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액션 걸로 시작했지만 점차 로맨틱 코미디 걸이 됐다”는 산드라 블록의 말은 그녀의 변화를 온전히 대변한다. <스피드>(1994)의 터프한 액션 헤로인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어낸 산드라 블록은 이듬해 <당신이 잠든 사이에>(1995)로 로맨스의 중심에 섰다. 연이은 성공으로 그녀는 대중의 관심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 성공적인 두 편 이후로 그녀는 평범한 멜로나 스릴러에 갇혀 빛을 잃어갔다. 그러나 그녀를 구한 건 슬랩스틱이었다. 제작자로서도 이름을 올린 <미스 에이전트>(2001)에서 철저히 망가진 그녀의 결심은 결국 보상을 얻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를 구한 건 코미디였다. 오래된 유행가사처럼 잊혀져가던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2009)로 다시 할리우드의 중심에 섰다. <올 어바웃 스티브>(2009)는 “나는 항상 대담했다”라는 산드라 블록의 자신감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다. 최근 <블라인드 사이드>(2009)로 인상적이란 평가를 얻고 있는 산드라 블록의 전성기는 어쩌면 지금이 아닐까. 언니가 돌아왔다.
출신성분으로 할리우드 배우를 소개하는 건 새삼스런 일이다. 다만 그 출신성분이 유명세를 탔다는 사실에서 다른 의의를 읽어야 한다. 맷 데이먼도 마찬가지다. 하버드 출신이란 그의 과거는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경력을 첨언하는 수식어로서의 의미에 불과하다.
“본드는 항상 1960년대의 가치관에 밀접해 있었다. 마이크 마이어가 자신의 스파이물 <오스틴 파워>로 부자가 되는 오늘날 세계에서 그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맷 데이먼의 코멘트처럼 이제 <007>의 제임스 본드는 낡은 유산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운 건 다름 아닌 하이퍼 리얼리즘 안티히어로 제이슨 본이다. <007>시리즈로 대변되던 기존의 스파이물과 달리 체지방 비율을 줄여버린 <본>시리즈의 담백함은 실로 신선한 것이었다. 심지어 21세기와 함께 마초적 환골탈태를 시도한 <007>시리즈가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는 추측엔 부인할만한 여지가 없다.
<본>시리즈는 스파이물의 전통적인 컨벤션을 뒤엎은혁신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건 제이슨 본, 그리고 맷 데이먼이었다. 묵묵한 인상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차분함, 낭비가 없는 동작의 신속 정확함, 단단한 육체에 비견되는 비범한 두뇌, 그리고 묵직한 양심적 고뇌까지, 맷 데이먼은 작은 제스처부터 커다란 동선까지 제이슨 본을 이루는 자질 그 자체였다. 양미간을 찌푸리다 쉴새 없이 내달리는 제이슨 본은 분명 섹시한 물건이었다. 질주와 고뇌의 <본>트릴로지를 완성하던 맷 데이먼은 다른 한 편에서 유쾌한 무용담으로 또 하나의 트릴로지를 키우고 있었다. 가볍고 유쾌한 캐릭터가 즐비한 <오션스>시리즈에서 맷 데이먼은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두개의 트릴로지 이후, 맷 데이먼는 완전히 다른 입지를 구축했다.
200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배우 35인으로 꼽힌 맷 데이먼은 같은 해 ‘피플’지가 선정한 ‘살아있는 가장 섹시한 남자(Sexist men alive)’로 선정됐다. “나는 매우 낮은 위치에 있었다. 브래드 피트, 조니 뎁,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같은 배우들이 지나쳐 보낸 대본이 남아야 오디션을 볼 수 있을 만큼.” 이제 오래된 문장처럼 낡아버렸지만 맷 데이먼의 말처럼 그의 과거는 분명 그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흥미를 갖는 아이였고 그것이 여전히 그의 삶을 유지시키고 있다.” 맷 데이먼의 어머니 칼슨 페이지의 말대로 맷 데이먼은 어려서부터 특별했다. 칼슨 페이지는 8살의 어린 맷 데이먼이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저는 제가자라면무엇이 되길 바라는지알아요.” 어머니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대답은 명확했다. “배우요.” 이 일화만으로도맷 데이먼이 4년간 다니던 하버드 대학을 그만 두고 배우로서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사실에 수긍이 갈만하다. <스쿨 타이>(1992)와 같은 청춘물로 경력을 시작한 맷 데이먼은 <제로니모>(1994)에서 큰 배역을 거머쥐며 청운의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단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커리지 언더 파이어>(1996)에서 아편에 중독된 군인을 연기하기 위해 100일 동안 40파운드의 체중을 감량해야 했다. 훗날 이에 대해 맷 데이먼은 말했다. “내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지혜를 얻었다.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이나 꿈이 아닌 이상그건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굿 윌 헌팅>(1997)은 거기서 시작됐다.
이상과 다른 현실을 헤매던 맷 데이먼은 비로소”왜 내가 여기 앉아있지?”라는 생각을 품었고, “내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굿 윌 헌팅>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절친했던 벤 애플렉과 함께 각본을 써내려 간 <굿 윌 헌팅>은 할리우드의 언저리를 맴돌던 두 배우를 온전히 다른 궤도로 올려 보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역시 하버드 영문과 출신답게 작가적 재능이 있었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대본에 투영된 재능에 미래를 걸 생각이 없었다. “각본을 쓰는 건 말할 수 있는 내 길을 말하고 시스템을 비틀 수 있는 기회였다.” 같은 해 벤 애플렉과 함께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휩쓴 맷 데이먼은 그 기회를 배우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데 소진했다.
<굿 윌 헌팅>의 세트장에서 만난 스티븐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 맷 데이먼을 캐스팅했다. 비로소 오디션에서 벗어나 러브콜을 얻었다. 이윽고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1999)에서 살인마 톰 리플리를 연기하며 연기적 보폭을 넓혔다. 문제작 <도그마>(1999)에서 벤 애플렉과 다시 손을 잡은 뒤 구스 반 산트의 <게리>(2002)에선 각본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마치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듯 일했다.” 안소니 밍겔라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쉬지 않고 돌파해 나갔다. 정작 맷 데이먼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나는 그저 할 수 있을 만큼 한 것뿐이다.”
<본>시리즈와 <오션스>시리즈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서도 맷 데이먼은 배우로서 자신이 어떤 이력을 쌓아나가야할지 판단이 명확했다. “마틴 스콜세지가레오나르도와 함께 보스턴으로 가서할 일이 있다고 했을 때,나는 무조건 예스였다.” <디파티드>(2006)를 결정할 당시 맷 데이먼에게 출연료 협상은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에게 흥미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란 점이 주요했다. “빌 모나한의크레딧이 있는각본이라면을 통해 진짜 연기할만한 것이다.” 맷 데이먼은 자신의 가치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잘 아는 배우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출하고 연기까지 한 <굿 셰퍼드>(2006)에서 그와 함께 출연한 맷 데이먼은 한 토크쇼에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출연해 이와 같이 말했다.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할 수 있었던 이후로 나는 분명 더 나은 배우가 됐다고말할 수 있게 됐다.”
근래 공개된 스티븐 소더버그의 블랙 코미디 <인포먼트>(2009)에서맷 데이먼은 14kg가까이체중을 늘렸다. 소더버그의 <인포먼트>가 맷 데이먼에게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과 꿈’으로서 인정받은 셈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빅터스>(2009)와 폴 그린그래스의 <그린 존>(2010)에 주연배우로 이름을 올린 맷 데이먼은 최근존 쉐인의 서부극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 출연을 확정지었고,게이 피아니스트 ‘리버라치’의 실화를 다루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차기작에서 마이클 더글라스와 동성애 연기에 도전할 결심을 굳혔다.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이 무산됐다지만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도 여전히 건재하다. “만약 내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의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들은 안전한 선택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 나는 절대 그와 같은 길로 가길 원치 않는다.”오래 전 자신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결코 평범한 길을 걷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청년기를 거쳐 비로소 모두가 바라는 배우로 성장했다. 동시에 그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돈 치들 등과 함께 설립한 자선단체기구를 통해 아프리카의 수질 개선과 식수 공급에 앞장서고 있으며 지난 해엔 오마바를 지지하는 연설을 통해 매케인 진영을 초토화시키며 진정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천했다.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시도하기 보다 당신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제 꿈을 실현한 맷 데이먼은 이제 세상을 구한다. 그는 진정 차가운 두뇌와 뜨거운 심장을 지닌 하이퍼 리얼 히어로다.
