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도 없는 단어다. 족보가 없는 말이다. 하지만 어딘가 친숙하다. 예술영화라는 말보단 가볍고, 블록버스터보단 고상하다. 아트버스터가 대중에게 먹힌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8월에 개봉된 <비긴
어게인>은 10월까지
3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3개월간 다양성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수성해왔다. 다양성영화 중엔 최초로 세 자릿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비긴 어게인>이 흥행에 탄력을 받게
된 시점부터 아트버스터라는 단어를 명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트버스터는 ‘예술성을 갖춘 블록버스터’라고 정의하는 신조어다. ‘아트’보단 ‘버스터’에 방점이 찍히는 인상이다. 올해 아트버스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건 지난 3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개봉 직전이었다. 그 이후로 아트버스터는 대단히 보편적인
용어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일찍이 2011년에 영화 <북촌방향>의 홍보과정에서 한차례 사용된 바 있었지만 올해만큼의
파급력은 없었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널리 읽히고 발음된다.
<비긴 어게인>을 홍보한 올댓시네마의 김태주 실장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예술영화라고
하면 지적인 예술을 즐기는 소수 취향의 영화라고 느껴져서 거부감을 느끼는 관객들이 있다. 그런 거부감을
대중적으로 완화시켜주는 것 같다.” 그러니까 대중들의 입장에선 아트버스터라는 단어가 생각 이상으로 친근하고
쉽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녀>, <프란시스 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등 아트버스터라고
불린 영화들에게선 어떤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실 완성도가 뛰어난 작가주의 감독들의 영화이긴 한데 주제가 가볍게 느껴지고, 표현방식이 예쁜, 소위 ‘달달한’ 영화들이 전반적으로 잘되는 분위기다.” 영화사 그린나래미디어의 유현택
대표의 말처럼 아트버스터라고 명명되는 작품들은 대체로 관객의 취향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테면
전체적인 영화의 형태를 즐기는 것만큼이나 영화의 일부가 되는 소품들에 대한 소비 욕구를 자극한다. 그러니까
어떤 관객에겐 아트버스터를 본다는 건 소품숍을 방문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가 된다는 말이다. 아기자기한
파스텔톤의 소품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나
미래적인 환경 속에서도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자극하는 온화한 색감이 인상적인 <그녀>는 그 단편적인 이미지의 취향을 소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만족감을 부른다. 게다가 아기자기한 디테일과 거창한 스케일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충족시킨다.
KT&G 영화사업팀 팀장 진명현은 아트버스터에 대한 소비 욕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독립영화들은 저렴해 보여서 싫고, 상업영화는 평범해
보여서 싫은 관객이 존재했던 것 같다. 요즘 소위 아트버스터라고 불리는 예술영화가 그 영역을 잘 파고든
것 같다.” 결국 아트버스터를 본다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특별해진다는 만족감을 즐기는 관객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도시를 잘
묘사한 영화들의 성적도 하나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진명현 팀장은 말한다. “유명 감독이나
배우보다도 도시가 키워드인 거 같다. 제목에 유명한 도시 이름이 들어간 영화들의 흥행이 나쁘지 않다. 대표적으로 <미드나잇 인 파리>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흥행했다. <프란시스 하>나 <비긴 어게인>도
영화의 배경인 뉴욕을 잘 보여준다. 해외 여행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런 영화들은 낭만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SNS가 아트버스터의 열풍을 확산시키는 경향도 있다. 고급스러운 패션이나
라이프스타일을 과시하듯이 자신의 남다른 영화적 취향을 타인에게 전파한다. 영화적인 취향을 통해서 자신을
메이크업하는 거다. 예전에 비해서 영화를 많이 보지만 과거의 시네필과는 달리 진지한 영화적 비평에 심취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영화에서 발견한 이미지를 전시하고 음악을 공유하는데 집중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소품을 활용한 머천다이즈 제작을 통한 마케팅이 활발해지는 것도 그래서다. 포스터와 스티커, 엽서는 물론 텀블러와 같은 제품을 만들어서 시사회나
이벤트를 통해서 배포한다. 저예산 마케팅을 추구해야 하는 다양성 영화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이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취향을 적절하게 건드리는 전략이기도 하다. 유명한 셀러브리티나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하거나 게스트로 초대해서 관객과의 대화를 마련하는 이벤트가 잦아진 것도 유명인들의 취향을 공유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부여한다.
“SNS의 전파속도가 빠른 만큼 어느 영화나 예쁘고 감각적인 아트워크나 감성적인 텍스트를 통한 마케팅이 선행적으로
이뤄지는 거 같다. 대체로 이런 방식은 20~30대 여성
취향에 정확히 적중하는 경우가 많다.” 유현택 대표의 말은 20~30대
여성들이 아트버스터의 주요한 관객층에 속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네이버의 영화 섹션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녀>, <프란시스 하>와 같은 아트버스터 류의 영화들은 20대 여성의 호감도가 가장 크게 나타난다. 극장 환경의 변화도 주요하다. 과거와 달리 다양성영화를 상영하는 요즘의 예술영화 전용관들은 멀티플렉스 체인에 준하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한다. CGV 무비꼴라주나 롯데시네마 아르떼처럼, 멀티플렉스에서도 예술영화
전용관이 확대됐다. 극장 환경에 대한 거부감은 남성보단 여성 관객에게 예민하게 다가올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선 바람직한 결과다.
“예전엔 50개
미만의 개봉관에서 상영되는 다양성영화 시장과 200개 이상의 개봉관을 지닌 상업영화 시장으로 분류됐는데
요즘은 100개 전후의 개봉관에서 상영되는 중간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유현택 대표의 말처럼 시장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여러모로 반길만한 일이다. 다양한 취향을 배려할 수 있는 시장의 확대는 결국 전체적인 시장 규모를 확대시킬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편식의 가능성은 경계해야 한다. 최근 아트버스터 열풍 속에서
영상미나 음악 좋은 영화를 찾는 경향이 많아졌다. 수입 경쟁이 심해지고 수입 단가가 치솟는 경향이 발생한다. 영화의 투자 비용이 상승할수록 손실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는 전체적인
시장성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아트버스터는 여전히 불명확한 단어다. 그만큼 시장의 미래도 불확실하다. 확실한 건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 그건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지금
아트버스터라는 단어를 발음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기회란 말이다.
조정석이 처음 무대에 올랐던 것도 어느덧 10년 전 일이다. 그래서 올해엔 데뷔 10년을 기념하는 무대에 올랐다. 그 무대에서 소년이 됐다. 어색하지 않았다. 조정석은 아직 소년이다. 소년처럼 꿈꾸는 배우다.
2년 전, 조정석은 꼭
다시 무대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해 조정석은 팬들에게 약속했다. 내년엔 꼭 무대에서 만나자고. 올해 조정석은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로 무대에 올랐다. 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사실 이는 본인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조정석은 10년 전 서울 양재동에 있는 서울문화교육회관의 무대에
올랐다. 데뷔 무대였다. <호두까기 인형>이란 뮤지컬이었는데 쥐나 깡통로봇과 같은 비인간 1인 다역을
도맡았다. 객석에 앉아 있는 그 누군가였다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한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정석에겐 실로 특별한 순간이었다.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실감났다. 조정석이란 이름을 걸고 데뷔하는 날이었으니 얼마나 떨렸겠어요. 그런데 <블러드 브라더스>
무대에 처음 오를 때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왔어요. 기분 좋은 설렘? 친정으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했죠.” 3년 만에 오른 무대에서 10년 전 자신을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에서 자신의 오늘을 이끌어준 무대를 향한 사명감도 잊지 않았다. “내가 즐길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싶었고, 뮤지컬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쇼의 요소보단 이야기 자체가 훌륭한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블러드 브라더스>였다.”
7살 남짓의 소년으로 무대에 등장해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인물을 연기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등에 업고
3년 만에 무대에 처음 올라섰을 때, 그가 느낀 건 떨림보단 설렘이었다. 세포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무대 체질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조정석이 무대에 다시 오르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건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3년간 조정석은 다섯 편의 영화와 두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건축학개론>으로 시작된 영화 경력은 개봉을 앞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까지 포함해 다섯 편으로 늘었다. 처음으로 상투를 틀고 도포를 입은 <관상>과 처음으로 칼을 휘두르며 액션을 했던 <역린>에선 날고 기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영화의
흥망과 무관하게 조정석은 반짝였다. 아마 조정석의 ‘화양연화’가 있다면 지금일지도 모른다. 그의 화양연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민아와 함께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이명세 감독이 1990년에 발표한 동명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필연적으로 원작과 다른 시대성과 세태를 담고 있지만 원작이 품고 있었던 결혼에
대한 보편적인 관념과 특별한 성찰을 고스란히 끌어안았다.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의 옴니버스식
설정을 그대로 흡수하며 원작에 경의를 표한다. 특히 조정석에겐 자신이 생각하는 결혼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결혼이란 게 마냥 행복하고 달콤할 거 같지만 막상 해보면 벗어나고
싶거나 구속된다는 기분을 느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충돌과 갈등을 뛰어넘는 새로운 행복도
존재할 거라 생각해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할 동반자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희 영화가 그런 느낌을 전달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조정석이 꿈꾸는 인연이란 어떤 것일까.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에요. 스스로 개척하고 일궈나가야 한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어떤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걸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 여자와의
관계도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가고 개척해나간다고 생각하는 쪽이죠.”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든 조정석에게 결혼이란 막연하면서도
가까운 화두다. “결혼 생각은 하지만 특별히 그런 생각에 쫓기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 당장 급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리며 자라온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의 문턱을 넘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됐다. 지금도
한 동네에 사는 덕분에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들은 애 아빠가 됐어도 그에겐 위안을 주는 존재들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기운을 얻어요. 걔네들도 제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 것 같고요. 동네에서 소주 한잔 하면서 얘기하다 보면 리프레시된대요. 그런 얘길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죠.” 오랫동안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건 어쩌면 조정석 역시 쉽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일지도 모른다. 그에겐 뚜렷한 주관이
존재한다. “사실 제가 안 좋은 사람은 아닌 거 않아요. 최소한
어리석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할 사람은 아닌 거 같단 말이죠.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손쉽게 놓을 수 있어요.” 쉽게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갖기 위해 무리하는 대신 정말 자신이 쥐어야 할 것을 확실하게 선택한다는
말이다.
조정석은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 태권도를 배웠는데 체육관에서 겨루기를 하다가 다운을 받으면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집에 와선 분해서 울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다음 심사 땐 걔를 꼭 다운시켰죠.” 그는 배우로서의 승부욕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자신만을 위한 승부욕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배우에겐 승부욕이 있어야죠. 다만 승부욕이 드러나는 순간 배우를 그만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 욕심이 연기에서도 드러나거든요. 연기를 할 땐 그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나을 버리려고 노력해야죠.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캐릭터를 만들어내야지, 배우로서 돋보이려고 하면 그저 욕심이 드러나는 거죠. 그런 욕심이 드러나면 안되죠.” 그러니까 조정석이 말하는 승부욕이란 배우 개인의 머리를 들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 완전히 작품에 녹아 들어가겠다는,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이다. 자신과의 싸움인 셈이다. “자신감과 자만심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누구보다 자신감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연기할 수 있었을 테고요. 이런 자신감은 열심히 노력했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봐요. 물론 정말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도 있죠. 그래서 항상 나를 새롭게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호흡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사실 지금 조정석은 그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블러드 브라더스>의 공연이 끝나면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홍보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고, 차기작인 영화 <시간이탈자>의 프리프로덕션에 참여해야 한다. 게다가 곧 부산국제영화제도 시작된다. 3년째 맡고 있는 대만 홍보대사로서 대만에도 다녀와야 한단다. 혹시 워커홀릭일까.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일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아요. 만약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시나리오만 봤다면 당연히 하지 않았겠죠.” 조정석은 지금 궤도 위에 올랐다. 궤도 위에 올랐으니 궤도 위를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건축학개론>이 2012년에 개봉됐으니까 제대로 이름을 알린 건 사실 얼마 안됐잖아요. 사람들에게 아직 소년처럼 어린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요. 성장기로 보자면 소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소년답게 야망을 품어야죠. 배우로서의 야망을 품고 계속 노력해나가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그럴수록 저를 아끼는 이들이 많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조정석은 소년처럼 활짝 웃었다. 2년 전에 보았던 것처럼 단단하고 푸른 웃음이었다.
