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대신 1수. 윤태호는 바둑의 한 수를 두듯 <미생>을 그려나간다. 한 수 한 수 현실과 이상의 대국이 펼쳐진다. 그 안에서 수많은 성공과 실패가 지어지고 허물어진다. 그래서 미생이다.
단행본 네 권의 판매부수가 10만부를 넘었다.
사실 출판사와 계약한 건 다섯 권이었고 1년 연재하면 끝나는 분량이었으니 그것만 하고 털어내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10수 지나면서 힘이 실린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날개 달린 대리가 나오는 에피소드를 지날 땐 이거 길게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미생>은 웹툰이지만 단행본으로 보는 맛도 괜찮더라.
사실 <미생>은 단행본 페이지로 먼저 만들고 나서 한 컷씩 떼어 웹상에 붙인 작품이다. 보통 온라인에서 상하로 나뉜 컷과 컷의 간격에 삽입된 내레이션이나 대사엔 임팩트가 있다. 그런데 책에선 스크롤 방식으로 보면서 멋있다고 생각했던 그 대사가 구석의 작은 컷 안에서 훅하고 지나가니 그런 느낌이 덜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으로 먼저 보다가 기다리기 감질나니까 온라인으로 넘어온 독자들 중엔 오히려 책이 낫다는 이들도 있다. 결국 받아들이는 독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더라.
바둑과 직장을 소재로 둔 만화를 제의 받은 후 연재까지 3년이 걸렸다고 들었다.
위즈덤하우스에서 제안한 건 바둑의 10계명이라 불리는 ‘위기 10결’을 통해서 직장인들의 처세를 설파한다는 컨셉트의 작품이었다. 10년 전부터 바둑꾼들의 이야기를 생각했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이끼>는 준비부터 완결까지 5년이 걸렸다. 그렇게 보면 내가 60세까지 할 수 있는 작품이 몇 타이틀 안 되는데 <이끼>를 끝낸 마당에 직장인들의 처세에 관한 만화나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일단 계약금을 받았고, 그 제안을 배려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서야 지금의 방향을 제시했다. 도리어 출판사에선 고마워했다. <이끼>가 영화화되고 유명해지는 과정을 보면서 작가가 알아서 잘할 텐데 괜히 앞질러간 게 걱정됐다더라. 반대로 난 2년 동안 시간을 보내고서야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었다(웃음). 3년간 작품을 준비하는데 한번도 날 흔든 적이 없었다. 그런 배려 덕분에 더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직장생활 경험이 없으니 취재원이 필요했을 텐데.
6수 연재할 때까지 취재를 거절 당해서 취재원을 못 만났다. 그래서 초반엔 회사 모습이 좀 두리뭉실하게 그려졌다. 사회경험이 많은 직장인들도 볼 텐데, 내가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한 지인으로부터 상사맨인 남자친구를 소개받고 시작됐다.
6수까지? 불안하지 않았나?
계약상 더 이상 연재를 미룰 수 없었다. 역시 계약은 위대하더라(웃음). 기업 홍보팀에 전화하면 매번 거절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지. 만약 공식적인 루트로 조언을 받았다면 기업의 이미지를 염려하느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분들 입장에선 반기업적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포함될 수도 있고.
지금은 취재원들이 알아서 찾아올 것 같다.
메일이 엄청 온다. 특히 요르단 에피소드에선 취재 협조를 자원하는 주재원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말에 문맥이 있듯이 취재에도 결이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의 이야길 듣게 되면 충돌 지점이 생기겠더라. 물론 사진 자료나 기본적인 정보는 감사하게 받았지만 맥락을 흔들만한 디테일이 유입될까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사람을 만나진 않았다.
시점을 유지하는 주체를 명확하게 두고 다양한 팩트만 수집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다. <미생>의 원 인터내셔널은 취재원들과 함께 만든 가상의 회사다. 그 회사의 폼은 일반적으로 여러 회사에 해당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설립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가 끼어들면 전혀 다른 방향성이 생길 수 있다는 게 염려스러웠다.
당신에게 직장 경험이 없었던 것처럼 장그래도 직장을 처음 경험한다.
장그래의 보고서 작성 에피소드를 위해서 취재원들에게 긴 문장을 짧게 축약한 보고서 작성 사례를 제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결과는 갖고 있었지만 그 과정을 그리는 건 내 몫이었다. 그 과정을 찾아가는 게 재미있었다. 나와 장그래가 똑같이 발전한 셈이다. 과거 미술로 인해서 좌절했던 내 경험이 장그래의 대사로서 삽입됐을 수 있고, 데뷔 전 문하생 시절의 후회나 반성이 장그래의 인턴 생활과 겹쳤을지도 모른다.
인물의 상황에 공감하면서 자기 현실을 늘어놓는 댓글이 자주 보인다.
다들 알아서 자기 고백을 해주니까 제2의 취재가 된다. 가끔씩 올라오는 이견들도 악플과 다른 진지한 애정이 느껴진다. <이끼>때와는 상반된 체험이다.
공감대를 키우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은 없었나?
93년도의 데뷔작을 독자 입장에서 처음 봤을 때 그 작품이 너무 모자라 보였다. 제3자가 된 거지. <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어떤 주의나 주장을 펼치기 보단 목격하듯 묘사하자는 거다. 내가 내 데뷔작을 봤던 것처럼 독자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제3자의 입장으로 목격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대사를 소박하게 쓴다. 문장이 현란하면 특정한 누군가의 정체성처럼 느껴지지만 문장이 소박하면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나.
<야후>나 <이끼> 그리고 <미생>의 사연은 주인공들의 실패와 절망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야후>의 김현이나 <이끼>의 류해국은 불처럼 뜨겁게 번지는 인물이라면 <미생>의 장그래는 물처럼 차갑고 유하게 흐르는 인물이다. 작가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처럼 보인다.
최근에 이런 얘길 들었다. “드디어 작품에서 어머니가 나오네요.” 깜짝 놀랐다. 전작들에서 주인공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건 모두 가부장이었던 거다. <로망스>에선 장인어른이 모델이었고, <야후>나 <이끼>,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도 아버지와 연관된 이야기였다. 사실 <이끼>로 단단하게 매듭을 지은 느낌이 있었다. 가부장이란 정서에 기대서 창작해왔던 시절이 <이끼>로서 결산된 느낌이랄까. <미생>엔 확실히 모성애적인 코드가 있다. 영업 3팀에서도 모성애적인 연민이 강하지 느껴지지 않나.
개인적인 삶에서 계기를 찾을 순 없을까?
한번은 고향 가족들과 지리산에 놀러 갔는데 어머니께서 딸에게 물으셨다. “아빠가 무서워? 엄마가 무서워?” 그러니까 엄마는 화를 많이 내도 이해해주는 느낌이 있지만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화만 내니까 무섭다고 했다(웃음). 한편으로 서운한 이야기지만 확실히 아내가 잘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가끔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애들한테 화낼 때 아내에게 짜증내면서 뭐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큰 애는 엄마가 자기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정서적으로 믿는 거다. 아내의 힘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런 경험이 이야기도 변화시키는 것 같다.
<이끼>는 보는 사람도 힘이 들어가는 작품이었다. <미생>은 반대다. 그건 작가도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물론 마감은 항상 힘들겠지만(웃음).
프롤로그에선 자기 연민에 빠진 인물이 나온다. 슬픔을 먼저 던져주고 진행하는, 전형적인 내 패턴인데 그걸 딱 보니까 과거처럼 하기 싫어졌다. 나이를 먹으니까 몸이 어떻게든 조금은 자라있어서 예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을 수 없으니까 갈아입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그래라는 이름도 특이하다.
그 이름은 3수에 등장하는데 거의 3수 시작 직전에 생각한 이름이다. 당시에 ‘예스(Yes)’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오피스텔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거울에 비친 단어를 보고 ‘그래. 장그래?’하는데 어감이 착 붙더라. 그리곤 여자가 ‘안녕’하면 남자는 ‘그래’하는 걸로 여자 캐릭터는 ‘안영이’로 지었다(웃음). 바둑에서 오래 사는 돌을 부르는 장생을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웃음).
<미생>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축을 잡고 저마다의 시점과 합리를 설득한다.
다양한 직장인들이 그들 자신을 투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캐릭터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주인공은 그런 이들을 드러내는 가이드 역할을 하는 거다. 워커홀릭인 오차장이 있고, 위아래의 교량 역할을 하는 김대리, 권위적이진 않지만 대리보단 무게감이 있는 천과장 같은 이가 그들이다. 그들과 경쟁하면서도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염려해주는 옆 부서의 팀원들도 있다. 워낙 회사의 인물군이 다채로우니까 의식적으로 캐릭터를 설정하고 묘사하기 보단 스토리의 이슈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인물을 배치하는 요령이 생긴다.
영업3팀은 굉장히 이상적인 팀이다. 능력과 배포가 있는 상사들과 발전하는 막내 사원들이 직위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부조리가 없으며 체계가 잘 돌아간다. 영업3팀 자체가 <미생>의 주제이자 작가의 이상이라고 본다.
분명히 그렇다. ‘미생’은 완생으로 가는 길인데, 사실상 완생이란 이룰 수 없는 꿈과 같다. 대부분은 진짜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엔 그 꿈을 잊는다. 하지만 성인으로서의 이상도 있는 거다. 그걸 묘사하고 싶었다. 다른 부서를 통해선 어쩔 수 없는 현실의 각박함을 보여준다면 영업 3팀은 그 자체로서 내가 짐작한 직장인들의 이상향을 그리고 싶었다. 당신은 이런 욕망과 열기를 안고 입사하지 않았나? 이런 상사를 꿈꾸지 않았나? 어쩌면 그들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꿈꿨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미생>인 거다.
하지만 결국 현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고졸인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기 어려울 거란 대사가 등장할 땐 뼈아픈 기분마저 들더라.
요르단 사업 에피소드가 끝나고 ‘당연히 이 정도면 장그래도 정사원 돼야지!’란 댓글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그 에피소드를 지난 해의 사업 실적과 10대 성과를 공개하는 2013년도 시무식 장면으로 연결했다. 독자들 입장에선 영업3팀의 요르단 사업이 대단한 이슈였고, 장그래가 큰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만화 속의 대기업 차원에서 엄밀하게 보자면 그 이전에 비리 과정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미 존재했던 사업을 다시 한번 세팅한 것뿐이다. 사업 자체를 올바르게 되돌린 측면은 있지만 회사의 성과로선 당연한 업무였을 분이니까 장그래가 부각될 이유가 없었던 거다.
현실적이라서 더욱 가혹하다.
스토리상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다. 장그래가 잘된다고 이 사회의 계약직 사원들이 다 잘되는 건 아니다. 물론 작품이 리얼리티만을 담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기만이다. 특히 <미생>이 많은 지지를 얻은 건 독자들이 당면한 실질적인 고민을 대변했기 때문인데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면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장그래 정사원 시켜라!’ 이런 댓글들이 늘어서 나조차도 거부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못을 박았다.
낙관적인 거짓말은 할 수 없지만 긍정적인 비전은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고민했다. 그런 비참함으로 끝내야 될까. 그래서 ‘지금의 회사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야’라는 대사를 넣었다. 정사원이 되지 못했다고 장그래의 인생이 실패한 건 아니니까. 큰 상금이 걸린 대국에서 패한 바둑기사들은 ‘한판의 바둑이 끝난 거지’ 그러고 만다. 살다 보면 수많은 바둑판을 마주하니까 그저 한판일 뿐이다. 그 초연한 태도가 정말 매력적이다.
바둑 실력은?
10급 정도.
10급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
18급에서 1급으로 올라가고, 승단하면 초단에서 9단으로 올라간다. 10급보다 밑이면 대단히 못 두는 건데, 바둑의 재미를 느끼는 초입 단계랄까. 수는 낮지만 바둑TV에서 유명한 기사의 대국에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 있는 정도?
어떻게 입문했나?
문하생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작가 선생님들께서 가끔 바둑을 두셨는데 어른스러워 보이고 멋있더라. 그래서 바둑을 배웠다. 그런데 패배감 관리가 안되더라. 지고 나면 아까 뒀던 바보 같은 수가 계속 떠오르고 너무 분하고 약 올랐다(웃음). 남들은 하루에 서너 판도 두는데 난 한 판만 둬도 진이 다 빠졌다. 그래도 관련 서적을 읽는 건 재미있어서 그쪽으로 빠졌다. 바둑인들의 삶은 알수록 대단하다. 조치훈 9단은 교통사고가 났는데도 휠체어를 타고 와서 바둑을 둔 휠체어 대국이 유명하다. 그때 누가 왜 그렇게 바둑을 두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바둑, 그래도 바둑.” 남들한텐 바둑일 뿐이지만 자신한텐 바둑이 전부라는 거다. 대단한 비장함이 느껴진다. 바둑 기사들의 정수가 남긴 어록들을 보면 흉내낼 수 없는 어떤 경지가 느껴진다.
단행본의 ‘작가의 말’에서 바둑을 자기 패배조차도 복기하는 유일한 일이라고 했다. 그 문장을 읽고 새삼 바둑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했다.
대여섯 살부터 바둑을 둔 영재급 아이들 중 몇몇은 연구생이 된다. 감정 정리도 잘 안될 것 같은 그 꼬맹이들도 가만히 앉아서 복기한다. 그 아이들이 패배의 감정을 어떻게 관리할까,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어떻게 노력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연민이 생긴다. 바둑이 어려운 건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격랑의 사춘기에 연구생이 되어 승수를 채우고 입단하고자 할 텐데 이창호나 이세돌 같은 천재들이 많으면 아무래도 어렵다. 실력이 늘어도 자신보다 더한 천재를 만나서 패배하면 실력이 낮은 거다. 그런 과정을 견딘 아이들이 사회에 나오면 그 단단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떨까 궁금했다.
부모로서의 심정도 더해질 것 같다.
아이에게 연민이 들 때가 있다. 분명히 이런 상황에선 슬플 거 같은데 웃고 있을 때가 있다. 그걸 보면 슬프다. 이 정도는 참아낼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데 부모 입장에선 그렇게 애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더라.
