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정의롭다는 말은 언제나 부도수표 같고, 보수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은 그저 편안한 도피일 뿐이다. 어느 쪽인가는 늘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맞는 얘기를 하느냐가 관건이지. 나는 진보이기 때문에, 나는 보수이기 때문에라는 행동강령 따위는 개똥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그건 그저 정치가들이 자기 편을 손쉽게 끌어모으기 위해 동원하는 말장난일 뿐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서 진보라고 말하면서도 보수적으로 군다.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자신만 모를 뿐이다. 그저 '진보' 혹은 '보수'라는 신앙을 통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그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최선을 다해서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정의는 대부분 지고, 아주 가끔씩 이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그 확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중요한 건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오른손도, 왼손도, 두뇌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그녀는 야구가 어렵다고 말했다. 어려워서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야구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그랬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쿠바와 맞붙은 대한민국 대표팀은 한 점 차 스코어로 승기를 잡은 채 9회말 마지막 수비에 들어갔다. 차세대 국보급 투수로 꼽히는 류현진이 마운드에 올랐다. 승리를 예감했다. 첫 타자로부터 좌전안타를 맞았다. 동점주자가 나간 상황, 두 번째 타자의 희생번트로 주자는 2루까지 진루했다. 안타 하나로도 동점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두 타자 연속 볼넷으로 1사 만루 상황까지 맞이한 뒤 류현진은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의 마지막 투구는 스트라이크에 가까웠지만 볼 판정을 내린 히스패닉계 주심은 담담했다. 포수 강민호는 격렬한 항의 끝에 퇴장 명령을 받고 덕아웃에 포수 미트를 내던졌다. 마운드를 이어받은 건 마무리 투수로 정평이 난 정대현이었다. 투수와 포수 즉 배터리가 모두 교체된 채 맞이한 9회말 1사 만루 상황, 정대현의 손 끝에서 볼이 뿌려졌다. 유격수 앞 땅볼! 유격수 고영민이 이를 잡아서 2루를 밟은 뒤, 1루로 송구했다. 대한민국 야구팀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이었다.
스피드건에 150km는 찍혔을 거라던 강민호의 터프한 미트 던지기 덕분인지, 무심하고 시크한 정대현의 ‘차도남’ 투구 덕분인지 몰라도 52%의 시청률을 기록한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의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야구장에 모여들었다. 2009년 프로야구 관중은 520만 명을 넘겼다. 전년 대비 100만 명 이상이 늘어난 수치다. 그게 다가 아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년보다 눈에 띄게 여성관중이 늘었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 이후로 경기당 여성 관객 비율이 30% 수준이라고 밝혔다. 2008년 이전까지는 15% 안팎에 머무르던 수준이었다. 680만 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중수를 기록한 지난해에는 40%에 육박했다. 롯데 자이언츠 홍보팀의 임채무 씨가 전한 부산 사직구장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환기되는 사례가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의 ‘축’ 자도 몰랐던 대부분의 여성들이 레드카펫처럼 넘실대는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길거리 응원을 즐겼고, 축구를 알게 됐다. 문제는 월드컵이 끝난 뒤, 그 열기를 이어갈 공간을 찾지 못했다는 것. 프로축구에는 그녀들이 기대했던 월드컵의 열기가 없었다. 쉽게 말해서 프로축구는 인기가 없었다. 프로축구 구장의 텅 빈 관중석에서 월드컵 당시의 열기란 겨울 한파 속에서 떠올리는 한여름 무더위 같았다. 월드컵 무대에서 반짝거리던 태극전사들도 프로축구 안에서는 존재감을 잃었다. 프로야구는 달랐다. 출범 30주년을 맞이한 프로야구는 일찌감치 한국의 국민스포츠 자리를 꿰찼다. 팬덤의 스케일과 문화적 저변이 달랐다. 