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작품을 선택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훌륭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왕이면 훌륭한 작품을 선택하고 싶은 게 배우의 마음이다. 아니면 아예 스스로 만들어버리던가.
최근 국내에서도 배우 출신 감독들의 활동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꾸준히 단편 연출을 해오다 첫 장편 연출작 <마이 라띠마>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유지태와 최근 연출 데뷔작 촬영을 마친 하정우, 연출 데뷔작을 촬영 중인 박중훈 등이 그렇다. 일찍이 <오로라 공주>로 호평을 얻었고 <용의자 X>로 주목을 받았던 방은진이나 <요술>과 <복숭아나무>의 감독으로 화제를 모은 구혜선도 마찬가지다. 과연 한국에서도 배우 출신의 거장 감독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왜 배우들은 감독을 꿈꾸는가? 이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는 감독이 꾸는 꿈이다. 물론 감독 혼자 꿈꾼다 하여 완성되는 것이 영화란 말은 아니다. 감독이 꿈꾸는 몽타주와 미장센에 숨을 불어넣고자 충실히 복무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존재할 때 그 꿈은 생명을 얻는다. 각각의 컷처럼 나뉜 스태프들의 재능을 하나의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출력이 바로 이런 재능이다. 감독의 할 일이란 그런 것이다. “어릴 때는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스크린이 도화지라면 감독은 화가이고 배우는 붓이다. 배우는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한다. 훌륭한 배우들은 자기 역할을 확실히 인식한다. 완벽하게 작품의 일부로서 투신하고, 때때로 작품의 빈틈마저 메워버린다.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탁월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동선과 리액션을 물론이고 조명의 위치와 카메라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한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부터 워렌 비티, 우디 앨런, 로버트 레드포드, 멜 깁슨 등, 훌륭한 배우가 훌륭한 감독으로 성장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런 명배우들이 감독의 자리를 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사실 배우 입장에선 자신보다 함량이 떨어지는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설 때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을 거다. 그런 경우의 수가 늘어날수록 차라리 카메라 뒤에 서고 싶다는 욕망도 커질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작품 경력을 늘려나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젠 배우라기 보단 감독의 인장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그는 일찍이 웨스턴 무비의 아이콘이란 명예를 멍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 낡아서 그 권좌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배우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감독들에 의해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가 망가지는 꼴을 번번히 목격하게 된 그는 직접 제작사를 차리고 끝내 메가폰까지 잡았다. 그리고 히치콕을 연상시키는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0)와 함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편 ‘제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수식어를 얻은 벤 애플렉은 지난 2007년 스릴러 <가라, 아이야, 가라>로 감독 데뷔한 뒤 호평을 얻었고 주연까지 겸한 범죄물 <타운>(2010)을 통해서 호평뿐만 아니라 흥행까지 이끌어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둔 최근작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대가의 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말했다. “배우라는 커리어도 이어가고 싶다. 감독이란 연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니까.” 한때 <굿 윌 헌팅>(1997)의 각본 작업을 하며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던 그에겐 졸작 액션 블록버스터에 연이어 출연하며 배우로서 바닥을 쳤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어쩌면 벤 애플렉에게 감독으로서의 길은 스스로의 연기 경력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노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벤 애플렉이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 그 뒤엔 조지 클루니가 서있었다. 그는 <아르고>의 제작자였다. 조지 클루니 역시 성공적인 배우 출신 감독이다. 폴리테이너로도 유명한 그답게도 근작인 <킹메이커>를 비롯해서 <굿 나잇 앤 굿럭> <컨페션> 등 시대적인 호흡이 돋보이는 정치적 소재의 작품들을 연출해왔고 좋은 평가를 얻어왔다. 결국 배우가 감독이 됐을 때 최고의 장점이란 최소한 자신보다 실력 없는 감독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고, 배우로서의 경력을 확보할 기회 또한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명심할 건 성공적인 족적을 남긴 배우가 성공적인 족적을 남기는 감독으로 살아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 물론 성공한 배우만이 꼭 성공한 감독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보다 큰 건 사실이다. 산수를 잘하는 사람이 수학을 잘할 가능성이 보다 큰 것처럼.
