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재계의 큰 손으로 꼽히는 재벌의 뒷거래를 폭로한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다니엘 크레이그)는 되레 곤경에 처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명예훼손의 역공을 당한 그에게는 이를 맞받아칠만한 여력이 없었다. 정보원의 증발로, 심증은 충분했지만 물증이 없었던 것. 덕분에 재판에서 패소하고 막대한 벌금형 구형으로 전재산을 날리게 된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스웨덴의 산업을 일으킨 기업으로 꼽히는 방예르 산업의 전직 회장 헨리크 방예르(스텔란 스카스가드)의 제안을 대신 전하는 변호사로부터였다.
펑크한 헤어스타일과 피어싱이 눈에 띄는 리스베트 살란데르(루니 마라)는 사실 유능한 정보원이며 천재적인 해킹 실력의 소유자다. 사회부적응자에 가까운 그녀의 외모는 모든 이들의 편견을 부르는 동시에 그녀의 공격적인 성향이 구체화된 결과에 가깝다. 문신과 피어싱으로 무장한 그녀는 한 남자에 관한 정보 수집을 의뢰 받게 되고 그로 인해 그가 곤경에 처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로 인해서 한 남자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 남자의 이름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바로 리스베트가 조사한 바로 그 남자였다.
고인이 된 스웨덴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스릴러 3부작 중 첫 작품을 두 번째로 영화화한 데이비드 핀처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스웨덴에서 제작된 <밀레니엄 제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원작과 다른 각색이 발견되는 작품이지만 그 결과물에는 차별점이 있다. 각색물로서 두 작품의 차이는 인물 간의 관계를 묘사함에 있어서 그 내면의 감정까지 포용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스웨덴 버전은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관계를 동료라는 이성적 대상의 범위 안에 가두며 원작과 다른 길을 걷는 반면, 핀처는 두 남녀 사이의 미묘한 감정적 화학 작용을 보다 세심하게 다룸으로써 소설에 내재된 멜로적인 여운을 영화로 끌어온다.
미카엘과 리스베트의 만남이 성사되는 과정이나 결말부를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원작에 충실한 건 핀처의 결과물이다. 이는 단지 원작의 모사를 염두에 둔 것이라기 보단 그 결정적인 순간을 스크린에 세워 넣을 것인까라는 고민이 원작의 감정까지 영화가 포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맞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선택은 3부작으로 진전될 시리즈의 형태에도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란 예감을 부른다. 특히 원작이나 스웨덴 버전과 달리 결말부의 사건 해결 방식을 보다 독립적으로 각색해낸 측면은 이런 추측을 보다 강하게 대변한다.
스웨덴 버전이 남녀의 관계적 심리를 잔가지라 생각하고 쳐낸 결과물이라면 핀처의 작품은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이루는 관계에 보다 큰 흥미를 느낀 작가의 각색물이라는 차이로 보인다. 그만큼 스웨덴 버전이 사건의 추리와 해결에 공을 들인 작품이라면, 핀처의 작품은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인물의 심리와 현재의 관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는 이 작품을 보다 개인적인 야심이 깃든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물론 핀처의 작품에서도 스웨덴 버전의 인용이라 이해할만한 아이디어가 발견되지만 이는 스웨덴 버전의 인용이라기보단 먼저 선점한 결과에 대한 차별적인 대안이 불필요했던 까닭처럼 보인다.
핀처의 작품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스웨덴 버전의 영화와 원작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이 작품이 결국 원작과 스웨덴 버전을 섭렵한 관객에게 더 큰 발견의 재미를 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작을 먼저 숙지한 관객이 반대의 경우보다 영화를 보다 즐길 수 있는 확률이 크다. 사실 핀처의 영화는 두 인물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할애하는 분량이 책 한 권을 훌쩍 넘기는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속도감 있는 사건의 진전을 바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기다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미카엘이 헨리크를 만나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는 광경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는 복잡한 브리핑과 같아서 단숨에 들이키기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핀처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건 스타일의 양식이다. 비주얼리스트로서 핀처의 장기는 이 작품에서도 녹록하잖게 드러난다. 특히 극 초반 영화의 줄기와 상관이 없는 오프닝 시퀀스의 비주얼은 CF감독 출신다운 핀처의 감각을 체험할 수 있는 부록과 같다. 동시에 핀처의 감각은 스티그 라르손의 원작에 비해서 보다 정밀한 장르물의 형식에 가깝게 보인다. 특히 유령과 같은 시선으로 생물처럼 미끄러져나가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유려하게 공간을 포착하고 응시하는 방식은 필요에 따라서 극적인 서스펜스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원숙한 연기와 캐릭터 표현력이 두드러지는데 그 중에서도 리스베트를 연기한 루니 마라는 단연 인상적이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무난한 인상으로 출연했던 그녀는 펑크한 스타일로 무장한 리스베트를 연기해냈다는 이슈를 넘어서 완벽하게 자신의 스타일로 승화했다. 단연 올해의 발견이랄까.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은 청나라 초기의 문인 포송령이 집필한 16권 분량의 기담집 <요재지이>에 수록된 단편 <섭소천>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시 중화권 톱스타로 떠오른 장국영과 왕조현을 앞세운 이 작품은 무협과 느와르를 필두로 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대변하는 흥행작이었으며 올드팬들에게는 여전히 향수를 부르는 고전적인 아이콘이다. 새롭게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은 이런 전설적인 인기에 영합한 기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품을 새롭게 단장한다는 기획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전작과의 비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메이크된 판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내러티브에 있다. 왕조현이 연기한 소천과 장국영이 연기한 영채신의 러브스토리가 주를 이룬 전작과 달리 새로운 <천녀유혼>은 유역비가 연기하는 소천과 여소군이 연기하는 영채신의 로맨스 이전에 고천락이 연기하는 퇴마사 연적하와 소천의 내밀한 사연을 프롤로그로 삽입한다. 이로 인해서 전반적인 캐릭터들의 비중이나 형태도 변모했다. 소천과 영채신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사연이 소천과 영채신, 연적하가 이루는 삼각구도의 관계로 변모한 것. 또한 과거 연적하와 동료였으나 그에게 실망을 느끼고 대립하게 된 하설풍뢰(번소황)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도 새롭다. 이처럼 전작에 비해 보다 복잡해진 캐릭터 관계도는 내러티브의 전개에도 영향을 끼쳤다.