인생이 바둑이라면 본인은 어느 정도 수를 둔 거 같나. 어떤 판국이 보이나?
포석은 다 지난 정도? 이 판이 어떻게 될 거 같다고 어느 정도 정돈된 형세랄까. 나란 사람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진 대충 정해진 거 같다. 큰 자리들을 보면 내가 확보한 지점도 있고, 남에게 넘어간 지점도 있고. 이제 중반 이후에 끝내기를 어떻게 잘 처리할지가 문제다. 한 집이라도 더 확보할 수 있도록 정당하게 잘 싸울 수 있는 판을 짜야 한다. 디테일하게 모든 단계가 중요한 시기가 온 거 같다.
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퇴직연금 상담을 해주는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와의 통화를 소일거리처럼 즐기는, 은퇴한 CIA요원이다. 그런 어느 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프랭크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모종의 위협을 감지하고 이를 퇴치한 뒤, 과거 자신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함께 있을 때는 두려울 게 없었던, 일명 ‘레드(RED)’라 불리는 동료들을 규합해 나간다.
<레드>는 최근 개봉됐던 <익스펜더블>과 비교하고 싶어질 만한 영화다. 사실 내용적으로 두 영화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없다. 두 영화가 비교군의 자리에 놓일 수 있는 건 영화 외적인 문제에 있다.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그리고 헬렌 미렌이 등장하는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레드>는 실베스터 스탤론과 이연걸, 돌프 룬드그렌, 미키 루크 등이 출연하는 <익스펜더블>의 캐스팅에서 느꼈던, 유사한 향수가 감지된다. 하지만 그 향수에는 명확한 성분의 차이가 있다. <익스펜더블>의 액션이 이미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판단된 노장 액션스타들의 분투가 연민을 자아내는 것과 달리 <레드>는 여전히 할리우드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노년기 배우들의 일탈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부르는 까닭이다.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레드>는 근래 개봉된 <A특공대>와 <나잇&데이>등과 같은 첩보액션물의 성분을 추출해서 적당히 흔들어 섞어놓은 듯한 유사품이기도 하다. 음모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얻게 된 스페셜리스트 팀이 서로 힘을 합쳐서 제도적인 음모를 분쇄하고 되레 상대를 위협한다는 큰 줄거리를 비롯해서 도주와 작전을 거듭하는 스파이와 우연히 연루되어 동행하게 되는 여인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상되는 영화가 많다는 건 일단 <레드>가 그만큼 새로운 전형으로서의 이력으로 이해될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DC코믹스의 동명인기만화를 원작으로 둔 <레드>는 만화적인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조합을 통해서 얻어지는 재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다이하드’한 액션스타 브루스 윌리스를 축으로 존 말코비치의 정신 나간 카리스마가 모건 프리먼이 자아내는 차분한 긴장감과 어울리고 헬렌 미렌이 기관총을 발포해대는 보기 드문 신들까지, <레드>가 발생시키는 강력한 오락적 쾌감의 팔할을 책임지는 건 바로 그 배우들의 묵직한 관록이 일탈적 행위를 자행하며 이루는 아이러니로부터 얻어지는 묘미에 있다.
액션영화로서 적절한 만족감을 부여하는 <레드>의 스토리에 장치적으로 설치된 두 갈래의 로맨스 역시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재미를 부여한다. 배우들의 대사에는 유머러스한 활력과 직관적인 무게가 잠재돼 있으며, 그들의 존재감 자체가 오락영화로서의 쾌감을 배가시킨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볍게 뛰면서도 묵직하게 한 방을 날리는 노장 배우들의 모습은, 마치 하드록의 장인이 연주하는 스트레이트한 훅을 듣는 느낌과도 같다고 할까.
허영만 작가의 원작만화를 영화화한 <식객>은 33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식객: 김치요리>(이하, <식객2>)는 그 성공에 힘입은 후속적 기획이다. 사실상 <식객2>는 허영만 작가의 원작 브랜드 네임밸류만을 차용할 뿐, 그 작품의 성격과는 무관한 시리즈가 됐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의 출연과 이름만 같을 뿐 성격적으로 다른 중심인물의 등장은 이미 <식객2>가 원작을 염두에 둔 기획이 아님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식객2>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 관계를 염두에 둔 전작의 후속편이란 형태 안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본 수상관저 수석요리사인 장은(김정은)은 한때 기생집이었던 요리집이자 자신의 어머니 수향(이보희)가 있는 ‘춘향각’으로 돌아온다. 춘향각은 장은에게 기생의 딸이라는 트라우마를 안긴 공간이다. 그래서 장은은 어머니가 아끼는 춘향각을 제 손으로 없애려 한다. 한편 트럭을 타고 전국을 누비며 채소 장사를 하는 성찬(진구)이 친어머니처럼 모시는 수향의 ‘춘양각’을 없애려는 장은의 야심을 알게 된다. 결국 장은의 야심을 막고자 하는 성찬은 춘양각을 지키기 위해 장은이 출전한 김치대회에 나가 장은에 맞선다.
원작자의 의도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스핀오프라기 보단 일종의 팬픽에 가까운 <식객2>는 어찌됐건 <식객>에 이은 시리즈 속편이다. 동시에 음식을 소재로 둔 영화란 기조는 이어지고, 원작만화와 전작에서도 등장하는 대사, “세상의 모든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숫자와 같다”가 반복된다는 점에서도 그 모토의 계승을 연출하려 한다. 사실상 요리 영화라고 하지만 <식객2>가 주시하는 건 요리보다도 인간의 관계다. 전작의 단순한 선악구도에서 벗어난 캐릭터의 사연은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자질이란 점에서도 발전적이다. 요리의 완성보다도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손과 마음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손과 마음에 어린 진심을 포착하기 보단 자꾸만 진심을 연출하려 든다. 요리를 만드는 이의 정성의 온기를 전달하기보다도 눈물을 끌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거둘 수 없다. 김치를 응용한 다양한 요리들을 소박한 앵글로 포착함으로써 <식객2>는 여기서 요리란 단지 이야기와 관계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진심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스스로가 요리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강조하는 <식객2>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만 같이 군다. 요리를 소박하게 연출한다 해서 진심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식객2>는 자신의 의도를 살리지 못하는 반면, 그 의도를 감출만한 것들만, 혹은 그 의도에 좋은 양념이 될만한 재료를 자꾸 덜어낸다. 음식영화라는 장점을 스스로 포기한다.
결과적으로 <식객2>의 의도는 존중할만하다. 하지만 의도가 앞설 뿐, 전략이 서투른 영화의 완성도는 존중할만한 형태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간이 싱겁고, 맛이 애매한 영화가 됐다. 인물의 과거를 끌어내 청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그 인물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최소한 완벽한 밥상을 차리진 못했지만 적당한 손맛을 만끽하게 해준 전작의 묘미에도 미치지 못한다. 어쩌면 <식객2>는 애초에 그런 결정적인 맛의 비결을 모르는 영화였을지도 모르겠다. 전작의 흥행성에 고무되어 기획된 속편의 운명적인 결과란 이런 듯 뻔하고 뻔한 수순을 걷게 될 뿐이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릴만한 또 한 편의 사례로선 유용하다. <식객2>엔 속편이 지녀야 할 깊은 맛도 새로운 비범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끼> 캐스팅은 어떻게 생각하나?
깜짝 놀랐다. 특히 이장. (웃음) 정재영 씨가 머리를 삭발했던데. 하지만 감독님이 믿음이 강하더라. 워낙 신뢰할만한 배우이기도 하고, 나 역시도 믿어야지.
만화가 아닌 영화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고 변주한 타인의 창작물을 본다는 것에 대한 기대나 걱정이 있을 거 같다.
처음 영화를 계약했을 땐 어떤 분이 연출할지도 몰랐고 내 나름대로 상상만 해봤다. 배우는 누구, 감독님은 누구, 이렇게. 어쨌거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치를 벗어난 그 이상의 조합이 나왔다. 그래서 너무 기대가 커졌다. 일단 제일 기분 좋은 건 박해일 씨의 캐스팅이다. 캐스팅이 확정되기 전에 박해일 씨를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정지우 감독님께 내가 박해일 씨 팬이고, 류해국의 역할모델이기도 했다고 하니까 소개시켜주더라. 그때는 그냥 조심스럽게 만났는데 나중에 캐스팅이 확정됐다고 하니까 속으로 ‘아싸!’했지. (웃음)
류해국이 박해일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실제로도 박해일 씨를 모델로 류해국을 만들었다는 게 재미있다.
<연애의 목적>에 헐렁한 양복을 입고 나오는 게 좋더라. 왜냐면 뭔가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사람은 와이셔츠나 벨트, 바지, 이 이음새가 맞지 않아도 막 입고 다니잖아. 양복 뒷주머니도 일간지가 아닌 벼룩시장 같은 거나 넣고 다니고. (웃음)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은 겉모습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연애의 목적>에 나온 박해일 씨를 많이 응용했다. 항상 뭔가에 찌들어있고, 지쳐있는 모습. 그리고 특유의 애매모호하고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도 탐나더라. 계속 그 모습을 머리에 넣고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영화에 관여하는 건 없나?
전혀. 어쨌거나 연재가 완료되기 전에 계약이 된 상황이라 계속 회의는 해나가야 했다. 정지우 감독님도 계속 물어보시고. “그러니까 이영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웃음) 그런데 그림으로 표현해온 사람이 말로 설명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또 그게 말로서 내 입으로 나오면 내가 그 말을 들어도 재미없다. 어떻게 이 분을 감동시킬까 고민이 되니까 설명도 잘 안되고. 완결되고 난 지금은 여러 문제로부터 후련해졌다. 만화로서는 일단 여기까지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고 시나리오도 변형을 가할 수 있는 기본적인 폼이 생긴 거니까 그 분들도 편해졌고. 사실 5월 말에 연재를 끝내려고 했는데 8회 분량이 연장돼서 그 분들도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걸.
8회는 왜 연장됐나?
원래 기도원 이야기가 그렇게 길게 갈 분량이 아니었다. 하다 보니까 거기서 재미를 느꼈고 분량이 늘어난 거지. 뒤에 수습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몇 회를 더 해버리니까 결말부까지 길어져 버렸다. 아직도 내 생각엔 3회 정도는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미디어 다음(Daum)’측 사정도 있고 해서 거기서 마무리 지었다.
지금의 결말부도 불충분했다고 느끼나?
조금은 더 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예정된 템포대로 진행했다면 그 동안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데 무리가 없었는데 그걸 한 회에 몰아가다 보니까 급해진 바가 있었다. 그래서 아쉽다.
<이끼>에서 정치적 메타포를 읽어내고 그런 해석을 반영한 댓글이 많더라. 실상 그렇게 읽히는 장면도 적지 않다. 처음 잡았던 기본적 설정과 무관하게 연재 과정에서 관찰하거나 목격한 외부적 사건에 영향을 받아서 극적으로 수정이 가미된 요소는 없었나?
애초에 <이끼>는 노무현 정권 때 기획됐다. 애초에 현정치상황이 <이끼>에 반영된 건 없었던 거다. 작은 권력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작은 권력에 빈정 상한 사람의 싸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인공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서 갑자기 거대 담론이 돼버렸다. 창작물은 사실 생물과 같다. 대사 몇 마디만으로도 이야기가 확장되니까. 결국 애초에 내 머리 속에 구성돼 있던 것들이 너무 시시해져 버린 거다. 덕분에 뉘앙스가 수정된 부분이 있다. 그걸 제외한 나머지는 내 예정대로 갔다고 본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자라난 분량도 생겼으니 그 이후로의 진행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원래 계획했던 결말의 형태가 변하진 않던가.
원래 결말까지 이야기를 다 짜놓고 들어갔다. 그런데 방금 말한 것처럼 이야기가 자라나버린다. 그게 내가 간과한 문제였건, 단순한 실수였건, 독자들은 그걸 믿고 간다. 그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쓴 대사나 어떤 행위에 대한 묘사라 해도 독자들이 이건 그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면 일단 그 생각은 정당한 거니까 그것들에 대해선 내가 책임져 줘야 한다. 그런데 내용상 이런 문제가 자꾸 생기니까 애초에 내가 잡았던 것만큼 갈 수 없게 됐다. 크게 봐서는 결과적으로 애초에 내가 잡았던 대로 가야 했던 거지만 아까 말했던 것처럼 기도원에서 류해국 아버지가 갑자기 도인 같은 말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의 관념 자체가 확 팽창돼버렸다. 결국 내가 애초에 잡았던 설정들이 시시해져 버린 상황이 된 거다.
애초에 잡았던 결말과 지금의 결말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결말부분은 사실 비극적으로 끝내려고 했다. 류해국 같은 주인공이 자기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애초에 자기 생각과 습관을 다시 끌어와서 이 사건을 만든 거니까. 거기에 대해서 처단해버리고 싶었다. 네가 네 스스로 싫다고 느껴서 버리려던 성격이라면 네 성장을 위해서 완전히 버렸어야 했는데 왜 다시 그걸 또 쥐어 잡았냐고, 그런 생각으로 처단하려 했는데 그에 대해서 주변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지금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의 가치가 소중한 거 아니냐고. 사소한 정의라도 그걸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나는 사회보단 개인 우선으로 관점을 두고 생각해 왔다.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서는 스스로를 뛰어넘어야 된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작품 밑에 달리는 댓글 같은 걸로 인해서 어떤 사회성을 발견돼버리는 거다. 그래서 결말부에서 류해국이 이기는 쪽으로 색채가 달라져 버렸다. 대신 류해국의 방법으로 이기면 안 되겠더라. 그래서 검사한테 손을 뻗고, 검사도 이를 인정하고, 자기가 잘못했다고도 하고, 이런 식으로 류해국을 조금 더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남과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융화형 인간으로 그리게 됐다. 검사도 유들유들한 타협적인 인간에서 주인공처럼 선이 분명해진 인간으로 변했다. 원래는 주인공의 파멸이야기였다가 한 40화 즈음부터 생각이 바뀌게 된 거다.
그런 생각의 전환을 이끈 주변 사람이 궁금하다.
