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빅터 매이너드(빌 나이), 나이는 54세, 직업은 청부 살인업자, 커피 한 잔 하겠소?” 소음기 달린 총의 방아쇠를 주저하지 않고 신속하고 정중하게 당기는 남자, 매이너드는 명문 킬러 가문의 후손으로 타겟을 놓친 적 없는 프로이자, 미혼의 싱글남이다. 그리고 어느 날, 한 여자에 대한 청부살인 청탁을 받게 된다. 그 여인의 이름은 로즈(에밀리 블런트), 부동산 업자로 위장한 갱단 두목에게 가짜 렘브란트 자화상을 팔아 거액을 챙겼다. 그녀를 죽일 기회를 엿보며 미행하던 매이너드는 번번이 기회를 놓치고 주시하던 중, 제멋대로인 그녀를 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 저항감을 느낀다. 심지어 그녀를 구하려다 죽을 위기에 빠진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럽게 등장한 청년 토니(루퍼트 그린트)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한다.
1993년에 제작된 동명의 프랑스 영화를 리메이크한 <와일드 타겟>은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선 ‘레옹’의 사연을 그린 듯한 로맨틱 코미디다. 목표물을 사랑하게 된 킬러, 킬러가 사랑한 말괄량이 그리고 순진한 청년, 이 세 캐릭터가 뒤엉켜 이루는 좌충우돌의 전복적 상황과 끝 모를 사연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기 생활에 엄격하며 결벽이 있는 중년의 킬러와 밥 먹듯 소매치기를 하고 무책임하게 주의를 벌려놓는 여인 그리고 때때로 모자라 보일 정도로 순진하지만 킬러를 꿈꾸는 청년, 저마다 뚜렷한 성격을 지닌 세 인물이 같은 배를 탄 운명이 되어 벌이는 우여곡절의 항해는 우스꽝스러운 가운데서도 귀엽고 훈훈한 감정을 발화시킨다.
영국 배우의 관록을 대변하는 빌 나이를 비롯해서 스타로 떠오른 신예 에밀리 블런트와 루퍼트 그린트 그리고 <셜록>을 통해서 보다 확실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마틴 프리먼까지, 실력 있는 영국 배우들로 채운 캐릭터들은 영화에 다양한 감정을 채색하고, 영화는 이로써 감상적인 흥미를 확장해낸다. <와일드 타겟>은 비범한 야심작이라기 보단 깜찍한 소품에 가깝다. 로맨틱 코미디가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액션과 스릴러의 잔가지가 쏠쏠하게 영화를 장식한다. 엉뚱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이야기의 예상범위를 곧잘 벗어나곤 하는데 때때로 스토리텔링의 논리를 어긋나게 만드는 우연적인 상황이 발견되긴 하나 그마저도 위트로 연결된다. 그 모든 요소가 깨알 같은 애정을 부르는, 깜찍한 로맨틱 코미디다.
풋풋한 아이들로 가득한 어느 교실의 풍경, 하나 같이 손에 우유를 들고 마시는 아이들에게서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교실의 풍경은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질로 가득하다. 교탁 앞에서, 그리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아마도 담임선생님처럼 보이는 한 여인의 말이 학생들을 향하고 있음에도 마치 독백처럼 들리는,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교실 속 아이들의 무관심한 소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충격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가 아이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자신의 반 학생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 되는 유코의 일인칭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일인칭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소설은 다소 충격의 강도가 높은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일인칭 화법의 구어체 서술로 진전되며 이런 특유의 분위기는 사건 자체의 놀라움을 감정적인 감상으로 전달하기보단 이성적인 이해로서 응시하고 해부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또한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이를 통해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플롯 자체에 충실한 냉소적인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영화화한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시점을 통해 사건을 중계한다. 하지만 텍스트로 읽히는 소설과 달리 이미지와 사운드가 동원되는 영화는 두 매체의 형식적 차이가 관점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는 동일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건조한 화법을 유지해나가며 감정의 온도차를 발생시키지 않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가 좀 더 격양된 톤의 분위기를 지닌 결말을 연출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두 작품은 분명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 차이란 기본적인 스토리의 태도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매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감상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 <고백>은 건조한 소설과 달리 인위적인 연출 기법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이는 역설적으로 소설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영화적으로 반영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담담한 문체의 저변에 놓인 충격적인 사건과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소설은 활기찬 교실의 풍경을 비추는 유려한 영상의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잠재돼 있음을 전해 듣는 과정으로 대체된다. 표면적인 영상의 느낌과 영상 속에 잠재된 분위기가 뒤틀려 있다는 감상은 고백의 시작과 함께 그것이 일종의 위장과 같은 전술적 의도임을 깨닫게 만든다.
<고백>은 이는 개인주의를 넘어선 폐쇄적 관계 회로 속에 매몰된 이들의 출현으로 병리적인 사회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에 관한 의식을 전달한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심한 세대차,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살해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이 세대의 밑바닥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지적하는 충격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이 타인의 영역까지 침범해서 삶을 파괴하고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을 형성해 나간다는 진리, <고백>은 이 모든 과정을 단지 단 하나의 학급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속에 온전히 담아내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다만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플롯과 영상이 자연스러운 감상을 방해하는 단점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쩌면 의도적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 냉소적인 영화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온전히 구현해내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치지 못할, 소름 끼치는 충격에 가깝다. 당신의 사회는 안전한가?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 고백은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한 여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실종된 여자가 발견됐다. 흐르는 강물 안에서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국정원 경호실장이자 그녀의 약혼자인 수현(이병헌)은 결심한다. 그녀가 당한 모든 것을 그 놈에게 되돌려주겠노라고. 그리고 수현은 비로소 놈을 만난다. 연쇄살인마 경철(최민식) 앞에 수현이 나타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악마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꿔가며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한 게임을 거듭해 나간다.
