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삶이 무엇을 증명하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감회와 허무를 동시에 쥐어준다.
목사가 되려 했으나 신학교 입학에 실패하고 그림에 입문한 고흐는 뒤늦게 자신의 열정을 불태운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그림에 배어있는 짙은 고독은 분명 그의 앞날의 행보가 심상치 않으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으리라.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만을 400프랑에 팔았을 뿐인 고흐는 평생 가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동생 테오의 뒷바라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그의 그림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으로 매매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언젠가 내 그림이 물감보다 가치 있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고흐의 말대로 현재세상은 그의 그림이 물감과 비견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음을 인정하고 있다. 고흐의 인생에서 그는 남루하고 정신 나간 소행의 붓쟁이에 불과했지만 그의 인생이 없는 현실에서 그는 세상에 큰 감명을 주는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 고흐는, 그리고 그가 남긴 그림은 그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그림에는 지독하게 새어 나오는 깊은 고독과 슬픔이 무겁게 눌러앉아있으며 그와 동시에 가슴 속에서부터 끝없이 분출되어터져 나오려는 열정과 갈망으로 끊임없이달아올라 대류 하는 기운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삶이 우울했던 건 그의 뜨거운 열망이 현실의 차가운 질시에 갇혀 염원의 단계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기 때문 아닐까.
그는 갈망했으나 현실은 그를 갈망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흐의 비극이었고 오늘날 전해지는 숭고한 인간의 역사다. 비참했던 삶 너머의 영광 속에서 과연 고흐가 살아가고 있을까. 저 그림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고흐의 그림이 제 가치를 인정받는다 한들, 고흐는 무엇을 보상받을 수 있는가. 물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그런 삶은 그만큼 가치 있는 거라고, 그 누구는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훗날 그가 남긴업적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의 궤변일 뿐, 고흐의 삶과 무관하다.
물론 그는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그것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였기 때문이라고.고흐의 뜨거운열정과 깊은 고뇌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동반자는 아마도그의 그림이었을 것이리라.자신이 이해해주고자 했던 오랜 벗의 가치를 오랫동안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고흐의 그림들은 아름답지만그래서 지독하게 쓸쓸하다. 떠난 자리를 홀로 남아 지키고 있는 것만 같아서.
1월 30일, 군포여대생 납치살해 용의자로 검거된 강 모씨가 입을 열었다. 경찰은 당일 오전 강 모씨가 경기 서남부 연쇄 실종자 여성 7명을 살해했음을 자백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의 본질이 달라졌다. 더욱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사건의 체급이 오른 만큼 언론보도의 비중도 급격히 변했다. 30일을 기점으로 공중파 방송국 3사의 저녁 메인 뉴스는 더 이상 강호순의 실명을 가리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미 27일 첫 번째 현장검증 이후, 일간지에서는 강호순이란 이름 석자가 알게 모르게 활자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에서 강호순의 이름 석자가 고스란히 들려온 건 30일에서였다. 연쇄 살인범의 신원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송출됐다.
1월 31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지면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언론과 여론이 함께 술렁였다. 얼굴공개 논란이 얼굴공개로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1면에 얼굴공개 기사를 게재했다. 중앙일보는 4면이었다. 조선일보가 좀 더 대담했다. 당일 저녁 SBS 8시 뉴스에서도 강호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1시간 뒤, KBS 9시 뉴스에서도 강호순의 얼굴이 드러났다. MBC 뉴스데스크가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건 하루가 지난 2월 1일이었다. 역시 하루가 지난 2일엔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타 일간지에서 강호순의 얼굴을 나란히 게재했다. 반면 한겨레와 한국일보는 강호순의 얼굴 대신 얼굴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지면을 통해 독자에게 알렸다.
신문과 방송
얼굴 사진을 입수한 건 비단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뿐만이 아니었다. 일간지나 방송국이나 가릴 것 없이 이미 강호순의 얼굴공개에 대한 논의는 각기 내부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단지 시점이 문제였다. 과거 신정아의 누드 사진을 게재한 문화일보처럼 선정성의 뭇매를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사생활 침해에 대한 손가락질보다 극악무도한 흉악범에 대한 주홍글씨가 선명했다.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유력했다. 선봉에 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깃발을 꽂은 것도 그런 판단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지난 1월 31일자 지면에서 강호순의 얼굴공개에 관한 입장을 게재했다. 중앙일보 유건하 기획전략팀장은, “일일이 제작과정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편집권에 대한 심사숙고 끝에 내부결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SBS와 KBS의 저녁 메인 뉴스가 뒤를 따른 건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타이밍이었다. “보도국장, 팀장 선에서 간헐적인 논의는 계속되고 있었다. 단지 추이를 살피던 중이었다. 결국 31일 오전회의에서 갑론을박 논의 끝에 방송이 결정됐다.” KBS 정은천 사회부 팀장의 말이다. SBS의 입장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SBS 양철훈 편집부 부국장에 따르면, “애초에 편집부 차원의 고민이 있었다. 31일, 보도국 전체 편집 회의 차원에서 논의됐고, 부장 선 토론으로 결정됐다. 조선과 중앙에서 먼저 얼굴을 공개한 마당에 딱히 얼굴이 가려질 의미가 없어졌다는 판단이 우세했다.”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습적인 보도가 방송사를 움직이는데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허를 찔린 건 아니었다.
“조선과 중앙의 보도가 공개 논의의 단초가 된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방송과 신문은 신의의 잣대나 파장이 다르다. 이 부분의 고민이 있었다.” SBS 양철훈 편집부 부국장의 말이다. 누군가가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편해질 일이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물꼬를 텄다. 방송사의 고민을 어느 정도 덜어준 셈이다. 신문이 정보를 선점했다 해도 방송의 위력은 차원이 다르다. 조간신문의 보도 이후의 저녁 뉴스는 늦은 것이 아니다. SBS와 KBS가 차례로 강호순의 얼굴을 뉴스에 내보낸 시점은 주효했다. 이상한 건 MBC였다. 31일 당일에 침묵했던 MBC는 다음 날이 돼서야 MBC뉴스데스크를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익명을 요구한 타방송국의 인사가 의문스럽게 말했다. “타사보도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의아했다. 어째서 하루 늦게 방송을 했을까. MBC가 고민한 지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MBC 역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에 반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MBC 김성환 수도권 팀장은 말한다. “사진은 이미 강호순의 검거 당일에 입수됐다. 다만 이를 공개할 것인가, 라는 내부 논란이 계속됐다. 당일 편집회의에서 보도 시점은 결정된다. 얼굴공개까진 하지 말자는 의견이 우세했던 30일과 달리 31일엔 논의가 좀 더 깊어졌다. 그리고 2월 1일엔 논의가 무색해진 경향이 있었다. 타방송사에서 보도가 된 상황에서 우리가 얼굴을 가린다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MBC는 좀 더 신중했다.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방송의 공정성을 내세워 공영방송 사수라는 기치를 내거는 MBC가 앞장 설 일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방송에서마저 강호순의 얼굴이 알려진 마당에 MBC의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내부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니고 있는 정보를 묵힐 수 없다는 의견이 점차 힘을 얻었다. 타방송국보다 하루가 늦은 시점에서의 보도는 무색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껍데기는 유효했다. 시의적 효력은 상실됐지만 정보 차원의 목적에서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자체적인 의사표명이 중요한 사안이었다. MBC의 내부적 합의는 그렇게 이뤄졌다.
언론과 여론
강호순의 얼굴공개는 달리기가 아니라 꼬리잡기였다. 속도전보다도 탐색전에 가까웠다. 방송사는 두 일간지의 꼬리를 잡았다. 하지만 두 일간지도 머리는 아니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얼굴공개의 원칙으로 내세운 건 ‘국민의 알 권리’였다. 여론의 요구에 부응한 정보라는 점을 앞세웠다. “기사를 작성한 경위의 논리에 대해서는 이미 지면에서 충분한 입장을 밝힌 셈이라 본다.”김수혜 조선일보 기동팀장이 잘라 말한 것처럼 조선일보는 지난달 31일자 지면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한 자사 입장을 기사로 전했다. ‘반 인륜범죄자의 얼굴을 마땅히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눈에 띄는 대목이다. 중앙일보 역시 ‘공익을 위해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이름, 얼굴 공개’라는 헤드라인으로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 “즉흥적인 반응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끝에 여론의 요구가 높아진 끝에 응답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극악무도한 인면수심의 사건이 거듭되고 이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여론화되는 시점에서 언론이 방관할 순 없는 사안이다. 신문은 여론은 대면하는 매체 아닌가.”중앙일보 유건하 팀장의 말이다. 방송국의 입장표명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방송국 3사는 이번 얼굴공개가 ‘국민의 알 권리’와 ‘여죄의 제보’를 위한 것이라는 공통적 견해를 밝혔다. 국민을 위한 공익이 얼굴공개의 목적이란 이야기다.
지난 1일 오전, 강호순의 자백에 따른 추가 현장검증을 위해 군포경찰서를 떠나기 직전 기자들과의 질의 대면이 있었다. 첫 번째 질문이 나왔다. “어제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는데 심정이 어떠세요?”강호순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대신한 건 오후 5시경 경찰의 브리핑이었다. 군포경찰서 이명균 강력계장은 그 질문을 통해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강호순이 심경적인 충격을 느꼈다고 전했다. 경찰은 강호순에게 언론의 얼굴공개를 알리지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변화가 있었다. 경찰은 당일 현장검증에서 강호순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았다. 언론의 얼굴공개가 다음 날 이뤄진 특단의 조치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랬다. 현장검증 주변에서는 유족을 비롯한 구경꾼들의 고함이 빗발친다. 마스크를 쓰고 모자까지 눌러쓴 강호순을 향한 비난은 때론 주변의 경찰에게 향한다. “경찰 내부에서도 항상 논란이 있었다. 일선 형사들도 마스크를 벗기고 싶어한다. 피의자 인권도 중요하지만 여론 앞에서 피의자의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을 리 있겠나.”이명균 강력계장의 말이다. 경찰 역시 여론을 의식하고 있었다.
강호순의 마스크가 벗겨진 뒤에도 현장검증은 여러 차례 거듭됐다. 경찰은 강호순이 자신의 얼굴공개에 충격을 느꼈다고 발표했다. 강호순의 현장검증을 일선에서 취재한 모 일간지의 기자는 전한다. “범인의 심경변화에 대한 경찰의 발표는 기자들이 확인한 사안은 아니다. 현장에선 실제적으로 얼마만큼의 심경 변화가 있는지 느끼기 어려웠다. 다만 마스크를 벗은 뒤로 고개를 더 파묻는 경향이 있다.”마스크를 벗겼지만 강호순의 얼굴이 보이는 건 아니다. 눌러쓴 모자와 후드로 얼굴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굴을 파묻는 행위는 강호순이 마스크가 벗겨진 자신의 얼굴을 의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큰 변화는 강호순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있었다. “사진 기자의 카메라 앵글 각도가 변했다. 정면이 아니라 좀 더 아래로 내려간 거지.”한겨레 사회부 김기선 기자의 말이 현장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마스크가 벗겨진 강호순의 얼굴을 찍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 김기선 기자의 말이 이어졌다. “얼굴공개 뒤로 점점 보도가 선정적으로 변하고 있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팩트를 찾기 위한 노력보단 이슈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늘고 있다.”
언론은 강호순의 얼굴공개가 사회적인 공익을 위한 결단이라고 소개해왔다. 그 뒤를 이어 강호순의 과거 행적들이 낱낱이 드러난다. 살인 수단과 살해 방법, 살인 행적까지 여과 없이 보도된다. 범죄 예방 차원에서 강호순의 범행을 보도하고 추적해 샅샅이 공개한다. 전국적으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여자가 줄었다는 뉴스가 뒤따른다. 그 가운데 싸이코패스 테스트가 유행한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인터넷 매체까지 싸이코패스 진단법이라는 테스트를 기사화하고 유포한다. 이수정 경기대 심리범죄학 교수에 따르면, “최근 싸이코패스 진단법이라고 알려진 대부분의 테스트는 잘못된 정보다. 게다가 싸이코패스 테스트를 비범죄자에게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불특정 다수의 호기심은 일회적이다. 다만 그 호기심에 영합하는 배후는 지속적이다.
“현장의 기자들 중에서도 보도가 너무 선정적으로 흐르고 있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온다.”어느 일선 기자의 말처럼 강호순을 둘러싼 언론의 보도방식에서 이상기류가 발견된다. 지난 2일, YTN에서 보도된 현장검증 관련뉴스는 단연 자극적이었다.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돌을 던져서 죽이고 그러는데 (강호순 역시) 그런 식으로라도 처참하게 죽여야죠.”강호순의 현장검증을 지켜보던 수원의 한 시민이 내뱉은 분노 섞인 언어가 여과 없이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언론의 보도가 여론의 흥분상태를 부추기고 있다고 할만한 사안이다.
