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부동산 중개업자 메릴 모건(사라 제시카 파커)과 변호사 폴 모건(휴 그랜트)은 별거 중인 부부다. 폴의 외도로 인해 부부 사이에 금이 가고 파편처럼 떨어진 채 지나던 부부의 별거도 어느새 3개월에 다다랐다. 벌어진 관계를 이어보려는 폴은 메릴에게 선물을 전하고 만남을 청하며 대화를 나눠보지만 메릴의 마음은 좀처럼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영화 같은 사건이 찾아온다. 저녁식사 후, 길을 걷던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날벼락 같은 빗방울보다도 더 날벼락 같은,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 범인에게 온전히 노출된 두 사람은 증인보호 프로그램 아래, 짐을 싸 들고 시골로 내려가 한 지붕 아래서 다시 일상을 꾸리게 된다.
<들어는 봤니? 모건부부>(이하, <모건부부>)는 뭔가 대단한 사건을 연출할 것 같은 제목과 달리 <장미의 전쟁>의 해피엔딩 버전쯤 되는 부부 클리닉 영화다. 3주 뒤 다시 만날 법적 절차를 밟기 보단 3개월 간의 공백기를 두고 서로와 자신의 감정을 염탐하던 부부는 애꿎은 사건을 빌미로 부서진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게 된다. 로맨틱코미디에 스릴러적 코드를 삽입하며 극의 전환적 구실을 마련하는 <모건부부>의 착상은 일면 참신하다. 사실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는 무에서 출발해 유를 창조하는 감정적 관계의 발전양상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하지만 <모건부부>는 이미 시작부터 일방적인 감정선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관계를 지켜본다는 점에서 그런 소소한 장르적 재미가 일정부분 포기된 것이나 다름없다.
애정전선에 위기를 맞이한 부부의 관계가 다시 봉합된다는 서사의 형태엔 어떠한 문제가 없다. 소품적인 위트가 동원되는 발랄한 로맨틱코미디보단 보다 진중한 형태의 교훈을 전달하는 멜로드라마로서의 가치가 발생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하지만 <모건부부>는 철없는 뉴요커들의 투정을 유머로 착각하는 영화다. 말 그대로 로맨틱코미디라는 속성 안에서 얕은 웃음을 발생시키고 좀처럼 설득 당할 수 없는 로맨틱을 구사한다. 달콤한 로맨틱코미디에 살벌한 스릴러적 코드를 삽입해 넣으며 극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부 플롯의 창의력은 인정받을만하지만 전반적인 내러티브가 안이하며 스토리텔링 자체는 식상하다.
뉴요커의 투정을 개그로 치환하는 영화의 태도는 마치 우리가 먹는 스타벅스의 비싼 커피가 실상 미국의 싸구려 1달러 커피란 점을 환기시키는 것과 같다. ‘강남의 귤이 회수를 건너면 강북의 탱자가 된다’는 말처럼 화려하고 세련된 뉴요커들의 삶을 시골로 이양시키며 얻는 시각적 차이가 특별한 묘미를 발생시키리란 착각 차체가 이미 수준 낮은 유머적 감각을 노출한다. 그러니까 그 맑은 공기와 아늑한 정경이 공해와 소음의 향수를 부르는 수단으로서 활용됐을 때, 이미 <모건부부>의 대사나 풍경은 관객을 향한 공해나 다름없다. 철없는 뉴요커의 철없는 동동 구름을 보며 그것이 뉴요커에 대한 오해라도 살까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그런 껍데기만으로도 로맨틱은 고사하고 코미디조차 기대할만한 여건이 안 된다는 건 이미 자명한 사실이다. 코미디가 내내 헛바퀴를 도는 사이, 로맨틱은 끝내 헛스윙으로 끝난다.
분명 2D 셀애니메이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젠 3D CG애니메이션이 대세다. 하지만 시대가 끝났다 하여 시대의 주인공까지 사라져야 할 필요는 없다. 물론 명맥이 끊어졌던 디즈니의 전통적인 2D 셀애니메이션의 전성기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는 이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전성기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가치를 증명할만한 유산의 상속은 가능하다. 디즈니의 49번째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오랜 명맥의 가치가 무엇인지 대변하는 작품이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그리고 <라이온킹>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향수 그 자체일 것이다.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라는 이름에 쌓인 묵은 세월을 털어내고 닦아낸 결과물이다. 기본적으로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연상시키는 제목을 지닌 <공주와 개구리>는 사실상 ‘신데렐라’스토리를 끌어들이며 동화를 변용한다. 동시에 흑인 여주인공을 앞세우고 1920년대 재즈의 고장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삼아 보다 현대적인 형식의 동화로서 이야기를 착안하는데 주력했다.