야구장은 만원이었고, 응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야구장에서 한번 놀아봤다는 여성들은 그 매력에 마구마구 빠져들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그라운드를 생전 처음 본 그녀들은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파도타기에 합류하기도 하고 입에 붙는 선수들의 응원가에 목청을 높여보다가 야구장에서 먹는 ‘치맥’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야구장의 단골손님이 됐다. 뒤늦게 발견한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베이징올림픽 야구경기를 지켜본 여성들은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러했듯이 다부진 선수들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에 열광했다. 스포츠 스타의 탄생은 곧 그 분야의 관심으로 이어진다. 1994년도 농구대잔치 당시,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부는 실업팀들을 꺾으며 파란을 일으켰다. 장동건과 손지창 등 당대 청춘스타들이 대학농구선수로 출연했던 <마지막 승부>에 열광했던 소녀팬들은 농구장을 찾아 젊은 농구스타들에게 드라마의 팬덤을 이입할 수 있었다. 스타성은 곧 상품성이다.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에서 태극기를 달고 활약했던 선수들은 스포츠 스타는 스포츠 마케팅의 최전선에 배치된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 사이에 여성의 신체사이즈에 맞춰서 출시된 유니폼 판매율이 4배까지 뛰었다. 야구중계 화면에서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여성팬의 이미지가 심심찮게 포착됐다. 야구장에 놀러 갔던 그녀들은 야구팬이 돼서 돌아왔다. 프로야구 신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그녀들에게 각 구단들의 구애가 시작됐다. 여성팬을 겨냥한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고 활발히 진행한다. 두산 베어스의 ‘퀸즈 데이’가 대표적이다. 한 달에 한번 핑크색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는 두산 베어스 선수들은 그날만큼은 팬들을 위해서 뛴다. 스킨십 전략을 통해서 친밀감을 높여나간다. 야구장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사실 야구는 즐기기 위해서 학습이 필요한 스포츠다. 즉각적인 액티비티가 뚜렷하게 체감되는 축구와 농구 등과 달리 룰을 먼저 숙지해야 비로소 액티비티가 보인다. 그만큼 확고한 흥미가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일찍부터 야구에 흥미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견고한 야구팬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래서 흥미로운 변화다. 본래 한국에서 야구장은 수컷들의 놀이터였다. 1982년,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을 했건 말건, 고교야구의 인기를 이어받은 프로야구는 출범 초기부터 대단한 팬덤을 구축했다. 지역 감정이 팽배하던 1980년대의 정서를 확실하게 긁어댄 덕분이기도 했다.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목포의 눈물’을,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부산 갈매기’를 불렀다. 응원하는 팀의 패배로 격분한 어떤 홈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물병을 던지고, 상대팀 선수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야구장은 분리와 단절의 정서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심리가 체감되는 바로미터의 현장이었다. 그만큼 과격했다. 정치적 부조리로 인한 갈등이 스포츠의 팬덤으로 위장한 듯한 불편한 진실.
야구장을 찾는 젊은 여성팬들이 늘어난다는 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낡은 시대성을 극복해나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젊은 남녀 커플이 각자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나란히 앉아있는 야구장의 풍경은 이 사회의 취향과 여유가 한 뼘 늘었음을 증명한다. 서로 다른 취향을 인정하고 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다. 각자 다른 방향을 응원하면서도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그녀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태생적 의무감을 얹지 않는다. 그저 잘생긴 선수의 플레이가 좋아서 응원하는 팀을 결정했다니,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인가. 지역갈등 따위는 그녀들에게 중요치 않다. 여자는 야구의 미래다.