연적하와 소천의 관계가 두드러지는 리메이크작에서 영채신은 극을 주도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극의 전개에 있어서 영채신은 여전히 주요한 캐릭터다. 다만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보장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순히 캐릭터의 중요도가 변화했음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가 리메이크작에서 일종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리메이크 판본은 영채신과 소천의 로맨스보다도 소천과 연적하의 사연이 감정적 중추를 차지하는 형태로 발전된다. 이런 선택은 두 사람의 로맨스로 귀결되는 원판의 감정선을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잉태한다. 하지만 역으로 리메이크 판본의 선택은 영채신과 소천의 감정선을 중화시키고, 소천과 연적하 사이의 감정선마저 소품처럼 몰락시킨다. 감정적인 구조를 확장시키고 있으나 그 감정에 긴밀함을 불어넣는 재주까지 마련하는데 실패한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들의 매력, 더 나아가서 배우 스스로가 어필하는 매력의 결핍 덕분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판본은 원전에 비해서 캐릭터들의 매력이 떨어지는 인상이다. 청순함과 요염함을 오가던 왕조현과 유약하면서도 섬세하고 순정적인 장국영에 비해서 유역비와 여소군은 평범하다. 이는 온전히 배우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에 관한 묘사력과 그들에게 주어진 행동 반경의 제약 탓이기도 하다. 캐릭터 관계가 확장됐다는 건 극의 중추를 이루던 캐릭터들이 자신의 활동반경을 그만큼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반경을 잃어버렸다는 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캐릭터들이 그만큼의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맹점이다. 상황은 보다 분주해졌으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건 감상의 집중력도 약해짐을 의미한다.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의 묘사력은 지금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하지만 그 열악함이 발생시키던 재미가 있었다. 이를 테면 소품으로 제작된 시체들이 기어 다니는 광경은 그 자체가 지닌 원초적인 긴장감이 있었으며 영화는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며 위트를 발생시킨다. 슬랩스틱의 요소와 함께 고전적인 무협물로서의 매력이 존재했다. 그 열악함이 B급 취향의 흥미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천녀유혼>은 오늘날의 발전된 CG기술을 통해 보다 매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구축했지만 되레 그것이 이 영화를 심심하게 만든다. 진보한 기술이 되레 원작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퇴화시킨 셈이다. 무협물로서 액션의 묘사는 보다 디테일해졌지만 날것처럼 등장하던 소품들의 귀기 어린 기운들은 사라졌으며 영계와 인간계 사이의 신비감도 되레 증발한 것 같다. 거친 단면들을 말끔하게 밀어냈지만 오히려 그것이 <천녀유혼>을 평범한 작품으로 인식시킨다. 깔끔할수록 보기는 좋지만 때때로 그것이 심심할 수 있다는 것,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증명하는 건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가 아닐까. 장국영에 대한 향수는 덤이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포트스미스라는 마을에 매티 로스(헤일리 스타인펠드)라는 소녀가 나타났다. 같은 날 마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당일이 범죄자 세 명의 사형집행일이었던 까닭이다. 어쨌든 소녀가 그 마을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말을 사기 위해 포트스미스를 방문한 아버지와 동행한 하인 탐 채니(조쉬 브롤린)가 아버지를 죽이고 주머니의 금화를 들고 인디언 구역으로 달아나버린 것. 영민한 소녀 매티는 그의 뒤를 쫓을 동행자를 고용하기로 결정하고 그 중 거칠기로 악명 높이만 검거율이 대단한 연방보안관 카그번(제프 브리지스)에게 접근한다. 그 와중에 탐 채니가 과거에 저지른 살인의 행적을 뒤좇던 텍사스 레인저 라 뷔프(맷 데이먼)가 그들 주변에 나타난다. 이로서 세 사람의 추적이 시작된다.
존 웨인의 서부극으로 잘 알려진 헨리 해서웨이의 연출작 <진정한 용기>를 리메이크하며 화제가 된 코엔 형제의 <더 브레이브>는 (국내 수입사에서 가져다 붙인 서로 다른 개봉명과 무관하게) 동명의 원제를 지닌 두 작품의 기원이 된 웨스턴 소설의 대가 찰스 포티스의 <트루 그릿 True Grit>을 영화화한 각색물로서도 높은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해서웨이의 <진정한 용기>는 포티스의 원작과 달리 후일담에 가까운 매티의 1인칭 내레이션을 걷어내고 존 웨인이 연기한 카그번의 캐릭터를 묘사하는데 주력한 영웅주의 서부극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는 매티의 내레이션을 복원하며 극의 흐름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동시에 보다 능동적으로 극적 흐름을 유추하게 만드는 감상자의 역할을 생성시킨다. 극적 발단이 되는 인과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을 걷어내고 인물의 대사와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건의 격발지점을 예측하게 만든다. 이는 보다 많은 서사적 예상과 캐릭터적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이다.