<이끼> 40회 즈음에 영화판권 계약을 했고 그 후에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로 한) 정지우 감독님을 만났다. 정 감독님이 내 원래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40분 정도 들어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솔직히 윤 작가 생각에 동의가 안 돼요. 나는 내가 바로 류해국 같은 사람이라 믿는데 내가 공격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내가 그렇게 죽일 놈인지, 고민에 빠지네요.” (웃음) 계속 “류해국이 뭘 잘못했나요?”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다. 그러다 보니까 나도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됐다. 사실 나는 검사한테 조금 더 점수를 준다고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박검사는 지방으로 좌천됐거나 말거나 어차피 사회의 주류에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하시더라. 결국 왜 박검사가 승자가 되고 류해국이 패자가 되냐는 물음이었지. 그때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파멸로 가는 건 아니란 생각이 굳어지더라. 검사한테 갈 역할이 류해국한테 와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최종적으로 끝이라고 도장 찍는 역할은 역시 주인공인 류해국에게 맡겨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말씀하시길, “류해국 같은 사람의 가치관은 지금 시대가 정말 필요로 하는 가치관인데 이 사람을 패배자로 만드는 건 어떠한 명분도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이 사회적으로 봤을 때 너무 아깝잖아요.”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
원래 스토리 안에서 이장은 어떻게 되는 거였나?
류해국을 포함해서 다 죽고 이영지만 살아남는 거였다. 사실 직접 그리기 시작하면서 콘티를 짜기 전까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생각만 그렇게 할 뿐이지. 그래서 마지막 버전도 한 스무 개 정도 나왔었다. 영화사마다 아직 연재 중인 만화니까 계약하기 전에 결말을 알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 영화사에 한번 써주게 되지만 사실 그건 또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영화사엔 또 다른 버전을 써주고, 이러니까 영화사마다 각자 본 버전이 다 다른 거다. 정 감독님한테 얘기할 때도 이건 확정적인 건 아니고 나도 솔직히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듀나(DJUNA)’라고 하나? 그 사이트 게시판에 한번 “작가도 <이끼> 결말을 모른답니다. 큰일입니다. 여러분.” 이런 글이 있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항상 그렇게 작업을 해왔다. 시작점과 끝점은 있는데 인물 위주로 가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설계는 없는 거다. 그런데 <이끼>를 하면서 그런 부분을 많이 배웠지. 사건 위주로도 정해놓고 프리(프로덕션)를 해야 된다는 걸 알았다.
<야후>와 함께 <이끼>를 비롯해서 최근 연재했던 <그는 거기에 없었다>사이엔 공통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건의 뇌관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부자관계가 작품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관념이 작품에 반영되는 건 아닐까 궁금해졌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건달 생활 비슷한 걸 하셔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야반도주 같은 것도 많이 하고, 자꾸 신변이 위험해지고 이러다 보니까 그런 게 너무 싫었다. 그러다가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도 싫어졌는데 점차 이 사회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가 가부장적인 태도에서 시작되고 확장되는 거 같더라. 처음엔 단지 내 아버지를 극복하고 싶어서 ‘아버지 일기’라는 것도 써보고 그랬는데 인식이 좀 더 확장되고 깊어지다 보니까 그냥 우리나라 사회가 그렇다고 느껴지더라. 정치인들은 여성들도 굉장한 마초 근성을 갖고 남성화돼서 움직이잖아. 이런 게 진짜 혐오스럽더라. 난 아직도 아내를 부를 때 ‘누구 씨’라고 부른다. ‘누구 엄마’ 이러는 것도 싫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들한테 ‘나 남자야’라고 뻐기는 것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야후>를 봐도 남자라고 폼 잡고 나오는 애들은 진짜 남자같이 나온다. 아주 권위적으로 여자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나에게 그런 사회에 대한 의식이나 분노가 굉장히 많은 거다. 남성성에 대한 부정이랄까.
세대간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묘사되는 작품이란 생각도 든다. 특히 요즘은 세대간 갈등이 경제적 문제로서 크게 두드러지는 시대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결국 세대간의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니까. 류해국은 기성 세대와 대립하는 젊은 세대로 치환해도 좋은 인물이다. 결국 그 적의를 사회적 행위로서 내보이고 이를 통해 자기 부정적 파멸마저 도모한다. <야후>도 사실 그런 세대적 적의에서 비롯된 자기 파멸적 이야기다. 원래 계획했던 <이끼>의 결말을 듣고 보니 <이끼>도 <야후>와 비슷한 비극적 파국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 볼 수 있었겠다. 다만 두 작품이 결말에서 극명한 차이를 두게 된 건 외부에서 얻은 영향력이 그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작품의 변화가 스스로의 생각 자체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맞다. 이제 지는 걸 이야기하긴 싫어졌다. 어떻게 보면 파멸을 그리고 싶다는 건 사소한 동기일 뿐이다. 내겐 엇나가고 싶어하는 정서가 굉장히 많거든.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네 만화 정말 재미있어.” 그럴 수록 막 엇나가고 싶어진다. (웃음) 정말 마이너한 정서지. 액면으로 느껴질 만한 선의의 칭찬이나 호의를 받지 못하고 자랐던 사람이라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 같다. 찰흙으로 잘 빚어놓고서 ‘에이, 이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란 식으로 막 뭉개버리는 애들 같은 마음이랄까.
스스로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역시 정지우 감독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그게 너무 사소한 태도라는 걸 느꼈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지해줄 때 욕심을 내서 더 잘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얘기까지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촛불집회만 봐도 과거와 (시위가) 형태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나. 과거 386세대들이 변절해가는 과정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 과거를 또 비난하고, 적의를 갖고, 그런 건 너무 비참한 삶이 아닌가. 그래서 한번이라도 그 안에서 승리를 해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스스로 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자 싶더라. 비록 그게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덕분에 나도 그런 식으로 많이 바뀌었으니까. 나 스스로도 분명한 선을 갖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애도 둘이나 낳았고. 이제 지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더라. 내가 포기하는 싸움은 있을지 몰라도 내가 멈추지 않은 이상 지는 싸움이란 건 없는 거다.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 추모만화에 <불의>라는 작품으로 참여했는데 이게 그냥 추모만화로 끝나는 게 아니었으면 했다. 불은 저절로 또 생겨나겠지만 불 끄지 말자고 말하고 싶었다. 최근 2년 사이에 그런 열망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개입됐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야후>는 여전히 당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사실 <야후>는 <이끼>보다 직설적으로 정치적인 함의를 두르고 메타포적 이미지를 적시한 작품이다.
<야후>에 나왔던 사건사고들은 지방에 살던 내가 서울에 올라온 당시,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기에 진짜 황당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TV를 보니까 마치 컴퓨터그래픽처럼 다리 중간이 내려앉아 있고,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마치 기네스북에 올라가는 토픽처럼 취급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처럼 치부해버린다 할까. 특히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당시엔 며칠 만에 사람들이 구조됐네, 이런 뉴스를 보고 세상이 정말 원색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관심사를 만화로 그렸던 거다. 사실 난 사회발언적인 인간이기도 하고.
그런 관심사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별자리를 공부하면서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 한 명에게도 구조라는 게 있지 않나. 사회와 그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있고. 결국 드라마라는 게 사람 이야기고, 그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나 권력 관계가 나타나고, 종교도 들어가고, 모든 게 다 들어가겠구나 싶어졌다. 꼭 기독교나 천주교 같은 특정종교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어떤 영역에 마음을 담아두고 의미부여를 하고자 하는 것도 다 종교적 의도가 되겠구나 싶어졌다. 물론 절대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던 부분이다. 내게 별자리를 가르쳐 주신 분들도 다 목사님 같은 사람들이었고 덕분에 별자리 배우면서 성경도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니까 자연스럽게 애초에 내가 지니고 있던 사회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이 겹쳐졌다. 인물을 우물처럼 깊게 보는 관점도 생겼다. 결국 <이끼>할 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받았다. 솔직히 <이끼>가 <야후>보단 관념적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잘 잡아서 들어간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야후>보단 <이끼>에 대한 만족도가 더욱 큰 건가?
원래 <야후>에서 주인공을 과격한 테러리스트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첫 아이가 생기면서 그렇게까지 갈 필요가 있나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까 뒤로 가면서 해프닝 위주의 사건들이 채워졌고, 결국 그렇게 하고 나니까 절반밖에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끼>에서는 뭐건 간에 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내가 원했던 밀도까진 들어가봤다는 느낌이 남더라. 지금까지 내가 한 작품 중에서는 가장 잘한 게 아닌가 싶다.
밀도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류해국이 이장 집에 찾아가기 전에 했던 대사가 기억난다. “오늘 밤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밀도로 채워져 있다.” <이끼>는 대사량이 적은 만화가 아니다. 동원되는 대사의 표현방식이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덕분에 해석의 욕구를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고. 그림만큼이나 언어를 동원하는 방식에서도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문장에 예민한 편이라서 그런 바가 없지 않았다. 스토리를 쓸 때 종이를 한 장 옆에 두고 대사를 반복해서 써봤다. 일단 직접적이라 느껴지는 표현은 가급적 쓰지 않았지. 그 다음에 표현이 많이 부풀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쓰지 않았다. 최대한 쉬운 문장이면서도 읽어봤을 때 적재적소에 쓰인 것 같아서 그 자체로 괜찮다는 느낌이 좋더라. 평이하지만 날 선 느낌? 그래서 대사는 반복해서 써보고 판단했다. 가장 훌륭한 대사는 폼 잡거나 많이 부풀려진 대사가 아니라 그 상황을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대사니까. 주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그런 대사가 있지.
대사량이 적지 않은 작품이지만 대사를 아끼는 경우도 많다. 함축적이라 이해되는 대사도 많고.
<야후>마지막 권에서 주인공과 신무학이 죽기 직전 “잘 가라.” 할 때, ‘아, 이런 맛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송지나 작가가 <모래시계>에서 “나 떨고 있니?” 이 대사를 쓰기 위해 7일 간 고민했다는 것처럼 나도 그 대사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거든. 가장 쉽게 의미를 응축시키면서도 얘네 나이에서 할 수 있는 대사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데 지금 당장 죽기도 바쁜 애들이 무슨 대사를 질질 끌면서 하겠냐 싶더라. 그래서 결국 “잘 가라.” 한마디로 가게 됐는데 그때 내 스스로 느낀 거지. 대사는 각 잡을수록 후지게 나오는 구나. 대사의 선이 분명해버리면 그 내용에 대해서 책임져줘야 하는 상황이 자꾸 발생한다. 여러 해석이 나올만한 대사를 쓸 수 밖에 없는 건 그래서다. 내적으로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사회 비판적인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기 어려운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런 주인공이 마치 식자층 같은 대사를 쳐대거나 사회적 발언을 해버리면 작가가 독자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의도가 보이게 되는 거다. 그래서 그런 대사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옆집 사는 아저씨가 자신이 그렇게 느껴서 하는 말 정도 수준의 대사가 필요했다.
캐릭터의 지적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될만한 대사는 최대한 배제했다는 건가?
맞다. 무엇보다도 <이끼>는 분명히 그림은 보이지만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호한 관념적 만화라서 묘사에 집중하려 했다. <이끼>를 하면서 어떤 분명한 걸 지적하듯 말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나 역시도 그만큼 불분명했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선이 뚜렷한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진 못하겠더라. 각자 처지에 맞는 이야기에 집중하자 싶었다.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을 보고 <살인의 추억>이 연상됐다. 인간적이라 이해되는 지방성의 이면에 감춰진 잠재적 폭력성이라던가, 소박한 환경 내에 깊게 뿌리 내린 부조리한 심리가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압축판에 가깝다는 느낌도 들더라. 무엇보다도 <이끼>에서 등장하는 마을은 그 자체로 작품에서 중요한 미장센이다. 그런 마을을 상상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는 차량의 주행속도를 10km/h정도 높이기 위해 곡선을 최대로 줄이는 형태로 완성됐다. 그만큼 굉장히 폭력적으로 건설됐지. 한번 그 도로를 타고 고향집을 갔다가 올라오는데 어떤 터널에서 나오니까 소음 방지벽 너머에 가둬진 작은 마을이 보이더라. 돈을 몇 푼이나 받았을지 몰라도 저 마을 사람들은 정말 어이없었겠지. 도로 아래 교각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마을이었는데 낯선 사람은 저 마을에 들어갈 수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 가까운 동네 사는 사람조차도 특별한 용건이 없으면 갈 마음도 들지 않는 마을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저런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이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들도 인상 자체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다. 캐릭터의 모티브는 어디서 시작됐나?
그 공간에 대한 호기심 이후로 사연이 많은 캐릭터를 만들어보자는 전제가 뒤따랐다. 종종 시골 사람에 대해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서울에 계속 살다 시골에 내려가서 살다가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정말 무서웠거든. 시골에 살면서 보면 가끔 시골에서 막걸리 같은 거 마시고 그러다가 난동 부리는 사람이 있다. 낫도 흉기가 되는 물건인데 눈 한번 돌아버린 사람 주변에 그런 게 놓여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농사를 짓고 힘을 쓰다 보니까 체격도 좋은데 저 사람이 순박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을 정도지. 그래서 우락부락하면서도 순박해 보이지만 눈 한번 핑 나가면 살벌해 보일 수 있는 느낌의 캐릭터들을 만들려고 했다. 이장 같은 경우, 딱 봤을 때부터 재수없어 보일 만큼 혐오스런 선입견을 주는 이미지를 모아 놓은 거다. 대머리에, 광대뼈에, 음흉한 큰 눈까지. 주인공인 류해국은 척 봐도 이질감이 느껴지게끔 훌쭉한 느낌을 줬고.
한 마을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드러내고 그런 관계에 잠재된 은밀한 사연과 그 사연의 발굴을 통한 갈등과 충돌이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만큼 캐릭터의 내외를 디자인하는 과정도 중요했을 거다.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도 존재하겠지만 주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게 되는 경우도 있진 않았을까.
