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기봉 가라사데, 내 사전에 명장면 없는 영화란 없다. 국내에서 좀처럼 개봉하지 못한 두기봉의 작품을 세트로 완비한 이번 부산영화제는 어쩌면 국내에 유랑민처럼 대접받지 못하는 홍콩영화팬의 심금을 울리는 은총의 장이 될지도 모른다.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두기봉의 신작 <복수>는 두기봉의 필모그래피에서 첨탑을 차지하진 못해도 두기봉의 업데이트된 감각을 맛볼 수 있는 현재진행형 두기봉표 느와르일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참새>의 개봉을 기다리다 목이 빠진 당신이라면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복수>를 직관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이미 불타오르지 않을까.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오른 <복수>는 어쩌면 당신이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꼭 봐둬야 할 단 한편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TIP.나 두기봉 영화야. 기봉이 형 믿지?
<공기인형 Air Doll>
10/10 CGV 센텀시티 7관17:30 (GV)
10/13 CGV 센텀시티 3관12:30
10/15 씨너스 부산극장 1관19:30
아시아 영화의 창 | 2009 | 고레이다 히로카즈 | 배두나, 오다기리 죠, 아라타 | 116분 | 일본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인형으로 배두나가 낙점됐다. 낭만적인 인형의 꿈이냐고? 천만의 말씀, 그녀는 섹스돌(sex doll)이시로소이다. 담담하듯 안온한 풍경 속에서 시니컬한 정서를 자아내는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신작 <공기인형>은 인간이 된 인형의 관점을 관통하는 현대문명 속 인류에 대한 고찰이다. 버려진 아이들의 침묵을 담담히 그려내던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해 최근작인 동상이몽 속에 놓인 가족들의 시니컬한 속마음을 은밀하게 드러낸 최근작 <걸어도 걸어도>까지,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은밀한 냉소가 인형의 낯빛을 한 배두나의 눈길을 통해 조명될 것이다. 올해 봉준호의 <마더>와 함께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되기도 했던 <공기인형>은 토론토영화제 등에서 이미 호평을 인증 받은, 둘도 없는 기대작임에 틀림없다.
2009년을 뜨겁게 달군 박찬욱의 신작 <박쥐>의 10분 추가 영상이 포함된 확장판 버전을 굳이 부산에서 또 볼 필요가 있느냐고? 당신이 올해 <박쥐>에 낚였다며 육두문자를 살포한 1인이건, 스크린 앞에 무릎 꿇고 지저스 크라이스트를 외치던 1인이건, 발동하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극장을 찾았던 이라면 단 10분의 추가 분량만으로도 <박쥐>는 분명 유효한 떡밥이다. 또 한번 격음이 난무하는 화법을 동원해 영화를 패대기 치건 할렐루야를 외치며 두 손을 모으고 찬양 크리에 들어가던, 중요한 건 <박쥐> 확장판은 부산영화제에서만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부산영화제에서 업데이트된 박찬욱의 강화된 떡밥을 모른 체 하기에 당신의 호기심이 이미 동하고 있다면 백문이 불여일견. 일단 닥극사.
TIP. 10분 추가 영상만으로도 파격적인 떡밥. 일단 물어봐.
<브라이트 스타 Bright Star>
10/9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16:30
10/12 대영시네마 3관17:00
10/15 시너스 부산극장 1관16:30
월드시네마: 마스터즈 | 2009 | 제인 캠피온 | 에비 코니쉬, 벤 위쇼 | 119분 | 영국, 프랑스, 호주
올해 칸영화제에서 공개된 <브라이트 스타>는 <피아노>와 <여인의 초상>을 통해 20세기를 주름잡았던 여성주의 감독 제인 캠피온의 섬세한 감각이 되살아난 성공적인 귀환이란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19세기 초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존 키츠와 패니 브라운의 실화적 러브스토리를 영화화한 <브라이트 스타>는 두각을 나타내는 영국 배우 벤 위쇼와 신성으로 떠오르는 애비 코니쉬의 브리티쉬 앙상블에 초점을 맞춰도 좋을 영화다. 음울한 감수성을 문체로 승화시키던 영국 음유시인의 도전적인 러브스토리. 어쩌면 <브라이트 스타>는 유려한 문장과 단정한 음율이 격정적이고 예민한 감수성을 타고 끝내 낭만적 파고로 몰아칠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가 아닐까.
언제 몰려올지 모르는 북한군을 피해 피난민들은 철교 밑 터널로 몰려들었다. 깜깜한 어둠 너머로 하얀 안광이 빛나고, 터널을 채운 침묵 속에서 종종 아이들의 울음이 터져 나오면 엄마들은 그 입을 막곤 했다. 터널 밖으로 인기척이 밀려온다. 사람들의 심장이 뛴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터널 속을 빗발치는 총알들이 휘젓는다.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음소리가 들끓던 터널은 점차 식어가는 주검들의 체온으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적층되는 시간 속에 매몰되지 않도록 끝없이 환기시켜야 할 역사, <작은 연못>은 격동적인 한국 근대사 가운데 덧없이 회자되다 희미해진 ‘노근리 사건’에 대한 기록적 재현이다. 故박광정을 비롯해 수많은 배우들의 연대만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면 당신의 피는 붉은 색이리라.
<아이 엠 러브>는 중후하고 섬세한 이탈리아 밀라노 상류 재벌가문의 그리스 비극적 몰락을 그린다. 가문의 영광은 세대의 균열과 감정의 변절을 통해 서서히 기둥 뿌리가 흔들려 간다. 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치열하게 따라잡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파국의 형상을 우아하게 따라잡으며 역설적인 심상을 자극하는 <아이 엠 러브>에서 방점을 찍는 건 아무래도 틸다 스윈튼의 열연이다. 2002년도에 이미 <틸다 스윈튼: 러브 팩토리>라는 가족 다큐멘터리로 틸다 스윈튼과의 각별한 인연을 과시했던 루카 구아다니노는 결국 틸다 스윈튼의 열연을 바탕으로 인상적인 장편을 완성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를 수상한 작품이자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틸다 스윈튼을 올해 부산에서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놓치지 말 것.
TIP.이탈리아 명문가가 죄다 마피아일 것이란 편견은 버려.
<피시 탱크 Fish Tank>
10/9 대영시네마 2관14:00
10/11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14:00
10/15 대영시네마 1관16:30
월드 시네마 | 2009 | 안드레아 아놀드 | 마이클 패스빈더, 해리 트레더웨이, 키어스틴 워레잉 | 124분 | 영국
2006년 칸영화제에서 자신의 첫 번째 장편 <레드 로드>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던 영국의 여성 감독 안드레아 아놀드는 올해도 자신의 두 번째 장편 <피시 탱크>로 <박쥐>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공동수상하며 명성을 이어나갔다. 두 편의 장편 연출작으로 두 번의 칸영화제 트로피를 쓸어담은 안드레아 아놀드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뛰어넘다 못해 박차버린 셈이다. <피시 탱크>는 전작 <레드 로드>와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도시적 생존본능에 짓눌린 인간적 체온을 구원하기 위한 진심을 담고 있다. 감정적 격발을 유도하는 문제적 결말을 향해 서서히 달궈져 나가는 서사는 결국 객석에 앉은 당신의 체온마저 끌어올릴 정도로 뜨거운 것이리라.
히치콕이란 이름은 한 감독을 지칭하는 절대명사의 영역을 넘어선 장르를 설명하는 절대명사다. 히치콕이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서스펜스를 지배하는 스타일이며, 규칙이고, 철학으로 군림한다. 히치콕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그의 양식을 자신의 창작에 투영하며 오마주의 제의를 치른다. Hitchcockian의 순례를 떠난다.
