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애틋한 건 그 지나간 기억으로부터 여전히 느껴지는 체온 때문일 게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당연스럽게 흘러가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린 스스로 모른 채 많은 것들을 흘리고 뒤돌아 줍지 못한 채 떠밀려 나간다. <토이 스토리 3>는 바로 그 잃어버린 시간에 관한, 즉 추억들에 대한 애틋한 드라마다. 세 번째 속편에 다다른 이 시리즈는 언제나 그렇듯 주인에게 버려질까 전전긍긍하는 장난감들의 좌충우돌 활극을 그린다. 1999년, 그러니까 21세기 전에 나온 전편과 10년이 넘는 격차를 두고 거듭된 세 번째 속편이지만 <토이 스토리 3>는 어느 속편들처럼 새삼스럽거나 안이한 기획물이 아니다.
지난 두 편과 마찬가지로 <토이 스토리 3>에서도 스토리텔링의 요건을 이루는 건 버려지길 두려워하는 장난감들의 활극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건 다른 장난감에 밀려나거나, 부서져서 버려지는 신세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영원히 폐기되는 것.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주인인 앤디가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는 나이로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 3>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대단한 극적 몰입도를 발생시킨다. 픽사가 제작했던 지난 작품 <업>이 극 초반부에서 젊은 남녀가 만나 함께 늙어가다 사별하기까지의 과정을 대사 한 마디 없는 몽타주 신으로 탁월하게 재생시켰던 것과 같이 <토이 스토리 3>의 오프닝 시퀀스는 몽타주를 활용하며 앤디의 성장과 그 성장을 함께 했던 장난감들의 추억을 환기시킨다. 이는 전편들을 경험하지 못했던 관객들을 위한 배려로서 손색이 없는 동시에 지난 전작을 추억하는 관객들에게는 훌륭한 선물이나 다름없다.
<토이 스토리 3>에서도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야기다. 언제나 그렇듯, 혹은 최근 들어 더욱 대단한 성과를 자랑하는 것처럼 픽사는 또 한 번 올해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토이 스토리 3>는 또 한 번 픽사의 장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또 한 편의 완전한 스토리를 창작해냈다. 픽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한 극찬을 부여할 수 있는 건 단지 뛰어난 내러티브를 완성할 줄 아는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픽사의 스토리는 체온을 품고 있다. 넉살스러운 캐릭터들은 능수능란한 유머를 구사하며 활기를 더하다가도 끝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찰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진짜 ‘감동’의 결정을 아로새긴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 3>는 픽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결정이다.
우디와 버즈를 비롯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그 장난감들의 모험담에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동시에 실로 형형하게 구현된 그 감정들을 응집시켜 이룬 압도적인 클라이맥스가 존재한다. <토이 스토리 3>에서 내러티브의 흐름은 결코 안주하거나 자만하는 법이 없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캐릭터들은 때때로 만만찮은 서스펜스로 관객을 일순간 끌어들이고 결국 좀처럼 외면할 수 없는 페이소스로 관객을 빠뜨린다.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시리즈인 <토이 스토리 3>는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속설을 실로 무색하게 만드는 문제작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영역을 넘어서 감히 영화사 안에서도 가장 훌륭한 트릴로지로서 손꼽힐만한 시리즈랄까. 심지어 <토이 스토리 3>는 픽사의 창작 비결이 마법이 아닐까 호들갑 떨고 싶게 만들 정도로 보는 이를 벅차오르게 만드는 감동의 진경으로 인도한다. 감동의 결정을 품은 이야기의 정수를 선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픽사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하나 같이 걸작이었다. <라따뚜이> <월-E> <업>까지, 매년 1편씩 걸작을 만들어내겠다는 각오라도 품은 것인양 대단한 이야기와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완성해 왔다. 사실 <토이 스토리 3>는 픽사의 아이디어 뱅크라 할 수 있는 존 라세터, 앤드류 스탠튼, 피트 닥터 등 지난 시리즈를 완성해낸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만든 야심작이기도 하다. 마치 자신들의 지난 추억을 꺼내들듯이, 그리고 자신들에게 지금의 영광에 다다르게 한 일등공신과도 같은 작품을 새롭게 닦아 내듯 정성스럽게 이야기를 직조하고 캐릭터를 어루만졌다. 대부분의 속편들이 창작자들의 무신경한 태도 속에서 흉물스럽게 망가지는 것과 달리 픽사의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보물 위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고 닦아내듯 정성을 다해 완벽한 속편을 완성했다. 장담하건대, 적어도 당신이 <토이 스토리 3>를 보게 된다면 그 사연의 끝에서 적어도 두 번은 울컥할 것이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건 그저 고맙다는 말이다. 픽사의 작품이, <토이 스토리 3>가 바로 그렇다.