“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지. 내가 몇 년 전에 다신 연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처럼.” 4년 전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가 배우로서 출연하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선언을 거짓말로 둔갑시킨 작품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 메가폰을 잡은 건 로버트 로렌즈다. 그의 첫 연출작이다. 로버트 로렌즈는 긴 시간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했다. <블러드 워크>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등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제작하고 기획하며 파트너로서 긴 시간을 공유해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덕분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평범한 드라마다. 늙어가는 한 남자와 그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비범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만으로 유사하게 읽히는 작품이 있다. <그랜 토리노> 말이다. <그랜 토리노>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늙어감에 관한 영화다. 노인에 관한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빌린 두 노인은 완고하다. 자기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는다. 물론 <그랜 토리노> 쪽의 노인이 보다 그렇다. 어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배우로서 남긴 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두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캐릭터와 밀착하는 건, 마치 그의 전기적인 캐릭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처럼 어차피 그 역시 늙어가는 처지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결국 어떤 퇴물에 관한 영화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로 일해온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구단주의 주변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스카우트 일을 이어나가기엔 그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는 이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식이 낡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그 일에 매진한다. 노구를 끌고 먼 길을 운전해간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낡아가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치명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는 자신의 중요한 커리어를 뒤로 밀어내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나선다. 오랫동안 반목하고 지냈던 부녀는 그 길을 함께 하며 갈등과 화해를 경험한다.
빤한 이야기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늙어가고, 퇴물이 된다. 빠른 구속을 자랑하며 자신만만하게 직구를 뿌리던 영건도 어느 순간 정교한 제구와 볼컨트롤에 기대어 맞춰 잡는 노장이 돼야 한다. 새까만 후배가 자신의 마운드에 올라와서 자신을 불펜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언젠가 감내해야 한다. 사람들은 젊다는 것에 투자하길 꺼리지 않는다. 반대로 늙었다는 것에 포기하는 것도 당연하다 믿는다. 관록이나 지혜라는 말은 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봉처럼 유용하게 느끼질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노인의 지혜와 관록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빤한 선악 구조를 내세운다. 패기만만한 젊은 야심가의 빤한 수를 장외로 날려버린다. 역전타가 선명하게 예상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이 빤한 경기를 종종 비범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건 타석에 들어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타 들어가는 듯한 음성, 80세가 넘은 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박력은 대단하다. 주름 하나마다 박력이 새겨진 기분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병약한 노인들과 조금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퇴물로 내몰리는 상황을 본다는 건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기도 하다. 육체의 노쇠와 함께 반비례하게 축적되는 경험 속에서 익어가는 지혜를 팔 곳이 없다. 퇴물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퇴장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겨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의 거스 또한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증명해낼 뿐이다. 아직 자신의 지혜는 쓸만한 것이라고. 거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공을 쳐내는 배트 소리로서 구질과 배트 스피드를 파악해낸다. 거짓말같다.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랜 세월을 그 현장에서 자리하고 지켜본 전문가의 관록이 만들어낸 유산이다. 거짓말 같은 그 연륜은 결국 세월을 소모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어떤 노인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결국 이를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만큼은.
모든 노인이 깊은 지혜와 연륜을 품고 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생이 무르익어간다는 사실일 거다. 결국 퇴물이 되어 세상의 뒷방으로 밀려날 때 그런 가치나마 손에 쥐고 있지 못하면 다시 세상으로 떠밀려나올 기회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나 <그랜 토리노>는 결국 노인들에 대한 영화라기 보단 어떤 노인에 관한 영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온 이에 관한 이야기다. 단지 늙어간다는 것을 노스탤지어로 치환하지 않는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결코 초라한 노인의 얼굴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박력이 넘치는 인상으로 노인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에 마주선다. 퇴물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묵묵하게 살아간다. 마치 원래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끝내 퇴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와 같이 빤한 드라마에 비범한 인상을 새겨 넣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엔 노인을 위한 변명은 없다. 그것이 그 지혜와 연륜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여생을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마치 이 빤한 드라마를 신중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것처럼.