지진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노는 게 중요하다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들을 말할 땐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행복해
보였다.
최근에 유행했던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두 번이나 초대받았다.
처음엔 진의함이란 대만 배우가 지목해서 했던 거라 진가신 감독이나 장학우 같은 중국의 지인들을 다음 주자로 초대했다. 그런데 나중에 (황)정민이
형한테 문자가 왔다. “야, 너 해야 돼!” 나를 지목했더라. 그래서 한번 또 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좋은
일이니까 상관없겠더라.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위한 일이긴 하지만 우울하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알고 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지만 의미를 모르고 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즐겁게 확산되면 좋겠다.
진가신 감독의 <퍼햅스 러브>를 비롯해서 몇 편의 중화권 영화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작년에도 한 편 찍었고, 올해도 한 편을 더 찍었다. 찾아주니 고맙지. 예전부터 합작영화를 몇 번 했는데 넓은 세상에
나가서 멋진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분이 좋지. 장학우 씨나 진가신 감독은 어릴 때부터 존경했던 분들이라
신기했다. 정말 영화배우 보는 느낌?
아시아에선 <대장금>이나 <동이>의 인기가 상당해서 알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겠다.
그래서 족쇄라는 생각도 든다.
족쇄라니,
어떤 의미인가?
이런 관심을 받는 걸 부러워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건 그만큼의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사실 외국에선 사람들의 관심을 떨쳐버리고 쉬고 싶은데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여행을 많이 다녀서 마냥 그럴 수도
없다. 그런데 외국인들까지 알아보면 정말 가끔씩은 힘들기도 하다. 물론
뭔가 이상한 짓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냥 편하게 쉴 수 있는 느낌이 사라지니까.
아이스버킷 챌린지에 초대한 진의함이란 배우와는
최근에 <두 도시 이야기>란 영화로 호흡을 맞췄다고
하던데.
후시 녹음만 남았다. 북경에서 할 예정인데 한국을 오가면서 프로모션도
진행할 예정이다.
김태균 감독이 연출을 했다고 들었는데 한국영화인가?
중국영화다. 진의함 씨 외에 진학동이라는 중국 배우가 나오고, 원더걸스의 혜림이도 출연한다. 사실 대본도 완벽하게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이 왔는데 김태균 감독님의 전작이 마음에 들어서 수락했다. 3개월 가량을 기다리는 동안
감독님이 중국을 오가면서 대본을 수정하고 배우 캐스팅을 진행했는데 촬영은 불과 1달 반 만에 끝났다. 기적이라고 생각했지. 장마기간인데도 날씨까지 좋았으니까. 최근에 1차 편집본을 봤는데 만족스러웠다. 한 시간 정도를 들어내야 한다지만 완성도가 있었다.
<두
도시 이야기>라니 두 도시를 오가는 건가?
한국 제목은 그렇지만 원래 중국 제목은 <탁혼연맹>이다. ‘혼인을 방해하기 위한 연맹’이란 뜻이다. 남동생의 결혼을 막으려는 중국 여자와 딸의 결혼을 막으려는
한국의 ‘돌싱’ 아빠의 관계가 진전되는 내용이다. 북경은 처음에 잠깐 오가는 정도만 촬영했고 95%정도를 부산에서
촬영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지만 전 아내가 화교로 설정돼서 중국말을 할 수 있다는 설정이었다.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중국 배우들과 중국어로
연기를 한다는 게 색다른 기분이었을 거 같다.
신기하지. 중국에서 중국어로 하는 건 당연하지만 한국에서 중국어로
대사를 하니까 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부산이란 도시가 독특하더라.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느낌이랄까. 과거의 향수와 최첨단의 풍경이 공존해 있다. 게다가 바다도 있고. 영화 찍기 좋은 도시였다. 지금껏 부산을 오가면서 느끼지 못했던 바를 이번에 많이 느꼈다.
지금 촬영 중인 작품은 한국영화라고 들었다.
아직 가제이긴 한데 <여름에 내리는 눈>이란 옴니버스 영화다. 두 복서의 우정도 있고, 매니저와 여배우의 이야기도 있는데 나는 아버지와 딸에 대한 이야기다. 눈물을
참기 힘들만한 이야기다.
한국영화는 오랜만이다.
그렇지. 해외영화만 두 편을 찍고 나서 처음이기도 하고.
그런데 영화 <점쟁이들>의 원안자라던데?
그 영화를 기획한 장원석 PD와 정말 친해서 자주 만났는데 한번은
태국에서 친해진 가이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한국의 점쟁이들이 태국 관광을 왔는데 갑자기 버스
안에서 난리가 났단다. 갑자기 웃고, 울고, 춤추고, 소리 지르고. 나중에
진정되고 이유를 물어보니 방금 지나간 터가 좋지 않아서 잡귀들이 몸에 들어와서 그랬단다. 그래서 나중엔
그 터를 피해서 다녔다더라. 이 얘기를 듣더니 자기가 영화화하고 싶다고 원안으로 사겠다는 거다. 대신 뭘 원하냐고 해서 레고나 두 개 사달라고 하니까 레고를 우습게 알았는지
100개도 사줄 수 있다는 거다. 어쨌든 <스타워즈>에 나오는 ‘밀레니엄 팔콘’을
사달라고 했다. 결국 중고로 하나 사주더라. 영화가 잘되면
더 해준다더니 아무래도 잘 안됐나 보다(웃음). 원래 카메오
출연도 요청 받았는데 일정상 힘들었다.
레고 매니아로 알려져 있는데 재미를 붙인
계기가 궁금하다.
뭐든 만드는 걸 좋아해서 예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직접 하게 된 건 아들이랑 같이 놀 수 있는 걸 고민하다가
찾은 게 레고였다. 애가 뭔가 만지작거릴만할 때부터 같이 만들자고 레고를 사줬다. 그러니까 한 8년 이상은 된 거 같다.
아들도 좋아하나?
완전 좋아하지. 애하고 같이 노는 데엔 레고가 최고다.
그런데 단순한 취미라고 말하기엔 수준이
상당하더라.
레고로 못하는 게 없더라. 언젠가 레고로 집도 짓고 싶다. 가능성이 충분하다. 브릭(brick)이
얼마나 있는가가 문제지. 쌓기만 하면 된다. 물론 기본적으로
머리도 써야 하고.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기도 했지만 일상에서 쓸 수 있는 걸 만들고 싶었다. 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그런데 브릭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그것 때문에 당장 브릭을 사기도 그렇고, 일단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우리집 대문의 번호판을 레고로 만들어서 붙였다. 그러니까 애들이 너무 좋아한다. 나갈 때 한번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들어올 때 한번 보면 또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아내는 처음엔 창피하다고 싫어했지만 결국 좋아하더라.
일상에서도 레고를 많이 써보고 싶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레고로 만드는 이번
프로젝트 제안은 어떻게 받게 됐나?
신세계 관계자와 친분이 있던 지인 중 한 명이 우연히 이야기를 듣고 나를 추천했다. 그래서 연락을 받고 나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브릭을 확보할 기간이 필요했고, 사이즈를 고려한 설계와 제작에 들어갈 시간도 절충할 필요가 있었다.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팀이 있던데.
활동한지 2년 정도 됐다. 레고와
관련된 걸 찾다가 포털사이트 카페에도 가입하게 됐는데 카페를 돌아다니다가 지금의 멤버들을 만나게 됐다. 사실
같은 커뮤니티에 있다고 해서 마음이 다 맞긴 어렵다. 그 안에서 의견이 맞는 사람 몇 명끼리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관심이 생겨서 함께 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했고 꾸준히 참여하게 됐다. 서울역에서
전시도 하고, 3년째 레고 벼룩 시장을 여는데 그것도 꽤 커졌다. 지금은
덴마크에 있는 레고 본사와 직접 소통할 정도다. 심지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브릭을 우선적으로 살 수
있는 우선권도 준다. 나름대로 공헌도를 인정 받은 거랄까.
아무래도 외국에 나가면 레고 가게는 꼭
들르겠다.
너무 멀지만 않으면 시간되는 대로 무조건 간다. 그전에 카메라에 관심이
있을 땐 카메라를, 피규어에 관심이 있을 땐 피규어를, 다이캐스트
미니카를 보러 다녔다. 그런 게 있으면 좋다. 여행가서 쉬는
것도 좋지만 어떤 한가지를 선택해서 찾아 다니면 재미있다. 이런 계획이 있으면 어딜 가든 즐겁게 할
수 있다.
사실 레고와 가까워 보이는 이미지는 아니다.
아무래도 점잖게 보이는 면이 많았으니까. 사실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레고를 좋아하는 모습이 나온 것도
작가가 뭐하고 노냐고 물어보길래 레고하고 클라이밍이라고 하니까 다 반영된 결과다.
취미가 있다는 것도 좋지만 이를 통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겠다.
사실 레고는 혼자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만들고 보면 뿌듯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도 분명 있지. 그런데 그걸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드물다. 우리가 1년에 한두 번씩 전시를 여는데 가끔 카페에
올라온 게시물을 보고 우리가 연락해서 전시 의향을 물어본다. 사실 처음에 모였을 땐 쪽팔렸다. 카페에서 다같이 레고를 만들고 있으니까(웃음).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도 있고, 하다 보면 즐겁다. 게다가 성격이 나쁜 사람은 없다. 모난 사람은 가끔 있어도(웃음).
연예인이 모임에 등장하니까 놀라는 사람은
없었나?
처음엔 다들 나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모임에 처음 나왔을
땐 놀라더니 이젠 자연스러워졌다. 서로 편해진 거지. 사실
이런 카페 모임에선 서로 자신을 닉네임으로 소개하는데 나는 그냥 닉네임을 내 본명으로 썼다.
한 가지에 꽂히면 깊게 파고 드는 편인가
보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잖아. 요즘은 그나마
좀 바뀌고 있다지만 불쌍한 거다. 술을 마시면 다음날 피곤하고 일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사실 술값으로 할 수 있는 취미가 많다. 대단히 생산적이고 다음날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가지. 게다가 가족이랑 같이 놀기도 좋다. 이런 걸 알리고 싶었다. 클라이밍을 하는 것도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해서
알리고 싶었다. 술만 마시는 게 다가 아니다.
술 외에 대안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불쌍한 거다. 자신이 해보지 못한 걸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학을
가는 게 목표이고, 결국 대기업에 가거나 공무원이 되길 바라는 게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영문과든, 국문과든 상관없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되니까.
사실 요즘은 대기업에서 잘리기도 하잖아. 그러니까 제2의 대안을 세워야지. 이젠 100살까지
산다는데 나이 60에 정년 퇴직하면 남은 세월은 어떡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취미는 그래서 중요한 거란 말이지. 더 이상
돈만 많이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늙어서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나이를 먹어서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요즘은
작은 가게들이 많이 생겨서 좋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겠지만 큰 욕심을 버리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적당히 먹을 만큼만 벌겠다는 시도가 보인다. 앞으론 그런 것들이 많이 생길 거다.
