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배달 음식 전성 시대다. 집에서 미식을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하지만 그 식사가 과연 즐거웠던가?
주말마다 강림하는 귀차니즘 속에서도 꼬박꼬박 허기는 찾아왔다. 배는
고프지만 밥을 하긴 귀찮았다. 밥을 차려 먹은 뒤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도 귀찮았다. 나도, 아내도. ‘귀찮으면
나가 죽어야지’라던 어머니의 명언이 떠올랐지만 나가 죽기도 귀찮았고 배는 고팠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배달의 민족 아이가. 그래서 한동안 새로 이사간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찾아내는데 공력을 쏟았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 대략적인 리뷰를 살피고, 괜찮아 보이는 중국집에 전화해서 주문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가장 맛있는 중국집을 찾았다. 하지만 짜장면이 물렸다. 결국 내 입에게 미안해서 외출을 했다.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동네엔
괜찮은 식당이 많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촌에 살면서도 배달 유전자가 충만한 민족성에 의지하며 주말
끼니를 연명했던 지난 날이 문득 서글퍼졌다.
배달의 민족이란 말은 반쯤은 우스갯소리지만 반쯤은 틀린 말도 아니다. 이
땅에선 조선시대부터 일찌감치 음식 배달 문화가 있었으니까. 18세기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황윤석의 <이재일기>에 따르면 냉면을 주문해서 배달해 먹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교방문화가 발달한 진주에선 관아의 기생들이나 부유한 가정집에서 진주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06년에 창간한 일간지 <만세보>엔 음식 배달에 관한 광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린 정말 배달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배달의 민족의 역사가 꽃피는 전성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침에도, 한낮에도, 한밤중에도, 새벽녘에도, 무엇이든 주문하세요. 배달을 해주지 않는 가게도 걱정하지 마라. 배달을 대행하는 업체가 있으니까. 전화를 걸 필요도 없다. 스마트폰 액정을 몇 번 터치하면 결제까지 손쉽게 되는 배달앱이 있으니까. 최근엔
전국 팔도 맛집의 음식을 당일 혹은 익일에 배달해주는 ‘미래식당’이란
사이트도 생겨났다. 목포의 민어회를 서울의 방안에서 받아 먹을 수 있단다. 배송비는 고작 3천원 정도. 세상
좋아졌다. 전국의 음식을 집에 앉아서 맛볼 수 있는 시대라니. 그러니까
내가 사는 그 집이 미식 문화의 미래라는 것이다. 항상 같은 식탁에 앉아서 다양한 식당의 메뉴들을 맛볼
수 있다는 말이다. 편리하다. 하지만 어딘가 허무하지 않은가.
누구나 식사를 한다. 연료를 채운다.
하지만 기름에도 등급이 있듯이 음식에도 등급이 있다. 맛있는 음식과 맛없는 음식이 존재한다. 채울 것이냐, 맛볼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맛있는 음식 즉 ‘미식’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미식, 나, 로맨틱, 성공적? 아니아니, 그럴리가. 대부분의
사람은 홀로 식사하길 꺼린다. 혼자 밥을 먹는 ‘혼밥족’이 늘어난다 해도 삼삼오오 테이블을 채운 이들 사이에서 홀로 밥을 먹는 건 어색한 일이다. 그건 우리가 오래 전부터 밥을 먹는 행위만큼이나 밥을 먹는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었던 거다. ‘어떤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한 건 ‘어떻게 밥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식사라는 건 결국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넘어서 ‘누구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먹을 것인가?’라는 다채로운 물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험이다. 씹고, 먹고, 맛보고, 즐기는
미각적인 경험을 넘어서 말하고, 듣고, 웃고, 감정을 교류하는, 일종의 공감각적인 경험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찾아가서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것, 식탁이 단지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마주앉아서 시간을 공유하는 것임을 깨닫고,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지불하는 돈은 단지 음식값만이 아닐 것이다. 시간과 관계를
소비하는 비용까지 포함된 내역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음식과 함께 소비한 경험에 대한 지불이라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만큼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식사를 하기 위해선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저서 <미식 예찬>의 저자 브리야 샤바랭은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나는 그대가 누군지 말해보겠다”고 썼다. 우리는 때가 되면 선택한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 선택에는 다양한 기호만큼이나 각자의 사정도
포함돼 있다. 아침 출근길에 김밥을 사가는 여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면서 김밥을 먹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음식을 씹으면서 우리의 시간과 일상도 함께 씹어 삼킨다. 포털사이트에서
‘야근’과 ‘야식’이란 단어를 함께 검색해보면 야근에 대한 괴로움과 야식에 대한 즐거움이 함께 쏟아진다. 야식이 좋아서 야근할 리는 없다. 야근해야 한다. 고로 야식을 먹어야 한다. 야식문화는 어쩌면 피로사회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배달문화의 발달 역시 피로사회의 단면 어디쯤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쁘고 고된 삶에서 여유 있는 식사란 사치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선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배달의 민족으로선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서너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 게 선진문화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저녁을 먹는데 서너 시간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배달음식의 편의는 인정한다. 그리고 배달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건 식당을 찾아갈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도 다양한 미식을 즐길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먹고 사는 재미를 포기해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배달의 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죄라면
정말 죄인 것 같다.
이준기는 항상 편견과 싸우는 배우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싸우지 않았다. 맞서지 않았다. 그저 견뎌냈다. 단단하고 유연하게,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배우로 살아남았다.
촬영은 어땠나?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화보 촬영이었는데 여자 모델과 함께 찍어서 신선하기도
했고.
화보로 만날 기회가 드물다.
사실 작품으로 다가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패션 분야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도 하고, 화보를 통해 더욱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면 좀처럼 보기 힘들다.
배우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는 게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팬들
취향에 맞추는 것도 있고. 그런데 요즘 주변에서 예능 출연을 권하는 사람이 워낙 많긴 하다. 연기만 보지 말고, 다른 재능도 좀 써먹어 보라고. 사실 나도 예능에 나가는 게 싫진 않지만 아직 그렇게 소모될 때가 아닌 거 같아서 고민이다. 하지만 확실히 작품 외적인 활동이 드물다 보니 일반적인 대중 시각에선 활동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한 배우가 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예능을
생각해 보는 것도 그래서고.
막상 나가면 잘할 거 같다.
너무 오버할까 봐(웃음). 익숙하지
않은 만큼 그 어색함을 모면하고자 오버할 거 같다. 욕심도 부릴 거 같고. 어쨌든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는 거 않다. 유쾌할 걸 좋아하기도
하고.
TV는
자주 보나?
어지간한 프로그램은다 본다. 원래 좋아하기도 하지만 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중들의 취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가늠하기 좋은 척도가 TV프로그램이라 생각해서 두루두루 본다.
시사프로그램도?
본다.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책임감 있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해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세하겠다는 게 아니라 배우로서 그런 흐름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공적인 녹을 먹고 사는 공인은 아니지만 공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반공인 쯤은 되니 어떤 식으로 발언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판단하기 위해선 그런 흐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걸러 들을 것도 자연스럽게 걸러
들을 수 있고. 최소한 뭔가를 들었을 때 ‘뭐라는 거지?’ 이러고 싶진 않다. 그런 정보들이 연기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고.
최근 생일날에 팬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했다던데.
팬클럽 분들께서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고 들어서 작년부터 팬클럽 운영진에게 부탁해서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물질적인 선물을 받는 것보다도 팬들과 같이 봉사활동을 하니까 오히려 나를 채우는 기분이 든다. 이준기가 멋있단 이야기만큼이나 이준기 팬들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좋고.
그렇게 계속 자리를 지켜주는 팬들과 같이 늙어가는 것도 좋다.
한때 SNS
인사말에 적어놨던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배우’라는
문구는 자기 주문 같았다.
맞다. 나는 내가 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기 최면을 거는 셈이지. 20대 때만 해도 한 작품이 터지면
그 작품의 영향력이 오래갔다. 그런데 요즘은 금방 사라진다. 유일하게
대중과 소통할 기회가 작품뿐이니까 최소한 1년에 한 작품은 해야 한다는 경각심이 생겼다. 그래서 최소한 1년에 한 작품은 꼭 선보이려 한다.
실제로 <왕의
남자> 이후로 영화든 드라마든 1년에 한 작품씩 꼭
출연했다. 그런데 거의 한 편 이상을 안 하더라.
한 작품을 고르고 끝내기까지 소모되는 시간이 최소 반 년은 걸린다. 그러니 1년에 한 작품 이상 하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와 영화를 연이어 하면
가능하겠지만 그러기엔 작품을 선택하는데 고민하고 소요하는 시간이 적지 않다.
팬들 입장에선 좀 더 자주 보고 싶지 않을까.
어떤 배우들은 4~5년을 쉬기도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작품을 기다리면서. 나는 쉬지 않고 해마다 한
작품이라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싶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시간에 쫓기듯 결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다 싶을 때 그 결과를 지켜보는 팬들도 힘들다고 하더라. 그래서 오히려 팬들은 조급해지지 않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만화는 좋아하나?
예전엔 좋아했는데 30대 이후론 거의 못 봤다.
웹툰도 안 보나?
거의 안 봤다.
차기작으로 확정된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의 원작 웹툰은 봤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주 들어가 보는데 드라마 매니아들 사이에서 <밤을
걷는 선비>라는 웹툰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될 거 같다면서 이미 화제였다. 그래서 그때 찾아봤다. 아마 작년 초였을 거다. 여러 모로 신선했다. 그래서 소속사에 한번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미 다른 배우가 물망에 올랐다더라. 그런데 제작이 미뤄지더니
올해 초에 제작진과 접선할 기회가 생겨서 한번 밀어붙여보자 싶었다. <조선총잡이>에 이어서 연속으로 사극을 하는 게 부담스럽지만 소재가 신선하니까 기회가 오면 잡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게다가 원래 관심이 있던 작품이니까.
원래 그렇게 적극적인 편인가?
아니다. 그래서 감독님도 많이 놀랐다고 하셨다. 첫 미팅 자리부터 감독님과 술을 3차까지 마실 정도였으니까(웃음). 원래 첫 미팅에선 서로 잴 때가 많다. 배우도, 감독님도. 그런데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일단 판타지라는 장르를 좋아한다. 내 생김새나 신체적인 능력, 연기적인 스타일도 판타지에서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밤을
걷는 선비>는 뱀파이어라는 역할을 해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선할 것 같았다.
원작을 봤으면 알겠지만 본인이 연기할 김성일이란
캐릭터와 외모부터 닮았다.
나도 ‘어? 나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배우가 원작의 캐릭터와 싱크로율을 맞추려고
하는데 이건 이미 그림부터 닮았으니까 끌리는 점도 있었다. 물론 요즘은 눈 찢어진 배우들이 많이 나왔지만(웃음), 20대 때만 해도 내가 독보적이었잖아.
데뷔 초부터 남다른 외모로 주목 받았다. 개성 있는 외모로 부각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극복해야 할 한계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맞다. <왕의 남자>의
흥행 덕분에 스타로 발돋움했음에도 작품 제안을 많이 받았던 건 아니었다. 배우로서 다양하게 쓸 수 있는
얼굴이 아니란 평이 많았다. 그래서 배우 생명이 짧아질 것이란 위기감을 느꼈다. 심지어 <왕의 남자> 이후에
했던 <플라이 대디>도 흥행에 실패했으니까. 스타라고 불렸지만 배우로서의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배우밖에 없었고,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체적
능력이나 감정 표현에 주목하도록 만들자고, 그러면 내 얼굴도 점점 익숙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내 연기를 봐주더라.
사실 ‘이준기가
연기를 잘한다’라는 칭찬에는 ‘생각보다’라는 전제가 붙는 경우가 많았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연기적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그때도 역할을 잘 만난 덕분이란 말도 많았다. <일지매> 때도 생각보다 잘 하는데 ‘과연 계속 잘할 수 있을까?’라는 꼬리표가 많이 붙었다. 그래서 약간 오기가 생겼다. ‘아직도 믿지 못한단 말이지. 다 불태워버리겠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기본적인 캐릭터
구축부터, 다양한 감정선을 보여주고, 대역 없이 해낼 수
있는 한 최대치의 액션을 소화하려 했다. 그래서 ‘고생미’ 넘치는 배우라는 소리도 들었고(웃음). 그러다 보니 신뢰가 생긴 거 같다.
끊임없이 선입견과 싸워온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성격도 안 좋을 거 같고(웃음).
한때는 안티팬도 적지 않았다.
‘이준기는 안될 거야. <왕의
남자>는 운이 좋았지.’ 처음엔 이런 시각이 대부분이라서
처음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배우로서의 나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여기까지 온 것도 같다. 물론
처음엔 악플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데도 계속 봤던 건 그걸 이겨내야 배우로서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유 없이 저평가하는 건 넘기되 필요한 이야기는 수용하고자 했다. 지금도 찾아본다. 좋은 말만 보지 않는다. 냉정한 평가는 정확하게 수용하려 한다.
