직도 연락한다.
진짜?
학교 다닐 때 모임에서 만난 친구라서 아직도 연말에 망년회할 때 본다.
당신이 좋아했다는 걸 아나?
우린 사귀었으니까.
아~!
난 승민이 같은 경험은 없다. 결국은 사귄다, (웃음)
실제로 건축 일을 했다던데.
대학 졸업 후 4년 정도 설계사무소를 다녔다. <건축학개론>은 오래 전부터 준비한 작품이다. 기획 당시만 해도 영화인의 정체성보다 건축인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컸다. 사실 건축일 할 때 주택 한 채를 설계해보고 싶었다. 결국 못했지. 주택 프로젝트가 흔치도 않았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대사처럼 그런 의뢰를 받을 위치도 아니었고.
주택?
여러 건물을 설계했지만 주택이 가장 쉬운 듯 어렵다. 설계사무소도 안 하려고 한다. 공력은 오피스 짓는 것과 비슷한데 돈이 안되니까. 주택은 사실 모든 설계사들의 꿈이다.
‘구성원을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짓고자 하는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의뢰하면 건축가가 그 사람의 취향에 맞춰주는 게 건축이다. 그러니 상대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오피스나 관공서 같은 건물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니까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면 오히려 반칙이다. 주택에는 개인의 취향만 존재한다. 그러니 그 사람을 정말 잘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집주인이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욕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 흔하지 않은 방식이라 해도 그렇게 해야 된다. 그에 따른 모델을 제시하는 게 순서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는 언제부터 썼나?
2003도였다.
꽤 오래 걸렸다.
너무 장대했다. (웃음) 한 세 번 엎어졌나. 첫 제작사에서는 캐스팅이 안됐다. 다음에는 캐스팅이 됐지만 제작이 안됐고,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했고. 사실 <불신지옥> 이후에도 미련이 남아서 시작했다가 한번 더. (웃음) <건축학개론>과 30대를 보냈다. 애초에 미련을 버렸으면 진작 입봉했을 거라 생각도 했다. 주변에서도 많이 말렸다. 괜히 시간 날리지 말라고. 결국 해냈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하고, 다시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교훈은 얻었다. 개인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인데, 다행히도 영화를 찍어서 마무리됐다. 10년 걸려서 할 일은 아니었다. 순진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에 흥미를 지닌 사람이 많지 않았나.
많았다. 하지만 엄한 제작자가 흥미를 가지면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나도 고생한다. 제작 능력도 없으면서 시나리오 좋다고 덤벼드는 사람 많거든. 처음에는 시나리오 좋다 하면 감격했다. (웃음) 그 생활을 3~4년 하니까 순수해질 수가 있나. 누군가 세팅을 해야 가능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어쨌든 찍었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께서 우연히 시나리오 보시고 하자 하셨다. 만약 심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안 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 좋다 하면 감격하고 그랬다. 하지만 제작 능력도 없으면서 시나리오 좋다고 덤벼드는 사람 많거든. 여러 제작사를 전전하면서 투자도 안되고, 캐스팅도 안되고, 그런 꼴을 한두 번 봤어야지. 게다가 <불신지옥>으로 입봉했지만 흥행에서 망한 감독이라 그 이후에도 힘들었다.
<불신지옥>에 대한 평가는 좋았는데.
어리둥절하더라. 그때는 입봉 자체가 목표였다. 영화 감독 되려고 이 판 들어와서 10년을 보냈는데 영화 한편 못 찍고 주저앉느니, 은퇴하더라도 영화 한편은 찍어야지 싶더라. 약간 변질된 느낌이지만 사실 영화판에 그런 케이스가 많다. 멜로는 A급 배우가 붙여줘야 비로소 투자가 되는데, A급 배우는 입봉 감독과 하지 않으려 하고, 캐스팅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서 캐스팅 부담이 덜한 장르로 접근했다.
공포 영화가 감독들의 입봉 수단이란 말도 있지.
옛날에는 그랬지만 요즘은 공포가 워낙 안되니까. 나 역시 쉽게 입봉했다 말할 수 없고. 아는 후배가 한다 그러면 말릴 거다.
장르물에 도전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멜로 영화 각색에 참여한 적도 있었는데 제대로 써본 건 <건축학개론> 하나였다. 작가나 감독이란 타이틀을 달고 멜로 외에 다른 걸 쓸 수 있을지 두렵더라. 그래도 입봉하려면 뭔가 쓰긴 써야 했고, 다른 걸 해보고 싶기도 했다. 멜로는 감정극이니 상황극을 해볼까 생각하면서 시작했다. 두렵기도 했지만 쓰면서도 재미있었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불신지옥>이 짓기 위해 지은 집이라면 <건축학개론>은 짓고 싶은 집인 셈이다. 초고와 영화 사이의 차이가 궁금하다.
현재 부분이 많이 달라졌다. 과거는 비슷하다. 10년간 각색하면서 현재를 다루는 게 힘들었다. 시작할 때가 서른 넷이었고, 지금이 마흔 넷이니까, 나이 먹으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지더라.
여자 때문에 울어본 적 있나?
물론. 얘가 사귀자는데 왜 싫다는 거지? 속상해서 많이 울었다. (웃음)
연애는 얼마나 했나?
많이 했다. <건축학개론>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대학 시절 소개팅하고 다섯, 여섯 번 봐도 안 맞으면 헤어진다. 그 헤어지는 형식에 대한 비겁함이랄까. 예를 들어서 여자가 연락을 기다리는데, 연락 안 해주면 그대로 페이드 아웃. 굉장히 비겁한 거지. 어릴 때는 더더욱 그렇고. 그에 대한 반성?
90년대 학번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내가 90학번이다. 사실 영화의 배경인 96년도에는 취업해서 직장 생활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할 때 주변에 컴퓨터 있는 친구도 없었고, 삐삐 같은 것도 없었다. 대학교 2학년 즈음 노래방 생기고, 클럽 생기고 그랬다. 급격하게 디지털화되면서 IT라는 단어도 처음 생기고, 인터넷은 좀 나중인가.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뭔가 빠르게 변했다. 90년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기 보단 그 시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많다. 그 시대를 관통한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접근한 셈이다.
촌스럽지만 반갑더라.
5년 전만 봐도 촌스러운데 10년이면 엄청나지. 10년 동안 <건축학개론> 준비하면서 어떤 습관이 생겼다. 예를 들어서 지금 드림콘서트 보면 되게 촌스럽다. 최근에 98년에 데뷔한 핑클 멤버들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 본적 있나? (웃음) 시간이 그렇다. 그래서 정겹기도 하고.
처음 컴퓨터를 가진 건 언제인가?
94년도? 입대하기 전에 교양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리포트를 워드로 제출하라는 거다. 손으로 쓰면 안 된다나? 학교 앞에 손으로 쓴 리포트를 타자 쳐주고 출력해주는 인쇄소 비슷한 게 있어서 돈 주고 맡겼다. 짜증났지. “이런 걸 왜 해?” 막 이러면서. 그런데 군대 다녀오니까 죄다 컴퓨터로 하더라.
다른 건 몰라도 삐삐는 정말 유물 같더라.
그런 첨단기기가 시간의 척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내 친구가 시티폰 쓸 때는 웃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웃기잖아. 나는 사실 삐삐를 안 좋아했다. 카페에서 ‘호출하신 분!’ 부르고 그러면 되게 이상해 보였다.
옛날 물건들 가진 거 있나?
알바해서 처음 산 CDP가 아직 있다. 그런 거 모아놓는 편이다. 시절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고, 버리긴 아깝다. 지금도 작동되고.
손 탔던 물건 못 버리는 편인가?
그런 건 아닌데 부피만 크지 않으면 기념이 될만한 물건은 두고 본다. 대학 다닐 때 갖고 다니던 학생수첩도 아직 갖고 있다. 그 당시 썼던 전화번호부 보면 내가 예전에 친하게 지낸 사람들도 떠오르고. 자주 보진 않지만 그 정도는 남겨뒀다. 큰 건 너무 짐이고.
영화 준비하면서 자주 꺼내봤겠다.
개봉하고 영화 내리면 정리 좀 할거다. 너무 오랫동안 그 짓을 했더니 지겹다. (웃음) ‘기억의 습작’도 못 듣겠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원래 좋아하던 곡인가,
좋아했지.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염두에 뒀던 곡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만지면서 곡도 계속 바뀌다가 나중에 ‘기억의 습작’이 어울려 보였다. 노래도 좋고.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더라. 김동률 씨가 대학 과후배거든. 만나본 적이 없다. VIP시사회에 잠깐 왔다던데 인사도 못했다. 나나 그 친구나 건축도 안 하는데 학과 선후배가 무슨 소용이냐.
조정석의 재수생 연기가 압권이다. 주변에 재수했던 친구는 없었나?
내가 했다.
재수할 때 연애했었나?
난 모범생이었다. (웃음) 연애하면 대학 떨어진다고 믿고, 공부만 했다.
재수까지 해서 연대 건축공학과에 갔다. 원래부터 건축을 좋아했나?
고3때 연대 건축과 썼다가 떨어졌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성격도 약간 꼼꼼하고,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은 엄마한테 이사 가자고 조르지 않나. 본인이 사는 공간에 불만이 있는 거다. 나도 그랬다. 오래된 중복도식 아파트였는데 내 방은 창이 밖으로 나지 않고 복도로 나있었다. 창에 대한 갈증이 많았지. 어릴 때 어머니한테 그런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시더라. 집을 그저 부가가치,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신 거다. 그런 불만은 그저 사치였다. 나는 공간의 질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래서 건축과에 간 거 같다.
어디 살았나?
정릉 토박이인 승민처럼 38년을 동부 이촌동에서 지내면서 초중고 다 나왔다. 지금은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다. 어릴 때 뛰어 놀던 공간들을 보면 기억이 살아난다. 사실 다른 동네에서 사는 게 여전히 이상하다. 어머니는 아직 거기 산다.
동네친구도 많았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사는 동창들이 많았지.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얼마 전에도 이촌동에서 모였는데 난 바빠서 못 갔다. 한 친구 전화로 일곱 명이 돌아가면서 인사하더라. (웃음) 12년을 한 동네에서 복작복작하던 친구들이니 유대감도 깊다.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같은 대학까지 간 친구도 있으니까. 맨날 만나서 농구하고, 레코드점 가서 LP사고, 서로 판 빌려 듣고, 옛날 기억이 선하다. 이촌동은 아파트가 많은 동네인데, 그 아파트들을 보면 여긴 누구네 집이란 식으로 인식된다. 여전히 거기 사는 친구도 많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건축 회사에서 근무했다는 점에서 승민과 닮았다. 개인적인 경험이 캐릭터에서 반영된 것 같다.
맞다. 게다가 승민이처럼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랑 둘이 살았고, 어머니께서 장사도 오래하셨다. 집에 대한 불만도 그렇고, 승민이에겐 내가 녹아있다.
“정릉이 어떤 왕의 능인지 알아?”라는 영화 속 대사 때문에 찔리더라.
대부분 모를 걸. 왕이 아니라 비의 능이지. 별 의미 없지만.
건축학개론 수업 장면에서 교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건축의 시작은 자기 동네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수업 중 들었던 말인가?
내 생각이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처럼 지도에 루트를 그리는 건 대학 다닐 때 실제로 친구들과 스터디에서 했던 일이다. 교통지도를 분해해서 전도만한 지도로 조합했는데 나름 재미있다. 통학로나 친구집으로 가는 노선을 지도에 그려보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길이 다시 보인다.
되는 면이 있다. 일종의 도면화 작업?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공간을 재발견하는 느낌이 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디일까. 처음 시나리오 구상할 때, 화두는 이거였다. 고향이라 하기에 서울은 너무 넓은 것 같다.
듣고 보니 그렇다.
승민은 태어나면서 한곳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새로운 공간에서 독립을 꿈꾸는 친구라면 서연은 이 동네 저 동네 부유하다가 정착을 꿈꾸는 친구다. 둘의 만남은 성장통이다. 결국 그 이후에 승민의 공간이 넓어진다면 서연은 비로소 고향에 정착하는 셈이다.
정릉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서울의 한 동네에 오래 살았다는 설정에 어느 동네가 어울릴까 생각하니 정릉이 그렇더라. 내가 원한 건 명확한 구획이 있는 동네였다. 강남은 구획이 안 된다. 길 하나 건너면 다른 동네가 되고, 서로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고. 예를 들어서 이촌동은 한쪽이 한강, 한쪽이 철길, 이런 식으로 완전히 구획화됐다. 마치 섬 같은 여의도처럼. 강북에는 그런 동네가 많다. 그래서 바운더리에 대한 인식도 강하다. 한 가지 더 좋았던 건 정릉에 버스 종점이 많다는 거다. 도시의 끝처럼 보였다. 영화에서 나오는 710번 버스는 정릉에서 개포동으로 이어지는, 서울 강남북을 가로지르는 황금노선이다. 예전에 비슷한 소재로 단편도 찍었었다.
어떤 내용인가?
내가 타는 버스의 반대 방향 종점은 내게 가장 먼 곳이다. 그 당시 동부 이촌동에 38번 버스가 있었는데 월계동은 우리 집 방향의 반대쪽 종점이었다. 30년을 넘게 한 동네에 살면서 38번 버스를 타고 항상 노선도를 봐왔는데 어느 순간 그 월계동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서른 넘어서 버스 타고 종점까지 혼자 가면서 단편을 찍었다.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르다.
사실 서울에서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지 않나?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서울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어떤 동네에 대해서 비하하기도 하고. 심지어 강북을 두려워하는 강남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이 내 호기심을 당긴다. 시나리오에 그런 생각이 반영됐다. 과거가 거시적인 공간이라면, 현재는 미시적인 공간. 과거의 인물들은 도시를 돌아다니고 교외까지 나가며 경험을 확장하지만 현재의 인물들은 공간으로 파고 들듯 기억으로 들어간다.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제주도 풍경이 너무 멋지더라. 어디인가?
서귀포 위미리. 명필름과 제작 합의한 다음에 제일 먼저 집 알아보러 내려갔다. 열 군데 부동산을 돌면서 찾았다. 영화에 어디가 적합할지 보러 다니고 결정한 다음에는 그에 맞춰서 시나리오 각색했다.
제주도에서 증축된 집은 실제로 지었나?
처음 나온 벽돌집은 진짜 집이고 증축되는 건 세트다. 설계하는데 두 달 반 걸렸다. 그런데 명필름에서 진짜로 공사 들어간다. 다만 영화 속 디자인과 똑같이 지을 수 없어서 세트 디자인을 했던 구준회 소장이 다시 설계하는 중이다. 거의 끝났다더라. 5월에 시작해서 가을에 완공 예정이다.
<살인의 추억> 연출부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봉준호 감독과 같은 대학 출신이다. 1년 차이 학번이던데, 원래 아는 사이였나?
전혀 몰랐다.
연대 영화 동아리가 유명하다.
한번 가입했다가 이상해서 나왔다. (웃음) 난 사진부였다. 조선희 사진작가가 동기다. 이번 포스터도 선희가 찍었다. 벌써 22년지기다. 서클 선배 감독도 한 명 더 있네. 임상수 감독님. (웃음)
건축학과 출신이니 만큼 세트 제작에 관심이 많겠다.
당연하지. 나는 미술감독 두 명 달라 그런다.
건축일은 왜 그만 뒀나?
재수까지 해서 건축과를 갔고, 그만 두리라 상상한 적도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설계 사무소에 들어갔는데 척박한 현실을 각성했다. 내 성향 탓이겠지만 ‘이렇게 못살겠다’는 생각했지. 건축은 좋은데 건축 현장이 불합리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회사 생활 2년 즈음 됐을 때부터 흥미가 떨어지면서 겉돌았다.
그럼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컴퓨터에 관심이 생겨서 사진도 찍고 했으니 혼자 관련 책을 사서 포토샵 공부하고, 일러스트레이터 해보고, 이런 낙으로 살았는데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Premiere)’를 손댄 게 화근이었다. (웃음) 재미를 붙이다가 결혼을 앞둔 절친한 과동기를 위해서 결혼식에 상영할 영상을 편집해줬다. 어릴 때 사진 스캔 받고, 그걸 동영상으로 편집하면서 음악도 깔고, 나중에는 영상 파일을 CD로 구워서 친구한테 보여주고, 그게 내 인생의 첫 시사였다. (웃음) 그러다가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해서 아까 말한 단편을 찍었고, 한겨레 문화센터 등록하고, 그러다가 결국 영화하겠다 마음 먹었지.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포기하기가 쉬웠나?
사실 건축설계사들은 이직이 심하다. 2년 정도 다니면 자연스레 직장을 옮긴다. 그런데 옮기자마자 IMF가 터져서 선배들 잘리는 거 보니 정나미 떨어지더라. 나는 언제 잘릴까 싶고. 앞으로 그 일을 계속 한다는 게 요원하게 느껴졌다. 봉급도 더럽게 짜니까. (웃음) 솔직히 그래서 영화도 엄두가 안 났지.
그런데 왜 선택했나?
IMF 터지고 연봉 재협상하면서 초봉 수준으로 월급이 깎여버렸다. 뭔 차이인가 싶더라. 처음에는 방송 PD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IMF 터지니 PD도 안 뽑더라. 그런데 MBC에서 기습적으로 공고를 냈다. 그때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어서 점심 시간에 방송국까지 걸어가 지원서류를 제출하고 일요일에 여의도 중학교에서 시험을 봤다. 떨어졌다. 그것도 언론고시라서 1년은 준비해야 된다더라. 해볼까 했는데 그 해가 응시 자격 나이 제한에 걸리지 않는 마지막 해더라. 역시 불합리하다. (웃음) 그냥 영화하자 했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살인의 추억> 후에도 영화를 계속 해야 되는지 고민했다. 봉 감독님이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하셔서. (웃음)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삶도 생각했다던데.
입봉을 못하니까. (웃음) 다들 내가 쓴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고 사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연출하고 싶다 하면 다른 말을 한다.
어쨌든 오랫동안 염원하던 작업을 이뤘다. 후련한 기분도 들겠다.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장대한 시간이었다. (웃음) 결국 해냈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하고, 확실한 건 이제 다시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교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개인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인데, 다행히도 영화를 찍어서 마무리됐다. 아무리 좋아하는 이야기라 해도 10년 걸려서 할 일은 아니었다. 상처도 많았고, 창피했지. 순진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다.
“10년 뒤에 뭘 하고 있을까?”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10년 전에 뭐하고 있었나?
10년 전이면 <살인의 추억> 연출부 시절이다.
그때 10년 후를 생각해봤나?
감독이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마 그때 2009년도에 겨우 입봉할 걸 알았다면 그만 뒀을 거다. (웃음) 2005년 즈음에는 입봉하리라 생각해서 준비했다가 이 꼴 났다. (웃음)
정말 치가 떨렸나 보다.
나이 서른 넘어서 어머니 집에 얹혀 살며 한 달에 모든 생활을 50만원으로 할 때였으니까. 그건 사는 게 아니다, 친구도 못 만나고, 외출도 못하고, 어머니 걱정도 심해지고, 간혹 만나는 친구들도 술 사주면서 걱정 하고.
어머니 반대도 있었을 텐데.
2년만 해보겠다고 약속해놓고 어겼지. 좀 더 있으면 감독 될 거 같아, 막 이러면서 속이고. 어느 순간 어머니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정하신 것 같다.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 입봉하고 나서 비로소 인정하셨지.
그때 반응은 어땠나?
좋아하셨지. 청룡영화제 각본상 받아서 TV 나오니 인정하시더라. 그 전까지는 안 좋아하셨다.
부모님들은 상 받으면 좋아하지.
TV 나오니까. (웃음)
10년 뒤를 생각하나?
한다. 나는 내일, 이번 주, 1년 뒤 어떻게 살지 습관적으로 계획하는 편이다.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나중에 알았다. 막연하게 10년 뒤도 생각하고 있다. 일종의 바람도 섞여 있고. 건축설계사 하면서 싫었던 건 1년 뒤, 3년 뒤, 10년 뒤 자리가 정해진 느낌이었다. 사실 영화일은 1년 뒤를 예측할 수 없다. 다른 직업도 그렇겠지만 특히 그렇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더욱 필요한 거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매력 있다.
예상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으니 두렵지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회사를 다니면 안정적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겠지. 안정적이란 말은 결국 딱 그 정도라는 말이잖아. 어쩌면 답답한 일이지.
마치 내친 김에 달린다는 말처럼 박훈정은 시나리오 작가에서 연출자로 성큼 올라섰다. 김지운이 연출한 문제작 <악마를 보았다>와 현재 제작 중인 류승완의 차기작 <부당거래>의 원작자로서 유명세를 탄 박훈정의 <혈투>는 단순히 그 유명세의 상승곡선에 올라탄 기획이 아니다.
원래부터 제목이 <혈투>였나? 가제는 없었나?
원래 <북극의 변>이라는 가제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렵다는 의견이 있어서 직관적인 제목으로 바꿔보자고 하더라. 결국 제작사에서 <혈투>가 어떠냐 하길래 나쁘지 않아서 그렇게 갔다.
시대극이지만 시대적 재현이 많이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시대극으로서 고증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텐데.
글을 쓸 때는 필연적으로 자료조사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지만 촬영에서 고증이 요구되는 건 비주얼 때문이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객잔의 건축양식도 확인했다. 엄밀히 따지면 역사적인 고증과 틀린 부분들이 없진 않다. 의도한 부분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부분도 있다.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면서도 우리 미술팀에게 강조한 건 의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딱히 고증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혈투>에서 나오는 객잔이란 공간의 위치가 만주로 설정됐지만 어떤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 무시하고 영화적 느낌을 살리기 위한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해준다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광활한 곳에 놓인 버려진 공간처럼 느껴지길 원했다. 결론적으로 객잔이 세 인물의 무덤처럼 보였으면 좋겠더라. 역사적인 배경에 기대서 갈 뿐, 보이는 것까지 다 정확해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광해군 11년이라는 시대상이 명시되지만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이 대두되던 시대상을 반영한 팩션영화라고 해도 상관이 없겠더라. <혈투>에서의 시대적 배경은 세 인물의 갈등을 야기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처럼 보였다.
의도했던 바다. 역사적인 사실을 상기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영화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정확하게 광해군 11년을 적시한 건 이야기의 설정과 가장 가까운 배경이 바로 그때였기 때문이다. 광해군 7년 즈음에 대북과 소북의 대립으로 옥사사건도 일어났고, 이로 인해 집권층이 바뀌지 않았나. 광해군 11년에 명의 강압으로 인한 출병 사실도 있었으니 이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으로서 적합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런 배경 안에 놓인 세 인물의 사연이었다.
도입부와 결말부를 제외하면 객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영화의 8할이다. 한정된 공간이란 점에서 묘사의 한계가 발생하는 셈인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저예산 사극을 생각했다. 아무래도 저예산으로 가려면 한정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적합하다. 문제는 이게 상업영화로 기획되니까 방금 지적한 것처럼 공간의 한계가 약점이 될 수 있겠더라. 한 공간만 비춰지면 관객들이 지루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공간을 바꿀 수는 없지 않나. 그건 <혈투>가 아닌 다른 영화겠지. (웃음) 결국 공간활용에 있어서 고민이 많아졌다.
대안은 어디서 찾았나?
다양한 해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비주얼을 구상했다. 어떻게든 그 한정된 공간에서 긴장감과 재미를 뽑아내고자 했다. 영화적으로 얼마나 잘 표현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조선도 있고, 명도 있고, 청도 있고, 심지어 벌판도 있다. 세 사람의 관계도 그 공간 안에 표현돼 있다. 세 사람의 자리를 보면 도영은 객잔 안쪽의 객실을 등진 채 앉아있고 헌명은 문과 창문 쪽에 앉아 있다. 그리고 두수가 앉아 있는 곳은 깊은 안쪽이다. 헌명은 어떻게든 객잔에서 나가서 돌아가야 하는 인물이라 문과 가깝게 자리하면서 자주 밖에 나가본다. 하지만 도영은 어차피 갈 곳도 없고 객잔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 두수는 어느 쪽이나 붙을 수 있는 인물이다. 이렇게 장치적인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만들어놓고 보니까 사람들이 거기까진 신경 쓰지 않겠구나 싶더라. (웃음)
액션도 하나의 주요한 볼거리다. 하지만 어둡고 한정된 공간에서 액션이 촬영된다는 점도 하나의 과제였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봤으니 알겠지만 <혈투>에서 필요한 건 화려한 액션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럴싸했던 액션이 점점 찌질해진다. 머리 잡아당기고, 귀나 손 물어뜯고, 그런 싸움에서 비주얼은 필요가 없지. (웃음) 막판에 어두운 아래층에서 싸울 즈음에는 인물들의 감정이 극까지 치닫지 않나. 나는 거기서 액션보단 사람의 감정이 주는 느낌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관객들이 화면을 통해서가 아닌 눈 앞에서 보는 느낌의 싸움을 묘사해야 한다고 느꼈다. 덕분에 촬영팀이 고생했지. 배우들이 연기하는 바로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찍었으니까. (웃음) 조명의 조절도 중요했다. 처음에서 마지막 싸움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는데 이는 공간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객잔에서, 객잔 지하로 들어가니까. 어차피 세 인물은 만주에 죽으라고 보내졌고, 만주 벌판은 거대한 관이다. 그 관에서 살겠다고 도망쳐서 객잔을 발견했지만 그 객잔에서 셋이 맞닥뜨렸을 때 그곳은 다시 보다 작은 관이 된다. 결국 지하에서 남은 두 사람이 부딪힐 때 그곳은 더 작은 관이 된다. 액션은 그런 공간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동선의 수단과도 같았다.