주드 로의 연인으로 통용되던 시에나 밀러는 이별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그녀를 구원한 건 죽은 뮤즈였다. 잇걸은 이제 아이콘의 삶을 선택하며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
“누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있을까? 그녀는 사랑스럽고, 재미있고, 독창적이며, 자극적이야. 놀라움으로 가득해(Who wouldn’t get off on the way she makes heads turn? She’s sweet, fun, original, exciting, full of surprises).” <나를 책임져, 알피>에서 알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 중 하나인 니키를 설명하는 알피의 독백은 어쩌면 시에나 밀러를 위한 것이라 해도 좋다. 시에나 밀러는 시선을 사로잡는 강렬한 매혹을 어필하는 여인으로서 스크린에 섰다. <나를 책임져, 알피>의 니키를 비롯해서 <레이어 케이크>의 타미도, <카사노바>의 프란체스카도, 매력적인 남성들의 시선을 일순간 사로잡고 심장을 녹였다. 소매치기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남자들의 마음을 훔쳤다. 진정한 뮤즈였다.
정작 관객에게 시에나 밀러는 존재감이 약한 배우였다. 그녀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건 로맨스였다. 주드 로의 연인으로 파파라치들의 표적이 된 이후로 그녀의 이미지는 스크린의 한 장면보단 타블로이드의 사진 한 장으로 각인됐다. 배우라기 보단 가십면을 장식하는 셀레브리티로서 익숙했다. 동시에 슈퍼모델 케이스 모스에 비견될만한 뉴욕의 패셔니스타로서 이미지가 더욱 공고히 전파됐다. 2004년 글래스톤베리에서 선보인 그녀의 패션은 보헤미안과 히피의 스타일이 혼재된 의미의 ‘보호-시크(Boho-chic)’라는 고유명사로 통용됐다. 그녀의 룩은 유행처럼 번졌고, 시에나 밀러의 스타일이 유행했다. 그러나 오히려 시에나 밀러는 소외됐다. 그녀는 배우였다. 그녀의 알맹이는 연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껍데기에 주목할 뿐, 그 껍데기를 부수고 알맹이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에나 밀러를 꿈꾸는 연기 지망생은 없지만 시에나 밀러를 닮으려는 그녀의 아류들, ‘시에나 밀러스(Sienna Millers)’와 ‘시에나스(Siennas)’가 넘쳤다.
2005년, 주드 로와 쌓아왔던 2년여 간의 정분이 순식간에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주드 로의 외도를 알게 된 시에나 밀러는 결국 7개월 전에 맞춘 약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뺐다. 재회를 거듭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에나 밀러는 ‘꼴도 보기 싫은’주드 로와의 헤진 사랑을 기워나갈 수 없음을 재확인했다. 시에나 밀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결심이었다. 단지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별 이후로 시에나 밀러는 배우로서 중요한 경력을 맞이한다.
‘비교적 방어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시에나 밀러에게 주드 로와의 이별은 삶을 두텁게 감싸던 두려움을 파괴하는 계기가 됐다. 시에나 밀러는 앤디 워홀의 뮤즈이자 밥 딜런의 로망이기도 했던 그녀, 에디 세즈윅에 관한 전기영화이자 시대극인 <팩토리걸>의 주연으로 낙점됐다. 에디 세즈윅은 시에나 밀러를 위해 준비된 것마냥 찾아왔다. 앤디 워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뮤즈로 날아오르다 한 순간 나락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에디 세즈윅의 스물 여덟 인생사는 시에나 밀러에겐 적잖은 관심을 불렀다. “지난 여름에 인내해야 했던 ‘개인적인 큰 사연’을 통해 에디 세즈윅에 대한 영감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궁극적으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한 <팩토리걸>의 에디 세즈윅은 단순히 연기적 집념에 국한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체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에디 세즈윅에게 접근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이다. “대본에 끼워 보내진 에디의 사진을 본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사진이 나를 강타했고 이 역할로 뛰어들게 했다. 에디의 눈동자엔 비범하고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었고 상처와 흠도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그녀에게 매료됐다.”앤디 워홀과 밥 딜런이 한 눈에 반했던 에디 세즈윅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방식은 그녀에게 매혹되는 것이었다. 시에나 밀러는 에디 세즈윅에 반했고 그때부터 에디 세즈윅의 모든 것들을 수집하고 들췄으며 연구했다. “내 머리 속이 에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던 동안 심각한 고뇌에 시달렸다. 그녀는 한 순간 무너져버릴 수 있는 길을 걷곤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파괴적인 누군가의 호기심에 끌리고 만다. 그렇지만 왜 그녀가 그런식으로행동했는지이해하고자 했고 나아가 그녀의 결정에 동감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느끼고자 노력했다.”결국 <팩토리걸>은 시에나 밀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단순히 남성들을 치장하기 위해 영화에 전시되는 인물을 벗어나 영화에 삶을 새겨 넣는 인물로서 자리했다.
미쉘 파이퍼와 로버트 드니로, 클레어 데인즈 등과 함께 출연한 <스타더스트>에서 시에나 밀러는 과감히 자신을 버렸다. 비중이 대단한 역할이 아님에도 매력적인 외모를 버리고 캐릭터를 위해 스스로를 아끼지 않았다. 스티브 부세미가 연출한 <인터뷰>는 시에나 밀러 속에 감춰진 시에나 밀러의 진가를 드러내면서도 그녀의 신비를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타블로이드 정치부 기자가 유명 연예인을 인터뷰하는 하룻밤 동안을 그린 <인터뷰>에서 시에나 밀러는 스티브 부세미와 함께 녹록하지 않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카티야는 대중의 주목과 혐오를 동시에 얻는 셀레브리티의 명예와 고단함을 한 몸에 드러내면서도 스스로의 본심을 끝내 감추는 스타의 내면적 신비를 구현한다. <인터뷰>를 통해 시에나 밀러는 제25회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뉴욕의 잇걸이 인디영화계의 뮤즈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참담한 혹평을 면치 못했던 <피츠버그의 미스터리>에 출연하며 피츠버그를 ‘쉿츠버그(Shitsburge)’라 비하한 탓에 구설수까지 오르다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도 시에나 밀러의 행보는 인상적이다. 뉴욕 태생이지만 유년시절을 런던에서 보낸 시에나 밀러는 스스로를 ‘뼈 속까지 영국인이라 주장한다.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두른 그녀의 감수성은 LA의 태양과 런던의 구름을 닮았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함께 호흡을 맞춘 <사랑의 순간>에서 시에나 밀러는 불안과 인내를 한 얼굴에 담아 간절한 애증을 전한다.
<지. 아이. 조: 전쟁의 서막>은 기존의 시에나 밀러를 잊게 만들 만큼 낯선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특유의 금발머리를 가리고 흑색 가발을 착용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하는 악역 배로니스는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사실상 가장 큰 혼란은 시에나 밀러 자신에게 있었다. “선악을 오가는 캐릭터라 소화가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육체적으로 강인한 스타일은 아닌데 액션 신을 잘해 내기 위해 6주 동안 무술 훈련을 받았다. 사실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규모를 완전히 벗어난 경험이었다. 난 그렇게 큰 규모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으니까.”블루매트 위에서의 액션은 그녀에게 온전히 새로운 경험이나 다름없었다. 블록버스터는 독립영화에 얽힌 지난 추억들을 깡그리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모험이었다. ‘평소 같으면 전혀 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사람들이 실제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에나 밀러는 그렇게 블록버스터의 아이콘이 됐다. 그리고 내년 초로 결정된 후속편의 촬영을 또 한번 고대하는 중이다.
