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벽적인 화이트 칼라가 지배하는 정돈된 식탁과 책상 위로 시선이 미끄러져 나간다. 그리고 그 공간만큼이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하다. 그 남자의 시선에 놓인 초점이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맞춰진 탓이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가 투명한 창 너머의 광경 기억 너머에서부터 소환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15세 시절의 열병과 함께 찾아온 기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출발한다.
우연한 만남은 소년에게 관음의 기억을 남겼고, 그 기억은 욕망을 소환했으며 결국 사랑을 잉태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용납되기 힘든 로맨스로부터 시작되는 물음이다. 자기 나이의 두 배수가 넘는 성숙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어느 소년의 사연과 그 사연을 통해 도달하게 될 어떤 깊은 물음이 불명확한 전후반 구조의 서사로서 서로를 보좌한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는 소설의 시야를 확보하되 초점을 달리했다. 사물에 밀착하듯 섬세한 1인칭 시점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하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전지적 시점의 관조적 이미지를 통해 기저의 심리를 의문스럽게 추적한다.
어린 마이클(데이빗 크로스)과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관계는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길 정도로 기연에 가깝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관음하다 욕망하게 된 소년과, 생동감 있게 성장하는 소년의 육체를 탐닉하는 여인의 관계란 굴절된 에로티시즘의 정욕처럼 아슬아슬하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출발한 관계를 로맨스로 정착시키는 건 소년의 책이다. 책 읽어주길 원하는 여인은 소년의 낭독을 전희처럼 즐기다 몸을 섞곤 한다. 육체적 관능에서 정신적 교감으로 발전한 소년과 여인의 관계는 위태롭게 휘말리면서도 정적인 추억을 쌓아나간다. 어느 여름처럼 격정적이면서도 풍요로운 로맨스는 소년에게 열병이 일어나듯 시작되고 이내 사라진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또래보다 이른 경험적 성숙을 마친 마이클은 덕분에 평생을 허무에 시달린다. 멜로는 <더 리더>를 관통하는 큰 맥락이다. 하지만 그 멜로에 방점을 찍은 건 아니다. 세심한 문체만큼 감성적인 접근이 돋보이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좀 더 건조한 방식의 시선을 드러내며 의문을 거듭 전진시킨다. 화자의 시선 내부에 놓인 것들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듯 세심하게 묘사하던 원작과 달리 영화의 시선은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비추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빚어낸 감정의 후천적 형태조차도 불분명하다. 어떤 수단에 불과하다 말할 수 없지만 실상 그 관계의 정체가 <더 리더>의 중추는 아니다. 그 멜로는 심오한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편린과도 같다.
한나의 감정적 기복에 대한 근본을 깨닫지 못한 마이클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법대에 진학한 뒤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찾은 법정에서 그 진실을 목도한다. <더 리더>의 본질적 물음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그 지점이다. 윤리에 대한 물음과 반문이 첨예하고 노련하게 이어진다.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원작을 접하지 않은) 관객 역시 그 지점에서 그 비밀을 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게 되는데 이런 덕분에 그 상황이 발생시키는 딜레마를 마이클과 함께 공유하게 된다.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적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된 한나의 죄를 경감시켜줄 유일한 단서를 마이클은 알지만 그것을 뱉어낼 수 없다. 이유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각기 존재한다.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마이클의 심리적 기저에 놓인 진심은 한나의 그것과 같다. 수치심은 마이클을 함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부적 갈등을 통해 홀로 침식된다.
