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스스로 빛날 수 있길 바란다. 기회를 꿈꾼다. 별을 꿈꾼다. 엄태웅과 김민준도 별을 바라봤다. 결국 별이 됐다. 그리고 잠깐의 반짝임이 아니길 다시 꿈꾼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톱스타>로 많은 관객들을 직접 만났다. 아무래도 배우에겐 가장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순간이 아닐까?
엄태웅(이하 ‘엄’)무대인사를 하면서 상영관을 헷갈릴 정도로 많이 긴장했다. 그런데 관객들이 재미있게 봐주는 거 같더라. 나도 부산에서 처음 완성된 영화를 봤는데 박중훈 감독님이 영화를 찍으면서 “이 장면에선 관객들이 이런 감정으로 받아들일 거야”라고 했던 게 대부분 와닿더라. 정확한 생각을 갖고 정확하게 준비한 신들이 잘 그려졌다고 느꼈다.
김민준(이하 ‘김’) 현장에서 배우로서 긴가민가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감독님이 말했다. “약속 하나 할게. 이 부분을 영화로 보면 전혀 이상하게 안 보일 거야.” 영화를 보니까 그게 다 지켜졌더라.
엄우리 영화가 공개되기 전에 사람들이 너무 올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데 내가 객관적으로 우리 영화를 볼 순 없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올드한 영화는 아니다.
김트위터에서 마음에 드는 리뷰 하나를 발견했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어머니랑 함께 본 딸이 올린 것 같은데 ‘영화보고 나서 엄마랑 할 얘기가 많아서 좋다’고 했다. 할 얘기를 많이 만들어주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대가 다른 어머니와도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더라.
배우가 영화를 볼 땐 무엇을 볼까?
엄요즘 밀린 영화들을 본다고 극장을 자주 찾는데 어제 <관상>을 봤다. 송강호 선배님 연기를 보니까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 너무 잘하니까 질투하다가도 감탄하게 된다. 아무래도 단순하게 영화 자체를 보려고 하지만 결국 배우들의 연기를 많이 관찰하게 된다.
<톱스타>를 주목하도록 만드는 건 아무래도 ‘감독 박중훈’이라는 이름이다.
엄단순히 28년 동안 배우로 살아왔다는 이유로 감독이 되는 건 아닌 거 같다. 박중훈 선배님 자체가 그런 자질이 있는 사람이더라. 머리도 좋고, 리더십도 있고, 너무 좋은 감독이었다.
김항상 ‘만약 감독이 된다면?’이란 생각을 해왔던 사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독으로서의 첫 현장에서 그렇게 스태프들과의 융화를 이끌어낼 수 없었을 거다. 아무래도 배우 입장에선 감독과의 소통이 중요한데 내가 이런 감독 앞에서 제대로 연기하지 못한다면 정말 자질이 없는 배우일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탁월하게 디렉션을 주셨다.
엄 컷이 이렇게 나뉘니까, 카메라가 이렇게 들어가니까, 여기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더 효과적인가. 이런 기술적인 요령을 지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배우들을 잘 격려해주셨다. 그렇다고 연기에 대한 짐이 덜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모니터로 나를 봐준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편해지더라.
두 사람의 친근한 모습만 봐도 현장 분위기가 좋았을 거라 짐작된다.
엄단언컨대(웃음), 현장 분위기는 정말 최고였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의 현장이 별로였다는 건 아니다.
김수습하는 거야(웃음)?
엄<톱스타>가 특별했던 건 감독님이 우리를 처음 만나서 했던 약속을 거의 다 지켰다는 점이다. 감독님이 자존심을 걸고 지킨 거지. 그래서 놀라웠다. 감독님이 현장에서 싫은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현장의 모든 사람에게 ‘야!’ 혹은 ‘너!’라고 하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
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처음 감독으로서 현장에 서면서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 얹고 시작했을 텐데 그걸 다 설득시키고 증명해가며 현장을 끌어갔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다.
서로에 대한 첫인상은?
엄나는 예전부터 드라마에 나오는 걸 봤고, 가끔씩 산책하다가 운동하는 모습을 본적도 있었다.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랑 친해질 사람 같지 않았다. 취미나 취향을 봐도 나와 많이 다른 사람 같으니까. 그런데 <톱스타> 덕분에 김민준이란 사람을 알게 된 게 정말 고맙다.
김태웅이 형이 한번은 “김민준이란 사람을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좋다”고 하시는데 그 말만으로도 마음을 열어주신다는 느낌이었다. 의지할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게 너무 좋다. 사실 그런 속내를 남자들끼리 털어놓긴 힘들지 않나.
엄그러니까 울면서 손 꼭 잡고 털어놔야지(웃음).
작품을 같이 한 배우들끼리 꼭 친해지는 건 아니지 않나?
엄대부분 매일 보게 되면 서로 모나지 않은 이상 친해지기는 하는데 작품 끝나면 서로 바빠지니까 소원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민준이와도 그럴 수 있겠지. 그런데 나는 민준이가 형 같았다. 뭐랄까. 신체적인 위압감 같은 게 있잖아. <톱스타>에서 민준이가 양복을 입고 서있는 뒷모습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마치 격투기 선수가 등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민준이는 동생들을 좋아하더라. 자연스럽게 동생들을 대하는데 나는 막내이다 보니까 사람 자체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선 나보다 남자답다고 느껴졌다.
김아! 맞다. 박중훈 감독님이 뒷모습을 되게 잘 찍더라. 나도 굉장히 마음에 드는 형 뒷모습이 있었거든. 뒷모습을 잘 찍는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굉장히 매력적이지 않나? 물론 앞모습이 별로라는 건 아니고(웃음). 뒷모습에 그런 페이소스를 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뒷모습에 집중하면서 영화를 봐야겠다. 혹시 배우들 간의 기싸움을 경험한 적은 없나?
엄사실 기싸움보단 시샘이 더 정확한 단어 같은데(웃음). 가끔 그런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가 부각돼야 하는 인물이 죽고 다른 사람이 살아버리면 영화를 망치는 거다. 어떤 식으로든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이번 현장은 너무 좋았다. 캐릭터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돼있고, 감독님의 지시가 명확했으니까. 그걸 잘 못하는 감독을 만나면 정말 힘들다. 배우가 자기 캐릭터의 당위를 주장할 때마다 수긍하면서 결국 시나리오와 다른 영화를 찍어버리고 이상한 게 나오니까(웃음).
김 그런 면에서 박중훈 감독님은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현장에서 감독들이 배우들 간에 스파크가 튀는 상태에서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고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긴 힘들다고, 그게 좋지도 않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감독의 능력이 의심스러울 때 배우 입장에선 가장 힘들지 않을까.
엄서로 믿음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 일단 생각이 별로 없는 감독이 있다. 예를 들면 “배우들끼리 상의해서 좀 챙겨주세요.” 이러면서 배우들한테 다 맡겨버리는 경우엔 너무 답답하다.
감독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나?
엄 없었다. 멋있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내가 할 일은 아닐 거 같더라. 나는 이렇게 스태프들과 현장을 꾸려서 운영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김나는 기술적인 호기심이 많긴 하다. 이 대사가 어떻게 녹음되는지,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면서 배우의 연기를 극대화시키는지, 신기하다. 나날이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과거엔 힘들었던 일이 너무 쉬워진다. 필름 시절엔 불가능했던 리테이크를 디지털 시대에선 계속 가도 괜찮다. 퀄리티도 계속 좋아진다. 그렇다면 과거에 연기를 돋보이도록 만드는 방식과 지금의 방식의 차이가 얼마나 다를까라는 궁금증이 있다.
단순히 기계를 좋아해서가 아닐까?
김영화적인 호기심인 거 같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도 배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배우라면 누구나 인지도 있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 그 간절한 시절을 되돌아보진 않았나?
엄처음 영화에 출연했을 땐 몇 번씩 극장에 가서 보고 그랬다. 누군가 날 알아보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어쩌다가 알아봐주는 사람이 생기면 쑥스럽지만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번 작품이 다음 작품으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연기하던 시절이었지. 계속 작품이 들어와서 연기로 돈을 벌면서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싸인을 해주면서 기분 좋았던 순간들, 잘 나가는 배우를 부럽게 바라봤던 기억, 그 시절이 다 <톱스타>에 있었다. 그래서 캐릭터의 감정을 잘 알겠더라.
김7년 정도 모델 생활을 하다가 97년도에 IMF 위기가 터져서 모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지방에 내려가 작은 옷 가게를 운영했는데 의상학과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어느 잡지에서 스크랩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장님이랑 닮은 모델이 있다고 하더라. “이거 난데?” 그랬더니 “웃기지 마세요”라고 하는데 가슴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정말 난데(웃음)!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절친’이 그러더라.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으니까 지금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 길로 가게 접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 친구 말이 아니었다면 지금 그냥 동대문에서 장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고마운 친구지.
엄사실 민준이는 재주도 많고, 이것저것 관심이 많은 친구다. 신기한 물건도 많이 갖고 있어서 덕분에 현장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김박중훈 선배님께서 농담을 잘 하시는데 어느 날은 이러셨다. “민준이는 이런 것도 알고, 저런 것도 알고, 그런데 야, 연기를 똑바로 해야지. 연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라고(웃음).”
김민준 씨는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고, 뭔가 생활인으로서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김사실 매형이 운영하는 가게다. 나는 적당한 자본을 투자하고 아이디어를 던져서 내 능력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내가 이런 걸 해볼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과 ‘이런 거 해보면 좋을 거 같다’는 흥미가 첫 번째였다. 그런 생각 하나로 시도한 가게인데 결과적으로 재미있더라.
엄우리 부부도 가끔 가서 서비스도 얻어먹었다(웃음).
김 그런데 태웅이 형 소속사에서 우리 가게 주변에서 빙수 가게를 운영하는데 최근에 어묵을 판다더라. 우리 가게 메인이 어묵인데(웃음).
엄 빙수 팔다가 겨울에 굶어 죽게 생겼어. 그래도 우리 어묵이 너네 어묵처럼 고급스럽진 않잖아(웃음).
김어쨌든 태웅이 형도 알겠지만 연기에 도전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다. 그러니까 뭔들 못하겠냐는 생각도 든다.
엄태웅 씨는 작년 초에 <네버엔딩 스토리> 제작보고회에서 관객 250만 명을 동원하면 결혼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더니 1년 만에 결혼했다. 250만도 안됐는데(웃음).
엄그때 웨딩 컨셉트의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래서 농담처럼 했던 거다. 그런데 기사가 막 나가면서 어머니한테 혼났다. 결혼하고 나선 아내한테도 혼나고(웃음). 이번엔 공약 물어봐서 아무 것도 안했다(웃음).
결혼하고 나서 변한 것이 있다면?
엄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라. 얼굴이 변했나. 어쨌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니까 이제 아버지 역할도 할 수 있겠더라. 예전에 드라마 <추적자>에서 손현주 선배님 연기를 보면서 나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 있었는데 지금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딸을 잃은 부모 심정을 알겠거든. 뭔가 연기할 아이템 하나가 더 생긴 것 같다고 할까? 그리고 안정적인 기분도 들고. 그래서 얼굴이 좋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김민준 씨는 아직 싱글인데 아직 결혼 생각은 없나?
김(결혼을) 맨날 생각한다(웃음). 태웅이 형도 이렇게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지만 주변에서도 결혼하면 다 행복하게 살더라. 친구인 장혁도 결혼한 이후부턴 항상 형처럼 느껴진다. “네가 결혼도 안하고 애도 없어서 말인데…”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항상 할말이 없어진다(웃음). 그래서 과연 그 기분이 뭘까 생각하기도 하고.
엄신기한 게 자주 만나는 고향 친구 두 명이 있는데 두 명 중 한 명은 단 둘이서 만나기엔 불편했는데 그 친구가 결혼하고 나도 결혼하고 서로 애도 생기니까 원래 만나던 친구보다도 그 친구한테 연락을 하게 된다. 신기하더라.
김그런데 왠지 결혼하면 책임감이 생겨서 어른스러워질까 걱정된다.
엄내가 어른스럽진 않잖아(웃음). 아마 민준이는 곧 할 거 같다. 나름 준비도 된 거 같고.
김뭔 소리야. 아직 한참 더 벌어야 돼(웃음).
엄<톱스타> 대박 나면 되지. 어쨌든 자리도 잡았고, 할 자세도 됐으니까 결혼만 하면 될 거 같은데.
최근 <나 혼자 산다>에 김민준 씨가 출연해서 길고양이 밥을 주는 걸 봤다. 원래 동물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김우리가 동물들의 자리를 뺏은 만큼 도의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양이에게 약간의 사료와 물을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누군가는 그 우리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대체 어떤 면에서 얼마나 해가 된다는 건지 반문하고 싶다. 요즘은 SNS를 통해서 고양이들 입지가 좋아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대중의 주목을 받는 입장에서 삶의 괴리를 느껴본 적은 없을까?
