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더 이상 사람들이 시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시상은 더 이상 운율 위로 흐르지 못하고 메마른다. 참혹한 세태 속에서 시구는 마치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은 씨앗처럼 감성을 잊은 듯 단단하게 메마른인간의 마음에 뿌리 내릴 수 없는 것마냥흩날려 간다. 물기를 잃어버린 것처럼 메말라버린 세상 속에서 시쓰기를 절실히 갈망하면서도 좀처럼 시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어느 여인은 그 대신 험악한 세상의 단면만을 거듭 목격하고 체험해 나갈 뿐이다.
물 흐르는 소리만이 가득한 강가에서 흙을 만지는 아이들, 그 중 한 아이의 시선이 강물 위로 머문다. 그 시선을 따라잡은 카메라 너머로 수면 위로 무언가가 점차 스크린 너머의 객석을 향해 떠밀려온다. 한적한 자연풍경과 대비적인, 참혹한 광경이 눈앞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시>는 대사 한마디 없는 풍경만으로 유려하고 명징하게 이 세계의 단면과 이면을 발췌해 관객의 눈 앞에 들이민다. 안온한 풍경 안에서 쉽게 표정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참담한 실체의 고요한 등장. <시>는 직설적인 문체와 서정적인 운율이 동반된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형태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면에 담긴 끔찍한 직설과 비통한 은유를 찌르고 머금는 영화다.
직장문제로 부산에 내려가 지내는 딸 대신 홀로 손자(이다윗)를 키우며 할머니 미자(윤정희)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어느 날, 어꺠결림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미자는 강으로 투신해 자살했다는 소녀의 어머니가 넋나간 듯 딸을 찾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잊지 못하던 미자는 그것이 곧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육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강으로 투신한 소녀가 대면해야 했던 폭력은 끔찍하게 매듭지어졌지만 그 폭력의 당사자들은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가해를 쉽게 희석시키고, 그 당사자들의 부모는 위로나 슬픔의 감정보단 해결과 처리의 이성적 방안을 마련한다. 그 이성적인 해결방안은 미자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시상에 몰두해나간다.
어떤 일상은 파문처럼 번지듯 조용히 떠밀려와 삶을 출렁이게 만들고 흘러 넘쳐 채울 수 없도록 흔들어대지만 실상 삶은 그렇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다시 제 삶을 이룬다. <시>는 사건의 단면을 끌어내며 감정을 진동시키기 보단 사건을 품은 일상의 풍광을 고스란히 지켜봄으로서 감정을 억누른다. <밀양>이 일상을 파헤치고 삶을 도려내어 그 생의 심층을 관찰하는 영화였다면 <시>는 일상으로 덮여가는 삶의 진행적인 너비가 결국 가닿을 수 밖에 없는 생의 영토를 살피는 영화다. 담담하게 떠밀려 내려와 삶을 위협하는 현실 위로 일상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지만 실상 그 삶은 쉽게 내려앉지 않은 채 켜켜이 시간의 중력 위로 떠밀려 내려가 새로운 일상을 쌓아나간다.
그 어떤 날, 우연히 스쳐 지난 타인의 일상이 제 일상의 발목을 붙잡듯 운명은 어떠한 예감도 없이 너비를 펼쳐 생을 덧없는 것으로 몰아가고 일상은 당연스럽게 생의 너비를 밀어낸다. 그 흐름에 순응하듯 인간의 생은 무력하게 유지되지만 그 삶의 흐름마저도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처럼 차분히 이 세계 속으로 안착한다. 아름다운 일상의 총합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삶의 너비는 마치 물처럼 흐르는 일상 속에서 점차 정화될 수 밖에 없는 기억처럼 고요히 흐름을 지속해나갈 뿐이다. <시>는 <밀양>처럼 어떤 종교적인 엄숙함을 감지하게 만드는 영화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체념적 체험이 아닌 갈망적 의지로서 보다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둔탁하고 거친 각운의 경험이 남긴 심상의 상흔은 결국 삶의 운율 속에서 보다 깊고 고요한 문체가 되어 삶을 정화시킨다.
<시>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를 통해 보다 명징한 통증과 수려한 슬픔을 각인시키면서도 끝내 그것이 아름답다 말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경이로운 영화다. 이미 존재 자체로서 시나 다름없는 여인은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나, 시를 흉내내는 속물들의 세상 속에서 시를 되묻는다. 그리고 결국 한편의 시를 완성한다. 통증의 세상에서 깊게 침전해 내려가는 감성의 운율은 아련하다 못해 시리고 창백해서 아프고 고결해 소중한 것이다. 이창동은 정적이면서도 첨예하게 파고 드는 문체를 구사하는 가운데, 윤정희는 그 안에서 자신만의 화법을 동원하며 독자적인 운율을 보존한다. 세상은 메마르고, 삶은 시리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영화는 되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저마다의 삶은 모두가 그렇듯 스스로 돋아나고, 자라나는데 세상은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시상을 어렵게 떠올리고 쓰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처럼 삶을 아름답게 떠올리고 써내려 가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탓이 아닐까. 그래도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있더라도, 살아서 만나기를.