아무리 몸에 좋은 말이라도 쓴 말은 쓴
말이다. 자존감이 강한 편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거기 휩쓸린다는 느낌이 들면 애초에 보지 않았을 거다. 그런
의견을 듣는데 익숙해지면서 단단해지고, 유연해진 거 같다. 배우는
어차피 작품으로서 대중들의 심판대 위에 서야 된다. 언제까지 배우로 살진 몰라도 배우로서 사는 이상
어떻게든 감수해야만 한다. 이왕이면 빨리 보고, 빨리 느끼고, 빨리 생각할수록 나에게도 유리하다는 걸 안다. ‘내가 잘했는데 쟤들은
왜 저래?’ 이러면 언젠가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쉬울 거다. 요즘은
누가 내 기사보고 있으면 ‘댓글에서 뭐래? 혹시 욕은 없냐?’ 최소한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멘탈 수준은 됐다(웃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유연해지고, 능글능글해진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맷집이 좋아진 셈이다.
아마 드라마를 계속해서 그런 거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처음 드라마 시스템을 경험했을 땐 죽을 맛이었다. ‘이런 열악한 시스템에서
뭘 한다는 거지? 다음엔 절대 안 할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중독되더라. 매주마다 두 시간짜리 결과물을 만들고, 매주마다 시청자들의 평가를 듣게 된다. 처음엔 그것도 스트레스였는데
하다 보니까 그런 의견을 수용하는 능력도 생기고, 순발력도 늘고, 점점
드라마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힘들고, 지치는데도
다시 드라마를 선택하고, 그렇게 점점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은 느낌? 간혹 팬들이 영화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도 드라마를 계속 하게 되는 건 그런
중독성 때문이다.
고생을 잘 견디고 즐기는 타입인가 보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어색하더라. 이런 사치스러운 현장이
있다니(웃음). 배우에게 이렇게 많은 시간을 주고, 고작 한두 신 찍고 쉬고. 물론 바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쨌든 24시간을 구르는 것보다 기다리는 게 더 지치더라. 지금은 치열하고 공격적인 스타일을 즐기게 된 거 같다.
배우가 되기 전에도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부모님의 반대 속에서도 서울로 상경해서 숙식 제공하는 가게를 떠돌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던데.
주방 보조를 할 때도, 당구장 카운터를 볼 때도, 호프집 서빙을 하거나 주유소 알바를 할 때도, 그저 서울에 왔다는
게 너무 좋았다(웃음). 원래부터 낙천적이다. 당구다이를 닦다가 TV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곧 저기 나갈 텐데’란 생각하고. 오디션도 계속 떨어졌지만 오디션을 더 많이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때의 근성들이 남아있는지 웬만한 피곤은 견딜 수 있다.
생활력 있다는 말을 좀 들었을 거 같다.
내겐 그것밖에 없다(웃음). 하나
더 있다면 낙천적인 성향. 그래서 모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고3때. 조금 늦은 편이었지. 어릴 때부터 남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건 좋아했지만 배우가 되고 싶단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햄릿>을
연극으로 봤다가 배우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배우가 되고 싶다기 보단 배우라는 직업을 공부해보고
싶었다. 그러니 부모님께서도 기가 차셨겠지. 난데없이 배우가
되겠다고 하니까.
나라도 말렸을 거다.
친구들이 다 ‘또라이’라고
했다. 네가 배우를 하면 나는 대통령한다고(웃음). 그것도 그럴 것이 그때만 해도 부산 사람이 서울에서 연예인이 된다는 건 와 닿는 일이 아니었다. 타고난 사람이 하는 거니까. 그러고 보면 확실히 인생이란 모를 일이다.
춤과 노래를 좋아했으니 아이돌 가수를 꿈꿀
법도 했는데.
연예인이 되고 싶단 생각 자체를 못했다. 그 당시에는 부산에서 연예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것도 그냥 연기를 공부해보고 싶었던 거지, 영화배우가 돼서 스타가 될 거란 생각이 아니었다.
어쨌든 잘됐으니 다행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섬뜩하다(웃음).
그래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후회가 없다는 말처럼, 그 시기가 내겐 그랬다. 사실 컴퓨터 공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재수를 해야 하니 고3이었던 그 해는 쉬어가는 타이밍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여유가 있을
때 도전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컴퓨터 공학과는 왜 가고 싶었을까?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끼고 살아서 관련 공부를 하고 싶었다. 만약
컴퓨터 공학과에 못 가서 프로그래머가 될 수 없으면 ‘용팔이’라도
할거라고 생각했다(웃음).
질문이 던져지면 폭포처럼 답변이 쏟아지는데
평소에 혼자 생각이 많은 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편이다. 그래서 생각이 막히고 답답해지면 지인을 불러서 술을
마신다. 개똥철학이라 해도 툭툭 털어내면서 생각을 정화시킨다. 혼자
머리 싸매고 있는 편이 못 된다. 그래서 좋은 대화 상대를 만나는 게 복이라고 생각한다.
말 없이도 편한 친구가 점점 절실해지는
나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이런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상대를 술자리에서만 채울 순 없을 거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런 결핍을 해소하는 게 맞는 거 같다. 진득하게 연애해보고 싶다. 이제 가볍게 만날 나이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연애도 많이 못해봤는데
벌써 서른넷이나 됐으니까(웃음).
연애도 때를 놓치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요새 좀 억울하다. 꼭
적어달라. 팬들도 좀 알아달라고(웃음).
<투윅스>에서 딸로 나왔던 아역배우 이채미로부터 받은 생일축하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고 ‘역시 딸이 좋다’는 멘션을 남겼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의미심장하게 읽히더라.
요즘은 집을 보러 다닐 때도 결혼하면 여기서 살 수 있을지 생각한다. 옛날엔
내가 저기서 쉰다면, 저기서 혼자 커피를 마신다면, 오로지
나한테만 맞춰서 생각했는데 지금은 집을 보러 가면 거실에 내 아이가 뛰어 논다면, 애들이 이 방에서
잠을 잔다면, 아내가 여기서 같이 지낸다면,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시각이 달라졌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바뀌나 보다.
팬들도 이제 그런 생각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체크해보니 반반이더라(웃음). 하지만
이제 거기 휩쓸릴 나이는 아닌 거 같다. 나도 내 사랑을 찾아야지. 당장은
아니라 해도 나도 내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혼자일 순 없으니까.
결혼을 통해 안정적으로 배우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배우라는 게 사실 비정규직이다. 사고 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도 어떤
일이 생겨서 갑자기 이 직업을 잃을 수 있고, 아니면 별다른 이유 없이도 잊혀질 수 있다. 그러니 더욱 절박하게 연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자리를
지켜야 나중에 가족이 생겼을 때 가족들도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원래 가정적인 사람이다. 떠돌아다니는 것보단 집안에서 생활하는
걸 좋아한다. 챙겨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도 좋고. 팬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그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편애하진 못했을 거다. 나름대로 사람을 챙기는 편이라 팬들과도 돈독하게 지내는 거다. 가족
또한 마찬가지일 거다. 그만큼 결혼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느낄 거란 확신이 있다.
웨이보 팔로워 수가 1600만 명이라던데, 서울 인구보다 많다(웃음). 중국과 일본에 팬덤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그만큼 든든하다. 그만한 팬덤이 있는 배우가 된 덕분에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상당하니까. 내가 잘해서 기회를 얻은 부분도 있겠지만 팬들 덕분에 얻는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을 벗어나서도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자. 그런데 정작 <밤을 걷는 선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못한 거 같다.
“’커먼 그라운드’ 가봤어?”라는 질문을 받았다. 커먼 그라운드라는 곳이 뜨는 공간이란 말이었다. 들어보니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서 만든 공간이라 했다. 새로운 일은
아니다. 영국 런던의 컨테이너 쇼핑몰 ‘박스파크’나 뉴질랜드의 ‘리스타트’ 등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건물의 사례는 이미 적지 않다. 서울 논현동의 ‘플래툰
쿤스트할레’나 한남동 블루스퀘어의 전시관 ‘네모’ 등, 국내에서도 처음이 아니다. 다만
커먼 그라운드는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진 건물 가운데 전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지닌 건축물이라고 했다. 본래
택시회사 부지였던 공터를 코오롱인더스트리FnC(이하: 코오롱)에서 매입해서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올렸다고 했다. 공식 홈페이지에선
커먼 그라운드가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고속 촬영 동영상을 볼 수 있었다. 그 영상을
보니 직접 두 눈으로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커먼 그라운드가 들어선 곳은 광진구 자양동, 더 직접적으론 건대 부근이라고
했다. 7호선 건대 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걸어가니
파란 컨테이너들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보니 항구에 적재된 컨테이너들을 보는 기분이라 그 너머에 파란
바다가 펼쳐질 것도 같았다. 어쨌든 양쪽으로 나뉘어 길게 공간을 감싸는 형태로 이어져 쌓인 두 동의
컨테이너 박스엔 다양한 매장들이 들어서있다. 공식적인 보도자료에 따르면 56개의 패션 브랜드와 16개의
F&B, 1개의 문화공간으로 구성돼 있다고 했다. 두 동의 패션 브랜드는 각각 남성용, 여성용으로 나뉘어 있다. 층마다 동마다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악세서리 매장을 비롯한 여성 브랜드가 집결된 한 동은 길게 이어지는 컨테이너 구조에 따라 동선이 이어지는 탓에
약간 통로가 비좁은 동대문 패션몰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반면 남성용 브랜드가 모인 다른 한 동은 상대적으로 여러 개의 컨테이너가 뻥 뚫려서 이어진
구조 덕분에 동선에 여유가 있는 아울렛 매장처럼 느껴졌다.
흥미로운 건 코오롱에서 운영하는 이 공간에서 코오롱 산하의 패션 브랜드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디 디자이너 브랜드나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등 소위 동대문 상권을 통해서 패션계로 진입하는 혈기왕성한 젊은
브랜드들로 포진돼 있었다. 그리고 컨테이너 박스 안팎을 채우는 것도 젊은 피였다. 커먼 그라운드를 누비는 이들 대부분은 10대 혹은 20대쯤으로 보이는 남녀였다. 둘이서 혹은 삼삼오오끼리. 커플 혹은 친구들끼리.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커플에게 대뜸
커먼 그라운드가 마음에 드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쿨하잖아요.” 커먼 그라운드는 젊은 공간이었다. 세워진
지 오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어린 것과 젊은 건 다른 이야기다. 육체보다도 정신의 문제다. 컨테이너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컨테이너로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발상이 이 공간에 모여드는 이들의 정신적 나이를 규정하게 만든다.
광장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자전거 묘기를 하는 이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규칙성 없이 광장 위로 산재해 움직이던 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고, 원형의 벽이 형성됐다. 광장 안에 작은 광장이 생겼다. 커먼 그라운드를 주목하게 만든 건 분명 공터를 세워진 컨테이너 박스 자체겠지만 커먼 그라운드에 온다면 광장을
통하게 될 것이고, 광장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광장 한가운데
서면 좌우로 광장을 감싸듯 이어진 컨테이너 박스 위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이들과 눈이 마주치기 십상이다. 덕분에
난간에서 내려다 보는 클러버들 사이에 둘러싸인 클럽의 댄스 플로어에 선 기분이 들었다. 광장엔 푸드
트럭 세 대가 컨테이너 하나를 가운데에 끼고 어깨를 기댄 것마냥 서있다. 트럭마다 각기 다른 종류의
음식을 판매한다. 음료나 맥주도 주문할 수 있다. 다들 그
주변에 앉거나 서거나 하며 음식을 기다린다 대부분 맥주 한 병씩을 제 앞에 두거나 손에 들고 있었다. 다들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든다. 불편하다기 보단 즐길 만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쿨하다.
어쩌다 문득 커먼 그라운드 옆으로 동네 주민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가 구부정하게 무심히 걸어가는 풍경을 보았다. 왁자지껄한 젊음 옆에서도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커먼 그라운드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다. 하지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놀이터는 아닐 거다. 물론 세상의 모든 재미를 쫓을 필요는 없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놀이터를 찾으면 된다. 들어왔던 길을 따라 나오며
깨달았다. 커먼 그라운드는 내게 어울리는 놀이터가 아니라는 것을. 서른
살 중반의 나이가 됐기 때문인지, 쿨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
없었다. 물론 그 활기가 싫진 않았다. 그저 내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나는 그걸 인정하기로 했다. 쿨하게.
여자가 없다. 남자가 없다. 만날 사람이 없다.
소개팅에 나오는 여자도 많고, 남자도 많은데, 정작
내 여자는, 내 남자는 없다. 소개팅만 계속된다.