원칙과 논란
흉악범 얼굴공개를 입법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이를 반박한다. “흉악범에 대한 기준이 모호할뿐더러 법에 따른 얼굴 공개가 된 용의자가 후에 진범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2차, 3차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벌써 ‘강호순의 고향 특산물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지 않나.”강호순의 얼굴공개와 함께 우리 사회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인식이 드러났다. 죄질에 따라 인권존중이 분류돼야 한다는 주장과 범죄자라 할지라도 기본적인 인권은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를 빌미로 사형제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곳곳에서 설전이 벌어진다. 지난 2월 5일자 법률신문에서는 헌법학자 30명과의 전화 설문조사를 공개했다. 찬성 46.7%, 반대 53.3%. 반대가 앞섰지만 팽팽한 결과다. 법적인 합의 역시 쉽지 않다는 의미다. 찬성하는 쪽이 내세우는 논리의 기반은 알 권리에 있다. 반대하는 쪽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 27조 4항에 기반을 둔다.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반면 알 권리는 헌법이나 실정법으로 규정된 권리가 아니다. 법무법인 드림 정영택 변호사의 자문에 따르면 이렇다. “헌법 21조 1항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돼있다. 여기서 언론, 출판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연관되고 이것이 알 권리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하지만 두 사안이 흉악범 얼굴공개에 대한 찬반 논리를 완벽하게 보좌할 수 있는 근거가 못 된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알 권리가 얼굴공개와 직결된 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영택 변호사는 다양한 유권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헌법 10조 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한 의무를 진다.’고 명시돼 있다. 또한 헌법 37조 1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한다. 헌법 37조 1항을 근거로 국민 개개인은 헌법에 열거되지 않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이에 따라 헌법에 열거되지 않은 초상권 역시 개인의 보장받을 권리에 속한다. 이는 헌법 10조 1항에 따라 개인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국가적 의무와 연동된다. 강호순의 얼굴공개가 초상권의 문제로 발전될 수 있다는 의미다. 예외는 있다. 사회적인 공인에 한해서 초상권의 문제는 예외로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강호순을 공인이라고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이다. 공인의 사전적 의미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물’이다. 연예인이 공인인가, 라는 논란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호순 역시 마찬가지다. 유명세를 치렀다고 해서 공인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호순이 공인이 아니라면 얼굴공개는 초상권 침해에 해당한다. ‘고의 또한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민법 750조에 따른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언론의 얼굴공개 보도는 초상권의 권리를 강호순의 동의 없이 신문에 게재했기 때문에 고의적인 위법행위로 해석이 가능하다. 동시에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17조에 따라 과거 행적이 담긴 사진의 게재까지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과거 신정아의 누드 사진을 게재해 패소한 문화일보의 판례도 여기에 해당된다. 얼굴공개에 대한 다양한 유권해석이 존재함에도 언론이 보도를 선점했다는 건 원칙에 대한 고민이 가벼웠거나 이를 간과했다는 의미다.
“언론입장에서는 위법성보다도 기사로서의 의미가 관건이 될 수 있다. 불법적인 보도가 면책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법률적 판단과 무관하게 언론 입장에서 기사적 가치를 판단하고 보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MBC 김성환 수도권 팀장의 말은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의 말과 연동된다. “언론의 보도는 자유다. 상업적이고 부적절한 일이라 해도 거기에 대해 간섭할 필요는 없다. 그 후 그만큼의 책임을 지면 된다.”언론은 뉴스로서의 가치를 먼저 선택한다. MBC가 PD수첩을 통해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표현의 자유에 따라 뉴스 선별과 보도 결정은 언론의 권리다. 문제는 세세한 원칙의 틈새를 파고 든 관행이 거대한 원칙들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나워진 여론 위로 강호순의 얼굴을 내던져 대중에게 물어뜯게 한들 사건의 근본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기존에 고수하고 확립되던 원칙이 흔들린다. 언론을 통해 흉악범의 얼굴이 공개되고, 이를 통해 경찰은 피의자의 마스크를 벗겼다. 공익을 위한 것이라 했지만 실상 논란만 가중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소모전이 계속된다. 상처의 치료를 위한 고심보단 당장의 고통을 잊을만한 마약을 처방한 셈이다.
“언론은 사회의 표정 중 하나다. 국민들이 강호순을 얼굴을 보고자 하는 건 국민의 분노가 반영된 것이다. 그 안엔 강호순의 얼굴 자체가 보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이 있을 수도 있는 반면 집단적인 광기도 분명 존재한다.”김성환 팀장의 말처럼 언론의 얼굴공개는 사회적 요구의 부응이다. 다만 그 사회적 요구가 현명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MBC가 타방송사에 비해 하루 늦게 얼굴공개를 결정한 건 이런 고민이 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MBC마저 확신할 수 없는 사회적 요구에 짓눌린 셈이다. 여론을 악용했다는 비난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공분하는 대중을 이성적 판단으로 이끌어야 하는 언론이 오히려 대중적 공분을 흡수해 여론을 선동하고 있다.”김기선 기자의 말에 무게가 실린다.
지난 2일 MBC 뉴스데스크의 클로징 멘트는 그 일부 언론을 향한 것이었다. “몇 년 전 경찰이 마스크를 씌우면서 내규로 슬그머니 시작했듯이, 이번에 일부 언론이 이를 벗기면서 어물쩍 결정했습니다.” KBS의 정은천 팀장은 이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 클로징 멘트가 KBS를 겨냥한 방아쇠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고 MBC의 선정성을 지적했다. “우리는 MBC와 달리 강호순의 단독사진만 사용했다. 피의자 가족이 함께 찍힌 사진을 입수했지만 무관한 제3자의 피해를 고려했기 때문이다.”그러나 MBC의 클로징 멘트는 비단 KBS를 향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MBC 스스로를 향한 손가락이 될 수도 있다. 뒤늦은 합류라 해도 MBC가 그 대열에 들어선 건 마찬가지다. “절차의 실종의 생각의 실종이 될 수 있어서 더 우려스럽습니다.”클로징 멘트의 마무리는 이렇다. 언론의 강호순 얼굴공개 과정이야말로 절차의 실종이자 생각의 실종이었다.
절망과 희망
“어차피 이건 길게 갈 사안이 아니다. 알지 않나.”모 일간지의 팀장급 인사의 말처럼 강호순의 얼굴도 어느 다른 이들처럼 곧 잊혀질 것이다. 문제는 강호순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인가의 문제다. 강호순을 통해 유영철과 지존파를 다시 보게 된 것처럼 언젠가 우리는 새로운 흉악범을 통해 강호순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살인의 추억은 되풀이된다. 강호순의 얼굴공개를 범죄예방효과로 연결하는 논리는 미약하기 짝이 없다. 단지 강호순을 힐난하고 때려죽인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흉악범만큼이나 끔찍한 증오만 양산될 뿐이다. 징벌이 아니라 예방이 필요하다. 강호순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봐야 한다. 강호순의 얼굴은 우리 사회에 잠재된 악의 뿌리가 어디까지 내려앉아있는가의 지표다.
개개인의 절망이 모여 사회적 공분을 이룬다. 추악한 사회적 기저에 맞닥뜨린 당혹감이 거대한 분노로 몰아친다. 언론은 여론의 방파제다. 진짜 알아야 할 것과 단순히 알고 싶은 것을 구별해서 떠내려 보내거나 막아서야 하는 것을 가늠하는 것이 진정한 언론의 몫이다. 그저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하고 여론의 돌팔매질을 부추기는 것이 언론의 역할은 아니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전문화된 형사정책과 효과적인 교정교화가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합니다.”이수정 교수는 지난 10년간 이에 대해 주장해 왔지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강호순의 검거에서 프로파일링 수사가 큰 역할을 했다. 이수정 범죄심리학 교수는 그 프로파일링이 유영철 사건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한다. 불행을 통해 절망을 얻기는 쉽다. 하지만 희망을 가늠해야 한다. 강호순은 이 사회의 직설적인 절망이자 희망의 역설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강호순의 얼굴엔 살인마에 대한 친절한 예시 따윈 없었다. 소박하고 온화한 미소에 가증스러움이 더해질 따름이다. 그 끝에 무력한 분노만 잔뜩 걸려들었다.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에 동의합니까, 라는 질문에 적합한 답을 찾긴 어렵다. 하지만 살인자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살인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마주보지 않기 위해선 좀 더 현명해야 한다. 싸이코패스 테스트 따위를 클릭하거나 강호순을 향한 육두문자나 날리고 있을 사안이 아니다. 당신 앞에 드러난 강호순의 얼굴을 향해 물음표를 얻어야 한다. 어째서 우리는 강호순의 얼굴을 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 여론을 위해 강호순의 얼굴을 공개했다는 언론에 되물어야 한다. 살인마의 얼굴을 본 당신이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분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구별해야 한다. 절망을 볼 것인가, 희망을 볼 것인가. 우린 지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살인마의 얼굴이 잘 생겼다는 것 따위를 알고자 했던 게 아니라는 걸 당신은 분명 알고 있다.
중세 유럽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화폭에 현실을 옮겨 담고자 했다. 극사실주의적인 붓터치로 실사와 그림 간의 피아를 좁히고자 했다. 선명한 명암 속에서 드러나는 사물의 재질이 필사되듯 채워졌다. 크리스트교의 엄숙주의가 지배한 중세 바로크 미술은 우아함과 장엄함의 극치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호강하고 있는 것만 같다. 기계적인 인상도 느껴진다. 작은 포도알맹이에 맺힌 투명한 물기까지 화폭에 그려낸 사실주의적 색채감은 경외를 넘어 경악할 지경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접근이다. 그 실재적인 색감을 구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실패의 경험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력의 산물을 결코 간과할 순 없다. 하지만 중세 바로크 미술의 그림들은 아름다운 반면 떠오르지 않는다. 한 폭의 그림마다 경이로운 기교를 보여주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이 그러하여 어느 하나가 잡히지 않는다.
‘서양미술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란 타이틀은 무색한 일이다. 렘브란트가 유화뿐만 아니라 에칭으로도 유명하다지만 실상 유화 한 점뿐인 렘브란트 전시회란 에칭으로 구색을 맞춘다 한들 어딘가 석연찮은 게 사실이니까. 물론 그 밖에도 루벤스와 반다이크, 푸생, 브뤼헐, 부셰 등,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그림이 몇 점 자리잡고 있지만 그저 구색을 맞추는 느낌이다. 서양미술거장전이란 거창한 타이틀은 무색하지만 어쨌든 화려하고 우아한 중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감흥이 생김은 부정할 수 없다. 완벽하고 섬세한 디테일이 가득한 사실주의적 터치과 우아하고 장엄한 신 고전주의적 감성을 지켜본다는 건 실로 기이한 낭만임에 틀림없다. 호화스럽되 우아하며 예민하지만 섬세하다. 르네상스의 성취를 후퇴시킨 바로크 미술의 걸작들은 암흑 시대 속에서도 나름의 고민을 품었다. 고상함 속에 영험을 그려 넣기 위해서, 분명 그들은 노력했을 것이다. 물러서는 와중에도 성취는 발견된다. 바로크 시대는 분명 성취를 위한 퇴보의 시대였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프랑수아 부셰의 ‘헤라클레스와 옴팔레’다. 관능적인 에로티시즘 사이로 매혹적인 우아함이 깃든다. 격정적인 낭만 속에서 고상한 품위가 유지된다. 실로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림이다. 헤라클레스와 옴팔레의 서사를 알고 본다면 어딘가 서글퍼지겠지만 적어도 그림 너머의 순간만큼은 황홀하다. 풍만한 육체 속에 낭만이 깃들고 입을 맞춘 찰나는 화폭에 담겨 영원을 누빈다. 영원한 시간, 영원 하고픈 시간. 관능과 순수 사이에 놓인 투명한 매혹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스타에 관한 말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말엔 옥석이 없다. 그저 실체가 묘연한 사연 속에 스타가 있을 뿐이다. 스타가 있으니 말이 이어진다. 그저 스타를 위시한 말이 떠돌 뿐이다. 그 사이에서 스타가 살고 있다.
전지현의 복제된 핸드폰이 화제다. 만질 수 없는 전지현을 듣고라도 싶었을까. 놀라운 소식은 그 다음이다. 소속사의 사주로 전지현의 핸드폰이 복제됐다고 한다. <스타의 연인>이 떠올랐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스타의 연인>과 전지현의 핸드폰 복제를 연관지은 기사들이 인터넷 메인까지 올랐다. 전지현은 다가오는 2월에 소속사와 전속계약이 만료된다. 전지현과 정훈탁 대표의 실루엣이 <스타의 연인>을 통해 구체화된 것만 같다. 재계약을 거부하는 이마리(최지우)에게 갖은 회유와 협박을 거듭하는 서태석(성지루)의 관계가 이번 사건을 통해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뻗어 날아간다. 무명의 이마리를 톱스타로 일궈낸 연예기획사 대표 서태석은 10년 전 패션화보집의 모델로 데뷔한 전지현을 오늘날 톱스타로 키워낸 싸이더스HQ의 정훈탁 대표를 연상시킨다. 마치 고의적인 것마냥 기이하게 시기가 맞아떨어졌다.
