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연희(김윤진)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딸로 인해 걱정을 멈추기 어렵다. 딸이 희귀한 혈액을 지닌 탓에 좀처럼 이식이 가능한 심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그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뇌사 상태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 실려 오고, 그녀의 혈액형이 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희는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휘도(박해일)의 등장과 함께 기대는 불안으로 뒤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 사로잡힌 채 양아치 같은 삶을 살던 휘도(박해일)는 뒤늦게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한다. 그리고 연희는 이를 막고 딸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다다른다.
<심장이 뛴다>는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나는 연희와 휘도의 관계를 통해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화로부터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이는 당연하다. <심장이 뛴다>는 모정이라는, 고전적으로 신파로서의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유용한 소재를 취하며 이야기의 근본을 이룬 작품이다. 그만큼 장르적인 쾌감보다는 드라마틱한 감정선이 보다 와 닿는 영화인 셈이다. <심장이 뛴다>의 특이점은 그 지점에서 나온다. 각자 딸과 어머니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결코 중첩될 필요 없었던 두 삶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 필연적인 관계로 거듭난다는 과정을 다이나믹한 추격전과 심리전의 양상으로 그려나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장이 뛴다>는 이런 특이점을 단점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본다는 건 분명 절박한 감정으로 발전해야 할 터인데 <심장이 뛴다>에서는 좀처럼 그런 어머니의 행위나 감정이 모성이라는 진심으로 와 닿지 못한다. 일찍이 <마더>에서 보여준 것처럼, 본능에 가까운 어미의 본능이란 결코 이성적인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심장이 뛴다> 역시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낸다. 문제는 모성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어미의 모성이 지독하다기 보단 지나치게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타인의 심장을 훔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면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묘사해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면모라는 것이 때때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의 감정 변화도 이해될 뿐, 깊게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어머니의 진심을 깨닫게 된 양아치가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위한 무언가를 하려 든다는 상황 자체는 온당하다. 문제는 그가 취하는 방법론이 딸의 심장을 구하려는 엄마만큼이나 비상식적이며 딱히 설득력 있는 과정 안에서 연출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납득은 더디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무디며 영화가 의도하는 모든 결과적 감상도 얕아진다.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처럼 착각한 듯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는 기분이란 불쾌함과 멀지 않은 것이다.
아이의 심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와 죽어가는 어머니의 뒤늦은 진심을 확인한 망나니 아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난다. <심장이 뛴다>는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내며 그 광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상황의 진전을 통해 극적인 파고를 얻어내고자 하는 스릴러다. 마치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지독한 모성도, 뜨거운 긴장감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으로 착각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고 있자니 되레 성질이 뻗친다.
악의는 연기처럼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힌다. 개인의 삶을 흔들고 때때로 세상을 무력하게 옥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선의 덕분이다. 쉽게 피어나고 흩어져 나가는 악의와 달리 선의는 조심스럽게 피어나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난 뒤, 세상을 치장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바로 그 선의에 관한 이야기다. 선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사연은 텍스트로 옮겨진 뒤, 이미지로 재현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실제 미식축구의 경기 장면과 이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쿼터백(Quarter Back)이다. 각팀에 자리한 쿼터백의 전술을 통해 자신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에 접근시키느냐, 상대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으로부터 밀어내느냐, 에 따라서 승운이 갈리는 게임이다. 전진패스가 불가능한 미식축구에서 득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저돌적인 태클을 피해 공(pigskin)을 안고 터치라인으로 돌진해서 터치다운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전술을 지시하는 쿼터백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만큼 쿼터백의 보호도 중요하다. 미식축구 프로리그(NFL)에서 쿼터백 다음으로 레프트 태클(Left Tackle)이 고액연봉을 받는 것도 그 덕분이다. 레프트 태클의 임무는 바로 그 쿼터백의 보호다. 쿼터백을 향해 태클을 걸 상대 선수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쿼터백의 진로와 시야를 여는 것이 바로 레프트 태클의 임무다. “모든 주부들이 알겠지만 첫째로 돈이 많이 드는 곳이 주택융자금이라면 두 번째는 보험료죠.” 산드라 블록의 내레이션은 미식축구에서 쿼터백과 레프트 태클이 차지하는 포지션의 비중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블라인드 사이드>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가지 기능성을 품고 있다. 만약 미식축구의 룰을 모르는 관객이라고 해도 그 오프닝 시퀀스를 통과한 관객이라면 <블라인드 사이드>가 묘사하는 미식축구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이 영화의지향점으로 안내하는 일종의 팁이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블라인드 사이드 Blind side>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었다. 미식축구 경기장 내에서 레프트 태클이 보호해야 할 쿼터백의 ‘사각지대’를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선의의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155kg의 거구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는 리 앤(산드라 블록)을 통해 부유한 투오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삶의 기회를 열어나간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쿼터백이 터치라인을 향해 팀을 전진시키듯, 정해진 결말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영화이자 단순명료한 룰처럼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다. 중요한 건 단순히 그 결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의 의미를 명확히 다져나가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터치라인이라면, 그 결말에서 얻어져야 할 의미는 터치다운이다. 미식축구가 터치다운을 통해 승패를 가늠하는 게임이듯, <블라인드 사이드>의 성패도 실화가 품은 의미를 영화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영화인 셈이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마이클과 투오이 가족, 그 중에서도 리 앤과의 관계 묘사에 있어서 인상적인 감상을 끌어낸다. 부유한 백인 가정이 열악한 환경에 놓인 흑인 소년을 자신의 울타리로 편입시켜 그가 품은 가능성을 발굴하고, 그의 인생을 보다 나은 궤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의 근거는 리 앤의 선의로서 설명되며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관 안에서 이해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그 선의를 있는 자의 여유 안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선의가 어디서 비롯되고 발전해나갈 수 있었는가의 문제다. 단순히 ‘봉사활동’과 같은 의무적인 행위와는 구별될만한 지점이다. 이런 묘사가 <블라인드 사이드>를 드라마틱한 재현 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실화에 담긴 진심을 포착하고 그 실존적인 감정의 원형을 스크린에 덧입히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사실상 마이클과 리 앤의 관계는 명확하다. 리 앤은 베풀고, 마이클은 받는다. 이는 표면적으로 가진 자가 나누고, 갖지 못한 자가 받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와 유사한 일방향적인 소통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선의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가 낳은 관계의 소통과 발전적 가치를 묘사하는 영화다. 마이클에 대한 리 앤의 헌신이 동정의 수순을 넘어 소통의 관계로 거듭날 때 삶의 의미는 확장되고 진심은 체온을 얻는다. 리 앤과 마이클은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거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리 앤은 마이클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깨닫게 된다. 마이클은 리 앤을 통해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희망을 품게 된다. 마이클과 리 앤은 서로에게 있어서 ‘블라인드 사이드’를 열어주는 관계다. 결국 리 앤이 마이클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마이클 역시 리 앤의 삶을 변하게 만든다.
리 앤의 선의가 마이클에게 통할 수 있는 건 리 앤의 선의가 헌신적이기 이전에 마이클이 그 선의를 받아들일만한 자격이 되는 인물이자 선의가 통할 수 있는 선의를 지닌 인물인 까닭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선의가 위협받는 건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인물들을 통해서다. 당사자들의 진심은 타인의 의심을 통해 흔들리거나 위협받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건 당사자들의 진심에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가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품이자 이를 통해 선의의 가치에 대해서 설득한다. 선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결국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에서 선의의 가능성은 보다 높은 생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렇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심이 담긴 선의가 살아남듯, 드라마를 살리는 것도 그 진심이다.
쿼터백의 지시에 따라 모든 선수들이 터치다운의 활로를 뚫어내는 것처럼, <블라인드 사이드> 역시 실화가 품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크고 작은 요소들의 공헌도가 돋보이는 영화다. 간결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진심을 담아내기 좋은 형태로서 완성됐다. 저마다 적절한 감정의 깊이를 자아내고 관계의 너비를 구축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은 감상을 부른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산드라 블록은 (그 수상자격에 대한 의심 따위는 상관 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의 재현을 넘어 보존이란 측면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품고 있다. 선의는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감동을 보존한다. 이는 우리에게 선의의 발굴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설득하는 동시에 그 가치의 보존이 영화라는 매체의 가치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임을 증명한다.
초콜릿 복근의 ‘언니’들도, 앙증맞은 ‘쉪~’ 애교도, 심지어 ‘빵꾸똥꾸’의 우격다짐도 끝났다. 마치 TV 안이 텅 빈 것만 같다. 하지만 ‘장준혁’이 죽어도, ‘미실’이 죽어도, 드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꽃피는 춘삼월에 폭설이 계절을 역주행해도 드라마는 어김 없이 피고 진다.