“좋은 여자 없냐?” 남자1호가 물었다. “좋은 남자 없어?”
여자1호도 물었다. 일단 남자랑 여자는 있구나. 그래서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시켜주기로 했다. 그런데
남자1호가 여자1호의 사진이 보고 싶다고 했다. 여자1호에게 사진을 하나 달라고 했다. 여자1호는 살짝 볼멘소리를 했지만 사진을 주겠다고 했다. 전제가 있었다. “그럼 나도 볼래.”
남자1호에게도 사진을 달라고 했다. 군말 없이
사진을 보냈다. 중간에서 두 사람의 사진을 봤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위
사진은 실물과 다를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 메시지를 띄워줘야 할 것인가 잠시 생각해보기도 하였으나 내
친구에게 관심을 더 보이며 날 조금씩 멀리하던 너를 보며 될 대로 되라고 생각했다. 뭐,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위조 수준은 아니니까. 어쨌든 두 사람은 심판의
날, 아니 날짜를 정했다고 했다.
그런 만남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남자1호에게 연락이 왔다. 괜찮았냐고 물었다. “아니, 뭐, 나쁘진
않았어.” 그러니까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음…그런데’라고
운을 떼더니 2% 부족한 느낌을 나열했다. 굳이. 여자1호에게 끌리지 못한 이유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았지만 남자1호에겐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 스타일이 아님’을
스스로 다짐하는 이유가 덕지덕지 붙어있을 뿐이었다. 여자1호에게
문자가 왔다. 여자1호에게선 긍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졌다. 적극적인 표현이 동원되진 않았지만 무스크향과 같은 여운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명확한 기대감을 분사했다. “혹시 나에 대해서 별 말 안 해?” 나는 여자1호에게 약을 줬다. 모르는
게 약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남자1호는 당연히 애프터 신청을 하지 않았다. 안부도 묻지 않았다. 여자1호도
당연히 안부를 묻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론
소개팅 한번 한 게 대단한 인연이라는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어떤 가능성이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나치게 낭비가 없는, 효율적이지만
삭막한 엔딩이랄까. 소개팅의 애프터는 남자가 잡는 것이 무언의 룰이다.
연락이 없는 남자를 기다린다는 건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불이 켜진 상영관의 텅 빈 풍경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소개팅에서 여자가 차일 일은 물리적으로 희박하다. 어떠한
기미도 없는 남자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듯 먼저 연락하는 여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다.
여자2호는 난감했다. 어제
소개팅을 했던 남자에게 카톡이 왔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
여자2호는 일전에도 이런 문자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통신사
상담원에게 요금 관련 문의를 하고 통화를 마치면 이런 문자가 왔다. 그 문자에 답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카톡엔 답을 하고 싶었다. 그 남자에게 호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했다. “네. 오늘 하루 행복할게요!” 당연히 이상하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침인데 벌써 하루가 끝난 느낌이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말투로 시련을 주는 남자의 카톡
앞에서 여자2호는 무기력해졌다. 일부로 이러는 걸까. 설마 어장관리인가.
나는 그 사연을 듣고 의아했다. 정말 어장관리일까? 놀아본, 지금도 노는 남자2호는
말했다. “쑥맥이네. 요즘 같은 세상에 관심도 없는데 다음날
연락하는 애가 누가 있어. 그리고 선수라면 그렇게 어설프게 안 던지지.
최소한의 대화는 형성시켜야 할 거 아냐. 호감은 보이고 싶은데 요령이 없네. 뭘 몰라.” 그렇다. 그는
그저 답답한 남자였을 뿐이다. 필연적으로 호감지수가 하락한다. 그리고
여자2호의 의심도 정당했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의 의지
없는 호의에 닳고 닳아서 생긴, 일리 있는 의심이었기 때문이다. 여자3호는 요즘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은 희한할 정도로 의지가 없다고 했다. “호감이
있다고 생각했고, 대화도 잘 되는데 관계에 진전이 없는 거야. 계속
같은 자리를 뱅 도는 느낌? 문자를 주고 받거나 통화를 할 땐 사귀는 것 같은데 막상 만날 의지도 안
느껴지고,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어.” 맞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남자도. “1등은 아니어도 3등 안에 드는 여자는 갖고 싶진 않지만 잃고
싶지도 않거든. 어차피 소개팅은 계속 잡혀 있고, 잡힐 거고, 그러니까 1등짜리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 하지만 3등짜리 여자를 놓치고 싶지도 않지. 그 이상의 여자를 만날 거라 확신할 수 없으니까.” 남자2호의 말이다.
하지만 어장관리가 남자만의 특권은 아니다. 남자3호는 말한다. “대답만 잘하는 느낌이랄까. A를 물어보면 정확히 A만 답하는 거지. 내가 다시 B를 물어보지 않는 이상 진전이 안돼. 그런데 막상 만나자면 또 만나고. 그러면 또 어쩌자는 건가 싶지.”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게 남자의 물음표에 응답하지만 스스로 물음표를 제시하진 않는다. 문자를 주고 받는 동안에도, 만나서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남자가 궁금해하는 사연은 들려주되,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애프터 신청의 칼자루는 남자가 쥐고 있지만 애프터 신청이 넘어오는 순간 그 칼자루의 칼을 뽑는 건 여자 몫이다. 여자가 칼을 쥐게 된다. 하지만 여자 입장에서도 잡고 싶진 않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있다. 마찬가지다. 소개팅 기회는
널려 있고, 언젠가 엑스칼리버를 뽑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쓸만한 칼이다 싶은 건 일단 뽑고 본다. 손에 쥐고 버리더라도.
칼자루만 쥔 남자가 발을 동동 굴리건 말건. “어차피 선택은 남자가 하잖아. 그러니까 사실상 남자한테 선택을 많이 받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도도해질 수밖에 없지. 남자가 지 잘난 거 알듯이 여자도 지 잘난 거 아는 거지. 그렇게
잘난 값을 하는 거야. 남자는 계속 그녀의 주가를 올려주는 거고.” 여자4호의 말이다.
주마다 평균적으로 1회 이상의 소개팅을 한다는 남자4호에게 소개팅은 습관이다. 그는 소개팅이 있는 날에도 술약속을 마다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소개팅 결과를 물어보면 항상 무덤덤하게 말한다. “잘
안됐어.”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별의 효율성은 높은데 만남의 효율성은 떨어진다니, 소개팅의 목적이
완벽하게 어긋난다. 물론 타석수와 타율은 비례하지 않다. 두
타석에서 안타 하나를 친 타자가 10타석에서 안타 네 개를 친 타자보다 타율이 높은 것처럼. 하지만 어쨌든 타석수가 많으니 안타를 칠 수 있는 절대적 기회가 많아지는 건 사실이다. 100타석에 섰는데 안타 하나를 못 칠까. 한 방이면 된다. 하지만 그 한 방이 없다.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공이 적지 않은데
내가 기다리는 공이 오지 않아서 방망이를 좀처럼 휘두르지 않는다. 성격이 좋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교양도 있고, 스펙도 좋았으면 좋겠다. 좋으면 더 좋은 게 아니라 다 좋아야 좋다.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이 더 크게 보인다.
“남자한테 청담동에 있는 바에 가자고 하는 여자들의
심리가 뭔지 알아? 자기를 위해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보려고 데려가는 거야. 칵테일 한 잔 마시면 4만원 정도는 그냥 깨지니까.” “소개팅할 때 차는 일부로 안 가져가. 만약 데려다 주기 싫은
여자를 만나게 됐을 때 주차장 입구에서 ‘잘 가요’하고 헤어질
수 없잖아. 그래서 그냥 택시 태워서 보내는 거지.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같이 택시 타고 가서 데려다 주면 되잖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가 집에
데려다 주는 것도 신경 쓰이지. 혼자 사는 집의 위치를 공개하고 싶지도 않고. 여러 모로 부담스러워.” 남자가 하는 말도, 여자가 하는 말도 저마다의 합리가 있고, 저마다의 이기심이 있다. 다만 인내심은 드물다. 남자든, 여자든, 나름의 기대를 안고 소개팅에 나오지만 생각보다 절박하지 않다. 여자도, 남자도 없어서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 한번의 만남을 통해서
너무 많은 것을 판단하려 한다. 마치 로또 같다. 다음 주가
되면 새로운 로또를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에도, 다음
주에도 당첨확률은 한결 같이 희박하다. 가능성이 희박한 로또 당첨번호를 기다리듯 주말이 되면 소개팅
장소로 나간다. 마치 죽지 않기 위해서 절정이 없는 이야기를 매일 밤 이어나가는 셰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절정도 결말도 없는 일일야화가 덧대어지고 덧대어진다. 일회적인 인연만 덧대어지고, 덧대어진다. 그래서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솔로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솔로다. 그리고 항상 여자도, 남자도 없다. 소개팅만 넘친다. 어렵다. 어려워.
김이나는 작사가다. 김이나에게 작사는 하고 싶은 일의 영역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사를 쓴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살 수 있다.
지금 작사 의뢰가 들어온 곡이 있나요?
오늘 당장 써야 하는 거 하나랑, 일주일 안에 써야 하는 거 하나 정도?
오늘 당장 끝내야 할 곡은 어느 정도 진전이 있나요.
집에 가면 시작해야죠.
가사를 쓰는데 뜸들이는 편은 아닌가 봐요.
그래야 잘 나와요. 초기에 그렇게 쓴 가사들이 잘 나와서 이렇게 해야 잘 풀린다는 걸 알았죠.
오늘 당장 써야 할 곡이 하나 있다는 말이 담담해서 되레 치열하게 들리네요.
그렇죠. 말은 이렇게 해도 치열하죠. 마감시간을 지켜서 원서를 넣어야 발표를 기다릴 자격도 생기니까. 치열함이 익숙해진 거죠.
<김이나의 작사법>은 가사를 제외하고 문장을 활용한 첫 결과물입니다.
원래 가수들의 복화술사였던 사람이 직접 말하는 입장이 되니 문체를 잡는 것부터 어려웠어요. 확신을 주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하는 것 같다’란 식으로 쓰다 보니 초등학생 일기 같았거든요. 비유 없이 뭔가를 설명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가사와 다른 영역이라는 걸 알았죠.
<김이나의 작사법>이란 제목으로부터 필연적 오해가 생기는 것도 같습니다.
사실 ‘작사’라는 단어를 제목에 넣느냐를 두고도 논의가 많았어요. 중요한 건 이게 ‘김이나의 작사법’이지, ‘작사의 정석’은 아니란 거였죠. 작사가 예술임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나라는 작사가에겐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작사가를 시인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꼭 그렇진 않다는 걸 말하고 싶었고요. 무엇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책도 팔릴 거라 생각했고요. 그래서 다른 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로부터 자신들의 일과 닮았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정말 기뻤죠.
10년 전부터 작사가로서 책을 쓰겠다고 생각했다니, 야심가처럼 느껴지더군요.
어릴 때부터 망상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서 음악을 듣다가 ‘내가 작곡가라면 얼마나 멋질까? 상을 받으면 수상 소감을 뭐라고 하지?’ 이런 식으로(웃음). 작사가가 된 뒤에도 비슷한 망상이 있었죠. ‘10년은 하겠지? 그럼 그 때 책을 내야겠다.’
작사를 한지 10년이 넘었고, 작사에 관한 책도 냈습니다. 망상이 현실이 된 셈이죠.
실패와 패배의 데이터도 굉장히 많을 거예요. 다만 그런 데이터를 남겨놓는 편이 아니에요. 재미로 점을 봐도 나쁜 얘기는 기억하질 못해요. 보통은 나쁜 얘기만 기억하게 된다는데, 저한테는 좋은 습관인 셈이죠.
때론 불편한 말도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개인적인 관점을 통한 발견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전달되는 평가일 땐 조금 달라요. 누군가 저에 대해 내린 평가라면 오히려 좋은 내용은 쳐내고 듣는 편이거든요.
’레프트윙’이나 ‘라이트윙’과 같은 축구 포지션으로 음반 제작 형태를 비유했더군요. 축구를 좋아하나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오프사이드의 개념을 알게 된 수준이에요. 사실 남편이 축구를 좋아하는데 “저 사람은 왜 골을 못 넣어?”라고 물어보면 “저 사람은 골 넣는 포지션이 아니니까”라면서 설명해준 덕분에 포지션도 대충 알게 됐고요.
사실 그 비유 때문에 ‘작사가’를 제외한 ‘김이나’라는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궁금해졌거든요.
별 거 없어요. 그냥 게임 정도? 뭔가에 꽂히면 미친 듯이 파는 편인데 게임은 중독자 수준이 됐어요(웃음). 옛날엔 <스타크래프트>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꽂혔죠. 요새도 기본적으로 모바일 게임만 네 개를 돌려요. 피규어 모으는 것도 좋아하고, 덕후 기질이 다분하죠(웃음).