어두운 전당포에 박힌 채 사는 탓에 ‘전당포 귀신’이란 별명을 얻었다는 그 사내는 말수도, 표정도 없다. 좀처럼 과거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전당포 주인 사내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일면식 없는 남자에게 붙이기 쉬운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적당한 거리감을 둔 채 접근할 뿐이다. 하지만 그 호칭의 거리감을 쉽게 무시하는 유일한 상대가 있다. 술집에서 댄서로 일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소미(김새론)는 네일 아티스트로 일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갖고 살아가는 씩씩한 소녀다. 소미만이 아저씨라 불리는 그 사내, 태식(원빈)의 전당포로 들어설 수 있다. 매일 같이 전당포를 찾아오는 소미는 태식의 말벗이 되고 자신의 외로움도 달랜다.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된 소녀와 유일하게 소녀의 아지트가 되어 주는 정체불명의 사내. 소녀와 사내의 관계는 서로에게 정서적 공백을 채워주는 유일한 위안이나 다름없다. 무신경한 태도로 상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듯 아무렇지 않게 태식의 전당포로 들어서는 소미와 무덤덤하게 문을 열어주는 태식은 서로 알게 모르게 모종의 단단한 정서적 연대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극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태식의 과거는 소미에 대한 감정을 더욱 애틋하게 매만지고, 아버지가 없는 가운데 폭력을 거듭 목격하고 자란 소미에게 태식의 존재는 일종의 대리적인 안위를 부여한다. 그런 어느 날, 두 사람의 현실을 위협하는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고 위기에 놓인 소미를 구하기 위한 태식의 고군분투가 시작된다. 그 남자 거침없다.
고독한 킬러와 어린 소녀의 우연한 관계를 담아낸 <레옹>의 내러티브에 과격하면서도 저돌적인 <테이큰>의 아버지를 사내로 치환해 격투신을 연출하고 홍콩느와르적인 스타일을 덧씌우면 <아저씨>가 된다, 는 말은 조금 비약적이지만 앞에서 열거한 요소들은 분명 <아저씨>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 무엇보다도 <아저씨>는 가족애를 느와르적인 비정성의 기폭제로 장치한 이정범 감독의 차기작이란 점에서 보다 주목받을만한 필모그래피다. 이정범은 <아저씨>를 통해 정서적 이해를 넘어 보다 직접적으로 느와르적인 비주얼 감각을 마음껏 뽐낸다. 비정성의 선을 넘는 동시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악랄한 캐릭터들을 통해 현실적인 비극성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보색에 가까운 심성을 지닌 주연 캐릭터의 비장한 감성을 적극적으로 설득시킨다.
불분명한 정체성을 지닌 덕분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연 캐릭터 태식의 가려진 단면들은 <아저씨>에서 스토리텔링의 탄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느와르적인 관성을 보다 매끈하게 기름칠하는 자질로서 유용하다. <열혈남아>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린 채 재문(설경구)을 보좌하던 치국(조한선)이 극의 후반부에 다다라 폭발적인 정서적 페이소스를 이끌어내는 것과 같이 <아저씨>가 태식의 과거를 드러내는 방식은 서사적인 흥미 속에서도 매몰되지 않는 캐릭터적 호기심을 유지하며 이야기를 보다 손쉽게 밀고 나가며 주입시키는 방편이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저씨>는 <열혈남아>에 비해 보다 높은 체온을 지닌 작품이다. 피비린내가 밑바닥에서 진동하는 잔혹한 느와르적 세계관의 끝에 휴머니즘의 위안을 품었다.
무엇보다도 <아저씨>에서<본>시리즈의 그것을 연상시키듯 정교하게 디자인된 액션신의 묘미는 발견에 가깝다. 협소한 공간에서 분각을 다투듯 스피디하게 팔과 다리를 뻗고 비트는 인물들의 효율적인 동작 속에서 발생하는 묵직한 타격감을 놓치지 않는 중반부의 액션신은 인상적이다. 특히 화려한 동작 대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실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해 나가는 인물의 동작을 통해 보다 강렬한 긴장감을 제공하는 후반부의 일대 다수 격투신은 단연 백미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생사가 결정되는 찰나의 긴박감을 냉정하게 포착하며 감각적인 소비재가 아닌 생동감 있는 진짜 폭력을 포착해낸다. 종종 그 핏빛 시퀀스의 잔혹함이 대단한 수위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과하다기 보단 확신이 대단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다고 판단할만한 완성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분명 성취에 가깝다고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지나치게 비장한 대사를 던지는 탓에 감정적으로 넘치는 몇몇의 찰나를 제외하면 원빈은 <아저씨>의 비현실성을 완벽하게 영화적 리얼리티로 승화시키는 이미지로서 완전하다. 지독하게 암담한 악의로 무장된 ‘비정성시’의 뒷골목에서 선의를 향해 비장하게 분투하는 이상적인 ‘그림’ 그 자체다. 그 그림에 휴머니즘적인 감정적 동의를 부추기는 김새론의 연기는 그녀의 나이를 고려하자면 꽤나 영악하게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기도 하다. 또한 평소 코믹한 이미지로 어필하던 김희원의 악랄한 연기는 <아저씨>의 세계관을 단단하게 다지는 미장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선악의 경계를 완벽하게 구축하는 훌륭한 기자재나 다름없다.
