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는 연기처럼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힌다. 개인의 삶을 흔들고 때때로 세상을 무력하게 옥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선의 덕분이다. 쉽게 피어나고 흩어져 나가는 악의와 달리 선의는 조심스럽게 피어나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난 뒤, 세상을 치장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바로 그 선의에 관한 이야기다. 선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사연은 텍스트로 옮겨진 뒤, 이미지로 재현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실제 미식축구의 경기 장면과 이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쿼터백(Quarter Back)이다. 각팀에 자리한 쿼터백의 전술을 통해 자신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에 접근시키느냐, 상대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으로부터 밀어내느냐, 에 따라서 승운이 갈리는 게임이다. 전진패스가 불가능한 미식축구에서 득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저돌적인 태클을 피해 공(pigskin)을 안고 터치라인으로 돌진해서 터치다운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전술을 지시하는 쿼터백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만큼 쿼터백의 보호도 중요하다. 미식축구 프로리그(NFL)에서 쿼터백 다음으로 레프트 태클(Left Tackle)이 고액연봉을 받는 것도 그 덕분이다. 레프트 태클의 임무는 바로 그 쿼터백의 보호다. 쿼터백을 향해 태클을 걸 상대 선수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쿼터백의 진로와 시야를 여는 것이 바로 레프트 태클의 임무다. “모든 주부들이 알겠지만 첫째로 돈이 많이 드는 곳이 주택융자금이라면 두 번째는 보험료죠.” 산드라 블록의 내레이션은 미식축구에서 쿼터백과 레프트 태클이 차지하는 포지션의 비중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블라인드 사이드>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가지 기능성을 품고 있다. 만약 미식축구의 룰을 모르는 관객이라고 해도 그 오프닝 시퀀스를 통과한 관객이라면 <블라인드 사이드>가 묘사하는 미식축구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이 영화의지향점으로 안내하는 일종의 팁이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블라인드 사이드 Blind side>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었다. 미식축구 경기장 내에서 레프트 태클이 보호해야 할 쿼터백의 ‘사각지대’를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선의의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155kg의 거구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는 리 앤(산드라 블록)을 통해 부유한 투오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삶의 기회를 열어나간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쿼터백이 터치라인을 향해 팀을 전진시키듯, 정해진 결말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영화이자 단순명료한 룰처럼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다. 중요한 건 단순히 그 결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의 의미를 명확히 다져나가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터치라인이라면, 그 결말에서 얻어져야 할 의미는 터치다운이다. 미식축구가 터치다운을 통해 승패를 가늠하는 게임이듯, <블라인드 사이드>의 성패도 실화가 품은 의미를 영화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영화인 셈이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마이클과 투오이 가족, 그 중에서도 리 앤과의 관계 묘사에 있어서 인상적인 감상을 끌어낸다. 부유한 백인 가정이 열악한 환경에 놓인 흑인 소년을 자신의 울타리로 편입시켜 그가 품은 가능성을 발굴하고, 그의 인생을 보다 나은 궤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의 근거는 리 앤의 선의로서 설명되며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관 안에서 이해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그 선의를 있는 자의 여유 안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선의가 어디서 비롯되고 발전해나갈 수 있었는가의 문제다. 단순히 ‘봉사활동’과 같은 의무적인 행위와는 구별될만한 지점이다. 이런 묘사가 <블라인드 사이드>를 드라마틱한 재현 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실화에 담긴 진심을 포착하고 그 실존적인 감정의 원형을 스크린에 덧입히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사실상 마이클과 리 앤의 관계는 명확하다. 리 앤은 베풀고, 마이클은 받는다. 이는 표면적으로 가진 자가 나누고, 갖지 못한 자가 받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와 유사한 일방향적인 소통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선의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가 낳은 관계의 소통과 발전적 가치를 묘사하는 영화다. 마이클에 대한 리 앤의 헌신이 동정의 수순을 넘어 소통의 관계로 거듭날 때 삶의 의미는 확장되고 진심은 체온을 얻는다. 리 앤과 마이클은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거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리 앤은 마이클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깨닫게 된다. 마이클은 리 앤을 통해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희망을 품게 된다. 마이클과 리 앤은 서로에게 있어서 ‘블라인드 사이드’를 열어주는 관계다. 결국 리 앤이 마이클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마이클 역시 리 앤의 삶을 변하게 만든다.
리 앤의 선의가 마이클에게 통할 수 있는 건 리 앤의 선의가 헌신적이기 이전에 마이클이 그 선의를 받아들일만한 자격이 되는 인물이자 선의가 통할 수 있는 선의를 지닌 인물인 까닭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선의가 위협받는 건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인물들을 통해서다. 당사자들의 진심은 타인의 의심을 통해 흔들리거나 위협받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건 당사자들의 진심에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가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품이자 이를 통해 선의의 가치에 대해서 설득한다. 선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결국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에서 선의의 가능성은 보다 높은 생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렇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심이 담긴 선의가 살아남듯, 드라마를 살리는 것도 그 진심이다.
쿼터백의 지시에 따라 모든 선수들이 터치다운의 활로를 뚫어내는 것처럼, <블라인드 사이드> 역시 실화가 품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크고 작은 요소들의 공헌도가 돋보이는 영화다. 간결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진심을 담아내기 좋은 형태로서 완성됐다. 저마다 적절한 감정의 깊이를 자아내고 관계의 너비를 구축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은 감상을 부른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산드라 블록은 (그 수상자격에 대한 의심 따위는 상관 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의 재현을 넘어 보존이란 측면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품고 있다. 선의는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감동을 보존한다. 이는 우리에게 선의의 발굴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설득하는 동시에 그 가치의 보존이 영화라는 매체의 가치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임을 증명한다.
초콜릿 복근의 ‘언니’들도, 앙증맞은 ‘쉪~’ 애교도, 심지어 ‘빵꾸똥꾸’의 우격다짐도 끝났다. 마치 TV 안이 텅 빈 것만 같다. 하지만 ‘장준혁’이 죽어도, ‘미실’이 죽어도,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꽃피는 춘삼월에 폭설이 계절을 역주행해도 드라마는 어김 없이 피고 진다.
조선 시대에서도 대세는 식스팩이었던가. 말 달리는 노비 언니들의 헐벗은 몸이 예사롭지 않았다. <추노>, 도망 노비를 쫓는 노비들. 그러니까 노비 풀어서 노비 잡는 동족상잔의 비극적 체제 위에서 쫓기는 자가 아닌 쫓는 자가 된 노비들은 ‘짐승남’이 될지언정 진짜 짐승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화끈하게 부르짖고 한판 뒤엉켜 붙다가도 껄껄거리며 웃고, 엉엉거리며 울었다. <추노>는 <선덕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인 함수를 품었으나 신념과 이상의 고매함보다도, 삶과 밀착한 의리나 우정이라는 관계의 끈을 통해 미련하지만 우직하게 생의 너비를 채운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배신한다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와 보다 나은 세상을 이루려다 눈뜬 채로 죽어나가는 이상주의자들이 결연하게 손을 맞잡고 처연하게 현실과 맞설 때, 단단한 육체가 맞부딪혀 내는 땀의 결정이 모여 이루고자 했던 ‘보다 나은 세상’을 브라운관 밖에서조차 절실히 꿈꾸게 만든다.
고운 소리, 맑은 소리 낸다는 모 피아노 건반이 무색할 정도로 간드러진 비음, 솔로천국 커플지옥을 주창하던, 200년 묵은 홍삼보다도 마음이 묵을 만큼 묵어서 풀어지지 않는다는 솔로들의 마음까지 치즈처럼 녹여버린 그 한 마디, “쉪~.” 주방에서 연애질이 한창인 쉐프와 주방보조의 태업이 돋보이는 연애 드라마 <파스타>는 남녀노소 누구라도 한 번 즈음 꿈꿔봤거나, 지나쳤거나, 혹은 자신도 한 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믿거나……(잠시 5분간 묵념), 어쨌건 판타지다. 불굴의 씩씩함과 천부적인 애교 유전자를 타고난 그녀를 통해 차가운 도시 남자가 그래도 내 여자에겐 따뜻하다는 가설을 온전히 입증해내는 인류적 낭비, 아니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보기 드문 연애질 드라마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후로 단골손님이 뜸했던 트렌디 드라마 매장에서 간만에 단골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파스타>는 이승에서 보기 드문 드라마틱한 사연일지라도 분명 신선하고 담백한 낭만이었다. 최소한 강남에서 뺨 맞고 이런 기분 처음 느낀다는 재벌2세의 사디스트적인 취향을 신데렐라 러브스토리로 진단하는 돌팔이 멜로가 판을 치는 드라마 세계에서 탈피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랑이야기였다. <추노>도, <파스타>도, 이제 떨어진 낙엽처럼 바스러져 간다. 이야기는 끝났고, 캐릭터의 삶은 가려졌으며, 공유하던 시간은 추억으로 묵어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연들은 그 빈자리의 주인으로서 추억을 공유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동이>는 새로운 사극의 본좌 자리를 노린다. <대장금>과 <허준>, <이산>을 연출했던 이병훈 PD의 새로운 작품이기도 한 <동이>는 긴 호흡을 위한 첫 숨을 내쉬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 사극들이 초반 아역들의 열연으로 진검승부를 펼친다는 점만큼은 <동이>도 잘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김유정 양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내세우며 시작된 첫 회부터 곁눈질 학습효과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허우적거리는 액션과 몰입을 훼방하듯 느슨한 스토리텔링은 가히 20세기적이다. 이 모든 게 <선덕여왕>과 <추노>때문일까. 시대는 변했고, 사극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트렌디한 창이 됐을 뿐이다. 한효주를 비롯한 주요 성인 배우들의 등장조차 이루지 못한 시점에서 가혹한 일침은 이른 처사다. 남은 앞길이 실크로드가 될지 골고타 언덕이 될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파스타>의 공백에 시청률을 득템한 <부자의 탄생>과 <제중원>과의 본격적인 몸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한편 <추노>의 종방을 기다렸다는 듯 방송3사는 수목드라마를 새단장한다. <신데렐라 언니>는 문근영의 출연작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최근 새로운 ‘국민여동생’들의 범람과 함께 더 이상 국민여동생이 문근영을 위한 절대명사로서 유효하다 말할 순 없겠지만 어쨌든 문근영은 유효하다. <바람의 화원>을 통해 보다 성숙한 내면을 드러냈던 문근영은 처음으로 표독스러운 악역에 도전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로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선보인 서우가 배수의 진을 친다. 젊은 여배우들의 연기 대결은 관록 있는 대배우들의 그것과 한 차원 다른 경연적 흥미를 돋운다. <꽃보다 남자>로서 스타덤에 오른 이민호의 차기작이자 <연애시대>이후 한동안 브라운관에 두문불출했던 손예진의 복귀작 <개인의 취향>이 출사표를 내민다. <아이리스>로 주목을 얻은 김소연이 카리스마를 내던지고 귀여운 여인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검사 프린세스>도 눈길을 끈다. 천하통일이냐, 천하삼분지계냐, 수목드라마 판도는 벌써 뜨겁다.
그녀가 쓰면 일단 본다. 김수현 작가의 신작 <인생은 아름다워>는 주말드라마에서 태풍의 눈이다. 한국적인 가족의 형태 안에서 시청자들이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크고 작은 도발을 매설하는 김수현의 스토리텔링은 시작부터 유효하다. 거실을 공유하고 제 방을 차지한 가족들은 혈연이라는 인력과 개인이라는 척력의 관계 속을 분주하게 드나들고 부딪히며 말을 걸고 크고 작은 갈등과 반목을 되풀이한다. 무엇보다도 드라마 역사상 이처럼 멀쩡하고도 아름다운 ‘게이’ 청년이라니, 이건 배반, 배신, 아니 감동이야, 감동. 어쨌든 이것이 인권윤리위원회나, 열혈 야오이 팬덤을 배려한 팬서비스가 아닌 진짜 정공적인 문제제기란 점에서 김수현의 드라마는 또 한번 빛난다. 이미연의 복귀작 <거상 김만덕>은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고 있으나 그래서 김새는 작품이다. 여성 CEO 김만덕의 생애를 재조명한다느니, 새로운 리더상,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다느니, 이런 건 청와대 정신교육용으로 배포될만한 비디오 자료에나 어울릴만한 문구잖아. 각설하고 김만덕이라는 실존인물의 도전적인 삶은 분명 미덕이며 이미연은 인물의 생에 적합한 설득력을 얹는다. 물론 진짜 다크호스는 따로 있다. 문광부에서 자신만만하게 내건 한국CG산업육성계획에 찬물을 끼얹다 못해 북극곰이라도 초빙해서 코카콜라 병뚜껑이라도 따다 줄만큼 무시무시한 CG완성도를 보여주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일명 <신불사>. 그러니까 온라인 상의 짤방 몇 컷만으로도 이미 전설은 아닌 레전드 반열에 오른 <신불사>는 요즘 시대에서 ‘병맛’이 얼마나 악마적인 트렌드인가를 보여주는 새로운 전형이다. 폭탄 터지면 부엽토쯤은 떨어뜨려줘야 하고, 서류뭉치는 가지런하게 떨어져야 레알임……더 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여하간 <신불사>는 악마의 유혹이다. 시청률 10%는 이미 병맛의 노예 지수를 의미한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 세경은 말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시간은 멈췄다. 그렇게 <지붕 뚫고 하이킥>은 흑백의 찰나를 여운처럼 남긴 채 끝났다. 그 끝에서 시청자들은 경악했고, 슬퍼했다. 세경이 행복하길 바라던, 해피엔딩을 바라던 이들에게 그 결말은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 불행하기만 한 그 마지막 찰나가 세경에게도 불행이었을까.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는 순간, 너무 깊게 찔러 넣어 구겨질 것 같았던 한 마디의 진심을 비로소 꺼내 놓을 수 있었던 세경의 시간은 그녀의 바람대로 그대로 멈춰버렸다. 설사 그것이 끝이었다 해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해리는 ‘빵꾸똥꾸’조차 잊게 만드는 이별의 슬픔을 알았고, 준혁 학생은 날카로운 첫사랑과의 키스를 가슴에 묻은 채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드라마는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의 무덤 속으로 주검처럼 스러져 묻혀갈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 넘을 수 없는, 진짜 삶으로 자라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슬퍼도 안녕. 그리고 다시 한번 반갑게 안녕.
한류 붐에 편승해 ‘텔레시네마7’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TV방영을 목표로 제작된 7편의 TV영화가 국내 극장에 상영된다. <내눈에 콩깍지>는 그 7편 가운데 첫 번째 주자다. 그 내용인즉,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킹카 훈남인 강태풍(강지환)이 갑작스런 차 사고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시각장애를 겪고 덕분에 미의 법칙을 거꾸로 거슬러 (영화적 주장에 의하면) 폭탄과 같은 외모를 지닌 동물잡지기자 왕소중(이지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
좀처럼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단지 말이 되지 않음을 이유로 지구상의 모든 영화들을 쥐고 흔든다면 실상 남아날 작품이 몇이나 되겠냐는 비약적인 안도감을 안은 채 <내눈에 콩깍지>의 설정을 받아들인다면 못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그 인위적인 뻐드렁니를 앞니에 끼워넣고 주근깨도 좀 찍었다지만 이지아의 외모가 고스란히 보존된 왕소중을 탈레반적 폭탄 취급하는 것도 웃어넘길 수 있다. 동시에 강태풍의 제스처나 대사로부터 넘쳐흐르는 과도한 허세적 태도가 단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재미를 의도한 영화적 고의라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눈에 콩깍지>는 명백하게 극장용이라 내걸고 티켓값을 요구하기엔 부끄러운 작품이다. 흥미를 자아낼 가능성이 지극히 얕은 사연이 잘게 쪼개지고 늘여뜨려진 형태로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연을 방출하는데 여간 피곤한 느낌이랄까. 단순히 3~4편 정도로 나뉘어서 방영된 형태로서 관람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2시간 동안의 장기전에서 오는 지루함은 덜했을지 모를 일이다. 전반적으로 딱히 흥미롭게 관찰될만한 사건이 부재하며 인물들의 감정적 정리는 설득력이 완벽하게 결여된 느낌이다. 만화적인 캐릭터와 사연은 팬시하지만 그 가벼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태하고 안이하다.
일시적인 시각적 장애란 소재도 딱히 설득적이지 않지만 그것을 간과한다 해도 그 너머로부터 진전되는 감정적 갈등과 진화가 좀처럼 설득력 있는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하게 과장된 대사와 제스처조차도 그 끝에 다다라서는 그냥 손발이 오그라든다. 좀처럼 끝나야 할 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사족이 굴러다닌다. 나름대로 적정량의 역할을 충당한 배우들에게 동정심이 배어날 정도로, 게다가 순차적으로 개봉될 6편의 차기 작품에 대한 불신지옥에 빠질 정도로, 그렇다.