사실 모델은 거의 없었다. 단지 인물마다 하나씩 죄를 집어넣었던 거다. 백지 상태의 캐릭터를 만들어놓고 얘는 무슨 죄, 얘는 무슨 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이입했다. 이장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 원죄, 그리고 전석만은 어린 아이를 죽이고 할머니도 죽게끔 한 죄, 그리고 그 외에도 인간의 몸뚱이로 장사하며 이를 통해 그 누군가를 죽인 죄, 간접 살인을 한 죄, 이런 식으로 죄를 부여해놓고 그 죄를 부각시킬 수 있는 성격들을 접목시킨 거다. 살다 보니 죄를 짓게 됐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 성격을 만든 다음에 죄를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트라우마를 캐릭터를 이해하는 힌트로 적용시킨 거다. 인물 파일을 만들 때 본래 타고난 이 사람의 성격을 먼저 설정한 뒤, 그 사람의 서사를 만들게 된 거다.
마을에 모인 인물들이 가지라면 이장은 뿌리와 같은 존재다. 아무래도 이장은 다른 캐릭터보다도 극적인 분위기를 이끄는 핵심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존재를 구상하는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냥 그런 사람 많지 않나? 특히 사회 생활하다 보면 사람들의 생각을 점유하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다. 2~30명 정도의 인원이 화실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수의 시선이 관성적으로 몰리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더라. 만약 그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틀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순간, 이제 이장 같은 사람이 되겠지. 그런 흔한 성격을 극대화시킨 거다. 사실 류해국 아버지 같은 사람도 흔하다. 예전에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봐왔는데, 작은 교회에 가보면 마치 절대자인 양 행사하는 목사가 많다. 목사가 없으면 전도사가 그 역할을 하고 앉았다. 권사만 해도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많다. 똑같은 시골 촌부인데 권사네, 장로네, 이런 이유만으로 어른입네, 행세하는 사람이 많다. 정식으로 교단에서 인증된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많고 그로부터 추출해온 성격을 약간만 세게 변형시켜버리면 <이끼>같은 집합이 생긴다.
마을은 죄의식의 연대로서 은둔하는 장소다. 그 공간의 성격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사람이 독립적인 거 같지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의존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감춰야 될 것이 많거나 상처가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해주길 바란다. 자신의 죄의식을 일정부분이나마 노골적으로 감싸주는 방어막이나 울타리 같은 존재를 항상 염원한다. 예를 들어 집단 섹스를 해도 서로 용인될 수 있는 관계? 그렇게 죄의식을 공유해주는 사람이 너무 고마운 거지. 그래서 결국 그 마을에서 나오기 싫어지는 거고. 예를 들어서 기도원에 들어간 사람들도 다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들인데 왜 집까지 팔아서 그 돈을 교회에 다 갖다 주고 그랬을까. 그건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절대적인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위로를 얻고, 보호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뿐이지. 어떻게 보면 스스로 악마를 키우는 거다.
<이끼>에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이 많다. 특히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로서 호감을 끌어내기 보단 지나친 자기 아집과 오기로 뭉친 인간으로 인식되어 호감을 증발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반에 보면 류해국 보고 ‘얘 뭐냐, 진상이냐, 이 새끼 뭐냐. 진상이다. 짜증난다’ 이렇게 욕하는 댓글도 많다. (웃음) 나도 공감한다. <야후>할 때도 선배들이 그랬다. “야, 걔가 주인공 맞아? 걔 너무 찌질해!” (웃음) 내가 그런 모호한 정서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인물의 정서에 동의를 해주고 싶다가도 그런 인물이 막 싫어지기도 해서 그걸 그대로 표현에 옮긴다. 어쩌면 내가 나를 좀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끼>의 이장은 단순히 악인이라 말하기 애매한 지점이 있다. 현실적인 윤리 안에서 분명 악으로 규정될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인물만의 명확한 합리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부조리 자체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처럼 작품 내에서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겪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 내가 작은 세계에서도 상처받고 사는 편협한 인간이다 보니까 자신을 합리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 방어기제가 잘 발달된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부럽다. 류해국 아버지를 보면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고, 이장은 형이하학적인 절대적 존재감을 꿈꾸는 사람이다. 이 둘의 충돌을 그리고 싶어졌다. 자살에 있어서도 주인공 아버지는 스스로 숨을 멎게 해서 죽지 않나. 인간으로서 정말 할 수 없는, 자율신경까지 점해버린 사람이다. 결국 그 극단적인 죽음으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거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박탈감이 있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장이 그 마을의 절대적 메시아라면 마을 사람은 그에게 고해를 받고 구원을 얻은 존재다. 류해국은 정의를 추구하고 진실을 쫓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마을의 암묵적 합의를 파괴하는 침입자다. 어떤 식으로든 유기적으로 순환하던 마을의 생리를 훼손하는 바이러스이거나 박테리아 같은 존재로 마을사람에게 인식될 수 밖에 없다. 믿음 자체를 통해 평온한 연대적 삶을 이루던 집단의 질서를 흔들어버리는 이물질 같은 존재랄까. 그래서 한편으로 <이끼>가 종교적 믿음의 형태에 대한 도발을 던지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아, 정말?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더니) 사실 내가 어릴 때 나름대로 교회를 진지하게 다녔다. 그래서 <이끼>의 기도원 신을 그리고 나서 무의식적으로 죄의식에 시달렸던 거 같다. 특히 맨 마지막 회 작업할 때, 잠을 자면서 꿈을 꿨는데 예전에 같이 교회 다녔던 선배 형이 군화에 교련복 상의, 군복바지를 입고 기도원 샤워실로 나를 끌고 가더니 나를 두들겨 패더라. 그래서 4시간 자고 일어나서 잠을 확 깨버린 거죠. 덕분에 안 그래도 <이끼>마지막화 분량이 많았는데 잠까지 설친 상태에서 작업을 하게 됐다. 그래서 사실 도전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종교적인 죄의식이 있었다는 걸 느끼고 뒤늦게 그게 도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실 내가 하나님, 예수님, 이런 용어는 절대 쓰지 않고 절대자, 신, 이런 단어만 썼던 것도 다 그걸 피해가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다.
어떤 특정종교에 국한돼서 해석되는 건 위험했을 거다.
그런 식으로 한정되게 이해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절대자에 대해 탐닉하는 사람으로 설정했던 거지.
믿음은 그 자체로서 신성하고 숭고하지만 그 행위적 목적은 때로 불순하고 도피적이다. 예를 들어 <밀양>에서 전도연 씨가 연기한 캐릭터가 자신의 아들을 납치해 죽인 살인범을 면회 갔을 때 자신은 신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그에게 전도연 씨가 대사하는 장면이 있지 않나.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이 널 용서하냐.” 개인적인 신앙은 때때로 공공적인 윤리를 무력화시킨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앙을 이용한다. 결국 이장에 대한 신앙적 믿음에 의지하는 마을 사람들은 현실적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나 마을이라는 도피처에서 살아간다. 결국 류해국은 그런 도피를 통해 평온을 누리는 마을 사람들의 죄의식을 다시 출렁이게 만드는 존재다.
헤집어버린 거지. 다시 원래대로 세팅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제 곤란해지고.
어떻게 보면 류해국은 현실에서 도피해버린 인간들의 나약한 양심을 뒤집어 끌어냄으로써 그 실체를 각인시키고 스스로 그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되레 자신의 부조리한 정서마저 극복하게 되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달아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다.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전대통령이 각각 5년 동안 정권을 잡았지만 그 동안에 정권을 빼앗긴 세력들이 항시 정권을 잡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 사람들은 지금 야당인데 전혀 야당같지도 않고, 우리 사회의 주류는 여전히 그들을 지지하고 있고, 오히려 정권을 잡은 쪽이 계속 힘들어하고, 이제 다시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니까 언제 우리가 뺏긴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원래 잡아왔던 사람들처럼 쉽게 안착하고. 이 사람들은 어쩌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자격도 없는 것들이 이 자리에 들어와서 자기네 룰을 헤집어 놓는 거라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 처가 쪽 집안이 좀 잘 산다. 그런데 처가 쪽 친척들과 모여서 밥을 먹는데 그때 한참 촛불집회하고 그럴 시기였다. 처가 쪽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작은 아버님 한 분께서 그때 노무현 전대통령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고등학교 밖에 못 나온 새끼가 어디 대통령이나 했다고 저 따위로 하고 지랄이야.” 그러니까 숙모님이 추임새를 넣었다. “왜들 저래. 지금 대통령 바뀐 지 얼마나 됐다고 응원은 못할망정 촛불집회나 하고 있어.” 그 양반들은 노무현 전대통령 당선됐을 때부터 욕을 하셨던 분들이다. 그런데 왜 이명박 대통령은 응원해야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더라. 나에게 한나라당 입당 원서까지 주셨던 분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은 병균 보듯이 하고, 마치 급이 다른 녀석이 어디 와서 까불고 있냐는 식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발언을 던지고. 그 때가 <이끼>를 ‘미디어 다음’에 연재하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그래서 스토리를 쓸 때, 조직과 개인에 대한 폭력적인 관계에 대한 생각이 더 깊게 자리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힘으로 구축한 정의라고 할까.
정의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냥 지들끼리의 룰이지. 그곳에 류해국이 들어가서 하나씩 툭툭 건들기 시작하니까 얘네들은 짜증이 나고, 기분이 나쁘고, 점차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다.
<이끼>에 달린 댓글을 보면 지난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와 현재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에 걸친 많은 해석들이 대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걸 보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궁금하다.
솔직히 그런 건 그 분들 마음이지. 작업할 때는 최대한 그런 외부적인 해석에서 벗어나야 되는 거 같더라. 그리고 나는 무아의 경지에서 내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해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작업해야지 그 안에 어떤 의도를 담고자 하는 건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주제나 의도가 분명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쨌든 내가 가진 기본적인 정체성은 내 작품이 보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그렇게 정치적인 해석을 동원해서 댓글을 다는 건 그 사람들 마음이고 자유로운 권리다. 내 만화에서 그런 코드를 읽었다는 건 그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걸 내 만화를 통해서 본 것뿐이라 생각하니까. 그리고 내가 봐도 대단하다 싶은 해석들이 댓글로 달리는 건 어쩌면 내 작품에 그런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겠지. 나는 <이끼>나 <야후>가 우화 같은 풍자극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난 내러티브보단 인물에 관심이 많다. 어떤 반전을 넣어서 깜짝쇼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기승전결의 감동보다는 이 인물을 따라가다가 혹하고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과정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사건을 배치하는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럴 정도로 야심 차게 머리를 돌릴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웃음)
류해국이 부정하려 하는 맞은 편의 인간들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있다. 류해국의 아버지나 이장이나, 사람의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메시아적 능력을 드러내곤 한다. 하지만 결국 류해국의 아버지는 이장에게 눌리고 이장은 류해국의 손에 처단된다. 권력적 관계가 결과적으론 인간에게 얼마나 허망한 게임인지를 인식시키려는 대목아닌가. 권능에 가까운 위력적인 카리스마를 드러내던 인간일지라도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치졸하게 힘을 발휘해왔는지를 드러낼 때 그 내면에 놓인 인간의 존재 자체가 미약하게 느껴진다.
별자리 배우면서 들었던 말 중에, 제 인생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 라는 말이 가장 와 닿았다. 나에겐 훌륭한 변명거리지. 나는 박탈감이 많은 사람인데 그 인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니까. 예를 들어서 이건희나 이재용이나, 그 정도의 부를 획득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의미부여하지 말라는 거지. 결과적으로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다 죽을 사람들이고. 물론 내가 추구하는 삶이 있고, 기왕에 사는 거라면 삶의 색채를 더 밝게 가져가는 게 맞겠지. 자기가 자기를 긁어가면서 사는 거보단 조금 무책임해 보일 정도로 밝고 긍정적으로 사는 게 낫겠더라. 처음에 류해국을 처단시키자고 결정했지만 나중에 류해국을 처단하지 않고 포지티브한 영역으로 끌어올리자고 마음 먹은 것도 그런 발전적 고민의 결과였던 거다.
그런데 그 별자리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나?
순정만화가 이황주 씨와 친했는데 그 분이 우연찮게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내게 소개해줬다. 그래서 김준범 씨와 같이 공부했지. 내 인생에서 굉장히 많은 전환점이 됐다고 할까?
별자리를 공부한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점지하는 것을 배우는 일인데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 늘진 않았나?
나는 내 자신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공부를 시작한 거라서 남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사실 대부분은 남에게 관심이 많더라.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한 사람들 대부분을 만나면 생일이 언제냐고 묻기도 하고 누군가에 대해 쉽게 단정하려 한다. 그건 상대에 대한 실례다.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보고 제 머릿속으로만 파악하는 거지. 그런데 상대방은 잘 모르잖아. 정보가 부딪히는 거지. 어떤 면에서 이건 폭력이다. 그래서 난 그런 게 싫다. 그 사람이 먼저 물어보기 전에는 그런 말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무엇을 깨닫게 됐나?
공부가 깊어지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명상이 없을 수 없다. 내가 이렇구나, 하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때도 많고, 탐욕스런 과거가 떠오르거나 낭비했던 시간들이 머리 속에 흘러가기도 한다. 물론 그런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 과정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낼 수도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더라. 사람들과 오해를 일으키고 그런 오해를 쌓아둔 부분들에 대해서도 왜 그런 문제에 좀 더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까, 조금 더 쉽게 관계를 맺어나가지 못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한 후회가 남는다.
스스로 대인 관계가 어려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얼마나 닫힌 성격이었냐 하면, 허영만 선생님 화실을 그만 두고 조운학 선생님 화실로 옮긴 다음에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도 그만 두고 나왔는데’ 막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 화실에서 선생님들이 화투를 치면서 새벽마다 라면 심부름을 시키곤 했는데 그게 싫어서 한번 화투판을 엎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조운학 선생님한테 저 새끼 안 자르면 우리가 나가겠다고 집단으로 난리가 났지. 그렇게 극단적이었다. 그 모든 과정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거다. 난 왜 그럴 때 부드럽게 대처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이끼>의 류해국이나 <야후>의 김현은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측면이 강하다. 어쩌면 그런 캐릭터 성향은 본인 스스로의 생각이 반영된 측면이라 봐도 될 거 같다.