‘데이-X’는 고도로 훈련된 러시아 스파이들이 위장된 신분으로 미국 본토에 잠입해서 살아가다 일거에 미국 핵심부 공격을 개시한다는 냉전시절의 가설이다. 이 가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여하간 <솔트>는 이 가설을 뼈대로 삼아 허구의 살점을 붙여나간 첩보 액션물이다.
냉정하게 잘라 말하자면 21세기에 냉전이라니, 와이파이 시대에 모뎀 켜는 소리마냥 한 물 간 유물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스파이물에서 냉전시절이 언급된다는 것이 어리석은 전략은 아니다. 궁극적인 본체가 아닌 캐릭터의 서사적 배경으로서 여전히 활용가치는 다분하다. 다만 그것이 미끼가 아닌 바늘이라면 양상은 조금 달라진다. <솔트>에서 냉전은 단순히 캐릭터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사전적 정보가 아니라 캐릭터가 대면하고 극복해야 할 현재의 미션이 된다. 마치 낡은 가설의 발굴이라도 해내려는 듯 자못 진지한 태도가 되레 그 모든 기반에 소금을 뿌리듯 초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 불분명한 가설의 신빙성 따위를 물을 필요는 없겠지만 대체 이 낡은 가설, 그리고 지난 시대를 장악했던 묵은 유물적 이념이 현재에서도 이야깃거리로서 유효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해진다. <솔트>는 여성 스파이를 앞세워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한 첩보 액션물의 아류작에 가깝다. 궁극적으로 <솔트>의 야심은 그저 안젤리나 졸리의 터프한 스턴트 액션을 치장하기 위한 내러티브의 장식의 마련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냉전시대의 낡은 가설이 21세기에 부활시킨다는 전략이라니, 일부로 속아주기 어려운 거짓말처럼 몰입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무색한 법이랄까.
진부한 음모의 미로를 구태의연하게 밀어 넣는 <솔트>를 구원하는 건 안젤리나 졸리다. <솔트>는 머리보다 발을 쓰는데 능한 스파이 ‘액션’영화다. 보는 것만으로도 노고가 느껴지는 안젤리나 졸리의 스턴트 액션은 분명 볼만한 거리로서 적절한 기능을 다한다. 하지만 그 눈요기조차도 딱히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스턴트 액션의 연속에 불과하다. 흥미를 유발하기 어려운 첩보적 소재를 눈가림하듯 액션 자체로서 승부수를 띄우지만 그 역시도 애매하다. 이 정도의 액션은 흔해 빠진, 낭비적인 기시감의 복기에 불과하다. 낡은 수싸움과 빤한 몸싸움으로 이뤄진 흔한 액션물에 가깝다.
미쉘 공드리와 팀 버튼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비현실을 꿈꾸는 감독이다. 하지만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몽상의 이미지를 채색하는 공드리나 자아의 내면에 깊게 잠재된 트라우마를 악몽처럼 소환하는 버튼과 달리 놀란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보다 구체화시키는데 주력해왔다. 놀란에게 잠재된 꿈의 영역은 환상적인 비주얼에 함몰되거나 몽상처럼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꿈에 매혹당할 뿐, 그 꿈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불확실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정의를 명확하게 짚고 체계화시킨다. 자신의 꿈을 꾸는데서 멈추지 않고 그 꿈을 주시하고 목격해나가며 잠재된 세계관의 설계도를 작성한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세계관이 집약된 총아나 다름없다. 자신들이 설계한 꿈으로 표적을 유인한 뒤, 표적의 꿈에 침투해 무의식의 경계를 넘어 생각을 추출하는 자들. <인셉션>은 마치 의식 속에 잠재된 거대한 무의식의 가능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실험적 영상처럼 보인다. 타인의 꿈-비록 그것이 자신들이 설계한 도면을 통해 완성된 꿈이라 할지라도-에 잠입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자신이 침투한 타인의 꿈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주시하는 상대의 무의식을 경계하고 자신들이 훔쳐내고자 하는 표적의 생각에 접근해낼 수 있는 최단의 루트를 궁리해 나간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머리 속에 응축된 상상력을 펼쳐놓은 창작적 도면과도 같다. <메멘토>, <인썸니아> 그리고 <프레스티지>는 인간의 의식 속에 웅크린 잠재태의 비사실적인 형상을 사실적인 현실태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구체화시킨다. 놀란은 언제나 시공간의 명확한 경계를 자신의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는 장치적 요소로서 활용한다. 망각과 기억, 수면과 각성, 환상과 트릭이라는 대립적 요소가 등을 맞댄 분리면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뒤, 두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지어 정의함으로써 상반되는 대립적 관념의 공존이 가능한 비선형의 질서를 명료하게 설득시킨다. 비현실적인 관념들을 현실적인 상 위에 올려놓을 뿐, 그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음으로써 보다 입체적인 구조적 감상을 유도해낸다.