영화는 원작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다른 방향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다진다. 원작과 뉘앙스가 달라진 결말은 영화만의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기 위한 첨언과도 같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고백을 털어놓는 것 사이엔 상실의 통증과 기억의 배려가 잔존한다. 그 사이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건 죄의식이다. 자신의 낭독 행위가 한나의 삶을 치유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이었음을 직감한 마이클은 그 일화에 얽힌 비밀을 보존함으로써 그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그 법정의 공모 속에 동참한다. 역사가 잉태한 죄의식이 개인에게 전이돼서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련의 상황을 목격할 때 홀로코스트적인 상처가 목격된다. 죄의식의 유전과 이로 인한 동통이 깊게 감지된다. 침묵의 시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클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낭독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나는 언어를 읽고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몰락시킨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시대적 광기에 천착했다 뒤늦게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된 운명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얹혀진 운명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함께 침전해버린 이의 운명 역시 가엾고 모질다. 결국 한나는 깡통에 돈을 남겼고, 유대인 생존자의 딸은 깡통만을 소유한다. 돈은 문맹재단에 전달되고 마이클은 고백을 결심한다. 자신의 비밀 속에서 반평생을 허무로 견뎌온 마이클은 결국 한나의 기억을 자신의 후세대에게 물려준다. <더 리더>는 운명의 과업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이 새로운 삶을 염원해나가는 방식을 담담하게 비춘다. 묵직한 질문들이 때때로 버겁게 다가오지만 냉정하듯 주시하는 영화의 시선엔 깊은 배려가 포착된다. 물론 역사적인 기록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죄의식은 보존된다. 단지 과거에 대한 단죄만큼이나 중요한 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더 리더>는 엄중한 기록을 바탕으로 새겨진 역사 속에서 휩쓸려간 개인의 삶을 통해 그 물음을 정중하게 제시한다. 마치 온 몸을 연기적 자재로 활용하는 듯한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은 그 물음을 보좌하는 훌륭한 주석이다. 무엇보다도 그 질문을 외면하지 말 것. 우리에게도 역시 아픈 역사는 존재하므로.
세계2차대전이 한창 중인 튀니지 사막에서 독일군 대령 장교는 다짐한다. 나는 조국 수호가 아닌 인류 수호를 위해 싸우겠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의 영웅이 아닌 인류의 주적이라 판단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그 독일군 대령 슈타펜버그(Stauffenberg, 톰 크루즈)의 양심적인 성찰을 조명하는 데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자 연기의 입을 빌어 던지는 일종의 고백성사다. 동시에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도입부에 이를 명백히 밝힌다. 적어도 이 허구적 산물의 어느 측면까지 실재가 반영된 것인지 가늠할 순 없겠지만-또는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이는 적어도 영화의 태도를 의심하지 않게 만드는 적절한 방어기제 노릇을 한다.
일단 <발키리>는 어느 비윤리적 집단 내부에서 피어난 양심적 선언에 대한 재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발키리>는 모종의 정치적 야심을 숨기고 포복시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두려움은 온전히 그 시대에 내포된 정신병적 파시즘에서 비롯된다. 인물들이 대항하는 건 거대한 악이 아니라 거대한 악처럼 강요되는 정신병적 불안이다. 두려움은 충돌과 갈등을 도모하고 이는 곧 영화적 서스펜스의 주체로 발전한다. 서스펜스의 날을 세우는 건 인물의 외부에서 형성되는 이미지의 결과물이 아니라 갈등과 충돌로서 이뤄지는 심리적 불안감이다. 그 불안은 인물들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제약하며 가둔다. 그 사이에서 차분하고도 점진적인 서스펜스가 영화를 잠식해나간다.
