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월버그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듯 10대를 관통했다. 암담한 어제는 지났다. 다만 결코 잊지 않는다. 이제 그는 가장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족과 함께 오늘을 산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밀수업자였던 크리스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벗고 새로운 삶을 입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가 있다. 가족은 그 남자가 사는 이유다. 그러나 마약밀수업자들의 운반책 노릇을 하던 처남이 얻게 된 큰 빚을 대신 갚기 위해서 다시 밀수를 모색해야 할 상황에 내몰리면서 그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콘트라밴드 Contraband>는 어느 가장의, 아버지의, 결국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마크 월버그는 평범한 삶을 꿈꾸는 그 가장의, 아버지의, 한 남자의 사연을 대변한다. ‘딸바보’로 잘 알려진 마크 월버그(Mark Wahlberg)는 할리우드에서도 가정적인 남자로 손꼽히는 남자다. “아이가 생겼을 때, 미치도록 행복했다. 내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삶이 실현됐으니까.”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스타배우이자 행복한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그의 오늘은 한때 결코 기약할 수 없는 미래였다.
메사추세스주 보스턴 남쪽 교외에 자리한 도체스터에서 태어난 마크 월버그는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10대를 건넜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열한 살 되던 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마크 월버그는 열세 살 무렵 코카인에 손을 댔다. 열네 살의 나이로 학업을 중단했고, 열여섯 살에는 교도소에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마약과 폭력은 마크 월버그의 유년시절을 기워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회복시킨 건 가족이었다. 2년 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간 그는 검정고시 자격을 얻었다. 특히 희대의 아이돌 스타로 군림했던 뉴키즈 온 더 블록의 원년 멤버인 친형 도니 월버그는 동생의 삶을 견인하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의 원년 멤버로 발탁됐지만 스스로 기회를 날려버린 적이 있었던 마크 월버그가 후에 마키 마크라는 힙합 뮤지션으로 데뷔해서 성공을 거둔 것도 제작자로서 서포트해준 형 도니 덕분이었다.
결과론에 가깝지만 마크 월버그가 경험한 이른 일탈은 현재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을 위해 마련된 이른 성장통이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이른 나이의 과오는 그만큼 삶의 방향을 일찍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후회할만한 짓을 많이 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되기까지 스스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진정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때까지.” 그가 추구하는 ‘제대로 된 삶’은 배우로서 실현됐다. 배우 마크 월버그의 경력에 있어서 방아쇠가 된 건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감독의 <부기 나이트>다. 7~80년대 미국의 포르노 산업의 열풍과 몰락을 살피는 이 작품에서 마크 월버그는 당대의 포르노 스타로 출연하며 남다른 물건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냈다. 조지 클루니와 함께 출연한 걸프전 배경의 코미디물 <쓰리 킹즈>와 팀 버튼 감독의 리메이크 SF물 <혹성탈출> 그리고 다채로운 출연진과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 범죄물 <이탈리안 잡> 등으로 할리우드에서 확고한 위치를 만들어나갔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로 전미 비평가 협회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유년 시절 온갖 비행을 전전한 콜린 패럴이 야생마 기질의 배우로 성장한 것과 달리 마크 월버그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배우가 됐다. 가족의 불화와 가난으로 인해서 길거리의 비행에 내몰렸던 그가 건강하고 정직한 이미지로 거듭나며 가족적인 가장의 면모를 갖추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길거리에 내몰려 스스로를 망쳐가던 시절에 그가 꿈꾸던 삶이었고, 영화를 통해서 그런 희망을 회복해나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콘트라밴드>는 마크 월버그의 자전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연배우뿐만 아니라 직접 제작자가 되길 자처한 그는 자신이 연기한 크리스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얻었다.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상황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많은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각각 다른 상황에서 생각과 행동을 이어나가는 방식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착하고 성실한 남자다. 문제를 해결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방법을 찾아 나간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고단하고 간절한 여정에 마크 월버그는 기꺼이 동참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제작된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 <콘트라밴드>는 원작의 뼈대를 최대한 살리고 할리우드의 효율적인 제작방식으로 새로운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특히 아이슬란드에서 활동하는 감독 겸 배우이자 <콘트라밴드>를 제작하고 원작에 직접 출연한 바 있는 발타자르 코크마쿠르(Baltasar Kormakur)가 연출을 맡았다는 것도 이색적이다. 마크 월버그는 그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배우이기도 한 그는 카메라 앞에서도, 카메라 뒤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굉장히 잘 파악한다. 다른 사람과 소통할 줄 알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법을 안다.” 뉴올리언즈와 파나마를 오가며 로케이션으로 진행된 촬영은 단 37일만에 종료됐다.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적지 않은 액션 신이 연출된 이 작품이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됐다는 건 결국 제작진들의 신뢰로 구축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콘트라밴드>는 올해 오프닝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현재 마크 월버그는 발타자르 코크마쿠르의 새로운 코미디 연출작에 출연을 결정하고 덴젤 워싱턴과 함께 호흡을 맞출 준비를 하고 있다.