서스펜스의 거장, 스릴러의 아버지, 거대한 수사로 치장한 히치콕은 동세대와 후대의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남겼다. 그 영향력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항상 1순위로 언급되는 브라이언 드 팔마는 <드레스드 투 킬>을 통해 히치콕의 양자가 됐다. 너무나도 유명한 <싸이코>의 욕실 살해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드레스드 투 킬>의 관능적인 도입부 샤워신은 드 팔마가 히치콕에게 얼마나 매료됐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드 팔마는 스스로의 입으로 ‘히치콕의 영향력’을 공언함으로써 그 명예를 공고히 다지고자 했다. 그 후로도 드 팔마는 <필사의 추적>의 우스꽝스러운 샤워신으로 <싸이코>의 샤워신을 다시 한번 재해석한 뒤, <이창>과 <현기증>을 아우르는 <침실의 표적>을 통해 히치콕의 영향력을 온전히 전시해낸다. 하지만 이런 드 팔마의 경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두고두고 드 팔마의 발목을 잡는다. 히치콕에게 오마주를 바친 드 팔마의 명예는 오늘날에 이르러 드 팔마를 히치콕의 모방자라고 낙인 찍게 만들었다. 사실 드 팔마의 관심은 히치콕에만 집중된 건 아니었다. 드 팔마는 히치콕과 동시대의 거장이었던 하워드 혹스의 <스카페이스>를 리메이크했고, 몽타주 기법의 교과서적 장면이라고 일컫는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시퀀스를 <언터쳐블>에서 고스란히 재현하며 에이젠슈타인을 오마주한다. 하지만 일찍이 <그리팅>과 <시스터즈>를 통해 히치콕의 ‘관음증’과 ‘현기증’을 흠모했던 드 팔마는 히치콕의 후광을 통해 영예를 얻었으나 히치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방범으로 전락했고, 드 팔마 스스로도 히치콕과의 비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근작인 <블랙 달리아>는 현재 드 팔마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가까운 히치콕 ‘강박관념’에 빠지고 말았다고 느끼게 만들 정도다. 드 팔마의 불행은 그가 ‘히치콕을 너무 많이 안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히치콕의 영화는 거듭 감상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더 배울 만한 게 있다.”이는 마틴 스콜세즈가 영국의 영화지 <사운드 앤 사이트>에 기고한 히치콕에 대한 헌정사다. 드 팔마와 동시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기도 하는 마틴 스콜세즈는 보다 영리한 방식으로 히치콕을 흠모했다. 드 팔마가 히치콕의 명장면을 재해석하며 모방의 오명을 썼던 것과 달리 마틴 스콜세즈는 히치콕을 참고하는 방식으로서 그의 장기를 자신의 영화에 녹여냈다. <택시 드라이버>의 오프닝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하는 트래비스의 눈동자 클로즈업은 <현기증>의 그것에 가깝다. 히치콕의 <오인>을 연상시키는 카메라 기교와 히치콕의 시점이 적극 반영된 듯한 뉴욕 시내의 주관적 묘사로 가득한 <택시 드라이버>의 긴장감은 히치콕을 참고한 영화광 마틴 스콜세즈의 전리품에 가깝다. 히치콕의 작품에서 음악을 전담했던 버나드 허만을 삼고초려한 끝에 그에게 <택시 드라이버>의 음악을 맡긴 것도 우연이 아니다. 버나드 허만의 유작이 된 <택시 드라이버>는 <싸이코>의 그것만큼이나 감정적 파고를 일으키는 음악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스콜세즈는 히치콕의 인상적인 오프닝 타이틀 디자이너로 유명했던 솔 바스를 자신의 파트너로 삼기도 했다. ‘솔 바스의 타이틀이 스크린에 나타날 때, 진정한 영화의 시작이 이뤄진다’고 말하기도 했던 스콜세즈는 <좋은 친구들>부터 <카지노>까지 솔 바스가 디자인한 오프닝 타이틀을 사용한다. <카지노>는 결국 솔 바스의 유작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두 사람이 스콜세즈의 영화를 통해 유작을 남긴 셈이다. 드 팔마가 히치콕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달리 스콜세즈는 히치콕과 함께 수많은 감독들의 영향력을 들먹이는 영화광의 면모를 과시하며 자신의 세계관을 위한 참고사항으로서 히치콕을 나열하는데 성공했다. 심지어 스콜세즈는 자신이 감독을 맡은 스페인의 샴페인 광고에서 ‘히치콕이 남기고 간 3페이지짜리 미완성 트리트먼트가 있었다’는 거짓말로 무성 테크니컬러 단편을 만들기까지 했다.
앞선 두 감독과 다른 의미에서 거장이 된 스티븐 스필버그 역시 히치콕의 양자다. 스코티의 고소공포증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줌렌즈와 트래킹 샷을 결합해 활용한 <현기증>의 '줌 인 트랙(Zoom in & track out)'기법은 <죠스>에서 해변가의 상어를 처음 목격하는 브로디 서장의 시선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또한 <죠스>는 <새>의 해양버전이라는 평을 얻기도 했는데 무방비 상태로 수면에서 유영하는 인물에게 접근하는 백상어의 모습은 사람 주변으로 한 마리씩 모여드는 새들의 집결만큼이나 긴장감을 조성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을 맡았던 J.D 카루소의 연출작 <디스터비아>와 <이글 아이>는 노골적인 히치콕의 차용에 가깝다. 히치콕의 <이창>과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각각 차용했지만 두 작품은 히치콕의 작품과 전혀 다른 판본이다. 히치콕의 두 작품이 마치 잘 볶은 원두커피처럼 중후한 향을 낸다면 J.D 카루소의 그것들은 커피우유처럼 가공된 오락영화의 단맛을 뽐내는 것에 불과하다. 한편 스필버그는 <디스터비아>가 <이창>을 도용했다는 혐의로 <이창>의 판권소유자로부터 피소 당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 히치콕이 살아생전에 스필버그를 ‘물고기를 만든 소년’이라 비하하며 만남을 간청하는 스필버그의 부탁을 거절했던 일화만큼이나 굴욕적인 사건이다.
히치콕은 나이와 국경, 분야를 초월하며 매혹을 선사했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증폭시키는 이야기적 방식인 맥거핀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데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는 이를 온전히 반영하는 작품이다. 또한 브라이언 싱어의 근작인 <작전명 발키리>에서 슈타펜버그 대령이 히틀러를 테러하기 위해 폭탄을 숨기는 장면은 프랑수아 트뤼포와 히치콕의 유명한 대담 가운데 등장했던 맥거핀 이론의 사례와 명확히 닮았다. 한편 히치콕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진 스티븐 킹은 조지. A 로메로의 <나이트라이더스>에 ‘대형 샌드위치를 먹는 남자’로 카메오 출연하며 히치콕의 카메오에 오마주를 바치기도 했다. 한국의 봉준호 역시 히치콕과 비견되는 젊은 감독군에 속한다. 최근 칸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에 출품됐던 <마더>는 현지에서 공개된 뒤 히치콕의 <현기증>과 비교되며 호평을 얻었다. 오명을 쓴 남자, 관음증, 미묘하게 엇물려 돌아가는 내러티브, 그리고 결과적으로 맥거핀을 이루는 스토리텔링. 히치콕의 미스터리한 이야기 흐름과 서스펜스적인 연출이 깊게 관여한 듯한 <마더>는 히치콕의 영향력이 희미하듯 깊게 배어든 작품인 셈이다. 사실 봉준호가 맥거핀을 선호하는 스토리텔러란 점에서도 봉준호에게 히치콕의 영향력을 읽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 알려진 것처럼 봉준호에게 <새> 리메이크 제안을 던졌다는 미국 에이전시의 안목은 괜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히치콕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를 바친 건 구스 반 산트다. 히치콕의 <싸이코>를 숏 바이 숏으로 완성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리메이크라기 보단 일종의 필사본이나 다름없다. 문체가 다를 뿐 동어반복의 문장에 가까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의 원본과 완벽한 대조군을 이루는 필사본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엔딩까지 최대한 원작에 밀착한 방식으로 완성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온전히 평단과 관객에게 조롱 당했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는 용감했다. ‘히치콕의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봉준호의 생각을 구스 반 산트는 자기 희생적인 방식으로 증명했다. 마이클 베이가 제작한 졸작 <힛쳐>따위가 <새>가 방영되는 TV를 스크린에 노출시키며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를 들먹이는 것과 비교하자면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는 실로 정직하고 비범한 오마주다. 구스 반 산트야말로 뼈 속까지 진정한 Hitchcockian인 것이다.