갈등의 축은 헌명과 도영이고, 두수는 그 갈등에 끼어드는 중간자다. 그런 의미에서 두수는 정말 중요한 인물이면서도 소모적으로 그려질 가능성도 있는 인물이다.
<혈투>는 세 인물의 밸런스가 깨지면 끝나는 영화다. 두수는 도영과 헌명의 확실한 대립 구도에 끼어드는 만큼 잘못하면 불필요한 인물처럼 보이거나 헌명과 도영의 균형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있었다. 반면 도영과 헌명의 방향추 역할을 하거나 관계의 돌발변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두수는 엄밀히 말하면 헌명과 도영이 속한 지배층 집단의 피해자다. 두수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여기서 이 꼬락서니로 죽어가야 하는 이유는 결국 얘네 탓인 거다. 두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뭐든 할 수 있는 인물이므로 가장 중요한 건 생존과 귀향이다. 그런 부분에 집중하고자 했다. 동시에 두 사람의 긴장감으로 채워진 이야기에 약간의 위트를 가미하며 조금 숨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할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다.
두수가 관객으로부터 가장 큰 연민을 얻을 것 같다.
덕분에 제작할 때도 그런 소리 많이 들었다. “(결말을) 바꾸면 안될까요?” (웃음) 사실 두수가 최고의 피해자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적인 설정이기 전에 진짜 그런 상황 속에서 그것이 바로 두수의 현실인 셈이다. 그걸 뒤집으면 판타지가 되는 거고.
결국 계급적 갈등이 <혈투>의 본체인 것 같다.
계급투쟁에서 시작된 이야기다. 헌명, 도영이 지배층이라면 두수는 피지배층이다. 그리고 지배층 가운데서도 권력을 쥐고 있는 쪽과 권력을 쥐지 못한 쪽을 주류와 비주류로 나눌 때, 헌명은 비주류다. 결국 주류였던 친구의 가문을 팔아서 새롭게 주류가 되는 쪽에 붙어보려 하는데 그쪽에서도 사실상 얘를 자기 식구라고 생각해준 적이 한번도 없는 거다. 사실 헌명은 자신에게 파병 가라고 할 때부터 인지했을 거다. 다녀 오면 자신에게 예조 자리를 봐주겠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예조 자리란 굉장한 노른자 자리인 탓에 예조정랑 자리를 놓고 권력을 쥔 자들이 치열하게 다투던 판인데 그 자리에 넣어주겠다는 말 자체가 이미 꾀는 말인 거지. 헌명 정도 머리를 지닌 애라면 분명 자신이 팽 당한다고 느낄만한 사안이었을 거고. 다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후에 도영의 입을 통해서 정확하게 확인을 받게 되니 폭주하게 되는 셈이다.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고자 친구도 팔았는데 결국 다시 그 지경이니까. <혈투>를 보고 나서 이런 부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길 바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런 갈등을 직접 연기하는 배우들이 중요했을 것 같다. 배우들이 의도대로 그런 갈등들을 잘 연기해준 것 같나.
결과적으로 배우들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솔직히 첫 촬영 때는 조금 당황했다. 왜냐면 지금까지 내가 써오고 그려왔던 게 있으니까. 하지만 연기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잡아온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
그 첫 촬영에서 낯설었던 그 배우는 누구였을까. (웃음)
진구였다. (웃음) 크랭크인 이후 첫 신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점점 그 모습에 적응해가니까 되레 그것이 진구라는 배우에 어울리는 도영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촬영이 진행되면서 도영이라는 캐릭터를 수시로 손보게 됐다. 고창석 선배도 초반에는 너무 연극적이다 싶어서 고민을 했었는데 금방 도영이나 헌명의 분위기에 맞춰나가더라. 덕분에 지금도 어쩌면 이렇게 캐스팅이 잘 됐을까 생각한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진구가 도영 역에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처음에 진구 씨를 만날 때 배역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도영 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도영은 영화상에서 감정을 절제하고 내뱉는 진폭이 가장 큰 역할이기에 젊어 보이는 친구지만 기본적으로 연기가 되는 배우이길 바랬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걸 염두에 두고 만났지만 배역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하지 않았는데 미팅이 끝나고 나가면서 진구 씨가 이런 말을 하더라. “저는 두수 역할도 좋습니다.” 그 순간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졌다. 물론 결과는 예정대로 갔지만.
헌명은 가장 입체적인 감정을 품은 인물이다. 그 감정을 잘 살리는 것이 <혈투>라는 영화의 성패나 다름없었을 거다.
이야기의 단초 자체가 헌명으로부터 출발하니까 중요할 수 밖에 없었지. 사실 헌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깊은 인물로 그려졌다. 덕분에 영화도 깊어진 것 같고. 사실 헌명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걱정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봐도 알겠지만 헌명은 이미 다 드러난 인물이다. 그래서 전형적이고 단순하게 보여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희순 선배가 역시 잘하더라. (웃음) 헌명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중요했고, 이게 표현이 안되면 영화 자체가 애매해지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의문을 남기게 될 거라 걱정했다. 하지만 희순 선배가 연기하면서 되레 누가 봐도 헌명이 짠하게 느껴지도록 완성됐다. 사실 헌명을 하고 싶어하는 배우가 좀 있었는데 나는 희순 선배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잘 해주시더라. 하지만 희순 선배는 고생이 많았지.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 안되니까 자꾸 누르고, 누르고, 그러니까 너무 힘들었을 거다. 그렇게 감정 잡기도 힘든데 액션은 개싸움이고, 또 눈에 피를 떡칠하고 다니니까 눈도 아프고, 나중에 그러더라. “이 영화는 액션도 힘들고! 액션 안 해도 힘들어!” (웃음) 내가 봐도 고생이 많았다.
이 영화의 일등공신이다. (웃음)
늘 우리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함께 있으면 하는 얘기지만 시나리오보다 콘티가 잘 나왔고, 콘티보다 영화가 훨씬 잘 나왔다. 배우들이 굉장히 큰 몫을 해준 덕분이다. 물론 촬영을 비롯한 나머지 부분도 다 좋았지만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연기를 잘 해준 만큼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포기해야 하거나 반대로 살을 붙인 부분은 없나.
애초에 약간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생각했었지만 조금 저예산영화 같은 느낌이 강해져서 그 요소를 걷어냈다. 그리고 걷어낸 부분에 살을 붙였지. 원래 서현이라는 캐릭터는 없었다. 원안에서는 철저하게 남자들만 나왔지. 제작사에서 디벨롭(develop)하면서 헌명이 지닌 신분상승과 출세의 욕망에 그 나이대 남자들의 욕망 중 하나인 여자에 대한 소유욕을 포함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부분이 포함되면서 헌명이라는 인물의 갈망이 더 살아났다고 본다.
촬영과정 중에는 그런 부분이 없었나?
현장에서 고친 건 없다. 거의 시나리오와 콘티대로 찍었다. 배우들이 직접 대사를 해보니까 입에 안 붙거나 씹혀서, 혹은 어떤 상황에서 맞지 않는 톤이란 판단이 들었을 때 즉석에서 대사를 고친 건 있지만 그 외에는 고쳐진 부분이 없다. 이건 우리 스태프들에게 고마운 바인데 스태프들이 대본과 콘티를 보고 많은 준비를 해줬다. 적어도 준비가 안됐거나 뭔가 좋지 않아서 뜻하지 않게 고쳐야 했던 부분은 없었으니까. 물론 연출을 하다가 ‘이걸로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지만 만약 그렇게 갔다가 나중에 톤이 튀어버린다거나 그러면 뒷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 그냥 제대로 갔다. 촬영 전에 이 날 이 신을 찍겠다고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약속했는데 그걸 현장에서 필이 왔다고 바꿔버리는 건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짓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연출에 대한 감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약속은 어지간하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입봉작이다 보니까 그런 바도 없진 않겠지. (웃음)
원래 연출을 희망했었나?
영화를 꿈꾸는 누구나 그렇듯 연출을 희망했다. 하지만 감독이 된다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지 않나. 나는 심지어 전공이 그쪽도 아니었고. 우리 때만 해도 전문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도 드물었다. 동숭아트센터 지하에 있는 ‘키노’라는 서점에서 시나리오 전집을 팔았는데 그걸 사서 보기도 했지. 결국 글 쓰는 걸 좋아해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 막연하게 언젠가 연출을 하자는 뜻을 품고 일단 시나리오 작가로 자리잡은 뒤 돈이나 많이 벌자 생각했다. 어이없는 생각이지. 돈 벌려면 다른 걸 했어야지. (웃음)
영화를 전공해볼 생각은 없었나?
중학교 때까지는 만화가가 꿈이었다. 만화를 곧잘 그렸지. 그런데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이 늘지 않아서 만화는 아닌가 보다 싶었고 다른 걸 생각했다. 내가 영화나 소설을 보고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결말을 고쳐 쓰길 좋아했다. 그리고 사진이나 음악도 좋아했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다 할 수 있는 게 영화더라. 하지만 좀 막연했지. 연극영화과 시험도 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웃음) 아무래도 어른들의 편견이 강한 시기이기도 했고, 내가 공부를 못하는 편이 아닌 덕에 부모님의 꿈이 크셨던 것 같다. (웃음)
최근 개봉된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와 제작 중인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의 원작자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데 왜 <혈투>를 연출작으로 선택한 건가.
사실 <혈투>는 2006년에 쓴 시나리오다. 오래 전에 썼지만 넘기지 않은 이유는 개인적인 애착이 많았던 작품이었던 탓이다. 이 작품을 원했던 제작사나 감독님들이 있었지만 그 분들이 만들고자 하는 방향이 나와 맞지 않더라. 그래서 이건 내가 갖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직접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기회가 온 거다. ‘비단길’에서 시나리오를 몇 개 보여달라고 해서 <북극의 변>을 별생각 없이 보여줬는데 대표님이 다음날 보자고 하더라. 그리고 보자마자 그랬다. “연출 안 해볼래? 이거?” 이건 작가로서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 감독으로서 쓴 시나리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사실 그렇다고, 언젠가 직접 해보고 싶어서 쓴 거라고 답했다. 결국 그렇게 하게 된 거다. 물론 갑작스런 제안에 당황스러워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했지. 만류하는 사람도 좀 있었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주가가 더 높아질 텐데 기다렸다가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냐는 거였지.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일단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 제작사에 대한 신뢰도 생겼다. 결국 하루도 안돼서 하겠다고 전화했지.
어떤 점에서 신뢰가 생긴 건가.
내가 작가로서 10년 동안 활동하며 여러 제작사를 겪어 보고 각색도 많이 해봤지만 정확하게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 알고 제안하는 회사는 드물다. 올라가볼 수 있는 산이 10개면 10개를 다 올라가봐야 된다. 그러다 결국 다 아니면 다시 첫 번째 산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여긴 그게 아니었다. 너무 명확하게 제시하더라. 나는 제작자가 가장 정확해야 한다고 본다. “이건 재미있지만 작품으로 만들 때 이 부분만 손보면 좋겠는데?” 이래서 내가 괜찮겠다고 하면 가는 거다. 반대로 내 생각이 다르면 그 간극을 좁히던지,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과 해야겠지. 그런데 내가 겪어본 제작사가 열이라면 그 중 일곱은 그게 흐리다. “이게 재미있긴 한데……이렇게 한번 해볼까요?” 이런 식이랄까. (웃음)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 감독이 처음으로 자신이 쓰지 않은 시나리오를 연출한 작품이면서도 굉장히 센 작품이다. 영화를 봤을 텐데 어떻게 봤는지 궁금하다.
내가 쓴 시나리오였지만 이게 만들어지면 조용히 넘어갈 영화는 아닐 거라 생각은 했다. 어쨌든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는 만족한다. 다 떠나서 작가로서 내 시나리오가 내 손을 떠나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는 주재료를 공급해주는 사람이다. 그 재료를 가지고 구워서 스테이크를 만들던, 회를 뜨던, 삶아먹던, 어떻게 만드는 건 순전히 요리사인 감독 몫이다.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 감독님 영화고, <부당거래>는 류승완 감독님 영화인 거다.
예전에는 재료만 공급했지만 직접 요리까지 하게 됐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만족감은 묻지 않겠다. (웃음) 다만 이 경험이 당신에게 남긴 소회 정도는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재료로 내가 하고자 하는 요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 요리를 기다리는 분들에게 직접 맛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게 맛이 있던지 없던지, 내가 책임질 수 있고,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은 것 같다. 다만 작가로서 스토리만 만들고 글만 쓸 대는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하면 되니까 안 되는 게 없다. 하지만 직접 연출을 하고 촬영을 하면 안 되는 게 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이 실제로 이렇게밖에 안 나온다면 결국 타협해야 한다. 게다가 내가 내 돈으로 내 영화를 찍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릴 수 있겠지만 남의 돈으로 영화를 찍었으니 최소한 손해는 끼치면 안 되겠지. 이런 상업영화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기본적인 뼈대는 건드리지 않는 한에서 관객에게 재미를 줄 수 있는 살을 붙이고자 노력했다. 직접 요리를 하다 보니 이런 스트레스를 받더라. 그리고 내가 단순한 편이라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한다. <혈투>에 1년 정도 매달려 있다 보니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쓸 수가 없어서 생기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당장 글부터 쓰고 싶겠지만 감독으로서의 욕심도 생겼을 것 같다.
일단 욕심은 난다. 그런데 내가 쓴 시나리오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라서 쓴 것이겠지만 그걸 잘 찍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 같다. 정말 자신 있다면 내가 직접 만들겠지만 내가 잘할 수 없는데 괜히 욕심 부리기 보단 다른 감독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성향이나 취향이 있으니까. 분명 나는 또 연출하고 싶고, 그렇게 하려 하겠지만 욕심을 부리지는 않으려 한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그리고 <혈투>를 보면 공통적으로 복합적인 인물의 심리가 그려지고 이에서 비롯된 갈등이나 충돌이 복잡한 플롯의 사건을 만든다.
내가 원래 사건 중심 영화보다 캐릭터 중심 영화를 더 좋아하긴 한다. 그리고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고 결국 그 사건을 벌이는 건 사람이다.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왜, 우리가 재미있어하는 이야기도 눈으로 보이는 사건의 뒤에 있는 이야기지 않나. 원래 사람 관찰하는 게 우리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면 결국 사건이 보인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다. 한두 시간 즐겁게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나와 어울리는 재주가 아닌 거 같다.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나가서 아무 말없이 집에 가서 씻고 누웠더니 자꾸 생각하게 되는, 그런 잔상을 남겨주고 싶다. 적어도 뭐든 하나 던져주고 싶다. 그런 걸 좋아하니까.
<해운대>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수식어를 차지한 영화다. 백주대낮에 거대한 쓰나미 장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모험이었고, 한스 울릭이라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VFX슈퍼바이저가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이색적이었다. 모팩 스튜디오에서 최종작업이 된 것으로 아는데 일단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고 난관도 많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모든 공정에 직접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이 나진 않았나.
방금 말한 대로 <해운대>는 한국 최초의 재난 영화다. 대낮에 대규모 쓰나미를 묘사해야 하는데 난이도가 높고, 우리가 기술적으로 처리해본 적 없는 부분이라 제작자나 투자자 입장에서 경험치가 없는 국내 업체들에게 도박성을 가지고 시도해보라고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닌 게 사실이다. 경험치 없는 작업을 하려면 그만큼의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고, 시행착오에 대한 기회비용을 제공해줘야 한다. 하지만 제작비 한계가 뻔한 마당에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다. 게다가 CG작업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분야로 꼽히는 게 물CG다. 데이터양도 워낙 크고, 제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웬만한 기술력이나 인프라가 뒷받침돼 있지 않으면 무리한 작업이다.
제작비가 빠듯하니까 신뢰가 가는 외국 슈퍼바이저를 고용한 셈이다. 그 과정에 대해서 관여한 바가 있나. 그리고 모팩이 <해운대>에 참여하게 된 과정도 궁금하다.
해외업체들을 여기저기 많이 접촉했었지만 그 제작비로 원하는 퀄리티는 보장해줄 수 없다는 답변만 한결같이 돌아왔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스 울릭은 자신이 참여했던 <퍼펙트 스톰>과 <투모로우>의 2배 퀄리티를 그 예산에서 보장하겠다고 장담했다.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두 작품을 책임졌던 사람이 그렇게 대답을 하니 신뢰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스한테 작업을 맡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한스가 예산이 빡빡하니 자기네 팀은 전반적인 슈퍼바이징을 맡되 물 소스의 퀄리티를 높이는 작업에 집중하고 쓰나미를 제외한 VFX샷을 처리하고 나머지 합성 작업을 맡아줄 업체를 파트너로 찾아야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국내 업체들의 포트폴리오를 확인하고 체크해본 뒤, 모팩을 선택했다. 그 때 제작사에서 조건을 걸었다. 어차피 모팩에 예산을 많이 배정해주지 못하니까, 대신 모팩에 기술 이전을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그걸 흔쾌히 허락했다.
메인 작업을 한스 울릭이 꾸린 팀이 맡고 서브 작업을 모팩에서 하는 형태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후에 개봉 직전까지 모팩에서 거의 모든 작업을 다시 했다는 말도 들었고.
처음에 작업을 시작하고 한스 울릭 측에서 R&D(연구개발)를 한다, 소스가 나오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그 시간에 쓰나미와 관련 없는 샷들을 미리 진행하면서 한스 울릭이 처리한 이미지 소스가 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그쪽에서 파이널 데이터가 넘어오기 시작했는데 너무 황당한 퀄리티였다. 그 전에 소스를 몇 개 보여주긴 했지만 3~40% 작업 단계라니까 점차 좋아지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결과를 보니 투자사나 제작사도 발칵 뒤집힐 정도였다. 그때부터 <해운대>CG가 개판이라니, 재난영화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재난이니, (웃음)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거다. 안에서도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이 상태로 끝장이라 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개봉날짜도 결정된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투자사 측, 제작사 측, 그리고 나까지 미국으로 다 몰려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상황을 체크해본 결과 누가 봐도 폴리건 엔터테인먼트가 작업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게 ‘명약관화(明確觀火)’였다.
물CG의 제작방식에 대해서 설명해줄 수 있나?
물CG를 만드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기술적인 부분이라 일반인들이 이해하긴 조금 힘들겠지만 쉽게 설명해보자면, 아까 말한 것처럼 물CG는 데이터 양이 크고 제어하기 힘들기 때문에 구현하기가 어렵다. 한스가 제안한 건 물을 제대로 시뮬레이션하는 ‘레벨셋 시뮬레이션(Level-set Simulation)'인데 입자 하나하나가 진짜 물처럼 움직이는 거다. 그만큼 비용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물을 제대로 시뮬레이션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의 작업방식을 응용해서 물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게 '서페이스 디포밍(Surface Deforming)'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종이 한 장을 펄럭거리면 물이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물의 질감을 부여해서 좀 더 디테일하게 출렁거리게 만들어서 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다. 물론 그것도 보다 정교하고 과격한 움직임을 만들려면 꽤 까다로운 작업이 된다. 하지만 기존에 상용화된 툴 안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국내 업체들조차도 어느 정도 스킬이 있는 아티스트들에게 미리 준비 작업을 시켜서 시도하면 꽤 괜찮은 결과물을 획득할 수 있는 수준까진 왔다.
아무래도 좋은 퀄리티도 중요하지만 <해운대>에 책정된 예산으로 고비용의 작업에 예산을 투자하는 건 부담이었을 텐데, 레벨셋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는 한스 울릭 측의 근거가 궁금했을 텐데.
<해운대>의 스케일이 이 예산으로 레벨셋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제대로 묘사하기 쉽지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걸 하겠다는 건지, 내가 질문했을 때, 한스 울릭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우리는 ILM시스템을 지원받아서 활용할 수 있도록 계약이 돼 있다.” 그렇다면 답이 된다. 왜냐면 ILM이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시뮬레이션 파이프라인과 시스템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거든. 그럼 당연히 그럴 듯하지. 게다가 한스가 ILM출신이기도 하고.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까 그렇게 계약된 적이 없더라. 그리고 미국에 가서 보니까 레벨셋 시뮬레이션을 약속해놓고 그렇게 하고 있지도 않았고. 물론 한스가 고용한 많은 아티스트들은 할리우드에서도 인정받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경력도 있는 작업자들이었던 건 맞다. 그런데 그들이 몇 명 정도 모인다고 해서 갑자기 어마어마한 게 가능한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사실 그 당시 내 느낌으론 이건 속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결국 모팩에서 모든 것을 다 떠맡게 된 것으로 아는데,
투자사와 제작사가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작업하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나한테 슈퍼바이저 역할을 주고 내가 작업의 총책임자가 되면서 미국에 소스를 요구하게 된 거다. 소스만 받아서 나머지 작업을 우리가 다 하는 걸로 결정했지. 그런데 그쪽에서 작업을 진행했던 소스들로는 도저히 퀄리티를 맞출 수가 없어서 그 과정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긴 했지만 아예 방법을 바꿔버렸다.
쓰나미 이미지가 사실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우리가 작업하기 전에 자료들을 굉장히 많이 찾아봤는데 실제로 쓰나미는 배불뚝이처럼 부풀어서 쑥하고 밀려온다. 보기에 위압감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물이라는 게 사람 무릎 높이로만 밀려들어와도 사람이 그 힘을 제어할 수 없다. 쓰나미가 위험한 건 그 때문이다. 그 힘에 쓸려가게 돼있다. 그렇게 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각종 쓰레기나 기물들과 엉키고 레미콘 안에서 시멘트가 돌과 자갈에 섞여 들어가는 것처럼 끔찍하고 잔인하게 죽는 거다. 그 안에 엉켜 들어가면 시체가 거의 갈갈이 찢어진다. 정말 지저분하면서도 무시무시하지.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렇게 묘사할 순 없는 거였다. 그래서 ‘에어포일(airfoil)’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서핑 파도 같은 이미지로 아예 형태를 바꿔버렸다. 과학적인 이미지는 아니지만 시각적으로 훨씬 위압감을 주는 방식으로 작업 방향을 잡고 다시 시작한 거다.
그 시점이 언제였나?
그때가 4월 초였다. 불과 개봉을 두 달여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내가 직접 지시해서 미국에서 받아온 소스들은 그대로 쓸 수 없어서 기본 작업만 된 데이터를 받아서 우리가 전부 다시 재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질감도 바꾸고, 조명도 바꾸고, 렌더링도 다시 하고, 디테일도 다시 추가하고, 최종합성을 한 뒤, 결국 640컷이 넘는 작업을 두 달여 만에 완전히 다시 하다시피 했다.
넉넉한 시간이 확보되지 못한 시점에서 재작업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그런 지점에서 아쉬움이 남지 않나?
사실 완성도에 있어서 절대 만족스러울 수가 없지. 그리고 결국 이렇게 레벨셋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서페이스 디포밍을 메인으로 가는 방식이 될 거였다면 애초에 우리에게 우리 기술 내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라고 주문하는 게 훨씬 나았을 거란 생각에 답답하고 화나는 것도 없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좀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하고 지금보다 더 높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확보됐을 거다. 그리고 미국에서 사용된 예산의 절반 이하로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었을 거고. 예고편 나가고 악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히 관객들이 받아들일만한 수준으로 마무리시켰다는 점에서는 위안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굉장히 아쉽고 불만족스러운 결과다.
올해 개봉 예정인 <워리어스 웨이>의 VFX작업에 참여했다. 당시엔 <런드리 워리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영화였는데 해외에서의 작업조건의 차이를 느낄만한 기회였을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 계약서는 갑을이 공정하지 않다. 무조건 갑에 유리한 조항들 투성인데 할리우드 계약서는 두께부터 책 한 권 분량인데다가 을에 대한 보장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더라. 문제가 생겨도 우리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명시한 조건들이 많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만 제대로 해내면 그 외의 문제가 발생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항들이다. 최소한의 작업기간을 보장하고, 기본적인 소스를 언제까지 제공해주며, 난이도에 따라서 작업시간의 차별적인 보장을 책임진다는 조항까지 있다. 할리우드의 방식은 분명 굉장히 합리적이고 퀄리티를 보장해주는 방식이다. 물론 그 방식이 무조건 훌륭한 건 아니다.
어떤 점에서 말인가?
권리를 주장하고 보호받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더 적은 비용과 더 빠른 시간 안에서 훨씬 더 효율적으로 퀄리티를 생산해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음에도 그것들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게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모든 면에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취하는 방식이 상당 부분 할리우드보다 유리하고 효과적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생기더라. 할리우드가 무조건 답이라고 볼 순 없는 거다.
물론 여전히 기술적으로 취약한 지점도 존재하고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지점이 있지만 국내 VFX산업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빠른 성장을 이뤘다고 자평해도 좋을 것 같다.
짧은 시간 안에 굉장히 많은 발전을 이뤘다는 건 맞다. 그만큼 우리가 내부적으로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노력한 지점이 분명히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실 국내에서 콘텐츠가 활발하게 제작됐고, 우리에게 그 콘텐츠를 제작해볼 수 있는 기회가 끊임없이 제공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닥치는 프로젝트를 당장 해내려다 보니 경험치가 쌓이고, 좀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구르다 보니 여기까지 굴러오게 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웃음) 다만 워낙 조건이 열악하다 보니까 스스로 발전할만한 동력을 갖기 어렵다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구르던’ 이란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도 스스로 발전적인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다. 그나마 콘텐츠의 활발한 제작으로 기회가 제공됐다는 게 유일한 기회였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온당하지 않다는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나?
