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밴드 시즌 2>가 시작했다. 놀랍게도 홍대를 주름잡는, 알만한 이들은 안다는 인디 밴드들이 죄다 나왔다. 저마다 열심히 연주하고 노래했다. 그 무대가 왠지 서글펐다.
<탑밴드 시즌 2>가 전파를 타기 시작한 건 5월 5일 토요일 밤 11시 25분경이었다. 트랜스픽션이, 슈퍼키드가, 몽니가, 칵스가, 데이브레이크가, 피터팬 콤플렉스가, 그리고 피아가! 홍대에서 공연 좀 보고 놀았다고 자부하는, 여름에 뮤직 페스티벌에서 좀 흔들어봤다는 선수들이 다 아는 그 이름들이 세탁기에서 막 건져낸 빨래마냥 줄줄이 걸렸다. 그 덕분인지 2회부터 5회까지 광고는 완판됐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네임드 밴드들이 서바이벌 경연을 벌인다는 게 팔릴 만한 이슈이긴 했다. 그러나 시청률은 2%대에서 요지부동이다. 그럼에도 SNS를 비롯한 인터넷상에서 <탑밴드 시즌 2>는 뜨거운 감자였다. 프로그램의 완성도에 대한, 몇몇 밴드의 출연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심사 방식에 대한 갑론을박이 뜨거웠다. 기이할 정도로 그랬다.
큰 논란이 있었던 2회 방송을 보자. 방아쇠가 된 건 화제의 밴드 피아였다. 그들 역시 1차 예선을 거친 99팀 중 하나였다. 2차 예선에서는 한 조를 이룬 3팀이 경연을 벌인 후, 심사위원들이 논의 끝에 결정된 1팀이 3차 예선 무대에 오른다. 피아의 무대를 바라본 심사위원석에선 상반된 기류가 흘렀고 전선이 형성됐다. 신대철은 ‘그래도 피아’를 주장했고, 김경호는 ‘어째서 피아냐’고 반박했다. 신대철의 말처럼 ‘짜임새 있는 연주를 보여줬고, 못한 건 아니’었지만 유영석의 말처럼 ‘기대 이하’였고, 김경호의 말대로 ‘예전의 느낌과는 많이 달랐’으며, 신대철도 ‘보컬의 측면에서 압도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유영석이 ‘지금 피아가 떨어지면…’이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와중에, 김경호는 ‘논란이 될까 봐 그러는 거냐’ 받아쳤다. 끝판왕이라고 생각했던 피아였다. 단판 승부에서 전적을 끌어들여서 심사하는 건 엄연히 반칙이다. 백전백승의 챔피언이라도 방어전에서 한번 패배하면 벨트를 헌납하는 게 룰이다. 하지만 그 자리엔 챔피언이 없었다. 피아도 도전자였다. 패배보다 뼈아픈 건 탈락이었다. 이는 <탑밴드 시즌 2>의 딜레마를 환기시키고, 인디 밴드 신이라는 바운더리를 각성시키는 풍경이었다.
국내에서 인대 밴드라는 언어가 동원된 건 커트 코베인이 시애틀의 자택에서 산탄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린 지 1년여 즈음 된 1995년 4월 무렵이었다. 홍대의 펑크 클럽 드럭에 모인 얼터너티브 밴드들이 커트 코베인의 사후 1주년을 추모하며 연주를 했고 정기적으로 공연이 지속됐다. 델리 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크라잉 넛, 코코어 등과 같은 밴드들이 등장한 것이, 그들에게 인디 밴드라는 언어가 통용된 것이 그 무렵이었다. 홍대를 본진 삼아서 그들만의 리그를 꾸리고 클럽 등지에서 공연을 펼쳐나가는 록밴드들에 대한 팬덤은 댄스 음악 일변도로 흐르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분명 특별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 당시로부터 지금까지 인디 밴드를 정의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있었던가.
인디펜던트, 즉 ‘인디’라는 단어가 음악계로 유입된 건 대중화된 기성 장르와 대립적인 포지셔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장르의 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멤피스 로큰롤이, 뉴욕 펑크락이, 시애틀 그런지가 그랬다. ‘인디’라는 수사는 자연스럽게 마이너의 속성을 끌어안는다. 하지만 그건 전략적인 포지셔닝의 방식일 뿐, 태생적인 구분의 의미가 아니었다. 메이저 자본력을 설득하기 힘든 마이너 장르들이 최소한의 자본력으로 자신의 재능을 입증하는, 도전자로서 링에 오르는 시스템이었을 뿐, 극복해야 할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너바나가 평생 인디 뮤지션이 아니었던 것도 그래서다. 한국에서 인디 밴드라는 영역이 모호한 건 그래서다. 그건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마치 불가피한 한계처럼 보인다. 메이저로 진입하기 위한 시작점이 아니라 필연적인 마이너리티의 영역처럼 보인다. 인디 신의 스타 밴드가 된다 한들, 그건 철저하게 그 협소한 신 안에서의 이슈일 뿐이다. 피아를 안다면 인디 밴드를 알겠지만 인디 밴드를 모른다면 피아는 어쩌다 들어본 이름 정도나 될 것이다. 한 번 인디 밴드는 영원히 인디 밴드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어떠한 지향점을 모색할 수 없는 굴레이자 속박처럼 인식된다. 저항이나 도전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 갈 곳을 잃은 미아들이 보호소에 귀속되듯 정처 없는 머무름이다.
<탑밴드 시즌 2>가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허문 건, <탑밴드>를 통해서 그런 기준 자체가 불명확할뿐더러 의미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이를 공고한 뒤, 별다른 액션 없이도 소위 말하는 네임드 밴드들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고 한다. 아마추어 신분으로 <탑밴드>에서 참여한 몇몇 밴드의 인지도나 몸값이 수직 상승했다는 소식 앞에서 인디 밴드로서 보낸 오랜 세월은 자연히 허망해졌다. 락 페스티벌 무대나 홍대 공연장에서 항상 마주하는 팬들만 보게 된다는 기분도 괜한 데자뷰가 아니다. 방송 출연이 얼굴을 알리고 이름값을 높이겠다는 단순한 욕망의 소산일지도 모르지만 새로운 관객과 대중에게 자신의 창작물을 어필하고 싶다는 건 예술가로서 당연한 갈망이다. 그들이 <탑밴드 시즌 2>를 선택한 건 그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향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자신들을 한 단계 도약시켜줄 발판이 필요했다. <탑밴드 시즌 2>가 좋은 발판인지 가늠하기 전에 그런 기회 자체가 절실하다.
이건 결국 인디 밴드라는 계층의 생존을 다룬 리얼리티 서바이벌이다. 2%의 시청률에 매몰된 ‘그들만의 리그’라 해도 그들의 갈증을 해갈해줄 새로운 무대가 그곳에 있었다. 14년 경력의 밴드 피아가 그 무대에 선 것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명예로운 퇴장 따윈 기대할 수 없지만 일단 무대에 오르고 볼 일이다. 살아남아서 당장 오를 수 있는 무대를 확보하는 게 보다 중요하다. <탑밴드 시즌 2>가 환기시키는 건 바로 그런 절박함이다. ‘토요일 밤의 락 페스티벌’이라는 슬로건은 그 라인업만으로 무색하지 않다. 하지만 실상은 ‘헝거 게임’이다. 굶주린 밴드들이 모여서 경합을 벌이는 광경은 그러니 애처로울 수밖에 없다. 실상 그것이 인디 밴드들의 허기를 갈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불합리마저 눈감게 만드는 허기를 외면하지 않길 바라는 건 그런 까닭이다. 지향점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인디 밴드라는 실체 또한 마련할 것이기에. 인디 밴드들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
오는 7월 27일부터, 제30회 런던올림픽이자 3번째 ‘런던’올림픽이 개최된다. 영국의 문화적 저력이 총망라될 개폐막식은 이번 대회의 하이라이트. 그 빛나는 순간을 선사할 여덟 명의 대단한 재주꾼들을 소개한다.
대니 보일(Danny Boyle)/개막식 아트 디렉터
“두려워하지 말라. 영국이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의 한 구절은 런던올림픽 개막식의 주제 ‘경이로운 영국(Isles of Wonder)’으로 승화됐다. <트레인스포팅> <슬럼독 밀리어네어> 등의 영화로 스타일리시한 비주얼에 핏이 딱 떨어지는 사운드를 선사해온 영국 감독 대니 보일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쇼’를 약속했다. 현직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가 여왕의 명으로 스타디움에 날아들며 시작될 개막식은 이미 한 편의 영화를 예고한다.
언더 월드(Underworld)/개막식 음악 감독
대니 보일은 말했다. “올림픽 개막식 음악감독으로 임명된 언더월드는 개막식으로 옮길 영국적인 창작력의 마지막 조각이다.” 언더월드는 <트레인스포팅>의 엔딩 타이틀곡 ‘본 슬리피’의 주인공이다. 90년대 후반 빅비트 열풍을 이끈 언더월드는 여전히 최고의 사운드를 뽑아내는 일렉트로니카 듀오다. 엘보우가 주제가를 부르고, 뮤즈, 콜드플레이와 같은 실력파 영국 뮤지션들의 참여가 언급되는 개막식 사운드를 지휘한다니, 언더월드에 대해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크리에이티브 총괄 프로듀서
개막식과 폐막식은 전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의 입구와 출구다. 런던올림픽의 입구와 출구는 크리에이티브 총괄 프로듀서 스티븐 달드리를 통해 세워진다. 자신이 연출했던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엘튼 존과 함께 뮤지컬로 연출한 그는 토니상 10개 부문 수상으로 전방위적인 재능을 증명했다. 발레복을 입은 탄광촌 소년 빌리 엘리어트처럼, 새로운 시대를 사는 영국인들의 꿈이 환상적인 이미지로 투영된다.