악의는 연기처럼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힌다. 개인의 삶을 흔들고 때때로 세상을 무력하게 옥죈다. 그럼에도 아직 세상이 살만하다 말할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선의 덕분이다. 쉽게 피어나고 흩어져 나가는 악의와 달리 선의는 조심스럽게 피어나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난 뒤, 세상을 치장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바로 그 선의에 관한 이야기다. 선의에서 비롯된 현실의 사연은 텍스트로 옮겨진 뒤, 이미지로 재현된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실제 미식축구의 경기 장면과 이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미식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쿼터백(Quarter Back)이다. 각팀에 자리한 쿼터백의 전술을 통해 자신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에 접근시키느냐, 상대의 러닝백을 터치라인으로부터 밀어내느냐, 에 따라서 승운이 갈리는 게임이다. 전진패스가 불가능한 미식축구에서 득점을 올리기 위해서는 상대 선수의 저돌적인 태클을 피해 공(pigskin)을 안고 터치라인으로 돌진해서 터치다운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전술을 지시하는 쿼터백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만큼 쿼터백의 보호도 중요하다. 미식축구 프로리그(NFL)에서 쿼터백 다음으로 레프트 태클(Left Tackle)이 고액연봉을 받는 것도 그 덕분이다. 레프트 태클의 임무는 바로 그 쿼터백의 보호다. 쿼터백을 향해 태클을 걸 상대 선수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쿼터백의 진로와 시야를 여는 것이 바로 레프트 태클의 임무다. “모든 주부들이 알겠지만 첫째로 돈이 많이 드는 곳이 주택융자금이라면 두 번째는 보험료죠.” 산드라 블록의 내레이션은 미식축구에서 쿼터백과 레프트 태클이 차지하는 포지션의 비중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블라인드 사이드>의 오프닝 시퀀스는 두 가지 기능성을 품고 있다. 만약 미식축구의 룰을 모르는 관객이라고 해도 그 오프닝 시퀀스를 통과한 관객이라면 <블라인드 사이드>가 묘사하는 미식축구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이 영화의지향점으로 안내하는 일종의 팁이다. 영화의 타이틀이기도 한 <블라인드 사이드 Blind side>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었다. 미식축구 경기장 내에서 레프트 태클이 보호해야 할 쿼터백의 ‘사각지대’를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에서는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선의의 ‘사각지대’를 의미한다.
결손가정에서 자라나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한 155kg의 거구 마이클 오어(퀸튼 아론)는 리 앤(산드라 블록)을 통해 부유한 투오이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삶의 기회를 열어나간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쿼터백이 터치라인을 향해 팀을 전진시키듯, 정해진 결말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영화이자 단순명료한 룰처럼 명확하게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다. 중요한 건 단순히 그 결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말의 의미를 명확히 다져나가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이 터치라인이라면, 그 결말에서 얻어져야 할 의미는 터치다운이다. 미식축구가 터치다운을 통해 승패를 가늠하는 게임이듯, <블라인드 사이드>의 성패도 실화가 품은 의미를 영화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영화인 셈이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마이클과 투오이 가족, 그 중에서도 리 앤과의 관계 묘사에 있어서 인상적인 감상을 끌어낸다. 부유한 백인 가정이 열악한 환경에 놓인 흑인 소년을 자신의 울타리로 편입시켜 그가 품은 가능성을 발굴하고, 그의 인생을 보다 나은 궤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의 근거는 리 앤의 선의로서 설명되며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가치관 안에서 이해될만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그 선의를 있는 자의 여유 안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선의가 어디서 비롯되고 발전해나갈 수 있었는가의 문제다. 단순히 ‘봉사활동’과 같은 의무적인 행위와는 구별될만한 지점이다. 이런 묘사가 <블라인드 사이드>를 드라마틱한 재현 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실화에 담긴 진심을 포착하고 그 실존적인 감정의 원형을 스크린에 덧입히는데 성공한 작품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사실상 마이클과 리 앤의 관계는 명확하다. 리 앤은 베풀고, 마이클은 받는다. 이는 표면적으로 가진 자가 나누고, 갖지 못한 자가 받는,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와 유사한 일방향적인 소통의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는 단순히 선의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의가 낳은 관계의 소통과 발전적 가치를 묘사하는 영화다. 마이클에 대한 리 앤의 헌신이 동정의 수순을 넘어 소통의 관계로 거듭날 때 삶의 의미는 확장되고 진심은 체온을 얻는다. 리 앤과 마이클은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 거주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리 앤은 마이클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각지대를 깨닫게 된다. 마이클은 리 앤을 통해 자신이 꿈꾸지 못했던 사각지대의 희망을 품게 된다. 마이클과 리 앤은 서로에게 있어서 ‘블라인드 사이드’를 열어주는 관계다. 결국 리 앤이 마이클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마이클 역시 리 앤의 삶을 변하게 만든다.
리 앤의 선의가 마이클에게 통할 수 있는 건 리 앤의 선의가 헌신적이기 이전에 마이클이 그 선의를 받아들일만한 자격이 되는 인물이자 선의가 통할 수 있는 선의를 지닌 인물인 까닭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블라인드 사이드>에서 선의가 위협받는 건 당사자가 아닌 제3의 인물들을 통해서다. 당사자들의 진심은 타인의 의심을 통해 흔들리거나 위협받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건 당사자들의 진심에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가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작품이자 이를 통해 선의의 가치에 대해서 설득한다. 선의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건 결국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개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그런 개인이 모인 사회에서 선의의 가능성은 보다 높은 생존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렇게 선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의식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심이 담긴 선의가 살아남듯, 드라마를 살리는 것도 그 진심이다.
쿼터백의 지시에 따라 모든 선수들이 터치다운의 활로를 뚫어내는 것처럼, <블라인드 사이드> 역시 실화가 품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크고 작은 요소들의 공헌도가 돋보이는 영화다. 간결하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진심을 담아내기 좋은 형태로서 완성됐다. 저마다 적절한 감정의 깊이를 자아내고 관계의 너비를 구축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은 감상을 부른다. 특히 최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산드라 블록은 (그 수상자격에 대한 의심 따위는 상관 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완성한다. 무엇보다도 <블라인드 사이드>는 선의의 재현을 넘어 보존이란 측면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품고 있다. 선의는 이렇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 감동을 보존한다. 이는 우리에게 선의의 발굴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설득하는 동시에 그 가치의 보존이 영화라는 매체의 가치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식임을 증명한다.
그녀는 인형이다. 다만 순수한 동심을 배려하기 위해 태어난 인형이 아니다. 그녀는 성인 남성을 위해 마련된 인형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하자면 성인 남성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성인 용품이다. 흔히 말하는 섹스돌(sex doll)에 가까운 공기인형(air doll)이다. 물론 인형에게 운명이나 인생이란 단어는 마땅치 않다. 그렇기에 인형의 용도를 가혹하다 설명하는 것도 마뜩찮은 일이다.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공기인형>에서의 인형만큼은 운명이나 인생이란 단어를 동원해야 한다. <공기인형>은 사람의 마음을 얻게 된 인형에 관한 영화이므로. 이는 <공기인형>이 묘사하는 세계의 정서 안에서 분명 역설적인 감상을 부를 만한 것이다.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인간들의 세상에서, 마음이란 것 자체를 담아낼 수 없는 텅 빈 그릇이 된 인간들의 세계에서, 되레 마음을 얻게 되버린 인형의 운명이라니, 분명 역설적이다.