마크 월버그는 소문난 타투 마니아다. 지난 해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문신 제거 시술을 받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아이들이 내 문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그 광경을 목격하게 만든 건 아버지로서 전하고픈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신을 지우는 고통을 보여주면서 어떤 행동에는 책임져야 할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일찍이 삶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을 체험했기에 그 뼈저린 교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진심, 마크 월버그에게 있어서 지금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가 매일 같이 돌아가야 하는 집에 있다. “나는 두 딸과 두 아들이 생기기 전까지 가정적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이 나를 변화시켰다. 영화에서처럼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각할 여지도 없는 문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마크 월버그는 오늘을 산다.
재앙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처럼 인간은 자신이 쌓아온 문명의 풍요로부터 추방당했다. 과거를 대변하는 앙상한 풍경들이 주검처럼 나뒹굴며 문명의 단절을 증명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재앙 아래, 삽시간에 스러져간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피폐한 삶을 연명하며 죽음을 향해 정처 없는 걸음을 옮긴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삶이란 무력하다. 그들에게 허락된 건 단지 남아있는 생명을 부지하는 본능뿐이다. 살아남았다는 말 자체가 비극이다. 희망은 완전히 증발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들이 비틀거리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곳은 이미 끝장난 세계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될 수 없는 곳이다. 그 세상에 남겨진 인간들은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 생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 단지 살아남았고 죽을 수 없어서, 혹은 죽을 용기가 없어서, 유효하지 않은 생이 하루하루 연장될 뿐이다. 마치 짐승과도 같이 그 삶엔 인간적이라 부를 만한 어떤 근거가 없다. 이미 인간적으로 살아가겠다는 노력 자체에 의미가 없다. 폐허로 내려앉은 문명의 지난 흔적들은 인간이 쌓아 올렸던 모든 역사를 거짓말처럼 되돌린다. 거대한 재의 기둥이 된 나무들은 하나씩 쓰러져가고 바다마저 잿빛으로 물든 세상엔 한기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마치 유령처럼 세상을 떠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그 끝장난 세계의 풍경에 에워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아이는 묻는다. “우린 착한 사람인가요?” 아버지는 답한다. “그렇단다.” 선악에 어떤 의미를 둘 수 없는 세상에서 아이는 선을 묻고 아버지는 선을 답한다. 희망을 꿈꾼다는 것이 불순한 세상에서 부자(父子)는 선을 꿈꾼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일말의 희망이다. 단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켜야 할 아들이 그 빌어먹을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발 남은 총알을 장전하기 망설이는 건 그 두 발의 총알이 자신과 아들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그 총알로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의 아들부터. 그리고 그 전까진 살아남아야 한다. 불을 옮기는 사람으로써, 선의 방향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 너머엔 어떠한 희망도 없다. 그럼에도 그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건, 불행히도 그 부자가 인간으로 태어난 덕분이다.