엄사실 배우로서만 알려졌을 땐 사람들이 ‘엄태웅이네?’라고 해도 선뜻 다가오진 않았다. 그런데 <1박 2일>을 하면서 그게 무너지기 시작하더라. 나는 원래 낯을 가리고 남들한테 친근하게 다가서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1박 2일>에 출연한 이후부터 어디서나 낯선 이들이 친근하게 다가오는데 내가 거기에 부드럽게 대처하지 못하니까 자꾸 힘들어서 사람 많은 곳이 꺼려지고 피하게 된다. 아내도 나랑 연애할 때 부담스러워했다. 친근한 이미지가 생기는 건 좋지만 문제는 내가 항상 사람들에게 맞춰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다.
김방송을 통해서 한 사람의 작은 면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니까 그게 그 사람의 전부라고 인식되는 면이 있다. 만약 내가 <1박 2일>에 출연했다면 나는 형과 다른 이미지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것도 나이긴 하겠지만 그 순간의 이미지가 극대화되는 거니까 그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기고 사람들에게 고착되는 것 같다.
대중들은 스타에 대한 환상을 품기도 하지만 경멸하기도 한다. 이중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항상 조심해야 하는 위치일지도 모른다.
엄부산에서 중훈이 형이 그러더라. 우리가 저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손가락질도 하는 거라고. 그냥 어쩔 수 없는 일 같다. 말이나 글로 정하진 않았지만 어떤 규칙이 생긴 거 같다고 할까.
김정말 공인의 기준이 뭘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나는 배우로서 역할을 해주고 그 대가를 받으며 살아가는 국민 한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율권과 기본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이 침해 당하게 되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내가 팬 미팅이나 시사회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을 마주쳤을 땐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게 맞겠지만 내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피해를 볼 정도면 양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계가 민감하게 느껴진다.
엄 그래서 가끔씩은 차라리 내가 그 자리에 안 갔으면 거기 계신 분들도 괜찮을 테니까 차라리 내가 집에나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때도 있다. 내가 좀 더 성숙해지면 괜찮을지, 아직까진 가리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오래 전 연기를 하고 싶다는 초심이 있었듯이 지금 또 다른 초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엄배우로서 연기하며 생활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면 이젠 그보단 큰 책임감을 느낀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 해야 하고, 영화가 좋지 않은 평가를 얻게 되면 미안해지는 부분도 생긴다. 촬영 현장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시절엔 그래서 더 못하는 게 있고, 아쉬운 게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었지만 이젠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장이 생긴 만큼 마음이 편해져서 더 할 수 있는 게 많아졌으니까 그만큼 잘 해야 한다. 그런 책임을 느낀다.
김나는 동료들의 신임을 얻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관객이나 시청자들의 신임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김민준이 이 역할을 한다고 하면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잘됐네’라는 말, 지금은 그게 가장 갖고 싶다.
배우는 작품을 선택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훌륭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왕이면 훌륭한 작품을 선택하고 싶은 게 배우의 마음이다. 아니면 아예 스스로 만들어버리던가.
최근 국내에서도 배우 출신 감독들의 활동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꾸준히 단편 연출을 해오다 첫 장편 연출작 <마이 라띠마>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유지태와 최근 연출 데뷔작 촬영을 마친 하정우, 연출 데뷔작을 촬영 중인 박중훈 등이 그렇다. 일찍이 <오로라 공주>로 호평을 얻었고 <용의자 X>로 주목을 받았던 방은진이나 <요술>과 <복숭아나무>의 감독으로 화제를 모은 구혜선도 마찬가지다. 과연 한국에서도 배우 출신의 거장 감독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왜 배우들은 감독을 꿈꾸는가? 이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는 감독이 꾸는 꿈이다. 물론 감독 혼자 꿈꾼다 하여 완성되는 것이 영화란 말은 아니다. 감독이 꿈꾸는 몽타주와 미장센에 숨을 불어넣고자 충실히 복무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존재할 때 그 꿈은 생명을 얻는다. 각각의 컷처럼 나뉜 스태프들의 재능을 하나의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출력이 바로 이런 재능이다. 감독의 할 일이란 그런 것이다. “어릴 때는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스크린이 도화지라면 감독은 화가이고 배우는 붓이다. 배우는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한다. 훌륭한 배우들은 자기 역할을 확실히 인식한다. 완벽하게 작품의 일부로서 투신하고, 때때로 작품의 빈틈마저 메워버린다.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탁월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동선과 리액션을 물론이고 조명의 위치와 카메라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한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부터 워렌 비티, 우디 앨런, 로버트 레드포드, 멜 깁슨 등, 훌륭한 배우가 훌륭한 감독으로 성장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런 명배우들이 감독의 자리를 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사실 배우 입장에선 자신보다 함량이 떨어지는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설 때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을 거다. 그런 경우의 수가 늘어날수록 차라리 카메라 뒤에 서고 싶다는 욕망도 커질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작품 경력을 늘려나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젠 배우라기 보단 감독의 인장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그는 일찍이 웨스턴 무비의 아이콘이란 명예를 멍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 낡아서 그 권좌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배우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감독들에 의해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가 망가지는 꼴을 번번히 목격하게 된 그는 직접 제작사를 차리고 끝내 메가폰까지 잡았다. 그리고 히치콕을 연상시키는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0)와 함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편 ‘제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수식어를 얻은 벤 애플렉은 지난 2007년 스릴러 <가라, 아이야, 가라>로 감독 데뷔한 뒤 호평을 얻었고 주연까지 겸한 범죄물 <타운>(2010)을 통해서 호평뿐만 아니라 흥행까지 이끌어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둔 최근작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대가의 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말했다. “배우라는 커리어도 이어가고 싶다. 감독이란 연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니까.” 한때 <굿 윌 헌팅>(1997)의 각본 작업을 하며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던 그에겐 졸작 액션 블록버스터에 연이어 출연하며 배우로서 바닥을 쳤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어쩌면 벤 애플렉에게 감독으로서의 길은 스스로의 연기 경력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노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벤 애플렉이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 그 뒤엔 조지 클루니가 서있었다. 그는 <아르고>의 제작자였다. 조지 클루니 역시 성공적인 배우 출신 감독이다. 폴리테이너로도 유명한 그답게도 근작인 <킹메이커>를 비롯해서 <굿 나잇 앤 굿럭> <컨페션> 등 시대적인 호흡이 돋보이는 정치적 소재의 작품들을 연출해왔고 좋은 평가를 얻어왔다. 결국 배우가 감독이 됐을 때 최고의 장점이란 최소한 자신보다 실력 없는 감독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고, 배우로서의 경력을 확보할 기회 또한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명심할 건 성공적인 족적을 남긴 배우가 성공적인 족적을 남기는 감독으로 살아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 물론 성공한 배우만이 꼭 성공한 감독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보다 큰 건 사실이다. 산수를 잘하는 사람이 수학을 잘할 가능성이 보다 큰 것처럼.
전주시의 지휘 아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4대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이 계획된다. 전주시청 한지과로 발령을 받게 된 7급 공무원 한필용(박중훈)이 실록 복본화 프로젝트를 일임하게 된다. 그 가운데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 민지원(강수연)은 전주시청에 한지 다큐멘터리 제작 협조를 요청하고 전주시장은 그것이 복본화 작업에 시너지를 부여할 것이란 판단에서 이를 수락한다. 그것이 달갑지 않은 한필용은 이로 인해 그녀와 반목하게 되지만 점차 한지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필용은 뛰어난 지공예가였으나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내 이효경(예지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고향을 찾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달빛 길어올리기>, 시적인 제목을 지닌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은 영화의 스토리와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을 진행하는 전주시장 송하진은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민병록 교수에게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 제작을 의뢰했고, 이는 임권택 감독에게 전달됐다. 판소리와 민속화라는 <서편제>나 <취화선>, <천년학>이 그러했던 것처럼 <달빛 길어올리기> 역시 민족적인 정서를 발굴하는 극영화라는 점에서 임권택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다. 다만 그 전례가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는 것과 달리 <달빛 길어올리기>가 관영적인 의뢰를 통해서 제작된 작품이란 점에서 출발점이 다르다. 물론 <달빛 길어올리기>가 관영적인 홍보에 충실한 기능적인 영화라는 지적이 아니다.
의외로 <달빛 길어올리기>는 작품의 제작 동기와 무관하게 임권택 감독의 개인적인 소망이 간절하게 투영된 한지 영화로 완성됐다. 특히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의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보다 차별적인 형식의 시도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극영화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달빛 길어올리기>는 다큐적인 면모가 보다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실상 전주시청의 실록 복본화 작업에 참여했던 7급 공무원의 실화가 바탕이 된 드라마투르기 속의 인물들은 한지라는 주인공을 수식하기 위한 장치처럼 삽입된 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한필용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서사에 몰입하던 관객은 시점숏으로 관찰되던 한지 수공예품들이 갑작스럽게 정직한 인서트 숏으로 대체되는 광경 앞에서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극영화로서의 요소와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두 요소가 밀착하지 않고 분리된,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방식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형식성의 실패처럼 보이지만 다시 한번 되짚어보면 그 무리수를 감안하고 밀어붙인 창작자의 의도 안에서는 성공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에서 점차 그 고유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가는 한지를 조명하고자 한 임권택 감독은 그 소재 자체를 조명하는 것이 극영화적인 형식성의 완성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임권택의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에게 굉장히 낯선 형식의 영화가 될 것이며 반대로 그런 형식성을 기대하지 않았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당혹스러운 감상을 부여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어쩌면 임권택 감독은 한지라는 전통적 가치가 현실 속에 놓인 처지를 자신의 입장으로 이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추측을 배제하고 한지 자체의 소재를 조명하는 이 영화의 방식을 고려했을 때, <달빛 길어올리기>는 감독 자신이 한지라는 소재 자체의 조명에 자신의 세계관이 함몰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형식적인 실패를 밀어붙인, 의도적인 성공의 결과물에 가깝다.
그런 형식성의 차이와 무관하게 이 영화는 역시 임권택 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의 시선을 견지한 작품이다. 종종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단지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동적인 선경은 이 영화에서도 두루 발견된다. 한필용과 민지원이 오롯이 빛나는 달 아래서 차를 타고 가는 나이트신이 담긴 원경은 고요하고 그윽하다. 달밤 아래 깊은 계곡 속에서 전통적인 한지 제조에 전념하는 이들의 풍경으로 갈무리되는 결말 역시 숭고하고 애잔한 정서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모든 풍경들은 물리적인 기능성으로 대변될 수 없는, 장인의 내공을 통해 살아있는 풍경 속에서 길어 올린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이 <창>(1997)을 연출한 이후로 15년 만에 현대극을 완성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이는 어쩌면 <천년학>에 걸린 100번째 영화라는 수식어의 무게를 뒤로 한 채, 자신 스스로도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는 임권택 감독의 집념을 보다 강력하게 반영한 또 하나의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 모든 대외적 의미를 배제하고 단순히 이 영화가 지닌 현대극적인 완성도를 본다면 적절한 수준의 성과를 지니고 있다고 평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흐름과 달리 플롯과 플롯을 잇는 과정에서 기이한 단절이 발견된다. 인과적으로 플롯을 마무리지어야 할 대사들이 종종 삭제되거나 시퀀스를 정리할 마지막 숏이 증발된 느낌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일종의 과업처럼 완성된 작품이지만 그 의무에 짓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존중받아도 좋을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의도에서 벗어나 냉정한 시선으로 이 영화를 정리한다면 임권택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전달을 넘어서는, 한 영화의 완전한 잉태에는 다다르지 못한 미완의 야심처럼 보인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길어 올린 한지와 같지만 그 정성스러운 낱장의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듯하여 일말의 아쉬움을 떨치기가 어렵다. 깊게 배어든 정성을 쉽게 펼쳐내기가 쉽지만은 않았던 것일까.
<두사부일체>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색즉시공>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1번가의 기적> 마지막 30분에 쓰나미가 밀려온다면? 이 질문에 수렴할만한 정답은 <해운대>. 단지 제목은 변경돼야 한다. 또한 바다가 인접한 지역이었을 때 가능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쓰나미를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약 테헤란 거리 한복판에서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을 구덩이로 빠뜨리면 그 영화 제목은 <테헤란>이 될 지도 모른다. 농담이냐고? 글쎄.
적어도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쓰나미를 기대하고 <해운대>를 찾은 관객이라면 1시간 30여분의 드라마를 견뎌야 한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파괴적 장관을 목격할 수 있는 건 분명 그 이후에나 가능하니 말이다. 그 1시간 30여분을 채우는 건 옴니버스적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드라마다. 서사의 시작은 이렇다. 내륙에서 먼 바다까지 어업을 나섰던 배 한 척이 거센 폭풍우에 휘말렸고 그 배에 탑선해 있던 연희(하지원)의 아버지가 무거운 철망에 깔려 있다. 그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이 안간힘을 쓰지만 무거운 철망은 꿈쩍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 구조헬기에 탑승하게 된 만식(설경구)은 죽음을 방조했다는(, 그리고 그와 함께 병행되는 본질적) 죄책감과 연희를 향한 모종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연민으로 연희의 삶을 돌본다.
