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갈라지다 이내 꺼진다. 달아날 곳조차 없을 정도로 지반 전체가 요동을 친다. 캘리포니아주 전체가 마치 기울어진 접시 위의 팬케이크처럼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다. 화산도 폭발하고, 쓰나미까지 밀려온다. 지구상의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사람이 발붙이고 설 땅이 없어진다. 말 그대로 전지구적 재앙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2012>는 재난이란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미지들의 합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재앙 블록버스터의 총아다. 재난이라면 보여줄 만큼 보여준 할리우드가 아예 끝장을 보자는 심산으로 영화를 제작한 것마냥 보일 정도로 막대한 규모를 전시하는, 진정한 블록버스터다.
지구의 멸망, 더 나아가서 인류의 멸망을 그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2012>는 바티칸 궁전을 붕괴시키고 리우데자네이루의 그리스도상을 무너뜨리는 등, 전세계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재난적 이미지를 전시해내며 묵시록적 기운을 과시한다. 재난 블록버스터는 현실에서 비극으로 점철될 만한 재앙을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듦으로써 엔터테인먼트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오락적 결과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2>는 분명 대단한 볼거리임에 틀림없다. 눈 앞에 생생하게 전시되는 파괴적인 장관이 즐비한 <2012>는 단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상을 지배할만한 거대한 시퀀스를 품고 있다.
사실상 <2012>에서 드라마란 재난의 이미지를 연결하기 위한 교각이나 다름없다. 예감하지 못했던 재난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달리고 비행하며 헤엄친다. 물론 그 이전에 재앙을 미리 점지하는 과학자들과 이를 보고받는 세계적인 권력가들의 침통한 표정을 통해 묵시록적인 엄숙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차피 <2012>가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즐기기 위한 킬링타임 무비라는 것을 인지한 관객에게 <2012>에서 이미지 이외의 영역을 차지하는 요소들의 역할이란 그 스펙터클을 효과적으로 엄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2012>는 압도적인 이미지의 너비에 비해 감정적으로 와 닿는 충격적 강도가 기이할 정도로 얕은 영화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2012>는 규모 이외에 내세울 것이 없는 볼거리에 불과한 탓이다.
재앙으로부터 탈출하는 인물들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보다도 되레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의 아찔함처럼 감정을 표출한다. 그것이 때때로 재앙에 놓인 이들의 사실적 비극을 간과하게 만든다. 재앙 앞에서 생존적 본능을 곤두세우기보단 비범한 휴머니즘을 역설한다. 그것은 감동적이라기 보단 허세적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는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허술한 탓이다. 디테일한 CG를 통해 실물감이 대단한 재앙적 이미지와 달리 재앙을 목전에 두고 대의를 주창하는 인물들의 뻣뻣함이 스펙터클마저 느슨하게 만든다. 서스펜스적인 연출 감각도 부재하다. <2012>의 재난적 광경을 지켜본다는 건 말 그대로 지켜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 상황이 야기할만한 긴장감이 좀처럼 객석으로 전이되지 못하고 스크린 안에서 증발된다. 단지 전인류적 위기와 다수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는 침통한 감상이 영화와 무관하게 개인의 심상을 지배하고 말 뿐이다.
<투모로우>를 통해 전지구적 재앙을 그렸던 롤랜드 에머리히는 <2012>를 통해 보다 파괴적인 인류적 미래를 그려낸다. <2012>는 어쩌면 대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할리우드의 위력을 대변하는 과시적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 동안 할리우드가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전시하는 욕망의 분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2012>는 말 그대로 그 이상의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 영화다. 이미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안에서 이뤄진 모든 것들을 조합해놓은 편집영상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두뇌가 작은 공룡들처럼 창의력도, 상상력도 부족하다. 물론 재난의 종합전시관이란 측면에서 볼거리는 분명하다. 결론은 (어떤 식이든 <2012>를 보고야 말 관객에게) 스크린이 큰 상영관이 진리다.