카그번을 연기하는 존 웨인과 제프 브리지스의 이미지만으로도 <진정한 용기>와 <더 브레이브>의 차이는 손쉽게 발견된다. 거친 주정뱅이이자 난폭한 총잡이인 카그번이라는 인물은 지저분하고 게으른 이미지가 농후한 <더 브레이브>의 제프 브리지스가 깔끔하게 정리된 인상이 느껴지는 <진정한 용기>의 존 웨인보다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감상을 부른다. 극적인 상황에 따라 연기력의 격차가 짙게 발견되는 <진정한 용기> 속 캐릭터들보다도 <더 브레이브>의 캐릭터들은 뛰어난 상황 몰입으로 실제적인 연기에 접근해 낸다. 동시에 <진정한 용기>와 달리 <더 브레이브>는 원작의 텍스트를 통해 예견되는 황량한 풍경으로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코엔 형제가 연출한 이미지들은 어린 소녀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좇아 연방보안관을 고용하고 추적에 나선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흥미진진한 사실성을 부여한다. 특히 결말부의 태도는 두 작품의 대조적인 관점을 녹록히 드러내는 결정적인 한 수나 다름없다. 보다 낙관적이고 경쾌한 엔딩으로 마무리된 <진정한 용기>의 감상적 태도와 달리 <더 브레이브>는 보다 냉정한 시선으로 목표에 다다른 인물들의 관계적 결말에서 황량하고 건조한 회상의 양식으로 갈무리한다. 이는 해서웨이의 영화가 훼손시킨 포티스의 원작이 지닌 세계관을 복원해낸 결과물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다양한 장르적 연출을 시도하면서도 직관적인 시선과 냉소적인 위트로 세상을 관조하는 코엔 형제의 세계관은 <더 브레이브>에서도 유효하다. 낭만주의 웨스턴과 수정주의 웨스턴의 길목에 위치한 원작의 관점은 사실적인 관점과 냉소적인 위트로서 현상을 직시하는 코엔 형제의 시선을 통해 또 한번 새롭게 거듭났다. 소품에 가까운, 우스꽝스러운 블랙코미디의 연출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코엔 형제는 <파고>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이 냉정한 태도로 세상을 직관해내는 스릴러물을 통해 품격 있는 걸작들을 만들어 내곤 했다. 물론 <더 브레이브>가 코엔 형제가 만들어낸 필모그래피 속에서 상대적으로 걸작의 반열에 들만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코엔 형제의 냉소적인 시선이 견지된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라는 이름 안에서 가능한 영화적 품위가 담긴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기억될만한 작품이다.
웨스턴 복수극이라는 평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더 브레이브>는 그 사건 속에 놓인 인물들의 입체적인 성격을 통해 극적 전개에 대한 흥미를 높인다. 서술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이자 사건의 기준이 되는 매티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다부진 면모를 드러내며 이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자아낸다. 동시에 나태하고 독설적이지만 정의적인 위엄을 지닌 카그번과 소심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나 인정이 깊은 라 뷔프의 동행은 다양한 갈등과 충돌을 빚으며 평면적인 극의 흐름에 흥미로운 에너지를 부여한다. 서부 개척 시대 웨스턴의 풍경을 넓게 조망하면서도 인물들의 성격을 세심하게 조명하는 <더 브레이브>는 세계관의 너른 풍경 속에서 깊은 인간적 체온을 발췌해낸다. 포티스의 원작이나 해서웨이의 <진정한 용기>를 접한 이들에게도 영화의 이런 입체적인 면모는 흥미를 끌만한 대목임에 틀림없다. 리메이크와 소설의 영화화라는 형식적 의미를 뛰어넘는 영화적 성취이자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코엔 형제의 장인적인 면모에 대한 재확인으로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더 브레이브>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총망라된 동시에 그들의 빼어난 연기가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작품이란 점에서 감탄을 부르는 영화다. 똑똑하고 야무진 매티 로스를 연기하는 헤일리 스타인펠드는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가장 이상적인 캐스팅에 가깝다. 소심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라 뷔프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지난 캐릭터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나 보다 능숙한 연기적 방식으로서 극에 일조하고 있다. 특히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는 <더 브레이브>의 완성도에 일조한 하나의 영화적 특성이라고 평해도 손색이 없다. 존 웨인의 말쑥함과 달리 지저분한 행색의 제프 브리지스는 극적인 사실성을 더하는 동시에 보다 중후한 위엄을 갖추며 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데 혁혁한 공헌을 해낸다. <더 브레이브>가 코엔 형제의 영화가 아닌 제프 브리지스의 영화로 불려진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잠언 28장 1절을 인용하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극의 마무리까지, 중후한 세계관의 중량감을 유지하면서도 감각적인 리듬감을 통해 신을 열고 닫으며 극적인 흥미를 자아내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나간다. <더 브레이브>는 이미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코엔 형제가 일정한 영화적 성취를 완수해내는 장인의 궤도로 들어섰음을 확신하게 만드는 인장과 같다. 동시에 이 작품은 역시 장인이라 불려도 좋을 명배우의 중대한 일조를 통해 빚어낸 웨스턴의 위엄이란 점에서 보다 고무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터벅터벅,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시선이 공허하다. 두서 없이 움직이는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여인을 어디론가 밀어내고 있다. 멀리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곧 여인의 눈에 어떤 깨달음이 맺힌다. 뒤를 돌아보고 다시 돌아서서 길을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곧 현실을 체감한다. 숨기고, 그 와중에 무언가를 먹는다. 살기 위해서 그렇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인의 귀 속으로 사이렌 소리들이 들어찬다. 그리고 떠오른다. 묵묵하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만추, Late Autumn. 그렇게 영화는 관객 앞에 떠오른다.