<해운대>는 서사적 할당량에서 우위를 점한 만식과 연희의 사연 외에도 평행 나열되는 둘 이상의 관계를 확보하며 드라마의 너비를 벌린다. 쓰나미를 경고하는 지질학자 김휘(박중훈)와 그의 전부인 유진(엄정화), 만식의 동생인 해양구조대원 형식(이민기)과 서울에서 내려온 삼수생 희미(강예원), 그리고 연희의 동창이자 동네 백수건달인 동춘(김인권) 등, 다양한 인물의 서사가 평행적인 시선으로 나열된다. 다양한 인물들이 제 각각의 사연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드라마의 너비는 확장된다. <해운대>는 다분히 전략적으로 사연을 확장해 나간다.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쌓여 올린 드라마가 일거에 초토화되는 순간, 신파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우호와 갈등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쌓아나가던 캐릭터들이 쓰나미 한방에 서로의 손을 잡고 뛰거나 부둥켜안으며 끝을 예감하거나 죽음을 각오한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해운대>가 의도한 궁극의 드라마다.
쓰나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파괴를 위해 축조된 건물이나 다름없다. 진전되는 인물의 관계 속에서 한발씩 전진하는 사연이 거대한 재난 앞에서 일거에 전복되는 비극적 참상은 감정을 고양시키는데 분명 효과적이다. 서사의 층위를 쌓아 올리고, 관계의 너비를 확장하던 드라마가 파괴적 재난 앞에서 일순간 무너지는 광경은 참담한 심경을 부른다. 특히 ‘부산’과 ‘해운대’라는 지정학적 입지는 국내 관객에게 이색적인 기시감을 부를 만하다.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를 통해 이국적 풍경을 바탕으로 둔 재난 스펙터클을 감상해온 국내 관객들에게 <해운대>가 선사하는 국내 입지의 재난 광경은 보다 생동적인 감정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파괴적 이미지가 클라이맥스로서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발생시킨다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분명한 장점이 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혹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위용처럼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투자한 대작이다. 거대한 쓰나미를 구현한 CG는 분명 할리우드의 수준과 비교하자면 보다 떨어지는 결과물임에 틀림없지만 비용 대비 효과를 감안한다면 배려가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해운대>는 160억여 원을 들여 만든 드라마다. <해운대>에서 쓰나미의 역할이란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를 전복시키기 위한 용도로서 기능한다. 생각해보자면 그 전까지의 서사는 너비를 벌릴 뿐, 어떤 갈무리가 없다. 그저 한방의 이미지를 통해 서사적 구조가 일거에 무산되는 형식이다. 그 의도는 불순하지 않다. 다만 그 형태를 따져볼 필요는 있다. 거대한 자본을 투영해서 만들어놓은 인위적 이미지가 사실상 드라마를 파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는 건 어딘가 괴상하다.
<해운대>는 일상적 풍경의 파괴를 통해 관객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이는 효과적인 전략이다. 쓰나미로 인해 초토화되는 해운대의 모습 속엔 거센 물살에 밀려나고 정처 없이 떠다니는 비극적 파토스로 가득하다. 일상적 공간이거나 특별한 휴양지로서 ‘해운대’가 지닌 보편성의 특성 안에서 펼쳐지던 그 이전까지의 드라마는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침몰되고 수장된다. 가학적인 유머와 서민적 풍경으로 가득했던 1시간 30여분의 서사가 침몰된 이후로 몰아치는 비극적 신파는 지난 서사의 광경들을 모조리 추억으로 치장해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쓰나미 이전까지의 서사가 지닌 단점들을 염두에 둔다면 이건 엄연히 반칙이다. 후반부를 위해 직조된 것에 틀림없는 재난 이전까의 드라마는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조직됐다기 보단 너비를 벌리기 위해 이어 붙인 형태적 사연으로서 종종 선명한 틈새를 드러낸다. 평행적인 비중으로 나열되는 캐릭터 역시 각자 부여 받은 사연의 완성도 안에서 매력의 편차를 발생시킨다.
사실상 <해운대>의 드라마가 뛰어난 밀도를 자랑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오락)영화가 뛰어난 밀도의 드라마로서 오락적 가치를 평가받는 것도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결론의 형태를 통해 평가를 얻기 마련이다. <해운대>는 자신이 설계한 드라마를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그 평가로부터 한 발 달아난다. 만약 <해운대>가 한국형 재난영화라는 이름으로서 자부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해운대>는 단지 파괴적 스펙터클을 선사하는 이미지를 통해 드라마의 약점을 눈속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전례를 드러낼 뿐이다. 사실상 한국적 환경을 제외하면 <해운대>가 ‘한국형’이라고 불려야 할만한 이유도 막연하다. 단지 그것이 할리우드 대비 저예산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감안해야 결과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해운대>는 할리우드 재난영화들, 혹은 블록버스터들이 곧잘 발휘하는 장점과 곧잘 범하는 단점마저도 하나의 상투성으로 끌어들인 기성품처럼 보인다. 때때로 전시적 욕망을 위해 소모되는 시퀀스가 눈에 띄고, 상황에 걸맞지 않은 유머들이 껑충거린다.
새로운 시도와 모험은 중요하다. 다만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환경에서 빚어질 결과물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그 방식을 모방하고야 마는 욕망은 도전일까, 허세일까.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과연 실제적 가치인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쌓아온 데이터 안에서 장단점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모방해버린 결과물은 과연 한국적인가. 파괴적인 후반부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위한 볼모로서 쌓아올린 1시간 30여 분의 서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미명을 위한 제물인가? 드라마를 덮쳐버리는 스펙터클의 쓰나미가 결국 '한국형' 방식인가? 자본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 만들어낸 결과물의 목적은 무엇인가. 매년 여름마다 국내 극장을 독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맞서지 못할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면 과연 그 용도는 무엇에 있나. 그렇다면 과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봐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드라마를 파괴하는 스펙터클, <해운대>는 30여 분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1시간 30여 분짜리 임시방편 드라마의 제단이다. 그게 '한국형 재난영화'라 불릴 만한 결과물이라고? 글쎄.
지인의 부탁으로 성신여대 방송실에서 배우론(?)을 짧게 녹음하게 됐다. 버리긴 아까워서 원고를 남긴다. 12명은 성신여대 방송실에서 선정했으며 그 기준은 대종상 수상자 명단에 두고 있다 한다.
원래 원고상에서는 경어체 문장을 썼으나 다시 문어체로 바꿨다. 배우는 가나다 순으로 나열됐다.
김윤진
한류스타로 불리고 있지만 이건 좀 어색하다. 언제부턴가 그저 해외에서 인기만 있으면 한류스타라고 부른다. 그 전에 미국에 한류가 있긴 하나? 실체 없이 너무 남발되는 용어다. 어쨌든 현재 김윤진은 <로스트>의 성공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통용하는데 성공했다. <쉬리>의 흥행으로 관심을 얻었지만 그 이후로 그럴만한 행보를 보여주지 못했던 그녀가 해외에서 되려 성공해 국내에서도 관심을 얻었다. 이건 마치 국내에서 관심을 얻지 못하던 상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끌자 국내로 역수입된 현상과 비슷한 거다. 그 이전에 그녀는 미국에서 오래 생활한 덕분에 영어를 잘한다. 이는 국내배우들이 해외활동을 함에 있어서 지닐 수 밖에 없는 선천적 장애를 설명하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언어의 장벽을 돌파하지 않고선 쉽지 않은 일이란 거다. 어쨌든 해외의 상종가는 최근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그녀가 열연한 <세븐 데이즈>가 흥행했다. 지적인 변호사의 이미지와 절절한 모성애가 잘 융합됐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쉬리>에서 보여준 연기도 이중적인 태도였다. 아직 김윤진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부족하다. 그건 반대로 이 배우에게 볼만한 기대치가 아직 많이 남았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김혜수
건강미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육체파 배우에서 관능적인 이미지의 연기파 배우로 진입하는데 성공한 배우이자 명랑한 소녀의 이미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의 성장통을 잘 견뎌낸 케이스다. 사실 그녀는 성실하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라.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토록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며 성장한 배우는 드물지 않나. 물론 건강미 넘치는 이미지로 소모되던 그녀가 섹스심벌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그녀의 파격적인 의상이 한몫 한 것도 있다. 하지만 2000년도에 들어서 그녀가 보여준 파격적인 변신은 상당히 눈부신 것이다. 그녀의 육체적 가치는 캐릭터의 완성도에 기여했다. <얼굴 없는 미녀>와 <타짜>에서 보여준 그녀의 모습을 보라. 팜므파탈이라는 용어로 간단히 정의될 수 있겠지만 노출만으로도 상당히 파격적이다. 결코 무모한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의 장점을 캐릭터에 반영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위치를 점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헌신적이고 열의가 넘쳤다. 이 정도면 당연히 <좋지 아니한가>?
문소리
최근 드라마로 발을 넓히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영화배우로서 더 많은 걸 보여준 것이 확실하다. 그녀가 자신을 각인시킨 건 <오아시스>였다. 뇌성마비 장애인을 연기하는 그녀는 연기가 아니라 완전 장애인이 됐다. 실제로 그 영화를 보고 문소리가 실제 장애인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많았다. 사실 그건 연기적으로 평가될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면 말 그대로 묘기에 가까운 것이니까. 하지만 그 태도는 중요하다. 어떤 여배우가 그런 역할을 맡고 싶어할까? 게다가 그건 매우 고통스럽게 보인다. 차기작인 <바람난 가족>에서 그녀가 보여준 파격적인 노출도 헌신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그건 김혜수의 노출과는 다른 의미다. 김혜수의 육체가 자신에 대한 가치 증명을 겸한다면 문소리의 육체는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 그 자체를 위한 소품으로서 위치한다. 그녀는 배우로서 진검승부를 펼쳤다. 결국 오늘날 문소리라는 배우에 대한 신뢰도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게다가 그녀는 쉽게 말해서 소위 연기 잘 하는 배우다.
박중훈
정말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다. 안성기와 함께 출연한 영화도 많다. 8~90년대 국내영화를 주름잡았던 배우이며 <마누라 죽이기>나 <투캅스>시리즈에서 보여준 능청스러운 입담과 표정 연기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 영향력이 지나쳤던 것인지 90년대 이후 코믹한 범작들에 연이어 출연했고, 결국 그 이미지가 배우의 자질을 한정시켰다. <게임의 법칙>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를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코믹한 이미지로 한정돼선 안 되는 배우다. <세이 예스>에서 그의 진지함이 역설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폭소를 유발한다는 건 비극적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한 때 그렇게 됐다. <인정사정 볼것없다>는 그런 면에서 훌륭했다. 이 배우의 장점이 탁월하게 구현된다. 게다가 자신의 오랜 파트너 안성기와의 연기니 호흡도 좋았다. 몇 년 후 다시 안성기와 호흡을 맞춘 <라디오 스타>는 그간 한국영화가 이 배우를 소비했던 얄팍한 태도를 고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올디스’를 ‘구디스’로 끌어올리는 건 배우의 능력이기도 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의 몫이기도 하다. 박중훈 씨 같은 배우를 썩히는 건 정말 애석한 일이다.
설경구
캐릭터와 배우의 간극이 크지 않아 보이는 배우, 굳이 규정하자면 성격파 배우랄까. 최근작인 <강철중: 공공의 적 1-1>으로 이어진 <공공의 적>시리즈에서의 강철중은 어쩌면 설경구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온전히 끌어들인 게 아닐까 싶은 인상이 강하다. 어딘가 삐뚤어졌지만 밉지 않다. 기본적으로 선량하다. 게다가 희극적이다. 인간미가 발생한다. 동물적인 본능으로 움직이는 인상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이 배우가 지닌 능동적 자질은 상당히 강렬하다. 덕분에 다소 경직된 캐릭터를 붙여놓으면 스스로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인상도 나타난다. <공공의 적>과 <공공의 적2>를 비교해보자. 아무래도 전자가 좀 더 자연스럽다. 현재 그는 재난 블록버스터 <해운대>에 참여했다. 아마도 그 결과가 나오면 <괴물>의 송강호와 비교될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둘 다 동물적인 배우다. 다만 날 것의 느낌이 다르다. 설경구가 좀 더 맹수적인 느낌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 잘 다스리면서도 본인을 제약하지 않는 캐릭터를 선택하는 쪽이 그에겐 좋을 거 같다.
송강호
모든 역할을 자신의 캐릭터로 소화해내면서 중심을 잃지 않는 배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연기력과 함께 어느 정도 흥행성이 보장되는 특이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어쩌면 과거 한석규의 바통을 이어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송강호가 수렴할 수 있는 캐릭터의 너비가 한석규에 비해 광활해 보인다. 송강호는 분위기를 장악한다. 어떤 배역도 자신의 옷처럼 걸치면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코디한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미장센으로써 영화를 장악하기 보단 좋은 추임새를 넣는다. 함께 출연한 배우들에겐 둘도 없이 좋은 파트너가 될 거다. 문장의 형태를 해치지 않는 탁월한 수식어의 역할을 하는 덕분이다. 본인도 원톱보단 그런 역할이 더욱 편해 보인다.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이런 기라성 같은 감독들의 러브콜을 끊임없이 받는 배우가 바로 송강호다. 어쩌면 이보다 더 좋은 설명도 없겠다.