조선 시대에서도 대세는 식스팩이었던가. 말 달리는 노비 언니들의 헐벗은 몸이 예사롭지 않았다. <추노>, 도망 노비를 쫓는 노비들. 그러니까 노비 풀어서 노비 잡는 동족상잔의 비극적 체제 위에서 쫓기는 자가 아닌 쫓는 자가 된 노비들은 ‘짐승남’이 될지언정 진짜 짐승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화끈하게 부르짖고 한판 뒤엉켜 붙다가도 껄껄거리며 웃고, 엉엉거리며 울었다. <추노>는 <선덕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인 함수를 품었으나 신념과 이상의 고매함보다도, 삶과 밀착한 의리나 우정이라는 관계의 끈을 통해 미련하지만 우직하게 생의 너비를 채운다.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배신한다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와 보다 나은 세상을 이루려다 눈뜬 채로 죽어나가는 이상주의자들이 결연하게 손을 맞잡고 처연하게 현실과 맞설 때, 단단한 육체가 맞부딪혀 내는 땀의 결정이 모여 이루고자 했던 ‘보다 나은 세상’을 브라운관 밖에서조차 절실히 꿈꾸게 만든다.
고운 소리, 맑은 소리 낸다는 모 피아노 건반이 무색할 정도로 간드러진 비음, 솔로천국 커플지옥을 주창하던, 200년 묵은 홍삼보다도 마음이 묵을 만큼 묵어서 풀어지지 않는다는 솔로들의 마음까지 치즈처럼 녹여버린 그 한 마디, “쉪~.” 주방에서 연애질이 한창인 쉐프와 주방보조의 태업이 돋보이는 연애 드라마 <파스타>는 남녀노소 누구라도 한 번 즈음 꿈꿔봤거나, 지나쳤거나, 혹은 자신도 한 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믿거나……(잠시 5분간 묵념), 어쨌건 판타지다. 불굴의 씩씩함과 천부적인 애교 유전자를 타고난 그녀를 통해 차가운 도시 남자가 그래도 내 여자에겐 따뜻하다는 가설을 온전히 입증해내는 인류적 낭비, 아니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보기 드문 연애질 드라마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후로 단골손님이 뜸했던 트렌디 드라마 매장에서 간만에 단골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파스타>는 이승에서 보기 드문 드라마틱한 사연일지라도 분명 신선하고 담백한 낭만이었다. 최소한 강남에서 뺨 맞고 이런 기분 처음 느낀다는 재벌2세의 사디스트적인 취향을 신데렐라 러브스토리로 진단하는 돌팔이 멜로가 판을 치는 드라마 세계에서 탈피한,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랑이야기였다. <추노>도, <파스타>도, 이제 떨어진 낙엽처럼 바스러져 간다. 이야기는 끝났고, 캐릭터의 삶은 가려졌으며, 공유하던 시간은 추억으로 묵어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연들은 그 빈자리의 주인으로서 추억을 공유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쓴다.
<동이>는 새로운 사극의 본좌 자리를 노린다. <대장금>과 <허준>, <이산>을 연출했던 이병훈 PD의 새로운 작품이기도 한 <동이>는 긴 호흡을 위한 첫 숨을 내쉬고 있다. 무엇보다도 최근 사극들이 초반 아역들의 열연으로 진검승부를 펼친다는 점만큼은 <동이>도 잘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김유정 양의 똘망똘망한 눈빛을 내세우며 시작된 첫 회부터 곁눈질 학습효과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허우적거리는 액션과 몰입을 훼방하듯 느슨한 스토리텔링은 가히 20세기적이다. 이 모든 게 <선덕여왕>과 <추노>때문일까. 시대는 변했고, 사극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트렌디한 창이 됐을 뿐이다. 한효주를 비롯한 주요 성인 배우들의 등장조차 이루지 못한 시점에서 가혹한 일침은 이른 처사다. 남은 앞길이 실크로드가 될지 골고타 언덕이 될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파스타>의 공백에 시청률을 득템한 <부자의 탄생>과 <제중원>과의 본격적인 몸싸움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한편 <추노>의 종방을 기다렸다는 듯 방송3사는 수목드라마를 새단장한다. <신데렐라 언니>는 문근영의 출연작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최근 새로운 ‘국민여동생’들의 범람과 함께 더 이상 국민여동생이 문근영을 위한 절대명사로서 유효하다 말할 순 없겠지만 어쨌든 문근영은 유효하다. <바람의 화원>을 통해 보다 성숙한 내면을 드러냈던 문근영은 처음으로 표독스러운 악역에 도전하고, 그 반대편에서는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로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선보인 서우가 배수의 진을 친다. 젊은 여배우들의 연기 대결은 관록 있는 대배우들의 그것과 한 차원 다른 경연적 흥미를 돋운다. <꽃보다 남자>로서 스타덤에 오른 이민호의 차기작이자 <연애시대>이후 한동안 브라운관에 두문불출했던 손예진의 복귀작 <개인의 취향>이 출사표를 내민다. <아이리스>로 주목을 얻은 김소연이 카리스마를 내던지고 귀여운 여인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검사 프린세스>도 눈길을 끈다. 천하통일이냐, 천하삼분지계냐, 수목드라마 판도는 벌써 뜨겁다.
그녀가 쓰면 일단 본다. 김수현 작가의 신작 <인생은 아름다워>는 주말드라마에서 태풍의 눈이다. 한국적인 가족의 형태 안에서 시청자들이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는 크고 작은 도발을 매설하는 김수현의 스토리텔링은 시작부터 유효하다. 거실을 공유하고 제 방을 차지한 가족들은 혈연이라는 인력과 개인이라는 척력의 관계 속을 분주하게 드나들고 부딪히며 말을 걸고 크고 작은 갈등과 반목을 되풀이한다. 무엇보다도 드라마 역사상 이처럼 멀쩡하고도 아름다운 ‘게이’ 청년이라니, 이건 배반, 배신, 아니 감동이야, 감동. 어쨌든 이것이 인권윤리위원회나, 열혈 야오이 팬덤을 배려한 팬서비스가 아닌 진짜 정공적인 문제제기란 점에서 김수현의 드라마는 또 한번 빛난다. 이미연의 복귀작 <거상 김만덕>은 이 시대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고 있으나 그래서 김새는 작품이다. 여성 CEO 김만덕의 생애를 재조명한다느니, 새로운 리더상,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다느니, 이런 건 청와대 정신교육용으로 배포될만한 비디오 자료에나 어울릴만한 문구잖아. 각설하고 김만덕이라는 실존인물의 도전적인 삶은 분명 미덕이며 이미연은 인물의 생에 적합한 설득력을 얹는다. 물론 진짜 다크호스는 따로 있다. 문광부에서 자신만만하게 내건 한국CG산업육성계획에 찬물을 끼얹다 못해 북극곰이라도 초빙해서 코카콜라 병뚜껑이라도 따다 줄만큼 무시무시한 CG완성도를 보여주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일명 <신불사>. 그러니까 온라인 상의 짤방 몇 컷만으로도 이미 전설은 아닌 레전드 반열에 오른 <신불사>는 요즘 시대에서 ‘병맛’이 얼마나 악마적인 트렌드인가를 보여주는 새로운 전형이다. 폭탄 터지면 부엽토쯤은 떨어뜨려줘야 하고, 서류뭉치는 가지런하게 떨어져야 레알임……더 이상 설명은 생략한다. 여하간 <신불사>는 악마의 유혹이다. 시청률 10%는 이미 병맛의 노예 지수를 의미한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요.” 세경은 말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시간은 멈췄다. 그렇게 <지붕 뚫고 하이킥>은 흑백의 찰나를 여운처럼 남긴 채 끝났다. 그 끝에서 시청자들은 경악했고, 슬퍼했다. 세경이 행복하길 바라던, 해피엔딩을 바라던 이들에게 그 결말은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에게 불행하기만 한 그 마지막 찰나가 세경에게도 불행이었을까. 모든 것을 놓을 수 있는 순간, 너무 깊게 찔러 넣어 구겨질 것 같았던 한 마디의 진심을 비로소 꺼내 놓을 수 있었던 세경의 시간은 그녀의 바람대로 그대로 멈춰버렸다. 설사 그것이 끝이었다 해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해리는 ‘빵꾸똥꾸’조차 잊게 만드는 이별의 슬픔을 알았고, 준혁 학생은 날카로운 첫사랑과의 키스를 가슴에 묻은 채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워나갈 것이다. 드라마는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의 무덤 속으로 주검처럼 스러져 묻혀갈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 넘을 수 없는, 진짜 삶으로 자라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슬퍼도 안녕. 그리고 다시 한번 반갑게 안녕.