(필름 원본이 유실됐다고 알려진) 이만희 감독의 동명 원작을 김수용 감독이 한차례 동명의 리메이크작으로 완성한 바 있는 <만추>는 바닥으로 나뒹구는 낙엽이 되기 전,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몸을 빨갛게 물들이며 강렬하게 마지막 삶을 치장하는 단풍과 같은 멜로다. <만추>는 살인죄로 체포돼 수감된 여인이 어머니의 부음으로 7년 만에 3일 동안의 외출을 얻게 되고, 그 짧은 외출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가 서서히 자신을 사랑으로 물들인다는 것을 직감하고 한 순간 강렬한 열애에 빠져든다는 로맨스물이다. 이미 같은 제목으로 두 번의 반복을 거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동명의 로맨스물로 리메이크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이 묵은 감정의 허물을 벗기듯 오랜 신파의 유효기간을 다시 한번 연장한다.
(동명의 제목을 지닌) 이만희와 김수용의 <만추>가 시대상의 변화와 연출 형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라면 시애틀의 이국적인 풍경으로 리모델링된 김태용의 동명 리메이크물은 그 상대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차별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애틀의 풍경 속에 놓인 동양의 남녀는 자신들이 밟고 선 그 이국에서 온전한 타인으로 대비되며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잉태하지 않았던 이국의 풍광 속에 머무는 두 남녀의 몽타주는 그 단적인 풍경만으로도 두 사람의 외로움을 한껏 드러낸다. 복역 중인 수감자 신분으로서 3일만의 외출을 허락 받은 여자와 자신의 육체를 이국에서의 새로운 생을 위한 밑천으로 삼은 남자의 만남은 그리하여 운명적일 수 밖에 없다.
<만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을 증발시켜버리듯 적막한 감상 속으로 관객의 시선을 묵묵하게 걷게 만든다. 대사 하나 없이 탕웨이의 초췌한 표정만을 스크린에 가득 채운 오프닝부터 모든 서사의 뒤에 홀로 남겨진 채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응시하는 탕웨이의 설렘을 여운처럼 남긴 채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는 엔딩까지, <만추>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에서 염원하고 싶은 현실에 대한 기도로 끝을 맺으며 관객을 점차 갈망하게 만든다. 뿌연 안개가 걷히듯 러닝타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기승전결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는 감정적 자극을 최대한 차단하며 훈(현빈)과 애나(탕웨이)의 개인적 서사를 유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두 인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돼 나가는지 찬찬히 관찰할 수 있도록 강물처럼 서서히 극을 떠내려 보낸다.
범상치 않은 전력을 지닌 두 남녀가 시애틀에서 우연히 만나 단 3일 동안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경험한다. 서서히 서로에게 진한 감정을 물들이는 두 남녀의 거짓말 같은 러브스토리가 담긴 <만추>는 두 인물의 화학작용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온도차로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멜로물의 특성에 발을 들이기 보단, 되레 감정을 증발시키고 저온으로 숙성된 감정을 결말에 다다라 여운으로 휘발시킨다. 고즈넉한 가을로 접어든 시애틀은 적막하고도 고요하며 그 속에서 방랑하다 조우하듯 마주친 두 동양 남녀의 사연은 저마다 처연한 짐작을 부르며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그만큼 숙연하게 무르익는다. 김태용의 <만추>는 마치 두 사람의 관계적 진전이 동시간대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경험적 교감으로서 설득해낸다. 외로운 두 인물의 감정이 자연히 공감대를 이루고, 이런 감정적 교감의 가능성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넘어 점차 감정적인 깊이를 형성하게 된다.
백지와 같이 다양한 감정을 그려 넣기 좋은 표정을 지닌 탕웨이는 <만추>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평가될만한 자원이다. 그녀는 현빈의 들뜬 연기를 상대적으로 보완하는 동시에 극적인 흐름 안에서 분위기의 편차가 큰 <만추>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와 같이 자리한다. 현빈 역시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캐릭터와의 궁합도 적절하다. 현빈과 탕웨이의 이례적인 조합도 김태용 감독이 포착한 수려한 풍경 속에 잘 녹아 드는 인상이다.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도는 외로운 타인들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만추>는 생의 끝을 예감하듯 빨갛게 제 몸을 태운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져 나뒹굴기 직전의, 애잔하고 서글픈 설렘을 전하는 가을의 끝과 같은 멜로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동명 고전 소설을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걸리버 여행기>는 어쩌면 그 원작과 유사한 평행우주라고 해도 좋은 작품이다. 다만 우연히도 과거 스위프트의 그 걸리버와 다른 시대를 사는, 현대의 또 다른 걸리버(잭 블랙)가 그와 다른 소인국으로 통할 수 있는 경로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 결과물이 바로 이 <걸리버 여행기>(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들은 일종의 사족이며 낭비다. 결코 심각해질 수도, 심각해질 필요도 없는 이 작품의 태도 앞에서는 말이다.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원작과 마찬가지로 소인국으로 간 걸리버의 경험을 담은 것이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이 <걸리버 여행기>의 목표다. 물론 인간 세계에 관한 혐오적 풍자를 가득 담아낸 조나단 스위프트의 의도는 논외다. 단지 소인국으로 간 현실의 인간이 겪는 좌충우돌 그 자체를 전시하는 것이,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 것이 이 영화의 확실한 목표지점인 셈이다. 물론 이 영화의 핵심적인 묘미는 거인 ‘잭 블랙’의 위트 있는 활약상을 지켜보는 것 그 자체일 것이다. 단지 그 익살스러운 표정만으로도 웃음을 자아내는 잭 블랙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87분, 이는 곧 이 영화가 딱히 많은 이야기를 할만한 여력이 없는 작품임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단점이 아니다. 어떤 아이디어에서, 구체적으로 현대판 ‘걸리버 여행기’를 만들어보자는 발상에서 출발한 이 영화의 두 번째 스텝은 그 발상을 현실로 착상시키기 위해 기본적인 요소들을 채워 넣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자신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이상의 탁월한 이야기를 설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상적일 수 없는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최대한 짧은 러닝 타임을 할애하는 것이니까.