제62회 칸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현지시간으로 24일 오후 7시 경, 칸 뤼미에르대극장에서 열린 폐막식 및 시상식을 끝으로 12일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그리고 최고영예인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으로 <화이트 리본>의 미카엘 하네케가 호명됐다.
쿠엔틴 타란티노, 제인 캠피온, 페드로 알모도바르, 켄 로치, 이안, 라스 폰 트리에, 두기봉등, 거장들의 신작이 대거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별들의 잔치라 불렸던 이번 칸영화제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경악의 연속이었다. <박쥐>를 시작으로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리스트>를 비롯해 잔혹하고 폭력의 수위가 높은 작품들이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기대를 모았던 몇몇 작품들은 평이한 반응을 얻으며 실망감을 더했다. 그런 가운데 제인 캠피온의 <브라이트 스타>와 미카엘 하네케의 <화이트 리본>, 쟈크 오디아르의 <예언자>가 좋은 평을 얻으며 조심스럽게 황금종려상 수상 가능성을 예상케 했다.
결국 지난 2001년 <피아니스트>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2005년엔 <히든>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던 미카엘 하네케의 <화이트 리본>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에 앞서 쟈크 오디아르의 <예언자>가 심사위원대상에 호명됐다. 지난 해 로랑 캉테의 <더 클래스>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황금종려상 트로피가 프랑스 영화에게 돌아갈 기회가 무산되는 순간이었다. 그에 앞서 역시나 혹평의 중심에서 논란을 면치 못했던 브릴란테 멘도자의 <키나타이>가 감독상을 거머쥐며 야유까지 얻었고, 역시나 범작이라는 평이 우세했던 로우 예의 <스프링 피버>도 각본상을 수상하며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한편, 지난 2004년 <올드보이>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박쥐>의 박찬욱 감독은 <피쉬 탱크>의 안드레아 아놀드와 함께 심사위원상을 공동수상했다. 이로서 박찬욱 감독은 유일하게 칸영화제 트로피를 2개 이상 소유한 한국영화인이 됐다. 기대를 모으던 송강호의 남우주연상은 <인글로리어스 바스타즈>의 크리스토프 왈츠에게 돌아갔다. 브래드 피트보다도 눈에 띄는 연기를 펼쳤다는 중평이 많았다. 또한 칸영화제 최고의 문제작이라 꼽히던 <안티크리스트>에서 자학적인 연기를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샬롯 갱스부르는 여우주연상으로 이에 보답 받았다. 한편 <무성한 잡초 Wild Grasses>를 발표하며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던 누벨바그의 거장 알랭 레네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비경쟁부문인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됐던 봉준호의 <마더>는 현지에서 고른 호평을 얻었지만 지난 23일 칸 드뷔시 극장에서 열린 시상식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학생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씨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출품된 조성희 감독의 중편 <남매의 집>은 씨네파운데이션 3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62회 칸 영화제 수상작
황금종려상(Palme d'Or): <화이트 리본 The White Ribbon> 미카엘 하네케 심사위원대상(Grand Prix): <예언자 A Prophet> 쟈크 오디아르 심사위원상(Jury Prize): <박쥐 Thirst> 박찬욱, <피쉬 탱크 Fish Tank> 안드레아 아놀드 (공동수상) 감독상(Award for Best Director): <키나타이 Kinatay> 브릴란테 멘도자 각본상(Award for Best Screenplay): <스프링 피버 Spring Fever> 로우 예 남우주연상(Award for Best Actor): <인글로리어스 바스타즈 Inglorious Basterds> 크리스토프 왈츠 여우주연상(Award for Best Actress): <안티크리스트 Antichrist> 샬롯 갱스부르 평생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 for his work and his exceptional contribution to the history of cinema):알랭 레네
풀 내음이 날 것처럼 푸른 잔디밭으로 꾸며진 무대 위엔 의자에 앉은 한 여자가 있다. 이윽고 뒤편에서 꽃을 든 한 남자가 등장한다. 여자는 돌아보고 남자는 다가선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된다. 하지만 대화가 아니다. 여자와 남자는 각각 언어를 내뱉지만 실상 그 언어는 대화로 엉키지 못하고 비켜 나가 증발해버린다. 아내와 남편임이 분명한 남녀는 서로를 향하되 마주하지 못한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지만 남자는 여자를 응시하지 못한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고 여자는 남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소리치지만 남자는 빈자리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답한다.
남자의 언어는 독백이다. 여자의 언어는 결국 전해지지 못하는 독백이 된다. 두 독백은 대화처럼 리듬을 타고 서로의 언어에 호환되지만 결국 이는 무대에서 소통되지 못하고 객석으로 흘러 들어간다. 두 사람은 만날 수 없는, 혹은 마주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민들레 바람되어>는 순정적인 남자의 신파다. 본질적으로 눈물을 발생시키기 좋은 자질로 이뤄진 멜로다. 하지만 단순히 최루성 신파로서 기능하는 작품은 아니다. 주인공인 두 부부 외에도 한쌍의 노부부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민들레 바람되어>에서 신파의 무게를 경감시키는 위트적 장치로서 기능한다.
궁극적으로 <민들레 바람되어>는 신파다. 웃음보다 중요한 건 눈물이다. 다만 그것이 평이한 형태의 신파와 거리를 둔 도발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극 초반 기능적인 트릭을 통해 이야기의 형태를 각인시킴으로써 관객은 그 형태 자체가 이루는 정서가 온전히 흘러갈 것임을 예감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로맨스의 형태는 그리 순탄하게 순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 순정의 너머에 감춰진 진실이 한차례 스토리를 흔들고 지나갈 때 관객이 이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실상 <민들레 바람되어>의 바탕이 된 희곡의 스토리가 완벽하게 구성된 작품이라 판단하긴 어렵다. 종종 대화를 위장한 독백은 일관적인 형태로 이어지지 않으며 절정에 다다르는 내러티브 역시 자연스러운 단계의 전철을 밟기 보단 급작스럽게 삽입되는 인상을 부여한다.
하지만 앵콜작이기도 한 이번 <민들레 바람되어>는 배우들의 열연이 볼만한 연극이다. 남편 안중기 역에 조재현, 안내상, 정웅인이라는 트리플 캐스팅을 채비한 이번 앵콜은 어느 누구라도 궁금할 만큼 배우들의 연기 자체만으로 만족할만한 가능성이 큰 공연이다. 일단 공연을 통해 확인했지만 조재현은 명성에 걸맞게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시종일관 여유롭게 무대를 오르내리며 나이 먹어가는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특히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디테일하게 묘사하기도 함으로써 현실적인 느낌을 더한다. 안내상과 정웅인의 연기도 궁금하지만 조재현은 꽤 성실한 연기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노부부를 연기하는 황영희와 김상규의 연기 또한 감칠 맛 난다는 표현에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이승민과 함께 더블 캐스팅 된 이지하는 적절히 제 역할을 잘 꾸려나가는 인상이다.
<연극열전2>의 마지막 라인업이기도 한 이 작품은 기획자이기도 한 조재현의 공연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공연을 통해 확인한 조재현의 연기는 <연극열전2>라는 기획에 유종의 미를 거둘만한 마침표로서 부족함이 없다. 창작극이 아닌 기존의 인기 작품의 되새김질이란 점에서 비판도 많이 얻었지만 <연극열전2>는 분명 젊은 관객에게 연극의 묘미를 어느 정도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실효를 거둔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저변의 확대만이 아닌 발전을 위한 고민이 동반돼야 한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 염두에 둘 방향성이 절실하다. <민들레 바람되어> 앵콜 공연장의 객석마저 가득 메운 관객들을 과연 어디로 이끌 것인가는 결국 이 공연 이후의 고민에 달린 셈이다.
<빨래>는 평범하듯 비범한 뮤지컬이다.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유머와 경쾌한 넘버가 인상적인 뮤지컬이지만 궁극적으론 가난한 사랑노래라 마음 한 부분이 애잔해진다. 사회의 밑바닥을 이루는 빈민층들은 저마다의 꿈을 접고 접어 달동네 한 켠 작은 방에서 또아리를 틀 듯 비좁게 살아간다. <빨래>는 그들의 삶을 단순하듯 진솔하게 묘사하며 유쾌하듯 구슬픈 멜로디로 노래한다.