한류 붐에 편승해 ‘텔레시네마7’이라는 타이틀로 일본 TV방영을 목표로 제작된 7편의 TV영화가 국내 극장에 상영된다. <내눈에 콩깍지>는 그 7편 가운데 첫 번째 주자다. 그 내용인즉, 세계적인 건축가이자 킹카 훈남인 강태풍(강지환)이 갑작스런 차 사고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시각장애를 겪고 덕분에 미의 법칙을 거꾸로 거슬러 (영화적 주장에 의하면) 폭탄과 같은 외모를 지닌 동물잡지기자 왕소중(이지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
좀처럼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단지 말이 되지 않음을 이유로 지구상의 모든 영화들을 쥐고 흔든다면 실상 남아날 작품이 몇이나 되겠냐는 비약적인 안도감을 안은 채 <내눈에 콩깍지>의 설정을 받아들인다면 못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그 인위적인 뻐드렁니를 앞니에 끼워넣고 주근깨도 좀 찍었다지만 이지아의 외모가 고스란히 보존된 왕소중을 탈레반적 폭탄 취급하는 것도 웃어넘길 수 있다. 동시에 강태풍의 제스처나 대사로부터 넘쳐흐르는 과도한 허세적 태도가 단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재미를 의도한 영화적 고의라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눈에 콩깍지>는 명백하게 극장용이라 내걸고 티켓값을 요구하기엔 부끄러운 작품이다. 흥미를 자아낼 가능성이 지극히 얕은 사연이 잘게 쪼개지고 늘여뜨려진 형태로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연을 방출하는데 여간 피곤한 느낌이랄까. 단순히 3~4편 정도로 나뉘어서 방영된 형태로서 관람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2시간 동안의 장기전에서 오는 지루함은 덜했을지 모를 일이다. 전반적으로 딱히 흥미롭게 관찰될만한 사건이 부재하며 인물들의 감정적 정리는 설득력이 완벽하게 결여된 느낌이다. 만화적인 캐릭터와 사연은 팬시하지만 그 가벼움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나태하고 안이하다.
일시적인 시각적 장애란 소재도 딱히 설득적이지 않지만 그것을 간과한다 해도 그 너머로부터 진전되는 감정적 갈등과 진화가 좀처럼 설득력 있는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하게 과장된 대사와 제스처조차도 그 끝에 다다라서는 그냥 손발이 오그라든다. 좀처럼 끝나야 할 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사족이 굴러다닌다. 나름대로 적정량의 역할을 충당한 배우들에게 동정심이 배어날 정도로, 게다가 순차적으로 개봉될 6편의 차기 작품에 대한 불신지옥에 빠질 정도로, 그렇다.
크랭크업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영화가 개봉됐는데 기다려지지 않았나?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께서 모니터를 많이 못 보게 하셨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너무 궁금증이 커진 상태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 새로운 면도 보이고 저 때는 내가 저런 감정으로 연기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선하더라.
제목부터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부르는 작품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어떤 감상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색다른 이야기라 이걸 감독님이 과연 어떻게 표현해내실지, 그리고 만약 내가 메이를 연기한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증으로 시작했다. 항상 내게 들어왔던 시나리오와 너무 다른 류의 영화였고 기존에 내가 해왔던 캐릭터와 상반된 면도 있어서 그런 호기심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주지홍 감독은 연기적인 요구가 많은 편이었나?
시나리오 상에는 디테일한 설정이 많았지만 일단 현장에 나오시면 어떤 게 편하냐고 물어보시곤 했다. 배우들에게 가장 편안한 현장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하셨다.
한국에 온 메이는 고모에게 자신을 왜 미국으로 보냈냐며 따진다. 단순히 메이가 미국으로 보내진 것에 대한 불만을 고모에게 토로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미국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억울함이 발생한 게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메이의 미국 생활에 관해서 결코 묘사하지 않는다. 배우로선 조금 답답할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시나리오 읽으면서 감독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부분이 그 고모와의 대화였다. 일단 감독님은 메이 스스로 그게 고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단지 고모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왔던 아픔을 세상에 표출하는 것이라 하시더라. 그게 고모에 대한 원망으로 그려져선 안되니까 뻔한 오열 같은 신파적 표현이 동원돼서도 안됐다. 그런 감정을 잘 절제해서 보여주는 게 내 숙제였지. 그래서 이 신을 찍고 나서 다시 찍어보고 싶다고 얘길 드리니까 감독님은 이게 좋다고, 100%라고 하시는 거다. 그때 조금 아쉬웠는데 나중에 편집된 걸 보니까 감독님께서 만족하신 그 선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메이가 미국에서 겪은 삶이나 양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감독님께 여쭤봤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아닐지라도 학대나 홀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아닌, 보통 가정의 평범한 유년을 보낸 아이지만 항상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지닌 채 한국에 살아있을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남들과 다른 아픔 때문에 항상 스스로가 벽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메이는 상당히 히스테릭한 캐릭터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어나간다 해도 그 정서에 스스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히스테릭한 부분도 그렇지만 메이가 항상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메이가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답답함을 한국에 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어떤 해결책이나 돌파구가 없다는 답답한 느낌이 연기를 하면서 점점 더 나에게도 전이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가끔씩은 촬영이 끝나고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도 그 기분이 해소되지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있었을 텐데.
3일 동안 세트장에서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서 말 한마디 안하고 계속 답답한 기분으로 연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너무 답답하더라. 어둡고 침침한 세트장에 있다 보니 밖은 햇살이 비치는 낮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로 메이의 감정에 빠져 있다 보니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졌다. 그래서 세트장 문을 박차고 햇빛 아래에서 30분 정도 앉아서 마음을 다스린 적이 있다. (웃음)
큰 사건들이 펼쳐지기 보단 두 남녀의 감정적 충돌과 교감이 중요한 영화였으니까 장혁 씨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 나름대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회사가 같아서 오고 가면서 인사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 전에 내게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던 거 같다. 감성적인 부분보단 이성적인 부분이 강할 것 같다는 느낌? 마초적인 느낌도 강하다 생각했고. 그런데 실제로 함께 연기를 해보니까 감수성이 예민하고 작품에 대한 열의도 강하시더라. 초반엔 감독님이 장혁 씨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기해서, (웃음) 처음엔 되게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데 영화의 흐름처럼 점점 더 친해지다 보니까 내가 몰랐던 매력들이 하나씩 발견됐다. 개인적으론 장혁 씨의 재발견?
스스로가 장혁 씨에 대한 선입견을 지녔다 말한 것처럼 당신의 선입견을 지닌 누군가도 있을 거다. 특히 아이돌 가수 출신 연기자들에게 대중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최근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그런 배경에서 얻은 상처란 생각이 든다. 대중들의 손가락질이 거셀수록 스스로 연기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책임이나 강박도 커질 거다.
예전엔 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기가 정말 좋아지고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 자체에 감사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날 보시는 분들도 약간 변화된 느낌이 보인다고 하시는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방영했던 <태양을 삼켜라>가 본인의 8번째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주연 캐릭터를 거듭 맡아오고 있는데 작품의 얼굴로서 전면에 부각되는 게 부담될 때는 없었나?
처음엔 처음이기 때문에 봐주는 게 있지만 한 작품씩 해나가면서부터 대중들의 비판도 더 날카롭고 냉정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것 같다. 특히 작품마다 6~70명 정도 인원들의 노고가 담기는데 나 하나 때문에 그 노고가 퇴색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
그 동안 브라운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엔 익숙해졌겠지만 스크린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생소할 수도 있었을 거다.
일단 감독님께서 미묘한 감정선을 원하셨는데 아무래도 브라운관 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그런 연기는 뭔가 부족하거나 심심한 거 같고, 이 정도 표현으로 관객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약간 들었다. TV같은 경우 마음에 안 들면 채널을 돌릴 수도 있고 이런 저런 다른 일을 하면서 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일단 스크린 크기도 그렇고 모든 관객들이 스크린에 집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잖아. 그래서 그런 미묘한 감정선도 캐치가 되고 느껴지는 것 같더라. 감독님께서 왜 나에게 저런 밋밋하다 느낄만한 감정선을 요구하셨는지 스크린을 보니까 알게 됐다.
드라마로 배우 경력을 쌓아왔으니 영화 현장은 처음이었다. 준비기간을 비롯해서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땠나?
일단 드라마는 엔딩을 모르고, 심지어 다음 회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찍어야 되는 경우가 많아서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게다가 대중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라 배우입장에선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어서 배우에겐 보다 친절한 작업 현장이 되는 것 같다. 덕분에 내 스스로도 자신감이나 안정감이 있었던 거 같고, 다음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더 좋았다.
드라마는 현장 분위기가 상당히 타이트하다. 반면 영화는 좀 더 여유롭게 진행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된 느낌이 있었을 것 같다.
일단 스태프 분들의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배우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건 의무적이라기 보단 당연시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한 프로의식과 열정을 지닌 것 같다. 그런 부분은 존경하고 본받을만한 점이라 느꼈다.
사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부터 본인도 프로로 대중 앞에 섰다. 그렇지만 바로 프로로서의 자각이 생겼던 건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나는 처음부터 대중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그런 책임감을 가질 순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수가 자신의 무대를 즐기지 못하고 연기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정말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책임감이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앞서 있었던 거 같아서 그 어린 마음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다.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부분도 많다. 뒤늦게 남는 아쉬움은 없나?