햇살이 안온하게 내리쬐는 산뜻한 외관의 풍경과 달리 깊게 그늘지듯 침침한 내부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이런 철창이 있을 곳은 세상에서 2군데 밖에 없다. 동물원과 여기.”대사가 지칭하는 그 ‘여기’란 곳은 바로 교도소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화시켜서 내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떤 범죄자는 그곳에서 걸어나갈 수 없다. 교도소는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기도 한 탓이다. 그리고 그곳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실행하거나, 확인한 이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집행자>는 제목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을 중심에 둔 영화다. 사형이라는 소재 내에서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제3자의 인권을 살핀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인 동정에 천착하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는 교도관들의 심리적 채무와 그 끝에 남겨질 반영구적 상흔을 살핀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사형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사형이라는 제도가 심각한 건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끊음으로써 반인권적인 처벌을 자행한다는 점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 제도적 차별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해버리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하다. 사형이라는 제도를 결정하는 건 헌법적 약속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의적 의사에 따른 법치적 행정은 어느 개개인들의 손끝을 통해 이뤄진다. 결과적으로 그 행위에 손을 담근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심리적 갈등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셈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고 할만한 <집행자>는 베테랑 교도관과 신참 교도관을 대비시키고, 범죄자에 대한 냉소한 시각과 동정적 시선을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프레임을 영화에 장치하고 이를 통해 사건의 양상을 발전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체제에 적응해나가는 신참 오재경(윤계상)과 베테랑 배종호(조재현)의 관계는 버디무비를 보는 듯한 흥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체제 속에서 사람의 본성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어가는가라는 고찰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종종 자신이 짊어진 무게감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듯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가벼운 웃음을 매복시키기도 하며,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어색한 흐름이 발견되기도 하며 불필요하게 확장된 감정적 진화가 감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집행자>는 소재가 발생시킬 수 있는 다양한 논지들을 단계적으로 나열할 뿐, 창의적인 형태로 발전시켜나가지 못한다. 일차원적인 연극적 상황을 연출해서 단조롭게 의미를 부각시키고 캐릭터를 통해 직설적인 감정을 쏟아내지만 훈육처럼 뻣뻣해서 깊게 마음을 끌어당기거나 흔들어 놓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광경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압력은 대단하다. 특히나 사형수 이성환(김재건)과 오랜 벗이 된 김교위(박인환)가 직접 그의 사형집행을 실시하는 순간의 페이소스는 <집행자>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시퀀스라 할만하다. 하지만 그 외에 사족과 같은 서브플롯들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되레 균형을 맞추지 못하는 느낌이다. 마치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의 경계처럼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중화시키지 못한 모양새가 흠이랄까.
플롯을 좀더 과감하게 정리했다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 같은 감상이 남는 건 결국 어떤 좋은 취지나 의미만으로 영화가 완전해질 수 없다는 문제를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든다. 좋은 발언만큼이나 좋은 발성도 중요한 법이다.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대통령은 일개 개인이 아니라서 (개인적인 처신까지도) 국민적 동의와 수반적 회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등장하는 대사는 일면 의미심장하다. “국민의 손과 발이 되겠다”던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취임사처럼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자 전국민적 동의를 등에 업고 대표성의 권위를 등에 업은 권력자다. 그만큼 대통령은 어느 개인으로서의 삶을 전면에 내걸 수 없는 대의적 존재로서 의무를 지닐 때 그만큼의 권력을 함께 보장받는다. 그리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국민적 동의를 통해 절대적 권력을 얻었다는, 그 대통령에 관한 드라마다.
사실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국영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단순히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대통령을 중심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전례들과 차별화 될만한 작품이다. 또한 대통령이라는 직책으로부터 행사되는 업무적 고뇌를 벗어나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아우라에 감춰진 개인적 인간미를 조명한다는 것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궁극적 방점이다. 어쩌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근래 두 전임대통령의 부고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특별한 감상을 부를 만한 시의성을 두른 작품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대통령의 임기 교체 과정을 이어나가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세 대통령을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을 형식적 단절을 생략한 상태로 접붙인 옴니버스적 장편이다. 대통령 퇴임을 앞두고 로또 1등에 당첨된 김정호(이순재), 젊고 잘 생긴 최연소 대통령 자리에 올라 국책을 수행하던 중, 한 청년의 개인적 바람 앞에서 갈등하게 되는 차지욱(장동건),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여성대통령이 됐지만 남편 최창면(임하룡)의 돌발적 행동으로 곤혹을 치르게 되는 한경자(고두심)까지, 세 번의 정권교체 속에서 세 대통령이 겪게 되는 큰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나열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그 주요한 사건을 통해 대통령이라는 틀에 감춰진 인간을 발췌하려 한다.