생은 시작과 달리 예정 없이 끝난다. 죽음이 슬픈 건 그래서일 게다. 죽은 자들의 빈 자리는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생 한복판을 공허하고 황량하게 비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는 바로 그 죽음을 소재로 둔 영화다.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기억 속에 놓인 망자들과 접속하는 조지(맷 데이먼)와 인도네시아를 휩쓴 쓰나미로 인해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랐던 프랑스의 유명 저널리스트 마리(세실 드 프랑스), 그리고 죽은 쌍둥이 형을 간절히 그리는 소년 마커스(조지 맥라렌)까지, 제각기 발 딛고 선 땅 위에서 직간접적으로 죽음과 사후를 경험한 이들의 뿔뿔이 흩어진 사연이 서로의 교감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린다.
경험의 진위와 무관하게, 죽음이란 결국 개인적인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묘사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그 초현실적 영역에 환상을 뒤집어씌운 결과물로 완성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히어애프터> 역시 사후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영화들이 취하던 관습을 크게 뒤집지 못한다. 빛으로 가득 채워진 무의 영역처럼 보이는, <히어애프터>의 사후 이미지는 죽음을 경험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설정된 결과물이라지만 결국 이 불분명한 사후의 상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저 허구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말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히어애프터>를 관통하는 핵심이 아니다.
<히어애프터>는 죽음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담보로 영화를 신비로 치장하는 영화가 아니다. 사후라는 초현실적 영역을 실존적 경험으로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통증에 관한 드라마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각각 먼 곳에 떨어진 세 인물은 죽음에 속박된 삶을 살아간다. 무시무시한 쓰나미 이미지로 극초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블록버스터의 재난 스펙터클 유희와 달리 <히어애프터>의 쓰나미 시퀀스가 관객에게 쥐어주는 건 극심한 통증이다. 압도적인 죽음의 물결은 빠르고 신속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수장시키고 수많은 삶을 집어삼킨다. 이는 <히어애프터>가 주목하는 죽음이 단지 생 이후의 단계로서의 영역 찾기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생의 상실이 야기시키는 현실적 통증을 진단하기 위한 것임을 웅변하는 첫머리 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작위적으로 설정된 상투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이유가 분명한 사연을 품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매개로 한 이 개별적인 사연들이 옴니버스적인 스토리 안에 상주하고 점차 그 흐름 속에서 맞물려나갈 때, 인위적인 의도의 위장에 실패하고 있다는 인상이 감지된다. 세 개의 줄기를 엮어 넣은 <히어애프터>의 옴니버스적 스토리에 종속되며 이런 인물들의 사연은 죽음이라는 경험의 단면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에 가깝다. 죽음에 근접한 경험을 해봤거나,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격했거나, 타인의 기억과 경험 속에 내재된 죽음을 끊임없이 감지하는 세 인물은 제각각 죽음에 대한 경험의 너비를 확장해내기 위한 요소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이 영화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두른 말판과 같다면, 그 주제를 품은 이야기 속에 자리한 캐릭터들은 일종의 말인 셈이다. 어떤 주제의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요소들을 조정하고 있다는 인위적인 양상이 발견되며 그로 인해 내러티브는 종종 불가피하게 산만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어애프터>는 분명 특별한 덕목을 지닌 영화다. 죽은 자와 접속하는 영매의 삶을 사는 조지의 능력은 타인에게 재능이라 여겨지지만 스스로에겐 둘도 없는 저주다.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죽음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품는 이중적인 심리를 연상시킨다. 누군가와의 접촉만으로 산 자에게 남겨진 망자의 기억을 목격하고, 망자의 전언을 전달해야 하는 자신의 삶에 진력이 난 조지는 타인을 위로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삶을 돌볼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마리는 삶의 기반을 상실하면서도 자신이 목격한 것들 것 대해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전달하길 멈추지 않는다. 어린 쌍둥이 형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마커스 역시 그 죽음이 남긴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 모든 인물들의 삶은 누군가의 죽음이 그 주변에서 살아 숨쉬던 이들에게 남기는 영향력의 너비를 대변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의 죽음은 곁에 있던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거나 멈춰 서게 하거나 뽑아내 뒤흔든다.