<인셉션>은 이 모든 자질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인셉션> 자체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펼쳐 보인 도면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세계관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서처럼 시작되던 영화는 점차 내밀한 설계도의 거대한 단면들을 펼쳐 보이듯 스케일을 키우지만 서사적 속도감은 유지한 채 정보의 밀도를 팽창시키며 세계관을 확장시켜 나간다. 겹겹이 쌓일 뿐 결코 뒤엉키지 않는 입체적 구조 안에서 경제적인 동선을 미리 확보해둔 것처럼 내러티브는 매끈하게 진행되고 경이적인 인테리어와 같이 발견적인 영상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인셉션>에서 묘사되는 꿈과 현실은 영화와 현실이며 동시에 허구와 현실이다. 놀란은 <인셉션>을 통해 영화를 통해 가능한 꿈의 영역을 끊임없이 파고 드는 동시에 그 거대한 허구의 연속에 짓눌리지 않도록, 즉 ‘림보’에 빠지지 않도록 이야기의 맹점을 경계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서 좀처럼 ‘죽이기 힘든’ ‘생각’들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이에 잠식당하지 않고자 재생되는 생각의 진전이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 출구를 확보해낸다. 입체적인 액자 구조 형태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체험처럼 펼쳐질 때,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장치를 얻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적 욕망을 입체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무대를 얻게 된다. 비선형적인 이미지를 통해 구축되는 명확한 논리 속에서도 깊게 응축되어 발현되고 마는 페이소스는 <인셉션>의 스토리텔링에서 가히 비기에 가깝다.
<인셉션>은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이 싸워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관과 같다. 현실을 인지하는 의식이 끊임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고 부수는 무의식의 세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낸 듯한 세계관이 스크린 위에 구현된다. <인셉션>은 분명 하나의 전형으로 남을 만한 작품이다. 이는 단순히 그 세계관의 외형이나 구조 혹은 비범한 이미지의 출현과 같이 명확하게 확인되는 결과물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완성된 작가적 세계관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투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겹겹이 싸인 그 꿈의 세계 속에서 저마다 분투를 벌이는 구성원들의 활약에 매혹 당하고 헤어날 수 없게 몰입하다 끝내 의미심장한 탄식을 내뱉고야 말 당신들의 감상은 이미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의를 고수하며 싸움에 승리한 남자에게 남은 건 영광이라 부르기조차 넌더리나는 상처 뿐이었다. 가정은 무너졌고, 직장은 사라졌다. 만신창이처럼 너덜해진 삶 속에서 무기력을 체감한 남자는 덧없는 교훈 하나를 짊어진 채 관계를 단절시키듯 살아왔던 아버지의 시신이 놓인 지방의 마을로 떠난다.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굴 속으로’ 들어가듯 세상과 스스로를 단절시키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남자는 ‘더러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다시 마음에 지펴오르는 의심을 좇아 그 실체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점차 완성돼 나가는 거대한 비밀과 마주서다 이에 맞서나가기 시작한다.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리에서 연재된 윤태호 작가의 <이끼>는 작은 실마리에서 출발해 거대한 담론으로 내달리는 작품이다. 마을을 둘러싼 비밀은 이 세계의 이면에 놓인 진실과 깊게 맞닿아 있으며 평온한 마을의 풍경은 부조리를 가린 위장의 합리로서 이뤄낸 것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류해국은 그 모든 위장된 합리로서 이룬 평온을 헤집어 내는 암적인 존재다. 애써 자신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며 자신만의 공동체 속에서 평온을 유지해오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추적하는 류해국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밀어내거나 제거하려 들고 이는 결국 어느 한 쪽의 끝을 볼 수 밖에 없는 지난한 싸움으로 치열하게 발전돼 나간다.