사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으로서의 공무적 현실성을 추적하는 작업이 아닌, 대외적 바람이 투영된 이상적 이미지즘에 가깝다. 공무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통령의 사소한 에피소드는 직책에 가려진 개인을 환기시킨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범위와 충돌을 일으키는 개인적 범위의 사연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대한 뿌리깊은 관성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도발과도 같다. 독재의 역사와 더불어 제왕적 이미지를 뿌리깊게 내린 기존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현실적 권위를 한 꺼풀 벗겨내기 위한 허구적 작업과도 같다. 소박하고 진솔한 대통령들을 연이어 묘사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인간적이란 언어와 괴리감을 이루는 대한민국 대통령들과 차별화된 대리적 만족을 그리기 위해 기획된 고의적 판타지다.
현실에서 사실상 좀처럼, 어쩌면 결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통령들이 등장하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일종의 희망사항이거나 허구적 대리만족에 가까운 작품이다. 대통령의 비현실적인 미담을 연이어가는 건 현실적 가치관을 역설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에 가깝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이상을 영화적으로 대리 만족시킨다는 미덕이 발생한다. 하지만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지나치게 강박적인 영화다.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들뜬 기분을 죽이지 못한 채, 매 사연을 안이하고 평이한 해피엔딩으로 그려내기 위해 작위적인 미소를 짓는 느낌이다. “굴욕의 역사는 있어도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소. 한국을 우습게 보지 마쇼.”극중 2번째로 등장하는 최연소 대통령 차지욱의 혈기왕성한 발언처럼, 때때로 과도하게 격양된 국가적 자부심을 웅변하거나, 매 에피소드마다 내재된 개별적 클라이맥스에서 과장된 음악을 삽입하며 감정적 고양을 조장한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은 마치 ‘인간적’이란 용어를 대변하는 이상적 롤모델로서 묘사되기 위해 동원된 이미지로서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대통령들이란 친서민적이거나 자기헌신적인, 혹은 일탈적인 일상을 꿈꾸는 대통령을 나열하기 위한 수단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치 소재에 대한 강박에 눌려 창작적 태도를 발전시켜나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마냥 지나치게 이상적인 이미지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한 인상이 느껴진다는 건 분명 아쉬운 지점이다. 동시에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재기발랄함과 치기어림이라는 취향적 호불호로서 명확한 팬덤을 두르던 장진의 영화란 점을 염두에 두자면 그 특이성을 거세한듯한 코미디와 평이한 이야기 전개를 연출한다는 건 작가적으로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물론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나름대로 대중적 호응을 얻을만한 코미디적 감각을 품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 위무를 가능케 할만한 기능적 역할이 뚜렷한 작품이다. 예술이 현실 안에서 누릴 수 없는 꿈을 대변하는 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이상적 태도는 인정할만한 구석이 있다. 장진이라는 개인적 범위의 퇴보적 결과물이란 평을 떠나 <굿모닝 프레지던트>라는 영화가 지닌 대중적 고려는 시대적으로 인정받을만한 구석이 있다. 다만 그 판타지가 현실을 대변한다고 파악한다면 곤란하다.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환상일 뿐,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대통령에 대한 현실적 이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공익적인 우화일 뿐이다. 타인을 짓밟고 권위를 누리는 현실의 뻔뻔한 누군가들과 결코 무관한 이상적 대통령들이 사는 그곳은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므로.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제목을 빌린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재회한 과거의 연인은 시간 속에서 낡아가던 기억을 현재에서 되새김질하며 다시 한번 로맨스적 예감을 꿈꾼다. ‘때를 알고 내린 좋은 비’처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을 그린 <호우시절>은 낭만적인 로맨스 멜로다.