청운의 꿈을 품고 강릉에서 상경했던 나영과 돈을 벌기 위해 몽골에서 입국해 불법체류 중인 솔롱고는 서울 생활 5년 차 만에 기어들어간 달동네 옥상에서 빨래를 널다 마주친다. 강릉에서 올라온 나영에게도, 몽골에서 들어온 솔롱고에게도, 서울은 그저 이방인의 땅처럼 무심하고 차가울 뿐이다. <빨래>는 그들이 만나 사랑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로맨틱한 뮤지컬이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한 낭만에 기대어 설명하지 않으며 그 결심을 단순히 젊은 날의 치기처럼 가볍게 묘사하지 않는다. <빨래>는 대사를 통해 곧잘 ‘힘내라’는 격려를 던지곤 하는데 이로부터 이 뮤지컬의 힘이 전해지는 느낌이다. 지극히 상투적인 인사처럼 느껴질 만한 이 세 음절의 언어는 가난과 불행 속에서도 꿋꿋이 삶을 지탱하는 이들간의 격려로서 당위를 얻고, 결국 객석의 관객에게마저도 힘을 보탠다.
두 주인공인 나영과 솔롱고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욕쟁이 주인할매. 이 뮤지컬에서 웃음과 눈물이라는 감정적인 너비를 보장하는 캐릭터이자 결정적인 추임새로서 박혀있는 그녀는 두 주인공보다도 <빨래>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헌도를 책임지는 인물이다. 특히 <빨래>는 주인공보다도 조연들의 연기가 더욱 두드러지는 뮤지컬이기도 한데 욕쟁이 주인할매를 연기하는 이정은과 함께 구씨를 비롯해 남자 조연 캐릭터 대부분을 소화하는 정문성, 이영기 두 배우의 연기 또한 꽤나 반갑고 정겹다. 특히 이 세 배우는 대학로 원더스페이스에서 공연하던 원년 멤버로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다는 점을 눈 여겨 볼만하다.
원년 라인업 당시에도 나영 역을 맡았던 주연 여배우의 성량이 약간 부족했던 점이 아쉬웠던 것처럼 새로운 캐스팅에서도 마찬가지의 결핍을 느끼게 된다. 기본적인 음색은 곱지만 고음 처리가 종종 불안하다. 무엇보다 이번 라인업의 변화는 임창정이라는 스타급 배우와 홍광호라는 뮤지컬 스타의 가세인데 전자의 공연을 봤으므로 후자 쪽의 평은 어렵겠다. 다만 가수 출신이며 연기자인 임창정은 나름 나쁘지 않다. 특히 도올을 패러디한 서점 싸인 씬의 재치와 팬서비스 차원의 실제 관객동원 싸인은 아이디어가 괜찮다. 스타 마케팅을 잘 활용한 결과물이다. 다만 배우의 연기와 무관하게 이처럼 군무적인 형태의 연출이 행해질 때 시선이 어느 개인에게 집중된다는 건 심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아닐까. 대부분이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무대 배우 가운데 독보적인 네임밸류를 지닌 배우가 존재한다는 건 묘하게 전체적인 호흡을 망각하게 만드는 자질이 된다. 좋은 작품의 이름값을 더욱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스타의 기용은 효과적이나 관객의 시야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은 한편으로 고민할만한 거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빨래>는 원더스페이스 공연 당시 좁은 무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세트가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좀 더 무대가 넓어져 그런 묘미를 관찰할만한 구석이 경감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기능성을 계승하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노래가 꽤나 괜찮다. 뮤지컬이 귀에 감기는 넘버를 만든다는 건 분명 성공적인 일이며 <빨래>는 그 방면에서 괜찮은 성과를 거둔다.
<빨래>는 분명 좋은 뮤지컬이다. 적절한 너비와 깊이를 갖추고 있다. 엄청난 미사여구를 동원할만한 업적의 반열까진 아니라도 대중적 공감대를 아우르는 주제의식과 소재를 착취하지 않고 진심이 담긴 배려가 인상적인, 누군가에게 권할 만큼 좋은 작품으로 손색없다. 기능적으로 탁월하며 정서적으로 원숙하다. 단지 구색을 맞춘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 갈구하는 이들의 꿈이 강렬하게 와 닿는다. 이 가난한 사랑노래를 응원하고 싶은 건 그 때문이다. 그 사랑엔 낙관보다도 비관이 어울리지만 응원하고 싶은 진심을 부른다. 돈으로 사랑을 사고, 재물이 행복을 대변하는, 낭만이 사라진 시대에서 낭만을 꿈꾸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한다. 이 막막한 도시에서 살붙이고 살 수 있는 사람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된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 모두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힘내자. 근심 걱정일랑 매일같이 빨고 새롭게 살아가자. 자기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자. 사람답게 사랑하자.
좋은 사진엔 스토리텔링이 담겨있다. 시퀀스를, 씬을, 내러티브를, 스토리텔링을 예상하게 만드는 훌륭한 프레임이 된다. 그리고 사진을 찍다 보면 언젠가 알게 된다. 인물 사진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인물 사진이 어렵다는 건 인물과의 소통이 필요한 까닭이다. 어떤 풍경을 배려하는 완벽한 구도를 찾는다는 것과 조금 다른 차원의 재능이나 경험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색다른 프레임을 연출하거나 뷰파인더 너머의 공간을 발견하는 것과 다른 차원의 자질이 필요하다.
좋은 인물 사진은 아름다운 표정, 멋진 제스처를 연출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이상을 전달한다. 마치 베어진 기둥 단면 나이테처럼 인물의 인생을 대변할만한 어떤 단면 그 자체가 된다. 모든 인물에겐 저마다의 드라마가 있다. 훌륭한 사진가는 그 인물의 드라마를 결정적 순간에 담아 영원히 보존한다. 유섭 카쉬(Yousuf Karsh)는 아마도 그런 사진가 중 한 사람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일 것이다. 그가 찍은 수많은 명사들의 사진엔 저마다의 드라마가 담겨있다. 벽에 걸린 얼굴들을 따라 걷다 보면 잔잔한 우아함에서 거친 격정을 아우르는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삶을 넘나드는 느낌을 얻는다.
유섭 카쉬의 자화상 포트레이트
이번 전시회는 보스톤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유섭 카쉬의 빈티지 프린트(vintage print) 중 65점을 직접 공수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여기서 빈티지 프린트란 작가가 직접 인화한 오리지널 프린트를 의미하며 사진엔 작가의 자필 사인이 있다. 사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필름을 통해 많은 복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희소성의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필름이란 것도 결국 인화가 반복되면 그만큼 수명이 단축된다는 점에서 보존적 속성의 한계에 갇힌 물질이라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요즘은 은염사진 보다도 디지털로 출력되는 사진들이 대세를 이루기 때문에 빈티지 프린트의 희소가치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진이든 그림이든 오리지널은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이번 전시회의 가치도 이런 점에서 분명 뜻 깊은 의미를 지닌다.
윈스턴 처칠, 오드리 햅번, 알버트 아인슈타인, 피델 카스트로, 파블로 피카소, 슈바이쳐, 테레사 수녀,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세계 각지의 유명 인사들을 필름에 담아낸 유섭 카쉬는 마치 그와 공존했던 20세기 명사들의 일생을 단 한 장의 이미지로 대변하기 위해 살아온 것마냥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유명 인사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이벤트가 된다. 하지만 단지 그 얼굴을 구경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된다. 카쉬의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건 누군가의 인생에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될만하다. 그의 사진이 인물의 인생 전체를 대변할 순 없는 건 사실이다. 그건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인물의 인생을 짐작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업적이다. 적어도 카쉬의 사진은 그 이상에 도달한다.