언제부터 게임을 즐겼나요.
8비트 컴퓨터 시절부터 했어요. 어머니께서 컴퓨터를 사주셔서 컴퓨터 학원에 다녔는데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것만 배웠죠. 회오리 모양의 그래픽을 만든다던가, 일기를 써서 저장한다던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것 중에 유일하게 재미있는 건 게임밖에 없었죠.
좋아하는 것도 일이 되면 힘들다고 하죠. 음악이 지겹게 느껴질 때는 없나요?
항상 좋아하는 무언가가 생기면 항상 그 구조나 뒷배경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옛날부터 좋아하는 음악이 있으면 베이스만 따라 들어보거나 연주 파트별로 나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전히 들을수록 설레요.
책을 읽고 나니 작사란 창작이라기 보단 그 가사에 관계된 모든 이들을 위한 컨설팅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가사는 다양한 인간 유형에 대한 이야기에요. 작사가 혼자만의 세계관으로 작사를 커버하기엔 한계가 있죠. 물론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작사가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결국 가사에 담긴 진심보다 ‘가사에 담긴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는가’가 중요한 거죠.
가사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닐 때도 있고요.
일반적인 발라드나 음절 수가 많은 미디어 템포의 곡들 같은 경우는 이야기의 작법처럼 가사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빅뱅의 ‘베베’나 엑소의 ‘으르렁’ 혹은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에선 서사보단 이미지나 리듬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사가 보다 중요하죠. 가사 자체가 캐릭터가 되는 셈이죠.
한때 남편인 조영철 프로듀서가 작사가 아내를 밀어준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더군요.
분명한 건 제가 이미 작사가로 활동할 때 남편은 음반 제작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었단 거예요. 저와 결혼한 후에 이 업계로 넘어왔죠. 물론 제 작사가 경력에 남편의 기여가 없었다고 단언할 순 없어요. 유리한 바도 있겠죠. 한편으론 가사를 제일 많이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제작자이기도 하고요.
결혼하기 전에 남편이 음악 프로듀서가 되려 한다는 걸 알았습니까?
음악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프로듀서가 될 줄은 몰랐어요. 저와 같이 작업한 첫 작품이 브라운아이드걸스의 ‘Love’였는데 그때만 해도 기획력이 있다고만 생각했지, 계속 할 줄은 몰랐죠. 본인도 자기가 이렇게 잘될 줄 몰랐대요(웃음).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사가로 나설 땐 불안하지 않았나요?
지금도 불안하죠. 그래도 저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렸어요. 제가 회사를 그만 뒀던 시점이 아마 50곡 정도를 작사했을 즈음이었을 거예요. 곤두박질치진 않겠다 싶을 정도? 그리고 이젠 작사가로서의 감을 잃게 된다 해도 이 업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음반 비즈니스 종사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뭘까요?
초등학생 시절에 ‘입영열차 안에서’를 부르는 김민우와 ‘추억 속의 그대’를 부르는 황치윤이 멋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노래를 부르거나 말을 할 땐 멋있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추억 속의 그대’의 작곡가가 윤상인 걸 알고 윤상 노래를 찾아 듣다가 전율을 느꼈어요. 그때 알았죠. 내가 멋있다고 느낀 게 음악 자체였구나.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매력을 만들어낸 이들이 있다는 게 놀라웠죠. 그걸 들여다 보고 싶었죠. ‘그 안에서 뭘 하길래 이런 게 나왔을까.’
결국 작사가가 돼서 윤상의 곡을 작업했습니다. 감회가 남달랐을 거 같습니다.
윤상 작곡가님께서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이 업계에서 너만큼 ‘빠심’이 대단한 사람은 못 봤다. 그래서 넌 잘 될 거야”라고. 너무 힘이 되는 말이었어요. 사실 가요에 대한 빠심이 창피하게 여겨져서 감춰야 된다는 강박이 있었거든요. 뭔가에 씌워서 날뛰는 느낌이니까요.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나서 그게 제 능력이란 걸 알았어요. 훈련이나 연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를 다잡는 계기가 됐죠.
‘예술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좋은 일꾼이라고는 생각한다’는 문장은 작사가라는 직업에 대한 정의라기보단 김이나의 생존방식에 대한 정의에 가깝겠죠.
스스로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어떤 작사가에겐 독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이게 내 안의 무언가로부터 길어 올린 완전한 창작이라기 보단 가수의 모형을 계속 복원하는 느낌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소진된다는 느낌을 받지도, 지치지도 않아요. 어쨌든 시간이 지나고 거품이 가라앉을 즈음엔 보다 분명해지겠죠.
거품이라면 유명세를 의미하는 걸까요?
맞아요. 다만 나쁜 의미로 발음한 게 아니에요. 맥주는 거품이 있을 때 마셔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작사가로서 성공했다는 모양새를 얻게 됐으니 지금이 하이라이트라는 말이죠. 그리고 조금씩 거품이 꺼지면 제 생존방식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겠죠.
‘작사가 저작권료 1위’란 식의 홍보문구가 부각되기도 했는데, 부담스럽지 않나요?
띠지에 얼굴을 넣을 때부터 기분이 이상했어요. 사실 ‘인상 좋게 생겼네’ 정도의 호감만 얻어도 판매엔 유리하겠죠. 그런데 유명인사들의 추천글과 저작권료 1위라는 홍보문구들이 합쳐지면서 제 스스로가 저열한 상품이 되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가수들을 더 이해하게 됐어요. 나보다 어린 애들이 끊임없이 이런 과정을 겪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만큼 스태프들도 큰 책임감을 갖게 된다는 걸 알았고요.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에 일러스트를 직접 그렸는데,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 글이 낯설더라고요. 너무 진지하게 읽혀서 저 자신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를 중화시킬 수 있는 만화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죠. 개인적으론 이말년 작가의 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병맛’나는 느낌이 좋거든요. 그런데 편집자가 직접 그리면 좋겠다는 거예요. 처음엔 반대했죠. 지금은 좋은 선택이었던 거 같아요. 완전히 병맛 나잖아요(웃음).
병맛 코드에 끌리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저한테 병신 같은 구석이 있기 때문 아닐까요(웃음)? 개인적으로 완벽하게 멋있게 보이는 건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것처럼 느껴져요. 지나치게 완벽해서 되레 매력이 없는 느낌? 그래서 병맛 코드의 솔직함이 세련됐다고 생각해요. 그런 코드를 활용하는 작가들도 대부분 똑똑하잖아요. 대단한 능력이죠.
처음 김형석 작곡가를 만난 자리에서 작곡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보다 뻔뻔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대단한 천재들에겐 드라마틱한 기회가 찾아오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모양 빠지는 순간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해요(웃음). 솔직히 작곡가를 동경한 건 아니에요. 그저 음반 비즈니스에 입문하고 싶었죠.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작곡가한테 ‘음반 비즈니스로 입문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물어볼 순 없잖아요. 그 사람의 분야를 통해서 어필해야 하는 거죠. 저한테 작사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제가 작사가라서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거예요.
김형석 작곡가가 작사를 권하지 않았다면 삶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다른 방식으로라도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어디선가 A&R로 활동하고 있을 수도 있고. 다만 프로듀서는 아닐 거 같아요.
본래 작사가를 꿈꾸지 않았음에도 작사가가 됐듯이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거예요. 혹시 지금 작사 외에 관심 있는 일은 없을까요?
인터뷰어? 책을 쓰는 중간에 잠시 기자를 인터뷰해서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항상 질문을 하고 누군가의 생각이나 사실을 전달하는 사람의 입장이 궁금하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많이 사라졌어요. 작사나 열심히 해야죠. 요새는 원고 기고 요청도 들어와요. 다 할 순 없지만 가능한 건 해보고 있어요.
남자는 여자를 원한다. 여자도 남자를 원한다. 하지만 남자도, 여자도 깨는 상대는 원하지 않는다. 존중 받길 원한다. 그 남자, 그 여자가 만난 깨는 여자, 깨는 남자.
WHAT
MEN WANT
솔직히 남자가 여자한테 매너라는 걸 기대하진 않지. 남자가 바라는
게 얼마나 있나? 그런데 정말 항상 일관되게 별로다 싶은 지점은 있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왜 여자들은 항상 늦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집에 시계가 없나? 아니면 시계 보는 법을 안 배웠나? 10분 정도, 그래, 괜찮아. 20분? 그래, 뭐 괜찮아. 30분? 좀 열 받지. 그 이상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를 처음 만날 때 좀 늦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아니, 늦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남자보다 일찍 오면 조금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래.
그래서 처음 여자를 만날 땐 이미 어련히 알아서 늦겠지 생각하고 있어. 어쩌다 그러는 게
아니라 10명 중에 7명은 그러니까. 이해가 된다기 보단 면역이 된 거지.
사실 밥값 내고, 차값 내고, 술값
내고, 영화비 내고, 아깝진 않아. 다만 성의의 문제지. 가격이 아니라 횟수의 문제라고. 최소한 초면에 여자한테 밥값 내라고 할 남자가 어디 있어. 그리고
처음 만났는데 밥 먹고 나서 헤어져? 그거 뭐냐. 요즘 유행한다는
소셜 다이닝이야? 아무튼 커피라도 한 잔 하지. 대부분 그때
좀 깨지. 전혀 계산할 생각이 없다라는 게 딱 보이거든. 지갑에
손도 안대. 지문 인식 지갑이라 손 대면 결제되나? 아무튼
내는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은데 얘는 이미 얻어먹을 준비가 돼 있는 거야. 나도 사람인데, 최소한 물질적으로 착취당한다는 기분이 드는 건 별로잖아. 내 카드랑
만나려고 나왔어? 그냥 두 가지 생각이 들지. 얘는 정말
개념이 없거나 나한테 마음이 없거나.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일 수가 없지. 아무리 예뻐도 매너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 내가 그나마
주선자 얼굴 봐서 예의를 차리는 거지.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너와 나의 연결고리 때문이라고. 돈이 아까운 게 아니야. 까놓고 커피값 정말 비싸다고 해도 2만원 안팎이지. 성의가 없잖아.
그리고 그런 거 있잖아. 왜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거야. ‘어디 갈까?’ 물어보면 다 괜찮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재. 그런데 막상 어디 가자고 말하면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이유는 항상 있어. 그럼 차라리 자기가 정하던가. 아니면 신돈을 만나던가. 관심법이라도 써야 되는 건가? 최소한 자기가 싫어하는 거라도 말해주던가. 아니면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까 군소리를 하질 말던가. 뭔가 항상
불명확해. 사귀다가도 뭔가 어긋나서 화를 내서 이것 때문이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래. 아니, 무슨 인터스텔라야. 웜홀이라도
넘어가야 이유가 있을 거 같다니까. 섭섭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말하던가. 왜 꼭 쌓아뒀다가 옛날 일까지 다 끌어내서 화를 내고 그래. 그리고
가끔씩 그런 애들 있지. 전 여자친구는 어땠어? 대체 왜
물어봐? 말해주면 빡칠 거면서. 쿨한 척해봤자 결국 다른
식으로 화낸다고. 그리고 자기는 솔직하게 다 말한대. 전
남자친구가 어쩌고 저쩌고. 내가 그 얘기를 왜 듣니. 나한테
소개팅해줄려고? 아니면 셋이서?
아, 그리고 진짜 제일 심한 비매너.
왜 사진이랑 얼굴이 그렇게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야지.
얼굴이 두 개야? 교체형인가? 그럼 그 얼굴을
달고 나왔어야지 왜 잘못 달고 나왔어. 그래서 가끔씩 자기 얼굴 제대로 달고 나온 여자가 나오면 정말
매너모드지. 커피값? 에이,
됐어. 내가 내면 되지. 이미 완벽한 매너모드인데.
WHAT
WOMEN WANT
처음 만났는데 ‘어디로 갈까요?’라고
물어보는 것까진 괜찮아. 그러면 좀 무난한 곳을 가던가. 전에
처음 만난 남자애가 나를 데리고 불족발을 먹으러 가는데, 정말 열불이 났지. 내가 불알친구야? 사실 처음 만났을 때 어디 가자고 꼬치꼬치 말하면
좀 그렇잖아. 너무 까다로운 사람 같고. 그럼 좀 알아서
무난한 곳으로 가주면 안돼? 아무데나 가자고 했더니 불족발이 뭐니? 불족발이. 이 남자랑 만나면 안 봐도 훤하다. 속 터지겠지. 그리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신경 안 썼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지는 애들 있지.
그러니까 옷을 잘 입고, 못 입고, 그런 센스를
말하는 게 아냐. 자기 방에서 뒹굴다가 그렇게 약속장소까지 굴러서 나온 것 같은 애들이 있다니까. 여기가 카페냐, 네 방이냐 싶을 정도로. 그럼 다시 굴려서 집에 보내고 싶지. 나름 소개팅이라고 신경 쓰고
나왔는데 왜 이런 꼴을 보고 있어야 되나 싶고. 성의가 없어. 성의가. 아, 물론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이해해. 하지만 내가 계속 이해할 이유는 없는 거잖아. 한번 이해해줬으면 됐지.