영화에서 가장 명징한 순간은 마리가 겪는 쓰나미의 스펙터클을 한 차례 경험한 뒤에 등장하는 조지의 심령술 신이다. 살아 있는 이에게 죽은 이의 메시지를 전하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끝내 치유시킨다. <히어애프터>는 그 경직된 형식과 무관하게 보는 이의 영혼을 감화시키는 명료한 찰나들이 곳곳에 자리한 영화다. 이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관통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시선이 단순히 이미지의 연출을 뛰어넘어 어떤 정서와 조응해낸 덕분일 것이다. <그랜 토리노>를 통해서 강직한 보수주의자의 현명한 죽음을 그려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타인의 죽음 앞에서 제 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마련했다. 죽은 이들의 영역을 갈망하는 산 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히어애프터>는 결국 사자들을 위한 송가가 아니라, 그 망자들의 곁에 머물던 산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 가깝다.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되레 이를 뛰어넘는 인정의 방식으로서 그 이전의 실제적인 삶을 위로하고 구원한다. 거대한 재난이든, 사소한 죽음이든, 생사는 언제나 갈대처럼 흔들린다. 죽음은 결국 삶 이후의 영역이다. 산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을 위로하며 제 생을 구원하며 살아야 하는 법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일으키는 법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엄숙하지만 온화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멀지 않은 땅에서 삽시간에 휩쓸려 나간 수많은 생들에게 깊은 애도를. 그 곁에서 숨쉬던 모든 이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이 거대한 참사 앞에 상처 입은 세계의 영혼에 치유를.
그의 입술이 일그러진다. 예의를 모르는 손녀 앞에서 한번, 이웃에 이사온 동양계 가족 앞에서 한번. 아들의 말처럼 50년대를 사는 사람이다. ‘포드’에서 일생을 보낸 그에게 ‘도요타’를 운전하면서 자신의 유산만 노리는 아들은 개탄할 현실에 불과하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성조기를 집 앞에 매단 것처럼 그는 뼈 속까지 보수적인 미국 국민이다. 이웃의 동양인들은 하나같이 눈엣가시다. 하지만 그 동양인 이웃들이 늙은 보수주의자를 변화시킨다. <그랜 토리노>는 그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변하는 건 보수적 신념이 아니다. 다만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가득하던 보수주의자가 희망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사회로 환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까지의 과정이 그 변화의 본체다. 결말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종교적 영험에 다다를 정도의 감동을 선사한다. 표정만으로 영화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생 자체를 영화에 투영한 느낌이다. 동시에 촌철살인의 대화가 살가운 웃음마저 마련한다. <그랜 토리노>는 노장의 인생이 반영된 역작이다. 자신의 삶을 관통해온 신념의 무게를 온전히 보존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정의를 위해 복수가 아닌 징벌의 혜안을 마련한다. 그 거룩한 희생을 밟고 선 대안 세대는 빛나는 전통에 탑승해 미래로 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위하여, 아멘.
엄숙한 장례미사가 진행 중인 성당을 메운 하객들 가운데 홀로 서있는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는 중이다. 짧은 백발과 뚜렷한 주름의 굴곡은 그의 세월을 짐작하게 만드는 나이테와 같다. 부인에 대한 애도로 굳은 표정이 일그러진다. 엄숙함이 지배하는 장례미사 가운데 그의 심기를 거슬리는 일들이 눈 앞에 가득하다. 장난을 치며 히죽거리는 손자들과 피어싱이 눈에 띄는 손녀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바쁘다. 그의 입술 한 쪽이 일그러진다. 장례미사가 끝난 뒤 집에 돌아온 그는 옆집에 이사온 동양인들을 보게 된다. 그의 입술 한 쪽이 또 한번 일그러진다. 그가 사는 동네엔 동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 이민자들이 늘어만 간다.
보수주의자인 월트 코왈스키에게 작금의 현실은 개탄할만한 변화의 연속이다. 젊은이들은 날이 갈수록 무례해지고 예의는 점점 씨가 말라간다. 게다가 자신이 사는 동네엔 그 예의마저 가르치기 힘든 이방인들의 유입이 넘쳐난다. 그는 가치관과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다. 젊은 세대의 무례함을 혐오하고 피부색이 다른 이민족들의 유입을 경계한다. 자신의 일생이 투영된 ‘포드’의 1972년산 ‘그랜 토리노’를 아끼는 그에게 ‘도요타’에서 근무하고 일제차를 운전하는 아들과 그 내외는 탄식할만한 현실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란 대화가 껄끄럽지만 한낱 물려받을 유산이 남아 있는 삭막한 관계에 불과하다. 어린 손녀조차도 할아버지의 재물을 탐내고 사후 처리를 묻는다. 이웃에 입주한 동양인들 역시 그에게 야만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월트가 상종할 수 없는 족속이라 믿었던 새로운 동양인 이웃은 그의 시니컬한 삶에 예기치 못한 새로운 계기들을 마련한다.