“나는 긍정적인 가치관에 큰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운명이란 허풍을 믿지만 나는 내 스스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그 믿음처럼 시에나 밀러는 지금 제 삶을 결정하는 중이다. 얼마 전 시에나 밀러는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19세기 희곡 <미스 줄리>를 현대적 배경으로 각색한 <애프터 미스 줄리>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영국의 ‘웨스트 엔드’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를 공연한 바 있는 시에나 밀러에게 어쩌면 브로드웨이는 꿈의 무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팩토리걸>은 분명 시에나 밀러의 삶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다. 에디 세즈윅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뮤즈는 과거완료형의 삶이다. 시에나 밀러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산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깨우쳤다. 그 삶이 계속되는 한, 보다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이다. 뮤즈는 성장한다.
내한행사에서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
기분이 좋다기 보단 한숨 놨다는 게 맞는 말 같다. 왜냐면 아직도 모르겠으니까. 사실 기자시사 전까지 많이 걱정스러웠다. 왜냐면 기존에 내가 보여줬던 연기와 전혀 다른 형태의 연기를 선보이는 거니까. 사실 우리나라 배우들이 SF블록버스터를 쉽게 경험해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 안에선 어떤 것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 된다.
만화적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망설임이 있었을 것 같다.
유명한 원작만화 안에서도 가장 만화적인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영화를 선택하는 초반에 긴 시간 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다. 사실 촬영하는 중간에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런데 시에나 밀러도 마찬가지로 그런 딜레마를 토로하더라. 왜냐면 시에나 밀러도 할리웃 블록버스터를 처음 경험하는 거라서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어리둥절한 건 둘 다 마찬가지였거든. 더군다나 난 더했고. 맨날 블루스크린 앞에서, ‘네 앞에 차가 지나간다!’, ‘저 뒤에 폭탄이 터진다!’ 이런 말에 맞춰서 장면을 상상하며 연기하지만 좀처럼 와 닿지가 않더라. (웃음)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놀랐다. 내가 저런 걸 찍었다니. 일본에서 시에나를 만났을 때 시에나랑 서로 막 이랬다. “영화 봤어? 놀랍지 않아?” (웃음)
스톰 쉐도우는 칼을 들고 싸우는 캐릭터인데, 남자로서 그런 액션 캐릭터에 대한 로망은 없었나?
(단호하게)없었다. (웃음) 그랬다면 이전에 이미 찍었겠지.
일단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는 아니었을 것 같다.
처음 캐스팅 됐을 땐 뭐야, 하고 집어 던졌다. 사실 <지. 아이. 조>가 뭔지도 모르고, 워낙 만화적이라 와 닿지 않더라. "따라와라! 공격하라!" 이런 1차원적인 대사나 지문들이 도처에 있는데. (웃음) 그래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건 ‘로렌조 D. 보나벤추라’와 ‘스티븐 소머즈’는 웬만한 할리웃 배우들도 간과할 수 없는 조합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전혀 와 닿지 않는 만화 같은 수준의 시나리오지만 이 사람들이 뭉쳤을 땐 뭔가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중요한 배역이란 것만으로도 주변의 권유도 상당했을 것 같다.
미국에 있는 에이전트를 통해서 <지. 아이. 조>에 대한 인포메이션(information)을 조금씩 얻었다. “꼭 하는 게 좋다. 너무 좋은 찬스다.” 그 쪽에서 자꾸 이러니까 뭔가 있겠지 싶어지더라. 사실 동양인 배우들이 자국에서 어떤 연기를 했건, 얼마나 유명했건, 항상 할리우드에 가면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가 되거나, 칼만 휘두르는 악역이 되는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미국의 에이전트에게 자주 피력했다. 그만큼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내 에이전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 아이. 조>를 권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고 계속 얘기하니까 나도 곰곰이 생각하게 되더라. 내 연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주길 바란다면 할리우드에 가는 건 궁극적으로 나를 더 크게 알릴 수 있는 기회니까 좋은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지도를 넓히기 위해서 정말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점차 나를 합리화 시키기 시작했다.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으니까.
결국 최종적인 고민은 자신을 납득시키는 일이었나 보다.
지금이야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젠 어떤 영화를 좋아한다던가 말할 때 예전의 내 취향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지만 사실 난 4살 때부터 극장이라는 공간을 좋아했다.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극장에서 나오기 싫다는 이유로 연속으로 두 세편씩 영화를 보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 때 내가 왜 그렇게 극장을 좋아했나 생각해보면 어린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꿈을 적어도 2시간만큼은 현실화시켜서 볼 수 있는 공간이 극장이었기 때문인 거 같다. 무협액션, SF, 날아다니는 캐릭터, 나도 그런 것들을 통해 꿈을 키웠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많이 변했구나 싶어지는 거다. 나는 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기쁨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통해서 나 스스로를 마인드 컨트롤하면서 나름대로 합리화시켰다. 내가 지금 이 일을 선택함으로써 해야 될 것에 대한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니까 편하더라.
우리나라에서는 원작에 대한 인지도가 전무한 편이지만 사실 본국에서는 상당한 수준이다.
진짜 신기했던 건 <지. 아이. 조>에 대한 인포메이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만화인가 생각했는데 미국에 가서 <지. 아이. 조> 팬들의 반응이나 느낌들을 접하고서야 뭔진 몰라도 이게 대단하긴 대단한 거라는 걸 알았다. 미국에 있으면서 '스톰 쉐도우' 피규어(figure) 선물도 많이 받았다. 굉장히 다양한 버전의 만화가 60년대부터 나왔고 내가 맡은 역할이 이미 예전부터 이렇게 많은 피규어로 제작됐다니 유명하긴 유명한 작품이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번에 'CGV 골드 클래스'에서 식구들끼리만 볼 수 있게 시사회를 해줬는데 <지. 아이. 조>에 대해서 좀 알고 나서 보니까 되게 신기해 보이더라. '스네이크 아이즈'나 '스톰 쉐도우'는 정말 유명하고 인기가 많은 캐릭터인데 그 안에서 내가 그걸 연기하고 있다니, 약간 그런 거 있지 않나. 우린 아니지만 <지. 아이. 조> 팬들에겐 그 인물들이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배트맨 같은 인물인 거다. 그런데 출연한 배우 입장에서 그런 유명한 만화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뒤늦게 재미있더라.
동양인 배우가 많은데 왜 하필 자신을 택했는지 궁금하진 않았나?
좀 싸서 그런 게 아닐까? (웃음) 감독이 어떤 역할을 캐스팅할 때 객관적으로 누가 더 좋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판단하는 건 웃기는 일이겠지만 단순히 그렇게 비교하는 것과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냥 그 역할에 맞는 배우가 있구나, 라고 생각했을 거라 믿는다.
사실 지금까지 해외로 진출한 국내배우들의 영화는 개봉 전부터 그 측면을 부각시키는 마케팅이 활발했다. <지. 아이. 조>를 보고 나니 지금까지 공개된 국내 배우들의 해외 진출작 가운데 가장 확실한 비중을 보여준 당사자라는 생각이 들던데 오히려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진 스스로 최대한 많이 자제한 느낌이 들더라.
내가 매니저를 잘못 뽑았나? (웃음) 원래 그런 건 매니저들이 하는 일이잖아. 우리 매니저가 둔한 가보네. 좀 뻥뻥 터트리지. (웃음) 사실 너무 많이 포장되면 나중에 보고 나서 얼마나 허무해질지 모르니까, 나는 그냥 조용히 가는 게 좋다고 봤다. 욕먹을까 봐 너무 불안하고, 사실상 좀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나중에 영화 개봉하면 볼 사람은 어차피 보게 될 텐데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미리 떠들 필요 있나. 나는 사실 (손가락을 작게 벌리면서) '요건'데, 여기선 (손을 넓게 벌리면서) '이렇게' 얘기하니까, 결국 (다시 손가락을 작게 벌리면서) '이걸' 보게 될 텐데, 이게 왜 (다시 손을 넓게 벌리면서) '이렇게' 돼있지? 이럴 수 있잖아. 말로 쉽게 설명할 순 없지만 그렇게 보이고 싶진 않은 거다. 차라리 몰랐는데 보니까 괜찮네, 이렇게 되는 게 낫지.