사실 우리나라 소비자, 관객들은 까다롭지 않나.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제작비가 얼마였던지, 제작기간이 얼마였던지, 이런 거 안 따지거든. 사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다. 극장가서 한국영화나 할리우드 영화나 동일한 티켓값을 지불하는 마당에 그런 걸 봐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완성도를 추구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가 된 거다. 조건이 열악해도 욕먹지 않으려면 완성도를 추구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발전한 거지.
CG를 활용하면 제작비가 상승한다는 오해도 많다. 물론 요즘 블록버스터의 예산은 CG에 할당되는 비율이 높은 게 사실이지만 CG가 제작비를 경감하는데 활용되는 경우도 많다.
제작비가 커지는 요인으로 CG를 지목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내가 볼 땐 일정 부분 오해가 있다. 오히려 제작비가 열악하고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CG에 의존하게 됐고 더 높은 완성도와 더 큰 스케일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거다. 우리나라처럼 제작비 상황이 열악하면서도 관객들의 요구가 높은 환경일수록 CG의존도는 점점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활용가치가 그만큼 크다고 예측된다. 내 생각에 우리가 작업한 7~80%의 작품에서 CG는 제작비를 절감하는 동시에 완성도를 추구하는 쪽에 활용됐다고 본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국가대표>의 마지막 스키점프 장면 같은 경우, 만약 세팅해서 찍었다면 상당히 많은 돈이 깨졌을 거다.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아주 훌륭한 사례가 아닐까? 사실 기술적 난이도가 높은 작업은 아니지만 효과적으로 잘 활용된 케이스라고 보인다. 영화에서 크게 기여한 셈이지. <해운대>는 너무나 당연한 케이스고.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중공군이 밀려오는 장면 처리도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효율적인 사례지.
사실 국내에서 할애되는 CG작업의 비용은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미비한 수준에 가깝다.
우리나라는 할리우드에 비해서 VFX제작비용이 싸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에게 놀라운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건 영화가 잘 만들어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제작비 대비 완성도가 기겁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윤제균 감독님은 JK필름을 할리우드에 진출시켜야 한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웃음) 그래서 미국 쪽하고 접촉하고 계시는데 다들 하나같이 <해운대> 제작비만 들으면 깜짝 놀란다더라. 물론 <해운대>가 할리우드 스탠다드 퀄리티라고 볼 수는 없겠지. 그렇지만 제작비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판단했을 때 어떻게 이런 이미지를 획득해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거다. 그런 면에선 경쟁력이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건 국내 산업적 단가가 낮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작업자들에 대한 충분한 대가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불합리한 상황이 오히려 가격경쟁력으로 와전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사실 제작비가 절감됐다는 측면은 희생을 밑바탕에 깔고 우리가 스스로 감내하면서 더 요구해야 할 비용을 우리 스스로 감내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는 상황이 변화돼야 할 지점이 있긴 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단지 싸다는 것으로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건 산업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거다. 비싸다고 할지라도 퀄리티로 승부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지난해 11월에 AFM(American Film Market)에서 국내업체들과 공동으로 부스를 차리고 해외 프로모션을 했다. 당장 눈에 띄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현장에서 보고 들었다는 점만으로도 특별한 성과가 아니었을까.
우리를 포함해서 모든 업체가 여러 가지 상담을 했다. 사실 계약 직전까지 가니 마니, 이런 건 언론용 멘트에 가깝다.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었던 건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애초에 관심도 정보도 없었던 해외 영화사나 제작사들이 한국에 이런 VFX업체들이 의외로 많고 생각보다 퀄리티가 괜찮다는 인식을 조금씩 만들어냈다는 거다. 일단 알릴 수 있어야 그 다음 기회도 발생한다. 국내 VFX업체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던 상황에서 해외 홍보효과란 측면만으로도 분명 의미 있는 행사였다.
AFM진출을 보도하는 뉴스나 기사 가운데 해외진출이 가시화된 것처럼 말하는 보도가 많았다. 사실상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는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나라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라서 그런지 어느 날 우리가 갑자기 할리우드의 유명 작품에 깃발 꼽기를 기대하는 측면이 있더라. 그게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입장을 바꾸고 생각하면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작품들도 그들 나름대로 목숨 걸고 하는 작품일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아시아 변방 국가에 메인 작업을 맡길 리가 없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모든 것이 확 이뤄질 것처럼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하는 면이 있다. 우리가 처음에 어필할 수 있는 건 가격 경쟁력일 수 있지만 시장에 조금씩 스며들듯이 참여해서 좋은 평판을 얻어내기 시작하면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너무 성급하게 치고 들어갔다가 결과가 좋지 않아서 평판이 떨어지면 다시 되돌리기도 힘들어진다. 해외진출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겠지만 그래서 너무 성급하게 질러나가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신중해야 하는 입장이다.
<괴물>당시 작업한 오퍼니지의 데이터는 오퍼니지의 소유였기 때문에 결국 국내에 남겨진 것이 없는 것으로 안다.
뒷맛이 씁쓸한 지점이 없지 않았다. (웃음)
그런 의미에서 <해운대>는 결과적인 데이터를 모팩에 남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노하우가 우리에게 남겨졌으니까. 비슷한 작업을 다시 한다면 훨씬 효율적인 방식으로 더 높은 완성도를 끌어낼 자신이 생겼다.
JK필름에서 제작하는 <제7광구>에도 참여하나?
지금 프리 프로덕션을 2달 가까이 진행 중이다. 컨셉트 디자인까지 우리가 다 맡아서 진행하고 있다.
심해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알고 있는데 역시나 국내에선 블록버스터 규모의 예산이 투자된다고 들었다. 일단 크리쳐 무비라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일종의 모험이 될 수도 있겠다.
아까 <해운대>의 노하우가 우리에게 자산이 됐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렇다고 그 자산이 <해운대>같은 영화만을 위한 자산이 되는 건 아니다. <해운대>를 해봤기 때문에 큰 데이터를 컨트롤해야 할 수 있는 노하우가 우리에게 생겼다. 성향이 다른 작품이라 해도 그 스케일을 효과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거다. 예를 들자면 계속 1~2층짜리, 아니면 높아 봐야 3~4층 건물 짓던 사람이 갑자기 3~40층 건물을 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건물의 성격이 달라지는 건 다른 문제다. 큰 호텔을 지어봤던 사람이라면 규모가 큰 공장을 짓는 것도 가능할 수 있는 거다. 스타일이 달라질지언정 스케일이 큰 건축물을 지어봤던 노하우는 고스란히 활용된다.
현재 한국에서의 VFX작업에 대한 활용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보나?
의외로 기존의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VFX에 대한 이해도가 심각하게 낮다. 그래서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고, 이런 식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봤을 땐 국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의 반도 써먹지 못하고 있다. VFX기술을 활용할 때 가능한 확장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거다. 그러면서 자꾸 할리우드만큼 그림이 안 나오네, 이런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자기 주머니의 쌈짓돈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계속 남의 방만 쳐다보고 부러워하는 꼴이다.
그래도 과거보단 많이 나아진 수준이 아닌가?
과거엔 심각한 수준이었지. 그래 놓고 책임만 우리한테 묻는 이상한 형국이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단 협조적이긴 하다. 이젠 영화에서 VFX가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는 메인 스텝이라는 걸 인정하고 우리 의견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다루진 않는 수준까진 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게 야기시키는 문제가 있다. 준비상황에서 작업 중인 현장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가르키는 방향을 봐야 하는데 자꾸 손가락 끝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하지만 자꾸 자기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거다. 결국 제대로 된 소스가 획득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렇지만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않았냐고 말하게 되고, 결국 그런 면에서 답답해지는 거지. 오케스트라에서 지휘자가 지휘를 하는데 연주자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자기 악보만 보고 연주해버리는 거다. 개개인의 연주가 나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결국 오케스트라가 파워를 발휘하는 건 지휘자가 곡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향으로 곡의 느낌을 끌고 가느냐에 달렸다. 그런 면에서 조합이 잘 이뤄지지 않는 면이 발생하는 거다.
CG를 이용한 프리 프로덕션도 활용되고 있다. 사실 프리 프로덕션은 촬영 단계에서의 낭비를 줄이고 보다 효율적인 체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업이다.
그렇다. 프리 프로덕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선 프리 프로덕션이 무엇을 해야 하는 단계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프리 프로덕션이 중요하다고 다들 말로는 떠들지만 실질적인 방법은 모르고 있다. 할리우드가 무서운 건, 표면적으로 그들이 확보한 기술적 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보일지 모르지만 그보다도 프리 단계에서의 충분한 검증을 통해서 완성도를 보장할만한 프로세스를 확보하고 작업을 시작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프로덕션과 포스트는 그걸 실행하는 단계지. 애초에 프리 프로덕션을 통해 깨지고 부딪히며 시행착오를 겪는 난장판 상황을 만들어내지 않는 거다. 게다가 숙련된 스태프들이 많은 덕분에 계획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다. 그렇게 사전에 계획을 미리 세우고 출발하니까 예측대로 훌륭한 답이 나온다. 사실 비용이 지불되지 않는 프리 프로덕션은 진짜 프리 프로덕션이 아니다. 우리는 배우 캐스팅 시기와 투자 계약 시점이 맞물리기 때문에 대부분 크랭크 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제작이 가시화된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대부분의 프리 프로덕션이라는 건 기존에 작품을 같이 해왔던 스태프들과의 친분이 있어서 이번 작품도 같이 해보자며 사전미팅을 준비하는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 자기들이 해왔던 경험치 내에서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서로 의논하는 단계랄까. 사실 프리 프로덕션은 이미 실행하는 단계여야 한다. 그게 안되고 있다.
여전히 CG에 대한 거부감을 지닌 사람도 있을 테고, 반대로 CG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해주리란 막연한 믿음을 지닌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지나치게 터부시해서 소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우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냥 다 CG에 의존해버리려고 억지를 부리거든. 사실 CG가 모든 걸 해결해주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고, 다른 VFX효과를 이용했을 때 더 효과적인 부분이 있고, 절대 CG를 활용해선 안될 만한 부분도 있다. 그런데 그걸 구별하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하니까 결과물이 난잡해지고 퀄리티가 엉망이 되는 거다. 얼마 전에 박철수 감독님이 인터뷰를 하나 했던데 답변을 보니까 참 답답해지더라.
어떤 내용이었나?
우리나라 영화에 CG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영화가 망가졌다고 하시고 <그랜 토리노>를 예로 들었더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CG를 전혀 쓰지 않고도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나. 그건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 <그랜 토리노>가 CG를 적극적으로 쓴 영화는 아니지만 구석구석 CG를 꽤 쓴 작품이다. 다만 효과적으로 필요한 곳에 활용했기 때문에 CG라는 게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전에 <아버지의 깃발>이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CG투성의 영화 아닌가. <스페이스 카우보이>도 CG없이는 불가능한 영화였다. CG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모르고 난잡하게 사용된 결과물만 보고 그 자체를 터부시한 셈이다. 만약 어떤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지 않았다면 연기를 못한 그 배우와 그 배우에게 제대로 된 디렉션을 주지 못한 연출자에게 문제가 있는 거지, 연기자 전체가 의미 없다고 싸잡아 판단하는 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다. 그런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거다. 물론 박철수 감독님은 극단적인 케이스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충무로를 좌지우지하는 많은 제작자나 감독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태생 자체가 기술로부터 비롯된 예술이다. 기술과 함께 하는 예술인 셈이다.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면 답답해지는 거다. 훌륭한 감독들은 언제나 훌륭한 기술을 활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 아닌가.
어쩌면 그런 개인들의 이해도가 높아지는 게 기술적인 발전이나 시스템의 해결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될 것 같다.
훌륭한 연기자는 캐스팅 리스트에서 우선 순위에 올라갈 수 밖에 없고, 연기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도태돼야 당연한 거다. 마찬가지로 VFX를 훌륭하게 수행해내는 업체들이 기회를 더 많이 갖고 그렇지 않은 업체들이 자연스럽게 도태되면서 옥석이 갈려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작품을 끝내고 나서 제대로 된 검증이 이뤄지지 않는다. 얼마나 효과적으로 예산 대비 퀄리티를 끌어냈는지에 대한 검증은 누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마다 조건이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비교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까 비용에 비해서 작업 결과가 엉망이었다 해도 그냥 분위기 타서 대충 넘어가고,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 하에서 엄청난 기여도를 남겼음에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내가 봤을 땐 그걸 판단하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조금 억울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느낀다.
많은 개선점이 필요하다 느끼겠지만 개선이 시급한 사안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있나?
장기적으로 많은 부분들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겠지. 그렇지만 일단 지금 당장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프리 프로덕션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제대로 준비하는 게 무엇인지를 인식시키고 그렇게 준비하는 과정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적극적으로 활용됐을 때 값어치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증명해서 기존 방식대로 영화를 제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한계를 깨닫게 만들고 프리 프로덕션의 의미를 갖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그걸 설득하기가 쉽진 않지.
일단 그런 설득이 가능한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나마 <해운대>를 하고 나서 윤제균 감독님과 어느 정도 신뢰가 생겼고 상당한 이해를 얻고 있다. 그리고 감독님도 우리한테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계신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반응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다. 사실 투자자도 따라서 반응해줘야 되고 산업 전체가 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어줘야 되니까 쉽지 않다. 결국 좋은 선례를 제시해줄 수 밖에 없다. 이렇게 했더니 이런 결과를 얻었다, 라는 선례를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는 그것이 당연해지는 풍토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상당한 숙제다.
결국은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다.
내 학부 전공이 시각디자인이다. 대학 시절, 강사 한 분이 우리나라 디자인이 발전하지 않는 이유는 클라이언트의 안목이 수준 이하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디자이너가 아무리 훌륭한 시안을 들고 가도, 그 시안 몇 개 가운데 가장 후진 시안을 선택한다는 거다. 결국은 사주는 사람의 안목이 발전하기 전에는 디자인이 발전할 수 없다는 거지. 디자이너들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들이 제시하는 디자인을 받아주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다. 잔인하게 얘기하면 돈 쥔 자들이 깨어나지 않는 이상 쉽지 않은 문제다. 제 아무리 보검이라 해도 그걸 그냥 식칼로 사용하면 어떤 의미가 있겠나. 결국 사용자가 그 가치를 깨닫고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의미 있게 쓰이는 거다. 우리가 해야 할 노력도 있지만 그 노력만으론 부딪혀야 할 한계도 크다.
VFX에 대한 무지를 타파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VFX를 작업하는 사람들은 영화를 공부하는 반면, 영화를 작업하는 사람들은 VFX에 대해 무지하다는 게 결국 작업적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뮤지컬을 연출하는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지 않고 이해도도 없다면 말도 안 되겠지. 당연히 VFX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충분한 공부를 하고 이해도를 지녀야 한다. 감독이 연기 지도를 하면서 연기에 대해서 아무런 기준도 관점도 없다면 한심할 거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15년간 이석원은 뮤지션으로 살아왔다. ‘언니네 이발관’의 리드보컬이자 기타리스트로서 다섯 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하지만 2009년은 이석원이란
이름 석자에서 뮤지션이란 존재가 아닌 또 다른 존재로서의 이력을 알린 한 해다.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 2009’의 트레일러를 연출했고, <보통의 존재>란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동시에 지난해 발표한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는 3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동시에 한국대중음악상에서
3관상을 수상하며 평단과 대중의 너른 지지마저 얻었다. 음악가로서의
깊이를 채우는 동시에 새로운 영역으로 존재를 확장해갔다.
이와 같은 이석원의 행보를 지켜본 누군가는 그를 아주 특별한 존재라 인식할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동떨어진 세계의 일처럼 여겨지는
기회를 차례로 성취해 나가는 이의 삶이란 특별하게 여겨져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석원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이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아주 보통의 존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건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연을 앞둔 시점에서는 목을 보호하기 위해 며칠간 입도 열지 않는다는 예민함은 완벽한
무대를 연출하고 말겠다는 최선의 집념이다. 동시에 그 완벽한 무대는 관객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완벽한 무대를 이루지 않고서는 성이 차지 않는 특유의 기질로서 쟁취해야만 하는 그만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이석원의,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은 분명 꿈의 팝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 음악을
하면서 즐거운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이석원의 말은 의외의 사실이다. 그에게 음악이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스스로를 투과하는 창이었다. 단지 그것으로 족했다. 이석원에게
음악이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표현하고자 했던 수단에 가까웠다. 그리고
자신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만족할 수 있는 가치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는
아주 보통의 완벽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인터뷰는 두 번에 걸쳐 만남을 거듭한 이석원과의 두 번째 대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첫 번째 인터뷰로부터 정확히 이틀 만에 이석원은 메일을 보냈다. 인터뷰를
다시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 인터뷰에 첨언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온전히 다시 하자는 제안이었다. ‘인터뷰가 중간에 끊긴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린다’는 그는 ‘인터뷰에 기록된 자신의 발언을 스스로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상대와의 인터뷰가 분명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시종일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발음하는 이와의 대화를 한 차례 더 이어갈 수 있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 인터뷰가 이석원의 마음을 온전히 대변하는 결과물로 완성됐다고 장담할 순 없겠지만 자신의 작품에 자신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했던 이석원의 노력처럼 이 기록 역시 이석원이란 인물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는 진심 정도는 전해지길 바란다. 아주 보통의 완벽주의자를 위한 아주 보통의 인터뷰로서 말이다.
왜 인터뷰를 다시 하자고 했나?
그날 시간적인 문제로 영화제 직원 분이 인터뷰를 중간에 자르지 않았나. 그리고 나도 공연을 앞두고 힘든 상황이었고, 사실 영화 관련 인터뷰로만 생각했다가 예기치 않게 음악적인 질문을 많이 받게 되니 급작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
원래 인터뷰에 호의적인 편인가? 아니면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가?
솔직히 나는 인터뷰를 힘들어하는 편이다. 내 일기를 본다니까 하는 말이지만 일기에 여러 차례 썼던 것처럼 인터뷰에서 내가 한 답변들을 나 스스로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내 음악을 듣고, 일기를 보고, 방송이나 공연을 통해서 나를 접하고, 나를 볼 수 있는 여러 경로가 있지 않나. 그 중에서 라디오에 나와서 떠드는 것과 인터뷰에서 말하는 건 내가 한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거짓말했다거나 이런 말이 아니다. 뭐라 해야 할까. 사람 마음은 시시때때로 변하는데 그 순간 내가 했던 말이 활자로 남고 기록이 돼버리니까 그게 내 영원한 진심으로 남게 되는 것 같아서 그게 싫다. 항상 인터뷰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다 후회한다. ‘내가 그 말을 왜 했지?’ 이런 게 너무 많아서. 이건 같은 맥락인데 나는 작업할 때도 수정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걸 굉장히 힘들어한다. 앨범이나 글은 내 맘대로 끝없이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할 수 있지만 인터뷰는 수정하기가 힘들지 않나. 그래서 다시 할 수 있을까 겸사겸사 물은 거다. 아마 지난 번 인터뷰와 같은 질문을 해도 전혀 다른 대답이 많을 거다. 감안해서 들어달라.
‘지산 락 밸리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올해 처음으로 개최된 페스티벌이었는데 어땠나?
좋았다. 내가 볼 땐 페스티벌 가운데 주최측에서 이렇게 잘 준비한 경우는 드물다. 공간도, 사운드도 좋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해갔기 때문에 더 좋았다. 여기서 완벽이라는 의미는 이렇다. 사실 본인들이 완벽하게 라이브를 준비해도 사운드 쪽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공연은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전속 엔지니어를 항상 대동하고 간다. 일단 소리가 완벽하게 보장되니까 우리가 가진 걸 100% 보여줄 수 있었다. 여러 면에서 좋았다.
외국의 뮤지션들과 함께 참여하는 페스티벌이란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오아시스(Oasis)’와 같은 날 공연했는데, 기라성 같은 외국 뮤지션과 한 무대에 서거나 그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 자체로부터 어떤 자극을 느껴보진 않았나?
일단 오아시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오아시스의 셋 리스트가 사실 친절한 편은 아니다. 변동도 별로 없고. 물론 내가 좋아하거나 아는 노래가 많이 나오면 좋지만 이미 여러 차례 봤기 때문에 특별하진 않았다. 그보다 우리 앞에 공연했던 ‘프리실라 안(Priscilla Ahn)’이 굉장히 사랑스럽더라.
전국 투어를 마친 뒤 첫 공연이었다. 밴드 단독 콘서트와 페스티벌의 라이브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어떤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거의 7달씩 콘서트를 할 정도로 공연을 많이 하는 편인데 표현이 좀 그럴지 모르지만 용도별 공연을 많이 한다. 우리 단독 콘서트, 그 중에서도 극장 콘서트, 그리고 우리 콘서트 브랜드인 ‘월요병 콘서트’라는 것도 있다. 월요병 콘서트냐, 아니면 일반 극장 콘서트냐, 이에 따라서 분위기는 완전 달라진다. 같은 행사라도 일반적인 대학 축제냐, 지역 행사냐, 에 따라 다르듯 행사마다 종류가 다르고, 공연을 준비하는 의도에 따라서 분위기도 굉장히 달라진다. 페스티벌 같은 경우는 비싼 돈을 주고 먼 데까지 놀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들이 모인 날이니 만큼 우리도 작정하고 달려줘야 된다. 그러니 만약 이번 공연에서 우리를 처음 봤거나 앨범만 들어봤던 사람이라면 좀 놀랐을 거다. 말랑말랑한 그룹인 줄 알았는데 라이브에서는 굉장히 파워풀하더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럴 땐 우리도 다 막 미쳐서 노니까. 그러다가 그런 페스티벌이 아닌 다른 공연에서 우리를 보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일 거다.
2004년도에 김C와 함께 OCN에서 방영하는 <오씨네 영화잡기>에 출연했다. 16mm 카메라로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무한도전>과 비슷한 부류의 프로그램이었다. 나랑 김c, 용이 감독, 이렇게 셋이 묶어서 출연했는데 매주 영화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하거나, 게스트들을 모시고 토크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김태용 감독, 만화가 강풀 외에도 다양한 게스트가 나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막판에 셋이서 영화 만들기에 도전한다는 컨셉으로 진행했는데 사실 그땐 영화 만든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방송을 워낙 모를 때였고 그냥 좀 웃기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냥 제작진들이 짜주는 대로 갔던 프로그램이랄까.
김C는 요즘 <1박 2일>과 같은 버라이어티에서 왕성하게 방송활동 중이다.
재미있더라. (웃음)
그런 오락방송과 전혀 매치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정말 독특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를 구축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어땠나?
나는 처음부터 김C가 방송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방송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자리잡고 적응할 수 없다. <1박2일>에서 김C는 웬만하면 뒤에 있는 편인데 그것도 오히려 자기 자리를 알기 때문에 똑똑하게 적응하는 방식인 거다. 처음부터 나는 김C가 방송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금 말한 김C와 마찬가지로 방송을 통해 활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지인이 몇 명 있다. 근래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에도 출연했었는데 방송에 대한 욕심은 없나?
<오씨네 영화잡기>이후로 TV에 나가는 것에 대한 결론을 얻었다.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 를 떠나서 내가 TV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스스로의 결론이었다. 당시 그 프로가 ‘투니버스’를 제외한 케이블TV 시청률 1등을 기록하기도 했다. 내가 웃기는 건 좀 하거든. (웃음) 그런데 나를 굉장히 소모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기본적으로 나는 카메라가 돌아간다는 걸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냥 체질이 아닌 거지. TV에서 라이브하는 것도 굉장히 싫어한다. TV카메라가 있으면 그 자체로 내가 편하지 않아서 내가 가진 백(100)을 보여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서 우리가 가진 백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병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TV카메라 앞에선 웬만하면 공연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 때 얻은 결론은, ‘TV에 다시 나가지 말아야겠다’. 사실 그때 돈은 많이 받았지.
짭짤했겠다.
괜찮았지. 거기다가 ‘언니네 이발관’ 수입까지 더하니 갑자기 재벌 된 거다. (웃음) 그렇게 돈벌이는 좀 됐을지 몰라도 돈 때문에 나를 소모하는 느낌을 견디기 어려웠다. 요즘도 김C랑 연락하고 지내는데, 김c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저렇게 방송을 아는 사람은 방송하면서 음악도 할 수 있지만 확실히 나와는 다른 길인 것 같다고.
사실 방송을 어려워하는 것 같진 않던데, 그런 불편함을 연출적으로 가리는 건가?
기본적으로 나는 연출이 가능한 인간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잘 컨트롤하지 못한다. 그게 가능한 건 그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대나 방송, 아니면 사석에서마다 내 모습들은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서 유년시절 친구를 대하는 것과 회사 동료를 대할 때 완전히 달라지지 않나. 여기선 되게 까불까불 한데 여기선 의젓하게 오피셜한 모습을 보이고, 이런 경우 같은 거다. 그게 ‘난 얘네들 만나면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연출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런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무대 올라가면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방송에 나가면 그 상황이 날 그렇게 만드는 거다. 아무래도 방송은 긴장되고 불편하다. 방송이 내게 요구하는 모습은 오직 하나니까. 재미있거나 웃겨야 한다. 그래서 갖은 헛소리 다 해야 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다가 내 일기를 보면 또 뭔가 다른 사람 같고.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진짜일까, 싶어질지도 모르지. 그건 내 성격이 분열적이거나 다중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씬디 2009(디지털시네마서울 2009)’에서 본인이 연출한 트레일러는 지난 두 개의 씬디 트레일러와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완성됐다. 김영하 작가나 이상은 씨가 만든 트레일러가 단순히 풍경을 담은 영상에 가깝다면 당신의 트레일러는 온전히 연출된 것이다. 보다 영화적 방식에 가깝게 접근했다 할까. 일기에서 밝힌 연출의 변에 따르면 ‘1분짜리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던데 그래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나로서는 일단 트레일러 자체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일단 그 두 분이 만든 트레일러 밖에 샘플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말해야 될 것 같은데, 앞선 두 분들의 작품이 그 분들의 선택이었다면 난 좀 더 거창하게 찍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러프하게 찍어야 되는 거야?”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하더라.