크랭크업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영화가 개봉됐는데 기다려지지 않았나?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께서 모니터를 많이 못 보게 하셨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너무 궁금증이 커진 상태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 새로운 면도 보이고 저 때는 내가 저런 감정으로 연기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선하더라.
제목부터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부르는 작품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어떤 감상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색다른 이야기라 이걸 감독님이 과연 어떻게 표현해내실지, 그리고 만약 내가 메이를 연기한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증으로 시작했다. 항상 내게 들어왔던 시나리오와 너무 다른 류의 영화였고 기존에 내가 해왔던 캐릭터와 상반된 면도 있어서 그런 호기심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주지홍 감독은 연기적인 요구가 많은 편이었나?
시나리오 상에는 디테일한 설정이 많았지만 일단 현장에 나오시면 어떤 게 편하냐고 물어보시곤 했다. 배우들에게 가장 편안한 현장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하셨다.
한국에 온 메이는 고모에게 자신을 왜 미국으로 보냈냐며 따진다. 단순히 메이가 미국으로 보내진 것에 대한 불만을 고모에게 토로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미국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억울함이 발생한 게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메이의 미국 생활에 관해서 결코 묘사하지 않는다. 배우로선 조금 답답할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시나리오 읽으면서 감독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부분이 그 고모와의 대화였다. 일단 감독님은 메이 스스로 그게 고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단지 고모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왔던 아픔을 세상에 표출하는 것이라 하시더라. 그게 고모에 대한 원망으로 그려져선 안되니까 뻔한 오열 같은 신파적 표현이 동원돼서도 안됐다. 그런 감정을 잘 절제해서 보여주는 게 내 숙제였지. 그래서 이 신을 찍고 나서 다시 찍어보고 싶다고 얘길 드리니까 감독님은 이게 좋다고, 100%라고 하시는 거다. 그때 조금 아쉬웠는데 나중에 편집된 걸 보니까 감독님께서 만족하신 그 선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메이가 미국에서 겪은 삶이나 양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감독님께 여쭤봤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아닐지라도 학대나 홀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아닌, 보통 가정의 평범한 유년을 보낸 아이지만 항상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지닌 채 한국에 살아있을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남들과 다른 아픔 때문에 항상 스스로가 벽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메이는 상당히 히스테릭한 캐릭터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어나간다 해도 그 정서에 스스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히스테릭한 부분도 그렇지만 메이가 항상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메이가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답답함을 한국에 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어떤 해결책이나 돌파구가 없다는 답답한 느낌이 연기를 하면서 점점 더 나에게도 전이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가끔씩은 촬영이 끝나고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도 그 기분이 해소되지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있었을 텐데.
3일 동안 세트장에서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서 말 한마디 안하고 계속 답답한 기분으로 연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너무 답답하더라. 어둡고 침침한 세트장에 있다 보니 밖은 햇살이 비치는 낮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로 메이의 감정에 빠져 있다 보니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졌다. 그래서 세트장 문을 박차고 햇빛 아래에서 30분 정도 앉아서 마음을 다스린 적이 있다. (웃음)
큰 사건들이 펼쳐지기 보단 두 남녀의 감정적 충돌과 교감이 중요한 영화였으니까 장혁 씨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 나름대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회사가 같아서 오고 가면서 인사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 전에 내게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던 거 같다. 감성적인 부분보단 이성적인 부분이 강할 것 같다는 느낌? 마초적인 느낌도 강하다 생각했고. 그런데 실제로 함께 연기를 해보니까 감수성이 예민하고 작품에 대한 열의도 강하시더라. 초반엔 감독님이 장혁 씨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기해서, (웃음) 처음엔 되게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데 영화의 흐름처럼 점점 더 친해지다 보니까 내가 몰랐던 매력들이 하나씩 발견됐다. 개인적으론 장혁 씨의 재발견?
스스로가 장혁 씨에 대한 선입견을 지녔다 말한 것처럼 당신의 선입견을 지닌 누군가도 있을 거다. 특히 아이돌 가수 출신 연기자들에게 대중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최근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그런 배경에서 얻은 상처란 생각이 든다. 대중들의 손가락질이 거셀수록 스스로 연기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책임이나 강박도 커질 거다.
예전엔 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기가 정말 좋아지고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 자체에 감사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날 보시는 분들도 약간 변화된 느낌이 보인다고 하시는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방영했던 <태양을 삼켜라>가 본인의 8번째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주연 캐릭터를 거듭 맡아오고 있는데 작품의 얼굴로서 전면에 부각되는 게 부담될 때는 없었나?
처음엔 처음이기 때문에 봐주는 게 있지만 한 작품씩 해나가면서부터 대중들의 비판도 더 날카롭고 냉정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것 같다. 특히 작품마다 6~70명 정도 인원들의 노고가 담기는데 나 하나 때문에 그 노고가 퇴색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
그 동안 브라운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엔 익숙해졌겠지만 스크린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생소할 수도 있었을 거다.
일단 감독님께서 미묘한 감정선을 원하셨는데 아무래도 브라운관 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그런 연기는 뭔가 부족하거나 심심한 거 같고, 이 정도 표현으로 관객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약간 들었다. TV같은 경우 마음에 안 들면 채널을 돌릴 수도 있고 이런 저런 다른 일을 하면서 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일단 스크린 크기도 그렇고 모든 관객들이 스크린에 집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잖아. 그래서 그런 미묘한 감정선도 캐치가 되고 느껴지는 것 같더라. 감독님께서 왜 나에게 저런 밋밋하다 느낄만한 감정선을 요구하셨는지 스크린을 보니까 알게 됐다.
드라마로 배우 경력을 쌓아왔으니 영화 현장은 처음이었다. 준비기간을 비롯해서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땠나?
일단 드라마는 엔딩을 모르고, 심지어 다음 회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찍어야 되는 경우가 많아서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게다가 대중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라 배우입장에선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어서 배우에겐 보다 친절한 작업 현장이 되는 것 같다. 덕분에 내 스스로도 자신감이나 안정감이 있었던 거 같고, 다음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더 좋았다.
드라마는 현장 분위기가 상당히 타이트하다. 반면 영화는 좀 더 여유롭게 진행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된 느낌이 있었을 것 같다.
일단 스태프 분들의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배우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건 의무적이라기 보단 당연시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한 프로의식과 열정을 지닌 것 같다. 그런 부분은 존경하고 본받을만한 점이라 느꼈다.
사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부터 본인도 프로로 대중 앞에 섰다. 그렇지만 바로 프로로서의 자각이 생겼던 건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나는 처음부터 대중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그런 책임감을 가질 순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수가 자신의 무대를 즐기지 못하고 연기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정말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책임감이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앞서 있었던 거 같아서 그 어린 마음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다.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부분도 많다. 뒤늦게 남는 아쉬움은 없나?
그 당시엔 그게 너무 익숙했고 당연했다. 겁도 많았고, 그냥 당연히 지나가는 게 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놓치고 간 부분이 많다고 느껴져서 마음이 아픈 순간이 있다. 평범한 삶을 조금 더 즐기고 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 연기자로서도 그런 경험을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토끼와 리저드>는 운명적 관계를 되새겨 나가는 남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과거 가수로서 데뷔했고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본인의 인생 속에서 뒤늦게 스스로 운명적이었다 느낄 수 있는 계기나 과정의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그 삶에서 얻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됐을지도 모른다.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랑보단 상처가 익숙했던 그들,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연기가 내게 상처가 되기 시작했고 나의 아킬레스건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연기의 참 맛이나 기쁨을 알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여전히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밟아나가면 어느 순간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이런 과정이 힘들다기 보단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면이 더 많아진 거 같다.
“왜 내가 네 손을 잡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는 은설의 대사처럼 운명이란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배우로서 살아가는 것도 결과론적으로 본인의 운명인 셈인데 그 상황 속에서 어떤 목표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에게 연기가 어떤 것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연기는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정말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다가왔고 이로 인해 이런 저런 시련을 받았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벗어날 수 없게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젠 그 어떤 것보다 연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것 같아서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기에 대한 기쁨을 알고 내 길이란 확신이 생긴 만큼 내 스스로 연기를 즐기면서 보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목표다.
인기라는 건 마치 때때로 버거워서 버리고 싶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메이의 짐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데뷔 초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던 만큼 그 인기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어린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기를 얻어서 그런지 그런 인기에 대한 허와 실을 너무 빨리 알게 됐다. 그게 물론 나에게 중요한 건 안다. 다만 그게 삶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나한테 따라와주면 좋지만 따라와주지 못해도 너무 낙심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는데 원래부터 염두에 둔 선택이었나, 아니면 입시적 진로를 앞두고 결정한 문제였나.
솔직히 그 당시엔 학교에서 그때 내가 하던 것과 다른 부분을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다른 분야를 배우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연극영화과를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학교를 갈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체계적인 공부도 하지 못했고 그런 부분을 놓치고 가야 했던 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얻은 경험이 본인에게 실질적인 연기적 수업이 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의 시행착오도 겪어왔을 텐데,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 기분은 어땠나?
아마 카메라에 대한 공포가 없고 오히려 친밀감이 있다는 게 가수 출신 연기자의 장점이 아닐까. 반대로 우리 식구든, 멤버든, 매니저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왔던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수십 명의 스태프들과 몇 달간 동거 동락하듯 지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생기는 다양한 트러블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낯설고 힘들었다. 게다가 짧은 순간의 무대 공연에 익숙해 있던 내게 긴 호흡의 연기는 낯설고 힘든 일이기도 했다.
무대에선 짧은 순간에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되지만 현장에서는 에너지를 배분해서 끊임없이 방전과 충전을 거듭해야 한다.
가수가 무대에 서는 게 100m 달리기라면 연기는 마라톤 같은 느낌이다. 그땐 에너지를 배분하는 법에 익숙하지도 못했고 서툴렀다. 그래서 연기적으로도 들쑥날쑥 하고 논란의 여지가 생긴 거 같다. 기존에 그런 걸 배우고 어느 정도 인지가 된 상태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던 만큼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터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보니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핑클’ 시절 덕분에 여전히 ‘요정’소리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웃음) 그런 말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나?
그 당시에 우리가 그렇게 불려졌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련한 추억이 되는 거 같다. 재미있다, 그냥. (웃음)
‘핑클’은 이제 당신의 삶에서 과거형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현재를 말할 땐 항상 핑클이라는 과거에서 시작된다.
‘핑클’이 큰 존재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사실 예전에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지만 지금은 ‘핑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한다. 덕분에 이제 ‘핑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픈 욕심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수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활동을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핑클 활동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가수 출신 연기자로서 끊임없이 비난을 받을 때마다 그런 고비가 있었다.
대중들의 비난에 항상 대응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도 간혹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본인에게 비난을 던진 불특정다수의 사람들 중 그 영상을 통해 미안함을 품었던 이들도 있을 거다. 일일이 항변하거나 변명할 순 없지만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때때론 좋은 소통 방식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아는 지인 분에게 이런 얘기들에 대해서 다 해명하고 싶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더라. “이 직업을 가진 이상,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이슈가 되거나,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돼 살아야 한다. 그런 오해와 구설수와 각종 루머에 대해서 네가 모두 하나하나 해명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라. 그러나 네가 해명하지 못한 그런 루머나 오해들은 사실이 돼버린다. 어떤 것을 선택할 거냐.” 내게 온 국민의 오해와 루머를 하나하나 해명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하는 법도 배워야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실은 분명 밝혀지는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돼서 해명할 기회가 되면 해명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젠 그런 지혜가 약간 생긴 것 같다.
‘핑클’ 시절 함께 활동했던 다른 멤버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제각각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함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로부터 10년 정도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 어떤 감회라 할만한 게 있을까?
항상 넷이었다가 혼자가 됐을 때는 각자 본인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저마다 본인의 분야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보이는 것 같고, 각자 분야에서 다들 인정받고 있는 거 같아서 좋다. 내가 제일 어려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자매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언니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잘 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요즘 새로운 10대 아이돌 그룹이 많은데 그런 후배들을 보면서 예전 생각을 할 때는 없나?
나는 그 당시에 우리 팬들이 우리 노래나 이미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를 좋아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단지 어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예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각자 개성도 뚜렷하고 재능도 뛰어나지만 그 나이 또래들만 누릴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면 새롭고 신기하고 그렇다. (웃음)
<토끼와 리저드>는 뒤늦게 찾은 운명적 상대에 대한 멜로다. 이제 데뷔 초에 비해 사랑에 대한 관념도 보다 깊어질 나이로 들어섰는데 운명적인 대상을 찾을 것까진 없겠지만, (웃음) 연애나 결혼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 볼만한 나이가 됐다.
어릴 때부터 너무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만나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그런 소망이 있다.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차태현 씨와 호흡을 맞췄다. <토끼와 리저드>에서도 차태현 씨가 출연하는데 본인과 호흡을 맞추는 신이 없어서 마주칠만한 일도 적었을 것 같다.
사실 포장마차 신에서 같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은설과 메이의 감정에 몰입하고 싶으시다고 편집하셨다. (웃음)
지난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를 새로운 작품에서 만나는 건 본인에게 몇 안 되는 경험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만났다는 점도 특별한 감상을 주지 않던가?
20대 중반의 내가 만난 태현 오빠와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태현 오빠는 참 많이 다른 사람 같더라. 그리고 태현 오빠도 이제 결혼했고 아이도 있는 만큼 보다 성숙한 느낌이 드니까 새롭기도 하고 그만큼 정감도 갔다.
방금 말한 대로 서른을 앞둔 나이인데 그만큼의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할 것 같다.
일단 20대엔 이런 저런 갈등이나 시련이 많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의 중심을 잘 세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20대 때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 목표가 생기고 중심이 잡힌다고 느껴지니까 오히려 30대가 좀 더 기대된다. 그 목표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이랄까.
최근에 한 다른 인터뷰에서 장혁 씨가 성유리 씨를 교양 있는 여자라고 했더라.
(웃음) 워낙 장혁 씨가 교양이 있으셔서 나도 거기 발 맞추어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동적인 부분보단 정적인 부분이 많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 발랄하고 활발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외란 말을 많이 듣게 되진 않았을까.
요즘 인터뷰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내가 되게 발랄하고 활발한 이미지로 많이 생각된다는 점이다. 내 스스로는 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는 점이 새로웠다.
메이의 히스테릭한 모습만 걷어내면 본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감정이라 오히려 편하게 봤는데 보신 분들은 색다르게 보시더라. 이런 부분이 내겐 강점이 될 수 있겠구나 느꼈다.
<쾌도 홍길동>이나 몇몇 드라마에서 백치미적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로 각인된 부분도 많을 거다. 어쩌면 정작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캐릭터들을 연기한 셈인데 자신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떤가?
그런데 내 안에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은 그런 캐릭터들이 평소 생각하는 나와 닮았다는 얘기도 하더라.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이 부각되느냐 차이인 거 같다. 이런 저런 역할을 하다 보면 나도 잊고 있었던 성격들이 나온다. 결국 스스로의 재발견이랄까.
때때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을 테고.
어제 영화를 세 번째로 봤는데 눈 모양이 신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 게 보였다. 각도에 따라서, 아니면 조명에 따라서 그렇기도 하고, 어떨 땐 조금 올라간 눈이 되거나 반대로 내려간 눈이 되기도 하고. 나도 몰랐던 그런 부분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쉽겠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10년여 동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런 관심 속에서 짓눌리지 않고 살아남는 건 말 그대로 그 삶을 즐길 줄 알 때 가능할 것 같다. 그 삶 자체가 일종의 도피처가 되는 거랄까.
예전엔 사생활을 구속 당하는 느낌이 싫다는 막연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 사생활이라 할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일상 속의 내 삶은 딱히 스펙터클하지 않고 재미있다기 보단 지루하다. 그런데 연기를 통해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이젠 기꺼이 다른 부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의향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이젠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은 사생활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아서 그 일상을 절충하는 게 가능한 것 같다.
