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났다. 축복을 공유해야 할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비통하다. 산모가 죽었다. 그 때문인가. 다들 아이를 경계한다. 아이의 얼굴을 본 아버지의 얼굴은 경악을 품더니 그 아이를 들고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리고 아이는 버려진다. 팔순 노인의 주름으로 가득한 작은 얼굴과 백내장에 관절염까지 앓고 있는 노쇠한 육체는 막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노인들의 요양원에서 거두어진 아이는 운명처럼 노인들 사이에서 자라난다. 그곳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는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로 알려진 스콧 F. 피츠제럴드의 동명 단편을 모티브의 뼈대로 삼아 풍만한 살을 붙여나간다. 제목은 영화를 탁월하게 함축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의 특별한 일대기를 회상과 재현의 방식으로 전진시키는 160분의 서사는 저 제목으로 완전히 압축된다. 서사적인 흐름에 역류하는 인물의 성장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 주변에 선 인물을 묘사하는 영화는 원작과 궤가 다르다. 시대적 배경을 비롯한 상당부분의 설정이 원작으로부터 이탈된다. 인물을 둘러싼 변화를 덩어리진 서사의 경계적 진행에 담아 묘사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사실적인 연대를 서사로 삼아 그 안에서 발생하는 시대적 배경을 사건에 결부시켜 인물과 시대의 변화를 연관시켜 작동한다. 1860년대에 시작되는 원작과 달리 <벤자민>이 1918년,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에 시작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사로 나열되는 원작과 달리 서사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맥락도 마련됐다. 어느 특별한 인생에 대한 일대기를 바탕으로 하되 그 안에 특별한 사연을 가공해 삽입한다. <벤자민>은 기이한 생을 짊어지고 가는 남자의 일생을 관통하는 감정을 그린다. 그저 노인에서 유아로 성장(?)하는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삶을 다룬 원작과 달리 <벤자민>은 그 기이한 삶 속에서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는 로맨스의 추억을 드리운다. <벤자민>은 실로 미스터리 하나 로맨틱한 영화다. 벤자민 버튼이 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와중에도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와의 로맨스는 은밀하게, 때론 강렬하게 지속된다. 이는 평생의 러브스토리이자 운명적인 로맨스다. 물론 긴 러브스토리는 많다. 하지만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인생이 이 러브스토리를 특별하게 배려하는 동시에 매우 절실한 감성을 보완한다. 특별한 소재와 서사의 뼈대가 온전한 원작을 통해 수려한 모티브를 발생시켰다. 각색을 맡은 에릭 로스는 흥미로운 사건을 위대한 러브스토리로 펼쳐냈다.
현실적인 연대는 <벤자민>에 현실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벤자민>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영화다. 특히 부드러운 붓질로 그려진 유화 같은 색감을 지닌 <벤자민>의 풍경은 영화의 문학적 상상력에 걸맞은 삽화로서 기능한다. 마치 실재 같지만 환상이며, 거짓 같지만 진실하다. 기이한 운명을 타고 난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씩씩하고, 그 운명을 관통하는 로맨스는 아련하되 투명한 여운으로 지속된다. 미스터리한 소재를 다듬어 아름다운 드라마를 연출하고 진실한 감동을 선사한다. <조디악>을 통해 중후한 거장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데이빗 핀쳐는 <벤자민>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생이 끝나도 그 생이 남긴 사연은 회자되기 마련이다. <벤자민>은 특이한 삶보다도 특별한 감동이 서려있어 아름다운 수작이다. 160여분의 대장정 끝에 얻어진 감정은 실로 투명하다. 눈물 나게 아름답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도 마지막까지 사랑은 흐른다.
상대 패를 읽을 수 있다면 게임은 유리해지기 마련이다. 도박이란 게 그렇다. 주식도 마찬가지다. 그래프의 변화를 읽는 자가 돈의 주인이 된다. <작전>은 그래프의 변화를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은 주식을 통해 ‘작전’을 펼친다. 주가의 흐름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주가의 흐름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대사를 빌리자면 대한민국 경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덕분에 주식에 관련된 전문용어가 난무하고 이에 관한 언어들이 삽시간에 흘러간다. 다양한 정보가 현란한 영상과 함께 스크린 속을 활보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딱히 인지하거나 숙지할 필요는 없다. <작전>은 주식에 대한 복잡한 이해를 바라는 영화가 아니다. 주식은 <작전>이란 영화를 설계하기 위한 일종의 매물과 같다.