이영애
애당초 ‘산소 같은 여자’라는 CF이미지로 떠오른 미인이다. 애초에 연기자 지망생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만큼 활동 초반엔 연기 못하는 배우 축에 꼈다. 그런 그녀가 오늘날 배우라는 프리미엄을 얻게 된 건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인식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럴 땐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맡아준 사람이 박찬욱 감독이다. 만약 이영애가 <공동경비구역 JSA>에 출연하지 못했다면 과연 배우로서 반등할 수 있었을까? <친절한 금자씨>도 마찬가지, 성공적인 변신은 배우를 돋보이게 한다. 그것이 파격적일 때 위력은 더한다. 사실 그녀에게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는 그녀의 활동 시기에 비해 많은 편이 못 된다. 그리고 CF는 전지현만큼이나 많이 찍는다. 그래도 그녀를 전지현처럼 비하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건 출연작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명품의 가치를 창출했다. 기회를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꿰차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 누가 그녀를 산소 같은 여자라고 부르나? 전지현이 아직도 ‘엽기적인 그녀’에 머무르고 있음을 상기해보자면 이영애의 명품가치가 좀 더 실속 있어 보인다.
장동건
스타로서 상품성을 과시하지만 어느 정도 연기력도 인정받는 배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사실 상품성의 가치가 더욱 돋보인다. 그것이 국내를 넘어서 해외로 나아가는 상황이란 점에서 가치가 더욱 높아지는 상황이다. 사실 그도 한때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친구>를 통해서 완전한 입지를 구축했지만 그 전에 출연했던 <인정사정 볼것없다>가 더욱 주요했다. 쓰임새가 한정적이던 주연배우가 조연배우를 자청하며 무엇을 터득했을까? 파격적인 캐릭터를 입고 이미지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 결과가 <친구>와 <해안선>이다. 그 큰 눈망울이 표독스러워졌다. 다들 거기서부터 장동건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결국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완전히 야심을 완성됐다. 다만 현재의 그는 그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다. <태풍>의 최명신에서 그 표독스러움의 유효기간이 드러낸 느낌이다. 하지만 이 배우가 보여준 고민은 중요하다. 자신의 스타성을 과시하는 요즘의 젊은 배우들은 한번쯤 그의 모험적인 경로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요즘 배우들은 시도를 무서워한다. 어쩌면 김태희가 배우의 이미지를 얻고 싶다면 장동건의 필모그래피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진영
사실 최근에 출연했던 대작 드라마 <로비스트>의 시청률이 부진했다. 게다가 몇 년 사이에 출연작의 흥행도 부진하다. 배우라면 분명 스트레스 받는 일일 테다. 사실 그녀의 출연작 중에 눈에 띄게 흥행한 작품은 <싱글즈>가 유일하다. 그런데 왜 이 배우의 이름이 이토록 영향력을 발휘할까? CF에서 그녀를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녀의 캐릭터가 상당히 눈에 선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싱글즈>이후로 그녀는 좀 더 자립적인 여성상을 연기하게 됐다. <청연>의 박경원과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연아까지, 그리고 흥행과 무관하게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연애, 참>을 통해서는 다양한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젠 파격이 무뎌진 시점에서 좀 더 내밀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녀가 <소름>에서 보여준 연기를 최고로 꼽는 사람이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전도연
성장하는 배우의 얼굴이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증명하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국내에서 여배우가 극복해야 할 한계를 자신의 능력으로 돌파한 사례이기도 하고.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하기까지 이 배우가 보여준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라. 과감하면서도 영화에 지극히 헌신적이다. 캐릭터마다 몰입도 훌륭하고 자세도 진지하다. 솔직히 외모로 치자면 예쁜 배우는 아니겠지만 전도연은 분명 아름다운 배우다. 현재 연기에 대한 믿음 자체만으로 이만한 신뢰감을 부여하는 여배우가 누가 있나? 찾아보라. 전도연이 한국영화에서 차지하고 있는 무게감의 현재형은 그만한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녀가 이렇게 성실한 필모그래피를 유지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다. 앞으로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고르는데 좀 더 신중해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행보는 상당히 성실하면서도 훌륭하다. 박수를 받아도 마땅한 배우다.
최민식
최근 몇 년 사이 이 배우를 보기 힘들었다.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몇 년 사이 정치적인 제스처로 작품 활동이 어려웠다. 이 배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건 그만큼 영화계의 손실이다. 이 배우의 주연작들을 보라. 대부분 쉽게 넘어갈만한 작품이 아니다. 그는 애초에 현재 활동하는 배우들의 이상이기도 했다. 현재 30대를 넘어선 배우들과의 인터뷰를 해보면 종종 최민식 씨의 연극을 보곤 했다, 는 답변이 나온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감정들이 분출되는 화수분과 같다. 게다가 그의 연기는 언제나 고뇌를 동반한다. 고단하고 피로하면서도 끈질기다. 트라우마에 짓눌리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저 웃고 넘긴다. 잡초처럼 생명력이 강한 인상을 탁월하게 남긴다. 그런 배우에게 3년 간의 공백이 생겼다. 누가 아쉬워야 하나? 그는 얼마 전 히말라야에서 전수일 감독의 새 영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을 찍었다. 그는 히말라야에서 무엇을 보고 왔을까? 이 배우의 인생 자체가 어쩌면 드라마가 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그의 연기를 본다는 건 어느 한 사람의 인생을 짊어지는 것처럼 무거운 일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그걸 봐야 한다고 말하는 건 그 사람이 장인이라고 불려도 부끄럽지 않은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황정민
극단적인 이중성을 오가는 얼굴을 지녔다. 예를 들어서 <너는 내 운명>의 김석중과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을 비교해보라. 얼마나 극단적인가.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농촌총각의 얼굴에서 도시의 비정함에 찌든 갱단의 중역을 오가는 그 모습이 저마다 녹록하지 않다. 극단 목화 시절 무대에서부터 키워나간 경험적 내공이 상당한 덕분이겠지만 꾸밈새를 조금만 달리해도 이 배우의 인상은 극단적인 모습으로 돌변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중간 지점이 애매합니다. <검은 집>에서의 그는 뭔가 좀 망설이는 기분이 든다. 어느 한 쪽으로 무게중심을 잡았을 때 이 배우의 진가는 드러난다. 물론 복합적인 응용은 가능하다. <행복>에서 영수는 그런 케이스다. 정말 나쁜 놈이지만 삿대질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픽션의 상황에서도 현실적인 감정이입을 부른다. 그만큼 이 배우의 표정이 수많은 감정을 내포할 수 있는 그릇이란 의미이기도 하겠다.
전작들의 개봉을 기다릴 때와 기분의 차이가 있나? 다른 기분? 있지. 기대가 돼! 관객들이 이 영화를 상업영화로 봐줄 지가. 난 이 영화를 대체적으로 상업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결말은 상업적이지 않거든. 해피엔딩도 아니고, 불편하잖아. 근데 만약 성공한다면 나는 정말 행운이지.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는 건가? 있지. 왜 없어? 대부분 질문이, 순이가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월남에 왜 가냐? 다 그 질문뿐이야. 사랑하지 않아도 갈 수 있다, 난 그러는데, 사랑하지 않는데 왜 가요, 자꾸 그러니 염려돼.
결말부 때문에 고심하는 과정이 있었나? 아니야. 되려 거꾸로 마지막 장면을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박아놓고 쓴 거야.
그럼 엔딩이 <님은 먼곳에>의 모티브로 작용한 건가? 그렇지.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가다가 갑자기 하겠어? 처음부터 박아놓고 간 거지. 그리고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온도를 계속 올리는 거지.
전작들도 이렇게 출발한 영화가 있었나? 난 영화마다 다 그래. 항상 라스트를 정해놓고 간다고. <왕의 남자>도 라스트를 박아놓고 간 거야. <황산벌>도 그렇고, <라디오 스타>도 그렇고.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당신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시니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응! 시니컬해!
이번 작품은 그에 대해 가장 노골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 같다. <즐거운 인생>이 제일 노골적이지. 거긴 대사가 나오잖아. 내가 빨리 결혼해야 너와 이혼하지. 거기선 아예 읊잖아. 결혼이 갖고 있는 의미와 결혼이 제도화되는 것의 의미는 다른 거야. 난 결혼제도의 시작을 이렇게 봐, 물론 궤변이야. (웃음) 과거 어떤 수컷끼리의 투쟁이 있었는데 거기서 살아남은 승자가 불안해진 거야. 내가 지금 힘이 빠지면 저 새끼들이 나를 치러올 것 같아. 그럼 수컷들에게 족쇄를 채워야 되잖아. 족쇄를 채우는 방법은 단 하나야. 결혼시켜서 애 낳게 한 뒤, 한 집안에 다 몰아넣어야 돼. 그럼 처자식 달린 놈이 함부로 살 수 없게 되는 거지. 현대사회의 남자들은 회사 때려 치고 싶은데 못 때려 쳐. 왜? 처자식 때문에 그렇잖아. 그게 결혼제도의 숙명이야! (웃음) 억압된 결혼제도가 긍정적인 결혼의 시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스스로 퇴행적 제도로 몰락하는 거지. 끊임없이 발목을 잡혀 사는 그런 현실을 영화로 시비 거는 거지. (웃음) 사회에 긴장을 던지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야. 어쨌든 영화는 대중 예술이잖아. 사회가 통념으로 갖고 있는 것에 자극을 주는 거라고. 해석은 각자 사회인과 관객이 알아서 하는 거야. 예술가가 그것까지 답을 내려줄 순 없잖아.
당신의 영화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처럼 보인다. 영화가 다 판타지지. 다 뻥구라인데. (웃음)
하지만 당신의 영화는 주변부의 현실을 생생히 조명하거나 역사적 배경을 구현하는데 주력함으로써 사실적 배경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님은 먼곳에>도 베트남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영화의 현실성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나는 없는 얘길 하지 않아. 기본적으로 있는 얘길 다르게 보는 거지. 그러니까 현실에 토대를 둔 이상을 보는 것이지. 판타지라는 것은 없는 세계를 그려내는 거야.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전부 다 있었던 사실에 근거해서 어떤 새로운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단지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간 건 아닌 것 같다. 서양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어. 소위 냉전 이데올로기라고 말하는 것의 이념에 대해서.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지나 발생한 20세기의 전쟁은 19세기에 북유럽에서 생성된 이념에서 비롯된 거라고. 경제학자 마르크스(K. Marx)가 주장한 캐피탈리즘(Capitalism)을 도구로 어떤 집단이 또 다른 명분을 세워서 이데올로기 집단을 만들었지. 그러면서 전쟁이 시작된 거야. 그 전쟁의 끝이 20세기 마지막 전쟁인 베트남 전쟁이라고. 지구 반대편에 와서 서구에서 발생한 이념전쟁이 끝난 거야. 그리고 바로 이전에 있었던 전쟁이 한국전쟁이야. 그런데 한국전쟁은 아직 안 끝났어. 종전이 아니라 우린 전쟁 중이라고. 국제사회에서 아직 휴전으로 돼 있다고. 근데 우리보다 늦게 일어난, 냉전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종전됐고 우리가 한.베 수교한지가 벌써 몇 십 년이나 돼.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난 전쟁은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에밀 쿠스트리챠(Emir Kusturica)의 <언더그라운드>에서도 나오는 보스니아 내전이지. 그건 민족, 종교갈등이라고. 냉전 전쟁이 아니야. 서양은 이미 EU통합까지 하면서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20세기에 맞이했다고.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걔들이 싸놓은 똥에서 콩나물 빼먹고 사는 것과 똑같아. 걔들이 만들어놓은 이데올로기에 지구 반대편의 우리는 지금까지도 자유롭지 못한 거야. 난 이에 불만이 많아. 나만 불만 있겠어? 대한민국 사람들 다 그렇겠지. (웃음) 그런데 이걸 직접적으로 다루기에는 불편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영화를 하면서 불편을 많이 주면 그것도 예의가 없잖아. 그래서 비슷한 걸 하나 해야겠다 싶어서 이제 (베트남전은) 끝났으니까 건드려도 된다 싶었지. 전지적 시점으로 봐도 그렇게 불편할 사람이 많지 않아. 그래서 베트남 전쟁을 이야기하게 된 거야.
베트남 전쟁은 사실 우리의 전쟁이 아니었지만 우리의 전쟁처럼 인식되는 측면도 있다. 우리가 갔으니까 우리의 전쟁이 돼버린 거지. 그리고 남의 전쟁인데 우리가 우겨서 들어간 거지.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대한민국 안에서만큼은 남자들만의 전쟁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여성의 시각으로 베트남전을 바라보는 <님은 먼곳에>의 시점이 특별한 의미를 발생시키는 측면이 발생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베트남전에 타국 여성의 시각이 개입된 사례는 드물다. 심지어 전쟁터에 간 위문공연단을 주인공으로 삼은 전쟁 영화는 전세계 영화 백 년사에서 이게 딱 하나야.