혹자가 이명박 욕을 했다. 나는 듣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치가 종종 이명박 같은 짓을 해대는 것을 떠올렸다. 가끔 정치적 진보를 표방하는 이들이 실생활에서 스스로 부조리하고, 권위적 억압을 불사하는 꼴을 보다 보면 구역질이 난다. 정치적인 진보가 일상에서 꼴보수처럼 구는 꼴을,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어쩔 수 없다’란 식의 합리를 만들어나가며 본인의 일상을 강요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노릇이다. 사적인 대화 중에는 자신의 이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분신이라도 해낼 것 같은 진보적 투사가 공적인 일상 속에서 둘도 없는 꼴보수가 될 때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주둥이와 뇌의 지역자치제 정책이라도 펴고 있는 것인가 의심스럽다. 이런 진보적 꼰대들의 행위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쥐어주는, 경종을 울리는 이미지로 각인되곤 한다. 그 삶을 경계해야 한다.
조금 놀랍긴 했다. 그 위풍당당한 포즈 앞에 놓인 문구들이 뜨악했다. 하지만 사채 광고도 아니고, 그걸 도덕적 해악으로 이해하고 싶진 않다. 공정택 밀어준 어머니들의 심정도 그럼 비도덕적인 거냐. 논란의 핵심은 신해철의 언행일치 여부다. 그는 해명했다. 공격적인 욕설 퍼포먼스까지 선보였다. 이에 댓글 다는 언어가 넘쳤다. 비아냥부터 실망과 오해의 성토, 그리고 그의 논리를 이해한다는 동조도 때론 발견됐다. 사교육을 옹호함으로써 공교육을 조롱한다는 그의 태도는 맥락적 논리가 있다. 하지만 그리 멋진 것도 현명한 것도 아니다. 그의 취향이려니 존중할 뿐이다. 다만 그의 광고가 부른 파장이 전 사회적이라는 것에 있다. 신해철이라는 일개 가수의 영향력이 이리도 대단함을 새삼 느꼈다. 신해철과 무관하게 흥미로운 건 진보에 대한 잣대다. 진보가 정의와 동일하다는 개념이 신해철을 둘러싼 비판적 언어의 기저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다크나이트>의 배트맨과 조커를 살펴보자. 누가 보수이고, 누가 진보인가. 아이러니하지만 진보는 배트맨보다 조커에 어울린다. 조커는 모든 사회적 제도를 조롱하고 때려부순다. 배트맨은 보수주의자다. 단지 정의와 안정을 꿈꾸는 보수주의 자경단일 뿐이다. 이렇듯 진보가 항상 정의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신해철과 관련된 언어가 위험한 건 그를 정의의 사도로 여기는 이들의 실망감 때문이다. 이 땅에서 왜곡된 진보와 보수의 정의를 다시 정립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신해철이 잘했냐고? 판단은 셀프.
만약 누군가가 내가 진보와 보수 중 어느 편에 속하는지 가늠해본다면 아마 보수보단 진보에 가깝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다. 난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고려하는 게 옳다고 믿고, 조중동보단 한겨레, 경향, 시사인을 좋아하며 사회적 변화를 설득하려는 편이므로. 분명 보수보단 진보의 프레임으로 날 해석하는 게 어울리는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진보의 프레임이 어떠한가가 중요하다. 서로의 취향이 다르듯 진보와 보수를 이해하는 스타일도 다를 것 같다. 자, 여기서 한가지 물음. 당신이 생각하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진보란 공정하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연병장에서 PT체조 8번을 150회 정도 반복시킨 다음 한번 다시 물어보고 싶다. 그렇다면 보수는 불공정하고 비도덕적이며 비윤리적이어도 된다는 거? 님하, 쫌.