<작전>에서 주식이란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파악하기 위한 도표와 같다. 부자들이 어장에서 먹음직한 미끼를 던지면 빈자들이 달려들고 그 사이 부자들은 그물을 던져 모조리 낚는다. 정보의 접근성은 자본의 유무에 따라 구별된다. 유산 계급의 속성이 근본을 구별한다. 속칭 데이 트레이너라고 스스로를 지칭하는 강현수(박용하)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 작전을 펼치는 황종구(박희순)의 차이도 거기서 비롯된다. 강현수는 재능을 통해 운을 확보하지만 황종구는 자본을 통해 계획을 실행한다. 증권 브로커 조민형(김무열)과 황종구의 작전을 가로채는 것도 재능을 통한 운이다. 이를 통해 재능밖에 없는 이는 밑천을 지닌 자의 수하로 포섭된다. 마치 그것은 프로에 준하는 실력을 갖춘 아마추어가 프로의 세계에 입성한다는 의미와 같다.
강현수는 <타짜>의 고니를 닮았다. 혈기 좋게 고를 외치다가 개털이 된 고니처럼 강현수 역시 찌질한 인생 갈아타기 위한 정답으로 주식을 믿었다가 바닥을 친다. 하지만 자신을 망가뜨린 그 곳에서 다시 한번 재기를 노린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교훈처럼 망가진 삶을 같은 방식으로 복구해나간다. 주식시장과 도박판엔 눈먼 돈이 난무한다. <작전>은 <타짜>의 변형이다. 인텔리한 주식 용어와 이론들이 어지럽게 출력되지만 실상 그건 중요치 않다. 실제적인 증권시장의 복잡한 함수관계를 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치밀함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이며 그것을 가능케 할 요구도 불필요하다. 그저 꼴만 갖추면 된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기싸움을 벌이는 캐릭터들의 심중이다. <작전>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교훈하는데 모든 것을 펀딩한다. 강자와 약자는 자본의 여부로 나뉘고, 그들은 곧 선과 악으로 대비된다. 비윤리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강자들은 악으로 묘사된다. 예외는 있다. 작전에 참여한 자산 관리자(PB) 유서연(김민정)은 기회주의자에 가깝다. 그래서 악보단 선에 근접한 지점에 선다. 그것이 본인의 입장에서 유리한 고지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상대적인 캐릭터 비중이 낮다. 강현수와 황종구 일당의 대비가 <작전>의 본질에 가깝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우열관계에 대한 반발과 성토가 <작전>의 핵심이다. 장르적인 연출을 시도하고 이미지가 빠르게 전환된다. 동떨어진 세계를 남몰래 염탐하는 듯한 흥분도 발생한다. 전문용어들이 난무하지만 모든 걸 이해하고 넘어갈 의무는 없다. 그건 그저 피상적인 세계관에 불과하다. <작전>은 리얼리티를 구사하는 허구일 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실존에 근접해있는지를 따져 묻는 건 불필요한 작업이다. 흡사 그것은 희화화된 조폭들을 위시한 조폭코미디의 전략과 유사해 보인다. 사실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보단 영화적으로 연출된 설정을 앞세워 교훈을 전파한다. 문제는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을 교훈적 태도로 설명하던 영화가 결말부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바탕으로 성공한 캐릭터의 BMW를 등장시킬 때, 기존의 설교는 허세가 된다. 에그타르트와 초코파이를 대비시키는 이미지만 그럴싸할 뿐, 그것을 향유하는 이들에 대한 의식은 개선시킬 수 없다. 맛있고 비싼 음식을 마음껏 즐기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할 수 밖에. 결국 남는 건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뿐, 긴 설교는 한탕주의를 가리기 위한 허세에 불과했을까.