노조미(배두나)는 웨이터로 일하는 독신남 히데오(이타오 이츠지)가 소유한 인형이다. 그는 인형을 마치 자신의 애인처럼 대하며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자신의 성욕을 해결한다. 인형은 결국 마음을 빙자한 인간의 소유물로서 행위의 대상에 불과하다. 대상화된 물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주인이 집을 비우면 인형은 살아난다. 주인이 매만진대로 죽은 듯이 누워있던 인형이 일어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말을 배우고, 행동을 익힌다. 구체 관절로 인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눈에 띄게 움직이지만 인형은 점차 사고하며 세상을 관찰한다. 그리고 마음을 얻는다. 그 마음이란 우리가 익히 말해온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랑이 인형을 욕망하게 만든다. 우연히 들른 비디오샵에서 만난 직원 준이치(아라타)를 보고 감정을 얻게 된다.
고레이다 히로카즈는 언제나 잔잔한 수면처럼 평온한 표정을 지닌 풍경을 전시한다. 하지만 그 풍경의 수심 밑바닥에는 고도의 갈등과 소통의 불화가 켜켜이 쌓여 암초처럼 머리를 내민 부조리들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종종 평온한 현실의 풍경 위로 머리를 내민 부조리들은 어느 개인의 삶을 좌초시키거나 소통을 막아서고 서로 선회하게 만든다. 밀도는 변하지 않지만 온도가 변한다. 그 안온한 풍경 뒤로 내면의 갈등이 첨예하게 도드라진다. 대표작이라 할만한 <아무도 모른다>를 비롯해 근작인 <걸어도 걸어도>까지,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영화들은 표정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그 틈새로 새어나오는 이상 체온의 발화점을 색출해낸다.
<공기인형>은 인형이라는 이방인의 관점을 빌려 인간들의 세계를 관찰해내고 진단하는 영화다. 도쿄라는 특정한 지정학을 배경으로 두르고 있으며 그 환경이 연출하는 갖가지 특이점들을 묘사하고 있지만 굳이 <공기인형>이 묘사해내는 모든 병리학적인 풍경들을 굳이 도쿄라는 지정학에 매몰시킬 필요는 없다. 로케이션의 풍경은 이질적이되,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양태는 현대 도시라는 보편적 정서 속에서 일반적인 것이다. 노조미가 관찰하고 접촉하는 도쿄의 사람들에게 내재된 상실감이나 공허함은 익히 보편적인 현대인들의 감정적 재해나 다름없다. <공기인형>은 인형이라는 이방인의 눈은 익숙한 풍경들을 낯설게 재현하는 프리즘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공기인형>에서 인형이란 세상을 적나라하게 바라보는 눈이자 그 세상을 채운 다수의 사람들의 곁에 선 대조군의 역할로서 유효하다.
부자연스러운 인형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서 감상의 특이점을 확보해낸다. 시간의 흐름과 경험의 축적 속에서 변화하는 인형의 움직임과 일상적 태도를 관찰하는 건 그 자체로서 흥미롭다. 하지만 <공기인형>이 묘사하는 세계관의 진풍경은 진부한 측면이 있다. 히끼꼬모리를 비롯해, 변태적인 성욕자, 노쇠한 늙은이, 외모에 예민한 여인 등, <공기인형>에서 인형이 마주치고 상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란 하나같이 상징적인 나열의 의미를 품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풍경은 익히 진부하다. 익히 현실적인 문제들을 품고 있지만 그 특수한 개별적 이미지들의 합산으로 완성된 결과값은 그만큼의 의도에 부합될만한 의미를 전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스펙트럼의 너비보다도 프리즘의 형태가 흥미롭다는 건 <공기인형>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하지만 <공기인형>은 단지 그 세계를 중계하는,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활보해 나가는 공기인형의 형태만으로도 인상적인 작품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인형의 관점을 통해 현대인간들의 공허를 관통해 나가는 <공기인형>의 표면적 의도는 해석의 수순으로 넘어갈 필요 없이 관찰의 수순에서 해결될 만큼 영화의 표면을 떠다니는 공기의 입자와 같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의도의 깊이를 압도하는 형태적인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영화에서 그 형태의 완성을 가늠하는 건 <공기인형>에서 중요한 대목이나 다름없다. 공기로 채워진 노조미의 반투명한 비닐 재질의 몸이 빛을 반투명하게 관통하고 이를 노조미가 관찰할 때,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영화는 비범해진다.
무엇보다도 공기를 채우며 일상을 거닐던 인형이 자신의 몸을 타인의 숨으로 채운 뒤, 그 숨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낼 때, <공기인형>이 나열한 군상의 표정을 동원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의미는 명확해진다. 타인의 숨결을 통해 생동하는 삶이란 이처럼 아름답고 애처롭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아름답고 애처로운 삶으로부터 도피할 때, 인형이 그 삶을 선택함으로서 지금의 세계와 그 안의 사람들이 마주한 공허의 너비가 실체를 드러낸다. <공기인형>은 단순히 멜로영화라는 장르적 평가 안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이고 독자적인 성취를 이룬 영화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면서도 그 비극적 종결을 예감하지도 못한 채 자신의 상식 안에서 마음을 쏟아내고 이를 통해 비극을 체감하는 인형은 그 담담한 표정을 통해 되레 그 현상적 파국의 너비가 품은 감정적 여운의 가능성을 마음껏 확장한다.
무엇보다도 <공기인형>은 배두나가 연기한 공기인형의 육체만으로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배두나는 <공기인형>의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으로서, 그 존재 자체로서 영화를 이룬다고 할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배두나의 연기 자체의 탁월함은 물론이고, 인형이라는 이방인으로서 존재하는 대상이 배두나라는 비일본인의 신분으로서 연기된다는 점만으로도 그것을 관찰하는 이에게 특별한 감상을 부른다. 평온한 표정으로 체온을 연출하지만 냉정한 낯빛으로 세계의 환부를 적출하는 고레이다 히로카즈가 <공기인형>에서 배두나를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공기인형>은 이미 탁월한 가능성을 품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두나는 단순히 육체의 움직임만으로도 공허한 세상을 채우는 인형의 꿈을 생동감 있는 현실로 승화시킨다.