영화화 단계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온 <이끼>의 연출자로 나선 강우석 감독은 분명 의외의 카드였다. <이끼>는 고요한 용광로와 같은 작품이다. 완벽하게 감정이 정제돼 버린 듯한 메마르고 거친 세계관은 극단의 대립 구도로 맞서는 캐릭터들의 갈등과 충돌로서 뜨겁게 달궈진다. 유머나 분노와 같은 인간의 평면적인 감정을 넘쳐 나듯 활용하는 강우석의 세계관은 분명 <이끼>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이끼>는 원작의 영향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서 그 세계관이 스크린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재현될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우석의 <이끼>는 원작의 서사 일부를 재구성함으로서 극의 질량을 줄여냈다. 문제는 원작의 캐릭터들이 고스란히 영화에 잔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작의 다양한 캐릭터들은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임과 동시에 그 세계관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은밀하고도 긴밀하게 이뤄진 캐릭터들의 관계 구도는 <이끼>라는 세계가 품은 부조리를 완성하는 커다란 조각이며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이들과 대립 구도에 선 인물을 유인하는 지도나 다름없다. 캐릭터들의 사연은 그 세계관의 기원이자 그 세계를 이룬 부조리를 설명하기 위한 인과의 본체나 다름없다. 영화는 그 모든 사연을 묘사함에 있어서 힘을 배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이 그 캐릭터들이 극적으로 완수해야 할 목표를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이끼>는 캐릭터들의 질량을 더해서 그 세계관의 무게감을 채우는 작품이다. 캐릭터의 사연은 바로 그 캐릭터들의 극적인 질량감을 표현하는 수단 그 자체로서 완전하다. 개개인의 서사가 드러나고 축적되며 세계관의 본질이 완성되고 극이 진행된다. <이끼>는 원작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규모나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세계관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서사에 빤한 편차를 둔다. 패착은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피는 유지하되 질량이 줄어들었고, 전체적인 밀도는 낮아졌다. 변주의 시도 자체를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만 원작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그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간과하고 그 결과적인 형태만을 수용한 듯 보이는 결과물은 원작 자체에 대한 이해가 얕았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서사의 변주 역시 좋은 효과를 거둔 결과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무색한 측면이 있다. 특히 서사적인 순열을 보다 손쉽게 매만지려는 의도처럼 보이는 오프닝은 궁극적으로 원작의 장점이 영화에서 희석된 이유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시나 다름없다. 인과를 감춤으로서 독자의 의문을 증폭시킨 원작의 서사는 단순히 구조적인 트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점차 그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세계관의 너비에 서사적 질량을 늘려 나가며 극의 밀도를 채워나가는 작업과 같다. 서사의 변형은 그 구조의 자질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때때로 영화는 번뜩이는 긴장감이 담긴 시퀀스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전반적로 극의 흐름은 그 방향이 명확할 뿐, 강도의 편차가 크다. 동시에 어떤 전형적인 감정이 결여된 듯한 원작 캐릭터들과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평면적이다. 배우들은 분명 열연을 펼치고 있지만 대부분 캐릭터로서 녹아들기 보단 배우가 지닌 스테레오 타입의 열연에 가깝다. 이는 배우들의 해석력 문제라기 보단 전체적인 디렉션의 방향성 문제로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이끼>는 리메이크라는 성과 안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라 평할 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그것이 리메이크라는 의미를 지운 뒤의 성과 안에서도 딱히 특별하다 말할 것이 없는 평이한 범작에 가깝다. 때때로 이례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우석 감독의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인 냉소가 느껴진다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에 불과하다. 특히 느닷없는 장광설로 변질된 결말부나 패착에 가까운 반전은 이 작품이 원작의 기질 자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변주라는 의미 안에서도 온전한 실패를 느끼게 만든다. 서스펜스가 증발해버린 듯한 <이끼>에서 때때로 예기치 못한 유머가 발견된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이는 고의적인 의도라기 보단 우발적인 발생에 가깝다. 결국 이마저도 연출적 실패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나 다름없다. 마치 변주가 아닌 변질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캐릭터는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감상을 부른다. 1980년대 동명의 드라마시리즈를 스크린에 옮긴 <A-특공대>는 분명 인기TV시리즈의 네임밸류에 편승한 상업적 기획물이다. 하지만 <A-특공대>는 단순히 그 이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작이 지니고 있었던 장점을 명확히 계승한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두서없이 나열되는 서사의 조각들은 저마다의 서사에서 중심이 되는 캐릭터의 등장과 그 성격을 묘사하기 위한 의도 자체로서 기능한다.
저마다 유니크한 능력을 자랑하는 멤버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만큼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도 위트와 여유를 잃지 않으며 단단한 팀웍을 바탕으로 명쾌하게 임무를 완수한다. 지속적으로 제공되는 액션신이 끊임없이 자극의 세기를 밀고 올라가는 동안 곳곳에 매복된 것처럼 순발력 있게 튕겨져 나오는 역설적인 위트가 적절한 높이를 조절하듯 역치를 이룬다. 강렬한 리듬감의 자극이 적절한 강약과 안배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A-특공대>는 캐릭터를 통해 서사의 구조를 마련하고 감상의 방점을 찍는 오락영화다. 마치 첩보와 전쟁을 병풍으로 삼아 케이퍼 무비의 활력과 쾌감을 전시하는 듯한 <A-특공대>는 캐릭터의 설정과 관계의 설계에 있어서 베테랑급의 수준을 자랑한다.
고난이도의 특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A-특공대(The A-Team)'는 본명을 쓰지 않고 작전명으로 소통하는 캐릭터들의 조합으로 이뤄진 스페셜리스트 팀이다. 현명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한니발(리암 니슨)을 중심으로 대단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는 멋쟁이(브래들리 쿠퍼), 과격하면서도 순진한 B.A(퀸튼 ’램페이지‘ 잭슨), 그리고 똑똑하지만 괴짜에 가까운 머독(샬토 코플리), 이렇게 총 4명의 소수정예로 이뤄진 ’A-특공대‘의 캐릭터 각자의 개성은 <A-특공대>의 매력을 구동시키는 밑천 그 자체다.
4인의 주연 캐릭터들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A-특공대>는 단순 명확하게 캐릭터를 전시해내는 도입부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해 개개인의 개성을 조합하고 보이지 않는 관계의 여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입체적인 관계의 너비를 확보해낸다. <A-특공대>는 내러티브가 단단한 작품은 아니며 때때로 묘사의 수위가 현실성의 한계를 무시하듯 과한 감이 없지 않은 작품이지만 확실한 한 방을 통해 끊임없이 쾌감과 활기를 제공하고 축적하는 오락적 감이 뛰어난 작품이다. 단단한 조직력으로 감상을 지배하기 보다는 개인의 전투력을 응집해서 감상 자체를 궤멸시키는 작품이랄까.