주최측에?
아니. 내 주변에 영화 하는 분들에게. 나는 음악보다 영화에 관련된 친구들이 더 많다. 어쨌든 내 맘대로 찍으면 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지난 두 분은 직접 촬영까지 했다. 뭐가 됐든 나는 내 연출의도에 맞게 기술자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지, 내가 기술적인 부분까지 담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면서 그 안에 매몰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내가 촬영을 하지 않으면 더 자유롭게 구상하고 연출이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감독이 돼서 판을 좀 벌려보자 싶어졌다. 촬영감독도 구하고, 프로듀서, 조감독, 주연배우까지 쫙 구해서 진행하게 됐다. 언제 또 이런 일을 해볼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연출 경험은 전무했을 텐데.
우리 홈페이지에‘녹음 스케치’라는 섹션에 제작동영상이 있다. 사실 그게 영화하는 분들에게 약간 화제가 됐었다. 신선하다, 재미있다, 이런 반응이 있었다. 그런 경험 정도?
다 떠나서 영화 현장이라는 걸 구성하는 것 자체는 완전히 처음이었으니까.
완전 처음이었지.
그 현장을 구성하는 것에서부터 트레일러 제작이 시작된 셈이다. 난관은 없었나?
일단 처음엔 막막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무슨 일이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만 확실하면 그 뒷부분들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물어보고, 알아나가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구상하는 게 힘들었지. 실제로 판을 벌려나가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제작비는 어떻게 조달받았나?
일단 제작진행비용으로 사무국에서 돈 100만원 정도가 나왔다. 나 혼자 찍었다면 다 먹었겠지? (웃음) 사실 무보수로 도와주신 분들도 많고, 촬영감독님께는 차비 정도만 드렸다. 어쨌든 공짜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지 않나. 조명이나 세트는 실비를 들여야 하니까 그런데 돈을 좀 썼지.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하하하>에 참여한 박흥렬 촬영감독을 섭외했다. 어떻게 접촉했나?
<싸움의 기술>시나리오를 쓴 민도현 감독이 소개시켜줘서 촬영 전에 홍대에서 미팅을 했다. 그 분이 당시 바로 몇 일 뒤에 홍상수 감독 차기작 크랭크인에 들어갈 상황이라 굉장히 바빴다. 중요한 건 페이도 줄 수 없었고, 사실 나를 도와줄 이유가 하나도 없었지. 그래서 그 분을 뵙고 내가 이런 걸 찍고 싶다고 확실히 얘기하고 그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게 만들어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거다. 결국 그 분께서 그렇게 느끼셨으니까 촬영을 하셨겠지.
차승우 씨를 배우로 섭외했는데 처음부터 생각했던 캐스팅이었나?
처음부터 승우를 생각한 측면이 크다. 그런데 승우가 앨범 녹음 중이었기 때문에 만약 차승우가 못하게 되면 차선책으로 내 주변의 누구로 해야겠다 정도의 생각은 있었다. 주인공은 영화배우처럼 멋있는 놈이어야 했기 때문에 내 주변에 멋있는 놈 원, 투, 쓰리를 뽑아서 이 놈이 안되면, 이 놈으로 가자 싶었지.
차선으로 생각했던 건 누구였을까?
<비바소울>의 성룡이하고 이지형.
아무래도 남성성이 물씬 느끼는 느낌으로 보자면 차승우가 최선책처럼 보이긴 한다.
그렇지. 지형이도 비주얼은 괜찮지만 걔가 마초적인 느낌은 또 아니거든. 그래서 만약 지형이로 가면 지형이가 자주 쓰는 카우보이 모자를 씌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룡이로 가면 어떻게 가야 할지 생각했고. 성룡이는 차승우랑 또 다르게 남성적으로 생겨서 만약 그 친구로 갔다면 그 친구에 맞게 뭔가가 또 됐겠지.
결과물은 마음에 드나?
나는 대만족이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그림이 딱 그대로 나와서 만족한다.
영화 쪽에 지인이 많은 것 같다.
사실 나는 음악하는 친구들과 교류하는 일이 거의 없다. 뭐라 해야 될까. 나는 음악을 음악적인 행위로써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괴리감 같은것을 느낀다. 그러니까 음악적인 음악이라는 건 음악하는 사람 특유의 어떤 관성이라던가 음악하는 사람의 관습적인 판단들이랄까.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데 단지 어떤 음악적인 이유에서 좋다고 판단하는 부분들에서 대해서 알러지가 있다. 그래서 음악하는 애들보단 영화하는 사람이나 방송작가, 출판 쪽 사람들과 있을 때 오히려 할 얘기가 많아진다.
그 음악적인 음악이란 기능적인 기교에 천착하는 것을 의미하나?
기술적인 테크닉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도 스튜디오 녹음 경험만 수십 번이고, 녹음이나 앨범 만드는 작업에 대해서는 테크니션이 됐다고 봐야 된다. 중요한 건 테크닉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단 단순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서 음악이건 영화건 책이건 본질이 무엇인가의 문제다. 울림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랄까. 우리는 앨범을 만들거나 라이브를 할 때 이 바닥에서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동원해서 작업한다. 음악적으로 최고의 지식과 기술이 동원된다는 말이다. 그건 울림을 제대로 내기 위한 종을 만드는 작업인데 내가 아까 말한 부류들은 종을 만들되, 그 종의 알멩이가 비어있다. 즉, 기자에겐 독자가 중요하고, 정치인에겐 유권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게 핵심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음악은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음악을 만든다는 건 좀 특별한 일이다. 물론 글을 쓰거나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과 같이 기본적으로 나라는 사람을 표현한다는 공통적 행위로서 별로 다를 건 없다. 단지 외피가 다른 거겠지. 처음 음악을 할 때부터 줄곧 생각했던 건 내가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거다. ‘어떻게’라는 건 결국 ‘무엇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에 집중하다가 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단지 음악하는 게 좋기 때문에 음악공부를 하고, 유학도 다녀오고 해도 정작 표현하고 싶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음악을 들어보면 공허하다. '어떻게'만 죽어라고 팠는데 정작 '무엇을'이 없다는 거다. 불행한 일이지. 갖고 있는 컨텐츠 자체가 빈곤하니까 방법론을 아무리 연마해도 공염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앨범에 대한 성취감은 어느 정도인가? 자신을 음악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있기 때문에 15년 동안 음악을 해왔을 텐데.
오히려 나는 음악하는 자체를 굉장히 괴로워하는 타입이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뒤따를 ‘어떻게’라는 작업이 굉장히 고통스럽다. 최근에 만든 5집엔 억대의 돈이 들어갔다. 우리가 앨범을 3만장 넘게 파니까 손익분기가 될랑 말랑하더라. 일반적인 밴드의 녹음비 치고는 아주 많은 돈이 들어갔다. 그러면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사운드에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몇 년간 뛰어난 테크니션들이 투입돼서 작업해야 되고, 엄청난 돈도 들어가야 되고, 그래야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계산이 서면 이미 힘들어질 수 밖에 없는 거다. 처음에 우리에게 배정된 작업비가 1억이었다. 그런데 1억 5천이 되고, 2억이 넘어갔다. 기간도 1년이 넘어가버렸다. 그러니까 회사를 상대로 설득해야 하고, 협상해야 되고, 이해를 이끌어내야 되고, 이런 과정 안에서도 전문적인 기술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가져가고, 끊임없이 자평도 해야 하고, 그 안에서 내 몸과 마음이 완전히 거덜나더라. 그럴 정도로 해보니까 이제 나에겐 그 ‘어떻게’라는 게 즐거울 수 없는 거다. 나에겐 음악이 좋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좋아서 하고 싶어 미치겠다. ‘뮤직 메이스 미 하이(Music makes me high).’ 이런 애들하고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란 거다. 이제 와서 나는 음악전문가가 됐고, 이 바닥에서 인정도 받게 됐지만 그런 음악적인 사람과 나 사이엔 굉장히 괴리가 있다.
그 괴로움을 참는 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일 거다.
원래 트레일러 편집에 할애되는 시간을 이틀로 나눠서 12시간 정도로 잡았다. 그런데 2시간 만에 끝내버렸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아는 감독님들이 와서 쫙 앉아있었는데 내 힘으로 그냥 편집해버렸지. 나는 음악에 대해서 음악적으로 접근했다기 보단 어떤 분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범용적인 접근을 했다. 그러니까 내 머리 속에 있는 걸 끄집어 내서 현실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15년간 음악을 통해서 단련돼 온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내가 직접 기술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 없다. 기술자들과의 파트너십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그렇게 작업해왔다. 만약 내가 음악만 하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영화현장에서 판을 벌리고 프로 촬영기사랑 작업할 수 없었을 거다. 완전 휘둘렸겠지. 나는 내 가게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거나 책을 쓰거나 할 때도 내가 머리 속으로 원하는 걸 끄집어 내기 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경험적 노하우를 터득해왔다. 음악이라는 협의에 매몰돼 있는 게 아니라 결론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음악이건, 영화건, 책이건, 표현이 가능한 작업 자체에 중심을 두고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에 천착해온 거다.
결국 당신에게 음악이나 연출, 그리고 글은 자신의 세계관을 소통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셈이다. 자신을 담아낸 결과물에서 값어치를 느끼나 보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그런 측면이 크다. 대신 방금 말한 부분에서 소통이라는 단어만 표현으로 바꾸면 적절하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완벽하게 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소통이란 단어는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표현이나 발산이라는 말은 좋아한다. 소통은 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그 사람이 제 나름대로 받아들이거나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좋겠다. 단지 작품의 창조자로서 내 머릿속에 있는 걸 그대로 끄집어낸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입맛대로 그걸 보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경험에서 기반된 결론이 아닐까?
그건 절대적이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도 사소한 대화조차 안 된다. 이번에 작업하는 내 책에 들어가는 내용 중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어머니께서 들어오셔서 나한테 막 화를 내신다. 어제 냉장고에 넣어놓은 가지 나물을 왜 안 먹냐고, 그래서 자기가 지금 먹고 있지 않냐고, 화를 내시는 거다. 그럼 나는 이해가 안 가지. 그래서 가지 나물을 해놓으면 오늘 먹어도 되고, 내일 먹어도 되는데, 왜 하루가 지나도록 먹지 않는다고 화내시고 그걸 왜 엄마가 먹어 치우는 거냐, 하고 물으면 상하니까 그렇지, 답하신다. 아니,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데 그게 하루 만에 왜 상해요, 그러면 덥잖아, 그러시고. 그러니까 이건 그냥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엄마 머릿속엔 대화에 필요한 논리나 상식보단 내 아들은 내가 해주는 반찬을 잘 먹지 않는다는 믿음이나 단정이 중요했기 때문에 대화가 될 수 없는 거다.
자식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만한 사연이 아닐까. (웃음) 어쨌든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소통불가를 민감하게 느끼는 만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선 더욱 민감해질 수도 있겠다.
너무 많지. 오늘 이 인터뷰도 ‘내 앞에 앉은 기자가 내 이야길 충분히 이해했을 거다. 그리고 녹음까지 돼 있었고 분위기도 좋았으니까 내가 이야기한 내용 그대로 나오겠지.’ 이렇게 생각했더라도 나중에 기사를 보면 ‘이거 내가 말한 의미랑 다른데’ 라고 실망하게 된다. 토시 하나 틀려지면 의미가 완전 달라지잖아. 예전에 인터뷰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5집 앨범에 엄청나게 많은 제작비가 들어갔다’고 답변했는데 나중에 기사를 보니까 ‘제작비도 엄청 들어갔을 거에요.’ 이렇게 적혀있더라. 나는 그런 말한 적 없거든. 나는 전체적인 디렉터이기 때문에 우리 앨범 제작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전에 일기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일기의 사소한 문장조차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게 된다고 했더라.
내가 일기를 9년 정도 쓰고 있는데 옛날엔 안 그랬다. 아마 작년부터 그랬을 거다. 솔직히 자기가 써놓을 걸 남 보는 자리에서 고치면 초라하잖아. 자기가 써놓고 구리게 느끼니까 지웠나 보다 이럴 수도 있고. 5집을 작업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내가 원하는 만큼 후속 작업을 해보는 게 내 평생 소원이었는데 그걸 지난 4집까지는 못했지만 5집 때 그게 정말 최대치까지 허용되는 여건을 얻었다. 내가 100만 번 고치고 싶었다면 99만 번까진 됐다는 말이다. 그랬더니 내가 원하는 퀄리티에 근접한 결과가 나오더란 거다. 거기서 내 강점이 수정에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천만 번을 고치더라도 고칠 수 있으면 고치자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쪽팔리다는 생각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도 고친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도 언제부턴가 얘는 원래 고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게 서로간에 이해되는 부분이 생기니까 편하더라.
9년 간 웹상에 일기를 써온 것도 어쩌면 아까 말한 것과 비슷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의 일환이라 여겨서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동시에 그 일기가 개인의 일상사를 기록하는 사적인 영역이면서도 공적인 게시판 역할을 하는 것 같더라. 일기를 오픈된 공간에 전시하기로 마음 먹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아마 뮤지션이 그런 공간에 일기를 쓴 것 자체는 내가 거의 최초일 거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굉장한 전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뭐든 단순한 계기로 시작한다. 2001년도에 홈페이지를 개설할 때가 2집을 내고 망해서 3년 동안 음악을 못하고 다시 출발해야 할 시점이었다. 내 생각엔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때이기도 했고. 왜냐면 망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는데 일기 밖에 없더라. 예전에 PC통신 시절부터 글 쓰는 걸 되게 좋아했다. 그 때 썼던 글에 내 사변적인 이야기도 많았고, 그 자체가 나에게 좋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시판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거의 최근에 와서 이뤄진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일기라기 보단 더 솔직한 내면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어떻게 그런 밑바닥에 있는 속마음까지 다 쓸 수 있냐고, 괜찮냐고. 나는 진짜 괜찮다. 완전히 속까지 끄집어내서 보여주는 게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작년부터 형식적인 부분에서 자유로워졌다. 예를 들어서 일기인데도 일기처럼 쓰는 게 아니라 서간문처럼,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처럼 쓸 때도 있고, 아니면 말한 대로 사람들 보라고 게시판처럼 쓰는 글도 있고, 아니면 누구 한 사람만 보라는 식으로 쓸 때도 있고.
9년 동안 그 포맷을 유지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한때는 일기란 것에 대해서 고민도 많았다. 아무래도 남이 보는 일기이기 때문에 정말 쓰기 싫을 때도 많았지. 이게 정말 내 솔직한 글인지, 쓰기 싫은데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되는 순간도 있었다. 일기에 대한 피드백도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갈등들이 생기기도 했고. 다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부담이나 갈등들이 사라지고 편해졌다. 그래서 정말 100%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쓴다. 반말로 썼다가, 존대로 썼다가, 욕을 썼다가, 그냥 내 맘대로지. 만약 지금 와서 내 일기를 읽으면서 이건 다른 누군가에게 남 보라고 의식적으로 쓴 거 같다? 그것조차도 제 솔직한 개인적인 심경, 의도가 있다 해도 의도조차도 나의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타인의 반응을 의식했던 시점이 있었나 보다.
의식할 수 밖에 없지.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어쩌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과정이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내가 가진 무기가 솔직함 밖에 없기 때문에. (웃음)
그런 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라도 있었나?
9년간 갈등했는데 해방되지 않으면 안될 거 같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오랜 시간 고민하게 되면 받아들이게 되는 때가 있지 않나. 그야말로 정말 그렇게 받아들이게 됐다. 최근에 와서는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됐지만 남들이 보는 거니까 때론 의식하게 되도 어쩔 수 없고, 그런 내 모습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긍정하게 됐다. 그리고 옛날에는 일기가 재미가 없어졌네, 뭐가 어쩌네, 그런 피드백이 오면 재미있게 써야 되나, 고민스럽기도 했다. (웃음) 지금은 그런 건 없다. 그냥 잘못된 건 지우면 되니까. (웃음)
사실 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간단한 일 같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훈련이 된다.
훈련? 무엇에 대한 훈련?
글쓰기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와 고등학교 시절 일기가 다르듯 글을 쓰다 보면 점차 문법을 신경 쓰게 되고, 형식에 공을 들이게 된다. 일기를 써오면서 글쓰기 자체에 대한 욕심이 발전하진 않던가?
나는 반반인 거 같다. 일기를 쓴다는 게 글쓰기라는 면에서 훈련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기 안에 다른 글을 쓸 때 말이다. 일기는 아무래도 일기이기 때문에 패턴화되고 고착화되는 면이 있다. 내 일기엔 특정한 분량이 있다. 한 이 정도 스크롤이면 끝난다고 할만한 분량이 항상 정해져 있다. 만약 그런 내가 장편소설 분량의 글을 써야 된다고 하면 망하는 거다. 9년 동안 이만큼 밖에 안 써봤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다른 영역의 글을 쓸 땐 굉장한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가을에 출판될 책을 작업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책인가?
그냥 에세이다. 산문집이라 하기도 하는 수필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글쓴이가 살아온 이야기나 신변 잡기, 결국 자기 생각을 쓰는 거잖아. 나도 똑같다.
얼마 전,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 씨도 여행기를 냈다. 이상은 씨도 여행기 책을 낸 적이 있고, 근래에 주변의 뮤지션들의 출판사례가 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고무되는 느낌은 없나?
아니, 나는 오히려 그럴 수록 쓰기 싫어졌다. 나는 남들이 하는 건 무조건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요즘에 왜 그렇게 책들을 많이 내나 싶어서 나는 내기 싫어지더라. 그런데 내가 책을 내게 된 건 ‘페이퍼’의 황경신 편집장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5집을 내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출판 제의를 많이 받았다. 7군데 이상에서 제의를 했다. 돈을 대줄 테니까 런던에 다녀와서 ‘언니네 이발관 런던 정복기’ 이런 걸 원하는 대로 써봐라, 별별 제의가 많았다. 그걸 다 고사했다. 그런데 막판에 황경신 편집장이 와서 얘기하는데 그 분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출판 제의를 비롯해서 트레일러 제작 의뢰도 그렇고,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제의를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나.
내 음악하는 동료들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부탁들은 음악적인 분야로 한정된다. 물론 나한테도 피처링 좀 해달라, 가사를 써달라, 이런 부탁도 들어오지만 말한 것처럼 책을 내자, 영화를 만들자, 방송을 찍어보자, 이런 식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 사실 이게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 왜 그럴까, 나도 생각해봤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주변의 가까운 분들도 많이 얘기하는데 그 사람들 말로는 내 음악도 음악이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호기심을 주는 경향이 있단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자꾸 나에게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더라. 최근에도 출판 제의를 받았었는데 1년 동안 세계일주를 다녀와서 책을 써보란다. 나는 태어나서 일에 관련되지 않은 개인적인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왜 이런 제안을 나한테 하냐고 물어보면 의례적인 답변만 온다. 이석원이라는 사람에 주목했다, 어쩌고 저쩌고. 어쩌면 이석원이란 사람에 주목했다는 표현에서 내 주변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목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음악을 하는 자세도 음악을 음악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삶으로서의 음악, 사람으로서의 음악에 당위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결국 내 음악이 사람들에게 들려질 때 음악으로 가기보단 사람으로서 전달되는 측면이 있는 거 같다. 결국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책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는 게 달가울 것 같진 않다.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셈이니까.
그건 좋던데. (웃음) 난 원래 집 떠나면 못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여행을 너무 가고 싶다. 지금 나이가 마흔 가까이 됐는데 작년부터 사는 것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졌다. 그래서 결국 책도 하게 됐고. 나이 먹으면 사람이 그러잖아. 갑자기 안 하던 걸 한다고, 나도 그런 것 같다.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봐야겠더라. 그래서 여행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졌다. 작년 연말에 콘서트 끝나면 가야지, 그랬다가 올해 5월까지 콘서트하는 바람에 못 가고, 이번 여름엔 책 써야 되니까 못 가고, 가을을 넘기면 이제 가야겠다고 지금 생각하지만 또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할 수도 있겠지. 어차피 나란 사람은 책을 내기 위해 가게 됐건, 내 자의대로 가게 됐건 마찬가지다. 내가 일기에서 밑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듯이 여행을 갔다 와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여행기를 쓰기 보단 어차피 나를 위한 사변적인 여행기를 쓸 거다. 책 내줄 테니까 돈 받고 여행가라, 해서 다녀왔다 해도 다는 그에 대해 완전히 다 쌩까고, 내 의도에만 자유롭게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수많은 사람들이 본다는 전제로부터 자유롭게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인 거다. 그러니까 일단 보내주면 나야 좋지. (웃음) 핑계 삼아 갈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고. 그런데 당장 오케이하진 않았다.
지금 와서 글이 큰 의미를 준다는 말처럼 뭔가 지금에 와서 새롭게 흥미를 끄는 요소들이 생기나 보다.
15년 동안 음악을 하면서 여기까지 정말 힘들게 온 대신 글을 통해 구원받았다. 음악은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5집도 내가 15년 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지식, 노력을 한계치까지 꺼내서 죄다 쏟아 부었는데 결국 100을 채우지 못했다. 결국 그게 고통이 되고 아쉬움이 된다. 그런데 이 글쓰기라는 건 단 한 줄로도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글쓰기가 쉽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표현에 대해 내가 만족스럽다는 건 내 마음이 지금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고 느낄 때다. 나에겐 그런 게 너무 좋다. 음악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경험을 주더라.
5집은 개인적인 앨범이라고 말해왔다. 그 이전까지의 앨범이라고 해서 개인적인 범위와 무관한 작품들이 아니었을 텐데 특별히 5집을 개인적인 앨범이라고 밝힌 까닭이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이발관을 알고 나를 아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음악이나 글이 모두 나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됐다는 걸 알 거다. 다만 5집이 개인적이라는 건 다른 의미다. 지난 4집 같은 경우엔 이야기가 없다. 굉장히 통속적인 가사이기도 하고. ‘그대 지금 어디 있나요. 나 알고 싶어요.’ 이런 건 이야기가 아니다. 일반적인 감정을 가사를 담은 거지. 이번 5집에서는 그게 아니라 정말 깊은 내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대단히 개인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는 거다.
5집의 가사가 개인적이란 말을 자전적인 일기라 이해해선 안되겠다.
일기라, 내 가사가 앞으로 어떨지 몰라도 지금까지는 거의 그랬던 거 같다. 단지 5집에서는 이발관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 극대화된 거 같다. 내가 어떤 새로운 걸 했다기 보단 계속 내 개인적인 것들을 쓰다가 5집을 통해서 개인적인 표현이 폭발해버렸다고 할까? 언제 내가 개인적인 걸 쓰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5집은 레코딩 과정에서 수 차례 수정을 거쳤고, 그만큼 예정 발매일도 늦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을 자주 피력했다. 하지만 5집은 명반이라는 평까지 얻었고 신에서도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이 뒤따랐다. 자신이 느끼는 불만족에 비해 외부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느낌이다. 아이러니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그렇지. 나는 4집 앨범이 나왔을 때 사운드적으로 완전히 정점을 쳤기 때문에 다 끝날 줄 알았다. 그리고 5집을 내면서 이 앨범을 내면 우린 망한다, 까진 아니었지만 어디로 숨고 싶었다. 앨범에 대한 스스로의 자신감과 반응이 반대로 가니까 아이러니를 많이 느끼지.
사실 4집까지는 자신의 앨범을 피력할 때 상당한 자신감을 어필하곤 했다.
그건 사실 창작하는 사람이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본인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떻게 듣는 사람을 만족시키겠나. 그런 모습이 4집까진 있었다. 그랬는데 5집부터는 많이 사라졌지.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타이틀부터 심경의 변화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야기 컨셉의 앨범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서사적인 형태에 기획적으로 접근한 앨범이라 봐도 될 것 같다. 그런 형태를 기획하게 된 이유가 뭔가?
5집을 만들면서부터 창작자로서의 나에게 닥친 가장 큰 변화인데, 그 모든 게 이야기라는 세 글자로 귀결된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 창작자로서 고민하다 얻은 건, 나는 이야기꾼이 돼야겠다,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는 사람이 돼야겠다, 이런 결론이었다. 그래서 5집도 그렇게 만든 거다. 굉장히 개인적인 내 이야기를 갖고 픽션을 만들어낸 거거든. 다른 무엇을 해도 결국 다른 무엇을 하더라도 나한테는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중요해진 거다. 아마 앞으로 당분간 그럴 것 같다.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음악을 시작한 경위는 사실 만들어낸 이야기처럼 드라마틱했다.
좀 만화 같지. (웃음)
가상의 밴드 이름을 내걸고 PC통신 게시판에 글을 쓰고, 이를 통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다시 한번 그 거짓 밴드 이름을 언급했고, 결국 그 거짓 이름이 진짜 밴드의 이름이 됐다. 그 당시 밴드 이름을 내걸었을 때 진짜 밴드를 할 것이란 생각이나 했나?
전혀, 상상도 못했다. 시작하고서도 얼떨떨했다. 앨범을 낼 거란 상상도 못했고. 내 인생이 좀 만화 같다. 팔자인가 보다.
결과적으로 그게 지금의 당신을 좌우해버린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그게 발단이 됐지.
만약 요즘 같았다면 거짓말 했다고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웃음) 그 당시를 종종 되새겨볼 때가 있나?