제우스가 만들어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올림푸스의 신들도 욕망하는 존재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신의 군상이란 현대적 의미에서 당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관 속의 가공적인 캐릭터에 가까운 것이다. 곧 그리스 신화란 오늘날에 있어서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판타지의 소스로서 유용하다. 인간을 탄생시켰다지만, 인간에 의해 창작되었고, 인간을 지배한다지만, 인간에 의해 완성된, 인간사의 또 다른 판본이나 다름없다. 특히나 창작력의 고갈에 다다를 정도로 컨텐츠의 소비가 극대화되고 리메이크가 득세하는 요즘의 시대에서 그리스 신화와 같이 방대한 세계관은 분명 아이템에 목마른 창작자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화수분의 세계일 것이다.
1981년에 개봉된 <타이탄 족의 멸망 Clasf of the Titans>을 리메이크한 <타이탄 Clash of the Titans>은 시대의 변화만큼이나 영상기술이 진보했음을 뽐내는 작품이다. 원작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스톱모션 기법을 활용하며 눈속임에 성공했던 것과 달리 근작은 근사한 CG를 동원하며 비현실성을 현실감 있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타이탄>이 원작을 보다 근사한 이미지로 재활용하는 작품으로서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타이탄>은 원작을 비롯해서 그리스 신화의 내러티브 자체에 일부 변형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근본적인 메시지를 얹어내려 한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스만큼이나 잘 알려진 영웅 페르세우스(샘 워싱턴)에 관한 서사를 스크린에 펼쳐낸 원작처럼 <타이탄> 역시 페르세우스의 영웅담을 현대에 재생한다. 다만 신화의 플롯을 충실히 재현하는 원작과 달리 <타이탄>은 그 플롯을 활용하되 재가공한 뒤, 재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신과 인간의 혼혈아인 반신반인 ‘데미갓’ 페르세우스는 제우스(리암 니슨)로부터 물려받은 혈통을 범상한 재능이 아닌 저주 받은 운명처럼 여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친 신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하데스(랄프 파인즈)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에게 닥쳐오는 운명의 과업들을 하나씩 헤쳐나간다. <타이탄>은 마치 <반지의 제왕>과 <스타워즈>를 비롯해서 갖가지 영웅의 성장물을 뒤섞은 클리셰 범벅의 영화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 영화에 반영된 것이 그리스 신화란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선 작품들의 연관성을 비교하는 건 딱히 효과적인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야말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서사에 깊게 관여한 스토리텔링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탄>은 페르세우스의 영웅담 가운데 중요한 맥락들을 원형에 가깝게 묘사하면서도 그 의미를 조금씩 변주한다. 메두사의 목을 베고, 페가수스를 타고 하늘을 날며, <타이탄>에서는 크라켄이라 소개되는 괴물을 물리치고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모든 에피소드는 페르세우스를 장식하는 무용담으로서 기능을 국한하지 않는다. <타이탄>은 마치 헤브라이즘에 저항하는 헬레니즘적인 영화처럼 보인다. 신의 폭정에 저항하는 인간들의 세계에서 신의 피를 물려받은 페르세우스가 그들의 구원자로서 활약하는 과정은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동시에 휴머니즘의 의미를 역설한다. <타이탄>이 비범한 일관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영화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캐릭터의 감정이나 태도는 종종 엇나가거나 방향을 잃고 그 진전을 무시한 채 무리한 선회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타이탄>은 재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부적으로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그 재능을 경멸하는 건 끔찍한 낭비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재능의 활용이 공공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이는 재능의 가치 자체에 대한 설득에 가깝다.
3D 비주얼을 내세우고 있지만 <타이탄>은 굳이 3D로 관람할 이유가 없는 영화다. 편광안경으로 인해 전반적인 색감이 훼손당하는 동시에 3D 입체효과가 이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들 만한 뚜렷한 기능적 값어치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타이탄>이 만들어내는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들은 (종종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괜찮은 볼거리가 된다. 사막에서의 전갈과의 전투나 메두사와의 대결 신을 비롯해서 크라켄이 등장하는 후반부 신은 액션 블록버스터로서 강력한 한 방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적절하다. 최근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는 샘 워싱턴은 터프하면서도 강직한 영웅적 면모를 온 몸으로 드러낸다. 신의 세계에서 영웅이 된 인간의 활약상은 비주얼의 성과와 함께 텍스트로서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리스 신화가 현대에서 오락적으로 유용하다는 걸 증명한다고 할까.
2003년 3월 19일,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미군은 전폭기를 동원해 바그다드 상공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다. 미군의 총공세로 바그다드는 초토화됐고 미군의 진격으로 도시는 점령됐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명목으로 이라크에 무력을 행사했고,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부시는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으며 애초에 그것은 전쟁처럼 시작되지도 않았다. 미국이 주장했던 대량살상무기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그 허구적 주장이 대량살상의 참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그린 존>은 명확하게 그날을 재현하는 데서 출발한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을 연출하며 확고한 팬덤을 형성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다시 한번 맷 데이먼을 앞세워 ‘진짜’ 미국의 치부를 들춘다.
