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정의롭다는 말은 언제나 부도수표 같고, 보수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은 그저 편안한 도피일 뿐이다. 어느 쪽인가는 늘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맞는 얘기를 하느냐가 관건이지. 나는 진보이기 때문에, 나는 보수이기 때문에라는 행동강령 따위는 개똥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그건 그저 정치가들이 자기 편을 손쉽게 끌어모으기 위해 동원하는 말장난일 뿐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서 진보라고 말하면서도 보수적으로 군다.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자신만 모를 뿐이다. 그저 '진보' 혹은 '보수'라는 신앙을 통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그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최선을 다해서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정의는 대부분 지고, 아주 가끔씩 이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그 확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중요한 건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오른손도, 왼손도, 두뇌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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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FREE JUSTICE

피로는 간 때문만은 아니다. 밥 말리는 말했다. “악은 세상을 망치려고 하루도 쉬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추적자>의 백홍석도 그래서 뛰고 또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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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술이 일그러진다. 예의를 모르는 손녀 앞에서 한번, 이웃에 이사온 동양계 가족 앞에서 한번. 아들의 말처럼 50년대를 사는 사람이다. 포드에서 일생을 보낸 그에게 도요타를 운전하면서 자신의 유산만 노리는 아들은 개탄할 현실에 불과하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성조기를 집 앞에 매단 것처럼 그는 뼈 속까지 보수적인 미국 국민이다. 이웃의 동양인들은 하나같이 눈엣가시다. 하지만 그 동양인 이웃들이 늙은 보수주의자를 변화시킨다. <그랜 토리노>는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변하는 건 보수적 신념이 아니다. 다만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가득하던 보수주의자가 희망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사회로 환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까지의 과정이 그 변화의 본체다. 결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종교적 영험에 다다를 정도의 감동을 선사한다. 표정만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생 자체를 영화에 투영한 느낌이다. 동시에 촌철살인의 대화가 살가운 웃음마저 마련한다. <그랜 토리노>는 노장의 인생이 반영된 역작이다. 자신의 삶을 관통해온 신념의 무게를 온전히 보존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정의를 위해 복수가 아닌 징벌의 혜안을 마련한다. 그 거룩한 희생을 밟고 선 대안 세대는 빛나는 전통에 탑승해 미래로 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위하여, 아멘.

 

(프리미어 'MOVIE 4人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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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영화화된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의 작가이기도 한 앨런 무어의 걸작 그래픽 노블왓치맨(Watchmen)’은 과거의 사실을 허구의 재료로 삼아 새롭게 쌓아 올린 역사다. 바꿔 말하자면 실존의 이름으로 포장한 거짓의 세계관이다. 베트남전과 닉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경계로 한 소련과 미국의 미사일 전쟁 위협, 핵전쟁의 우려로 상징되는 세3차 세계대전까지, 역사적 메타포로 치장된 작품 너머의 현실은 사실을 인용한 허구에 불과하다.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과 3선에 성공한 닉슨 대통령까지, 현실을 가장한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그 세계는 엄연한 가상이다. 그 모든 건 착란의 발상에서 비롯된다. 케네디 암살 이후 대욱 강경해진 동서진영의 대립이 발병시킨 폭력의 징후와 공포의 착시로부터 잉태된 거대한 허구가 암울한코스튬 히어로(costume hero)’의 스토리텔링을 출산시키기에 이른 셈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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