사실 이런 류의 이야기, 즉 복수를 그리는 여타의 스릴러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악마를 보았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과율을 통해 구동되는 장르적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는 단순히 스릴러 영화의 컨벤션으로 규정될 수 없는 불균질한 기질들로 ‘치장’된 작품이다. 극의 시작부터 후더닛 구조에 대한 미스터리 자체를 포기해버린,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린 <악마를 보았다>는 그 관계를 이루는 두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두 배우의 표정과 가학적인 행위를 통해 장르적(이거나 말거나 애초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는) 스토리텔링의 동력을 밀고 나가(려)는 영화다.
개봉 전부터 제한상영가 판정 문제로 도마 위에 오른 <악마를 보았다>에서 가장 부각되는 건 아무래도 폭력성의 강도일 것이다. 일단 <악마를 보았다>가 묘사하는 폭력의 수위는 특정한 장르물에 단련되지 않은 관객들이 손쉽게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의 결과값은 단지 그 폭력의 물리적 전시만으로 얻어지는 결과적 감상은 아닌 것 같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묘사되는 폭력은 대단한 물리적인 질량감을 자랑하지만 그 폭력성을 더욱 깊게 체감하게 만드는 건 그 물리적 폭력을 간접적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관객을 구석으로 몰아 넣는 심리적 압력이며 그 압력의 여백을 채우는 허무가 보다 강한 절망을 체감하게 만든다.
폭력이라는 행위를 묘사하는 방식도 가혹하지만 그 폭력으로부터 유린당하는 대상이 느끼는 수치감과 모욕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무화시켜버릴 만큼의 거대한 폭력에 압사당한 개인의 무력감이 극렬하게 전이된다. 사실 이 폭력성의 체감을 극대화시키는 건 배우들의 연기다. 짐승과 같이 동물적인 욕망과 본능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는 최민식과 살해당한 자신의 약혼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역시 무자비한 폭력적 행위를 불사하는 냉혈한의 면모를 선보이는 이병헌의 연기는 영화에서 정서적 온도차의 극단적인 대비를 이룸으로써 폭력적 심도와 너비를 극대화시킨다. 짐승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인간성이 결여된 듯한 연쇄살인마 경철과 그 폭력성에 맞서서 보다 강한 폭력을 구사하며 상대를 구석에 몰아가는 수현은 양극단에서 영화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증폭시켜 나간다.
<악마를 보았다>는 일종의 게임이다. 짐승 같은 인간을 대면하게 된 어느 사내는 스스로 악마가 되어 자신의 분노를 상대에게 완전히 방출해내려 하지만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 분노는 되레 허기처럼 채워지고 그 끝에 남겨진 건 파괴적인 절망에 가깝다. <악마를 보았다>는 마치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하드보일드적인 복기이자 선문답처럼 보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양태에서 시작되는 <악마를 보았다>는 극단적인 폭력을 전시하며 장르적인 긴장에서 발생하는 쾌감과 거리를 벌린다. 특히 <악마를 보았다>는 극의 진행과 함께 초현실적인 시퀀스로 캐릭터들을 몰아넣으며 장르적 리얼리티라는 인력을 철저하게 거부해 나간다. 이는 마치 폭력에 대한 거창한 철학으로 위장된 가학과 피학에 대한 실험극처럼 보인다. 단지 폭력이라는 행위 자체의 발생을 포착한다라는 인상을 벗어나 어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과감한 폭력들을 거듭해서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력하게 부여한다.
이는 <악마를 보았다>에서 양날의 검이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극단적인 폭력의 시각적 체감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말 그대로 어떤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을 거듭해서 보고 있다라는 직감 때문일 것이다. <악마를 보았다>가 전달하는 폭력의 위력은 가학자에 대한 공포보다도 피학자가 느끼는 모욕으로부터 깊게 체감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폭력이 체감되는 방향 이후로 무엇이 진전되고 있느냐는 것. <악마를 보았다>는 어느 개인의 복수를 빌미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동시에 제도적 체계에 대한 강렬한 불신을 던진다. 다만 그 포장이 지나치게 비범하다. 단적인 예로 중반부의 산장신은 온전히 리얼리티로부터 이탈해버린 듯한 부조리극의 무대 위에서 연출되고 있으며 이는 이 영화가 제기하는 모든 물음들을 선문답의 영역으로 띄워 보내고 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남는 건 단지 폭력을 치장하는 극단적 이미지뿐이다. 극단적인 폭력의 연출은 문제가 아니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어쩌면 이 현실 어딘가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수 있거나 혹은 이미 벌어진, 끔찍한 예언이자 재현일 수 있다. 다만 그 이미지들이 뭔가 대단한 어떤 의미의 담보처럼 전시되고 있음에도 결과적으로 그 결과치에 다다르지 못한다면 그것을 지지할 수 있을까. <악마를 보았다>를 비범하게 포장하는 대사와 표정들은 그 결말에 다다라서 완벽하게 휘발되고 말 것들에 불과하다. 악의로 가득한 이 영화는 극단의 폭력을 구사하고 있지만 폭력에 대한 지독한 혐오를 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아이러니를 전시할 뿐, 자신의 아이러니에 답하지 못한다. 그 지독한 폭력들을 버티게 만든 영화 뒤에 남는 게 고작 허세 가득한 선문답적인 허무라니, 이런 낭비적인 복수가 어디 있나.