그 당시엔 그게 너무 익숙했고 당연했다. 겁도 많았고, 그냥 당연히 지나가는 게 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놓치고 간 부분이 많다고 느껴져서 마음이 아픈 순간이 있다. 평범한 삶을 조금 더 즐기고 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 연기자로서도 그런 경험을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토끼와 리저드>는 운명적 관계를 되새겨 나가는 남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과거 가수로서 데뷔했고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본인의 인생 속에서 뒤늦게 스스로 운명적이었다 느낄 수 있는 계기나 과정의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그 삶에서 얻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됐을지도 모른다.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랑보단 상처가 익숙했던 그들,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연기가 내게 상처가 되기 시작했고 나의 아킬레스건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연기의 참 맛이나 기쁨을 알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여전히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밟아나가면 어느 순간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이런 과정이 힘들다기 보단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면이 더 많아진 거 같다.
“왜 내가 네 손을 잡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는 은설의 대사처럼 운명이란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배우로서 살아가는 것도 결과론적으로 본인의 운명인 셈인데 그 상황 속에서 어떤 목표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에게 연기가 어떤 것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연기는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정말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다가왔고 이로 인해 이런 저런 시련을 받았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벗어날 수 없게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젠 그 어떤 것보다 연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것 같아서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기에 대한 기쁨을 알고 내 길이란 확신이 생긴 만큼 내 스스로 연기를 즐기면서 보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목표다.
인기라는 건 마치 때때로 버거워서 버리고 싶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메이의 짐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데뷔 초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던 만큼 그 인기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어린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기를 얻어서 그런지 그런 인기에 대한 허와 실을 너무 빨리 알게 됐다. 그게 물론 나에게 중요한 건 안다. 다만 그게 삶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나한테 따라와주면 좋지만 따라와주지 못해도 너무 낙심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는데 원래부터 염두에 둔 선택이었나, 아니면 입시적 진로를 앞두고 결정한 문제였나.
솔직히 그 당시엔 학교에서 그때 내가 하던 것과 다른 부분을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다른 분야를 배우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연극영화과를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학교를 갈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체계적인 공부도 하지 못했고 그런 부분을 놓치고 가야 했던 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얻은 경험이 본인에게 실질적인 연기적 수업이 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의 시행착오도 겪어왔을 텐데,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 기분은 어땠나?
아마 카메라에 대한 공포가 없고 오히려 친밀감이 있다는 게 가수 출신 연기자의 장점이 아닐까. 반대로 우리 식구든, 멤버든, 매니저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왔던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수십 명의 스태프들과 몇 달간 동거 동락하듯 지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생기는 다양한 트러블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낯설고 힘들었다. 게다가 짧은 순간의 무대 공연에 익숙해 있던 내게 긴 호흡의 연기는 낯설고 힘든 일이기도 했다.
무대에선 짧은 순간에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되지만 현장에서는 에너지를 배분해서 끊임없이 방전과 충전을 거듭해야 한다.
가수가 무대에 서는 게 100m 달리기라면 연기는 마라톤 같은 느낌이다. 그땐 에너지를 배분하는 법에 익숙하지도 못했고 서툴렀다. 그래서 연기적으로도 들쑥날쑥 하고 논란의 여지가 생긴 거 같다. 기존에 그런 걸 배우고 어느 정도 인지가 된 상태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던 만큼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터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보니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핑클’ 시절 덕분에 여전히 ‘요정’소리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웃음) 그런 말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나?
그 당시에 우리가 그렇게 불려졌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련한 추억이 되는 거 같다. 재미있다, 그냥. (웃음)
‘핑클’은 이제 당신의 삶에서 과거형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현재를 말할 땐 항상 핑클이라는 과거에서 시작된다.
‘핑클’이 큰 존재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사실 예전에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지만 지금은 ‘핑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한다. 덕분에 이제 ‘핑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픈 욕심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수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활동을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핑클 활동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가수 출신 연기자로서 끊임없이 비난을 받을 때마다 그런 고비가 있었다.
대중들의 비난에 항상 대응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도 간혹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본인에게 비난을 던진 불특정다수의 사람들 중 그 영상을 통해 미안함을 품었던 이들도 있을 거다. 일일이 항변하거나 변명할 순 없지만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때때론 좋은 소통 방식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아는 지인 분에게 이런 얘기들에 대해서 다 해명하고 싶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더라. “이 직업을 가진 이상,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이슈가 되거나,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돼 살아야 한다. 그런 오해와 구설수와 각종 루머에 대해서 네가 모두 하나하나 해명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라. 그러나 네가 해명하지 못한 그런 루머나 오해들은 사실이 돼버린다. 어떤 것을 선택할 거냐.” 내게 온 국민의 오해와 루머를 하나하나 해명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하는 법도 배워야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실은 분명 밝혀지는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돼서 해명할 기회가 되면 해명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젠 그런 지혜가 약간 생긴 것 같다.
‘핑클’ 시절 함께 활동했던 다른 멤버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제각각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함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로부터 10년 정도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 어떤 감회라 할만한 게 있을까?
항상 넷이었다가 혼자가 됐을 때는 각자 본인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저마다 본인의 분야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보이는 것 같고, 각자 분야에서 다들 인정받고 있는 거 같아서 좋다. 내가 제일 어려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자매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언니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잘 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요즘 새로운 10대 아이돌 그룹이 많은데 그런 후배들을 보면서 예전 생각을 할 때는 없나?
나는 그 당시에 우리 팬들이 우리 노래나 이미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를 좋아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단지 어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예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각자 개성도 뚜렷하고 재능도 뛰어나지만 그 나이 또래들만 누릴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면 새롭고 신기하고 그렇다. (웃음)
<토끼와 리저드>는 뒤늦게 찾은 운명적 상대에 대한 멜로다. 이제 데뷔 초에 비해 사랑에 대한 관념도 보다 깊어질 나이로 들어섰는데 운명적인 대상을 찾을 것까진 없겠지만, (웃음) 연애나 결혼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 볼만한 나이가 됐다.
어릴 때부터 너무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만나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그런 소망이 있다.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차태현 씨와 호흡을 맞췄다. <토끼와 리저드>에서도 차태현 씨가 출연하는데 본인과 호흡을 맞추는 신이 없어서 마주칠만한 일도 적었을 것 같다.
사실 포장마차 신에서 같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은설과 메이의 감정에 몰입하고 싶으시다고 편집하셨다. (웃음)
지난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를 새로운 작품에서 만나는 건 본인에게 몇 안 되는 경험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만났다는 점도 특별한 감상을 주지 않던가?
20대 중반의 내가 만난 태현 오빠와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태현 오빠는 참 많이 다른 사람 같더라. 그리고 태현 오빠도 이제 결혼했고 아이도 있는 만큼 보다 성숙한 느낌이 드니까 새롭기도 하고 그만큼 정감도 갔다.
방금 말한 대로 서른을 앞둔 나이인데 그만큼의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할 것 같다.
일단 20대엔 이런 저런 갈등이나 시련이 많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의 중심을 잘 세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20대 때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 목표가 생기고 중심이 잡힌다고 느껴지니까 오히려 30대가 좀 더 기대된다. 그 목표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이랄까.
최근에 한 다른 인터뷰에서 장혁 씨가 성유리 씨를 교양 있는 여자라고 했더라.
(웃음) 워낙 장혁 씨가 교양이 있으셔서 나도 거기 발 맞추어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동적인 부분보단 정적인 부분이 많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 발랄하고 활발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외란 말을 많이 듣게 되진 않았을까.
요즘 인터뷰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내가 되게 발랄하고 활발한 이미지로 많이 생각된다는 점이다. 내 스스로는 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는 점이 새로웠다.
메이의 히스테릭한 모습만 걷어내면 본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감정이라 오히려 편하게 봤는데 보신 분들은 색다르게 보시더라. 이런 부분이 내겐 강점이 될 수 있겠구나 느꼈다.
<쾌도 홍길동>이나 몇몇 드라마에서 백치미적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로 각인된 부분도 많을 거다. 어쩌면 정작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캐릭터들을 연기한 셈인데 자신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떤가?
그런데 내 안에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은 그런 캐릭터들이 평소 생각하는 나와 닮았다는 얘기도 하더라.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이 부각되느냐 차이인 거 같다. 이런 저런 역할을 하다 보면 나도 잊고 있었던 성격들이 나온다. 결국 스스로의 재발견이랄까.
때때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을 테고.
어제 영화를 세 번째로 봤는데 눈 모양이 신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 게 보였다. 각도에 따라서, 아니면 조명에 따라서 그렇기도 하고, 어떨 땐 조금 올라간 눈이 되거나 반대로 내려간 눈이 되기도 하고. 나도 몰랐던 그런 부분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쉽겠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10년여 동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런 관심 속에서 짓눌리지 않고 살아남는 건 말 그대로 그 삶을 즐길 줄 알 때 가능할 것 같다. 그 삶 자체가 일종의 도피처가 되는 거랄까.