어쨌든 밥값은 관례적으로 남자가 내잖아. 그러니까 커피든, 맥주든, 이 다음에 가는 곳에선 내가 계산해야겠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가끔씩 ‘다음 차례는 그쪽이 사세요’ 이런 애들 있어. 어린 시절에
TV 보다가 ‘이것만 보고 공부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너 공부 안 하니!’ 이러면 공부할
마음이 싹 사라지잖아. 정말 다음 차례가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사줄 마음이 사라지지. 친해진 것도 아니고 처음 만나서 그러면 깨지. ‘나한테 밥 사준
게 그렇게 아까웠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밥 먹듯이 전 여자친구 이야기하는 애들 있잖아. ‘전 여자친구는
안 그랬는데’ 이런 애들. 진짜 생각보다 많아. 무슨 알람처럼 뱉는다니까. 그럼 걔한테 다시 가서 잘 하던가. 그나마 그건 양반이다. 난데없이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친구 욕하는
애들 있거든. ‘전 여자친구는 정말 멍청했어’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 그러면 내가 ‘아, 그 여자는 정말
멍청했구나’ 할까? 얘는 나중에 나도 이렇게 말하겠구나 생각하지. 그리고 왜 꼭 내 얘긴 안 듣고 지 얘기만 해? 모든 이야기가 다
자기중심적이야. 이게 무슨 그래비티야? 내 앞에서 자기 인생을
구구절절 말하는데 입으로 ‘자소서’ 써? 내가 면접관이야? 재미라도 있던가.
그나마 위트 있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어서 듣고 있다가 나도 관심 있는 소재를 말하길래 한 마디 했어. 그럼 좀 들어야지. ‘아, 그래요’하고 다시 또 지 얘기만 해. 전생에 묵언수행하다 죽었나 봐. 그냥 내 귀만 놔둬도 될걸? 자웅동체도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좋으면 여자는 왜 만나니? 아, 여자 귀를 좋아하나?
사실 남자가 여자보단 돈에 민감하겠지. 책임감도 들고. 하지만 ‘오늘 영화 보러 갈까?’하면
영화 얘기를 해야지. ‘어? 그래? 그럼 밥도 먹고…’ 얘 뭐니? 누가
너 혼자 내래?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얘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값, 밥값, 커피값,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런 게 보인다니까. 그리고 영화를 선택할 때도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하면 그러려니 해. 그런데 네가 보고 싶은 영화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훨씬 대단하고
어쩌고 저쩌고. 자기가 훨씬 우월한 선택을 한다고 설득하는 애들 있잖아. 좀 재수없지. 아, 물론
재수없는 것 중에 최고는 말 놓는 애들 있잖아. ‘어? 내가
오빠네?’ 이러면서. 이게 쿨한 줄 아나 봐? 거기다가 가끔씩 능글능글하게 어영부영 손 잡거나 어깨에 손 올리는 애들도 있어. 팔이 불편하면 깁스를 하던가.
그리고 포르노 보고 성교육 잘못한 남자애들 많잖아. 섹스도 사실 둘이서 함께 교감하려고 하는 건데, 나한테 무슨 서비스
받으러 왔어? 욕구는 넘치는데 무드는 없고. ‘입으로 해줘’ 이런 말하는 애들 정말 입으로 해주고 싶지. 욕을. 얘는 정말 어떻게든 나랑 한번 해볼라고 만난 건가 싶을 정도로, 옷도
벗고, 체면도 다 벗는 애들 있잖아. 완전 깨지. 침대에서 내려오면 나랑 헤어질 거야? 남자는 그게 결승선인 줄 아는데
여자는 거기가 출발점이라고. 몰라도 그렇게 모를까.
살짝 날이 선듯한 뾰족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조목조목 말했다. 조금 진지했지만
무겁진 않았다. 유쾌한 여운이 남았다.
피곤해 보인다.
스튜디오로 오는 길에 졸았더니(웃음).
스케줄이 많나 보다.
작품이나 방송 촬영이 있는 건 아닌데 항상 스케줄이 있더라.
이전에 했던 인터뷰를 보면 유독 ‘생각보다 진지하다’는 말이 많다.
인터뷰를 하고 나면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많다. 아무래도 인터뷰에선
고민해서 말하다 보니 더 그렇게 보이는 거 같고.
원래 진지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그런 선입견을 경험하는 기분이 궁금하다.
특별히 좋고, 싫은 건 없다. 그냥
‘내가 방송에서 그렇게 보이나?’라는 생각 정도? 아무래도 방송에서도 이렇게 조용하게 말할 순 없으니까(웃음). 나름 밝게 보이려 노력하는 부분은 있다.
<스타일
로그>에선 의외로 무뚝뚝해 보일 때가 있더라.
그때 민호는 원래 알고 있었지만 친하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나나는
처음 만났기 때문에 어색한 부분이 있었던 거 같다. 그래도 점점 친해지면서 후반부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던
거 같다.
낯을 가리는 편인가.
낯가림이 심해서 친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여자일 경우엔 더
심하다.
<위험한
상견례 2>에서 도둑 가문의 아들로 나온다. 혹시 남의
것을 갖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
아주 어렸을 땐 있었다. 장난감이나 축구화 같은 거. 물론 남의 것을 빼앗고 싶다기 보단 그냥 순수하게 갖고 싶다는 생각.
특별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순간이동?
이유는?
영화 <점퍼>의
주인공이 순간이동으로 스핑크스 위에서 햄버거를 먹기도 하는데 부럽더라.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몇 초
만에 갈 수 있다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살면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은데 여행만한 경험도 없는
거 같다. 그래서 순간이동이란 능력을 갖고 싶다.
여행 좋아하나?
늘 가고 싶지
가장 인상적인 해외여행지는?
사실 해외를 나간 경험은 별로 없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중학교 시절부터 모델 일을 시작했으니까. 친구들과 여행 계획을
세워본 적도 있는데 대부분 나 때문에 취소하게 되더라. 갑자기 촬영이 잡힐 때가 있어서. 게다가 어릴 땐 금전적 여유도 없었다(웃음).
그래도 친구들이 잘 이해해주는 편이었나
보다.
아무래도 친구들이니까.
최근에 한 브랜드 행사에서 풋살경기를 선보였다. 친구들과 축구를 자주 한다던데.
예전엔 주기적으로 자주 뛰었다. 최근엔 친구들이 팀까지 만들어서 일요일
아침마다 공을 차는데 나는 일요일 아침엔 <인기가요> 생방송
준비를 해야 해서 못한지 한참 됐다.
생방송 진행은 긴장되지 않나?
예전에 <와이드 연예 뉴스>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을 꽤 오래 진행했지만 오랜만에 해보니 긴장되더라. 그만큼 저절로 집중하게 되고 최선을
다하게 되니까 끝나도 후회는 안 생긴다. 생방송만의 매력이 있는 거 같다.
아직 배우로서 대표작이라 할만한 작품이
없다. 작품에 대한 욕심이 그만큼 클 때다.
당연히 욕심이 생긴다. 배우로서 대표작을 갖는다는 건 많은 분들께
사랑 받은 작품을 만나는 것이니까.
솔직히
<위험한 상견례 2>가 대표작이 될만한 작품일지 모르겠다. 다만 배우로서 디딤판이 될만한 작품이 될지는 모르겠다.
감독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 영화가 너에게 대박은 아닐 거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네가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줄게”라고.
코미디물은 처음 아닌가.
시트콤 정도는 했는데 코미디물은 처음이지. 그래서 걱정도 많았지만
기대도 있었다. 예전부터 코미디물은 한번 해보고 싶었으니까.
도둑 집안의 가풍에 반항하는 아들을 연기했는데
본인은 실제로 어떤 아들이었을까.
나름 착한 아들이었다. 특별히 반항을 하거나 크게 말썽을 부린 기억은
없으니까. 부모님께서도 크게 혼내신 적이 없었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부모님께서 워낙 혼내시는 편이 아니라서 작은 말썽을 부렸을 땐 내가 되레 더 반성했던 거 같다. 그런
면에선 다른 친구들보단 성숙한 편이었던 거 같다(웃음).
그렇게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면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하는 건 고역 아니었을까?
처음엔 고사하려고 했다. 내 성격은 이 프로그램에 어울리지 않을 거
같고, 프로그램도 재미없어질 거 같다고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된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출연하게 됐다.
할만했나?
힘들었다(웃음). 그래도
억지로 밝은 척, 친한 척하지 않고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점차적으로 친밀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모두에게 다 좋아 보일 순 없는 거니까.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나? 해볼만한 일이었던 거 같나?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는 거 같다. 그래도 얻은 게 더 크다.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하나.
오해를 산 부분이 생긴 거 같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걸 보고 어떤 분들은 상대 파트너인 유라에 비해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 같더라. 말도
별로 없고, 가만히 있고. 사실 할말이 많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도 말하기 보단 들어주는 편이다. 게다가 유라는
밝고 발랄한 편이고, 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나는 거기 최대한 맞춰주려는 입장이었다. 그걸 오해해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긴 거 같지만 나라는 사람을 많은 분들에게 알려준 건 확실히 얻은 부분이다.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나?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가볍게 생각하면 결혼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 같다. 약간의 책임감은 생기겠지만 재미있을 것도 같고. 지금 내 나이에
누군가와 결혼한다면 연애하듯이 결혼생활을 할 거 같다. 남편, 아내, 이런 딱딱한 느낌이 아니라 친구처럼.
사실 결혼보단 연애가 더 현실적인 때다.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편일까?
적극적으로 대시한다기 보단 알 정도로는 표현하는 거 같다. 나는 관심이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안하는 타입이라 내가 표현하는 것 자체가 정말 엄청난 표현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거 같고(웃음).
<위험한
상견례 2>는 양가의 부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당사자들이 밀어붙이는 이야기다. 본인도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밀어붙일 수 있을 거 같나.
그럴 거 같다. 아무래도 부모님을 생각해보니 절대 그럴 분들이 아니란
걸 잘 알아서인 거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부모님을 설득시킬 거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게 뻔하니까.
원하는 걸 관철시키고자 노력하는 편일까?
어릴 때부터 남들이 다 쓸데 없는 짓이라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편이었다. 고집이 셌지. 물론 너무 터무니 없는 걸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건 또 아니니까.
모델 활동을 하다 자연스럽게 배우로 넘어왔는데
원래 모델이 되고 싶었나?
어릴 땐 수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중학교 때 외모와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모델이란 직업이 멋있어 보였다. 그땐 키가 작았는데 중3때 키가 확 커져서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 하고 싶은 건 빨리 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회사를 찾아갔다.
무작정 찾아간 건가? 나름 자신감이 있었나 보다.
사실 찾아가기 전에 많이 망설였다. 모델에 관한 정보가 담긴 책자를
많이 봤는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그걸 보시더니 모델을 하고 싶으면 빨리 하라고 하셨다. 뭘 그리 오래
고민하냐고. 그래서 ‘알겠어요’라고 바로 찾아갔다. 정말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가능했지. 그래도 정말 하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찾아간 걸 보니까.
하고 싶다고 다 받아주는 건 아닐 텐데, 나름 끼가 있었나 보다.
잘 모르겠지만 수업 한번 받아보고 이야기하자더니 두 달 뒤에 수업이 끝나니까 정말 해보자고 하더라. 그때 자연스럽게 배우가 되고 싶단 이야기도 했고, 같이 준비하게
됐다.
배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 중에서 대학로 연극을 연출하시던 분이 있었는데 덕분에 연극을 보게 됐다. 처음 연극을 보는데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고 빠져들었다. 연기하는
기분은 어떨까 정말 많이 궁금하더라. 그래서 애초에 모델과 배우 둘 다 할 수 있는 회사를 찾아갔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했는데 만인의 주목을
받는 건 괜찮았나?
처음 촬영하고, 처음 컬렉션 런웨이에 서고, 그때마다 너무 긴장했다. 그래서 너무 어색했던 거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흥분되고 즐겁더라. 기분 좋은 긴장감이랄까? 그래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무대에서 수많은 시선을 즐길 수 있는 편이었을지도. 모델로서 런웨이를 하고 주목을 받는 것도 있지마 배우 역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편이다. 연기할 때 그런 게 의식되진 않던가?
많이 의식됐죠. 지나가는 사람 한 명 한 명 다 신경 쓰일 정도였는데
그런 걸 하나하나 이겨내는 과정이 있었고, 지금은 많이 편해졌죠.
연기 데뷔작은 <쌍화점>인가.