<공주와 개구리>는 딱히 새롭다 말할만한 여지가 없는, 디즈니의 지난 작품들과 다를 바 없는 궤도 위에 탑승한 작품이다. 선악의 대비는 뚜렷하고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캐릭터들의 역경과 모험은 해피엔딩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조건들은 그 동안 디즈니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는데 동일하게 동원됐다. 진정성과 상투성이라는 백지장 차이는 동일한 요소들을 표현하는 방식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지녔거나 참신한 기법이나 창의적 방향성을 드러내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하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디즈니의 장기가 무엇이었는가를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선과 악, 노래와 춤, 꿈과 희망, 역경과 모험, 단순하지만 특별한 동화의 세계로부터 구현하는 그 모든 것들이 유쾌하고 즐거운 퍼레이드와 같이 진전된다. 마법과 모험의 세계관과 춤과 노래의 향연이 볼거리를 이루지만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건 로맨틱한 무드다. 어드벤처와 뮤지컬은 러브스토리를 이루기 위한 소스가 된다.
1920년대 뉴올리언스를 무대로 흑인공주를 그리고 있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인종차별과 같은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생각이 없다. 그건 마치 오바마 시대를 기념하는 팬서비스에 가까운 결과물이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인물들은 그런 현실적 편견이나 불합리와 무관하게 동화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순수한 낭만을 노래하는 역할로서 충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낭만은 유아적인 낙관이라기 보단 동화적 순수의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감동의 원형에 가깝다. 디즈니의 새로운 2D 애니메이션은 테크놀로지의 중심에서 아날로그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대변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란 존재하는 법이다. 능수능란한 픽션의 파도 속에서도 순수한 동화적 감동은 떠내려갈 수 없다. 기술은 변해도 감동은 변하지 않는다. <공주와 개구리>는 망각했던 동화적 세계를 복원하는 장인과의 반가운 재회나 다름없다.
살바도르 달리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지칭했다. 그는 사회부적응자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을 천재라고 언급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기괴한 행적은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스스로도 이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 천재로 인정받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달리의 기괴한 행위만큼이나 기괴한 그의 그림들이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천재성을 대변한다. 그의 기괴한 행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잊혀져 갔지만 그의 그림만큼은 여전히 현세에서 유효한 가치를 이어나간다.
<리틀 애쉬: 달리가 사랑한 그림>(이하, <리틀 애쉬>)는 살바도르 달리(로버트 패틴슨)에 관한 전기적 드라마이자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달리의 가려진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시대상과 실존인물을 재현하는 전기적 드라마의 성격이 기본적인 극의 자질을 이루는 동시에 퀴어 멜로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리틀 애쉬>는 살바도르 살리가 죽기 직전 고백했다는 스페인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하비에르 벨트란)와의 은밀한 로맨스를 서사의 줄기로 이어나간다. 독재와 혁명이라는 격동의 현대사를 지닌 스페인의 시대상 안에서 살아나가는 명사들의 삶을 지켜본다는 의미와 함께 그 삶의 가려진 단면을 발췌하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리틀 애쉬>의 기획적 목표는 뚜렷하다.
살바도르 달리보다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와 그들이 놓인 시대상을 곁들이듯 묘사하는 <리틀 애쉬>는 인물의 삶을 관통하기 보단 그 이색적인 관계의 지속을 곁눈질하듯 관찰한다. 동성애자였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호감을 느낀 후, 지속적인 관계를 이뤄 온 두 사람의 일대기가 서사의 줄기를 이룬다. 살바도르 달리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오가던 시점의 중심은 점차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게 할애되기 시작하며 점차적으로 <리틀 애쉬>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바라본 살바도르 달리의 이미지를 곁들이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일대기적 전기 성격을 띠게 된다. 그 서사적 진전엔 일관성이 부족하다. 인물의 관계와 시대적 상황을 오가며 어느 곳에 방점을 찍어내지 못하는 형상을 연출한다.
시대상에 대한 묘사나 해석은 탁월한 편이라 말하기 어렵고,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특별한 감상도 도모되기 어렵다. 단지 특이한 인물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캐릭터들의 인상에선 어떤 특별한 감흥을 얻어낼만한 지점이 드물다. 단지 그것이 그 인물에 대한 정통적인 관점을 배제한 관계 묘사에 치중한 결과라 할지라도 인물에 대한 인상적인 감상이 도모되지 않는다는 건 분명 전기영화로서 아쉬운 지점이다. 시대나 인물에 대한 묘사나 해석 어느 측면에서도 딱히 인상적인 면모를 발견하기 어렵다. <리틀 애쉬>는 수많은 실존인물들을 등장시킬 뿐, 그 인물들에 대한 흥미를 돋우지 못하는 전기영화인 셈이다. 마치 실존주의적 과거를 초현실주의적 스크린이 따라잡지 못하는 형국이랄까.