한땐 어른이 레고 같은 걸 갖고 놀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했지.
그런 면에선 우리사회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건강한 방향이다. 무엇보다 다양해져야 된다. 다들 레고하자는 말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생각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달라야 한다. 같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쌍둥이로 태어나도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린 획일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다 같아야만 했던 거다. 똑 같은 공식을 외우고 정답을 맞춘 사람이 앞으로 가고, 말도 안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다. 남들 다하는 건 해야될
거 같고, 남들이 웃으면 따라 웃어야 될 거 같고. 하지만
그건 내 삶이 아니란 거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사실 외동아들이었는데 어렸을 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생각하는
게 취미였다.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면
‘그건 왜 그럴까?’라는 생각에 빠져드는 거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는
내 이름을 남길 수 있을까?’ 싶었다. ‘이름을 못 남기겠구나’라고 생각하니 너무 절망적이었다. 그럼 가죽이라도 남기자. 그래서 시신 기증하기로 하고, 그랬더니 좋은 가죽을 남기자는 마음이
생기더라. 그래서 좋은 생각을 하려고 했고 결국 그런 생각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거다.
우려와는 달리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됐는데.
아주 조금?
막상 비관적이라고 오해 받을 가능성도 있을
듯한데 결과적으론 대단한 긍정주의에 가깝다.
굉장한 긍정이지.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다. 내가 처음에 연기를 시작할 때가 서른 살 즈음이었는데 장점이 하나도 없었다.
죄다 단점이다. 나이 많지, 인맥 없지, 연기 경험도 없지, 관심도 없지.
그럼 내 장점은 뭘까? 공예나 디자인이나 사진 찍어본 사람은 나뿐이지. 게다가 난 지금 바닥이니까 떨어질 일이 없어. 올라갈 일만 남았지. 이 정도면 대박이지.
결국 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중요하다는
말 같다.
나를 알아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나를 모르면 허황된 행복을 추구한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걸 기대한다. 왜? 나를 모르니까. 항상 뭔가 부족해.
만족이 안돼. 그럼 절망적이지. 결국 나를 모르니까
그런 거다. 내게 어울리는 만큼 갖는 거다. 그럼 만족감도
희열도 생긴다. 그런데 이만큼을 더 갖게 됐다? 그건 더
행복해지는 거지.
그만큼 감당할 수 없게 소유욕이 늘어날
수도 있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될 수도 있고.
그게 문제다. 쉽게 망각을 한다. 그러니
늘 뒤돌아보고 체크를 해야 된다. 그래야 바닥으로 떨어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언젠가는 다시 떨어지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면 죽는 것처럼 당연한
진리다. 진리를 거스르게 만드는 건 욕심이고 화다. 결국
그렇게 망가지는 거다.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는 사람 같다.
물론이다. 늘 죽음을 생각한다. 언제
길을 걷다가도 떨어지는 간판에 맞아서 죽을 수도 있는 거니까. 다만 늘 후회하지 않도록 나를 위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거지.
결론은 긍정적이지만 그 결론에 닿기까지의
사고의 과정은 비관에 가깝게 들린다.
긍정적인 생각은 중요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정확히 모르는 긍정주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어쨌든 행복해 보인다. 그전에 자신이 행복해지는 법을 잘 찾은 거 같고.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건 결국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장치가 다양하다는 거다. 그러니까 다들 그런 장치들을 마련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이런 장치들을 인정해달라는 거지.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주변 사람들도 행복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니까. 누구나 내 가족이 행복해지길
바라잖아. 결국 내가 행복해야 그럴 수 있는 거다.
음악 듣기는 간편하다. 터치 한 번이면 손쉽게 플레이된다. 비싸지도 않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음원 수익 분배가 공정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돌고 돌았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듣고 들어도
상관 없는 것처럼 돼버렸다. 어려운 게 당연한 게 됐다. 지난 7월 16일, 록 밴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을 주축으로 한 ‘바른음원협동조합’이
출범했다. 뮤지션들의 음악적 권익을 보호해 주지 않는 현재의 대중음악 시장에서 뮤지션 스스로 생존의
길을 열어보겠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음악으로 돈을 벌기 힘들어진 뮤지션들이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뮤지션이 힘들어진 건 음악 시장 사정이 열악해서가 아니다. 음악 시장은 돈을 버는데 정작 음악을 만드는 당사자들의 수익이 보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 한 곡의 다운로드 가격은 600원이다. 가수나 연주자에게 돌아오는 저작권료는 5% 수준이다. 90%에 가까운 금액이 제작사와 유통사의 몫이 된다. 노래 한 곡을
만들고 팔면 100원이 남지 않는다. 게다가 스트리밍은 곡당 12원에 결제된다. 그 와중에 음원 서비스 업체들은 음원정액제 등을
통해 박리다매로 헐값에 팔아 치운다. 제값을 받아도 수익을 내기 힘든 구조에서 수익성은 더욱 바닥을
친다. 지난 2012년
12월, AP통신에선 그해에 전 세계를 뒤흔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의 매출에 관해 보도했다. 당시까지 ‘강남 스타일’은 한국에서만 360만
건의 다운로드 횟수를 기록했는데 이를 통해 싸이가 손에 쥔 돈은 6600만원 정도였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국에선 290만 건의 다운로드가 집계됐다. 그런데 미국에서 싸이가 음원 다운로드만으로 얻은 수익은 무려 28억원에
달한다. 이 심각한 괴리는 국내 음원 시장의 기형적인 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표다. ‘강남 스타일’조차 이 정도니 다른 곡들의 음원 수익은 얼마나 처참할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다운로드 최저가격은 2237원, 프랑스가 1087원, 영국이 1064원, 미국이 791원
수준이다. 대한민국은 63원이다. 잘못 쓴 게 아니다. 결국 생산자인 뮤지션의 몫은 평균 10.7원 수준이다. 10원짜리 동전 하나 보기 힘든 요즘의 물가를
고려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곡당 12원 수준인 스트리밍 서비스는
저작권자의 몫이 곡당 무려 0.2원이다. 100곡을 스트리밍해도 20원이 남는다. 어쩌다 이렇게 기형적인 음원 수익 배분 구조가 정착된
건가. 국내 음반 시장은 2000년 이후 급격하게 디지털
시장으로 이동했다. 사실상 벼랑 끝에 섰다. 인터넷 망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소리바다와 같은 P2P 사이트를 통해서 음원의 불법 다운로드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음반 시장은 극도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터진 경제위기로 인한
소비 시장 위축은 얼어붙어가는 음반 시장을 향한 매서운 바람이었다. 침몰하는 음반 시장을 구출해 줄
대안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불법 다운로드를
막고자 음원을 초저가로 스트리밍 서비스에 공급했다. 망 사업자들의 플랫폼을 통해서 음악을 싸게 공급하고
유통시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면 다시 음반 시장이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다. 순진했다. 음반 시장의 맥박은 나날이 희미해졌다. 그 사이에 음원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디지털 디바이스의 기술 발달과 대중화로 인해 음원 시장 역시 급격하게 생활과 밀착해 버렸다. 문제는 구조와 의식이었다. 대형 음원 유통사들은 초기에 공급받았던
낮은 음원가에 맞춰 유통 기준을 정했다. 소비자들에게도 음원은 싼 가격에 즐길 수 있는 것이 돼버렸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손쉽게 음악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다. 음반
판매량은 회복될 기회를 잃었다. 음반 한 장 가격이면 듣고 싶은 음악을 다 듣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언젠가부터 음악은 거저 들어도 상관 없는 것이 돼버렸다. 음악은
제작과 유통을 담당하는 망 사업자들의 수익을 위한 시녀로 전락했고, 음악 종사자들은 순식간에 재주 부리는
곰으로 둔갑해 버렸다. 이젠 음원 차트에서 선전하는 아이돌 스타를 대거 보유한 메이저 기획사들조차 음원
수익엔 특별한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해외
진출이라는 옵션이 생겼지만 그것도 모두를 위한 은총일 리 없다. 그럼에도 음원 서비스 업체에서 차트
성적은 중요하다. 기대할 수 없는 음원 수익을 대체하는 수익 모델은 공연과 행사였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가 음악적인 주 수입원이 됐다. 결국
음원 차트 순위가 섭외 순위를 좌우한다. 행사장을 쫓아 전국 각지를 동분서주하는 가수들이 늘어났다.
최근 교통사고로 사망한 레이디스 코드 멤버들의 현실도 이런 시스템의 열악함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음악만으로 생존할 수 없는 기형적인 구조에서 빚어진, 러시안 룰렛
같은 비극이다. 음원값은 음원서비스사, 저작권협회, 음반제작자협회 등 음반 산업의 관계자들이 모여서 합의한 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승인을 받는다. 음악이 공공재도 아닌데 정부의 가격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건 의아한 일이다.
정부에선 음원 서비스 사가 40% 이상의 수익을 가져가지 못하게 막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을 설립한 신대철은문체부 회의에 참석해서 직접적인 음악 종사자들에게 80%의 이익을 돌려줄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신탁 단체들과 합의하면 승인해 주겠다는 대답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런 식의 제안을 한 경우는 없었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정부에서도 제대로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음악의 실제 주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기회를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은 어쩌면 그 첫 번째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시장성을 확보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현재의 음악
종사자들이 불합리한 음원 수익 배분을 감당하면서 폭리를 취하는 대기업 산하의 음원 서비스 업체들에게 음악을 공급하는 건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바른음원협동조합의 노력으로만 가능한 변화도가 아닐 것이다. 음악이
음악을 살리지 못하는 땅에서 그리는 음악적 청사진이란 결국 신기루이거나 백일몽이다. K팝도, 한류도, 언젠가 흩어질 모래성이다.
말해주고 싶었다. 읽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는 팟캐스트를 열었다. 거기 독자가 있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진행하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영화가 아니라 책에 관한 팟캐스트다. 소설가 김중혁 작가가 항상 고정 게스트로서 옆자리를 지킨다. 평론가와
작가가 진행하는 책에 관한 방송이라고 하니 진지하고 엄숙할 것만 같지만 유쾌하고 엉뚱한 만담이 귀를 잡아 끈다.
본질적으론 책에 대한 성실한 탐구와 지적인 관점과 뚜렷한 성찰이 마음을 붙잡는다. 2년
전에 시작된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스타 평론가와
인기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고, 2년 동안 전체 팟캐스트 순위에서 상위권을
지켜왔다. 인기를 모으는 대부분의 팟캐스트가 시사나 정치, 섹스에
대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을 상기했을 땐 놀라운 선전이다. 더욱 흥미로운 건 <이동진의 빨간 책방>이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라는 사실이다.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출판사는 위즈덤하우스뿐만이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진행하는 ‘문학동네’의 <문학이야기>, 소설가 황정은과 김두식 교수가 진행하는
‘창작과 비평’의 <라디오
책다방>이 대표적이다. 출판사가 팟캐스트를 기획하는
상황을 보도하는 다수의 언론에선 출판 시장의 불황으로 인한 현상과 연관해서 설명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일까. 만약 출판 시장의 불황을 타파하기 위한
의도를 앞장세운 기획이었다면 어떻게든 해당 출판사의 도서를 홍보하는 마케팅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이 보다 중요해졌어야 하지 않을까.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선 언젠가부터 자사 출판사의 도서를
홍보하는 광고성 코너를 짧게 삽입하긴 했지만 그 이전까진 출판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어떠한 암시조차 없었기 때문에 출판사가 운영하는 팟캐스트임을
모르고 듣는 청취자도 많았다. 게다가 90회 이상을 업로드한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위즈덤하우스의 도서를 집중적으로
소개한 건 윤태호 작가의 <미생>뿐이다. 그렇다면 위즈덤하우스에선 대체 왜 팟캐스트를 운영한 것일까.