그런 이해에도 불구하고 <걸리버 여행기>가 너무도 손쉽게 모든 상황들을 굴려 보내고 있다는 건 결코 간과하기 어렵다. 이르시니 행하노라, 라는 식이다. 소인국의 인물들은 말만 하면 무엇이든 이뤄내는 만능 재주꾼들이며 그들의 현실을 두르고 있는 모든 환경들을 고려할 때 결코 이뤄질 수 없을 것까지 완성하고 마는 놀라운 재주를 지닌 이들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유치한 지적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딱히 상식적인 상황을 마련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영화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거듭 나열하면서 그 어이없음을 자신의 영화적 태도로 치장해내는, 장난스런 결과물에 가깝다. 마치 정색하면 지는 게임에 가깝다고 할까.
영화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어떤 영화의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그건 바로 <걸리버 여행기>를 연출한 롭 레터맨의 전작인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몬스터 vs 에이리언>이다. 갑자기 거인이 된 탓에 괴물로 취급당하는 여성이 거대 로봇을 조종하며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막아선다는 이 애니메이션의 설정은 실사영화인 <걸리버 여행기>와 상당 부분 유사한 지점이 있다. 심지어 외계인이 조종하는 로봇의 디자인마저도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소인국의 로봇과 유사하다. 이런 기시감들은 이 영화가 그만큼 창의적이지 않은 결과물임을 증명하는 또 다른 단서들이다. 동일한 감독이 만든 두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차이를 제외하면 일종의 동어반복에 가깝다.
그러니 거기까지, <걸리버 여행기>는 잘못 만든 영화가 아니라, 애초에 잘 만들 의도가 없었던 영화다. 좀 심한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걸리버 여행기>는 그럴 듯한 아이디어 하나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허풍들이 동원된 영화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인물의 성장에 관한 교훈이나 감동은 그저 영화적 구색을 맞추기 위해 마련된 소품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소품이다. 이야기가 유치하다고, 스토리가 엉성하다고, 이 영화의 단점에 대해서 나열하는 것 자체가 쓸모 없는 짓이다. 거대한 잭 블랙이 펼치는 우스꽝스러운 몇몇 장면에 폭소하거나, 그의 애드립에 감탄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 당신이 읽은 이 리뷰 자체가 일종의 에너지 낭비라는 말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영화에서 영상기술의 발전은 장르의 개척을 가능하게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SF와 판타지 장르에서 거둔 성과들은 이런 전제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사례일 것이다. CG기술의 발전은 형이상학적인 상상력을 형이하학적인 표현력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들의 표현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연스레 장르 개척의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가능해졌다. 1982년에 공개된 <트론>의 속편격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 2>) 역시 바로 이런 영상기술의 발전을 통해 얻어진 표현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조악한 이미지의 결과물처럼 보여지는 <트론>은 당시만 해도 혁신적인 실험작이라 평가 받는 작품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미지화한 8비트 게임 영상 수준의 그래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당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험적 작품으로서 평가 받았다. 이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둔 아이디어가 표현 기술의 발전 속도를 앞서 구현된 사례로서도 유용하다. 마치 10년 전에 <아바타>가 나온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이는 결과적으로 실험적인 도전으로서의 가치를 벗어나서 그 조악한 이미지가 이룬 결과적인 성과, 즉 도스 체계로 운용되는 8비트 컴퓨터의 베이직한 프로그램 원리를 비유적인 이미지로서 치환한, 가상의 평행우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컬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조악한 영상이 되레 단순명확하게 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원리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트론>(이 제작된 시대)에 비해 진일보된 영상기술을 활용한 <트론 2>는 그런 장점을 통해 전작과 차별화된 감상의 묘미를 발생시킨다. 서사적으로 속편에 가까운 <트론 2>는 전편의 바탕을 이루던 컴퓨터 체계의 평행우주 세계관 ‘그리드’를 비롯해서 ‘광선 바이크’ 레이스나 ‘디스크 배틀’과 같은 볼거리의 이벤트를 동일하게 등장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보다 화려해진 이미지의 미장을 통해 리메이크의 의미를 부여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완성했다. 어두운 무채색의 색상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조도가 높은 형광색 띠가 곳곳에 배치한 ‘그리드’의 이미지는 과장된 빛의 황홀경에 가까운 감상을 부여함으로써 가상세계에 대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며 언어 그대로 레이저쇼를 구경하는 듯한 관람의 재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트론 2>는 그 현란한 빛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심심한 영화다. 말 그대로 구경에 가까운 재미라는 건 <트론 2>의 장점이라기 보단 단점에 가깝다. <스피드 레이서>가 연출해낸 비현실적인 레이싱 경기와도 비교해봐도 좋을 <트론 2>의 광선 바이크 레이스는 바이크를 따라 흐르는 빛의 물결을 구경하게 만들면서도 레이스의 속도감이나 긴장감을 차단해버린다. 이는 곧 그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이 쾌감의 속성으로 연동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는 <트론 2>를 두른 모든 이미지의 결과적 감상과 연결된다. <트론 2>는 <트론>의 시대보다도 진화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체계를 포섭하며 보다 광활해진 전자신호 시스템의 세계를 보다 화려해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전작의 야심에서 보다 나아간 기획물이다. 보다 진일보된 영상은 이를 대변하는 핵심적인 근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론 2>는 조악했던 전편이 얻어낸 컬트적인 의미로부터 차단된, 발전된 이미지를 과시하는 평범한 공산품으로서 퇴보된 작품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의 세계관을 설계하고 구상했으나 그 모든 이미지마저도 결국 전작이 마련한 세계관의 발전적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아닌 셈이다. 눈부신 이미지의 향연 속에는 감흥이 결여돼 있다.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의 세계관과도 비교할 만한 기계와 인간의 대립, 혹은 정보를 독점하는 시스템 속에서 발생하는 정보적 약자들에 대한 억압과 같은 현실 체계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트론 2>는 전작과 일맥상통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하지만 딱히 탁월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하기 힘든 전작만큼이나 속편의 기승전결 역시 세심하게 세공되지 못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극적 긴장감의 결여는 전시적 용도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로부터 기인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클라이맥스의 구심점을 마련하지 못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이를 부채질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론>의 속편으로서 ‘트론’이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롤타이틀 무비가 정작 ‘트론’이라는 제목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의아한 일일 것이다.