가족은 운명이자 속박이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깨이면서도 벽처럼 서로에게 다가서기 어렵다. 그래서 가족은 때때로 지옥이 되고, 폭력이 되고, 상처가 된다. 애정은 편견으로 이해되고 연민은 간섭처럼 지겹다. 예기치 않게 쌍방향에 놓인 구성원 모두를 파괴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운명공동체라는 이름 하에 뿌리내린 유대감은 때때로 덜어내기 힘든 부채처럼 버거운 의무감을 준다. 그래서 가족이란 슬프고 아픈 것이다. 버겁다고 덜어낼 수 있는 짐이 아니라서, 귀찮다고 내칠 수 있는 타인이 아니라서, 미워도 다시 한번, 끝없는 애증을 삭이며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로즈(에이미 아담스)는 고교 시절 치어걸 리더로서 화려한 전력을 지녔지만 아들 오스카(제이슨 스페벡)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청소대행업체에서 받는 푼돈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여동생 노라(에밀리 블런트)는 매번 직장에서 잘리는 탓에 백수 생활을 이어나가는 천덕꾸러기다. 그녀들의 아버지 조(알란 아킨) 역시 항상 변변찮은 사업을 기획하고 번번히 말아먹는 탓에 두 딸의 걱정을 산다. 그 가운데 오스카의 사립학교 입학비가 필요해진 로즈는 보다 큰 수익을 기대할만한 일을 찾던 중, 범죄현장 청소라는 고액의 업종을 추천 받고 동생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게 된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공통 분모처럼, <미스 리틀 선샤인>과 <선샤인 클리닝>은 유사한 주제를 끌어안은 작품이다. 콩가루처럼 흩어져 부유하던 가족이 끈끈한 반죽처럼 덩어리를 이루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내는 작품이다. –두 영화는 심지어 제작진도 같다.- 가족을 비극적인 진창으로 몰아넣는 건 가난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하루벌이로 먹고 살 듯 박복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세 가족은 일상은 그 자체로 팍팍한 심경을 전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가족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공유한다. 좀처럼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회상 신을 통해 파편화된 기억을 문득 내보이곤 하는 영화는 결말부에 다다라 아물지 못한 상흔을 선명히 비춘다. 좀처럼 보이기 어려웠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기까지의 갈등과 충돌을 그리는 영화적 여정은 성장통처럼 구성원의 성숙을 도모한다.
‘범죄현장 청소’라는 특별한 소재를 통해 보편적인 가족애로 그려나가는 <선샤인 클리닝>은 창의적이고도 탄탄한 선댄스표 영화에 걸맞은 모양새를 자랑한다. 끔찍한 죽음이 남긴 악취와 핏자국은 노라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마음에 봉인한 상처와 대면하게 만들고, 로즈에겐 새로운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아버지 역시 한동안 소통할 수 없었던 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찾게 된다. 세 가족의 성장을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샤인 클리닝>은 사실 소재로부터 발생할만한 특별한 흥미에 비해 적막한 가족드라마다. 충돌과 갈등을 건너 끝내 화해를 이루는 캐릭터 간의 어울림이 대단한 절정을 선사하지도 않거니와 세 가족을 비추는 영화적 시선이 시종일관 담담한 감정을 유지하는 탓이기도 하다. 인물마다의 비중적 편차가 크고 인물간의 정서적 교류가 선명하게 구축되지 못한 탓에 구성원간의 화합을 묘사하는 결말부의 감흥도 낮아지는 인상이다.
<선샤인 클리닝>에서 돋보이는 지점은 소재의 착상이다.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이들로부터 남겨진 끔찍한 흔적을 지우는 범죄현장 청소는 기발한 소재로서의 흥미를 넘어 드라마로서 훌륭한 매개를 이룬다는 점에서 보다 특별하다. 루저로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인물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물들의 희망을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비극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떤 이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동시에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참신한 이야기를 위한 자격을 지닌다.
현실적 난관들이 빚어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당장의 희망을 체념하면서도 새롭게 현실적 활로를 모색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감정을 자아낸다. 거울을 바라보며 희망적인 주문을 외우는 로즈의 얼굴은 낙천적이라기보단 절박하며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 매달려 함성을 지르는 노라의 표정엔 기쁨보다 슬픔이 서린다. 에이미 아담스와 에밀리 블런트의 얼굴은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도 긍정의 끈을 놓지 않는 인물들의 절박한 심리를 드러내는 창과 같다. 대책 없는 낙관으로 끝없는 무능력을 드러내지만 결국 딸을 위해 헌신적 대안을 제시하는 아버지 조를 연기하는 알란 아킨의 심드렁한 표정은 속내에 감춰진 진심의 깊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묵묵하면서도 끈기 있게 인물들의 표정을 응시하며 감춰진 속내까지 포착하는 <선샤인 클리닝>은 현실적 한계를 체감하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휴먼드라마다. 척박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가족사업은 결국 현실에서 거대한 빚을 남기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게 만든다. 누군가가 남긴 생의 흔적을 지워나가며 현실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는 가족은 자신들의 묵은 상처를 지우고 이는 과거를 극복하는 현실적 대안이 된다. <선샤인 클리닝>은 행복을 쟁취하기보단 그 기준점을 제시하는 영화다. 커다란 변화가 아닌 보편적인 삶의 테두리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삶이란 이렇게 작은 변화를 통해서 큰 울림을 얻곤 한다. <선샤인 클리닝>은 그렇게 작은 변화 속에서도 깊게 자라나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다. 명료하고 깔끔한 여운이 돋보이는.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던 '이브 생로랑'을 '디오르(Dior)'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굴하고 '존 갈리아노'를 디오르의 지휘관으로 발탁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는 말했다. "검정색 풀오버와 열 줄짜리 진주목걸이로 샤넬(Channel)은 패션 혁명을 일으켰다."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디오르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실용성을 강조한 '가브리엘 샤넬(Gabriel Channel)'의 패션을 시대적 혁명으로 정의했다.
샤넬이 파리로 진출했던 1910년경의 여자들이란 그저 남자들을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여성이 아니라면 일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화려하게 치장된 옷을 입고 매일같이 사교계를 전전하는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신분이 천하고 처지가 박하지 않은 여자가 일을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유년 시절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버려진 샤넬 역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샤넬(오드리 토투)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영화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반체제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직업적으로 선망한 여성이라 묘사한다.
1893년, 부모에게 버려져 여동생과 함께 수녀원에 맡겨진 샤넬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이후로 성인이 된 그녀의 모습을 통해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간다. 물랭(Moulin)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와중에 카페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워나가던 샤넬은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엔티엔 발장(브누아 포엘 부르드)을 만나게 된다. 샤넬의 도전적인 태도에 호감을 느낀 발장은 그녀가 파리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샤넬의 오디션은 실패하고 발장 역시 파리 근교에 있는 자신의 사저로 떠난다. 하지만 발장을 찾아가 그의 사저에 머물며 고위층의 사교생활을 경험하게 되는 샤넬은 그곳에서 고위층 부녀자의 화려한 패션에 실소를 머금고 자신만의 심플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리고 샤넬은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만한 연인 보이 카펠(알레산드로 니볼라)을 만나게 된다.
<코코 샤넬>은 샤넬의 스타일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만약 <코코 샤넬>을 통해 샤넬의 스타일을 만끽하고자 티켓을 구매한 관객이라면 만족감을 쥐고 상영관을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 될 거다.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샤넬이란 브랜드를 창시한 가브리엘 샤넬의 비화를 다룬 전기적 성격의 영화다. <코코 샤넬>이 묘사하는 샤넬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전문직업인이자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샤넬이 만들어내는 것보다도 샤넬이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묘사보다도 서사에 집중한다. 남성의 부에 기대어 화려한 치장을 뽐내며 살아가는 부유층 여성들의 삶을 무료하게 인식하며 무능력을 강요하는 사회에 회의를 느끼는 샤넬은 심플하고 실용적인 자립여성의 스타일을 완성해나간다.
샤넬의 스타일에 영감을 준 사회적 배경이 <코코 샤넬>의 1차적 자산이라면 샤넬의 삶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2차적 자산이다. 결국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인물의 삶이 빛나는 지점을 다룬 화려한 소품이 아니라 그 삶이 정점에 오르기 위해 어떤 여정을 거쳤는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쉽게 말하자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만한 이미지를 배제하고 서사적 끈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을 추구하는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관객 입장에선 비효율적인 소비를 느끼게 만들만한 지점이다. 샤넬이라는 인물에 대한 매력은 현재 샤넬이라는 브랜드가 부여하는 물질적 환상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는 인물의 성장이라는 역동적 소재를 지나치게 정적인 분위기에 가둠으로써 단조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감정적 고양을 무마시킨다.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처럼 권태로운 감상이 도모된다.
이름만으로 대변되는 인물의 삶이란 분명 들춰보고 싶게 매력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 인물의 현재를 이룬 기반을 살핀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의 서사적 선택은 그런 면에서 타당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을 온전히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은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영화다. 오늘날 명성을 얻은 명품 브랜드의 네임밸류를 만든 건 그 브랜드의 시작을 이룬 누군가의 삶이라기 보단 그 브랜드가 현대의 물질적 욕망과 상응하는 덕분이다. 물론 인물의 삶에 집중한 <코코 샤넬>이 패션쇼 따위를 기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만족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 기대심리를 배반하는 가치를 선택했다면 그것을 설득할만한 결과물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코 샤넬>은 설득력 없는 드라마다. 샤넬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단조로운 드라마를 통해 설명되고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전락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코코 샤넬>은 세기의 혁명이라 불리던 패션 아이콘을 투정하는 아이처럼 치환해버린 과소비적 영화다.
확고한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명품 브랜드, <코코 샤넬>은 분명 그 이름만으로도 누군가의 소비심리를 부추길만한 영화다. 하지만 환상은 금물. <코코 샤넬>은 트렌디한 스타일로 무장한 패션쇼가 아니다. <코코 샤넬>에서 스크린의 용도란 명품 스타일을 전시하기 위한 쇼윈도가 아니라 인물의 감춰진 삶을 훔쳐보기 위한 창과 같다. 코코 샤넬이 디자이너로서 빛나는 경력을 쌓아가기 이전에 그 삶을 어떻게 디자인 했는가를 조명하는 <코코 샤넬>은 엄밀히 말하자면 코코 샤넬이라는 인물을 위시한 멜로드라마이거나 페미니즘 전기에 가깝다. 그러니까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이 구가하는 명품적 환상성에 이끌려 <코코 샤넬>을 선택했다면 상영 시간 내내 무기력한 감상을 동반할 확률이 크다는 말. 물론 인물의 절정을 배제한 채 그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 인물이 감내한 시간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이라 추켜세울만한 구석은 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이 비극적인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국한된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다. 마치 가봉된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마냥 불완전하고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마냥 무료하다.
2년 전 인터뷰 당시에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에도 그런가요?
예. 덕분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요가학원>촬영하기 전에 3개월 동안 요가를 배우러 다닐 때, 차를 끌고 다닌 적도 있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다닌 적이 더 많았거든요. 항상 요가매트를 들고 지하철을 탔는데 어느 날 제 친구에게 전화가 온 거에요. 너 요즘 요가배우냐고. 그래서 그거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누가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사진에 찍힌 건가요?
사진은 아니고, 글이 올라왔어요. 지하철에서 차수연 씨를 봤는데 요가매트를 옆에 끼고 신문을 읽고 있더라. (웃음) 그래서 아,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죠.
드라마도 2편이나 출연했는데 몰라볼 리 없죠.
그런데 그렇게 비중 있는 역할이 아니었잖아요.
하지만 브라운관으로 얼굴을 노출됐을 때 얻게 되는 인지도는 때론 상상 이상이니까요. 실제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을 거 같고요.
그래도 아직까진 그렇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에요. 가끔씩 물어보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 그런데 대부분 그냥 아니라고 하면 아닌가 보다 하고 그냥 가버려요. (웃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시군요. (웃음)
똑같죠. (웃음) 지금은 요가 때문에 살이 많이 빠지긴 했는데 그것 빼곤 다 비슷해요. 생활하는 것도 그렇고, 여전히 지하철 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그때 제가 장쯔이 닮았다는 말씀을 드렸었죠. 그 뒤로 이런 말을 또 들어보진 않았나요?
가끔씩 들어요. 아직은 누굴 닮았다는 말이 따라다니는 거 같아요. 아직까진 제가 확실한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거 같아요.
<요가학원>의 나니는 궁극적으로 마리오네트 같은 캐릭터입니다.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다고 할까요. 그만큼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감독님께서 제 이미지가 나니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셔서 서슴없이 제게 그 캐릭터를 주셨지만 그 이후로 나니라는 캐릭터의 내적인 면을 어떻게 보여줘야 될지 서로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공포에서는 선악이 분명히 나눠져야 되는데 보통 악역이라면 독하게 생겼거나 이미지가 센 사람들이 캐스팅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번 같은 경우는 그 반대 이미지로 저를 캐스팅하셨으니까 조용하고 차가운 이면의 카리스마를 어떻게 뿜어져 나오게끔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그런 소스들 중 하나가 말투라던가, 말을 하기 전과 후의 호흡이라던가, 아니면 나니 만의 걸음걸이나 동선들이었죠.
일반적으로 감정을 담은 대사는 자의적으로 호흡을 통제하거나 조율할 수 있지만,
음율이 있죠.
나니의 화법은 모든 음절이 또박또박하면서도 어절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상당히 기계적인 어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래도 그런 화법을 설정하고 그에 적응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요가 선생님처럼 얘기하는 캐릭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희 요가를 전담하셨던 진수원 원장님의 말투를 녹음해서 한 2주 동안 연습했어요. 그렇게 연습해서 감독님께 보여드렸더니 나니라는 캐릭터는 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성 있는 요가 강사처럼 얘기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고,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감독님께서 저에게 눈동자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주셨어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말과 함께 감정이 나오잖아요.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감정이 말로 묻어나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감정을 최대한 배제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드라이하게 대사를 쳐줬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받았죠.
어쩌면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에서 기능적인 요구가 많았던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캐릭터의 화법 자체도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했고, 요가도 배워야 했으니까요.
정말 달랐죠. 일단 나니는 동선의 폭도 좁았어요. 인순과 비교해봐도 인순은 동적인 캐릭터라서 쉽게 눈에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나니는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제약된 상황이죠. 그런 가운데서도 중심축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마련했죠. 아까 말했던 화법이라던가, 걸음걸이, 아니면 무드라(mudra, 수인), 만트라(mantra, 진언), 이런 것들을 몸에 익히는 게 참 힘들었어요. 그런 대사만으로 무서운 감정을 전달해야 되는 사람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긴장돼있기보단 오히려 힘이 빠진 듯한 상태를 유지했을 때 관객에게 더 무섭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절대로 긴장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영화를 준비하는 3개월 동안 저를 버리고 제 몸부터 많이 바꿨어요.
요가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교정된 부분도 있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요가로 교정된 건 유연성이었죠. 보통 다른 친구들은 어깨가 많이 내려가 있는 편인데 저는 약간 솟은 어깨라 이게 어떻게 보면 항상 긴장돼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내리는 작업을 했고, 등을 약간 굽히고 다니는 버릇도 고쳤어요.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보이려면 정자세로 보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건 다른 방식으로 원장님과 교정을 잡아야 했거나 따로 집에서 연습이 필요했어요.
요가는 해본 적 있었나요?
캐스팅 되고 나서 감독님과 미팅할 때, 감독님께서 요가는 접해봤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런데 한번도 안 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캐스팅이 넘어갈까 봐 3개월 정도는 해봤다고 거짓말했어요. (웃음) 그랬더니 감독님께서도 다행이라고 하시는데, 오히려 제가 속으로 감독님께서 그렇게 봐주셔서 다행입니다, 싶었죠. (웃음) 그래서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2~3주 정도 더 빨리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미친 듯이 연습했죠.
몸을 움직이는 건 좋아하는 편이에요?
사실 동적인 운동을 되게 좋아해요. 달리는 걸 좋아해서 러닝머신 뛰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취미로 재즈 댄스도 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요가는 한자리에 머물러서 몇 초 동안 한 동작으로만 있어야 하는 정적인 운동이라 저한테 너무 힘들었어요. 확실히 저는 동적인 운동을 많이 선호하는 편이었던 거죠. (웃음)
그렇다면 나니의 어떤 매력이 차수연 씨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걸까요? (웃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감독님께서 저에게 왜 러브콜을 주셨는지 딱 알겠던데요. 그러니까 어떤 역을 할 것 같으니 시나리오 한번 봐라, 단지 이런 이유를 떠나서 시나리오에서 나니 역을 보니까 어떤 이미지 때문에 감독님께서 제게 이 캐릭터를 주신 건지 알게 됐어요. 나니는 단면적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적고 감정이 절제된 인물이라서 알 수 없는 신비스런 분위기가 풍기지만 몇몇 신에서는 발랄하고 밝은 모습들이 보여지기도 하고, 끝에 가서는 간미희를 배반했을 때 무너지는 모습까지 드러내잖아요. 이렇게 한 영화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란 점이 끌렸어요. 아직 제가 많은 영화를 해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제가 쌓아놓은 경력 안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선물세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에도 감정을 절제한다는 측면에서는 기존의 캐릭터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에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자신의 성격을 온전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더 매력을 느꼈어요. <아름답다>나 <보트>, <여기보다 어딘가에>같은 작품은 캐릭터의 감정적인 부분이 잘 표현된 작품이었고, 저도 감정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라서 그런 감정적인 표현들은 편했죠. 그런데 <요가학원>은 감독님께서 “마지막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그 전까진 모든 감정을 배제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감정의 표출이나 감정적인 표정은 너무나 잘 보인다. 하지만 <요가학원>에서는 그런 감정을 상중하로 나눠서 보여줬으면 좋겠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상태로 얘기하고, 행동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학원생들을 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 덕분에 <요가학원>을 통해 한가지 배운 거 같아요. 항상 표출만 할 줄 알았지, 그걸 어떻게 조절해야 할진 아직 몰랐으니까요.
