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쉘 공드리와 팀 버튼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비현실을 꿈꾸는 감독이다. 하지만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몽상의 이미지를 채색하는 공드리나 자아의 내면에 깊게 잠재된 트라우마를 악몽처럼 소환하는 버튼과 달리 놀란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보다 구체화시키는데 주력해왔다. 놀란에게 잠재된 꿈의 영역은 환상적인 비주얼에 함몰되거나 몽상처럼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꿈에 매혹당할 뿐, 그 꿈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불확실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정의를 명확하게 짚고 체계화시킨다. 자신의 꿈을 꾸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꿈을 주시하고 목격해나가며 잠재된 세계관의 설계도를 작성한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세계관이 집약된 총아나 다름없다. 자신들이 설계한 꿈으로 표적을 유인한 뒤, 표적의 꿈에 침투해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생각을 추출하는 자들. <인셉션>은 마치 의식 속에 잠재된 거대한 무의식의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실험적 영상처럼 보인다. 타인의 꿈-비록 그것이 자신들이 설계한 도면을 통해 완성된 꿈이라 할지라도-에 잠입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침투한 타인의 꿈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상대의 무의식을 경계하고 자신들이 훔쳐내고자 하는 표적의 생각에 접근해낼 수 있는 최단의 루트를 궁리해 나간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머리 속에 응축된 상상력을 펼쳐놓은 창작적 도면과도 같다. <메멘토>, <인썸니아> 그리고 <프레스티지>는 인간의 의식 속에 웅크린 잠재태의 비사실적인 형상을 사실적인 현실태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구체화시킨다. 놀란은 언제나 시공간의 명확한 경계를 자신의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는 장치적 요소로서 활용한다. 망각과 기억, 수면과 각성, 환상과 트릭이라는 대립적 요소가 등을 맞댄 분리면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뒤, 두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지어 정의함으로써 상반되는 대립적 관념의 공존이 가능한 비선형의 질서를 명료하게 설득시킨다. 비현실적인 관념들을 현실적인 상 위에 올려놓을 뿐, 그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보다 입체적인 구조적 감상을 유도해낸다.
<인셉션>은 이 모든 자질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인셉션> 자체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펼쳐 보인 도면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세계관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서처럼 시작되던 영화는 점차 내밀한 설계도의 거대한 단면들을 펼쳐 보이듯 스케일을 키우지만 서사적 속도감은 유지한 채 정보의 밀도를 팽창시키며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간다. 겹겹이 쌓일 뿐 결코 뒤엉키지 않는 입체적 구조 안에서 경제적인 동선을 미리 확보해둔 것처럼 내러티브는 매끈하게 진행되고 경이적인 인테리어와 같이 발견적인 영상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인셉션>에서 묘사되는 꿈과 현실은 영화와 현실이며 동시에 허구와 현실이다. 놀란은 <인셉션>을 통해 영화를 통해 가능한 꿈의 영역을 끊임없이 파고 드는 동시에 그 거대한 허구의 연속에 짓눌리지 않도록, 즉 ‘림보’에 빠지지 않도록 이야기의 맹점을 경계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좀처럼 ‘죽이기 힘든’ ‘생각’들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이에 잠식당하지 않고자 재생되는 생각의 진전이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 출구를 확보해낸다. 입체적인 액자 구조 형태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체험처럼 펼쳐질 때,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얻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적 욕망을 입체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무대를 얻게 된다. 비선형적인 이미지를 통해 구축되는 명확한 논리 속에서도 깊게 응축되어 발현되고 마는 페이소스는 <인셉션>의 스토리텔링에서 가히 비기에 가깝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싸워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관과 같다. 현실을 인지하는 의식이 끊임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부수는 무의식의 세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낸 듯한 세계관이 스크린 위에 구현된다. <인셉션>은 분명 하나의 전형으로 남을 만한 작품이다. 이는 단순히 그 세계관의 외형이나 구조 혹은 비범한 이미지의 출현과 같이 명확하게 확인되는 결과물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완성된 작가적 세계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투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겹겹이 싸인 그 꿈의 세계 속에서 저마다 분투를 벌이는 구성원들의 활약에 매혹 당하고 헤어날 수 없게 몰입하다 끝내 의미심장한 탄식을 내뱉고야 말 당신들의 감상은 이미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삶은 악보가 없는 연주와 같다. 저마다의 일상으로 마디를 채우고, 삶의 악절을 이룬 뒤, 종래엔 하나의 악보로서 인생을 거둔다. 소나타처럼 단정하게 저마다의 멜로디를 보존하는 개인의 삶은 콘체르토(concerto)와 같은 긴장과 이완의 협주적 관계로서 세계의 하모니를 이루기도 하며 어느 누군가는 거대한 심포니처럼 웅장한 울림을 전하고 영원을 산다. 저마다의 인생은 이 세계의 악장을 이루는 크고 작은 악절이다. 멜로디이며, 리듬이고, 하모니다. 그 삶에 준비된 악보는 없다. 누구나 텅 빈 오선지와 같은 시간을 제 삶으로 채워나간다. 누구나 <솔로이스트 The Soloist>로서 삶을 연주해나간다.
2005년 4월 17일, LA타임즈엔 ‘2현으로 세상을 소유한 바이올린 주자(Violinist Has the World on 2 Strings)’라는 헤드라인의 칼럼이 실렸다. ‘포인트 웨스트(POINTS WEST)’를 연재하는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의 글이었다. LA의 ‘펄싱 스퀘어(Pershing Square)’공원에 있는 베토벤 동상 주변에서 들려오는 ‘베토벤 소나타’를 쫓아간 ‘스티브 로페즈(Steve Lopez)’는 2현밖에 남지 않은 고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Nathaniel Anthony Ayers)’를 만났다. 그 뒤로 스티브는 나다니엘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도시의 거리 정책에 대한 의견을 쏟아냈다. 결국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도시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LA타임즈 기자이자 인기칼럼니스트인 스티브 로페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하게 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제이미 폭스). 스티브 로페즈가 나다니엘에 관해 연재한 칼럼을 엮어 전기적 소설로 각색한 동명원작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솔로이스트>는 실화와 영화의 협연이다. 단조와 같은 삶 속에서 피로와 권태를 느끼는 스티브는 전환을 위한 쉼표를 갈망한다. 도돌이표와 같은 착란에 갇힌 나다니엘에겐 새로운 삶을 위한 마침표가 필요하다. 나다니엘을 위해 헌신적인 원조를 마다하지 않는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통해 드라마틱한 기사 소재가 아닌 진짜 삶을 정화시키는 감동을 얻는다. 나다니엘은 스티브의 진심을 통해 점차 세상에 마음을 열어나간다.
스티브와 나다니엘의 관계에 망원경을 들이미는 동시에 그들의 개별적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솔로이스트>는 현실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관계적 묘사방식에서 현실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겨 넣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어내기 어렵다. 형태적으로 관계를 묘사해나가지만 재현적 이미지 이상의 정서적 감흥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오만과 편견>과 이언 매큐언 원작의 <어톤먼트>와 같이 영국작가들의 텍스트를 풍요롭고 섬세한 이미지로 전환해낸 조 라이트의 감수성 어린 재능도 <솔로이스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섬세한 문체를 예민한 영상으로 치환하고 풍요로운 문장을 풍부한 색채에 반영하며 조 라이트의 감각을 비범하게 드러내던 전작들과 달리 <솔로이스트>는 또렷하고 선명한 이미지가 주류를 이룬다. 물론 콘트라베이스 현을 포착하는 클로즈업 광각 샷과 함께 베토벤의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치환한 환상적인 장면과 같이 예민한 시선과 풍요로운 감각을 드러내 보이긴 하나 전반적으로 <솔로이스트>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이미지는 그 드라마만큼이나 평이한 결과물에 가깝다.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건 <솔로이스트>가 재현해낸 실화 역시 마찬가지다. 스크린은 단지 현실의 감동을 반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현실이 이뤄낸 감동의 본위가 스크린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고 있는지, 혹은 스크린이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발췌해내고 있는지가 주요한 관점으로서 감상을 지배하게 된다. 물론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뒤늦게 그 사연의 실체가 된 현실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것이 실화라는 정보를 미리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솔로이스트>는 허구적 사연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판단한 관객의 착시를 보다 강렬한 감상으로 이끌어낼 가능성이 다분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끝에 걸린 현실성의 환기가 <솔로이스트>에서 가장 강렬한 대목이다.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현실을 통해 완성된 영화라는 점이 <솔로이스트>에 강한 방점을 남긴다. 이는 결론적으로 <솔로이스트>가 부여하는 영화적 감동이 뒤늦게 체감하는 현실에 대한 환기보다 놀라운 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두 인물의 관계와 함께 개별적 인물의 고독과 혼란을 묘사하는 영화는 두 영역에 놓인 정서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고 저마다 방치하듯 선을 벌려나가는 느낌을 준다. 덕분에 내러티브의 집중력이 응집되지 못해 감상을 흩뜨리고 있다는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제이미 폭스는 호연을 펼친다. 하지만 순차적인 수순을 따르듯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서 두 배우의 연기 역시 평범함을 더하는 요소처럼 나열되는 것만 같다. <솔로이스트>는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의 가치를 방증하는 작품에 불과하다. 딱히 부족한 인상을 남기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말미에 다다라 스티브 로페즈와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의 근황을 전하는 자막이 영화적 재현보다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실화적 유산을 넘어서지 못한 재현적 한계의 사례로서 유용해 보인다. 마치 원곡의 울림에 도달하지 못하는 연주력을 선보이는 관현악단의 공연을 보는 것만 같다. 다만 에사 페카 살로넨의 지휘 아래 베토벤 심포니를 연주하는 LA 필하모닉의 공연은 어떤 영화적 얼개와 별개로 좋은 부록의 역할을 한다. 만약 현재에도 그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두 인물의 실제적 모습을 보고 싶다면 LA타임즈 홈페이지에 있는 스티브 로페즈의 칼럼을 검색해볼 것. 칼럼과 함께 첨부된 동영상 너머의 실제적 삶은 재현이 넘볼 수 없는 감동을 전달한다.
유일하게 제 시기에 정상적으로(?) 개봉되는 첫 영화다.
사실 다른 감독들에겐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이겠지만 나로서는 유일하게 처음으로 제 때 개봉되는 영화라서 감개무량하다.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 내 팔자가 그랬던 건데 어쨌든 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이를 잠식하는 두 가지 사건이 생겨서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맞았고, 뜻하지 않게 안티 <반두비> 세력들이 엄청난 악성 댓글을 올리는 바람에, 그래도 일단 개봉된다는 건 좋은 거지. 이번 계기를 통해서 다음 작품들은 이제 시차를 두지 않고 완성될 때마다 제 때 개봉했으면 좋겠다. (웃음)
<반두비>가 친구란 의미의 방글라데시 단어라고 들었다.