어머니가 직장에 간 사이, 아이가 사라졌다. 그 어느 곳에서도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경찰청에 전화를 걸어 실종신고를 하니 경찰이 퉁명스럽게 답한다. 24시간 이후에 현장 방문이 가능하다. 24시간이 지났다. 5달이 지났다.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는 집으로부터 먼 외딴 곳에서 발견된 아이가 돌아온다는 기차역으로 발을 구른다. 그리고 모자는 상봉한다. 그 감격스러운 순간에 어머니의 표정이 굳는다. 우리 아이가 아니에요. 이를 지켜본 경찰의 표정이 굳더니 입을 연다. 당신이 잘못 본 거에요. 생전 아이를 본 적도 없는 경찰이 평생 아이를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의 기억이 잘못 됐음을 지적한다.
<체인질링>은 아이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이 짧은 문장은 눈물겨운 신파를 예상케 하지만 실상 <체인질링>은 치열한 정치적 투쟁의 드라마다. 단지 아이를 그리워하는 모성이 중심이 아니다. 아이를 찾았다고 자위하는 경찰은 제 아이가 아님을 알아보는 어머니를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어머니는 이에 끝까지 저항한다. 이는 실화다. 1920년대 미국에서 사라진 아들 월터 콜린스(게틀린 그리피스)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어머니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에 관한 사연이다.
2시간 20분이라는 긴 호흡을 지닌 <체인질링>은 전형적인 선악 구도와 약자의 승리를 꿈꾸는 전형적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것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실제를 기반으로 둔 사연은 허구보다도 강한 설득력을 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드라마 속엔 강렬한 투쟁의 연대기가 꿈틀거린다. <체인질링>의 모토는 신파가 아니라 저항이다. 모성에서 비롯된 감정적 호소와 함께 권리를 찾기 위한 소시민의 이성적 선언이 내재돼 있다. 물론 기반은 모성이다. 하지만 모성애는 투쟁심으로 나아간다. 부패한 경찰과 착복하는 정치적 시스템 전반에 대한 언질이 한 어머니의 모성애로부터 고발되고 발가벗겨진다.
사연의 형태는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새로운 애완견을 사주듯 실종된 아들 대신 찾아온 다른 아이를 모성애로 받아들이라 강요하는 경찰의 모습은 권위적인 공포를 느끼게 한다. 동시에 이에 저항하는 크리스틴을 되려 몰아세우는 경찰의 만행은 분노를 머금게 한다. 그 종래에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의 권리를 묵살하고 되려 억압한 경찰의 만행을 폭로하는데 성공한 어머니의 승리는 감동을 자아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모든 사연은 슬프다. 진실은 조작이 가능하다. 그 조작된 진실엔 진실의 외벽으로 밀려난 이들의 처절한 사연이 짓눌려있다. 단순히 순수한 모성애로부터 발생하는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뛰어넘어 권위적 억압에 저항하는 개인의 순수한 양심을 조명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1920년대를 조명하는 <체인질링>은 대한민국의 현재와 맞닿아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진실을 강요하고, 이에 분노하는 소시민들은 저항을 거듭한다. 정경유착이 맞물려 도시를 부패의 온상으로 만들고 조작된 평화를 전시하지만 실상 기저의 소시민들은 불안에 방치된 채 살아간다. 희생자가 나타나면 잘못을 덮고 되려 희생자를 협박한다. 권력의 지배자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로 소시민을 지배한다. <체인질링>은 슬픔을 동반한 승리를 꿈꾼다. 그 승리는 아픈 만큼 숭고하다. 조작된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선 결국 어느 개인의 헌신과 희생이 뒤따른다. 조직적인 체제를 통해 개개인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소시민은 말한다. 싸움을 걸지 않되, 마무리는 내가 지어야지. 체제에 굴복한 개인은 약자가 된다. 반대로 체제에 저항한 개인은 강자로 거듭난다. 팔순을 앞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시하는 정의란 이렇다. 대한민국의 가짜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미국의 진짜 보수주의자는 적어도 정의를 안다. 안젤리나 졸리의 열연에 찬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혜안에 깊은 경의를.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간략한 자막이 따라붙고, 서사의 변화를 표기하는 자막도 타이밍 맞게 등장한다. 이 사연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듯 빈번하게 자막이 등장하며 화면을 수놓는다. 실제로 <알파독>은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마약딜러로 성공했지만 결국 미 FBI의 최연소 수배범으로 기록된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라는 청년에 관한 서사를 극화했다.