지금까지 7편의 영화와 2편의 드라마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3년 차 배우로서 적은 경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인터뷰에서 그런 말도 했더군요. <요가학원>이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은 작품이라고요. 맞아요.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았어요. 저에겐 항상 미팅이 있었고, 오디션이 있었고, 감독님들께서 그 역할에 어울린다고 판단됐을 때 작품에 임했었죠. 그런데 <요가학원>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같이 작업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를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 제가 하겠다고 답변한 다음부터 미팅이 이뤄졌고요.
그래서 더욱 영화에 애착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저한테는 좀 애정이 남는 영화에요. 이전까지는 제가 출연한 영화를 볼 땐 항상 제 자신이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반적인 스토리나, 아니면 상대 배우와의 관계나 호흡 같은 제 개인적인 부분들이라던가, 전체적인 분위기 안에서 제 단점들을 잘 꼬집어서 봤었거든요. 저럴 땐 저렇게 하면 안 됐었는데, 이렇게. 그런데 <요가학원>은 너무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게 돼서 저는 그냥 다 괜찮더라고요. (웃음) 제 연기가 괜찮다기 보단 전반적인 영화 흐름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옛날 같은 경우엔 제가 어떻게 했다는 걸 제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가학원>은 주관적으로 보다 보니까 어디가 모자랐는지, 어디가 잘 안됐는지, 그리고 어디가 좋았는지, 더 듣고 싶어지는 거 같아요.
어쩌면 출연작 가운데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첫 번째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예. 너무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어요. (웃음)
아무래도 전작들이 개봉할 때와 기분도 남다르겠어요.
그래도 같이 출연한 배우들이 많아서 지금까지 작품 중에 제일 힘이 되는 거 같아요. 어느 무대에 서더라도 같이 긴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여섯 명이나 더 있다는 게 힘이 되더라고요.
오늘 오후에 무대인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관객 앞에서 무대인사를 하는 기분도 남다르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일반 관객에게 무대인사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요? 이번이 처음으로 도는 거에요.
아, 그런가요? <보트>때도 하지 않았나요?
예. 저는 안 했어요. 제가 나름대로 영화에 많이 출연했지만 대중들에게 이미지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인 거 같아요. 아무래도 영화 관계자들이나 감독님들은 이제 제 이미지를 잘 알게 돼서 이번 년도부터 많은 영화 제의를 많이 받게 된 거 같지만 대중들에겐 <요가학원>의 나니가 차수연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거죠.
사실 영화에서 나니의 전사가 조금씩 노출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과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런 부분에 대한 충분한 부연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할만한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서도 고민이 깊어질 수 있는 측면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캐릭터의 과거를 추측하는 건 결국 배우의 몫이니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었나요?
사실 원래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에게도 요가학원에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사연들이 담긴 과거 신이 있었어요. 시나리오 자체엔 더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감독님께서 그걸 영화에서 압축시키시다 보니까 배우들이 그런 설정만 인지하고 연기에 임해야 했어요. 다른 친구들 같은 경우에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고 요가학원에 들어왔던 것처럼 저 또한 비슷한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와 함께 간미희와의 사연을 담은 전사가 있었죠. 아쉬운 부분이긴 해요.
영화가 너무 많은 걸 보여주는 것 역시 딱히 좋은 방식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설명이 불충분할 땐 그걸 표현하는 배우에게도 부담이 생길 수 있겠죠.
그런 갭을 줄이는 게 힘든 거 같아요.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좀 더 설명을 해줘야 이해되지 않을까 싶은 경우도 있지만 작업하는 입장에선 이게 너무 지나치게 착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어디에 포인트를 줄지에 대해선 감독님만이 아시는 것이기도 하고요.
<요가학원>은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에서 가장 상업영화란 단어에 어울릴만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무래도 전작들과 현장 분위기부터 차이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전작들에선 감독님과의 대화가 항상 끊이지 않았는데 이번 <요가학원>에서는 배우들도 너무 많고, 감독님도 따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전작들보단 적었던 거 같아요. 인디 영화나 저예산 영화라 할 수 있는 전작들 같은 경우에선 촬영장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과 충분한 대화를 하고 들어갔거든요. 다만 <요가학원>같은 경우에는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전작들보다 대화를 적게 했지만 막상 현장에선 감독님과 얘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어요. 감독님께서, “다음 주에 이런 식으로 한번 해볼까” 하시면서 소스를 던져주시면 전 거기에 제 상상을 덧붙여서 감독님께 보여드렸고 그러면 감독님께서 또, “그것도 괜찮네?” 이러시고, “그럼 이런 식으로 접근해보면 또 어떨까?” 이렇게 다시 소스를 던져주시고, 계속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서 진행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마치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처럼요.
전작에서는 항상 상대역이 남자였지만 <요가학원>에서는 오로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연기를 했습니다.
시나리오 받았을 때, 나니라는 캐릭터가 먼저 보이긴 했지만 그 주변에 캐릭터가 너무 많았어요.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이 캐스팅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7명의 배우들이 다 모이면 정말 많은 불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굉장히 많았었죠. 여자 배우 2명만 모여도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진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거든요. 그런 얘기 못 들어보셨어요? (웃음) 그런데 2명도 아니고 7명인데 이게 과연 잘 풀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처음에 저희끼리 미팅을 했던 장소가 요가학원이었어요.
<요가학원>을 찍기 위해서 요가학원에 모였군요. (웃음)
예. 그렇게 1명씩 들어오면서 서로 인사하고 곧바로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서 요가를 시작했죠. 서로 말로서 통성명하긴 했지만 그 사람의 이면을 보기 전부터 저희끼린 몸으로 같이 부딪힌 셈이죠. 사실 유진이 빼고 다들 요가를 처음 접해보는 거라서 모두 몸이 힘들고 지치는 상태였고 그래서 더욱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요가 덕분에 서로에게 더 편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거죠.
아무래도 요가 마스터를 연기하는 만큼 영화상에서 보다 숙련된 요가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요?
정말 부담이 많았어요. 저는 요가가 처음이라 <요가학원>에 캐스팅되고 나서 남들보다 3주 일찍 매일 4시간씩 원장님과 혼자서 연습을 했었죠. 제가 3주 동안 열심히 했다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 동작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3주 만에 될 수 있는 동작들이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이제 3주 후에 다른 친구들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유진이가 오자마자 한번에 제가 못했던 것들을 하는 거에요. 유진이는 5년 전부터 요가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보니까 제가 3주 동안 했던 것들이 너무 허탈해지고,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어요. 그때 당시 실력으로 보자면 유진이가 마스터를 해야 되고 제가 유진이 역할을 해야 했던 입장이었던 거죠. 제가 그토록 하려고 했다가 실패했던 동작을 유진이가 한번에 하는 걸 보고 순간적으로 무너져버렸어요. 그 3주 동안 한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그때 술 한잔 했어요. (웃음) 그리고 어느 정도 집착은 버렸어요. 이게 금방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구나, 그러니 3개월 안에 최선을 다해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천천히 다시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기능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심리적으로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영화에선 나름대로 제 몫을 해낸 느낌인데요. 힘들었던 만큼 만족감도 크지 않았을까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던 작업이었어요. 제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런 소재였으니까요. 요가 초급 과정의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선생으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3개월 안에 그 정도 수준으로 피치를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그만큼 몸도 힘들었지만 캐릭터로서 중심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심리적 부담이 많았죠. 그런 덕분에 나니에게 많이 배워가게 된 입장이 됐어요. 저를 바꾸게 된 입장인 거죠. 덕분에 몸도 많이 밝아졌고, 이렇게 저를 자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게 됐고, 제 안에서 여러 가지로 차수연이란 배우를 업그레이드시켜준 영화가 된 거 같아요.
혹시 <요가학원>에서 욕심 나는 다른 캐릭터는 없었나요?
저는 나니가 좋던데요. (웃음) 물론 개인적으로 <요가학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캐릭터는 인순인 거 같아요. 인순의 강박증은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 분들도 다 갖고 계실 거에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공감이 갔죠. 마치 여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캐릭터 같아요.
<요가학원>은 외모지상주의 세태를 공포로 치환한 작품입니다. 그만큼 여성들이 느끼는 강박도 많이 묘사되고요. 사실 차수연 씨와 같은 배우들이야말로 외모에 대한 강박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직업이 아닐까 싶은데요. 혹시 지금까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낀 적은 없나요? 물론 지금도 충분히 예쁘시지만. (웃음)
저도 외모적인 콤플렉스는 분명히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저희는 얼굴이 먼저 보여지는 사람이고 그만큼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눈길이 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예뻐서 눈에 띄는 연기자나 배우가 있는 반면에 너무 예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연기적인 매력이 갖춰졌기 때문에 얼굴 자체가 아름답게 보이는 배우도 있는 거 같아요. 갈 길이 다 다른 거죠. 사실 너무 예뻐서 그 배역이 잘 안 보이는 배우들도 있잖아요. 얼마나 짜증나겠어요. 너무 예쁜 게 죄인거지. (웃음) 캐릭터가 보여야 되는데 너무 예뻐서 배우의 얼굴이 보이는 거죠. 저도 너무 예쁜 배우들을 보면 너무 예뻐서 캐릭터가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얼굴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는 눈에 띄게 예쁘지 않기 때문에 캐릭터를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영화 관계자 분들에게 종종 어느 캐릭터를 맡더라도 그 캐릭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이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만큼 저는 캐릭터가 잘 스며들 수 있는 베이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캐릭터의 내면적인 부분을 보여주는데 보다 유리한 입장이고 그만큼 연기적인 수준을 많이 끌어올려주면 제 얼굴이 아름답게 비춰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무래도 장단점이 있는 거죠. 단지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되는 거 같아요.
차수연 씨도 눈에 띄게 예쁘신 것 같은데요. (웃음) 예전에 전도연 씨를 닮고 싶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네요. 그만큼 자기 역할에 헌신적인 배우를 선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배우로서 너무 망가졌다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때로 꺼려지는 일이 아닐까요.
<요가학원>이전에 <집행자>를 찍을 때 윤계상 선배랑 베드신이 있었는데 그 신에서 우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옆 방에서 조용히 하라면서 벽을 두드리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맡은 캐릭터가 좀 당차서 너나 조용히 하라면서 막 소리지르고 도리어 그 벽을 치는 모습이 나와요. 그 한 샷을 찍고 나서 감독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나는 오케이지만 네가 한번 봐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왜요? 저는 괜찮은데요.”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아니, 여배우가 이렇게 안 예쁘게 나오면 본인에게 좀 그렇지 않아? 다시 찍을래?” 하시는 거에요. 사실 어떤 분들은 카메라에 예쁘게 비춰질 수 있는 각도를 잘 알아서 스크린에서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그 각도로 비춰지려고 노력하는 분들도 많이 있어요. 솔직히 저는 그 캐릭터로서 확실하게 보이는 게 얼굴이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배우로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계속 연기적으로 노력하고 자기 계발을 해서 제 캐릭터가 잘 보이게 되면 그게 저를 아름답게 보여줄 거라 생각해요. 저 역시도 그런 배우가 예쁘게 보이고요. 어쩌면 그게 저와 다른 배우들의 차이일지도 모르죠.
<집행자>얘기가 나왔는데 사실 <집행자>에 차수연 씨가 출연했다는 건 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알았습니다. 남자배우들에 대한 정보만 공개됐더군요.
홍일점이에요. (웃음) <요가학원> 들어가기 전에 촬영은 다 마친 상태였고요. 올해 11월에 개봉될 거 같아요.
올해에 개봉작 가운데 4편이나 차수연 씨의 이름이 올라가는 셈이군요.
혹시 <보트> 보셨어요?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고의적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차수연 씨 출연작은 다 봤습니다.
와! (웃음)
2년 전 인터뷰에서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캐스팅 배경이 하정우 씨의 추천 덕분이라고 하셨죠. 그리고 <보트>에서 하정우 씨와 함께 출연했습니다.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배우와 한 작품에서 만난다는 게 편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2년 전만 해도 하정우 씨는 떠오르는 신인이었지만 이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가 됐고요. 그걸 옆에서 지켜본 입장이 어땠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정우 오빠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옆에서 보면 배울 점도 많고, 연기에 대한 주관도 뚜렷하신 분이니까요. 에너지가 정말 넘치는 배우에요. 그리고 저도 그 에너지를 받아서 더 좋은 에너지로 쓸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배우인 거 같고요. 우선 촬영장을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배우인 거 같아요. 저는 제 것 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아직까진 그런 여유가 없지만 정우 오빠는 그런 여유로 현장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연기에서도 자연스럽게 여유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얼마나 치밀한 계획과 설정들을 갖고 연기하시겠어요. 저는 아직 많은 경험이 적은 배우라서 여전히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데 옆에서 오빠가 그런 부분들을 집어주기도 했어요. <보트>에서 담배 피는 연기를 할 때,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을 만큼 과하다 싶은 제안까지 주더라고요. “혀로 끄면 참 임팩트 있겠다.” (웃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제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아니면, “담배를 피우고 나서 컵에 집어넣어봐. 그럼 좀 살 것 같은데.” 그렇게 사소하지만 제가 섬세하게 잡아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살짝 건드려주곤 했죠. 너무 감사했어요.
<오감도>에서 허진호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하셨죠. 허진호 감독님의 작품이라 점만으로도 멜로 연기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요?
<오감도>촬영은 4일 동안 했는데 아직 저에겐 짧은 시간에 그 배역으로 빠져들 수 있는 노련미가 없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어요. 그저 허진호 감독님을 믿고 멜로라는 장르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보려 노력했던 거죠. 그래서 사실 <오감도>인터뷰 때는 기자 분들에게 재미있게 말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오감도>에서 귀신 역할을 맡았고, <별빛 속으로>에서도 귀신 역할이었는데, 이번에 <요가학원>도 사실 귀신에 가까운 역할이었죠. 아무래도 차수연 씨의 인상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있는데요. 아무래도 저는 차수연 씨의 눈동자가 그런 감상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기자 분들이 도리어 저한테 자신의 신비스런 이미지가 어디서 나오는 거 같냐고 물어보시곤 하는데 저도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제 눈동자에서 묘하고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나온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니까요.
본인이 대답하기엔 좀 쑥스러운 답변이잖아요.
저는 했는데! (웃음) 사실 감독님들께서 다들 그렇게 얘기하셔서 제가 스스로 캠으로 저 자신을 찍어봤어요. 그렇게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제 까만 눈동자가 흰자 부분을 좀 더 많이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좀 묘한 느낌으로 발산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큰 눈이 아닌데도 좀 더 커 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생기는 거 같고요.
사실 지금까지 신비스럽거나 차갑고 속 모를 느낌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각인시킨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아니요. 저는 저에게서 제일 처음으로 보여지는 이미지가 그런 것이라면 먼저 그런 이미지로 성공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잘 하고, 잘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가 정확하게 보이면 이제 또 다른 이미지를 제 안에서 찾으려고 하겠죠. 예를 들어서 정우 오빠는 <추격자>에서 살인자 역할로 성공했잖아요. 그 이후로 살인자 역할은 이제 안 들어온다고 해요. 그런 것처럼 저도 차갑고 신비스런 이미지로 정확히 쐐기를 박아주면 그 다음엔 감독님들께서 또 다른 이미지의 저를 원하지 않으실까요? 제 안엔 또 다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 때 그런 이미지를 보여주면 되겠죠.
유일하게 제 시기에 정상적으로(?) 개봉되는 첫 영화다.
사실 다른 감독들에겐 지극히 정상적인 사실이겠지만 나로서는 유일하게 처음으로 제 때 개봉되는 영화라서 감개무량하다. 비관적으로 생각하면 지금까지 내 팔자가 그랬던 건데 어쨌든 이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이를 잠식하는 두 가지 사건이 생겨서 기분이 좀 거시기하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맞았고, 뜻하지 않게 안티 <반두비> 세력들이 엄청난 악성 댓글을 올리는 바람에, 그래도 일단 개봉된다는 건 좋은 거지. 이번 계기를 통해서 다음 작품들은 이제 시차를 두지 않고 완성될 때마다 제 때 개봉했으면 좋겠다. (웃음)
<반두비>가 친구란 의미의 방글라데시 단어라고 들었다.