스페인의 위대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훗날 히치콕의 추앙을 얻는 거장 루시스 브뉘엘(매튜 맥널피), 그리고 천재 화가로 꼽히는 살바도르 달리까지, 실존인물을 재현하는 작품 안에서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단연 눈에 띄는 볼거리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하이틴 이미지를 벗어 던진 로버트 패틴슨의 광기 어린 연기는 그 연기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이색적이다. 때때로 캐릭터의 흐름을 설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도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호연이라 평하긴 망설여지지만 열연으로서의 성과는 인정받을만하다. 동시에 배역만으로도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한 선택의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보다 인상적이다. 때때로 흉내와 같은 기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상은 아쉽지만 그 시도는 인정할만하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황량한 풍경에 둘러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더 로드>는 원작을 통해 연상했던 막연한 이미지의 극단적 구체화를 이룬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온전히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말한다는 건 어딘가 억울한 일이 될게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물론 <더 로드>는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아래 갇힌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동시에 그것이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살인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지방 형사들의 몽타주는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극 초반부터 정체가 개방된 범인의 당돌한 심리와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 구도가 <추격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범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아버지는 직업윤리에 반하면서까지 제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놈 목소리>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이입한 <세븐 데이즈>. 그리고 그 끝에선 <올드보이>를 본뜬 듯한 죄와 벌에 대한 패러독스가 걸려든다. <용서는 없다>는 마치 지금까지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적절한 성공을 거둔 한국영화의 레퍼런스를 섞어 넣고 순차적으로 나열한 것 같은 형태를 띤 영화다.
금강 하구둑에서 토막 난 시체가 하나 발견된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부검의 강민호(설경구)는 결정적 단서를 잡아내고 손쉽게 용의자 이성호(류승범)를 검거한다. 경찰의 심문 중, 범행을 부인하던 이성호는 신참 여형사 민서영(한혜진)의 추궁에 손쉽게 자백을 한다. 하지만 이성호의 계략에 의해 강민호가 불가피하게 사건에 개입하고 대학 시절 은사로서 강민호를 존경하던 민서영은 그의 심상찮은 태도를 기이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용서는 없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심리다. 이성호는 <용서는 없다>의 논리를 완성하는 핵심이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조종자다. 강민호는 이성호의 계략대로 놀아나는 말이며, 민서영을 비롯해 강민호의 주변인물은 강민호의 처지를 악화시키고 긴장감을 배가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결국 그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조율하는 이의 절대적 역량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시할 것인가가 <용서는 없다>의 키인 셈. 단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는 없다>는 그 역할의 어필에 실패한 영화다.
<용서는 없다>의 이성호는 자신의 명확한 속셈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강민호를 움직이게 만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오랜 목적을 완수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하지만 사실상 이런 식의 이야기 구조에서 그 변수란 본래 그 게임의 설계자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용서는 없다>가 그려나가는 서사의 논리는 지나치게 우연을 간과하고 있다. 명확히 말하자면 머리가 나쁘다. 덕분에 결말부에서 주어져야 할 충격이 얕다. 사실상 <용서는 없다>는 결말을 위해 모든 과정이 할애되는 영화다. 그 모든 지난한 여정이란 결말부의 정점에 서기 위한 오르막길인 셈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빈틈이 많은 과정은 동력을 끌어올리기엔 역부족이며 결말의 정점 역시 높이가 모자라다. 논리적 동원이 빈약해지는 가운데 감정적 이입만 과도해진다.
마치 <올드보이>의 그것과 비슷한 파국을 그리는 <용서는 없다>는 단적으로 자해를 무릅쓴 어느 남자의 복수를 그리는 작품이다. 그 복수의 정당함이란 굳이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 어느 개인의 복수란 그 행위의 윤리적 정당함을 따져 물을 수 없게 개인적인 서사 안에서 인정될만한 사안이다. 다만 그것이 공적인 부분에서 이야기로서 대중에게 언급될 때는 사안이 다르다. 누군가의 개인적 범위의 사연을 소비하기 위해선 충분한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얹어야 한다. <용서는 없다>는 사연의 틈새를 메우지 못하고 자꾸 옆길을 뚫어가려는 작품이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형태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범인이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허세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배우의 연기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정작 제 기능성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동시에 뻣뻣한 대사에 갇힌 이성호를 연기하는 류승범은 <용서는 없다>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다.