<발키리>의 결말을 언급하는 행위가 스포일러로 규정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이 영화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허구적 야심은 역사적 기록을 뒤집고자 할 만큼 과감하지 않다. 실패한 혁명은 적어도 그 당시엔 반역으로 기록되고 처형당한다. <발키리>는 그 당시엔 반역이라 불리던 에피소드다. 히틀러가 암살당해서 죽었다는 기록을 본적이 없는 이상, 그가 자살했다는 역사적 증언을 아는 이상,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적 몸통이 온전히 실화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선언하는 영화의 도입부를 확인하는 이상, 결과는 명백하다. 슈타펜버그의 신념은 결국 무덤으로 향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결론이 도출된다. <발키리>는 정해진, 혹은 예고된 결말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와 추이를 묘사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동시에 그 정해진 비극을 향한 인물의 의지가 대두된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온전히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 가지 물음은 어째서 당연한 비극적 결과를 전개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슈타펜버그의 고결한 양심적 선언을 비추기 위해서? 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첨언이 필요하다. 더 잠재적인 야심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이 매그니토의 유태인 수용소 씬을 등장시키는, 울버린의 인체 실험적 장면이 나치를 연상시키는 <엑스맨>의 수장 브라이언 싱어가 만든 <발키리>엔 사유화된 욕망이 잠재돼있다. <발키리>는 영화감독 브라이언 싱어와 유태인 브라이언 싱어가 공존하는 영화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에게 대항한 범인류적 위인의 삶을 추적하는 영화이기 전에 브라이언 싱어가 복원하고픈 어떤 정의에 대한 추도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 암살 기도를 꿈꾸는 군내부 세력들과 처음 접촉하는 장소에서 목격하는 건 일종의 정치다. 독일의 미래를 위해 히틀러를 죽이고자 하는 그가 히틀러를 죽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부터 생존을 위한 정치적 모략을 목격한다. 그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적임자를 찾고 있다. 그들의 사명감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안전에 있다. 패전이 점차 시일 안으로 다가오자 패전국의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 히틀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하지만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의 죽음이 사명이라 믿는다. 그런 그에게 정치는 온당치 않다. 정의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을 위한 정치란 일종의 사기와 같은 것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그런 사람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실제적인 슈타펜버그로부터 어느 정도 가공된 인물이다. 가공의 주체는 브라이언 싱어다. 그는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의 나치를 윤리적으로 부정하는 인물로서 바라보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슈타펜버그와 목적을 같이 하는 주변의 군부 세력들이 패전국 독일의 역사에서 명예롭게 히틀러의 존재를 지우길 원하는 것과 궤가 다르다. 패배가 예감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유하려는 이들의 정치 가운데 슈타펜버그만이 유일하게 히틀러에 대한 윤리적 타락을 본다. 슈타펜버그는 유일한 양심이자 조직의 윤리적 타락을 비판하기 위한 기제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의 육체를 빌려서 독일 나치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내부적인 양심을 발효시킨다. 외부에서 유입된 강제적 진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잉태된 자율적 신념이 스스로의 모체를 부정하길 바란다.
세계2차대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두르고 있지만 <발키리>는 전장을 묘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극 초반 튀니지에서의 씬을 제외하고 전쟁터다운 장면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베를린 독일군부의 장교만이 등장한다. 연합군과 독일군과의 전투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 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어떤 이들은 벌써부터 이 영화에 스펙터클이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으나 의도하지 않은 바를 스스로 원해서 실망했다 말하는 건 석연찮다. <발키리>는 전쟁의 승패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패배한 체제의 전복을 통해 자신을 보수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미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전범의 역사에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 바둥거리는 이들의 처량한 사연이다.
<발키리>에서 흥미로운 건 히틀러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는 세력들간의 정치적 갈등이 발견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테러의 주변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가늠하는 제3자들의 태도다. 슈타펜버그의 비장함이 때때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 이 덕분이다. <발키리>는 어느 한편에 선 자들의 묵묵한 표정보다도 그 중간지대에서 방목하듯 살아가는 회색분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점을 갈등하고 고심할 때 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슈타펜버그의 결의에 찬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그만큼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의 편에 설 것인지를 망설이는 자들의 표정은 흥미롭다. 결국 <발키리>는 어떤 선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선의와 건너편의 악의 사이에 놓인 중간자들의 흔들림이 드러날 때 더욱 매력적인 흥미를 부른다. 중심부보다 주변부의 설계가 더욱 흥미롭다.