사실 현지 발음대로 부르면 ‘반도비’가 맞다. 그런데 <반도비>라고 쓰면 반도에 내린 비? (웃음) 아무래도 굳이 ‘반두비’라는 발음을 선택한 건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어감 때문이다. 이미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반두비’라는 제목의 동화책이 나왔더라. 어느 초등학교에 전학 온 방글라데시 출신 어린이와 한국 아이들의 우정을 다룬 내용인데 그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그 친근함에 필이 꽂혔다. 미국에서 ‘어륀지’라고 부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오렌지’라고 하는 것처럼, ‘머다나’보단 우리나라에선 ‘마돈나’가 익숙한 것처럼 ‘반두비’라는 어감이 내겐 느낌이 왔다. 이게 비록 외국어라서 처음 듣는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제목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유니버셜한 느낌이 나한테 와 닿아서 과감하게 제목으로 선택했다.
밝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네이밍 단계에서 이미 실현된 것 같다. (웃음)
욕심인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느낌이다. 전작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열 명 중에 한 명도 제목을 제대로 기억하는 분이 없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콤마(,)가 있다는 건데 민용준 기자도 항상 그거 안 넣더라. (웃음) 사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어려운 제목이긴 한데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My friend & his wife>, 상당히 시적인 음율이 가진 제목이 된다. 어쨌든 이번만큼은 발음하기 편한 제목을 붙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지.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영화지만 <반두비>는 그보다 적나라한 대사나 행위를 통해 현실정치를 손가락질한다.
내 작품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건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고. (웃음) 작품을 만들 때 난 항상 시대의 공기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자세를 염두에 둔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 작품을 만드는 상황이 영화에 반영된다. <반두비>를 촬영하기 직전에 격렬한 촛불 시위가 있었고, 서울시 교육감 선거도 있다 보니 그런 게 자연스럽게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배경으로 자리를 하게 되더라. 애초부터 정치적인 메타포를 넣고자 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작품을 만드는 상황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그 상황을 보는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 들어서 그렇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완성된 영화를 보다가 나도 놀라는 경우가 있고. (웃음)
<반두비>가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라고 들었다. (신동일 감독은 한 여고생이 자신이 다니던 학원선생님과 함께 부모를 살해하고 학원비를 탈취했던 사건이 <반두비>의 배경이 됐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부터였나.
정확히는 2001년 한 11월 즈음에 어느 지하철 안이었던 것 같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스포츠신문을 우연히 보다가 그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걸 무조건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긴 했지만 그걸 바로 추진할 순 없었다. 그 당시는 내가 <신성가족>이라는 단편을 만들었지만 장편영화로 데뷔하기 전이었고 그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실이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주변 여건이었으니까. 그러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완성하고 나서야 이제 본격적으로 만들어야지 싶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가능하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계속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다고 내 마음 언저리에 계속 묻어뒀던 소재가 된 거지.
그 실화가 당신에게 흥미를 부여한 지점이 궁금하다. 그 사건인가, 그 사건을 둘러싼 환경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자극적인 사건이었는데 무엇보다 내가 주목했던 건 그 사건을 일으킨 여고생을 그렇게까지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렇게까지 상황을 어긋나게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죄악을 저지른 여학생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소재에 대한 흥미보단 사회현실에 대한 분노와 개인에 대한 애처로움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 셈이지.
그런데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없었던 건가? 결국 모티브가 된 그 사건을 그대로 영화화시키진 못한 셈이다.
내가 포기했지.
그 모티브로부터 전혀 다른 형태의 <반두비>가 완성된 건 어느 연유인가?
불과 17~18살 밖에 안된, 꿈과 이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나이의 여학생이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작용해 영화를 만든 건 맞지만 실제로 영화는 그 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비록 2001년도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지금도 입시 문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걸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영화를,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극적으로 여고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라도 응원과 격려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왔지만. (웃음)
여고생이란 소재는 결국 그 실화에서 발췌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 캐릭터를 연결하게 된 착상의 시작이 궁금하다. 둘 사이엔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궁금할 거다. 실화를 재현의 소재로 다뤄서 영화로 만드는 건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 때문에 포기했지만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둔 영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반두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두 여고생 얘기로 풀자고 결심했지. 한 명은 지금의 민서처럼 가난한 아이, 또 한 명은 유정이라는 아이인데 아버지가 학원장이라서 학원 선생들이 집에 와서 개인교습을 해주는 유복한 부잣집 아이였다. 그리고 둘은 절친한 친구인데 어쩌면 여성판 예준과 재문 같은 관계라 볼 수 있는 우정 얘기로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정이라는 애는 앞날이 보장된 애다. 반면 민서라는 아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과외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용돈도 넉넉치 않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아이다. 요즘 서울대 진학하는 애들 대부분이 안정적인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들이더라. 개천에서 용 나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할 정도지. 어쨌든 내가 얘를 대학 보낼 방법을 고민하면서 찾다 보니까 사회 봉사활동으로 포인트를 얻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아이디어가 생각났고 거기서 카림이라는 제3의 인물이 나왔다. 그런데 이대로 시나리오를 썼다가 제작은 포기했다. 작품 활동 몇 번 해보고 나니까 직감적으로 이 이야기는 현재 한국에서 만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어째서?
유정이는 좀 있는 집 아이니까 있어 보이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미술비용이 많이 들 거 같았고, 그만큼 제작비가 더 들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예 유정을 날려버리고 민서와 카림 얘기로 집중하자 생각해서 카림이 남자주인공이 됐다. 그러니까 우연히 드라마의 필요성에 의해서 대상이 된 인물로 생각했던 이주노동자가 작품이 더 구체화되고 심화되는 과정에서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신과 전혀 무관한 본질은 아닐 것 같다. 사회적 약자를 캐릭터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미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본적으로 나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가 민서와 카림을 주인공으로 얘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카림이 존재적으로 아웃사이더라면 민서는 시기적으로 아웃사이더다. 카림 같은 경우는 이방인으로서 한국사회 하층민의 존재를 대변한다. 민서 같은 경우, 가장 에너지틱하고 젊음을 발산해야 할 십대 후반 사춘기 시기에 입시 이데올로기에 젊음을 저당 잡힌 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아웃사이더라는 동질성이 형성하는 드라마적인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더라. 덕분에 이렇게 전무후무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원래 시나리오대로 두 여고생을 중심으로 한 영화였다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비슷한 관계를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반두비>의 민서와 카림은 마치 <방문자>의 호준과 계상의 관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가 형성되고 방향성을 얻는다.
언뜻 봐서는 전혀 무관한 사이처럼 보이는 관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다 연관돼있다고 생각한다. 또 내 나름대로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연관시킬 수 있는 거 같다. 물론 그 관계는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적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우호적인 관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주노동자보단 여고생이 한국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고, 거기서 둘 사이의 갈등도 발생한다. 하지만 자신은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라 생각하는 민서가 자기에게도 속물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이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자각하면서 변모하는 모습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 보여진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변화가 그려진다는 게 중요했다.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카림과 같은 이주노동자 외국인에 대해 보편적인 포비아를 공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당신은 어땠나?
나도 포비아가 있었던 거 같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때문인지 몰라도 강한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었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내츄럴 본(natural born)’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이 좀 강하게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주인공인 영화도 거리낌없이 만들 수 있었던 거 같고, <나의 친구>에서 다룬 미용사나 요리사는 서민, 노동자 계급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반두비>도 후진국 유색인종이나 무슬림처럼 타자화된 사람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거부감은 애초에 없었던 거 같다. 이주노동자 문화제 같은 곳에서도 친절함을 느낀 적은 있지만 경계심이 든 적은 없었으니까. 안타까운 건 그런 편견들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영화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제노포비아 현상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펼쳐진다는 것에 놀랐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잠재적 수준이 있었음에도 예상보다 높은 수위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직접적인 체감의 강도차도 다를 것 같고.
내 자신이 잘 났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덜 떨어진 인간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적이었다. (웃음) 너무 안타깝지. 친절하게 대사로도 나오지만, <반두비>의 주제는 ‘Open your mind. 마음의 문을 열어’다. 상대방은 마음을 열려고 하는데 굳이 그런 걸 절대적으로 거부하거나 외면하려는 분이 계시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분들도 소통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 분들을 만나보고도 싶다. 만나서 서로에 대한 오해나 선입견을 허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분들께서 꼭 영화를 보셔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매도하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여주면 내 진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분들에게 <반두비>가 조금이나마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2001년도의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배경은 엄연히 현재다. 여고생들의 실상에 대한 취재도 필요했을 것 같다. 2001년도에 알게 된 그 사건과 도입부 여고생들의 방과 후 시퀀스가 좀 맞닿아 있는 거 같다. 일종의 맹아라고 할까. 그 사건엔 서울대에 가야 한다는 여고생의 강박관념과 이에 갈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부추긴 학원장의 역할이 있었다. 짧은 시퀀스지만 현재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고생의 모습은 실제 사건의 여고생을 짓누르던 강박관념을 연상시킬만한 짧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학생들이 주고 받는 대사들은 내가 특별히 지정한 대사가 아니라 내가 준 모티브를 바탕으로 그 아이들끼리 직접 만든 대사였다. 나는 방학 되면 뭐할지, 학원과 관련해서 스스로 너희가 대사를 만들어봐, 라는 간단한 가이드만 제시했다. 리허설하면서 들어보니까 그 친구들의 보편적인 정서나 가치관을 반영하는 대사처럼 들려서 생동감이 느껴지더라. 실제 고등학생들의 영어점수에 대한 고민이나 방학기간 학원 문제가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방학이면 학생들이 여행을 가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기 정신을 살찌워야 되는데 오히려 방학에 더 집중적으로 입시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안타깝고 비극적이지. 민서가 돋보이는 건 그런 안타까움에 저항하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 도입부에서 친구들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민서의 행동 자체가 드라마가 되는 셈이지.
드라마적으론 비논리적 상황을 연출하지만 논리적 형태의 현실참여적 발언들이 그 비논리를 중화시키는 역할로서 작동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작품이 불균질하게 느껴진다.