이번 내한 기자회견 때도 그랬지만 당신을 이야기하는 외국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달콤한 인생>을 보고 당신을 알게 됐다고 말하는 것 같더라.
물론 업계 사람들이나 되니까 아는 거겠지. 물론 채닝 테이텀 같은 경우는 내가 캐스팅되기 이전에 <달콤한 인생>을 봤다 하더라. 덕분에 그 친구는 날 알고 있었지만 시에나 밀러 같은 경우는 나를 전혀 몰랐다. 촬영 다 끝나고 DVD빌려서 봤다고 했으니까.
10억 정도의 개런티를 받았다고 들었다. 할리우드에서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가치를 환산한 금액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은데.
10억이라는 돈은 거기서도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다. 심지어 미국의 알려진 배우들도 톱스타가 아닌 이상 그 정도 개런티 받기가 힘들다고 들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일본배우들도 마찬가지고. 일단 나는 개런티에 대해선 관여하지도 않았다. 왜냐면 에이전트가 있었으니 그건 에이전트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중요한 건 이게 내 첫 작품인데 개런티 문제로 출연하느냐, 마느냐, 를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거다. 이게 나한테 어떤 역할을 하는 영화인가가 중요했지. 그런데 이렇게 많이 받기도 힘들다고 하더라. 우리 에이전트가 힘이 되게 세구나, 라는 걸 실감했다. 사실 되게 유명한 에이전트거든. –이병헌이 소속된 미국 에이전트사 ‘엔데버(Endeavor)’는 자국에서도 톱 클래스 에이전트로 꼽힌다.-
사실 ‘스톰 쉐도우’는 최근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 가운데 가장 단순해 보이는 캐릭터다. 본인의 욕심을 자제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했을 것 같은데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특별한 주문은 없었나?
일단 악당은 악당,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 그걸 딱 구분한 영화인 만큼 캐릭터의 눈빛이나 행동, 말투에서건, 그 구분이 확실히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왜냐면 워낙 정신 없고 복잡한 이미지가 등장하는 영화라 그것마저도 애매모호하고 깊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캐릭터가 단순한 요소를 맡아주길 원했던 거 같다. 사실 원래 찍을 분량에서는 과연 저 놈이 좋은 놈일까, 나쁜 놈일까, 할만큼 애매모호한 대사나 분량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의도적으로 다 잘라낸 거 같다. 확실한 의중까진 모르겠지만 내 추측으로는 2부, 3부를 의식한 거 같다. 지금은 그냥 나쁜 놈, 이렇게 단순 노선으로 나오지만 사실 원래는 약간 묘한 느낌이 있다고 느껴질 만한 지점들이 좀 있었다.
최근 들어서 계속 악역을 연기하고 있다. 아직 국내에서 개봉되지 않은 <나는 비와 함께 간다>나 전작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이어서 <지. 아이. 조>에서도 악역을 맡았다. 다만 지난 두 전작의 두 악역은 <지. 아이. 조>에 비해 상당히 콤플렉스한 악역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방금 말했지만 사실 '스톰 쉐도우'도 베일에 싸여있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에서도 짧게 나오지만 사실 그보다 더 깊은 얘기가 있었다. 스포일러가 될 거 같아서 더 말할 순 없지만, (웃음) 원래는 이중적인 느낌이 있었다. 원래 그런 점이 나에겐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편집본을 보고 약간 실망스럽기도 했다. 왜냐면 너무 단순한 악당이 돼버렸으니까. 지금은 뭔가 의중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원래 그런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걸 다 떠나서 아까 내가 말했던 것처럼 <지. 아이. 조> 팬들에게 '스톰 쉐도우'라는 역할이 차지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다른 걸 떠나서 그것 하나만으로 기분 좋게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의 캐릭터는 나쁜 직업을 가졌고 잔혹한 장면을 연출하는 역할이긴 하지만 사실 굉장히 강한 아픔과 아킬레스건을 지니고 있으며 프로페셔널이 강한 인물이다. 우연찮게 세 작품에서 악역을 맡았다. 사실 세 작품의 제작 시기나 개봉 시기가 다 달랐지만 <나는 비와 함께 간다>와 <놈놈놈>은 촬영 일정이 일부 겹쳤고, 그 다음에 바로 <지. 아이. 조>에 들어갔다. 만약 세 작품을 다 같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다면 모두 다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그 이전의 나 같았다면 너무나 신중하게 또 다시 한번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해보다가 결국 셋 다 못했을 거다.
그런데 결국 세 작품 모두 하게 됐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결정하기까지 1년 가까이 고민했다. 그 쪽에서도 이제는 대답할 때가 되지 않았냐며 재촉이 올 정도로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참 많이 생각했다. 사실 내가 한국에서 좋은 배우로 인정받고 좋은 작품을 할 기회도 생기는 만큼 지금 여기서 안주해도 될 것 같고 꾸준히 연기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굳이 모험을 해야 되나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분들은 지금처럼 내가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다면 언제 또 할 수 있겠냐며 출연을 거듭 권유했다. 트란 안 홍 같은 훌륭한 감독과 서로의 생각과 정서를 공유한다는 건 분명 매력적인 일이다. 생판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그 사람이 과연 나에게서 어떤 느낌을 뽑아내려 하는지, 어떤 면을 이용하기 위해서 나를 선택했을지 점점 궁금해졌다. 결국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결정하고 나니까 <놈놈놈>이나 <지. 아이. 조>를 결정하긴 쉬웠다. 이것도 결정했는데 이것도 한번 해보지, 이런 느낌? 그 시기를 지나고 나니 많이 열렸던 거 같다.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할까.
아까 말했던 것처럼 사실 한국에서 어느 정도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진 상황에서 할리우드에 도전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쌓아 올린 걸 다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
버리고 간다는 느낌보다는 새로운 걸 알게 된다는 느낌? 이미 내가 이건 알게 됐으니까 다른 걸 배운다고 해서 이게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나. 어쨌든 간에 처음 접하고 경험하는 환경이었던 만큼 그 속에서 내 나름대로 발버둥을 쳤던 건 사실이다. 특히 <나는 비와 함께 간다>같은 경우엔 그게 진짜 처음이었으니까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했고 그만큼 그 결과에 대해선 정말 뭐라고 얘기할 수도 없을 거 같다.
영어 때문에 처음에 고전했다고 하던데 영화에서는 딱히 그런 느낌을 못 받았다.
나는 내가 언어적인 재능만큼은 복 받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못 하는 것도 되게 많지만 적어도 그 부분은 잘할 수 있는 거 같다. 재수해서 간 곳도 불문과였고. 물론 공부를 안 해서 불어는 별로 못하지만. (웃음) 어느 나라 말이라도 배울 때마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 재능 있다는 말을 듣는다. 예전에 <백야 3.98>을 찍을 때 딱 일주일 동안 러시아 말을 현지 한국사람에게 배웠는데 그 사람이 내 발음이 너무 좋다는 거다. 다른 건 몰라도 발음을 익히고 따라 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주워들은 일본어만으로 일본사람들과 대화를 하는데도 다들 발음이 좋다고 말해준다. 그래서 그 부분만큼은 내가 남자답게 자랑해도 되겠구나 싶더라. (웃음)
현지에서 개인마다 보이스(voice) 트레이너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당황했다고 하던데.
처음에 작품을 결정했을 때 영어를 익혀야 된다고 조바심이 났는데 그게 일주일, 이주일 지나니까 무감각해지더라. 어차피 대사도 몇 개 없고 보이스 트레이너도 있다니까 트레이닝 받으면 짧은 시간에 나는 할 수 있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한 사람마다 다 붙는 줄 알았던 트레이너가 한 사람 밖에 없고 그 사람 혼자서 모든 주인공들한테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국 매니저한테 어떻게 된 거냐고 난리 치면서 빨리 전화로 알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파라마운트'가 워낙 큰 회사라서 전달된 결과를 듣게 되기까지의 과정만 몇 일이 걸린다. 결국 몇 일이 지나고 나서야 한 시간씩 두 번 정도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런데 디테일하게 지도해주더라. 나름대로 내 영어 발음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상당히 세밀한 지적을 받게 됐다. 짧은 시간이지만 효과적이었다.