<더 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종말을 지나쳐버린 인간들의 껍데기만 남은 일상을 살핀다. 그리고 그 얇은 껍데기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를 지켜나가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단지 살아남았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선 누군가를 해쳐야 하고, 해치지 않기 위해선 굶주리고 죽어가야 한다.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는 부자는 남쪽을 향해 전진한다. 그 발걸음엔 어떤 의욕이나 야심이 없다. 그저 살아야 한다. 걸어도 걸어도 희망 없는 내일을 향해 살아나가서 전진할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살아간다는 의미를 환기시키고야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참혹한 풍경에서 몇 발치 벗어나 스크린을 응시할 누군가가 마음의 정화를 느끼게 된다면 그건 결코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다. 하늘과 바다, 대지 구석까지 잿빛으로 가득한 세계는 되레 보는 이의 현재를 환기시키고 그 세계 속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부자의 전진을 통해 제 삶을 살필 것이다. 그 황폐한 세계 한가운데서 스스로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말하며 전진하는 부자는 볕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음습한 세상에서 입김을 내면서도 종래까지 인간적인 양심의 체온을 잉태시키고 유지해나간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현세의 관념 따윈 온전히 증발해버린 곳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죽음을 고민한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만약 원작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하여 <더 로드>에 좋은 평을 내릴 수 없다는 지적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이 있고, <더 로드>가 있었다. <더 로드>를 추켜세울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원작에 예속돼버린 것들이다. 그 황폐한 세계관의 디자인은 작가의 손으로서 이미 기록된 것의 증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원작에 대한 존경심을 충실하게 반영한 작품이기도 하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라 할지라도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 아래 매몰된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러한 영화의 결과물을 보고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불평만 늘어놓는다는 건 영화의 입장에서 분명 억울한 일이 될게다.
<더 로드>는 분명 비범한 작품이다. 걸작이라 불리는 원작의 유려한 활자를 장엄한 영상으로 치환한 <더 로드>는 비범한 텍스트의 위엄을 훼손하지 않는 이미지들의 나열만으로도 일단 성공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그 재현성이 어떤 진심을 담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보다 높은 평가가 가능하다. 원작의 비범한 양태를 훼손하지 않음과 동시에 그것이 품은 감정적 내면을 원작과 다른 판본의 틀 안에서도 온전히 전달해낸다. 텍스트를 통해 막연하게 짐작하거나 연상했던 이미지들이 구체적인 자리를 잡고 시선을 압도해낸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남자(비고 모텐슨)와 그의 아들(코디 스미스 맥피)은 황량한 풍경에 둘러싸인 채 남쪽으로 내려간다. 특별한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세상은 끝났고, 그 끝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더 이상 공존을 꿈꾸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이고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건축한 문명의 이미지들은 새로운 약육강식이 도래한 묵시록의 밀림을 황폐하게 치장한다. 그 사이에서 남자는 오래 전 사별한 부인(샤를리즈 테론)을 꿈꾼다. 이토록 피폐한 현실이 도래하게 된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건 오로지 꿈의 환각이다. 꿈에서 과거를 보는 남자는 현실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선악의 구별조차 무의미한 세상에서 선한 이가 되겠다고 남자는 아들에게 다짐한다. 스스로를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라 설명하는 아버지는 아들에게 일말의 빛을 부여한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원작에 나열된 텍스트를 신 바이 신의 풍경으로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참혹하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묵시록의 장관을 스크린에 소환한다. <더 로드>가 구축한 이미지는 원작으로부터 연상되는 풍경의 자취를 따라 그려지고 나열된다. 