예전엔 사생활을 구속 당하는 느낌이 싫다는 막연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 사생활이라 할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일상 속의 내 삶은 딱히 스펙터클하지 않고 재미있다기 보단 지루하다. 그런데 연기를 통해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이젠 기꺼이 다른 부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의향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이젠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은 사생활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아서 그 일상을 절충하는 게 가능한 것 같다.
가족은 운명이자 속박이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깨이면서도 벽처럼 서로에게 다가서기 어렵다. 그래서 가족은 때때로 지옥이 되고, 폭력이 되고, 상처가 된다. 애정은 편견으로 이해되고 연민은 간섭처럼 지겹다. 예기치 않게 쌍방향에 놓인 구성원 모두를 파괴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운명공동체라는 이름 하에 뿌리내린 유대감은 때때로 덜어내기 힘든 부채처럼 버거운 의무감을 준다. 그래서 가족이란 슬프고 아픈 것이다. 버겁다고 덜어낼 수 있는 짐이 아니라서, 귀찮다고 내칠 수 있는 타인이 아니라서, 미워도 다시 한번, 끝없는 애증을 삭이며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로즈(에이미 아담스)는 고교 시절 치어걸 리더로서 화려한 전력을 지녔지만 아들 오스카(제이슨 스페벡)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청소대행업체에서 받는 푼돈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여동생 노라(에밀리 블런트)는 매번 직장에서 잘리는 탓에 백수 생활을 이어나가는 천덕꾸러기다. 그녀들의 아버지 조(알란 아킨) 역시 항상 변변찮은 사업을 기획하고 번번히 말아먹는 탓에 두 딸의 걱정을 산다. 그 가운데 오스카의 사립학교 입학비가 필요해진 로즈는 보다 큰 수익을 기대할만한 일을 찾던 중, 범죄현장 청소라는 고액의 업종을 추천 받고 동생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게 된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공통 분모처럼, <미스 리틀 선샤인>과 <선샤인 클리닝>은 유사한 주제를 끌어안은 작품이다. 콩가루처럼 흩어져 부유하던 가족이 끈끈한 반죽처럼 덩어리를 이루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내는 작품이다. –두 영화는 심지어 제작진도 같다.- 가족을 비극적인 진창으로 몰아넣는 건 가난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하루벌이로 먹고 살 듯 박복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세 가족은 일상은 그 자체로 팍팍한 심경을 전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가족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공유한다. 좀처럼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회상 신을 통해 파편화된 기억을 문득 내보이곤 하는 영화는 결말부에 다다라 아물지 못한 상흔을 선명히 비춘다. 좀처럼 보이기 어려웠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기까지의 갈등과 충돌을 그리는 영화적 여정은 성장통처럼 구성원의 성숙을 도모한다.
‘범죄현장 청소’라는 특별한 소재를 통해 보편적인 가족애로 그려나가는 <선샤인 클리닝>은 창의적이고도 탄탄한 선댄스표 영화에 걸맞은 모양새를 자랑한다. 끔찍한 죽음이 남긴 악취와 핏자국은 노라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마음에 봉인한 상처와 대면하게 만들고, 로즈에겐 새로운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아버지 역시 한동안 소통할 수 없었던 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찾게 된다. 세 가족의 성장을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샤인 클리닝>은 사실 소재로부터 발생할만한 특별한 흥미에 비해 적막한 가족드라마다. 충돌과 갈등을 건너 끝내 화해를 이루는 캐릭터 간의 어울림이 대단한 절정을 선사하지도 않거니와 세 가족을 비추는 영화적 시선이 시종일관 담담한 감정을 유지하는 탓이기도 하다. 인물마다의 비중적 편차가 크고 인물간의 정서적 교류가 선명하게 구축되지 못한 탓에 구성원간의 화합을 묘사하는 결말부의 감흥도 낮아지는 인상이다.
<선샤인 클리닝>에서 돋보이는 지점은 소재의 착상이다.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이들로부터 남겨진 끔찍한 흔적을 지우는 범죄현장 청소는 기발한 소재로서의 흥미를 넘어 드라마로서 훌륭한 매개를 이룬다는 점에서 보다 특별하다. 루저로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인물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물들의 희망을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비극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떤 이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동시에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참신한 이야기를 위한 자격을 지닌다.
현실적 난관들이 빚어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당장의 희망을 체념하면서도 새롭게 현실적 활로를 모색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감정을 자아낸다. 거울을 바라보며 희망적인 주문을 외우는 로즈의 얼굴은 낙천적이라기보단 절박하며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 매달려 함성을 지르는 노라의 표정엔 기쁨보다 슬픔이 서린다. 에이미 아담스와 에밀리 블런트의 얼굴은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도 긍정의 끈을 놓지 않는 인물들의 절박한 심리를 드러내는 창과 같다. 대책 없는 낙관으로 끝없는 무능력을 드러내지만 결국 딸을 위해 헌신적 대안을 제시하는 아버지 조를 연기하는 알란 아킨의 심드렁한 표정은 속내에 감춰진 진심의 깊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묵묵하면서도 끈기 있게 인물들의 표정을 응시하며 감춰진 속내까지 포착하는 <선샤인 클리닝>은 현실적 한계를 체감하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휴먼드라마다. 척박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가족사업은 결국 현실에서 거대한 빚을 남기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게 만든다. 누군가가 남긴 생의 흔적을 지워나가며 현실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는 가족은 자신들의 묵은 상처를 지우고 이는 과거를 극복하는 현실적 대안이 된다. <선샤인 클리닝>은 행복을 쟁취하기보단 그 기준점을 제시하는 영화다. 커다란 변화가 아닌 보편적인 삶의 테두리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삶이란 이렇게 작은 변화를 통해서 큰 울림을 얻곤 한다. <선샤인 클리닝>은 그렇게 작은 변화 속에서도 깊게 자라나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다. 명료하고 깔끔한 여운이 돋보이는.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던 '이브 생로랑'을 '디오르(Dior)'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굴하고 '존 갈리아노'를 디오르의 지휘관으로 발탁했던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는 말했다. "검정색 풀오버와 열 줄짜리 진주목걸이로 샤넬(Channel)은 패션 혁명을 일으켰다." 우아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디오르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실용성을 강조한 '가브리엘 샤넬(Gabriel Channel)'의 패션을 시대적 혁명으로 정의했다.
샤넬이 파리로 진출했던 1910년경의 여자들이란 그저 남자들을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여성이 아니라면 일을 하지 않는 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화려하게 치장된 옷을 입고 매일같이 사교계를 전전하는 호화로운 삶을 누렸다. 신분이 천하고 처지가 박하지 않은 여자가 일을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유년 시절 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버려진 샤넬 역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샤넬(오드리 토투)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영화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반체제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직업적으로 선망한 여성이라 묘사한다.
1893년, 부모에게 버려져 여동생과 함께 수녀원에 맡겨진 샤넬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되는 영화는 그 이후로 성인이 된 그녀의 모습을 통해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간다. 물랭(Moulin)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와중에 카페에서 노래를 하며 가수의 꿈을 키워나가던 샤넬은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엔티엔 발장(브누아 포엘 부르드)을 만나게 된다. 샤넬의 도전적인 태도에 호감을 느낀 발장은 그녀가 파리에서 노래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샤넬의 오디션은 실패하고 발장 역시 파리 근교에 있는 자신의 사저로 떠난다. 하지만 발장을 찾아가 그의 사저에 머물며 고위층의 사교생활을 경험하게 되는 샤넬은 그곳에서 고위층 부녀자의 화려한 패션에 실소를 머금고 자신만의 심플한 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리고 샤넬은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만한 연인 보이 카펠(알레산드로 니볼라)을 만나게 된다.
<코코 샤넬>은 샤넬의 스타일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다. 만약 <코코 샤넬>을 통해 샤넬의 스타일을 만끽하고자 티켓을 구매한 관객이라면 만족감을 쥐고 상영관을 벗어나기란 어려운 일이 될 거다.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샤넬이란 브랜드를 창시한 가브리엘 샤넬의 비화를 다룬 전기적 성격의 영화다. <코코 샤넬>이 묘사하는 샤넬은 페미니스트로서의 전문직업인이자 비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다. 무엇보다도 샤넬이 만들어내는 것보다도 샤넬이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묘사보다도 서사에 집중한다. 남성의 부에 기대어 화려한 치장을 뽐내며 살아가는 부유층 여성들의 삶을 무료하게 인식하며 무능력을 강요하는 사회에 회의를 느끼는 샤넬은 심플하고 실용적인 자립여성의 스타일을 완성해나간다.