로이 밀러(맷 데이먼)는 제이슨 본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다르지만 유사한판본이다. 그는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수색하는 ‘MET-D’ 팀에서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는’ 미육군 소위다. 정부의 주장대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음을 의심치 않는 그는 매번 ‘정보와 현장 상황이 다른’ 임무수행 과정을 겪어나가며 점차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모종의 확신을 통해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이행할 뿐, 분석의 의무가 없다는’ 상관의 냉소적인 답변 뿐이다. 하지만 밀러가 품은 의혹은 더욱 짙어지고 이를 눈여겨보던 CIA요원 마틴 브라운(브렌단 글리슨)은 그에게 모종의 제안을 던지고 진실의 은폐를 도모하는 국방부 요원 파운드스톤(그랙 키니어)이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기 시작한다.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어디에서도 증명되지 않았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 아래 명분은 온전히 퇴색됐다. 9.11 테러가 만들어낸 트라우마로부터 달아나듯 이라크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위무하듯 그승리를 자축하던 미국은 그 뒤로 깊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렁에 빠졌다.그리고포스트 9.11이후, 그로부터 잉태된 파괴적징후는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동어반복적으로 지적되고 보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왔다. 그런 면에서 사실그모든 징후들의 시발점이 된 그날을 되새김질하며 그 뒤에 자리한 음모론을 폭로하는 건 분명 새삼스러운 일이다. 이미 지난 9.11테러와이라크전으로부터 생산된징후들은 수 차례에 걸쳐 관찰되고 진단되어 왔으며 그 재현 방식 또한 다양한 형식을 빌려 보다 너른 텍스트로 확장돼 왔기 때문이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 이후로 7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계평화와 독재의 타도를 위한 이라크 점령을 주장한 미국의 해명을 여전히 무색하게 만드는 사안이다. 이라크 전쟁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의 ‘세계평화’적 결의가 아닌 ‘석유전쟁’의 일환이라는 것도 공공연하게 제기된 진실이나 다름없다. ‘대량살상무기’의 제거가 아닌 ‘석유’의 수급을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했다는 설은 공공연한 사실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를 끊임없이 부인하는 당사자들이 존재하는 한, 사실은 사실로서 확증되지 못한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린 존>이 그려내는 풍경은 분명 새삼스럽지만 그 풍경 너머의 현상은 여전히 유효한 사건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그린 존>을 통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되묻고 있다. 2003년에 벌어진 참상은 2010년의 현실에서도 미결의 과제인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현장감을 연출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자랑하는 감독이다. 두 편의 <본> 시리즈를 비롯해서 <플라이트 93>과 <블러디 선데이>를 통해 선사한 현장의 이미지는 가히 체험적인 감상을 제공한다. 역동적인 핸드헬드와 긴박감을 제공하는 빠른 컷의 전환, 그리고 적절하게 치고 빠지며 찰나의 몰입을 도모하는 줌 인의 타이밍. 폴 그린그래스는 특유의 장기를 활용해 <그린 존>에서 전장의 사실감을 극대화시킨다. 미군의 바그다드 폭격신이 등장하는 도입부부터 대량살상무기 수색에 나서는 미군의 시가전을 다루는 초반부부터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연출을 통해 극에 대한 몰입도를 극대화시킨다.
<그린 존>을 통해 사실적인 전장을 묘사하는 폴 그린그래스가 목표한 것이 단순히 그 현장성의 재현이었다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린 존>은 그 재현 자체만으로도 다이렉트한 쾌감과 명확한 감상을 발생시키는 작품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 존>의 야심은 그 현장감의 재현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린 존>이 재현하는 긴박한 현장감은 결과적으로 그 현장의 기저에 웅크리고 있는 음모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한 키워드나 다름없다. 관객은 <그린 존>이 부여하는 리얼리즘의 시선을 통해 진짜 진실의 너비를 함께 목격한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볼모로 둔 그 참혹한 현장의 진실을 향해 날렵하게 움직이되 첨예한 시선을 유지해낸다. 위기일발의 전장을 누비는 미군들과 그 안에서 매일같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라크인들의 참상과 대비되는 ‘그린 존’의 과소비적인 정경은 이 세계의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뼈 있는’ 풍경이다. 정의와 평화의 이름을 내건 강대국의 대의적 논리가 세계의 질서를 유린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을 농락하는 소수 권력자의 야욕임이 고발한다.
<본> 시리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린 존>은 그 모든 부조리가 잉태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부조리의 청산을 주장하고설득한다. 음모론의 대가토니 길로이의 각본에 비해 <그린 존>이 설계한 음모론의 그물망은 보다 평면적이지만 폴 그린그래스의 사실적인 연출력과 맷 데이먼의 우직한 표정은 진실의 무게감을 훼손하지 않은 채 진실로 전진하는 날카로운 눈과 단단한 두 다리를마련했다. 이라크의 현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 시작점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시리즈를 통해 말했던 것처럼 모든 딜레마의 출발점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그린 존>을 통해 첨언하고 있다.첫 단추를 잘못 채운 누군가가 이를 바로잡지 못할 때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정확하게 다시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린 존>은바로 그 의미의 원점을명확하고 통쾌하게 관통한다.
어머니는 희망한다. 자신의 딸이 미인대회에서 우승하길. 그리고 믿는다. 그것이 딸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줄 것이라고. 딸은 희망한다. 미인대회 단상에 서는 것 따위보다 자신에게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길. 그리고 믿는다. 분명 지금과 또 다른 현실이 내일엔 존재할 것이라고. 블리스(엘렌 페이지)는 도회지와 거리를 둔 시골마을의 평범한 학생이자 딸이다. 지극히 평온하여 지루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일탈을 꿈꾸던 블리스는 조약돌처럼 날아든 롤러 더비의 풍경을 목격하고 이는 소녀의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킨다. 결국 그 파문을 따라 헤엄쳐 나가듯 롤러 더비에 발을 들이게 된 블리스는 파도처럼 출렁이는 수면 위의 갈등을 피하지 않고 물살을 헤치듯 그 삶을 갈라 자신만의 내일로 나아간다.
<위핏>은 평범함을 옳고 바른 삶이라 강요하는 부모의 훈계에 갇혀 있던 소녀가 자신의 역동적인 삶을 찾아 저항하는 하이틴 무비의 혈기를 품고 있다. 사실 성장드라마라는 공식 안에서 지극히 정형화된 범주의 기승전결을 선보이지만 <위핏>은 불필요한 반항적 혈기보다도 자신만의 삶을 갈망하는 10대의 건전한 정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삶을 관철시키는 영민한 태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보다 특별하다. 10대 소녀의 성장을 관통하는 동시에 소녀의 주변 환경을 채우는 인물들의 내면적 진심을 깊이 있게 포착해낸다. 결국 어느 개인의 성장을 이루는 건 그 개인의 영민한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바이기도 하겠지만 그 주변 환경의 성숙을 통해서 보다 단단하게 일궈질 수 있음을 <위핏>은 설득하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삶의 자극을 꿈꾸던 소녀의 선택을 단순한 관대함이 아닌 진정한 이해의 눈길로서 조명한다.