과거의 TV시리즈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A-특공대>는 좋은 선물이 되겠지만 원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도 이 작품은 유효할만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르시즘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듯한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대단한 자신감을 표하는 <A-특공대>는 극단은 어떤 방식으로도 통할 수 있음을 대변하는 듯한 작품이다. 영화가 발생시키는 건 쾌감 그 자체다. 호쾌한 액션과 유쾌한 캐릭터, 그것만으로 자아내는 오락적 자질이 확실한 만족감을 부른다.
권력은 음모의 숙주다. 음모를 먹고 자란 권력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더욱 음모를 키워나가지만 점차 덩치를 키운 음모는 권력에 기생하다 결국 그 권력 자체를 먹어치운다. 베스트셀러 작가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자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작가>는 자신이 마련한 음모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파멸되는 어느 권력가와 그 권력을 조종하는 거대한 배후의 질서를 대필작가의 눈으로 묘사해내는 정치스릴러다.
미국의 해변에서 시체 한구가 발견된다. 이는 영국수상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집필하던 그의 최측근 맥아라였다. 이를 대신할 대필작가를 찾던 출판사는 새로운 고스트(이완 맥그리거)를 적임자로 찾게 되고, 그를 아담 랭이 있는 미국 별장으로 보낸다. 하지만 이와 함께 아담 랭이 국제전범재판소에 기소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그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가운데 자서전 집필을 위해 그의 곁에 머무는 고스트는 그 주변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로만 폴란스키는 예전부터 인간성의 극단에 대한 물음에 매달려 왔다. 할리우드 진출작인 <악마의 씨>는 광신에 대한 근본적인 공포를 환기시키고, 초기작인 <물속의 칼>이나 <혐오>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묘사한다. 또한 <차이나타운>을 통해서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조명하며 <테스>나 <비터문>을 통해서는 엇나간 성적 욕망을 묘사해낸다. 무엇보다도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를 묘사함으로서 인간이 빚어낸 거대한 폭력의 참상을 고발한다.
사실 <유령작가>는 원초적인 광기와 공포가 지배하던 그의 전작들에 비해 보다 장르적으로 매끈한 모양새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보다 확실한 건 <유령작가>가 바로 현시점에서 펼쳐지는 전세계적인 부조리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내면적 자의식을 확장하기 보단 그 개인의 자의식이 사회와 연동되는 현상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부정한 세계의 장벽에 맞서던 개인의 허무한 말로를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차이나타운>의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영화 가운데 가장 장르적인 형태로서 매끈한 선을 지닌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서서히 전진하듯 서술적으로 묘사한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에 비해 폴란스키의 영화는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된 듯한 서사의 경제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사의 단계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원작의 디테일한 텍스트는 영화에서 암시와 복선의 이미지로 대체된다. 이처럼 플롯의 잔가지를 쳐내고 보다 긴밀하면서도 단단한 내러티브를 구성해내는 동시에 보다 극적으로 변주된 연출을 동원한 폴란스키의 <유령작가>는 원작과 비교했을 때 극영화로서의 묘미를 살렸다고 평해도 좋을 만큼 뚜렷한 각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영화들로부터 감지되던 원초적인 기운이 탈색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특이점으로 자리잡을만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연출을 선보이며 흉악한 시대의 속살을 응시하는 폴란스키의 시선은 확실히 유효하다. 권력의 상층에 머물던 이의 치부가 드러나는 순간, 그의 몰락이 세상의 정의를 일으켜세운다고 믿지만 결국 그 몰락은 그 배후에 놓인 누군가의 또 다른 권력의 수단으로서 소비될 뿐이라는, 거대한 이 세계의 은밀한 진실을 일깨운다. 영국의 전수상 토니 블레어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도 아이러니한 감상을 부르는 <유령작가>는 폴란스키의 깊은 시선과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탁월한 정치스릴러로서의 품격을 얻었다.
<춘향전>은 언어에서 시작되어 문장으로 옮겨진 작자, 연대 미상의 구비문학이다. 대부분의 구비문학들은 다양한 근원설화로부터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라 추정되며 <춘향전>역시 <도미설화>나 <박색설화>와 같이 그 근본을 짐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근원설화를 지닌 판소리 문학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은 입과 입을 거쳐나가며 다양한 형태로서 변주되고 오늘날의 형태로서 정착된 결과물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 종래적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다. 정절과 정조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좋을 춘향의 일편단심을 그리는 <춘향전>은 당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시하던 유교적인 풍속을 대변하는 결과물로서 종착된 작품이다.