브레히트는 연극 도중 관객이 몰입하는 순간에 디테치(detach), 이화를 시켜버린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버린다던가, 엉뚱하게 노래를 부른다던가, 결국 영화로 따지면 관객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영화 속에 담긴 세계가 단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거다. 나에게도 영화보다 중요한 건 현실이라는 걸 환기시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그런 걸 느끼면서 거리감을 두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을 느끼면서 뭔가를 곱씹거나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런 것들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균열을 일으키거나 혼돈을 발생시켜서 극적 몰입을 방해하거나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게 내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단점 같기도 하고, 장점 같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반응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작품이 불균질한 건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해서 당신에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허구적인 영향력을 미친 작가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영향을 받았다기 보단 내가 관심 있었던 작가라면 두 명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내가 2년 전쯤에 프라하에 들렀던 적이 있는데 카프카 박물관에서 카프카에 대한 상징적 유물들을 보면서 카프카가 지닌 기괴함이나 기묘함을 느꼈다. 언캐니(uncanny)하다고 할까. 대학교 때 카프카의 부조리한 태도에 미세하게나마 비이성적인 측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히트는 당시 주된 흐름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사이론과 정반대에 가까운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와 같은 서사 이론을 창립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습니다, 라는 걸 인지하게 만드는 건 지극히 이성적인 방식이다. 나는 내 작품이 이성과 감성이 혼재된 형태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만든 강이관 감독과 친분이 있는데 내 세 작품을 다 보고 내 작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작품이라 규정하더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거 같지만 난 내 작품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정리하기엔 오묘한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의외지만 데이빗 린치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든 적은 없고, 만들기도 힘든 작품이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데이빗 린치의 기괴한 세계관이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내 작품의 엉뚱함은 분명 그런 취향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또라이나 변태 같은 면도 있는 거 같고. (웃음)
사실 <반두비>에서 선정적이라고 지적될만한 문제적 장면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의 신과 민서와 카림의 침대 신이 아닐까 싶다. 그 부분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었나?
그 장면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는 구실이 된 장면 같긴 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관객들의 몫이다. 드라마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그 장면들은 상당히 긴장할만한 장면이다. 로맨틱코미디처럼 진행되는 영화를 무장해제된 상태로 관람하다가 충격을 먹을 수 있는 장면이랄까. 세대를 막론하고 낯설고 불편해질 수 있는 장면 같은데 나이가 많을수록 더 불편할 가능성이 크겠지.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성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수록 충격적일 거다. 여고생이 얼굴 시커먼 남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서 같이 밥을 먹고 침대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사실 그 동안의 드라마 흐름을 다른 느낌으로 전환시키거나 벽을 형성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왜 들어갔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민서가 그런 행동을 한 이면과 배경을 관객들이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관객들이 메워줘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쩌면 신동일표 영화가 그래서 그런 거 같다. (웃음) 보기엔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무엇이 있다고 할까.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강렬한 현실이 영화에 반영되는 거 같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가 상당히 불균질하지 않나. 갑자기 이야기와 관계없는 유머나 농담이 어처구니 없게 튀어나오기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이긴 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그 분에 대해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완성된 모양새나 형태에 대해서 괜히 시비 걸고 싶거나 스스로 파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어서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고 봤을 때 나 역시도 드라마 공식이라 할만한 것들을 죽비로 내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랄까.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이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듯 여러 감정을 겪게 만들지만 난 그 사이에 멈춰서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스톱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분들은 반갑기도 하고, 신선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완성도에 흠이 생긴다고 지적하기도 하더라.
민서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선생님을 만난 뒤 함께 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시퀀스가 재미있었다. ‘이게 첫 번째 상담인 거 아세요?’라는 민서의 대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불순한 신 뒤에 되레 긍정적인 방향의 드라마가 형성된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평범하고 안정돼 보이는 현상이나 관계의 수면을 뒤집어 보면 때때로 그 아래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결국 임계점이나 비등점에 달하면 터질 거다. 난 창작하는데 있어서 전복적인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잠깐 뒤집어보고 의심해보면 새로운 이면이 보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 만난 두 사람이 그 불편한 사건 직후에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상황에서 코미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뒤집어서 관계를 바라보면 인생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엉뚱하다고 볼 수 있고, 단순히 유머러스하다 말할 수 있지만 평온해 보이는 관계의 이면에 포진한 끓는 점을 표출시켜보고 싶었다. 평범한 수위의 비범함이 있고, 비범한 수위의 평범함이 있는 것처럼.
전복적인 상황을 통해서 창작적 영감을 얻는다면 요즘 같은 세태는 정말 창작을 부추기는 텃밭이나 다름없겠다. (웃음)
내가 요새 상당히 기시감을 많이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격동기였던 87년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이이자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지금 왜 그때로 돌아간 거 같을까? (웃음) 지금 87년이 다시 돌아온 거 같다. 그 당시 정치적 민주화 정도나 사회적 성숙 정도가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22년을 쇠퇴했다고 할까. 그 당시 집회나 데모 현장에서 느꼈던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금도 든다면 지난 20여 년간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됐다는 우리 나름대로의 성취감이 착각이나 신기루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훼손되고 붕괴되는 실정이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거의 ‘파시즘X’, ‘유사 파시즘’이라 불릴만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의 내가 대학생 당시 느꼈던 감정을 느끼다 보니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웃음) 그렇다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사고수준이 22년 전으로 후퇴했다는 것도 아니라면 이 사회가 지금 22년 전 현실을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이겠지. 한마디로 비극적인 코미디다. 다만 비극인지 코미디인지 분간이 잘 안될 뿐이지.
웬만한 부조리극은 명함을 내밀 수 없는 현실이랄까. (웃음) 지금 현 대통령이시고, 알고 보면 학교 선배님이신 청와대의 그 분이, (웃음) 어제 중도라는 표현을 하셨지만 아마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얘기하신 것 같지가 않더라. (웃음) 보수라는 분이 자신의 실용주의를 중도라고 말씀하시는 거 보면 얼마나 불안하고 스스로 몰렸다고 생각해면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분을 좀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3년 반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편치 못하게 사시는 것보단 차라리 그 분께서 안락함을 찾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아마 그 힌트가 담긴 <반두비>를 보면 마음의 위안을 찾지 않으실까. (웃음) 그래서 그 분이 좀 보셨으면 좋겠는데. <방문자> 만들 때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 그 당시 전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였던 부시가 <방문자>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 은근히 있었는데, (웃음) 이번에도 좀 그렇다. <반두비>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대통령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물론 제가 지금 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건 아니다. (웃음) 나름대로 이렇게 얘기했지만 이게 다 그 분 잘못은 절대 아니거든. 그 분을 뽑은 천만 명의 어리석은 선택이 더 문제지.
사실 제스처만 봐도 당신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감하고 급진적이다.
내가 현실에서 풀지 못하고 상상만 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것들이 영화 속에서 구체화되거나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내가 현실에 만족하고 있거나 생각했던 욕구가 풀어지는 상태라면 굳이 작품을 만들 동기부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세 작품은 현실사회의 부조리나 모순, 인간사이의 질곡 같이 계속 심화되고 산재하는 문제들, 즉 내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부분들이 종종 세고 강렬하게 묘사될 뿐, 사실 나 자신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다. (웃음)
백진희 씨를 만났었다. 상당히 주관이 뚜렷한 친구더라.
그렇게 똑부러지는 면 때문에 내가 캐스팅한 거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외국인을 배우로 캐스팅했는데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작품은 캐스팅부터 모험이었다. <방문자>에서 계상 역할하는 강지환 씨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지숙을 연기한 홍소희 씨나 주연들을 당시 신인배우로 캐스팅했으니까. 세 번째 작품 <반두비>도 두 친구가 아마추어다. 두 친구를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고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 둘을 캐스팅하는 것도 나에겐 모험이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외국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보니 굉장히 리스크(risk)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마붑이라는 친구가 똑똑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진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더 힘들었지. (웃음) 그건 아무래도 마붑이 맡은 카림이라는 캐릭터가 마붑에게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매치가 되는 덕분에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거 같다.
양해훈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몇몇 내 지인들이 카메오 출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항상 양해훈 감독을 언급하는 걸 보니 효과적인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웃음) ‘내수 시장을 살려야 된다’는 명대사도 만들어졌고. (웃음) 나도 듣는 순간 센스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두비>를 찍고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왔다. 그 위기의 대안은 내수시장을 살리는 거 아닌가. 알고 보니 상당히 선견지명이 들어간 대사였다. (웃음)
사실 최고의 카메오는 당신이 아닐까. 엔딩 즈음에 당신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진짜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웃음) 종종 우디알렌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직접 연기를 해볼 생각은 없나?
만약 그러면 한국영화계에 쿠데타적 사건이 되는 거지. 결국 배우들의 세계가 균열이 생기고, 세력 판도가 바뀌는 거라서, 농담이고! (웃음) 적절하다 싶을 때 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기는 말 그대로 쿠데타이기 때문에 난 그저 작품의 맛깔스런 양념이 되면 그만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웃음)
전작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행히 나는 배우들 운은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배우들 입장에선 감독 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웃음) 어느 작품을 하건 충돌은 딱 한번씩 있었다. 오히려 그 충돌이 전화위복이 돼서 서로 힘을 모으고 좋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충돌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비논리적인 흐름을 서사에 익숙한 기성 배우들에게 설득한다는 게 어려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백진희 씨와 같은 신인 배우를 설득하는 작업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신인들은 백지 상태니까. 감독이 어떻게 리드하는지, 어떻게 힌트를 주느냐, 에 따라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닐 수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 백지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신인이 더 자유롭게 자기의 끼를 표출하거나 재능을 발산할 수 있는 것 같다. 괜히 어줍잖게 경험한 친구들한테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 자기가 가진 경험의 한계에 막혀버리곤 하더라. 진희나 마붑 같은 경우, 백지 상태라는 게 오히려 풍성한 가능성을 끌어내기 좋았던 거 같았다. 겉멋든 연기자보다 경험이 없더라도 열정에 충만한 신인을 더 선호할 수 있는 건 이런 덕분이다.
두 인물의 버디무비라는 형식에서 <반두비>는 <방문자>와 비슷한 관계구도를 그리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발생시키는 개개인의 변화를 전체적인 방향성으로 전환한다는 점에 있다. 그 방향성은 단지 영화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객석과 상응하려는 시도로서 이뤄지곤 한다.
또 다시 변증법 얘기가 나오는데 민서라는 ‘정’ 혹은 ‘반’과, 카림이라는 ‘정’ 또는 ‘반’이 충돌하고, 교감하고, 화합하는 ‘합’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인물들마다 다 그런 방향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인물과의 관계나 드라마를 만들 때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역할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고 서로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긍정적으로 전환해나간다. 나는 내가 그리는 인물 캐릭터들에 대해서 양존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한 편에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그들에게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응시하기도 한다. 사실 관객들을 한 인물에게 감정이입시켜서 롤러코스터처럼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게 그리기 쉬운 방식일 수도 있지만 내 작품은 그 인물에 대해서 잠시 돌이켜보게끔 하는 장치들이 장착되고 그런 이질적인 리듬을 통해서 인물을 바라보거나 인물이 관객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의 교차가 발생하는 것 같다. 사실 내 작품은 스펙터클을 강화할만한 여건이나 제작 토대가 열악한 편이기 때문에 인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형성되는 드라마가 중요하다. 그만큼 인물을 그린다는 건 나에게 흥미로운 작업이다.