이번 전시회가 재미있는 건 사진뿐만 아니라 사진에 얽힌 일화를 담은 텍스트가 함께 전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공휴일엔 쉽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 넉넉한 여유를 지니고 전시장에 들어선 이라면 엄청난 만족을 느낄 거다. 단지 햅번이나 처칠 사진 하나 구경하러 왔다면, 그리고 정확히 그런 식의 구경만 띄엄띄엄 즐기다 전시회장을 떠나버렸다면 헛것을 본 셈이다. 만약 작품을 들여다본 후, 그 텍스트마저 하나씩 곱씹을 수 있었다면 이 전시회를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카쉬의 사진이 대단한 건 그가 단순히 대단한 인물들을 찍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그 대단한 인물들에 걸맞은 사진을 찍기 위해 얼만큼 고심하고, 얼만큼 인물에 접근했으며 얼마나 대담하거나 섬세했는가를 눈 여겨 봐야 한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인물의 심연을 이미지에 노출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대화를 시도했으며 궁극적으로 상대와의 심리적 장벽을 넘어서기 위해 스스로를 얼마나 열고자 했는지를 볼 수 있다면 많은 감동을 느낄 것이다.
물고 있는 시가를 강제로 뺏어서 찍었다는 윈스턴 처칠의 으르렁거리는 표정과 흔들림 없이 우아하게 머무는 오드리 햅번, 총명하면서도 깊고 순수한 아인슈타인의 눈동자, 하이라이트와 암부가 선명하게 교차하는 파블로 피카소의 풍경 등, 어느 작품 하나도 쉽게 건너뛸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사진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깊게 각인된 건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사진. 스페인 출신의 첼리스트 음악가인 그는 바흐의 ‘첼로 무반주 연주곡’을 발굴하고 끝내 하나의 완벽한 형태로 완성한 거장이다. 카쉬는 어느 여타의 인물들과 달리 첼로를 연주하는 그의 뒷모습을 필름에 담아냈는데 엄숙한 풍경 속에서 우아한 선율이 흐르듯 신비로운 한 컷이라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사진엔 기묘한 페이소스가 넘실거리는데 스페인 내전 이후, 프랑코의 독재정권으로부터 미국으로 망명해 살았던 파블로 카잘스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파블로 카잘스
윈스턴 처칠
알버트 아인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마더 테레사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헬렌 켈러와 폴리 톰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그레이 아울
시베리우스
소피아 로렌
제시 노먼
이번 전시회는 당초 8일로 끝날 예정이었으나 15일부터 앙코르 전시가 재차 열린다 하니 기회를 놓친 이들에겐 반가운 소식이 될 것 같다. 클림트전처럼 네임밸류에 비해 수준은 형편없는 전시회가 있는 반면, 이처럼 명성만큼이나 내용도 흡족한 전시회도 있다. 가격도 클림트전의 절반가인 8천원 수준이다. 이 정도 가격에 이런 전시를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 대단한 혜택이다. 누구나 DSLR을 액세서리처럼 지니고 다니며 셔터를 낭비하듯 눌러대는 세상 속에서 카쉬의 한 컷들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의 깊이를 선사한다. 인물에 대한 깊은 배려와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그가 선택한 찰나에 담긴 인물들은 이로서 영원을 산다. 단지 얼굴이 아닌 인생을 기록한다. 당신에게 이 전시회를 권하는 건 그 때문이다. 당신은 한 장의 사진이 아니라 인물 자체를 만나게 될 것이다. 카쉬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지난 4일 오전 11시 30분, 강남구 신사동의 에브리싱 노래연습장에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주재로 ‘음악산업 진흥중기 계획발표’가 개최됐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공간이라고 했다. 대중음악산업에 관련된 다양한 인사들과 취재진을 수용하기에 장소는 비좁아 보였다. 이 자리에서 유인촌 장관은 “미국 빌보드차트와 견줄 만한 한국 대중음악(K-POP) 차트와 미국 그래미상 같은 대중음악 시상식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공신력 있는 음악산업 기본통계를 마련해 이를 바탕으로 보다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시스템이 구축된 대중음악시상식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국내음악산업의 권위를 높이고 한류를 재점화하겠다고 천명했다.
비주류 음악산업 지원정책안 발표가 뒤따랐다. 우수신인을 발굴해 각종 방송과 음악 페스티벌에 연계시키고 후원하겠다는 내역이다. 상암동 콘텐츠홀을 리모델링해서 대중음악전문공연장을 구축하겠다는 계획도 공개됐다. 현재 리모델링이 진행되고 있는 올림픽홀은 차후 대형공연장으로서, 상암동 콘텐츠홀은 인디나 신인 뮤지션을 위한 공간으로 전용화시키겠다는 구상이다. “향후 5년간 국고 1275억을 투입해서 지난 해 8440억 원이었던 국내 음악시장을 1조 7천억 단위 규모로 성장시켜 세계 10권 음악시장으로 도약시킬 것”유인촌 장관은 당당한 포부를 밝혔다.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 한국언론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후보와 개요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음악평론가와 전문기자, 교수 등 52명의 선정위원단의 심사로 선정된 수상후보작들이 공개됐다. 올해로 6회를 맞이하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은 26일 저녁 7시 건대 새천년홀 대공연장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이지선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장이 문광부 담당자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건 지난 18일이었다. 지원금이 축소되거나 지원 자체가 철회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19일, 문광부 담당자는 지원금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시상식 예정일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소신주의
한국대중음악상은 문화연대와 문화일보의 공동주관으로 시작됐다. 당시 선정위원 중 한 명이었던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가 문화일보 사업부를 설득해 광고수익을 지원하는 형태로 한국대중음악상의 재정을 마련했다. 하지만 대안적인 시상식을 모토로 둔 대중음악시상식이 언론사의 산하에서 행사를 거듭한다는 것에 대한 내부적 이견이 발생했다. 대안적 취지가 중요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독립된 단체를 설립해 행사를 진행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상업성과 타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재정확보를 충당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장 좋은 방식은 정부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통로가 없었다. 문화예술위원의 문예진흥기금이나 서울문화재단의 시민활동공모사업은 시민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정책이다. 기획단체인 한국대중음악상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상시적이지 않은 시상식은 지원요건이 없다. 하지만 2회까지의 경력을 담보로 선정위원장을 비롯한 선정위원 몇 명이 문화산업부 국장을 찾아가 설득했다. 결국 3회부터 5회까지 3년에 걸쳐 문광부의 지원이 이뤄졌다. “교부신청서는 사전에 어느 정도 지원에 대한 약속이 이뤄지지 않고선 제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임의적인 요청이 아니라 사전 신청에 대한 합의에서 비롯된 행정상의 절차다. 3년 동안 그 과정을 거쳐 지원을 받았고 올해 역시 작년 12월부터 지속적으로 지원 규모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이지선 사무국장의 말이다.
문광부 담당자는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에 지원불가에 대한 이유로 핵심 사업 추진에 따른 예산 부족 때문이라 설명했다. 이 사안이 언론에 전해지자 기자들의 문의와 국회의원 질의가 문광부에 이어졌다.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 쪽에서 지원금 교부 신청이 늦었고 그에 따른 행정절차가 늦어져서 지원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문광부의 입장이 보도를 통해 전달됐다. “우리도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됐다. 하지만 교부 절차는 예년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올해는 예년보다 빠른 편이었다.”당초 사무국은 예년처럼 3천 만원 지원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1월 중, 잘하면 5천 만원까지 지원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문광부 담당자의 귀띔을 듣고 1월 말, 5천 만원으로 금액을 맞춰서 지원금 교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다가 다시 5천 만원까진 어렵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2주가 지난 2월 10일경에 3천 만원으로 금액을 낮춰서 재교부 신청을 했다. 하지만 19일까지 통장은 채워지지 않았다. 이지선 사무국장은 말한다. “나라 예산이 어떻게 기획되고 운영되는지 일일이 알진 못해도 작년 말부터 어느 정도 예산편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지난 3년간 지속됐던 지원이 이렇게 단 시일 만에 끝날 수 있나.”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말한다. “정책 방향을 떠나서 인간적인 기본 예의에 대한 문제 아닌가. 3년 전부터 지원이 이뤄진 만큼 우리 측도 그 예상에 맞춰 관례대로 준비해온 부분이 있고, 실무진 차원에서도 어떤 문제가 없을 거란 판단이 있었기에 느닷없는 통보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지 않겠나.”올해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은 문광부 지원금 3천 만원과 네이버의 후원금 2천 만원을 더한 5천 만원 가량의 시상식 비용을 예상했다. 그에 따라 시상식 행사로 예정된 건대 새천년홀 대공연장 대관 선금을 지불했고, 예산에 맞춰 트로피 재질을 결정해 제작이 이뤄졌으며 기념음반제작도 이미 마친 상태다. 이미 2천 만원 가량의 비용이 지출된 상태에서 문광부 지원금이 사라진 셈이다. 네이버의 지원은 후원 형태로 이뤄진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규모와 격식이 있는 시상식이 전개될 때’라는 전제가 붙는다. 음악전문방송사인 ‘엠넷(M.NET)’의 녹화중계도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건대 대공연장 대관이 물 건너간만큼 방송 여부도 불투명해졌다. 선금은 지불했지만 문광부 지원 철회로 잔여금의 지불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대관은 커녕 선금조차 눈먼 돈이 됐다. 네이버 후원금도 반토막이 났다. 없는 살림이 더욱 팍팍해졌다.