아무래도 기본적인 대사의 형태가 망가지면 그걸 인지한 관객의 극중 몰입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세밀하게 지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그런데도 의외로 뉘앙스는 안 가르쳐준다. 예를 들면, 내가 스네이크 아이즈를 만나서, “헬로우, 브라더.” 하는 장면 있잖아. 그게 “헬로우! 브라더!”(격양되게) 인지, 아니면 “헬로우, 브라더.” (차분하게) 이건지 나는 모르겠더라. 그래서 내가 트레이너에게 물어봤다. “내가 스톰 쉐도우인데 그게 어떤 역인지 알죠? 스네이크아이즈는 어떤 역인지 알죠? 그럼 이건 어떤 식으로 해야 돼요?” 하지만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다. 왜냐면 자기가 감독의 월권행위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철저한 사람들이다. 내 발음 가운데 장음, 단음을 구별해줄 뿐이다. R발음을 할 때나 L발음을 할 때, A발음과 E발음의 차이점, 그야말로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만 지도한다.
영어로 연기를 하는 것과 한국어로 연기를 하는 것 사이엔 엄청난 갭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익숙한 언어로 연기할 때 감정을 전달하기가 훨씬 용이할 테니까. 그나마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먼저 경험한 덕분에 <지. 아이. 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렇진 않았다. 두 작품은 너무나 생판 다른 극과 극인 영화였거든. 겉에서 보기부터 안의 내용까지 심하게 다른 영화니까. 물론 그런 건 있었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찍을 땐 적어도 대사 NG는 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 감독이 여기서 좀 더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감정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을 받게 된다면 그 감정에 몰입하고 좀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 대사는 그냥 술술 나오게끔 해놔야 된다는 생각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대사만 외운다고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 대사의 뉘앙스나 발음, 인터네이션(internation, 억양)에 관한 것도 신경 써야 한다. 감독이 어느 부분에 액센트를 줘야 한다고 하거나, 트레이너가 옆에서 ‘지금 여기서 장음을 내야 되는데 왜 단음을 내냐’ 이렇게 얘기하는 걸 듣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감정이 싹 달아난다. 거기까지 신경 써야 된다는 게 참 어렵더라. 사실 ‘에이, 뭐 있겠어. 어차피 인간의 감정이나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데 얼마나 다르겠어’ 이렇게 좀 얕보면서 쉽게 생각하고 갔는데 오래간만에 코에 땀이 송송 맺혀가며 NG내면서 연기했던 기억이 있다. (웃음)
문화적 차이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나?
말은 대본에 써 있는 대로 하면 되지만 표정이나 제스처 같은 느낌의 차이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눈썹을 올리면서 얘기하는지, 왜 그 사람들은 저렇게 손을 사용하는지. 쉬운 예로 평상시에 그 사람들과 사적인 자리에서 대화하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아~!’ 이러면 그 사람들이 되게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우린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그러지 않나. 그게 이상한가 보더라. 그런 것부터도 많이 다르다. 그만큼 열린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지 그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고 좀 더 작업이 용이해진다.
할리우드의 현장 시스템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다.
그런 것도 소소하게 따지면 많았지. 예를 들면 주연이냐, 조연이냐, 에 따라서 분장차도 달라진다. 조연들을 분장해주는 버스에선 세컨(2nd)이나 써드(3rd)가 분장해주고 헤어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으로 주인공 위주의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매일 아침 6시에 집합해서 오후 6시까지 촬영이 이뤄지는데 하루 종일 기다리게 만들다가 거의 끝날 시간 다 돼서야 촬영이 없다고 알려줄 때도 종종 있었다. 내 촬영이 없을 거 같으면 조감독이 미리 얘기해줄 수도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 순간적으로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그냥 그런 것조차 즐기고 싶었다. 그냥 '아, 이런 게 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내가 그런 위치가 될 수도 있을 테고.
촬영을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면 그 시간엔 주로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나?
운동, 나는 배우가 아니라 무술인이었다. (웃음)
스턴트 분량이나 본인의 액션 소화 분량은 어느 정도였나?
기본적인 발차기나 검술 같은 건 내가 다 했다. 대신 점프하고 뛰어내리는 위험한 건 스턴트가 했지. 그리고 계단 뛰어올라가는 단순 노동 신 있잖아. 할리우드에선 배우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런 건 대역이 해주더라.
함께 연기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건 어땠나? 어제 내한 기자회견에서는 화기애애하게 보이던데.
그 친구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소박한 사람들이다. 할리웃 스타라고 의식하거나 잘난 체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어떤 것도 불평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편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언어적 차이 때문이라도 처음엔 다소 서먹하지 않았을까.
사실 말이 없는 사람은 친해지기 불편하지 않나. 처음에 내가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나 보더라. 나도 내가 외향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만큼이나 외향적이지 못했거든. 그 사람들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몇 년 만난 사람처럼 대하고 그만큼 빨리 친해진다. 그러다 보니까 트레이닝 받는 한달 동안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점점 더 격차가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사람들은 정말 급격히 친해지고, 나는 점점 더 동떨어지고. (웃음) 그리고 초반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스태프들이나 배우들에게 이상한 소문까지 났다. 쟤 너무 건방지다, 자기가 동양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무게 잡는다, 정확히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소문이 났다고 하더라. 당연히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 사실 워낙 속어도 많이 쓰고 그러니까 내가 대화를 못 따라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괜히 이야기에 끼어들었다가 뉘앙스도 못 알아들어서 괜히 썰렁한 상황을 만드느니 조용히 있자 싶었거든. (웃음) 그냥 말 시키면 대답이나 하는 정도였지.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그럴 거 같다. 그 친구들 입장에선 자기들끼리 다들 친구처럼 지내는데 누가 혼자 가만히 있으면 그래 보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나중에 친해진 다음에 물어봤지. “그런 소문 들었는데 진짜야?” 그랬더니, “누가 그러냐! 말도 안 된다! 너 같이 착한 애가 어디 있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음) 사실 다들 되게 좋은 친구들이다. 특히 마론 웨이언스하곤 정말 친하게 지냈다.
항상 당당한 모습이라 미국에서도 딱히 주눅들진 않았을 거 같은데.
사실 이번에 LA에 가서 홍보할 때는 일본이나 한국에서와는 완전히 반대 상황이 될 거다. (웃음) 그리고 만약 그 이전에 LA에서 내 모습을 봤으면 그렇게 말하지 못했을 거다. 쪼그려 앉아있었으니까. (웃음) 어쨌든 내 베이스는 여기고, 일본도 같은 아시아이기 때문에 베이스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친구들이 입을 떡 벌릴 정도로 일본에서 너무나 성대한 레드카펫 행사가 열렸는데 덕분에 한국 오면서 너무나 부담이 됐다. 한국에서 내가 뭔가를 좀 더 보여줘야 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일부로 도착하자마자 호스트로서 파티를 했다. 그 친구들 입장에선 그럴 거 아닌가. 한국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가보지 못한 나라인데 그 나라 배우가 옆에 하나 있으니까 ‘너네 나라 왔구나’하게 될 테니까 내가 뭔가 이 친구들을 위해서 한번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다행히도 다들 너무 고맙고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면서 좋아하더라. 나는 내가 호스트로서 긴장해서 술에 취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긴장이 풀리니까 취기가 확 돌더라. 게다가 다음 날 행사 때문에 몇 시간 못 자고 일어나서 취기가 가시질 않았고, 덕분에 어제는 취중에 인터뷰를 했지. (웃음)
최근 공교롭게도 해외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계속 캐스팅돼서 한국보다 해외에 있는 시간이 한동안 계속됐다. 향수 같은 건 생기지 않던가?
조금 그랬다. 공교롭게도 <놈놈놈>끝나고 나서 둔황하고 홍콩을 계속 왔다 갔다 했는데 그 일정이 끝나자마자 한국에 조금 있다가 바로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한 3~4개월 있었나. 그리고 잠깐 한국 들어왔다가 바로 프라하로 갔다. 그렇게 또 한 달 정도 있었고, 거의 1년 이상을 외국에서 보냈다. 미국에서 3~4개월 있을 땐 내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더라. 결국 어머니께서 못 참으시고 동생과 같이 반찬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잠깐 미국에 건너오기도 했다. 그땐 굉장히 반갑더라.