마크 피셔(Mark Fisher)/디자인 총괄 프로듀서
U2의 360도 투어는 360도 개방형 무대에서 펼쳐졌다. 마크 피셔가 설계한 이 세트는 가히 괴물이다. 4개의 거대한 곡선 기둥, 생물처럼 변화하는 중앙의 LED, 객석 모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이 무대는 우주의 쇼를 연출했다. 전설적인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투어의 무대 역시 그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REM, U2, 조지 마이클 등의 무대를 설계한 그가 이번 런던올림픽 개폐막식을 디자인했다 하니, 안 봐도 환상이다.
해미시 해밀턴(Hamish Hamilton)/방송 총괄 프로듀서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식 전세계 시청자 수를 예상하길 무려 0이 아홉개, 10억 명이란다.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을 영국발 빅쇼를 전세계 안방으로 전파하는 건 바로 해미쉬 해밀턴. U2, 로비 윌리엄스,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세계적인 스타 뮤지션들의 콘서트를 안방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DVD 기획자로 유명했던 그는 그래미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으며 2010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연출하기도 했다.
캐서린 우그우(Catherine Ugwu)/프로덕션 총괄 프로듀서
2000년 1월 1일, 런던의 밀레니엄 돔이 개장했다. 스펙터클한 오프닝 행사를 제작한 건 캐서린 우그우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공공 이벤트를 컨설팅하고 프로그래밍하는 한 사람이다. 2002년 맨체스터 영연방경기대회 폐막식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개막식.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폐막식 제작자이기도 했던 그녀는 올해 런던올림픽 개폐막식을 통해서 또 한번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이벤트를 기획한다.
킴 개빈(Kim Gavin)/폐막식 아트 디렉터
“지난 50년 동안 음악은 영국의 가장 강력한 문화적 수출품이었다. 우리는 올림픽 폐막식을 위대한 영국 팝뮤직의 특별한 프로모션으로 기획할 작정이다.” 폐막식 아트 디렉터 킴 개빈의 포부는 주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름하여 ‘심포니 오브 브리티쉬 뮤직(A Symphony of British Music).’ 2009년 120만 파운드의 티켓 수익을 올린 테이크댓의 서커스 투어를 비롯해서 지난 해 회당 8만여 명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한 테이크 댓의 프로그레시브 UK투어 29회를 전회 매진시킨 바 있는 그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콘서트 기획자다.
데이비드 아놀드(David Arnold)/폐막식 음악 감독
8월 12일에 열릴 런던올림픽 폐막식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 아닐까. <007>시리즈의 근작 다섯 편을 비롯해서 수많은 영화음악을 만들어온 데이비드 아놀드는 런던올림픽 폐막식 음악감독으로서 말했다. “이 경이적인 이벤트를 위해서 황홀하고 열광할만한 사운드트랙을 준비할 것이다.” 락의 본고장 영국의 심장에서 열릴 폐막식은 어쩌면 21세기의 기념비적인 락 페스티벌이 될지도. 참고로 데이비드 아놀드는 아이리쉬 싱어 송 라이터 데미안 라이스와 사촌 지간이다.
안판석 감독님께서 항상 언젠가 꼭 같이 하자 하셨어요. 안감독님을 신뢰했고 대본도 재미있어서 두려움 없이 시작했죠.
지금까지 이렇게 편안한 현장은 처음이라 하셨더군요.
드라마 특히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 방영 당일까지 촬영하기도 하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듯 촬영하잖아요. 지금까지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해야 끝내는 거라 알고 살았는데, 너무 순조로웠어요. 촬영이 밤 12시를 넘긴 게 두세 번 정도? 보통 9시나 10시? 일찍 모이지도 않았고요. 이렇게도 가능한 건지 의구심이 들면서도 경이로움까지 느껴졌어요. 이런 의미였죠.
프리 프로덕션이 철저했나 봐요.
감독님께서 3년 정도 준비하셨대요. 작가님과 충분한 교감도 이뤄졌고, 모든 게 딱 맞춰진 채 작업이 진행됐죠.
대치동 교육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기도 했어요. 중학생 자녀가 있는 어머니 입장이라 더욱 남다르지 않았나요?
아이들이 정말 불쌍하죠. 저도 정말 이런가 싶을 정도였는데 더한 분들도 있다 하네요. 아무래도 저는 일하는 엄마니까 자식 교육에 올인하는 분들과 수준이 다르겠죠. 그런 엄마도 능력이 돼야 해요. 저 같은 사람은 알아서 잘해주길 바랄 뿐이에요.
부모로서 조바심은 들지 않나요?
공부가 억지로 시켜서 될 일도 아니고, 본인이 해야 머리 속에 들어가는 거죠. 저는 뭐든 한 발 늦어요. 예를 들면 학원 선택도 뒤늦게 아이가 해보고 싶다 할 때 그러자고 하니까요. 한발 먼저 간다고 인생을 먼저 사는 것도 아니고 아이마다 특성도 다른데 뭐가 더 낫다 말할 수 없겠죠.
사실 김희애 씨와 윤서래는 굉장히 닮은 여자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이번 작품이 좀 편안했던 걸 보면 저랑 크게 벗어난 인물은 아니었나 봐요. 주인공이 처한 환경도 비슷하니까요. 결혼해서 아이가 있잖아요.
작품이 끝나면 캐릭터에 대한 여운이 남을 텐데, 지금은 어떤가요?
4개월을 윤서래로 살았고, 집보다도 세트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 아무래도 남아 있죠. 하다못해 친구랑 3박 4일 여행을 갔다 와도 여행의 잔상이 남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거의 빠져 나왔어요. 저는 애들도 있는 엄마니까, 일상으로 돌아와야죠.
일상으로 돌아오니 허전하지 않았나요?
배우로서 살다가 현실로 확 들어가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힘들죠. 그래도 허당처럼 붕 떠있지 않고, 정신 없이 일상으로 되돌아가서 빨리 회복될 수 있었어요.
배우로서 높은 기대감에 부응해야 한다는 게 부담되진 않던가요?
저를 그 배역으로서 최고라 생각하고 선택한 건데 배신하지 말아야죠. 좋은 배역을 연기하고, 개런티도 받고, 시청자들도 저를 기대하는데 대충하면 안되잖아요. 한국어로 연기하고, 한국 사람을 위한 연기라면, ‘그 역할만큼은 내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해야죠. 그런 각오로 최선을 다하면 진심이 보인다고 믿어요. 물론 지나치면 부담스럽게 보이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야죠.
1993년에 개봉한 <101번째 프로포즈> 이후로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았어요.
그러게. 마땅한 기회가 안 생기네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좋은 분들께서 좋은 작품으로 불러주신다면 언제나 잘할 수 있죠. 그리고 모든 건 인연이 맞아야죠.
혹시 해보고 싶은 캐릭터는 없나요?
좋은 작품 속에 한 사람의 소품으로 들어가는 걸 좋아해요. 제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싶진 않아요. 배우란 게 뜻대로 된다기 보단 선택을 기다리는 직업이니까요.
배역에 기준을 두고 작품을 선택하는 건 아닌가 보죠?
배우는 어떤 역할을 해도 좋은 작품 속에 들어가 앉으면 빛나요. 빛나는 연기를 하고 싶어도 후진 작품에 들어가면 빛을 잃고 이상하게 보이죠. 저는 배역이 아니라 작품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내 남자의 여자>나 <마이더스>처럼 기존과 다른 연기를 해냈을 때 나름의 희열이 있었을 거 같아요.
다들 보통 윤서래처럼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표현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참으면서 살잖아요. <내 남자의 여자>나 <마이더스> 같은 작품을 하면 대리만족을 느끼죠. 지위도 있고, 돈도 있으니 자기 생각이나 주관대로 할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하니까요. 자기는 못하는 얘기를 다른 사람이 하면 대리만족도 느끼고 멋있게 보이잖아요.
원래 그런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어울렸어요.
저도 가끔 어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무심결에 저 사람이 원래 저런가 생각해요. 그러다가 깨달았죠. 남들도 나를 보고 그럴 수 있겠구나. 한때는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을까 했는데 그게 정상인 거 같아요.
얼마 전에 있었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행사 MC를 19년 동안 하셨더군요. 특별한 의미라도 두고 계신 건가요?
처음에는 얼떨결에 좋은 프로그램에 동참하자고 했어요. 언제부턴가 사정이 좋지 않은지 어린이날에 하지 않고 아무도 모를 법한 평일 낮에 하더군요. 이제 이러다가 완전히 불씨가 꺼지겠구나, 싶었죠. 누가 MC 맡겠어요. 그래서 그냥 했죠. 그런데 불씨가 살아났는지 재작년부터 어린이날 골든 타임에 하는 거에요. 좋은 행사인데, 다행이죠. 사실 오랫동안 어린이날에 하지 않아서 깜빡해요. 올해도 까먹고 여행 가려다 일주일 전 즈음에 ‘아, 5월 5일!’ 하면서 발권 연기했죠.
여행 좋아하시나 봐요.