과감하게 총질을 해대는 흑인 갱스터들이 걸러지지 않은 증오와 살의로 무장한 랩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커다란 TV로 방영된 힙합 뮤직비디오는 타락의 이미지를 쾌락의 메시지로 변형시킨 강렬한 비트가 젊은이들을 자극한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한 청년이 무심하게 소리친다. 총을 쏘면 기분이 죽이겠지! 행위의 결과적 책임보다도 행위에 대한 쾌락만이 강하게 감지된다.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타락의 무게를 감내할 줄 모르면서도 타락을 꿈꾼다. <알파독>은 자신이 무엇을 저지르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리는 젊은이들의 비극을 품고 있다. 장난처럼 시작된 사연은 번져나가는 불처럼 걷잡을 수 없게 커져나간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쉴새 없이 에피소드를 만들어 돌린다. 각기 비중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은 거미줄처럼 얽히며 사건을 형성해나간다. 그 사연의 중심엔 젊은 나이에 마약 딜러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조니(에밀 허쉬)가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매일같이 향락을 즐기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에게 빌려간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겠다는 제이크(벤 포스터)와 심하게 다툰 후 그의 삶이 풍랑처럼 흔들린다. 제이크와 주고 받은 갈등의 전개 속에서 조니는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우연히 만난 제이크의 동생 잭(안톤 옐친)을 납치한 조니는 친구인 프랭키(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잭을 떠넘기고 감시를 맡긴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만을 설명하자면 상당히 심각한 범죄적 행위가 발생했다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영화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서스펜스에 유리한 상황임에도 코믹이 발생하고 하이틴 무비의 발랄함이 감지된다. 심각한, 혹은 심각할 운명에 놓인 사연에 비해 혈기왕성한 스타일로 멋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영상엔 어떤 변수에 대한 예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가벼운 장난처럼 두서없이 부유하는 사연 속엔 그저 놀기 좋아하고 즐기기 좋아하는 청춘이 존재할 따름이다. 납치한 쪽이나 납치된 쪽이나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일종의 해프닝처럼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던 이들은 때때로 끈끈한 교우 관계로 거듭나며 특별한 추억을 쌓기도 하고 미래를 기약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 사태의 심각성이 각인된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이었는가를 깨달은 조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마약을 팔고 유흥을 즐기던 20대 청년은 어른의 육체로 성장했으나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미숙하기만 하다. 가벼운 리듬에 들썩거리듯 흘러가던 이야기는 결말부에 다다라 심각하게 주저앉는다. 큰 온도차가 발생한다. 흥겨운 파티와 취기로 가득하던 영화가 이내 급작스런 죽음을 대면하며 급격하게 얼어붙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알파독>은 책임보다 권력을 먼저 배운 청년들의 비극을 묘사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만큼이나 충격도 크다. 하지만 이는 진지한 사유로 발전되기 위한 계기라기 보단 일회적인 충격요법에 가깝다. 다큐적인 양식을 통해 사안의 심각성을 조명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의 말미까지 사연의 허구적 태도를 추구한다. 또한 그 상황의 주체를 묘사할 뿐 그 상황에 영향력을 끼친 배후를 지적하는데 미흡하다.
마약을 파는 조니의 아버지 소니(브루스 윌리스)는 아들의 사업을 방조하고 되려 육성한다. 부자의 기묘한 유대감이 시대적 타락을 가볍게 비웃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훈육은 아들을 망친다. 한편에서 잭은 어머니 올리비아(샤론 스톤)의 지나친 간섭에 스트레스를 겪고 이내 집에서 달아난다. 두 사연은 결국 기이한 파국을 낳는다. 이 사연은 특수하나 그 사연의 배후는 보편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하지만 <알파독>은 그 사연의 배후보다도 그 사연의 형태를 탐닉하는데 열중한다. 결국 그 심각한 결과를 마주친다 해도 그 과정의 경쾌한 잔상이 아른거린다. 허구적인 내러티브가 진지한 실화를 압도한다. 의도보다도 수단이 앞선다. 스타일의 과잉 속에 자의식이 묻혔다. 영화의 의미가 증발된다. 기교는 성장했지만 의미를 성숙시키는데 실패한 셈이다.