(국내 관객에겐 다소 낯선 감상을 제공할만한) 롤러 더비라는 스포츠가 등장하는 <위핏>은 성장드라마로서 내면적 질량을 채우는 동시에 스포츠 영화로서의 외형적 부피를 확장하는, 밀도가 단단한 작품이기도 하다. 경사진 트랙 위에서 빠르게 내달리는 동시에 거친 몸싸움을 불사하는 여성들의 롤러 더비는 <위핏>에서 흥미진진한 볼거리다. 이는 롤러 더비의 현장감을 생생히 담아낸 카메라 워크의 탁월함 덕분이기도 하지만 진짜 자신의 육체를 롤러 더비에 적응시킨 배우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바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스크린의 한 켠에서 끊임없이 넘어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배우들의 훈련 과정은 영화를 위해 헌신한 배우들의 진심을 느끼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는 일찍이 파란만장한 성장사를 견뎌낸 드류 배리모어의 첫 번째 연출작이란 점에서도 보다 특별한 외부적 감상을 부른다. 이른 10대 시절부터 삶의 정체성에 깊은 혼돈을 느꼈던 그녀의 경험담이 역설적으로 보다 담백하고 진솔한 성장드라마의 고민으로서 투영됐다 말해도 좋을 만큼 <위핏>은 서사적 익숙함을 정서적 체온의 깊이로 극복해낸다. 또한 그 연출적 진심을 대변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적절한 평형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특별한 곡예를 선보이는 선수들처럼 유쾌한 활기와 원숙한 관록을 갖춘 배우들의 앙상블이 영화의 정서를 두텁게 매만진다. 이는 <위핏>의 긍정적 에너지로서 보존된다.
미인대회의 단상에서 본인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연출해내던 블리스는 거친 롤러 더비 트랙에서 자신의 진정한 미소를 발굴해낸다. 스스로에게 강압된 궤도를 이탈한 소녀는 그 새로운 궤도 위에서 자신이 원하던 방향을 찾아 내달린다. 그리고 그 내달림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옥죄던 어머니의 강압에 반항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진심을 설득해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결국 소녀는 성숙한다. 물론 그 성숙 이후로 블리스의 삶이 온전히 다른 것이 될 것이라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보다도 그 경험의 순간들을 지난 소녀의 현재는 분명 남다른 것이다.
<위핏>이 선사하는 결말부의 낙관은 소녀의 도전을 위한 보상을 마련하기보다도 그 도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를 끌어올린다. 굳이 승리로서 그 도전의 가치를 증명하기보다도 그 도전 자체가 이루는 경험적 가치를 깨닫게 만든다. 개개인의 인생이란 승리와 패배로서 주연과 조연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삶에서 어떤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한다. 누군가를 누르고 승리를 만끽할 수 없다 해서 그 삶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건전한 가치관을 탁월한 드라마의 리듬감과 유쾌한 활기로서 설득한다. 그 트랙 위의 질주는 결국 승패보다도 성숙을 위한 것이었음을 끝내 설득한다. 그리고 빠르고 단단한 스포츠 성장드라마 <위핏>을 선보이며 감독으로서 영역을 옮긴 드류 배리모어의 데뷔전은 분명 성공적인 것이다.
늑대인간은 드라큘라와 함께 서구의 고전적인 서스펜스의 소재로서 이야기를 통해 장수를 누려왔다. <울프맨>은 이 고전적 소재가 현대에서도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작품 같다. 1941년, 조지 와그너가 연출한 동명원작을 리메이크한 <울프맨>은 ‘랩 디졸브(Lap Dissolve)’ 기법을 활용하며 당대 영상기법의 교과서적 선례로 추앙받았던 원작의 시대로부터 현격하게 진화된 CG기술력을 토대로 현대적인 영상기술의 발전을 증명하면서도 고전적인 특수분장기법을 포용함으로써 클래식한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원작이 동시대 안에서 파격적인 가치를 증명했던 것과 달리 <울프맨>은 되레 복고적인 가치를 어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식적 태도는 원작의 형태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리메이크라는 방식의 가치를 생산해낸다.
사실 <울프맨>은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원작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10여 년 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로렌스(베네치오 델 토로)에게 동생이 실종됐다는 비보가 전해지고, 이로 인해 로렌스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로 인해 아버지 존(안소니 홉킨스)과 재회하는 로렌스는 괴기한 사건에 휘말림과 동시에 아버지와 관련된 트라우마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큰 틀 안에서 원작과 특별한 차이를 두지 않는 서사는 딱히 그 원작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현대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질 만한 것이 아니다. <울프맨>은 전형적인 늑대인간 이야기를 정통적으로 계승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재가 잉태한 스토리의 원형에 근접한 작품인 까닭이다. 예기치 않게 늑대인간의 운명에 속박돼 버린 사내의 비극적 운명론, 그리고 그 위에 덧입혀질 로맨스적 비극 등은 하나 같이 고전적인 소재의 전형성을 설명하기 좋은 사례에 가깝다.
물론 <울프맨>이 원작의 서사적 육체에 온전히 빙의된 것만은 아니다. 변형된 캐릭터의 이름은 자처하고라도, 로렌스와 대립각의 위치에 선 아버지 존의 캐릭터의 변화는 원작과 <울프맨>사이의 정서적 거리감을 이루는 가장 큰 수단이다. 액자구성에 가까운 아버지의 서사에 비극적인 감정선을 부여한 원작과 달리 <울프맨>은 철저하게 존에게서 비극적인 감정선을 배척시킨다.그는 <울프맨>에서 로렌스의 분노를 야기시키고 그의 비극성과 폭력성을 보다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대립각으로서 보다 강한 존재감을 설득한다. 동시에 존을 연기하는 안소니 홉킨스는 이런 영화의 의도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할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런 캐릭터의 완성도는 결말부에 연출되는 파국적 정서를 보다 강력하게 보좌하는 것이기도 하다.