딱히 <스타의 연인>을 즐겨본 것은 아니다. 명확히 고백하자면 띄엄띄엄 봤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캐릭터만 파악한 수준이다. 그래서 드라마가 어떻다라는 말을 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남았다. 인터넷 뉴스 연예기자라는 전병준(정운택)이 서태석을 찾아와 이마리와 김철수(유지태)의 사이를 폭로할만한 사진을 보여준다. 사진을 본 서태석은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배우의 스캔들을 팔아 사건을 무마시킨다. 전병준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특종을 얻었다. 서태석은 이마리의 기회비용이 다른 배우에 비해 크다고 확신한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연예기획사에게 있어서 톱스타는 최고의 상품이다. 시가 최고액을 자랑하는 프리미엄 명품이다. 명품은 작은 금만 가도 가격이 급락한다. 십만 원짜리 핸드백의 손잡이가 떨어지는 것보다도 백만 원짜리 핸드백에 실금이 가는 게 뼈아픈 일이다. 이마리는 회사의 얼굴이자 존망이다. 이마리 있고 연예기획사 있지, 연예기획사 있고 이마리 있는 게 아니다. 서태석은 이마리를 지키기 위해, 엄밀히 말하면 연예기획사를 지키기 위해 이마리를 보호한다. 아니, 가둔다. 그녀의 사생활은 관리 대상이며 그녀의 이미지는 가능한 한 조작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마네킹이 아닌 이상에야 욕망이 없을 리 없다. 대필 작가 김철수와 사랑에 빠지는 이마리도 그것이 때론 두렵다.
하지만 좋은 걸 어떡해.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고, 그러니 손잡고 싶고, 뽀뽀도 해보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어떡해.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상황. 그녀가 사랑을 얻기 위해선 잃어야 할 것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많다. 그보다도 그녀를 통해 명예를 유지하던 주변인들의 반발이 거세다.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서태석은 분노한다. 성질이 뻗쳐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어린애 달래듯 회유도 해보지만 이마리는 점점 더 속에 갇힌 자신을 드러낸다. 애써서 스캔들을 막고, 대필 작가 비리도 막았건만 이마리의 한마디에 죄다 공염불이 된다. 배신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당신이 덜 먹고, 덜 입는 대신 더 먹이고, 더 입혀서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기껏 대학 보내놓고 장가 보내주니 정작 어미를 박대하더라는 하소연처럼 억울하다. 폭로전이 이어진다. 에라, 너 죽고 나 죽자. 비밀이 폭로된다. 해치지 않아, 라던 약속은 믿어달라는 어느 오빠의 그 날밤 언약처럼 부질없다. 결국 모든 것이 부서진다. 서태석의 내면에 담긴 일말의 진심조차도 완전히 망가진다. 상품성은 바닥을 친다. 더 이상 영업이 어렵다.
<스타의 연인>은 스타의 이미지에 갇힌 개인의 존재를 소명하려 한다. <온에어>의 맥락이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두 드라마는 연예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반짝이는 이미지 뒤편의 그림자를 조명한다. 암울하고 시니컬하다. 아름답고 반짝이던 이미지의 뒤편은 아수라장이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가시밭길을 걷는다. 톱스타의 지위는 무겁지만 버릴 수 없는 왕관이다. 촘촘히 박힌 다이아몬드는 무겁지만 하나같이 버릴 수 없다. 그 구속된 이미지로 살아가는 것은 이미 운명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무겁게 짊어진 명예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자신이 볼 수 없는 명예보다 자신이 볼 수 있는 삶을 찾는 게 중요하다. 이마리는 은퇴를 결심한다. 왕관을 내려놓겠다.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겠노라 천명한다. 2001년, 심은하는 은퇴를 발표하고 사라졌다. 더 이상 연기자 심은하를 볼 수 없었다. 종종 심은하를 향한 말들이 구애처럼 이어졌지만 그래도 그녀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아간다는 심은하의 근황이 종종 들려왔다. 은퇴를 선언해도 톱스타의 잔상은 길게 남았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있었느냐에서 시작된다. 무대에서 볼 수 없는 과거의 톱스타가 오늘의 이슈가 된다. 오늘의 톱스타는 말할 것도 없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루머들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치다 거대한 숲을 이룬다. 연예인에 대한 소문은 심심찮게 떠돌다 때론 실화처럼 통용되곤 한다. 누구와 누가 사귄다더라, 결혼했다던데, 속도 위반해서 그렇대. 지네처럼 다리가 많아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소문의 머리를 확인할 길이 없다. 다들 듣기만 했을 뿐, 본적도 없고, 직접 들은 바도 없다. 대체 어디로부터 흘러나온 사연인지 알 길이 없다. 며느리도 모르는 사연에 만고의 진리처럼 묵은 말이 달라붙는다.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 날리 없다. 아무래도 그렇지? 다들 맞장구 친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람들의 입과 귀를 바삐 기어 다닌다. 그러다 개중 하나라도 진짜가 되면 여지없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역시 소문은 괜히 나는 게 아니지. 모든 소문에 신빙성이 생긴다.
누구나 한번쯤 스타를 꿈꾼다. 그 반짝이는 삶을 동경한다. 관심이 집중되는 그 자리에 질시도 함께 뒤섞여 뒹군다. 스타가 되고 싶으면 연락해! <개그콘서트>의 한민관은 명함을 내던지며 소리친다. 재능은 천부적인 것이라지만 오늘날 스타는 후천적으로 기획된다. 포장지로 감추고 다듬어서 시장에 내놓은 뒤 끊임없이 관리한다. 피부를 관리하듯 사생활까지 관리한다. 지난 해 11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연예 기획사들의 불공정 계약에 대한 시정명령을 내렸다. 과도하게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지적 사항도 발견됐다. 전지현의 휴대폰 복제는 지난 관행의 진화다.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관성적으로 이어진 관례다. 화려한 은막 너머로 감춰진 폭력의 노출이다.
김태희가 결혼을 했다고 한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전화 연결된 비가 이효리와 염문을 뿌렸다고 한다. 그 밖에도 누구는 임신을 했었고, 누구는 연예인 이전에 업소를 들락거렸다느니, 이래저래 떠도는 말이 참 많다. 직접 본 사람은 없고, 직접 들은 사람은 도통 나오지 않는데 소문들은 기이하게 퍼지고 또 나아간다. 최진실이 자살한 뒤, 그 원흉이라는 증권사 여직원이 구속됐지만 그녀 역시 그저 누군가에게 들은 바를 옮겨 적었을 뿐이라 실토했다. 거대한 밑그림의 일부가 적발되고 돌을 던져보지만 풍토는 변하지 않는다. 최진실은 악플로 죽었다고 했다. 이 말에도 실체는 없다. 그저 살아서 입을 여는 자들의 또 다른 소문에 불과하다. 인터넷 모욕죄를 신설하려는 정부 여당을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말 속에도 진실은 없다. 그 누구도 진실을 모른다. 그저 돌고 도는 말 속에서 끊임없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스타들에게 진짜 삶이란 요원하다.
<스타의 연인>은 스타가 사는 세상을 빌미로 만들어낸 또 다른 말이다. 그 말 속엔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있다. 물론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길은 없다. 그저 그렇게 끊임없이 돌고 도는 말을 누군가는 주워다 팔아먹고 누군가는 그 말로 시간을 때운다. 그리고 스타는 그 말 위에서 살아간다. 흉하고 보기 싫은 말 가운데서 스스로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살아간다. 국민여동생도, 국민배우도, 빛을 발하는 만큼 능욕을 감내한다. 말과 말 사이에서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서 스스로를 감추고 지우며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사생활조차도 계산대에 오른다는 걸 아는 순간 진정 스스로를 지워야 한다. 가진 게 많아서 부러울 것 같은 삶에 빈곤한 일상이 드리운다. 그 빈곤한 일상을 구원하는 길은 그것조차 거짓으로 만드는 일이다. 설사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소문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자신조차도 거짓말처럼 숨겨서 온전히 살아간다. 그저 말 사이에 숨어서 스스로를 보존할 뿐이다. 그렇게 완전한 거짓의 보호색을 띄고 스타는 살아간다. 아니, 살아가야 한다.
오스카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 인가. 그 예상답안지가 공개됐다. 미국 현지시각으로 지난 22일 오전 5시 30분에 LA 아카데미 사무엘 골드윈 극장에서 미국 영화예술아카데미의 주최로 제81회 아카데미 수상후보작 발표가 이뤄졌다. 골든글로브에서 무관을 기록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총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저력을 발휘한 가운데, 최근 골든글로브 4관왕의 주인공 <슬럼독 밀리어네어> 역시 10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그 밖에 <밀크>가 8개 부문에, <프로스트VS 닉슨>과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가 5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며 수상 가능성을 점쳤다. 2008년 최고 흥행작이자 화제작이었던 <다크 나이트>도 8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지만 히스 레저의 남우조연상을 제외한 주요 부문에선 외면당했다. 한편, <월-E>는 장편애니메이션 부분 외에도 각본상을 포함한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귀추가 주목된다.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오늘 2월 21일 LA 코닥극장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후보작 The 81st Academy Awards Nominees
작품상 Best motion picture of the year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밀크 Milk>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남우주연상 Performance by an actor in a leading role
<비지터 The Visitor> 리처드 젠킨스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프랭크 란젤라
<밀크 Milk> 숀 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브래드 피트
<레슬러 The Wrestler> 미키 루크
남우조연상 Performance by an actor in a supporting role
<밀크 Milk> 조쉬 브롤린
<트로픽 썬더 Tropic Thunder>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다우트 Doubt>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히스 레저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마이클 셰넌
여우주연상 Performance by an actress in a leading role
<레이첼 시집가다 Rachel Getting Married> 앤 헤서웨이
<체인질링 Changeling> 안젤리나 졸리
<프로즌 리버 Frozen River> 멜리사 레오
<다우트 Doubt> 메릴 스트립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여우조연상 Performance by an actress in a supporting role
<다우트 Doubt> 에이미 아담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페넬로페 크루즈
<다우트 Doubt> 비올라 다비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타라지 P. 헨슨
<레슬러 The Wrestler> 마리사 토메이
감독상 Achievement in directing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데이빗 핀처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론 하워드
<밀크 Milk> 구스 반 산트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스티븐 달트리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각색상 Adapted screenplay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에릭 로쓰, 로빈 스위코드
<다우트 Doubt> Written by 존 패트릭 쉐인리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피터 모건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데이비드 헤어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몬 뷰포이
각본상 Original screenplay
<프로즌 리버 Frozen River> 커트니 헌트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마이크 리
<킬러들의 도시 In Bruges> 마틴 맥도나
<밀크 Milk>더스틴 랜스 블랙
<월-E WALL-E> 앤드류 스탠튼, 짐 러든, 피트 닥터
편집상 Achievement in film editing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커크 박스터, 앵거스 월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리 스미스
<프로스트 VS 닉슨 Frost/Nixon> 마이크 힐, 댄 할리
<밀크 Milk> 엘리엇 그레이엄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크리스 디킨스
촬영상 Achievement in cinematography
<체인질링 Changeling> 톰 스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클라우디아 미란다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월리 피스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크리스 멘지스, 로저 디킨스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앤쏘니 도드 맨틀
미술감독상 Achievement in art direction
<체인질링 Changeling> 제임스 무라카미, 개리 페티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널드 그레이엄 버트, 빅터 J. 졸포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나단 크라울리, 피터 란도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마이클 칼린, 레베카 앨러웨이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크리스티 지아, 데브라 쉐트
의상상 Achievement in costume design
<오스트레일리아 Australia> 캐서린 마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재클린 웨스트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마이클 오코너
<밀크 Milk> 대니 글리커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 알버트 울스키
분장상 Achievement in makeup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그렉 캐놈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존 카글리오네 주니어, 코너 오 설리반
<헬보이2: 골든 아미 Hellboy II: The Golden Army> 마이크 엘리잘드, 톰 플라우츠
음악상 Achievement in music written for motion pictures (Original score)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알렉산드레 데스플롯
<디파이언스 Defiance> 제임스 뉴튼 하워드
<밀크 Milk> 대니 엘프만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월-E WALL-E> 토마스 뉴튼
주제가상 Achievement in music written for motion pictures (Original song)
“Down to Earth” from <월-E WALL-E> 피터 가브리엘, 토마스 뉴튼
“Jai Ho” from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굴자
“O Saya” from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마야 아룰프라가삼
음향상 Achievement in sound editing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리차드 킹
<아이언맨 Iron Man> 프랭크 에울너, 크리스토퍼 바예스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톰 사이어
<월-E WALL-E> 벤 버트, 매튜 우드
<원티드 Wanted> 와일리 스테이트맨
음향효과상 Achievement in sound mixing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데이비드 파커, 마이클 세마닉, 렌 클라이스, 마크 아인가르텐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로라 허쉬버그, 개리 리조, 에드 노빅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이안 타프, 리차드 프리케, 레슐 푸커티
<월- E WALL-E> 톰 마이어스, 마이클 세마닉, 벤 버트
<원티드 Wanted> 크리스 젠킨스, 프랭크 A. 몬타노
시각효과상 Achievement in visual effects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에릭 바바, 스티브 프리그, 버트 달튼, 크레이그 바론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닉 데이비스, 크리스 코발드, 팀 웨버, 폴 프랭클린
<아이언맨 Iron Man> 존 넬슨, 벤 쇼, 댄 슈딕, 쉐인 마한
장편애니메이션 상 Best animated feature film of the year
<볼트 Bolt>
<쿵푸 팬더 Kung Fu Panda>
<월-E WALL-E>
장편다큐멘터리 상 Best documentary feature
<네라크훈, 베트라얄 Nerakhoon, The Betrayal>
<세상 끝에서의 조우 Encounters at the End of the World>
<더 가든 The Garden>
<맨 온 와이어 Man on Wire>
<트러블 더 워터 Trouble the Water>
단편다큐멘터리 상 Best documentary short subject
<넴엔의 양심 The Conscience of Nhem En>
<파이널 인치 The Final Inch>
<스마일 핑키 Smile Pinki>
<306호 발코니에서 온 증인 The Witness from the Balcony of Room 306>
단편애니메이션 작품상 Best animated short film
<작은 육면체의 집 La Maison en Petits Cubes>
<러브스토리 Ubornaya istoriya - lyubovnaya istoriya>
<옥타포디 Oktapodi>
<프레스토 Presto>
<디스 웨이 업 This Way Up>
단편영화 작품상 Best live action short film
<줄 위에서 Auf der Strecke>
<마농 온 더 아스팔트 Manon on the Asphalt>
<뉴 보이 New Boy (Network Ireland Television)>
<더 피그 The Pig>
<토이랜드 Spielzeugland>
외국어영화상 Best foreign language film of the year
<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 Der Baader Meinhof Komplex> 독일
<더 클래스 Entre les murs> 프랑스
<굿, 바이 Okuribito> 일본
<복수 Revanche> 오스트리아
<바시르와 왈츠를 Vals Im Bashir> 이스라엘
(최근 <원스>에서 연인으로 등장한 그와 그녀,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의 새로운 밴드 'Swell Season'이 내한 공연을 펼쳤고, 이에 맞춰 재개봉된 <원스>의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들은 실제 연인이며 뮤지션이기도 하죠. 이 글은 2007년 10월 1일에 작성된 기사입니다. 그 당시 추석 연휴 동안 <원스>를 2번 연일 관람하고 나서 써내려간 글을 포스팅합니다. 그저 당신이 이 영화를 꼭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전 정말 좋았거든요. 진심으로 말이죠. 지금도 매우 좋아합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고 애잔해요. 그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이 글을 포스팅합니다. 조금 길어요. 염치없게도 말이죠.)