4대강 개발이라는 현안을 차용한 건 맥거핀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해도 눈가림의 구실은 한다. 동시에 부검 과정을 세심하게 다루고 시체의 형태를 디테일하게 살린 더미는 눈길을 끈다. 문제는 그것마저도 현혹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결말에 다다르면 그 세심한 부검과정의 묘사가, 체모마저 디테일한 더미의 전시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라는 해답이 제시된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딱히 비범한 내용을 전하지 못하는 화자가 끝까지 비범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건 지겨운 일이다. <용서는 없다>가 그런 꼴이다. 결말에 다다를수록 사연은 갈피를 잃고 이성마저 잃은 뒤, 이야기를 갈무리할 타이밍마저 제대로 잡지 못하다 결국 허세로 자폭한다. 정말이지 용서가 안 된다.
자신의 9번째 작품을 완성하려는 감독은 깊은 고민에 놓였다. 그의 초기작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근래에 그가 만든 작품들은 졸작이라는 오명 속을 헤맨다. 그에게 팬이라고 접근하는 이들도 그의 초기작을 칭송하면서 그의 근작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는다. 시나리오조차 탈고하지 못한 그는 영화 제작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조차 중간에 달아날 정도로 심각한 강박을 느끼고 있다. 이탈리아 영화계의 거장 귀도 콘티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화를 갈망하지만 좀처럼 창작적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9살 유년 시절과 어른으로서 자라버린 현재 사이를 방황하며 자신의 주변에 자리한 여인들과 조우한다.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표작 <8과 1/2>을 모티브로 삼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나인>을 다시 동명 그대로 스크린에 투영한 롭 마샬의 <나인>은 <8과 1/2>과 <나인>의 사이에 놓인 작품이다. 그러니까 <8과 1/2>과 <나인>이 각각 1/2처럼 더해진 결과물이랄까. 페데리코 펠리니가 완성한 자전적 고뇌가 다시 영화적으로 재현되는 동시에 뮤지컬 무대를 위해 마련된 퍼포먼스는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사실상 <나인>은 그 제목 자체만 보더라도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보다도 뮤지컬 <나인>의 영화화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다시 영화적 형태로 재현되는 영화 <나인>의 형상은 원작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인>이 페데리코 펠리니를 염두에 둔 결과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두 작품에 대한 비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나인>은 단순히 그 캐스팅의 면면만으로도 이미 범상치 않은 외모를 지녔다. 귀도 역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비롯해 마리온 꼬띠아르, 페넬로페 크루즈, 니콜 키드먼, 케이트 허드슨, 주디 덴치, 소피아 로렌, (‘블랙 아이드 피스’의) 퍼기까지, <나인>은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스펙터클을 전시해버린다. 마치 조명이 점멸하듯 귀도의 곁에 등장하고 퇴장하는 여배우들은 그 자태만으로 <나인>의 매혹을 이룬다. 그 여배우들이 저마다의 음성과 몸짓으로 스크린을 수놓는 몇 장면은 <나인>을 기억하게 만드는 결정적 순간이 된다. 배우들의 매력 그 자체를 캐릭터에 반영하고 여과 없이 스크린에 전시하는 <나인>은 그 이미지를 화려한 포장지처럼 두른 작품이다. 그 외형적인 화려함만으로도 <나인>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풍요로운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뮤지컬 <나인>은 <8과 1/2>의 서사를 기본적인 골조로 삼되 뮤지컬 형식 자체를 통해 원작과 다른 차별화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영화 <나인>은 뮤지컬의 형태를 다시 스크린에 이양한다는 점에서 분명 원작의 궤도를 벗어난 차별성을 지닌 작품이다. 하지만 무대적인 연출 형식을 통해 스크린 원작과 온전히 다른 차원의 영역적 특성을 획득한 뮤지컬 <나인>과 달리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나인>은 영화적 형식으로 회귀했다는 점에서 원작의 형태가 환기될 가능성이 다분해졌다. <8과 1/2>의 서사가 축이 되는 뮤지컬의 영화화에서 <나인>은 그 서사적 형태를 연출하는 방식에서 온전히 <8과 1/2>의 자장 안에 놓여 있으며 뮤지컬 <나인>의 가무마저 차용한다.
<8과 1/2>과 뮤지컬 <나인>을 끌어안은 영화 <나인>은 두 영역을 탁월하게 봉합하지도, 어느 한 영역을 확실히 선택하지도 못한 채 배회한다. 시네마와 뮤지컬의 불편한 동거를 보는 것 같다. 뮤지컬 영화로서의 포만감은 부족하고, 원작에 대한 영화적 해석은 빈곤하다. <시카고>를 연출한 롭 마샬이라는 타이틀과 이를 수식하는 배우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반짝이는 외형을 이루지만 견실한 영화적 내면으로 잠입해 들어가지 못한다. 배우 고유의 개성만으로도 캐릭터들은 반짝거리지만 캐릭터 자체로서 태양처럼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로부터 비춰진 매력을 달처럼 반사시켜 빛을 발한다. 덕분에 <나인>은 때때로 캐릭터가 아닌 여배우들이 출연하는 콘서트를 보는 것 같다. 결국 그녀들이 만들어내는 인상적인 장면들은 순간적 전율로서 찰나를 지배할 뿐, 영화적 흐름을 만드는데 실패한다. 지속력이 약한 대신 압도적 순간이 틈틈이 나열된다. 결국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 시퀀스가 차례를 기다리듯 나열되고 이에 대한 기다림도 선망된다. 작품에 대한 지속적인 몰입이 쉽게 무산된다.