사실 슈타펜버그가 나치의 비윤리적 태도에 항거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독일의 이익에 반하는 히틀러의 행위적 결과가 참담하다는 데서 악을 규정한다. 윤리라기 보단 실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의 <발키리>가 균형을 잃는 것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데 있다. <발키리>는 독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느 애국자에 대한 항거적 실화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자의 내면에 다른 욕망이 숨겨져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의식이 우회한다. 히틀러를 숭배하거나 숭배하는 척을 하며 살아갔던 독일인들의 무기력에 대한 항의와도 같다. 이런 태도는 <발키리>를 때때로 지극히 사유화시킨다. <발키리>는 정치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날 때 긴박해진다. 목적을 완수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윤리적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미션이라 끊임없이 스스로의 행동을 검증하고 자신의 안위를 판단한다. 유일하게 행동을 위한 행동을 펼치는 슈타펜버그만이 적극적이다. 그는 그의 말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슈타펜버그를 소환한 주체가 종종 의무감의 주체를 헷갈리듯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 인물의 의지를 허구의 틀 안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의무감과 캐릭터의 탈을 쓰고 자신의 유전자적 트라우마를 투영하려는 의무감이 캐릭터의 균형을 흔든다. 슈타펜버그의 강력한 정치적 매력은 그가 정치를 하지 않는 인물이란 점에서 발생한다. 그를 따르는 사람 대부분이 그의 신념을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때때로 슈타펜버그를 통해 어떤 정치를 하려 든다. 슈타펜버그를 윤리적 주체로 삼아 히틀러라는 상징적 비윤리를 비판하려 든다. 결말의 숭고함은 어딘가 지나치다. 페이소스가 발생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의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슈타펜버그의 안위와 그의 가족에 국한된 사안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키리>는 비정치적인 인간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태도를 탐구한다. 전쟁의 패배자로 기록될 것을 예감한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가 보존될 길을 찾는다. 그건 그 전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이 되길 시도하는 것이다. 히틀러를 죽이면 전범이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패배를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
<발키리>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홀로코스트 영화보다도 강한 자의식을 품고 있다.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비극적 역사에 갇힌 유태인들의 기적 같은 구원담을 말해온 건 그들의 처지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된다. 그건 휴머니즘에 기반한 일종의 대항적 희망이다. 비극에 대한 방어적 성찰이다. 하지만 <발키리>는 그 비극을 잉태한 주체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갈망하듯 재현한다. 동족의 비극을 기획했던 자들의 내부적인 몰락을 기획한다. 비극을 묘사하는 방식으로서의 간접적 고발이 아니라 비극의 발원지에서 펼쳐지는 자기 모순을 통해 정신병적인 체제를 고백하듯 그린다. 더 이상 과거를 동정하듯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극복으로 나아간다. 일종의 야심이 담겨있다. 더 이상 유태인의 비극을 그리는 추모제가 아니라 비극을 기획한 적의 심장부를 겨눈 직접적인 가해를 꿈꾼다.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고자 했던 이들은 정치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려 했다. 전쟁의 무의미를 깨닫는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 사명을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리고 그의 결단과 행위를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 와중에도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고 망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정치적인 인간이 정치적인 결단을 종용한다. <발키리>의 성과는 그 아이러니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지나친 감정을 요구하는 결말이 불합리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그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부화시키려는 막판의 시도가 지속적인 서스펜스의 리듬을 흐트러뜨린다. 섬세하게 간격을 유지한 채 심리적인 기저에서 찬찬히 흐르고 불거지던 긴장의 구조적 흐름이 허망하게 급류된다. 특히 너비보다도 깊이에 치중하던 <발키리>의 서스펜스 구조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감정적인 과잉 상태에서 마무리된다는 점은 여러모로 아쉽다. 그건 단지 결말이란 정보의 개방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하던 온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음역 대를 규칙적으로 연주하던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악장에 다다라 갑작스럽게 고음역대로 음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발키리>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무마시키기 위해 극 말미에 다다라 지나친 무리수를 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싱어는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방조한 셈이다. 오로지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인 인물처럼 묘사되지만 슈타펜버그조차도 비정치적 태도로 정치를 완수한다. 결국 휴머니즘은 무색해진다. 