관계는 항상 당신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어떤 소재의 작품이라도 인간관계를 다루는 것만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편의상 지금까지 내 작품을 관계 삼부작이라고 했지만 계속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 같다.
<방문자>나 <반두비>처럼 가장 먼 관계를 이야기할 땐 긍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키지만 <나의 친구, 그의 아내>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이야기할 땐 부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예준과 재문 같은 경우는 10년에 걸친 우정이라지만 둘 사이엔 계급의 벽이 자리한다. 예준은 승승장구하는 외환딜러로서 자기 자리가 계속 상승하는 친구지만 재문은 그럴 수 없는 존재고 결국 둘 사이의 친근함을 가로막는 권력이란 문제가 대두되고 이런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부모, 형제, 친구 같은 사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솔직히 내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만큼 나로선 당연히 그런 관계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반면 전혀 맺어지지 않을 것 같은 관계지만 같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갈 수 있는 관계라면 여지없이 관계를 맺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관계지만 서로의 차이가 존재할 뿐, 공통분모가 있다. 변증법적으로 비적대적 모순관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해주는 이해와 연민의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로 관계를 만들고자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현실적 필요성이 무의식적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닌가 싶다.
변화 역시 항상 당신의 테마다.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당신 영화를 성장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자면 왠지 불순한 태도 같다. 성장은 결국 그것을 말하는 대상과 그것을 통해 말해지는 대상 간의 이해관계가 우열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강제적 용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당신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보다 나은 사람이 아닌 바에야 그 캐릭터들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을 듣고 보니까 성장이란 말은 왠지 강제적인 느낌이 들고, 상대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변화라고 봤을 때 적절한 표현인 거 같다. 어쨌건 내가 쓰는 표현이지만 드라마 자체에서 인물은 세 가지 변화 구도를 지닌다. 스스로 변하거나, 변절되거나, 혹은 여전하거나. 민서는 분명 스스로 변하는 인물이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먹거나 그게 익숙지 않아서 때때로 포크를 쓰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자기 스스로 삶에 적응하거나 인생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신에서 관객들이 그렇게 느껴준다면 좋겠다. 민서가 변했고 관객도 변했다고,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변화되길 갈망하길 바란다.
당신 영화는 항상 그 변화를 통해 희망을 모색하는 느낌이다. 전반적인 비관으로 가득 찬 느낌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결말만큼은 그 무거운 공기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연출자나 감독들은 인간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비관적이거나 비극적으로 인물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내 스스로가 삶이나 인생, 사람에 대해서 낙관적이고자 하는 생각이 비관보다 강하다. 어떻게든 희망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싶어진다. 그래야 삶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런 가치가 조금이라도 존중되고 공유될 수 있을 때, 이 빌어먹을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웃음)
<반두비>와 <방문자>에서 민서와 호준은 변하는 사람들이고, 계상과 카림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물들이다. 역할을 달리해서 말하자면 계상과 카림의 역할을 하는 건 당신이고 궁극적으로 민서와 호준과 같은 변화의 몫은 관객인 셈이다.
<반두비>가 예전영화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불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이 관계를 맺는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인 만큼 소재 자체가 주는 무거움을 경쾌하게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만들고자 했던 건 대중들이 <반두비>를 훨씬 편하게 받아들이고 그만큼 영화가 관객에게 쉽게 다가갔으면 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서가 식사하는 엔딩신에서 캐릭터의 변화를 감지하는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던 자기 자신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얻거나 일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나는 내 영화를 통해 최상의 성취를 이룬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이 사회적 제도나 분위기에 대한 환기였다면 <반두비>는 보다 공격적인 정치적 구호의 뉘앙스가 보다 강하게 피력된다. 특정인물을 적확하게 적시하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한 호불호가 <반두비>에 대한 장단으로 맞서는 것 같다.
특정인물이 영화에서 묘사되거나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 반응이 엇갈리더라. 직설적이라서 통쾌하고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지만 그런 실제인물에 대한 언급을 통해 완성도에서 시비를 얻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더라. 굳이 누군가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이나 묘사가 안돼도 충분히 정치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인데 오히려 그런 묘사가 작품에 마이너스를 불렀다고 보시는 분들이 계신다. 사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는 없으니까 내 영화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봤을 때, 내가 왜 그런 특정인물을 굳이 영화에 넣었는지에 대한 고민만이 내겐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그만큼 예민해졌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일부로 넣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시대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날 그렇게 부추긴 거지. 민서가 몸담고 있는 공간과 배경의 배후에 특정인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보니 이게 자연스럽게 묻어간 것뿐이지, 무조건 넣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지녔던 건 아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시대가 문제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웃음) <반두비> 시나리오의 초고가 난 건 사실 고 노무현 대통령 말기였지만 <반두비> 제작이 가시화된 건 MB정권 초기였고, 이제 정권이 2년 정도 지나는 중에 영화가 개봉됐다. 내 작품이 시대적 공기와 호흡한다고 본다면 시나리오를 쓸 때와 영화를 만들 때 분위기가 워낙 달라지기 때문에 되게 시대적 공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내 작품에 그런 파격을 가져다 주신 현직 대통령님과 현 정권에 감사와 유감을 동시에 표합니다. (웃음)
사실 영화에 현실적 지표들을 온전히 투영했을 때 장단점은 명확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성을 명확히 적시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반두비>에서 시대성을 분명하게 느끼는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거 같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고 아쉬움을 느꼈던 분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놀라더라. 시나리오엔 잘 표현되지 않는 부분들이 영화를 찍을 때 자연스럽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나 자신도 시나리오를 보고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영화에서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상하게도 시나리오보다 완성된 영화가 더 느낌이 좋다는 말을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는데 왜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뭘 넣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었던 걸로 보아서 무언가를 넣게 만든 시대가 나에게 선사한 선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웃음)
<반두비>를 비롯한 당신의 작품들은 항상 정치적인 시선이 강하게 인지되는 탓에 장르적 자질이 많이 가려진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장르에 입각한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장르를 굉장히 경멸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변했다. 우리나라에서 종종 상투적으로 ‘당신 작품의 장르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난 그런 질문이 정말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장르로 수렴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인생에서 어떤 날은 공포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코미디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멜로 같은 나날이 된다. 인생 자체가 장르적 혼합이라고 본다면 영화도 이렇게 풍성한 장르가 될 수 있는데 꼭 하나의 코미디, 스릴러, 액션,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방문자>는 코미디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스릴러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다. 이번에 <반두비>는 하이틴 로맨스나 로맨틱 코미디, 넓게는 휴먼드라마로도 불린다. 내가 본능적으로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내가 잘 풀 수 있는 장기가 코미디는 아닐까 싶어지더라. 어떤 특정 장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장르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위트, 해학과 같은 유머로서 인물을 다루고, 관계를 그려나가는 방식에서 남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 두 가지 장점을 장르와 결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다음 작품 얘기를 하자니 좀 그렇지만, (웃음) 다음 작품은 그래서 뭔가 다른 형태의 결과가 나올 거 같기도 하다.
차기작에서 지금의 생각들이 깊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다음 작품 같은 경우는 좀 더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장르의 요소가 더 강화될 순 있겠지.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장르를 경멸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감독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코엔 형제 영화를 편차 없이 선호한다. 코엔 형제 영화는 블랙코미디적이면서도 어떤 작품은 스릴러가 강하고, 어떤 작품은 로맨스가 강해지고, 그렇게 장르가 자유자재로 변형되지 않나. 나도 내가 가진 특성이 장르와 결합할 때 결과물이 나로서도 궁금하고 보다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정치적 의식은 차기작에서도 배제될 순 없을 것 같다.
내 작품의 주제는 심플하다. 내 작품에 미학적 야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서로 연대하자는 주제의식이 강할 뿐이지. 그 토대가 우정과 환대라는 거고, 그만큼 소박한 건데 사람들에게 서로의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자고 말하는 게 단순 명료하면서 쉬운 거 같지만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생각들을 전하는 게 오히려 힘들다. 그래서 그런 걸 호소한다는 게 보다 절실한 가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반두비>의 주제는 ‘마음을 열어’라는 대사로 압축된다. 사실 이는 <방문자>를 비롯해 당신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나 다름없다.
민서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동기부여의 존재는 카림이다. 내 작품이 불과 2억 2천짜리 제작비로 만든 작은 영화지만 보다 많은 분들이 보면서 뭔가 하나를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타자에 대한 깨달음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일 수 있고, 그것이 부담이 되기보단 하나의 즐거움으로써 유쾌하게 이 작품을 만끽하거나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아쉽게도 고등학생들이 볼 수 없게 됐지만 1시간 47분짜리 영화가 오히려 3년 동안 수업시간에 읽고 듣는 교과서보다도 자기 삶의 방향이나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회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바꿔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얻게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진심이 얼마 정도나마 느껴지는 셈일 테니 나로서는 작품을 만든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격양된 목소리 너머로 사진과 기사가 흐른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프로레슬러의 전성기가 언어로 구술되고 이미지로 비춰진다. 영광의 나날들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환호와 열광이 빗발치던 지난 세월을 넘어 눈앞에 들어서는 건 어느 적막한 대기실의 풍경. 작은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그는 고단하고 힘겨워 보인다. 영광의 세월을 지나 노쇠한 육체는 여전히 그 세월을 연장하기 위해 부딪히고 내던져진다. 사나이는 여전히 자신의 전설을 놓지 못한다. <더 레슬러>는 전설을 먹고 사는 어느 루저를 위한 송가다.
영화 속 대사처럼 프로레슬링은 ‘다 짜고 하는’게 맞다. 리얼리티를 가장한 버라이어티에 가깝다. <더 레슬러>는 그 합이 완성되는 과정을 여과없이 들춘다. 과격한 퍼포먼스가 링 위를 지배하고 승자와 패자의 구도 역시 배역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허구의 노동은 실로 헌신적인 육체적 공갈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합을 맞추고 과정을 숙지한다 해서 노동이 부정되는 건 아니며 고통이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해에 가까운 엔터테인먼트다. 살점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는 와중에도 극적인 연출을 고려하고 내러티브를 유지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정교한 합이 어울려야 한다. 그 퍼포먼스가 실제적인 고통과 고단한 노동의 성과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값어치를 발생시킨다. 수난이 심할수록 관객의 열광도 더해진다. 링에서 영웅이 된다는 건 얼마나 자학적인 수난을 감내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그것은 실로 절박한 진심을 담고 있는 피학적인 거짓말인 셈이다.