사실 현지 발음대로 부르면 ‘반도비’가 맞다. 그런데 <반도비>라고 쓰면 반도에 내린 비? (웃음) 아무래도 굳이 ‘반두비’라는 발음을 선택한 건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어감 때문이다. 이미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반두비’라는 제목의 동화책이 나왔더라. 어느 초등학교에 전학 온 방글라데시 출신 어린이와 한국 아이들의 우정을 다룬 내용인데 그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그 친근함에 필이 꽂혔다. 미국에서 ‘어륀지’라고 부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오렌지’라고 하는 것처럼, ‘머다나’보단 우리나라에선 ‘마돈나’가 익숙한 것처럼 ‘반두비’라는 어감이 내겐 느낌이 왔다. 이게 비록 외국어라서 처음 듣는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는 제목이지만 국경을 초월하는 유니버셜한 느낌이 나한테 와 닿아서 과감하게 제목으로 선택했다.
밝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열망이 네이밍 단계에서 이미 실현된 것 같다. (웃음)
욕심인지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느낌이다. 전작인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열 명 중에 한 명도 제목을 제대로 기억하는 분이 없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 콤마(,)가 있다는 건데 민용준 기자도 항상 그거 안 넣더라. (웃음) 사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어려운 제목이긴 한데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My friend & his wife>, 상당히 시적인 음율이 가진 제목이 된다. 어쨌든 이번만큼은 발음하기 편한 제목을 붙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지.
<방문자>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정치적 메타포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영화지만 <반두비>는 그보다 적나라한 대사나 행위를 통해 현실정치를 손가락질한다.
내 작품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는 건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그런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고. (웃음) 작품을 만들 때 난 항상 시대의 공기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자세를 염두에 둔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 작품을 만드는 상황이 영화에 반영된다. <반두비>를 촬영하기 직전에 격렬한 촛불 시위가 있었고, 서울시 교육감 선거도 있다 보니 그런 게 자연스럽게 주인공들의 일상적인 배경으로 자리를 하게 되더라. 애초부터 정치적인 메타포를 넣고자 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작품을 만드는 상황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그 상황을 보는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 들어서 그렇게 됐다. 그래서 그렇게 완성된 영화를 보다가 나도 놀라는 경우가 있고. (웃음)
<반두비>가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라고 들었다. (신동일 감독은 한 여고생이 자신이 다니던 학원선생님과 함께 부모를 살해하고 학원비를 탈취했던 사건이 <반두비>의 배경이 됐다고 밝힌 바가 있다.)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건 언제부터였나.
정확히는 2001년 한 11월 즈음에 어느 지하철 안이었던 것 같다. 지하철 선반에 놓인 스포츠신문을 우연히 보다가 그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걸 무조건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긴 했지만 그걸 바로 추진할 순 없었다. 그 당시는 내가 <신성가족>이라는 단편을 만들었지만 장편영화로 데뷔하기 전이었고 그 당시 한국영화 제작현실이 이런 소재의 영화를 만들기 어려운 주변 여건이었으니까. 그러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 완성하고 나서야 이제 본격적으로 만들어야지 싶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6년에서야 가능하게 된 셈이다. 그러니까 그 동안 계속 언젠가 영화로 만들겠다고 내 마음 언저리에 계속 묻어뒀던 소재가 된 거지.
그 실화가 당신에게 흥미를 부여한 지점이 궁금하다. 그 사건인가, 그 사건을 둘러싼 환경인가?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한 자극적인 사건이었는데 무엇보다 내가 주목했던 건 그 사건을 일으킨 여고생을 그렇게까지 만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렇게까지 상황을 어긋나게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런 죄악을 저지른 여학생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소재에 대한 흥미보단 사회현실에 대한 분노와 개인에 대한 애처로움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한 셈이지.
그런데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생각은 없었던 건가? 결국 모티브가 된 그 사건을 그대로 영화화시키진 못한 셈이다.
내가 포기했지.
그 모티브로부터 전혀 다른 형태의 <반두비>가 완성된 건 어느 연유인가?
불과 17~18살 밖에 안된, 꿈과 이상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나이의 여학생이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작용해 영화를 만든 건 맞지만 실제로 영화는 그 실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비록 2001년도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지금도 입시 문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걸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나름대로 영화를,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극적으로 여고생이 주인공인 영화를 통해서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라도 응원과 격려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유감스럽게도 청소년 관람불가가 나왔지만. (웃음)
여고생이란 소재는 결국 그 실화에서 발췌된 셈인데 그 과정에서 이주노동자 캐릭터를 연결하게 된 착상의 시작이 궁금하다. 둘 사이엔 연관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당연히 궁금할 거다. 실화를 재현의 소재로 다뤄서 영화로 만드는 건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 때문에 포기했지만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둔 영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반두비>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두 여고생 얘기로 풀자고 결심했지. 한 명은 지금의 민서처럼 가난한 아이, 또 한 명은 유정이라는 아이인데 아버지가 학원장이라서 학원 선생들이 집에 와서 개인교습을 해주는 유복한 부잣집 아이였다. 그리고 둘은 절친한 친구인데 어쩌면 여성판 예준과 재문 같은 관계라 볼 수 있는 우정 얘기로 다루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정이라는 애는 앞날이 보장된 애다. 반면 민서라는 아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과외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용돈도 넉넉치 않다. 한마디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아이다. 요즘 서울대 진학하는 애들 대부분이 안정적인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들이더라. 개천에서 용 나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할 정도지. 어쨌든 내가 얘를 대학 보낼 방법을 고민하면서 찾다 보니까 사회 봉사활동으로 포인트를 얻어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이주노동자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아이디어가 생각났고 거기서 카림이라는 제3의 인물이 나왔다. 그런데 이대로 시나리오를 썼다가 제작은 포기했다. 작품 활동 몇 번 해보고 나니까 직감적으로 이 이야기는 현재 한국에서 만들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
어째서?
유정이는 좀 있는 집 아이니까 있어 보이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미술비용이 많이 들 거 같았고, 그만큼 제작비가 더 들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예 유정을 날려버리고 민서와 카림 얘기로 집중하자 생각해서 카림이 남자주인공이 됐다. 그러니까 우연히 드라마의 필요성에 의해서 대상이 된 인물로 생각했던 이주노동자가 작품이 더 구체화되고 심화되는 과정에서 단순한 대상이 아닌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당신과 전혀 무관한 본질은 아닐 것 같다. 사회적 약자를 캐릭터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또 다른 흥미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기본적으로 나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내가 민서와 카림을 주인공으로 얘기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한 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카림이 존재적으로 아웃사이더라면 민서는 시기적으로 아웃사이더다. 카림 같은 경우는 이방인으로서 한국사회 하층민의 존재를 대변한다. 민서 같은 경우, 가장 에너지틱하고 젊음을 발산해야 할 십대 후반 사춘기 시기에 입시 이데올로기에 젊음을 저당 잡힌 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아웃사이더라는 동질성이 형성하는 드라마적인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더라. 덕분에 이렇게 전무후무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원래 시나리오대로 두 여고생을 중심으로 한 영화였다면 <나의 친구, 그의 아내>와 비슷한 관계를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반두비>의 민서와 카림은 마치 <방문자>의 호준과 계상의 관계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관계가 형성되고 방향성을 얻는다.
언뜻 봐서는 전혀 무관한 사이처럼 보이는 관계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다 연관돼있다고 생각한다. 또 내 나름대로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계를 연관시킬 수 있는 거 같다. 물론 그 관계는 우호적일 수도 있지만 적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우호적인 관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주노동자보단 여고생이 한국사회에서 계급적으로 우위에 섰다고 할 수 있고, 거기서 둘 사이의 갈등도 발생한다. 하지만 자신은 편견이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이라 생각하는 민서가 자기에게도 속물적이고 차별적인 시선이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자각하면서 변모하는 모습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 보여진다.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변화가 그려진다는 게 중요했다.
일반적인 한국인이라면 카림과 같은 이주노동자 외국인에 대해 보편적인 포비아를 공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당신은 어땠나?
나도 포비아가 있었던 거 같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때문인지 몰라도 강한 거부감을 느낀 적이 없었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내츄럴 본(natural born)’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이나 애정이 좀 강하게 형성된 것 같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주인공인 영화도 거리낌없이 만들 수 있었던 거 같고, <나의 친구>에서 다룬 미용사나 요리사는 서민, 노동자 계급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반두비>도 후진국 유색인종이나 무슬림처럼 타자화된 사람을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거부감은 애초에 없었던 거 같다. 이주노동자 문화제 같은 곳에서도 친절함을 느낀 적은 있지만 경계심이 든 적은 없었으니까. 안타까운 건 그런 편견들이 너무나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영화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제노포비아 현상이 인터넷 댓글을 통해 펼쳐진다는 것에 놀랐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잠재적 수준이 있었음에도 예상보다 높은 수위의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과 직접적인 체감의 강도차도 다를 것 같고.
내 자신이 잘 났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덜 떨어진 인간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 충격적이었다. (웃음) 너무 안타깝지. 친절하게 대사로도 나오지만, <반두비>의 주제는 ‘Open your mind. 마음의 문을 열어’다. 상대방은 마음을 열려고 하는데 굳이 그런 걸 절대적으로 거부하거나 외면하려는 분이 계시다는 게 안타깝다. 하지만 그 분들도 소통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 분들을 만나보고도 싶다. 만나서 서로에 대한 오해나 선입견을 허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고,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분들께서 꼭 영화를 보셔야 할 것 같다. 오히려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심하게 매도하는 게 아닐까. 영화를 보여주면 내 진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분들에게 <반두비>가 조금이나마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고.
2001년도의 사건을 모티브로 했지만 배경은 엄연히 현재다. 여고생들의 실상에 대한 취재도 필요했을 것 같다. 2001년도에 알게 된 그 사건과 도입부 여고생들의 방과 후 시퀀스가 좀 맞닿아 있는 거 같다. 일종의 맹아라고 할까. 그 사건엔 서울대에 가야 한다는 여고생의 강박관념과 이에 갈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부추긴 학원장의 역할이 있었다. 짧은 시퀀스지만 현재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고생의 모습은 실제 사건의 여고생을 짓누르던 강박관념을 연상시킬만한 짧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 학생들이 주고 받는 대사들은 내가 특별히 지정한 대사가 아니라 내가 준 모티브를 바탕으로 그 아이들끼리 직접 만든 대사였다. 나는 방학 되면 뭐할지, 학원과 관련해서 스스로 너희가 대사를 만들어봐, 라는 간단한 가이드만 제시했다. 리허설하면서 들어보니까 그 친구들의 보편적인 정서나 가치관을 반영하는 대사처럼 들려서 생동감이 느껴지더라. 실제 고등학생들의 영어점수에 대한 고민이나 방학기간 학원 문제가 자연스럽게 반영됐다. 방학이면 학생들이 여행을 가거나 책을 읽으면서 자기 정신을 살찌워야 되는데 오히려 방학에 더 집중적으로 입시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안타깝고 비극적이지. 민서가 돋보이는 건 그런 안타까움에 저항하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그 도입부에서 친구들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민서의 행동 자체가 드라마가 되는 셈이지.
드라마적으론 비논리적 상황을 연출하지만 논리적 형태의 현실참여적 발언들이 그 비논리를 중화시키는 역할로서 작동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작품이 불균질하게 느껴진다.
브레히트는 연극 도중 관객이 몰입하는 순간에 디테치(detach), 이화를 시켜버린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버린다던가, 엉뚱하게 노래를 부른다던가, 결국 영화로 따지면 관객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영화 속에 담긴 세계가 단지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서 영화를 감상하는 거다. 나에게도 영화보다 중요한 건 현실이라는 걸 환기시키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그런 걸 느끼면서 거리감을 두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부분을 느끼면서 뭔가를 곱씹거나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런 것들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균열을 일으키거나 혼돈을 발생시켜서 극적 몰입을 방해하거나 떨어뜨리기도 하는데 그게 내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단점 같기도 하고, 장점 같기도 하고, 그런 점에서 반응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거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내 작품이 불균질한 건 사실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해서 당신에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에 대한 언급은 몇 번 정도 이뤄졌다. 하지만 허구적인 영향력을 미친 작가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영향을 받았다기 보단 내가 관심 있었던 작가라면 두 명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내가 2년 전쯤에 프라하에 들렀던 적이 있는데 카프카 박물관에서 카프카에 대한 상징적 유물들을 보면서 카프카가 지닌 기괴함이나 기묘함을 느꼈다. 언캐니(uncanny)하다고 할까. 대학교 때 카프카의 부조리한 태도에 미세하게나마 비이성적인 측면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히트는 당시 주된 흐름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사이론과 정반대에 가까운 소외효과(alienation effect)와 같은 서사 이론을 창립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은 지금 연극을 보고 있습니다, 라는 걸 인지하게 만드는 건 지극히 이성적인 방식이다. 나는 내 작품이 이성과 감성이 혼재된 형태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사과>를 만든 강이관 감독과 친분이 있는데 내 세 작품을 다 보고 내 작품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작품이라 규정하더라.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거 같지만 난 내 작품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정리하기엔 오묘한 구석이 있는 거 같다. 의외지만 데이빗 린치 영화를 좋아한다. 내가 그런 영화를 만든 적은 없고, 만들기도 힘든 작품이지만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는 데이빗 린치의 기괴한 세계관이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내 작품의 엉뚱함은 분명 그런 취향과도 관련이 있을 거다. 또라이나 변태 같은 면도 있는 거 같고. (웃음)
사실 <반두비>에서 선정적이라고 지적될만한 문제적 장면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의 신과 민서와 카림의 침대 신이 아닐까 싶다. 그 부분에 대한 염려는 전혀 없었나?
그 장면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는 구실이 된 장면 같긴 한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관객들의 몫이다. 드라마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그 장면들은 상당히 긴장할만한 장면이다. 로맨틱코미디처럼 진행되는 영화를 무장해제된 상태로 관람하다가 충격을 먹을 수 있는 장면이랄까. 세대를 막론하고 낯설고 불편해질 수 있는 장면 같은데 나이가 많을수록 더 불편할 가능성이 크겠지.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성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해본 적이 없을수록 충격적일 거다. 여고생이 얼굴 시커먼 남자를 자기 집에 데려와서 같이 밥을 먹고 침대에서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테니까. 사실 그 동안의 드라마 흐름을 다른 느낌으로 전환시키거나 벽을 형성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왜 들어갔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민서가 그런 행동을 한 이면과 배경을 관객들이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관객들이 메워줘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어쩌면 신동일표 영화가 그래서 그런 거 같다. (웃음) 보기엔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무엇이 있다고 할까. ‘싸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강렬한 현실이 영화에 반영되는 거 같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가 상당히 불균질하지 않나. 갑자기 이야기와 관계없는 유머나 농담이 어처구니 없게 튀어나오기도 하고. 나와 전혀 다른 세계이긴 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그 분에 대해서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완성된 모양새나 형태에 대해서 괜히 시비 걸고 싶거나 스스로 파괴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어서 그런 장면들이 나온다고 봤을 때 나 역시도 드라마 공식이라 할만한 것들을 죽비로 내려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랄까.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이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듯 여러 감정을 겪게 만들지만 난 그 사이에 멈춰서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스톱을 외치고 싶어진다. 그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분들은 반갑기도 하고, 신선함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분노를 일으키거나 완성도에 흠이 생긴다고 지적하기도 하더라.
민서가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선생님을 만난 뒤 함께 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전환되는 시퀀스가 재미있었다. ‘이게 첫 번째 상담인 거 아세요?’라는 민서의 대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불순한 신 뒤에 되레 긍정적인 방향의 드라마가 형성된다는 게 상당히 흥미로웠다.
평범하고 안정돼 보이는 현상이나 관계의 수면을 뒤집어 보면 때때로 그 아래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점이 발견된다. 결국 임계점이나 비등점에 달하면 터질 거다. 난 창작하는데 있어서 전복적인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잠깐 뒤집어보고 의심해보면 새로운 이면이 보일 수 있다. 어처구니없게 만난 두 사람이 그 불편한 사건 직후에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상황에서 코미디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뒤집어서 관계를 바라보면 인생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처럼 보일 때가 있다. 엉뚱하다고 볼 수 있고, 단순히 유머러스하다 말할 수 있지만 평온해 보이는 관계의 이면에 포진한 끓는 점을 표출시켜보고 싶었다. 평범한 수위의 비범함이 있고, 비범한 수위의 평범함이 있는 것처럼.