한때 물밀듯이 쏟아지는 조폭코미디가 한국영화계를 장악하던 호시절이 있었다. <조폭마누라> <가문의 영광> <두사부일체> 등 희화화된 조폭 캐릭터를 통해 코믹한 설정을 이어가던 조폭코미디는 흥행가도를 달렸다. 그 뒤로 시리즈가 양산되면서 설정의 질적 묘미보단 가공된 웃음의 양적 팽창이 극대화됐고 그만큼 관객은 점점 식상해 했다. 그럼에도 한동안 프랜차이즈를 유지하던 조폭코미디는 끝내 한동안 시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관객은 조폭코미디를 소비하면서도 때때로 그것을 충무로 영화를 비난하는 질적 표준으로 손가락질했다.
<유감스러운 도시>(이하, <유감 도시>)는 과거의 향수와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정준호와 정웅인, 정운택, 그리고 김상중까지, 과거 <두사부일체>의 기시감도 덧씌워진다. 게다가 메가폰을 잡은 이는 <두사부일체>의 속편인 <투사부일체>의 김동원 감독이다. <유감 도시>는 정확하게 조폭코미디의 혈통을 계승한다. 속편의 양산으로 질적 하락을 거듭했지만 과거 조폭코미디의 시작은 나름대로의 설정적 묘미를 품고 있었다. 브랜드 네이밍을 거둘만한 실효가 어느 정도 존재했다는 의미다. <유감 도시>는 일종의 출발점이다. 속편이 아닌 이상에야 나름대로의 설정적 묘미는 검증할만한 자질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다.
누가 봐도 <유감 도시>는 <무간도>를 삼켰다. 물론 <디파티드>급의 변주적 능력은 없다. 그저 코미디를 위한 일종의 패러디적 포석으로 <무간도>를 지목했을 따름이다. 경찰은 조폭이 되고, 조폭은 경찰이 된다. 설정은 누구나 아는 그것과 같다. 형태적으로도 홍콩 느와르의 비장함을 종종 내비친다. 그리곤 비범한 듯 묘사되는 상황을 코미디로 전복시킨다. <유감 도시>는 비장함을 묘사하는 척 하다가 우스꽝스럽게 그 상황을 전복시킨다. 이 형태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내러티브를 전진시키는 와중에 개그콘서트에 가까운 상황들이 수없이 치고 빠진다. 때때로 희극적인 대사나 상황들이 발견되긴 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지극히 촌스럽고 장기적으로 지루하다.
이야기가 뻔하다거나 그런 건 애초에 대단한 지적대상도 아니다. 산만한 구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도 어딘가 지겹다. 모든 걸 떠나서 <유감 도시>가 자신의 장기라 믿는 유머가 단연 볼품없다. 배우들의 몸개그나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대사는 순간적으로나마 웃음을 유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곧 비웃음이 된다. 순간적인 웃음으로 인내하기에 앞길이 뻔한 스토리는 길고도 험하다. 무엇보다도 성매매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착취적 성향의 개그들은 때때로 불편하기까지 하다. 시대착오적인 기대감이 <유감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나름대로 자기 캐릭터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영화는 최악으로 다다른다.
사람은 때로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부딪힌다. <유감 도시>는 이 대사로 시작된다. 반대로 관객은 때로 자신이 예상했던 상황에 배반당한다. <유감 도시>는 목적이 뚜렷한 영화다. 당신을 웃겨주겠다. 하지만 요즘 웬만한 버라이어티만큼의 웃음을 보장하지 못한다. TV는 적어도 관람료가 필요 없다. 단지 변변찮은 웃음을 구하기 위해서 극장까지 발품을 팔고 돈을 쓴다는 건 심각한 사치다. 아무리 시대가 흉흉하다지만 돈 주고 웃음을 사주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질 이유는 없다. 유감스러운 영화가 또 한편 등장했다. 이래저래 시대 유감이다. 코미디영화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편견에서 헤어나올 때는 이미 지났다.