그럴 거다. 자기 반성적인 면은 그래서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결국 스스로가 반영된 캐릭터들을 죽였거나 죽이려 했던 셈이다. 그건 어쩌면 스스로 느끼는 자신의 부정적 성격을 제거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런 캐릭터에게 반영된 게 아닐까.
음, 그렇다기 보단 나를 캐릭터에 투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다. 나는 행복했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반영된 이 캐릭터들도 이 사회에선 안 되겠구나, 라는 식으로 접근된 거다. 결국 이 사회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종자들이구나 싶었던 거지. 그러니 당연히 이 사회에서는 소멸이 돼야 맞는 거란 생각이 있었다. 나도 나름대로 한쪽으로 굉장히 오만한 구석이 있다. 내 속에 오만한 탑이 하나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아래 나머지는 폐허 같은 정서가 채워진 거고. 지금은 또 다르지만 나에게 남을 굉장히 잘 깔보는 태도가 있는 반면, 한편으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없는 편이다. 그런 성향이 캐릭터에 많이 투영되다 보니까 어차피 얘네들도 이 사회에 적응 못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사회와 융화할 수 있는 타협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끼>는 결과적으로 <야후>에 비해 그런 정서를 덜어낼 수 있는 작품이 됐다. 그만큼 스스로도 변한 게 아닐까.
예전에 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데 사소하게 차끼리 시비가 붙었던 걸 보게 됐다. 서로 차에서 내리더니 갑자기 싸우면서 “야, 쳐봐, 쳐봐!” 이러면서 길 한가운데서 뒤엉키더라. 그 길 옆에 많은 차가 있는데도. 나는 남의 눈이 창피해서라도 그렇게 못하거든.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공격적일 정도로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사는 구나 싶었다. 그게 내 눈엔 천박해 보이지 않는 거다. 나는 쪽팔려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한 때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깡이 놀랍더라. 아이 낳을 때도 그럴 수 있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소한 거라도 싸워서 쟁취하는 아버지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 고민도 꽤 했다. 그런데 나는 결코 그렇게 안 되더라.
<야후>의 김현이나 <이끼>의 류해국은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모종의 박탈감을 느낀다. 형태를 떠나 그 너비나 크기로서 중요한 존재감을 행사하던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때 인물들은 결핍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세상에 대한 분노나 다른 세계에 대한 공격성으로서 충만하려는 것만 같다.
사람이 그렇지 않나. 만약 내가 박탈됐다는 감정을 느끼게 할만큼의 실패나 상실을 맛보게 되면 그 반대영역에서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가 분명히 생길 거다. 특히 내가 그런 게 굉장히 강한 편이니까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그런 게 강하게 있는 것이겠지. 이번에 <이끼>의 류해국도 원래 그런 과정을 통해서 실패한 사람으로 설정하려 했다가 아까 말한 것처럼 바꾸게 된 거고. 나 역시도 그런 과정을 통해 변해간다. 엄한 데서 보상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 안에서 싸워야 한다. 상실감이 있으면 싸워서 얻어내든가, 아니면 깨끗하게 포기하든가. 지금 정권에 대한 박탈감을 지녔다 해도 다음 투표 때 두고 보자, 이럴 수 있다면 이건 지는 게 아니지 않나. 그런 상실감을 엄한 데서 채우거나 회피하지 말자는 거지. ‘세상 이렇게 됐으니 나도 모르겠다. 투표고 뭐고 그냥 여행이나 다니자.’ 이러지 말자는 거다. 자기가 뭔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구석에서 그걸 다시 챙기고 뚜렷하게 싸워야 한다.
류해국을 죽일까 했다지만 주변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결국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 주변의 요구가 어쩌면 시대적 요구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류해국은 참 힘들게 사는 사람이다. 덕분에 박 검사도 힘들어졌고. (웃음) 사실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모른 체할수록 자신의 안위는 편해진다. 하지만 자꾸 뭔가를 들춰보고 캐내고 찌르다 보니 마찰과 충돌이 생기고, 그래서 스스로 힘들어질 수 밖에 없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게 어려운 건 그런 피곤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불편한 정의보다도 편한 불의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어쩌면 그 주변 사람들의 요구가 그런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뤄진 게 아니었을까. 최소한 그런 가치에 대한 보상심리를 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결국 만화에서라도 보상을 해주고 싶어졌다. 위로 받아야 할 곳에서 위로를 받지 못하니까. 예를 들어 국가나 사회 시스템 안에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현실이니 각자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 만화가로서 내 만화를 보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갔을 텐데, ‘아고라’를 보면 종종 ‘벌써 죽었냐? 촛불집회 그거 그냥 유행이었냐?’ 이러면서 자괴감에 빠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실 아직 끝난 건 아니거든. 서로 힘을 실어주는 게 중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설사 우리가 원하는 정권으로 교체된다 해도 그 사람들이 또 우리를 다 대변해주는 건 아닐 거다. 그 사람들도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궁극적으로 현 정권이 목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하고 그걸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항시 환기해야 되고, 경계해야 되고, 서로 위로해줘야 한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라 해서 대기업의 비리가 정의롭게 파헤쳐진 적 있었나? 결국은 그 너머에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단지 이명박 대통령 욕하는 데서 끝날 문제가 아닌 거다. 단지 표면적으로 국민이 개입할 수 있는 노골적인 문제가 발견되니까 그렇게 거대한 시위적 형태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뿐이다. 거대 기업, 자본, 흔히 말하는 커튼 뒤의 사람들과의 싸움은 대를 이어서 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구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감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렇게 끝낼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화가로서 해줄 수 있는 위로를 해줬다 믿으니까.
<이끼>는 제도적인 방식에 대한 고민이 진전되고, 개인의 분노를 사회적 합의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야후>보다 더 나아간 작품이다. 어쨌든 <야후>나 <이끼>처럼 정치적 해석이 동원될만한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소재에 대한 관심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무거운 작품으로 인지도를 얻게 됐다는 점에서 부담은 없나?
그런 부담은 없다. 나는 기본적으론 창작자지, 사회 운동가는 아니니까.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다 해도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작품은 내가 할 수 없는 거다. 사회적인 발언을 하거나 그런 태도를 유지하려고도 노력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안에는 사회관찰자 입장으로서의 피가 많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관심이 많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생각이 나를 점유해버릴 수는 없지. 그걸 경계하기도 하고. <이끼>도 특별히 정치적으로 풀어보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아마 그런 목적을 노리고 시작한 작품은 <야후>가 유일했다. 다만 우연찮게 <이끼>를 독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엮다 보니까 나도 문득 ‘이렇게도 풀이가 가능하구나’라는 지점이 생겼다. 나는 굳이 그걸 거부하지 않는다.
<야후>에서 나오는 수경대의 비행용 바이크는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특별한 소재였던 것 같다. 그 자체의 이미지는 명백히 허구지만 막강한 공권력의 도구로서 상징적인 이미지를 구가한다. 요즘 세태에 너무 잘 어울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웃음) 그래서 오히려 요즘의 세태에 대한 기시감을 뒤늦게 느낀다. 비행용 바이크라는 날아다니는 기체를 생각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애초에 주인공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던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처음엔 오토바이 기동대를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지엽적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더라. 공간적인 제약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날아다니는 걸 생각했다. 특히 러시아워의 특성이 강한 서울의 특수성 때문에라도 지상은 어렵겠다 싶더라. 어쨌거나 주인공은 모든 사건의 중앙에 서 있어야 했고, 그만큼 기동력을 확보할만한 수단이 필요했던 거다. 그래서 헬기도 생각했는데 사실 헬기는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 비행체를 만들어야겠다 마음먹었지. 그리고 독재정권 하에서는 상상을 초월했던 일들이 많았으니까 ‘이쯤 있으면 어때?’란 생각도 하게 됐지.
사실 <야후>에서 수경대만 빼면 리얼한 시대극 만화가 된다. 그리고 그 수경대의 비행기체는 <야후>에서 만화적 상상력으로서 발휘된 가장 특별한 이미지다.
그것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다. 한번은 중앙대에서 연극영화과 교수를 하는 선배가 너무 안타까워하는 거다. 선배가 수업 중에 계속 이야기했단다. “너희 <야후>라는 만화 꼭 봐라. 우리 시대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아마 <야후> 6~7권 즈음에서 수경대 비행바이크가 나오기 시작했을 거다. 그런데 그걸 보고 ‘야, 이거 뭐니? 정말!’ 했다는 거다. 그래서 나에게 와서 “왜 갑자기 이게 나오는 거야. 오토바이로 해도 됐잖아. 왜 이걸 넣는 거니?” 이렇게 너무 안타까워하더라. (웃음) 그런데 나는 그걸 진짜 넣고 싶었거든. 그때만 해도 주인공이 서울 시내를 날아다니면서 벌이는 총격전을 보여주는 내용을 생각했으니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에 와서 ‘아싸!’싶었던 게 있다. <야후>최종 권에서 50미터 탄이라고 50미터 넘으면 뻥하고 터지는 총알이 나오는데 그 총알이 최근에 개발됐다 하더라. (웃음) 거리를 정해서 쏘면 엄폐물 너머에 있는 사람 머리 위에서 화약이 터져서 사상을 입히는 거다. 그 뉴스를 보면서 ‘아, 내 머리가 그렇게 뒤쳐지지 않았어.’ 싶었지. (웃음)
<야후>도 그렇지만 <이끼>에서도 분량이 늘어날수록 그림체의 변화가 보인다. 사실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런 문제에 봉착하는 거 같긴 하다. 심지어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슬램덩크>조차도 첫 단행본과 마지막 단행본의 그림체가 판이했으니까. (웃음) 대작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에서도 그런 변화가 종종 발견되곤 하는데 어쨌든 작가로서는 뒤늦게 꽤나 신경 쓰이는 부분일 거다. 사실 <이끼>의 댓글에서 종종 ‘작화붕괴’라는 말이 보이더라. 심지어 후기에 직접 그걸 거론하기도 했고. (웃음)
거기에 대해선 충분히 공감한다. (웃음) 사실 80회씩이나 되는 장편을 하다 보니 사람이 그 정도 그리다 보면 뭐가 늘어도 늘거든. 보다 능수능란해지면서 더 잘 그리게 되는 거지. 특히 나는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잘 그리지 못한다. 학창시절에 보면 만화를 잘 베껴서 그리는 애들 있지 않았나. 그런데 나는 그걸 잘 못해서 남의 그림을 베껴본 적은 별로 없다. 거의 내가 만들어서 그림을 그려봤지.
모사가 어렵단 말인가?
그렇다. 애들은 로보트 태권V, 마징가도 잘 그리는데 내가 그리면 뭔가 비율도 맞지 않아 보인다. 태권V라고 할만한 요소는 다 들어가 있는데 정작 결과는 태권V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캐릭터가 나온다. 그렇게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게 굉장히 힘들다. 그러다 보니까 류해국 같은 주인공은 제발 같은 그림으로 나오기 쉽게 개성을 분명히 담아보려 했다. 그 삐쭉하게 만든 코 같은 거. (웃음) 그런데 박 검사는 개성이 모호하다 보니까 매회마다 자꾸 얼굴이 바뀐다. 사실 이현세 선생님처럼 개성을 강하게 주면 작화붕괴가 일어날 일도 별로 없다. 그런데 내가 쓰는 그림체가 그런 경향을 더 심하게 가중시키는 탓도 있다. 모니터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모니터 하나에 실제 그림 사이즈보다 200%확대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얼굴을 그릴 때도 눈썹 하나만 모니터에 꽉 채우고 볼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내가 어디를 그리고 있는 건지 모니터만 봐서 잘 모를 때가 생긴다. 선 하나 그리고, 축소해서 다시 보고, 다시 키워서 또 그리고. 물론 이게 변명은 안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니까. (웃음)
인물들의 신체비율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웃음) 그런데 그런 불균형한 느낌이 후에 오묘한 특징으로 인식된다는 기분도 들더라. 뭔가 상당히 기괴하다고 할까. 물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웃음)
그런 어설픈 방식도 몇 회를 가면서 밀어붙이다 보면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독자들이 맞춰주더라. (웃음)
<이끼>엔 스크린적인 이미지가 많이 동원된다. 롱테이크가 연상되는 컷도 이어지고, 스크롤을 내리다 보면 핸드헬드적인 이미지가 연출되는 느낌도 들더라. 컷 자체에 기능적 공을 들인 흔적도 역력하지만 특별한 장면 연출에 공을 들인다는 인상도 받았다. 일반적인 출판 만화는 정보가 양 페이지로 한꺼번에 확 들어온다. 예측이 가능하지. 그런데 웹툰은 작가가 하기에 따라서 컴퓨터 모니터에 한 장면만 눈에 띌 수 있게 구성이 가능하고 계속 (마우스 휠을) 내리면서 봐야 하니까 잔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잔상을 이용하기 위해 반복컷도 많이 쓴다. 매번 다른 컷들로 이어지면 잔상이 남을 여지가 없어지니까 비슷한 표정의 컷이 반복돼야 보다 집중할 수 있다. 그렇게 가다가 예상치 못한 컷이 떡 하고 올라오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스크롤 만화의 장점이 그런 거다. 독자들의 점유력이 세진다고 해야 하나. 말한 대로 한 컷 한 컷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출판 만화엔 배경이 없는 컷도 무지하게 많으니까 주인공 얼굴로만 때워도 되는 컷도 있지만 웹툰에선 매 컷마다 컷 자체의 밀도를 유지시켜줘야 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기본적으로 배경도 계속 깔아줘야만 된다. 그런 전제로 가다 보니까 작업 자체가 힘들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건 리듬이다. 재미도 리듬에서 생기니까. 처음엔 그 스크롤만의 리듬을 못 잡아서 정말 힘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이게 정말 재미있나?’ (웃음) 의심도 들었다. 반복해서 볼수록 나는 익숙해져 버리니까 제3자들의 반응을 모르겠더라. 다행히 10회 정도 지나고 보니까 어느 정도 조절이 됐다.