‘장안 건달 세계의 1인자 이서방’이라 불리는 방자(김주혁)가 ‘통속소설의 1인자’ 색안경(공형진)을 만나 춘향(조여정)과 몽룡(류승범) 사이에 놓인 자신의 과거를 소설화시켜줄 것을 제안하는 오프닝으로 출발되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 <방자전>은 <음란서생>의 그것처럼 입을 빌어 전달되는 구비문학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음란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의 폐쇄적 풍속의 외관 안에 담겨있을 법한 ‘비공식 야사’를 조명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당대 시대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 안에서 도발에 가까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로 다양한 서민 문화가 향유됐던 당시 시대상을 떠올린다면 보다 자연스러운 묘사로서 이해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방자전>이 지금 현재 이 시대 안에서 유효한 시도라는 점이다.
<방자전>은 한국영화가 사극을 다루는 근 몇년 사이의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상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풍기문란한 상상, 즉 체통을 중시하는 계급시대를 배경으로 둔 섹스어필한 야사는 근래 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들의 어떠한 전형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거듭 시도되고 시행되는 이야기적 방법론에 가깝다. 또한 <춘향전>을 비롯한 다양한 구비문학들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승되고 명맥을 유지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오늘날에 있어서 <춘향전>의 유효성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변주적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어필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근래 개봉됐던 <전우치>와 함께 한국 고전 소설의 현대적 쓰임새로서 비견될만한 이야깃거리로서 유용하다.
춘향과 몽룡의 서사를 중심으로 둔 <춘향전>과 달리, 그 제목처럼 방자를 중심에 둔 <방자전>은 기본적으로 <음란서생>과 유사한 서사적 리듬을 두르고 있는 작품이다. 섹스어필한 코미디를 골자로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로 치장된 전반부의 서사는 후반부에 다다라 비극적인 분위기를 두른 진지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방자전>은 그 제목 자체만으로도 감지되듯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설정에 대한 변주적 묘미를 즐길만한 작품이다. 원작이 품고 있던 열녀 춘향의 절개를 적절히 뭉개고 덧댄 뒤, 절대적 규약에 가까운 계급사회의 풍토를 비틀며 적절한 도발과 풍자의 미덕을 채워나간다. 전작에 비해 과감해진 노출 수위는 파격적이라기 보단 적절한 감상적 자극을 야기시킬 만한 전시적 효과를 거둔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다만 <음란서생>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감상을 강박적으로 얹혀놓은 것처럼 멜로적 취향을 한껏 들어올리는 결말의 감정선은 조금 민망하다. <춘향전>의 기원에 대한 풍자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아나는 위트가 짙은 멜로적 뉘앙스 안에서 침전되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방자전>은 캐스팅의 조합으로부터 숙성시키는 맛이 괜찮은 영화다. 캐스팅부터 묘한 감상을 부르는 주연배우들이 기본적인 음식맛을 유지하는 식재료 역할을 한다면 조연배우들은 특별한 맛과 향을 더하는 양념으로서 탁월하게 영화에 배어든다. 언제나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사하는 오달수의 연기는 백문이불여일견이며, 그 누구보다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송새벽은 영화의 히든카드로서 인상적인 방점을 찍는다.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미장센은 덤이다.
제목만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동명의 고전 어드벤처 PC게임을 연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사실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이하, <페르시아의 왕자>)는 그것과 시간차를 두고 있는 후속작에 가까운 롤플레잉 콘솔 게임을 모티브로 완성된 작품이다. 추억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며 실제로 그 양자에 가까운 후속 모델을 모티브로 완성된 작품이지만 실상 그 추억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 <페르시아의 왕자>는 제목 그대로 <페르시아의 왕자>이되, 그 누군가가 기억하는, 혹은 반가워할 그 게임과는 직결되지 않는 동명의 타이틀을 지닌 영화에 가깝다.
고아였지만 우연히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눈에 띄어 샤랴만 왕의 아들로 입양된 다스탄(제이크 질렌홀)은 왕가의 막내 왕자로서 활발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난다. 그러던 중, 신성한 도시라 불리는 ‘알라무트’가 위험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된 왕자들은 도시를 공격하고 다스탄의 활약으로 도시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공주 타미나(젬마 아터튼)를 만난 다스탄은 곧 함정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자로 전락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올드한 고전의 명성처럼 근래 보기 드물게 올드 패션한 영화다. 스턴트와 파쿠르, 야마카시 등으로 채워진 액션 신의 팔 할은 서커스적인 재미를 부여하며 활극적인 기운을 부여한다. 하지만 일관적으로 뛰고, 구르는 액션으로 이뤄진 역동적인 움직임을 응시하다보면 굉장히 활동적인 가운데서도 느슨하게 벌어져 가는 지루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것은 그 역동적인 움직임들이 때때로 실소를 부를 정도로 과장된 액션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액션의 줄기를 이루는 서사가 막무가내에 가깝게 흐르는 덕분이기도 하다.
단검에 채워진 모래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고, 이로 인해 운명의 수정과 보완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영화에 적절한 흥미와 신비를 부여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서사의 흐름과 소재의 활용은 과거적이라는, 그러니까 향수를 자극할만한 수단으로서 감상을 부추기기 보단 언어 그대로 오래된, 그러니까 무언가 낡은 것을 보고 있다는 인식을 부풀린다. 마치 오래된 아동용 디즈니 영화가 성인용 오락 블록버스터의 흉내를 내고 있는 형태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고 할까.