<울프맨>은 CG를 비롯한 현대적 영상기술을 전시하며 늑대인간의 변신이나 폭주가 발생시키는 잔인한 볼거리를 부각시키기 보다도 고전적인 서사와 문학적 비극의 연출에 보다 적극적이다. 늑대인간이 된 인간의 비극적 운명론과 오이디푸스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멜로적 파토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정서적 무게가 중후한 시대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영상을 곁들이며 <울프맨>에 앤티크(antique)한 가치를 부여한다. 실제로 로렌스가 배우로서 <햄릿>의 무대에 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 <울프맨>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비극적 딜레마가 극적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울프맨>이 추구한 과거지향적인 방식의 수용은 때때로 낡은 산물이라는 인식을 온전히 차단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늑대인간이라는 고전적 소재의 낡은 감성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고전적인 연출을 지향하는 영화의 서사적 투박함에서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다. 비극적 정서를 지향한 서사적 의도는 일면 비범한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탄탄하게 여며야 할 서사적 진전에서 느슨한 간극들이 발견된다. 또한 늑대인간이 연출하는 서스펜스적 긴장감과 액션의 박진감을 묘사하는데 많은 러닝타임을 할애하기 보다도 개인의 트라우마와 딜레마를 정신분열저인 이미지로 묘사하는데 공을 들이기도 하는 양상이 때때로 혼란스럽다. 고전적인 서사의 양식을 수용하겠다는 극적 의도와 달리 인물의 정서는 현대적인 정신질환적 분석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부되는 양상이다.
물론 영화의 중후한 무게감을 관철시키는 언해피엔딩의 결말부까지, <울프맨>은 자신의 서사적 의도를 며확히 관철시키는 작품이란 점에서 평가를 얻어낼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고전적인 중후함과 우아함을 갖춘 배우들의 풍모와 기질은 <울프맨>의 의도를 명확히 다지는 영화적 밑천으로서 유효한 역할을 해낸다. 다만 고전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이미지 안에서 현대적인 정신분석학에 기인한 트라우마를 연출해내는 작품의 기질로부터 발생할만한 감상적 불협화음은 상업영화적인 자극적 세기를 원하는 오늘날 대다수의 관객의 기대감 안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안티히어로의 감수성에 젖은 현대 관객의 기대감에 고전적 괴물의 트라우마를 들이미는 꼴이랄까.
유년 시절부터 플린트는 남달랐다. 그 아이는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냈고,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그 재능이었다. 그 재능은 일종의 불운처럼 주변사람들을 비롯해 자신에게마저도 끝없는 민폐를 끼쳤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에 유익한 재능이 되길 바라던 소년은 결국 마을의 골칫거리로 소문이 자자한 성인으로 자랐다. 그리고 성인이 된 플린트는 발명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마을에 끝없는 민폐를 이어나간다. 그런 어느 날, 그 삶에 반전이 찾아온다. 먹을 거라곤 정어리밖에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던 플린트는 물을 음식으로 바꾸는 기계를 발명하고 우연히 기계를 하늘로 띄워보낸 플린트는 이를 통해 마을에 무전취식의 행운을 가져다준다. 말썽의 원흉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모든 이들의 무시를 한 몸에 받았던 플린트는 이로 인해 마을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사실상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이 취하는 기본적인 설정, 예를 들자면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진다는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이미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인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음식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그 자체가 이미 끝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갖가지 음식 세례를 맞은 몸은 소스로 범벅이 될 것이며 길거리는 부패한 음식의 악취가 들끓을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현실적인 세계관을 두르고 있되, 그 현실성을 풍자의 수단으로 치장한 작품이다. 영화가 연출하는 갖가지 상황들은 고의적인 농담에 가깝다. 사실적 증명에 실패한다기 보단 고의적인 비틀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 유머가 겨냥하는 팔할의 과녁은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가 차용하던 패러다임의 전복적인 패러디에 가깝다. 농담에 가까운 상황을 마구잡이로 건너뛰는 캐릭터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농담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단순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아들을, 그리고 마을의 사고뭉치를 모든 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키는 과정은 할리우드 영웅스토리의 진부함을 그대로 차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다만 진지한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크고 작은 농담들로 이뤄진 코미디의 틀거리로서 이해할 때 이는 유용한 방식이 된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드라마로서의 내러티브를 통해 이야기로서의 뼈대를 세우되, 본질적으로 자신의 목적이 양념처럼 쏟아지는 유머의 향연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만화적인 과장성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면서 그것의 활용도를 극대화시키는, 장르적 허용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해내고 있다. 진부한 성장드라마의 약점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유머와 재치로서 극복해냈다. 그리고 그 유머와 재치가 즐길만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현실적 두려움보단 그 상황이 주는 놀라운 재미를 만끽하게 만든다. 관습적인 사연에서 벗어나지 않는 드라마의 진부한 가뭄은 지속적인 강우량을 자랑하는 번뜩이는 유머로 극복된다.
좁은 방안에서 자신의 부인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청년의 눈에 수심이 서려 있다. 하지만 메일을 검색하던 청년의 눈이 곧 진지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톨스토이의 ‘부활’을 집어 든다. 메일을 빼곡하게 채운 텍스트의 행간 사이에 놓인 단어들을 유심히 살피던 청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책과 대조한 뒤 관계가 모호한 단어들을 끄집어내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에 나열한다. 청년은 저마다 독립적인 의미의 단어들을 나열하지만 그 단어의 나열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읽어내고 있다. 그와 동떨어진 또 다른 장소, 국정원에서는 어떤 이들의 동행을 주시하는 요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국정원의 요원들은 북에서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전문암살자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선상으로 연결된 두 개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사건을 향해 수렴된다.
<의형제>는 마치 낡은 시대의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이념의 대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현대에서 남북의 대립적 구도 자체가 낡고 낡은 것이다. 하지만 <의형제>는 남북이라는 지정학적 대치 구조를 본질처럼 끌어들이는 대신, 수단으로서 활용하는 영화다. 북에서 내려온 남파간첩 지원(강동원)과 그의 뒤를 좇는 국정원 요원 한규(송강호)는 낡고 낡았지만 여전히 유효한 남북관계의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요구에 의해 대치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관계에 놓여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형제>가 다루는 건 그 두 사람의 대립 구도적 운명이 아니다. 그 대립 구도적 운명이 불가분하게 뒤섞이게 되는 기묘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영화의 목적지에 가깝다.