방금 했던 말처럼 강도하 작가와 같은 기존의 만화가들은 테두리의 구획에 정확히 색의 경계가 나눠진다는 느낌인 반면 <이끼>의 색감은 회화처럼 번지는 느낌을 준다.
포토샵 툴 중에 직선을 그리는 툴이 있다. 사실 이걸로 대부분 라인을 따서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문하생들한테 작업을 시킬 때도 그걸 못 쓰게 한다. 다 손으로 따서 그리게 만든다. 비뚤어져도 상관없다고, 흔들려도 상관없으니까 손으로 그리라고 한다. 유리라면 모를까, 실제 건물벽을 흙으로 미장센하고 나서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직선은 아니거든.
매체의 변화에 따라 그림체에서도 변화가 생기는 게 느껴지지 않던가?
처음엔 인물을 그리는데 그 툴의 사이즈를 너무 두껍게 했다가 가늘게 했다가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작화붕괴니, 그림체가 다르니, 이런 얘기도 많이 나왔다. 그게 다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였던 거지. 후반부로 갈수록 체계가 잡히고 날 것 그대로의 느낌도 사라졌다. 사실 스크롤 만화가 영화와 비슷한 면이 많다. 매 컷마다 그림 사이즈를 다르게 하다 보면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최대한 컷은 유지한다. 그렇게 와이드 컷을 유지하다 특정장면에서만 변형을 시켜줘도 그게 별로 충격을 주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덕천이가 할머니 귀신을 보는 신에서도 비슷한 사이즈가 유지되다가 마지막 컷이 길어지니까 독자가 봤을 때 공간감이 확 넓어진다고 느껴져서 순간 놀랐을 거다. 갑자기 정보량이 많아진 거니까. 이장이 주인공 아버지 목을 잡고 훈계하는 신에서는 거의 이장 얼굴만 쭉 나온다. 독자가 마치 이장에게 목을 잡힌 듯한 느낌을 받게 하고 싶었다. 이장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독자한테 이장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댓글에서 “이번엔 날로 먹었네?”하기도 하고. (웃음) 이현세 선생님이 그리는 까치는 어떻게 그려도 까치다. 그런데 허영만 선생님 쪽 작가들은 그림이 조금만 변형돼도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나온다. 나도 한 사람의 얼굴을 계속 그린다는 게 부담이 크다. 특히 나같이 동일한 얼굴을 잘 못 그리는 작가는 카메라 각도만 바뀌어도 새로운 얼굴형이 막 나오거든. 그니까 그 클로즈업을 하는 게 내게 얼마나 큰 부담인데 그걸 날로 먹었다고 하니까 황당하긴 했다. (웃음) 하여튼 스크롤 만화는 그런 장점이 있다. 두 페이지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절대 못 가거든. 갈 수가 없다. 왜냐면 많은 정보가 한 눈에 들어와버리니까.
웹툰을 하면서 그 매체에 대한 적응 과정에서 애를 먹기도 했겠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실험적 방식을 구사했다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결말부로 갈수록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스크롤을 내리면서 보다 보면 속도감이 부여되는 신이 있다. 중심부에 비해 주변부 이미지를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아웃 포커싱되는 느낌의 컷이 많았다. 동시에 스크롤을 빠르게 내릴수록 프레임의 속도감이 연출되는 기분이 들더라. 기존의 웹툰과도 그런 점에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웹툰 작가들이 저보다 더 적극적으로 포토샵 툴을 쓴다. 솔직히 내가 그런 기능을 전에는 몰랐던 거지. (웃음) 하다 보니까 포토샵 기술이 늘어서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해서 알게 된 것들을 쓴 거였다. 아마 초반부부터 그 기능을 알았다면 초반부부터 적극적으로 썼을 거다. 다만 초반부는 좀 정적이었고, 후반부로 갈수록 속도감이 붙었으니까. 물론 후반부도 정적이지만 영화로 치자면 풍경 자체는 정적인데 왠지 드럼 소리가 사운드로 깔리는 느낌에 가까웠다고 할까. 그리고 만화에는 사운드가 없으니까 이미지로 그런 느낌을 좀 주려고 했던 건 있었다. 굳이 내가 실험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끼> 단행본도 발간되고 있는데 애초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 작업이 이뤄진 것이라면 지금의 <이끼>와 같은 형태는 불가능했을 거다.
머릿속에 지면을 염두에 두고서 책으로 나올 거니까 책도 고려해야 돼. 이렇게 작업은 못 하겠더라. 왜냐면 웹툰에 적응하고 웹툰의 장점을 흡수하는 것도 버겁고 힘드니까 출판까지 고려해서 작업한다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뭔가 이렇게 보여줘야지, 이런 건 전혀 없었다. 특히 출판만화를 하다 보면 문하생 때 배워왔던 관성대로 그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법도 쉽게 가고. 그러니까 만약 웹툰에서 실험적이라고 느낀 것이 있다면 그건 점점 늘어간다는 거? ‘아, 이런 것도 있었네.’ 이런 발견을 느끼면서 ‘이런 것도 넣어봐야지. 이것도 적용해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컬러링 작업이 있고, 없고, 에 따라서 작업도 천차만별일 텐데 웹툰에 컬러가 들어간다는 것도 과거와 작업적인 차이를 느끼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발생한 시도적 차이도 있었을 테고.
진짜 힘들지. 출판 만화할 때는 먹만 필요했다. 흑백만화다 보니까 제일 센 표현이라면 먹칠이었다. 그런데 컬러 만화이다 보니까 어디에 포인트를 둬야 할지 모르겠더라. 다 자기 색을 갖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색을 적극적으로 쓰기 어렵다 보니까 작정한 게 차라리 전체적으로 톤을 다운시켜버리자는 거였다. 아예 무채색 계열로 보이게끔 만들어버리고 대신 빛으로 음영을 묘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통일감도 주고, 음영이 생기면 좀 더 인상이 강렬해지는 게 있잖아. 색을 쓴다는 기분 말고 빛을 묘사한다는 기분으로 가자고 생각했다. 색을 쓰는 건 기본적으로 작업시간도 더 걸릴뿐더러 색에 대한 계획도 갖고 가야 하니까 힘들거든.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신이 생각나는데 류해국 아버지가 기도원에서 어머니를 데리고 나가는 복도 신에서 시체들을 음영으로 표현했던 장면이 기억난다. 차라리 구체적인 실물의 모습을 어둠으로 덮어서 실루엣만 감지시켰기 때문에 살벌한 기운 자체가 보다 증폭되는 것 같더라.
아무리 어둡게 해도 노트북 모니터로 보면 웬만하면 다 나온다. 그래서 최대한 노트북에서조차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게끔 하려고 그렇게 어둡게 해놨는데 누가 그 조잡하게 펜터치 돼있는 걸 포토샵으로 완전 밝게 만들어서 댓글에 올려놨더라. (웃음) 그때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 미안한 게 또 그 밑에 사람들이 댓글로 욕을 써놨더라. 알아는 볼 수 있게 해놔야 될 거 아냐, 하면서 욕을 써놓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여튼 그렇게 어둡게 된 장면도 웹툰에선 적극적으로 쓸 수 있다. 출판만화에서는 그렇게 해놓으면 인쇄가 떡이 져버린다. 스크릴 톤을 여러 번 붙여놓게 되면 미세한 알갱이들이 인쇄하면서 다 뭉개져 버려서 효과가 잘 살지 않는다. 그런데 확실히 컬러만화라서 채도 만으로도 색을 뭉개버릴 수 있다는 건 좋았다.
<이끼>는 항상 도입부에 어떤 중요한 풍경을 프롤로그처럼 전시한 뒤, 타이틀 컷을 배치하고 본격적인 작품을 밀고 나가는 형식도 인상적이었다. 키를 쥐고 있는 공간이나 인물의 이미지를 먼저 전시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적인 컷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배경묘사에 공을 들이고 빛과 음영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혹시 만화보단 회화적인 부분에서 영향력을 얻은 바는 없는지 궁금하더라.
컬러만화를 하게 되니까 회화를 많이 보게 됐다. 최근의 모던회화 말고 클래식한 거 있지 않나. 네덜란드 풍경화 같은 걸 많이 봤지.
사실주의적인 고전회화 말인가?
그렇다. 풍경을 많이 담았던 고전주의 회화 같은 거. 특히 <이끼>에서 구름 사이로 달빛 묘사되는 장면 같은 건 네이버 블로그에서 참고한 거다. 회화만 쫙 올려놓는 블로거들 있잖아. 달빛이 정말 대낮처럼 환한 밤을 그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밝은데 어떻게 밤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계속 살펴보게 됐다. 그러면 구름은 이렇게 묘사하고, 이건 이렇게 묘사하고, 이런 걸 계속 분석해보고 내 작품에 적용해보기도 하는 거지. 강도하 같은 경우, 나무 숲을 그릴 때 윤곽을 잡아서 색을 넣지만 나는 나뭇잎을 다 그린다. 터치가 많이 들어간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사실 강도하처럼 그리는 게 애니메이션적인 기법인데 사실 나는 애니메이션 같은 그림체를 싫어한다. 어쩌면 내가 수채화 전공의 입시미술로 그림을 배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색에 대한 직관력이 강한 편이다. 그런 경험적 기반이 있어서인지 회화작품들을 참고한 게 도움이 됐다.
원래 미대를 진학하려고 했다던데.
실패했지. 보기 좋게 떨어졌다. (웃음)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품은 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다. 이미 만화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때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 당시 만화 전공 대학이 없으니까 당연히 미대라고 생각하게 된 거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자기가 대학을 가지 않을 거란 설정은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미술을 하고 싶어서라기 보단 만화가로서의 진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미대를 선택했던 건가?
비슷하다. 만화는 너무 좋았지만 만화가에 대한 자각은 크지 않았고, 만약 직업이라도 하나 갖는다면 화가가 돼야 하지 않을까 했던 거지. (웃음) 그렇게 ‘미대 갈까?’했는데 막상 대학에 떨어졌고, 우리 집 경제상황이 나를 재수시켜서 대학에 보낼 수가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화가가 돼야겠다’가 된 거지. 학교 다닐 때도 진로 상담을 받지 않나. 난 항상 ‘그걸 왜 하지?’라고 생각했다. ‘다들 자기가 생각하는 진로가 없나?’ 생각했지. (웃음)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이 너무 뚜렷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해서 왜 고민하는지 정말 몰랐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면 몰라도 과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게 정말 이해가 안 갔거든. ‘화학을 좋아한다는 애가 경영학과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웃음)
결국 미대 진학이 좌초되고 만화가를 지망하게 됐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히 고전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항시 어려웠지. (웃음)
허영만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명확한 진로가 잡힌 게 아니었을까.
만화 그리러 서울로 올라온 것부터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루트를 모르니까 만화학원을 가게 된 거지. 그런데 그 만화학원 원장님이 만화가 협회에서 허영만 선생님과 싸운 적이 있어서 전화번호조차 가르쳐주지 않더라. (웃음) 결국 나 혼자 앞길을 찾아야 했던 거지. (웃음) 한때 아파트 벤치에서 자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벤치 생활하던 멤버 형이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들을 만나게 돼서 연락처를 받아와서 나한테 가르쳐주더라. 결국 허영만 선생님이 계시는 은마 아파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찮게 알게 됐고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그렇게 객지 생활을 하면서 노숙도 했던 경험이 <야후>에서 김현에게 반영됐나 보다.
(웃음)
아무래도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사상을 작품에 투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거다. 아까 말한 아버지에 관한 심상도 그런 부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테고. 결국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주목하는 부분을 작품의 주제로 삼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당신은 사람의 얼굴에 대해서 특별한 감상을 얻는 게 아닐까 싶더라. <야후>의 단행본 표지에 그려진 건 항상 얼굴이었는데, 이번에 <이끼>의 단행본 표지 역시 얼굴이더라.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묘사하면서 내면적 변화에 대한 단서를 제시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는 말도 그런 의미와 연동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만큼 사람을 통해 작품에 대한 모티브나 소스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궁금하다.
남에 대한 관찰보다도, 나 스스로에 대한 관찰을 오랜 시간 동안 해왔다. 나에겐 상실이나 결핍의 정서가 굉장히 많다. 어릴 때 미술대회에서 받아온 상장을 벽에 도배하다시피 붙여놨었다. 그런데 남의 집에 가보고 나서 상장은 액자에다 걸어놓는구나, 처음 알았지. (웃음) 어쨌든 집이 망해서 이사를 가는데 우리 집을 사러 온 사람이 벽 안에 곰팡이가 피었는지 본다면서 그 벽지를 다 찢더라. 그래서 상장이 남아있는 게 한 장도 없다. 내 상장이 찢어지는 걸 내 눈을 목격하기도 했고. 좀 더 머리가 커지면서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린다는데, 상도 많이 받는데, 왜 내겐 항상 그 다음이 없지?’ 싶더라. 열매가 맺어야 되는데 그 다음이 없는 거다. 상실감 같은 거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교실 뒤 칠판의 절반을 내주셔서 분필로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고, 숙제 검사조차도 그림 연습으로 대체해줄 정도로 밖에서는 인정을 받았는데 정작 집에서는 왜 인정을 못 받을까, 이런 생각들. 그리고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와도 아버지는 거의 신경도 안 썼다. 그 까짓 거, 이런 식이었지. 그래 놓고 본인이 다 망한 뒤에 자신 없을 땐 “너 대회 나가서 상 받았냐?”고 얄밉게 물어보고, 치사하게 이제 와서. 스스로 돌아봤을 때 내 인생이 안타까웠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짠하고, 그런 느낌들이 굉장히 많았지. ‘나는 왜 이렇게 불쌍하지?’란 생각을 자주 품었다.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 보니까 별자리 공부도 하게 된 거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
그래서 결국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었나?