15년 전인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고 여기까지 워낙 정신 없이 왔으니까. 확실한 건 내가 아까 말한 음악적인 음악가들과 나는 유리되어 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을 좋아서 한다. 음악을 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이 음악이 너무 좋아서 음악을 시작한다. 너무 좋아서 기타를 배우고, 건반도 배우고, 곡도 만들어보고, 그런데 그 곡을 사람들이 좋아해주다 보니까 프로가 되고, 이런 거잖아. 그런데 내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음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음악이 고통이었다. 음악을 하다 보니까 음악을 기술적으로 들어야 되더라. 난 음악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걸 직업으로 삼고 나니까 그 즐거움이 사라지더란 말이다. 그래서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이걸 내가 왜 했나 싶을 만큼 너무 괴로웠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항상 스테레오 타입화된 음악가들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음악을 시작할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지만 확실한 건 내가 음악을, 밴드를 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싶어서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다. 항상 그런 괴리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음악 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벽을 느낀다.
정말 음악을 위해서 자신을 매진하는 태도에 어울리긴 힘들다는 말 같다.
그게 그 사람들이 음악을 대하는 대다수의 방식이니까 내가 특이하다고 봐야겠지.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누구나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한다. “그럼 왜 하냐?” (웃음) 그렇게 고통스럽고 싫은데 왜 하냐고. 그럼 정말 할말이 없지. 이번에 트레일러할 때도 사람들이 계속 즐기면서 하라는데 난 작업할 때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내가 즐겁다고 생각하는 작업은 글쓰기 밖에 없다. 정말 특이하지.
어째서 글쓰기만큼은 즐길 수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뭔가 즐길 수 있는 작업이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까.
정말 놀라운 경험이지. 완전 쏘 해피다.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할 수 있는 작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래서 음악을 생각하면 너무 우울해진다. 이제 6집에 들어가야 되는데 두려운 거다. 만약 더 이상 곡이 안 떠오르면 어떻게 하지? 사실 이런 두려움은 2집 때부터 갖고 있었다. 나는 15년 동안 내가 음악하는 사람이란 자각을 거의 못하면서 음악을 했기 때문에 항상 음악한다는 사람들과 있으면 괴리를 느꼈다. 어느 순간, 내일부터, 어쩌면 지금부터 더 이상 악상이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은 거다. 그리고 내가 만든 앨범들을 봐도 내가 만든 것 같지 않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서 6집은 잘 만들고 싶지. 정말 끝내주게 만들고 싶다.
언니네 이발관이란 밴드의 역사가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 첫 앨범은 국내 앨범 역사에서 명반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 정도 평가를 받을 거란 생각을 했나? 의외의 사실이 아니었을까.
너무 명반, 명반하니까 민망한데. (웃음) 1집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만들었다. 하지만 뜻밖은 아니었다. 나는 1집과 2집이 나왔을 땐 난리가 날 줄 알았다. 막 100만장 팔리고 뒤집어질 줄 알았지. 그런데 너무 안 팔려서 완전히 실망했다. 오히려 5집은 한 삼천 명이나 살까 생각했는데 3만 명이 넘게 사버렸으니까 오히려 지금 더 희한하지. 왜냐면 데뷔앨범을 만들거나 2집 정도 된 아티스트들은 자신감이 이빠이 올라있는 상태다. 누구나 자기 앨범에 다 죽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었던 거지.
오랫동안 악기를 다뤘던 사람도 아니고, 밴드조차 급조한 당신이,
(말을 끊고) 아, 질문이 뭔지 알 것 같다. 그런데도 왜 자신감이 있었냐 하면 나는 그때 우리나라에 진짜 프로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카피밴드도 그렇고, 프로라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하면 저렇진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내 밴드 경험이 일천하고 경험적인 소스가 많지 않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탱하게 해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자기 중심이 확고하다는 것이었고 좋은 음악이 무엇이다라는 확신이 내게 있었다. 어렸을 대부터 음악을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누구보다 프로였고, 그걸 그대로 보여주면 난리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쟤네들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에만 집착하는 애들이야, 이런 판단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로선 걔네들을 굉장히 무시하면서 시작하기도 했지.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앨범이 나온 당시는 홍대 인디밴드라는 개념이 정립되던 시점이었다. ‘델리 스파이스’도 1집을 냈고, ‘크라잉 넛’과 ‘코코어’ 같은 밴드도 막 데뷔했던 시점이었다. 당시는 홍대 인디밴드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니네 이발관도 그 한 축을 담당했다. 당시에 그런 분위기가 이뤄진 배경이나 여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나?
나는 그런 여건이 조성됐다기 보단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이 폭발했던 거 같다. 그 계기는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이 사망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커트 코베인이 죽으면서 사람들에게 오함마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고, 자연스럽게 그런 충격이 응집된 게 아닐까. 여건이 충족됐다기 보단 어떤 흐름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우리가 여건을 만들어갔다고 할까?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듣고 나니까 문득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하다.
마이클 잭슨이 죽은 건 슬프고 안타깝지. 사실 우리 음악에는, 특히 5집엔 흑인음악적인 부분이 많이 가미돼있다. 마이클 잭슨이 엔터테이너네, 이런 애들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음악 자체가 굉장한 음악 아닌가. 지금까지 음악적인 영향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받지 않을 거란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
자살이란 점에서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이 문득 떠오른다. 일기에 그에 관한 글을 남기기도 했던데 뒤늦게 그 죽음으로부터 어떤 단상을 얻었나?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각성을 얻었다. 조금이라도 세상에 기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많이 했다. 그분의 죽음을 접하면서.
특별히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줬다고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단순하게 영향을 잘 받는 타입이 있고, 안 받는 타입이 있지 않나. 나는 후자다. 내 주변에 어떤 형 때문에 자기 인생이 바뀌었네, 누군가가 하는 걸 쫓아서 했네, 이런 애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게 거의 없는 사람이다. 태어나서 생전에 누구 말 듣고 내 인생이 바뀌었다 할만한 적은 없었다.
커트 코베인은 아니었을까? (웃음)
내가 봤을 때 커트 코베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건 누구나 받은 정도의 영향일 거다. 그래서 커트 코베인을 특별히 꼽을 수는 없지. 특정한 인물은 정말 없는 거 같다. 어떤 자잘한 의미에서 나에게 이런 저런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있는지 몰라도 결정적으로 큰 의미를 남긴 사람은 없다.
올해 했던 인터뷰에서 6집이 마지막 앨범이 될 거라고 공언했더라. 정말 다음 앨범이 마지막이 될 거란 확신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 의중이 궁금하다.
그건 내 두려움이자 막연한 예상 같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앨범 내는 추세를 봤을 때, 내가 마흔한 살이나 두 살쯤 6집이 나온다 하면 7집은 40대 중반에 나온다는 얘기거든. 그랬을 때 나처럼 음악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선에 도달하지 않은 앨범을 만들어낸다는 걸 견딜 수 없을 것이고 아마 그렇다면 더 이상 음반을 내지 않을 거다. 생물학적으로 40대 넘어서 자기 페이스를 제대로 내는 작곡가가 얼마나 있냐고 봤을 때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그러니까 아마 6집이 마지막이 되지 않겠나 싶다. 사실 지금 생각으론 6집이 나올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물론 지금 우리 언니네 이발관에서 이능룡이란 친구의 존재가 많이 가려져 있다. 사실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걔가 다 만든다고 보면 된다. 어떤 물리적인 영역의 음악, 소리는 그 친구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제 내가 외면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까 사람들에게 많이 가려져 있지.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은 이능룡에서 시작해서 이석원이 마무리 짓는다는 공식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이 생기지. 능룡이가 끝내주는 걸 만들어도 나머지 50을 내가 만들어야 되는데 내가 제대로 못 만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거든. 능룡이는 이제 한참 정점에 있을 나이인데 내가 그 선을 맞출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다. 음악은 하면 할수록 되게 힘든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로서는 어떤 결의를 다진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내 평생 마지막 앨범이라고 생각하고 내 모든 걸 쏟아 붓게 될 거다. 그런 선언적인 의미에 가깝다. 내 평생 해왔던 일을 이 이후로 죽을 때까지 영원히 못 본다는 생각을 갖고 6집 앨범을 만든다는 거다.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고.
멤버와도 그런 의견을 공유하나?
늘 한다.
주변의 지인들은 그런 발언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던가.
그 기사가 나가고 나서 너무 많은 질문을 받았다. (웃음) ‘정말 마지막이냐? 왜 그러냐?’ 물어보는 거지. 내 대답은 이렇다. 막말로 6집이 마지막이라고 했다가 7집을 낸다 해서 사람들이 욕할 건 아니지 않나. ‘6집이 마지막이다’라는 것에 대해 의식하는 사람들은 이발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만큼 기다리는 사람들일 거란 말이다. 그랬는데 내가 6집이 마지막이라고 했다가 7집을 내면 ‘어, 이 새끼, 그렇게 말해놓고 7집을 왜 내?’ 이러면서 싫어할 것도 아니고. (웃음) 만약 7집이 좋게 나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지. 다만 나는 일단 이 앨범 이상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지금으로선 없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주면 좋을 거 같다. 나도 7집까지 내고 싶다. 정말 늙어서까지도 내가 가진 베스트로 활동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쉽지 않을 걸 아니까 두려움을 표현한 거지.
사실 모든 창작자가 매번 베스트라고 불릴만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지 않나. 사실 5집은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고 지금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을 종종 해왔는데 그 이전까지의 앨범들은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떤가?
아까도 말했지만 수정을 해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게 항상 제작 기간이나 돈 문제 때문에 스톱이 된다. 2, 3, 4집이 다 그랬지. 그게 내겐 한이 됐다. 나는 수정할 게 이만큼 남았는데 회사에서 중간에 앨범을 강제로 내버린단 말이다. 3집 때도 마스터링 끝내고 나서 내가, “마스터링 더하자. 이 앨범 나가면 우린 망한다.” 했더니 제작자가 정신병원에 신고한다 그래서 그냥 앨범이 나가버렸다. 나는 정말 3집이 나가면 우리는 망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5집 때는 회사와 담판을 지었지. 아무리 시간이 많이 들고, 돈이 많이 들더라도, 내가 하자고 하는 데까지 해주소.
3집은 지금까지의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당시로선 많이 팔렸지. 하지만 정말 나는 그 앨범을 지금도 못 듣는다.
그 앨범도 기회가 되면 다시 수정하고 싶나?
아니, 그러기엔 너무나 과거가 돼서. (웃음)
예전에 운영했던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에 가면 시네마테크 전단지가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있어 보여서 가져다 놨다. (웃음)
그런데 왜 시네마테크 전단지였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영화 쪽 사람들을 많이 안다. 한번 살롱에 아는 분들이 시네마테크 쪽 사람들을 모시고 왔었다. 그래서 그 분들과 이야기하고 대답하다가 자기네 ‘시네마테크 친구들’이 되면 뭐가 어쩌고 저쩌고 하길래 그럼 갖다 놓으시라고 했다. 나도 그런 문화적인 표현이나 활동이 뽀다구나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지원이라면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고.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의 내부 인테리어에 관여했다고 하던데 직접 그 인테리어를 했다는 말인가?
인테리어 회사에 맡겼지. 다만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인테리어 회사에 디자인을 일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거다. 상당한 디렉션이 들어가는거다.
그 당시 일기에서 재미있는 글을 봤던 기억도 난다. 종업원을 뽑아서 ‘사장님’이란 말을 듣는 게 처음으로 애인으로부터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충격적인 일이었다라는. (웃음)
소름이 쫙 끼치더라. (웃음)
가게를 영업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뭐였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음악을 하는 자체에서 뮤지션이란 자각이나 미련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당시가 음악을 한지 10년 이상 된 2006년이었는데 음악하는 게 너무 힘들고 지쳐서 가게를 차린 거다. 장사해야겠다. 돈이나 벌자.
그런데 이제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 영업을 그만하게 된 이유가 뭔가?
나로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작업이란 것에 미련이 없으니까 가게를 차렸던 것인데 이제 목숨 걸고 작업해야 되는 상황이니까 작업에 걸림돌이 되는 건 가차없어지는 거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나는 무조건 그걸 날렸어야 됐다. 나는 그 가게 때문에 작업이 방해 받는 걸 (손가락을 작게 벌리면서) 요만큼도 용납할 수 없다. 그 가게에 애정을 갖게 된 이발관 팬들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공간이 됐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이 세상에 작업보다 더 중요한 건 없기 때문에 그게 작업에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순간 무조건 날렸다.
가게 운영까지 포기하면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바로 다음 앨범을 마지막이 될 거라고 말하는 뮤지션의 심정은 대체 뭔가?
다음 앨범을 목숨 걸고 만들지만 그 앨범이 마지막이니까 그 다음의 노후대책을 위해서 지금 일단 장사를 계속해야 한다, 그럴 순 없지 않나. 그렇게 미래를 보면서 지금 작업에 올인할 순 없을 거 같다. 내일을 생각하면서 오늘에 올인할 수 없다. 무조건 사생결단하고 지금 이 작업을 어떻게든 잘 해내야지.
언니네이발관이란 밴드를 하게 된 것이나 집필 작업, 트레일러 제작까지, 어쩌면 이석원이란 사람의 오늘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서사는 우연에서 시작해서 필연으로 굳어진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그만큼 계획적인 인생에 대해 염두에 둘 것 같진 않다.
나는 너무 계획적인 사람이다. 매일 계획을 짠다. 다만 그 계획이 맨날 바뀐다. 그래서 지금의 계획을 짜는 거다. 오늘의 계획, 한 달의 계획, 일 년의 계획을 짜지.
긴 미래를 염두에 둔 계획을 세운 적은 없나?
사실 몇 십 년 뒤의 일까지 계획을 짠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지난 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비롯해서 3관왕을 수상했다. 작년에 한국대중음악상이 무산될 뻔한 위기도 있었는데 겨우내 시상식이 거행됐다. 어쩌면 그 사태가 한국음악신의 현실을 대변하는 사례가 아닐까. 인디밴드라는 정체성 안에서 이런 신의 어려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언니네 이발관은 1집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밴드보다도 유복한 환경에서 음악을 해왔다. 우리는 불평을 할 자격도 실감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씬의 어려움 같은 질문을 받을때면 사실 난감하다. 물론 언제나 일이천명을 놓고 콘서트를 하다가 괜객이 몇십명 들어차 있는 클럽으로 동료의 공연을 구경갈때면 아찔한 기분이 들때가 있다.
사실 인디밴드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열악한 느낌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것 같은 관성이 생긴다. 언니네 이발관도 인디밴드의 범주로서 이해되는 만큼 그런 선입견을 적용해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대부분 그렇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거다. 공연해도 페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다더라. 우리도 사실 그렇게 너무도 힘든 걸 아니까 주변에서 누가 음악한다고 못하게 한다. 나는 무대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누가 말릴 정도로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인데, 왜 그러냐 하면 진짜 너무 감사하거든. 음악한지 15년이 됐고, 대한민국에 밴드가 수천 팀이 되는데 왜 이 많은 돈을 주면서 우리를 아직도 헤드라이너로 세워주는지, 그게 너무 신기하고 고맙다. 그런 처지에 있는 우리가 대한민국 음악에 어떤 문제가 있고, 너무 힘들고, 이럴 수가 없는 거잖아.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건 그거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999개의 팀은 너무나 고생할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음악한다 하면 못하게 말리면서도 우리도 피해자란 식으로 대한민국 음악계의 문제가 뭐니 이런 생각을 해볼 일이 별로 없었다는 거다.
신의 열악함을 경험적으로 느낀 바가 없으니까 그걸 대변할 입장이 안 된다는 말이겠지.
그렇지. 지금 전속 엔지니어를 데리고 다니는 밴드는 메이저 통틀어서도 몇 팀 안 된다. 외국 페스티벌 할 때도 그렇고, 펜타포트 2006년 때도 그랬다. 국내밴드들은 사운드 개판이거든. 그런데 외국밴드들이 나오면 좋다. 왜냐하면 전속엔지니어들이 와서 전날부터 리허설하니까. 그때 내가 그걸 보면서 생각한 게 ‘씨발, 아니, 우리는 왜 전속 엔지니어를 쓰지 못할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지. 돈이 엄청나게 들거든. 심지어 이번 지산 락 밸리 때는 내 전용 모니터 스피커까지 가져갔다. 돈이 많이 들지만 그만한 여력이 되면 돈을 아끼지 말고 때려 붓자는 거다. 그렇게 해서 우리 수입이 줄더라도 결국 최고의 퀄리티를 지닌 사운드를 내는 게 중요하니까. 물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간 공연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작만큼이나 그 이후의 행보도 일반적인 케이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전형적인 인디밴드의 바로미터나 샘플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이렇다고 해서 대체로 그럴 것이다라는 것도 말이 안되고.
사실 첫 앨범이 백만 장 넘게 팔릴 거란 생각을 했으니 애초에 언니네이발관을 인디가 아닌 메인스트림으로 생각하고 신에 접근했나 보다.
정확하다. 인디에 관심 없었다. 그냥 우린 무조건 상식적으로 판 많이 팔고, 예쁜 여자 사귀고, 부모님한테 인정받고, 이거였지. 근데 갑자기 인디밴드라면서 몇 만장 팔리고 땡이니까 완전 혼란스러웠다. 이게 뭐야 싶었지. 그러다 일평생 인디가 돼버렸다. (웃음)
결국 의도와 다른 삶을 살아왔던 것처럼 그 안에서도 의도와 다른 결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경험을 겪다 보면 차라리 무언가 기대를 하거나 특별한 예측을 한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을 느낄 때가 생기지 않나?
그건 아니지. 왜냐면 나는 어차피 우연히 좋은 일이 많이 생긴 놈이니까 그냥 가만히 있자, 이럴 수는 없잖아. 남들은 할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팔자를 갖고 있다 해도 그게 나한테 왔을 때엔 분명한 계획이 필요하다. 책도 그렇다. 내가 책을 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막상 내게 된다고 했을 때는 계획적으로 간다. 트레일러 작업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어서 지산 락 밸리에서의 그 하루를 준비할 때도 얼마나 계획적이었냐 하면 집에서 눈뜨면서부터 공연장으로 출발하기 전까지의 시간들을 분 단위, 시간 단위로 일일이 다 적고 그대로 체크해 나간다. 몇 시에 운동하고, 몇 시에 씻고, 옷은 뭐를 입고 나가고, 준비해야 할 건 뭐고, 피크는 몇 개를 챙겨서 어느 가방에 넣고,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절대 빠뜨리는 것 없게 완벽히 준비해서 회사로 가고, 회사 차를 타고 공연장까지 가서 리허설은 몇 시니까 그때까진 무엇을 하고 몇 분을 쉬고 몇 시에 밥을 먹을지, 이런 것까지 명확하게 있어야 한다. 그런 계획이 회사랑 공유돼서 이석원 씨는 몇 시에 밥을 먹어야 된다, 물은 몇 분마다 갈아줘야 된다, 이렇게 매뉴얼화되면 기계처럼 움직인다. 그럴 정도로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간다.
말 그대로 완벽주의자다.
내 입으로 말하긴 남세스럽지만 좀 심하게 그렇다.
그게 때때로 스트레스가 되진 않나?
지금은 괜찮다. 완벽하게 가니까. 전속 엔지니어가 없을 때는 공연할 때마다 지옥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완벽하게 준비해도 개판인 엔지니어를 만나면 우리 소리가 나올 수 없거든. 예를 들어서 투 기타로 가는데 내 기타 소리밖에 안 나온다면 그 노래는 병신 되는 거다. 사실 그건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어떤가. 이발관 역시 병신이구나, 이거지. (웃음) 라이브라는 게 그렇다. 그래서 음악하는 게 내게 고통이었다. 내 의지와 능력으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엔지니어를 둘이나 데리고 다닌다. 모니터 엔지니어를 전속 엔지니어로 박아 놓고, 완벽한 내 소리를 얻기 위해 무대에 내 전용 장비로 싹 갈아버린다. 그리고 바깥 하우스에선 우리 엔지니어가 가서 다 컨트롤한다. 여기서 밸런스 이렇게 잡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다 완벽하게 가면 하는 나도 완벽할 수 밖에 없고, 듣는 사람들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만큼 완벽한 환경이 꾸려질 때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음악이 힘든 건 완벽할 수 없는 작업이니까. 특히 앨범을 만드는 작업은.
사실 5집이 3만 장이나 팔렸다는 사실은 최근 국내 음반소비 추세로 봤을 땐 상당한 성과다.
많이 팔렸다고 봐야지.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음반 판매의 절대량이 급감했기 때문에 더더욱 눈에 띄는 결과가 아닐까 싶다.
거의 망했다고 봐야지.
결과적으로 뮤지션의 음악을 소비하는 절대량이 그만큼 낮아졌다는 건 당사자로서 좋은 일은 아니지 않나. 특히나 고액의 제작비를 들여서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 입장에서는 더욱 힘 빠지는 일이 아닐까.
정말 우리가 환경적으로 좋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 텐데 사실 우리 환경이 나쁜 게 아니니까. 앨범도 절대적 판매량은 적지만 상대적으론 많이 팔았고, 특히 공연에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우린 상당히 풍족한 편이다.
하지만 좀 더 좋은 환경이라면 그만큼 보다 여유롭게 음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성격적으로 환경 탓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컨텐츠가 좋으면 어떤 식으로든 대중이 소비해준다는 믿음이 있다.
언니네 이발관이란 이름으로 5장의 앨범을 냈다. 만약 다음 앨범이 본인의 말대로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봐야 하나?
더 이상 좋은 곡이 나오지 않게 되면 앨범은 못 내겠지. 하지만 공연은 할 수 있다. 다만 더 이상 노래마저 할 수 없게 될 때 공연도 못 하겠지. 내가 음악을 못하게 되는 건 그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지산에서 보니까 ‘페티 스미스’도 그렇고, 김창완 씨도 그 나이에 정력적인 라이브를 하시지 않나. 빌리 조엘을 봐도 그렇고. 그러니까 이런 거다. 작곡가로서의 정점은 젊은 날에 치지만 라이브는 정말 늙어서까지 할 수 있다. 그런 생명력이 있는 가수가 돼야지.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을 거 같다. 우리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우리는 정말 과분할 정도로 밀어준다. 우리가 공연을 많이 하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올 수 없다. 그걸 보면 사람들이 언니네 이발관을 정말 많이 아껴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더 이상 좋은 앨범이 나오지 않는 것과 음악 생활이 접힌다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혹시나 마지막 앨범이란 발언이 음악적 은퇴를 의미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 놈의 마지막 앨범 이슈를 사람들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더라. 그래서 확실한 결론으로 말하자면 마지막 앨범으로 만들겠습니다, 라는 각오 정도로 정리가 됐으면 좋겠다. (웃음) 사람들이 너무 민감하게 나한테 뭐라고 해서.
팬으로선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발언이겠지. 마지막 앨범이라니.
짜증나지. 자기가 좋아하는데 그만 두겠다고 설레발이나 치고 이러니까. (웃음) 그런데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소니 EX1, EX3로 트레일러를 제작했다. 이제 영화를 디지털로 찍게 되면서 예전보다 손쉽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적인 레코드 방식에서 벗어나 신디사이저나 오토튠 같은 전자기기를 동원하고 샘플링 음원만으로도 음악을 만든다. 아무래도 문화적인 형태가 달라진 시대다. 글도 펜이 아닌 컴퓨터로 자판을 쳐서 입력한다. 어쩌면 언니네 이발관도 15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왔지만 어쨌든 언니네 이발관은 유지됐다. 그런 일관성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로 해석되는 바가 있나?
매 순간 무대에 오를 때마다 생각한다. 그건 감사와 행운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거 같다. 정말 신기하다. 그리고 너무 고마운 일이다. 방금 15년을 얘기했는데 정말 그 세월을 생각하게 된다. 15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내가 이 자리에 또 서있을 수 있을까. 이건 감사한 일이고 기적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무대에 올라가서 그냥 내 자신을 불태워버리는 게 내 일이다. 언제 다시 서게 될지 모르니까.
5집은 당신의 음악적 각오에 대한 전환점이 됐다. 운영하던 가게도 그만 두고 다음 앨범을 준비할 만큼 음악작업에 대한 비장함이 드러난다. 5집 앨범을 내기까지의 어려웠던 과정만큼 6집에서도 만만찮은 과정이 이어질 수 있다. 5집을 서사적 형태의 앨범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6집에 대한 막연한 기획이라도 잡히는 건 없나?
6집은 지금 전혀 제로 상태다. 아무 것도 없다.
트레일러도 만들었는데 영화 연출에 대한 관심은 없나? 설마 제의 받은 적은 없겠지?
(한참 생각하다가) 근래에 트레일러 작업하고 그런 제의가 있었다. 연출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아니고.
반쯤 농담처럼 물었는데 정말 제의가 있었다니 내가 되레 놀랐다. (웃음)
원래 내 인생이 좀 만화 같다. (웃음)
<이끼> 캐스팅은 어떻게 생각하나?
깜짝 놀랐다. 특히 이장. (웃음) 정재영 씨가 머리를 삭발했던데. 하지만 감독님이 믿음이 강하더라. 워낙 신뢰할만한 배우이기도 하고, 나 역시도 믿어야지.
만화가 아닌 영화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고 변주한 타인의 창작물을 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나 걱정이 있을 거 같다.