사실 코맥 매카시의 원작에서 읽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재생시키고 싶다는 매혹은 당연한 것이다. 유려한 비유가 간결한 문체를 따라 가볍게 걸어 나간다. 건조한 정서적 수면 아래 침전한 풍만한 감성이 떠오른다. 덕분에 그 매혹은 넘기에 만만치 않은 함정이다. 기능적으로 그 풍경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풍경 안에 담긴 내면의 심상마저 포착해내야 한다. 텍스트가 품은 방대한 심상의 너비를 구체화시킨다는 건 영토의 한계가 없는 상상력을 경계가 명확한 이미지에 수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걸작의 아우라를 풍기는 원작을 다른 방식의 장르적 대지로 치환한다는 건 위험한 도전이다. <더 로드>는 이미 반열에 오른 원작의 유려한 텍스트를 이미지로 옮긴다는 점에서 폄하의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더 로드>의 스크린은 마치 원작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기 위한 도구와 같다. 영상에 앞서 활자가 묘사한 세계에 대한 막연한 단상을 품었던 관객이라면 분명 그 탁월한 재현 능력에 압도적인 감상을 얻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더 로드>는 원작을 통해 연상했던 막연한 이미지의 극단적 구체화를 이룬 작품이라 평할만하다. 플래쉬백을 동원해 현재와 과거의 서사를 섞어나가며 원작의 서사를 미약하게 비트는 영화는 최대한 원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않되 그 영역의 자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창의력을 발휘했다. 동시에 <더 로드>는 절묘한 캐스팅이 영화의 팔할을 보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뛰어난 묘사가 정서적으로 훌륭한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더 로드>는 원작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얻을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더 로드>는 온전히 원작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엄두를 내지 못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방식에 창의력이 없다고 말한다는 건 어딘가 억울한 일이 될게다. 원작으로부터 주어지던 막연한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식에서 <더 로드>는 분명 집요한 노력의 성과를 설득하고 있다. 물론 <더 로드>는 원작을 뛰어넘는 성과를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원작과 평행할 만한 장르적 변이로서 유용하다. 원작의 그늘아래 갇힌 영화라기 보단 변주보단 재현을 선택한, 야심의 영역이 다른 작품인 셈이다. 동시에 그것이 단지 원작에 대한 세밀한 재현에 그친 것이 아닌, 그 이미지가 둘러싼 세계관과 그 세계를 차지한 인물들의 정서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다. 묵시록의 장관에 갇힌 아버지와 아들은 죽음의 대지 속에서 생을 찾아 떠돈다.
그 참혹한 세계에서 진짜 생을 얻기 위해 생을 저버린 부인과 달리 아버지는 유령과 같은 생을 선택한다. <더 로드>는 생이 아닌 사(死)를 향한 로드무비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그 생을 부지해야 할 덧없는 희망이다. 어쩌면 그 아들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세계는 끝날 것이었다. 그건 부성이라기 보단 의무에 가까운 생의 본능이자 속박이다. <더 로드>는 시작이 그렇듯, 끝에서도 어떤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아들은 살아남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세상은 여전히 잿빛으로 가득하고 그 잿빛 세계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방향도 모르고 떠돈다. 그럼에도 <더 로드>는 그 참혹한 이미지 끝에 숭고한 감정을 전하고 마는 작품이다. 아이는 희망이고, 그 희망은 결국 세계를 떠돌지언정 그 희망을 이어나가려는 인간들의 선의는 작은 불씨를 살린다. 그 지난한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결국 그 모든 것을 목도한 이의 마음이 치유되는 과정이다.
<더 로드>는 너무도 참혹하여 살아나갈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극한적 의지를 통해 진짜 산 사람을 치유하는 힐링 시네마다. 원작과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폄하하는데 동원된다는 건 섭섭한 일임에 틀림없다. <더 로드>는 단순히 뛰어난 재현에 그친 영화가 아니라 그 재현적 이미지에 무엇을 담아낼 것인지 고민한 작품으로서 성과를 전한다. 단순한 전시적 야심이 아닌 진심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풍경엔 원작에 대한 경의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열망이 서려있다.