그냥 난 또 다른 걸 무언가를 위해서 결핍이 돼있구나, 라는 거. 다른 뭔가를 강화시키려다 보니까 이런 결핍이 된 거구나, 라고 인정하게 됐다. 다들 생김새가 다르게 태어나듯이 각자 다른 미션을 갖고 태어난다고 할까. 그 미션을 하기 위해서 어떤 옵션들을 갖고 태어나는데 강화된 옵션이 있는 반면, 결핍된 옵션이 있는 셈이지. 마치 야구팀 운영을 시뮬레이션하는 구단주 게임을 예로 들면, 자금이 한정돼 있지 않나. 선동렬 한 명 산다면 나머지 선수는 리틀 야구단에서 사와야 한다. 그러니까 표준 퀄리티를 올릴 것이냐, 아니면 주력 선수 몇 명을 올리고 나머지를 버릴 것이냐,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누구나 똑같이 100을 갖고 있다면 어떤 사람은 90이 한 면에 몰려있는 거다. 어떤 회장이라는 사람은 전생에 조상이 나라를 구해서 그게 돈 버는 쪽으로 갔나 싶기도 하고. (웃음) 근데 나는 그게 아닌 거지. 손으로 하는 재주가 많이 강화된 사람이더라. 그런데 별자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이런 결핍에 대한 포지티브(positive)한 보상이 항상 있다는 거다. 물론 네거티브(negative)한 보상도 있고. 네거티브는 사람을 파멸로 몰 수도 있지만 포지티브는 그 결핍으로 되레 남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세상을 이해하는 창구가 된다고 할까. 8년간 별자리 공부하면서 남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폭도 넓어졌다. 덕분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 라는 선이 뚜렷해졌지. 얼토당토않은 걸 탐낼 필요는 없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잃거나 기회를 빼앗기지 말고 확실히 하자. 사실 이 회사에도 그런 각성이 없었다면 굳이 참여하지 않았을 거다. 별자리를 공부하고 나니까 내 얼굴 앞에 거울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거기서 내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 남을 뿐이지, 남이 뭘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그린 인물들의 얼굴이 스스로에 대한 다양한 자화상이라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혹시 요즘 주시하고 있는 현상이나 사건이 있나?
최근 우리나라 상황이 너무 빤하게 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최근에 ‘수유 너머’라는 곳을 통해 인문학 공부를 조금씩 해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조금 더 진지하게 해봐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왜냐면 8년 동안 배운 별자리를 다 소진한 상태라 이걸 다시 끌어와서 국물을 우려낼 생각은 들지 않는다. 창작자가 스스로 처참해질 때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책을 읽을 때다. 문화를 향유하는 건 생활이어야 하고 그렇게 우러나와야 진짜 좋은 내용이 나오는 건데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남의 책을 뒤적이고 남의 영화를 살펴보고, 그런 건 안타까운 일이다. 수면 위로 뭔가 떠올리기 전에 그 수면 아래에서의 활동이 좀 바쁘게 필요하겠더라.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온라인 강의도 많더라. 문화강의도 많고. 그렇게 뭔가 배워보려 한다.
강단에도 서고 있다고도 들었는데.
세종대학교에서 하고 있다.
강단에 서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전한다는 건 어떤가?
강단에 서는 친구들은 막상 자기가 학생들한테 에너지를 얻어온다고 말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그 아이들의 학비가 너무 아까워서 어떻게든 그 학비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싶다. 수업 준비를 해보니까 6~7시간 걸리는데 마감해가면서 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그래도 어떻게든 그 보상을 해주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내가 얻어오긴 뭘 얻어와. (웃음) 그 애들이 수업 끝났을 때 ‘아, 오늘 뭐 좀 들었네.’ 이런 느낌이 들 정도가 돼야겠다 싶었다. 최근에 진중권 씨가 쓴 ‘미디어 아트’란 책을 읽으면서 ‘아트 앤 스터디’라는 문화교양 웹사이트에 매달 돈 십만 원씩 내고 유료강의도 들었다. 내가 애들한테 항상 말하는 게 있다. 웹툰을 고민하지 말고 디지털 만화를 고민해라. 자신을 만화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창작자라고 생각해라. 만화도 창작의 한 범위니까. 우리 시대에 너무 흔해져서 가치 없는 말이 많다. 정의, 도덕, 교양. 특히 교양이란 말은 원래 의미에 비해 너무 천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쉽게 쓰이지. 하지만 창작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교양이다. 창작자는 교양인이 돼야 한다. 학생들에게도 계속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발표하게 만들어서 그 애들을 발가벗기려 한다.
수업 방식이 궁금하다.
내가 지금 단편만화를 가르치는데 단편 만화 기획서를 써오라 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한 명씩 발표시킨다. 이걸 왜 기획했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설득해보라 한다. 핵심적인 건 이거다. 말로 하지 못한 관념은 쉽게 지워지는 거니까 글로 써보고 말로 표현해놔야 된다. 그리고 말 못하면서 글을 잘 쓰는 사람 없다. 글을 잘 쓰려면 말도 잘 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앞뒤 분명한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대신 말은 어눌해도 상관없다. 대신 앞뒤를 맞춰라. 그래서 여기 앉아있는 네 동료들이 네 작품을 사가야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입장에서 네 생각을 최대한 매력 있게 설명해라. 그렇게 먼저 기획서로 전부 다 심사한다. 그 다음에 콘티를 짜오게 한다. 애초에 기획했던 바가 콘티에서 어떤 리듬으로 표현됐는지 프로젝션으로 쏴서 이 장면은 어떻게 그릴 거고, 이런 의도로 이렇게 했다는 걸 설명하게 한다. 그리고 이걸 그리기 위해 어떤 사진자료를 취재했는지 그 과정도 검토한다. 최종적으로 그 과정에 걸맞은 결과가 나왔는지에 점수를 주는 거다. 결국 그 과정에서 배운 성취감이 남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만화가로서의 기능력보다 생활력을 학습하는 교육방식처럼 보인다.
그렇지. 출판사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연재를 할 수 없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면 설득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그 사람들이 본인의 어떤 능력을 알고 같이 일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협업이 가능할까라는 거다. 최소한 자신의 매력은 자신의 입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젠 한 분야를 이끄는 선배로서 후배에게 조언을 던지는 입장이 된 것 같다.
느닷없이 그렇게 됐지. 뽑아낸 작품도 별로 없는데 중견이 돼버렸으니까. (웃음) 내가 허영만 선생님 화실에 들어갔을 때 허영만 선생님 연세가 지금 내 나이였다. 그때 이미 허영만 선생님은 전업작가로 활동하면서 세상에 작가로서 이름을 많이 알렸다. 이미 한 100타이틀 가까이 그린 작가였으니까. 나는 아직 20타이틀도 꼽지 못한다. 만화를 꾸준히 본 독자라면 모를까.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지. 그래서 책임감도 이 정도밖에 안 된다.
사실 에피소드 형태의 단막극으로 진행되는 웹툰이 서사적 호흡을 지닌 작품들에 비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서사적 연재로 이뤄진 웹툰을 주목 받게 만든 시초는 강풀 작가가 아니었나 싶다. 서사적 형태의 웹툰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독자의 주목을 얻게 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끼>도 그런 흐름의 중심에 놓인 작품이다. 사실 이전까지 지면 출판 작가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서사가 없는 작품을 해볼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서사적 형태가 작품의 기본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다. 개그물을 한다 해도 서사가 있는 개그물을 하고 싶지. <아색기가>같은 아이디어는 내 머리 속에 있질 않다. 사실 흥미도 별로 없고. 물론 (양)영순이 작품을 재미있게 본다. 단지 내가 그걸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사실 웹툰으로 들어올 때 그런 생각은 했다. 원래 웹툰은 유머 사이트 게시판을 이용해서 만화적인 패러디물을 올리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거다. 그런데 기성작가로서 그런 후배들이 만들어놓은 웹툰이란 판에 들어오면서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들어온다는 게 실제로 굉장한 부담이 됐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될까 고민도 됐고.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는 걸 보여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더라. 나도 후배들이 했던 것처럼 간결하게 치고 나가는 형식을 따라 한다는 건 너무 치사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역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로 가야겠구나 싶었다. 강풀이나 강도하가 몇 년에 걸쳐서 서사적 만화 폼을 웹툰에 안착시켰고 나는 다행히 서사라는 게 웹툰에서 인정받는 시기에 여기 들어와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서사적 폼으로 웹툰에 들어오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만큼 그 역할을 똑바로 맡고 싶었다.
같은 사무실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 작가는 웹툰이라는 매체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얻게 된 대표적인 웹툰 작가다. 반대로 당신은 기성 매체 작가로서 매체의 변화에 편입된 작가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새로운 매체에서 적응할 수 있느냐에 대한 갈등이나 고민이 많았을 거 같다.
굉장히 부끄러웠지. 그리고 못하면 어쩌나 싶었고. 예를 들어서 가령 댓글 개수조차도 액면으로 쫙 나오지 않나. 이게 개그작가보다 못 나오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웃음) 물론 작품의 경종을 극화냐, 개그냐, 로 나눌 수 없지만 좀 더 둔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내 작품이 사람들의 함의도 못 잡아내면 처참할 것 같았다. 특히 경력이 20년이나 됐다는 사람이 기존의 웹툰 작가들만큼의 흥미도 못 끌어내고, 싸구려처럼 말하자면 낚시 정도도 못하면 곤란한 거 아닌가 싶더라. 엄청난 돈을 받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웹툰에서 작업하던 후배들보단 많은 돈을 받으니까 그만큼 돈 값을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드는 거다. 그래서 연재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이끼>를 끝내고 나서는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으로 들어갔지. 이것보단 나아야 할 텐데 말이다. 그래서 강풀 보면 신기해죽겠다. 어떻게 연달아서 저렇게 뻥뻥 터뜨릴까. (웃음) 나는 한 3년 헤매다가 이제 이야기 하나 나왔는데, 신기하지.
결과적으로 <이끼>는 웹툰 역사상 상당히 중요한 작품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도 놀랄 만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사실 내가 계속 만나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같은 회사에 소속된 강풀, 양영순도 사실 거의 안 만난다. 강도하, 이충호 씨, 아니면 자주 가는 술집 사장님, 이런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현실감이 없는 거지. 그래서 처음에는 댓글만 놓고 고민하다 보니까 댓글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가 생기더라. 누가 댓글로 이슈 하나 던져놓으면 그 의견에 시비 걸기 위해서 내 만화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댓글을 다는 거다. 그럼 결국 만화하곤 정말 상관없는 양상이 펼쳐진다. 그런 판단이 드니까 댓글이 수백 개, 천 개 달려도 자기들끼리 노느라고 다는 건가 싶어지는 거다. (웃음) 그리고 조회수로 고료를 판단하게 되는데 사실 다음은 네이버에 비해 조회수가 3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냥 ‘난 아직 멀었네?’라는 생각만 들고. (웃음) 그래서 또렷하게 내가 뭘 이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라. 사실 웹툰하면서 영화 계약한 후배들이 많다. 다만 강풀 말고는 이슈가 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나는 이슈 메이커라고 할만한 강우석 감독님이 연출을 맡으면서 그 덕을 꽤 본거지. 솔직히 객관적으로 상황을 봤을 때 과연 <이끼>가 반응이 있나 싶더라. 길 다니면서 누구한테 사인을 해줄 일도 없었고, 동네 아파트에서 동대표 나와라, 이러면 나가고. (웃음) 네이버 ‘한국인’에 실리고 이랬을 때 요즘 내가 조금 이슈가 되나 보다, 이 정도지. 지속적으로 이슈가 된 적은 없기 때문에 그런 거 같다. 그런데 (강)풀이는 만나보면 확실히 그런 태도가 있다. 지금 웹툰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그만큼 자기가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어떤 기준점이 될 수 있으니까, 항상 그걸 각성하고 산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생각은 거의 없다. 그냥 풀이가 “형, 이렇게 해보죠.” 그러면 “그래.”하고, 내가 풀이 등을 타고 간다는 생각이지. 아직은 내 위치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실감이 안 난다. 어차피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정지우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렛츠 필름 김순호 대표님께서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칭찬 말고 의미부여를 해주시니까 너무 송구스럽고 감사했다. 그때 내가 감동을 받아서 허투루 하지 말고 신중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허영만 작가님도 다음에서 <꼴>을 연재했다. 현재 출판만화의 소비가 원활하지 않다 보니 그 대안으로 웹툰이 부상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기존 출판만화에서 중시했던 만화의 형식에서 벗어난 작품들도 자주 눈에 띈다. 어떤 면에서는 진화라 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퇴보라고 볼 수 있는 지점이 밟히기도 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돋보이지만 기본적인 기능적 자질이 부족한 작품들도 적잖게 눈에 띈다. 그런 과정에서 종종 기성 작가들과 웹툰 작가들 사이의 신경전도 없지 않은 거 같다. 매체의 변화 속에서 겪는 시행착오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분명 고민이 있지. 나는 만화가들이 너무 형식을 따진다고 생각한다. 방금 말한 것처럼 출판만화의 어법을 왜 고정적인 방식이라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의심이 든다. 나도 거기서 성장한 사람이지만 만화에 어떤 특정한 형식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웹툰이 가진 좋은 장점이 많다. 출판만화가 포기했던 장르의 다양성이라던가, 그 동안 출판만화가 도외시했던 독자층의 흡수, 이런 것들은 웹툰이 가진 큰 장점이라고 본다. 대신 출판만화는 신인작가가 등용해도 일정 수준의 퀄리티를 담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쩌면 그 신인작가도 출판만화의 관습에 적용됐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다. 자기의 개성을 보이기 보단 편집장 한 사람의 안목을 통과해야 연재할 수 있는 곳이 출판만화니까. 그런 점에 비해서 웹툰은 순기능이 많다. 기본적으로 웹툰이 아닌 디지털 만화를 염두에 둔다면 모바일이나 이북(e-book)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시 어마어마한 환경변화가 이뤄질 거다. 이랬을 때 언제까지 출판만화의 폼에 대해 고정적 확신을 주장해야 하겠나. 물론 그쪽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그쪽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지금 출판만화 쪽에 있는 사람들은 웹툰이 출판만화에 대한 관심도를 흡수해버린다는 이유로 공격 아닌 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만화의 질적인 수준을 저하시켜버렸다나. 그런데 본격적으로 웹툰이 활성화되고 작가들이 먹고 살만큼의 고료를 받기 시작한 건 불과 5년 안팎이다. 그런데 출판만화는 3~40년이나 된 분야다. 자기들이 자신들의 어법을 고민하면서 왜 우리가 이렇게 밀리게 됐는지를 고민해야지, 이제 파이가 좀 넓어진 상황에서 그 넓어진 파이에 대해 돌 던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다. 그건 자멸하자는 뜻이지. 스스로 내적인 고민을 하고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변해야 하는 거고. 예를 들어서 출판만화를 책으로만 파는 게 한계가 있다면 이게 디지털 컨텐츠로 전환됐을 때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어떤 고민도 없으면서 여전히 일본만화만 수입해오고, 그러면서 수입구조만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가서는 곤란하다는 거다. 기본적으로 작가들의 마인드에 너무 많은 한계를 지어준다. 출판만화의 형식이 정확한 폼인 것처럼 강요한다던가. 그런 게 나는 못마땅하다.