채닝 테이텀은 부인과 함께 입국했더라. 본인도 결혼 생각이 있을 텐데.
부럽지. 그런데 언제까지 결혼해야 한다는 제한시간이 있다면 빨리 해야겠지만 그런 건 아니니까. 지금 이렇게 바쁜 상황이라고 길가면서 그냥 아무나 골라잡고 '나랑 결혼 하자' 이럴 수는 없잖아. (웃음)
좋은 작품 제의가 많이 들어오는 덕분이겠지만 근래에 휴식 없이 지속적으로 연기를 거듭 해오고 있는 느낌이다. 혹시 개인적으로 스스로 그런 필요성을 느끼는 건 아닌가?
특별한 이유는 없다. 사실 어떨 땐 되게 오래 쉬기도 하고. 사실 <놈놈놈> 이전까지는 작품을 별로 안 하는 배우로 꼽혔다. 어떤 경우는 2년에 영화 한 편할 때도 있었고, 보통 1년에 영화 한편? 그랬는데 <놈놈놈>부터 이상하게 끊임없이 계속 작품을 하게 됐다. 일단 우연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활발하게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는 게 자기가 몸소 뛰어야 되는 일이니까, 내 몸이 아프고 힘들다고 네가 대신 가서 해라 이럴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나. 누군가 대신 시킬 수 있는 사무직 같은 일이 아니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질을 따지지 않고 막 구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좋은 작품이 이렇게 밀려들었을 때는 스케줄만 되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뒤에 좀 쉬어야겠지.
아무래도 아시아에서는 주목 받는 배우다 보니까 아시아 권역 내에서의 사생활은 제한 범위가 있을 거 같다. 그래서 되레 미국이나 프라하에서 촬영이 이뤄지는 동안만큼은 그런 부분에서 자유롭다고 느껴지진 않았나?
사실 옛날엔 그런 생각도 했다. 이젠 우리나라 배우도 이래저래 입지를 다지고, 이런 저런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자신을 세계적으로 선보이는 기회가 생길 수 있게 됐지만 몇 년 전까지는 지금처럼 할리우드에 나가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그 때 만약 누군가가 "할리우드 진출할 수 있으면 할거야?" 라고 물었다면 그때야 워낙 꿈 같은 일이니까 당연히 그렇다고 했을 거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유명한 사람이 된 지금은 최소한 지구상의 반 정도가 내가 맘 편하게 여행할 수 있는 나라라면 좋을 거 같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일반적인 자연인으로서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그게 정말 풍요로운 삶이 아닐까. 본래의 나를 찾거나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평상시에 배우로서 할 수 없는 그런 기회와 장소가 제공된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니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할리우드 영화를 찍게 됐고, 그게 또 어마어마하게 큰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라 영화가 개봉되면 전세계적으로 다 보여지게 될 테니까 나를 알아볼 사람이 생길 거다. 물론 아직까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알아볼 수 있을지,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없지만 적어도 느낌은 달라지지 않을까. 예전에 여행하면서 돌아다닐 대와 다른 느낌이 있을 거란 말이지. 아직까진 그런 걸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친한 배우라 할 수 있는 정우성 씨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꿈이 감독이라고 피력해오기도 했다. <쓰리, 몬스터>의 <컷>에서 영화감독 역할을 맡기도 했는데 혹시나 연출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라도 없나?
막연하게만 있다. 그건 어렸을 때 꿈이었으니까. 지금은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다만 부담 없는 단편 정도라면 한번쯤 해보고도 싶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그런 장이 주어진다면야 언젠가 해볼 만 하지. 사실 배우생활 초반에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영화를 만들면 즐겁겠다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다. 대부분 판타지 장르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가끔 영화를 보면서 ‘와, 저게 내 아이디어였는데’ 싶은 작품들도 있었다. <나비효과>가 그랬고 <버뮤다 삼각지대>라는 영화가 그렇더라. 사실 이런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다가 얼마 전에 TV에서 우연히 조금 보게 돼서 알았다. 그리고 혹시 그 영화 봤나? <더 재킷>?
키이라 나이틀리 나오는?
맞다. 그거. 내가 박찬욱 감독님한테 그 영화 보라고 그랬더니, “재미없잖아” 막 이러면서, “점퍼?” 그러더라. (웃음) 그런데 난 그런 영화를 좋아한다. 기본적인 바탕이 사실적이지만 일부 컨셉이 판타지적인 느낌을 주는 영화가 좋다. 판타지에 대한 호감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판타지 장르가 발달하지 못해서 지금까지 내가 했던 영화들엔 판타지적인 성격이 거의 없지만 나는 나름 그런 걸 좋아하거든. 완전 판타지보단 약간의 판타지적인 요소가 있는 영화. 내 출연작 중에 <번지점프를 하다>도 그런 면이 있어서 좋아한다.
스필버그 감독이 관심을 보였다는 말이 있던데.
일본 프리미어 레드카펫에서 스티븐 소머즈 감독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한 얘기가 그거였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해줄게” 하더니 그런 얘기를 하더라. 마음 속으론 (전화기를 꺼내드는 시늉을 하면서)“그 분 전화번호 어떻게 돼?” (웃음) 이러고 싶었지만 겉으로 쿨한 척, “아, 그랬어?”하고 말았다. (웃음)
아무래도 <지. 아이. 조>를 보고 나서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해외적인 입지를 기대하는 관객이 늘어날 것 같다.
나는 기대를 별로 안 한다. 괜히 큰 배역의 작품만 쫓아다니다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것까지 잃고 싶지 않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건 한국말로 한국정서를 담아내는 한국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늘 한국영화를 베이스로 삼아서 활동하다가 또 좋은 계기가 생겨서 할리우드에서 또 한번 작품하고 오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이상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니까, 좋은 감독과 작품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중에 또 생긴다면 그럴 수 있겠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여전히 동양인들이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단단히 다지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란 생각이다. 할리우드엔 중국 배우도, 일본배우도 있고, 심지어 거기로 아예 본거지를 옮기는 배우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인지에 대해선 난 약간 의심을 품고 있다.
처음엔 막연한 기회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특별한 욕심이 생기진 않던가?
지금까지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왔다. 어찌어찌 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만큼의 수준으로 모든 일이 이뤄졌다. 그런 만큼 어쩌면 여기에서 그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한국말로 우리의 정서를 담는 연기다. 물론 정말 좋은 기회가 또 생기면 그때 나가서 또 한편 하고 오면 좋은 거고. 덴젤 워싱턴이 남우주연상을 탄 게 불과 몇 년 전 같은데,-2002년- 그때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같은 미국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흑인이라는 차별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양인이 거기에 끼는 건 더 힘든 일이다. 예를 들어서 작품성 있는 영화에서 연기를 잘했다고 해도 후보로 오르는 건 가까운 시일에 가능한 일이 아닐 거다.
데뷔한지 이제 15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당신이 많은 것을 이루고,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스스로에겐 배우로서 뭔가 더 이루고 싶은 것들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목표가 없다. 사람들이, “다음 계획이 어떻게 돼요?”, “이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어요?”, “어떤 작품을 하고 싶어요?” 하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왜냐면 나는 정말 계획을 안 세우니까. 계획 없이 뭔가 갑작스럽게 덜컥 하게 됐을 땐 나 또한 설레고 놀라게 된다. 그런 걸 즐기나 보다. 만약 시나리오를 받게 되면 그걸 깨끗한 마음으로 읽어야 그 시나리오가 의도하는 바나 캐릭터를 100% 건드릴 수 있는데, 만약 내가 그 전에 어떤 캐릭터나 장르를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게 제대로 읽힐까? 내 생각이 액션에 있는데 멜로가 들어왔다면, “에이, 멜로네.” 이러겠지. (웃음) 그런 것처럼 마음을 비워두는 게 여러 가지로 좋을 거 같다. 그래야 나도 내 팬들과 같이 감동하고, 같이 놀랄 수 있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장감도 있고.