전복적인 상황을 통해서 창작적 영감을 얻는다면 요즘 같은 세태는 정말 창작을 부추기는 텃밭이나 다름없겠다. (웃음)
내가 요새 상당히 기시감을 많이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격동기였던 87년에 한참 감수성이 예민했던 나이이자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지금 왜 그때로 돌아간 거 같을까? (웃음) 지금 87년이 다시 돌아온 거 같다. 그 당시 정치적 민주화 정도나 사회적 성숙 정도가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다. 한마디로 22년을 쇠퇴했다고 할까. 그 당시 집회나 데모 현장에서 느꼈던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금도 든다면 지난 20여 년간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이 됐다는 우리 나름대로의 성취감이 착각이나 신기루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것들이 훼손되고 붕괴되는 실정이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거의 ‘파시즘X’, ‘유사 파시즘’이라 불릴만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지금의 내가 대학생 당시 느꼈던 감정을 느끼다 보니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기도 한데, (웃음) 그렇다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사고수준이 22년 전으로 후퇴했다는 것도 아니라면 이 사회가 지금 22년 전 현실을 생각나게 만든다는 것이겠지. 한마디로 비극적인 코미디다. 다만 비극인지 코미디인지 분간이 잘 안될 뿐이지.
웬만한 부조리극은 명함을 내밀 수 없는 현실이랄까. (웃음) 지금 현 대통령이시고, 알고 보면 학교 선배님이신 청와대의 그 분이, (웃음) 어제 중도라는 표현을 하셨지만 아마 그 단어의 뜻을 알고 얘기하신 것 같지가 않더라. (웃음) 보수라는 분이 자신의 실용주의를 중도라고 말씀하시는 거 보면 얼마나 불안하고 스스로 몰렸다고 생각해면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래서 그 분을 좀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3년 반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편치 못하게 사시는 것보단 차라리 그 분께서 안락함을 찾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고, 아마 그 힌트가 담긴 <반두비>를 보면 마음의 위안을 찾지 않으실까. (웃음) 그래서 그 분이 좀 보셨으면 좋겠는데. <방문자> 만들 때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 그 당시 전세계를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자였던 부시가 <방문자>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 은근히 있었는데, (웃음) 이번에도 좀 그렇다. <반두비>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대통령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물론 제가 지금 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건 아니다. (웃음) 나름대로 이렇게 얘기했지만 이게 다 그 분 잘못은 절대 아니거든. 그 분을 뽑은 천만 명의 어리석은 선택이 더 문제지.
사실 제스처만 봐도 당신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는 과감하고 급진적이다.
내가 현실에서 풀지 못하고 상상만 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는 것들이 영화 속에서 구체화되거나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만약 내가 현실에 만족하고 있거나 생각했던 욕구가 풀어지는 상태라면 굳이 작품을 만들 동기부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세 작품은 현실사회의 부조리나 모순, 인간사이의 질곡 같이 계속 심화되고 산재하는 문제들, 즉 내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 부분들이 종종 세고 강렬하게 묘사될 뿐, 사실 나 자신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다. (웃음)
백진희 씨를 만났었다. 상당히 주관이 뚜렷한 친구더라.
그렇게 똑부러지는 면 때문에 내가 캐스팅한 거 같기도 하고.
처음으로 외국인을 배우로 캐스팅했는데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작품은 캐스팅부터 모험이었다. <방문자>에서 계상 역할하는 강지환 씨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지숙을 연기한 홍소희 씨나 주연들을 당시 신인배우로 캐스팅했으니까. 세 번째 작품 <반두비>도 두 친구가 아마추어다. 두 친구를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고 연기 경험이 전무한 그 둘을 캐스팅하는 것도 나에겐 모험이었다는 의미다. 게다가 외국인이 주인공인 영화다 보니 굉장히 리스크(risk)가 많았다. 하지만 다행히 마붑이라는 친구가 똑똑하고 지적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커뮤니케이션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진희하고 커뮤니케이션이 더 힘들었지. (웃음) 그건 아무래도 마붑이 맡은 카림이라는 캐릭터가 마붑에게 정서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매치가 되는 덕분에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거 같다.
양해훈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도 재미있었다.
몇몇 내 지인들이 카메오 출연을 했는데 사람들이 항상 양해훈 감독을 언급하는 걸 보니 효과적인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웃음) ‘내수 시장을 살려야 된다’는 명대사도 만들어졌고. (웃음) 나도 듣는 순간 센스 있다고 생각했는데 <반두비>를 찍고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왔다. 그 위기의 대안은 내수시장을 살리는 거 아닌가. 알고 보니 상당히 선견지명이 들어간 대사였다. (웃음)
사실 최고의 카메오는 당신이 아닐까. 엔딩 즈음에 당신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진짜 방글라데시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웃음) 종종 우디알렌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직접 연기를 해볼 생각은 없나?
만약 그러면 한국영화계에 쿠데타적 사건이 되는 거지. 결국 배우들의 세계가 균열이 생기고, 세력 판도가 바뀌는 거라서, 농담이고! (웃음) 적절하다 싶을 때 내가 나올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기는 말 그대로 쿠데타이기 때문에 난 그저 작품의 맛깔스런 양념이 되면 그만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웃음)
전작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배우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행히 나는 배우들 운은 있었던 거 같다. 물론 배우들 입장에선 감독 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웃음) 어느 작품을 하건 충돌은 딱 한번씩 있었다. 오히려 그 충돌이 전화위복이 돼서 서로 힘을 모으고 좋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충돌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까 말했던 비논리적인 흐름을 서사에 익숙한 기성 배우들에게 설득한다는 게 어려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백진희 씨와 같은 신인 배우를 설득하는 작업은 좀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신인들은 백지 상태니까. 감독이 어떻게 리드하는지, 어떻게 힌트를 주느냐, 에 따라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닐 수 있고, 이를 통해 스스로 백지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신인이 더 자유롭게 자기의 끼를 표출하거나 재능을 발산할 수 있는 것 같다. 괜히 어줍잖게 경험한 친구들한테 이렇게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 라고 하면 자기가 가진 경험의 한계에 막혀버리곤 하더라. 진희나 마붑 같은 경우, 백지 상태라는 게 오히려 풍성한 가능성을 끌어내기 좋았던 거 같았다. 겉멋든 연기자보다 경험이 없더라도 열정에 충만한 신인을 더 선호할 수 있는 건 이런 덕분이다.
두 인물의 버디무비라는 형식에서 <반두비>는 <방문자>와 비슷한 관계구도를 그리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발생시키는 개개인의 변화를 전체적인 방향성으로 전환한다는 점에 있다. 그 방향성은 단지 영화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객석과 상응하려는 시도로서 이뤄지곤 한다.
또 다시 변증법 얘기가 나오는데 민서라는 ‘정’ 혹은 ‘반’과, 카림이라는 ‘정’ 또는 ‘반’이 충돌하고, 교감하고, 화합하는 ‘합’이 만들어진다고 할 때, 인물들마다 다 그런 방향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인물과의 관계나 드라마를 만들 때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역할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음으로써 서로의 모습을 닮아가고 서로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긍정적으로 전환해나간다. 나는 내가 그리는 인물 캐릭터들에 대해서 양존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한 편에선 그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그들에게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응시하기도 한다. 사실 관객들을 한 인물에게 감정이입시켜서 롤러코스터처럼 드라마를 끌고 가는 게 그리기 쉬운 방식일 수도 있지만 내 작품은 그 인물에 대해서 잠시 돌이켜보게끔 하는 장치들이 장착되고 그런 이질적인 리듬을 통해서 인물을 바라보거나 인물이 관객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선의 교차가 발생하는 것 같다. 사실 내 작품은 스펙터클을 강화할만한 여건이나 제작 토대가 열악한 편이기 때문에 인물들이 들락날락하면서 형성되는 드라마가 중요하다. 그만큼 인물을 그린다는 건 나에게 흥미로운 작업이다.
관계는 항상 당신 작품의 핵심을 이룬다.
어떤 소재의 작품이라도 인간관계를 다루는 것만으로 풍성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편의상 지금까지 내 작품을 관계 삼부작이라고 했지만 계속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 같다.
<방문자>나 <반두비>처럼 가장 먼 관계를 이야기할 땐 긍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키지만 <나의 친구, 그의 아내>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이야기할 땐 부정적인 방향성을 발생시킨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예준과 재문 같은 경우는 10년에 걸친 우정이라지만 둘 사이엔 계급의 벽이 자리한다. 예준은 승승장구하는 외환딜러로서 자기 자리가 계속 상승하는 친구지만 재문은 그럴 수 없는 존재고 결국 둘 사이의 친근함을 가로막는 권력이란 문제가 대두되고 이런 문제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가족이나 부모, 형제, 친구 같은 사소한 인간관계 속에서 권력이 형성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상황에 놓이면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솔직히 내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만큼 나로선 당연히 그런 관계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반면 전혀 맺어지지 않을 것 같은 관계지만 같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갈 수 있는 관계라면 여지없이 관계를 맺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여고생과 이주노동자는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관계지만 서로의 차이가 존재할 뿐, 공통분모가 있다. 변증법적으로 비적대적 모순관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면 서로를 이해해주는 이해와 연민의 관계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로 관계를 만들고자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현실적 필요성이 무의식적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닌가 싶다.
변화 역시 항상 당신의 테마다.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당신 영화를 성장이라는 단어로 정의하자면 왠지 불순한 태도 같다. 성장은 결국 그것을 말하는 대상과 그것을 통해 말해지는 대상 간의 이해관계가 우열관계로 해석될 수 있는 강제적 용어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당신 영화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보다 나은 사람이 아닌 바에야 그 캐릭터들의 변화를 성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말을 듣고 보니까 성장이란 말은 왠지 강제적인 느낌이 들고, 상대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변화라고 봤을 때 적절한 표현인 거 같다. 어쨌건 내가 쓰는 표현이지만 드라마 자체에서 인물은 세 가지 변화 구도를 지닌다. 스스로 변하거나, 변절되거나, 혹은 여전하거나. 민서는 분명 스스로 변하는 인물이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먹거나 그게 익숙지 않아서 때때로 포크를 쓰는 것처럼 사소하지만 자기 스스로 삶에 적응하거나 인생을 개척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신에서 관객들이 그렇게 느껴준다면 좋겠다. 민서가 변했고 관객도 변했다고, 조금이라도 스스로가 변화되길 갈망하길 바란다.
당신 영화는 항상 그 변화를 통해 희망을 모색하는 느낌이다. 전반적인 비관으로 가득 찬 느낌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도 결말만큼은 그 무거운 공기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어떤 연출자나 감독들은 인간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비관적이거나 비극적으로 인물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내 스스로가 삶이나 인생, 사람에 대해서 낙관적이고자 하는 생각이 비관보다 강하다. 어떻게든 희망의 요소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싶어진다. 그래야 삶에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그런 가치가 조금이라도 존중되고 공유될 수 있을 때, 이 빌어먹을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게 아닐까. (웃음)
<반두비>와 <방문자>에서 민서와 호준은 변하는 사람들이고, 계상과 카림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물들이다. 역할을 달리해서 말하자면 계상과 카림의 역할을 하는 건 당신이고 궁극적으로 민서와 호준과 같은 변화의 몫은 관객인 셈이다.
<반두비>가 예전영화보다 훨씬 더 직설적이고 불편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사실 이주노동자와 여고생이 관계를 맺는다는 게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영화인 만큼 소재 자체가 주는 무거움을 경쾌하게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서 만들고자 했던 건 대중들이 <반두비>를 훨씬 편하게 받아들이고 그만큼 영화가 관객에게 쉽게 다가갔으면 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서가 식사하는 엔딩신에서 캐릭터의 변화를 감지하는 동시에 영화를 감상하던 자기 자신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얻거나 일상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나는 내 영화를 통해 최상의 성취를 이룬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전작들이 사회적 제도나 분위기에 대한 환기였다면 <반두비>는 보다 공격적인 정치적 구호의 뉘앙스가 보다 강하게 피력된다. 특정인물을 적확하게 적시하기도 하고. 이 부분에 대한 호불호가 <반두비>에 대한 장단으로 맞서는 것 같다.
특정인물이 영화에서 묘사되거나 언급되는 것에 대해서 반응이 엇갈리더라. 직설적이라서 통쾌하고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도 있지만 그런 실제인물에 대한 언급을 통해 완성도에서 시비를 얻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더라. 굳이 누군가에 대한 직설적인 언급이나 묘사가 안돼도 충분히 정치적 완성도를 지닌 작품인데 오히려 그런 묘사가 작품에 마이너스를 불렀다고 보시는 분들이 계신다. 사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는 없으니까 내 영화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고 봤을 때, 내가 왜 그런 특정인물을 굳이 영화에 넣었는지에 대한 고민만이 내겐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그만큼 예민해졌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일부로 넣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내가 영화를 만들 때 시대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날 그렇게 부추긴 거지. 민서가 몸담고 있는 공간과 배경의 배후에 특정인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보니 이게 자연스럽게 묻어간 것뿐이지, 무조건 넣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지녔던 건 아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시대가 문제지. 내가 문제가 아니다. (웃음) <반두비> 시나리오의 초고가 난 건 사실 고 노무현 대통령 말기였지만 <반두비> 제작이 가시화된 건 MB정권 초기였고, 이제 정권이 2년 정도 지나는 중에 영화가 개봉됐다. 내 작품이 시대적 공기와 호흡한다고 본다면 시나리오를 쓸 때와 영화를 만들 때 분위기가 워낙 달라지기 때문에 되게 시대적 공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내 작품에 그런 파격을 가져다 주신 현직 대통령님과 현 정권에 감사와 유감을 동시에 표합니다. (웃음)
사실 영화에 현실적 지표들을 온전히 투영했을 때 장단점은 명확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공간성을 명확히 적시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영화적 리얼리즘이 훼손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반두비>에서 시대성을 분명하게 느끼는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거 같다. 사실 시나리오를 보고 아쉬움을 느꼈던 분들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놀라더라. 시나리오엔 잘 표현되지 않는 부분들이 영화를 찍을 때 자연스럽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나 자신도 시나리오를 보고 밋밋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영화에서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상하게도 시나리오보다 완성된 영화가 더 느낌이 좋다는 말을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는데 왜 그런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뭘 넣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었던 걸로 보아서 무언가를 넣게 만든 시대가 나에게 선사한 선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웃음)
<반두비>를 비롯한 당신의 작품들은 항상 정치적인 시선이 강하게 인지되는 탓에 장르적 자질이 많이 가려진다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장르에 입각한 작품을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장르를 굉장히 경멸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변했다. 우리나라에서 종종 상투적으로 ‘당신 작품의 장르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는데 난 그런 질문이 정말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장르로 수렴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인생에서 어떤 날은 공포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코미디 같은 나날이 되고, 어떤 날은 멜로 같은 나날이 된다. 인생 자체가 장르적 혼합이라고 본다면 영화도 이렇게 풍성한 장르가 될 수 있는데 꼭 하나의 코미디, 스릴러, 액션, 이렇게 단순화시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방문자>는 코미디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고,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스릴러 같은 느낌의 영화가 됐다. 이번에 <반두비>는 하이틴 로맨스나 로맨틱 코미디, 넓게는 휴먼드라마로도 불린다. 내가 본능적으로 장르에 대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내가 잘 풀 수 있는 장기가 코미디는 아닐까 싶어지더라. 어떤 특정 장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장르 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위트, 해학과 같은 유머로서 인물을 다루고, 관계를 그려나가는 방식에서 남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 두 가지 장점을 장르와 결합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다음 작품 얘기를 하자니 좀 그렇지만, (웃음) 다음 작품은 그래서 뭔가 다른 형태의 결과가 나올 거 같기도 하다.
차기작에서 지금의 생각들이 깊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다음 작품 같은 경우는 좀 더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장르의 요소가 더 강화될 순 있겠지. 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장르를 경멸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장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감독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코엔 형제 영화를 편차 없이 선호한다. 코엔 형제 영화는 블랙코미디적이면서도 어떤 작품은 스릴러가 강하고, 어떤 작품은 로맨스가 강해지고, 그렇게 장르가 자유자재로 변형되지 않나. 나도 내가 가진 특성이 장르와 결합할 때 결과물이 나로서도 궁금하고 보다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정치적 의식은 차기작에서도 배제될 순 없을 것 같다.
내 작품의 주제는 심플하다. 내 작품에 미학적 야심이나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서로 연대하자는 주제의식이 강할 뿐이지. 그 토대가 우정과 환대라는 거고, 그만큼 소박한 건데 사람들에게 서로의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자고 말하는 게 단순 명료하면서 쉬운 거 같지만 지금은 그런 기본적인 생각들을 전하는 게 오히려 힘들다. 그래서 그런 걸 호소한다는 게 보다 절실한 가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반두비>의 주제는 ‘마음을 열어’라는 대사로 압축된다. 사실 이는 <방문자>를 비롯해 당신의 전작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나 다름없다.