<쌍화점>에
처음 캐스팅됐는데 김종관 감독님이 연출한 단편영화 <헤이, 톰>을 먼저 찍었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섰던 기억은?
긴장돼서 오만 가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움직이지? 어떤 표정을 짓지? 화면엔 어떻게 나올까? 지금 표정은 괜찮나? 얼어 보이진 않을까? 계속 이런 생각만 났다.
화면 너머의 자신을 보는 건 익숙한가?
아직도 좀 낯설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이 보면 민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래도 잘 나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지만 기대도
되고.
모델과 배우 중에 더 하고 싶었던 일은?
둘 다 하고 싶었다. 다만 어린 나이에 모델 활동을 먼저 하고 20대 중반부터 배우 활동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연기를 빨리 시작하게 됐다.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모델로서 괜찮은 경력을 쌓을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쳐서 조금 아쉽더라.
자신의 생각보다 빨랐던 만큼 예기치 못한
부담감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는데.
당연히 부담감이 생겼다. 그나마 처음엔 큰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긴장을 덜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던 거 같다. 아마 좀
더 중요하고 큰 역할이었다면 힘들었을 거다.
드라마 스페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방송 관계자들도 상당히 주목했던 작품으로
알고 있다. 본인을 비롯해서 김우빈, 이수혁, 성준, 김영광과 같은 모델 출신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서 주목을 받은
작품이기도 했고.
맞다. 그 작품을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꽤 많다. 지금도 인터뷰할 때마다 한번씩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해보면 감독님
입장에선 모험이었을 거다. 경험이 거의 없는 모델 친구들을 데리고 작품을 끌어갔다니 정말 대단한 결단이었지. 촬영 내내 재미있었다. 그 멤버가 다시 모여서 촬영할 기회를 얻기도
힘들겠지.
그 당시만 해도 그 작품이 이렇게 회자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을 텐데.
소재가 특이하니까 마니아층은 생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드라마 방영이 끝나고 더 많은 인기를 끈 거 같다. 방송사에서 DVD를
출시했는데 그때까지 발매했던 DVD 중에서 가장 많은 판매가 이뤄졌다고 하더라.
때론 기대 밖의 결과로 돌아오는 경험이
있다. <위험한 상견례 2>도 그런 작품이 될
수도 있고.
일단 코미디라는 장르에 처음으로 도전했던 작품이자 첫 상업영화 주연작이니까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작품이 끝나면 ‘아, 진짜
추웠다’란 식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는데 아마 <위험한
상견례 2>는 ‘정말 많이 웃었다’란 식으로 기억날 거 같다.
누구 덕분에 많이 웃었을까?
신정근 선배님이나 전수경 선배님, 김응수 선배님께서 워낙 잘 하셔서
같이 촬영하면 항상 많이 웃었다. 그 탓에 NG도 많이 나서
죄송했지만 웃긴 걸 어떡해(웃음).
오랫동안 배우로 살아온 선배들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보진 않았을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저렇게 오랫동안 연기를 해온 것도 대단한데
항상 내 생각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시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됐다. 그리고 세 분 다 항상 잘
대해주셨다. 나도 나중에 어린 후배가 생기면 따뜻하게 잘 대해줘야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감 있게 연기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신 거 같다.
혹시 해보고 싶은 작품이나 역할은 없나?
최근엔 코미디를 해봐서인지 몰라도 로맨틱 코미디를
해보고 싶더라. 좀 더 나이가 들면 남성적인 장르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해보지 못한 캐릭터가 많아서 한번씩은 다 해보고 싶다. 지금까진
나름 잘해온 거 같은데 올해엔 어떤 작품이 됐든 정말 뿌듯하게 기억할 수 있는 작품을 꼭 해봤으면 좋겠다.
힙합을 몰라도 아는 그 이름 타이거 JK와 윤미래 그리고 실력파 래퍼 비지(Bizzy)가 모였다. 이름하여 MFBTY. 당장 입에 붙지 않아도 괜찮다. 조만간 누구보다도 열광하게 될 테니까.
MFBTY는 ‘내 팬들이
너희 팬들보다 낫다’는 의미인 ‘My Fans (are) Better
Than Yours’의 약자, 그러니까 ‘스웩(Swag)’ 그 자체다. 이 생소한 이름에 담긴 자신감이 허세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힙합은 몰라도 타이거 JK와 윤미래는
알 거다. 그리고 드렁큰 타이거의 앨범에 꾸준히 참여해온 실력파 래퍼 비지(BIZZY)까지, 이 세 사람이 뭉친 프로젝트 유닛이 MFBTY다. 이미 2013년
초에 MFBTY라는 이름으로 싱글앨범을 발매했고 같은 해 말에 세 사람이 의기투합한 정규 앨범 <살자(The Cure)>가 발매된 바 있다. 리허설은 끝났다. 이제 진짜 무대에 오를 시간이다. MFBTY의 <Wondaland(원다랜드)>는 타이거 JK이자 윤미래이자 비지이면서도, 타이거 JK도 윤미래도 비지도 아니다. “R&B나 소울, 힙합에 빠져 있던 세 사람이 함께 작업하니까
대단한 힙합 프로젝트로 아는 사람들이 많더라. 음반 판매처의 예약 판매에 게시된 걸 보니 장르가 힙합으로
돼있어서 댄스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타이거 JK의 말이다. 그러니까 힙합계의 <어벤져스>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타이거 JK와 윤미래가 모인, 게다가 실력파
래퍼인 비지까지 가세한 이 앨범이 힙합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타이거 JK가 다시 말했다. “각자 하기 힘들었던 음악을 이렇게 모여서 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록부터 팝, 댄스, 어쿠스틱까지 다 있다. 대중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그 누구의 팬보다도 나은 그들의 팬들이라면 당연히 열광할 준비가 돼 있겠지만.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MFBTY의 앨범에 대한 힌트는 그 앨범의
지주인 세 사람 외에도 피처링 참여로 이름을 올린 수많은 뮤지션들의 이름에 있다. 전인권, 방탄소년단의 랩몬스터, 비스트의 용준형, 도끼(Dok2), 윈디시티의 김반장, 유희열 그리고 이현준과 이윤정의 EE 등 나이와 장르를 초월한 다채로운
음악적 대가들이 MFBTY의 앨범에 기꺼이 참여했다. 언어
그대로 기꺼이. “이메일로 조심스럽게 참여를 요청했는데 예상치 못한 게스트들이 우리가 사는 의정부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끼린 ‘어렵겠지?’ 하면서도 던져본 셈이었는데 다들 직접 찾아온 거다. 정말 기대하지
못했던 터라 너무 고마웠다.” 유희열은 한밤 중에 의정부까지 달려와 밤을 지새우며 피아노 곡 작업을
선사했다. 타이거 JK 앞에 5년 만에 나타난 김반장이 자신의 밴드와 함께 연주해준 곡에 전인권의 목소리가 입혀졌다. 랩몬스터는 피처링뿐만 아니라 MFBTY의 곡을 모니터링해줬고, 뮤직비디오 현장까지 찾아와 카메오 출연을 자청했다. 게다가 누군가
새하얀 벤츠를 그들의 작업실 앞에 세우더니 도끼와 더 콰이엇이 내렸다고. “그 외에도 참여 의사를 밝혀주신
분들이 많았지만 시간상 불가능해져서 어렵게 고사할 수밖에 없는 분들도 있었다. 정말 신비한 일이었다.”
타이거 JK와 윤미래는 국내 음악계에서 대체불가능한 래퍼이자 뮤지션이다. 그들이 함께 제대로 놀아보겠다는데 최소한 음악 좀 가지고 논다는 이라면 그 판에 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타이거 JK, 윤미래 그리고 비지 이
세 사람의 음악적 열정과 호기심이 그 판을 깔았다는 사실이 더욱 주요했다. “우리도 각자 음악을 오래
하다 보니까 자기들만의 틀이 생겼다. 그런 틀에서 벗어난 음악을 해보려고 했지만 오래 음악을 하다 보면
계산하지 않아도 관성이란 게 생긴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그런데 이렇게 셋이 뭉치니까 완전히 새로운 걸 해볼 수 있겠더라. 그래서
셋이 뭉치니 새로운 곡이 늘어났고, 각자의 솔로로 할 수 없는 음악들을 MFBTY로 해보기로 했다.” 물론 세 사람의 여정이 마냥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마음은 서로 잘 맞지만 각자 캐릭터가 다르고 서로의 색깔이 뚜렷하다 보니 서로 융화되는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본래 싱글 앨범 발매 계획은 정규 앨범으로 확대됐다. 서로 좋아하는 취향을 하나의 틀로 규격화해서 반죽하기 보단 나열해서 수집하기로 했다. 그 결과 16곡이 전혀 다른
MFBTY의 <Wondaland>가 탄생했다.
앨범의 타이틀인 <Wondaland>는 그들이 추구하는
‘원더랜드(Wonderland)’ 그러니까 그들이 꿈꾸는
멋진 이상향의 ‘얼터에고’라 해도 좋을 신세계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타이거 JK와 윤미래,
비지가 자신들을 둘러싼 음악적 자의식을 버리고 나아간 새로운 음악적 영토인 셈이다. 하나보단
둘, 둘보단 셋이 어울리는 음악을 통해서 자신들이 꿈꾸던 순수한 음악적 사랑이 깃든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음악적 활동에 대한 열망에서 잉태된 산물이다.
무엇보다도 MFBTY의 음악에서 키가 되는 건 윤미래다.
“(윤)미래의 훅이나 코러스로부터 탄생한 곡이 많다. 거기에
영감을 받아서 줄거리를 쓰고, 비지와 같이 살을 붙이는데 코러스 라인이나 멜로디에서 영감을 얻게 되니까.” 한편 비지는 타이거 JK와 윤미래에 비해 알려지진 않았지만 드렁큰
타이거의 5집 앨범부터 참여해온 실력파 래퍼다. 즉 MFBTY의 히든 카드인 셈. “비지가 아니라 해도 친한 동생은 많다. 단지 친하다는 이유로 음악을 함께 한다면 그건 오해”라는 타이거 JK의 말은 그의 존재감에 기대감을 입힌다. 그리고 타이거 JK, 설명이 필요한가?
지난 2013년 세 사람은 이미 한 차례 정규앨범을 발매한 적 있다. 세 사람 각자의 이름이 들어간 그 앨범의 타이틀은 <살자>였다. 1년 전 세상을 등진 타이거 JK의 아버지 고 서병후의 투병을 정신적으로 응원하고자 만든 앨범이었다. 1년여 전 인터뷰에서 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선 기사상에서 숨겨주길 바랬던 타이거 JK는 이제 허심탄회해하게 고백했다. “사실 아버지께선 알고 계셨다. 오히려 우리에게 숨기고 계셨지. 그래서 나랑 미래, 비지, 매니저들까지 모두를 위한 조언이 담긴 노트를 남기고 가셨다. 우리에게 사랑에 관한 곡을 많이 쓰라고 부탁하고 가셨다. 연인 간의 사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큰 사랑 말이다.” 그래서 지난 해 12월에 타이거 JK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그가 남긴 1억 원의 재산을 아버지의 명의로 세월호 사고 피해자들에게 기부했다. “친구가 그러는데 남자들은 아버지를 보내고 나서 남자가 된다더라.” 타이거 JK 또한 아버지다. 자신의 아들인 서조단은 MFBTY의 새 앨범 중 ‘방귀 댄스’라는 음악에 작곡과 노래로 참여했다. 그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방적으로 응원하기 보단 고통을 통해서 재능을 갈고 닦길 고대한다. 호랑이가 새끼를 키우듯 쉽게 먹이를 주지 않는다.
타이거 JK는 <엘르>와 함께 한
2013년 10월호 화보 덕분에 미국에서 영화 캐스팅 제안이 왔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화보가 잘 나온 덕분에 포트폴리오처럼 전해진 거 같더라. 지금은
내가 뛰어들 자리가 아닌 거 같아 일단 고사했다.” 그리고 이미 3년
전 타이거 JK가 출연했던 영화 <세계일주>가 드디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이들의
모험담을 그린 이 영화에서 타이거 JK는 길거리의 방랑 악사로 등장하며 아이들을 위기로부터 구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아동학대방지 홍보대사를 했던 시절이었고, 그런
좋은 취지와 부합하는 영화라고 하니 참여하고 싶었다. 그런데 기타만 들고 앉아있으면 되는 카메오라더니
점점 분량이 늘어났다. 현장 분위기가 재미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보였는지 감독님께서 계속 부르시더라. 좋은 경험이었다. 언젠가 영화에 또 도전해보고 싶다.” 언젠가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MFBTY의 활동이 보다 중요하다. “진짜 이번엔 활발하게 활동하고
싶다. 방송도 많이 하고, 뮤직비디오도 다섯 개 이상 찍을
거다. 그래서 우리가 재미있게 음악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MFBTY라는 생소한 이름 아래 모인 타이거 JK, 윤미래 그리고 비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그 무엇보다도 뜨거운 음악적 열망으로 자신들이 서있어야 할 무대, 진정한 원더랜드를 염원한다.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그 어떤 팬들보다도 나은 그들의 팬들 역시 손을 머리 위로. 기다림은
끝났다.