스웨덴 작가 욘 A. 린드크비스트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은 이에 앞서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바 있는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과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홍보에 따르면) <렛미인>은 <렛 미 인>의 리메이크작이 아닌, 동일한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렛미인>은 분명 <렛 미 인>의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는, 비교군의 운명을 타고난 작품임에 틀림없다.
스웨덴의 적막한 설원을 배경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페이소스와 은밀하게 새어 나오는 서스펜스가 공존하는 <렛 미 인>은 한 소년의 성장드라마이자 잔혹한 멜로이며 특이한 기질을 자랑하는 장르물이기도 하다. <렛미인> 역시 이런 범주의 특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다. 장르적 특성에 보다 접근한 결과물이라 말할 수는 있지만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은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렛 미 인>으로부터 크게 차별화된 이미지를 그리려 노력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되레 잔혹한 결말부는 원작보다도 스웨덴 버전의 작품으로부터 얻은 영향력을 감지하게 만든다.
하지만 <렛미인>은 <렛 미 인>과 분명히 다른 작품이다. 스웨덴을 배경으로 둔 <렛 미 인>의 정적인 감수성은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둔 <렛미인>에서도 유효하다. 하지만 두 정서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렛 미 인>이 반투명한 유리 너머의 이미지와 같이 불투명한 감정을 매개로 신비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라면 <렛미인>은 보다 뚜렷한 단선을 지닌 채 보다 감정을 위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보다 확실한 점을 찍어내는 영화에 가깝다.
이는 어린 배우들의 표현력과 기시감의 차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의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감상자가 얻을 수 있는 간접적인 정보의 수집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고 이를 통해 감상을 완성해가는 전자에 비해 후자는 보다 직접적인 표현을 동원함으로써 영화의 의도를 보다 단단하게 전달한다. 이는 관객이 개입할 수 있는 해석적 차이를 좁히고 이를 통해 보다 확실한 형태의 감정으로 관객을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렛 미 인>의 기준에서 <렛미인>은 보다 친절한 영화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협소한 결과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렛미인>을 보다 폄하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렛미인>은 나름의 성취를 품은 영화다. 무엇보다도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둔 <렛미인>은 <렛 미 인>에 비해 보다 정치적인 텍스트를 삽입하고 있다. <렛 미 인>이 감수성과 연동되는 이미지의 활용이 돋보이는 영화였던 것과 달리 <렛미인>은 보다 직설적으로 풍경 자체를 시대적 배경과 연동하며 영화의 해석적 방향성을 변화시킨다. 도입부부터 레이건의 연설을 비추고 이를 중간중간 삽입해나가는 모습은 <렛미인>이 서정적인 뱀파이어물로서의 특이성에서 벗어나 간접적인 정치적 메타포를 웅변하는 작품이란 사실을 예감하게 만든다. 물론 서사적 나열의 차이는 두 영화에서 가장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거리감일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두 영화의 정서적 차이에 한 몫을 거드는 요인이다. 특히 뱀파이어 소녀 애비를 연기하는 클로이 모레츠는 소녀와 여인의 경계를 오가듯 성숙한 감정을 전달하며 영화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다. 이 역시도 스웨덴 버전과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결과인데, <렛 미 인>의 감정적 중심이 소년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에게 놓인 영화였다면 <렛미인>은 뱀파이어 소녀 애비에게 보다 많은 감정적 이입을 하게 되는 영화다. 이는 캐릭터로부터 드러나는 집중력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렛미인>은 <렛 미 인>과 많이 다른 영화는 아니지만 두 영화의 차이는 분명 유효하다. 그리고 두 작품은 감상의 고지를 선점한 작품을 뛰어넘을 만큼의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차기작을 완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것인가를 체감하게 만드는 좋은 비교군이기도 하다.