처음 영화를 계약했을 땐 어떤 분이 연출할지도 몰랐고 내 나름대로 상상만 해봤다. 배우는 누구, 감독님은 누구, 이렇게. 어쨌거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치를 벗어난 그 이상의 조합이 나왔다. 그래서 너무 기대가 커졌다. 일단 제일 기분 좋은 건 박해일 씨의 캐스팅이다.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에 박해일 씨를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정지우 감독님께 내가 박해일 씨 팬이고, 류해국의 역할모델이기도 했다고 하니까 소개시켜주더라. 그때는 그냥 조심스럽게 만났는데 나중에 캐스팅이 확정됐다고 하니까 속으로 ‘아싸!’했지. (웃음)
류해국이 박해일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실제로도 박해일 씨를 모델로 류해국을 만들었다는 게 재미있다.
<연애의 목적>에 헐렁한 양복을 입고 나오는 게 좋더라. 왜냐면 뭔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사람은 와이셔츠나 벨트, 바지, 이 이음새가 맞지 않아도 막 입고 다니잖아. 양복 뒷주머니도 일간지가 아닌 벼룩시장 같은 거나 넣고 다니고. (웃음)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은 겉모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연애의 목적>에 나온 박해일 씨를 많이 응용했다. 항상 뭔가에 찌들어있고, 지쳐있는 모습. 그리고 특유의 애매모호하고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도 탐나더라. 계속 그 모습을 머리에 넣고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영화에 관여하는 건 없나?
전혀. 어쨌거나 연재가 완료되기 전에 계약이 된 상황이라 계속 회의는 해나가야 했다. 정지우 감독님도 계속 물어보시고. “그러니까 이영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웃음) 그런데 그림으로 표현해온 사람이 말로 설명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또 그게 말로서 내 입으로 나오면 내가 그 말을 들어도 재미없다. 어떻게 이 분을 감동시킬까 고민이 되니까 설명도 잘 안되고. 완결되고 난 지금은 여러 문제로부터 후련해졌다. 만화로서는 일단 여기까지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고 시나리오도 변형을 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폼이 생긴 거니까 그 분들도 편해졌고. 사실 5월 말에 연재를 끝내려고 했는데 8회 분량이 연장돼서 그 분들도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걸.
8회는 왜 연장됐나?
원래 기도원 이야기가 그렇게 길게 갈 분량이 아니었다. 하다 보니까 거기서 재미를 느꼈고 분량이 늘어난 거지. 뒤에 수습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몇 회를 더 해버리니까 결말부까지 길어져 버렸다. 아직도 내 생각엔 3회 정도는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미디어 다음(Daum)’측 사정도 있고 해서 거기서 마무리 지었다.
지금의 결말부도 불충분했다고 느끼나?
조금은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예정된 템포대로 진행했다면 그 동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무리가 없었는데 그걸 한 회에 몰아가다 보니까 급해진 바가 있었다. 그래서 아쉽다.
<이끼>에서 정치적 메타포를 읽어내고 그런 해석을 반영한 댓글이 많더라. 실상 그렇게 읽히는 장면도 적지 않다. 처음 잡았던 기본적 설정과 무관하게 연재 과정에서 관찰하거나 목격한 외부적 사건에 영향을 받아서 극적으로 수정이 가미된 요소는 없었나?
애초에 <이끼>는 노무현 정권 때 기획됐다. 애초에 현정치상황이 <이끼>에 반영된 건 없었던 거다. 작은 권력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작은 권력에 빈정 상한 사람의 싸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인공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갑자기 거대 담론이 돼버렸다. 창작물은 사실 생물과 같다. 대사 몇 마디만으로도 이야기가 확장되니까. 결국 애초에 내 머리 속에 구성돼 있던 것들이 너무 시시해져 버린 거다. 덕분에 뉘앙스가 수정된 부분이 있다. 그걸 제외한 나머지는 내 예정대로 갔다고 본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자라난 분량도 생겼으니 그 이후로의 진행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원래 계획했던 결말의 형태가 변하진 않던가.
원래 결말까지 이야기를 다 짜놓고 들어갔다. 그런데 방금 말한 것처럼 이야기가 자라나버린다. 그게 내가 간과한 문제였건, 단순한 실수였건, 독자들은 그걸 믿고 간다. 그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쓴 대사나 어떤 행위에 대한 묘사라 해도 독자들이 이건 그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면 일단 그 생각은 정당한 거니까 그것들에 대해선 내가 책임져 줘야 한다. 그런데 내용상 이런 문제가 자꾸 생기니까 애초에 내가 잡았던 것만큼 갈 수 없게 됐다. 크게 봐서는 결과적으로 애초에 내가 잡았던 대로 가야 했던 거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기도원에서 류해국 아버지가 갑자기 도인 같은 말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관념 자체가 확 팽창돼버렸다. 결국 내가 애초에 잡았던 설정들이 시시해져 버린 상황이 된 거다.
애초에 잡았던 결말과 지금의 결말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결말부분은 사실 비극적으로 끝내려고 했다. 류해국 같은 주인공이 자기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애초에 자기 생각과 습관을 다시 끌어와서 이 사건을 만든 거니까. 거기에 대해서 처단해버리고 싶었다. 네가 네 스스로 싫다고 느껴서 버리려던 성격이라면 네 성장을 위해서 완전히 버렸어야 했는데 왜 다시 그걸 또 쥐어 잡았냐고, 그런 생각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그에 대해서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지금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의 가치가 소중한 거 아니냐고. 사소한 정의라도 그걸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나는 사회보단 개인 우선으로 관점을 두고 생각해 왔다.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작품 밑에 달리는 댓글 같은 걸로 인해서 어떤 사회성을 발견돼버리는 거다. 그래서 결말부에서 류해국이 이기는 쪽으로 색채가 달라져 버렸다. 대신 류해국의 방법으로 이기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검사한테 손을 뻗고, 검사도 이를 인정하고, 자기가 잘못했다고도 하고, 이런 식으로 류해국을 조금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남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융화형 인간으로 그리게 됐다. 검사도 유들유들한 타협적인 인간에서 주인공처럼 선이 분명해진 인간으로 변했다. 원래는 주인공의 파멸이야기였다가 한 40화 즈음부터 생각이 바뀌게 된 거다.
그런 생각의 전환을 이끈 주변 사람이 궁금하다.
<이끼> 40회 즈음에 영화판권 계약을 했고 그 후에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로 한) 정지우 감독님을 만났다. 정 감독님이 내 원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40분 정도 들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솔직히 윤 작가 생각에 동의가 안 돼요. 나는 내가 바로 류해국 같은 사람이라 믿는데 내가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내가 그렇게 죽일 놈인지, 고민에 빠지네요.” (웃음) 계속 “류해국이 뭘 잘못했나요?”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다. 그러다 보니까 나도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사실 나는 검사한테 조금 더 점수를 준다고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박검사는 지방으로 좌천됐거나 말거나 어차피 사회의 주류에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시더라. 결국 왜 박검사가 승자가 되고 류해국이 패자가 되냐는 물음이었지.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파멸로 가는 건 아니란 생각이 굳어지더라. 검사한테 갈 역할이 류해국한테 와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최종적으로 끝이라고 도장 찍는 역할은 역시 주인공인 류해국에게 맡겨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말씀하시길, “류해국 같은 사람의 가치관은 지금 시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가치관인데 이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건 어떠한 명분도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 너무 아깝잖아요.”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
원래 스토리 안에서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거였나?
류해국을 포함해서 다 죽고 이영지만 살아남는 거였다. 사실 직접 그리기 시작하면서 콘티를 짜기 전까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생각만 그렇게 할 뿐이지. 그래서 마지막 버전도 한 스무 개 정도 나왔었다. 영화사마다 아직 연재 중인 만화니까 계약하기 전에 결말을 알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 영화사에 한번 써주게 되지만 사실 그건 또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영화사엔 또 다른 버전을 써주고, 이러니까 영화사마다 각자 본 버전이 다 다른 거다. 정 감독님한테 얘기할 때도 이건 확정적인 건 아니고 나도 솔직히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듀나(DJUNA)’라고 하나? 그 사이트 게시판에 한번 “작가도 <이끼> 결말을 모른답니다. 큰일입니다. 여러분.” 이런 글이 있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항상 그렇게 작업을 해왔다. 시작점과 끝점은 있는데 인물 위주로 가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설계는 없는 거다. 그런데 <이끼>를 하면서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지. 사건 위주로도 정해놓고 프리(프로덕션)를 해야 된다는 걸 알았다.
<야후>와 함께 <이끼>를 비롯해서 최근 연재했던 <그는 거기에 없었다>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건의 뇌관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부자관계가 작품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관념이 작품에 반영되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건달 생활 비슷한 걸 하셔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야반도주 같은 것도 많이 하고, 자꾸 신변이 위험해지고 이러다 보니까 그런 게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싫어졌는데 점차 이 사회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가부장적인 태도에서 시작되고 확장되는 거 같더라. 처음엔 단지 내 아버지를 극복하고 싶어서 ‘아버지 일기’라는 것도 써보고 그랬는데 인식이 좀 더 확장되고 깊어지다 보니까 그냥 우리나라 사회가 그렇다고 느껴지더라. 정치인들은 여성들도 굉장한 마초 근성을 갖고 남성화돼서 움직이잖아. 이런 게 진짜 혐오스럽더라. 난 아직도 아내를 부를 때 ‘누구 씨’라고 부른다. ‘누구 엄마’ 이러는 것도 싫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나 남자야’라고 뻐기는 것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야후>를 봐도 남자라고 폼 잡고 나오는 애들은 진짜 남자같이 나온다. 아주 권위적으로 여자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그런 사회에 대한 의식이나 분노가 굉장히 많은 거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이랄까.
세대간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묘사되는 작품이란 생각도 든다. 특히 요즘은 세대간 갈등이 경제적 문제로서 크게 두드러지는 시대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결국 세대간의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니까. 류해국은 기성 세대와 대립하는 젊은 세대로 치환해도 좋은 인물이다. 결국 그 적의를 사회적 행위로서 내보이고 이를 통해 자기 부정적 파멸마저 도모한다. <야후>도 사실 그런 세대적 적의에서 비롯된 자기 파멸적 이야기다. 원래 계획했던 <이끼>의 결말을 듣고 보니 <이끼>도 <야후>와 비슷한 비극적 파국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 볼 수 있었겠다. 다만 두 작품이 결말에서 극명한 차이를 두게 된 건 외부에서 얻은 영향력이 그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작품의 변화가 스스로의 생각 자체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맞다. 이제 지는 걸 이야기하긴 싫어졌다. 어떻게 보면 파멸을 그리고 싶다는 건 사소한 동기일 뿐이다. 내겐 엇나가고 싶어하는 정서가 굉장히 많거든.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네 만화 정말 재미있어.” 그럴 수록 막 엇나가고 싶어진다. (웃음) 정말 마이너한 정서지. 액면으로 느껴질 만한 선의의 칭찬이나 호의를 받지 못하고 자랐던 사람이라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찰흙으로 잘 빚어놓고서 ‘에이, 이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란 식으로 막 뭉개버리는 애들 같은 마음이랄까.
스스로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역시 정지우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그게 너무 사소한 태도라는 걸 느꼈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지해줄 때 욕심을 내서 더 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촛불집회만 봐도 과거와 (시위가) 형태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나. 과거 386세대들이 변절해가는 과정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과거를 또 비난하고, 적의를 갖고, 그런 건 너무 비참한 삶이 아닌가. 그래서 한번이라도 그 안에서 승리를 해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스스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자 싶더라. 비록 그게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나도 그런 식으로 많이 바뀌었으니까. 나 스스로도 분명한 선을 갖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애도 둘이나 낳았고. 이제 지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더라. 내가 포기하는 싸움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멈추지 않은 이상 지는 싸움이란 건 없는 거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추모만화에 <불의>라는 작품으로 참여했는데 이게 그냥 추모만화로 끝나는 게 아니었으면 했다. 불은 저절로 또 생겨나겠지만 불 끄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다. 최근 2년 사이에 그런 열망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개입됐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야후>는 여전히 당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사실 <야후>는 <이끼>보다 직설적으로 정치적인 함의를 두르고 메타포적 이미지를 적시한 작품이다.
<야후>에 나왔던 사건사고들은 지방에 살던 내가 서울에 올라온 당시,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기에 진짜 황당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TV를 보니까 마치 컴퓨터그래픽처럼 다리 중간이 내려앉아 있고,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마치 기네스북에 올라가는 토픽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처럼 치부해버린다 할까.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당시엔 며칠 만에 사람들이 구조됐네, 이런 뉴스를 보고 세상이 정말 원색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관심사를 만화로 그렸던 거다. 사실 난 사회발언적인 인간이기도 하고.
그런 관심사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별자리를 공부하면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 한 명에게도 구조라는 게 있지 않나. 사회와 그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있고. 결국 드라마라는 게 사람 이야기고,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나 권력 관계가 나타나고, 종교도 들어가고, 모든 게 다 들어가겠구나 싶어졌다. 꼭 기독교나 천주교 같은 특정종교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어떤 영역에 마음을 담아두고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도 다 종교적 의도가 되겠구나 싶어졌다. 물론 절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던 부분이다. 내게 별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도 다 목사님 같은 사람들이었고 덕분에 별자리 배우면서 성경도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니까 자연스럽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겹쳐졌다. 인물을 우물처럼 깊게 보는 관점도 생겼다. 결국 <이끼>할 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받았다. 솔직히 <이끼>가 <야후>보단 관념적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잘 잡아서 들어간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야후>보단 <이끼>에 대한 만족도가 더욱 큰 건가?
원래 <야후>에서 주인공을 과격한 테러리스트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첫 아이가 생기면서 그렇게까지 갈 필요가 있나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까 뒤로 가면서 해프닝 위주의 사건들이 채워졌고, 결국 그렇게 하고 나니까 절반밖에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끼>에서는 뭐건 간에 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내가 원했던 밀도까진 들어가봤다는 느낌이 남더라. 지금까지 내가 한 작품 중에서는 가장 잘한 게 아닌가 싶다.
밀도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류해국이 이장 집에 찾아가기 전에 했던 대사가 기억난다. “오늘 밤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밀도로 채워져 있다.” <이끼>는 대사량이 적은 만화가 아니다. 동원되는 대사의 표현방식이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덕분에 해석의 욕구를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고. 그림만큼이나 언어를 동원하는 방식에서도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문장에 예민한 편이라서 그런 바가 없지 않았다. 스토리를 쓸 때 종이를 한 장 옆에 두고 대사를 반복해서 써봤다. 일단 직접적이라 느껴지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았지. 그 다음에 표현이 많이 부풀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쓰지 않았다. 최대한 쉬운 문장이면서도 읽어봤을 때 적재적소에 쓰인 것 같아서 그 자체로 괜찮다는 느낌이 좋더라. 평이하지만 날 선 느낌? 그래서 대사는 반복해서 써보고 판단했다. 가장 훌륭한 대사는 폼 잡거나 많이 부풀려진 대사가 아니라 그 상황을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대사니까. 주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그런 대사가 있지.
대사량이 적지 않은 작품이지만 대사를 아끼는 경우도 많다. 함축적이라 이해되는 대사도 많고.
<야후>마지막 권에서 주인공과 신무학이 죽기 직전 “잘 가라.” 할 때, ‘아, 이런 맛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송지나 작가가 <모래시계>에서 “나 떨고 있니?” 이 대사를 쓰기 위해 7일 간 고민했다는 것처럼 나도 그 대사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거든. 가장 쉽게 의미를 응축시키면서도 얘네 나이에서 할 수 있는 대사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죽기도 바쁜 애들이 무슨 대사를 질질 끌면서 하겠냐 싶더라. 그래서 결국 “잘 가라.” 한마디로 가게 됐는데 그때 내 스스로 느낀 거지. 대사는 각 잡을수록 후지게 나오는 구나. 대사의 선이 분명해버리면 그 내용에 대해서 책임져줘야 하는 상황이 자꾸 발생한다. 여러 해석이 나올만한 대사를 쓸 수 밖에 없는 건 그래서다. 내적으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사회 비판적인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기 어려운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런 주인공이 마치 식자층 같은 대사를 쳐대거나 사회적 발언을 해버리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의도가 보이게 되는 거다. 그래서 그런 대사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옆집 사는 아저씨가 자신이 그렇게 느껴서 하는 말 정도 수준의 대사가 필요했다.
캐릭터의 지적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될만한 대사는 최대한 배제했다는 건가?
맞다. 무엇보다도 <이끼>는 분명히 그림은 보이지만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관념적 만화라서 묘사에 집중하려 했다. <이끼>를 하면서 어떤 분명한 걸 지적하듯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나 역시도 그만큼 불분명했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선이 뚜렷한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진 못하겠더라. 각자 처지에 맞는 이야기에 집중하자 싶었다.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을 보고 <살인의 추억>이 연상됐다. 인간적이라 이해되는 지방성의 이면에 감춰진 잠재적 폭력성이라던가, 소박한 환경 내에 깊게 뿌리 내린 부조리한 심리가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압축판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더라. 무엇보다도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은 그 자체로 작품에서 중요한 미장센이다. 그런 마을을 상상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는 차량의 주행속도를 10km/h정도 높이기 위해 곡선을 최대로 줄이는 형태로 완성됐다. 그만큼 굉장히 폭력적으로 건설됐지. 한번 그 도로를 타고 고향집을 갔다가 올라오는데 어떤 터널에서 나오니까 소음 방지벽 너머에 가둬진 작은 마을이 보이더라. 돈을 몇 푼이나 받았을지 몰라도 저 마을 사람들은 정말 어이없었겠지. 도로 아래 교각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었는데 낯선 사람은 저 마을에 들어갈 수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가까운 동네 사는 사람조차도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갈 마음도 들지 않는 마을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저런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들도 인상 자체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캐릭터의 모티브는 어디서 시작됐나?
그 공간에 대한 호기심 이후로 사연이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보자는 전제가 뒤따랐다. 종종 시골 사람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서울에 계속 살다 시골에 내려가서 살다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정말 무서웠거든. 시골에 살면서 보면 가끔 시골에서 막걸리 같은 거 마시고 그러다가 난동 부리는 사람이 있다. 낫도 흉기가 되는 물건인데 눈 한번 돌아버린 사람 주변에 그런 게 놓여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농사를 짓고 힘을 쓰다 보니까 체격도 좋은데 저 사람이 순박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을 정도지. 그래서 우락부락하면서도 순박해 보이지만 눈 한번 핑 나가면 살벌해 보일 수 있는 느낌의 캐릭터들을 만들려고 했다. 이장 같은 경우, 딱 봤을 때부터 재수없어 보일 만큼 혐오스런 선입견을 주는 이미지를 모아 놓은 거다. 대머리에, 광대뼈에, 음흉한 큰 눈까지. 주인공인 류해국은 척 봐도 이질감이 느껴지게끔 훌쭉한 느낌을 줬고.
한 마을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고 그런 관계에 잠재된 은밀한 사연과 그 사연의 발굴을 통한 갈등과 충돌이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만큼 캐릭터의 내외를 디자인하는 과정도 중요했을 거다.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도 존재하겠지만 주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진 않았을까.
사실 모델은 거의 없었다. 단지 인물마다 하나씩 죄를 집어넣었던 거다. 백지 상태의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얘는 무슨 죄, 얘는 무슨 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이입했다. 이장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 원죄, 그리고 전석만은 어린 아이를 죽이고 할머니도 죽게끔 한 죄, 그리고 그 외에도 인간의 몸뚱이로 장사하며 이를 통해 그 누군가를 죽인 죄, 간접 살인을 한 죄, 이런 식으로 죄를 부여해놓고 그 죄를 부각시킬 수 있는 성격들을 접목시킨 거다. 살다 보니 죄를 짓게 됐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성격을 만든 다음에 죄를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트라우마를 캐릭터를 이해하는 힌트로 적용시킨 거다. 인물 파일을 만들 때 본래 타고난 이 사람의 성격을 먼저 설정한 뒤, 그 사람의 서사를 만들게 된 거다.
마을에 모인 인물들이 가지라면 이장은 뿌리와 같은 존재다. 아무래도 이장은 다른 캐릭터보다도 극적인 분위기를 이끄는 핵심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존재를 구상하는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그런 사람 많지 않나? 특히 사회 생활하다 보면 사람들의 생각을 점유하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다. 2~30명 정도의 인원이 화실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수의 시선이 관성적으로 몰리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더라. 만약 그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틀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순간, 이제 이장 같은 사람이 되겠지. 그런 흔한 성격을 극대화시킨 거다. 사실 류해국 아버지 같은 사람도 흔하다. 예전에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봐왔는데, 작은 교회에 가보면 마치 절대자인 양 행사하는 목사가 많다. 목사가 없으면 전도사가 그 역할을 하고 앉았다. 권사만 해도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많다. 똑같은 시골 촌부인데 권사네, 장로네, 이런 이유만으로 어른입네, 행세하는 사람이 많다. 정식으로 교단에서 인증된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고 그로부터 추출해온 성격을 약간만 세게 변형시켜버리면 <이끼>같은 집합이 생긴다.
마을은 죄의식의 연대로서 은둔하는 장소다. 그 공간의 성격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사람이 독립적인 거 같지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의존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감춰야 될 것이 많거나 상처가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란다. 자신의 죄의식을 일정부분이나마 노골적으로 감싸주는 방어막이나 울타리 같은 존재를 항상 염원한다. 예를 들어 집단 섹스를 해도 서로 용인될 수 있는 관계? 그렇게 죄의식을 공유해주는 사람이 너무 고마운 거지. 그래서 결국 그 마을에서 나오기 싫어지는 거고. 예를 들어서 기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도 다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인데 왜 집까지 팔아서 그 돈을 교회에 다 갖다 주고 그랬을까. 그건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절대적인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위로를 얻고, 보호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뿐이지. 어떻게 보면 스스로 악마를 키우는 거다.
<이끼>에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 많다. 특히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로서 호감을 끌어내기 보단 지나친 자기 아집과 오기로 뭉친 인간으로 인식되어 호감을 증발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반에 보면 류해국 보고 ‘얘 뭐냐, 진상이냐, 이 새끼 뭐냐. 진상이다. 짜증난다’ 이렇게 욕하는 댓글도 많다. (웃음) 나도 공감한다. <야후>할 때도 선배들이 그랬다. “야, 걔가 주인공 맞아? 걔 너무 찌질해!” (웃음) 내가 그런 모호한 정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인물의 정서에 동의를 해주고 싶다가도 그런 인물이 막 싫어지기도 해서 그걸 그대로 표현에 옮긴다. 어쩌면 내가 나를 좀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끼>의 이장은 단순히 악인이라 말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다. 현실적인 윤리 안에서 분명 악으로 규정될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인물만의 명확한 합리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부조리 자체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처럼 작품 내에서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겪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 내가 작은 세계에서도 상처받고 사는 편협한 인간이다 보니까 자신을 합리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 방어기제가 잘 발달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부럽다. 류해국 아버지를 보면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고, 이장은 형이하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다. 이 둘의 충돌을 그리고 싶어졌다. 자살에 있어서도 주인공 아버지는 스스로 숨을 멎게 해서 죽지 않나. 인간으로서 정말 할 수 없는, 자율신경까지 점해버린 사람이다. 결국 그 극단적인 죽음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거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박탈감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장이 그 마을의 절대적 메시아라면 마을 사람은 그에게 고해를 받고 구원을 얻은 존재다.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쫓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마을의 암묵적 합의를 파괴하는 침입자다. 어떤 식으로든 유기적으로 순환하던 마을의 생리를 훼손하는 바이러스이거나 박테리아 같은 존재로 마을사람에게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믿음 자체를 통해 평온한 연대적 삶을 이루던 집단의 질서를 흔들어버리는 이물질 같은 존재랄까. 그래서 한편으로 <이끼>가 종교적 믿음의 형태에 대한 도발을 던지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아, 정말?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사실 내가 어릴 때 나름대로 교회를 진지하게 다녔다. 그래서 <이끼>의 기도원 신을 그리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에 시달렸던 거 같다. 특히 맨 마지막 회 작업할 때, 잠을 자면서 꿈을 꿨는데 예전에 같이 교회 다녔던 선배 형이 군화에 교련복 상의, 군복바지를 입고 기도원 샤워실로 나를 끌고 가더니 나를 두들겨 패더라. 그래서 4시간 자고 일어나서 잠을 확 깨버린 거죠. 덕분에 안 그래도 <이끼>마지막화 분량이 많았는데 잠까지 설친 상태에서 작업을 하게 됐다. 그래서 사실 도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종교적인 죄의식이 있었다는 걸 느끼고 뒤늦게 그게 도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내가 하나님, 예수님, 이런 용어는 절대 쓰지 않고 절대자, 신, 이런 단어만 썼던 것도 다 그걸 피해가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다.
어떤 특정종교에 국한돼서 해석되는 건 위험했을 거다.
그런 식으로 한정되게 이해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절대자에 대해 탐닉하는 사람으로 설정했던 거지.
믿음은 그 자체로서 신성하고 숭고하지만 그 행위적 목적은 때로 불순하고 도피적이다. 예를 들어 <밀양>에서 전도연 씨가 연기한 캐릭터가 자신의 아들을 납치해 죽인 살인범을 면회 갔을 때 자신은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그에게 전도연 씨가 대사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이 널 용서하냐.” 개인적인 신앙은 때때로 공공적인 윤리를 무력화시킨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앙을 이용한다. 결국 이장에 대한 신앙적 믿음에 의지하는 마을 사람들은 현실적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 마을이라는 도피처에서 살아간다. 결국 류해국은 그런 도피를 통해 평온을 누리는 마을 사람들의 죄의식을 다시 출렁이게 만드는 존재다.
헤집어버린 거지. 다시 원래대로 세팅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제 곤란해지고.