안에서 느끼는 갈등이 생각보다 깊나 보다.
기성매체가 웹툰을 공격하는 논리는 딱 그거다. 결국 웹툰은 수입구조가 없으니까 허상 아니냐. 그런데 사실 이 인터넷 IT 비즈니스라는 게 끊임없이 개발되는 중이고 계속적으로 도구가 개발되고 모델이 나오면서 또 새로운 시장이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웹툰 시장만 보고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허수다,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다. 정작 고민해본 적도 없으면서 지금 포털의 웹 구조만 보고 단정지어버리는 건 굉장히 오만한 판단이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어제와 오늘이 다른 IT환경에서 많은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하고 정착시키려 노력하는데 강 건너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허수네, 뭐네,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안 된다. 그건 굉장히 비겁한 행위일뿐더러 나라 전체의 산업적인 측면을 봐도 그건 아닌 거다. 성공을 기원해줘야지. 그렇게 힘을 합쳐서 자기네 컨텐츠도 잘 되게끔 가야지. 웹툰이 망한다고 자기들이 잘 될 거란 보장도 없으면서 왜 거기에 돌을 던지는지 모르겠다. 제발 앉아있는 사람끼리 뛰어가는 사람 다리 걸지 말고, 같이 뛰든가, 손을 내밀든가 하자는 거다.
류해국처럼 뛰어들어서 뭔가를 헤집어 놓을만한 발언이다. (웃음) 만화가로서의 기능적 창작력을 넘어 산업적인 생계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단순하게 만화 그리는 게 아니라 창작을 한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자기만의 형식으로 말을 대신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대체되지 않는 작가가 되야 한다. 자기의 시효가 끝났을 때는 독자 앞에서 사라져도 되지만 나를 대체하는 누구 때문에 내가 밀려나는 상황은 없어야지. 적어도 몰개성적인 작가는 되지 말자고 생각한다. 각자 자신만의 작가적 역량을 지켜야 하고 그러려면 창작자라는 분명한 자기 태도가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학생들한테도 말한다. “나는 극화 만화가가 꿈이야, 이렇게 단정하지 마라. 말이 다 빚이 된다. 너희가 경험할 게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지 너희는 아직 모른다.” 예전에 허영만 선생님 문하생 시절에 같은 화실에 있던 사람들이 만화잡지를 보면서 “이건 너무 일본풍이야. 이건 너무 상업적이야.” 그랬는데 그 말들이 결국 자기 스스로한테 다 빚이 돼서 돌아온다. 괜히 자기가 말한 상업적인 만화 그려놓고서 우리끼리 만나면 불필요한 죄책감에 빠져있지. “사실 나 요번에 상업적인 거 좀 했어.” 이러면서. 그게 뭔 상관이냐. 우리가 배운 게 상업만화인데. 그러니까 말을 조심해야 한다. (웃음)
어쨌든 <이끼>의 연재를 끝내고 나서 남는 단상도 많았을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까 머리나 속이 팽창돼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사사로운 동기나 아이템을 캐치해서 작품을 시작해야 하는데 지금은 내가 너무 부풀려진 상태다. 왠지 대부분의 생각이 딱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원상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지. 부담감이라면 부담감이랄 수 있고. 설경구 씨도 <역도산>으로 살 찌운 상태에서 바로 뭘 할 수가 없었을 거다. 빨리 본래 상태로 축소시켜서 옛날의 예민했던 나로 다시 돌아가고 반짝반짝한 생각을 돌릴 수 있게끔 만들어야겠다. 물론 <이끼>는 내게 너무 고마운 작품이다. 다만 빨리 이 사이즈를 줄이는데 집중하려 하고 있다. 호흡조절을 해줘야지.
이제 댓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후련하겠지. (웃음)
댓글에 괜히 욕 써놨다가 다른 팬들에게 융단폭격 맞을까 봐 그런지 메일로도 욕을 하더라. (웃음) 댓글로 하면 몇 줄로 끝날 수 있는 말이 메일로 오니까 더 강렬하게 오는 거지. 그냥 멋도 모르고 클릭해서 열어봤다가, 어이구. (웃음)
지면 연재를 병행했는데 앞으로 또 웹툰에서 연재를 계획하는 바가 있나?
원래는 있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이끼>때문에 그것들이 지금은 시시해져 버렸지. (웃음) 처음에 생각할 때는 그 아이템들에 대해서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막 깜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내가 이걸 왜 재미있다고 생각했을까. 이런 상황이지.
스스로에게도 <이끼>가 어떤 변화를 남겼다고 생각하나?
포지티브의 확신, 긍정의 힘을 느꼈다. 연재가 끝나고 댓글을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줬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긍정으로 끝났다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들이 많이 위로를 받았다는 걸 분명히 느꼈고, 그게 가장 큰 성과였나 보다. 나에게는 그 동안 전혀 없었던 것이니까.
헤비메탈의 하위장르 중 하나인 데쓰메탈은 죽음과 악마 숭상의 뉘앙스를 연출하는 가사와 퍼포먼스라는 외부적 형태가 특성으로 정착된 장르다. 흉악한 가사와 극악한 무대 매너를 통해 광적인 팬덤을 형성한 세기말적인 장르는 그 폭력성을 방출하는 의식적 행위를 통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발생시킨다. 메탈 음악이 메인스트림을 석권한 핀란드나 동유럽의 국가 중 실질적으로 죽음을 추앙하는 데쓰메탈 그룹이 존재한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뮤지션 대부분은 무대와 일상이 분리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디트로이트 메탈시티>(이하, <DMC>)는 그런 현실성에 착안한 설정을 허구적 캐릭터와 스토리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특히 장르적 구별 없이 음악산업의 인프라가 전방위적으로 구축된 일본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일본에서 이를 소재로 둔 만화가 등장했다는 것도 딱히 놀랍지 않다.
스웨디쉬 팝(Swedish pop)과 같은, 자칭 스위트 팝 가수를 꿈꾸는 네기시 소이치(마츠야마 켄이치)는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도쿄에서 가수가 되기 위해 기획사를 찾아간다. 그러나 스위트 팝이 아닌 데쓰메탈 밴드 ‘디트로이트 메탈시티(DMC)’에서 극렬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악명을 떨치는 ‘크라우저 2세’로 활동하며 신분을 속이며 살아간다. 지극히 소심하고 내성적인 네기시 소이치가 짙은 분장으로 제 얼굴을 감추고 무대에 올라 크라우저 2세로서 과감한 퍼포먼스를 펼쳐낸다는 설정은 욕망과 현실이 괴리된 캐릭터의 부조리를 유머로 치환한다. 특히 와카스키 키미노리의 동명 원작만화의 에피소드를 충실히 영화적 상황으로 반영한 <DMC>는 유치하듯 쾌활하고 황당하듯 기발하다. 물론 때때로 지나치게 진지한 척을 하며 간지러운 페이소스를 주입하는 광경이 발견되기도 하나 전반적으로 엉뚱하게 전개되는 상황의 위트가 독창적인 매력분포도를 이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마츠야마 켄이치다. <데스노트>영화판에서도 L을 연기했던 전력이 있는 마츠야마 켄이치는 <DMC>에서도 소심한 네기시 소이치와 과격한 크라우저 2세를 오가며 만화캐릭터 전문배우라 불려도 좋을 정도로 탁월하게 캐릭터를 소화했다. 만화적인 독창성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영화적 사실감을 만족시킨다. 자칫 잘못하면 코스프레 수준의 유치함으로 몰락하기 좋은 캐릭터를 영화적 형태로 구현한다. 결국 <DMC>의 특이성을 보장하는 캐릭터가 성공적인 표현력을 갖춘 덕분에 영화적 설정 역시 힘을 얻는다. 또한 영화는 원작의 주요한 에피소드를 영화화에 고스란히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서사의 변주를 통해 영화적 가능성을 그려나간다.
물론 <DMC>는 유치한 슬랩스틱 개그처럼 가볍고 산만한 웃음을 주는 영화다. 여기서 가볍고 산만한 웃음은 깊이에 대한 지적이라기 보단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다. 대단한 교훈에 도달하거나 걸출한 각본으로 승부하는 영화라기보단 재기발랄한 캐릭터와 황당한 소동극으로 무장한 개그콘서트나 다름없다. 원작과 달리 과하게 변주된 드라마가 종종 간지럽지만. 흉폭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과격한 퍼포먼스를 구사하는 크라우저 2세와 순진하지만 소심한 우엉남 네기시 소이치 사이를 오가는 에피소드는 효과적인 웃음을 제공한다.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적 형태의 드라마로 변주된 영화는 매니악한 소재를 보편적인 드라마로 엮어낸 원작만큼이나 즐겁다. 취향의 제한이 엄격하지 않다면 음악영화로서의 묘미도 만끽할 가능성이 크다.
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볼’을 영화화한다니! 뒷감당을 생각한다면 분명 용기가 가상한 기획이다. <드래곤볼 에볼루션>(이하, <드래곤볼>)은 원작 팬들의 심금을 울릴만한 배반의 향연으로 이뤄졌다. 원작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어떤 독자라면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손오공(저스틴 채트윈)의 모습만으로도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나의 드래곤볼은 이렇지 않아, 라며 스크린을 향해 ‘에네르기파’라도 쏘고 싶은 애증이 한데 모여 ‘원기옥’을 띄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어떤 면에서는 영리한 선택이다. ‘드래곤볼’의 본래 자태를 있는 그대로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집념은 만화와 영화의 괴리감을 무시하는 무지로 판명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드래곤볼>은 코스프레 무비로 스스로를 몰락시키지 않겠다는 듯이 만화적 세계를 거침없이 허물어 나간다.
그러나 그 특수한 세계관을 변주한 자신감이 특별한 묘미로 연동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무색한 일이다. ‘기’를 아느냐는 직설적 대사로서 그 세계관을 일축하려는 대사는 흡사 ‘도’를 아십니까, 류의 질문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무국적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방대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할리우드식 스테레오 타입의 동양적 철학으로 채색되고 있는 건 심히 유감이다. 내가 아는 ‘손오공’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스크린의 손오공이, 그리고 그 세계가 본래의 형태를 훼손할만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까닭에서 <드래곤볼>은 유감스럽다. ‘드래곤볼’을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야심 자체가 7성구를 모아 신룡을 소환하겠다는 의지만큼이나 초현실적인 일이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드래곤볼>을 보면 그렇다. 엔딩 크레딧 너머의 영상을 통해 발견되는 후속에 대한 암시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착각의 늪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기분이 든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네오와 스미스의 수중 격투 장면을 통해 ‘드래곤볼’의 실사버전을 연상했던 지난 한 때의 기대감이 서러울 지경이다.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얻은 만화작가 강풀의 원작을 영화화한다는 것만으로 <순정만화>는 일단 눈에 들어온다. <아파트>, <바보>에 이어 영화화된 세 번째 작품이자 이전에 영화화됐던 작품들이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원작의 인기를 배반할만한 결과를 남겼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실질적으로 원작을 본 관객이라면 <순정만화>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적용할 수 밖에 없는 잣대는 분명 원작의 영향력에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순정만화>는 위에서 열거한 이전의 두 작품에 비해 적절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할만한 수준이다. 원작을 변주함에 있어서 과욕이 지나쳤거나, (<아파트>) 원작의 스토리와 설정을 축약하기 급급했던(<바보>) 전작들과 달리 <순정만화>는 만화 본래의 설정을 최대한 해치지 않는 수순에서 영화적인 이미지를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원작이 지닌 최대의 장점인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순정만화>는 작정하고 써 내려간 듯한 비현실적인 연애담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표백된 것처럼 선량하고, 그 인물들이 인연을 맺는 방식도 일상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가까운 예로 CF나 드라마, 영화에서도 가능할 것 같은 특별한 경우의 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순정만화>가 공감할만한 여지를 확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정서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까닭이다.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은 커플 관계를 상정하면서 그 관계를 통해 일반적인 연애의 감정들을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넉살 좋게 그려내고 있다. 상황에 대한 설득력이라기 보단 인물의 감정에서 발견되는 적절한 수긍에 가깝다.
원작이 지닌 장점을 영화적으로 잘 계승하고 있는 <순정만화>는 특별함보단 안정감이 장점인 작품이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중심에 자리잡은 두 커플은 비현실적인 나이차를 지니고 있음에도 서로 다른 양상의 로맨스를 점해나간다. 하지만 특별한 갈등 상황에 직접적으로 돌진하기보단 적절한 유머와 캐릭터의 사연에 적절한 여백을 두며 차근차근 인물의 심리를 관찰하고 따라잡는데 주력한다. 풋풋하고 순수하게 서로를 알아가는 띠동갑 커플과 일방적인 연하남의 구애를 받는 연상녀의 마음 기울이기엔 현실적인 편견을 넘어설만한 극적 재미가 존재한다. 소심한 30대 남자와 낙천적인 10대 여자, 적극적인 20대 초반 남자와 소극적인 20대 후반 여자의 로맨스는 각자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상황에 몰입하기 좋은 설득력을 구사한다. 비록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인지하면서도 수긍하고 싶게 만드는 여력이 충분하다. <순정만화>란 제목처럼 그 판타지 로맨스의 한계까지도 적절한 수준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