가끔 여행도 가야죠. 배우는 스폰지처럼 뭐든 보고 느껴야 해요. 일상에서 현실적으로 사는 것도 배우로서 중요하고요.
연기가 삶의 기준인가요?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늘 하지도 않아요. 일상 속에서 너무 평범하게 살아요. 다만 배우가 직업이니까 문득문득 환기된다고 할까요? 그런 정도이지 빠져있지 않아요.
자기 관리도 철저하실 것 같아요. 일찍 일어나고 일찍 주무실 것만 같아요.
맞아요. 웬만하면 취침 시간 12시 안 넘겨요. 11시 정도면 자고 아침 6시, 7시면 깨요. 모든 만물이 잘 때 같이 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괜히 피부가 좋으신 게 아니군요. 점점 젊어지는 것 같아요.
에이~, 그럴리가요. 저는 젊었을 때 유달리 멋낼 줄 몰랐어요. 왜 저렇게 꾸미는데 돈 쓰고 낭비하는지, 겉멋이 들었다고 생각했죠. 더군다나 배우인데도요.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잘 가꾸는 게 기본이구나 깨달았어요. 이런 저런 옷도 입어보고, 자신을 가꾸는 법을 배웠죠. 여자들은요. 꾸미기 나름이에요.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꾸미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늘과 땅 차이죠. 저도 마찬가지고요.
밤샘 촬영도 잦을 텐데.
힘들어요. 12시 전에는 제발 끝나길 바라죠. 다음날에도 영향이 있잖아요. 물론 하다 보면 해요. 새벽에 자면 늦게 일어나면 되잖아요. 그럼 시차만 바꾸면 되니까요.
과거를 돌아보는 편인가요?
돌아보죠. 그리고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지금 너무 행복하다 생각하고요.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만큼 지금 행복해요. 힘든 과거는 미래의 행복에 대한 저축이라 생각하거든요. 힘든 일이 많았지만 지금 무탈하게 사는 것도 감사하다고 느껴요. 어릴 때부터 일도 많고 말도 많아서 힘든 동네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저축도 많이 해놓은 것 같다 할까요?
만약 배우가 안됐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장사를 하든, 어느 직종에 있었든, 무지하게 열심히 살았을 거에요.
몸이 탄탄해 보이는데, 운동도 하시나요?
꾸준히 해요. 강하게까진 아니고, 쉬지 않고 멈추지 않는 정도? 2주씩 하지 않을 때도 있고, 미니시리즈 들어가면 몇 달씩 거르기도 하지만, 뭐 어때요? 다시 하면 되죠. 멈추지만 않으면 돼요.
대단히 활동적이신가 봐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하루 종일 움직여요. 몸도 좀 쉬어줘야 충전되는데, 배터리가 깜빡이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매일 반복하니까 충전하기 전에 방전돼서 병원에 실려가는 게 다반사였죠. 일년에 한두 번씩 꼭 그랬어요. 이제 정신차리고 조심해요.
어머니가 유명인이라는 걸 아이들이 신경쓴다 느낀 적 있나요?
다행히 시대가 많이 변해서 엄마가 배우라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는 거 같아요. 하지만 공짜는 없잖아요. 엄마가 유명하다는 게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십자가일 거에요. 가끔 애들이 말해요. “엄마가 유명해서 좋아.” 그럼 말하죠. “애들아, 그건 감사하고 좋은 일인데 그 반대편에는 그것 때문에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있을 거에요. 그러니 그런 좋은 감정을 기억해뒀다가 힘들 때 환기시켜서 마음을 얼른 회복해야 돼요.”
아이들과 대화는 많이 하세요?
많이 하려 하죠. 하지만 애들이 점점…...
중학생 아들만 둘이니 점점 과묵해질지도 몰라요.
가끔 말문 열어주면 너무 고마워서, “그래, 그래, 그래. 토닥토닥.”(웃음)
늦잠 자는 아이들 깨우는 것도 일이겠네요.
큰 애가 몸이 좀 약한데 종종 늦잠을 자요. 그게 다 밤에 안 자니까 늦잠 자는 거에요. 그래서 “엄마가 두꺼비집 내린다!” 그래요.(웃음) 컴퓨터 보다가, 침대에 누워서도 핸드폰 만지작거리다가 어영부영 늦게 자고 아침에 코피 터지고 그러니까요. 잠이 보약인데. 이게 반복되면 다음날 영향을 미치고, 습관이 되면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깨워야죠. 그런데 사실 마음 약해서 잘 깨우지도 못해요. 엄마들은 애들 자는 모습, 노는 모습, 먹는 모습 볼 때 제일 좋을 걸요. 그런데 또 쟤 저렇게 놀다가 숙제도 못하는 거 아닐까, 한편으로 조바심도 내고, 걱정도 하고.
영락없는 윤서래네요.
그럼요. 리얼이에요. (웃음)
행복해 보여요.
돈이 많은 집, 명예가 높은 집, 그래서 저 사람들은 행복할 거 같지만 문 열어보면 다 똑같다고 믿어요. 어떻게 반짝반짝하는 날만 있겠어요. 저 자신은 완벽하지 않아요. 그게 인생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야죠. 그게 다 마이너스가 되는 게 아니라 곱하기 2를 줄 수도 있다 생각해요. 그럼에도 다른 사람보다 많은 걸 가졌고, 좋은 기회를 얻어왔으니 당연히 행복해야죠.
강지환은 원래 알고 있었다. 치킨은 맥주와 먹어야 제 맛임을. 하지만 ‘치맥’ 맛은 달랐다. 서른 여섯 살이 돼서야, 연기 생활 10년을 채우고야 ‘치맥’ 맛을 알았다.
"내 연기를 즐겁게 보긴 어렵다. 눈으로는 모니터를 보면서도 반응을 감지하려고 더듬이를 뽑고 있거든.” <경성 스캔들>의 선우완이나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처럼 넉살 좋고 유쾌한, 군살 없는 감정의 소유자들은 강지환의 아바타가 아니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의 환영일 뿐. 강지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고민이 많은 사람이다. ‘대사가 있건 없건 대본은 꼭 지니고 있어야 되고, 잘 때는 머리맡에 두고 있어야 하는’ 강지환은 ‘항상 아이디어를 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를 혹사시킨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결코 스스로 편안해질 수 없는 남자다. 강지환은 연기를 마치고 나서도 항상 작품 주변을 서성였다. 드라마에 출연할 때면 잠에서 깨자마자 일종의 의식처럼 컴퓨터를 켰다. TNS사이트에 들어가서 시청률을 파악하고, 시청자 게시판과 팬카페의 동향을 살피는 건 자연스런 ‘일과’가 된지 오래다. “작품을 끝내면 후련해야 되는데 스코어가 잘 안 나오면 내 탓인가 싶다. 한두 살 먹으며 변하긴 하지만 아직까지 딱 떨쳐버리기 힘들다. 그런 성격을 가진 배우를 보면 그저 부럽다.”
<영화는 영화다>를 하고 나니 ‘까칠할 것 같다’는 말을, <7급 공무원>을 하고 나니 ‘빈틈이 많아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배우는 캐릭터의 탈을 쓰고 언제나 오해 받는다. 오해가 완벽할수록 캐릭터에 대한 완성도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셈이다. 허나 그 오해들은 때때로 배우의 쓸모를 철저하게 가둬버린다. 로맨틱 코미디 혹은 약간의 액션이 가미된 또 다른 로맨틱 코미디, 강지환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가둔 장르의 창살. ‘처음에 <차형사>가 달갑지 않았’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어느덧 나이 서른 여섯의 10년차 배우가 됐는데, ‘언제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 배우’로 한정되는 것이 고민스러웠던 것. 하지만 ‘작품이라는 게 운때가 있고, 내 작품이라 들어오는 작품은 따로 있는 법’이었다.
강지환은 <차형사>의 대본을 처음 보고 ‘대사와 신이 살아있다’고 느꼈고, ‘최소한 망하지는 않겠구나’ 판단했다. 뚱뚱하고 더러운 잉여 형사가 말끔한 몸짱 모델로 거듭나는 과정은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몸은 남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말한다. “직업이었으니까 했지.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12.5kg, 차형사가 되기 위해서 강지환이 더하고 덜어야 했던 무게는 명확했다. 하지만 증량과 감량 사이에서 강지환이 체감해야 했던 고통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잘 빼는 것만큼이나 잘 찌우는 것이 중요했고, 단순히 빼는 것이 아니라 탄탄하게 다듬는 것이었기 탓이다. ‘닭가슴살을 갈아 마시며’ 체중을 늘리는 건 차라리 애교였다. 촬영 스케줄의 7~80%를 소화하는 롤타이틀의 임무를 소화하는 가운데서도 정해진 기간 안에 살인적인 감량에 돌입해야 한다는 건 자기 학대에 가까웠다. 가장 힘든 건 ‘스트레스로 예민해진 자신의 눈치를 보는 현장의 분위기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물론 강지환은 ‘더럽고 뚱뚱하고 비호감인 차형사를 밉지 않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이행했다.