<렛미인>을 통해 굳이 <렛 미 인>과의 우월성을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렛미인>은 <렛 미 인>만큼이나 나름의 결정을 품고 있는 작품이다. 다만 토마스 알프레드슨에 앞서서 매트 리브스의 <렛미인>을 먼저 봤다면, 혹은 이 영화가 보다 앞서서 제작됐다면 감상은 얼마나 달라졌을지에 대한 의문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쑤시개 꼬나 물고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쌍권총 손에 들고 폭풍 킬샷 날리던 주윤발의 <영웅본색>은 홍콩 느와르의 전설이다. 하얀 비둘기 날리며 홍콩 느와르의 간지를 창출해낸 오우삼의 <영웅본색>은 홍콩이라는 지정학적 입지를 특유의 장르적 분위기로 승화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시대를 선도하는 작품이었다기 보단 그 시대적 공기와 함께 호흡함으로써 얻어진 훈장과 같은 장르나 다름없다.
1986년작인 <영웅본색>은 오늘에 이르러 분명 낡은 추억과 같은 유물이나 그것이 자신의 시대 안에서 이룬 성취는 분명 간과할 수 없는 매력임에 틀림없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을 리메이크한 송해성의 <무적자> 속에 담긴 <영웅본색>의 흔적이란 그래서 조금 낯설다. <영웅본색>의 캐릭터 구도를 이어받은 새로운 얼굴들, 그리고 그들이 펼쳐 보이는 유사 이미지의 액션은 <영웅본색>에 빚진 것임에도 그 뉘앙스와는 조금 동떨어진 것들처럼 보인다.
<영웅본색>이 그러했듯이 <무적자> 또한 범죄 조직의 비정함에 맞서는 수컷들의 의리를 앞세워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액션 느와르를 표방한 작품이다. 팽배한 물질주의와 대륙으로의 반환을 앞둔 공황적 심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홍콩의 입지를 사내들의 느와르적 정서로 연동한 <영웅본색>은 시대에 깃든 아이러니한 정서를 낭만적인 기운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만의 멋을 입힌다. <무적자>는 탈북자라는 신분과 부산이라는 지정학을 통해 <영웅본색>의 국산화를 시도하고 보기 좋은 젊은 배우들의 캐스팅을 통해 혈기를 보충한다.
<무적자>는 스토리텔링의 흐름 안에 있어서 눈에 띄는 결점이 발견되는 영화가 아니다. 인과관계는 적절하며 관계 설정의 변주와 갈등의 양상에서도 큰 흠이 드러나지 않는다. 부산을 근거지로 연출한 느와르적 풍광도 근사하다. 다만 그 내러티브의 흐름을 흔드는 울림이 약하다. 강한 의리와 애틋한 형제애로 묶인 원작의 인물들이 펼쳐내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무적자>의 인물들은 감정의 이입을 이끌어내기 보단 그 감정적 상태를 거듭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것만 같다. 다단한 플롯을 통해 복합적인 감정선을 구축했으나 감정의 진전이 더디고 끝에 다다라 닿는 폭발력이 약하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기능적으로 나쁘지 않다. 다만 그것이 말 그대로 기능적인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정서적 공감대를 이룰만한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할까. 젊은 배우들의 갈등과 이해로 도모되는 <무적자>의 감정선은 강렬한 혈기가 존재하나 이를 녹록하게 묵혀줄 관록이 눈에 띄지 않는다. 표독스러운 눈빛과 멋스러운 자태가 공존하지만 그것들을 진짜로 승화시킬 내공이 부재한다. 나름대로 대단한 물량공세를 자랑하는 피날레의 액션신은 나름의 볼거리를 이루지만 그 상황 위를 날고 뛰는 인물들의 감정선은 객석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정서적 연대에 빠져드는 것 같다고 할까. 이미 낡은 것이 된 원작의 영광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무적자>는 딱히 인상적인 작품이 아니다. 원작의 본색은 물론 자신의 본색조차 얻어내지 못한 범작에 불과하다. 존경심을 표하기 이전에 자립심부터 챙기고 볼일이랄까.
정의를 고수하며 싸움에 승리한 남자에게 남은 건 영광이라 부르기조차 넌더리나는 상처 뿐이었다. 가정은 무너졌고, 직장은 사라졌다. 만신창이처럼 너덜해진 삶 속에서 무기력을 체감한 남자는 덧없는 교훈 하나를 짊어진 채 관계를 단절시키듯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놓인 지방의 마을로 떠난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굴 속으로’ 들어가듯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남자는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에 지펴오르는 의심을 좇아 그 실체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점차 완성돼 나가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서다 이에 맞서나가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서 연재된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거대한 담론으로 내달리는 작품이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이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과 깊게 맞닿아 있으며 평온한 마을의 풍경은 부조리를 가린 위장의 합리로서 이뤄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류해국은 그 모든 위장된 합리로서 이룬 평온을 헤집어 내는 암적인 존재다. 애써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신만의 공동체 속에서 평온을 유지해오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추적하는 류해국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밀어내거나 제거하려 들고 이는 결국 어느 한 쪽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치열하게 발전돼 나간다.