<님은 먼곳에>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영화인가. 사진 한 컷. 인터넷에서 베트남 위문공연 찾아보면 사진들이 쫙 나와. 거기에 패티킴, 현미, 김세레나, 그리고 이금희, 요즘은 우리가 모를만한 이름의 여가수들이 등장한다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사진이 왕창 나와. 그 사진 보면 누구나 알아. 아, 이거 완전 영화네. 다만 우리가 먼저 본거지. 먼저 본 사람이 임자잖아! (웃음)
영화에서 순이가 전쟁의 폭력성을 직접 목격하는 건 세 장면이 나온다. 그 세 장면은 순이의 경험으로 진전되어 나열된다. 단순한 목격자의 시선에서 참여자로, 그리고 종래에는 생존의 본능을 통해 상황에 개입시켜버린다. 특히 마지막 단계에서 정만이 노래 부르는 행위는 순이를 통해 학습된 결과다. 그들이 직면한 죽음을 여성과 노래가 구제해준다는 양식에 삽입된 의미가 읽힌다. 여성의 노래라는 것을 영화적 도구로 쓴 것이기도 하지만 거기엔 여성성이 이데올로기를 무화시키는 시선임을 주장하고자 하는 은유적 의미가 내포돼있어. 순이라는 개인이 시어머니, 남편, 친정으로 둘러싸인 가족사에 가둬져 있다가 그 가족사에서 튕겨져 나와 정만을 만나면서 사회사를 이루는 거야. 그러다가 정만과 같이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국군과 배를 타면서 국가사가 돼버린 거라고. 그리고 베트남에 도착한 순간, 세계사가 되는 거야. 그리고 맨 마지막에 따귀를 칠 땐 인류사가 되는 거라고. 히스토리(He story)를 허스토리(Her story)로 돌리자고. 그러니까 개인사, 가족사, 사회사, 국가사, 세계사, 인류사, 까지 진행되는 시퀀스(sequence)를 거기에 맞춰놓고 가는 거야.
어느 특정한 시대에 담긴 역사적 맥락을 개괄적이면서도 발전적으로 그려내고 싶었던 건가? 그렇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콕 집어서 쫙 펼쳐놓은 거지.
전장 한복판에서 여성의 시선 아래 무릎 꿇은 남성이 놓여있는 엔딩의 구도도 의미심장하다. 마치 그 모습은 신부님 앞에서 기도 드리는 신자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일종의 고해성사지. 용서와 구원을 상징화한 컷이야. 난 사랑의 끝은 용서라고 본다고. 순이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통해 때려서라도 사랑하지 않는 남편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거야. 반성한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 반성하지 않은 자는 구원받을 수 없잖아. 구원의 조건은 반성이라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준거야. 순이가 뺨을 딱 치고, 또 치고, 그렇게 세대를 맞고 나면 그제야 끅끅 거리면서 괴물처럼 운다고. 이게 반성의 심정이 나오는 순간이야. 순이는 그때, 밀치면서 용서를 해. 용서한다고. 용서하니까 무너져서 구원받는 거야. 그 구원을 정만도 받아. 그 다음 컷에서. 그 때, ‘대니 보이(Danny Boy)’라는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지.
상길이 구원의 직접적인 대상이라면 정만은 간접적인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정만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디 가겠어? 제니한테 가겠지. 사실 정만의 구원 스토리가 이 영화에 굉장히 큰 축인데, 그걸 이해하려면 1970년대 초 한국에 어떤 사회적 현상이 있는지 알아야지. 대한민국은 20세기를 맞이하자마자 일제로부터 수탈당했어. 지배적인 남성성이 거세당했다고. 그리고 몇 년 후, 6.25 동족상잔으로 전부 다 폐허가 됐어. 그럼 남성들은 이제 길바닥에 나와서 뭘 해야 되겠어. 생존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되는 거야. 돈의 신화가 시작된 거야. 현재 금권만능주의의 시작이 1960년대 말, 70년대 초, 이 때라고. 그래서 우리는 베트남전에 평화를 지키러 갔다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돈을 벌러 간 거야. 사실 한국전쟁이 없었으면 일본의 경제는 이렇게 빨리 일어서지 못했다고. 한국전쟁에 필요한 물자자금을 일본공장에서 죄다 생산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그것처럼 한국도 한국전쟁 이후에 베트남전을 통해서 경제재건을 할 수 있었던 거야. 그 남자들이 돈의 신화를 만든 거지. 그리고 그때 세계 낙태율1위 국가가 한국이야. 그 때 한국의 문명수준이 애를 지워서라도, 자기를 따르는 여자를 버려서라도 돈을 벌러 가야 하는 거야. 그래서 정만도 갔어.
정만은 결국 그 시대에 놓인 남성성의 상징적 배치라 할 수 있는 것 같다. 정만의 여정은 결국 그 시대적 속성에 대한 일침인가? 정만은 어쩌다 보니 베트콩 땅굴까지 갔을까. 거기서 베트콩이 묻지. 이 무기는 뭐냐? 그러니 정만이, 우리가 공연하고 받은 거다. 우리 돈 벌러 왔다. 그러니까 베트콩이, 한국군도 돈 벌러 왔다. 그러니 정만이, 아니, 한국군은 평화 지키러 왔지, 그러니까, 너 평화가 뭐라고 생각해, 베트콩이 묻잖아. 평화? 우리를 풀어주면 그게 평화지. 정만이 이렇게 대답하니까 베트콩이 총을 들이대잖아. 베트남은 1800년대 말부터 백 년간 프랑스 식민지였어. 내가 가봤는데 땅굴의 실제 총 연장길이가 250km야. 서울에서 대전보다 더 가. 그 땅굴이 손으로 백 년을 판 땅굴이야. 그 나라가 그만큼 어마어마한 나라라고. 그 속에서 그네들은 애를 낳고, 교육시키고, 밤엔 나가서 농사짓고, 그렇게 땅굴 안에서 생명을 부지하면서 평화를 찾으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라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 감히 평화를 그렇게 얘기하니 총맞아야 싸겠어, 안 싸겠어? 당연히 바로 죽여버려야지. 그런데 그 때, 순이가 벌떡 일어나잖아. 남편 만나러 왔어요. 이 남자가 그 말을 알았겠어? 그러니 노래를 부르는 거야. 개돼지가 아니고서야 언어가 다르고 민족이 달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써 한 여자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거거든. 결국 총 내려놨어. 그럼 뭐야. 순이가 이들을 구제한 거라고. 살려낸 거야.
결국 노래의 주체가 여성이란 점은 <님은 먼곳에>에서 중요한 구도를 형성하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땅굴 씬의 마지막에 순이가 ‘님은 먼 곳에’를 부를 때, 베트콩들이 다 같이 하나가 돼서 그 공연을 보고 있잖아. 그 때 정만이 멍하게 지켜보고 있지. 저년이 내 돈줄인데, 저게 우릴 죽음에서 구해내고, 저건 대체 뭘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그러다가 폭탄 터져서 땅굴에서 나왔어. 나왔더니 미군이 막 학살해. 그래서 정만이, 아임 낫 베트콩(I’m not Viet Cong). 아임 코리안(I’m Korean), 이렇게 외쳐봤자 미군 눈엔 다 옐로우(yellow)야. 지금도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미국가면 다 옐로우야. 우린 걔들한테 대상화 돼있을 뿐이야. 그 때 저편에서 빵, 하고 미국 장교가 베트콩을 학살하잖아. 그리고 마지막에 그 베트콩 대장을 겨눌 때 정만이 눈을 못 두고 내려. 왜? 저 사람은 정만을 죽일 수 있었어. 근데 순이가 우릴 구해준 거야. 그리고 미군은 아군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자길 죽이려는 거야. 그러니 염치 없는 거지. 그래도 일단 살아야 될 거 아냐. 그래서 미국국가를 불러. 미군이 봤을 땐 옐로우가 미국국가를 부르니까 이상하잖아. 미국애가 갑자기 애국가 부른다고 생각해봐. 정말 이상하지. 총을 어떻게 겨눠. 저게 뭐야, 이럴 거 아냐. 그런데 긴장해서 가사를 까먹었어. 이 때 성찬이 부르는 노래가 ‘대니 보이’라고. ‘대니 보이’가 어떤 노래야. 서울 이태원에서 제니가 불렀던 노래야. 정만은 그 여자를 버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서울에 있던 제니가 부른 ‘대니 보이’가 자기들을 살려준 거라고. 그러니까 이건 서울에 있는 제니가 정만과 일행을 모두 구한 거야. 순이까지 다. 순이는 그전에 베트콩 속에서 일행을 구한 거고.
‘대니 보이’란 노래는 <님은 먼곳에>에서 중요한 장치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대니 보이’는 아일랜드 민요야. 1800년대 말, 아일랜드 독립전쟁 시절에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는 아버지가 자식이 오길 기다리다 먼저 죽는 이야기가 담긴 노래야. 얼마나 가슴 아파. 전세계 음악 교과서에 그 노래가 다 실려있어. 그 노래를 우리도 초등학교 때 ‘아 목동아’라는 제목으로 배웠어. 내가 그 장면에서 미국 장교에게 디렉션(direction) 줄 때 이렇게 설명했다고. 표정은 네 맘대로 지어라. 단, 네 어머니가 텍사스 농촌에서 널 기다리며 이 ‘대니 보이’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 알겠다. 알겠지, 당연히. 전세계 다 아는 노래인데. 특히 미국 애들은 그 노래를 더 잘 알겠지. 그리고 맨 마지막에 상길이 주저앉아서 울 때, 그 때 나오는 음악도 ‘대니 보이’야. 그 ‘대니 보이’가 흐를 때, 정만이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이제 돌아가는 거야. 결국 어디로 갔겠어? 이태원 가야지! 지가 인간이면! 개돼지 아니고서야. 날 구원해줬는데! 난 위대한 여성성이 그런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찍은 거야. 근데 이렇게 읽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
솔직히 말하면 당신의 전작들과 반대로 <님은 먼곳에>는 남성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다. 반성을 안 해서 그래. 반성에 인색해서 그래. 나는 따귀 맞고 싶었어.
솔직히 속살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 불편한 느낌이 남는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 자기가 반성을 안 해와서 그래. 반성을 해봐. 너무 편안해. (웃음) 일부로 그렇게 한 거야. 이 영화를 본 남자는 개나 소나 다 똑같아. 내가 <황산벌>에서도 계백의 처를 통해서 비슷한 말을 했어. ‘백제가 망하던 흥하던, 네가 맨날 전쟁터만 죽어라 쫓아다니더니 나한테 죽어라 살아라 하는 게 말이 돼?’ 계백 처 입장에서는 백제가 망하던가, 신라가 망하던가, 상관없다 이거야. 여자의 눈은 그런 거야. 왜? 남자는 어려서부터 집에서 나가 골목에서부터 편가르기를 시작해. 골목대장 정하고 그렇게 거기서 서열화를 익히지. 남성은 본능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가는 존재야. 이천년 역사가 그래서 히스토리(He story)라고. 남자들의 이야기인 거야. 그 이데올로기의 모순이 20세기에 발발한 이념전쟁이야. 제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부터, 원자폭탄까지, 이게 다. 르네 마그리트(Rene Marritte)가, 난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믿지 못하겠다, 고 한 것도 그 때문이야. 그래서 쉬르레알리즘(surrealism), 초현실주의로 가버린 거야. 그래서 유럽이 한 때 초현실주의로 확 덮여버린 거야. 다다이스트(dadaist)들에 의해서. 그니까 난 그런 서열화, 편가르기의 이념을 무화시켜버릴 수 있는 세계관은 딱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 여성성, 허스토리(Her story)로 보면 베트콩이든, 한국군이든, 미군이든 똑 같은 놈들이라고. 총 들고 설치는 그 놈이 그 놈들이라고. 베트콩의 부인이나, 총 쏜 미국 장교의 엄마나, 순이나, 순이 엄마나, 순이 시어머니나, 그들이 만나봐. 총질하겠어? 이데올로기 필요해? 그걸 난 이 영화로 설명한 거야.
신파조의 뉘앙스가 강한 제목 때문에 그런 의미가 많이 상쇄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독이 가능하지. 어쨌든 그 전에 그래도 내가 70억을 투자자한테 받아야 될 거 아니야. 그런데 내가 이런 말하면 받아낼 수 있겠어? (웃음) 투자자가 미쳤어? 뭔가 거짓말 좀 보태야 될 거 아니야. 난 사기꾼이 돼야 한다고. 남녀간에 사랑이 있고, 전쟁터에서 여자가 남편을 만나고, 이런 공갈을 쳐야 될 거 아냐. 이래야 돈 70억을 타지. 안 그러면 누가 꽁꼬(공짜)로 70억을 주겠어. 20세기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는 21세기 영화스토리! 이러면 나한테 누가 돈 주겠어? 아무도 못 줘. 난 이 영화를 찍어야겠고, 공갈을 친 거지. 그럼 그 공갈에 또 배신하면 안되잖아. 그럼 그렇게 구색을 맞춰서 찍어야지. 그렇게 돈 타놓고 딴 영화 찍을 수는 또 없잖아. (웃음)
사실 <님은 먼곳에>는 ‘남편 찾아 삼만리’라고 명명될만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 구조 자체가 로맨스를 예감하게 만들고 신파를 상상케 한다. 그건 이미 호머의 ‘오디세이’야. ‘오즈의 마법사’고, ‘심청전’이고, ‘바리데기’야. 이건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수천 년동안 인간이 수도 없이 이야기한 클리셰라고(cliché)라고. 전혀 새로운 게 아냐.