추석 연휴 동안 <원스>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습니다. 한국영화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추석 극장가의 풍경 속에서 작게나마 제 자리를 마련하고 있던 <원스>는 이질적인 한 점의 여백 같아 보이더군요. 일단 제가 수많은 한국 영화들보다 <원스>를 택한 건 그 영화들을 이미 언론시사를 통해 봐버린 탓이기도 했고, 더욱 솔직해지자면 <원스>의 시사 일정을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한가했던 추석 연휴는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원스>를 보기 일주일 전쯤에 이미 OST를 구매해서 듣고 있던 저로서는 이 영화를 보지 않고서야 버틸 재간이 없었죠. 결국 전 <원스>에 대한 갈증은 두 번에 걸친 연일 관람으로 해갈하게 됐습니다.
위에서 밝힌 바처럼 애초에 영화 관람의 의도는 이 글을 불러내고자 하는 기획적 움직임과는 무관했습니다. 단지 극장을 찾은 건 <원스>를 보고 싶다는 순수한 의욕에 불과했습니다. 이 글은 그 순수했던 욕망에 덧씌워진 어떤 불순한 의도를 위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그 불순한 의도는 글의 말미에 밝히겠습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고백하자면 <원스>의 언론시사회를 불가피하게 놓친 덕분에(!) 이 영화를 일반 상영관에서 접하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씩 언론 시사회를 통해서 접했던 영화들에 대해 리뷰란 형식으로 글을 쓰고 별점을 매기는 과정을 <원스>에 덧씌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매우 뿌듯했기 때문이죠. 가끔씩은 그 책무가 저에겐 과분한 짐처럼 얹혀지는 까닭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고뇌에서 나왔을 창작물에 별점을 매기는 것에 대한 어떤 중압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박한 평가가 됐던, 후한 평가가 됐던 마찬가지로 말이죠.
처음 <원스>를 보기 위해 찾은 곳은 강남 코엑스의 메가박스였습니다. 극장에 가기 위해 올라탄 지하철의 한산함은 명절날 도시의 풍경 중의 하나로 낯설면서도 멋쩍지는 않았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오면 발견할 수 있는 이 도시의 풍경이자 이 당시에만 허락된 여유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코엑스엔 어김없이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메가박스에서도 티켓을 끊기 위한 늘어선 줄도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단 전반적인 인파의 간격 차가 더욱 벌어졌음이 감지될만큼 코엑스에도 명절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듯 하더군요. 저는 코엑스 메가박스 10관에서 23일 2시 35분에 영화를 봤습니다. 상영 시간 10분 전, 상영관에 들어섰을 때 확연히 구별되는 공석의 자태는 이 영화가 확실히 소외될 것이란 예측에 맞아떨어지는 품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삼삼오오 상영관을 채우더니 종래엔 스크린에 가까운 앞줄 몇 곳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채워지더군요. <원스>에 대한 기대이상의 수요가 약간 놀랍기도 했고, <원스>가 어떤 특별한 수요를 위해서 존재하는 영화만은 아닐 수 있단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이는 물론 영화적 자질에 대한 우려가 아닌 그 자질을 수용하고자 하는 관객의 취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였습니다. 한편으론 그런 취향을 존중한 멀티플렉스의 어떤 결정(?)이 먹혔다는 사실에서도 다행스러웠습니다. 상업적 마인드를 우선시하는 멀티플렉스 체인에서 큰 주목을 끌지 못하는 영화를 선택한 건 일종의 모험일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원스>가 만들어 낸 상영관의 진풍경은 후에도 어떤 모험을 이끌어 낼 좋은 선례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두 번째로 <원스>를 보기 위해 찾은 곳은 명동CQN(씨네콰논)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추석 연휴 첫날이었던 24일 2시 50분 영화를 보기 위해 찾은 명동은 상당히 북적거리더군요. 다소 한산한 거리의 분위기를 기대했던 필자에겐 아쉬운 풍경이었지만 그것이 이 거리가 쉽게 보여줄 수 없는 이질적인 표정일 것이라 생각하곤 부질없는 기대감 따위는 접어둔 채 사람들을 피해가며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명동CQN 역시 멀티플렉스의 형태를 갖춘 극장이지만 전날 찾았던 코엑스 메가박스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공간임은 확실했습니다. 상영관의 객석 수와 스크린의 너비를 비교하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메가박스의 광활한 풍경과 달리 여유롭게 자신의 영화를 기다리는 몇몇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실내의 모습은 이미 두 극장의 차이를 증명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날과 마찬가지인 건 <원스>를 보기 위해 들어선 3관을 가득 채운 객석의 모습이었습니다. 소수의 수요를 만족시킬만한 특별한 영화들을 자주 상영하곤 하는 명동CQN의 특성상 이런 사실이 크게 특별할 이유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원스>란 영화에 대한 수요층이 기대 이상이란 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인 코엑스 메가박스와, 그에 비하면 중소 규모라 할 수 있는 명동CQN에서 <원스>의 상영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은 묘했습니다. 이는 극장 규모에 관계없이 <원스>란 영화가 어떤 수요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 즉 만족할만한 관객 점유율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반가운 일이었죠. 이는 현재 멀티플렉스 극장들에 채워진 어떤 영화들을 통해선 경험할 수 없는 <원스>만의 순수한 외적 체험처럼 느껴졌으니까요. 특히나 작은 규모의 영화들이 외면받는 요즘같은 현실에선 고무적인 사실이며 한편으로 약간의 과장을 섞어 넣자면 다양한 영화의 수요를 원하는 일부 관객층의 열망을 극적으로 대변하는 사례처럼 보였습니다.
<원스>는 장르적으로 단순히 명명하면 뮤지컬(musical) 영화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대가, 혹은 우리가 아는 뮤지컬 영화와는 거리가 있는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들은 음악을 위한 가상적인 공간을 마련하며 이를 장르적 특성으로 규정화하여 관객의 암묵적인 동의를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뮤지컬 영화는 고유의 영화적 언약을 통해 관객과의 순수한 장르적 소통을 이루려는 의지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역으로 관객의 동의 이전에 상황을 먼저 전시하고 그런 이색적인 상황을 관객에게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셈이기도 하죠.
뮤지컬 영화에 대한 불결한 반감을 느낀다면 이런 까닭일 것입니다. 뮤지컬 영화들이 단순히 ‘뮤직’의 소재적 기능보단 ‘뮤지컬’이란 효과적 기능에 치중한 나머지 장르가 태생적으로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한계가 발생하는 것이죠. 뮤지컬 영화의 영상은 음악을 위한 공간 마련을 축조하는 것으로 소비돼야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론 음악의 영상화를 위해 무모한 판타지를 연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인식되기도 합니다. 만약 뮤지컬 영화를 싫어한다고 말한다면 이런 강박적인 장르적 연출로 인해 마련된 낯선 영화적 공간에 손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반발심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이 <원스>를 단순히 뮤지컬 영화라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원스> 속의 음악들은 영화적 공간을 단지 음악을 위해 축조한 기능성의 역할로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이는 뮤지컬 영화들의 대다수가 취하는 어떤 강박 관념, 즉 뮤지컬이란 무대 위의 장르를 스크린 위에 재현하는 것이 장르적 의무라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기 때문이며, 혹은 애초에 <원스>가 그럴 의무가 없는 공간에서 연출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원스>의 음악들은 어떤 특별한 공간을 마련할 의무감 따위에서 벗어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에서 화음을 넣고 멜로디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원스>의 화음을 노래와 연주의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남녀가 영화 밖의 현실에서도 음악에 기반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물들인 덕분이기도 하지만 <원스>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화음이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을 모태로 한 덕분이기도 합니다.
처음 카메라를 통해 <원스>가 시작되는 지점은 더블린의 길거리이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사건을 형성하고 감수성이 본격적으로 제 색깔을 물들이는 지점, 즉 마지막까지 제 이름을 드러내지 않기에 그와 그녀라고 명명할 수 밖에 없는 남녀의 만남이 이뤄지는 공간 역시 그 길거리입니다. 결국 <원스>의 음악은 우리가 흔히 길거리에서 지나치며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단지 그녀가 어둑해진 길거리를 지날 때, 그의 노래가 들렸고 그 멜로디가 그녀를 잡아 끌었기 때문에 <원스>라는 이야기가 발생한 것일 뿐입니다. 이 허구적인 만남은 멜로디를 통해 진짜처럼 일상으로 스며들었고 그 진짜 같은 만남은 악보에 음표를 새겨 넣듯 영화에 이야기를 그려 넣어 갑니다. 그 안에서 음악은 어떤 배경으로서 존재하기도 하고 그와 그녀의 일상에서 존재하는 삶의 구성원으로서 자리잡기도 합니다. 그와 그녀의 목소리로, 그의 기타음과 그녀의 피아노음으로, 종래엔 그들의 삶에 존재하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계시로 거듭나며 <원스>의 음악 영화적 가치는 소박하게 빛을 발합니다.