살인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지방 형사들의 몽타주는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킨다. 극 초반부터 정체가 개방된 범인의 당돌한 심리와 그에 맞서는 경찰의 대립 구도가 <추격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범인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아버지는 직업윤리에 반하면서까지 제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놈 목소리>의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이입한 <세븐 데이즈>. 그리고 그 끝에선 <올드보이>를 본뜬 듯한 죄와 벌에 대한 패러독스가 걸려든다. <용서는 없다>는 마치 지금까지 흥행이나 비평적으로 적절한 성공을 거둔 한국영화의 레퍼런스를 섞어 넣고 순차적으로 나열한 것 같은 형태를 띤 영화다.
금강 하구둑에서 토막 난 시체가 하나 발견된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부검의 강민호(설경구)는 결정적 단서를 잡아내고 손쉽게 용의자 이성호(류승범)를 검거한다. 경찰의 심문 중, 범행을 부인하던 이성호는 신참 여형사 민서영(한혜진)의 추궁에 손쉽게 자백을 한다. 하지만 이성호의 계략에 의해 강민호가 불가피하게 사건에 개입하고 대학 시절 은사로서 강민호를 존경하던 민서영은 그의 심상찮은 태도를 기이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용서는 없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심리다. 이성호는 <용서는 없다>의 논리를 완성하는 핵심이다. 게임의 설계자이자, 조종자다. 강민호는 이성호의 계략대로 놀아나는 말이며, 민서영을 비롯해 강민호의 주변인물은 강민호의 처지를 악화시키고 긴장감을 배가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결국 그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조율하는 이의 절대적 역량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시할 것인가가 <용서는 없다>의 키인 셈. 단적으로 말하자면 <용서는 없다>는 그 역할의 어필에 실패한 영화다.
<용서는 없다>의 이성호는 자신의 명확한 속셈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강민호를 움직이게 만들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오랜 목적을 완수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변수가 발생하지만 사실상 이런 식의 이야기 구조에서 그 변수란 본래 그 게임의 설계자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용서는 없다>가 그려나가는 서사의 논리는 지나치게 우연을 간과하고 있다. 명확히 말하자면 머리가 나쁘다. 덕분에 결말부에서 주어져야 할 충격이 얕다. 사실상 <용서는 없다>는 결말을 위해 모든 과정이 할애되는 영화다. 그 모든 지난한 여정이란 결말부의 정점에 서기 위한 오르막길인 셈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빈틈이 많은 과정은 동력을 끌어올리기엔 역부족이며 결말의 정점 역시 높이가 모자라다. 논리적 동원이 빈약해지는 가운데 감정적 이입만 과도해진다.
마치 <올드보이>의 그것과 비슷한 파국을 그리는 <용서는 없다>는 단적으로 자해를 무릅쓴 어느 남자의 복수를 그리는 작품이다. 그 복수의 정당함이란 굳이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 어느 개인의 복수란 그 행위의 윤리적 정당함을 따져 물을 수 없게 개인적인 서사 안에서 인정될만한 사안이다. 다만 그것이 공적인 부분에서 이야기로서 대중에게 언급될 때는 사안이 다르다. 누군가의 개인적 범위의 사연을 소비하기 위해선 충분한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얹어야 한다. <용서는 없다>는 사연의 틈새를 메우지 못하고 자꾸 옆길을 뚫어가려는 작품이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형태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범인이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허세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배우의 연기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정작 제 기능성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동시에 뻣뻣한 대사에 갇힌 이성호를 연기하는 류승범은 <용서는 없다>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다.
4대강 개발이라는 현안을 차용한 건 맥거핀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해도 눈가림의 구실은 한다. 동시에 부검 과정을 세심하게 다루고 시체의 형태를 디테일하게 살린 더미는 눈길을 끈다. 문제는 그것마저도 현혹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결말에 다다르면 그 세심한 부검과정의 묘사가, 체모마저 디테일한 더미의 전시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가라는 해답이 제시된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딱히 비범한 내용을 전하지 못하는 화자가 끝까지 비범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건 지겨운 일이다. <용서는 없다>가 그런 꼴이다. 결말에 다다를수록 사연은 갈피를 잃고 이성마저 잃은 뒤, 이야기를 갈무리할 타이밍마저 제대로 잡지 못하다 결국 허세로 자폭한다. 정말이지 용서가 안 된다.
경쾌한 멜로디가 선명한 음악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김혜자의 춤사위를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절망과 안도가 체증처럼 내려앉은 얼굴에선 공유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극단적 너비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다 살풀이하듯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이는 팔은 축 져진 듯 늘어지면서도 강약을 맞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심정을 유추할 수 없게 중의적인 동작으로 절묘하게 음악과 어울리며 몸을 흔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당혹스럽지만 고요하다. 마치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전의 잔잔한 수면처럼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위태롭게 감정을 동요시킨다.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서적인 진동을 도모함으로써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과 평온의 중의적 상태 가운데서 몰입을 도모한다.