문광부의 최성훈 전략컨텐츠산업과 주무관은 이같이 말한다. “예산 수립 과정에서 3천 만원 정도의 단위까지 세세한 예산의 집행이 결정되는 건 아니다. 분야별로 덩어리 단위로 결정돼서 수립된 뒤 부서로 넘어오면 부서별로 집행 금액이 산정되기도 한다. 3천 만원 정도 단위는 과장 선에서 임의적으로 결제를 결정하는 수준이다. 한 마디로 매년마다 집행에 대한 여부가 결정되는 거지, 이미 예정된 바라는 건 없다. 한국대중음악상 역시 지원 결정 후 철회된 게 아니라 검토 중 최종적으로 불가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뿐이다.”한국대중음악상 지원금액에 대한 결정은 문광부 전략컨텐츠산업과의 자율반사적인 정책이란 셈이다. 대뇌의 지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 하지만 대뇌의 변화는 신경계 전체에 영향을 준다. 한국대중음악상 지원이 약속된 건 이전 참여정부 정권이었다. 5회 시상식이 열렸던 작년 2월 역시 참여정부의 마지막 임기였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정책의 변화가 있다는 의미다. 자율신경계에도 이상조짐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년과 같이 조건반사처럼 대응했던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은 뒤통수를 맞았다. 특별한 이상징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공교롭게도 유인촌 장관의 ‘한국의 그래미’발언 역시 한국대중음악상 기자회견이 있던 4일에 이뤄졌다.
문광부는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골든디스크 시상식도 지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골든디스크와 한국대중음악상은 체급이 다른 행사다. “골든디스크는 일간 스포츠를 비롯해 기업들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다. 대중음악시상식은 민간단체가 주도하는 시상식이다. 법인도 아닌 단체다. 두 시상식의 지원 철회가 형평성 있는 정책으로 내세워진다는 건 재벌과 서민에 대한 복지 철회를 동등하게 여기는 것과 다를 게 뭔가.”대중음악평론가이자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인 김작가의 말이다. 골든디스크 공식 홈페이지만 봐도 한국대중음악상과 차이가 확연하다. 스폰서 목록만 봐도 확실하다. 노는 물이 다르다. 두 시상식은 엄연히 목표가 다르다. “한국대중음악상은 기존 방송 매체의 대안적 성격을 지닌 시상식이니만큼 상대적으로 매체들은 방어적 자세가 강해질 수 밖에 없다. 기존 방송들의 지원은 어렵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김창남 교수의 말처럼 한국대중음악상은 기업들의 선전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 이지선 사무국장은 말한다. “스폰서기업을 적시해줘야 지원이 쉽다. 기업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기업명을 딴 xxx상이란 시상식이 거행되는 걸 바라지 않겠나.”한국대중음악상의 소신으로선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시장주의
지난해 말, 문광부에서 구성한 자문위원단의 ‘음악산업 진흥중기 계획’에 대한 정책적 자문이 있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중 한명인 박준흠 가슴네트워크 대표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저 예산수립을 위한 자문일 뿐이다. 시간 소요도 2시간 가량에 불과하다. 예산이 깎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 자문이 이뤄진다. 확정안이라기 보단 기획재정부로 들어가기 전 단계 내역에 불과한 셈이다. 어쨌든 그 당시 비주류 음악 지원 정책은 2가지로 명시됐다. 비주류 음악 시상식, 즉 한국대중음악상과 인디 음악에 대한 지원이다.”예산 편성을 위한 과정에서 한국대중음악상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는 말이다. 결제과정에서 배제됐다는 건 결국 상위 단계에서 정책적 고려가 배제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의심케 한다. 문광부 전략컨텐츠산업과의 장치영 사무관은 말한다. “한 가정의 가족은 가장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법이다. 장관이 ‘선택과 집중’을 위해 정부의 통합 시상식을 지원한다고 했다.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나.”
선택과 집중의 방향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산업 중기진흥 계획발표’에서 눈에 띄는 핵심사업이 있다. 유인촌 장관이 발표한 정책의 골자는 크게 두 가지다. ‘한국의 그래미상 신설’과 ‘비주류 음악산업 지원정책안’, 하지만 후자보단 전자가 눈에 들어온다. 해외방송 연계 인디뮤직 홍보지원이나 우수신인 뮤지션 선정 및 지원, 대중음악 활성화 지원은 이미 지난 정부에서부터 이어져오던 것이다. “모 국회의원 보좌관을 통해 계획안을 전달받아서 원문을 봤다. 사실 인디 씬이 주목 받던 90년대부터 시행됐던 정책들과 큰 변화는 없는 내용이다. 인디 레이블 지원사업이 이미 아티스트 지원 형태로 변형된 것도 재작년이다. 우수 신인을 발굴해 방송이나 페스티벌 무대에 진출시킨다는 것도 예전 정책이다. 명칭만 변했을 뿐 개선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 사실상 인디 지원은 구색맞추기에 불과하고 시상식과 차트가 핵심사업처럼 보인다.”이지선 사무국장의 말이다. 새로운 정권에서 비주류 음악산업 지원정책은 큰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큰 변화는 시상식과 차트에 있다. 물론 인디 지원 정책 중 전문공연장 구축도 눈에 띄는 대목이긴 하다. 그러나 플럭서스 뮤직 김진석 이사는 말한다. “솔직히 댄스음악 일색의 아이돌 그룹에게 전문공연장은 절실하지 않다. MR틀어놓고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건 대형홀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아이돌 가수를 옆에 세워둔 채 그래미를 발언하고 대중음악인을 위한 전문공연장을 언급한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새로운 정권의 정책 추진력이 새로운 정책에 실릴 것이란 예측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그래미와 공인차트는 음악산업 진흥을 위한 MB정권의 핵심 탄환인 셈이다. 김진석 이사는 말한다. “일단 흥미롭긴 하다. 다만 중요한 건 지금 유인촌 장관 옆에 누가 있느냐가 아닐까. 그날 보도된 기사 사진을 보니 SM가수 몇 명이 함께 서 있더라.”김작가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장관이 발표한 장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운영하는 노래연습장에서 그런 발언이 나왔다.”장소 섭외에 관여했던 한국문화콘텐츠 진흥원의 관계자가 말했다. “호텔 연회장이나 문화부 5층 회견장, 상암동 문화콘텐츠센터, 멜론 악스홀 등 장소에 대한 다양한 고려가 있었다. 그러다 산업적 현장에서 행사를 진행하자는 중론이 있었다. 공연장도 좋지만 음원의 소비가 이뤄지는 사업장이 괜찮지 않을까라는데 의견이 모였다.”대중음악의 산업적 현장으로 채택된 장소가 노래연습장이라는 의미다. 현정부가 문화적 정책을 바라보는 시각이 도출된다. 창작보단 소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시장주의자의 눈이다.
“한국연예제작가협회와 한국음원제작가협회 주관 하에 정책이 기획된다는 말을 들었다. 음반산업관계자 가운데 메이져 기획사 위주로 참여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김작가의 말처럼 지난 달 4일, 유인촌 장관의 정책발표가 있었던 노래연습장에선 이덕요 한국음원제작자협회장, 지명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 정광태 연예제작자협회 부회장 등과 같은 유관 단체장과 김영민 SM엔터테인먼트 대표, 양민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 정욱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등과 같은 메이져 연예기획사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책발표의 맥락은 상하를 염두에 둔 것이나 실질적으로 적극적인 기대효과를 드러내는 건 상층부에 불과하다. 김작가는 말한다. “DJ정부나 참여정부 시절부터 문화산업에 대한 정부의 관점은 산업적 골자에 불과했다. 항상 수출산업의 기반으로 문화를 규정하니 그 끝에 역점을 두는 건 한류다. 이번 정권도 다를 게 없어 보인다.”장관의 계획 발표가 있었던 당일, KTF뮤직의 주가가 상승했다. 음원시장에 대한 수요를 전망한 투자 움직임이 관측된다. 시장주의자들이 기대심리가 탄력을 얻고 있는 셈이다.