“출판시장이
많이 축소됐지만 아직도 독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양질의 책을 가이드해줄 수 있는 경로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다. 사실 방송을 비롯한 기존의 매체가 지닌 영향력이 줄어들고 책에 대한 집중도도 떨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독자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것도 중요했다. 그런데 팟캐스트 청취자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서 새로운 형태의 매체에서
책을 이야기해보면 어떨까라는 호기심도 있었다. 아마 다른 출판사들도 비슷한 의도에서 팟캐스트를 기획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기획한
위즈덤하우스의 김은주 분사장의 말이다. 한 달에 두 번 업로드되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매주마다 나름의 주제를 정해서 그 주제에 어울리는 책을
소개한다. 신작보다도 구작이 대부분이다. 진행자인 이동진이
선정하는 도서들이 그 대상이 된다. 위즈덤하우스는 그저 멍석만 깔았다.
완벽하게 진행자의 역량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이는 앞에서 소개한 다른 팟캐스트도
마찬가지다. 신형철이 진행하는 <문학이야기>는 문학에 대한 진지한 해설과 철학적 접근에 집중하고자 하는 진행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존중한다. 어지간한 농담이나 유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성을 염두에
둔 기획이라고 말할 여지조차 없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
역시 대단한 야심에서 출발한 기획이 아니었다. 하지만 ‘양질의
정보’를 생산해내겠다는 의도는 존재했다. 그래서 믿을 만한
진행자의 섭외가 관건이었다. 그 자체로 브랜드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인지도 있는 평론가와 작가가 팟캐스트를 통해 책을 말하게 된 건 그래서다. 이는
기성 미디어에선 시도하기 힘든 기획이었다. 책이라는 컨텐츠에 대한 단편적인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 책을 소재로 한 양질의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저조한 야심한 시간에 편성되기 일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청취가 가능한 팟캐스트는
출판사 입장에선 매력적인 플랫폼일수밖에 없다.
“아마 책이 잘 팔리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만들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출판계의 위기를 고려한 돌파구일수도 있지만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는 심리가 작동했다고 본다.” 교보문고 콘텐츠 사업팀의 윤태진 PD의 말이다. 그는 올해 초 소설가 정이현과 문학평론가 허희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낭만서점>을 기획했다. 대형 서점인 교보문고에서 운영하는 팟캐스트라지만
역시 진행자의 역량이 중요하다는 건 앞서 소개한 출판사의 팟캐스트와 유사하다. 다만 서점이라는 광장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큰 메리트가 있다. 서점은 본래 독자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책의 광장이다. 북콘서트라던지, 낭독회 등의 도서 관련 행사가 서점에서 열리는 건
본래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명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이란 형식성을 생각했을 때 교보문고라는 광장의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
타이틀 자체로 브랜드가 된 <이동진의
빨간 책방> 또한 광장을 얻었다. 상수동에 생긴 카페
‘빨간 책방’은 위즈덤하우스에서 운영하지만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위한 공간이다. 이동진이 팟캐스트에서 선정해 소개한 책들을 판매하기도 하고, 팟캐스트
녹음 혹은 공개방송을 위한 광장 노릇을 한다. 2주년을 기념하는 공개방송 당시엔 50개의 객석이 가득 채워졌다. 온라인에서 확인한 인지도를 오프라인을
통해서 확신하게 된다. 적극적인 출판사만큼이나 적극적인 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지난 8월에 오픈한 웹사이트 ‘소설리스트’는 소설가 김중혁과 김연수, 서평가 금정연 등이 운영하는, 소설 전문 매체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신간에 묻혀 사라지는 좋은 소설을 발굴하자는 취지를 안고 문을 열었다. 영화에 별점을 매기듯 문학에 별점을 매긴다. 소설가가 직접 소설을
평한다. 새로운 시도다. 시기적절한 기획이다. 책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론을 통해서 기대 이상의 대중성을 확보한 팟캐스트의 성과는 분명 출판사뿐만 아니라
작가들에게도 고무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새로운 바람이다.
물론
‘불황’이란 단어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기류를 형성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시도는 존재해야 한다. 팟캐스트는
출판계의 새로운 날개다. 디지털식 방법론이 아날로그 시장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상적인 조합이다.
남보다 늦게 배우가 됐고, 조금 늦게 연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조동혁의 인생은 길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드라마 촬영 중에 팔을 다쳤다고 들었다
<나쁜 녀석들>이란
작품인데, 액션신을 촬영하다가 뼈에 금이 갔다. 전치 6주라더라. 욕심이 과했지. 동료들에게
굉장히 미안하다.
촬영은 얼마나 진행됐나
11화 중 2화까진 거의
다 찍었다. 나머지 화도 조금씩 건드리긴 했지만 늦어도 10월말까진
촬영을 다 끝내야 해서 두 달 동안 달려야 된다.
<야차>나 <감격시대: 투신의
시대>와 같은 드라마에서 액션 연기를 펼친 바 있었다. <나쁜
녀석들>에서도 액션신이 많다던데 나름의 준비가 있었을 거 같다
내가 맡은 캐릭터가 액션을 많이 보여줘야 하는 만큼 작품에 들어가기 두 달 전부터 액션스쿨에 나갔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더 몸을 풀고 작품에 들어가는 게 내겐
어떤 식으로든 이로운 셈이니까. 그리고 살인청부업자 역할이니 날렵해 보여야 할거 같아서 살을 뺐는데
확실히 몸이 가볍더라. 액션하기도 수월하고. <야차>때는 근육이 워낙 커서 80kg 정도가 나갔는데 세 합 정도만
맞춰도 숨이 찼다.
악당이 악당을 잡는다는 설정이 흥미롭더라. 인간의 선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람에겐 착한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지 않나.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다 보니 확실히 사람이 제일 나쁜 거 같다(웃음). 인간처럼 배신하는 동물은 없지 않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것만 봐도 제일 잔인하다. 한번 사기까지 당해보니까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고 마는 게 낫지 싶다.
투자 사기를 당해서 최근에 송사가 있었다곤
들었는데 어찌됐나
다 끝났다. 결국 내가 이겼다. 분명한
사기였으니까.
그래도 이젠 홀가분하겠다
알고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말해주는 건데 작정하고 사기친 사람과의 민사재판에선 이겨도 돈을 돌려받을 수가 없더라. 이 사람이 재산이 있어야 압류라도 거는 건데 이미 자기 명의의 재산을 싹 빼돌려 놓으면 수가 없는 거다. 사실 민사 소송으로 재판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갔다. 벌을
주고 싶었으니까. 스트레스도 받고 피해가 적지 않았지만 결코 그냥 넘어갈 상황은 아니었다. 게다가 나만 당한 게 아니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 안되니까
그 사람들의 실체를 알리고자 했다. 나도 힘든 상황이라 변호사까지 사서 재판을 가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넘어갈 순 없었다. 그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더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쉽게 믿긴 힘들다. 그래서 쿨해진 면도 있다. 예전엔 ‘저 사람이 왜 저러지?’라고
생각이라도 했다면 지금은 이상하면 그냥 안 본다(웃음).
모델 활동을 먼저하고 연기를 했다고 들었다. 원래 연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끼라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연기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한동안 이 바닥에 있다 보니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배우로 데뷔하고 방송에 나오는 걸 보니까 ‘나도 한번 해볼까?’란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막연하게 출발했다.
할만하던가
사실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서 열심히 준비하지도 않았고, 오디션은
보러 가는 족족 다 떨어졌다(웃음). 막연하게 ‘언젠가 되겠지?’란 생각만 했는데 점점 돈도 떨어져서 한번 열심히
해보고 안되면 깔끔히 포기하자고 했는데 기회가 생기더라. 그 덕분에 지금까지 활동하는 중이고.
이게 내 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보진
못했을까
처음엔 연기하는 게 너무 창피했다. 죽겠더라. ‘이게 내 일이 아닌가?’ 자주 생각했다.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해도 연기력이
느는 것 같지도 않고. 게다가 성격은 엄청 급한데 현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길고(웃음). 너무 힘들었다. 다만
먹고 살아야 하니까 계속 했던 거지. 그러다가 3년 전 <브레인>이란 드라마 현장에서 (신)하균이 형 연기를 보고 뭔가 많이 느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그 뒤로 연기하는 게 재미있더라. 다만 여전히 현장에서 오래 기다리면 미칠 거 같다(웃음).
<브레인>에 출연하기 전까진 연기에 대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건가
거의 대사만 급급하게 외워서 하는 느낌으로 연기를 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인물은 이 상황에서 뭘 원할까? 이 상황에서 뭘 할까?’ 정도는 생각하니까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일찍 그런 생각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은 없나
많이 한다. 좀 더 일찍 데뷔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29살에 데뷔 했으니까 좀 늦었지. 후회된다. 자격지심도 생기고.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자신감이다. 뭔가를 갖춘 사람은 얼굴에서 자신감이 확 들러난다. 대부분 자기
일에 최고가 된 사람들이다. 얼굴에서 그런 게 보이는 나이가 되니까 부족해 보이는 것들을 채우고 싶어진다.
데뷔한지 벌써 10년이 됐다. 그래도 10년
전보단 지금의 얼굴에 자신감이 붙지 않았을까
10년 전엔 현장에 갈 때 불안했다.
이젠 기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많이 배웠고, 많이 배우고 있으니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
지금 나이가
서른 여덟.
곧 마흔이다. 그런데 사실 요즘 마흔은 옛날 마흔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래 봤자 40이다(웃음). 사람들이 동안이라고, 젊어 보인다고 해봤자 뭐하나. 나이가 서른 여덟인데(웃음).
결혼은
40대 초반엔 해야지.
연애는
아직 못하고 있다.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본다고 했는데 좋아하는
여자한테도 순정적일까
그런 편이다. 다만 꽂히기 까다로워서 그렇지. 외모를 까다롭게 본다는 건 아니다. 물론 예쁘고 날씬하면 좋겠지. 하지만 그것보단 느낌이 중요하다. 만났을 때 친구 같은 여자? 그러려면 코드가 잘 맞아야 한다. 예전엔 여성스러운 여자가 이상형이었는데
지금은 친구처럼 잘 통하는 여자가 좋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은 거 같고. 내가 워낙 철딱서니가 없어서(웃음).
주변에 결혼하지 않은 지인들이 많은 편인가
주로 만나는 이들 중에서 내가 거의 막내인데 결혼한 사람이 두 명 정도 밖에 없다. 같이 모여서 골프치고, 수다 떨고,
밥 먹고, 독거노인들처럼 논다(웃음).
그래도 그런 친구들이 있으니 외롭진 않겠다
집에 들어가면 허전하다. 그 외로움은 아내가 채워줘야 할 부분인 거
같다. 밖에 나가서 놀다 보면 그 순간은 괜찮은데 그리고 나서 집에 들어오면 너무 외롭다. 여자는 모르겠는데 남자는 확실히 결혼해야 된다.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추해지는 거 같다. 아무리 잘 꾸미고 다녀도 아내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차이가 있더라.
얼마 전까지 <심장이 뛴다>라는 리얼리티 예능에 출연했다
사실 너무 힘들었다. 100% 리얼이었으니까. 실제 현장을 만들 순 없잖아. 게다가 사람들의 생사와 재산이 걸린
현장이 장난도 아니고. 사실 우리가 사고 현장에서 깊숙이 관여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실수라도 생기면 큰일날 수도 있고, 방송까지 덩달아 욕먹는 빌미를
만들 수 있으니까.