살인마로 몰린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비추는 이야기. 누구라도 분명 모정이 끓어 넘치는 신파를 예감하기 좋은 문장이다. 하지만 애초에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 신에서조차 괴담을 통해 교묘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켰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경험한 이라면 절절한 신파로 무장한 작품을 기대할 리 만무하다. 모두가 살인마라고 낙인을 찍은 아들 도준(원빈)에 대해 어머니 혜자(김혜자)는 말한다.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어미에게 모성은 숙명이다. 이성적 믿음을 판별하는 의식을 거치기 이전에 직관적인 보호본능이 둘러쳐진다. 어미의 본능이란 이성을 통해 가늠하기 어려운 본능의 영역이다. 동물적으로 유전된 습성이다. 숭고한 사명이기 이전에 무거운 십자가다. 그리고 <마더>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진범을 추적하는 스릴러이기 전에 어미의 심정을 따라잡는 심리극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잡고 울기 보단 타이르고, 진범을 뒤쫓거나,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들의 결백을 향해 전진해나간다. 누구도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모든 수순을 동원한다.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모습엔 헌신적인 페이소스보다 광기에 가까운 컴플렉스가 서려있다. 모성이란 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마더>는 서사적으로 나아가나 서정적이며 심리적 밑바닥까지 헤집는 표정으로 감정의 옆모습까지 그려낸다. 암전된 공간과 배경에서 밀려난 여백은 때때로 서스펜스의 은신처가 되며 배우들은 수집된 감정의 개체 수를 가늠할 수 없게 너른 표정을 드러낸다. 특히 김혜자는 <마더>가 김혜자의 얼굴에서 시작됐다는 봉준호 감독의 고백을 온전히 증명한다. 순수한 광기는 맹신으로 나아가 착란에 도달하고 이내 잔인한 절망의 수순으로 돌입한다. 그 모든 과정의 합리가 김혜자의 얼굴을 통해 이뤄진다. 김혜자의 얼굴은 <마더>를 위해 마련된 최적의 자질이자 유일무이한 시작이고 끝이다.
수없이 흩어진 별개의 지점처럼 인식되는 스토리가 결국 단계적인 복선으로서 재차 의미를 발생시키며 하나의 맥락을 구성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물론 발화점의 온도를 붙이기까지의 시간이 길게 요구된다는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온도가 상승한 이후로 이야기는 급격하게 가속을 시작하고 이내 극한까지 내달린다.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개별적인 지점의 사건들을 하나의 맥락에 놓인 복선으로 꿰어가는 이야기 구조가 탁월하다. 동시에 <마더>는 사실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스릴러에 가까운 형태로 직조된 이야기지만 실질적으론 ‘누구’보단 ‘무엇’에 의문의 무게가 실리는 영화다. 어머니는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따라 걷지만 관객은 끊임없이 아들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예상과 동떨어진 모자의 전사가 드러나기도 하고,-박카스- 그 관계에 대한 불순한 관점이 동원될만한 중의적 언어가 동원되기도 한다.-잔다-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러의) 비범한 결단에 가까운 결말의 태도를 확정 짓게 만드는 계기 역시 그 목격에서 비롯된다. 지독한 어미의 본능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기 파괴의 행위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과정을 이끄는 믿음의 기반이 어떤 진실에 맞닿았고 이를 통해 어머니가 무엇을 결심했는가를 지켜보게 된다는 의미와 같다. 그 결심은 객석에 충격을 전하지만 관객이 비명 지르기 보단 숨을 멎게 만든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이례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영화다. 로케이션 비중을 극대화시킨 <마더>의 광활한 풍경은 풍요롭기에 더욱 예민하다. 때때로 혜자의 걸음을 수평선의 구도로 원경으로 찍어낸 광경은 애환적이며 인물을 측면에 밀어 넣은 채 온전히 배경을 삼킨 카메라의 구도는 거대한 배경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소외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이에 곧잘 상반되게 인물의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메워 넣곤 하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역동적인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보다 깊고 너른 감정의 영역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특히 인물과의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구도적 변화는 개별적인 영역에서 좀 더 세심한 관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의 극적인 몰입을 가중시킨다. 처음으로 2.35:1 와이드 비율의 화면 비를 선사하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는 <마더>는 그만큼 풍요롭고 섬세한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자리한 인물의 예민한 심리를 더욱 모나게 드러낸다. 특히 대비적인 움직임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도입부와 결말부는 <마더>의 입구와 출구로서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음악의 기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오프닝 신을 비롯해 음악과 시퀀스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답습이라 지적될만한 결과라기 보단 참신한 복기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사건이 얼마만이냐.”라는 대사처럼 한적한 도회지의 형사들은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뻔뻔하진 않아도 여전히 직감에 의존해 사건을 마무리 짓는데 급급하며 졸속적인 수사방식으로 무능을 전시한다. 동네 바보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강압적 회유는 되풀이되고 용의자의 바지를 벗기는 지하실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범인의 현장검증은 여전히 난장판이다.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반대말의 의미로 해석될만한 상황이다. <살인의 추억>의 경찰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무능을 가리려는 시도를 보인다면 <마더>의 경찰들은 무지의 소산으로 밀어붙인 불확실성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무능력을 또 한차례 노출한다. 결국 그 반대말의 끝은 <살인의 추억> 못지 않게 무게가 엇비슷한 정서적 허탈감으로 도달한다는 점에서 동일해진다.