정책주의
한국대중음악상은 당초 ‘엠넷’에서 중계 녹화가 예정돼 있었다. 후원의 형식으로 참여한 덕분에 중계권료는 지불하지 않는 형태로 사전협의가 이뤄졌다. 지금까지 ‘엠넷’은 무대 연출까지 참여했던 1회 시상식을 비롯해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중계를 3번 치른 전력이 있다. 이지선 사무국장은 말한다. “어차피 공중파 방송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시상식과 취지가 어울린다고 판단되는 EBS에 타전해본 적은 있다. 작년엔 OBS 주철환 사장이 의지를 표명해서 중계되기도 했다. 올해도 원래 ‘엠넷’에서 3월 방송 편성이 약속돼있었다. 하지만 시상식 규모가 축소되면서 일단 유보된 상태다.”한국대중음악상이 중계 형식의 후원을 ‘엠넷’에 요청했다. 그리고 ‘엠넷’은 이를 수용했다. “이 시상식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케이스다. 하지만 규모와 상관없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동네 강당에서 하더라도 녹화를 위해 나갈 의향이 있다. 우린 음악 전문 방송국이다. 우리마저 공중파처럼 편협하게 메인스트림을 지향한다면 음악적 다양성은 살아남을 수 없다.”홍수현PD의 말이다. “한국대중음악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판단도 있었다.”는 문광부 관계자의 의견과 대조적이다. 현장의 의견과 탁상의 의견이 배치된다. 그러나 결정권은 탁상공론을 통해 행사된다.
한국대중음악상은 대안적인 시상식인만큼 기존의 시상식들과 다르게 인디뮤직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수상 내역에 포섭했다. 평론가들의 잔치라는 일부 비판도 있었지만 메인스트림과 인디펜던트의 가교 역할로서 역할을 다져나가고 있다는 중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조금씩 영향력이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다. 문광부는 인디음악 지원사업에 대한 정책을 추진 중이다. 그럼에도 한국대중음악상은 단지 민간단체의 시상식이기 때문에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반사업자들의 문화관련지원 문의가 매일같이 들어온다. 한국대중음악상만 배려하기 어려운 입장이다.”최성훈 주무관의 말이다. 현재 국내대중음악시상식 중 주요행사는 4가지로 꼽을 수 있다. ‘하이원 서울가요대상’과 ‘MKMF 뮤직 페스티벌’, ‘골든디스크 시상식’, 그리고 ‘한국대중음악상’이 이에 해당된다. 이중 상업적인 후원과 거리를 둔 시상식은 ‘한국대중음악상’이 유일하다. “상업성과 거리가 있는 의미 있는 행사일수록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대중음악산업의 주류 업계와 접근성이 높아진다면 얼마나 공정하고 의미있는 시상식이 거행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김창남 교수의 말처럼 ‘객관적인 음악적 성취를 평가하는 시상식’으로서의 가능성에 가장 근접한 것이다.
홍수현 PD는 말한다. “그래미나 한국 고유의 차트를 만드는 것도 좋지만 현재 우리나라 음반업계 현실을 좀 더 명확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차트가 원활히 돌아가기 위해선 집계방식의 공정성도 중요하지만 씬 전체의 활기가 중요하다. 단순히 몇몇 대형 레이블이 지배하는 형태로 음악계가 활성화된다면 결국 차트 집계방식의 공정성도 무색해질 수 밖에 없다. “사업자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기 때문에 공신력 있는 차트의 마련이 필요하다. 나라에서 공인차트를 지정할 순 없다. 단지 협의의 장을 마련할 뿐이다. 관보처럼 게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 않나. 사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저작권 신탁 단체 등과 같은 각종 단체들과의 입장 차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것이다. 해외 홍보 마케팅을 비롯해 국내 콘텐츠 품격의 상승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최성훈 주무관의 변이다. 그러나 엠넷 홍수현 PD는 말한다. “차트는 어떤 사람이 만들어도 공정하다고 평가하기 힘들다. 우리도 10년 동안 차트를 유지하고 있지만 4달 마다 차트 선정 방식에 변화를 준다. 음악산업의 변화가 그만큼 유동적이기 때문이다.”어느 사업자가 선정된다 해도 그 차트를 과연 공신력 있는 차트라고 인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관료제 조직의 하청 형태로 완성될 차트가 유동적인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게다가 현재 방송국이나 음반사와 같은 각 사업자마다 개별적으로 집계하는 차트와의 충돌을 감소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난 2월 8일에 개최됐던 그래미 시상식은 올해로 51회를 맞이했다. 그래미의 역사는 미국 음악의 오랜 역사를 증명한다. 빌보드 차트 역시 마찬가지다. 영국의 UK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도 그 나라의 음악산업의 너비와 깊이를 증명하는 일종의 표지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래미와 빌보드는 행정적인 기획을 통해 이뤄진 결과물이 아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문화적 성취에서 출발한 자생적 성과다. 다양한 장르적 무브먼트가 태동하고 씬의 활성화가 적극적일 때 그 성취에 대한 명예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문광부의 지원을 얻지 못한 한국대중음악상은 오는 12일 학전그린소극장에서 시상식을 거행한다. 김창남 교수는 말한다. “시상식 자체를 최소화하거나 시상식 거행이 어려워지면 선정만이라도 유지하는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한국의 그래미가 발표됨과 동시에 한국대중음악상이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문광부 관계자는 말했다. “그래미하려고 한국대중음악상에 지원한다는 건 오해다.”그저 오해다. 이에 대해 김진석 이사는 말한다. “유지되고 있던 시상식의 지원철회로 존속위기를 부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래미를 만들기 전에 현재 씬에서 보존할 수 있는 모델을 찾는 게 낫다. 음악의 산업적 측면만 너무 부각하는 거 같다.”그래미는 선점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미의 시작이 지금의 그래미가 아니었듯이 한국대중음악상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 싹이 말라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MKMF 뮤직 페스티벌’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국내 시상식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제각각 시상식의 특성에 맞는 권위가 다양하게 자리잡고 발전할 수 있는데 그걸 굳이 인위적으로 통합하려는지 모르겠다.”홍수현 PD의 말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사업자 사이에서 인위적으로 통합적 사업을 모색하는 건 쉽지 않다. 개별적인 자생력을 채색해 나갈 수 있는 밑그림을 만들어주는 게 오히려 실용적인 방안에 가깝다.
장관의 정책발표 현장에 동석한 원로가수 정훈희가 질문을 던졌다. “대중문화에 기여한 대중음악인에 대한 군면제 혜택을 시행할 의향은 없나요?”이에 유인촌 장관이 답했다. “가수들도 군대는 반드시 가야 한다. 다만 왕성하게 활동하는 시기에 연기가 가능하거나 연예 활동의 연장선에서 군 복무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객석에 앉아있던 관계자 모두가 박수를 쳤다. 샤이니와 태연이 등장해 공연을 펼친 건 그 뒤였다. 노래연습장 기기의 반주에 맞춰 라이브로 공연을 했다. 현장에 있었던 한 기자가 말했다. “정책발표를 취재한다기 보단 자축연을 구경하는 외부인 같았다.”문광부 관계자는 조만간 정책 실무자들이 음악산업선진국들의 해외실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그들이 과연 무엇을 보고 돌아올지는 모를 일이다. 다만 이미 방향은 정해졌다. 51회 그래미를 동경하는 문광부는 5회 전통의 한국음악시상식엔 관심이 없다. 한국음악산업을 위해 소비될 1275억 원 가운데 한국대중음악상을 위해 할애될 3천만 원은 없는 셈이다. 실로 무심하고 시크한 선택과 집중이다.