‘노숙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새벽에 영등포나 서울역을 찾고, 풍물시장이나 동대문에서 직접 의상을 구해 오는’ 고민을 마다하지 않던 강지환에게 있어서 최대의 고민은 ‘뚱뚱한 무대포 강력반 형사’를 완성할 핵심적인 설정이었다. 그 고민을 단박에 덜어준 이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파리지앵 정재형’. “그 분의 단발머리가 나한테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사실 형사가 장발이라는 게 현실성이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 단발머리는 차형사의 트레이드마크로 얹혔다. <7급 공무원>으로 함께 작업했던 ‘신태라 감독과의 신뢰’가 돈독한 덕분이기도 했다. 신태라 감독은 ‘혼자 쥐어짜낸 뒤 나타나서 여러 버전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강지환의 연기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기다림은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쾌도 홍길동>으로 한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성유리를 상대배우로 추천하고 직접 설득한 것도 강지환이었다. 본래 적극적인 자세로 작품에 참여하는 강지환이지만 <차형사>는 분명 그에게 특별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일을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정말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전국 400만 관객을 동원한 <7급 공무원>으로 경력의 정점에 오른 강지환은 하루 아침에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갔다. 전소속사와의 계약 분쟁에 휘말린 강지환은 만신창이가 되어 1년 여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배우’ 혹은 ‘공인’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것이 기사화’되고, ‘소송, 법정과 같은 단어로 배우의 이미지가 오염되는 상황’보다도 힘겨운 건 ‘외로움’이었다.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나름 자리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모두가 등돌리니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인정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좌절감만큼이나 갈망을 억누르는 것도 힘겨웠다. ‘묵묵히 때를 기다리던’ 그는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서 인맥을 쌓는 것보다 내 일을 확실하게 해내는 것이 배우로서 진짜 힘을 기르는 일임을 깨달았다.” 현재 강지환이 수많은 예능 출연 제의를 뿌리치는 것도 ‘연기적으로 정당한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다. 단순히 ‘작품을 성공시키겠다는 맹목적인 이유’로 영화와 무관한 입담을 과시하는 건 그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는 일과 같다.
“조급함이 앞서던 예전과 달라졌다. 내가 노력해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이제 ‘운명을 조금 믿게 됐다’고 한다. ‘내 작품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스스로 선택한 작품을 좀 더 믿게 됐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연기 10년차를 맞이하는 해에 만난 <차형사>는 그에게 ‘치맥’ 같은 영화다. 한때 해외의 고급 맥주가 진정한 ‘맛’이라고 믿었던 그는 이제 동네 호프집의 물탄 생맥주를 들이키는 일상의 ‘멋’을 알게 됐다. 연기 경력 10년 만에 찾은 최고의 선물, 그건 바로 ‘최선을 다한 만큼 어디 내놔도 창피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믿는’ 여유라고 강지환은 말했다. 심각하고 진지한 특유의 그 표정으로.
‘최초’와 ‘여성’이라는 단어는 손쉽게 수식된다. 최초의 여류사진가로 꼽히는 이모젠 커닝햄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건 ‘사진가’라는 아이덴티티, 그 자체였다.
이모젠 커닝햄의 이름은 그녀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심벌린>의 공주 이모젠으로부터 빌려온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딸이 남다른 운명을 타고 났다고 믿었다. 그녀가 그 운명에 눈을 뜬 건 시애틀 워싱턴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06년경이었다. 등록금 원조의 명목으로 식물 사진 슬라이드 제작에 참여했던 그녀는 사진에 매료됐다. 훗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예술 위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내가 대단한 예술적 재능을 지녔다고 믿으며 예술학교에 진학시켰다. 하지만 사진가가 되길 원하진 않으셨다.” 왕이었던 아버지 심벌린이 점지해준 고귀한 신분의 남자 대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스스로 선택한 공주 이모젠처럼 이모젠 커닝햄은 아버지의 바람과 다른 길을 걸었다.
이모젠 커닝햄은 70년의 세월을 카메라 뒤에서 살아왔다. 사진의 프레임을 회화의 캔버스처럼 인식한 회화주의적인 인물사진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그녀는 점차 사실적인 즉물주의로 나아가며 본격적으로 셔터를 눌러나갔다. 이모젠 커닝햄은 피사체의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응시하고 추구하는 작가였다. 그녀가 바라본 뷰파인더 너머에는 이 세계의 맨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관능적인 클로즈업으로 다양한 식물들을 스펙터클하게 포착하거나 다양한 남녀의 나신을 고요하게 응시한 사진들은 이모젠 커닝햄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모젠 커닝햄이 수많은 식물들을 근접해서 찍었다는 사실은 벌거벗은 인간의 육체를 과감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필름에 담아냈다는 점과 맞닿는다. 그녀의 누드는 섹슈얼리티가 아닌 오리지널리티에 가깝다. 그녀는 인간의 나체에 탐닉하는 대신 인간의 원형, 즉 육체를 드러냄으로써 자연적인 가치를 복원한다. 또한 그녀가 클로즈업한 식물들의 형태는 우리가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던 그 작은 형태 속에 담긴 세밀한 세계를 광대하게 비춘다. 이 말없는 피사체들의 나신이 저마다 하나의 우주로서 완성된 세계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원초적인 형태 자체가 이미 하나의 미학적 완결체임을 깨닫게 만든다.
“사진에 관한 나의 흥미는 미학과 관계가 있고 모든 것엔 작게나마 미적인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모젠 커닝햄과 에드워드 웨스턴, 안셀 아담스, 소냐 노스코비악 등과 함께 참여한 F64 그룹은 극도로 사실적인 형태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즉물주의와 사실주의의 미적 가치를 발전시켜나갔다. 대형 카메라 조리개의 최대값을 의미하는 F64 그룹은 정밀 묘사가 가능한 카메라의 기계적인 특성을 이용해서 사진의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사진 예술의 심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이 새로운 가능성이라 제시했고 이모젠 커닝햄은 그 그룹에 속한 유일한 여류사진가에 머물지 않고 비전을 제시하는 중심으로 자리했다.
화학 전공으로 사진 인화에 정통했던 이모젠 커닝햄은 <여성을 위한 직업으로서의 사진술>이라는 책을 출간하며 여성이 단순히 남성성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전문적인 경력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초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그녀는 페미니스트의 영역을 넘어서 자립적인 인간이자 자존적인 작가로서의 삶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식물을 찍었다는 걸 벌써 잊어버렸을 거다. 빛에 노출되는 모든 것을 사진에 담아낸다는 생각으로 최고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팔고자 하니까.” 1976년 9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모젠 커닝햄은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최초의 여류사진가로서가 아닌 사진가 한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으로 셔터를 눌렀던 그녀는 여성을 넘어선 진정한 사진가였다.
The Poetry of Form : Imogen Cunningham
이모젠 커닝햄 展
5월 17일부터 6월 23일까지 청담동 유진갤러리에서 이모젠 커닝햄의 사진전이 열린다. 1993년에 출간된 커닝햄의 도록의 제목을 차용한 이번 전시회는 12점의 빈티지 프린트와 디지털 프린트 20점이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갑자기 고개를 기울일 때조차 쇠망치로 가격당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잠을 잘못 잔 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뜰 때마다 통증은 더해졌다.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전기 신호와 화학 작용을 통해서 작동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목에서 팔로 내려가는 전기 신호의 구조만큼은 짜릿하게 느낄 수 있는 며칠이 지나고 어깨가 시큰거리기 시작할 즈음, 깨달았다. 침대가 과학이건 말건, 이건 침대 탓도, 베개 탓도 아니야. 의사 왈, 터틀넥 신드롬, 일명 거북목 증후군. 컴퓨터 앞에 자주 앉아 있는 현대인들에게 잦은 직업병이라나. ‘목디스크로 가기 딱 좋은 상태’라 진단을 받은 나는 ‘왜 이제야 왔냐’는 의사 특유의 핀잔을 듣고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얻은 뒤, 치료 받았다. 그 치료란 것이 이와 유사한 증상들을 용하게 치료한다는 ‘수기치료’ 요법. 목관절의 내려앉은 추간판을 손으로 눌러서 펴준다는데, 손목을 잡을 뻔했다. 여간 아픈 것이 아니라서. 허나 분명 효과가 있었다. 고개가 기울어지고, 목이 돌아갔으며, 어깨도 가벼웠다. 치료하는 선생님은 물었다. “안 아파요?” “아파요.” “근데 잘 참으시네.” “아프다고 소리 지르면 신경 쓰여서 힘이 덜 들어갈 거 아니에요. 그럼 제가 손해죠.” “푸하하, 정말 합리적으로 참으시네요. 인내심이 강하니 이 지경이 돼서 오죠.” 오호라, 그런가! 불편함은 참고 인내할 대상이 아니다. 개선해야 하는 것이지. 통증은 몸이 보내는 신호다. 몸이 불편하다는 메시지, 그걸 무시했다. 무식했다. 그래도 담배를 끊었다. 먹고 살자고 야근은 할지언정, 최소한의 자해는 하지 말자 다짐했다. 2주가 넘었다. 그렇게 마감도 끝났다. 당연히 고개도 돌아간다.
건축가는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집을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건축가에게 물었다. 건축가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 책지성 팀장. <두 남자의 집짓기> 저자.
구승회 디자인크래프트 대표이사. <건축학개론> 제주도 ‘서연의 집’ 설계.
김찬중 더_시스템 랩 대표.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 설계.
전숙희 와이즈 건축 소장. 다세대 주택 ‘Y하우스’ 설계.
‘건축’이라는 단어가 발견되는 두 편의 영화 <건축학개론>과 <말하는 건축가>에 대한 남다른 감상이 있을 것 같다.