그럼에도 <나인>은 단지 그 인상적인 몇 장면의 우월함을 통해 온전히 가치가 폄하될 수 없는 영화다. 세트장에 들어선 귀도를 따라 빛을 떨어뜨리며 음영의 대비를 선명히 이루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의 광경은 무대적 연출 기법을 스크린에 반영하는 <나인>의 진가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기라성 같은 여배우들이 만들어내는 퍼포먼스는 단지 그것만으로 <나인>을 ‘it movie’로 만든다. 특히 마리온 꼬띠아르는 <나인>에서 재발견에 가까운 성과를 드러낸다. 무엇보다도 ‘Be Italian’을 열창하며 정열적인 퍼포먼스를 선사하는 퍼기의 무대는 단지 그 신만을 떼어놓고 반복해서 되새김질하고 싶을 정도로 <나인>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로 만든다. 결국 <나인>은 감독의 재능보다도 이를 압도하는 뮤즈들의 향연으로서 보다 높은 가치를 전하는 무대인 셈이다.
둥근 챙이 앞뒤로 달린 디어스토커를 쓰고, 어깨를 덮은 긴 케이프가 인상적인 인버네스 코트 안에 단정한 라운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지팡이를 쥔, 우리가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모습. 1887년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세기를 초월해 고전적인 추리문학의 아이콘이 된 셜록홈즈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영국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셜록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추리소설 ‘셜록홈즈’시리즈의 셜록홈즈란 분명 그런 남자다. 세련되고 지적인 이 영국탐정은 그가 등장하는 원작소설을 굳이 접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그 이미지를 어필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장르적인 아이콘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가이 리치가 연출한 <셜록홈즈>는 우리가 잘 알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해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소설과 함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스북을 참고해 제작했다는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활발한 두뇌활동 못지 않게 근육을 움직이길 즐기는 사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통해 이성적으로 사건의 꼬리를 좇는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와 달리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주먹질도 불사할 정도로 다혈질이며 호전적인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마초적 사내다. 물론 아서 도난 코일은 일찍이 그의 셜록홈즈 시리즈 초기작에서 그가 검도나 권투에 능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는 분명 원작의 그것을 통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궁극적으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탐정 아이콘을 고전적 세계관의 히어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테면 고전 소설의 캐릭터 자체를 영화적으로 리메이크해버린다고 할까. 원작 팬이라면 그것이 불순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고전아이콘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사실상 <셜록홈즈>는 셜록홈즈를 셜록홈즈라 쓰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 읽는다. 셜록홈즈의 이름을 빌렸을 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의 특성이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기괴한 악당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등장시키는 것에서부터 원작의 재현이 아니라 원작의 영화적 차용이라 불려도 좋을 자질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셜록홈즈의 단짝인 왓슨(주드 로)과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서도 다를 바 없다.
<셜록홈즈>는 추리극이라기 보단 액션활극에 가까운 버디무비로 완성됐다. 셜록홈즈와 왓슨과의 관계를 그려나가는데 러닝타임의 절반 가량을 할애하는 <셜록홈즈>는 사건의 해결과정에 주목하는 추리적 묘미보다도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적 감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동시에 셜록홈즈의 유일한 연인이라 추측되곤 했던 아이린 애들러(레이첼 맥아담스)를 등장시키며 그의 순애보적 감정마저 묘사하는 <셜록홈즈>는 간접적으로 유추되던 캐릭터의 감정적 단서마저도 적극적인 사건의 형태로서 구체화시킨다.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현장에 자리한 미세한 단서들을 통해 사건을 따라 걷는 영민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사건보다 앞서 달리는 행동파 탐정이다.