어느 날 저녁, 동양인 양아치 갱단의 난입으로 벌어진 이웃의 소란에 월트가 개입한다. 결국 총구를 들이밀고 그들을 물리친 월트는 이웃의 감사와 함께 거듭되는 사례를 얻지만 그것이 이타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아는 월트에게 호의는 버겁기만 하다. 그러나 그 후로 월트가 우연한 계기로 이웃의 소녀 수(아니 허)를 한차례 더 구하게 되고 두 사람은 말문을 트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로 인해 수는 자신의 남동생 타오(비 뱅)를 월트에게 접근시키고 두 사람의 친분이 형성된다. 부인과 사별한 뒤, 자식들과 괴리된 채 홀로 살아가는 월트의 고독은 개인주의적 사회의 산물에 가깝다. 세대의 교류가 불필요한 세계 속에서 아버지 세대는 쓸쓸히 늙어간다. 반면 동양인 이웃엔 살가운 가족주의적인 풍요로 가득하다. 두 집안의 문화적 대비만으로도 대조적인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 차이는 월트의 편견을 일깨우는 상대성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월트의 허전함을 자극하는 무언의 구실로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동양인 남매는 월트의 강한 편견을 넘어설 수 있는 예외적인 호의를 가능케 한다. 젊지만 의외로 예의 바르며 이방인이지만 무례하지 않다. 편견을 넘어 인간적 호의가 발생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그 지점에서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그랜 토리노>는 어느 완고한 보수적 노인의 존엄한 결정을 비추기 위한 영화다. 자신의 우직한 신념을 키로 삼아 인생에 시동을 걸며 외길을 주행하던 월트가 그 시동을 유지한 채 새로운 길로 들어서서 펼치는 마지막 레이스를 숭고하게 묘사한다. 그는 결코 자신의 편견을 후회하거나 그로 인한 지난 과오를 참회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신념의 확신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이 정당한가를 판단할 뿐이다. 월트가 유색인종과 젊은 세대를 찌푸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근거는 사실 어떤 면에서는 합당하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예의가 없고, 존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월트의 문제의식이 단순히 그들에 현재를 힐난하기 위한 수단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그런 광경을 방조하거나 야기시키는 풍경 너머의 근본을 향해 인상을 찌푸린다.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부모를 둔 자식들은 예의를 잃어가고, 이방인의 사회에 편입되어 어울리지 못한 채 겉도는 유색인종들은 비뚤어진 폭력의 연대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월트는 그 모든 표면적 문제로부터 타오를 격리시킴으로써 그를 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키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쉽지 않다. 그 근본을 해결하지 않고선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의 너비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차 어떤 결심을 굳혀나간다.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종교적 영험함에 다다를 정도로 엄숙하고 장엄한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파한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는 그 위대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만만찮은 위트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월트가 내뱉는 촌철살인의 독설은 사실 욕쟁이 할머니의 그것처럼 살갑다. 독설로 포장된 위트에 가깝다. 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객석을 들었다 놓는 유희로 소화된다. 한편 <그랜 토리노>를 지배하는 대단한 박력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월트, 엄밀히 말하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제스처와 구체적 행위를 더하는 것만으로 씬의 공기를 변화시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얼굴만으로 씬을 지배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후로 4년 여 만에 스크린에 등장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인생 전반을 통해 벌어들인 내공의 깊이와 너비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투영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완전한 모양새를 구축한 연출력 역시 관건이다. 기복 없이 구획이 명확한 플롯과 감정적 빈틈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내러티브의 흐름은 <그랜 토리노>의 완벽한 행열을 이룬다. 이완과 긴장을 오가는 인물 간의 관계가 희극과 비극의 팽팽한 구도를 완성한다. 우직한 스토리텔링과 함께 세심하게 진전되는 캐릭터의 구도와 심리적 양상이 너비와 깊이를 함께 구축한다. 계산적인 정공법이라기 보단 경험적인 방식의 이야기 세공력이 빛을 발한다. 단순한 제스처의 반복이 거대한 복선으로 장착되고 미약하게 감지되곤 하던 어떤 암시가 거대한 전율로 확장된다. 계산적인 동시에 감각적인 양식으로 보좌되는 플롯과 내러티브의 구축은 <그랜 토리노>의 주제를 보필하기 위해 마련된 탁월한 부속품들이다.