구승회(이하 ‘승’):약간의 의무감으로 <말하는 건축가>를 봤다. 마지막 장면이 짠하더라. 목욕탕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아줌마한테 “이거 지으신 분 아세요?” 물어보니, “그걸 어떻게 알아~.” 대답하는데 그 옆에 정기용 선생님이 앉아 있다. 건축가가 열심히 만들어놓은 공간을 일반인들이 잘 쓰면서도 정작 같은 공간에 있는 건축가의 존재는 모른다니 찡했다. 한때 윗세대 건축가들이 국제적이지도 않고 디자인도 못한다고 폄하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분들만큼의 퀄리티를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걸 깨닫는 순간처럼 울컥하더라.
김찬중(이하 ‘찬’): 정기용 선생님께 개인적인 신세를 져서 어떻게 갚아야 할까 생각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화를 보면서 좀 울었다. <건축학개론>은 건축이 지역과 얼마나 밀접한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감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공간에 대한 사소한 경험이 기억의 인자로 어떻게 자리잡는지 잘 보여준다. 두 영화는 건축가들이 ‘어떤 기억을 선물할 수 있는가’라는 직업적 소명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았다.
전숙희(이하 ‘숙’): <말하는 건축가>는 실제 건축가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반가웠지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봤다.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정기용 선생님 회고전을 출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 이전부터 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단 말을 들었는데 회고전 준비에 관해 듣고 마음이 덜컹했었다. 건축계가 이분을 보내드릴 준비를 한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회고전이 많은 건축가들을 묶어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살아생전에 메이저 갤러리에서 회고전을 했다는 것도 건축계만의 파티가 아니라 건축계 밖의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했다. <건축학개론>은 아직 못 봤지만 구승회 소장님의 작품이 나온다니 궁금하다.
구본준(이하 ‘본’):사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다른 때보다 높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느낀 건 건축영화제였다. 건축영화제 1회가 1주일이나 더 연장상영을 했다. 지난 2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왔다. 그래서 두 영화가 절묘해 보인다. <말하는 건축가>는 공공건축을 다루지만, <건축학개론>은 사적으로 건축을 다루니까 두 작품을 같이 보면 좋을 거 같다.
한국에서 건축가란 어떤 존재인가?
찬:만약 집이라는 결과물만 중요했다면 <건축학개론>이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일을 맡겼더니 어느 날 집이 완성됐더라, 이런 건 소위 집장사라면 모를까, 건축가에게 어려운 일이다. 건축주가 집 짓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즐기고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건축가의 역할이다. 의사나 변호사도 그렇지 않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의뢰인이나 환자로부터 좀 더 많은 부분을 끌어내는 거니까. 그 과정에 참여시키고 그에 대한 기억까지 함께 넘겨야 된다.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런 과정의 기억 또한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본:예쁜 집을 짓기 전에 하자 없이 지으려면 시공업자가 건축가의 설계를 잘 지키면서 짓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게 감리라는 영역인데, 시공업자가 설계해서 짓고 검사해서 괜찮다고 넘어가는 건, 자기가 문제 내놓고 100점 맞았다는 거다. 건축가가 건축주를 대신해서 튼튼한 집이 나오도록 시공업체를 견제하고 압박을 가해서 완성도를 높여야 된다. 무엇보다도 집을 짓고 나면 건축사가 영세해서 없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A/S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 지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건축가한테 맡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 지을 때 복덕방부터 간다.
숙: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건축가가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 여름에 우리가 만든 금호동 다세대 주택이 보도되면서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의뢰가 있었는데 정작 성사되는 건 없었다. 대부분 건축가가 직접 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건축가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건축주의 요구사항에 맞는 시공자를 만나도록 돕는다. 시공자는 최대 이익을 원한다. 그럼 건축주가 원하는 그림 내에서 최대한 값싼 재료를 쓰고 쉬운 방식대로 짓는다. 건축가들은 그 돈이 제대로 쓰일 수 있게 전체를 봐주는 거다, 그게 돈을 잘 쓰는 방법이다.
찬: 사실 수많은 아이템이 들어가는 큰 덩치의 건축물이 30년 동안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완성한다는 건 어렵다. 재료의 속성도 변할 수 밖에 없으니 분명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구나 건축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아카데믹하게 접근하지 않아도 생활 속의 공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 대부분 불만을 말한다. 그 불만들을 긍정으로 바꾸긴 힘들다. 사실 문 손잡이가 흔들거려도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따진다. 종합적인 책임자로서 건축가의 위치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 없을 때 아버지 집을 설계했었는데 덕분에 평생의 욕을 먹고 있다. 하물며 전구 나가는 것도 내 탓이니.(웃음)
승: 이사가면서 돈 좀 아껴보겠다고 우리 집 인테리어를 직접 했는데 지금까지도 매일 혼난다. 와이프가 건축주라서.(웃음) 자문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건축가에게 어떤 믿음을 싣는 경향이 있다. 아플 때 찾아가는 의사가 명의이길 바라는 것처럼. 그래서 움찔하다가 ‘저는 공사는 안 합니다’ 하면서 책임소재에서 빠져 나온다. 많이 얽힐수록 힘든 게 사실이니까. 소비자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이가 알아서 잘 해주고, 되도록 싸게 하면서도 좋은 퀄리티를 바라는 건 당연하긴 하다. 요즘은 그런 분들이 바라는 바를 건축가로서 잘 듣고 있는지 고민한다. 단순히 액수를 깎아주는 게 아니라 대안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외국도 많이 다녀서 본 것도 많고 좋은 재료나 디테일은 많이 아는데 막상 그것들을 조합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 잘 모른다.
본:우리나라 건축가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디자인 감각이 워낙 다르니까.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인테리어에 길들여져서 공간을 꾸며본 적 없는 사람이 90%니까. 솔직히 자기가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다. 취향도 없고. 아파트는 편리한 대신 디자인 감각을 거세시킨다.
숙:어떤 공간을 좀 강조한다면 그 건너편은 조용한 것이 들어가야 되는데 대부분 강조되는 것만 고른다. 종합적인 공간을 보지 못하는 거지.
취향은 삶의 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취향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숙: 최근에 집 짓는 것에 대한 문의가 많다. 시공사들이 공급하는 아파트가 아니라 자신들이 짓는 집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최근에는 한 시공사에서 찾아왔는데 아파트가 아닌 다른 걸 개척해보려 한다는 거다. 적당한 규모의 땅이 있기 때문이라지만 결국 그 수요계층에 대한 판단이 있다는 거다. 주거 문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터닝 포인트라 생각한 게 아파트를 쫓지 않는 세대들이 나왔다는 거다. 사실 집값이 비싸다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절망을 준다. 특히 아파트는 재산 정도를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어느 건설사가 지었는지, 어느 지역인지, 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수준을 단정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주거 형식은 다양성의 가치와 깊게 연관돼 있다.
본: 제일 중요한 건 일상에서의 건축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된다. 외국에서 본 골목길은 예쁘던데 우리 동네는 왜 이런지, 쓰레기통 같은 건 좀 더 괜찮은 디자인일 수 없는지, 길에 분전함은 왜 저렇게 많은지, 이런 것들. 가로수길이 좋은 이유는 길에 구조물이 별로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길 위에서 액티비티가 발생하고 길에 붙어있는 건물과의 상호작용도 좋아진다. 지금까지 한국은 도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저 내 집이 중요했는데 주택 하나가 예뻐지면 그 동네에 또 예쁜 집이 들어서고, 이런 건 의외로 쉽게 번질 수 있다.
찬: 역사적으로 건축이 선발 산업으로 등장했던 적은 없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건축은 후발 산업에 가깝게 포지셔닝된다. 산업, 문화, 예술을 포괄한 종합적 성격이 강해지는 탓이다. 건축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문화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다. 그런 시점에서 아까 말했던 두 영화가 때를 잘 맞춘 셈이다. 어쩌면 지금 시점이기 때문에 그런 시장성을 인정받았을지도 모르고.
본: 의사나 변호사는 인생 최악의 순간에 만나지만 건축가는 인생에서 제일 행복할 때 만난다. 일생 동안 집을 두 번 짓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게다가 아직도 대부분 건축가가 아니라 시공업체를 찾아가서 집을 짓는다. 정기용 선생님도 목욕탕이나 마을 공설운동장 같은 걸 만들었는데 건축가가 하니까 확실히 좋다는 걸 알려준다. 2003년에 정기용 선생님께서 순천에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기 이전에는 부모들이 어린애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없었다. 건축가가 하니까 그런 배려들이 생긴 거다. 심지어 순천시청 안에 처음으로 도서관을 전담하는 행정과가 생겼다.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기용 선생님께서 거기까지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도서관 하나가 굉장히 많은 걸 바꿨고, 공공건축이 이렇게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다. 실제로 건축은 많은 걸 바꿀 수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의 특성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승: 서울의 특성은 아파트다. 어떻게든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독특한 물리적 환경이 아닌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나올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건 안 좋으니 쓸어버리자는 건 결국 지저분한 집들 다 쓸어버리고 반듯하게 짓자고 하는 무대포 마인드와 다를 게 없다. 요즘 가로수길 말 많지 않나. 이제 옛날 가로수길 아니라고, 너무 상업화됐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게 정상이다. 예술가들이 모여서 좋은 분위기를 형성했고, 사람들이 모이고, 가치가 올라가니, 대기업들이 몰려와서 꼭지를 잡고, 그 사람들이 이동한다. 내 생각이 이상적인 건지 좋아지는 곳이 있으면 쇠락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서울시 모든 곳이 다 좋을 수는 없지 않나. 흥망성쇠가 이어지는 생태계가 있다는 건 도시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닐까.