혹시 배우가 아닌 직업을 가져보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은 없었을까
많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게 이 길은 너무 갑갑했으니까. 물론 이제 연기하는 건 재미있는데 우리나라의 촬영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된다. 그리고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에 대한 불안감이 생긴다. 배우는
쉴 때 그냥 무직이니까(웃음). 그게 결혼을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불안한 거지. 나 혼자는 감당이 되지만
아내가 있고, 애가 있으면 어떻게 감당하나.
아내와 아이가 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동력만 생기고 기회가 안 생기면 끝이잖아(웃음). 그런 불안감 때문에 다른 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생긴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다 갖고 있지 않을까?
나는 한량이 꿈이다
남자들의 로망이지(웃음).
마지막화에서 우는 걸 봤는데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나 보다
사실 소방서라고 하면 단순히 불 끄는 사람들이 있는 곳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말 많은 일을 하더라. 사람들이 무슨 일만 생기면 119에 전화한다. 심지어 문 따달라고도(웃음). 그런데
불평 하나 없이 다 해준다. 그분들이 없으면 대한민국이 안 돌아갈 거 같았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소방대원들이 감내하는 부당한 처우를 알게 됐다. 그런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니 너무 화가 나더라. 그래서 뭔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품이 없어서 위선에 얘기해도 보급이 안되니까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사비로 털어서 장비를 충당하는 소방관들이
너무 많다. 이런 면은 방송에서 전혀 드러나질 않더라. 항상
제일 좋은 소방서로 배정되고, 뭔가 부족하면 다른 지역에서 빌려와서라도 최대한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거다. 그래도 최대한 이런 현실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는데 종영이 된다고 하니까 소방대원
분들에게도 죄송하고, 멤버들에게도 미안해지더라. 그래서 울컥했지.
답답했겠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니까. 좋은 프로그램이 없어져서 너무 아쉬웠다.
그 입장이 돼야만 아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사실 배우라는 직업도 좀 그렇지 않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예인이면 돈을 많이 벌거라 생각한다.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 연예인도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배우들도 그렇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나 일에 대한 스트레스도 있고, 심지어 욕도 함부로 못하니까 풀 곳도 별로 없다(웃음).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이 없진 않아서 가끔 불편할 때가 있다.
사실 첫 영화였던 <애인>에서의 과감한 베드신이 한동안 회자됐는데, 지겹지 않았나
그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상대 배우였던 성현아 씨는 이름 있는 배우였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선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당시엔 나름 오디션 경쟁률도 높았다.
나름의 절실함이 있었나 보다
그렇지.
지금도 뭔가 절실함이란 게 있을까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땐 지난 거 같다. 이젠 연기를 잘해서 인정받는 배우가 돼야 한다.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연기력을 인정 받고, 그래서 상도 받아보고, 영화도 하고, 이런 굵직굵직한 욕심만 남은 것 같다.
스물 다섯, 비로소 여인의 나이로 들어섰다. 한없이 투명하기에 짙은 예감으로
물든다. 청초한 외연으로부터 매혹적인 예감이 움을 튼다. 신세경이
피어오른다.
오늘 화보 촬영은 어땠나요?
사실 사진에 찍히는 게 어색해요. 그래도 이 또한 즐길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더욱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죠.
3자
입장에선 집중력이 좋아 보이던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작보고회나 쇼케이스를 비롯한 행사장에서 포토월에 서는 게 제일 힘들어요. 화보 작업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잖아요. 서브텍스트가 있고. 하지만 포토월에서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그냥 웃어야 하는 거니까요. 저는
억지로 웃으면 되게 어색하거든요. 입꼬리에 경련 일어날 거 같아요(웃음). 눈 앞에서 번쩍거리는 플래시를 보면서 몰입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곳에서 찍은 사진 중에 정말 웃기는 사진 많아요. 일종의 ‘흑역사’랄까(웃음).
정말 힘든가 봐요.
스트레스가 생기니까요.
어쩌면 굉장한 메소드 연기에 도전하는 셈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정말 그렇네요(웃음)!
그나저나 이거 정말 맛있는 빵집에서 사온
거니 한번 먹어보세요.
어디서 사온 건데요?
서촌에 있는 빵집이에요.
아, 저 그 동네 좋아해요.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고 몇 번 가본 적 있는데 주변의 미술관도 마음에 들고, 좋더라고요.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고요?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생각보다 신경 쓰는 사람이 없거든요.
눈에 띄지 않는 노하우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진짜 별 거 아니지만 있긴 있어요. 오른쪽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는 척하며 가리고, 왼쪽에서 나타나면 왼손으로……
진짜 별 거 아니네요……
그런데 정말 잘 몰라요. 지나가는 사람 얼굴 일일이 확인하면서 걷진
않잖아요. 요즘엔 지하철 타면 다들 스마트폰만 보고 있고.
운전면허는 없나요?
있어요.
차를 살 생각은 없나요?
딱히 운전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그런데 다들 있으면 편하다고 하니
고민 중이에요. 살짝 보류 중?
왠지 <타짜-신의 손>에 출연하기 전에 화투를 만져본 적이나 있을까 싶네요.
영화 준비하면서 처음 접했는데 왜 진작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어요. 심지어
잘 치는 거 같아요(웃음). 그런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스톱을 할 줄 알더라고요. 제 ‘베프’들도 알던데요. 사실 촬영하면서 사람들이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화투에 대해서 적당히 알고 있다는 걸 아니까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혹시 승부욕이 있는 편인가요?
고스톱 칠 땐 발동해요(웃음). 하지만
평소엔 없는 편이죠. 경쟁 자체가 싫어요.
하지만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순간도 있죠.
물론 노력하는 게 싫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다만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도 모든 게 뜻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건 알아야죠. 화투를 치면서도 깨달았는데 어차피 운은
돌더라고요. 이번 판에서 내가 아무리 많이 따도 다음 판에선 잃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돌아오기도 하니까 지금 졌다고 해서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고, 당장
이겼다고 해서 마냥 기뻐하기만 해선 안되겠죠.
<타짜>의 여성 캐릭터라 하니 매혹적인 팜므파탈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세경 씨가 연기한 허미나는 당돌하고
패기만만한 캐릭터에 가까워요.
사실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캐릭터들처럼 역시 기구한 아이에요(웃음). 그런데 제가 허미나를 좋아하는 건 그런 상황에 눌려있거나 기죽어 있지 않다는 점이에요. 무엇보다 자신이 멋지게 해낸 일에 대해서 생색내는 경우가 없어요. 저는
그런 게 너무 좋거든요.
사실 그런 사람들은 손해 보는 일이 많잖아요. 일은 죽어라 했는데 알아주지 않으면 서럽고.
그래서 손해 보는 일도 분명 있어요.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이 흘러서
사람들이 자연히 알아주는 게 훨씬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언젠가 알아주리라고 생각하는 거죠.
여배우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겠지만, 우직함이 느껴지네요.
저 좀 우직해요(웃음). 저만의
우직함이 있어요.
대화를 해보니 생각보다 활달한 편이기도
하고요.
제가 좀 활달하죠(웃음). 오늘
화보가 잘 나와서 기분이 좋은 것도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활달하다가도 조용해지기도 해요. 3자 입장에서 봤을 땐 업과 다운의 갭이 커 보일 수 있는 편이죠.
아무래도 왁자지껄하고 시끄러운 분위기를
좋아할 것 같진 않아요.
대부분의 취미 생활도 그런 방향과는 멀죠.
독서량이 상당한 편이라던데.
최근엔 많이 못 읽었지만 팬들이 좋은 책을 선물해주셔서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가장 최근에 읽었던 책은 뭔가요?
김화영 선생님께서 쓰신 <여름의 묘약>이란 책인데 수필이에요.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반적인 기행문과는 형식이 조금 달라요. 알베르 카뮈를 너무 좋아하는데 카뮈의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도 있고, 문학가들 이야기가 많아서 흥미로웠어요.
지난 한 달 동안 몇 권 정도 읽었나요?
두 권이요.
한 달에 두 권씩은 읽나요?
그러려는 편이죠. 다만 작품에 들어가면 좀 불가능할 때가 많죠. 올해에도 연초부터 촬영을 하다 보니 많이 못 읽었어요.
그래도 한 달에 두 권이면 꾸준히 읽는
편이죠.
운동하듯이 의무감으로 읽을 때도 있어요(웃음).
굉장히 오래된 습관처럼 느껴지네요.
중고등학교 시절이 너무 행복했던 건 그 시기에 음악도 많이 듣고,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정말 많이 읽었기 때문이에요. 특히 고등학교 2,3학년 때가 피크였는데 그땐 정말 꽉 채워서 시간을 보냈던 거 같아요.
그 시절이 연기에도 도움이 된다는 건 그런
의미와도 무관하지 않겠네요.
맞아요. 지금의 제가 지닌 자양분의
8할은 되는 거 같아요.
그런데 특별히 책을 읽는 게 좋았던 이유가
뭘까요?
저는 전시회에 가는 것도 좋아해요. 여행을 가면 중요한 일이 미술관을
찾는 일이거든요. 전시를 통해서 얻는 감상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미술관이란 공간의 분위기에 사로잡히는
느낌이 더욱 좋은 거 같아요. 최근에 촬영을 끝내고 동유럽에 다녀왔는데 비엔나의 벨베데레 궁전에 있는
미술관에서 우연히 명화 복원 작업을 보게 됐어요. 마치 공기가 멈춰있는 느낌이었죠.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헤드셋을 낀 채 작업하는 걸 보는데 그런 종류의 공기가 있다는 게 너무 놀라운 거예요. 독서라는 행위도 제게 그런 공기를 전달하는 거 같아요. 책 속의
활자들을 읽는 순간이 미술관이 주는 그런 공기와 비슷한 느낌이 있는 거죠.
마치 책에 담긴 이야기나 미술관의 작품들보다도
책과 미술관이라는 그릇 자체에 대한 애정이 더욱 크게 와닿네요. 사실 배우라는 존재도 이야기에 잠시
들어갈 뿐 이야기 자체가 될 순 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선 이야기를 담는 책이나 작품을 걸어주는 전시장과
비슷한 속성이 있죠. 그런 의미에서 문득 배우란 직업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드네요.
저한텐 대단히 재미있는 일이에요. 포토월 앞에 서는 것만 빼면(웃음)?
<타락천사>를 좋아하는 영화로 자주 언급했어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그건 전시와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했던 것과 비슷해요. 내가 그
영화를 봤을 때의 상황이나 시기가 중요하죠. <타락천사>를
본 게 스무살 때였는데 그때 잠시 폭풍의 언덕을 오르듯 힘든 시기가 있었거든요. 그때 개인적으로 위로가
됐던 영화에요. 특별히 어떤 부분이, 어떤 요소가 좋아서라기
보단. 음악이든 책이든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란 대부분 그런 식이에요.
사실
<타짜>가 2006년 영화인데 그
즈음에 아마 <신데렐라>도 개봉했죠? 벌써 8년 전이네요.
그렇죠. 사실 인터뷰에서 그 당시 이야기를 해본 적은 별로 없는데
새삼 기분이 묘하네요.
98년도에
발표된 서태지 씨 뮤직비디오에 출연해서 주목을 받기도 했잖아요. 그때가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던 때이기도
하고.
사실 어머니의 지인 분을 통해서 우연한 계기로 출연했던 건데 그땐 정말 너무 어렸으니까 진로를 결정할 시기도
아니었죠
그래도 결국 배우의 길로 들어섰으니 마냥
우연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데뷔작인 <어린 신부>(2004)를
찍을 당시엔 중학교 1학년이었죠. 사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이미 지금만큼 키가 컸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정말 큰 편에 속했어요. 그래서 고등학생을 연기할 수 있었죠. 그런데 스무 살 이전까진 작품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또래 배우들이 한창 활동하는 걸 보면 우울할 때도 있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온전히 고등학생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게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거든요. 지금 제 중심을 잡아주는 감수성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많이 확립된 시기였죠.