조금 기묘한 감상을 낳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페르시아의 왕자>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던 시절의 정세를 상기시키는 설정의 묘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위험한 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신비의 도시를 침공했지만 정작 그 전쟁을 발발시킨 무기는 발견되지 않으며 권력에 눈이 먼 권력자의 야욕에 의해 왕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현실을 겨냥한 교훈 따위와는 거리가 먼 영화라는 것. 철저하게 제리 브룩하이머 식의 엔터테인먼트로 가득 채워진 <페르시아의 왕자>는 스케일을 통해 대단한 오락적 너비를 확보하는 특유의 방법론을 적극 활용한 어드벤처 무비로서의 기능성만을 염두에 둔 오락영화라고 말해도 좋은 작품이다. 그러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오락영화로서의 만족감일 것이다. 뭔가 거창하고 날렵한 것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반복적이고 느슨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추억은 재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픽사(PIXAR)’가 늘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모범생이라면 ‘드림웍스(Dreamworks)’는 머리는 뛰어나지만 때때로 노력이 부족해서 열등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게으른 우등생 같다. 마치 ‘좋은 예’와 ‘나쁜 예’가 뚜렷하다고 할까.드림웍스의 신작 <드래곤 길들이기>는 그 중에서도 좋은 예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버크섬은 바이킹 부족의 고향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가축을 약탈하고 목숨을 노리는 용과 맞서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가 되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꿈이자 업이었다. 부족 내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로 통하는 바이킹 족장 스토이크는 용을 괴멸시키기 위해 그들의 거주지를 찾아내길 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더욱 더 큰 고민은 그의 아들 히컵이다. 도무지 전사와는 거리가 먼 체격과 성격을 지녔음에도 아들은 용과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며 번번이 사고만 치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스토이크의 고민은 말끔히 해결된다. 약골이라 용과 맞서기 어려울 것이라 믿었던 아들이 그 누구보다도 용을 다루는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 하지만 덕분에 히컵에게는 아버지가 모르는 고민이 하나 생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 안에서 잉태된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슈렉>시리즈의 성공 이후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들은 의인화된 캐릭터들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왔다. 동물의 탈을 썼을 뿐, 인간이나 다름없는 캐릭터들의 활동을 통해 위트를 건져내는 방식으로서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은 유효했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명확하게 인간과 자연의 대비를 그리는 작품이다. 용과 대립하는 인간들의 세계관을 통해 두 대상 간의 교감을 그린다는 점에서 자연과 인류의 경계가 중첩적이던 전작과 뚜렷하게 다른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아바타>의 대단한 흥행 이후로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는 3D영상의 구현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아바타>이후로 스크린에 가장 탁월한 3D영상을 구현하는 작품이라 자부할만한 작품이다. 물론 두 작품 사이에 간극은 있다. 실사를 바탕으로 구현한 <아바타>의 3D영상과 달리 <드래곤 길들이기>는 기본적으로 CG애니메이션의 툴을 바탕으로 제작된 3D영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두 작품의 완성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분명 <아바타>이후로 3D영화라는 포맷 안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좋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3D기술을 볼거리로서 충분히 활용하는 동시에 단순하고 명료한 스토리에 적절한 감동적 요소를 삽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적 몰입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드림웍스의 전작인 <몬스터 vs 에이리언>이 습작과 같은 3D애니메이션이었다면 <드래곤 길들이기>는 완성형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의 메인 프랜차이즈였던 <슈렉>시리즈의 뒤를 잇는 포스트 드림웍스 시리즈로서 빈자리를 채울만한 작품이라 단언해도 좋다. 이미 새로운 시리즈 제작에 착수한 <쿵푸팬더>처럼 <드래곤 길들이기>의 시리즈 기획 역시 이미 공표된 상태다.다만 그 동안 드림웍스가 시리즈를 거듭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유지하지 못했던 전례들을 생각해본다면 불안한 예감이 동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데뷔에 성공한 캐릭터를 밑천으로 삼아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무작정 서사적 레일만 깔고 전진해나가듯 시리즈를 거듭하는 방식은 <쿵푸팬더>와 <드래곤 길들이기>를 통해 새로운 국면 전환에 성공한 드림웍스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차후의 고민을 떠나서 현재의 성과, 즉 <드래곤 길들이기>는 상당히 인정받을만한 성과에 가깝다. 명확한 기승전결로 이야기의 줄기를 뚜렷하게 세우고, 교감과 성장이라는 테마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통해 명료한 감동마저 거둔다. 또한 다양한 디자인과 개성을 캐릭터와 순발력 있는 위트를 통해 탁월한 오락적 재미를 더한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오락영화로서의 평형감각과 기술과 연출의 균형감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한 큰 스크린을, 3D상영관을 찾길 권한다. 지갑을 열수록 재미는 극대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