(스포일러라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그랜 토리노>의 결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종결하는 <그랜 토리노>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깊은 혜안을 담고 있다. 월트는 문 앞에 성조기를 내걸 만큼 애국심이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개인주의적인 젊은 세대는 지독한 이기주의로 이해되며 타민족의 활발한 유입은 국가주의적 결속을 해치는 무분별한 난입으로 이해될만한 것이다. 지독한 편견은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개인적 악의로서가 아닌 전체적인 존속을 위한 고민으로서 그런 편견을 유지하고 지탱해나간다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랜 토리노>는 단순한 문제제기의 수준에서 시동을 꺼버리지 않고 그 해결점이 모색될만한 지점을 가리키며 새로운 주행방식을 설득시킨다. 월트의 ‘그랜 토리노’가 단순히 그의 지난 자부심을 위한 전시물이 아닌 미래의 새로운 주인을 위해 물려지는 산물로서 거듭날 때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시대를 배려하는 대안적 정책으로 거듭난다. 아메리칸 드림을 지나 전세계 인종의 전시장이 된 오늘날의 미국이 더 이상 백인들의 전유물이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체감한 백발 노인의 보수적 신념은 자신의 영토를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혜안과 우직한 결심으로 발전된다. 외부인의 유입을 막을 수 없는 현실을 위한 새로운 고민을 모색한다. 차별과 편견을 통한 억제가 아닌 선별과 교화를 통한 육성을 제시한다.
50년 전 한국전에 참전했던 월트는 전장에서 짊어지고 온 살육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는 명예로운 훈장의 치욕적 진실을 잊지 못한다. 그의 현실적 고독도 대부분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별한 부인이 자신과 친분이 있던 신부 (크리스토퍼 칼리)에게 남편의 고해 성사를 부탁한 것도 그런 상흔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트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죄책감에 맞선다. 그에게 지난 비극은 당면해야 할 현실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그 죄를 사해달라 요청하지 않음으로써 이를 온전히 자신의 책무로 짊어지며 살아간다. 그의 결심도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비극을 잉태한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책임지려는 태도는 고집만큼이나 비장한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건 자신의 기득권이 쇠퇴하고 있다는 위기에 젖어 염치없는 망발을 일삼는 어느 보신주의자들의 얄팍한 보수주의 퍼포먼스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정의가 무너지고 인간의 예의가 망가지는 사회에 대한 염려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육체를 공익적 방도로 삼아 사회에 환원한다. 스스로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될지라도 소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과감히 돌진한다. 자신의 노쇠한 육체가 새롭게 거듭나는 사회의 비료가 되길 희망한다. 자신이 점지한 대안 세대에게 폭력의 책무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의로서 그는 복수가 아닌 징벌을 택한다.
<그랜 토리노>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아들과의 괴리감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월트는 딸을 그리는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와 비슷한 실루엣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프랭키와 달리 월트는 자신이 응원하는 후세대의 좌절을 짊어지고 퇴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후세대의 발목을 잡는 모든 제반 조건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삶을 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라스트 씬이 쓸쓸하게 퇴장하는 노장의 뒷모습이었던 것과 달리 <그랜 토리노>는 새로운 전통의 주인이 된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고 사라지는 저편을 롱테이크로 비춘다. 그 풍경은 새로운 세대의 존립을 위해 삶의 마지막을 태운 어느 노장의 깊은 철학이 이룬 성과다. 롱테이크로 비추는 그 풍경에서 변하는 건 비단 인간을 통해 움직이는 차량 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변한다. 인간이 변할 때 세상도 변한다. 결국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도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가, 라는 고민과 함께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 라는 고민이 대칭을 이룬다. <그랜 토리노>는 그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에 묵직한 답변을 남긴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느 보수주의자의 냉철한 시각에 담긴 따뜻한 혜안을 그린다.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되 그 신념이 나아가야 할 철학적 공정함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신념이다. 기득권의 보신을 위해 보수주의의 문패를 내거는 알량한 거짓 연기와 다른 진짜 보수주의자의 덕목을 숭고한 방식으로 구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렇게 거장의 철학을 또 한번 설득시킨다. 언젠가 노장은 죽는다. 다만 사라지지 않을 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언젠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랜 토리노>는 그에게 영원을 약속하는 이름이나 다름없는 걸작이다. 마치 누구나 탐내는 1972년산 '그랜 토리노'처럼.