만약 셜록홈즈가 아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에 호감을 지닌 관객에게 <셜록홈즈>는 즐길만한 캐릭터적 묘미를 품은 오락영화로서 유용하다. 또한 <셜록홈즈>의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셜록홈즈의 원형은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셜록홈즈>는 가이 리치의 스타일보다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 팔 할인 작품이다. 첨언하자면 왓슨을 연기하는 주드 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조합이 이루는 캐릭터적 재미가 큰 맥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좌하는 내러티브의 묘미가 탁월하다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특히 셜록홈즈가 상대하는 블랙우드는 <셜록홈즈>에서 마치 셜록홈즈의 탐정적 활약을 그리기 위해 단순하게 배치된 소비적 악당처럼 보인다. 동시에 사건의 해결방식에서도 셜록홈즈의 능력은 다소 과장돼있다. 이성적인 방식의 추리를 차분히 따라잡기 보단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움직이는 셜록홈즈의 모습은 실로 파격적이라기 보단 안이하다. 만약 추리극의 형태로서 <셜록홈즈>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 이전에 셜록홈즈라는 본래적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고 영화에 접근했을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안고 상영관을 나서게 될 정도로 <셜록홈즈>는 분명 셜록홈즈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의 결말이 조커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나는 것처럼 <셜록홈즈>의 결말도 (셜록홈즈의 최대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난다. 히어로 캐릭터로 재생산된 셜록홈즈는 자신의 성공을 장담하듯 차기 시리즈의 제작마저도 가시화시킨 셈이다. 고전적인 탐정을 히어로로 탈바꿈한 시도 자체를 불순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가 가상의 캐릭터인 이상,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상성을 거부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그만큼 효과적인 가치를 품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캐릭터 시리즈를 위한 습작처럼 보이는 <셜록홈즈>가 딱히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물론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 이를 만회할 수 있다면 <셜록홈즈>는 그 시리즈의 방아쇠로서 재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를 위한 가장 훌륭한 밑천이란 점에서도 이 가능성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품고 있다.
고명한 피리를 불며 요괴를 잠재우던 표은대덕은 다른 세 신선의 실수로 요괴에게 피리를 빼앗긴 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세상으로 사라진다. 세 신선은 세상에 뛰쳐나온 요괴들을 잡기 위해 사라진 표은대덕과 피리의 행방을 좇고, 이를 위해 도사 화담(김윤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선들과 함께 요괴를 좇던 화담은 그 과정에서 전우치(강동원)와 맞닥뜨리게 된다. 설화적인 프롤로그를 밑그림으로 판타지의 자질을 채색해나가는 <전우치>는 이를 통해 토속적 비현실성을 현대적 시대상 안으로 이입해 나간다. 실존인물이라 전해지기도 하는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신묘한 주인공 전우치를 발체해 현대적 배경에 이입한 <전우치>는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의 뼈대에 현대적 서사라는 살을 붙이며 ‘한국형 히어로무비’의 유형을 제시한다.
욕망이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캐릭터들의 아귀다툼을 그려낸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전우치> 역시 저마다의 욕망으로 맞부딪히는 인물들의 격돌을 그린다. 하지만 최동훈의 지난 두 전작이 복마전이었다면 <전우치>는 각축전이다. 두 전작이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내달리던 캐릭터들의 힘겨루기였다면 <전우치>는 욕망을 안은 캐릭터의 롤러코스터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의 캐릭터들은 욕망의 패를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어내기 위한 수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복마전의 말판 위에 놓여있다. 그 말판을 설계한 최동훈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주사위를 굴리듯 캐릭터들의 일진일퇴를 연출하며 다채로운 캐릭터의 묘미를 한껏 활용한다. 비중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게 캐릭터들의 개성을 드세게 살리고 이를 통해 영화의 스타일마저 단단하게 동여맨다. 두드러지되 모나지 않는 캐릭터 영화를 완성해냈다. <전우치>를 향한 팔 할의 기대감도이를 겨냥한다. 나열된 배우들의 이름을 읽어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대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전우치>는 궁극적으로 이를 조율할 최동훈의 캐릭터 조율 실력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물건처럼 보일만한 작품인 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매력적이다. 시대적 배경의 변화에도 곧잘 넉살 좋게 어울리는 전우치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를 축적하면서도 현실적 괴리감을 능숙하게 돌파해나간다. 단순히 그 캐릭터의 표현적 존재감만으로도 장르적 가능성이 구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변부다. 중심에 박힌 캐릭터의 모양새는 명확하지만 그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구심점이 흐리고 쓸모를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된다. 유해진의 초랭이는 적당한 수준의 위트를 자아내고 사연의 전환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쓸모를 지닌다. 전우치를 상대하는 화담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표현력은 적절하나 선악의 기질적 변화를 설득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 캐릭터 자체에 대한 흥미가 반감된다. 동시에 임수정이 맡은 서인경은 지나치게 장치적이며 세 신선은 <전우치>에서 제 구실 자체가 무력한 낭비에 가깝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백윤식과 염정아만큼의 설득력도 없다. 제 역할을 설득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그저 자리만 지킨다. <전우치>에선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리듬이시종일관 엇박자로 삐걱거린다. 그저 캐릭터를 볼모로 서사적 노선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갈 뿐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전자보다 적극적으로 토속적 설화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보다 한국적인 판타지 장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할만한 작품이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구상된 듯한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와 보다 어울리는 장르적 접목을 시도했다 할만한 지점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받을 만한 구석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감을 구사하는 액션신을 따라잡기엔 숨이 차게 느껴지는 앵글의 잔상이 시야를 가리며 감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전반적인 액션신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앵글은 공간감에 있어서 탁월한 시야와 반경을 제공한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아낸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다만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하고 저마다 독립적인 빼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는 게다. 마치 저마다의 음을 지닌 음표들이 악보로서 오선지에 배열된 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제 음을 고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내긴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많은 것들을 흔들어 섞지 못해서 문제인 셈이랄까. 음표만 나열한다고 악보가 나올 리 없는 것처럼.