도덕과 윤리, 공정성에 대한 프레임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눈다는 게 어찌나 간편한 건지 잘 안다. 현 상황에서 그것이 어찌나 잘 먹히는 주장인지도 잘 안다. 흔히 강남 땅투기 사장님들의 논리가 이 나라의 보수이며 딴나라당의 차떼기 정책도 이 나라의 보수이며 조갑제 옹의 데모하는 것들 대가리 날려 뻘플도 이 나라의 보수적 마인드로 인식된다는 거 잘 안다. 무개념이든 막장이든, 그 비논리적인 자가수성의 비인간적 처사가 보수로 자각되고 있다는 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보수는 변화를 싫어하는 게 맞으니까. 자신들의 기득권을 움켜쥐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혹은 그 권위의 영생을 위해 불변의 무한 루프로 이 세상을 무한반복 시키려는 태도는 흡사 텔미의 후렴구만큼이나 막강한 것이다. 또한 그 기득권의 석좌에 오르기 위해 공정택에 투표하는 강북의 어머니들의 심정이란 것 또한 마찬가지다. 흔히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으로 구별될 수 없는, 너나 할 것 없이 기어오르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이 나라의 1%에 합류하고야 말겠다는 피라미드적 발상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비공정한 보수를 살찌우는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가 진보와 보수를 배트맨과 조커의 태도로 양분할 때 <다크 나이트>와 같은 사단이 난다. 보수의 도덕적 결함 따위는 계란으로 바위 치듯 쉽게 허물어지고, 진보의 도덕적 결함은 그 씬을 동강내다 결국 타이타닉처럼 침몰시켜버리는 일상다반사가 되풀이된다면 그건 대체 왜 그런 것이냐. 신해철이 학원광고를 찍었다 하여 찍지마, 식빵, 내 성질이 뻗쳐서, 이렇게 화풀이하다 끝나는 게 아니라 사람 하나를 침몰시키고 목을 조르려다 그 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수순 또한 그런 강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전여옥이 오크질을 하건, 나경원이 날치기 법안 통과 후 썩쏘를 지으며 뉴스에 등장해도 그것을 보고 분개할 줄만 아는 태도는 그렇다면 무엇인가. 당신의 공정함은 대체 어느 방향으로 작동하는가.
실리적인 문제다. 당신이 진보를 논한다면 일차적으로 옳은 것과 타당한 것을 찾아 떠도는 귀와 눈을 지니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겠다. 단지 그 뿐이라면 진보하지 마라. 옳은 것과 타당한 것에 대한 검증에 혈안이 되고 이에 집착하다 스스로 허물어지는 이라면 썩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스스로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산에 올라가 풀뿌리를 캐먹더라도 자신의 양심 어느 한 가운데라도 더럽히지 않겠다는 도 닦는 심정으로 진보를 논한다면 차라리 관둬라. 그 자리는 실리를 논하는 자리지 윤리적 자세로 서로를 감시하고 자기 검증으로 충혈된 눈을 비벼야 하는 자리가 아니다. 진보는 변화를 논한다. 그 변화의 목적은 서로 좀 더 같이 잘 사는 것을 바라는 태도에 있다고 본다. 변하지 않는다는 커뮤니티는 아무리 제도적인 정비가 완전하다 한들 고인 물과 같이 썩어가는 인간의 심리에 의해 함께 탁해지기 마련이다. 건강한 보수만큼이나 건강한 진보가 필요하다. 독설과 비판만으로 보수를 겨냥하는 태도는 그저 진보 진영의 워크샵에 불과하다. 정책적 변화를 추진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한 조직적 기제를 몰아붙여야 한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불공정함은 끊임없이 개선하고 자정 하려는 노력이 중요할 뿐, 그것이 씬 자체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구멍이 돼선 안 된다. 당신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응당 그래야 한다. 단지 진보의 탈을 쓰고 공정한 척하길 즐기는 것이라면 차라리 보수해라. 땅이 꺼져라 보수를 욕하는 게 진보의 태도라고 믿고 끊임없이 자신의 공정함을 기치로 내거는 게 진보라면 차라리 그냥 편하게 살아라. 행복하기 위해서 진보를 내걸어라. 자존심이 아니라 실리를 얻기 위해서 진보를 주장해라. 그럼 우린 좀 더 편하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진보란 행복추구권을 위한 주장이지, 당신을 위한 명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