<마더>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정황을 지니고 있다면 인물이 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중압감은 간접적으로 <괴물>에 맞닿아있다. 현서를 찾아 괴물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가족과 진범을 찾기 위해 의심스러운 단서의 현장을 몰래 탐색하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의 혈육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가족이 어머니 개인으로 축소됐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동선이 단선적으로 뚜렷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잠입한 어머니의 은폐가 어떤 목격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괴물의 본거지인 하수구에 끌려온 현서가 괴물을 피해 하수구 구멍에 은둔하며 괴물을 관찰하는 상황과 비슷한 긴장감을 이룬다. 또한 어두운 음영을 통해 도진이 바라본 것을 관객으로부터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 단서의 은폐를 확보함으로써 의문의 지속을 유지하고 사각지대의 음산한 서스펜스를 확보한다는 점에서도 출몰의 위협을 물리적으로 구사하던 <괴물>의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란 점에서 동일하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고,(<플란다스의 개>) 살인마를 수사하고,(<살인의 추억>)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괴물>) 진범을 추적한다.(<마더>)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애완견과 보지 못한 살인마, 그리고 구할 수 없었던 딸을 맞이했던 것과 달리 <마더>는 유일하게 자신이 쫓는 상대를 목격하게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동네에서 혈혈단신으로 진범을 찾아 나서는 어머니의 본능적 결의는 결국 결실을 이룬다. 어미의 본능만이 유일하게 제 목적을 이룬다. 뒤늦게 자신이 짊어진 어미라는 십자가가 자신을 골고타 언덕으로 이끌어 채찍질하고 못박히게 만들었음을 뒤늦게 체감한다 해도 만신창이가 된 제 심정을 억누르고 제 새끼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본디 그 어미의 본능에 걸맞은 숙명이라는 것을 육체적 행위로 증명한다. 동시에 사건의 주변부에 놓인 이미지를 통해 시대와 정치적 풍자를 거두던 야심도 <마더>에선 최대한 배제됐다. 무능한 경찰의 이미지는 <살인의 추억>처럼 시대적 열악함과 정치적 불공정을 겨냥하는 수단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위트의 수단이 되고 사건의 전개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될 뿐이다. 지난 세 편의 전작이 동맥과 정맥 주변부의 모세혈관의 흐름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마더>는 오로지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다. 정맥의 판막을 거쳐 멈춰서면서도 서서히 전진하던 이야기가 비로소 심장을 거쳐 동맥으로 뻗어나가듯 가속적이다.
창문은 <마더>에서 종종 관객과 인물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중계 창처럼 활용된다. 관객은 그 창을 통해 영화적 상황으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그 상황의 목격자로서 자리잡아야 한다. 창 너머엔 함께 식사하는 모자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비추는 저편의 진실이 걸어나가는 풍경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두 광경은 모두가 진실이다. 백숙을 찢어 아들에게 먹이려는 어머니의 모습도, 창을 따라 걷는 살인자의 얼굴도 거짓이 아니다. 관객은 두 번의 식사광경을 양 끝에 두고 그 가운데 살인의 목격자가 된다. 양 끝의 이미지는 동일하다. 구도까지 일치한다. 하지만 그 풍경은 대비적이다. 더 이상 온전히 같은 풍경으로서 인식되지 않는 생소한 광경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창 너머의 모자는 같은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간다. 모든 것을 감당한 어머니는 구태의연하게 아들을 위해 어미로서의 본능으로 제 부서진 삶을 가다듬고 일상을 반복한다. 아들을 위해 흐르는 오줌을 지우는 것도, 피를 닦아내는 것도 그 어미의 몫이다.
여기서 모성애는 숭고하다거나 찬사를 얻을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평생을 짊어져야 할 어미의 업(業)처럼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형(刑)과도 같다. 어미는 결국 괴물이 되어 제 자식을 구하고, 평생 살인의 추억을 한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 ‘새끼 잃은 어미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한다.’하지만 정작 어미는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저 제 새끼의 체취를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감히 그 삶이 어떠하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다 제 어미의 삶을 밟고 살아온 그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마더>는 모성애라는 숭고함을 벗겨낸 어미들의 상처와 같은 삶에 바치는 지독하게 순수한 헌사다. 무엇보다도 국민엄마라는 박제 같은 타이틀로 치장된 이미지를 부수고 김혜자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닌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것만으로도 <마더>는 이미 훌륭한 성과로 시작된 작품인 셈이다.
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박쥐>는 ‘뱀파이어가 된 신부’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라는 두 개의 바퀴를 통해 굴러간다. 박찬욱 감독이 택한 두 장의 카드는 박찬욱이라는 네임밸류 안에서 적절해 보인다. 특히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일면 타당한 느낌이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이 건장하고 본능에 충실한 남자를 만나 정욕을 깨닫고, 이는 흉악한 치정극을 성립시켜 살인의 공모에 다다르게 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던 공모자들이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던 관념과 의식들과 적나라하게 연관돼있다. 이는 온전히 개인의 취향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박찬욱 감독의 취향 그 자체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통제된 연출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된 표정과 격양된 몸짓을 통해 저마다 인공적인 양식에 철저히 복무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부터 거창한 미장센까지 하나 같이 기능적인 의미에 종속된 인테리어적 구실에 여념이 없다. 모든 상황이 인공적이다. 연출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때로 배우들은 본연의 인상을 무의식적으로 노출하며 부조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상당히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가운데 아주 간혹 제 얼굴을 드러낸다. 본래 각인된 이미지가 강할수록 그 찰나는 자주 반복된다. 이는 연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영화가 얼마나 배우의 자의적 해석이 불가능한 영화인가를 드러내는 지점이라 흥미로울 따름이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드러내기 위한 직접적 수단이 되어 흉악하게 응용되고 때때로 빈틈을 찾아 웃음을 삽입하는 소품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뱀파이어가 <박쥐>의 날개라면 ‘테레즈 라캥’은 몸통이다. 날개와 몸통은 어떤 비중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역할의 배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변주된 이미지로서 모티브의 흔적을 강렬하게 자각시키는 ‘테레즈 라캥’은 <박쥐>를 구현하기 위한 몸통 그 자체다. 특히 <박쥐>에서 인상적인 이미지를 확보했다고 말할만한 시퀀스의 대부분은 테레즈 라캥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다. 하지만 때때로 시퀀스를 연결하는 매듭이 헐겁다. 구조적으로 불친절한 형태로 시퀀스가 이어짐을 지각하게 된다. 