에로스를 연상시키는 구조란 의미다. 그런데 <님은 먼곳에>는 궁극적으로 아가페를 이야기한다. 에로스로 이 영화를 대하면 너무 협소해지지. 인간의 욕망 중에서 소유와 집착이 바로 그거잖아. 여성성도 어미와 암컷으로 나뉜다고. 예를 들어서 열두 살짜리 소녀가장이 있어. 그리고 일곱 살짜리 남동생이 있어. 그걸 보자기에 둘러싸서 이 열두 살짜리가 키운다고 생각해봐. 그럼 그 열두 살짜리 여자애를 어미로 봐야 돼, 암컷으로 봐야 돼? 당연히 어미지! 그게 모성애잖아. 근데 강남에 있는 돈텔마마 같은데 가봐. 마흔 넘은 아줌마가 화장 진하게 하고 있어. 그럼 그게 어미야, 암컷이야? 암컷이지! 나는 지금 어미 이야길 한 거야. 암컷 이야길 한 게 아니라고. 그런데 자꾸 암컷을 갖다 붙이면 억울하지. 안 그래도 암컷은 다음 영화에서 찍으려고 준비해놨어. 여성의 욕망이 끝까지 갔을 때 나타나는 악마성을 내가 보여줄게. 영화가 2시간밖에 허용이 안 되니까 다 넣을 수가 없어. 4시간이면 다 넣었겠지. 2시간 안에 그걸 어떻게 다 설명하냐. 불가능하잖아.
그 작품이 혹시 이전에 무산된 <매혹>인가? 아니야. 지금 최석환 작가가 쓰고 있는 <7번 국도에 사무치다>라는 작품인데 아까도 말했듯이 여성의 욕망의 끝에 드러나는 악마성을 이야기해보려고. <님은 먼곳에>는 어미와 암컷이란 두 여성의 모습 중에서 모성을 더 키운 그런 영화고. 결국 정, 반, 합, 이야. 그 다음에 찍을 영화가 뭔지 나도 너무 궁금해. 여성의 모성에 대한 위대함을 <님은 먼곳에>에서 했으니 그 다음엔 암컷의 욕망에 대해서 그려보고 싶은 거야. 그럼 그 과정에서 또 뭔가 배우겠지. 난 그게 뭔지 몰라. 그저 시나리오 쓰고, 틀거리만 잡아놓고, 거기에 출연할 여배우의의 눈으로 뚫고 지나가면 뭔가 올 것 같아.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것끼리 합쳐진 무언가가 완성되겠지. 가봐야 알 거 같아.
예전에 했던 인터뷰 기사 중에 이런 말을 했더라. 난 씨네필도 아니고 영화적 지식을 가지고 영화를 찍는 감독이 아니다, 라는. 결국 당신의 영화적 자산은 경험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습득된 경험조차도 다음 순간의 작업에 반영될 수 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그게 100%야. 정확하게 봤어. 솔직히 나는 네티즌이나 기자들 글에서 지적되는 비판이나 비난이 있으면 그걸 그대로 갖다가 다음 영화에 메워버려. 그럼 영화가 좋아지는 거야. 반성하면 무조건 좋아져. 찍으면 찍을수록 점점 좋아질 수 있는 건 그 때문이야.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영화를 배웠어, 연습을 해봤어, 조감독을 해봤어? 아는 게 없잖아. 그래서 그냥 주변사람얘기 듣고 그대로 하는 거야. 그게 얼마나 쉬운 건데.
사실 전작들을 통해 당신에게 종종 나왔던 지적이 영화 속에서 여성을 희생양으로써 묘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그건 한국사회에서 일반적인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보편적인 시선에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님은 먼곳에>를 보고 나면 의문이 생긴다. <님은 먼곳에>에서 나타나는 시선은 본래 당신의 것이었다고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건 당신의 심경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변화는 영화를 찍으면서 진행된 양상으로 생각된다. 영화 안에서 그런 변화가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까 말했듯이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얻어진 경험이 다음 씬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확한 지적이야. 영화를 찍으면서 심경의 변화가 도모된 거야. 감독은 본래 주인공의 내면을 통해서 관객과 소통하는 거라고. 순이라는 인물이 나야. 단지 그걸 수애가 연기했기 때문에 순이로 보여지는 거지. 그 여성의 눈을 통해 그 많은 남성들, 베트콩이든 한국군이든 정만이든 상길이든 죄다 관통해서 내가 관객과 만나는 거라고. 그래서 처음에 2~30분 촬영할 때까진 나도 헷갈려서 수애하고 소통이 잘 안 되는 거야. 이걸 뭐라고 해야 되나, 싶은 거야. 그렇게 가다 보니까 수애가 자연스럽게 순이가 돼버렸어. 월남에 가니까 순이가 돼버린 거야. 그럼 그냥 쭉 가는 거야. 나도 이건 처음 가는 탐험이었기 때문에, 이 탐험의 종점에서 나 스스로 배운 게 너무 많아.
대부분의 감독들은 자의식을 통해 영화를 찍는데 당신은 그 반대다. 난 자의식 없어. 난 무의식이 강해. 자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면 자의식이 이겨? 무의식이 이겨? 무의식이 이기지. 그러니까 난 무조건 이겨. (웃음) 웬만한 자의식이 와도 내겐 가소롭지. 난 무의식으로 승부하니까.
당신의 영화가 유희적인 속성을 지니는 것도 그런 무의식적인 반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 본능에 충실한 거야.
하지만 <님은 먼곳에>는 당신의 유희적인 태도가 최대한 배제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당신과 어울리지 않게 <님은 먼곳에>는 사력을 다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님은 먼곳에>전까진 남성끼리, 그것도 지독한 남성영화 4편을 찍었잖아. 그냥 끝까지 가본 거야. 지독한 마초주의의 신봉자같이 영화를 찍었다고. 남자끼리 노는 건 진짜 재미있어. 그런데 여자 하나 끼면 갑자기 분위기 이상해지지. 고스톱을 치던, 뭘 하던, 남자끼리 놀면 편하잖아. 난 평생 그렇게 살았어. 그런데 이번에 여자가 끼니까 불편한 거야. 맘대로 못하겠어. 그래서 조신해진 거야. (웃음) 조신해지다 보니까 유희성이 슬쩍 빠져나가는 거야. 그러다 보니 남성들의 유희가 얼마나 무책임한 행동인지 느껴지는 거야. 지금 내 왼쪽 눈은 여자 눈이라니까. (웃음) 느껴지지 않아? 한쪽은 남자 눈, 다른 한쪽은 여자 눈. 전엔 둘 다 남자 눈이었는데, 이러다가 나중에 다 여자 눈이 될지도 모르지.
나중엔 여자들끼리 노는 영화를 찍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수도 있어! 거기까지 갈수도 있어. 끝까지 가봐야지, 뭐. (웃음)
그래도 당신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말의 목적 정도는 있을 것 아닌가. 계획하지 않을 뿐, 방향만은 확실해. 영화로 세상을 바꾸겠다. 이 오만스러운! (웃음) 모든 인간은 태어나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어. 근데 난 영화밖에 할 게 없잖아. 다른 뭐로 세상을 바꿔. 당신은 글로 세상을 바꾸고자 쓰겠지만 난 영화밖에 없으니까 영화를 하는 거야. 단 세상을 바꾸는데 왕도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 뭔 소재가 와도 결국은 다 똑같은 주제야. 이상하지. 어떤 소재가 와도 다 똑같아. 파이프라인(pipe line)이야. 이 파이프라인에 뭐가 들어오던, 쇠가 들어오건, 돌이 들어오건 다 비슷해지는 거지.
사실 당신의 영화는 크건 작건 모두 다 비극성의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극적인 테두리가 특별한 건 그 와중에도 남자들은 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남자들의 판타지거든. (웃음)
그것을 뒤에서 바라보는 여성들은 혀를 차면서도 그 상황을 비난하진 않는다. 그건 그 남자들이 철이 없을 뿐, 비열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모성애가 유발된다. 하지만 <님은 먼곳에>에서 남자들이 처한 비극의 양상은 좀 다르다. 말 그대로 그들은 돈을 벌러 베트남에 간 비겁한 남자들이니까. 유희가 발생할 수 없는 자리에 남자들이 내몰린 셈이다. 유희가 없으니까 당연히 절대 놀 수 없지.
그런데 순이가 그 곳에서 유희를 발생시킨다. 그건 그 동안 당신이 보여준 남자들의 유희가 얼마나 얄팍했는지를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성이지. 나는 몰랐던 거지. 이번에 <님은 먼곳에>를 하면서 깨달은 거라니까. 아까 고백했잖아. 나는 계획이 없는 인간이야. 나는 자의식을 버린 지 오래된 인간이야. 난 오래 전에 자의식이 거세돼버렸어. 그러다 보니까 무의식에 의존해서 사는 거야. 그래서 옛날에 내가 인터뷰한 내용 보면 맨날 하는 말이 있어. 내 머리 30%, 남의 머리 70%로 영화 찍는다. 남의 자의식을 받아들이려면 난 무의식적이어야 돼. 내가 자의식이 강한데 남의 자의식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내가 여자의 자의식을 받아들이려면 내가 무의식이 돼야 가능한 거지. 내 자의식이 강하면 여자의 자의식과 충돌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들어올 수 없잖아. 요즘 만든 사자성어가 하나 있는데, 허공무도, 빌 허(虛), 빌 공(空), 없을 무(無), 길 도(道). (웃음) 한 달 전에 만들었어. 이걸 붓글씨로 써서 집에다 붙여놓으려고. 비우고, 비우고, 또 비워서, 모두 다 없애버리고 도를 닦겠다고 결심했어. (웃음)
나도 아까 고백했지만 <님은 먼곳에>는 불편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란 건 불쾌함의 의미가 아니다. 영화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니라 관람의 행위자인 내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란 의미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지 주입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를 절대 강요한 게 아니야. 나는 고백을 한 거야. 나의 고백이라고. 모든 작품은 작가의 고백이어야 되는 거야. 만약에 고백이 없다면 난 그 작품을 인정하지 않아. 남의 고백을 가져왔다거나, 자신의 고백처럼 포장했다거나, 그러면 그건 이미 작품으로서 퀄리티(quality)가 떨어졌다고 본다고. <황산벌>도 나의 고백이었고, <왕의 남자>도 나의 고백이었고, <라디오 스타>, <즐거운 인생> 모두 다 나의 고백이야. 내가 얼마 전에 미술 작품 전시회 할 때, 내 작품 제목 중 하나를 ‘고백도 습관이다’라고 지었어. 고백을 자꾸 하다 보면 습관이 돼. 고백하고 나니까 비잖아. 그러니까 자꾸 새로운 고백이 들어오는 거야. 남의 것이 다 들어오는 거야. 먹고 싸고, 먹고 싸고, 계속 순환하는 거야. 내 안에서.
결국 당신의 영화는 자신의 주의나 주장을 담아내고자 함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인정을 담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 인정해야 극복할 수 있어. 인정하지 않는 인간은 절대로 극복할 수 없어. 인정해야 반성하는 거야. 반성해야 개선할 수 있는 거지.
이쯤 되니 당신의 남성 판타지를 더 이상 즐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몰라. 또 언젠가 확 돌아갈지. (웃음) 내가 지금 쉰 살이니까 앞으로 백 살까진 살아야지. 그럼 아직 50년이나 남았네. 50년 영화 찍을 거니까 알 수 없지. 일단 계속 반성하면서 열심히 잘 찍어야 돼.
당신은 유희적 인간이다. 당신이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란 점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웃음) 그런데 일도 많이 했어!
일조차도 노는 것처럼 하지 않나. 맞아. 노는 것처럼 하지. (웃음)
노는 듯이 일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본다. 대부분 일반적인 사람들은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나. 그건 이 현대사회 자본주의의 모순이고 불행이야. 니체가 인간의 본능 중에 원초적인 것을 세가지로 얘기했다고 하던데, 그건 웃음과 춤과 놀이야. 그건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적 본능에서 뗄 수 없는 요소라고. 근데 현대 사회에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 웃음과 춤과 놀이를 일과 분리시켜버린 거야. 사실 옛날에 경작사회나 수렵사회에서는 춤추면서 사냥을 하고, 놀면서 경작을 하고 그렇게 웃으며 일을 했다는 거지. 근데 인간의 이성이 지나치게 성공욕망에 사로잡히면서 끊임없이 일에 대한 강도가 높아지고, 그러니까 웃음과 춤과 놀이는 자꾸 분리되는 거야.