웹툰 계의 ‘암모나이트’ 혹은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강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작가다. 한결
같은 이야기를, 한결 같은 믿음으로 쓰고 그린다. 재미있는
작품에 대한 순정으로.
<무빙> 연재 전에 SNS를 통해서 대단한 각오를 남겼다.
늘 그렇다. 각오는 항상 대단해(웃음)!
자신감일까,긴장감일까?
긴장감이지. 사실 다른 작가들은 전혀 무섭지 않은데 독자들은 늘 무서워. 혹자는 창작이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난 아니야. 독자랑 싸우는
거지. 독자를 재미있게 만들어서 굴복시켜야 돼. 독자가 재미없게
느끼면 지는 거야. 그러니 늘 긴장되지.
팩션물이었던 <26년>을 제외한 전작들은 ‘순정만화’와 ‘미스터리심리썰렁물’로 구분했다. 그런데 <무빙>은 ‘액션만화’라고
했더라.
후회하고 있다(웃음). 전반부는
순정물처럼 보이지만 후반은 아니거든. 그런데 미스터리물도 아니고, 대신
후반부에 액션이 조금 나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이 별거 안 해. 아니, 못해(웃음). 그러다가
막판에 빵 터트리고 끝날 거야. 전체 분량의 3/4정도까지
진행돼도 액션이 안 나와. 아마 욕 좀 먹겠지(웃음).
기다린 만큼 제대로 된 액션이 안 나오면
악플 좀 달리겠는데.
‘답답이’ 같았던 애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했을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지 않을까? 그런 쾌감을 제대로 느끼려면 정말 답답하고
짜증이 나야겠지. 우린 지금 그 과정을 지나가고 있는 거야.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뚱뚱한 봉석이를 보면서. 그래도 액션이라고 붙인 건 조금 후회된다(웃음).
그런데 왜 제목은 <무빙>일까?
만약 제목이 <액션>이었다면
비행 능력이 대단하고 큰 일을 해내는 히어로가 필요했겠지. 하지만 나는 조금씩 움직이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 캐릭터도, 이야기도. 사실 제목을 붙일 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야(웃음). 어쨌든 하늘을 나는 히어로물을 하고 싶었는데 한국의 현실에서 그럴듯한 히어로물을 해보고 싶었지. 아이언맨 같은 히어로는 미국에선 그럴 듯해 보여도 한국에선 능력이 과해 보이잖아. 그리고 시간능력자들이 등장했던 <타이밍>과 어감도 비슷해서 좋고.
그렇다면 초능력을 지닌 히어로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사실 우리나라만큼 히어로를 이야기하기 좋은 환경도 없다. 지금도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분단국가에 초능력자가 있다고 하면 남한이든, 북한이든 얼마나 많은 관심이 생기겠어.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영화가 있는데 실제로 초능력
부대를 만들려고 했던 미국 특수부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야. 그런데 우리나라 안기부에서도 첩보전에
활용할 수 있는 초능력자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탐사전문기자인 주진우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지.
정재승 박사에게도 자문을 구했다던데.
뇌과학자니까 초능력에 대해 물어봤지. 재승이 형이 카이스트에 있을
때 이상한 사람들의 문의가 많이 왔대. 실제로 자신이 초능력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실험도 해봤는데
결론은 초능력자는 한 명도 없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왜 초능력 중에서도 하늘을 나는
능력이었을까?
하늘을 나는 게 매력적이니까.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사람도 많잖아.
최근작으로 올수록 비현실적인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상이다. ‘순정만화’인 <당신의 모든 순간>이나
<마녀>조차 좀비나 오컬트라는 장르적 세계관에 담아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뻥을 치고 싶어진다. 만화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
말이야. 현실적인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귀신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뻥 치기 좋아서다. 무슨 말을 해도 구라니까 창작할만한 여지가 많거든. 초능력도 마찬가지다. 마블의 초능력자들도 말이 안되잖아. 거미인간이라니, 완전 ‘개뻥’이지(웃음). 하지만 이야기가
그럴듯하니 재미있잖아. 나도 그런 만화를 해보고 싶었다. 허황된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하는 게 작가의 몫이라 생각하니까.
<26년> 이전엔 작품마다의 연재 간격이 2개월 수준이었는데 <26년>부터 반 년으로 벌어졌고, 이젠 1년에 한 작품 수준이다. 작년엔
아예 연재가 없었고.
이야기를 쓰는데 들어가는 공이 점점 커지는 탓이다. 사실 <26년> 이전 작품들을 연재할 때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으면
그만큼 공을 들였을 거다. 하지만 그땐 연재를 하지 않으면 손가락을 빨아야 하니까 차기 연재를 빠르게
가져가야 했다. 지금은 그때보단 여유가 생겨서 작품을 다듬을 시간이 생겼지. 그런데 1년 넘게 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밝힐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이란?
집요한 거 봐라. 훌륭한 기자일세(웃음).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
사전 작업 기간이 늘어났다는 건 작품에
대한 욕심도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었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독자들이 남기는 댓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지루해졌다는 댓글이 몇 백 개 달리면 뒤에 있는 클라이맥스를 앞으로 끌어오고 싶어진다. 실제로 그런 짓을 하다 구조가 어그러져서 작품을 말아먹는 작가들도 있다. 그러니까
연재에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나를 믿고 이야기를 밀고 갈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만화가들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니까 이야기까지 밀리면 안 된다. 이야기가 내 무기라 생각하니 그에 들이는 공이 커지는 거다. 대사
하나까지 완벽하게 준비했을 때 연재에 들어간다는 철칙을 지키고 있다.
스스로 그림을 못 그린다고 말할 수 있다니
그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진 않나 보다.
몇 년 전만 해도 콤플렉스였다. 왜 이렇게 그림을 못 그릴까. 처음 일상툰 형식의 <일쌍다반사>를 연재할 땐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막대한 분량의 장편 서사 만화를 소화하면서 손이 느리고, 마음 먹은 대로 표현하지 못하니 답답하더라. 그런데 그림과 만화는
다른 영역이란 걸 알게 됐다. 일러스트로 봤을 때 내 그림이 약한 건 사실인데 나는 만화는 잘 그린다. 내 이야기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콤플렉스가 없어졌다.
이야기가 자신의 무기라고 했는데 보다 정확하게는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품게 만드는 덕분에 캐릭터의 행위가
독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작품이 지루해지는 거다. 캐릭터 소개가 굉장히 길잖아. <무빙>도 6화까지
왔는데 아직 캐릭터 소개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진행된 사건이랄 게 거의 없잖아. 하지만 이 과정이 내 작품의 궁극적인 재미를 보장한다. 이야기의
성패는 독자들이 주인공을 얼마나 가깝게 느끼는가에 달려있다. 독자들이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를 마련해야 한다. 활자로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캐릭터라고
소개하는 것보단 우유부단해 보이는 사연과 소극적으로 보이는 사연을 하나씩 보여주는 게 맞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공감대를 열어주거든. 캐릭터를 최대한 설명하고 이해시킨 뒤엔 이야기에 힘이
붙는다. 결국 이야기가 완결됐을 때를 보고 가야 된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이야기를 준비해서 진행해야 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두 커플 이상의 중심인물이
등장해서 얽히고 설키며 이야기가 굴러간다.
<프렌즈>란
시트콤을 좋아하는데 거기 여섯 인물이 등장하잖아. 40분 남짓한 시트콤에서 두 커플씩 엮어서 세 가지
사건을 진행한다. 그러니 재미있을 수밖에. 내 작품에 다양한
커플이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전략이다. 미비한 존재들이 협력해서 거대한 선을 이루는 이야기가 좋다.
전작들과 달리 <무빙>은 봉석이와 희수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되는 인상이다.
후반부에 봉석이네 부모님과 희수네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거다. 그러니까
결국 세 커플의 이야기가 되겠지. 전후반을 책임지는 캐릭터를 나눈 건 처음이라 지루한 감도 있는 거
같다.
죽음을 주요한 감정적 매개로 활용하는 작품이
많다. 죽음에 예민한 사람이 아닐까 궁금했다.
김중혁 소설가도 비슷한 질문을 하더라. 조금 없어 보이는 대답인데, 이야기를 쓰다가 꽉 막힐 땐 의미 있는 인물 하나를 죽이면 뚫린다(웃음). 주변 인물들이 그 구멍을 메우려고 노력하면서 이야기가 살아나거든.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거 같다. 아버지께서 목사님이셔서 가끔씩 돌아가신 신도의 장례식장을
따라가는 일이 종종 생겼거든. 그땐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웃고 떠드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 들어서 알았지. 긴긴밤을 보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죽음만큼 극단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것도 없지만 사람은 결국 자기 삶으로 돌아가게 돼있다.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고립의 정서가 느껴진다. 물리적인 고립이든, 정서적인 고립이든 결국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데 그 외로움에 귀 기울여 주거나 손을 내미는 이들의 존재의 등장을 통해 짠하게 심금을 울리는 감동을 자아내는 방식이 일관되게 이어진다.
내 만화엔 유난히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나오잖아. 일찍이 가난을 경험해봤기
때문이지. 그래서 좀 외롭기도 했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까진 신나게 놀았던 친구들과 고등학교 시절부터 거리를 두게 됐다.
희한하게 애들이 고2때부터 돈을 가지고 놀더라. 친구
집에서 모이거나 농구를 하는 게 아니라 커피숍이나 피자집, 콜라텍에서.
그런데 나는 용돈도 없고, 버스 회수권만 들고 다녔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거든. 그러니까 불편해지더라.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잖아. 그러니까 점점 내가 애들을 밀어내더라. 친구끼리
어떠냐고 할 수도 있고, 그 마음도 알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그 상황의 외로움을 알 수 없다. 나를 배려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더라. 게다가 그땐 예민한 사춘기
시절이기도 했고. 그래도 학교에선 애들이랑 잘 어울렸다. 그리고
방과 후엔 혼자 도서관에 갔지.
놀 수 없으니 공부를 한 건가?
중2때부터 도서관에서 책 읽는 재미를 알았다.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다. 그리고 야한 이야기를 좋아했다(웃음). <여명의 눈동자>를
김성종 작가의 원작으로 읽어보면 엄청 야하다. 여옥이가 장난 아냐(웃음)! 그리고 추리소설 중엔 여자가 벌거벗고 죽은 채로 시작되는 게 많다. 대중적인
추리소설이나 통속소설을 좋아했는데 야한 재미로 무협소설을 보다가 김용의 <영웅문>을 읽고 감명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역사소설로 넘어가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보고 감탄했다. 그렇게 도서관 책장 하나를 다 읽었다고 뿌듯해했으니까 얼마나 공부를 안 했겠어?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그때 내가 엄청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을 거다(웃음).
그래도 작가로 살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의 복선 같은 시절이라 해도 좋겠다.
그런데 다독가라는 사람을 만나면 이런 말하기 부끄러워진다. 흔히 말하는
명작은 본 게 없으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처럼, 제목만 들어도 멋있는 책 있잖아. 이상하게 한두 권짜리 책엔 흥미가
안 생겼다. 적어도 세 권 이상은 돼야 읽었지. 아무튼 참
외로운 시절이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바르게 엇나갔던 거 같다.
항상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한다.인간의 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착하다는 믿음이 있다. 악당조차도 길가의 아이가
차도에 뛰어들면 달려가서 잡아줄 거라 생각한다. 사실 나는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은 안 본다. 결국 내가 믿는 사람들과만 교류하다 보니 내 세계에 갇힌 셈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운 좋게도 착한 사람들만 만나며 살아온 덕분일지 모르고.
그런 믿음이 휴머니즘의 감동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론 선으로 표백된 세계관을 보고 있다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잘 알겠지만 내 작품에서 악당은 둘 밖에 없었다. <26년>의 그 인간하고 <이웃사람>의 살인마. <26년>이야
원래 나쁜 놈을 반영한 거니까 그렇다 치면 <이웃사람>의
살인마가 내가 만든 유일한 악당인 셈이다. 사실 <이웃사람>의 시나리오엔 살인마의 외로움에 관한 2화 분량의 서사가 있었다. 그런데 연재 직전까지 의심이 거둘 수 없었다. 살인마에게도 사연을
부여해야 하나? 그래서 결국 걷어냈다. 정당성을 쥐어주면
안되겠더라. 그래서 알았다. 어떤 인물에 대해 이해하도록
만들면 그 사람을 결코 악당으로 여길 수 없다는 걸. 그러니 한 명씩 다 사연을 입혀주는 내 만화의
캐릭터들은 결코 악당이 될 수 없는 거지. 그래서 한때 고민하긴 했다.