<지. 아이. 조>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될 거라 생각하나?
그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한참 지나고 나서 보니까 <달콤한 인생>이 세계의 수많은 영화업계 사람들에게 나를 주목하게 만드는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만약 <지. 아이. 조>가 성공하고 '스톰 쉐도우'란 역할이 어느 정도만큼이나마 기억된다면 이젠 세계 업계가 아니라 세계 관객들에게 내가 처음으로 다가간 작품이란 의미가 생기겠지. 물론 그건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다. 끝나봐야 알 수 있는.
<트랜스포머>가 이룬 시각적 성취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로봇의 철판을 CG로 구현하는 건 크리쳐나 생물의 피부를 재현하는 것보단 손쉬운 작업이다. <트랜스포머>의 성취는 사실상 이미지의 구현 자체에 있다기 보단 그 이미지가 정신적 편견에 가까운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지점에 있다. 테크놀로지의 혁명이라는 흔해빠진 수사보다도 중요한 건 거대변신로봇들이 실사적인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오락영화가 시장성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다. 그러니까, ‘아마, 우린 안될 거야’를 ‘꿈은 이루어진다’로 변화시킨 저력이랄까. 이는 디스토피아적 예감을 등에 업고 스릴러적 감각을 바탕으로 두른 액션 시퀀스를 선사하던 <터미네이터>의 인간형 로봇과 전혀 다른 재질의 쾌감을 두른 본격 로봇 블록버스터의 출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은 전작의 성공에 힘입은 속편이다. <트랜스포머2>도 상업적인 성공을 밑천으로 컨텐츠의 자가증식을 거듭 반복하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을 고스란히 차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트랜스포머2>가 선택한 세일즈 포인트는 양적 팽창이다. 어느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속편들이 그렇듯 <트랜스포머2>에서도 물량공세적 팽창이 단연 눈에 띈다. 일단 로봇의 개체수가 현저히 늘었다. 그리고 액션 스펙터클의 규모도 전작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너비를 확장했다. 심지어 2시간 30여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은 <트랜스포머2>의 덩치를 가늠하기 좋은 요건이다. 러닝타임의 확대는 서사보단 묘사에 대한 팽배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LA도심을 비롯해 미국을 무대로 벌어지던 로봇들의 활약상은 속편에 이르러 상하이와 이집트 등 전세계적인 랜드마크를 점령하듯 펼쳐지고 나열된다.
로봇의 개체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작보다 눈에 들어오는 로봇 캐릭터는 현저히 줄었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범블비’를 제외한 나머지 로봇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소모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매력이 없다. 물론 ‘스타스크림’이나 ‘메가트론’과 같이 악의 축에 선 로봇들도 비등한 자태로 그 맞은 편에 온전히 존재감을 알리지만 무채색의 디자인으로 통일성이 두드러진 ‘디셉티콘’로봇들은 하나같이 몰개성적이다. 심지어 컬러풀한 색채감으로 개성을 자아내는 ‘오토봇’로봇들도 딱히 명확한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새롭게 가미된 트윈스 로봇, ‘스키즈&머드플랩’은 인상적이라기 보단 눈에 밟히다 마는 수준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닥다리 로봇 ‘제트파이어’정도를 제외하면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매력을 전달하는 로봇 캐릭터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개체수가 증가했을 뿐, 하나같이 일회용에 가깝다. 물론 그만큼 질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만큼 소모적인 감상을 부추긴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물론 후반부에 등장하는 초대형 합체로봇 ‘디베스테이터’나 ‘옵티머스 프라임’의 합체버전은 새롭게 ‘득템’했다 할만한 볼거리를 추가한다. 게다가 중반부에 다다를 즈음엔 <터미네이터>를 직설적으로 겨냥한 듯한 인간형 로봇조차 등장한다. <그렘린>을 모방한 듯 방정맞게 움직이는 소형 로봇들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로서의 활용도가 낮아보인다. 늘어난 숫자만큼 출연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는 로봇이 많아 보인다.
빠른 속도감을 자랑하는 컷의 흐름은 전작만큼이나, 혹은 전작보다 더 현란하다. <트랜스포머2>는 마치 눈에서 뇌로 시각적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와 경쟁하듯 컷을 구겨 넣은 이미지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그 와중에 고속촬영을 모방한 슬로모션으로 거대한 속도감 사이에 작은 심호흡을 마련하기도 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밀고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는 두뇌적 판단을 흐린다. 정신 없음 자체를 만족의 요건으로 유도하는 양상이다. 사실상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활유적이며 의인화된 강철피부의 유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의 인정할만한 성과는 스크린에 구현된 로봇의 육중한 자태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로봇의 육체에 인간적 감수성을 투영했다는 지점에 있다. <트랜스포머2>는 이런 감수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부각시킨다. 로봇간의 격돌 과정에서 파편이 떨어져나가고 윤활유를 내뿜는 옵티머스 프라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마치 인간의 피부조직과 피로 대입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인상마저 든다. 로봇의 파괴가 아닌 살해처럼 인식된다. 그것은 엄연히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 따위와 무관한 별나라 생명체들이다. 인간이 창조한 유사 생체가 아닌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종족인 셈이다. 인간 캐릭터, 즉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나 미카엘라(메간 폭스)의 매력이 전작에 비해 반감됐음에도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로봇 캐릭터들이 그 공백을 대신할만한 자질을 지닌 덕분이다. 엄밀히 말해서 <트랜스포머2>의 주인공은 로봇이다. 오히려 인간이 조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G로 구현된 가상의 존재가 인간의 연기를 압도한다. 이는 호불호의 영향력을 떠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중량감이 늘어난 액션신은 시각적 정보가 층위를 형성할수록 지독한 기시감을 부른다. 변신과 난투의 동어반복 속에서 그 특별한 매력이 점차 반감되는 느낌이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서 로봇의 육박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드라마의 밀도보다도 광활하다. 항공모함을 부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로봇들이 몸을 던진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사이, 한낱 손바닥만한 인간들은 발에 땀나게 뛰고 달릴 뿐이다. 명확히 의미를 전달하자면 늘어난 부피에 비해 질량은 축소된 느낌이다. 오락적 밀도가 감소됐다. 로봇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 활용했던 전작의 유머는 좀처럼 활용되지 않는 반면 입담도 느슨해졌다. 전작보다도 비범한 역할을 자처하지만 오히려 전작에 비해 활용도가 낮아 보인다. 그만큼 캐릭터의 대비를 통한 시너지가 약해진 느낌이다. 인간과 로봇의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활성화되어야 할 입체적 구조가 헐겁다. 그만큼 감흥의 유효시간도 짧아진다. <트랜스포머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현란한 영상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블록버스터다. 이는 분명 유효하다. 하지만 그 유효함이 끝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동어반복적인 액션신, 몰개성적인 캐릭터로 구축된 장시간의 러닝타임은 결말에 임박할수록 과감한 물량공세를 아끼지 않음에도 지켜보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단순한 시각적 감흥에 기댄 너비의 확장만을 앞세워 2시간 30여분을 채우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인다. 물론 전작에 비해 좀 더 암담해진 분위기는 비범한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완구로봇 엔터테인먼트의 수준에 가깝던 <트랜스포머>를 성인 취향의 오락물로 끌어올렸다 할만한 변화다. 때때로 그것은 만화적 취향의 로봇 대전이 아니라 장르적 서스펜스가 가미된 잔인한 혈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옵티머스 프라임과 디셉티콘 3종 로봇이 펼치는 중반부의 전투신은 <트랜스포머2>의 액션신 가운데 백미라 꼽을 수 있는 장면이다.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마냥 생생한 질감으로 스크린에 투사된 로봇의 현란한 움직임을 지켜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엔터테인먼트다. 망막을 피로하게 만드는 컷의 속도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마냥 포기할 수 없는 유흥일지도 모른다. 말초신경이 마비될 것 같은 시각적 압도감을 감상한다는 건 분명 흔한 기회는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각적 욕망에 비해 느슨한 농담과 육중한 액션의 동어반복 가운데 사족이 남발되는 스토리를 긴 시간 동안 감내할 수 있다는 것도 그것을 충만 시켜줄 것이라 믿어지는 시각적 자극이 존재한다는 전제 덕분일지 모를 일이다. 어지럽고 산만하게 돌아가는 과잉적 이미지 가운데 로봇이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이 선명하게 판별되진 않아도 변신을 거듭한다는 것에 현혹된다면 <트랜스포머2>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영화라 추켜세울만한 요건을 갖춘 셈이다. 빈 깡통임에 틀림없지만 깡통 디자인이 압도적인 건 사실이므로, 그 디자인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결코 무시하기 힘든 결과물이다. 하지만 <트랜스포머2>는 분명 적정수준의 역치를 넘어선 과잉의 자극을 내보내는 중독적 엔터테인먼트다. 즐기고 있다기 보단 홀리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과다한 자극적 세기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실은 긴축되고 자극은 증폭됐다. <트랜스포머2>의 장기적인 흥행성패도 그 지점에 대한 호불호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그 결과는 어쩌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자극적 세기를 조율할만한 새로운 지표로서 참고될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물론 테스트베드 대한민국의 이상기후적인 열광이 보편적인 기초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무쇠팔, 무쇠다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쇠를 두른 팔, 무쇠를 두른 다리. 무쇠로 만든 인조인간 로봇이 아닌 티타늄 고합금 갑옷을 입은 인간. ‘맨’자 돌림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아이언맨>은 코믹스 출신 히어로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스크린의 새로운 아이콘이다.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언맨>은 세상을 구원하는 ‘맨’으로서의 의무를 스크린에서 성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초인이라기보단 유능한 개발자에 가까우며 안티히어로의 고독을 벗어 던진 외향적 히어로다.