시대적인 정신질환을 진단하던 영화가 뒤늦게 인간미를 설득하는 건 어딘가 무력한 일이다. 정치적 승리를 원했던 패배자에게 숭고함을 부여할 때 그것은 명예가 아니라 일종의 모욕적 미화로 남게 된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살의를 느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이렇게 마음을 추스르기엔 지독하게 끔찍한 현실이다. 비처럼 떨어지는 백린탄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졌나. 참혹하다. 820명과 10명. 팔레스타인 사상자 820명을 이루는 건 대부분 민간인이다. 이스라엘 군 10명이 죽었다는데 개중 7명은 자신들의 실수로 인한 사망이라 한다. 이게 전쟁인가. 이건 학살이다. 홀로코스트다. 유태인 민족을 말살하자 했던 히틀러의 야심이 진정 현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분노가 차오른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배웠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가 말했다. 그들은 예수의 아들 딸이 아니다. 사탄이다. 악마가 그곳에 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행위 속에 악이 있다. 증오와 분노와 살의가 넘친다. 인간을 과녁으로 삼아 유희를 즐기는 이들이 국경지대에 즐비하다. 수용소에 갇혀서 삶을 꿈꾸던 유태인들은 이제 타인을 겨누며 즐기고 있다. 자신들의 비극을 잊고 만행을 전이한다. 언젠가 역사는 반목될 것이다. 공포에 떨고, 분노가 차오른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눈엔 또 한번 돌고 도는 증오의 역사가 서려있다.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도 내주어라. 예수가 말했다. 왼뺨을 때리고 오른뺨마저 때렸다. 예수도 고개를 숙일 판이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엔 악랄한 미소가 번진다. 가자지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즐겁게 한낮의 오락을 즐기고 있다. 폭력을 양성하고 타인의 비극을 즐기는 무리가 저 땅에 있다. 세계의 목소리가 일침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깡패가 따로 없다. 행패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악의 축이 따로 없다. 십자가 못박혀 죽은 예수가 자신을 못박은 로마인에게 저주를 퍼붓더냐. 예수의 사형을 소리치고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사면하라 악다구니를 쓴 건 유대인이었다.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작당해서 하느님의 아들을 죽였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에서 가장 먼 길로 가고 있다.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가르침을 잊은지 오래다.
단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카운터페이터>는 분명 그 질문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저 물음표를 흡수하는 답변이라기보단 튕겨내는 반문에 가깝다. 인간은 살아남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의미를 좀 더 보태보자. 인간이라는 존엄성이 완전히 짓이겨지고 삶이 형태로써의 껍데기만으로 남겨진 순간조차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이토록 많은 질문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답을 얻을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된 질문들은 영화가 유도하는 것들이다. 영화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생존의 도구로 몰락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 존재적 가치에 대한 물음을 끌어낸다.
해변가에 앉아 있는 사내가 보는 프랑스어 신문엔 종전을 알리는 기사가 1면을 장식하고 있다. -La Guerre est fine.(The War is over.)- 과묵한 사내의 눈엔 사연이 서려있고, 말 대신 내뿜어지는 담배연기는 흐릿한 잔상처럼 흩어져나간다. 1936년, 베를린의 술집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본격적인 사연은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위조지폐 제조 실력을 지닌 살로몬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가 유태인이란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뒤, 그 곳에서 어떻게 생을 연명했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처럼 담고 있다. 동시에 이는 파운드화와 달러의 위조지폐를 제조하고 적국인 영국과 미국에 유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려 했던 나치의 ‘베른하트 작전’이란 실화의 재구성이기 하다. 세계 최대의 위조지폐 사건이라 꼽히기도 하는 ‘베른하트 작전’은 유태인 수용소에 수감된 유태인을 대거 인력으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위조지폐범으로 잡혀 유태인 신분이 탄로나 수용소로 끌려온 뒤 노역에 시달리던 살로몬은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삽과 곡괭이 대신 붓과 팔레트를 들게 된다. 그러던 중 악명 높은 작센하우젠 수용소로 이송돼 절망에 빠진 그는 자신을 체포한 헤르조그 소령(데비드 스트리쏘우)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나치의 공작수행을 위한 위조전담반의 책임자로 복무하게 된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돈 안 되는 예술보단 돈 되는 불법행위에 골몰했던 살로몬에게 재능은 그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용되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생존 그 자체에 삶의 의미를 두던 살로몬은 수용소에서도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서 그림 실력을 드러냈고, 자신의 장기인 위조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삶을 연명하는 유용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지스탕스 출신이자 인쇄 기술자인 그의 동료인 브루거(오거스트 디엘)는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에 불복함으로써 그들에게 저항하려 한다. 결국 그 사이에 놓인 살로몬은 갈등과 함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다.