샤넬의 스타일에 영감을 준 사회적 배경이 <코코 샤넬>의 1차적 자산이라면 샤넬의 삶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2차적 자산이다. 결국 <코코 샤넬>은 샤넬이라는 인물의 삶이 빛나는 지점을 다룬 화려한 소품이 아니라 그 삶이 정점에 오르기 위해 어떤 여정을 거쳤는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쉽게 말하자면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만한 이미지를 배제하고 서사적 끈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을 추구하는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관객 입장에선 비효율적인 소비를 느끼게 만들만한 지점이다. 샤넬이라는 인물에 대한 매력은 현재 샤넬이라는 브랜드가 부여하는 물질적 환상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는 인물의 성장이라는 역동적 소재를 지나치게 정적인 분위기에 가둠으로써 단조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감정적 고양을 무마시킨다.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처럼 권태로운 감상이 도모된다.
이름만으로 대변되는 인물의 삶이란 분명 들춰보고 싶게 매력적인 것이다. 동시에 그 인물의 현재를 이룬 기반을 살핀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의 서사적 선택은 그런 면에서 타당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을 온전히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코코 샤넬>은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영화다. 오늘날 명성을 얻은 명품 브랜드의 네임밸류를 만든 건 그 브랜드의 시작을 이룬 누군가의 삶이라기 보단 그 브랜드가 현대의 물질적 욕망과 상응하는 덕분이다. 물론 인물의 삶에 집중한 <코코 샤넬>이 패션쇼 따위를 기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만족시켜야 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 기대심리를 배반하는 가치를 선택했다면 그것을 설득할만한 결과물을 제시해야 할 의무는 당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코 샤넬>은 설득력 없는 드라마다. 샤넬이라는 이름이 이토록 단조로운 드라마를 통해 설명되고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전락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코코 샤넬>은 세기의 혁명이라 불리던 패션 아이콘을 투정하는 아이처럼 치환해버린 과소비적 영화다.
확고한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명품 브랜드, <코코 샤넬>은 분명 그 이름만으로도 누군가의 소비심리를 부추길만한 영화다. 하지만 환상은 금물. <코코 샤넬>은 트렌디한 스타일로 무장한 패션쇼가 아니다. <코코 샤넬>에서 스크린의 용도란 명품 스타일을 전시하기 위한 쇼윈도가 아니라 인물의 감춰진 삶을 훔쳐보기 위한 창과 같다. 코코 샤넬이 디자이너로서 빛나는 경력을 쌓아가기 이전에 그 삶을 어떻게 디자인 했는가를 조명하는 <코코 샤넬>은 엄밀히 말하자면 코코 샤넬이라는 인물을 위시한 멜로드라마이거나 페미니즘 전기에 가깝다. 그러니까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이 구가하는 명품적 환상성에 이끌려 <코코 샤넬>을 선택했다면 상영 시간 내내 무기력한 감상을 동반할 확률이 크다는 말. 물론 인물의 절정을 배제한 채 그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 인물이 감내한 시간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비범한 선택이라 추켜세울만한 구석은 있다. 하지만 코코 샤넬이라는 이름이 비극적인 연애소설의 주인공으로 국한된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다. 마치 가봉된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마냥 불완전하고 절정이 삭제된 소설을 읽는 것마냥 무료하다.
2년 전 인터뷰 당시에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에도 그런가요?
예. 덕분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요가학원>촬영하기 전에 3개월 동안 요가를 배우러 다닐 때, 차를 끌고 다닌 적도 있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다닌 적이 더 많았거든요. 항상 요가매트를 들고 지하철을 탔는데 어느 날 제 친구에게 전화가 온 거에요. 너 요즘 요가배우냐고. 그래서 그거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누가 인터넷 카페에 올렸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사진에 찍힌 건가요?
사진은 아니고, 글이 올라왔어요. 지하철에서 차수연 씨를 봤는데 요가매트를 옆에 끼고 신문을 읽고 있더라. (웃음) 그래서 아,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죠.
드라마도 2편이나 출연했는데 몰라볼 리 없죠.
그런데 그렇게 비중 있는 역할이 아니었잖아요.
하지만 브라운관으로 얼굴을 노출됐을 때 얻게 되는 인지도는 때론 상상 이상이니까요. 실제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을 거 같고요.
그래도 아직까진 그렇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에요. 가끔씩 물어보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 그런데 대부분 그냥 아니라고 하면 아닌가 보다 하고 그냥 가버려요. (웃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시군요. (웃음)
똑같죠. (웃음) 지금은 요가 때문에 살이 많이 빠지긴 했는데 그것 빼곤 다 비슷해요. 생활하는 것도 그렇고, 여전히 지하철 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그때 제가 장쯔이 닮았다는 말씀을 드렸었죠. 그 뒤로 이런 말을 또 들어보진 않았나요?
가끔씩 들어요. 아직은 누굴 닮았다는 말이 따라다니는 거 같아요. 아직까진 제가 확실한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해서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거 같아요.
<요가학원>의 나니는 궁극적으로 마리오네트 같은 캐릭터입니다.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다고 할까요. 그만큼 철저하게 감정이 배제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감독님께서 제 이미지가 나니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셔서 서슴없이 제게 그 캐릭터를 주셨지만 그 이후로 나니라는 캐릭터의 내적인 면을 어떻게 보여줘야 될지 서로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공포에서는 선악이 분명히 나눠져야 되는데 보통 악역이라면 독하게 생겼거나 이미지가 센 사람들이 캐스팅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이번 같은 경우는 그 반대 이미지로 저를 캐스팅하셨으니까 조용하고 차가운 이면의 카리스마를 어떻게 뿜어져 나오게끔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그런 소스들 중 하나가 말투라던가, 말을 하기 전과 후의 호흡이라던가, 아니면 나니 만의 걸음걸이나 동선들이었죠.
일반적으로 감정을 담은 대사는 자의적으로 호흡을 통제하거나 조율할 수 있지만,
음율이 있죠.
나니의 화법은 모든 음절이 또박또박하면서도 어절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상당히 기계적인 어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래도 그런 화법을 설정하고 그에 적응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요가 선생님처럼 얘기하는 캐릭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희 요가를 전담하셨던 진수원 원장님의 말투를 녹음해서 한 2주 동안 연습했어요. 그렇게 연습해서 감독님께 보여드렸더니 나니라는 캐릭터는 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성 있는 요가 강사처럼 얘기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고,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감독님께서 저에게 눈동자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주셨어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말과 함께 감정이 나오잖아요.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감정이 말로 묻어나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감정을 최대한 배제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은 상태에서 드라이하게 대사를 쳐줬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받았죠.
어쩌면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에서 기능적인 요구가 많았던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방금 말했던 것처럼 캐릭터의 화법 자체도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했고, 요가도 배워야 했으니까요.
정말 달랐죠. 일단 나니는 동선의 폭도 좁았어요. 인순과 비교해봐도 인순은 동적인 캐릭터라서 쉽게 눈에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나니는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제약된 상황이죠. 그런 가운데서도 중심축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마련했죠. 아까 말했던 화법이라던가, 걸음걸이, 아니면 무드라(mudra, 수인), 만트라(mantra, 진언), 이런 것들을 몸에 익히는 게 참 힘들었어요. 그런 대사만으로 무서운 감정을 전달해야 되는 사람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긴장돼있기보단 오히려 힘이 빠진 듯한 상태를 유지했을 때 관객에게 더 무섭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절대로 긴장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영화를 준비하는 3개월 동안 저를 버리고 제 몸부터 많이 바꿨어요.
요가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교정된 부분도 있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요가로 교정된 건 유연성이었죠. 보통 다른 친구들은 어깨가 많이 내려가 있는 편인데 저는 약간 솟은 어깨라 이게 어떻게 보면 항상 긴장돼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내리는 작업을 했고, 등을 약간 굽히고 다니는 버릇도 고쳤어요.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보이려면 정자세로 보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건 다른 방식으로 원장님과 교정을 잡아야 했거나 따로 집에서 연습이 필요했어요.
요가는 해본 적 있었나요?
캐스팅 되고 나서 감독님과 미팅할 때, 감독님께서 요가는 접해봤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런데 한번도 안 했다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캐스팅이 넘어갈까 봐 3개월 정도는 해봤다고 거짓말했어요. (웃음) 그랬더니 감독님께서도 다행이라고 하시는데, 오히려 제가 속으로 감독님께서 그렇게 봐주셔서 다행입니다, 싶었죠. (웃음) 그래서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2~3주 정도 더 빨리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미친 듯이 연습했죠.
몸을 움직이는 건 좋아하는 편이에요?