<원스>가 뮤지컬 영화라는 인식을 각인시키는 건 <원스>의 음악들이 하나같이 뇌리에 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원스>의 음악들은 영상의 정서적 여백을 채우는 음향의 기능성, 즉 영화의 정서를 완성시키는 장치적 역할에도 충실하죠. 하지만 중요한 건 너무나도 평범하게 영화 속에서 빈 자리를 채우는 <원스>의 영화적 음표들이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영상 속에 오선지 같은 공간을 창작하는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난다는 것, 즉 기존의 뮤지컬 영화의 중력에서 해방된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뮤지컬 영화에 내장된 음악들이 그것에 어울리게 구성된 개별적인 영상들만을 부분적으로 각인시키며 작품의 외부에서 개별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과 달리 <원스>의 음악들은 영화의 파노라마를 재생시키며 전체적인 작품의 테두리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영화의 요소로서 대변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원스>의 음악들이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적인 순기능의 생명력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영화의 장면들 위에 얹혀졌을 땐 전체적인 정서의 흐름에 얹혀지는 상황 연출의 수단으로 활용되며 이는 전체적인 영화 안에서 떼어낼 수 없는 구성원의 일부로 뿌리를 내리는 덕분입니다. <원스>의 음악들은 뮤지컬 영화에서 장르적으로 소모되고 독립적으로 소비되는 부품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영화를 재생시키는 정서적 뼈대인 셈이죠. 그래서 <원스>는 뮤지컬 영화이면서도 뮤지컬 영화의 범주에서 은밀히 벗어납니다. 어찌보면 이는 박제처럼 굳어진 장르의 변형된 문법이 본질적인 장르의 정통성을 이색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박제처럼 굳어진 뮤지컬 영화의 변형된 문법이란 음악을 통한 장면의 재구성이 정형화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단지 기교적인 측면에 불과한데 근래의 뮤지컬 영화들은 이것을 장르의 책무처럼 떠맡고 있습니다. 음악에 걸맞는 영상에 강박증을 느끼는 것이죠. 물론 이는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만이 지닐 수 있는 특화된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적 완성도가 좌우하는 법이죠. <원스>의 장점은 그런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원스>는 음악을 위한 무대를 필요로 하는 영화가 아니라 음악이 있는 장소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음악 영화니까요. 처음 영화는 그의 노래로 시작됩니다. 이야기를 보여주기 전에 음악으로 관객을 무장해제시키고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혀나가죠. 흥겹거나 절절한 멜로디에 귀를 쫑긋 세우다보니 어느새 화면에 빠져들어가더란 식입니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가 형성되고 동시에 음악과 함께 이야기는 걸어나가죠. 그리고 영화 속 남녀는 노래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어색한 영화적 리얼리즘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고서도 각자의 노래와 서로의 화음을 통해 교감을 나눕니다. 이는 음악이라는 예술적 장르가 인간과 교감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스>는 이렇게 '뮤지컬' 영화가 아닌 뮤지컬 영화의 순수한 본질에 접근한 것이죠.
강박으로부터의 해방감은 단지 창작자의 짐을 덜어내는 성과에 국한된 것만이 아닙니다. 이는 관객이 짊어져야 하는 어떤 부담감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죠. 암묵적으로 관객에게 수용되어야 할 뮤지컬 영화에 적합한 어떤 연출들에 대한 어떤 거부감, 즉 배우의 노래가 대화로서 활용되고 뮤지컬의 본색이 드러나면 조명이 밝혀지고 군무가 완성되며 스크린이 무대로 치환된다는 뮤지컬 영화적인 허상이 강요되지 않아도 되는 덕분입니다. 이는 때때로 그런 방식을 통해 재생되는 영화 내의 장르적 공간의 전시가 단순히 시각과 청각적인 일시적 효과 이상의 성과를 넘지 못한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영상으로 재현된 감성이 단순히 음악적인 묘미를 구축하기 위한 구조물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산물임을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원스>의 자연스러움은 관객에게도 뮤지컬 영화로서의 감상에 대한 어떤 부담감도 짊어지지 않게 합니다. 덕분에 음악에 걸맞은 공간을 마련하는 기존의 뮤지컬 영화와 달리 <원스>는 일반적인 영화적 감상법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들은 음악을 위해 플롯이나 내러티브의 일정 부분을 인위적으로 할애하지만 <원스>는 단지 상황에 걸맞은 음악이 들리거나 직접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이는 결국 <원스>의 음악을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게 하며 음악과 영화가 함께 공존하는 자연스러운 뮤지컬 영화의 화음을 완성시키며 이를 음미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부분적인 뮤지컬적 연출에 현혹되어 전체적인 영화 흐름에 집중하기 힘든 뮤지컬 영화들의 산만함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사실이죠.
어쩌면 이는 <원스>라는 영화가 태어난 지정학적인 정서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소박한 영화적 풍경은 너무나도 여유롭습니다. 특히나 이런 배경에서 형성되는 정적인 감수성은 국내에서 이 영화를 소비할 도시의 관객들-주로 서울이겠지만-에겐 상당히 이국적인 인상을 줄 것입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애완견처럼 진공 청소기를 끌고 다니는 여성의 모습은 너무나도 귀엽고, 마치 7~80년대 대한민국의 시골을 연상시키듯 TV를 보기 위해 여성밖에 없는 이웃집을 매일같이 방문한다는 사내들의 이야기는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인간적인 유대감을 발견하게 하니까요. 게다가 그들은 일상에서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현명한 수용자의 삶을 누리기도 합니다. 각박한 도시적 감수성에서 짓눌려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신뢰가 살아있고 예술적 향유를 즐길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원스>의 음악들이 들려주는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빠뜨릴 수 없겠군요. 어두워진 광장에서 그가 열창한 ‘Say it to me now’는 그녀와의 10센트 짜리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은 <원스>의 감동으로 귀결됩니다. 그녀가 종종 피아노를 치기 위해 들른다는 악기상에서 그와 그녀가 이룬 첫 교감, 'Falling slowly'는 단순히 청각적으로 감지되는 아름다운 선율 이상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영화의 중간 중간마다 불려지거나 삽입되는 음악들은 각각 그 순간의 정서를 명료하면서도 절실하게 대변합니다. 남자가 자신의 옛 사랑에 대한 기억을 버스 뒤 칸에서 장난스럽게 기타선율에 얹혀서 여자에게 노래하는 ‘Broken hearted Hoover fixer sucker guy’의 발랄함도 즐거웠지만, 반대로 옛 연인의 영상을 보며 상기된 안색 속에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작사에 열중하는 남자의 ‘All the way down’은 깊게 침전한 그만의 슬픔을 막연히 짊어지게 합니다. 또한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사연이 담긴 곡을 그에게 들려주는 ‘The hill’을 통해 흘러 넘친 아픔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느낌은 눈물로 확인되는 안타까운 슬픔 너머로 미약한 심적 통증의 체감마저 선사합니다. 또한 늦은 밤, 그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는 그녀가 CDP의 배터리를 갈아 넣기 위해 집을 나선 후 돌아오던 중, 정적이 깃든 길 위의 어둠 속에서 들려지는 ‘If you want me’의 투명한 감수성은 <원스>에 담긴 서정성의 극치를 느끼게 합니다. 또한 그의 데모CD를 녹음하기 위해 모인 밴드의 연주를 그의 방과, 스튜디오 안에서 각각 들려주던 ‘Trying to pull myself away’와 ‘When your mind’s made up’과 같은 넘버의 잔상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원스>에서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장면 중 하나는 그녀가 종종 피아노를 치기 위해 들른다는 악기상의 주인이 자신의 귀에 전달된 남녀의 화음에 빙긋이 미소 짓는 순간입니다. 그 장면은 <원스>가 지닌 따뜻한 체온이 순수한 감동으로 전해지는 아름다운 단면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원스>는 음악이, 영화가, 혹은 그 모든 것을 둘러싼 예술이 인간을 감화시키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그것이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순간을 관객에게 목격하게 만들며 그 시각적 경험이 이뤄지고 있는 찰나의 순간을 순수한 감동적 체험으로 변모시킵니다. DV카메라가 잡아낸 열악한 화면으로 채워진 <원스>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근사하게 보이는 건 이런 사소한 기적들을 영화의 중간중간에 매복시킨 덕분일지도 모르죠. 열악한 데모 테이프를 틀어놓으며 남자의 음악을 담보로 대출을 신청하는 그녀의 맹랑한 제안 앞에서 은행의 대출 관리자는 대뜸 쇼를 믿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곤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과감히 대출을 승인할 때, 영화적 허구는 진실한 감동의 낯빛을 띠게 됩니다. 또한 남자의 지인이 주최한 조촐한 파티에 초대된 하객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저마다의 노래를 부를 때, 풋내기에 불과할 것 같던 밴드의 녹음을 불성실한 태도로 바라보던 프로듀서가 그들의 음악을 통해 탄복한 표정을 짓기 시작할 때, 아들의 데모CD를 듣고 감탄하는 그의 아버지가 지어낸 만족스러운 웃음을 대면할 때, <원스>의 감동은 단순히 스크린에서 빚어지는 일회적인 기획적 허구에 머물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서 객석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 관객을 품에 안는 감동의 진귀한 체험으로 승화됩니다. 그 장면들을 통해 예술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스>는 음악과 영화가 완벽하게 빚어낸 절묘한 화음의 결정체로서, 예술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감동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소박한 삶의 방식 안에서 가장 순수한 목적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그들의 현실은 인간의 창조력이 가장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며 그런 순간들로 이뤄진 <원스>의 시공간은 마치 영화적 연출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 아닌 자연스러운 관찰을 통해 얻어진 순수한 본질의 체득과도 같아 보입니다. 예술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예술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자본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로 다다를 때, 예술의 순수함은 이미 퇴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순간을 이기지 못하는 웃음과 깊게 침전할 수 없는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쓸려나가는 요즘의 극장가의 정서가 채우지 못한 넓은 여백을 <원스>의 투명한 가치는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프랑스 중세의 인상파 화가로 명성을 떨친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처럼 ‘세상에는 즐겁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으니 예술이라도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독한 허영심으로 물들고 진심이 결여된 화려함을 추구할 때 순결한 의미에서 예술적 미는 퇴색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예술이 존재하는 건 고된 현실에서 찌든 인간의 황폐한 영혼을 정화시키는 역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술적 미의 진정성은 인간을 압도하는 전율보단 인간에게 깃드는 소박함일 것입니다. <원스>는 인간에게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단명하면서도 차마 형용할 수 없게 보여줍니다. 그건 어떤 순간에 머무는 효과가 아니라 영원의 지속으로 유지되는 기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글의 말미에 다다랐으니 필자의 불순한 의도를 밝히자면, 단순히 이 글의 말미에서 이 문장을 보게 될 그 누군가가 될 그대가 그저 <원스>를 보러 가겠단 결심을 세우길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혹은 어떤 막연한 관심이나마 거머쥐었기를 실로 갈망합니다. <원스>의 투명함은 홀로 간직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워서 그 빛을 나눌 누군가를 절실히 떠올리게 하는 까닭입니다. 예술이 지닌 보편적 미덕은 범접할 수 없는 황홀한 체험의 산물이기보단 손을 맞잡고 싶은 소박한 정서적 동참이 아닐까요?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도 그 순수한 예술적 에너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스>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따스한 추억을 나누고 싶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이 글로 인해 당신의 마음이 정해졌다면(when your mind’s made up) 더 바랄 것이 없겠고요. 또한 <원스>를 관람한 후, OST를 통해 다시 영화를 거슬러가는 것 또한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분명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러운 그녀(And love her so, I wouldn’t trade her for gold)만큼이나 <원스>는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순간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은 음악과 함께 할 때 더욱 투명하게 빛나니까요. 전 예술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는 바로 그런 소박한 감동의 결정체를 통한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원스>를 통해 얻은 그 행복을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의지가 이 부끄러운 문장을 감히 그대에게 내보일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만큼이나 <원스>의 노래들은 잊을 수 없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을 지속하는 방법은 그 음악을 다시 듣는 것이며 이는 동시에 영화를 재생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OST에 수록된 14곡은 다시 <원스>로 돌아가는 출구이자 영화 속의 기억을 되살리는 통로인 셈이다. 그 14곡에 담긴 그와 그녀의 사연, 그리고 <원스>가 선사한 감동의 시공간을 재생시켜보자. 물론 OST를 소장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1. Falling slowly_ 그녀가 피아노를 연습하기 위해 종종 들른다는 악기상을 함께 찾은 그가 그녀의 권유에 의해 합주하게 되는 그의 자작곡. 그의 보컬과 기타, 그녀의 코러스와 피아노 선율이 더해져 아름다운 화음을 형성한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건반을 누르는 그녀의 곁눈질에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예감되기도 한다. 음악 영화로서 <원스>의 본질을 확실히 일깨워주는 장면이자 OST의 킬링 트랙으로 지정해도 손색없는 산뜻한 넘버.
2. If you want me_ 그가 작곡한 음에 자신의 작사를 붙이던 그녀는 CDP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기 위해 늦은 밤 길을 나선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오던 중 재생시킨 CD에서 플레이 된 음원에 자신의 가사를 붙여 그녀가 직접 노래하는 곡. 그녀의 슬픔이 묻어나는 가사가 쓸쓸한 밤거리의 풍경과 맞물리며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더불어 자신의 감정에 대한 그녀의 내면적인 혼란이 살짝 드러난다. 재미있는 건, 롤러스케이트를 탄 아이들을 비롯해서 이 장면에서 발견되는 주변의 인물들은 아마도 영화에서 고용된 엑스트라가 아닌 일반인처럼 카메라를 의식한다. 저예산 영화의 열악함이 되려 영화의 신선함을 더해주는 효과를 거둔다. 개인적으로 <원스>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3. Broken hearted Hoover fixer sucker guy_ 그녀의 진공청소기를 수리해주기 위해 그가 자신의 귀갓길에 동행한 그녀에게 함께 동승한 버스 뒷 칸에서 들려주는 노래. 그의 옛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장난스러운 기타 리프로 발랄하게 연주된다. OST는 영화 중의 웃음소리를 거르지 않고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화 중엔 과격(?)해진 그의 노래에 불편한 심기를 장난스럽게 전달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OST에 이 부분은 수록되지 않았다.