민서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동기부여의 존재는 카림이다. 내 작품이 불과 2억 2천짜리 제작비로 만든 작은 영화지만 보다 많은 분들이 보면서 뭔가 하나를 얻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타자에 대한 깨달음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일 수 있고, 그것이 부담이 되기보단 하나의 즐거움으로써 유쾌하게 이 작품을 만끽하거나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아쉽게도 고등학생들이 볼 수 없게 됐지만 1시간 47분짜리 영화가 오히려 3년 동안 수업시간에 읽고 듣는 교과서보다도 자기 삶의 방향이나 인생에 대해서 더 많은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발 딛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회 현실에 대해서 인지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을 바꿔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얻게 된다면 내 나름대로의 진심이 얼마 정도나마 느껴지는 셈일 테니 나로서는 작품을 만든 보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기분이 어떤가요?
제가 VIP시사회 때 어느 누구도 초대를 못했어요. 어떤 평가를 받을지도 염려스럽고, 저도 그때에서야 처음으로 보는 거라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못했죠. 그래도 최고로 인정받는 윤석 씨와 짝을 해서 그런지 보시고 난 분들께서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조금 안심이 돼요. 그래서 이젠 다 돈 주고 보라고 하려고. (웃음) 5%정도 긴장감이 풀어지긴 했어요. 그래도 관객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니까 조금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는 중이죠.
스크린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도 상당히 오랜만일 텐데요. 그래서 더욱 특별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분에 대해선 생각할 수 없어요. 그저 어느 부분에서 연기가 좀 튀지 않을까 염려를 많이 했죠. 한두 군데 정도 캐릭터와 조금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었다라고 할까? 저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일 수도 있고. 남들이 몰라도 본인은 보이거든요. 아, 저기서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런 게 있죠. 늘 보여요. 그래서 한번도 연기에 만족해본 적이 없기도 하고.
제작보고회 때는 데뷔하는 심정으로 연기했다고도 하셨죠. 아무래도 드라마 위주로 연기활동을 하다가 영화를 한다는 게 그만큼 부담이 되는 일이었나 보죠?
부담스럽죠. 이미 어느 정도는 다 보여준 느낌이고, 그만큼 다들 아마도 그럴 것이다라고 알고 있는 배우일 텐데 아무래도 스크린에선 괜히 달라 보여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역시 영화 촬영이 여러 방면에서 좀 더 섬세해요. 그래서 긴장을 받게 되는 것도 있고. 늘 어떠한 방면이든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무슨 얘기할까 고민되는데 영화 얘기만 나오면 일단 마음이 신인 같아. 제가 신인의 자세로 찍었다고 하니까 사장님이 너무 농담처럼 얘기한대. 진짜라니까! (웃음) 이건 농담 아니에요.
신인이라는 단어엔 설렘과 부담의 중의적 의미가 포함된 게 아닐까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이번엔 너무 운이 좋았어요. 김윤석이란 배우와 같이 그냥 업혀가는 느낌이랄까? 거북이 등에 탄 느낌? (웃음)
김윤석 씨 때문에 영화를 선택했다는 말씀도 하셨죠.
제 연기가 대형스크린으로 보여진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영화는 거의 다 거절했어요.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는 상대배우가 김윤석 씨라고 하니 너무 혹하는 거에요. 그러면 대본이라도 좀 봐야겠다 했죠. 그래서 처음으로 이종용 감독님과 미팅을 하게 된 거고요. 만약 윤석 씨 얘기 못 들었으면 대본도 안 봤을 거에요.
대본을 보고 나서 거절해도 상관없지 않나요?
제 입장에서는 대본을 보고 거절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돼요. 자신의 작품이라면 누구라도 열과 성을 다하면서 뼈를 깎아가는 느낌으로 썼을 텐데 그걸 보고 나서 ‘저 안 해요’, 이러기는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작품 자체를 못할 거 같으면 아예 안 봐요. 사실 영화는 워낙 제가 해보지 못했던 장르잖아요. 그리고 오래 전에 한번 했다가 혼이 났던 기억도 있고요. 그 이후로 작업도 철저해야 하고, 집중력도 요하는 작업이라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도 아예 안 봤을지 모를 일인데 윤석 씨가 출연한다는 말에 보게 된 거죠.
김윤석 씨의 이전 출연작은 얼마나 보셨나요?
<타짜>도 봤고, <추격자>도 봤어요. <추격자>는 남편하고 둘이서 제일 마지막 걸 봤는데 보고 나서 주차장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너무 섬뜩한 거에요. (웃음) 사실 우리 애기 아빠도 영화를 좋아하는데, 남자 배우 둘 다 너무 매력 있다고 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래서 이번에 같이 하는 배우가 ‘김윤석’, 그러니까 ‘정말?’ 되묻더라고요. (웃음)
좋은 연기자와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은 건 연기자로서 당연한 욕망이겠죠. (웃음) 반면 이연우 감독은 <거북이 달린다>가 첫 번째 장편 입봉작입니다. 오랜만에 찍는 영화에 신인감독이라니 불안한 점은 없었나요?
저를 정말 편안하게 해줬어요. 사실 제가 프로포즈를 받고 한달 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못한다고 했었거든요. 상대배우가 너무 좋아서 대본을 봤고 너무 작품도 좋았지만 그 땐 가족문제가 있었어요. 작년에 아이가 수능시험을 봐야 했고, 저도 개인적으로 쉴 기회가 한번도 없어서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때였죠.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못하겠다 그랬는데 그걸 한달 동안 다 받아주셨어요. 제가 촬영장에 적응이 안 될 것 같다니까 자기가 적응하게 해 드릴 거라고. (웃음) 사실 저는 그래요. 일을 하기 전에 사람을 보고 반하거든요. 그래서 작업이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분명히 있어야 일하기가 참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이연우 감독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젊은 사람이 정말 마음을 편하게 해줬어요. 그래서 제가 ‘원래 배우한테는 이런 건가요?’ 물어보니까, ‘원래 배우한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게 영화’라며, ‘영화를 한편하고 나서 이 매력에 빠지면 다신 드라마를 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런 설렘을 많이 줬죠. (웃음) 윤석 씨와 함께 호흡을 맞추기 전에 이미 이연우 감독을 많이 믿게 됐고요. 좋은 사람들이 저를 이렇게 원한다니 같이 작업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그래서 그냥 한번 해봐야겠다 마음먹었어요.
그렇다면 왜 꼭 자신을 선택하려 하는지 궁금하진 않던가요? 이연우 감독님께 한번쯤 여쭤보셨을 것 같은데요.
물어봤죠. 대본을 보고 왜 꼭 이걸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그런데 처음 한마디가 ‘예뻐서요’, 이래요. (웃음) 사실 그래요. 나이 든 아줌마한테 예쁘다고 하면 좋죠. 그래서 막 웃었지만 ‘그건 제가 썩 좋아하는 답은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했더니 어쨌든 저 아니면 안된데요. 사실 저 아니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저 아니고도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충분히 다른 느낌의 조 형사 부인이 됐을 거에요. 그런데 그 쪽에서 견미리 아니면 안 된다, 라고 프로포즈를 하니까 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조형사 아내가 어떤 걸까, 그들이 날 필요로 한다는데 도대체 날 어떻게 그리고 싶어하는 걸까, 내가 그걸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이런 생각에 약간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고.
사실 대부분 시골의 아줌마를 연상한다면 조금 살도 찌고 느슨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런데 <거북이 달린다>의 아내는 오히려 그와 반대적인 이미지라 흥미롭더군요. 그 지점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사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일상적으로 조금 더 변형을 줬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예를 들어서 다섯 살 연상이고, 생활에 찌는 아내라면 기미도 거뭇거뭇하게 올라와 보여야 되고, 머리도 좀 부시시한 파마머리로 갔어야 되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건 우리가 너무 통속적으로만 생각해서 그럴지도 몰라요. 이 여자는 아이들 머리도 한 올 한 올 다 빗겨서 한 가닥도 새어 나오지 않게 딱 묶어주잖아요. 또순이 같이, 뭐 하나 흐트러지는 걸 못 보는 그런 느낌의 여자로 가면 어떨까 싶었어요. 좀 깐깐한, 깡 진 느낌? 제 나름대로 그렇게 바꿔보자고 했는데 조금 아쉬운 건 제 모습이 조금 고왔다는 거? 예뻤다는 게 아니라 조금 생각보다 곱게 보였어요. 사실 기본 메이크업만 하고, 라인 하나도 안 그릴 정도로 화장을 거의 안 했어요. 그런데도 화장기가 있어 보이는 게 좀 아쉬웠죠. 그래서 다음에는 저런 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본래 얼굴이 어디 갈 순 없죠. (웃음) 하지만 어쩌면 그건 자신만이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그 동안 드라마에서는 세련된 도회지 여성의 이미지로 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다고 느껴지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래도 더 평범해 보여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돼요. 체형 자체도 너무 슬림한 게 아닌가 싶고. 그래서 슬림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엉덩이에 속옷도 더 넣고 그랬는데도 영화로 보니까 조금 그렇더라고요. 개인적인 제 생각이 이래요.
결과적으론 그런 외모를 통해서 억척스러운 여자라는 공감대를 보여주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억척스럽다’는 단어가 표현이 강하게 들려서 그렇지, 사실 다들 열심히 살지 않으면 어떻게 살겠어요. 이런 형태에서는 이게 맞고, 저런 형태에서는 저게 맞을 뿐, 각자 거기에 잘 맞춰서 살다 보면 다들 억척스럽게 살 수 밖에 없죠. 보통 아줌마들을 보고 억척스럽다고 얘기하는 건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사는 아줌마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도 사실 개인적으로 무능한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로서 그런 진심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실 조형사가 주인공이라서 나중에 멋있어 지는 거지, 그게 실제 남편이라면 속 터져 죽을 거에요. (웃음) 생각을 해봐, 그게 무슨 형사야. 손가락 잘리고 들어오고, 무술 한답시고 어설프게 폼 잡는 거 보면 어처구니가 없죠. 정경호를 때리려다가 맨날 다른 곳을 찍잖아. 그래서 내가 너무 답답해서 영화를 보다가 (옆자리를 치면서) 진짜 남편한테 뭐라 그랬다니까. 정말 답답해서 저러고 살겠냐고. 너무 영화에 몰입한 거지. (웃음)
조형사의 아내야 말로 진짜 내조의 여왕이죠. (웃음)
진짜 그래요.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양말 뒤집어 가면서,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 (웃음)
조형사의 아내는 아내이자, 엄마이며, 여자입니다. 단순하게 보이지만 섬세하고 복합적인 내면을 지닌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경험이 요구되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겠죠.
굉장히 연기를 잘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20대 초반인데도 4~50대 감정을 다 표현하는 친구들이 있죠. 그런데 사실 그 친구들도 몸에 밴듯한 느낌으로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순 없겠죠. 아무래도 저희 같은 나이의 배우들은 자신 자체가 그런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 걸 의식할 필요가 없어요. 내 남편이 누워있고, 내 새끼가 내 앞에 와 있고, 내가 부업을 할 때, 리액션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일상이니까.
상대배우의 안정감이 주는 시너지도 있었을 거고요.
저희가 하루 만에 만화방에서 세 신을 다 찍었는데 마치 드라마 촬영하듯이 드르륵 찍어서 굉장히 편했어요. 어려움이 없었죠. 그만큼 윤석 씨가 잘 받쳐줬고, 잘 맞았다고 할까. 스폰지 같은, 아니, 그보다도 체형에 맞춰서 흔들리는 물침대? 라텍스 침대에 누우면 신체의 모든 부분이 다 채워지는 느낌이잖아요. 상대가 어떻게 하든 갭이 없게 안착을 해주는, 그런 느낌의 배우였어요. <거북이 달린다>에선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를 은연 중에 보여주지만 사실 사이 좋은 부부처럼 보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음에 또 기회가 생기면 심리적인 교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연기를 같이 해보고 싶은 배우였어요. 이번에는 정말 그저 거북이 등에 탄 느낌이었으니까.
영화에 대한 부담감을 적잖게 말씀하셨는데, 드라마와 비교하자면 어떤가요?
드라마는요. 오랜 시간 시청자들을 젖어 들게 해요. 그래서 처음엔 만약 영자로 시작을 했더라도 끝에 가서 견미리가 되죠. 오래하다 보면 다 제 화(化)되는 거죠. 제가 안 하고 다른 배우가 했다면 또 그 화(化) 되는 거에요. 그렇게 젖어 들어요. 제가 스크린이 무섭다는 건 농담이나 겸손한 말이 아니라 진짜 스크린이 무서워요. 드라마는 ‘쟤 왜 저래’, 그러다가도 그 다음 장면이 나오면 잊어버려요.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잘하면 되죠.
드라마는 매회마다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도 배우에겐 영화보다 좀 더 관대한 매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죠.
그렇죠. 모니터를 꼭 하고 나서 이번 주 저 신에서 제가 너무 아니었더라도 다음에 만회할 수 있는 신이 있어요. 오늘 못했다면 내일 만회하거나 다른 신에서 강하게 임팩트를 주면 되고, 끝날 때쯤 평가를 한꺼번에 하거든요. 영화는 그게 아니잖아요. 영화라는 건 깜깜한 공간에서 2시간 동안 집중해서 보는 만큼 들통나거든요.돈 내고 영화를 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평가를 해버리기 때문에 만족을 못하면 한마디씩 꼭 하잖아요. 그런 순간순간의 평가가 다 오죠. 적어도 ‘누구 때문에’, 이런 소리 듣는 인물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거지! (웃음) 기왕이면 잘 봤다 소리를 듣고 싶죠. 그런데 오히려 연기가 너무 좋더라, 이런 말보단 전반적으로 다 좋았는데 그냥 뭐가 좋았는지 알 수 없을 때 저는 더 좋은 거 같아요. 너무 강해서 딱 보고 나면 뭐가 좋았는지 말할 수 있는 것보단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면 벌써 그 연기에 젖어 들었다는 거니까요.
드라마는 분절된 형태로 방영이 지속되는 만큼 연기톤의 변화도 어느 정도 수용되는 느낌이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적인 연기톤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점과 단점이 있겠죠.
그런 것도 있어요. 그만큼 그 두 시간 동안 빠져들게 만드는 연기를 했을 땐 그 캐릭터에 젖어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거 같아요. 이번에 <거북이 달린다>를 해보고 나니까 다음엔 발랄한 거 내지는 그렇게 삶에 찌든 억척이 아니라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느낌의 억척스러움을 해도 재미있을 거 같고. 그러니까 작품에 따라서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좀 다르죠. 영화배우들이 이런 것 때문에 영화 하는 구나 싶기도 하고.
브라운관에 비해 스크린이 크다는 점도 영화가 두려워지는 이유가 아닐까요.
그런 것도 있죠. 그러니까 결국 정말 잘해야 된다는 거, 공동작업인데 나 때문에 (한숨쉬면서)‘아~’, 이렇게 되진 말아야 되잖아요. 물론 어떤 일에나 그런 부담은 늘 있어요. 드라마에도 있고. 다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좀 더 큰 거죠. 그리고 스크린이 크기 때문에 드라마보다 좀 더 섬세한 연기가 요구된다는 점도 있죠. 드라마는 약간 생방송 같다고 할까. 드라마는 원투쓰리(카메라)로 순발력 있게 탁탁탁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서로 약속하고 다짐하듯 디테일하게 들어가니까 장르적으로 요구되는 연기가 다르죠. 그런 면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연기를 한다는 장르적 느낌을 다르게 만들긴 해요.
어쩌면 <거북이 달린다>로 두려움이라는 허들을 하나 넘은 셈이라 말해도 좋겠어요.
남의 등을 타서 넘었죠. 솔직히! (웃음) 저 혼자 막 달려가라고 하면 두렵겠지만 너무 푸근한 상대를 만났고, 그 사람이 리드하는 대로 몸만 흔들어주면 될 정도로 편했으니까요. 정말 해피한 거죠. (웃음)
사실 그 동안 영화 제의가 없진 않았을 텐데 그 제의를 20년 가까이 뿌리쳤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대단합니다. (웃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시나리오를 본 영화는 거의 없어요. 강제로 집까지 보내서 2~3개 정도 본 건 있지만 대부분 보기 전에 일단 거절부터 했으니까요.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스크린이니까 자신 없었어요. 핑계가 아니라 정말 자신이 없었던 거에요.
자신에게 제의가 들어왔던 작품의 완성된 형태를 보고 나서 아쉬웠던 적은 없었나요?