아무래도 오늘날의 정서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이 나한테 자꾸 올드하다, 고 하는데 난 올드한 게 좋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빈티지(vintage)가 오래되면 앤틱(antique)이 되는 것처럼. 그런데 빈티지 옷을 입는다고 그 사람이 빈티지해지는 게 아니란 거야. 인간이 빈티지해 져야지. 옷이 빈티지라고 그 사람이 빈티지가 되냐고. 나는 내가 빈티지가 되고 싶어. 그래서 난 좀 올드하고 싶어. 그리고 요즘 ‘쿨하다’는 말을 쉽게 쓰는데, 난 쿨하다는 말을 굉장히 시니컬하다, 냉소적이다, 비겁하다, 이렇게 받아들여. 죽으면 어차피 다 쿨해져. 살아있는 한 ‘핫(hot)’하게 살아야지, 뭘 쿨하게 살아? 죽은 놈처럼. 무슨 좀비야? (웃음) 제발 다들 쿨한 거 좋아하지마. 난 쿨한 거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가래침 뱉고 싶을 정도야. (웃음) 그런 사람들하곤 소통이 안돼.
그건 당신의 영화가 극한까지 치닫고 나서야 끝을 본다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쿨하다, 라는 말은 극한에 도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지하는 속성이 있으니까. 당신이 좋아할만한 단어가 아닐 만하다. 그건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소위 매너라는 말로 포장된 비겁함이야. 쿨하다는 말이 개인주의에서 나온 거야. 서양도 개인주의 이전에 집단주의가 있었다고. 광장문화야. 이게 방문화로 온 거지. 개인주의는 내가 당신한테 침해 받기 싫으니까 나도 당신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심리야. 이게 쿨함이라고. 인간은 점점 더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기계가 되는 거야. 그래서 더 외로움에 시달려. 그래서 사랑 신화가 생긴 거야. 돈 신화 못지 않게. 온통 로맨스로 모든 결핍을 메우려고 하는 거지. 그게 심해져서 이젠 원 나잇 스탠드(one night stand)까지 나왔어. 그게 쿨한 문화의 현실이라고. 난 쿨한 거 싫어. 혼자서 땅속에 가던, 화장터로 가던, 죽으면 어차피 외로워. 어차피 소외돼. 그럼 살아있을 때 핫하게 살아야지. 왜 살아있는 사람이 쿨하게 살아. 난 그게 너무 싫어. 그래서 내 영화 보면 핫하잖아. 나는 쿨한 영화 못 찍겠어, 빈정상해서 못 찍겠어. 난 냉소주의를 빈정주의라고 해. 그래서 난 온정주의파야.
당신 주변에 믿을만한 동지들이 존재하는 건 그런 점을 좋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럼. 피가 뜨거운 인간들이 모여있지.
최석환 작가와 당신을 떼어놓고 당신의 영화를 말하기란 힘들다. 서로 궁합이 잘 맞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서로 달라서 그래. 굉장히 달라. 걔는 물리에 강해. 난 화학에 강하고. 걔가 토목과 나왔어. 그러니 물리, 수학 이런 건 꽤나 알고 나왔을 거 아냐. 시나리오는 물리야. 그리고 영화는 화학이라고. 씬(scene)과 씬은 물리라고. 두 개의 텍스트(text)로서의 물리야. 이게 충돌하는 거야. 씬 바이(by) 씬, 난 그 ‘바이’에 드라마가 있다고 봐. 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이동하는 과정.시에서 한 줄의 행은 텍스트잖아. 그 다음 행 사이에 행간이 있어. 이게 컨테스트(context)야. 하나의 문장이 건너가면서 다른 뉘앙스로 화학반응이 일어나서 감응을 줄 때 그게 시가 되는 거잖아. 아니면 그게 논문이지. 시는 연역법이 아니라 대부분 도치법이거나 귀납법이야. 이 영화는 정확하게 도치법에 따라서 레토릭(rhetoric)을 간 거라고. A와 B는 같고, B와 C는 같으니까, A와 C는 같다, 이게 아니라고. 텍스트(text)를 통해서 컨테스트(context)를 이해했을 때, 훨씬 더 이모션(emotion)이 커진다라는 거야. (탁자 위, 명함과 담배를 양손에 잡고) 명함하고 담배가 땅하고 부딪히면 열에너지가 나와. 이게 난 드라마라고 본다고. 말 그대로 드라마는 화학 작용이야. 내가 잘하는 건 그거야.
상길은 자신이 사랑하는 애인이 있음에도 부모의 뜻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이와 결혼한 셈이다. 결말부에서 순이가 상길의 뺨을 때리는 행위는 어쩌면 그에 대한 질책의 의미가 내포된 게 아닌가 싶다. 상길은 그에 저항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건 제도에 대한 원망이라기 보단 제도에 대한 반발이지, 반발. 순이는 상길한테만 비겁했어. 상길이 뭐라 그러는데도 당당하게 대답하지 못해. 내가 수애한테, 이제 순이는 상길이 이후로 자신이 만나게 될 모든 사람한테 단 한번이라도 비겁하게 피해가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인간으로 남게 될 거다, 라고 설명했어. 시어머니한테마저 정면으로 돌파하잖아. 제사를 지내는데, 네가 어땠길래 네 남편이 군대 가고 월남 가냐, 이러니까 (순이가) 상길씨, 애인 있다 아닙니까, 받아 치지. 지금도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자기 남편 바람 핀다는 거 말하는 게 쉽지 않아. 이건 대단한 도발이야. 그 때 당시면 이건 쳐죽일 년 취급 당할 일이야, 암탉이 우는 정도를 넘어선 거지. 이건 역모라고, 역적이야.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본부인이랑 첩이랑 같나? 난 첩자식이라도 데리올끼다, 나가라! 이러잖아. 도발을 했으니까 나가야지. 나갔더니 친정아버지는, 그 집 귀신이 돼라, 그러고 사실 그 때 순이는 선택할 수 있었어. 시댁으로 안 돌아갈 수 있었다고. 자기 발로 나갔으니까. 자기 길을 갈 수 있잖아. 하지만 순이는 예의 바른 여자였던 거지.
남편 군대간 것을 며느리에게 질책하는 시어머니와 결혼한 딸을 내놓은 자식 취급하는 아버지가 공존하는 시대에서 순이의 저항권을 상길의 그것과 같은 무게로 나열하기란 억울해 보인다. 그 당시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란 한계가 명확하지 않나. 순이의 선택권은 사실 부재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회환경에서 순이가 갈 수 있는 길은 서울역밖에 없어. 그때 상경한 여자의 80%는 구로공단 가서 공순이 했고, 10%는 부잣집 가서 식모살이 했어. 그래도 베트남에 식모라도 보내는 줄 아냐고, 대사로도 나오잖아. ‘남은 쥐를 마저 잡자!’ 나올 때. (웃음) 그것도 아니면 창녀가 되는 거야. 그 당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는 거야. 순이가 그걸 모르겠어? 그 시대 여자들이 얼마나 삶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하지만 순이는 그 전에 예의 바른 여자야. 그 집 귀신이 되라는 친정아버지의 말을 따른 거야. 그런데 시어머니는 자기 남편이 6.25때 죽었어. 그런데 아들이 베트남에 가버린 거지. 어떡할 거야. 집에 있던 금붙이 가져다가 베트남 가서 아들 살리겠다고 결심하는 거지. 나중에 그 금붙이를 순이가 베트남 가져가서 트럭 사는데 쓰잖아. 어쨌든 순이가 들어오니까 망망하게 앉아있던 시어머니가 앞장 서라며 나서잖아. 그래서 순이가 결국, 어머니, 제가 갑니다, 과감한 선택이야. 난 이 시퀀스의 설정이 굉장히 탄탄해서 좋다고 생각해. 어쩌면 일반관객들은 좀 지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 난 침착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침착한 것과 지루한 건 효과나 현상이 비슷하게 나타나지만 누군 지루하게 보고, 누군 침착하게 보고, 그 차이일 뿐이야.
역사란 기제 안에서 사실 여성의 주체성은 함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역사성에 대한 저항적 태도를 순이의 주체의식으로 드러내는 것 같다. 아주 과감하게, 단 앞에 전제를 하나 붙여. 예의 바르게, 밀어붙이는 여자라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도 그런 거 아냐. 바리데기도 그런 여자 아냐. 심지어 잔다르크도 그런 여자야.
전작들에서 등장하던 여성들도 사실 비중이 작아서 국한적으로 태도가 읽혔을 뿐, 소극적인 여자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황산벌>에서 계백의 처는 묘하게 순이와 닮은 지점이 있다. 남성에게 일갈하지. 계백 처의 대사가 압축파일이라면 그걸 알집으로 확 풀어버린 게 순이야. (웃음)
결국 <님은 먼곳에>는 수동적인 여성이 능동적인 여성으로 변모하는 로드무비다. 한가지 의문이 드는 건, 순이가 원래 수동적인 여성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마치 수동적인 태도를 위장한 여성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위장이라기 보단 억압된 여자지. 그 억압성을 풀기 위해서 두 소녀를 장치로 넣었어. 하나는 미군 보충대에서 공연하다가 실수해서 정만한테 따귀 맞고 베란다에서 앉아있을 때, 옆 베란다에서 꼬마애가 문을 열잖아. 여섯 살짜리 여자애야. 순이가 쳐다보니까 그 소녀가 눈으로 말을 해. 언니, 왜 그러고 있어. 언니도 나같이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잖아. 이런 대사를 친다고 생각하라고 내가 수애한테 그랬어. 그랬더니 어떻게 돼. 순이가 씩 웃지. 금방 따귀 맞고 나온 여자가 미친년처럼 씩 웃고 앉았어. 이상하잖아. 그건 감독의 장치야. 그 다음에 길거리에서 정만 일행이 국수를 먹는데 순이는 또 국수도 안 줘. 그냥 뒤돌아 앉아있어. 돈이 없으니까 남자 넷이서만 먹어. 완전히 여성성을 소외시켜버리는 거 아냐. 근데 열여섯 살 정도 먹은 듯한 베트남 여자애가 순이 앞을 지나서 극장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뛰쳐나오더니 자전거랑 부딪혀서 시선을 환기시키지. 그 뒤로 폭발이 일어나고 미군이 와서 총을 쏘는 거야. 그런데 하필이면 왜 순이 앞에서 죽냐고. 다 의도가 있는 거 아냐. 순이의 억압된 여성성이 죽는다. 순이다, 저건. 수애한테 또 그렇게 설명했어. 억압성이 죽어가니까 순이 안에 평화가 온다. 그니까 그 순간 그 여자애를 바라보는 순이에게 공포와 평화가 같이 오는 표정이 나오는 거야. 그렇게 디렉션을 준거야. 그래도 쟤는 열여섯 살에 죽어가는데도 자기 할 일을 하고 죽었다. 넌 뭐하냐? 그 다음부터 진짜 써니가 되는 거야.
결국 순이가 써니로 변하는 과정은 단순히 남편을 찾기 위한 여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찾아간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만을 비롯한 남성들과 순이의 관계가 역전된다. 거기서부터 남자들의 졸렬함이 순이의 주체적 태도와 대비되어 부각되기 시작한다. 순이는 열심히 해서 된 게 없어. 남편 찾으러 가는데, 거기에 정만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거야. 결국 미군부대 바에서 ‘수지Q(Suzi Q)를 부르면서 자신이 얻은 달러를 계속 무대 뒤로 집어 던지잖아. 그 다음 씬에서 정만이랑 남자들은 그 달러를 꼬깃꼬깃 펴고 앉았어. 그런데 순이는 용득한테, 중령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지. 그래서 갔어. 남편을 만나려면 순이의 의지로 중령과 쇼부를 쳐야 하는 거야. 잠을 자서라도. 그러니까 문을 닫고 자기 의지로 돌아선 거 아냐. 중령은 한번도 꼬신 적이 없어. 중령은 당연히 할말을 한 거야. 가면 죽는다고. 결국 순이가 돈도 다 던져줬는데 남자들은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는 거지. 결국 용득이 자기 돈 먼저 태워. 그리고 성찬 한번 쳐다봐. 암말도 못해. 철식 봐. 암말도 못해. 그리고 정만은 고개 숙여. 암묵적 동의. 다 걷어. 다 태워. 이 돈이 무슨 돈이야. 순이가 약속을 지켜서 저렇게 남편에게 가려고 하는데 우리는 순이의 약속도 제대로 못 지켜주고,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한 거지. 그렇게 구원받은 거야.
결국 돈을 태운 건 그 구원에 대한 지불행위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그거지. 정만이 번 돈이 아니라는 거야. 순이는 자기가 돈까지 벌어다 주면서 갔고, 남자들은 선택을 한 거야. 저런 돈을 가지고 간다는 건 남성성을 끝까지 정당화하려는 것 밖에 안되기 때문에 반성을 시킨 거라고. 의도적으로.