그는 다짐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히틀러를 척결하겠노라. 그는 히틀러를 자신의 적으로 선포하는 중이다. 그는 장교다. 그러나 히틀러가 숨쉬는 독일을 향해 진군하는 연합군의 장교가 아니다. 나치의 표식을 달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일군의 장교다. 그는 자신의 최고 상관을 적으로 규정한다. 성공하면 혁명이 된다. 실패하면 반역이 된다. 기로에 선 그 남자는 성공을 다짐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실패한 혁명에 앞장 선 남자의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장교로서 국가 전복을 꿈꿨던 슈타펜버그(톰 크루즈)의 실패한 혁명에 관한 실제적 사연이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어느 한 인물의 일대기인 셈이다. 궁극적으로 <발키리> 역시 결과는 훤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결과가 정해진 사연이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이뤄진 영화가 이에 충실하다면 이야기의 구조는 새로울 것이 없다. 정해진 길을 따라갈 뿐이다. 정해진 결말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이야기에 대한 의문은 불필요하다. 단지 그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들려지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이미 공개된 결말이나 다름없는 <발키리>엔 결말에 대한 짐작이 필요없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에 반하는 군부 세력과 연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과정엔 미스터리의 흥미가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는 사전에 공개된 정보를 통해서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하는 히치콕의 방식과 유사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킨다. 인물의 사소한 움직임마저 세심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샷은 공간의 여백까지 번져나가는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적 충돌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적 배경을 두르고 있으나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베를린 한복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광경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전쟁의 끝을 예감하는 이들의 각기 다른 표정이다.
그 표정엔 공통적으로 어떤 두려움이 엄습해있다. 이미 자신들의 전쟁이 패배할 것임을 아는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전쟁의 끝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고뇌를 품고 있다. 패망을 알면서도 체제에 기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다. 그 와중에 슈타펜버그만이 자신의 신념을 통해 행위를 관철시킨다. 히틀러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동조자들이 갈등할 때 슈타펜버그는 과감히 행동을 펼친다. 여기서 슈타펜버그는 양심적인 내부자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때때로 브라이언 싱어의 잠재된 혈통의 욕망을 읽게 만든다. 그를 묘사하는 주체의 욕망이 슈타펜버그를 선으로 규정하려 할 때 <발키리>는 때때로 격양된 감정을 품는다. <발키리>의 가장 큰 흥미는 양립된 야심의 중간자들이 갈등하고 추이를 지켜보는 표정에서 발생한다. 중간에 선 자들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표정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고뇌가 감지된다.
<발키리>는 비상전시체제를 대비한 독일의 예비군 동원을 뜻하는 작전명이다. 또한 극중에선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에 삽입된 ‘발키리의 비행’이 흐르기도 한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발키리는 용맹하게 전사한 전장의 용사를 천상의 발할라 궁전으로 인도하는 여신이다. 발키리는 때때로 남성 인간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결국 남자를 떠나거나 그 반려자가 된 남자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고 묘사된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발키리 여신 브륀힐테와 결혼을 약속한 지상의 영웅 지그프리트는 갈등과 반목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키리 작전을 믿었던 슈타펜버그 역시 작전 지휘자의 변심으로 혁명의 수장에서 반역을 선동한 주범으로 반전된다.
물론 현대의 역사는 그를 반역자로 기록하지 않고 있으나 그의 최후는 명백하다. 역사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선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이 절대적 정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발키리>의 결말이 과정보다 감흥이 덜한 건 단지 예상된 결과인 것만은 아니다. 슈타펜버그의 의지가 숭고한 정의에서 비롯된 것처럼 묘사하는 태도가 어딘가 식상하기 때문이다. <발키리>의 결말은 휴머니즘을 향하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 전쟁에 패배했지만 정치적 승리를 꿈꾸던 이들의 표정이 흥미롭다. 하지만 결말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마치 홀로코스트 영화의 영웅을 접대하듯 관성적이다. 영웅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것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핑계는 식상하다. 브라이언 싱어의 욕망이 영화를 사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의 수여라기 보단 지나친 미화적 욕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 역시 <발키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감수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