있었죠. 있었지만 저보다 괜찮은 배우들이 대신 하셨기 때문에 훨씬 좋았다고 생각해요. 이건 드라마도 마찬가지에요. 드라마 제의가 왔을 때, 제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 과감히 못하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다른 분이 했기 때문에 진짜 좋아졌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저도 기분이 좋아요. 그러면 전 그 감독한테 전화해요. 거보라고, 나 아니어도 너무 좋지 않냐고. 그건 진짜 필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욕심이 없다기 보단 그게 시청자나 관객을 위한 진짜 배려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배우에 대한 시선이 달라짐을 느낀 부분은 없었나요?
저는 몰랐는데 사람들이 제가 영화를 했다고 하니까 굉장히 신기해해요. “이번에 영화 했지? 보러 가야지.” 이러면 “그래, 봐.” 이러면서도 보면서 뭐라 그럴까 걱정이 앞서요. 그리고 ‘뭐, 늘 저랬는데’, 이럴까 봐 걱정되고요. 배우로서 차라리 너무 다르게 느껴지는 건 좋아요. 그런데 ‘늘 똑같지’, 이러는 건 조금 섭섭하고 서운하죠. 제가 너무 많이 보여진 연기자이기 때문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런 것들이 좀.
사실 드라마에서 도시적인 이미지를 어필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 면에서 <거북이 달린다>의 시골 형사 아내는 그 이미지만으로 특별한 변화라 인지될 가능성도 적잖습니다.
제가 기존에 몇 년간 해왔던 캐릭터들이 야무지고 도시적인 느낌이 있었죠. 그리고 저는 모르겠지만 남들은 제가 사극에서 굉장히 무게감 있는 캐릭터를 맡았을 때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해요. <거북이 달린다>에서 아내는 그런 면에서 다른 역할이긴 하죠. 장르를 옮겼기 때문에 시청자가 아닌 관객들이 제 연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영화 계통에 계시는 분들이 어떤 평가를 할지, 그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 기본적으로 저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이 정도만 돼도 전 감사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아닌 다른 연기자가 했어도 윤석 씨가 잘 맞춰줬을 테고, 그만큼 다른 매력이 있었을 거에요. 저는 ‘나 아니면 안돼’, 이런 생각 별로 안 하거든요. 저희가 선택 받을 때, 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 행복하긴 하지만 막상 스스로 돌이켜 보면 저 아니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색깔이 달라지긴 하겠죠.
캐릭터의 이미지를 통해 배우의 성격을 가늠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역할에 따라서 사람을 멀게 느끼거나 가깝게 느껴는 거 같아요. 예전에 제가 <인현왕후>라는 사극을 할 땐 모든 분들이 다 저한테 착하다고 했어요. ‘아, 착한 사람 왔네’, 그랬어요. 왜 착한지도 모르게 착한 사람이 됐죠. 그런데 <대장금>을 하고 나니까, ‘어휴, 미워죽겠어! 어쩜 그렇게 독하게 해!’ 이러고. (웃음) 그러니까 역할을 잘 맡아야 돼요. 요즘은 우리 애들도 그래요. “엄마, 이젠 그렇게 악역 같은 거 하지마. 사랑 받는 역할만 해.”
자제 분의 수능준비 때문에 <거북이 달린다>를 고사하려 했다는 얘기도 하셨죠.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 악역을 맡지 말라는 자제 분들의 사소한 말이 어머니로서 마음에 걸릴 때가 있을 겁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본인에겐 큰 고민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요. 어쩌다 보니까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제 직업이 배우가 됐죠. 어느 순간에 제가 배우로 평가 받게 된 거에요. 직장인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군가 그런 사실을 평가해주겠죠. 내가 이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지, 이런 게 아니라 그저 연기가 좋아서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배우로서 앞만 보고 뛰었더니 다른 사람들이 너는 연기자라고 평가해준 거에요. 그런데 아이들이 크니까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저는 직업보다도 가정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속된 말로 그런 거 물어보시잖아요. “일이 더 중요해요? 가정이 더 중요해요?” 대부분 둘 다 중요하다고 대답해요. 하지만 전 가정이 더 중요해요. 이상하죠? 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제 일도 중요하지만 제 가족들이 제가 일을 하는 걸 행복하게 생각하고 그럴 때 제 일을 찾는 거지, 제 일을 하기 위해서 가족을 버릴 순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젠 남편이나 아이들이 얘기하는 걸 조금씩 생각하게 돼요. 아이들이 조금 크다 보니까 점점 제 역할을 보게 돼요. 깍쟁이 같은 역할이라도 하면, 그런 역할 말고 집에 있는 평범한 엄마하라고. 그럼 이제 제가 설득을 시키죠. 악역이 있어야 주인공도 있고, 선악이 분명해야 드라마가 재미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게 이렇다니 나도 조금 그렇게 해볼까.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웃음)
(웃음) 그럼요. 집안이 편해야 나와서 일도 잘되죠.
84년도에 탤런트 공채로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84년 3월부터 입사를 한 걸로 됐지만 사실 83년도에 입사했어요. 제가 83학번이라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 저는 연기의 ‘연’자도 몰랐죠. 원래 연예인에 꿈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때 저희가 가수 전영록하면 ‘와~!’하는 세대였는데 저는 그런데 무덤덤했고 오로지 무용밖에 몰랐거든요. 제가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오로지 무용만 생각하는 그런 아이였죠.
그런데 어쩌다 연기자로 입문하신 겁니까?
엄마가 우연히 원서를 갖고 와서 “얘, 한번 원서라도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이런 거 내면 큰일나.” 그랬더니, “얘는, 네가 되겠니. (웃음) 그냥 사진 하나 붙이고 한번 내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머리 빤빤하게 빗고, 엄마 블라우스하고 언니 큐롯(Culotte)바지 입고, 구두 하나 신고, 그렇게 원서 사진 찍어서 하나 붙여 보낸 게, 1차, 2차, 3차 다 통과해버린 거죠. 제 수험번호가 3316번이었어요. 그때 한 6천명 정도가 지원을 했고, 스무 명 정도를 뽑았거든요. 남자 10명, 여자 10명. 그런데 됐어요. 그래서 방송국에 가니까 여자 10명 중에선 저 하나, 남자 10명 중에서 딱 한 명만 연예인의 ‘연’자도 모르는 친구였던 거죠. 있어요. 그 친구도 지금은 그만 뒀는데, 그 친구와 저만 카메라나 연기 경험이 없는 친구였어요. 남들은 다 연극이나 CF경험이라도 있었거든요. 방송국에서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다 어디론가 가요. PD중에 선배도 있고 그러니까 다들 찾아가는데 항상 둘만 그 자리에 앉아있어요. 만날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앉아있는 거죠. 오리엔테이션에서 워크샵으로 작품을 하나 해보는데 암기력만 좋지, 연기는 어떻게 하는 지도 몰라서 헤맬 때는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닌가 보다 싶었죠.
그래도 어떻게 그만 두지 않고 계속 할 수 있었던 걸까요?
그땐 1년 전속계약을 해서 월급을 줘요. 한편 출연하면 5천원을 의무적으로 주는 거죠. 1년 동안 월급을 받고 이걸 하기로 했으니까 학교는 휴학했고 1년 동안 열심히 다녀야겠다, 싶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안 해본 역할이 없었거든요. 1년 동안 단 하루도 안 쉬었어요. 왜냐면 그땐 집전화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밤에 갑자기 전화하면 집에 있는 사람이 몇 명 안됐어요. 제가 항상 연락이 되는 사람 중에 껴 있었던 거죠. 그렇게 가면 뭘 시켰느냐, 더빙을 시켰어요. 그때만 해도 드라마가 대부분 후시녹음이었잖아요. 군중 박수, 이런 것까지 나가서 해야 되는 거에요. 초인종 ‘딩동’소리 듣고 ‘누구세요’, 이런 것까지 입맞춰서 이펙트를 넣어주고. 제가 사실 더빙의 천재에요. 그때 1년 동안 다 배웠거든. (웃음) 그리고 그 1년 동안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라 그걸로 제가 연기를 배웠죠. 그렇게 1년이 지나서 전속이 풀렸는데 365일 바쁘던 애가 이젠 일이 없는 거에요. 이걸 어떡해야 하나 싶었죠. (웃음)
그게 20년이 넘는 연기자 경력의 시작이었군요. (웃음)
만약 제가 하고 싶었던 무용을 계속 했다면 아마 사랑 받는 무용가가 돼있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분명한 건 제가 그냥 욕심이나 생각 없이 주어지는 대로 앞만 봤다는 거죠. 어떤 사심이 없었다는 거에요. 동기들이 주인공을 할 때 어쩌면 어린 마음에 아무래도 부럽기도 했겠지. 그런데 막상 질투하기 보단 내가 저기까지 가기 전에 일단 이걸 잘해야 될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저를 연기자라는 자리에 있게 만든 거 같아요. 그리고 당시에 일에 욕심내면서 스타가 되고자 했던 하던 사람들은 지금은 오히려 다 없어졌어요.
사실 연기의 ‘연’자도 모르고 배우 생활을 시작했던 만큼 아무래도 처음엔 배우로서의 가치관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렇게 연기자로서 삶을 지속하고 있는 만큼 배우로서의 자각이 자리잡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그게 주기적으로 와요. 딱 십 년 된 해였는데 그 전까진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연기를 했거든요. 일단 대본을 받으면 너무 예민해지고 두려웠어요. 맨날 대본을 껴안고 잤죠. 한 십 년간 정말 일하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욕심도 없어지죠. 그런데 십 년 차엔 뭐랄까, 내 연기가 가짜구나 싶었어요. 그 때 45일 동안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매일 밤 무대에 서는 게 도살장에 올라가는 기분이었어요. 관객들 눈이 너무 무서웠고 미치겠는거지. 이건 가짜 연기인데, 이 연기를 갖고 매일 이 관객들 앞에 서는 게 옳은 일인가, 정말 몸살을 했죠. 그래서 그 연극이 끝나고, 그 다음에 들어온 드라마를 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이 일을 그만 둬야겠다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 아마 본능적으로 열심히 했을 거에요. 그 전까진 제 연기를 모니터할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래서 그 때부터 조금씩 생각했죠. ‘아, 그래. 너도 조금 가능성이 있는 아이구나.’ 그렇게 십 년을 넘겼어요. 그런데 또 한번 십 년 차가 되니까 또 그게 오더라고요. 예전에 <사랑공감>이라는 드라마를 할 때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때 또 한번 느꼈죠. ‘아, 이게 또 나한테 오는구나.’ 정말 잘해야 된다는 느낌. 그걸 지내고 나니까 그 다음이 다시 좀 쉬워졌어요. 그래야만 마음이 조금 편해져요. 같은 일을 이십 년 정도 하니까 좀 익숙해지는 거 같아. (웃음)
그런데 <사랑공감>덕분에 상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웃음) 그런 것 때문에 용기를 얻어서 계속 할 수 있는 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인생이 아이러니할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로 자신의 평생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어느 날 밤에 문득 창가에서 제가 여태껏 어떻게 연기자 생활을 했는지 생각해보니 너무 우스운 거에요. 사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버릴 수도 있었는데 어쩜 그렇게 싹싹 잘도 빠져 나왔는지, 어쩜 그렇게 잘 버텼는지, 참 아무 생각 없이 버텼네 싶어서요. 어쩌면 욕심이 없어서 버텨진 거 같아요. 최고가 돼야겠다, 연기를 잘 해야겠다, 스타가 돼야겠다, 이게 아니고 그냥 주어진 걸 한 계단씩 오르다 보니까 가능해진 거죠. 자기가 밑바닥부터 올라갔으면 몇 계단쯤 올라온 줄 알잖아요. 그런데 내려가는 건 쉬워요. 그렇게 어느 순간 딱 떨어지면 어떡해요. 그 괴로움을 참기 힘들죠. 그런데 학연이나 혈연, 지연이 없이 제가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게 지금까지 오히려 저를 연기할 수 있게끔 해준 거 같아요.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올라가다가도 어느 틈엔가 인기 없이 내려올 때도 잘 내려와요. 그냥 툭, 툭, 툭 내려오면 되지, 뭐. (웃음)
스스로는 그렇게 자신을 과소평가하면서도 왜 자꾸 자신에게 연기적인 기회가 주어지는지 의아한 적은 없었습니까?
저는 우리 아이들한테도 이런 얘기를 해요. “지금 당장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앞만 보면서 열심히 가다 보면 누군가 너를 최고로 만들어주고 있더라. 그걸 너 혼자 만든다고 생각하지마. 주변에서 함께 만들어주는 거야. 주변에서 너 최고야, 라는 소리가 나와야 최고지. 네 자신이 너 혼자 아무리 최고라고 해 봤자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네가 최고가 되겠니.” 지나고 보면 참 운 좋았다 싶어요. 저도 자신이 없는데 누가 저를 선택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사장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운 좋게도 누군가 늘 찾아줘서 행복하게도 늘 그 일을 하게끔 만들어줘요.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순간순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픽 나요. ‘어머, 네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연기를.’ (웃음) 사실 여기까지 왔다는 걸 늘 감사해요. <사랑공감> 때는 주인공을 맡고 상까지 받았지만 그 다음에 주연급이 아닌 조연급의 연기를 하니까 어떤 분이 저한테 그랬어요. 저보다 훨씬 스타였던 분인데, “야, 너 이제야 그런 거에서 벗어났는데 왜 그런 역할을 해?” 그러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랬어요. “저는 그냥 견미리니까요. 인기 있는 스타가 아니라 그냥 배우니까요.” 제가 그 맛을 한번 봤다지만 그거 아닌 다른 걸 또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냥 배우라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지, 그 역할에 대해서 크기나 질, 양을 따지겠어요. 질이나 양은 제가 만드는 거죠. 5분을 나와도 5분 동안 제가 충실하면 아마 남을 거에요.
그런 생각들도 사실 당시엔 몰랐지만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그 과정에서는 알기 어려운 사실일지도 모르죠. 다만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가 오는 게 아닐까요.
십 년 지나고 이십 년 지나니까 이런 말을 하지, 십 년 차 되는 해에도 너무 아팠고, 이십 년 차 되는 해에 또 아팠고, 그래서 한편으론 두려워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 이런 두려움이 다시 오면 그 땐 어떻게 극복할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때도 또 힘들어 지겠죠. 아마 그때마다 힘들 거 같아요. 그래도 그 때 아팠던 게 지금은 너무 많이 도움이 되니까 앞으로도 참아야겠죠.
나이에 따라 연기할 수 있는 역할에 제한이 생기기도 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요?
아뇨. 그런 것보단 곱게 나이 들고 싶어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연기자는 너무 나이 먹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고, 너무 젊어서 할 수 없는 역할도 있죠. 참 맞추기 힘들어요. (웃음) 그래도 저는 주름진 얼굴이 친숙하고,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인상으로 비춰지고 싶어요. 그런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사실 사생활에 대해서 많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편이 아닐까 싶은데요.
인터넷이 무서워요. 그런데 저는 어차피 공인이라 그런 무서움을 감수하지만 아이들이 크니까 그게 아이들에게 많은 피해를 줘요. 그래서 어느 때는 인터넷 사이트에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다 지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죠. 걔들은 굉장히 괴로워하거든요. 그리고 차라리 있는 얘기만 하면 괜찮아요. 어느 때 보면 제 딸도 아닌데 제 딸이라고 올라와있을 때도 있다니까요. (웃음) 다만 기분 좋게도 예쁜 애들만 올라와있어서 다행이지. 내 딸보다 훨씬 예쁜 애들이야. 그냥 추측해서 올렸나 보죠. (웃음) 그런데 어쨌든 걔들도 불편할 거 아니에요. 제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저는 연기자일 뿐이지, 스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서 이슈가 되는 게 별로 재미없어요. 그냥 저에게 주어진 걸 잘 하면 되는 거죠.
<거북이 달린다>가 본인에게 준 특별한 변화가 있을까요?
이제 영화배우가 됐으니까 영화 시나리오는 다 받아서 읽어봐야지! 이런 자신감을 줬어요. (웃음)
다음 드라마에 대한 기사가 벌써 났더군요. 주인공이라던데.
아, 그렇게 나갔더라고요. 사실 해볼까 생각하다가 안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홍보가 먼저 나가버렸죠. 연령대가 조금 안 맞더라고요. 영화 개봉했으니까 이제 조금 더 쉬어야겠다 싶어요. 이렇게 몇 달 지나가고 찬바람 불 때쯤 다음 작품 생각해보려고요. 이번엔 좀 많이 쉬고 싶어요. 그런데 또 그러다가도 생선가게 아줌마라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전 후딱 해버리니까요. 제 마음 저도 몰라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