랜디 램(미키 루크)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테크닉을 통해 2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링의 전설로서 군림했다. 링 위에서 영웅으로 연호되는 레슬러지만 그는 사실상 남루한 삶을 살고 있다. 경기가 끝나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세를 내지 못해 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고 맥주 한 모금에 갖가지 약을 삼킨다. 작은 임대 트레일러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형마트에서 잡일을 하고 주말마다 링에 오르는 랜디의 삶은 패배자의 정서를 연상시킨다. 그가 링을 떠날 수 없는 까닭 역시 그 삶과 연관돼있다. 링을 떠나면 랜디는 진짜 패배자의 삶에 갇힌다. 그의 삶을 증명하는 건 오로지 링에 서는 것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링 위에서 관객의 환호를 얻는 것만이 그 삶을 부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동정의 여지로 가득한 랜디의 삶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객관화된다. 다큐적인 질감을 품은 카메라 기법은 <더 레슬러>를 페이소스로 가득한 감동의 도가니에서 구출시킨다. 종종 랜디의 뒤를 차분히 뒤따르곤 하는 카메라는 이를 통해 관객에게 그 남자가 걸어나가는 그 세계를 같은 눈높이로 응시할 기회를 준다. 환호와 열광 속에서 링에 오르던 랜디가 고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집주인이 잠근 열쇠를 열지 못해 비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는 과정은 실로 대조적이다. 또한 온몸에 스탬플러가 박혀 피투성이로 대기실에 앉아있는 랜디의 모습을 먼저 비춘 뒤, 끔찍한 유혈을 동반한 경기 과정과 경기 중에 얻은 상처를 대기실에서 치료하는 과정을 교차시켜서 적나라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엔 어떤 과장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동반한 배열상의 편집은 있지만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위한 노력은 극도로 절제된다. <더 레슬러>가 <록키>와 명확한 차이를 두고 있는 지점이다. 인물에 대한 감상주의적 접근을 최대한 배제시키고 철저하게 객관화시켜서 그 세계를 응시하고 인물에 대한 관찰을 요구한다.
물론 랜디라는 레슬러에 대한 감정일체가 생성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루저의 삶을 바라보는 일말의 동정심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런 극적인 감정을 철저하게 억누르는 연출의 묘가 좀 더 객관화된 감정을 야기시키고 이를 통해 그 인물 너머로 확대된 세계관을 조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스트립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를 사모하는 랜디의 감정을 온전히 순정적인 양상으로 치환하지 않으며 자신의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로부터 박대 받는 랜디의 모습을 동정으로 유도하지 않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상황은 상황 그 자체로서 판단하게 만들 뿐, 어떤 감정의 매개체가 되어 객석을 유린하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상황의 응시자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 <더 레슬러>가 정서적인 통증을 동반하는 건 그 덕분이다.
전설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랜디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숭고함보단 처절함에 가깝다. 그것은 영광을 위해서라기 보단 생존을 위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생존이란 물질적 가치의 잉여를 위한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 비루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유일한 존엄성의 뼈대를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이 그것뿐일 따름이다.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끊임없이 복기하고자 하는 노력은 때때로 그 현실을 한심할 정도로 나약하게 대비시킨다. 고통을 무릅쓰고 링에 올라서는 사내의 뒷모습엔 현실의 무력함이 깊게 배어있다. 더 이상 진짜가 될 수 없는 영광의 껍데기만 두른 고독한 삶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아버지로서의 삶에 재기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자신의 링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로맨스에 천착한 그 삶은 지독하게 비루하다. 그럼에도 그 삶을 책망할 수 없는 건 그 삶이 무가치하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흔과 혈흔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에 담긴 영광의 세월을 폄하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는 그 삶을 통해 감정을 완성하기 보단 그 삶 자체를 조명한다. 무엇보다도 미키 루크는 캐릭터로서의 연기적 영역을 넘어 배우 본연의 삶을 투영하는 양상이라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배우의 삶이 투영된 듯한 캐릭터의 진정성을 무시하기 힘들다. 실로 적나라한 루저의 일생이 배우의 삶 자체만으로 영화적인 감상을 부여하는 덕분이다.
그 삶엔 어떤 낭만도 포용되지 않는다. 스러져가는 육체를 겨우내 지탱하는 사내가 해묵은 언어로 짐작할 수 밖에 없는 전설에 몸을 던질 때, 희망보단 절망이 새어 나온다. 그럼에도 그 삶을 응시하는 건 그것이 진심이 담긴 삶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껍데기뿐인 영광이라 해도 그 자체를 위한 삶의 진정성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이 건조한 영화가 품고 있는 일말의 낭만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비범하지 못한 삶 속에서도 남다른 생의 의지가 빛난다. 박동이 약해진 심장이라 해도 마지막까지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움츠림을 거듭하듯 낡아가는 전설을 삶의 최전선으로 연장하려는 사내의 인생을 통해 삶이란 단어 그 자체를 응시하게 만든다. 그 최후의 수단이 죽음이라 해도 그 사내는 끝까지 전설을 삶의 테두리로 보존하려 한다. <더 레슬러>는 실로 처절하지만 그 의미를 결코 간과할 수 없게 담담한 그 인생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육체의 쇠락 속에서도 정신적 자존을 부지해 보려는 사내의 삶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루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진짜 루저의 삶을 그린다. 전설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그 껍데기를 유지한 채 그저 걸어간다. 영광의 뒤안길에 선 삶을 고스란히 발가벗긴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건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자 하는 일말의 의지다. 남루하지만 꿋꿋한 삶의 의지가 아련하게 빛난다. 그 삶에 어떤 감정 이입을 가하지 않고 그저 따라 걷을 뿐이다. 훌륭한 위안이자 현명한 연대로서 진심을 전한다. <더 레슬러>의 담담한 스크린을 응시하는 가운데 먹먹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다>의 원작이 김기덕 감독의 시나리오라고 들었다. 그 시나리오를 선택하기 이전에 본인이 구상했던 시나리오는 없었나? 개인적으로 쓰던 시나리오가 몇 개 있었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잘 안 풀리기도 하고,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감독님께서 이 시나리오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살펴보고 결국 하게 됐다. 내가 만든 이야기보단 원작이 있는 이야기로 첫 연출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나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됐고, 더 많이 배운 거 같다. 그래서 나에겐 더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고.
김기덕 감독의 원작 시나리오로부터 가장 크게 각색됐다 할만한 바가 궁금하다. 전체적인 뼈대는 원작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그래서 원작의 느낌들은 그대로지만 일단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화법을 각색함에 있어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화법을 선택했다는 게 가장 큰 변화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수타는 강패와 대등한 관계였던 게 아니라 지금보다 좀 더 비중이 적었다. 원래 7:3(강패:수타)에서 6:4정도였던 걸 반반 정도로 각색했다. 물론 두 남자의 이야기란 점에서 영화와 시나리오가 같은 이야기란 건 맞지만 원작에선 강패 이야기의 비중이 더 컸다. 그리고 봉 감독에게 코믹한 요소를 많이 가미한 점도 있고.
아무래도 원작의 영향력이 완전히 배제되진 않았나 보다. 영화상에서 캐릭터 무게중심이 수타보단 강패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느낌이 없진 않았다. 그런데 두 남자의 비중을 대등하게 변화시킨 의도는 뭔가? 김기덕 감독님의 원작에서 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서로 다른 삶을 동경하는 두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 처음부터 비중이 비슷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비슷해지면 두 남자를 모두 각자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영화와 현실의 비중도 비슷하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기덕 감독과 연이 닿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대학교 때 학생회위원을 했는데 학교 축제에 저명하신 분들을 초청해서 특별강의 같은 걸 하는 명사 초청강연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가 김기덕 감독님께 와서 해주십사 연락 드렸고 그 인연으로 가끔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 졸업하면서 영화가 너무 하고 싶어서 감독님께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메일을 드렸다. 감독님께 답장이 왔는데 지금 들어가는 영화가 있으니 여기서 연출부로 일하면서 영화가 자신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 일단 해보라고 하시더라. 경험을 해보면 알 수 있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영화를 하게 됐고 그 후로 여기까지 온 거다.
김기덕 감독의 촬영현장에서만 경험을 쌓은 건가? 일단 <사마리아>연출부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마리아>가 끝나고 한번 <신부수업> 연출부로 참여했다가 다시 <빈집>연출부로 참여하고, <활>과 <시간>의 조감독을 맡았다.
김기덕 감독의 현장과 일반적인 영화 현장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차이가 많다. 내가 다른 영화현장을 많이 경험해본 건 아니지만 일단 김기덕 감독님의 현장은 굉장히 빠르다. 현장에서 순발력 있는 상황대처를 보이시니까 촬영진행속도가 빠른 것 같다. 날씨나 외부적 환경요인으로 인해서 촬영이 어려운 날이 생겨도 그런 여건에 맞게 현장상황을 즉각 바꿔서 결국 본인이 원하는 내용을 담아내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는 배우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안 하신다. 뭔가 얘길 해보면서 배우들이 못하겠다고 하면 그걸 강요하진 않는다. 나 같은 경우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게 약간 있나 보더라.
<영화는 영화다>는 한 편의 영화가 완성돼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감독의 입장에서 자신의 영화 속에서 영화를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것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한 감정 같은 게 생기진 않던가.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관객들에겐 두 캐릭터의 삶이 먼저 보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 이후에 영화와 현실에 대한 부분을 좀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있었고. 물론 아이러니는 많았지. (웃음) 촬영하는 스태프들이 실제로 연기를 했는데 카메라 뒤에선 그렇게 활발하던 스태프들이 카메라만 보면 자꾸 도망가는 거다. 그래서 스태프 연기시키기가 너무 힘들더라. (웃음) 스태프 연기시키는 날엔 촬영도 오래 걸리고.
낙원상가 옆에서 촬영한 씬에서 촬영장의 스태프들과 그 사이로 걸어 들어오는 강지환 씨의 모습이 대비적이라 재미있었다. 전문연기자와 비 전문연기자들이 카메라를 대하는 방식의 대비가 발견되는 느낌이랄까. 차이가 크다. 사실 영화에서 스태프를 찍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영화에서 좀 더 리얼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서 찍었는데, 막상 찍어보니까…..안 찍는 게 좋겠더라. (웃음) 물론 스태프들이 고생을 많이 했고 사실 갈수록 스태프들의 연기가 늘었다. 스태프들도 모니터하면서 자신들의 연기가 느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 면에서 행복한 촬영현장이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영화적 리얼리티와 현실적 리얼리티의 차이를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감독이라면 현실적 리얼리티를 고려하면서도 영화적 리얼리티를 고민해야 한다. 게다가 영화란 진실을 보여주기 보단 진심을 담아내는 작업에 가깝다. 진짜가 있고, 정말 진짜 같은 게 있다면 사람들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건 진짜가 아니라 오히려 같은 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심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고, 진심처럼 느껴지게 잘 전달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런데 사람들이 진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후자다. 그게 정말 리얼해서가 아니라 리얼한 느낌을 주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리얼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때론 그게 약간 슬프기도 하다. 물론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정직하게 찍으려 했던 부분이나 배우들과 그렇게 작업했던 분위기는 영화에 담긴 거 같아 다행이다.