4. When your mind’s made up_ 그의 데모CD를 녹음하기 위해 결성된 밴드가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녹음하는 곡. 밴드로서의 합주 형태를 가장 진지하게 보여주는 장면으로 녹음 후에 카테스트를 위한 드라이브 장면 중에서도 배경음으로 들려지며 엔딩씬의 배경음으로 활용된다. 다소 안일한 자세로 지켜보던 프로듀서가 이 한 곡으로 진지한 자세로 돌변하기도 한다. 매끄러운 피아노 선율이 쟁글거리는 기타의 리프를 타고 흐르듯 어울리며 차근차근 절정의 상태로 오르는 남자의 보컬이 절절함을 느끼게 하는 서정적인 곡. 영화 상에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곡이다.
5. Lies_ 노트북을 통해 옛 연인과의 추억을 담은 동영상을 보며 작사에 열중하는 그의 장면에서 깔리는 곡. 그의 애틋한 그리움과 슬픔이 담담한 표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전해진다. 참고로 영상 속의 여자는 <원스>의 메가폰을 잡은 존 카니 감독의 오랜 연인이라 한다.
6. Gold_ 그가 그녀를 데려간 지인들의 파티 중, 그가 지인들과 함께 연주하는 곡.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남녀 주인공 외의 타인이 보컬을 맡은 곡이기도 하다. 각자 돌아가며 한 소절이든, 혹은 악기를 동원한 합주든 저마다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생활 속에서 음악을 애호하는 아일랜드인들의 소박한 정서가 소박하게 보여진다. 또한 이 곡이 등장하기 전에 어느 중년 여성과 중년 남성의 짧막한 노래가 영화상에서 들려지는데 그 중년 여성은 '그'를 연기한 글렌 한사드(Glen Hansard)의 친어머니라고 한다. 아쉽게도 그녀의 노래는 영화상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7. The hill_ 늦은 새벽까지 데모CD를 녹음하던 중, 마지막 녹음을 앞둔 10분의 휴식 시간 중, 녹음실을 나온 그녀가 우연히 옆방에서 찾은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녀의 연주음을 듣고 찾아온 그의 권유로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들려주는 자작곡. 곁에 없는 남편을 향한 진실된 사랑을 담고 있는 가사가 곁에 있는 그와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예감하게 한다.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그녀의 음성과 피아노 선율을 통해 내면에 깊게 침전한 그녀의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넘버. 영화에서는 절제할 수 없는 감정에 노래를 중단한 그녀로 인해 중간에 완곡을 들려주지 못하지만 OST에는 완곡이 수록됐다.
8. Fallen from the sky_ 첫 곡 녹음 후, 녹음실의 풍경을 편집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배경음으로 들려지는 곡. 장난스러우면서도 발랄한 공간의 여유와 즐거움이 한껏 묻어난다. 유일하게 신디사이저(synthesizer)음을 인트로에 도입한 넘버이기도 하다.
9. Leave_ 그녀의 청소기를 수리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한 그녀가 그의 자작곡 데모테이프를 듣는 장면에서 플레이 된 테이프의 음질 형식으로 들려지는 곡. 후에 그의 CD를 녹음할 스튜디오 대실비를 마련하기 위해 방문한 은행의 대출 매니저(small loans manager)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장면에서 같은 방식으로 들려진다. OST엔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원곡이 수록됐다.
10. Trying to pull myself away_ 스튜디오 녹음에 들어가기 전, 밴드 멤버들이 그의 방에 모여 연습하는 장면에서 연주되는 곡. 경쾌한 넘버가 인상적이다. 위에 언급한 ‘When your mind’s made up’과 함께 밴드의 형태로 연주되는 방식으로 영화상에 보여지는 유일한 곡이기도 하다.
11. All the way down_ 영화 초반, 그가 방안에서 홀로 옛 연인을 생각하며 부르는 곡. 노래와 함께 옛 연인과 연결되지 못하는 통화를 시도하는 장면이 교차되며 전화기 옆에 놓인 그의 옛 연인 사진이 클로즈업되기도 한다. 그의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12. Once_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기다려야만 들을 수 있는 곡. 제목 그대로 영화의 타이틀롤 넘버로 남녀의 서정적인 화음이 인상적이다.
13. Say it to me now_ 어두워진 더블린의 시내에서 그가 열창하는 곡으로 그의 지르는 창법이 인상적이다. 그와 그녀의 인연의 계기가 되는 곡이자 <원스>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여는 노래다.
흉흉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몇 주 동안 가판대에서 보이지 않고 있는 어느 주간지에 대한 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해를 넘기고 신년이 되면 출판될 거란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새해가 밝아도 그 주간지는 보이지 않았다. 주간지가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중이다. 가히 치명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8주년 기념호를 낸 직후부터였다. '필름2.0'은 그렇게 침전하고 있다. 인쇄 과정의 문제라고 둘러대던 답변도 인쇄 대금의 부족을 고백하는 실정에 이르렀다. 한 시대의 획을 그었다 할만한 영화 전문지 하나가 시장에서 점멸하듯 기울어간다. 물론 아직 스스로 선언하지 않은 끝을 논하기엔 시기상조다. 하지만 시장에서 모습을 감춘 어느 잡지의 끝을 예감하는 소문엔 범상치 않은 기시감이 덧씌워진다. 공공연하게 떠도는 소문 너머로 드리운 그림자는 꽤나 낯익은 것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드라마 전문지를 표방한 '드라마틱'은 지난 해 2월을 끝으로 무기한 휴간을 결정했다. 산소호흡기를 떼지 않았지만 뇌사 진단이 떨어졌다. 미드와 일드의 국내 저변이 넓어지고 국산 드라마의 제작이 활기를 띠는 가운데 드라마 잡지의 가능성에 담보를 잡았다. 영화나 음악과 달리 드라마에 대한 담론이 전무하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시도는 고무적이었다. 독보적인 시장 개척이 가능하다 여겨졌다. '드라마틱'은 격주간 발행으로 시작됐지만 월간 발행으로 궤도를 수정했고 끝내 운행을 멈췄다. 길은 열려있었지만 연료가 부족했다. 수익에 발목을 잡혔다. 컨텐츠에 대한 열의만으로 자본의 무심함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작년 말, 장르문학을 표방하던 '판타스틱'이 휴간됐다. 폐간되는 것 아니냐. 소문이 분분했다. 한 달 동안 자취를 감췄던 잡지가 익월에 출간됐다. 하지만 불운한 소식이 연이어졌다. 일년 열두 달마다 발간되던 잡지의 발행일이 연중 네 번으로 줄었다. 월간지가 계간지가 됐다. 기사회생을 위한 일말의 선택이었다. 소설과 만화가 연재되는 장르잡지가 세 달마다 돌아온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척박한 국내장르문화의 토양 속에서 '판타스틱'은 일종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장르 팬들의 호응도 뜨거웠다. 비주류의 소수감성이 한데 뭉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자본이었다. 광고가 붙지 않았다. 자본은 새로운 문화적 시도에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문화적 담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TV라는 매체비평을 통해 다양하고 획기적인 컨텐츠를 생산하던 '매거진T'도 새로운 움직임의 한 축이었다. 기사마다 차곡차곡 쌓이는 댓글의 양이 독자들의 애정을 확인하게 한다. 어느 포털 사이트마다 밑도 끝도 없이 악랄하게 인신 공격을 퍼붓는 악플러도 보이지 않는다. 순수하게 컨텐츠를 즐기고 의견을 교류하고 매체에 대한 애정을 남긴다. '매거진T'는 현재 버려진 땅처럼 황량해졌다. 더 이상 기사도 댓글도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매거진T'를 채우던 일원들은 새로운 스폰서를 찾았으나 갈등을 빚었고 결국 기존의 집을 버리고 새집을 장만했다. '매거진T'를 버리고 '텐 매거진'을 꾸렸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 사이 주인을 잃은 집은 황폐해졌다. 손님을 맞이하는 건 새로운 컨텐츠가 아니라 백신에 감지되는 트로이목마다. 버려진 집기처럼 묵어가는 컨텐츠 사이에서 바이러스가 흉측하게 자리잡고 유저를 급습한다.
'키노'의 폐간은 상징적이었다. 영화 담론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그 뒤로도 몇몇 영화지가 시장을 선도하고 온라인 영화 사이트가 성장했지만 자본의 논리에 예술적 담론이 무너지는 형국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상징적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키노'의 온라인 자매지에 가까운 '엔키노' 역시 '키노'의 폐간 이후 3년이 지나서 사이트가 폐쇄됐다. CJ는 '엔키노'를 인수했지만 컨텐츠를 수급한 뒤 과감히 경영을 포기했다. 거대한 자본을 다스리는 대기업에게 있어서 '엔키노'는 수익 창출에 기여하지 못하는 작은 부서에 불과했다. 문화적인 언어의 존명은 중요치 않았다. '엔키노'의 몰락은 여타 영화 사이트의 어려움을 대변한다. 한때 군소 영화사이트들은 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파이를 키웠다. 하지만 거대한 포털사이트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영화사이트의 파이는 눈에 띄게 줄어갔다. 결국 시장 장악력이 떨어질수록 수익은 악화됐다. 컨텐츠의 질적 하락을 부추겼고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은 점차 낡고 고루한 것이 됐다. 오프라인에서 문화적 언어가 남루해지는 사이, 온라인에선 수많은 말들이 찰나를 오간다. 블로그를 장만하며 인터넷에 입주한 개개인은 저마다의 익명을 내걸고 자신만의 사념을 축적한다. 여기저기 발길을 돌리며 부지런히 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크건 작건 제각각 목소리를 내고 서로 뒤엉켜 굴러가다가도 무심히 지나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고유의 아이디로 접속한 대중들은 저마다의 주파수를 개설해 자신들의 생각을 송신한다. 저마다 뒤엉킨 생각들이 어지럽게 나열되고 뒤섞인다. 서로 자신의 생각을 트랙백으로 걸고, 링크를 달며, 댓글로 남긴다.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데 여념이 없다. 언어의 바다가 형성되는 것 같지만 개개인의 사유화된 생각이 첨탑처럼 솟아오른다. 거대한 논의의 장이 형성되기 보단 개개인의 각축전이 활발하다. 논의보단 주장이 첨예하다.
포털사이트의 메인화면에 종속된 언론은 언어의 가치를 급속하게 몰락시켰다. 정보의 우열보단 속도전이 중요해졌다. 포털사이트가 뉴스를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신문을 펴는 대신 모니터를 켰다. 실시간으로 세상의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정보의 질적 가치는 중요치 않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는 언어의 선택이 중요하다. 언어가 가벼워졌다. 짧고 굵은 언어들이 난무한다. 대상에 대한 표피적인 판단이 압도한다. 언론에게 뉴스 공급을 사주하던 포털사이트는 이제 을이 아니라 갑이다. 신문이 시장을 잃어가는 사이 포털사이트는 시장을 독점했다. 남의 안방을 넘보다 자신의 안방을 잃어버린 언론은 머슴살이가 한창이다. 포털사이트가 메인화면에 인심 쓰듯 기사를 올려주면 마냥 고마워해야 할 따름이다.
포털 사이트의 메인화면을 장식하는 뉴스의 팔 할이 연예인에 대한 가십으로 도배됐다. 사람들은 연예인에 대한 왈가왈부에 손가락을 쉽게 허락했다. 재미를 본 언론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값싼 컨텐츠를 쏟아냈다. 질적 우열과 무관하게 동일한 장소에 진열된 정보들의 가치는 일정하게 하향 평준화됐다. 하나같이 그저 그런 정보로 도매금처럼 취급 당했다. 언어의 가치를 스스로 몰락시킨 언론의 자충수는 신뢰의 기반을 잃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단어들이 대세가 됐다. 비평은 말장난처럼 따분해졌다. 날카로운 분석이나 섬세한 비유는 인기스타 사진 한 장 앞에서 무색해졌다. 스크롤의 압박 속에서 텍스트에 대한 인내심은 사라졌다. 그 와중에 개개인의 주장들이 난무한다. 저마다 옳은 소리를 내며 분열해 나간다.
시청률 30%를 넘긴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막장 드라마라 불린다. 대중 가요는 아이돌 그룹의 경연장이 됐다.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지만 맥을 짚어줄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전문가가 보이지 않는다.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의 영토가 상실되니 언어의 주체도 함께 소멸한다. 짧고 자극적인 텍스트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긴 호흡의 언어가 지겹다. 자연히 진지한 논의가 무색해진다. 문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어려워지는 만큼 문화적 담론을 언어로 생산하는 대중문화저널들이 궁핍해진다. 물속에 산소가 부족하면 금붕어는 뻐끔거린다. 생존을 위한 신호를 보낸다. 대중문화저널의 위기는 대중문화 위기의 신호다.