<아바타>를 치장하는 팔 할의 수사는 이미지의 혁신이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12년의 장고 끝에 공개한 <아바타>는 분명 기존의 3D영화들과도 온전히 궤가 다른 이미지의 역작이라 칭할만한 결과물이다. 단순한 시각적 체험만으로도 본전은 거두다 못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해도 좋을 만큼 <아바타>가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대단한 만족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다만 그것뿐이란 평은 온당치 않다. <아바타>를 상찬할만한 근거를 단순히 그 이미지의 형태에 국한해 발색할 필요는 없다. <아바타>는 그 거창한 이미지로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근미래의 인류는 지구로부터 4.4광년 떨어진 ‘판도라’ 행성에서 고효율 자기장 에너지원인 ‘언옵타늄’을 채굴해 지구의 에너지난을 극복한다. kg당 2천만 달러에 거래되는 언옵타늄은 기업의 영리적 욕망을 부채질하는 물건이다. 다리가 마비된 탓에 보행이 불가능한 제이크 셜리(샘 워딩턴)는 판도라 행성에서 언옵타늄 채굴과 관련된 핵심프로젝트를 수행하다 죽음을 맞이한 일란성 쌍둥이 형의 과업을 이어받기 위해 약 5년여 간의 수면우주비행을 거쳐 판도라 행성에 착륙한다. 그곳에서 그는 형의 유전자를 판도라 행성의 ‘나비(Na'vi)'족 유전자에 결합해 만든 ‘아바타’에 접속하고 나비족의 본거지를 탐색하라는 명령을 이행한다.
지금까지 '3D'라는 수식어를 내세운 작품들이 시도라는 단어 안에서 존중 받아 왔다면 <아바타>는 이제 그 첫 번째 성과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될만한 작품이다. <아바타>가 선사하는 3D비주얼은 분명 그 이전의 어떤 3D영상들과도 차별화된 진화적 눈높이를 선사한다. 로버트 저메키스가 오랜 시간동안 답보와 약진을 전전하는 사이, 제임스 카메론은 단 하나의 결과물로서 완성적 성과를 드러낸다. 시각적 피로감이 낮아진 반면, 보다 생생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아바타>는 디지털캐릭터의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마저 뛰어넘는다. 잔상의 오차가 현격하게 사라진 <아바타>의 디지털캐릭터는 빠른 속도감 속에서도 선명한 형태를 유지하며 현격한 입체감을 전달한다.
향상된 이미지의 성과로만 <아바타>를 설명하기란 섭섭한 일이다. 사실 <아바타>가 구축한 판도라 행성의 세계관은 지구의 이란성 쌍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명확한 모티브를 두르고 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르지만 인간을 연상시키는 '나비(Na'vi)'족을 비롯해 판도라를 채우는 생태계 이미지는 대부분 지구로부터 이양된 세계관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에 인류의 ‘아바타’라 할만한 세계를 그려낸다. <아바타>를 비범하다 명할 수 있는 궁극적 이유도 그 지점에 놓여있다. <아바타>는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통해 인류의 오만한 역사를 성찰하고자 한다. <아바타>가 동원하는 판도라의 이미지는 그 성찰을 도모하기 위한 기시감의 현장이나 다름없다. 형태의 차이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판도라는 지구의 또 다른 판본인 셈이다. 그 또 다른 판본의 세계관을 유린하고 파괴하며 그 안에 자리한 약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의 군상은 결국 인류가 걸어온 오만한 역사의 재현과 같다.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유기적 신호전달 체계로 호환하는 <아바타>의 자연적세계관은 보다 인상적이다. 판도라의 메인보드이자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와 교감하며 거대한 네트워크 망을 구축하는 판도라의 대자연은 살아 숨쉬는 유기체의 질서를 이루고 있으며 이를 통해 숭고한 자연적 가치를 발생시킨다. 외부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형광의 색채를 띠는 판도라의 대지와 식물들은 터치스크린의 센서와 같고, LED조명에 가까운 조도를 밝힌다. 디지털 문명이 이룬 발전적 결과가 판도라의 대자연에 적용될 때, 그 광경은 황홀한 신비를 발산한다. 결국 그 대자연의 신비는 인간의 조악한 감수성과 대비군을 이룬다. 황홀한 판도라의 대자연적 풍요를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정복하겠다는 인류의 야심은 익히 초라하게 몰락한다. <아바타>는 분명 명확한 주제를 단순한 스토리텔링으로 진전시키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그 이유로서 폄하될 수 없는 근본적 가치를 품고 있다. <아바타>는 그 단순한 이야기를 현명하게 밀고 나가는 우직한 작품으로서 이해돼야 마땅하다.