수타와 강패란 이름은 상당히 직설적이다. 명쾌한 은유지만 반대로 노골적이다. 한편으론 희화화된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위험도 있어 보인다. 고민이 좀 있었겠다. 위험할 수도 있었지. 그래서 고민도 좀 했는데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어서 그대로 갔다. 제목도 사실 원작 그대로인 만큼 수타와 강패란 이름도 그대로 가보고 싶은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게 좀 코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봉 감독은 상당히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감독이다. 아무래도 감독 캐릭터란 점에서 감독인 당신과 비교하고 싶어진다. 당신과 봉 감독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일까? 차이가 좀 있지. 봉 감독은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영화적 설정을 진짜로 찍는다. 그런데 나라면 봉 감독처럼 그렇게 못한다. 영화는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지 않나. 만약 싸우는 씬을 찍고 난 다음날 싸우기 전 씬을 찍어야 한다면 실제로 싸움을 한다고 했을 때, 배우 얼굴에 상처가 나면 사소하게 나마 맥락적 연결상의 문제도 생기니까.
실제적인 공간의 형태를 과감히 드러내는 느낌이다. 그 공간의 기시감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는 느낌도 얻었다. 실제로 찍을 때와 전체적으로 컷들이 붙었을 때, 공간의 느낌이 달라졌다. 총체적으로 오는 느낌이 찍을 때보다 좀 더 리얼한 느낌을 주더라. 더 자연스러운 느낌도 있고. 인사동도 그렇고, 갯벌도 그렇고, 그 공간의 느낌들이 완성된 상태에서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이 있더라.
인사동이나 낙원상가처럼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장소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인파를 통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종로는 어차피 골목 앞을 막으면 사람들이 들어올 수가 없으니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인사동은 완전히 열려있으니까 거의 전쟁이었지.
게다가 소지섭에 강지환이라, 그 심각한 엔딩 장면을 찍으면서 다들 집중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소지섭이다! 강지환이다! 다 이러고 있으니, (웃음) 전쟁이었지. 우린 사람이 죽어가는 심각한 장면을 찍고 있는데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소지섭이다, 강지환이다, 이러면서 웃으며 사진 찍고, 우리는 통제하느라 정신 없고. 사실 그걸 찍으면 진짜 리얼한 건데 말 그대로 그건 영화가 아니니까. (웃음)
상황 자체가 현실과 영화가 공존하는 아이러니처럼 들린다. 인사동에서 옆으로 빠지는 골목 안에 폐지 수집하는 곳이 있다. 몇 차례 헌팅을 갔을 땐 조용하다 싶어서 한적한 골목을 헌팅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촬영날은 폐지 수거하는 날이라 끊임없이 폐지를 실어 나르고 자동차도 오가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왔다 갔다 하시고, 개도 있고. (웃음) 그런데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소지섭, 강지환이 누군지도 모르는 분들이라 그런 점에선 무리가 없었다. 한편으론 그런 점이 노인분들의 생활고가 느껴지는 측면이라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영화라는 결과물을 위해서 작업한 것이지만 그 현장 자체가 나에겐 현실이었고, 그런 부분들이 소중한 경험처럼 느껴졌다.
액션도 꽤나 중요한 관건이었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현장에서 액션연출을 경험해봤을 리는 없을 것 같고, 그에 대한 노하우가 전무했을 텐데. 마지막 갯벌 장면 같은 경우엔 두 배우가 지칠 때까지 싸우는 느낌을 담고 싶었고, 결국 싸움 자체에 의미가 없어지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건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생각했던 부분이다. 그런 바가 화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아서 다행이다. 그걸 담아내기 위해서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지섭 씨는 촬영 끝나고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도 귀에서 갯벌 흙이 계속 조금씩 묻어나올 정도라니까, 고생 많이 했지.
사실 갯벌은 계획된 로케이션 장소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원래는 그게 뻘에서 하는 액션은 아니었다. 내가 각색하면서 조금 수정된 부분인데 두 배우가 뭔가에 흠뻑 젖어서 같은 색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컨셉에서 강패는 블랙이었으면 좋겠고, 수타는 화이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옥상씬을 보면 강패는 블랙을 입고 있고, 수타는 화이트를 입고 있지 않나. 그리고 봉 감독의 영화 안에서도 강패는 계속 정장 안에 검은 셔츠를 입고, 수타는 흰 셔츠를 입고 있고. 나중에 둘 다 뻘이 묻어서 같은 색깔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똑같아졌다는 느낌. 그래서 갯벌을 생각하게 됐다.
그 갯벌씬에서 강패는 결국 수타와의 싸움에서 진다. 결국 주인공이 이긴다. 그건 어쩌면 검은 돌을 지워나가던 강패가 스스로 흰 돌에 둘러싸인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 갯벌씬은 온전히 영화적인 현실에 대한 자조처럼 보인다. 수타가 이겨야만 하는 어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까. 사실 영화 한편이 만들어진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의 느낌이랄까. 관객들이 보는 영화는 스크린에 걸린, 완성된 영화다. 스크린에 걸리기 위해 촬영됐지만 극장에 안 걸려서 상영이 안 되는 영화들도 있고, 촬영이 다 끝났지만 개봉을 못하는 영화들도 있다. 그래서 극장에 걸리는 건 사실 행복한 경우인데 관객들은 그런 영화들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기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느낌이나 스태프들이 얻는 그 순간의 느낌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에선 해피엔딩이 가능하다. 목적했던 결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목적대로, 시나리오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하지만 영화는 시나리오대로 완성되고, 그래야만 한다.
그 라스트 씬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건가? 원래 원작의 엔딩이다. 원작에서 온전히 그대로 가져가고 싶었던 부분이기도 했고.
사실 갯벌씬은 엄밀히 말해서 영화적 영역의 성취인 셈이다. 영화만의 쾌감이지. 영화적인 만족감이고.
그에 반해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엔딩은 대비적이다. 영화적 결말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려는 현실적 거부감처럼 느껴진다. 현실이란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것이니까. 캐릭터로 얘기한다면 수타는 성장하고 변모한다. 그런데 강패는 변하지 않는 캐릭터다. 변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똑같은 캐릭터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옷을 입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변하지 않는 모습이 굉장히 슬픈 거 같다. 현실의 사람들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마지막은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은 그것도 영화라는 느낌을.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린이 뒤로 빠지고 크레딧 올라가기 전에 프레임이 하나 더 생기지 않나. 그런데 그게 극장에서 상영할 때 많이 잘리더라. 그 극장의 이미지가 객석의 한 세줄 정도는 보이고 더 넓어야 하는데 객석은 안 보이게 잘리는 경우가 있더라.
스크린의 비율 문제 때문에? 맞다. 그래서 혹시 관객들이 그 부분을 놓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 결국 그것도 영화였다는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극의 말미에 피칠갑을 한 강패가 수타를 노려보는 장면은 마치 객석을 노려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사실 소지섭 씨가 연기한 강패가 강지환 씨가 연기한 수타에 비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그건 종종 영화 속의 악인을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인데 강패의 눈빛은 그 영화적 환상에 빠진 관객에 대한 경계심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과 악이라는 경계에 대한 사유도 가능할 것 같다. 난 사람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기 보단 모든 사람에겐 두 가지 면이 다 있어서 선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강패는 악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마지막에도 선하지 않은 행동을 한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단 그것이 선이냐 악이냐를 따지지 않고 더 매력적인 부분에 끌린다. 사실 그것도 좀 슬픈 거다. 재미없는 선보단 재미있는 악에 더 끌리니까. 물론 강패가 악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이 각자 직업이 다르고, 사회적인 입장이 다른 건 스스로 선택한 어떤 초기의 결정 때문이다. 그 사람 자체가 매번 그런 판단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스스로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 좋겠다.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은 직업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음)
갯벌 장면은 정말 처절했다. 얼굴이 갯벌에 반쯤 잠긴 강지환의 얼굴이 열의를 대변하더라. 이런 장면을 주문하는 감독은 얼마나 악랄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웃음) 악랄하겐 안 했다. (웃음) 그냥 두 배우들이 스스로 열심히 했다.
강패와 수타를 바라보며 봉 감독은 아무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서 캐릭터로 완성되는 배우들을 지켜보는 과정은 여러모로 즐거운 일일 거다. 굉장히 즐겁겠지.
똑같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본인에게도 비슷한 즐거움이 있었을 것 같다. 강한 열의를 갖고 연기에 임하는 배우들을 지켜볼 수 있는 감독의 입장이라면 봉 감독 못지 않게 즐거웠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런 얘기 아무한테도 안 했는데 배우들은 무지하게 고생했지만 솔직히 난 속으로 즐거웠다. (웃음) 배우들한테는 고생해서 마음이 아파요, 이렇게 얘기했지만. 영화에 그런 강렬한 느낌들을 주니까 그런 광경을 찍을 수 있어서 즐겁지.
그 장면을 촬영하기 직전에 봉 감독과 강미나가 주고 받는 대사가 생각난다. 두 배우를 격려하고 돌아온 봉 감독에게 미나가 괜찮겠냐고 묻자 봉 감독은 ‘감독이라고 뭐, 다 아나?’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미나가 그럼 감독님은 뭘 아느냐고 되묻자, ‘내 배우 끝까지 믿어야 된다는 거’라고 답한다. 그 대사가 어쩌면 감독 본인이 하고 싶은 대사였을지 모르겠더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봉 감독이 대신하는 대사가 조금 있다. 물론 그 이전에 봉 감독 캐릭터를 위한 대사다. 코믹하긴 하지만 결국 감독이니까 감독다운 모습을 마지막에 보여주고 싶었다.
감독으로서 배우를 믿고 가야 하는 순간이 있을 것 같다. 때론 갈등이 될 수 있지만 결국 감독이 배우를 신뢰할 수 있을 때 결과물의 가능성도 더 높아지는 게 아닐까 싶다. 배우들과의 소통은 어땠나? 두 배우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하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각자 캐릭터에 대한 애정들이 느껴졌다. 두 배우가 스스로 생각하는 강패, 수타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해온 부분이 있지 않나.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각했던 캐릭터가 있고. 근데 두 배우가 많이 고민한 부분을 내가 일방적으로 여기선 어떻게 해야 된다고 지도하진 않았다. 일단 배우들이 만들어온 캐릭터를 최대한 담고 싶었고, 그게 전체적으로 큰 톤에서 벗어날 때만 얘길하는 편이었지. 어찌됐든 소지섭의 강패, 강지환의 수타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오히려 편했다. 배우들과는.