건설중장비회사 팀장으로 근무하는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사천의 청두로 출장을 가게 되고 현지 지사장(김상호)을 만나 ‘두보초당’으로 안내를 받는다. 두보초당을 구경하던 박동하의 시선이 초당을 안내하는 여자 가이드에게 머무른다. 그 시선을 느낀 가이드의 눈빛에 놀라움이 선연하다. 과거 중국유학시절 연인이었던 박동하와 메이(고원원)는 그렇게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회포를 푼다. 우연한 만남 속에 지난 이별의 아쉬움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이 감돈다. 엇갈림이 빚어낸 안타까움이 번져 그리움이 되어 앙금과도 같은 추억으로 침전한다. <호우시절>은 그 앙금과도 같은 로맨스적 추억이 현실에서 재생된다는, 판타지적 로맨스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서 자리한 선남선녀의 이미지는 <호우시절>을 순정만화처럼 특별하게 치장한다. 특히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특별하게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고원원의 미소는 <호우시절>을 좀처럼 평범한 러브스토리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다. 사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재회해서 묵은 감정에 생기를 불어넣게 된다는 사연은 보편적이라기보단 특별하다 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호우시절>은 그 특별한 사연에 담긴 감정의 보편성에 적절한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빛 바랜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고 아련하게 묘사하며 그 말미에 긍정적 여운을 남기며 극적 낭만을 성숙시킨다.
본래 <호우시절>은 쓰촨성 지진을 추모하기 위해 세 개의 단편 옴니버스로 기획된 <청두, 사랑해>에 참여한 허진호 감독의 작품을 장편으로 리폼된 작품이다. 중국 청두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짧은 재회와 이별을 그리는 <호우시절>의 단편적인 서사도 어쩌면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상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하게 풋풋한 기운이 산들거리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한 <호우시절>은 사실상 작가적 욕심보다도 기획적 태도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도 좋은 형태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만큼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소품에 가깝게 이해해도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쓰촨성 대지진과 개인의 사연을 연동시키는 방식이나 그 현장을 예감하게 만드는 몇몇 이미지는 본래 <호우시절>의 기획의도를 재확인시키는 증거나 다름없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전작들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새로운 로맨스를 맞이하기 위해 남녀는 환절기 감기와 같은 진통을 건너고 삶의 면역력을 높인 뒤 성숙한 계절에 들어선다. <호우시절>은 느낌표라기 보단 쉼표에 가까운 작품이다.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일명 FPS(First-Person Shooter)게임이라고 불리는 1인칭 슈팅 게임을 즐기는 당신의 시점을 대변하는 버추얼 캐릭터가 만약 당신과 동일한 현실상의 인간이라면 과연 그 게임을 즐길 수 있을까? <게이머>는 가상의 세계 속에서 시뮬레이션되어 오락적 쾌감을 발생시키는 게임의 반윤리적 속성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연동한 액션영화다. 가상이 아닌 현실 안에서, 캐릭터가 아닌 인간이 서바이벌 게임을 벌여나간다는 설정은 비현실적 공간에서 체감되는 폭력적 오락성의 쾌감을 현실의 도마 위로 올린 문제제기적 속성을 발생시킨다.
비현실의 공간에서 구사되는 폭력성을 통해 본래 폭력이 지닌 잔혹한 속성을 망각시키고 오히려 오락적 쾌감을 구현하는 게임이 리얼리티한 세계관 안에서 생존을 위한 실제적 살육이 돼버린 세상,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게이머>는 이성이 마비된 듯 가상현실의 대리적 환각과 환락에 도취된 인간들의 비이성적 세계를 단순하게 일반화시킨 세계를 통해 게임이라는 속성의 기본적 태도를 윤리적 문제로 치환한다. 사실상 <게이머>가 디자인한 세계관은 비범한 척하지만 실은 단순하고 얄팍하다.