어떻게 보면 류해국은 현실에서 도피해버린 인간들의 나약한 양심을 뒤집어 끌어냄으로써 그 실체를 각인시키고 스스로 그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되레 자신의 부조리한 정서마저 극복하게 되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달아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전대통령이 각각 5년 동안 정권을 잡았지만 그 동안에 정권을 빼앗긴 세력들이 항시 정권을 잡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사람들은 지금 야당인데 전혀 야당같지도 않고, 우리 사회의 주류는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고 있고, 오히려 정권을 잡은 쪽이 계속 힘들어하고, 이제 다시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니까 언제 우리가 뺏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원래 잡아왔던 사람들처럼 쉽게 안착하고. 이 사람들은 어쩌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자격도 없는 것들이 이 자리에 들어와서 자기네 룰을 헤집어 놓는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 처가 쪽 집안이 좀 잘 산다. 그런데 처가 쪽 친척들과 모여서 밥을 먹는데 그때 한참 촛불집회하고 그럴 시기였다. 처가 쪽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작은 아버님 한 분께서 그때 노무현 전대통령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새끼가 어디 대통령이나 했다고 저 따위로 하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숙모님이 추임새를 넣었다. “왜들 저래. 지금 대통령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응원은 못할망정 촛불집회나 하고 있어.” 그 양반들은 노무현 전대통령 당선됐을 때부터 욕을 하셨던 분들이다. 그런데 왜 이명박 대통령은 응원해야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더라. 나에게 한나라당 입당 원서까지 주셨던 분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은 병균 보듯이 하고, 마치 급이 다른 녀석이 어디 와서 까불고 있냐는 식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발언을 던지고. 그 때가 <이끼>를 ‘미디어 다음’에 연재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그래서 스토리를 쓸 때, 조직과 개인에 대한 폭력적인 관계에 대한 생각이 더 깊게 자리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힘으로 구축한 정의라고 할까.
정의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지들끼리의 룰이지. 그곳에 류해국이 들어가서 하나씩 툭툭 건들기 시작하니까 얘네들은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쁘고, 점차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이끼>에 달린 댓글을 보면 지난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와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에 걸친 많은 해석들이 대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보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궁금하다.
솔직히 그런 건 그 분들 마음이지. 작업할 때는 최대한 그런 외부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야 되는 거 같더라. 그리고 나는 무아의 경지에서 내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작업해야지 그 안에 어떤 의도를 담고자 하는 건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제나 의도가 분명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가진 기본적인 정체성은 내 작품이 보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렇게 정치적인 해석을 동원해서 댓글을 다는 건 그 사람들 마음이고 자유로운 권리다. 내 만화에서 그런 코드를 읽었다는 건 그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걸 내 만화를 통해서 본 것뿐이라 생각하니까. 그리고 내가 봐도 대단하다 싶은 해석들이 댓글로 달리는 건 어쩌면 내 작품에 그런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겠지. 나는 <이끼>나 <야후>가 우화 같은 풍자극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내러티브보단 인물에 관심이 많다. 어떤 반전을 넣어서 깜짝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기승전결의 감동보다는 이 인물을 따라가다가 혹하고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사건을 배치하는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정도로 야심 차게 머리를 돌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웃음)
류해국이 부정하려 하는 맞은 편의 인간들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류해국의 아버지나 이장이나, 사람의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메시아적 능력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결국 류해국의 아버지는 이장에게 눌리고 이장은 류해국의 손에 처단된다. 권력적 관계가 결과적으론 인간에게 얼마나 허망한 게임인지를 인식시키려는 대목아닌가. 권능에 가까운 위력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내던 인간일지라도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치졸하게 힘을 발휘해왔는지를 드러낼 때 그 내면에 놓인 인간의 존재 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다.
별자리 배우면서 들었던 말 중에, 제 인생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 라는 말이 가장 와 닿았다. 나에겐 훌륭한 변명거리지. 나는 박탈감이 많은 사람인데 그 인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니까. 예를 들어서 이건희나 이재용이나, 그 정도의 부를 획득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의미부여하지 말라는 거지. 결과적으로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 죽을 사람들이고. 물론 내가 추구하는 삶이 있고, 기왕에 사는 거라면 삶의 색채를 더 밝게 가져가는 게 맞겠지. 자기가 자기를 긁어가면서 사는 거보단 조금 무책임해 보일 정도로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게 낫겠더라. 처음에 류해국을 처단시키자고 결정했지만 나중에 류해국을 처단하지 않고 포지티브한 영역으로 끌어올리자고 마음 먹은 것도 그런 발전적 고민의 결과였던 거다.
그런데 그 별자리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나?
순정만화가 이황주 씨와 친했는데 그 분이 우연찮게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내게 소개해줬다. 그래서 김준범 씨와 같이 공부했지. 내 인생에서 굉장히 많은 전환점이 됐다고 할까?
별자리를 공부한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점지하는 것을 배우는 일인데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늘진 않았나?
나는 내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시작한 거라서 남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사실 대부분은 남에게 관심이 많더라.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한 사람들 대부분을 만나면 생일이 언제냐고 묻기도 하고 누군가에 대해 쉽게 단정하려 한다. 그건 상대에 대한 실례다.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보고 제 머릿속으로만 파악하는 거지. 그런데 상대방은 잘 모르잖아. 정보가 부딪히는 거지. 어떤 면에서 이건 폭력이다. 그래서 난 그런 게 싫다. 그 사람이 먼저 물어보기 전에는 그런 말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무엇을 깨닫게 됐나?
공부가 깊어지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명상이 없을 수 없다. 내가 이렇구나, 하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때도 많고, 탐욕스런 과거가 떠오르거나 낭비했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 흘러가기도 한다. 물론 그런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 과정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사람들과 오해를 일으키고 그런 오해를 쌓아둔 부분들에 대해서도 왜 그런 문제에 좀 더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까, 조금 더 쉽게 관계를 맺어나가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한 후회가 남는다.
스스로 대인 관계가 어려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얼마나 닫힌 성격이었냐 하면, 허영만 선생님 화실을 그만 두고 조운학 선생님 화실로 옮긴 다음에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도 그만 두고 나왔는데’ 막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화실에서 선생님들이 화투를 치면서 새벽마다 라면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그게 싫어서 한번 화투판을 엎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조운학 선생님한테 저 새끼 안 자르면 우리가 나가겠다고 집단으로 난리가 났지. 그렇게 극단적이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거다. 난 왜 그럴 때 부드럽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이끼>의 류해국이나 <야후>의 김현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측면이 강하다. 어쩌면 그런 캐릭터 성향은 본인 스스로의 생각이 반영된 측면이라 봐도 될 거 같다.
그럴 거다. 자기 반성적인 면은 그래서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결국 스스로가 반영된 캐릭터들을 죽였거나 죽이려 했던 셈이다. 그건 어쩌면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부정적 성격을 제거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런 캐릭터에게 반영된 게 아닐까.
음, 그렇다기 보단 나를 캐릭터에 투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나는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반영된 이 캐릭터들도 이 사회에선 안 되겠구나, 라는 식으로 접근된 거다. 결국 이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종자들이구나 싶었던 거지. 그러니 당연히 이 사회에서는 소멸이 돼야 맞는 거란 생각이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한쪽으로 굉장히 오만한 구석이 있다. 내 속에 오만한 탑이 하나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아래 나머지는 폐허 같은 정서가 채워진 거고. 지금은 또 다르지만 나에게 남을 굉장히 잘 깔보는 태도가 있는 반면, 한편으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편이다. 그런 성향이 캐릭터에 많이 투영되다 보니까 어차피 얘네들도 이 사회에 적응 못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회와 융화할 수 있는 타협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끼>는 결과적으로 <야후>에 비해 그런 정서를 덜어낼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그만큼 스스로도 변한 게 아닐까.
예전에 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데 사소하게 차끼리 시비가 붙었던 걸 보게 됐다. 서로 차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싸우면서 “야, 쳐봐, 쳐봐!” 이러면서 길 한가운데서 뒤엉키더라. 그 길 옆에 많은 차가 있는데도. 나는 남의 눈이 창피해서라도 그렇게 못하거든.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공격적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사는 구나 싶었다. 그게 내 눈엔 천박해 보이지 않는 거다. 나는 쪽팔려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한 때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깡이 놀랍더라. 아이 낳을 때도 그럴 수 있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소한 거라도 싸워서 쟁취하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도 꽤 했다. 그런데 나는 결코 그렇게 안 되더라.
<야후>의 김현이나 <이끼>의 류해국은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모종의 박탈감을 느낀다. 형태를 떠나 그 너비나 크기로서 중요한 존재감을 행사하던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때 인물들은 결핍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세상에 대한 분노나 다른 세계에 대한 공격성으로서 충만하려는 것만 같다.
사람이 그렇지 않나. 만약 내가 박탈됐다는 감정을 느끼게 할만큼의 실패나 상실을 맛보게 되면 그 반대영역에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분명히 생길 거다. 특히 내가 그런 게 굉장히 강한 편이니까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그런 게 강하게 있는 것이겠지. 이번에 <이끼>의 류해국도 원래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실패한 사람으로 설정하려 했다가 아까 말한 것처럼 바꾸게 된 거고. 나 역시도 그런 과정을 통해 변해간다. 엄한 데서 보상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 안에서 싸워야 한다. 상실감이 있으면 싸워서 얻어내든가, 아니면 깨끗하게 포기하든가. 지금 정권에 대한 박탈감을 지녔다 해도 다음 투표 때 두고 보자, 이럴 수 있다면 이건 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상실감을 엄한 데서 채우거나 회피하지 말자는 거지. ‘세상 이렇게 됐으니 나도 모르겠다. 투표고 뭐고 그냥 여행이나 다니자.’ 이러지 말자는 거다. 자기가 뭔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구석에서 그걸 다시 챙기고 뚜렷하게 싸워야 한다.
류해국을 죽일까 했다지만 주변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결국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 주변의 요구가 어쩌면 시대적 요구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류해국은 참 힘들게 사는 사람이다. 덕분에 박 검사도 힘들어졌고. (웃음) 사실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모른 체할수록 자신의 안위는 편해진다. 하지만 자꾸 뭔가를 들춰보고 캐내고 찌르다 보니 마찰과 충돌이 생기고,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게 어려운 건 그런 피곤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불편한 정의보다도 편한 불의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그 주변 사람들의 요구가 그런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뤄진 게 아니었을까. 최소한 그런 가치에 대한 보상심리를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만화에서라도 보상을 해주고 싶어졌다. 위로 받아야 할 곳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니까. 예를 들어 국가나 사회 시스템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니 각자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 만화가로서 내 만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갔을 텐데, ‘아고라’를 보면 종종 ‘벌써 죽었냐? 촛불집회 그거 그냥 유행이었냐?’ 이러면서 자괴감에 빠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실 아직 끝난 건 아니거든. 서로 힘을 실어주는 게 중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원하는 정권으로 교체된다 해도 그 사람들이 또 우리를 다 대변해주는 건 아닐 거다. 그 사람들도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궁극적으로 현 정권이 목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걸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항시 환기해야 되고, 경계해야 되고, 서로 위로해줘야 한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라 해서 대기업의 비리가 정의롭게 파헤쳐진 적 있었나? 결국은 그 너머에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단지 이명박 대통령 욕하는 데서 끝날 문제가 아닌 거다. 단지 표면적으로 국민이 개입할 수 있는 노골적인 문제가 발견되니까 그렇게 거대한 시위적 형태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뿐이다. 거대 기업, 자본, 흔히 말하는 커튼 뒤의 사람들과의 싸움은 대를 이어서 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구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감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렇게 끝낼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화가로서 해줄 수 있는 위로를 해줬다 믿으니까.
<이끼>는 제도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이 진전되고, 개인의 분노를 사회적 합의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야후>보다 더 나아간 작품이다. 어쨌든 <야후>나 <이끼>처럼 정치적 해석이 동원될만한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소재에 대한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작품으로 인지도를 얻게 됐다는 점에서 부담은 없나?
그런 부담은 없다. 나는 기본적으론 창작자지, 사회 운동가는 아니니까.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다 해도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작품은 내가 할 수 없는 거다. 사회적인 발언을 하거나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고도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안에는 사회관찰자 입장으로서의 피가 많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관심이 많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생각이 나를 점유해버릴 수는 없지. 그걸 경계하기도 하고. <이끼>도 특별히 정치적으로 풀어보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아마 그런 목적을 노리고 시작한 작품은 <야후>가 유일했다. 다만 우연찮게 <이끼>를 독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엮다 보니까 나도 문득 ‘이렇게도 풀이가 가능하구나’라는 지점이 생겼다. 나는 굳이 그걸 거부하지 않는다.
<야후>에서 나오는 수경대의 비행용 바이크는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특별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 자체의 이미지는 명백히 허구지만 막강한 공권력의 도구로서 상징적인 이미지를 구가한다. 요즘 세태에 너무 잘 어울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웃음) 그래서 오히려 요즘의 세태에 대한 기시감을 뒤늦게 느낀다. 비행용 바이크라는 날아다니는 기체를 생각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애초에 주인공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처음엔 오토바이 기동대를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지엽적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더라. 공간적인 제약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날아다니는 걸 생각했다. 특히 러시아워의 특성이 강한 서울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지상은 어렵겠다 싶더라. 어쨌거나 주인공은 모든 사건의 중앙에 서 있어야 했고, 그만큼 기동력을 확보할만한 수단이 필요했던 거다. 그래서 헬기도 생각했는데 사실 헬기는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 비행체를 만들어야겠다 마음먹었지. 그리고 독재정권 하에서는 상상을 초월했던 일들이 많았으니까 ‘이쯤 있으면 어때?’란 생각도 하게 됐지.
사실 <야후>에서 수경대만 빼면 리얼한 시대극 만화가 된다. 그리고 그 수경대의 비행기체는 <야후>에서 만화적 상상력으로서 발휘된 가장 특별한 이미지다.
그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 한번은 중앙대에서 연극영화과 교수를 하는 선배가 너무 안타까워하는 거다. 선배가 수업 중에 계속 이야기했단다. “너희 <야후>라는 만화 꼭 봐라. 우리 시대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아마 <야후> 6~7권 즈음에서 수경대 비행바이크가 나오기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그걸 보고 ‘야, 이거 뭐니? 정말!’ 했다는 거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 “왜 갑자기 이게 나오는 거야. 오토바이로 해도 됐잖아. 왜 이걸 넣는 거니?” 이렇게 너무 안타까워하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그걸 진짜 넣고 싶었거든. 그때만 해도 주인공이 서울 시내를 날아다니면서 벌이는 총격전을 보여주는 내용을 생각했으니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에 와서 ‘아싸!’싶었던 게 있다. <야후>최종 권에서 50미터 탄이라고 50미터 넘으면 뻥하고 터지는 총알이 나오는데 그 총알이 최근에 개발됐다 하더라. (웃음) 거리를 정해서 쏘면 엄폐물 너머에 있는 사람 머리 위에서 화약이 터져서 사상을 입히는 거다. 그 뉴스를 보면서 ‘아, 내 머리가 그렇게 뒤쳐지지 않았어.’ 싶었지. (웃음)
<야후>도 그렇지만 <이끼>에서도 분량이 늘어날수록 그림체의 변화가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런 문제에 봉착하는 거 같긴 하다. 심지어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슬램덩크>조차도 첫 단행본과 마지막 단행본의 그림체가 판이했으니까. (웃음) 대작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에서도 그런 변화가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어쨌든 작가로서는 뒤늦게 꽤나 신경 쓰이는 부분일 거다. 사실 <이끼>의 댓글에서 종종 ‘작화붕괴’라는 말이 보이더라. 심지어 후기에 직접 그걸 거론하기도 했고. (웃음)
거기에 대해선 충분히 공감한다. (웃음) 사실 80회씩이나 되는 장편을 하다 보니 사람이 그 정도 그리다 보면 뭐가 늘어도 늘거든. 보다 능수능란해지면서 더 잘 그리게 되는 거지. 특히 나는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잘 그리지 못한다. 학창시절에 보면 만화를 잘 베껴서 그리는 애들 있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그걸 잘 못해서 남의 그림을 베껴본 적은 별로 없다. 거의 내가 만들어서 그림을 그려봤지.
모사가 어렵단 말인가?
그렇다. 애들은 로보트 태권V, 마징가도 잘 그리는데 내가 그리면 뭔가 비율도 맞지 않아 보인다. 태권V라고 할만한 요소는 다 들어가 있는데 정작 결과는 태권V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렇게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게 굉장히 힘들다. 그러다 보니까 류해국 같은 주인공은 제발 같은 그림으로 나오기 쉽게 개성을 분명히 담아보려 했다. 그 삐쭉하게 만든 코 같은 거. (웃음) 그런데 박 검사는 개성이 모호하다 보니까 매회마다 자꾸 얼굴이 바뀐다. 사실 이현세 선생님처럼 개성을 강하게 주면 작화붕괴가 일어날 일도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쓰는 그림체가 그런 경향을 더 심하게 가중시키는 탓도 있다. 모니터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모니터 하나에 실제 그림 사이즈보다 200%확대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얼굴을 그릴 때도 눈썹 하나만 모니터에 꽉 채우고 볼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내가 어디를 그리고 있는 건지 모니터만 봐서 잘 모를 때가 생긴다. 선 하나 그리고, 축소해서 다시 보고, 다시 키워서 또 그리고. 물론 이게 변명은 안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니까. (웃음)
인물들의 신체비율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웃음) 그런데 그런 불균형한 느낌이 후에 오묘한 특징으로 인식된다는 기분도 들더라. 뭔가 상당히 기괴하다고 할까. 물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웃음)
그런 어설픈 방식도 몇 회를 가면서 밀어붙이다 보면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독자들이 맞춰주더라. (웃음)
<이끼>엔 스크린적인 이미지가 많이 동원된다. 롱테이크가 연상되는 컷도 이어지고,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핸드헬드적인 이미지가 연출되는 느낌도 들더라. 컷 자체에 기능적 공을 들인 흔적도 역력하지만 특별한 장면 연출에 공을 들인다는 인상도 받았다. 일반적인 출판 만화는 정보가 양 페이지로 한꺼번에 확 들어온다. 예측이 가능하지. 그런데 웹툰은 작가가 하기에 따라서 컴퓨터 모니터에 한 장면만 눈에 띌 수 있게 구성이 가능하고 계속 (마우스 휠을) 내리면서 봐야 하니까 잔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잔상을 이용하기 위해 반복컷도 많이 쓴다. 매번 다른 컷들로 이어지면 잔상이 남을 여지가 없어지니까 비슷한 표정의 컷이 반복돼야 보다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가다가 예상치 못한 컷이 떡 하고 올라오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스크롤 만화의 장점이 그런 거다. 독자들의 점유력이 세진다고 해야 하나. 말한 대로 한 컷 한 컷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출판 만화엔 배경이 없는 컷도 무지하게 많으니까 주인공 얼굴로만 때워도 되는 컷도 있지만 웹툰에선 매 컷마다 컷 자체의 밀도를 유지시켜줘야 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기본적으로 배경도 계속 깔아줘야만 된다. 그런 전제로 가다 보니까 작업 자체가 힘들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리듬이다. 재미도 리듬에서 생기니까. 처음엔 그 스크롤만의 리듬을 못 잡아서 정말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게 정말 재미있나?’ (웃음) 의심도 들었다. 반복해서 볼수록 나는 익숙해져 버리니까 제3자들의 반응을 모르겠더라. 다행히 10회 정도 지나고 보니까 어느 정도 조절이 됐다.
방금 했던 말처럼 강도하 작가와 같은 기존의 만화가들은 테두리의 구획에 정확히 색의 경계가 나눠진다는 느낌인 반면 <이끼>의 색감은 회화처럼 번지는 느낌을 준다.
포토샵 툴 중에 직선을 그리는 툴이 있다. 사실 이걸로 대부분 라인을 따서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문하생들한테 작업을 시킬 때도 그걸 못 쓰게 한다. 다 손으로 따서 그리게 만든다. 비뚤어져도 상관없다고, 흔들려도 상관없으니까 손으로 그리라고 한다. 유리라면 모를까, 실제 건물벽을 흙으로 미장센하고 나서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직선은 아니거든.
매체의 변화에 따라 그림체에서도 변화가 생기는 게 느껴지지 않던가?
처음엔 인물을 그리는데 그 툴의 사이즈를 너무 두껍게 했다가 가늘게 했다가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작화붕괴니, 그림체가 다르니, 이런 얘기도 많이 나왔다. 그게 다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였던 거지. 후반부로 갈수록 체계가 잡히고 날 것 그대로의 느낌도 사라졌다. 사실 스크롤 만화가 영화와 비슷한 면이 많다. 매 컷마다 그림 사이즈를 다르게 하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최대한 컷은 유지한다. 그렇게 와이드 컷을 유지하다 특정장면에서만 변형을 시켜줘도 그게 별로 충격을 주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덕천이가 할머니 귀신을 보는 신에서도 비슷한 사이즈가 유지되다가 마지막 컷이 길어지니까 독자가 봤을 때 공간감이 확 넓어진다고 느껴져서 순간 놀랐을 거다. 갑자기 정보량이 많아진 거니까. 이장이 주인공 아버지 목을 잡고 훈계하는 신에서는 거의 이장 얼굴만 쭉 나온다. 독자가 마치 이장에게 목을 잡힌 듯한 느낌을 받게 하고 싶었다. 이장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독자한테 이장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댓글에서 “이번엔 날로 먹었네?”하기도 하고. (웃음) 이현세 선생님이 그리는 까치는 어떻게 그려도 까치다. 그런데 허영만 선생님 쪽 작가들은 그림이 조금만 변형돼도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 나도 한 사람의 얼굴을 계속 그린다는 게 부담이 크다. 특히 나같이 동일한 얼굴을 잘 못 그리는 작가는 카메라 각도만 바뀌어도 새로운 얼굴형이 막 나오거든. 그니까 그 클로즈업을 하는 게 내게 얼마나 큰 부담인데 그걸 날로 먹었다고 하니까 황당하긴 했다. (웃음) 하여튼 스크롤 만화는 그런 장점이 있다. 두 페이지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절대 못 가거든. 갈 수가 없다. 왜냐면 많은 정보가 한 눈에 들어와버리니까.
웹툰을 하면서 그 매체에 대한 적응 과정에서 애를 먹기도 했겠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실험적 방식을 구사했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결말부로 갈수록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스크롤을 내리면서 보다 보면 속도감이 부여되는 신이 있다. 중심부에 비해 주변부 이미지를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아웃 포커싱되는 느낌의 컷이 많았다. 동시에 스크롤을 빠르게 내릴수록 프레임의 속도감이 연출되는 기분이 들더라. 기존의 웹툰과도 그런 점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웹툰 작가들이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포토샵 툴을 쓴다. 솔직히 내가 그런 기능을 전에는 몰랐던 거지. (웃음) 하다 보니까 포토샵 기술이 늘어서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해서 알게 된 것들을 쓴 거였다. 아마 초반부부터 그 기능을 알았다면 초반부부터 적극적으로 썼을 거다. 다만 초반부는 좀 정적이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감이 붙었으니까. 물론 후반부도 정적이지만 영화로 치자면 풍경 자체는 정적인데 왠지 드럼 소리가 사운드로 깔리는 느낌에 가까웠다고 할까. 그리고 만화에는 사운드가 없으니까 이미지로 그런 느낌을 좀 주려고 했던 건 있었다. 굳이 내가 실험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끼> 단행본도 발간되고 있는데 애초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 작업이 이뤄진 것이라면 지금의 <이끼>와 같은 형태는 불가능했을 거다.
머릿속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서 책으로 나올 거니까 책도 고려해야 돼. 이렇게 작업은 못 하겠더라. 왜냐면 웹툰에 적응하고 웹툰의 장점을 흡수하는 것도 버겁고 힘드니까 출판까지 고려해서 작업한다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뭔가 이렇게 보여줘야지, 이런 건 전혀 없었다. 특히 출판만화를 하다 보면 문하생 때 배워왔던 관성대로 그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법도 쉽게 가고. 그러니까 만약 웹툰에서 실험적이라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건 점점 늘어간다는 거? ‘아, 이런 것도 있었네.’ 이런 발견을 느끼면서 ‘이런 것도 넣어봐야지. 이것도 적용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컬러링 작업이 있고, 없고, 에 따라서 작업도 천차만별일 텐데 웹툰에 컬러가 들어간다는 것도 과거와 작업적인 차이를 느끼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발생한 시도적 차이도 있었을 테고.
진짜 힘들지. 출판 만화할 때는 먹만 필요했다. 흑백만화다 보니까 제일 센 표현이라면 먹칠이었다. 그런데 컬러 만화이다 보니까 어디에 포인트를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 다 자기 색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색을 적극적으로 쓰기 어렵다 보니까 작정한 게 차라리 전체적으로 톤을 다운시켜버리자는 거였다. 아예 무채색 계열로 보이게끔 만들어버리고 대신 빛으로 음영을 묘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통일감도 주고, 음영이 생기면 좀 더 인상이 강렬해지는 게 있잖아. 색을 쓴다는 기분 말고 빛을 묘사한다는 기분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색을 쓰는 건 기본적으로 작업시간도 더 걸릴뿐더러 색에 대한 계획도 갖고 가야 하니까 힘들거든.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신이 생각나는데 류해국 아버지가 기도원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는 복도 신에서 시체들을 음영으로 표현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차라리 구체적인 실물의 모습을 어둠으로 덮어서 실루엣만 감지시켰기 때문에 살벌한 기운 자체가 보다 증폭되는 것 같더라.