그 시절이 배우로서의 연기에도 도움이 됐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타이밍에 어떤 감정을 어떻게 써먹을 수 있다고 설명할 순 없지만 그 시절이 지금의 저를 이루는
만큼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과거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부족함이나 아쉬움을
자주 토로했더군요.
사실 대부분의 배우들이 본인의 연기에 100% 만족하긴 어려울 거예요. 정말 놀라운 연기를 하는 선배님들도 정작 본인은 만족 못하더라고요. 그러니
저 같은 사람에게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을 수 있겠어요.
혹시 과거를 자주 되새김질하는 편인가요?
아무래도 생각이 많으니까요. 곱씹는 편이죠.
생각이 많으면 때론 괴로워질 때도 생기잖아요.
아무래도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아지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20대 초반에 비해서 많이 나아진 거 같아요. 좋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 좋지만 좋지 않은 생각에 사로잡히면 어떻게든 털어내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던가, 나름대로 노력하는
편이에요.
왠지 운동하는 걸 즐기는 편은 아닐 거
같았는데요.
의무감에 하는 거죠(웃음). 사실
기계 위에서 하는 운동보단 한강공원에서 걷는 게 좋고요.
<타짜-신의 손>이 추석에 개봉될 텐데 아무래도 이번 명절엔 가족과
보내긴 힘들겠네요.
그래도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주 보는 편이라서요. 오히려
가끔 로케이션 촬영 때문에 집을 떠나게 되면 좋기도 해요(웃음).
독립하고 싶은 마음도 있나요?
계획 중이에요. 내년 중으로.
혹시 애인이 있어서?
에이, 그랬으면 좋겠네요(웃음).
스물 다섯이면 연애하기 좋은 나이인데.
연애, 하고 싶죠. 그런데
어떻게 해요(웃음)?
아무래도 쉬운 일은 아니겠죠. 지하철 타는 것과는 다를 거예요.
사실 아직까지 이거 못해서 죽겠다고 생각해본 건 없었어요.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해왔던 편이니까. 그래도 남자친구와 손 잡고 걷는 건 힘들겠죠.
한 10년쯤
지나서 누군가 지금에 대해서 물어볼 때 지금이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지금 고등학교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하듯이 그때도 10년 전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10년
후가 더 행복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사람은 그러기 힘든 존재인 거 같아요.
어째서요?
일단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를 열망하는 편이잖아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과거에 대한 향수를 안고 살 수밖에 없죠.
물론 지금이 불행해서 하는 이야긴 아니겠죠.
그럼요. 10년 전이 더 행복했다고 이야기하는 건 지금이 10년 전보다 행복에 대한 절대량이 적다는 말이라기 보단 지금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그만큼
무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과거의 행복은 잘 곱씹고 행복했다고 인지하는데 정작 지금 가진 것들이나 이루고
있는 것들이 주는 행복엔 무딘 거죠. 10년 뒤엔 지금보다 훨씬 나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땐 또 스물다섯 살의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먼저 떠올릴 가능성이 더욱 클 거 같아요.
곱씹어보면 결국 긍정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는
말 같네요.
그럼요. 저는 되게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노력만 해요(웃음).
그래도 포토월에서의 스트레스는 꼭 극복해야죠.
그런데 언젠가 완벽하게 적응해버리면 왠지 슬플
거 같아요. 그래도 일단 살고 봐야겠죠(웃음)?
서로 낯 붉힐 일 없게 멀리 떨어져서 데이트에 방해되지 않도록 예의 바르게 찍었다고 했다. 그리고 행복하라고 축하한다고 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자라고 했다. 하지만 대중은 그들을 파파라치라고 불렀다.
파파라치라는 단어가 국내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 건 대략 2008년
즈음이었다. 할리우드에서나 유용해 보이던 이 단어가 국내에 도입된 건 이 땅에서도 파파라치식 보도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최초의 보도는 <디스패치>와 <더 팩트>의
자궁 역할을 했던 <스포츠서울닷컴>이었다. 처음엔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느 연예인 커플이 함께 있는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덮쳐서 셔터를 눌러댔고 필연적으로 충돌도 있었다. 당하는 쪽도, 강행하는 쪽도, 첫 경험이라 서툴렀고 서로 당황했다. 그래도 한 번 해보니 요령이 생겼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자세를 바꿨다. 그렇게 안전한 자세로 낚싯대를 드리웠다. 연예인을
찾아서 ‘연애’인을 찍고 연예 기사를 배포했다. 막 건져온 활어 같은 사진은 인터넷이란 도마 위에 오르자 회를 뜨듯이 클릭됐다. 사랑을 싣고 사방팔방으로 전파됐다. 사진 주변엔 ‘두 사람의 사랑을 축하해요, 뿌잉뿌잉’이란 식의 문장이 나열됐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인터넷에서 돌고 도는 건 두 남녀의 밀회를 담은 사진이었다. 위풍당당하게 ’특종’이란
명패를 내걸고 나온 기사 주변으로 숱한 온라인 매체의 기자들이 새우깡에 달려드는 갈매기처럼 날아들어 하나씩 주워먹고 트림을 했다. 소위 ‘우라까이’라는, 타 매체의 기사를 적당히 베낀 후속 보도가 쏟아졌다. 검색어에 걸려서
클릭만 되면 트래픽이 나오고 광고 수익이 올라가니까. 포털 사이트라는,
패가 잘 붙는 담요처럼 잘 깔린 판 덕분이었다. 배우의 연애 덕분에 모든 이들이 풍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파파라치’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해 그 사진들은 파파라치가 찍은 게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스포츠서울닷컴>이라는,
<디스패치>라는, <더 팩트>라는, 온라인 매체에서 직접 찍고, 써서 보도라는 명목으로 게재한 기사다. 간단히 정리하면 기자가 파파라치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외국에선 셀러브리티의 사생활을 촬영하는 파파라치는 프리랜스다. 매체에서 직접 파파라치식 취재를 하지 않는다. 파파라치들은 자신이
목표로 한 셀러브리티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배제한 채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어댄다. 완벽한
영리적 행위다. 그들의 사진을 구매할 것인가는 매체의 윤리적 기준에 달려 있다. 가십을 다루는 타블로이드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국내에서 ‘파파라치’라고 통용되는 건 버젓이 언론사를 표방하는 매체이며 본질적으로
그 매체의 기자다. 탐사 보도 전문을 표방해도 그들을 파파라치라고 부르는 건 다들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무례하게 면전에서 겁박하듯 셔터를 눌러대지 않고, 망원렌즈로
상대방을 배려하기 때문에 파파라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곤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만천하에 공유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사랑을 만천하에 홍보해 주고 축하까지 해주는 이들의 업적이 당사자들에겐 고마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취재차 만난 숱한 소속사 관계자들은 <디스패치>든 <더 팩트>든
그들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결국엔 귀찮고 짜증나는 존재라고 말했다. 한 소속사 관계자는 <더 팩트>의 사무실에선 기가 막힌 광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자신들이 몰래 촬영한 연예인들의 파파라치 컷이 사무실 복도에 자랑스럽게 일자로 죽 걸려있다고
한다. 지금은 과거형이 된 연인도, 심지어 다른 상대와 결혼까지
했던 이의 과거도 결박당한 것처럼 벽에 걸려 있단다. 사실 그들의 파파라치식 보도 이후에 결별한 커플들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최대한 아름답게 보도해 준다는 원칙 따위가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연예인 커플이 아니라 한쪽이 일반인인 경우엔 ‘신상’이 털리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아름답게 미화하든 말든
깨질 커플은 깨졌고, 털릴 신상은 털렸다.
소속사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들 매체는 배우들의 연애 사실을 보도하기 전날이나 당일 몇 시간 전에 해당
소속사에 전화를 건다. 남자 쪽보단 여자 쪽에 먼저 알려준다. 일종의
통보다. 그런데 어차피 기사를 내지 않을 것도 아닌데 전화를 거는 이유는 뭘까. 소속사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정하냐고 묻는다 했다. 인정하라고
설득한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씩 ‘인정하지 않으면’이란 식으로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전화로 말할 때도 있고, 소속사 관계자를 자사 사무실로 소환해서 면전에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불려가든, 전화를 받든, 때론
고민스럽다. ‘저 사진 정도면 그냥 부정해도 될 텐데, 뭔가
또 다른 게 있다면 어쩌나?’ 고민스럽다고 했다. 해당 인물들의
인정을 강요하는 건 자신들의 취재에 대한 논거를 강화하는 취지라고 했다. 연애가 죄도 아닌데 사진을
보고 인정해야 하는 상황도 불편하지만 죄인처럼 추궁 당하는 기분이라 더욱 별로라고 했다. 그리고 인정한다면
그들의 기사를 위해 디테일한 소스도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협박으로 팩트를 얻어낸다는 말이다. 사실 연예인들의 데이트 사진을 배포하는 것만으로 화제가 될 텐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디스패치>나 <더 팩트>는 스스로가 언론사라는 것을 의식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단순히 가십이나 캐서 팔아먹는 타블로이드가 아니라 배우들의 상호 동의 하에서 정보를 세간에
공유하는, 공정한 뉴스를 보도하는 매체로서 보여지길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러닝 파트너라고 생각하는 매니지먼트 사에 나름의 방식으로 협조를 요청한다. 어딘가 억울해 보이는 공생관계다.
생각해 보자. 어느 날 애인과 길을 가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난데없이 ‘몇 달 전부터 여자친구를 만나는 걸 봐왔다’고, ‘축하해 줄 테니 둘이 사귀는 거 인정하라’고, 묻는다면, 행복할까. 한편으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니 겁이 날 것 같다. 물론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존박이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은 연예인을 위한 기도를 올리자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부흥회가 아니다. 다만 궁금하다. 사실 이건 일종의 범죄 행위 아닐까? 스토킹에 준하는 사생활 침해에 해당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린 지금
범죄적 행위를 손쉽게 소비하고 있는 것 아닐까? 법무법인 청파의 이재만 변호사에 따르면 이렇다. “일단 과거 법원의 판례에 따르면 연예인은 ‘공적 인물(Public Figure)’로 구별되는 공인으로 구별된다. 그래서
연예인의 경우엔 초상권 침해를 판단할 수 있는 범위가 일반인에 비해 제한적이다.” 그러니까 연예인의
얼굴은 일반인의 얼굴과 달리 공적으로 전시되고 보도되는 것에 대해서 법적으론 보다 관대하다는 말이다. “다만
사생활에서 초상권 침해의 판단 여부까지 제한되는 건 아니다. 또 상대방의 명시적 의사에 반하여 지속적으로
특정인을 괴롭히는 행위를 반복하면 1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결국 파파라치식 보도에 찍힌 연예인이 해당 매체에 법적인 소송을 가해서 처벌이 가능하다고 한들 미약하다는
말이다. 사실상 되로 주고 말로 받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니
매니지먼트 입장에선 그저 웃으며 만나서 웃으며 헤어진다.