가상의 디스플레이가 미래지향적인 테크놀로지의 극단성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미래의 세상은 지극히 평범한 현재적 풍경을 두르고 있다. 인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나노셀 칩을 머리에 이식한 죄수들은 1인칭 슈팅게임의 캐릭터가 되어 그들을 직접 컨트롤하는 플레이어들의 손을 통해 생존 가능성을 부여 받는다. 가늠할 수 없는 기술적 발전을 드러내는 미래적 테크놀로지 세계관에서 빌딩 숲으로 이뤄진 도시의 평범한 현재성은 <게이머>가 지닌 설정의 얄팍함을 감출 수 없는 지점이다.
<게이머>는 디스토피아의 껍데기를 두른 액션영화에 불과하다. 단지 비관적인 세계관의 껍데기를 수단처럼 두르고 오락적 쾌감을 장착한 액션영화에 불과하다. 현란한 비주얼과 과감한 물량공세로 이뤄진 <게이머>의 액션 시퀀스는 그런 욕망 자체를 대변한다. 그러나 <게이머>가 전시하는 액션신은 기이하게 지겹다. 창의적인 동선을 직조하기 보단 시종일관 화면만 흔들어대는 통에 시각적 피로감만 축적되고 지나치게 안일한 캐릭터들을 줄곧 내세우며 결과에 대한 기대감을 상실시킨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게이머>는 지극히 전형적인 용두사미 영화다. 안일하게 진전시키는 이야기는 결국 플롯의 공백을 낳고 스스로 벌려놓은 이야기를 정리해낼 엄두도 내지 못하다 나태한 감동으로 모든 상황을 종식시킨다. 94분 간의 러닝타임 동안 게임을 즐겼다면 차라리 이보다 나았을까, 기회비용을 생각하게 만든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죽을 것이고, 여자는 망자가 된 연인 생각에 눈물지을 것이 빤하다. 결국 그 눈물을 얼마나 식상하지 않게 포장하고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가 <내 사랑 내 곁에>의 관건인 셈. (궁극적으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 할만한) 로맨스를 도입부에서부터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쉽게 웃고 쉽게 울면서도 곧잘 정색하는 영화다. 좀 더 농익을만한 감정들이 인위적인 수순에 의해 절제되고 감정적 고양을 차단당하며 인색할 정도로 얕은 수위의 감정을 허락 받는다.
모친상을 당한 종우(김명민)와 장례대행사에서 일하는 지수(하지원)가 만나 곧 연인이 되는 과정은 감정선의 설득력을 배려하지 않은 것마냥 급작스럽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의 무르익음을 설명하며 감정선의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마냥 멜로의 시작을 무뚝뚝한 단면처럼 잘라내듯 내보인다. 그 이후로 농밀하게 진전되는 로맨스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환경을 외면하듯 생기 있게 그려진다. 전후반부의 감정적 격차를 통해 신파적 깊이를 우려내는 <너는 내 운명>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전후반의 감정적 격차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감정선을 조절한다.
감정이란 것이 매번 설득력 있는 서사를 담보로 서서히 우러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급작스런 감정적 변화를 선보이는 서사적 흐름에 설득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가 선택한, 본질적으로 박진표 감독이 선택한 감정의 급변이 그 방식의 활용면에서 효율적인가를 의심해볼 여지는 있다. 그것이 박진표식 멜로라는 이름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그런 감정적 절제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직접적인 대사와 나레이션 독백까지 동원하며 감정을 직접 실어 나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스크린 밖에 놓인 관객의 감정이 무르익기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영화다. 관객 스스로가 그 감정선에 들어서기 전에 스크린은 감정을 뚝뚝 떨어뜨리다 일거에 방류한 뒤 곧잘 표정을 바꿔버리고 지난 감정을 탈색시킨다.