아무리 어둡게 해도 노트북 모니터로 보면 웬만하면 다 나온다. 그래서 최대한 노트북에서조차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게끔 하려고 그렇게 어둡게 해놨는데 누가 그 조잡하게 펜터치 돼있는 걸 포토샵으로 완전 밝게 만들어서 댓글에 올려놨더라. (웃음) 그때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 미안한 게 또 그 밑에 사람들이 댓글로 욕을 써놨더라. 알아는 볼 수 있게 해놔야 될 거 아냐, 하면서 욕을 써놓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여튼 그렇게 어둡게 된 장면도 웹툰에선 적극적으로 쓸 수 있다.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해놓으면 인쇄가 떡이 져버린다. 스크릴 톤을 여러 번 붙여놓게 되면 미세한 알갱이들이 인쇄하면서 다 뭉개져 버려서 효과가 잘 살지 않는다. 그런데 확실히 컬러만화라서 채도 만으로도 색을 뭉개버릴 수 있다는 건 좋았다.
<이끼>는 항상 도입부에 어떤 중요한 풍경을 프롤로그처럼 전시한 뒤, 타이틀 컷을 배치하고 본격적인 작품을 밀고 나가는 형식도 인상적이었다. 키를 쥐고 있는 공간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먼저 전시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적인 컷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배경묘사에 공을 들이고 빛과 음영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혹시 만화보단 회화적인 부분에서 영향력을 얻은 바는 없는지 궁금하더라.
컬러만화를 하게 되니까 회화를 많이 보게 됐다. 최근의 모던회화 말고 클래식한 거 있지 않나. 네덜란드 풍경화 같은 걸 많이 봤지.
사실주의적인 고전회화 말인가?
그렇다. 풍경을 많이 담았던 고전주의 회화 같은 거. 특히 <이끼>에서 구름 사이로 달빛 묘사되는 장면 같은 건 네이버 블로그에서 참고한 거다. 회화만 쫙 올려놓는 블로거들 있잖아. 달빛이 정말 대낮처럼 환한 밤을 그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밝은데 어떻게 밤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계속 살펴보게 됐다. 그러면 구름은 이렇게 묘사하고, 이건 이렇게 묘사하고, 이런 걸 계속 분석해보고 내 작품에 적용해보기도 하는 거지. 강도하 같은 경우, 나무 숲을 그릴 때 윤곽을 잡아서 색을 넣지만 나는 나뭇잎을 다 그린다. 터치가 많이 들어간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사실 강도하처럼 그리는 게 애니메이션적인 기법인데 사실 나는 애니메이션 같은 그림체를 싫어한다. 어쩌면 내가 수채화 전공의 입시미술로 그림을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색에 대한 직관력이 강한 편이다. 그런 경험적 기반이 있어서인지 회화작품들을 참고한 게 도움이 됐다.
원래 미대를 진학하려고 했다던데.
실패했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웃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품은 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다. 이미 만화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당시 만화 전공 대학이 없으니까 당연히 미대라고 생각하게 된 거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자기가 대학을 가지 않을 거란 설정은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미술을 하고 싶어서라기 보단 만화가로서의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미대를 선택했던 건가?
비슷하다. 만화는 너무 좋았지만 만화가에 대한 자각은 크지 않았고, 만약 직업이라도 하나 갖는다면 화가가 돼야 하지 않을까 했던 거지. (웃음) 그렇게 ‘미대 갈까?’했는데 막상 대학에 떨어졌고, 우리 집 경제상황이 나를 재수시켜서 대학에 보낼 수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화가가 돼야겠다’가 된 거지. 학교 다닐 때도 진로 상담을 받지 않나. 난 항상 ‘그걸 왜 하지?’라고 생각했다.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진로가 없나?’ 생각했지. (웃음)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해서 왜 고민하는지 정말 몰랐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면 몰라도 과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갔거든. ‘화학을 좋아한다는 애가 경영학과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웃음)
결국 미대 진학이 좌초되고 만화가를 지망하게 됐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히 고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항시 어려웠지. (웃음)
허영만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명확한 진로가 잡힌 게 아니었을까.
만화 그리러 서울로 올라온 것부터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루트를 모르니까 만화학원을 가게 된 거지. 그런데 그 만화학원 원장님이 만화가 협회에서 허영만 선생님과 싸운 적이 있어서 전화번호조차 가르쳐주지 않더라. (웃음) 결국 나 혼자 앞길을 찾아야 했던 거지. (웃음) 한때 아파트 벤치에서 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벤치 생활하던 멤버 형이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들을 만나게 돼서 연락처를 받아와서 나한테 가르쳐주더라. 결국 허영만 선생님이 계시는 은마 아파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찮게 알게 됐고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그렇게 객지 생활을 하면서 노숙도 했던 경험이 <야후>에서 김현에게 반영됐나 보다.
(웃음)
아무래도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사상을 작품에 투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아까 말한 아버지에 관한 심상도 그런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테고. 결국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주목하는 부분을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 특별한 감상을 얻는 게 아닐까 싶더라. <야후>의 단행본 표지에 그려진 건 항상 얼굴이었는데, 이번에 <이끼>의 단행본 표지 역시 얼굴이더라.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묘사하면서 내면적 변화에 대한 단서를 제시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도 그런 의미와 연동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만큼 사람을 통해 작품에 대한 모티브나 소스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궁금하다.
남에 대한 관찰보다도, 나 스스로에 대한 관찰을 오랜 시간 동안 해왔다. 나에겐 상실이나 결핍의 정서가 굉장히 많다. 어릴 때 미술대회에서 받아온 상장을 벽에 도배하다시피 붙여놨었다. 그런데 남의 집에 가보고 나서 상장은 액자에다 걸어놓는구나, 처음 알았지. (웃음) 어쨌든 집이 망해서 이사를 가는데 우리 집을 사러 온 사람이 벽 안에 곰팡이가 피었는지 본다면서 그 벽지를 다 찢더라. 그래서 상장이 남아있는 게 한 장도 없다. 내 상장이 찢어지는 걸 내 눈을 목격하기도 했고. 좀 더 머리가 커지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데, 상도 많이 받는데, 왜 내겐 항상 그 다음이 없지?’ 싶더라. 열매가 맺어야 되는데 그 다음이 없는 거다. 상실감 같은 거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교실 뒤 칠판의 절반을 내주셔서 분필로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고, 숙제 검사조차도 그림 연습으로 대체해줄 정도로 밖에서는 인정을 받았는데 정작 집에서는 왜 인정을 못 받을까, 이런 생각들. 그리고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와도 아버지는 거의 신경도 안 썼다. 그 까짓 거, 이런 식이었지. 그래 놓고 본인이 다 망한 뒤에 자신 없을 땐 “너 대회 나가서 상 받았냐?”고 얄밉게 물어보고, 치사하게 이제 와서. 스스로 돌아봤을 때 내 인생이 안타까웠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짠하고, 그런 느낌들이 굉장히 많았지. ‘나는 왜 이렇게 불쌍하지?’란 생각을 자주 품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 보니까 별자리 공부도 하게 된 거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
그래서 결국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었나?
그냥 난 또 다른 걸 무언가를 위해서 결핍이 돼있구나, 라는 거. 다른 뭔가를 강화시키려다 보니까 이런 결핍이 된 거구나, 라고 인정하게 됐다. 다들 생김새가 다르게 태어나듯이 각자 다른 미션을 갖고 태어난다고 할까. 그 미션을 하기 위해서 어떤 옵션들을 갖고 태어나는데 강화된 옵션이 있는 반면, 결핍된 옵션이 있는 셈이지. 마치 야구팀 운영을 시뮬레이션하는 구단주 게임을 예로 들면, 자금이 한정돼 있지 않나. 선동렬 한 명 산다면 나머지 선수는 리틀 야구단에서 사와야 한다. 그러니까 표준 퀄리티를 올릴 것이냐, 아니면 주력 선수 몇 명을 올리고 나머지를 버릴 것이냐,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누구나 똑같이 100을 갖고 있다면 어떤 사람은 90이 한 면에 몰려있는 거다. 어떤 회장이라는 사람은 전생에 조상이 나라를 구해서 그게 돈 버는 쪽으로 갔나 싶기도 하고. (웃음) 근데 나는 그게 아닌 거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많이 강화된 사람이더라. 그런데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이런 결핍에 대한 포지티브(positive)한 보상이 항상 있다는 거다. 물론 네거티브(negative)한 보상도 있고. 네거티브는 사람을 파멸로 몰 수도 있지만 포지티브는 그 결핍으로 되레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가 된다고 할까. 8년간 별자리 공부하면서 남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폭도 넓어졌다. 덕분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라는 선이 뚜렷해졌지. 얼토당토않은 걸 탐낼 필요는 없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잃거나 기회를 빼앗기지 말고 확실히 하자. 사실 이 회사에도 그런 각성이 없었다면 굳이 참여하지 않았을 거다. 별자리를 공부하고 나니까 내 얼굴 앞에 거울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거기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남을 뿐이지, 남이 뭘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린 인물들의 얼굴이 스스로에 대한 다양한 자화상이라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혹시 요즘 주시하고 있는 현상이나 사건이 있나?
최근 우리나라 상황이 너무 빤하게 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최근에 ‘수유 너머’라는 곳을 통해 인문학 공부를 조금씩 해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진지하게 해봐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왜냐면 8년 동안 배운 별자리를 다 소진한 상태라 이걸 다시 끌어와서 국물을 우려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창작자가 스스로 처참해질 때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을 때다. 문화를 향유하는 건 생활이어야 하고 그렇게 우러나와야 진짜 좋은 내용이 나오는 건데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남의 책을 뒤적이고 남의 영화를 살펴보고, 그런 건 안타까운 일이다. 수면 위로 뭔가 떠올리기 전에 그 수면 아래에서의 활동이 좀 바쁘게 필요하겠더라.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온라인 강의도 많더라. 문화강의도 많고. 그렇게 뭔가 배워보려 한다.
강단에도 서고 있다고도 들었는데.
세종대학교에서 하고 있다.
강단에 서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전한다는 건 어떤가?
강단에 서는 친구들은 막상 자기가 학생들한테 에너지를 얻어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그 아이들의 학비가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그 학비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다. 수업 준비를 해보니까 6~7시간 걸리는데 마감해가면서 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그래도 어떻게든 그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내가 얻어오긴 뭘 얻어와. (웃음) 그 애들이 수업 끝났을 때 ‘아, 오늘 뭐 좀 들었네.’ 이런 느낌이 들 정도가 돼야겠다 싶었다. 최근에 진중권 씨가 쓴 ‘미디어 아트’란 책을 읽으면서 ‘아트 앤 스터디’라는 문화교양 웹사이트에 매달 돈 십만 원씩 내고 유료강의도 들었다. 내가 애들한테 항상 말하는 게 있다. 웹툰을 고민하지 말고 디지털 만화를 고민해라. 자신을 만화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창작자라고 생각해라. 만화도 창작의 한 범위니까. 우리 시대에 너무 흔해져서 가치 없는 말이 많다. 정의, 도덕, 교양. 특히 교양이란 말은 원래 의미에 비해 너무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쓰이지. 하지만 창작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교양이다. 창작자는 교양인이 돼야 한다. 학생들에게도 계속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발표하게 만들어서 그 애들을 발가벗기려 한다.
수업 방식이 궁금하다.
내가 지금 단편만화를 가르치는데 단편 만화 기획서를 써오라 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한 명씩 발표시킨다. 이걸 왜 기획했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설득해보라 한다. 핵심적인 건 이거다. 말로 하지 못한 관념은 쉽게 지워지는 거니까 글로 써보고 말로 표현해놔야 된다. 그리고 말 못하면서 글을 잘 쓰는 사람 없다. 글을 잘 쓰려면 말도 잘 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앞뒤 분명한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말은 어눌해도 상관없다. 대신 앞뒤를 맞춰라. 그래서 여기 앉아있는 네 동료들이 네 작품을 사가야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입장에서 네 생각을 최대한 매력 있게 설명해라. 그렇게 먼저 기획서로 전부 다 심사한다. 그 다음에 콘티를 짜오게 한다. 애초에 기획했던 바가 콘티에서 어떤 리듬으로 표현됐는지 프로젝션으로 쏴서 이 장면은 어떻게 그릴 거고, 이런 의도로 이렇게 했다는 걸 설명하게 한다. 그리고 이걸 그리기 위해 어떤 사진자료를 취재했는지 그 과정도 검토한다. 최종적으로 그 과정에 걸맞은 결과가 나왔는지에 점수를 주는 거다. 결국 그 과정에서 배운 성취감이 남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만화가로서의 기능력보다 생활력을 학습하는 교육방식처럼 보인다.
그렇지. 출판사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연재를 할 수 없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면 설득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그 사람들이 본인의 어떤 능력을 알고 같이 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협업이 가능할까라는 거다. 최소한 자신의 매력은 자신의 입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한 분야를 이끄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을 던지는 입장이 된 것 같다.
느닷없이 그렇게 됐지. 뽑아낸 작품도 별로 없는데 중견이 돼버렸으니까. (웃음)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갔을 때 허영만 선생님 연세가 지금 내 나이였다. 그때 이미 허영만 선생님은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세상에 작가로서 이름을 많이 알렸다. 이미 한 100타이틀 가까이 그린 작가였으니까. 나는 아직 20타이틀도 꼽지 못한다. 만화를 꾸준히 본 독자라면 모를까.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책임감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사실 에피소드 형태의 단막극으로 진행되는 웹툰이 서사적 호흡을 지닌 작품들에 비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서사적 연재로 이뤄진 웹툰을 주목 받게 만든 시초는 강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서사적 형태의 웹툰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독자의 주목을 얻게 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끼>도 그런 흐름의 중심에 놓인 작품이다. 사실 이전까지 지면 출판 작가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서사가 없는 작품을 해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서사적 형태가 작품의 기본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다. 개그물을 한다 해도 서사가 있는 개그물을 하고 싶지. <아색기가>같은 아이디어는 내 머리 속에 있질 않다. 사실 흥미도 별로 없고. 물론 (양)영순이 작품을 재미있게 본다. 단지 내가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사실 웹툰으로 들어올 때 그런 생각은 했다. 원래 웹툰은 유머 사이트 게시판을 이용해서 만화적인 패러디물을 올리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거다. 그런데 기성작가로서 그런 후배들이 만들어놓은 웹툰이란 판에 들어오면서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들어온다는 게 실제로 굉장한 부담이 됐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될까 고민도 됐고.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 나도 후배들이 했던 것처럼 간결하게 치고 나가는 형식을 따라 한다는 건 너무 치사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로 가야겠구나 싶었다. 강풀이나 강도하가 몇 년에 걸쳐서 서사적 만화 폼을 웹툰에 안착시켰고 나는 다행히 서사라는 게 웹툰에서 인정받는 시기에 여기 들어와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서사적 폼으로 웹툰에 들어오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만큼 그 역할을 똑바로 맡고 싶었다.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 작가는 웹툰이라는 매체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게 된 대표적인 웹툰 작가다. 반대로 당신은 기성 매체 작가로서 매체의 변화에 편입된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새로운 매체에서 적응할 수 있느냐에 대한 갈등이나 고민이 많았을 거 같다.
굉장히 부끄러웠지. 그리고 못하면 어쩌나 싶었고. 예를 들어서 가령 댓글 개수조차도 액면으로 쫙 나오지 않나. 이게 개그작가보다 못 나오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웃음) 물론 작품의 경종을 극화냐, 개그냐, 로 나눌 수 없지만 좀 더 둔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내 작품이 사람들의 함의도 못 잡아내면 처참할 것 같았다. 특히 경력이 20년이나 됐다는 사람이 기존의 웹툰 작가들만큼의 흥미도 못 끌어내고, 싸구려처럼 말하자면 낚시 정도도 못하면 곤란한 거 아닌가 싶더라. 엄청난 돈을 받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웹툰에서 작업하던 후배들보단 많은 돈을 받으니까 그만큼 돈 값을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드는 거다. 그래서 연재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이끼>를 끝내고 나서는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으로 들어갔지. 이것보단 나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강풀 보면 신기해죽겠다. 어떻게 연달아서 저렇게 뻥뻥 터뜨릴까. (웃음) 나는 한 3년 헤매다가 이제 이야기 하나 나왔는데, 신기하지.
결과적으로 <이끼>는 웹툰 역사상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도 놀랄 만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사실 내가 계속 만나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같은 회사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도 사실 거의 안 만난다. 강도하, 이충호 씨, 아니면 자주 가는 술집 사장님, 이런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현실감이 없는 거지. 그래서 처음에는 댓글만 놓고 고민하다 보니까 댓글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가 생기더라. 누가 댓글로 이슈 하나 던져놓으면 그 의견에 시비 걸기 위해서 내 만화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댓글을 다는 거다. 그럼 결국 만화하곤 정말 상관없는 양상이 펼쳐진다. 그런 판단이 드니까 댓글이 수백 개, 천 개 달려도 자기들끼리 노느라고 다는 건가 싶어지는 거다. (웃음) 그리고 조회수로 고료를 판단하게 되는데 사실 다음은 네이버에 비해 조회수가 3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냥 ‘난 아직 멀었네?’라는 생각만 들고. (웃음) 그래서 또렷하게 내가 뭘 이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 사실 웹툰하면서 영화 계약한 후배들이 많다. 다만 강풀 말고는 이슈가 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나는 이슈 메이커라고 할만한 강우석 감독님이 연출을 맡으면서 그 덕을 꽤 본거지. 솔직히 객관적으로 상황을 봤을 때 과연 <이끼>가 반응이 있나 싶더라. 길 다니면서 누구한테 사인을 해줄 일도 없었고, 동네 아파트에서 동대표 나와라, 이러면 나가고. (웃음) 네이버 ‘한국인’에 실리고 이랬을 때 요즘 내가 조금 이슈가 되나 보다, 이 정도지.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적은 없기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그런데 (강)풀이는 만나보면 확실히 그런 태도가 있다. 지금 웹툰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그만큼 자기가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떤 기준점이 될 수 있으니까, 항상 그걸 각성하고 산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생각은 거의 없다. 그냥 풀이가 “형, 이렇게 해보죠.” 그러면 “그래.”하고, 내가 풀이 등을 타고 간다는 생각이지. 아직은 내 위치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이 안 난다. 어차피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정지우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렛츠 필름 김순호 대표님께서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칭찬 말고 의미부여를 해주시니까 너무 송구스럽고 감사했다. 그때 내가 감동을 받아서 허투루 하지 말고 신중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허영만 작가님도 다음에서 <꼴>을 연재했다. 현재 출판만화의 소비가 원활하지 않다 보니 그 대안으로 웹툰이 부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기존 출판만화에서 중시했던 만화의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들도 자주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는 진화라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퇴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밟히기도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돋보이지만 기본적인 기능적 자질이 부족한 작품들도 적잖게 눈에 띈다. 그런 과정에서 종종 기성 작가들과 웹툰 작가들 사이의 신경전도 없지 않은 거 같다. 매체의 변화 속에서 겪는 시행착오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분명 고민이 있지. 나는 만화가들이 너무 형식을 따진다고 생각한다. 방금 말한 것처럼 출판만화의 어법을 왜 고정적인 방식이라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 든다. 나도 거기서 성장한 사람이지만 만화에 어떤 특정한 형식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웹툰이 가진 좋은 장점이 많다. 출판만화가 포기했던 장르의 다양성이라던가, 그 동안 출판만화가 도외시했던 독자층의 흡수, 이런 것들은 웹툰이 가진 큰 장점이라고 본다. 대신 출판만화는 신인작가가 등용해도 일정 수준의 퀄리티를 담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쩌면 그 신인작가도 출판만화의 관습에 적용됐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다. 자기의 개성을 보이기 보단 편집장 한 사람의 안목을 통과해야 연재할 수 있는 곳이 출판만화니까. 그런 점에 비해서 웹툰은 순기능이 많다. 기본적으로 웹툰이 아닌 디지털 만화를 염두에 둔다면 모바일이나 이북(e-book)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시 어마어마한 환경변화가 이뤄질 거다. 이랬을 때 언제까지 출판만화의 폼에 대해 고정적 확신을 주장해야 하겠나. 물론 그쪽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그쪽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지금 출판만화 쪽에 있는 사람들은 웹툰이 출판만화에 대한 관심도를 흡수해버린다는 이유로 공격 아닌 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만화의 질적인 수준을 저하시켜버렸다나. 그런데 본격적으로 웹툰이 활성화되고 작가들이 먹고 살만큼의 고료를 받기 시작한 건 불과 5년 안팎이다. 그런데 출판만화는 3~40년이나 된 분야다. 자기들이 자신들의 어법을 고민하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밀리게 됐는지를 고민해야지, 이제 파이가 좀 넓어진 상황에서 그 넓어진 파이에 대해 돌 던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 그건 자멸하자는 뜻이지. 스스로 내적인 고민을 하고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변해야 하는 거고. 예를 들어서 출판만화를 책으로만 파는 게 한계가 있다면 이게 디지털 컨텐츠로 전환됐을 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어떤 고민도 없으면서 여전히 일본만화만 수입해오고, 그러면서 수입구조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가서는 곤란하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작가들의 마인드에 너무 많은 한계를 지어준다. 출판만화의 형식이 정확한 폼인 것처럼 강요한다던가. 그런 게 나는 못마땅하다.
안에서 느끼는 갈등이 생각보다 깊나 보다.
기성매체가 웹툰을 공격하는 논리는 딱 그거다. 결국 웹툰은 수입구조가 없으니까 허상 아니냐. 그런데 사실 이 인터넷 IT 비즈니스라는 게 끊임없이 개발되는 중이고 계속적으로 도구가 개발되고 모델이 나오면서 또 새로운 시장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웹툰 시장만 보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허수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다. 정작 고민해본 적도 없으면서 지금 포털의 웹 구조만 보고 단정지어버리는 건 굉장히 오만한 판단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이 다른 IT환경에서 많은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고 정착시키려 노력하는데 강 건너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허수네, 뭐네,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굉장히 비겁한 행위일뿐더러 나라 전체의 산업적인 측면을 봐도 그건 아닌 거다. 성공을 기원해줘야지. 그렇게 힘을 합쳐서 자기네 컨텐츠도 잘 되게끔 가야지. 웹툰이 망한다고 자기들이 잘 될 거란 보장도 없으면서 왜 거기에 돌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제발 앉아있는 사람끼리 뛰어가는 사람 다리 걸지 말고, 같이 뛰든가, 손을 내밀든가 하자는 거다.
류해국처럼 뛰어들어서 뭔가를 헤집어 놓을만한 발언이다. (웃음) 만화가로서의 기능적 창작력을 넘어 산업적인 생계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단순하게 만화 그리는 게 아니라 창작을 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형식으로 말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대체되지 않는 작가가 되야 한다. 자기의 시효가 끝났을 때는 독자 앞에서 사라져도 되지만 나를 대체하는 누구 때문에 내가 밀려나는 상황은 없어야지. 적어도 몰개성적인 작가는 되지 말자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만의 작가적 역량을 지켜야 하고 그러려면 창작자라는 분명한 자기 태도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학생들한테도 말한다. “나는 극화 만화가가 꿈이야, 이렇게 단정하지 마라. 말이 다 빚이 된다. 너희가 경험할 게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지 너희는 아직 모른다.” 예전에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 시절에 같은 화실에 있던 사람들이 만화잡지를 보면서 “이건 너무 일본풍이야. 이건 너무 상업적이야.” 그랬는데 그 말들이 결국 자기 스스로한테 다 빚이 돼서 돌아온다. 괜히 자기가 말한 상업적인 만화 그려놓고서 우리끼리 만나면 불필요한 죄책감에 빠져있지. “사실 나 요번에 상업적인 거 좀 했어.” 이러면서. 그게 뭔 상관이냐. 우리가 배운 게 상업만화인데. 그러니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 (웃음)
어쨌든 <이끼>의 연재를 끝내고 나서 남는 단상도 많았을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까 머리나 속이 팽창돼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사사로운 동기나 아이템을 캐치해서 작품을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내가 너무 부풀려진 상태다. 왠지 대부분의 생각이 딱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원상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지. 부담감이라면 부담감이랄 수 있고. 설경구 씨도 <역도산>으로 살 찌운 상태에서 바로 뭘 할 수가 없었을 거다. 빨리 본래 상태로 축소시켜서 옛날의 예민했던 나로 다시 돌아가고 반짝반짝한 생각을 돌릴 수 있게끔 만들어야겠다. 물론 <이끼>는 내게 너무 고마운 작품이다. 다만 빨리 이 사이즈를 줄이는데 집중하려 하고 있다. 호흡조절을 해줘야지.
이제 댓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후련하겠지. (웃음)
댓글에 괜히 욕 써놨다가 다른 팬들에게 융단폭격 맞을까 봐 그런지 메일로도 욕을 하더라. (웃음) 댓글로 하면 몇 줄로 끝날 수 있는 말이 메일로 오니까 더 강렬하게 오는 거지. 그냥 멋도 모르고 클릭해서 열어봤다가, 어이구. (웃음)
지면 연재를 병행했는데 앞으로 또 웹툰에서 연재를 계획하는 바가 있나?
원래는 있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이끼>때문에 그것들이 지금은 시시해져 버렸지. (웃음) 처음에 생각할 때는 그 아이템들에 대해서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막 깜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가 이걸 왜 재미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상황이지.
스스로에게도 <이끼>가 어떤 변화를 남겼다고 생각하나?
포지티브의 확신, 긍정의 힘을 느꼈다. 연재가 끝나고 댓글을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줬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긍정으로 끝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많이 위로를 받았다는 걸 분명히 느꼈고, 그게 가장 큰 성과였나 보다. 나에게는 그 동안 전혀 없었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