자본의 논리로 모든 것이 선택되고 수급된다. 자본의 선택에 따라 양산된 컨텐츠는 결국 과도한 팽창으로 이어지고 소멸된다. 돈 되는 댄스 가수 일색으로 무대를 채우던 대중가요가 시장을 잃은 것도 자본에 휘둘린 까닭이다. 대중가요에 대한 언어는 무력했다. 영화도 드라마도 비슷한 양상이다. 예술적 가치가 무마되고 자본의 횡포가 도외시될 때 대중문화는 급격히 퇴보한다. 대중문화에 기생한 저널들이 여기저기서 난립한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보도하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여념이 없다.
창작자가 생산한 컨텐츠에 대한 언어도 일종의 예술이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견지되고 새로운 시선을 부여할 때 넓고 깊은 유희가 발생한다. 대중문화저널은 단순히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다. 대중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반자로서 공존할 때 명분이 선다. 오늘날 대중문화저널의 위기는 언어의 가치가 상실되는 가운데 대중문화저널의 존재가치를 망각하는 데서 온다. 대중문화를 씹어 뱉기보다 되새김질하고 곱씹을 때 대중문화저널에 힘이 실린다. 점점 힘이 부친다. 대중문화를 팔아먹는 언어가 진지한 담론을 벼랑으로 밀어내고 있다. 정작 그것이 자신들의 시장을 몰락시키는 하나의 형태가 될 것임을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난 11일 미국 현지시각 8시,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렸다. 지난해 작가 노조의 파업에 동참한 배우들의 보이콧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시상식 무산이라는 진통을 겪었던 골든글로브는 올해 다시 아카데미 전초전의 열기를 띄웠다. 그리고 돌아온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풍성한 작품만큼이나 다양한 이변을 연출했다.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4관왕에 올랐다. 감독상, 각본상, 드라마 부문 작품상, 주제가상까지 쓸어담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주요부문 석권과 함께 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외교관 출신 작가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다. 지난 해 미국 비평가들의 찬사와 지지를 한 몸에 얻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지난 8일 열린 미국 비평가상 시상식에서도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작품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해 제65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는 골든글로브 2관왕에 올랐다. 다사다난한 인생 역정을 지닌 미키 루크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레슬러>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노래한 ‘The Wrestler’로 주제가상을 수상하며 2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샘 멘데스가 연출한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윈슬렛은 스티븐 달트리가 연출한 <더 리더>로 여우조연상까지 수상하며 이례적인 겹경사를 맞이했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괴력적인 연기로 보여준 히스 레저는 남우조연상에 호명되며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 밖에도 뮤지컬코미디 부분에서는 우디 알렌이 연출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가 작품상을, <킬러들의 도시>와 <해피 고 럭키>에서 주연을 맡았던 콜린 패럴과 샐리 호킨스가 각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장편애니메이션상은 픽사 스튜디오의 <월-E>가 선정됐다. 이로서 지난 2004년 신설된 이래로 픽사 스튜디오는 <카><라따뚜이>에 이어 <월-E>까지 3번 연속 골든글로브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공고히 다졌다. 외국어영화상엔 이스라엘 출신 감독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에게 돌아갔다. 아리 폴만의 실화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대한 경종을 울릴만한 작품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지난 해 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 평생공로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스티븐 스필버그는 1년이 유예 끝에 한해를 건너 미뤄둔 영광을 찾았다.
올해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영국 출신 영화인들에게 많은 트로피가 수여됐다. 대니 보일을 비롯해 영국 출신 배우 케이트 윈슬렛과 샐리 호킨스, 아일랜드 출신의 콜린 패럴까지 영국출신 감독과 배우들의 저력이 빛났다. 한편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론 하워드의 <프로스트 VS 닉슨>은 5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으나 한 부문에서도 호명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반면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기록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남우조연상 단 1개 부문 후보로 올랐지만 히스 레저의 수상으로 일말의 체면을 살렸다. 과연 아카데미 전초전의 결과가 오스카 트로피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영화부문 수상작
감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수상 각본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먼 뷰퍼이 수상 드라마_작품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선정 드라마_남우주연상 <레슬러 The Wrestler> 미키 루크 수상 드라마_여우주연상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케이트 윈슬렛 수상 뮤지컬코미디_작품상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선정 뮤지컬코미디_남우주연상 <킬러들의 도시 In Bruges> 콜린 패럴 수상 뮤지컬코미디_여우주연상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샐리 호킨스 수상 남우조연상 <다크 나이트 Dark Knight> 히스 레저 수상 여우조연상 <더 리더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수상 장편애니메이션상 <월-E> 앤드류 스탠튼 수상 외국어영화상 <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폴만 수상 음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 R. 라만 수상 주제가상 <레슬러 The Wrestler> 브루스 스프링스틴 ‘The Wrestler’ 선정 세실 B. 드밀 평생공로상 스티븐 스필버그 수상
아내가 결혼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이 제목은 불순하다. 치토스 한 봉지 더도 아니고, 결혼을 한번 더라니. P2P파일도 아니고 아내를 공유해야 한다는데, 남편은 그러란다. 속도 좋다. 물론 당연할 정도로 분노하고 울분도 터뜨린다. 하지만 선택해야 한다. 결코 소유권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결국 결심한다. 그래서 전처가 아닌 아내가 결혼한다. 사랑이 뭐길래. 오, 놀라워라. 그대 향한 그 마음. 한반도 역사상 남편을 공유하는 아내는 있었지만 아내를 공유하는 남편이 있었나. 가부장적 권위는 과거의 잔재가 됐다. 여성의 권위가 때때로 남성을 압도하는 시대에서 노덕훈은 현재 대한민국 수컷들의 고민과 맞닿는다. 아내가 결혼했다. 객석의 누군가가 이를 받아들이던, 말던, 노덕훈은 그것이 행복이라 결론내린다. 마초 독재 시대가 지고 있다. 노덕훈은 새로운 징조다. 이혼율이 급증하는 현대 사회에서 결혼은 어떤 의미가 있나. 그 남자의 선택이 흥미롭다.
강철중(설경구) <강철중: 공공의 적 1-1>
형아가 돌아왔다. 싱아횽에 필적하는 강철중이 돌아왔다. 상사에게 개기고, 범인과 일대일 맞짱을 요구하는 강철중은 여전히 꼴통이다. 하지만 그도 무언가에 굴복 당하는 중이다. 무서울 것 없이 살아왔지만 가난한 가장이라는 죄책감을 피할 수 없다. 강철중의 정의구현은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뼈빠지게 범인 잡으러 10년 동안 뛰었지만 집 하나 마련하기 어렵다. 되려 등쳐먹고 호의호식하는 작자들을 보니 심기가 불편하다. 자본주의가 야기한 상대적 박탈감이 강철중의 주먹을 지지한다. 주먹질이 현실의 부조리를 타파하진 못해도 대리만족은 이룬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는 단순 무식한 신념이 통쾌하기 그지 없다. 대한민국 서민 안티히어로가 재출범했다. 하지만 강철중도 돈 앞에서 무력하다. 범인을 때려눕힌다고 집이 장만되는 건 아니다. 돈 앞에 장사 없는 시대다. 강철중의 주먹이 통쾌해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강철중의 유효기간도 갱신된다. 아이러니한 인기다.
문자의 발전에 기여한 건 종이와 활자였다. 궁극적으로 종이와 활자의 발명은 책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책의 출판은 결국 문자의 보급을 의미한다. 언어가 기록되고 유통됐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는 대신 읽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귀가 아닌 눈을 통해 입력되고 입이 아닌 손을 통해 출력됐다. 기독교의 전세계적 확산이 가능했던 것도 문자의 보급 덕분이다.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성서가 출간되고 보급될 수 없었다면 오늘날 기독교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언어와 달리 문자의 수명은 길다. 보존이 가능하다. 책은 언어를 축적하는 창고다. 종이로 구성된 칸마다 언어를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강산이 변하는 10년 동안 기록된 언어는 파기되지 않는 이상 변치 않는다. 역사와 문학, 종교, 과학, 모든 언어들이 종이를 타고 시대와 국경을 넘어 전파된다. 언어의 유람은 책을 통해 가능해졌다.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미국 경제학자의 전문서를 대한민국에 앉아서 볼 수 있다. 책은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다. 그 다리가 휘청거리고 있다. 불황의 그림자가 서점가에 드리운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 텍스트가 흔들린다.
출판
출판을 하기 위해선 저자가 필요하다. 출판사와 저자의 접촉은 쌍방향의 형태로 이뤄진다. 저자가 출판사에 접촉하기도 하고, 출판사가 작가에게 글을 의뢰하기도 한다. 작가의 이름값에 출판사가 움직이기도 있다. 기획되는 책의 방향에 따라 작가가 선정되기도 한다. 원고의 수급형태도 다르다. 일정금액을 저자에게 지급하고 원고의 판권을 출판사에서 사들이는 매절이 있고, 책값의 일정 퍼센트(%)를 판매실적만큼 챙겨가는 인세가 있다. 선택에 따른 대가가 다르다. 판매량이 어느 정도 기대되는 작가라면 후자가 유리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돈방석에 앉게 된다.
편집자, 즉 에디터(editor)는 책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출판 배포하는 단계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한다. 에디터는 출판사의 자산과 같다. 저자와 출판사를 연결하는 다리이자 책의 기획을 총괄하는 전략가다. 에디터의 역량이 책의 가능성에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텍스트로 채워진 원고를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는 창조적 기획자다. 저자, 즉 라이터(writer)가 1차 생산자라면 에디터는 2차 생산자다. 디자인과 교정과 같은 후반작업을 외주 프리랜서에게 맡겨도 편집자를 내부직원으로 채용하는 건 그런 중요성 때문이다. 에디터는 책의 프로듀서다. 기획부터 인쇄, 납본의 단계까지 에디터가 함께 한다.
불황
최근 한 메이저 출판사는 에디터 전직원을 비정규 계약직으로 전환했다. “다들 황당해 했지만 상황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인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시장의 여건을 알기에 목소리를 낼만한 여력이 없었다.”이에 관계된 한 에디터의 말이 시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경제난에 따른 정리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으로 에디터를 고용하는 임프린트 방식은 대형출판사를 중심으로 업계 내의 추세가 되고 있다. 능력적 성과에 따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창의적인 기획의 경쟁을 통해 우월한 컨텐츠를 아웃소싱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셈이다. 일종의 성과급 계약에 가깝다. 고용자라기 보단 하청업체에 가깝다. 갑과 을의 관계다. 에디터 군마다 제작비용을 책정하고, 기획 방향을 건의한다. 책이 출판되기 전에 이미 가격경쟁이 시작되고 시장 상황에 대한 예지력이 요구된다. 시장상황이 악화될수록 기획 경향도 보폭을 줄이기 마련이다. 창조적인 마인드보단 실리적인 시야확보가 요청된다. 가능성 있는 모험보단 안정적인 적응력이 우선시된다. 시장의 위축과 함께 문자의 가능성도 위축된다.
대한민국 서점 1번지라 할 수 있는 교보문고의 발표에 따르면 2003년부터 작년까지 해마다 평균 18%가량씩 증가했던 입고 도서 수가 올해에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전년대비 15.2%가 감소했다. 시중에 출판되는 도서의 수가 현격하게 줄었다. 출판사들은 경제위기와 함께 최대한 몸을 사리는 중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전세계적 경제위기가 심상찮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종이값이 50%가까이 올랐다. 인쇄와 제본에 들어가는 비용도 마찬가지다. 현정권의 고환율 정책이 금융위기를 뒤집어 쓰면서 이례적인 환율 폭등까지 맞이했다. 덕분에 외국작가들에 대한 로열티 부담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소비자 심리마저 위축됐다. 한국출판연구소에서 국내 출판사 188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올해 출판업계 매출액은 지난해보다 무려 73% 가까이 감소된 것으로 집계된다. 도서판매량의 감소는 신작의 출간기회를 저하시켰다. 최대한 상업적으로 검증된 컨텐츠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집중적인 마케팅을 펼친다. 극단적인 긴축정책을 펼치는 중이다. 심지어 책 한 권 내지 않는 출판사도 생겼다. 모험을 하기보단 상태유지라도 해야겠다는 심산이다. 책을 찍어내는 자금이라도 최대한 아껴서 시간을 벌고 있다. 집안의 가구를 뜯어다가 불을 때고 있다. 얼어붙은 시장엔 좀처럼 자금이 돌지 않았다. 총알이 부족하니 공격력이 저하될 수 밖에 없다. 자본의 위기가 출판의 위기를 부채질했다. 모회사가 미국에 있는 한 국내 메이저 출판사가 시장에 매물로 나왔지만 매매 의사가 전혀 없어 그냥 방치 중이라는 소문도 심심찮게 나돌았다.