소설을 미리 접한 자는 분명 결핍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소설로부터 동떨어진 이는 의문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와 ‘테레즈 라캥’은 서로 잘 달라붙지 못하는 인상이다. 연상 자체는 기발하지만 효과적인 연동을 보여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히 숭고한 파괴의 절정으로 치닫는 <박쥐>를 마주한 관객들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널 수 있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빠질 것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차이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 안에서 이뤄진 산물이라 믿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은 <박쥐>를 성스러운 복음이라 믿고 따르며 기꺼이 자신의 해석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한 결핍과 인공적 내음을 자각하고 지나친 과잉과 자만의 산물이라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지독한 악취미로 치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박쥐>는 분명 존중할만한 취향이다. 비록 개인적인 영역 안에서 어떤 소통의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제한할만한 작품이지만 분명 그 안에 담긴 예술적 성취 자체를 마냥 질시할 수 있는 그릇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적인 지지와 작품의 고유한 가치 사이의 함수를 따질만한 셈이 동원될 것이다. <박쥐>는 마치 욕탕의 수면처럼 뜨거운 작품이다. 그 표면의 뜨거움을 참아내는 관객은 누구보다 깊게 잠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참지 못한다면 그저 발 한번 담가보지 못하고 외면당할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흥미로운 영화가 될 공산이 크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식물적인 삶에 길들여져 있던 여인과 본능에 충실하던 남자가 만나 정욕을 깨닫고 흉악한 치정극을 거쳐 살인을 공모한 뒤, 질환적인 죄의식에 시달리며 피폐하게 말라가다 결국 성스러운 공멸을 선택하게 된다는 소설의 흐름은 박찬욱의 영화를 관통하던 관념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박쥐>는 온전히 박찬욱 감독의 취향으로 채워진 사적인 유희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개인 취향의 수집품에 가깝다. 관객은 두 번 시험에 들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유희적 취향을 존중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건넌다면, 이차적으로 그 유희를 지지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뒤따른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과장된 표정을 띠고 격양된 연기를 펼치며, 공간을 구성하는 잡다한 소품들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기능적인 인테리어의 속성에 얽매여있다. 대단히 인공적인 형태로 모든 상황이 연출적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배우들의 연기는 그 통제에 얽매여 있다가도 종종 배우 본연의 얼굴을 숨기지 못해서 이질감을 발생시키기도한다. ‘뱀파이어’는 부조리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처럼 흉악하게 응용되거나 때때로 유머러스한 소품이 되기도 하지만 끝에 다다를수록 숭고해진다. 다만 대부분의 극적 묘사에 판본 그대로 활용되거나 모티브로서 변주된 ‘테레즈 라캥’의 흔적들이 굴러가는 풍경은 시퀀스 자체의 성취를 보여주는 반면 구조적인 불친절을 지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숙지한 자라면 결핍을 발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의문에 빠질 것이다.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의 연동은 기운의 결탁자체로서 기발하지만 두 콘텐츠가 잘 달라붙어 연동되지 못하고 틈을 벌린 채 굴러간다는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신앙의 문제다. 영화의 결과물 자체가 박찬욱의 완벽한 의도라고 믿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상을 설계할 수 있는 관객에게 <박쥐>는 성스러운 복음이 될 것이다. 반면 결핍과 인공성이 지나친 과잉과 자만이라고 판단하는 이에게 <박쥐>는 그저 악취미라 불쾌한 것이 될 뿐이다. 그 취향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지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아이러니하지만 <박쥐>는 영화보다도 영화를 둘러싼 말의 형태가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될 것 같다.
총을 맞고 사망한 부랑자 시신이 발견된 이튿날, 하원의원 스티븐 콜린스(벤 애플렉)의 여비서가 지하철역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이 덕분에 스티븐과 여비서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지고 무기회사를 상대로 한 청문회에서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던 스티븐의 발언권이 상실될 처지에 놓인다. 하루 차이로 발생한 두 죽음은 그저 동떨어진 두 개의 점처럼 접점이 없는 개별적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취재하던 ‘보스톤 글로브’의 기자이자 스티븐의 친구인 칼 매카프리(러셀 크로우)는 두 사건을 연결하는 단서를 발견한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실을 관통하는 진실이 직감된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이하, <플레이>)는 거대한 음모를 추적하는 기자의 이야기다.
뛰어난 취재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기자 칼 매카프리와 혈기왕성한 신예 여기자 델리 프라이(레이첼 맥아담스)는 진실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사건의 취재를 밟아나간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노크가 번번히 무산되거나 박대 당하는 와중에도 진실을 향해 접근해가는 취재과정이 호기롭게 묘사된다. 때때로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연출되며 스릴러적 긴장감을 더한다. <플레이>는 스릴러적 구조를 통해 긴장감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지적인 묘미를 더한다. 영화의 중추는 분명 거대한 집단의 이기에 대항하는 개인의 윤리적 저항을 곧잘 이야기하는 토니 길로이의 각본이다. 음모론에 갇힌 진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어지는 결말 직전, 영화는 진실의 맹점을 자각하고 왜곡된 진실의 남은 한 꺼풀마저 벗겨내며 논의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킨다. 진실을 추구하는 건 정의를 위해서지만 정의에 대한 집념은 때로 진실을 향한 시야를 가린다.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를 송고하기 직전까지 진실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쳐선 안 된다. 정의라고 믿어지는 부분조차도 의심해야 한다. <플레이>는 거대한 자본의 알력과 권력의 위협에 대항해 사선을 넘어서까지 결백한 진실을 얻어내려는 기자의 직업윤리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찌라시가 득세하고 가십이 넘쳐나는 시대에 완전한 진실을 향해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기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종을 울린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은 두려움을 심기 좋은 소재가 된다. 스릴러 장르를 표방하는 많은 작품들이 낯선 곳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을 서스펜스의 발원지로 삼는 것도 비슷한 연유다. 물론 현실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실제적 사건들이 서스펜스를 보좌하는 리얼리티의 배후로 지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이 영화에 영감이 불어넣곤 한다. <실종>도 그런 맥락에서 태어난 영화다. ‘보성어부연쇄살인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김성홍 감독의 변처럼 <실종>은 장르적 외피를 걸치고 세상에 나와 잔혹한 현실을 고발하는데 주력하는 영화다.