사실 첫 영화부터 캐스팅이 화려하다. 일단 두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촬영 내내 흐뭇했지. 어떻게 잡아도 그림이 나오니까 편한 것도 있고. (웃음) 두 배우가 굉장히 길지 않나. 만약 어느 한 쪽의 다리가 짧거나 머리가 컸다면 투샷을 잡기 보단 상대적인 표정 위주로 잡아야 되고 이런 걸 신경 썼을 텐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서 카메라도 편하게 잡았다.
감독으로서 두 배우를 컨트롤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 두 배우와 작업하게 된 게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지섭 씨나 지환 씨가 각자의 캐릭터를 너무 잘했기 때문이다. 만약 컨트롤한다고 생각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거 같다. 그런데 컨트롤한다기 보단 같이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편하고 즐거울 수 있었던 거 같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배우를 처음으로 경험해본 셈이기도 했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본 바는 없나? 아직 정의를 내릴 정도로 경험을 해본 것 같진 않다. 다만 누구나 자신과 결혼할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이상형이 있다. 그런데 결국 만나는 사람에 맞춰서 달라지지 않나. 실제로 만나게 된 사람을 그 이상형으로 맞출 순 없으니까, 서로 같이 변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같이 잘 살아야 된다. 감독과 배우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강패와 수타가 달리기를 하면서 테이크가 반복되는 장면은 마치 강패의 현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영화적 현실을 안착시키는 작업처럼 느껴졌다. 그건 봉 감독이 강패를 길들이는 광경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감독의 입장에서 배우를 다스려보고 싶었던 바는 없었나? 의견의 차이가 발생한 적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크게 마찰하거나 충돌했던 점은 없었다. 의견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냥 배우들이 원하는 걸 선택했다. 대부분 내가 특별한 주문을 안 한 상태에서 기본적인 동선만 정해주고 배우들이 잡아온 캐릭터로 테이크를 갔다. 물론 만약 내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더 표현돼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원하는 바를 배우들한테 얘기해서 한번 더 테이크를 갔다. 의견 충돌의 느낌은 없었고 그 테이크 중 좋은 걸 쓰면 됐다. 그래서 오히려 작업이 빨랐던 거 같다.
사실 고창석 씨가 연기한 봉 감독이란 캐릭터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꽤나 삭막해졌을지 모른다. 봉 감독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두 캐릭터가 같이 영화를 찍는다는 설정이 가능해지기도 하고, 불가능해지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캐릭터였다.
남자로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꽤 귀여운 캐릭터였다. (웃음) 무대인사 다닐 때마다 관객 분들이 귀엽다고 하더라. 봉 감독님이 인사하면, 귀여워요! 이러니 매번 봉 감독님께서도 당황하셨지. (웃음)
여성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나이에 내가 이런 소릴 듣게 될 줄 몰랐다고 얼굴이 많이 빨개지시더라. (웃음)
말미에 강미나의 말처럼 끝까지 없어 보이지만 그만큼 인간미가 느껴진다. 인간적인 매력을 주고 싶었다. 사실 감독님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나도 김기덕 감독님을 많이 봤지만 현장에서 있어 보이게 폼 잡고 있기 보단 대부분 편하고 후줄근한 차림으로 작품 자체에만 몰두해서 계신다. 현장에서 본인이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는 것보단 그런 게 오히려 멋있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평소 김기덕 감독의 현장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하다. 보편적으로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김기덕 감독님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있지 않나. 김기덕 감독님과 작업해보거나 개인적으로 만나오신 분들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만나보면 재미있고 귀여운 부분도 있다.
귀엽다? 약간 개구장이 같은 부분이 있다. 음, 여하간 그렇다. (웃음)
혹시 김기덕 감독에게 원작 시나리오의 모티브나 소재를 얻게 된 경로에 대해서 한번쯤 물어본 적 없나? 원작은 오랜 예전부터 김기덕 감독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시나리오라고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나오기 위해서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돼야만 하는 것 같다. 감독님께서 보시는 배우들에 대한 느낌,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조폭들에 대한 느낌, 그런 부분들에서 아마 시작되지 않았나 싶더라.
사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대중적으로 많은 지지를 얻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대중과의 충돌이라 할만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나. 아무래도 그런 일련의 상황을 김기덕 감독의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김기덕 감독이 얻은 몇몇 어려움에 대한 감정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일단 개인적으로 안타까웠던 부분은 감독님이 많이 외로워 보였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감독님을 생각하는 오해적 이미지들 때문에 더 그런 것 같고, 무엇보다도 감독들이 대체로 좀 외롭지 않나. 현장에서 얘기할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일적인 얘기를 해도 그 전체를 보는 사람은 감독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다 이해해 줄만한 사람도 없고. 그런 부분들이 많이 외롭게 보이더라. 다른 감독들도 그렇겠지만 작품을 깊게 들어가다 보면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누구나 아는 얘길 하면 공감을 많이 할 수 있듯이. 그런 부분들이 어려운 거 같다. 내가 한번 김기덕 감독님께 유치하게 여쭤본 적이 있다. 감독님, 영화가 더 힘든가요? 현실이 더 힘든가요? 그렇게 여쭤봤더니, 당연히 현실이 더 힘들지, 그러시더라. 그러면서 영화 찍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얘기하시더라. 영화를 찍을 때 제일 행복하고 시간도 잘 간다고, 거기서 행복을 느끼시는 거 같다. 나도 이번에 처음 찍으면서 들었던 느낌은, 배우들 고생시키고, (웃음) 고생시키면서 나도 고생하고, 그렇게 몸은 힘들어도 정말 행복하더라.
<영화는 영화다>라는 제목 자체가 애증을 동반한 느낌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애증이랄까. 현실을 넘을 수 없는 영화적 한계에 대한 인정 같기도 하고, 현실은 결코 이룰 수 없는 영화적 성취에 대한 선언 같기도 하다. 영화에선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얘기들도 가능하다. 거기엔 어떤 차이가 있는 거 같다. 다만 굳이 그 차이에 얽매여서 영화와 현실을 대비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물론 영화는 끊임없이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는 반면, 영화를 보는 현실의 사람들은 영화를 모방하려고 한다. 각자가 지닌 장점들을 따로 봤을 때 오히려 그게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싶다. 정말 리얼한 걸 보고 싶다면 현실을 일상적으로 스치듯이 지나치지 말고 차분하고 주의 깊게 뭔가 본인이 원하는 걸 찾아보면 된다. 그럼 좀 더 리얼한 걸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영화와 현실 사이엔 그런 차이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현실과 영화의 우열관계를 나누기 보단 평행우주라는 대등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 같다. 하지만 결말부의 뉘앙스는 아무래도 영화보단 현실에 비중을 준 느낌이다. 영화도 현실을 위해서 있는 부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현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패와 수타라는 두 캐릭터가 대립적인 관계로 보이지만 은연 중에 서로에 대한 묘한 애정이 오가는 것 같다. 약간 가볍게 말하자면 싸우면서 친해지는 관계 같기도 하고. 그런 게 느껴졌으면 했다. 사실 더 친하게 보이는 테이크들이 더 있었다. 그런데 너무 그런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찍으면서도 배우들과 얘길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느낌은 있지만 너무 친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두 사람의 경계가 희미해지기 보단 느슨해졌을 것 같다. 둘이 너무 친해지면 그것도 너무 영화적인 거니까. 사람이 또 그렇게 쉽게 친해지지도 않지 않나.
사실 <영화는 영화다>에서 강패를 비롯한 조폭들이 현실적인 조폭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영화에서나 등장할만한 느낌이랄까. 일단 조폭 영화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폭에 관심이 많진 않았다. 솔직히 강패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 조폭들을 만나서 취재하거나 그러지도 않았고. 한국 조폭이라기 보단 한국 영화 안의 조폭이랄까. 기존 영화들에서 묘사된 느낌들만을 통해서 설명하고 싶었던 부분들이 있었다. 룸싸롱이나 공사현장처럼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상황들이 있지 않나. 그리고 누군가를 죽여야 되는 부분도 실상 영화적으로 가져온 부분들이다. 스타 영화배우와 조폭의 부두목이란 직업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동경한다는 부분이 중요했다. 개인적으론 꼭 깡패일 필요가 있고 스타일 필요가 있는지가 중요하기 보단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동경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물론 일단 영화에서 그렇게 설정을 한 이상 캐릭터 자체의 삶은 리얼하게 보여야 되는 부분이 있다. 그걸 개인적 의도에 의해서 소모시키거나 조금 사소하게 다룰 수 있는 부분은 또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설정 안에서 최대한 캐릭터의 삶을 살리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현실보단 영화적 참고 사례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태양은 가득히>와 <무간도>가 떠올랐다. 두 남자가 각자 살아보지 못한 서로의 삶을 동경하는 느낌이나 정서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그 부분을 굉장히 중시했고 영화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적인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차용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서 강패가 영화를 촬영하면서 겪는 일은 영화적인 부분들이 많다. 연애만 해도 수타의 연애는 현실적인 연애고, 강패의 연애는 영화적인 연애다. 바닷가에서 키스하거나 그런 전형적인 영화적 느낌들이 강패의 연애에 있다.
아무래도 두 남자가 겹쳐지는 국면의 세기가 상대적으로 그 주변부에 배치된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보다 눈에 띄기 때문에 어떤 주변 캐릭터는 간과되게 느껴질 공산도 있을 것 같다. 아까 말했던 그 연애적 형태의 대비도 본인의 의도에 비해 가볍게 여겨질 가능성도 있을 것 같고. 둘의 이야기에서 중심축을 이뤄야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다른 주변부의 비중이 커지면 둘의 에피소드가 전반적으로 산만해질 것 같았다. 둘에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에 일부로 키우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두 남자가 서로를 통해 변화를 느끼는 지점도 있지만 각자 서로 사랑하는 여자를 통한 변화의 느낌은 부수적으로 주고 싶어서 그렇게 설정했다.
사실 결말을 배제한다면 강패는 배우로서 더 좋은 미래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엔딩은 감독으로서 캐릭터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린 셈인데 좀 가혹한 면이 있는 것 같다. 현실이 가혹한 거 같다. 현실은 잘 안 바뀌지 않나. 사람도 쉽게 안 바뀌고. 그런데 역으로 난 정말 사람들이 보다 좋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들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희망사항을 영화적인 만족감으로 적용한 채 끝내고 싶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영화는 그렇게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관객들은 자신의 현실에서 가능한 변화의 지점들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적인 대리만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엔딩에서 드러내는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은 현실과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일종의 안전거리처럼 보인다. 안전거리라는 표현을 해서 그런데 영화 자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그게 때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우들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을 결국 한발 떨어져서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면서 감성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얻는 것도 좋겠지만 결국 마지막엔 이것도 영화라는 느낌을 이성적으로 감안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바람이 있었다.