<아바타>는 진화된 3D비주얼을 선사한다는 점만으로도 새로운 영화적 발견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건 <아바타>가 구현하는 테크놀로지가 영화에 복무하는 방식이다. <아바타>에서 그 뛰어난 이미지는 단순한 전시적 효과로서 기능하지 않는다. 영화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충심 어린 보좌관으로서 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인류의 오만한 역사를 되짚는 우화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한 이미지적 수단으로서 보다 우월한 휴머니즘적인 가치를 역설한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우리가 두른 세계의 폐해를 진단한다. 그리고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한다. <아바타>는 말 그대로 인류의 새로운 진화를 촉구하기 위한, 신인류의 탄생을 그린 ‘아바타’적 이상인 셈이다.
어느 한가한 오후, 아내가 정성껏 차린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어린 딸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던 클라이드(제라드 버틀러)의 집에 두 명의 괴한이 침입한다. 그들에게 린치를 당한 클라이드는 가까스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지만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아내와 딸의 죽음을 잊을 길이 없다. 범인들은 경찰에 의해 검거됐지만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검찰은 자신의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겠다는 한 명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처벌을 방임한다. 담당검사 닉(제이미 폭스)의 설명을 듣게 된 클라이드는 망연자실하고, 법정의 무죄선고에 굳은 표정으로 법정으로부터 뒤돌아 선다.
(본래 작품과 무관한 일이지만) 정직한 제목이 우스꽝스럽게 읽히는 <모범시민 Law abiding citizen>은 문제의식이 뚜렷한 주제를 품고 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제도가 정의적인 질서를 구현하지 못할 때 그 제도적 맹점에 희생된 개인으로부터 체제적 위기가 도래한다. 법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그 법을 따르는 개인의 배신감은 거대한 복수심으로 변질된다. 선량한 모범시민은 지독한 괴물로 변태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모범시민>은 근래 개봉작 가운데 <다크 나이트>와 비슷한 함의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 채 뼈대만 앙상한 제도적 권위 속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건 부조리한 힘과 폭력이다. 개인의 사소한 억울함이 방치되거나 외면당할 때 제도적 정의는 일거에 무산된다. 직접적으로 비교하자면 <모범시민>의 클라이브는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나 다름없는 셈이랄까. 그만큼 문제제기의 측면에서 나름대로 비범한 현실적 고민을 품은 작품이라 인정할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모범시민>은 그 주제의식의 가능성을 발전시키지 못한다. 제도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낼 뿐, 그 결함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다. 물론 문제의식을 전하는 작품이 그 대안을 제시하는 의무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 다만 스스로가 표한 그 문제의식은 효과적으로 전달할 필요는 있다. <모범시민>은 문제의식을 손에 쥐고 있지만 단단하게 주무르지 못한 탓에 손가락 틈새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영화다. 클라이브가 표하는 분노엔 실체가 있다. 그러나 <모범시민>에서 그 실체는 단지 액션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스릴을 그리기 위한 미끼에 불과하다.
분노로 표방되는 감정적 진화를 설득하지 못하는 것과 무관하게 단순히 사건을 발전시키고 비밀의 규모를 키워나가는 방식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거대하게 부풀려진 비밀 너머의 진실이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유하자면 거대한 빌딩을 붕괴시킨 것이 도끼질의 위력이었다 고백하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모범시민>은 어떤 방식으로도 이성적 합의를 전달하지 못하는 작품이다. 제도적 맹점에 대한 개인의 분노는 화풀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빌미로 발화된 이미지도 인상적인 용도로 활용되지 못한다.
제이미 폭스와 제라드 버틀러를 비롯해 배우들은 적절히 제 역할을 해낸다. 특히 역할에 걸맞은 위엄을 전하는 비올라 데이비스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만으로 영화의 빈틈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양심을 팔아서 재미도 보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모범시민>은 의미도, 재미도 얻어내지 못하는 모범적인 실패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