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머니께서 누나와 함께 세부로 여행을 떠나셨다. 최근에 하늘이를 잃고 우울해 하시던 차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해외에 나가시는 건 처음이다. 덕분에 인천공항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멀리 떠나는 자식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그런 기분. 설레면서도 걱정이 되는 그런 마음. 갖고 있던 300달러를 어머니께 드렸다. 이왕 가는 거 잘 놀고, 잘 쉬다 오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누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어머니께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셨다고. 생각보다 깊게 들어가서 놀랐다고. 그렇구나. 어머니께서도 하실 수 있는 게 많구나. 어쩌면 나보다도. 마음 한 켠에 바닷물이 들이치는 기분이었다. 짠했다. 어머니가 보낸 지난 세월이. 어머니께서 한국에 돌아오시면 수영을 권해볼까 생각했다.
2. 나는 늘 어머니께 종종 말씀드리곤 했다. 엄마는 결혼을 잘못했다고. 세월을 돌릴 수 있다면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그러면 어머니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랬으면 네가 세상에 있었겠냐? 그렇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머니의 결혼 전 사진 속의 어머니와 지금의 어머니 사이엔 굉장한 괴리가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결혼을 해서 아버지를 잘못 만나서 삶이 망한 타입이라고 늘 생각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어차피 존재하지 않을 것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한편으론 완벽한 것일 테니 상관 없을 것이었다. 그 당시 존재했던 이의 존재감이 변질됐다는 결과적 사실이 보다 중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선택 이후로 왜곡된 그녀의 시공간을 생각하면 나는 종종 안타깝다. <인터스텔라>를 보면서도 문득 어머니의 삶을 생각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녀의 삶을 희생함으로써 나의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운명론적인, 예언적인 시공간의 오류. 왜곡. 변질. 당신은 지금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공허한 안타까움.
3. 오래 전 자취를 했던 여자친구를 사귈 때 그녀에게 가져다 주라며 어머니께서 싸주신 밑반찬을 먹고 여자친구는 말했다. “이러니까 웬만해선 먹을 때 맛있단 말을 안 하지.” 어머니께선 요리 솜씨가 빼어나셨다. 어릴 때부터 내 도시락 반찬은 쉽게 동났다. 연포탕은 그냥 집에서 쉽게 끓일 수 있는 국이 아니라는 걸 서른이 다돼서야 알게 된 것도 그렇다. 요즘은 문득 언젠가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지 못할 날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이렇게 자랐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두려운 일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 놓이게 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먼저 사라지지 못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쓸쓸한 일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오랜 삶을 살게 됐다 하지 않은가.
4. 그래도 어찌어찌 여기까지 삶을 굴려왔다. 수도가, 전기가 다 끊기고,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던 20대 초반에 나는 한번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한남대교 중턱까지 걸어가 한강을 내려다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 알았다. 나는 쉽게 자살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한남대교 한가운데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드라마처럼 생의 의지 같은 것이 북돋아 오르진 않았다. 그냥 알았을 뿐이다. 그 이후로 나는 여기까지 살아왔다. 살아남았다. 살고 있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까진 빌어먹지 않고, 밥벌이를 하며 내일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가끔씩 안도하며 하루하루를 수습하며 산다. 다만 언제나 그러하듯이 긴 계획 따윈 세우지 않을 뿐이다.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딱히 부질 없는 일이라고, 내 지난 세월을 통해 나는 믿게 됐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그러니 그냥 오늘을 버티며 살고 봐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오늘을 버텨야 최소한 내일이 있으므로. 그래도 다행히 여기까지 왔다. 다행이다. 아직까진, 그렇다. 최소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살게 만든다. 그러면 살 것이다. 최소한 내일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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