트럭 운전으로 성실하게 생계를 꾸리고 가장의 역할을 하던 정철민(유해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 가난이다.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가난이 성실한 서민을 살인자의 공범으로 몰락시킨다. 딸의 수술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철민을 좌절하게 만들고 스스로 패가망신하는 길이라 믿던 도박판에 희망을 걸게 만드는 과정은 가히 안쓰럽다. 돈은 성실한 가장이자 아버지를 쉽게 무너뜨린다. <트럭>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우열의 논리로부터 발생하는 비극을 스릴러적 긴장감으로 치환시키고자 한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한 딸에게 깊은 부성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사연은 시체를 싣고 달리는 트럭의 운전수란 설정의 좋은 전제가 된다. 인간의 양심을 통제하는 것이 자본에 대한 욕망 이전에 아버지의 부성이란 점은 <트럭>이 괜찮은 드라마의 자질을 갖췄다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불청객이 그 트럭에 합승하기까지, 그리고 그 트럭에 합승함으로써 벌어지는 일련의 긴장감은 스릴러란 장르적 욕망을 지닌 <트럭>의 좋은 연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에게 닥친 시련이 눈덩이처럼 덕지덕지 달라붙게 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양심조차도 외면한 채, 유기해야 할 시체를 가득 채운 트럭에서, 살인마와 동승한, 철민은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트럭>은 이 물음에 답변하는 첫 번째 난관에서 뺑소니 치듯 달아난다. 냉철한 논리적 개연성이 절실해지는 순간, 우연을 동원해 달아난다.
배우들의 연기는 적당한 편이다. 유해진은 부성애가 깊은 아버지의 간절함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다소 평면적이긴 하지만 진구는 극 속에서 요구하는 캐릭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추격자>의 지영민과 <트럭>의 김영호를 비교하고 싶어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두 살인마는 역할 비중이 전적으로 다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김영호는 지영민만큼이나 캐릭터적으로 가공될만한 여지를 마련 받지 못한 캐릭터다. 그저 배치된 형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김영호는 정철민의 고난 수위를 높여주기 위한 일종의 장애물에 불과하다. 물론 살인마의 풍모는 필요하다. 그 평면적인 수위가 그것이다. 문제는 캐릭터가 아니라 상황에 있다. 장철민의 고난을 늘어놓는 것까진 좋지만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안이하다. 게다가 후반부엔 불필요하게 캐릭터의 비중이 흔들린다. 나름대로 벌려놓은 이야기를 봉합하고자 마련한 또 하나의 맥락이겠지만 역시나 효과적이지 않다.
자본의 횡포가 선량한 인간을 조롱하고 죄악의 공범으로 몰락시키는 윤리적 태도가 장르적 계기로 나아가는 과정은 <트럭>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지점이다. 하지만 <트럭>은 그것이 본래 의도된 길목에 들어서서 되려 무기력해진다. 차라리 애초에 선량한 서민이 자본에 놀아나는 과정이 살인마와 얽히는 후반부보다도 더욱 공포스럽다. 구구절절 늘어놓은 사연은 절실한데 그것의 본래 목적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스릴러에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더욱 촘촘하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만한 논리적 개연성이 심각할 정도로 안이하게 우연에 몸을 기댄다. 살인마를 태운 트럭이 검문소를 돌파하기 직전의 긴장감은 난데없이 등장한 트럭의 횡포에 줄행랑치고, 살인마와 사투를 벌이며 죽음의 기로를 오가던 주인공이 제3자의 개입으로 구원 당한다. 그 와중에 엔딩은 가히 초현실적이다. 수많은 설명이 필요하고 윤리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상황을 개입시키며 무모하게 상황을 종료시킨다. 어쩌면 그것이 실현된 미래가 아니라 정철민이 바라는 일종의 꿈이라 우긴다면 수긍할만한 여지도 있다. 허나 그 이전에 이미 담보 잡힌 문제들이 산더미다. 빚은 한없이 늘어가는데 갚아나갈 능력이 가물가물하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싶은 상황 앞에서 결말은 백치미스럽게 해피엔딩이다. 진정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도 벌어진 모양이다. 문제는 그것조차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첩첩산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