의좋은 자매의 즐거운 한때를 담은 핸드폰 동영상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자매에게 닥칠 비극을 더욱 짙게 체감하게 만드는 보색효과로 기능한다. <실종>은 극초반부터 살인마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분위기를 급속하게 냉각시킨다.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추리적 물음엔 일말의 관심이 없다. 장르적인 눈속임보단 캐릭터를 통해 발생하는 살기 그 자체를 장르적 중추로 장착한다. 감정적 대립을 이루는 캐릭터 관계를 명확히 노출시킨 뒤, 눈덩이처럼 불거지는 이야기를 굴려나간다.
영화가 필요로 하는 서스펜스는 캐릭터 본연의 존재감 자체를 통해 발산된다. 판곤(문성근)은 관객의 심리 안에서 불안하게 예측하는 수순들을 여지없이 이루고 만다. 변태적인 성욕으로 가득 찬 살인마는 여자를 납치하고, 감금한 뒤, 변태적 성욕을 채우다 결국 살해한다. 그 모든 과정은 캐릭터의 끔찍한 본성을 극대화시키는 묘사의 방식에 가깝다. 이는 캐릭터에 대한 매력이나 동정의 여지로부터 관객을 괴리시키기 위한 의도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런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캐릭터를 공들이는 양식처럼 보인다. <실종>은 궁극적으로 관객들이 캐릭터에 대한 악의를 품길 원하는 영화다. 인면수심의 싸이코패스, 더 넓게는 사회적인 악에 대한 적의를 품게 만들고자 하는 일념으로 스크린에 살기를 가득 채우고 악의적인 눈빛으로 객석을 응시한다.
사악한 캐릭터의 본능을 묘사하는 전반부의 파괴력은 인정할만하다. 그것에 몸서리를 치는 사람이건, 그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사람이건, 문성근이 연기하는 판곤은 분명 끔찍하고 불쾌한 공기로 객석을 지배한다. 하지만 캐릭터의 잔혹한 본성이 밑천을 드러낸 전반부를 지나 반전의 기운이 담긴 후반부에 돌입하면 그 지배력이 서서히 쇠락한다. 캐릭터의 사악한 기운을 바탕으로 긴장감을 끌어올리던 방식을 통해 전반부를 소진한 영화는 같은 양식으로 후반부를 운영하지만 기시감이 가득한 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지배력이 떨어진다. 캐릭터가 발생시킨 파괴력의 효력이 떨어질 때 즈음, 그것을 대체할 만한 별다른 장치가 발견되지 않는다. 특별한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우직함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것이 특별한 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퇴색된다. 느슨해진 플롯의 여백을 채우는 건 지속적인 불쾌함뿐이다.
불쾌함은 <실종>의 본질적 의도이자 착시적 판단이다. <실종>은 스릴러라는 장르에 복무하기 보단 현실에 대한 언질을 위해 마련된 영화처럼 보인다. 실종된 동생 현아(전세홍)을 찾아나서는 현정(추자현)의 여정은 판곤에 대한 적의를 복수와 징벌로 매듭짓기 위한 하나의 수순이다. 문제는 그 방식에 있다. <실종>은 <추격자>와 마찬가지로 제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공적 시스템이 개인의 복수를 부추기고 이를 방치한다는 문제의식을 발생시킨다. <실종>에서 실종된 여자를 찾아 뛰는 건 <추격자>와 매한가지로 경찰이 아닌 개인이다. 하지만 <실종>은 이런 문제의식을 하나의 단계로 삼을 뿐, 발전시킬 의도가 없다. 그보다도 오히려 개인의 복수를 정당화시키는 수순으로서 태도를 심화시킨다.