사실 동적인 운동을 되게 좋아해요. 달리는 걸 좋아해서 러닝머신 뛰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취미로 재즈 댄스도 하고 있었고요. 그런데 요가는 한자리에 머물러서 몇 초 동안 한 동작으로만 있어야 하는 정적인 운동이라 저한테 너무 힘들었어요. 확실히 저는 동적인 운동을 많이 선호하는 편이었던 거죠. (웃음)
그렇다면 나니의 어떤 매력이 차수연 씨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걸까요? (웃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감독님께서 저에게 왜 러브콜을 주셨는지 딱 알겠던데요. 그러니까 어떤 역을 할 것 같으니 시나리오 한번 봐라, 단지 이런 이유를 떠나서 시나리오에서 나니 역을 보니까 어떤 이미지 때문에 감독님께서 제게 이 캐릭터를 주신 건지 알게 됐어요. 나니는 단면적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적고 감정이 절제된 인물이라서 알 수 없는 신비스런 분위기가 풍기지만 몇몇 신에서는 발랄하고 밝은 모습들이 보여지기도 하고, 끝에 가서는 간미희를 배반했을 때 무너지는 모습까지 드러내잖아요. 이렇게 한 영화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란 점이 끌렸어요. 아직 제가 많은 영화를 해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제가 쌓아놓은 경력 안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선물세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에도 감정을 절제한다는 측면에서는 기존의 캐릭터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존에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자신의 성격을 온전히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더 매력을 느꼈어요. <아름답다>나 <보트>, <여기보다 어딘가에>같은 작품은 캐릭터의 감정적인 부분이 잘 표현된 작품이었고, 저도 감정이 먼저 나가는 사람이라서 그런 감정적인 표현들은 편했죠. 그런데 <요가학원>은 감독님께서 “마지막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그 전까진 모든 감정을 배제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감정의 표출이나 감정적인 표정은 너무나 잘 보인다. 하지만 <요가학원>에서는 그런 감정을 상중하로 나눠서 보여줬으면 좋겠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상태로 얘기하고, 행동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학원생들을 대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 덕분에 <요가학원>을 통해 한가지 배운 거 같아요. 항상 표출만 할 줄 알았지, 그걸 어떻게 조절해야 할진 아직 몰랐으니까요.
지금까지 7편의 영화와 2편의 드라마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3년 차 배우로서 적은 경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최근 인터뷰에서 그런 말도 했더군요. <요가학원>이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은 작품이라고요. 맞아요.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았어요. 저에겐 항상 미팅이 있었고, 오디션이 있었고, 감독님들께서 그 역할에 어울린다고 판단됐을 때 작품에 임했었죠. 그런데 <요가학원>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같이 작업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를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렇게 처음으로 러브콜을 받았어요. 그리고 나서 제가 하겠다고 답변한 다음부터 미팅이 이뤄졌고요.
그래서 더욱 영화에 애착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저한테는 좀 애정이 남는 영화에요. 이전까지는 제가 출연한 영화를 볼 땐 항상 제 자신이나 작품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반적인 스토리나, 아니면 상대 배우와의 관계나 호흡 같은 제 개인적인 부분들이라던가, 전체적인 분위기 안에서 제 단점들을 잘 꼬집어서 봤었거든요. 저럴 땐 저렇게 하면 안 됐었는데, 이렇게. 그런데 <요가학원>은 너무 주관적인 관점에서 보게 돼서 저는 그냥 다 괜찮더라고요. (웃음) 제 연기가 괜찮다기 보단 전반적인 영화 흐름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옛날 같은 경우엔 제가 어떻게 했다는 걸 제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에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요가학원>은 주관적으로 보다 보니까 어디가 모자랐는지, 어디가 잘 안됐는지, 그리고 어디가 좋았는지, 더 듣고 싶어지는 거 같아요.
어쩌면 출연작 가운데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첫 번째 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예. 너무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어요. (웃음)
아무래도 전작들이 개봉할 때와 기분도 남다르겠어요.
그래도 같이 출연한 배우들이 많아서 지금까지 작품 중에 제일 힘이 되는 거 같아요. 어느 무대에 서더라도 같이 긴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여섯 명이나 더 있다는 게 힘이 되더라고요.
오늘 오후에 무대인사가 있다고 들었는데 관객 앞에서 무대인사를 하는 기분도 남다르겠어요.
저는 지금까지 일반 관객에게 무대인사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요? 이번이 처음으로 도는 거에요.
아, 그런가요? <보트>때도 하지 않았나요?
예. 저는 안 했어요. 제가 나름대로 영화에 많이 출연했지만 대중들에게 이미지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처음인 거 같아요. 아무래도 영화 관계자들이나 감독님들은 이제 제 이미지를 잘 알게 돼서 이번 년도부터 많은 영화 제의를 많이 받게 된 거 같지만 대중들에겐 <요가학원>의 나니가 차수연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거죠.
사실 영화에서 나니의 전사가 조금씩 노출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과거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 있더라고요. 그런 부분에 대한 충분한 부연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 할만한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로서도 고민이 깊어질 수 있는 측면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캐릭터의 과거를 추측하는 건 결국 배우의 몫이니까요.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었나요?
사실 원래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에게도 요가학원에 들어올 수 밖에 없는 사연들이 담긴 과거 신이 있었어요. 시나리오 자체엔 더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감독님께서 그걸 영화에서 압축시키시다 보니까 배우들이 그런 설정만 인지하고 연기에 임해야 했어요. 다른 친구들 같은 경우에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고 요가학원에 들어왔던 것처럼 저 또한 비슷한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와 함께 간미희와의 사연을 담은 전사가 있었죠. 아쉬운 부분이긴 해요.
영화가 너무 많은 걸 보여주는 것 역시 딱히 좋은 방식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설명이 불충분할 땐 그걸 표현하는 배우에게도 부담이 생길 수 있겠죠.
그런 갭을 줄이는 게 힘든 거 같아요.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좀 더 설명을 해줘야 이해되지 않을까 싶은 경우도 있지만 작업하는 입장에선 이게 너무 지나치게 착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어디에 포인트를 줄지에 대해선 감독님만이 아시는 것이기도 하고요.
<요가학원>은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에서 가장 상업영화란 단어에 어울릴만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무래도 전작들과 현장 분위기부터 차이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전작들에선 감독님과의 대화가 항상 끊이지 않았는데 이번 <요가학원>에서는 배우들도 너무 많고, 감독님도 따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전작들보단 적었던 거 같아요. 인디 영화나 저예산 영화라 할 수 있는 전작들 같은 경우에선 촬영장에서 시간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과 충분한 대화를 하고 들어갔거든요. 다만 <요가학원>같은 경우에는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전작들보다 대화를 적게 했지만 막상 현장에선 감독님과 얘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많았어요. 감독님께서, “다음 주에 이런 식으로 한번 해볼까” 하시면서 소스를 던져주시면 전 거기에 제 상상을 덧붙여서 감독님께 보여드렸고 그러면 감독님께서 또, “그것도 괜찮네?” 이러시고, “그럼 이런 식으로 접근해보면 또 어떨까?” 이렇게 다시 소스를 던져주시고, 계속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서 진행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마치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처럼요.
전작에서는 항상 상대역이 남자였지만 <요가학원>에서는 오로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연기를 했습니다.
시나리오 받았을 때, 나니라는 캐릭터가 먼저 보이긴 했지만 그 주변에 캐릭터가 너무 많았어요.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다른 배우들이 캐스팅되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7명의 배우들이 다 모이면 정말 많은 불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굉장히 많았었죠. 여자 배우 2명만 모여도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아진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거든요. 그런 얘기 못 들어보셨어요? (웃음) 그런데 2명도 아니고 7명인데 이게 과연 잘 풀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처음에 저희끼리 미팅을 했던 장소가 요가학원이었어요.
<요가학원>을 찍기 위해서 요가학원에 모였군요. (웃음)
예. 그렇게 1명씩 들어오면서 서로 인사하고 곧바로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서 요가를 시작했죠. 서로 말로서 통성명하긴 했지만 그 사람의 이면을 보기 전부터 저희끼린 몸으로 같이 부딪힌 셈이죠. 사실 유진이 빼고 다들 요가를 처음 접해보는 거라서 모두 몸이 힘들고 지치는 상태였고 그래서 더욱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요가 덕분에 서로에게 더 편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거죠.
아무래도 요가 마스터를 연기하는 만큼 영화상에서 보다 숙련된 요가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나요?
정말 부담이 많았어요. 저는 요가가 처음이라 <요가학원>에 캐스팅되고 나서 남들보다 3주 일찍 매일 4시간씩 원장님과 혼자서 연습을 했었죠. 제가 3주 동안 열심히 했다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 동작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3주 만에 될 수 있는 동작들이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이제 3주 후에 다른 친구들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유진이가 오자마자 한번에 제가 못했던 것들을 하는 거에요. 유진이는 5년 전부터 요가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보니까 제가 3주 동안 했던 것들이 너무 허탈해지고,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어요. 그때 당시 실력으로 보자면 유진이가 마스터를 해야 되고 제가 유진이 역할을 해야 했던 입장이었던 거죠. 제가 그토록 하려고 했다가 실패했던 동작을 유진이가 한번에 하는 걸 보고 순간적으로 무너져버렸어요. 그 3주 동안 한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그때 술 한잔 했어요. (웃음) 그리고 어느 정도 집착은 버렸어요. 이게 금방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구나, 그러니 3개월 안에 최선을 다해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갖고 천천히 다시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기능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심리적으로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영화에선 나름대로 제 몫을 해낸 느낌인데요. 힘들었던 만큼 만족감도 크지 않았을까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심적으로도 많이 힘들었던 작업이었어요. 제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런 소재였으니까요. 요가 초급 과정의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선생으로서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3개월 안에 그 정도 수준으로 피치를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거든요. 그만큼 몸도 힘들었지만 캐릭터로서 중심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심리적 부담이 많았죠. 그런 덕분에 나니에게 많이 배워가게 된 입장이 됐어요. 저를 바꾸게 된 입장인 거죠. 덕분에 몸도 많이 밝아졌고, 이렇게 저를 자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게 됐고, 제 안에서 여러 가지로 차수연이란 배우를 업그레이드시켜준 영화가 된 거 같아요.