그들에게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머무는 위조전담반의 수용공간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수용소에서 유일한 안식처다. 하지만 그곳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위배(圍排)됐을 뿐,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질 때, 그들에게 삶의 여지는 없다. 위협에 굴복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찰나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저항이 종전에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브루거의 주장은 옳은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그 선택이 전체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깊은 고민과 갈등을 부른다. 죽음과 직면한 이들은 오히려 죽음에 맞서는 것이 만만찮다. 생존과 가장 동떨어져 죽음과 대치한 순간, 생의 욕구는 더욱 강렬해진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도 살고 죽음의 문제가 더욱 가깝다. 나치의 체제하에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유태인들에게 그 당시 삶이란 매일같이 아득해지는 것이었을까. ‘오늘 총살되느니 차라리 내일 가스실에 가겠어’라는 살로몬의 말처럼 그들에게 삶이란 단 하루의 연장만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최소한의 단위적 연장을 통해서 삶에 대한 의지도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운터페이터>는 최소한의 단위개념으로 몰락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생존의 의지를 되새기는지, 그리고 그 국지화된 삶이 어떤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되짚어나가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파괴되고 삶의 의미가 유린당하는 순간 속에서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건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욕구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가스에 대한 공포에 예민해지고, 결핵을 앓는 동료를 위해 가까스로 약을 마련한 찰나 총에 맞아 죽는 동료를 목격하는 그들의 삶에 인간의 고결한 가치관 따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공산주의 체제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과 나치 유태인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카운터페이터>는 강압적 체제 안에서 연명하는 인간의 삶을 들춘다는 점에서 교집합을 이룬다. 하지만 전자가 짓눌린 삶을 온전히 펼쳐 원형의 가치를 복원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짓눌린 채 납작해진 삶의 처참한 몰골 안에 잔존한 일말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그 차이는 선택의 불가피성을 통해 발생한다. <타인의 삶>이 체제를 구성하는 가해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의미를 채취한다면, <카운터페이터>는 체제에 수용 당한 피해자의 행위 그 자체가 의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자신의 삶을 이루는 공간에 은닉하는 지배자 계층인 반면, 후자는 주어진 공간 속에서 감시 당하는 피지배자 계층인 까닭이기도 하다.
자신들을 둘러싼 수용소의 벽이 무너지고 같은 유태인의 총부리에 위협당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같은 유태인 수용자임을 밝히기 위해서 또 한번 사력을 다한 뒤에야 온전한 평화를 체감한다. 죽음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 벽 너머 수용소의 모습은 그들의 삶이 어떤 공포로부터 협박당하고 있었는가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벽 너머에서 문득 들려오는 총성과 절규로 굳어진 그들의 표정은 평화롭게 위장된 일상 속에 잠재된 공포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생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간절하게 끌어당긴다. 실존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고 그 가치가 희미해지는 찰나에도 생존에 대한 의지는 더욱 짙게 드리운다. <카운터페이터>는 죽음에 직면했던 자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를 비출 뿐, 그에 대한 가치를 되묻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도, 기쁨조차도, 그 너머에선 부재한다. 그저 삶이 지속될 뿐이다. 추억으로 남지 못할 상흔 같은 기억을 떠안은 채 지속될 그들의 삶은 그저 살아남았다는 위안을 통해 다시 오늘을 버티며 생존해나갔을 것이다. 동시에 생의 의미는 그렇게 살아남아야만 되물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