슬럼독 오스카네어(Oscarnaire)! 현지시각으로 2월 22일 오후 5시경, 미국 LA 코닥극장에서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거행됐다. 사회를 맡은 휴 잭맨은 화려한 뮤지컬 무대로 포문을 열며 시상식의 열기를 띄웠다. 그러나 이날 시상식의 주인공은 단연 <슬럼독 밀리어네어>였다.
지난 골든글러브에서 4관왕을 차지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어진 아카데미에서도 저력을 발휘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8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벌어들이며 제81회 아카데미에서 가장 큰 수익을 올렸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경쟁이 치열했던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8관왕에 오르며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13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3관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주요부문에선 단 한차례도 호명을 받지 못하며 체면을 구겼다. 숀 펜과 히스 레저에게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밀크>와 <다크 나이트>는 2관왕에 오르며 실속을 챙겼다. 이미 수상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던 히스 레저의 이름이 남우조연상에 호명되는 순간, 코닥 극장에 자리한 전 참석자가 기립박수로서 고인의 영예를 추대했다. 수상식은 가족의 대리 수상으로 이뤄졌다.
한편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독점했던 케이트 윈슬렛은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로 노미네이트 된 오스카 여우주연상 부문까지 석권하는 파란을 이어나갔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페넬로페 크루즈 역시 수상자로서 연단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월-E>로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차지한 픽사 스튜디오는 <라따뚜이>에 이어 오스카 2연패에 성공했다. 외국어영화상은 일본의 <굿’바이>에게 돌아갔다. 그 밖에도 <공작 부인: 세기의 스캔들>이 의상상에 호명됐다. 유난히 많은 수작들이 쏟아진 이번 아카데미 역시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대작보단 작품성 위주의 작품들을 선별했다.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연기 부문에 호명된 배우들의 다국적성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비 할리우드 영화인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최고 수혜자로 선정됐다는 점에서 최근 오스카의 보수적 취향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릴 전망이다. 한편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비롯한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작품들이 개봉 중이거나 개봉 예정인 만큼 아카데미의 선구안을 국내 극장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81회 아카데미 수상작 리스트
작품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감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남우주연상 <밀크 Milk> 숀 펜 여우주연상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남우조연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히스 레저 여우조연상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페넬로페 크루즈 각색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몬 뷰포이 각본상 <밀크 Milk>더스틴 랜스 블랙 편집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크리스 디킨스 촬영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앤쏘니 도드 맨틀 미술감독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널드 그레이엄 버트, 빅터 J. 졸포 의상상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마이클 오코너 분장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그렉 캐놈 음악상(Original score)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주제가상(Original song)“Jai Ho” from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굴자 음향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리차드 킹 음향효과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이안 태프, 리차드 프리케, 레슐 푸커티 시각효과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에릭 바바, 스티브 프리그, 버트 달튼, 크레이그 바론 장편애니메이션 상 <월-E WALL-E> 장편다큐멘터리 상 <맨 온 와이어 Man on Wire> 단편다큐멘터리 상 <스마일 핑키 Smile Pinki> 단편애니메이션 작품상 <작은 육면체의 집 La Maison en Petits Cubes> 단편영화 작품상 <토이랜드 Spielzeugland> 외국어영화상 <굿, 바이 Departures> 일본
이소라의 최근작인 7집은 어떤 타이틀조차 없는 백지 상태의 언어와 멜로디로 심금을 울린다. 전 앨범인 ‘눈썹달’에 비해 절박함이 덜어졌고 자신의 취향이 더욱 완강해진 느낌이다. 그것이 죽대처럼 꿋꿋하여 부러지기 쉬울 것마냥 구는 건 아니다. 단지 향취가 더욱 진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면서도 신경질적이고 온화하지만 예민하다. 때론 취한 듯 자유분방하지만 곧잘 경건하게 가다듬는다. 깊은 호흡을 토해내는 특유의 창법은 여전하지만 가녀리듯 굵게 지속되는 음색은 더욱 깊게 침전하면서도 고요하게 차오른다. 영역은 확고하되 자장이 강해졌다. ‘눈썹달’이 상실과 좌절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면 ‘7집’은 극복과 존재의 언어로 이뤄져 있다. 문자로 이뤄진 제목 대신 기호로 나열된 리스트는 의도를 함축하지 않고 무한의 깊이와 너비를 확장해나간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가 모여 각자의 철학을 뚜렷이 드러내고 언어의 관념을 넘어 축제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7집’은 이소라를 시인으로 접대하고 하나의 아티스트로 추대해도 좋을 만한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우아한 목소리에 담긴 불안의 입자들이 과감히 노래된다. 치유를 위한 갈망의 출구가 그 너머에 자리한다.
사실 난 이별로 인해 절박한 언어를 내뱉고 있을 때 ‘7집’을 듣고 있었다. 감내하기 어려운 이별의 언어들로 사무치는 노래 틈바구니에서 이 앨범을 찾아 들고 진동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삶에 대해 갈망했다. 돌고 도는 트랙의 무한 루프 속에서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별의 상흔들을 하나씩 어루만졌다. 오늘이 아프다 하여 내일을 멸망시킬 수 없는 것처럼 난 위로 받기 위해 ‘7집’을 듣고 또 들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위안이 됐던 노래는 9번 트랙.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강하게 하고 평범한 불행 속에 살게 해.’깊게 이해되고 넓게 울렸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도 거듭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Hey you, Don’t forget. 고독하게 만들어. 널 다그치며 살아가.’그리고 언젠가 다시 말해야 한다. ‘wanna stay with you, wanna be with you.’그저 현실이 ‘이제 사랑이 안 된다니 이별이야.’라고 할지라도 간직해야 한다. 다시 기억에서 끌어내야 한다. ‘Love is always part of me.’마음 속에 품었던 세월을, 기억을 부정하지 않아야지. 다시 사랑해야지. 그렇게 살아갈 거야.
늘 같은 노래
뭔가 같은 리듬
알 것 같은 음들
한결 같은 말
그래. 안다. 그 안에 너와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있었다는 것. 그 안에 사랑이 있었고 이별도 있었다는 것. 그렇게 난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또 사랑할거야. 난 그렇게 살아보려 해. 이 노래와 함께.
(2008년 9월에 픽사 20주년 기념 전시회 관람 후 작성한 글을 퍼다 올린 것입니다.)
펜슬 애니메이션을만드는 것이 연필이 아닌 것처럼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역시 컴퓨터가 아닙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아티스트입니다.
-존 라세터-
픽사의 창업자인 존 라세터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전시회에는 픽사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있다. 그건그저 데이터로 축적된 것이 아니다. 스크린에 구현될 색이 창작되고, 음향을 완성시키며다양한 캐릭터를 구상한다. 파스텔과 아크릴, 디지털 페인팅 작업을 통해 얻어지는 다양한 결과물 속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추출하고 더욱 창조적인 작업을 도모한다.세심한 컬러스크립트 작업을 통해서 명암의 대비와 색채적 짜임새를구상하고 세밀한 스토리보드 작업을통해탄탄한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건 뛰어난 기량을 지닌 스페셜리스트들을 위해 마련한즐거운 작업환경이다.그들은 풍부한상상력을 보장받고 가능성의 한계를 의심받지않는다. 가능한 모든 시도를 통해방대한 노력을 투자하고그 작업 자체는 하나의 예술적 기능성으로 통한다. 매 작품마다 노가다에 가까운 수고를 마다 하지 않는 건 그것이 단지 거대한 작업이 들어가는 프로젝트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들에겐 예술가라는 자부심이 있으며 그걸 즐길 줄 아는 역량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애니메이션이 탄생하기 힘든 건 단지 우리나라의 기술이 열등하거나 국내 애니메이터들의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환경의 문제다.<토이 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 <벅스 라이프> <카> <라따뚜이> 그리고 <월-E>까지,어느 한 작품 빼놓기 어려운 픽사의 작품들이 가능한 건 바로 예술을 존중할 줄 아는 태도 그 자체에 있다. 결국 그들의 태도는 룩소 주니어가 뛰어 나오는 픽사 로고 자체를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창작 집단의 상징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픽사 스튜디오는 예술을 유희로 구현하는 21세기 장인들의 놀이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