최루성 신파를 지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인정할만한 방식이지만 그 의도 내에서도 거둬내야 할 감정적 수긍이 있었다면 그 방면에서는 실패한 형식이다. 멜로적 감수성을 통해 승부수를 띄우는 <내 사랑 내 곁에>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의 상투성을 포기한 건 도전적이나 그 의도 안에서 숙성시켜야 할 감정적 키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건 역시나 식상한 일이다. 동시에 로맨스와 죽음에서 비롯되는 멜로적 감수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보단 별개적으로 괴리되는 인상이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처럼 서로 마주선 두 형태의 멜로적 플롯을 끝내 이어 붙이지 못한 <내 사랑 내 곁에>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맥락을 접목시키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말해도 될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인상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설득력 있게 그려나가는 과정에 있다. 현실적인 좌절감을 외면하기 위해 비극을 외면하고 희망을 연기하던 인물들이 비극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짓눌리는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삶은 좌절로 급격하게 내려앉는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부각시키는 건 김명민의 헌신이겠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적절한 백업이 조화를 이루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연기적 공헌과 별개로 그들이 던지는 대사에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전적으로 대사의 함량 때문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종종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명백한 오용이다. 신파로서 지나친 감정적 고양을 자제하려 한 의도는 존중할만하나 그 의도 안에서도 실패의 흔적이 역력하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세상 어딘가엔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남자가 있을 거라 믿는 여자. 남자란 모름지기 여자와 침대에 올라갈 생각만 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남자.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여자와 그 믿음을 허구라며 깨부수는 남자의 만남. 남녀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공식을 내세우며 반대의 이미지로 뻗어나가는 그래프로 대칭된다. <어글리 트루스>는 남녀라는 함수관계 속에서 정반대의 공식을 통해 대칭적 그래프처럼 거리감을 두던 남녀가 다시 한 점에서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는 로맨틱코미디다.
아침 뉴스쇼 PD 에비(캐서린 헤이글)는 품격 있는 방송을 추구하지만 나날이 바닥을 긁는 시청률에 임원진의 압박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야간 케이블 방송에서 ‘어글리 트루스(The ugly truth)’라는 성 카운셀러 방송을 우연히 보게 되고 직설적인 발언으로 순수한 사랑을 짓밟는 마이크(제라드 버틀러)를 보고 격분해서 전화연결까지 시도하지만 결국 모욕만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오전, 마이크를 아침 뉴스 쇼에 영입한다는 국장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지령을 받게 된 에비는 이에 질색하지만 결국 임원진의 압박에 그를 받아들이게 된다. 결국 뉴스 쇼에 출연한 마이크는 직설적인 발언으로 방송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지만 시청률은 상승하고 에비는 더욱 발만 동동 굴린다.
갈등선이 뚜렷한 남녀가 반목을 거듭하다 우연히 서로의 진심을 들추는 기회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호감을 이루다 종국에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로맨틱코미디라 불리는 대부분 영화들이란 남녀의 관계변화를 줄기로 로맨스의 진전을 그려나가는 작품이다. 어쩌면 그만큼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는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운 관습적 영화란 말이기도 하다. 그건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특별하게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식상한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로맨틱코미디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는 건 그 전형성이 갖춘 쏠쏠한 재미에 있다. 그리고 그 재미의 원천은 로맨틱의 배후에 놓인 코미디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어글리 트루스>는 스크루볼 코미디로서 탁월한 묘미를 자랑한다. 저마다의 생각과 속내를 거침없고 장난끼 가득한 수사에 담아 속도감 있게 주고 받는 캐릭터들의 입담은 <어글리 트루스>에서 오락적 재미를 자아내는 첫번째 묘미다. 또한 입담이 뛰어난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자랑하는 동시에 상황에 적절한 슬랩스틱을 구사하며 유머를 강화한다. 특히 캐서린 헤이글의 진동(?) 연기는 인상적인 웃음을 발생시킨다. 동시에 남녀 관계에 대한 적나라한 믿음을 표현하지만 연애 카운셀러로서 인상적인 조언을 던지는 마이크와 이를 통해 감정적 변화를 감지하는 에비의 관계 변화를 바라보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긴밀한 연인 관계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간다는 점에서 <어글리 트루스>는 성공한 로맨틱코미디라고 할만한 여지가 있다.