영화화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온 <이끼>의 연출자로 나선 강우석 감독은 분명 의외의 카드였다. <이끼>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작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정제돼 버린 듯한 메마르고 거친 세계관은 극단의 대립 구도로 맞서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충돌로서 뜨겁게 달궈진다. 유머나 분노와 같은 인간의 평면적인 감정을 넘쳐 나듯 활용하는 강우석의 세계관은 분명 <이끼>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이끼>는 원작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세계관이 스크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될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우석의 <이끼>는 원작의 서사 일부를 재구성함으로서 극의 질량을 줄여냈다. 문제는 원작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임과 동시에 그 세계관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은밀하고도 긴밀하게 이뤄진 캐릭터들의 관계 구도는 <이끼>라는 세계가 품은 부조리를 완성하는 커다란 조각이며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이들과 대립 구도에 선 인물을 유인하는 지도나 다름없다. 캐릭터들의 사연은 그 세계관의 기원이자 그 세계를 이룬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한 인과의 본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 모든 사연을 묘사함에 있어서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 캐릭터들이 극적으로 완수해야 할 목표를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이끼>는 캐릭터들의 질량을 더해서 그 세계관의 무게감을 채우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사연은 바로 그 캐릭터들의 극적인 질량감을 표현하는 수단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개개인의 서사가 드러나고 축적되며 세계관의 본질이 완성되고 극이 진행된다. <이끼>는 원작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규모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서사에 빤한 편차를 둔다. 패착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피는 유지하되 질량이 줄어들었고, 전체적인 밀도는 낮아졌다. 변주의 시도 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작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간과하고 그 결과적인 형태만을 수용한 듯 보이는 결과물은 원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얕았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서사의 변주 역시 좋은 효과를 거둔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측면이 있다. 특히 서사적인 순열을 보다 손쉽게 매만지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궁극적으로 원작의 장점이 영화에서 희석된 이유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시나 다름없다. 인과를 감춤으로서 독자의 의문을 증폭시킨 원작의 서사는 단순히 구조적인 트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세계관의 너비에 서사적 질량을 늘려 나가며 극의 밀도를 채워나가는 작업과 같다. 서사의 변형은 그 구조의 자질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때때로 영화는 번뜩이는 긴장감이 담긴 시퀀스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전반적로 극의 흐름은 그 방향이 명확할 뿐, 강도의 편차가 크다. 동시에 어떤 전형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원작 캐릭터들과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평면적이다. 배우들은 분명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캐릭터로서 녹아들기 보단 배우가 지닌 스테레오 타입의 열연에 가깝다. 이는 배우들의 해석력 문제라기 보단 전체적인 디렉션의 방향성 문제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이끼>는 리메이크라는 성과 안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라 평할 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이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지운 뒤의 성과 안에서도 딱히 특별하다 말할 것이 없는 평이한 범작에 가깝다. 때때로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인 냉소가 느껴진다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특히 느닷없는 장광설로 변질된 결말부나 패착에 가까운 반전은 이 작품이 원작의 기질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변주라는 의미 안에서도 온전한 실패를 느끼게 만든다. 서스펜스가 증발해버린 듯한 <이끼>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유머가 발견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는 고의적인 의도라기 보단 우발적인 발생에 가깝다. 결국 이마저도 연출적 실패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나 다름없다. 마치 변주가 아닌 변질처럼 느껴질 정도로.
동명의 1983년작 하이틴 슬래셔 무비를 리메이크한 <여대생 기숙사>는 원작으로부터 틀거리를 빌려온 뒤 보다 현대적인 배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인물의 관계를 변주함으로써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확실히 새겨 넣는다. 남자들을 끌어들여 기숙사 안에서 파티를 즐기는 여대생들은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길 정도로 개방적인 일상을 즐긴다. 그 가운데서도 ‘세타 파이‘라 불리는 비밀클럽의 멤버로서 우정과 결속을 다짐하며 자신들만의 비밀스러운 회합을 거듭하는 6명의 여대생들은 어느 날, 짓궂은 장난을 계획하지만 그 사소한 장난은 그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비극적 기억을 남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곧 새로운 현실적 불안으로 떠오른다. 누군가 그들이 지난 파티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살인은 서스펜스를 낳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수법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하이틴 슬래셔 무비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장르라 할 수 있다. <여대생 기숙사>는 전형적인 하이틴 슬래셔 무비다. 끔찍한 기억을 공유한 여대생들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기억을 봉인하지만 종종 발견되는 기시감과 어떤 징후들을 통해 심리적 불안을 느낀다. 그런 와중에서도 끊임없이 강력한 페로몬을 발산하며 섹슈얼리티를 어필하는 영화는 긴장과 이완을 통해 기본적인 서스펜스의 자질을 구축해 나가면서도 그 수위를 조절해 나간다.
<여대생 기숙사>는 어떤 과감한 시도나 참신한 발상을 발견할 수 있는,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이틴 슬래셔 무비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대부분의 영화들이 앞서 이뤄낸 성과들을 고스란히 차용한 작품에 불과하다 말한다 해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대생 기숙사>는 적어도 최소한 장르가 지향하는 목적만큼은 달성했다고 해도 좋을 작품이다. 때때로 지나치게 수위 조절에 강박을 느끼고 있다는 인상은 들지만 지나친 노출을 삼가면서도 기습적으로 연출되는 살인신은 적절한 긴장의 몰입을 도모한다.
물론 <여대생 기숙사>는 결말에 다다라 다소 무색한 반전으로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서사적인 완결성 안에서 빈약한 약점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또한 노출과 살인의 연출에 있어서 보다 과감한 이미지나 분위기를 기대했을 ‘선수’들의 기대 심리를 충족시킬 만큼 장르적으로 독자적인 성과를 이룬 작품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여대생 기숙사>는 장르가 표방하는 기본적인 구색을 잘 끼워맞추고 연출의 적절한 합의점을 찾은 장르적 소모품이라고 인정해도 좋을 만한 수준을 유지하는 작품이다. 하나의 전형으로 기억될만한 성과적 모델은 아니라 해도 쓸모 있는 기성품 정도로서의 품질은 갖춘 하이틴 슬래셔 무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