찬:다양성이 인정되는 도시라는 면은 좋다. 다만 흑백논리로 구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사는 동네가 있으면 못 사는 동네도 있고, 지저분한 동네도 있으면 깨끗한 동네도 있다. 이런 다양한 문제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도시가 서울이다. 우리가 성격이 급해서인지 그 각각의 영역들은 정체돼있지 않고 늘 변한다. 적응력도 굉장히 빠르다. 좋은 걸 인정하거나 나쁜 걸 바꾸려는 의지도 강한데, 그런 양면을 잘 순화시켜서 조화로운 관계성으로 정립하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브랜드 파워를 가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숙: 뉴욕은 볼거리가 집중된 맨해튼이 있지만 그 밖은 험악하기 이를 때 없다. 지하철 타면 누군가 뒤통수 후려칠 것 같기도 하고, 다리 밑은 악취도 심하다. 거기에 비하면 서울에는 산재된 풍경들이 있고, 살만한 공간으로 확산된 도시다. 다만 최근에 양산된 건물들이 많아서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다이나믹함을 따라올 수 있는 도시가 없다. 뉴욕에서 일할 때는 대부분 인테리어였다. 건축물을 지어볼 기회는 없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다들 혈안이 돼서 달려든다. 그만큼 서울은 건축가들에게 좋은 영역이다. 다만 오랫동안 계획하고 짓기보단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들이 변하는 만큼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 서울에는 아파트가 맞다. 서울에서 어떻게 단독주택을 짓겠나. 땅값도 비싸고. 다만 기왕 짓는 아파트라면 조금 더 합리적이어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다세대주택은 단독주택을 헐고 지은 거라서 많은 가구수를 고려하지 못한 도로와 붙어있다. 그래서 차도 많이 밀린다. 좀 걸어 다닐만한 길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는 도시 좀 예뻐해 보자는 생각이 필요하다. 서울의 가장 큰 매력은 제멋대로의 도시라는 점이다. 뭘 해도 이상하지 않다. 얼마나 재미있나? 모든 실험이 가능한데. 나는 서울이 좋다.
특별히 관심이나 애정을 지닌 지역이나 공간을 꼽는다면?
본: 종로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지역이지만 아직까지 대표할만한 건물도 없고, 분위기도 성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래된 거리의 매력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이런 특징이 거리 특유의 분위기로 발전되면 좋겠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건축이 중첩되며 공존하는, 상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거리로 발전하길 기대하고 있다.
숙:소년기를 강남에서 보냈고 유학을 마치고 2년 전 강북에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조직이나 경관에 끌리는 편인데, 지리, 지형적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강북의 도시조직이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몽촌토성에서 도시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승: 한강 둔치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답답할 때마다 찾아갔다. 성수동 일대나 홍대, 가로수길, 이태원에 관심이 있다. 문화적 환경이 도시 공간의 변화를 끌어낼 지역이 아닐까 본다.
찬:고등학교 때부터 가로수길의 변화를 경험했다. 물리적인 변화는 크지 않지만 상권과 땅값, 사람들의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도시의 진화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해외 건축가들의 국내 영입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 모인 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본: 외국건축가를 들여오는 인식이 문제다. 명품백 사듯이 유명 작가를 부르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성격에 맞는 외국 건축가를 잘 고르면서 국내 건축가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고 최선의 경쟁을 시켜야 한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프로젝트 등을 보면 외국 건축가의 이름값에만 매달린 느낌이 강하다. 최고의 작품을 철저하게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찬: 해외건축가들의 국내영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큼 역동적으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 해외건축가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다만 우리 문화에 대한 단편적 사고로 완성한 결과물을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건 이상하다. 건축은 단편적인 일상의 기억을 유지시켜주는 틀로서의 속성이 있다. 브랜드 파워라는 이유로 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에게 우리의 공간을 맡긴다는 건 잘못된 거다. 국내 건축가들의 수준이 그들보다 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조직적인 대응과 관리는 떨어진다. 고질적인 문화적 사대주의와 국내 건축가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연동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승: 건축주의 눈이 확실히 높아졌다. 그러니 해외 건축가에게 의존하던 시기는 지나갈 거라 생각한다.
<말하는 건축가>는 대중들에게 건축가 정기용을 알렸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나 건축물이 있을까?
본:이일훈 씨와 주대관 씨의 사회적 건축. 제한된 조건을 어떤 아이디어로 풀어냈는지, 어떤 생각을 펼치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축가들의 참여가 어려운 저예산 건물과 일상의 건축에서 이뤄낸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이 축적되는 것이다.
승: 김성홍 교수가 <길모퉁이 건축>에서 언급한 ‘중간건축’을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건축물을 성실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숙: 건축가들이 사랑하는 조성룡 선생님의 재생건축도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 선생님의 동료건축가로 등장하시는데 그 정도로는 아쉽다.
찬: 능력 있는 건축가 대부분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인식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설계비는 창피한 수준이다. 공사비를 아끼면 건물이 나빠지니 설계비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건물은 도면 10장으로도, 100장으로도 지을 수 있다. 다만 고민과 검증의 무게가 다른 만큼 고스란히 공사비의 차이로 연결된다. 고민과 검증이 치열할수록 공사비 운영도 정확해지고 절감 효과와 품질 향상이 따라올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원래 지속적이었지만 요즘에 이르러 보다 활발한 것 같다.
숙: 소비자들에게 자기 브랜드에 대한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를 조직하기 위해서 궁리하는 것 같다. 다른 비즈니스 영역으로 넘어가고자 할 때 이미 구축된 브랜드 가치가 보여지는 공간을 이용한 비즈니스가 효과적이다. 패션과 건축을 소비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경험의 소비’란 점에서 공통적이다. 기능적 필요를 넘어서 이미지 소비의 영역에서 패션과 건축은 분명 비슷한 양상이 있다.
본:장 누벨이나 안도 다다오, 프랭크 게리, 요즘은 팝스타가 된 건축가가 많다. 그들의 명성이 브랜드에 부여됐을 때 얻어지는 상업적 작용이 있다면 건축가 입장에서는 기능에 구애 받지 않고 럭셔리하게 작업하면서도 조형성이나 파격성, 추상성을 강하게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구성이야 기본적인 공간의 원칙만 지키면 되지만 데코레이션은 얼마든지 화려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오모테산도와 아오야마에 있는 건물들이 스타 건축가와 럭셔리 브랜드의 욕망이 딱 맞아떨어진 사례다. 일반인들도 오모테산도 프라다 매장 앞에 가서 사진도 찍고 좋아하는 거 보면 그런 화려하고 장식적인 건물이 도시에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건 바로 그 극소수의 스타 건축가들이다. 건물의 부가가치도 높이면서 대중의 주목까지 끌어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럭셔리 브랜드들은 건축에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찬: 1900년대 중반에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라는 건축가가 남긴 사진 한 장이 있다. 자기가 설계한 집의 공간을 찍었는데 자기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와이프의 뒷모습도 나온다. 내가 받아들인 건 공간과 의상, 집기들까지 포괄한 토털 아이덴티티, 종합적인 공감각이었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스페셜리티의 공감대와 종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다루는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의 전반을 대변한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거다. 사실 인더스트리의 속성에서 건축이 훨씬 오래됐지만 패션은 보다 대중적이다. 그리고 건축에도 트렌디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자하 하디드의 팬시한 폼이 그렇다. 심지어 그녀는 패션 분야에서도 리터치를 하고. 건축물이라는 게 엔지니어링이기도 하지만 표피적으로 트렌디해서 패션과 잘 어울린다. 사실 요즘 건축계에서 ‘서피스(surface)’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질감이라는 고유 영역은 패션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다.
본: 사실 오래 전에는 건축이 모든 것이었다. 건축의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라 조각공이었다. 화가라는 개념도 16세기까지 없었다.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건축의 개념에 다 포함돼 있었다. 근대적인 개념 안에서 회화, 아트, 디자인으로 쪼개진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어쩌면 본래의 총합적인 형태로 돌아간 건축일 수 있는 거다.
건축이란 분야가 복합적인 만큼 건축가라면 다양한 분야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둬야 할 것 같다.
중: 학생들에게 늘 건축 외의 것도 많이 봐두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일상부터 사회현상까지 살펴야 한다. 건축가를 마스터의 개념으로 규정한 교과과정이 있는데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사람이 사는 공간과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아니라 형태적인 관심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니 실제로 일을 하면 너무 힘든 거다. 실버 하우스를 짓거나 유치원을 짓겠다는 사람이 노인이나 아이들 심리는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설계해선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자기 영감에 의존해서 혼자 죽여주는 걸 만들면 대중과의 괴리가 생긴다. 그런 엘리트주의로 건축주를 가르치려 드는 악순환들이 있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 건축가들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탈피하고 있다.
본: 건축은 20년 뒤를 내다봐야 한다. 설계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거다. 미래 사회의 모습이나 건축주의 이래도 예측해야 한다. 예지력이 필요하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집이 뭔가를 고민해야 된다. 그게 인문학이다. 건축가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개발된 기술을 조합하는 코디네이터다. 어떤 식으로 기술을 채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니 인문학이 중요하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철학책 읽으라 한다고 짜증내지만 건축은 항상 사람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건축은 예술적인 기술이다. 자주 쓰는 예인데 추상주의 화가 몬드리안과 유사한 건물을 만드는 건축가가 있었다. 한번은 몬드리안 추상화와 똑 같은 의자를 만들었는데 그 의자 가격이 몬드리안 그림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예술은 쓸모가 없어서 비싼 거다. 쓸모를 초월하는 거다. 건축은 쓸모가 있다. 결국 예술이 될 수 없는 거다.