순간적인 복수심에 몰입한 피해자가 가해자를 응징한다는 내용을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태도다. 제3자가 당사자의 행위에 가치 판단을 논한다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을 묘사하는 것과 주장하는 건 다르다. <실종>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 쪽이다. 가치 판단의 주체가 될 관객의 몫을 영화가 낚아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덧붙게 되는 에필로그는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 받아도 딱히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복수를 묘사하는 수순을 넘어 지지하는 뉘앙스를 풍길 때 <실종>은 덧없이 불순해진다. 제도적 태만이라는 공적 문제를 환기시키지 못하고 되려 개인의 감정을 자극하며 이를 희석시킨다. 동시에 말미에 다다르면 흡사 희생자를 향한 조롱마저 감지된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두 아가씨가 나이 든 어부에게 배를 태워달라는 가운데 노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페이드 아웃 너머로 따라붙는 대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불순하다. 본래 의도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태도가 감지된다. <실종>은 불순한 착취로 가득한 영화다. 낙후된 지방성의 이미지는 영화의 말미에 다다를 때면 원시적 기운의 악이 은둔하는 은신처 즈음으로 몰락하고 악랄한 남성을 묘사하기 위해 폭력에 움츠린 여성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한다. 그 와중에 복수를 정당화하고 공적 물음이 간과된다. 불쾌함의 근원은 단순히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태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현실의 악을 설명하기 위한 영화적 방식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가기엔 쉽게 해소되지 않는 의혹의 잔상이 강하다. 스릴러에 대한 장르적 접근을 배제한 정치적 선택이었다면 우려할 만한 사안이다. 동시에 그것이 스릴러라는 장르적 이해의 접근 방식이라고 판단된 사안이라면 더욱 우려스럽다. 결국 스릴러적인 묘미도, 현실에 대한 환기도 실종된 채 일그러진 정치적 욕망만 발견된다. 배우들의 열연마저도 착취된 것마냥 안타깝다. 어쩌면 <실종>은 농촌 스릴러라 불리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살인의 추억>과 좋은 대조군이 될만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간략한 자막이 따라붙고, 서사의 변화를 표기하는 자막도 타이밍 맞게 등장한다. 이 사연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듯 빈번하게 자막이 등장하며 화면을 수놓는다. 실제로 <알파독>은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마약딜러로 성공했지만 결국 미 FBI의 최연소 수배범으로 기록된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라는 청년에 관한 서사를 극화했다.
과감하게 총질을 해대는 흑인 갱스터들이 걸러지지 않은 증오와 살의로 무장한 랩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커다란 TV로 방영된 힙합 뮤직비디오는 타락의 이미지를 쾌락의 메시지로 변형시킨 강렬한 비트가 젊은이들을 자극한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한 청년이 무심하게 소리친다. 총을 쏘면 기분이 죽이겠지! 행위의 결과적 책임보다도 행위에 대한 쾌락만이 강하게 감지된다.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타락의 무게를 감내할 줄 모르면서도 타락을 꿈꾼다. <알파독>은 자신이 무엇을 저지르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리는 젊은이들의 비극을 품고 있다. 장난처럼 시작된 사연은 번져나가는 불처럼 걷잡을 수 없게 커져나간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쉴새 없이 에피소드를 만들어 돌린다. 각기 비중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은 거미줄처럼 얽히며 사건을 형성해나간다. 그 사연의 중심엔 젊은 나이에 마약 딜러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조니(에밀 허쉬)가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매일같이 향락을 즐기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에게 빌려간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겠다는 제이크(벤 포스터)와 심하게 다툰 후 그의 삶이 풍랑처럼 흔들린다. 제이크와 주고 받은 갈등의 전개 속에서 조니는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우연히 만난 제이크의 동생 잭(안톤 옐친)을 납치한 조니는 친구인 프랭키(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잭을 떠넘기고 감시를 맡긴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만을 설명하자면 상당히 심각한 범죄적 행위가 발생했다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영화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서스펜스에 유리한 상황임에도 코믹이 발생하고 하이틴 무비의 발랄함이 감지된다. 심각한, 혹은 심각할 운명에 놓인 사연에 비해 혈기왕성한 스타일로 멋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영상엔 어떤 변수에 대한 예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가벼운 장난처럼 두서없이 부유하는 사연 속엔 그저 놀기 좋아하고 즐기기 좋아하는 청춘이 존재할 따름이다. 납치한 쪽이나 납치된 쪽이나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일종의 해프닝처럼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던 이들은 때때로 끈끈한 교우 관계로 거듭나며 특별한 추억을 쌓기도 하고 미래를 기약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 사태의 심각성이 각인된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이었는가를 깨달은 조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마약을 팔고 유흥을 즐기던 20대 청년은 어른의 육체로 성장했으나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미숙하기만 하다. 가벼운 리듬에 들썩거리듯 흘러가던 이야기는 결말부에 다다라 심각하게 주저앉는다. 큰 온도차가 발생한다. 흥겨운 파티와 취기로 가득하던 영화가 이내 급작스런 죽음을 대면하며 급격하게 얼어붙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알파독>은 책임보다 권력을 먼저 배운 청년들의 비극을 묘사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만큼이나 충격도 크다. 하지만 이는 진지한 사유로 발전되기 위한 계기라기 보단 일회적인 충격요법에 가깝다. 다큐적인 양식을 통해 사안의 심각성을 조명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의 말미까지 사연의 허구적 태도를 추구한다. 또한 그 상황의 주체를 묘사할 뿐 그 상황에 영향력을 끼친 배후를 지적하는데 미흡하다.
마약을 파는 조니의 아버지 소니(브루스 윌리스)는 아들의 사업을 방조하고 되려 육성한다. 부자의 기묘한 유대감이 시대적 타락을 가볍게 비웃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훈육은 아들을 망친다. 한편에서 잭은 어머니 올리비아(샤론 스톤)의 지나친 간섭에 스트레스를 겪고 이내 집에서 달아난다. 두 사연은 결국 기이한 파국을 낳는다. 이 사연은 특수하나 그 사연의 배후는 보편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하지만 <알파독>은 그 사연의 배후보다도 그 사연의 형태를 탐닉하는데 열중한다. 결국 그 심각한 결과를 마주친다 해도 그 과정의 경쾌한 잔상이 아른거린다. 허구적인 내러티브가 진지한 실화를 압도한다. 의도보다도 수단이 앞선다. 스타일의 과잉 속에 자의식이 묻혔다. 영화의 의미가 증발된다. 기교는 성장했지만 의미를 성숙시키는데 실패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