드라마틱하게 흐르던 영화가 가장 노골적인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며 엔딩을 맞이하는 셈인데 한편으론 도발적이면서 그만큼 위험한 시도처럼 보인다. 허무함을 느끼는 관객도 적지 않을 것 같단 점에선 위험을 무릅쓴 선택 같기도 하고. 위험하지. 후반 작업 하면서 그런 의견들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처음에 이야기가 출발된 지점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그 부분이 표현돼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관객들이 허무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 자칫 잘못하면 관객을 영화에 계속 참여시키다가 마지막에 가서 만든 사람만의 영화로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창작자의 화법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정서적으로 적절하게 살짝 거리를 두고 빠져 나온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수정을 많이 했다. 화면이 빠지는 타이밍이나 음악적인 부분을 고민했다. 결국 영화가 하려던 얘길 변질시킬 순 없는 거니까 강하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했던 거지. 그런데 결국은 객석이 좀 잘려서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안타깝다. (웃음) 그리고 사실 지섭 씨는 이 엔딩 때문에 이 영화를 결정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남는 장면은 어딘가? 개인적으론 뻘 씬도 애착이 가고 다 애착이 가지만 지환 씨와 지섭 씨가 많이 얘기했던 부분이 있다. 지환 씨는 강패를 보는 수타 입장에서 강패가 부하랑 공사장에서 가짜 액션하는 장면을 많이 좋아한다고 했고, 지섭 씨는 수타를 보는 강패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까페에서 은선이랑 둘이 차 마시는 장면이라고 하더라.
그 두 장면은 각자 캐릭터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나도 개인적으론 강패의 가짜 액션 장면이 가장 좋았다. 사실 영화를 두 번 봤는데 두 번째 볼 땐 결과를 알고 봐서인지 그 장면에선 꽤나 슬픈 느낌이 나더라. 그 시점에선 유쾌한 느낌을 주지만 그게 결과적으론 좀 슬픈 장면이다.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강패가 느끼는 영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상대적으로 더해지니까.
수타는 결국 성장했고, 강패는 모든 것을 잃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마지막 순간에 웃고 있는 건 수타가 아니라 강패다. 하지만 그게 이겼다는 승리의 느낌이라거나 정말 기분 좋은 만족감에서 나오는 웃음은 아니다. 되려 웃음 자체가 역설적으로 슬픈 느낌을 대변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언젠가 본인의 이야기로 연출을 하게 될 기회가 있을 거다. 본인이 주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뭔가? 사람에 대한 부분이다. 인생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누구나 다 하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사람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람이 중요한 거 같고. 아마 내가 글을 쓰게 되면 그런 부분들이 영화에 반영되지 않을까. 그리고 선악에 대한 이야기도 매력이 있는 거 같다.
확실히 구분할 수 없는 경계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경계가 그렇지. 어느 상황에서는 그게 선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느 상황에선 그게 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 미묘한 경계에선 분명한 긴장감이 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선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스릴러를 많이 좋아하기도 했었고. 물론 공포 빼곤 대부분 좋아하지만. 공포영화는 무서워서 잘 못 본다. (웃음)
첫 영화였던 만큼 지나고 나서 느끼는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많지. (웃음) 지금은 무대인사 다니느라 바쁘지만 무대인사 끝나고 이제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다. 사실 빨리 혼자 있고 싶다. 물론 그 전에 무대인사를 열심히 다니고 싶고. 그 이후로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면 내가 찍은 영화에 대해서 내 스스로 다시 한번 공부해봐야 될 거 같다. 어떻게 찍었으면 더 좋았을까라는 부분, 아쉬운 부분들은 왜 아쉬운지, 그런 부분들을 공부해야 개인적으로 영화가 마무리될 거 같다.
영화는 개봉했고 첫 번째 작품은 본인의 손을 떠났다. 기분이 어떤가? 홀가분한 느낌도 있고, 일단 배우들과 함께 무대 인사 열심히 다니면서 잘 되길 빌어야지. 그리고 빨리 혼자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웃음)
강패(소지섭)와 수타(강지환)라는 이름은 깡패와 스타에 대한 노골적인 직유지만 동시에 현실과 영화에 대한 은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는 영화다>는 그 제목만큼이나 도발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리얼리티를 구사하려 하지만 카메라의 슛이 들어가고, 슬레이트를 내려치는 순간 현실의 탈을 쓴 프레임의 파편으로 변질된다. <영화는 영화다>는 제목 그대로 현실을 넘어설 수 없는 영화적 한계에 대한 인정, 혹은 현실이 이룰 수 없는 영화적 선언처럼 보인다.
강패는 공갈과 납치, 심지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깡패다. 그는 종종 홀로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는다. 그가 보는 영화 속에는 칼부림하는 깡패들의 액션이 멋있기만 하고, 심지어 칼에 맞아 죽어가는 주인공의 모습마저도 어딘가 숭고하다. 어느 날, 강패가 관리하는 단란주점에 신작 영화를 찍는 감독과 배우들이 찾아온다. 그 중 유명 영화배우인 수타의 팬이라는 강패는 우여곡절 끝에 수타에게 싸인을 받지만 수타는 강패에게 쓰레기처럼 산다며 빈정거린다. 하지만 곧 수타는 강패를 통해 자신의 연기적 허세와 다른 진짜 기세를 느끼게 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인연이 얽혀 들어가는 그 지점에서 영화는 고조된다.
영화 속에서 깡패를 연기하는 수타는 강패를 한낱 쓰레기 취급하지만 현실에서 진짜 깡패인 강패는 수타에게 흉내조차 잘 못내는 주제에 주인공 행세하는 건 운이 좋은 것일 뿐이라며 받아친다. 서로의 반대편에서 상대에게 조소를 보내는 두 남자는 아이러니하게 점차 상대의 영역을 동경한다. 수타와 강패의 동선이 교차를 거듭할수록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지고 종종 상대의 경계를 침범하기 시작한다. 수타에게 강패의 언어는 실제로 도달하고 싶은 실존의 대화고, 강패에게 수타의 언어는 언젠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대사다. 강패가 현실에서 내뱉은 문장을 대사처럼 따라 하는 수타와 수타가 읊은 대사를 현실의 대화에 삽입하는 강패는 서로를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불분명한 진창으로 끌어들인다. 강패와 수타의 비극은 각각 그 경계를 넘으려는 찰나에서 발생한다.
‘진짜 싸우는 거라면 하겠다’는 강패와 ‘영화란 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수타는 엄연히 다른 세계의 구성원이지만 두 사람은 거울의 구도로 서로를 비추는 닮음의 형태와 같다. 가짜와 진짜로서 영화와 현실에서 빛과 어둠처럼 존재하던 두 사람의 육체가 하나의 영역에서 뒤엉킬 때 <영화는 영화다>는 강렬하게 진동한다. 상대방에게 품은 애증을 격발하듯 상대에게 내뻗는 주먹과 발길질은 반대편의 영역을 향해 옮겨진 한발처럼 서로를 잡아당긴다. 반복되는 테이크 안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강패는 현실을 지워나가기 시작하고, 강패를 비아냥거리던 수타는 현실적 주먹에 얻어맞으며 영화적 한계를 체감한다. 점차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서로를 마주보고 빙글빙글 돌던 두 남자가 자리를 맞바꾸듯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고 서로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영화다>는 철없던 어른아이의 거친 성장기이자 고독한 아웃사이더의 덧없는 호접몽이다. 영화 속 가상에 도취돼 세상을 만만히 내려보던 수타는 현실의 주먹에 얻어맞은 뒤에야 자신의 현실을 둘러보기 시작하고 카메라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강패는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더욱 절감한다. 결국 영화와 현실은 서로를 침범하지만 그 경계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종래에 뻘밭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는 두 남자의 얼굴은 진흙이 잔뜩 묻어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될 지경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건 수타나 강패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국 그건 결국 영화고, 주인공은 끝내 일어선다. 현실에 짓눌려서는 안 되는 것이 영화라면 영화의 망상을 경계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결말에 다다라 피칠갑을 하고 수타를 바라보는 강패의 날카로운 눈은 궁극적으로 어딜 향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마치 객석을 응시하듯 교묘하다. 만약 어떤 관객이라도 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강패로부터 매력을 느낀다면 결국 엔딩이 밀어내는 객석과 스크린의 거리감을 외면해선 안 된다. <영화는 영화다>는 결국 자신의 영화적 육체를 통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마주본 관객을 도발한다. 네 눈이 카메라야, 잘 찍어. 극 말미에 강패가 수타를 향해 던지는 이 ‘대사’는 수타를 매개로 영화 그 자체에 던지는 선언이다. 현실과 영화는 대립적이면서도 상호적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현실이고, 영화는 영화다. <영화는 영화다>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에 대한 애증 어린 시선을 도발적으로 선사한다.
새까맣게 울렁거리는 도입부 화면이 너무도 유명한 그 신비로운 시그널과 함께 브라운관을 메우면 마냥 가슴이 설렜다. ‘미드’란 유행어도 없던 그 때 그 밤에, 한국어로 더빙된 멀더와 스컬리를 만나는 건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매 번마다 아리송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남기고 고이 떠나는 엔딩에 사무쳐 TV가 있는 마루를 떠나지 못했다. 지금처럼 다시 보기도 없던 시절이라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어제 봤던 그 장면의 전율을 언어로 되새김질하는 게 소일거리였다. 어느덧 그 시절을 지나왔고, 멀더와 스컬리도 <엑스파일>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 역시나 울렁거리는 화면 속에서 신비롭게 흩날리던 시그널로 안녕을 고했다.
좀더 나이를 먹고 나니, 멀더와 스컬리만큼이나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졌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수준 이하의 음모 앞에서 무력해져야 하는 현실이 때론 두렵다. 차라리 그것이 UFO나 외계인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물음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그 주문은 누굴 위한 것이었나. 그 화면 너머에서 알게 모르게 이지러지던 진실의 그림자는 누구를 향해 달아나고 있었나. 그 시절, 가늠할 수 없는 화면 너머의 초현실은 차라리 천박한 권력적 음모가 난무하는 현실보다 거룩한 것이었다. 진실의 벽을 넘어가고자 분투하는 멀더와 스컬리와 함께 난 하나의 세월을 넘어왔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나. 나는 믿고 있었나. 그들이 보고자 했던 것을.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 나는 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위해,그리고 나는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