순이를 연기하는 수애의 대사는 전체적으로 많지 않은 편이다. 이것이 수애의 모호한 표정과 함께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의 너비를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수애한테 그랬어. 감독님, 주연 배우가 대사가 너무 없어요. 수애가 그래서, 영화에서 제일 저급한 전달방식이 대사야, 라고 내가 그랬더니, 아, 그래요. 몰랐어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원래 그래, 그렇게 믿어, 그랬지. 드라마는 블로킹(blocking)이야. 드라마의 어원이 희랍어(希臘語)로 동작, 움직임이라고. 이건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거야. 움직임 그 자체가 드라마야. 게다가 이건 구조주의 시나리오야. 순이가 구조적 전진을 하게 해놓은 거야. 순이의 움직임이 드라마인 거야. 월남 가는 것, 가는 것이 드라마야. 가서 밴드하는 것. 밴드하는 게 드라마인 거야. 미국에서 끊임없이 실험한 구조주의 시나리오가 이거야. 이야기의 구조적 전진이 서사성에 꼭 필요한 거야. 이게 서사기 때문에 그래. 서사가 아니면 내가 구조적 전진을 강조하지 않아. 서사의 본질은 어떤 인간이 먼 길을 떠나면서 수많은 경험을 하고 그를 통해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받고, 결국 환골탈태해서 돌아오면 처음에 갔던 내가 아니라는 거야. 그게 서사의 목적이라고. 그것을 수애한테 계속 강조시켰지. 계속, 나는 너한테 감정을 디렉션하지 않는다. 심정만을 설명하고, 동선만 내가 잡아주겠다. 이렇게.
아무래도 <님은 먼곳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수애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백지같은 순이의 표정이 모든 의미를 함축하는데 좋은 그릇이 된다. 그런데 다들 그저 수애가 예뻐 보인대. 수애가 저렇게 예쁜지 몰랐대. 어제 어떤 기자가 그러더라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앵글을 예쁘게 잡을 수 있냐고. 미치겠어. (웃음) 내가 한 예를 들어줄게. 베란다에 앉아서 꼬마랑 만나는 장면에서 표정 있잖아. 그걸 찍는데, 내가 봐도 너무 예쁜 거야. 그래서 촬영기사하고 조명기사, 미술, 분장까지 불러서, 얘 너무 예뻐. 무슨 ‘보그’ 표지 찍어? 못 생기게 만들어. 빨리. 이렇게 최대한 안 예쁘게 찍으려고 한 거야. 모든 컷을 다. 여배우는 자기 앵글이 어디가 예쁜지 다 알아. 내가 수애한테 그랬어. 너 예쁘게 보이려면 순이가 아니다. 예쁘게 보이려고 하지마. 예쁜 척 하지마. 그리고 카메라도, 예쁘게 잡지마. 그냥 잡아. 잡아서 예쁜 건 할 수 없지만. 조명도, 절대 예쁘게 캐치하려 하지마. 그렇게 찍었는데 수애가 이렇게 예쁜지 몰랐다고 그래. 왜 그런지 알아? 심정이 예뻐서 그런 거야. 내가 심정만 얘기해줬다고 그랬잖아. 마음이 예뻐 보이니까 얼굴도 예쁜 거야. 확실히 한 컷만 놓고 보면 수애가 예뻐 보일만한 얼굴이 하나도 없어. 근데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너무 예뻐. 저 여자가.
수애에게 그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이 관건이었을 것 같은데,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수애가 그랬어. 자기는 연기에 큰 자신이 있는 배우는 아니다. 연기를 하는 기술 좀 가르쳐달라고. 그래서, 연기하지마. 연기하는 기술은 없다. 연기는 창작이야, 연기는 예술이야. 연기는 기술이 아니다. 딱 이렇게 잘라 말했어. 그랬더니, 그래도요, 그러길래, 그래도 뭘 그래도야. 연기하지마! 그랬더니 얘가 연기를 하나도 안 했어. 연기한 장면은 하나도 없어. 내가 연출할 때 연기하는 거 들키면 나한테 다 NG야. 정진영이 정만이 연기를 막 해. 캐릭터를 만들어야 되니까. 그럼 컷. 너 연기하는 거 지금 나한테 들켰어. 나한테 들키면 내 뒤통수를 보고 있는 관객한테 다 들키니까 연기하는 걸 안 보이게 해줘. 그랬더니 너무 잘했어. 연기 안 했으니까. 있는 현실을 그대로 믿고 한 거니까. 내 연출의 원칙은 연출이 보이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테이크가 뭐 어떠느니, 연출이 빛났느니, 그러면 난 실패한 감독이야. 좋은 영화는 카메라가 보이지 않아야 돼. 카메라가 보이는 영화는 실패한 영화야. 내 기준엔 그래. 그렇지 않아? 난 연출도 안 보이게 하고, 연기도 안 보이게 해. 그래야 이 거짓말이 관객들한테 믿음이 가는 거야. 그래서 스타일을 싫어한다고.
당신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과 밀착해 보이는 건 같은 이유일 것 같다. 심지어 신인 연기자들조차 말이다. (이)준기 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원래 이십 대 남자애들이 그렇잖아. 자기가 좀 남자답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하지. 그래서 담배도 의기양양하게 뻑뻑 피워대고, 그래서, 너 영화 끝날 때까지 현장에서 담배 조심스럽게 펴, 그랬지. 그리고 장항선 선생님이 오니까 벌떡 일어나서 크게, 안녕하세요! 그러잖아. 그래서, 너 그러지마. 인사도 다소곳하게 하고 일어나지마, 그랬지. 그렇게 6개월 동안 살았어. 그러니까 연기지도가 필요 없어. 그냥 그대로 가면 공길이야. 그래서 걔 공길이 빠져 나오는데 6개월 걸렸어. (웃음)
배우자체를 캐릭터로 만들어버리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난 연기지도가 필요 없는 사람이야. 난 인간의 캐릭터나 배우의 본능을 끌어내려고 하지, 그 사람의 기술을 끄집어내려고 안 해, 기술은 다 버려버려. 기술을 싹 비우고 나면 그 다음에 본능이 나와. 그걸 잡는 거야. 그게 메쏘드(method) 연기야.
하지만 당신은 캐스팅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가 항상 주관하는 걸로 아는데. 난 아무나 와도 그렇게 만들어. (웃음) 다른 배우들도 얘기 안 했을 뿐 마찬가지야. 박중훈도 나한테 와선 코미디 안 하잖아. 다른 데 가서는 코미디도 하고 그렇게 망가져도 나하고 할 땐 안 했잖아. 안성기 씨 봐. 안성기 씨 다른 영화에서 연기할 때 연기 패턴이 보이잖아. <라디오 스타>에서 그게 연기한 거 같아? 아무나 와도 된다니까, 나한테. (웃음)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 아닐까? 소통의 문제야. 나는 소통을 할 때 필터가 없어. 내가 당신이랑 처음 만나서 인터뷰를 해도, 당신가 어떤 인간인지, 전에 뭘 했는지, 말투가 어떤지, 이런 건 아예 신경 안 써. 그냥 노 필터(no filter)! 다이렉트(direct)! 오로지 정면을 보고 한 다음, 그 뒤로 잊어버려. 왜냐면 다음에 또 다른 사람과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당신을 잊어버려도 기분 나빠하지마. (웃음) 난 눈 앞에 있는 사람한테 최선을 다할 뿐이야. 배우한테도 그래. 이 배우랑 얘기하면 이 배우랑 최선을 다하고 돌아서면 잊어먹어, 또 다른 배우 만나면 정확하게 그래. 비켜서는 법이 없어. 정면돌파지.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에 충실하자는 잠언적 삶에 가깝게 보인다. 그럼!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 난 계획을 믿지 않아. 옛날에 계획대로 했는데 되는 게 하나도 없더라. (웃음) 당신은 계획대로 다 됐어? 아니지? 난 그래서 계획을 안 해. 어차피 안 믿으니까. (웃음)
<왕의 남자>이후로 1년에 한편씩 영화를 찍고 있다. <님은 먼곳에>는 10개월 만에 나왔어.
심지어 <즐거운 인생>개봉하자마자 <님은 먼곳에>작업에 바로 들어갔다. 설마 이번에도? 들어가야 되는데 이 최작가가 게을러서. 이씨! (웃음) 내가 줄거리 다 불러줬는데 그걸 아직 정리 못했어.
<님은 먼곳에>는 70억의 제작비가 투자됐다. 전작들과 비교해서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큰 돈을 들인 셈인데 아무래도 흥행성적이 남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미치는 영향이 크지. 만약 이게 손해를 본다. 그럼 앞으론 이런 영화 안 찍어야지. 찍으면 바보지. 이제 아주 그냥 얄팍한 영화 찍어야지. 제대로 얄팍한 영화는 내가 잘 찍는다니까. (웃음) 쉽게 말해서 맨발로도 찍어. 온 힘을 써서 절대 안 찍어. 이렇게 온 기를 다 뽑아서 찍었더니만 관객이 안 들었어. 그럼 그냥 설렁설렁 찍어야지. 내가 짱구야? 나도 먹고 살아야지. (웃음)
<님은 먼곳에>는 당신에게 특별한 전환점이 될 것 같다. 전작들은 당신의 내부에 있던 것들을 꺼내서 작품에 채워 넣는 작업 같았다면 <님은 먼곳에>는 당신의 내부에 있는 것들과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간의 충돌이 느껴진다. 게다가 당신이 처음으로 남성이 아닌, 여성에 개입했다는 점도 새로운 자극이 됐을 거란 예상을 하게 됐다. 놀라운 건, 난 이거 진짜 내 인생에서 특별한 경험이야. 굉장히 나한테는 중요한 위치의 작품이라고. 내 안에서 내 자의식이 스스로 따귀를 맞은 거야. 당신이 불편했다고 그랬잖아. 맞아. 나인들 이걸 만들어가면서 안 불편했겠어? 그걸 인정하는 과정에서 나한테도 엄청난 내면의 변화가 생긴 거야. 처음부터 이걸 계획하지 않았다고. 아, 물론 기본적인 계획은 했지. 그런데 그 계획애 동화되진 않았지. 그런데 따라가다가 당신 말대로 시선에 개입해버린 거야. 이런 경험은 인생에서 처음 해봤어. 그러니 이 작품은 나한테 있어서 진짜 이상한 영화야. 내가 다음에 영화 찍는데 있어서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클 거란 말이야.
사실 전작들은 결말부에서 상승하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님은 먼곳에>는 가라앉는 느낌이다. 결말로부터 얻어지는 감상이 다른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선의 변화가 느껴진다. 정확하게 봤어. 당신이 화학적인 인간이라서 그래. 화학을 정확하게 아는 거야. 최작가는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 이건 이준익 감독의 제1기 마감작이다. 최작가가 나한테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이 영화는 나에게 1기의 마지막이자 2기의 시작점에 서 있는 거야. 이 다음은 나도 모르는 세상이라고. 이 세상이 내게 그 다음을 가르쳐준 게 없어. 상길이 순이에게 따귀를 맞은 다음에 그들과 그들의 그 다음 인생에 대해서, 난 내가 현존한 삶에서 배운 게 없어. 이제 그 길을 찾아가는 시작점이 여기야. 이 영화의 끝이 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란 걸 제일 먼저 안거야. 그러니까 난 아직 에너지가 식지 않을 수 있는 거야. 지난 5년 동안 1년에 한 편씩 찍고도, 게다가 이 작품은 불과 10개월 만에 찍었고. 그것도 월남까지 가서, 70억까지 썼고. 그러고 와서 지금까지 일주일 동안 인터뷰를 30개씩이나 해놓고서도 아직도 핏대가 서있는 건, 충혈된 상태 그대로 난 이렇게 멈춰있고 싶은 거야. 이 다음에 날 어디로 끌고 가야 할지, 계속 붙잡고 있는 거야. 이걸 놓치지 않으려고. 그 에너지를 꽉 잡고 있는 거지.
변화가 두렵지 않나? 왜 두려워? 즐겁지. 난 항상 매 순간 인생의 벼랑에 서 있었기 때문에 평지가 오면 못 살아. 난 벼랑이 편해. 외줄이 편해. 항상 외줄에 서 있어야 편해. 땅에 내려오면 막 멀미나. (웃음)
<님은 먼곳에>에서 당신의 의도와 결코 무관하게 폭소를 부르는 씬이 하나 있다. 응? 뭐?
‘남은 쥐를 모두 잡자!’라는 플랜카드 걸린 장면에서. (웃음) 아! 그건 우연이야. 그건 작년 10월 달에 찍은 거거든. 이메가가 아직 당선도 되기 전이야. 안 그래도 기자 시사하는데 거기서 다 웃는 거야. 이런 후폭풍이. (웃음)
사실 촛불시위 현장을 둘러보며 종종 당신 영화가 생각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물대포를 맞고, 방패에 찍히는 그런 치열한 상황 속에서도 노래하고 춤추며 유희를 발생시키고 있더라. 그 광장에서 말이다. 사실 내가 배후라니까. (웃음) 바로 그거야. 놀고 있는 거지. 내가 영화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것도 그런 의미야.
사실 논다라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예술과 가장 가까운 행위니까. 당신의 유희적 태도는 결국 당신의 예술적 근본이자 자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난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니까! (웃음) 난 사실 세상에 대한 증오가 많은 사람이야. 그게 영화에 나와. 유희란 건 그냥 놀자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