사진에 안 찍히면 된다. 그러면 연애를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나? 그러니 누군가는 찍히기 마련이다. 8개월 동안 잠복해서 관찰하고 소설을 쓰든, 3일 정도 쫓아다닌
뒤 빵하고 터트리든, 정말 오래된 연인이든, 썸 타는 사이든
상관없다. 그래서 얻는 트래픽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막대한 광고 수익으로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들의 사진이 묘한 영향력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디스패치>에서
보도했던 김연아의 파파라치 컷에서 그녀가 들고 있었던 모 브랜드의 도시락 통은 완판됐다. 최근 <더 팩트>에서 찍은 손흥민 사진을 본 네티즌들은 ‘손흥민’보다 ‘손흥민
차’를 보다 많이 검색했다. 파파라치 컷에서 그들과 함께
보이는 상품은 협찬이 아니라 리얼이니까, 구매욕구는 배가된다. 이는 <디스패치>가 나름의 방식으로 ‘사실’적인 매체라는 인지도를 쌓는 데 성공했다는 말이다. 사실 <디스패치>는
연예 전문 매체를 지향한다. <더 팩트>는 종합지를
표방한다. 실제로 두 매체의 전체 기사를 고려한다면 파파라치식 보도의 비중은 적다. 하지만 두 매체의 인지도를 만든 건 파파라치 컷이다. 자신들이 파파라치가
아니라고 부인해도 대중은 그들을 파파라치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 연예인의 사생활을 폭로해 주길 기대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두 매체는 소위 말하는 특종 매체다. 누군가의 연애 정황을 사진으로
제시하면 수많은 온라인 매체들이 하나같이 재빠르게 기사를 낚아채서 재생산한다. 포털 사이트라는 플랫폼이
미디어의 허브 노릇을 하는 기형적인 플랫폼에서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검색어 경쟁을 통한 클릭 낚시에 치중하는 낚시 전문 매체들이 기승을 부리는 건
궁극적으로 포털사이트 탓이 크다. 대중이 원하니까 이런 콘텐츠를 만들고 유통한다는 말은 대중에게 팔리는
콘텐츠는 제작과 유통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논리와 손쉽게 결탁한다. ‘연애’나 ‘결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는 누구를 막론하고 조회 수가 남다르니 경쟁적으로 써 내려간다. 트래픽 장사가 쏠쏠하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파파라치식 보도는 자극적인 단어로
말초신경을 자극해 클릭을 유도하는 트래픽 장사의 신무기에 가깝다. 기형적인 온라인 미디어의 환경이 만들어낸
진짜 기형아다.
사실 할리우드에도 파파라치가 존재한다. 유럽에서도 존재한다. 연예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대중의 관심을 독버섯처럼 먹고 자라는 신이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 화려한 무대 뒤엔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다. <디스패치>나 <더 팩트> 같은
매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 대상이 되는 연예인들의 입장에선 대단히 불편한 일이겠지만 산업적으로 봤을 땐 기이한 일만은 아니다. 불법성의 여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혹은 법적 처벌의 수위를 압도할 만한 수익이 보장된다면 시도할 수 있는
영리적 행위다. 다만 기자들이 파파라치 코스프레를 하면서 스스로의 행위를 전문 탐사 보도라고 변호하는
건 조금 이상하다. 이건 언론이라는 생태계가 바닥을 치는 수준까지 내려왔음을 대변하는 바로미터다. 한국에서 대부분의 언론 매체는 이제 기자의 직업적 사명감이나 품위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파파라치가 되고, 스스로 탐사 보도를 했다고 자위한다.
1957년 모나코 왕실에선 캐롤라인 공주가 탄생하자 공주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경매로 구입할 것임을 밝혔다. 이에 수많은 사진기자들이 캐롤라인 공주를 찍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 후 유명인의 사진을 찍는 프리랜스 사진가들이 생겨났다.
파파라치의 기원으로 꼽히는 일화다. ‘파파라치’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건 1960년에 공개된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 때문이었다. 영화에선 상류층 여성과 열애 중인 기자를 쫓아다니는 사진기자가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이 파파라초(Paparazzo)다. 모기를 의미하는 ‘파파타치(Papatacci)’와 번개를 의미하는 ‘라초(Razzo)’의 합성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파파라치는 파파라초의 복수형 단어다. 파파라초 대신 파파라치라는
복수형 표현이 실용화된 건 유명인의 주변에 모기처럼 들끓는 ‘파파라초들’의 모습이 그만큼 일반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펠리니는 파파라초에
유명인의 가십이나 팔아먹는 데 혈안이 된 기생적인 미디어의 단면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파파라초는 상징적 언어였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파파라치는 현실의 언어다. 기형적으로 몰락한 미디어 산업의 사생아다. 언론사임을 주장하고 파파라치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만 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 어디에나 있다.
정체를 모르겠다.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것 같다.
모델 출신 배우로 알려져 있지만 배우가
먼저였다. 송재림에 대해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단
한번의 대화만으로도 많은 걸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알고 싶은 게 많아졌다.
인터뷰를
30분 정도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던데.
길게 하건 짧게 하건 나는 상관없는데 아마 회사에서 그랬나 보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인터뷰를 시작해보자. 대학을 다니다가 20대 중반에서야 데뷔했다던데, 본래 배우나 모델이 되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싶더라.
연기에 대한 절대적인 목적의식을 갖고 이 일에 뛰어든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이 바운더리로 들어왔고, 배우로 데뷔했지만 모델로서 보다 유명해졌다. 사실 모델도 연예인이란 카테고리에서 끄트머리 즈음에 자리잡고 있지 않나. 어쨌든
그 안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직업 의식이란 게 생긴 거 같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모델이 아니라 배우로 먼저 데뷔했었나?
<그랑프리>라는
영화로 연기를 먼저 시작했다. 사실 여러 번 말했는데도 대부분 아직 잘 모르더라.
최근
<용의자>나 <감격시대>와 같은 작품에서 터프한 역할을 맡거나 액션신을 찍는 경우가 늘었다. 아무래도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 이후로 그런 역할이 많이 들어오나 보더라.
<해품달>로
인한 타입 캐스팅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소위 과묵하고 말없는 역할이랄까. 그때는 지금보다 얼굴에 살도 더 빠졌던 상태라서 더욱 과묵하고 날카롭게 보였는데 높은 시청률 덕분에 그런 이미지가
뇌리에 깊게 박혔나 보다.
어쨌든
<해품달>이 잘된 만큼 기회도 많이 늘었을 거 같다.
개인적으론 많이 아쉬웠던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아무래도 경험이 적어서 카메라 앞에서 쉽게 놀기가 힘들더라. 감독님한테
혼나기도 했고. 아무래도 그만큼 위축되다 보니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권위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이제 7년차 정도 됐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편해졌다. 옛날엔 현장에서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혼나기도 했지만 작품수가 늘어가면서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도 생겼고, 그만큼 현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게 편해졌다.
실제로 과묵한 타입은 아닌 것 같다.
과묵하다기 보단 낯을 좀 가린다는 편이다. 실제론 말도 많이 하고
의사 표현이나 주장도 확실한 편이다.
그래서 소속사에선 인터뷰를 30분만 했으면 좋겠다고 했을까?
그런가(웃음)?
어쨌든 연기에 대한 특별한 뜻이 없었음에도
배우가 됐고, 그렇게 살고 있다. 이젠 7년차인데 어느 정도 욕심이 생길 때도 되지 않았을까?
욕심이 생길 수록 많이 내려놔야 한다. 하나에 집착하면 조급함, 불안감으로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맡고 싶은 캐릭터를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캐스팅됐지만 엎어지거나 편성이
안 되는 작품들도 생기고, 다른 배우가 캐스팅됐다가 뒤늦게 콜이 왔지만 이미 내가 다른 작품을 준비
중이라 불가능해진 작품도 있었다. 마치 사람에게 운명이 있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캐릭터와의 연도 있는
거 같다. 물론 더 유명해져서 투자 가치가 있는 배우가 된다면 그런 연이 늘어날진 모르겠지만 결국 적든, 많든, 저마다에게 경우의 수는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게 고르고 추스르다 보면 ‘포텐’이 터질 수도 있겠지.
올해 다작을 하고 싶다고 했던데.
다작을 해도 좋을 때라고 생각한다. 고착화된 이미지가 없으니까. 벌써 <연어>라는
영화를 찍고 있다. 회차가 적은 영화인데 빠르게 찍다 보니 벌써 많이 찍었다. 그래서 8월 중순 즈음부터 할 수 있는 작품을 알아봐달라고 소속사를
압박하고 있는, 아니, 자기 주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웃음).
<잉여공주>라는 드라마도 시작한다고.
이미 1회차는 찍었다.
어쨌든 먼저 <터널 3D>가 먼저 공개될 예정이다. 공포영화다. 장르물 자체가 처음이기도 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월요일에 후시 녹음이 있었는데 촬영 당시의 호흡들을
실내에서 재현하려니까 쉽지 않더라. 게다가 <터널 3D>는 단 하룻밤의 이야기를 다룬 거라 호흡의 연결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이 있다 보니 상당히 흥분한 상태에서 대사를 쳐야 하기도 했고, 감정을
폭발시켜야 할 때도 많았고, 매 신마다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두
번 하라면 못할 거 같다(웃음).
공포영화 현장은 상대적으로 유쾌하다던데.
유쾌했다. 촬영 들어가기 전까진(웃음)? 한번 시작하면 동굴 밑까지 들어가야 해서 춥고, 음습했다. 게다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씨라서. 의자에 앉아 있으면 발이 시릴
정도였다.
실제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나 보다.
남양주 세트에서 찍은 신들도 있지만 대부분 강원도나 광명에 있는 진짜 동굴에서 찍었다.
몰입감은 높아졌을 거 같은데.
그만큼 대기 시간도 힘들었다(웃음).
깊은 곳에 들어가서 촬영을 하는 만큼 끝나면 다시 나가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나가(웃음).
다칠 위험도 많았을 거 같은데.
다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동준(연우진)을 만나서 몸싸움을 하다 도망가는 신을 동굴에서 찍었는데 주변에 날카로운 돌이 많았다.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부딪힐 곳도 많아서, 옆구리도 찧고,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다. 특히 여배우들이 그랬을 거다.
공포영화 좋아하나?
별로.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장르영화에 도전하고 싶었다. 아까 말했듯이 다작을 하고 싶었는데 특정
캐릭터로 고착화되지 않은 만큼 배우로서 다양한 색깔을 풀어보고 싶었다.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다는 말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쌓을 수도 있고.
<터널 3D>에선 반항적인 재벌2세인 기철이란 캐릭터를 맡았는데 활자상으론
빤해 보이는 캐릭터 같다.
좀 심심해 보이지(웃음).
위기를 조장하는 인물이라던데.
대단히 이기적인 캐릭터다.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밀고 나가다가
그와 벌어진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덕분에 상황이 복잡해진다. 기철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며 연기했다.
<연어>와 <잉여공주> 촬영을
병행 중이라던데, 힘들겠다.
육체적으로 힘들긴 하다. 그런데
<연어>는 준비기간이 길었고, <잉여공주>도 주1회 방송이다 보니 촬영 스케줄이 그리 급박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스위치가 어렵진 않다. 그냥 일종의 수행이라 생각한다(웃음).
<잉여공주>에선 엘리트 셰프로 출연한다는데, 어울린다.
아무래도 도시적인 느낌이 어울리는 것 같다. 처음엔 클리셰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등장하는데 4부 이후론 새로운 면모가 드러날 거다.
<잉여공주>는 좀 밝은 분위기의 작품 같던데
감독님, 작가님, 모든
배우들까지, 스물한 명이 모인 단체 카톡방이 있다. 거기서
다들 작품 얘기도 하고, 사소한 얘기까지 한다.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있다.
무릎에 흉터나 상처가 많다.
여긴 옛날에 자전거 타다가 다친 곳이고, 여긴 십자인대가 끊어져서
이식한 수술자국이다. 조심성이 없어서 몸을 좀 험하게 썼다(웃음).
팔뚝의 문신엔 특별한 의미라도 있나?
기독교 신자였다. 빌립보 4장 13절에 있는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I CAN DO EVERYTHING IN MY GOD)”는 뜻이다. 옛날엔
기도하는 소년의 손처럼 보였는데 요즘은 합장하는 것처럼 보인다(웃음).
불교로 전향이라도 한 건가(웃음)?