결말은 뻔하다. 누구나 예상하듯, 원수는 연인이 된다. –이건 스포일러도 아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결말을 확인하는 일이란 그만큼 식상하다. <어글리 트루스> 역시 그 식상함의 혐의에서 온전히 자유롭기 어려운 영화다. 하지만 그 뻔한 결말을 연출하기 위한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분명하다. 마초남과 순진녀가 만나 애정관의 차이를 확인하지만 이성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감정에 이끌리게 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섹스어필한 입담을 통해 사랑에 대한 순진한 감상을 날려버리고 실제적인 감정에 치중한다는 점도 현실적이다. 무엇보다도 근육만큼이나 입담도 탄탄한 제라드 버틀러와 우아하면서도 깜찍한 캐서린 헤이글의 앙상블이 <어글리 트루스>의 매력을 온전히 보장한다.
불과 2살의 나이에 백혈병에 걸린 케이트(소피아 바실리바)를 위해 엄마 사라(카메론 디아즈)와 아빠 브라이언(제이슨 패트릭)은 맞춤형 아기를 낳는다. 안나(아비게일 프레슬린)는 케이트를 위해 생을 얻은 아이다. 당연히 케이트를 위해 골수를 채취하고 신장 하나를 넘겨줄 운명이다. 그러나 안나는 유명 변호사인 알렉산더 켐벨(알렉 볼드윈)을 찾아가 자신의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소송장을 받아 든 사라는 안나의 태도에 격분하지만 브라이언은 안나의 의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며 안나를 인정하고 오빠인 제시(에반 엘링슨)는 말은 아낀다. 그리고 병세가 심각해지는 케이트로 인해 가족의 시름은 깊어져 간다.
완벽한 가족계획을 통해 태어난 아이. 언니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필연적인 운명을 타고난 동생. 유전자 조작에 의해 인간의 맞춤형 생산이 가능해진 현대에서 만물의 창조에 관여하는 건 단지 신만이 아니다.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시대에서 생명을 잉태한다는 건 단순히 콘돔의 유무에 따라 가늠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유전자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를 가족의 갈등과 충돌로 치환한 뒤 화해적 드라마로 뻗어나간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딸의 치료를 위해 맞춤용 아기를 계획한 부모와 이런 태생적 운명을 뒤늦게 거부하는 딸의 충돌,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가족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문제작에 가까운 소재를 통해 논란을 발생시키지만 그 논란은 가족이란 범위 내의 갈등과 충돌로서 발휘되며 궁극적으로 그 갈등은 가족들의 상흔과 고민을 드러내는 매개로서 작동된다.
<쌍둥이별>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출간되어 인기를 얻었던 조디 피콜트의 원작소설을 스크린에 이양한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가족이라는 운명적 테두리에 귀속된 구성원 개개인의 속내를 들추고 이를 통해 그 테두리의 형태 너머의 본질을 들춘다. 집안에 소송을 거는 막내딸 안나의 독백을 통해 출발하던 1인칭 시점의 플롯은 다른 가족들의 시점으로 중심을 이동하며 가족이란 테두리 내에 갇혀놓았던 개개인의 심리를 스크린에 나열한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고 믿었던 구성원들의 마음이 실은 조각처럼 나눠지고 저마다의 결핍과 고독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는 은연 중의 진실이 스크린 위로 조심스럽게 펼쳐진다. 투병 중인 케이트를 위한 온 가족의 헌신은 그 선택의 의미를 벗어나 때때로 가족 간의 상처를 방치하고 저마다의 불합리를 무시하게 만드는 계기로서 작동한다.