혹시 <요가학원>에서 욕심 나는 다른 캐릭터는 없었나요?
저는 나니가 좋던데요. (웃음) 물론 개인적으로 <요가학원>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캐릭터는 인순인 거 같아요. 인순의 강박증은 저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 분들도 다 갖고 계실 거에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공감이 갔죠. 마치 여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캐릭터 같아요.
<요가학원>은 외모지상주의 세태를 공포로 치환한 작품입니다. 그만큼 여성들이 느끼는 강박도 많이 묘사되고요. 사실 차수연 씨와 같은 배우들이야말로 외모에 대한 강박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직업이 아닐까 싶은데요. 혹시 지금까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낀 적은 없나요? 물론 지금도 충분히 예쁘시지만. (웃음)
저도 외모적인 콤플렉스는 분명히 있어요. 어떻게 보면 저희는 얼굴이 먼저 보여지는 사람이고 그만큼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에게 눈길이 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예뻐서 눈에 띄는 연기자나 배우가 있는 반면에 너무 예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연기적인 매력이 갖춰졌기 때문에 얼굴 자체가 아름답게 보이는 배우도 있는 거 같아요. 갈 길이 다 다른 거죠. 사실 너무 예뻐서 그 배역이 잘 안 보이는 배우들도 있잖아요. 얼마나 짜증나겠어요. 너무 예쁜 게 죄인거지. (웃음) 캐릭터가 보여야 되는데 너무 예뻐서 배우의 얼굴이 보이는 거죠. 저도 너무 예쁜 배우들을 보면 너무 예뻐서 캐릭터가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얼굴밖에 안 보이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는 눈에 띄게 예쁘지 않기 때문에 캐릭터를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영화 관계자 분들에게 종종 어느 캐릭터를 맡더라도 그 캐릭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이라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만큼 저는 캐릭터가 잘 스며들 수 있는 베이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캐릭터의 내면적인 부분을 보여주는데 보다 유리한 입장이고 그만큼 연기적인 수준을 많이 끌어올려주면 제 얼굴이 아름답게 비춰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무래도 장단점이 있는 거죠. 단지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되는 거 같아요.
차수연 씨도 눈에 띄게 예쁘신 것 같은데요. (웃음) 예전에 전도연 씨를 닮고 싶다고 하셨던 게 기억나네요. 그만큼 자기 역할에 헌신적인 배우를 선망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배우로서 너무 망가졌다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때로 꺼려지는 일이 아닐까요.
<요가학원>이전에 <집행자>를 찍을 때 윤계상 선배랑 베드신이 있었는데 그 신에서 우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옆 방에서 조용히 하라면서 벽을 두드리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맡은 캐릭터가 좀 당차서 너나 조용히 하라면서 막 소리지르고 도리어 그 벽을 치는 모습이 나와요. 그 한 샷을 찍고 나서 감독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나는 오케이지만 네가 한번 봐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왜요? 저는 괜찮은데요.”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아니, 여배우가 이렇게 안 예쁘게 나오면 본인에게 좀 그렇지 않아? 다시 찍을래?” 하시는 거에요. 사실 어떤 분들은 카메라에 예쁘게 비춰질 수 있는 각도를 잘 알아서 스크린에서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그 각도로 비춰지려고 노력하는 분들도 많이 있어요. 솔직히 저는 그 캐릭터로서 확실하게 보이는 게 얼굴이 예쁘게 보이는 것보다 배우로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계속 연기적으로 노력하고 자기 계발을 해서 제 캐릭터가 잘 보이게 되면 그게 저를 아름답게 보여줄 거라 생각해요. 저 역시도 그런 배우가 예쁘게 보이고요. 어쩌면 그게 저와 다른 배우들의 차이일지도 모르죠.
<집행자>얘기가 나왔는데 사실 <집행자>에 차수연 씨가 출연했다는 건 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알았습니다. 남자배우들에 대한 정보만 공개됐더군요.
홍일점이에요. (웃음) <요가학원> 들어가기 전에 촬영은 다 마친 상태였고요. 올해 11월에 개봉될 거 같아요.
올해에 개봉작 가운데 4편이나 차수연 씨의 이름이 올라가는 셈이군요.
혹시 <보트> 보셨어요?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고의적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차수연 씨 출연작은 다 봤습니다.
와! (웃음)
2년 전 인터뷰에서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캐스팅 배경이 하정우 씨의 추천 덕분이라고 하셨죠. 그리고 <보트>에서 하정우 씨와 함께 출연했습니다.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배우와 한 작품에서 만난다는 게 편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2년 전만 해도 하정우 씨는 떠오르는 신인이었지만 이제 연기력을 인정받는 배우가 됐고요. 그걸 옆에서 지켜본 입장이 어땠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하정우 오빠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옆에서 보면 배울 점도 많고, 연기에 대한 주관도 뚜렷하신 분이니까요. 에너지가 정말 넘치는 배우에요. 그리고 저도 그 에너지를 받아서 더 좋은 에너지로 쓸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배우인 거 같고요. 우선 촬영장을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배우인 거 같아요. 저는 제 것 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아직까진 그런 여유가 없지만 정우 오빠는 그런 여유로 현장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연기에서도 자연스럽게 여유가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또 얼마나 치밀한 계획과 설정들을 갖고 연기하시겠어요. 저는 아직 많은 경험이 적은 배우라서 여전히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데 옆에서 오빠가 그런 부분들을 집어주기도 했어요. <보트>에서 담배 피는 연기를 할 때,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을 만큼 과하다 싶은 제안까지 주더라고요. “혀로 끄면 참 임팩트 있겠다.” (웃음)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제가 그걸 어떻게 하겠어요. 아니면, “담배를 피우고 나서 컵에 집어넣어봐. 그럼 좀 살 것 같은데.” 그렇게 사소하지만 제가 섬세하게 잡아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살짝 건드려주곤 했죠. 너무 감사했어요.
<오감도>에서 허진호 감독님의 작품에 출연하셨죠. 허진호 감독님의 작품이라 점만으로도 멜로 연기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을까요?
<오감도>촬영은 4일 동안 했는데 아직 저에겐 짧은 시간에 그 배역으로 빠져들 수 있는 노련미가 없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어요. 그저 허진호 감독님을 믿고 멜로라는 장르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보려 노력했던 거죠. 그래서 사실 <오감도>인터뷰 때는 기자 분들에게 재미있게 말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오감도>에서 귀신 역할을 맡았고, <별빛 속으로>에서도 귀신 역할이었는데, 이번에 <요가학원>도 사실 귀신에 가까운 역할이었죠. 아무래도 차수연 씨의 인상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있는데요. 아무래도 저는 차수연 씨의 눈동자가 그런 감상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기자 분들이 도리어 저한테 자신의 신비스런 이미지가 어디서 나오는 거 같냐고 물어보시곤 하는데 저도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제 눈동자에서 묘하고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나온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니까요.
본인이 대답하기엔 좀 쑥스러운 답변이잖아요.
저는 했는데! (웃음) 사실 감독님들께서 다들 그렇게 얘기하셔서 제가 스스로 캠으로 저 자신을 찍어봤어요. 그렇게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제 까만 눈동자가 흰자 부분을 좀 더 많이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좀 묘한 느낌으로 발산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큰 눈이 아닌데도 좀 더 커 보이게 만들어주는 효과도 생기는 거 같고요.
사실 지금까지 신비스럽거나 차갑고 속 모를 느낌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각인시킨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아니요. 저는 저에게서 제일 처음으로 보여지는 이미지가 그런 것이라면 먼저 그런 이미지로 성공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제가 잘 하고, 잘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가 정확하게 보이면 이제 또 다른 이미지를 제 안에서 찾으려고 하겠죠. 예를 들어서 정우 오빠는 <추격자>에서 살인자 역할로 성공했잖아요. 그 이후로 살인자 역할은 이제 안 들어온다고 해요. 그런 것처럼 저도 차갑고 신비스런 이미지로 정확히 쐐기를 박아주면 그 다음엔 감독님들께서 또 다른 이미지의 저를 원하지 않으실까요? 제 안엔 또 다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 때 그런 이미지를 보여주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