어머니가 직장에 간 사이, 아이가 사라졌다. 그 어느 곳에서도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실종신고를 하니 경찰이 퉁명스럽게 답한다. 24시간 이후에 현장 방문이 가능하다. 24시간이 지났다. 5달이 지났다.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는 집으로부터 먼 외딴 곳에서 발견된 아이가 돌아온다는 기차역으로 발을 구른다. 그리고 모자는 상봉한다.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어머니의 표정이 굳는다. 우리 아이가 아니에요. 이를 지켜본 경찰의 표정이 굳더니 입을 연다. 당신이 잘못 본 거에요. 생전 아이를 본 적도 없는 경찰이 평생 아이를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의 기억이 잘못 됐음을 지적한다.
<체인질링>은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이 짧은 문장은 눈물겨운 신파를 예상케 하지만 실상 <체인질링>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의 드라마다. 단지 아이를 그리워하는 모성이 중심이 아니다. 아이를 찾았다고 자위하는 경찰은 제 아이가 아님을 알아보는 어머니를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어머니는 이에 끝까지 저항한다. 이는 실화다. 1920년대 미국에서 사라진 아들 월터 콜린스(게틀린 그리피스)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어머니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에 관한 사연이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호흡을 지닌 <체인질링>은 전형적인 선악 구도와 약자의 승리를 꿈꾸는 전형적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를 기반으로 둔 사연은 허구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드라마 속엔 강렬한 투쟁의 연대기가 꿈틀거린다. <체인질링>의 모토는 신파가 아니라 저항이다. 모성에서 비롯된 감정적 호소와 함께 권리를 찾기 위한 소시민의 이성적 선언이 내재돼 있다. 물론 기반은 모성이다. 하지만 모성애는 투쟁심으로 나아간다. 부패한 경찰과 착복하는 정치적 시스템 전반에 대한 언질이 한 어머니의 모성애로부터 고발되고 발가벗겨진다.
사연의 형태는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새로운 애완견을 사주듯 실종된 아들 대신 찾아온 다른 아이를 모성애로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경찰의 모습은 권위적인 공포를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이에 저항하는 크리스틴을 되려 몰아세우는 경찰의 만행은 분노를 머금게 한다. 그 종래에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권리를 묵살하고 되려 억압한 경찰의 만행을 폭로하는데 성공한 어머니의 승리는 감동을 자아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든 사연은 슬프다. 진실은 조작이 가능하다. 그 조작된 진실엔 진실의 외벽으로 밀려난 이들의 처절한 사연이 짓눌려있다. 단순히 순수한 모성애로부터 발생하는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뛰어넘어 권위적 억압에 저항하는 개인의 순수한 양심을 조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1920년대를 조명하는 <체인질링>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맞닿아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진실을 강요하고, 이에 분노하는 소시민들은 저항을 거듭한다. 정경유착이 맞물려 도시를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고 조작된 평화를 전시하지만 실상 기저의 소시민들은 불안에 방치된 채 살아간다. 희생자가 나타나면 잘못을 덮고 되려 희생자를 협박한다. 권력의 지배자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로 소시민을 지배한다. <체인질링>은 슬픔을 동반한 승리를 꿈꾼다. 그 승리는 아픈 만큼 숭고하다. 조작된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선 결국 어느 개인의 헌신과 희생이 뒤따른다. 조직적인 체제를 통해 개개인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소시민은 말한다. 싸움을 걸지 않되, 마무리는 내가 지어야지. 체제에 굴복한 개인은 약자가 된다. 반대로 체제에 저항한 개인은 강자로 거듭난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시하는 정의란 이렇다. 대한민국의 가짜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미국의 진짜 보수주의자는 적어도 정의를 안다. 안젤리나 졸리의 열연에 찬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혜안에 깊은 경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