선친의 대를 이어 무기회사 스타크 기업(Stark Industry)의 CEO 자리에 오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재벌2세로서의 부(富)뿐만 아니라 유전자적 자질까지 물려받았다. 미국의 핵미사일 개발에 공헌했다는 부친의 유능함은 어린 나이에 엔진을 만드는 아들의 재능으로 이어졌고 MIT공대를 졸업한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명성은 CEO로서의 사업적 재능과 결탁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매력에서 비롯된 여성편력을 가십으로 제공하며 셀레브리티 못지 않은 대중적 영향력을 뽐내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아버지의 말을 신조처럼 여기는 그의 신념이야말로 토니 스타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이 그러했듯, 거대한 스케일에 가득 채운 영상 테크놀로지를 전시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전시하기 이전에 서사적 설득력을 구성한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형제 히어로들과 다른 타입의 캐릭터 구상도를 그린다. 자신의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신무기를 시연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기지로 날아간 스타크는 테러범들의 습격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다. 생명유지장치를 통해 가까스로 생을 유지한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 무기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 <아이언맨>은 냉전 이후, 세계를 장악한 서구와 중동의 분쟁지역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아이언맨>의 정체성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만한 것이다.
스타크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나 브루스 웨인(<배트맨>)보단 (<본>시리즈의) 제이슨 본이나 (<매트릭스>의) 네오를 닮았다. 산업적으로, 혹은 국방적으로나 국가적 수호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진실을 목도한 뒤에서야 완전히 전복된다. 이는 초현실적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의 사적 고뇌와 맥락이 다른 사례다. 뉴욕 타임스퀘어를 나는 영웅의 현실적 딜레마(<스파이더맨>)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초인적 능력으로 전시하는 특이성(<엑스맨>), 유년시절에 비롯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정의구현(<배트맨>) 등 기존의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신의 능력이 되려 세상과 반동되는 형질의 것임에 고뇌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마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에 오르는 것처럼 인내하던 기존의 영웅담과 달리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오류를 깨닫고 원점으로 돌아가,(<본>시리즈) 자신을 함몰시킨 세계에 대항하고 맞서 싸운다.(<매트릭스>)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아이언맨>은 고도화된 이미지 기술을 전시할만한 그릇의 너비를 넓히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는 애초에 <아이언맨>이 <본>시리즈나 <매트릭스>와 같은 성찰보단 <트랜스포머>와 비견될만한 스펙타클을 지향한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는 토니 스타크의 신념은 자신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심을 척결하겠노라는 결심을 부르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위는 결국 더 강한 힘을 통한 합리적 수단의 공격력을 갖추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강한 힘을 구사하는 캐릭터의 폭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캐릭터의 성숙을 끼워 맞추는 수준에 머무른다. –이는 후에 <아이언맨>이 시리즈로 발전한다면 개인적 딜레마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그것은 단지 영화적인 한계라기 이전에 영화가 인식하는 현실주의적 자괴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적 자포자기, 혹은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는 현세태의 공격성-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압도하던 블록버스터의 관성적 변화-진화가 아닌-가 무감각해진 시대에서 <트랜스포머>는 육중한 외형을 전시하는 것만큼이나 세밀한 구조변화를 조작하는 것도 유용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됐다. <아이언맨>은 이를 응용한 포스트<트랜스포머>다. <트랜스포머>에서 변신로봇의 디테일한 변신과정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아이언맨>에서 초합금 갑주가 장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다. 마치 유년시절 변신로봇을 조작하던 재미만큼이나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또한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금속슈트로 감싼 아이언맨의 대결은 육중한 변신로봇들이 불꽃을 튀며 금속재질의 몸체를 부딪히던 <트랜스포머>와 유사한 이미지를 그린다.
다만 <트랜스포머>가 별나라에서 날아온 외계 우주인이라는 캐릭터의 서사적 공백을 스펙터클로 대체했던 것과 달리 <아이언맨>은 중반부가 넘어서는 순간까지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캐릭터에 대한 서사에 집중한다. <트랜스포머>에 비해 진지한 접근을 꾀하는 <아이언맨>은 전자에 비해 좀 더 성인적 취향의 스토리텔링을 고수한다. 게다가 포토제닉한 동시에 섹스 어필한 토니 스타크 역시도 성인 취향의 캐릭터에 가깝다는 점에서 <아이언맨>은 <트랜스포머>보다 성인을 배려한 장난감이라 할 수 있다. 스타크가 자신이 개발한 슈트를 장착한 뒤, 고공을 활주하며 내지르는 탄성은 마치 바이크나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것과 비견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슈트가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은 바이크나 스포츠카에 옵션을 달거나 혹은 이를 튜닝 했을 때의 흡족함과 유사해 보인다.
물론 의문의 여지는 있다. <아이언맨>에서 첫 번째로 적대화되는 대상은 아프가니스탄의 무장단체로서 이는 유사 ‘알 카에다’의 이미지즘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메카닉 슈트를 입은 토니 스타크에 비해서, 혹은 자신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이보다도 무지하고 열악해 보인다. 서구와 중동의 대립구도 안에서 이뤄지는 이미지의 단순한 대비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되, 그것이 선악의 대립과 맞물리는 동시에 우열의 이미지로 인식될만한 사안이란 점은 다소 문제가 있다. 물론 <아이언맨>은 그들의 테러행위를 뒤로 돕는 무기회사의 중역 오베디아(제프 브리지스)를 본질적인 악의 축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굴과 천막에서 생활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을 처단하고 그 이전에 그들의 살육행위를 전시하는 영화의 태도가 합리적인 폭력을 전시하기 위한 소모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혐의를 부른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며 끝을 낸 <아이언맨>이 (장차 시리즈로 진행된다면) 해결하지 못한 미성숙의 과제로 고민할만한 것이다.
스타크가 두른 갑옷의 상용화 여부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난해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이론적 근거들에 적절히 수긍할 수 있는 이에게 <아이언맨>은 충분히 유희할만한 오락물로서 기능할만하다. 게다가 하이퍼 테크놀러지 공학기술을 자아의 갑옷으로 두른 인공 초인의 면모는 수준 이상은 아니더라도 함량미달은 아니다. 개과천선한 영웅의 면모가 가볍게 그려지긴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직설적인 태도를 애써 심각하게 포장하기보단 확고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도 명쾌하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문제의식을 간과하지 않으며 이를 오락적 물량공세로 치환하는 의도는 참신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무리가 없다. 이는 여름용 블록버스터가 유지할만한 적절한 평형감각이란 점에서 평가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