찬: 건축에서 쓰는 소재 대부분은 건축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다른 산업에서 넘어온 거다. 알루미늄이나 컨테이너 조립식 주택 같은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부유물들을 재활용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결과다. 건축이 자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긴 어렵다. 요즘 등장한 미디어 파사드(Media Façade)도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에서 끌어온 방식인데 다른 장르에서 10년 정도 활용된 방식이 건축적으로 전용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단열 개념도 그랬고. 어쩌면 배와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그런 인더스트리의 사이클을 잘 알았다고 본다. 이런 사이클을 이해해야 장기적인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다. 트렌드는 영속적이지 않지만 트렌드의 흐름은 긴 방향을 알려준다.
본:실내 건축 같은 경우 차용이 더욱 쉽다. 티타늄 강판을 건축소재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행기나 안경에 먼저 쓰이고 건축으로 왔다. 건축은 보수적이라 안전하게 검증된 것들만 채택한다.
건축가에 대한 로망을 말하는 여자들을 종종 봤다.
승: 난 잘 모르겠는데. 혹시 내게 호감을 보인 여자들이 단지 직업 때문에?(웃음)
찬: 우리 집사람이 내가 <엘르>에서 토크한다니까, 자기를 하라더라. 피부에 와닿는 말 다해준다고.(웃음) 공대생들 가방에서는 공학용 계산기나 공학 관련 책이 나오는데 건축공학과는 스케치북도 나오고 철학책도 나온다. 로우테크와 하이테크가 결합된 느낌이라 인간적이다. 치명적인 단점은 고집이 세다. 아마 건축가의 DNA가 그런 것 같다. 그 정도 고집도 없으면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가기 힘들다. 직업인으로 봤을 때는 집중도도 높고 낭만이 있어서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생활인으로 봤을 때는 나이 들면서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고생 밖에 없다.(웃음) 고집이 센 반면 어느 순간 탁 놔버리는 경우도 있다.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 데리고 살기에는 살얼음 같이 불안한 느낌이 있을 거다. 게을러서 옷도 맨날 까만 색만 입고.
본:그런데 또 말은 그럴싸하게 한다. 원래 무채색은 모든 색에 코디가 가능하다고, 모든 색을 함유한 색이라고(웃음).
운명은 언제나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나 뒤늦게야 필연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김고은이 ‘배우 김고은’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그랬다. ‘책 욕심이 많아서 당장 보지 않더라도 일단 사고 보는’ 김고은은 ‘심심하면’ 집 인근의 서점으로 향했다. 그 날도 그랬다. 재미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를 집어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재학 중인 학교 무대에서 단 한번 자신의 연기를 봤던 학교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김고은은 알고 있었다. <은교>가 영화화될 것이며 은교 역에 어울리는 신인배우 오디션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적도 있다. ‘은교 역할을 맡게 될 여배우 꽤나 마음 고생하겠네.’ 하지만 몰랐다. 마음 고생할 그 여배우가 자신이 될 줄은. <은교>의 의상 감독을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정지우 감독을 만나는 자리로 바뀐 뒤 모든 상황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너무 재미있어서 2시간 만에 읽어버렸던’ <은교>는 탐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앞길이 창창한 20대 초반의 배우 지망생이 만만치 않은 노출신이 예정된 작품을 데뷔작으로 선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욕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작품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한 거에요. ‘그렇게 밖에 못해?’라는 생각도 들고.”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했다. 부모님의 동의도 필요했다. 아버지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10분 뒤, 방에서 나와 딸의 고민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노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작품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어. 하지만 그때 또 다른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네가 그걸 이겨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 그 한마디에 김고은은 스스로가 우습다고 느꼈다. “이렇게 욕심이 나는데 두려움 하나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하는 제가 용서가 안되더라고요.” 의심과 욕심 사이에 놓여있던 김고은이 확고한 의지를 쥐게 된 순간이었다.
원래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녀는 현장 적응력도 남달랐지만 카메라만큼은 낯설었다. 정지우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방법을 찾았다. “카메라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엉덩이로 이름도 쓰면서 망가져보는 거였어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었다. “낯선 집을 혼자 둘러보는 신이었는데 카메라가 바로 앞에 있는 게 느껴졌어요. 갑자기 카메라가 무서웠고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그 장면만 20번 정도 갔어요.” 김고은은 8시간의 분장을 마친 박해일이 자신으로 인해서 당일에 계획했던 분량을 촬영하지 못했다는 것에 ‘죄송스러워서 속이 다 문드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집중력을 높여주고자 ‘카메라 밖에서 시선을 맞춰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격려하는’ 박해일의 배려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잘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배운다는 입장으로 갔어요. 그러다 보니 많이 편해졌죠.”
작품 경력 하나 없는 22살 남짓의 신인배우 김고은은 <은교>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주목 받고 있다. 어쩌면 검증된 배우 박해일과 김무열 사이에서 트라이앵글의 한 각을 차지한 신인배우를 향한 관심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렷하게 자기 주관을 드러낼 줄 아는 김고은에게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은교는 겉으로 봤을 때 굉장히 순수함을 가진 아이다운 아이에요. 천진난만하게 행동하고 이야기하고 잘 웃잖아요, 하지만 자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고민했죠.”
김고은은 호기심이 강한 소녀 은교를 닮았다. 박범신 작가는 은교의 눈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맑은 재기로 반짝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아득하다. 단순히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눈빛이다.’ 20대 초반의 앳된 외모에서 싱그러운 젊음이 전해지지만 다양한 의문을 머금은 까만 눈동자는 순수와 관능의 파도가 철썩거린다. “제가 호기심이 많다는 걸 몰랐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제 눈 안에 호기심이 가득하대요. 저도 궁금한 거에요. 그 눈이 뭘까.” 이제 갓 연기에 입문한 신인여배우에게 대단한 상찬은 어쩌면 독이다. 하지만 김고은은 만개할 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꽃봉오리처럼 눈이 가는 배우다. 가혹한 부담감을 되레 ‘일상적인 연기를 보다 훌륭하게 해내야 한다’는 야무진 각오로 승화시킨 그녀는 <은교>를 관통하며 긴 야심을 품었다. 단단한 줄기를 뻗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꽃은 그렇게 피어 오른다.
그녀는 야구가 어렵다고 말했다. 어려워서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야구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그랬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쿠바와 맞붙은 대한민국 대표팀은 한 점 차 스코어로 승기를 잡은 채 9회말 마지막 수비에 들어갔다. 차세대 국보급 투수로 꼽히는 류현진이 마운드에 올랐다. 승리를 예감했다. 첫 타자로부터 좌전안타를 맞았다. 동점주자가 나간 상황, 두 번째 타자의 희생번트로 주자는 2루까지 진루했다. 안타 하나로도 동점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두 타자 연속 볼넷으로 1사 만루 상황까지 맞이한 뒤 류현진은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의 마지막 투구는 스트라이크에 가까웠지만 볼 판정을 내린 히스패닉계 주심은 담담했다. 포수 강민호는 격렬한 항의 끝에 퇴장 명령을 받고 덕아웃에 포수 미트를 내던졌다. 마운드를 이어받은 건 마무리 투수로 정평이 난 정대현이었다. 투수와 포수 즉 배터리가 모두 교체된 채 맞이한 9회말 1사 만루 상황, 정대현의 손 끝에서 볼이 뿌려졌다. 유격수 앞 땅볼! 유격수 고영민이 이를 잡아서 2루를 밟은 뒤, 1루로 송구했다. 대한민국 야구팀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이었다.