그런 건 아니다. 어쨌든 강요만 하지 않으면 어떤 종교라도 괜찮다. 신을 믿는다기 보단 좋은 의미를 주는 말이 많으니까. 다 먼저 산
사람들의 이야기잖아. 솔직히 문신은 어릴 때 멋으로 한 것 같다(웃음).
독서를 자주 하는 편인가?
예전엔 많이 읽었다. 2~3년 전까진 인터뷰 할 때 집에서 뭐하냐고
물어보면 책을 많이 읽는다고 답했는데 그래서 자연스레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돼버렸다. 그래서인지 팬들이
책이나 고양이 관련 선물을 많이 보내준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못 읽고 있다.
고양이를 키우나 보다.
맞다. 팬들이 고양이 관련 서적, 관련
물품, 하물며 고양이 밥그릇 설거지하는 스폰지까지 선물해주셨다(웃음).
고양이가 주인을 잘 만났네.
나도 좋다. 사실 나는 나한테 크게 돈을 쓰는 편이 아니라서 고양이
선물이 들어오는 게 더 좋다. 지금 입고 있는 반바지도 옛날에 산 청바지를 잘 안 입게 돼서 5천원 주고 줄인 거다.
아까 독서에 관해 물어본 건 다듬어진 문장처럼
말하는 타입이라서였다. 그래서 왠지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었을까 궁금했다.
요즘은 그냥 필요성에 의해서만 읽는다. 시나리오, 촬영, 사진, 연출론, 영상 문법, 카메라 워킹 등 연기에 도움이 될만한 책만 읽는다. 일종의 업무 관련 서적이랄까(웃음)?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고 싶어지지 않을까? 어떤 면에선 현실과의 괴리를 느낄 수도 있고.
물론 적용할 수 있는 한계는 있다. 다만 감독이 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배우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개론만큼의 지식 정도는 알고 있어야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래야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보인다. 현장이란 커다란 유기체나 다름없다. 하나가 잘못되면 전체를 다시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보고 이해할 수 있어야 자기 연기에도 집중할 수 있다. 이를 테면 렌즈 종류에 따라 프레임이 달라진다. 만약 밤에 줌 망원렌즈로
촬영을 한다면 포커스를 맞추기 어렵다는 걸 아니까 과한 움직임을 하지 않는 거다.
완벽주의자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 강박이 없진 않다.
처음부터 그런 강박을 갖고 연기한 건 아니었을
것 같다. 뒤늦게 연기에 대한 애착이 생겨서 그런 강박 또한 생겨났을 것 같단 말이다.
직장에서도 전직할 생각을 하면 지금 하는 일에 대한 흥미가 확 떨어지잖아. 나도
초기엔 많이 흔들렸다. 한때는 재미있을 것 같으니 일단 해보자고, 하다
보면 좋은 기회도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면 이젠 점점 더 끈끈한 직업 정신이 생긴 것 같다. 프로들의
세계에서 나 혼자 아마추어처럼 서있지 말자고, 내 기반이 어느 정도이건 간에 나중에 내 부인까지 책임져야
할 직업이라고 느끼면서 점차 임하는 게 달라졌다. 애정도 생기고.
모델 활동 시기가 그리 길진 않았다. 하지만 특별히 준비하지 않았던 분야에서 나름대로 인정 받았던 걸 보면 자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다 기회가 생겼고, 그 기회를 통해서 조금씩 알아갔던 거 같다. 당시엔 패션 매거진을 사보면서 포즈에 대해서 고민했다. 사실 내
키가 큰 편도 아니고, 호불호도 많이 갈렸고, 런웨이에 자주
오를만한 모델도 아니었지만 좋은 피사체가 되길 바랬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흡입력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컴퓨터 공학 전공이었다던데 중퇴를 했다. 특별히 전공을 살릴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내가 신림9동에서 태어났는데 신림동하면 떠오르는 게 있나?
아무래도 고시원이 떠오른다.
일단 부유한 동네는 아니지. 고시 발표라도 나는 날엔 시끄럽다. 잘된 사람은 잘돼서 웃고 안된 사람은 안됐다고 곡하는 소리하고. 어쨌든
대학교까지 가서 전공에 상관 없이 공무원 준비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나 역시 비싼 돈 내고 대학까지
갔는데 특별히 멘토를 찾지도 못했고,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젊음이 주는 무식함 덕분이랄까. 당시에
‘굶주린 들개처럼 돌아다녀라’라는 식의 카피가 유행했는데
이에 현혹돼서 학교 밖으로 떠돌았다. 물론 끽해봐야 아르바이트나 하는 수준이었지. 휴학한 뒤로 고깃집 알바도 하고, 회사 파티션 나르는 일, 모텔, 쇼핑몰 모델, 호프집
등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물론 수입이라고 해봐야 고작 옷이나 사 입고, 데이트 비용이나 충당할 정도의 수준이었지. 등록금을 충당한다는 게
명분이었는데 택도 없었다. 사실상 내가 놀기 위한 핑계밖에 안된 거다.
그래서 나중엔 후회도 많이 했지. 그나마 어린 나이에 조금이나마 현실을 느껴본 것 같긴
하다.
속된 말로 ‘남의 돈 먹기 쉽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겠다.
나는 ‘88만원 세대’를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어렵게 컸으니까. 사실 연년생 동생이
있는데 우리 집 형편이 둘 다 함께 대학에 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징병이라는
좋은 제도가 있지 않나(웃음). 어쨌든 당시에 산업체에서
대체 복무를 해서 돈을 벌었는데 시급이 2960원 정도였다. 보통
한 달에 85만원 정도를 벌었는데 점차 시급도 오르고, 하루에
네 시간 정도씩만 자며 철야를 하면 130만원 정도를 받았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140만원은 넘지 않더라. 어쨌든 그만큼
돈 귀한 줄은 안다.
금전적인 교훈 이외의 깨달음은 없었을까?
최소한 뭐가 귀하고, 중한지는 안다고 생각한다. 사람 귀한 줄도 안다. 최소한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사람을 대해선 안 된다는 건 안다. 부질 없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최소한 정말 쉽게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는 점에선 정말 필요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느린 걸음으로 가더라도 그런 믿음이 있다면 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느려서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선 들어본
적 없나?
어떤 책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세상이 변해가는 속도에 비해서 교육과 법이 제일 변화가 늦다고 하더라. 예를 들면 대한민국 누진세가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가전제품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데도 세제는 옛날 기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재 기준에 비례해서 변하질 못한다는 거다.
“운도 좋구나. 처음으로 나가는 해외가, 그것도 출장이 피렌체라니.” 한 선배가 말했다. 그렇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20대 끝자락에 찾아온 생애 첫 출국에 대한 심정이란 1%의 설렘과 99%의 두려움에 가까웠다. 처음으로 떠나는 외국에서 혈혈단신 파리를 경유한 뒤,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막연했고, 불안했다. 파리 공항에서 로마행 비행기를 경유하기 위해 긴 출입 통로를 홀로 걷다가 문득 뒤돌아봤을 때 아무도 없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마치 미아가 된 것 같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 하지만 경유를 위해 공항에 홀로 머무르는 동안 묘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알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나쁘지 않았다. 물론 로마 공항에 당도해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표를 끊고, 지하철을 타고, 비로소 기차를 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헤매다가도 물어물어 방향을 찾았고 그럭저럭 당도했다. 비로소 피렌체에 두 발을 디딘 건 새벽 2시경.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었는데 수중에 담배가 없기에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한 외국인에게 담배 한 대를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그는 브라질산인데 조금 독하다는 충고와 함께 흔쾌히 담배 한 대를 건넸고, 잠깐 대화를 나눴다. 이국에 와있음을 실감했다. 그러곤 택시를 잡아타고 피렌체의 피에솔레 언덕 위에 자리한 호텔에 도착해서 피로를 씻어내고 몸을 뉘고 보니 장장 20시간에 달하는 여정이 꿈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밤 꿈을 꾸진 않았나 보다.
다음날 호텔 관계자와의 미팅과 취재로 하루를 꼬박 보내고, 드디어 피렌체에서 고대하던 단 하루의 자유가 주어졌다. 내가 묵었던 호텔은 지대가 높은 언덕에 있는 덕분에 창밖으로 피렌체 시내가 내다보였는데 멀리서 빼꼼히 머리를 내민 듯한 두오모(대성당)의 돔이 보였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왔던 두오모의 돔이었다. 흔히 피렌체의 두오모라고 일컫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말이다. 피렌체에 발을 디딘 이상, 저 두오모에 올라야만 했다. 서른 살 생일이 되면 돔에서 만나자고 약속할 연인이 함께 있거나 말거나 피렌체까지 왔으니 두오모의 돔에 올라가봤다고 자랑할 수 있는 기억 하나쯤은 안고 가야 할 것 같아서 꼭 오르리라 다짐했다. 물론 다짐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피에솔레 언덕에서 피렌체 시내는 멀지 않았다. 지도 한 장 들고 나서서 피렌체의 골목을 누비며 지도를 훑어보고 마냥 두리번거리는 관광객의 기운을 한껏 뽐내면서 피렌체 두오모를 향해 스텝을 밟았다. 두오모를 향해 다가가며 골목을 지날 때마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의 전통적인 정취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를 대변하는 특별한 랜드마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내가 그 길 위에서 보는 것들이 하나하나 이 도시의 결을 이루는 역사이고, 서사였다. 길을 잘못 들어서도 괜찮았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저마다 층위를 이루는 지층을 찬찬히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두오모에 당도했다. 일단 성당의 스케일과 디테일에 감탄하는 절차를 밟은 뒤, 두오모 돔에 오르기 위해 입장했다. 두오모 돔에 오르려면 463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고 했다. 당연히 수를 세면서 오르진 않았다. 일단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불이 나는 허벅지를 신경 쓰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두오모 돔에 올랐는데! 응? 도대체 왜 저 건너편에 돔이 보이지?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오른 곳은 두오모 돔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조토의 종루’라는 또 다른 전망대였던 것. 입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오른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두오모 돔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아마 두오모 돔에 올랐다 해도 다시 이곳에 올랐을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두오모 돔과 함께 내려다보는 피렌체 전경은 지금도 내 인생에서 이만한 그림을 본 적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장관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낮은 건물의 붉은 지붕들이 이어지면서 멀리 보이는 산과 하늘의 경계가 살아 있는 유화나 다름없었다.
조토의 종루에서 내려와 잠시 고민했다. 두오모 돔에 올라갈 것인가. 그래도 피렌체까지 왔으니 올라가야겠다 결심했다. 그리고 올라가면서 알았다. 두오모 돔에 오르는 것이 463개의 계단을 꾹꾹 눌러 밟으며 어떤 자랑거리를 만드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두오모 돔 천장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인 조르조 바사리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거대한 프레스코화인 <최후의 심판>이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점차 가까워지는 천장화를 볼 수 있는데 대단한 위엄이 느껴지는 이곳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금치 못했다. 두오모 돔에 올라 볼 수 있는 풍경은 다시 한번 반가웠다. 조토의 종루에서 걸어 내려오는 계단마다 이 풍경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아쉬움이 터벅터벅 쌓였기 때문에. 그래서일까. 서른 살 생일에 이곳에서 다시 보자고 속삭일 연인이 없어도 상관 없었다. 20대 마지막에 찾아온, 처음으로 발 디딘 이국의 풍경이 이 정도라니 내 삶이 그리 나쁜 건 아닌가 보다, 잠시 생각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두오모에 오를 수 있다면 그때의 내 삶은 또 얼마나 좋아졌을까? 두오모에서 내려오니 잠시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지금도 피렌체의 두오모를 생각하면 꿈을 꾸는 것 같다. 아직도 가끔씩 그 꿈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