소재만으로 문제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과학 발전에서 비롯된 인간적 윤리를 가족의 안방으로 끌고 들어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궁극적으로 가족에 대한 성찰과 드라마틱한 감동을 거두는 작품이다. 원작의 명료한 문체를 감각적인 영상과 배경음악으로 치환하고 저마다의 1인칭 독백을 통해 수집된 개개인의 심리를 플롯으로 이어나가며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그 바탕이 되는 건 배우들의 열연이며 삭발 연기로 화제가 된 카메론 디아즈의 헌신적 연기만큼이나 아역들의 열연이 대단하다. 특히 소피아 바실리바와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연기는 훌륭하다. 투병 중인 케이트의 고통과 함께 성숙한 내면을 드러내는 소피아 바실리바의 연기는 의외적 결말을 선사하는 영화적 선택을 위한 설득력을 보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아비게일 프레슬린의 똑 부러진 연기 역시 영화의 본심을 감추기 위한 중요한 태도였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성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어린 배우들의 영특한 연기는 문제적 시선을 폭넓게 확장하는 동시에 영화적 흥미를 돋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류의 삶은 진보하지만 윤리적 가치판단은 나날이 어려워진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그 윤리적 논쟁을 실생활로 이끌고 들어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을 건드려 깨우치게 만든다. 삶이란 그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 자가 스스로를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과 명확히 달라진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결말은 원작의 형태보다도 설득력 있는 형태로서 변주됐다. 그리고 <마이 시스터즈 키퍼>는 죽음이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에 이성적으로 답변하는 동시에 감동마저 선사하는 작품이다. 가족은 결국 살아간다. 누군가의 빈 자리는 영원히 추억된다. 산 자는 살아야 한다. 대신 죽은 자의 꿈을 먹고 새로운 삶을 산다.
윌 버튼(갤런 코넬)은 인디락을 좋아하는 음악광이다. 매일 같이 존경해마지 않는 데이빗 보위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적은 메일을 보낸다. 답장을 기약할 수 없지만 단지 메일을 보낸다는 것만으로 낙을 느끼는 윌 버튼은 사실 동네에서 소문난 왕따다. 유일하게 그를 이해하는 건 어머니(리사 쿠드로) 뿐이다. 그런 윌 버튼은 비로소 왕따에서 벗어날 기회를 맞이한다. 어머니가 새 직장을 구한 덕분에 자신을 왕따로 무시하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학교로 전학가게 된 것. <드림업>은 왕따라 불리던 소년이 자신의 음악적 취향을 발판 삼아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드라마다.
다채로운 음악으로 치장한 <드림업>은 젊은 소년소녀들의 성장을 그려가는 전형적인 하이틴 무비다.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밴드슬램(Bandslam)’이라는 음악경연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밴드멤버를 구하던 샬롯(앨리슨 미칼카)은 우연찮게 윌 버튼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밴드 매니저로 섭외한다. 그 과정에서 윌 버튼은 베일에 가려진 소녀 샘(바네사 허진스)과 우연히 말문을 트게 되고 우정을 교류하게 된다.
우승자에게 거액의 상금과 음반 발매 기회를 준다는 밴드슬램에 출전하기 위해 윌 버튼이 구성하는 멤버는 남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관이 강한 학생들이다. 소외되거나 편협한 관계에 놓인 학생들이 밴드에 소속되어 화합을 이루는 과정은 <드림업>이 선사하고자 하는 감동의 핵심이다. 자신들의 세계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고 갈등을 이겨낸 끝에 성취의 결실을 얻어내는 과정만으로도 풋풋한 성장드라마의 묘미가 발견된다.
물론 <드립업>은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 불리기 힘든 영화다. 마치 방금 전까지 자신이 어떤 감정을 이루고 있었는지 쉽게 망각해버리는 캐릭터들의 감정선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고, 깊이가 얕은 갈등은 쉽게 무마되고 만다. 갈등이 쉽게 무마되는 만큼 성장드라마로서의 묘미 역시 확연하게 낮아진다. 동시에 서사의 진전 역시 리듬이 불균형하다. 단순히 에피소드의 나열을 이어 붙인 것마냥 한 형태로서의 이야기를 잘 이어나가지 못하는 인상이다. 하이틴 무비의 습성을 염두에 둔다면 스토리의 유치함 정도는 감당해야겠지만 구조적인 문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화법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림업>은 즐길만한 소품이라 인정할만한 작품이다. 게다가 <드림업>에서 가장 매력적인 소품 바네사 허진스는 여러모로 보는 재미와 듣는 재미를 부여한다. 피날레를 이루는 밴드슬램 공연 신은 깊이가 얕은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을 불식해도 좋을 만큼 효과적인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단점이 즐비하지만 명확한 쾌감을 보장할만한 발랄한 장점이 존재한다. 전체적인 협주는 서툴지만 때때로 괜찮은 개인기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