남북이라는 이념적 대립에 얽힌 인간들의 연민을 이끌어내며 비극적인 지정학적 운명을 상기시키던 작품들과 달리 <의형제>는 그 지정학적 속성을 다른 의미의 감정적 치환에 활용한다. 북에서 내려온 남파간첩 지원과 간첩을 수사하는 국정원 요원 한규는 극단적인 대립구도로서 서로를 배척하거나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명확하게 다른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오해로 인해 조직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거나 지나친 과욕으로 오랜 수고는 허사로 끝난다. 자신이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내쳐지게 된 두 남자는 조직을 위해 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뒤늦게 마주하게 되고 그로부터 시작되는 두 남자의 우연한 동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오해를 낳고 긴장의 국면을 이어나간다. 단순히 오해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긴장 관계는 부조리한 유머를 빚어내는 동시에 사연의 귀추를 주목하게 만드는 흥미의 유발지점과 같다. 버디무비의 유머와 홍콩 느와르의 비장미가 함께 엿보이는 동시에 지정학적 특수성이 더해져 독자적인 특성을 빚어낸다.
극의 밖에서 모든 정보를 수집해낸 관객들이 극 안의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오해의 여정을 지켜보게 만든다는 건 영화가 그 결과를 주목하게 만들 때 가능한 방식이다. <의형제>는 그런 자신의 의도를 영리하게 관철시키는 영화다. 상황의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유머와 긴장의 속성이 러닝타임에 적절한 가변성과 안정성을 부여한다. 안정적인 걸음을 유지하면서도 보폭을 적절히 조절한다. 무엇보다도 <의형제>는 오프닝과 피날레의 묘미를 잘 알고 있는 영화다. 초반 도입부를 통해 흥미를 자아내던 영화는 초반부 총격전의 긴박감 넘치는 묘사를 통해 관객의 시야를 스크린에 고정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결말부에 다다른 또 한 번의 총격신은 초반 총격신의 수미쌍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성공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 입구와 출구가 정확하게 제 자리를 잡고 있다.
해피엔딩을 연출하는 결말부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인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의형제>는 꽤나 흥미로운 버디무비로서 평할만한 영화다. 특히 동물적인 순발력으로 신의 공기를 장악하는 동시에 적절한 여백을 만들어내는 송강호의 연기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성공적이며 이에 적절한 리액션과 피드백을 이루며 자신의 캐릭터를 일궈내는 강동원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그 밖에도 많은 배우들이 적절한 위치를 잡고 제 역할을 해내는 가운데, 북파간첩 전문암살자로 등장하는 그림자 역할의 전국환은 강력한 카리스마로서 극의 깅장감을 한층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얼굴이다.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 성공적인 데뷔를 이룬 장훈 감독은 <의형제>를 통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탁월하게 날려버렸다. 무엇보다도 장훈 감독은 <의형제>를 통해 전작의 성공이 운 좋은 캐스팅의 수준에 기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에서 기인한 것임을 뚜렷하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보다 성공적이다.
허영만 작가의 원작만화를 영화화한 <식객>은 33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식객: 김치요리>(이하, <식객2>)는 그 성공에 힘입은 후속적 기획이다. 사실상 <식객2>는 허영만 작가의 원작 브랜드 네임밸류만을 차용할 뿐, 그 작품의 성격과는 무관한 시리즈가 됐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의 출연과 이름만 같을 뿐 성격적으로 다른 중심인물의 등장은 이미 <식객2>가 원작을 염두에 둔 기획이 아님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식객2>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 관계를 염두에 둔 전작의 후속편이란 형태 안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본 수상관저 수석요리사인 장은(김정은)은 한때 기생집이었던 요리집이자 자신의 어머니 수향(이보희)가 있는 ‘춘향각’으로 돌아온다. 춘향각은 장은에게 기생의 딸이라는 트라우마를 안긴 공간이다. 그래서 장은은 어머니가 아끼는 춘향각을 제 손으로 없애려 한다. 한편 트럭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채소 장사를 하는 성찬(진구)이 친어머니처럼 모시는 수향의 ‘춘양각’을 없애려는 장은의 야심을 알게 된다. 결국 장은의 야심을 막고자 하는 성찬은 춘양각을 지키기 위해 장은이 출전한 김치대회에 나가 장은에 맞선다.
원작자의 의도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스핀오프라기 보단 일종의 팬픽에 가까운 <식객2>는 어찌됐건 <식객>에 이은 시리즈 속편이다. 동시에 음식을 소재로 둔 영화란 기조는 이어지고, 원작만화와 전작에서도 등장하는 대사,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숫자와 같다”가 반복된다는 점에서도 그 모토의 계승을 연출하려 한다. 사실상 요리 영화라고 하지만 <식객2>가 주시하는 건 요리보다도 인간의 관계다. 전작의 단순한 선악구도에서 벗어난 캐릭터의 사연은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자질이란 점에서도 발전적이다. 요리의 완성보다도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손과 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손과 마음에 어린 진심을 포착하기 보단 자꾸만 진심을 연출하려 든다. 요리를 만드는 이의 정성의 온기를 전달하기보다도 눈물을 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거둘 수 없다. 김치를 응용한 다양한 요리들을 소박한 앵글로 포착함으로써 <식객2>는 여기서 요리란 단지 이야기와 관계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진심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스스로가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강조하는 <식객2>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만 같이 군다. 요리를 소박하게 연출한다 해서 진심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식객2>는 자신의 의도를 살리지 못하는 반면, 그 의도를 감출만한 것들만, 혹은 그 의도에 좋은 양념이 될만한 재료를 자꾸 덜어낸다. 음식영화라는 장점을 스스로 포기한다.
결과적으로 <식객2>의 의도는 존중할만하다. 하지만 의도가 앞설 뿐, 전략이 서투른 영화의 완성도는 존중할만한 형태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간이 싱겁고, 맛이 애매한 영화가 됐다. 인물의 과거를 끌어내 청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그 인물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최소한 완벽한 밥상을 차리진 못했지만 적당한 손맛을 만끽하게 해준 전작의 묘미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식객2>는 애초에 그런 결정적인 맛의 비결을 모르는 영화였을지도 모르겠다. 전작의 흥행성에 고무되어 기획된 속편의 운명적인 결과란 이런 듯 뻔하고 뻔한 수순을 걷게 될 뿐이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릴만한 또 한 편의 사례로선 유용하다. <식객2>엔 속편이 지녀야 할 깊은 맛도 새로운 비범도 발견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