스피드건에 150km는 찍혔을 거라던 강민호의 터프한 미트 던지기 덕분인지, 무심하고 시크한 정대현의 ‘차도남’ 투구 덕분인지 몰라도 52%의 시청률을 기록한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의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야구장에 모여들었다. 2009년 프로야구 관중은 520만 명을 넘겼다. 전년 대비 100만 명 이상이 늘어난 수치다. 그게 다가 아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년보다 눈에 띄게 여성관중이 늘었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 이후로 경기당 여성 관객 비율이 30% 수준이라고 밝혔다. 2008년 이전까지는 15% 안팎에 머무르던 수준이었다. 680만 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중수를 기록한 지난해에는 40%에 육박했다. 롯데 자이언츠 홍보팀의 임채무 씨가 전한 부산 사직구장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환기되는 사례가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의 ‘축’ 자도 몰랐던 대부분의 여성들이 레드카펫처럼 넘실대는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길거리 응원을 즐겼고, 축구를 알게 됐다. 문제는 월드컵이 끝난 뒤, 그 열기를 이어갈 공간을 찾지 못했다는 것. 프로축구에는 그녀들이 기대했던 월드컵의 열기가 없었다. 쉽게 말해서 프로축구는 인기가 없었다. 프로축구 구장의 텅 빈 관중석에서 월드컵 당시의 열기란 겨울 한파 속에서 떠올리는 한여름 무더위 같았다. 월드컵 무대에서 반짝거리던 태극전사들도 프로축구 안에서는 존재감을 잃었다. 프로야구는 달랐다. 출범 30주년을 맞이한 프로야구는 일찌감치 한국의 국민스포츠 자리를 꿰찼다. 팬덤의 스케일과 문화적 저변이 달랐다. 야구장은 만원이었고, 응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야구장에서 한번 놀아봤다는 여성들은 그 매력에 마구마구 빠져들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그라운드를 생전 처음 본 그녀들은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파도타기에 합류하기도 하고 입에 붙는 선수들의 응원가에 목청을 높여보다가 야구장에서 먹는 ‘치맥’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야구장의 단골손님이 됐다. 뒤늦게 발견한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베이징올림픽 야구경기를 지켜본 여성들은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러했듯이 다부진 선수들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에 열광했다. 스포츠 스타의 탄생은 곧 그 분야의 관심으로 이어진다. 1994년도 농구대잔치 당시,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부는 실업팀들을 꺾으며 파란을 일으켰다. 장동건과 손지창 등 당대 청춘스타들이 대학농구선수로 출연했던 <마지막 승부>에 열광했던 소녀팬들은 농구장을 찾아 젊은 농구스타들에게 드라마의 팬덤을 이입할 수 있었다. 스타성은 곧 상품성이다.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에서 태극기를 달고 활약했던 선수들은 스포츠 스타는 스포츠 마케팅의 최전선에 배치된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 사이에 여성의 신체사이즈에 맞춰서 출시된 유니폼 판매율이 4배까지 뛰었다. 야구중계 화면에서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여성팬의 이미지가 심심찮게 포착됐다. 야구장에 놀러 갔던 그녀들은 야구팬이 돼서 돌아왔다. 프로야구 신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그녀들에게 각 구단들의 구애가 시작됐다. 여성팬을 겨냥한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고 활발히 진행한다. 두산 베어스의 ‘퀸즈 데이’가 대표적이다. 한 달에 한번 핑크색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는 두산 베어스 선수들은 그날만큼은 팬들을 위해서 뛴다. 스킨십 전략을 통해서 친밀감을 높여나간다. 야구장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사실 야구는 즐기기 위해서 학습이 필요한 스포츠다. 즉각적인 액티비티가 뚜렷하게 체감되는 축구와 농구 등과 달리 룰을 먼저 숙지해야 비로소 액티비티가 보인다. 그만큼 확고한 흥미가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일찍부터 야구에 흥미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견고한 야구팬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래서 흥미로운 변화다. 본래 한국에서 야구장은 수컷들의 놀이터였다. 1982년,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을 했건 말건, 고교야구의 인기를 이어받은 프로야구는 출범 초기부터 대단한 팬덤을 구축했다. 지역 감정이 팽배하던 1980년대의 정서를 확실하게 긁어댄 덕분이기도 했다.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목포의 눈물’을,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부산 갈매기’를 불렀다. 응원하는 팀의 패배로 격분한 어떤 홈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물병을 던지고, 상대팀 선수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야구장은 분리와 단절의 정서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심리가 체감되는 바로미터의 현장이었다. 그만큼 과격했다. 정치적 부조리로 인한 갈등이 스포츠의 팬덤으로 위장한 듯한 불편한 진실.
야구장을 찾는 젊은 여성팬들이 늘어난다는 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낡은 시대성을 극복해나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젊은 남녀 커플이 각자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나란히 앉아있는 야구장의 풍경은 이 사회의 취향과 여유가 한 뼘 늘었음을 증명한다. 서로 다른 취향을 인정하고 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다. 각자 다른 방향을 응원하면서도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그녀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태생적 의무감을 얹지 않는다. 그저 잘생긴 선수의 플레이가 좋아서 응원하는 팀을 결정했다니,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인가. 지역갈등 따위는 그녀들에게 중요치 않다. 여자는 야구의 미래다.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하지만 상영하는 곳이 없다. 개봉한지 한 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난 2월 27일, LA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대에 오른 장 뒤자르댕(Jean Dujardin)의 탭댄스가 생중계됐다.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게리 올드만과 같은 할리우드의 초신성급 배우들을 제치고 헬리 혜성처럼 나타난 장 뒤자르댕은 오스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스타들은 무대에 오르는 낯선 프랑스 배우의 뒷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21세기에 등장한 무성영화 <아티스트>의 출현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아티스트>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의 주요부문을 휩쓸며 아카데미 5관왕에 올랐다.
이 소식은 한국 관객들의 호기심마저 당겼다. <아티스트>가 재미있다고? 그러나 상영관을 찾기가 힘들다. <아티스트>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온 건 28일 오전이었다. 전국 58관의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개봉 당시에는 90관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사이트에 명시된 국내 총 상영관은 2312관이다. 스크린 점유율 약 1.6%. 물론 아카데미의 지원사격으로 <아티스트>는 좀 더 국내상영관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29일 경 95관으로 확대 개봉됐고, 3월 7일 경에는 100여 관 안팎을 오갔다. 개봉 이후, 한 달이 지난 3월 16일에는 29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아티스트>의 북미 개봉일은 2011년 11월 25일이었다. 미국 내 전체 상영관은 36000여 관 정도로 추산된다. 4개관에서 개봉됐다. 점유율로 보자면 한국보다 더욱 심각한 셈.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에서 개봉 네 달에 다다르는 3월 15일경, <아티스트>는 1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개봉작의 상영관 확보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와이드 릴리즈(wide release)와 리미티드(limited). 대규모 단위로 상영관을 확보하는 와이드 릴리즈는 거액을 들여 제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단기간에 최대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 상영관을 대거 포섭해 관객의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리미티드는 그 반대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많은 상영관을 확보할 수도 없고, 한 편으로 그럴 필요가 없다. 영화를 배급한다는 건 상영관에서 영사될 필름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필름을 제작하는 것도 자본의 소요다. 저예산 영화들의 수익구조 안에서 필름 제작에 자본을 소모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리미티드 방식의 배급은 불합리라기 보단 효율적인 선택이다.
한국과 미국은 배급사와 극장주의 수익 배분 구조도 다르다. 한국은 제작사와 극장주가 정확히 반반으로 나눈다. 공평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극장이 온전히 절반을 먹는다면, 제작에 관여한 제작사와 배급사 휘하의 모든 이들이 그 절반을 나눠먹는 구조인 셈이다. 제작사를 도매상으로 보자면 폭리를 취하는 소매상을 만난 격이다. 미국에서는 수익 구조가 유동적이다. 일반적으로 미국 극장들은 흥행이 기대되는 영화에게 80% 가량의 지분을 준다. 블록버스터들이 이에 해당된다. 반대의 경우, 상황은 역전된다. 극장이 8을, 제작사가 2를 가져간다. 흥행 여부가 불확실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주의 입장을 안배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영화가 높은 수익을 올린다면? 상황은 다시 변한다. 수익 배분 구조 또한 역전된다. 2를 가져가던 영화사가 8을 가져가는 구조로 변한다. 그리고 흥행성이 확인된 영화의 상영관 또한 늘어난다. 리미티드에서 와이드 릴리즈로 전환된다. <아티스트>가 그랬다. 1월 20일, <아티스트>는 미국 내 662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와이드 릴리즈됐다. 미국의 영화시장은 한국 못지 않게 대자본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다. 하지만 시장의 영향력도 그만큼 막강하다. 영화의 제작과 배급의 구조가 분리된 덕분이다. 국내 상황이 이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고 극장까지 소유한 대기업의 지배 상황이 공고한 까닭이다.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의 위력은 2차 판권 시장이 초토화된 국내 시장에서 더더욱 강력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제작사 대표는 말했다. “만약 DVD 같은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했다면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배급 구조가 이뤄지진 않았을 거다.”
국내에서 영화는 개봉주에 흥행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서 완벽하게 명암이 뒤바뀐다. 2차 판권에 대한 이익이 미비한 국내 영화 시장의 상황 속에서 제작사들은 상영관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들이 저마다의 파이를 꽉 쥐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의 다양성이 확보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전국 곳곳에 극장 체인망을 확보한 제작배급사는 스크린 점유율이 낮은 영화를 장기상영하며 관객의 입장을 유도하고 경쟁 영화들을 교차상영 방식으로 밀어낸다. 가뜩이나 설 자리가 비좁은 작은 영화들은 자연히 도태된다. 한때 독립상영관이 대안의 형태로 제시됐으나 몇 년 사이 수많은 독립상영관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작은 영화들은 집을 잃었다. 시장 구조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어쩌면 그런 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건 대자본을 쥔 영화사를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시스템을 단순 비교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이건 기형적인 시장과 시장 규모의 문제이다. 시장이 넓어야 투자한 자본을 거둬들일 수 있는 경로의 확보도 보다 쉬워진다. 티켓을 살 관객은 모자라고, 흥행을 바라는 영화는 넘친다.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낙타를 집어넣기. 그런 상황에서 일주일 단위로 영화의 성패가 결정되는 극장에서 제작비의 대부분을 회수해야 하는 수익구조는 심각한 문제다. 극장에서 내려간 영화는 갈 곳이 없다. 어쩌면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그게 내 입장에서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당장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을 때, 상황은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대체 <아티스트>를 상영하는 극장이 왜 이리 없단 말인가? 영화가 별로라서? 아니다. 그건 정작 당신이 찾기 쉬운 극장에서 딱히 당기지도 않는 영화가 상영하는 것을 별 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영관을 찾아 발품을 파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 당신의 취향이 존중될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그저 손쉽게 클릭 한번으로 영화를 소유하는데 만족하는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손쉽게 영화를 소유하는 재미에 탐닉한다면, 그 영화들조차 존재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