매년마다 돌림노래처럼 반복됐던 출판의 위기란 말이 더욱 실감난다. 회복될 기미 없이 돌고 돌던 불황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2008년 도서시장은 병세가 최악이었다. 영세한 동네서점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음반 시장이 그랬듯 도서 시장도 다를 게 없다. 이젠 지방 군소 서점들의 차례다. IMF외환위기 당시, 보문당이나 종로서적과 같은 업계 최고를 다투던 거대 도매상과 서점이 도산을 맞이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양상의 차이는 있다. 외환위기 당시의 도산은 업계를 이끌던 거대 도매상의 몰락이 지방까지 확산된 것이라면 현재 경제위기 속에서 지방 도소매상이 어려움을 겪는 건 파이의 문제다. 전자가 도소매 시스템의 오류로 인한 과부하라면 후자는 파이의 상실에 따른 아사에 가깝다. 책이 팔리지 않는데 서점이 버틸 수 없는 노릇이다. 올해 부산의 대형서점 몇 곳이 문을 닫았다. 판매실적은 저하되고 이윤은 그만큼 낮아지는데 유지비는 나날이 오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동
온라인 서점은 오래 전부터 시장을 장악해왔다. 유형의 시장이 전전긍긍하는 사이, 무형의 시장이 파이를 확장해왔다. 특히 큰 폭의 할인율을 통한 공격적 방식으로 고객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매년마다 30~40%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출판계의 불황 가운데서도 승전을 거듭했다. 거대한 매장이 필요 없고, 그만큼 인건비의 부담이 덜한 인터넷 서점은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시장을 장악했다. 온라인 시장이 권력을 잡았다. 인터파크나 예스24와 같은 온라인 서점이 도서 마케팅의 새로운 고지가 됐다. 온라인 판매 순위 상위권을 쟁탈하기 위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마케팅 비용의 대부분이 온라인 서점 몇 곳에 책정됐다. 광고가 집중되고 판촉을 위한 이벤트가 동원됐다. 대형할인마트가 경쟁하듯 최저가가격을 통한 견제가 심화됐다.
단행본 판매 시장 규모는 대략 2조 5천억 원 규모로 추정된다. 온라인 서점 상위 5곳의 매출액은 1조원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판매성과를 무기로 출판사에 덤핑 요구를 해오기도 한다. 온라인 서점은 하나같이 최저가를 영업의 기치로 내건다. 오프라인에 대한 경쟁력을 상대적인 가격 정책에서 찾았다.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된다. 구입자들에게 추첨을 통해 고액의 경품을 제공한다. 도서의 단가가 내려가고, 이벤트가 활성화될수록 온라인 서점의 파이는 커진다. 하지만 단가의 하락은 출판사의 마진을 떨어뜨렸다. 온라인 소매상이 부유해지는 반면, 저작자와 출판자는 마이너스를 감수한다. 책값 상승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때로 서슴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해온다. 시장 상황이 아쉽기 때문에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 있다.”한 중견 출판사의 마케터가 말했다. 덫에 걸렸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서점은 오프라인의 불황을 견제할만한 대안이었다. 갑을 관계가 역전됐다. 온라인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이 책의 흥망을 좌우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의 형세가 완연히 달라졌다. 오프라인 시장이 몰락을 거듭하는 사이 온라인 시장은 새로운 대세로 한 축을 차지했다. 비단 온라인 서점뿐만이 아니다. 대형 포털사이트도 공룡이 됐다. 온라인 시장은 단지 판매와 선전을 위한 선택적 방편이 아니라 일차적 포석이 됐다. 마케팅의 포화가 온라인에 집중된다. 대형출판사들은 대규모 자본을 소모하며 책을 판다.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빈도가 많을수록 잘 팔리는 책이 된다. 온라인 서점의 초기화면에서 소개되는 책은 그렇지 못한 책에 비해 판매부수가 뛰었다. 특히 미디어에서 소개되는 책은 삽시간에 판매량이 급증했다. 방송에 출연한 몇몇 작가들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 상단을 차지했다. 물론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이외수나 황석영은 원래부터 유명한 작가였다. 이미 일정한 판매량이 기대되는 작가였다. 하지만 방송의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외수의 ‘하악하악’은 올해 도서판매량 2위에 올랐다. 이외수는 유명작가에서 완전한 스타로 거듭났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역시 방송 이후 베스트셀러 순위가 19위에서 1위로 수직 상승한 뒤 2주간 정상을 지켰다. 작가가 이슈의 중심에 서니 날개 돋친 듯 책이 팔려나갔다.
검증
올해 전체적인 도서 판매량이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 한국문학을 위시한 소설의 판매가 늘었다. 지난 몇 년 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점령했던 자기계발서나 재테크 관련서적이 경제불황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빈자리를 메운 건 문학도서와 경제서적이었다. 몇 년간 침체됐던 문학의 선전이 눈에 띈다. 특히 몇몇 작가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어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책으로 출간되기 전 네이버를 통해 먼저 선보였다. 포털사이트에서 소설이 연재된다. 이미 작년 박범신의 ‘촐라체’를 연재하며 주목 받았던 네이버가 다시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을 예전과 같이 블로그 형식으로 연재했다. 블로그의 방문자 수는 200만 명이 넘었다. 네이버가 블로그 형태로 작가의 개인적인 공간을 마련했다면 다음은 좀 더 적극적인 포지셔닝을 구축했다. ‘문학 속 세상’이라는 섹션을 할애하며 공지영의 ‘도가니’와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를 연재 중이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과 협업까지 도모했다. 시인 함민복의 에세이가 준비 중이며 한국대표시인 70명의 시를 연재한다. 그 밖에 교보문고나 예스24같은 온라인 서점의 블로그를 통해 정이현과 박민규, 백영옥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연재되고 있다.
과거에도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PC통신에 글을 연재하며 인기를 끌던 작가들의 작품이 책으로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전례는 있었다. 특히 이우혁의 ‘퇴마록’은 PC통신 연재 당시 클릭수가 무려 2억 3천만 번을 넘었을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후에 책으로 출간된 뒤에도 큰 인기가 지속됐다. 하이틴 소설로 10대들의 인기를 얻은 귀여니도 경우는 다르지만 비슷한 케이스다. 이름없는 신진작가들을 배출하고 장르문학과 같은 특수한 분야의 창작력이 빛을 보던 과거와 현재는 양상이 다르다. 최근 온라인 소설에는 기성 문단의 유명 작가들이 포진했다. 본격문학이 인터넷을 통해 연재되고 있다. 마치 과거 일간지 신문을 통해 연재되는 것과 유사하다. 지면에서 상실된 소설의 영토가 웹에서 복구되고 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소설에 대한 흥미가 떨어진 젊은 세대에게 기성문단의 인터넷 연재는 신선한 자극이 됐다. 박범신의 ‘촐라체’나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연재된 후, 각각 출판을 거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온라인 연재를 통한 텍스트의 가능성이 검증됐다. 특히 온라인의 연재는 독자와 저자의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블로그에 연재되고 포털사이트 메인에 전시되면 하루에도 수 만개의 댓글이 달리곤 한다. 반응이 삽시간에 확인된다. ‘개밥바라기별’을 연재한 황석영의 블로그는 방문자수가 2백만 명을 넘겼다. 현재 ‘개밥바라기별’의 판매부수는 35만 부를 돌파했다. 온라인의 인기가 오프라인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랠리포인트가 생겼다. 다음이 발 빠르게 ‘문학 속 세상’이란 섹션을 신설해 작가를 섭외하고 소설을 연재했다. 시장이 검증된 만큼 지체할 이유가 없다. 출판의 위기도 이에 기여했다. 도서시장의 경직은 기성문단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마추어를 위한 기회의 장이 됐던 과거와 달리 프로들의 새로운 영토가 개척됐다. 온라인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이다.
과거 온라인 소설이 검증되지 못한 작가들의 도전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현재 온라인 소설은 검증된 작가들을 모시기 좋은 공간이다. 소설보다도 먼저 작가가 보인다. 익명성에서 비롯된 새로운 얼굴이 발굴될 기회보단 익숙한 얼굴의 안정성이 추구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문학에 대한 관심을 유명작가들의 작품으로부터 발생시킬 수 있다는 긍정적 효과도 존재한다. 문학을 독자에게 소개시킬 수 있는 채널이 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대형 작가 몇 명의 성적을 토대로 거대한 성과를 자랑하기는 이르다.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가 가중된다. 일부 작가에게 기회가 편중될 가능성이 짙어진다. 불황 속에서 검증되지 못한 문장에 기회를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불리하다. 한번이라도 얼굴이나 이름이 팔린 작가일수록 홍보도 쉽다. 문학이 자본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자본에 의해 텍스트의 가치가 검열당한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이 늘어나는 추세다. 2005년 국내 개정판을 출간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최근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한 덕분이다. 새로운 표지가 제작됐다. 영화 포스터가 책 표지에 옮겨졌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비롯해 최근 이정명의 ‘바람의 화원’까지 영화나 드라마로 각색된 작품들도 관심을 얻었다. 원작의 인기가 높을수록 각색된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상승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올해 개봉했던 영화 <모던보이>의 원작은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인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였다. 이 작품은 영화의 개봉과 함께 영화와 같은 ‘모던보이’란 제목을 달고 재 출간됐다. 영화를 통해 원작소설이 주목 받았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상호작용이 활발하다. 마케팅의 전술도 그에 발맞춰 나아간다. 최근엔 영화나 드라마를 위한 판권으로 팔기 위한 소설을 기획하는 형태도 많아졌다. 맞춤형 문장들이 기회를 노린다.
생존
관심을 얻지 못한 책들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반품되는 추세다. 시장의 악화와 함께 시장 맞춤형 기획이 도모된다. 팔릴만한 기획들만 살아남아 시장으로 나온다. 대형출판사로 자본이 몰리고 거액의 마케팅이 동원되어 베스트셀러가 이뤄진다. 마진이 오르는 만큼 판매부수에 간절해진다. 2008년, 온라인 서점의 성장률은 10%대에 그쳤다. 시장의 불황이 이만큼 극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례일지도 모르지만 온라인 서점에 몰리던 과열이 누그러진 결과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입고되는 신간의 양이 줄면서 광고와 매출이 동반 감소했다. 그에 따라 베스트셀러와 함께 스테디셀러의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 새로운 활자의 공백을 묵은 활자로 대체하고 있다. 반값으로 세일을 해서라도 마진을 채우려 한다. 팔리지 못한 책들이 헐값에 넘어간다.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처럼 텍스트들이 도매금으로 팔려간다.
유명 작가들은 온라인에 글을 게재한 뒤, 오프라인으로 활자를 옮긴다. 텍스트의 고유 공간이 사라진다. 종이가 아닌 모니터로 텍스트를 소비한다. 소설마저 온라인 시장으로 넘어온 마당에 더 이상 문자와 종이는 천생연분이 아니다. 문자는 새로운 동거인을 만났다. 신문과 잡지는 일찌감치 온라인에 주도를 뺏겼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넘쳐나는 온라인에서 활자는 찰나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간다. 중요성과 상관없이 모든 정보가 천원샵의 물건처럼 동일하게 진열된다. 버라이어티 쇼의 자막들은 웃음을 활성화시킨다. 단순히 상황을 설명하는 첨언이 아니라 상황에 개입해 감정을 양성하는 시각적 효과를 거둔다. 텍스트를 브라운관에 디자인한다. 문자는 더 이상 가지런히 행과 열을 맞춘 문장처럼 차분히 머무르지 않는다. 웃음을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 덕지덕지 붙어서 나열된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다. 글을 쓰는 사람은 늘었지만 책의 소비는 줄었다. 문자를 만드는 사람은 많은데 문자를 읽는 사람은 드물다. 찰나를 위한 텍스트들이 쏟아지고 또 사라진다. 영원을 위한 텍스트들이 살아남지 못한다. 인터넷도 언어를 보관한다. 하지만 그 방대한 가상 공간 속엔 안정감이 없다. 언어를 음미할 시간이 부족하다.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다.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세상이 책을 기피하게 만든다. 마음의 여유가 부족할 수록 책과 멀어진다. 초등학교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리는 아이들이나 과업과 철야에 시달리는 샐러리맨의 세상에서 텍스트의 간격을 음미하라 권하긴 힘든 노릇이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책을 권하기란 쉽지 않다. 세상이 각박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차가워진다. 문장의 감성은 다른 세상의 언어 같다. 인터넷 뉴스의 신랄한 악플이 차라리 이 시대의 솔직한 언어가 됐다. 텍스트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거를 시작했지만 정작 사람들은 한 손으로 텍스트를 소비한다. 클릭만 할 뿐, 책장을 넘기지 못한다. 살아남은 텍스트들이 앙상하게 말라간다. 알게 모르게 위기로 흘러간다.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에서 텍스트가 살아남기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