내가 너무 단편적인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괜찮겠더라. 세상에 널린 게 만화인데 이런 만화가도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리고
나는 착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기적이거나 폭력적인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일단 내가 재미를 느끼기
힘들 거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겠지.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다양한 외피를 씌우는 데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겠다. 뻥을 치고 싶은 이유가 거기 있다고 할까?
나는 지금 매너리즘과 스타일의 경계에 서있다고 본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재미있으면 그건 작가의 스타일이다. 재미가 없으면 매너리즘이고. 착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돕는 이야기를 열한 편이나 했지만 앞으로도 같은 이야기를 할 거다. 그러니 ‘강풀은 이제 뻔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면 결국 내가 재미있는 작품을 해야지. 그러니 매번 긴장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독자들이 무섭다. 독자들이 재미없다는데 이걸 내 스타일이라
우길 수는 없잖아. 우기면 비참재지는 일이고. 인터뷰도 그래서
잘 안하고 연재 후기도 안 남긴다. 작품을 독자에게 내보낼 때 이미 승부는 끝난 거다. 그러니 작가가 뒤늦게 자신의 작품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일일이 짚어주는 건 변명일 뿐이지.
사실 웹툰에 후기라는 포맷을 정착시키는데
일조한 장본인인데.
<순정만화>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사실 작화 과정을 공개하거나 연재를 끝낸 소감을 남기는 것 정도는 괜찮다. 그런데 작가가 작품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면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그만큼 치열하게 연재하고, 끝나면 독자의 반응에 승복해야 한다. 본편보다 후기에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으면 이미 변명의 여지가 없이 실패한 작품이라는 거지.
가끔씩 작품에서 모든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질 때가 있다.
솔직히 나도 이젠 <순정만화>
같은 건 오글거려서 못 본다. 그런데 가끔은 그렇게 해야 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요즘은 대사나 내레이션을 길게 썼다가 너무 설명하는 것 같아서 빼버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나이 들었다는
걸 느낀다. 그렇게 해야 어린 애들은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많거든. 그래서
‘좀 설명하면 어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도 지금은 확실히 초기작들에 비해 내레이션은 정말 많이 줄어든 거다.
심리를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인과를 펼쳐
보이는 내레이션은 다르다. 전자는 독자를 위한 가이드 라인이 될 수 있는데 후자는 독자의 상상을 제한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가끔 상상을 제한해버린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상당히 많이 개입해버리는 편이긴 하지. 아무래도 그건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일지도 모른다. 점점 작품보다 상품을 만들고 싶어진다. 말장난
같지만 걸작보단 명작을 만들고 싶다. 생각을 곱씹으면서 의미를 찾아내는 게 작품도 좋지만 많은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도 약간 헷갈린다.
내가 좀 더 덜어낼 수 있는 부분인 걸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더 들어갈 때가 있으니까. <무빙>에서도 달리기 장면은 사실 한두 컷만 있어도 된다. 그런데 그걸
열 컷 넘게 그렸다. 굳이 그렇게 개고생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그 상황을 다 알아먹게 만들고 싶은
거다. 얘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걸. 결국 그 고생이
내 고생으로 연결되지만(웃음).
국문학과 출신인데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을까?
없다. 소설가가 되기엔 문체가 떨어지고, 화가가 되기엔 그림체가 떨어지니까. 그런데 만화가 나를 구원했다. 두 능력으로부터 조금씩 떨어진 거리에 있었는데 거기에 만화가 있는 거다. 그리고
만화라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나한테 맞는 거 같다.
0.5와 0.5였는데 둘을 더해서 1이 된 셈이랄까.
0.5을 0.7로 올려주면
안되나? 1이 아니라 1.4가 됐다고 하자(웃음).
작품 속 공간의 모티프가 되는 실제 공간을
치열하게 찾고 취재하는 편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실제 공간에 가봐야 이야기가 잘 풀리기 때문이다. 내가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라 가만히 앉아서도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 그래서 실제 공간을 많이 찾는다. 그러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생긴다. <무빙>의 배경이 되는 선사 고등학교엔 지금까지 스무
번 이상 갔다. 6화에 등장하는 달리기 장면 때문에 운동장에서 실제로 뛰어보기도 했다. 집착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 입장에선 가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공간에서 멍청하게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거짓말처럼 이야기가 풀릴 때가 많다.
인지도가 생겨서 취재 요청은 수월해지진
않았나?
아무튼 인지도라는 게 참 좋더라. 초창기만 해도 말도 못하게 퇴짜를
맞았는데 이젠 많이 수월해졌다. 내 만화를 보는 독자 연령층이 높다더라. 30대가 많대. 웹툰이 시작된
2000년대 초반부터 웹툰을 봤던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나이가 든 거다. 취재가 수월해진
건 인지도 덕분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 만화의 독자들도 무언가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됐기 때문인 거 같다.
아직 연재 초기인데 6화 마감 때 29시간 동안 철야를 했다고 들었다. 연재를 하다가 가끔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
맨날, 회당 30번씩(웃음). 너무 힘들 땐 ‘다음’이 폭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웃음). 살짝 사고가 나서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이유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2~3주 안에 회복될 정도로 팔만 살짝(웃음).
그런 과정을 생각하면 연재 전부터 무서울
것 같다.
내가 어떤 생활을 해야 되는지 안다는 거지. 매일 같이 18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서 살아야 된다는 거.
그만큼 연재를 완료했을 때의 쾌감도 상당하겠다.
<26년> 끝냈을
땐 진짜 울었다. 마지막으로 원고 송고를 위해 엔터키를 누르니까 눈물이 펑펑 나더라. 그땐 너무 힘들었거든.
최근 드라마 제안을 받았다던데.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깠어.
어떤 작품에 대한 제안이었나.
다 들어왔다. <미생>이
잘 돼서 그런 것 같다. 착각하는 거지. 그건 <미생>이니까 잘된 거거든. 가끔씩 콘텐츠 업자들의 얄팍함이 얄미울 때가 있다. 여러 번 영화화
과정을 지켜보니까 촉이 생겼거든. 이 사람들이 정말 작품을 만들려고 제안한 건지, 그저 판권을 확보하려고 이러는 건지, 다 보인다. 투자를 받으려고 판권만 확보하려는 회사도 많거든. 그래서 90% 이상 신뢰가 생기질 않으면 아예 계약하지 않는 게 내 신조다. 그래서
안 했지.
<조명가게> 시나리오는 탈고된 거 같던데.
그렇다는데 아직 못 봤다. 변영주 감독 말로는 원작에서 많이 바뀌었대. 맘대로 하라고 했지.
작품이 영화화됐을 때 감독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대신 받는 경우도 적지 않은 거 같더라.
진짜! 대체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웃음). 항상 원작자로서의 소감을 물어보는데 아무래도 대답하기가 좀
그래. 말을 잘못하면 감독이 상처받을 거 아냐. 사실 모든
만족감을 충족해주는 작품은 드물었지만 원작자로선 항상 선물 받는 기분이다. 그리고 영화 현장에 가면
감동적이다. 나는 어시스턴트 서너 명과 작업하지만 영화 현장엔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잖아. 그런 광경이 멋있어. 게다가 원작자는 제작과정 처음부터 알게 되니까
그 과정의 고생을 아는 입장에선 냉정한 평가가 불가능하지. 그래서 항상 피해서 대답한다. 주관적으로 좋았습니다(웃음).
요즘 윤태호 작가는 단행본의 레이아웃에
맞춰 컷을 구성한 뒤 웹툰 형태로 떼어서 나열하는 방식으로 그린다더라. 그래서 웹툰으로도, 단행본으로도 가독성이 좋다. 그런데 강풀 작가의 작품은 웹에서 볼
때보다 단행본의 가독성은 떨어지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태호 형의 작업 방식이 효율적이지. 컷으로 나눠서 재배치하는
거니까. 나는 출판 만화를 배운 게 아니라서 그런 기술이 없다. 그래서
책으로 볼 땐 가독성이 떨어지지. 그런데 나는 모니터나 액정으로 처음 보는 순간이 가장 중요하게 느껴진다. 웹툰에서 자생한 탓인지 몰라도. 그래서 무조건 웹상에서 잘 보이도록
배경을 꽉 채운다. 내 능력 안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그리는 거다. 성의
없는 그림을 보면 견딜 수가 없다. 못 그린 그림과 성의 없는 그림은 다르거든. 10년 넘게 작가 생활을 하니 보니 그런 것도 보인다.
포털사이트 중심이었던 웹툰의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있다.
웹툰은 지금이 최고 절정기이고 여기서 더 커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웹툰을 보는 독자의 수는 한정돼 있는데 시장이 너무 커진 감이 있다. 거품이 많이 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처럼 여겨지지만 언젠가 이 거품이 빠질 거다. 그때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길을 잃을까 걱정된다. 예전에 플래시 애니메이션 시장이 팽창했다가 훅 꺼진 것처럼.
웹툰을 다른 컨텐츠로 만들어서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도 이를 부채질하는 거 같다. 판권 계약만하고 영화화가 안 되는 웹툰도 많고
후배들이 영화 계약만 하면 다 영화가 되는 줄 아는데 내가 맨날 얘기한다. 웃기고
있네(웃음). 내가 여러 번 경험했잖아. 이름 있는 작가나 포털에서 상위권 작품이면 무조건 계약해서 판권을 확보하려 들지. 그러니까 신중하게 계약해야 된다.
강동구청에서 운영하는 길고양이 급식소 사업을
주도했던데, 과정이 궁금하다.
강동구청에 강풀 만화거리를 만들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처음엔 거절했다. 민망하잖아(웃음). 그런데
문득 길고양이 급식소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각난 거야. 그래서 강풀 만화거리 만드는 거 수락할 테니 구청장님과
한 시간 독대권을 달라고 했지. 그 전에 강동구 길고양이를 돌보는 캣맘들을 만나서 아이디어를 논의했고. 구청장님을 만나서 설명했고, 그 아래 실무자들과 한 스무 번 정도
회의를 했지. 그래서 결국 진행이 결정됐고 구청에서 시범사업으로 운영하게 됐지. 그런데 고양이를 싫어하는 구민들 입장에선 세금을 왜 이렇게 쓰냐고 구청에 항의할 수 있잖아. 그래서 구청에 조건을 걸었지. 급식소 설치물과 1년치 사료를 내가 대겠다고.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었을 텐데.
영화 <26년>이
흥행해서 개런티가 들어왔는데 절반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했고 절반은 고양이 급식소 사업에 썼다. 급식소 50개를 설치하고 1년치 사료를 샀지. 왠지 <26년>으로
번 돈은 내 개인적인 목적으로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거든. 그리고 구청에서도 민원이 들어오면 기부
형태로 이뤄지는 것이니 당당할 수 있잖아. 사실 구청에선 주민 중 절반만 반대해도 사업을 시행하는 게
힘들거든. 그러니 구청에서도 대단한 용기를 냈다고 생각해. 사료를
아예 구청에 보내주면 동회의가 있을 때 동장님들한테 배급하고, 알아서 배식하게 되는 거야.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지원이지.
그 뒤로
1년이 지나지 않았나?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사실 이 아이디어는 캣맘들이 편하게 사료를 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사업 반응이 너무 좋았던
거야. 1년간 잘 운영되면서 사료 회사에 기부 제안을 했어. 대신
내가 1년마다 홍보 만화를 그려주는 대가로. 사실 길고양이
급식소가 나한테는 상당한 모험이었어. 고양이들이 1년간 안락하게
잘 먹다가 갑자기 폐지되면 죄책감에 시달릴 거 같았거든. 재작년엔 만화 외에 가장 많이 신경 썼던 게
그거였는데 정말 다행이지. 처음에는 하루에 10번씩 전화가
왔대. 고양이 잡아가라고. 그런데 요즘은 민원이 없대. 애들이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안 찢는 거야. 덕분에
고양이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의식이 바뀐 것 같아. 다행이지.
연재가 끝나면 뭘 할 건가?
애 낳고 나서 연재하는 게 너무 힘들어졌다. 집에 가고 싶어져서. 6화까진 그 일념으로 늦지 않고 제 시간에
업데이트를 했다. 집에 빨리 가려고(웃음). 가족들과 여행가고 싶다.
세상은 손쉽게 뜨겁고, 차갑다. 그토록 뜨겁고 차가운 세상에서 누군가는 쉽게 떠오르고 진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제 자리를 지켜낸다. 전지현은 17년 동안 배우였다. 벗어난 적이 없었다.
촬영이 시작된 스튜디오에선 한 곡의 노래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비긴
어게인>의 OST에 수록된 ‘Lost stars’였다. 전지현은 항상 화보 촬영 현장에 직접 노래를
준비해온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준비한 그 한 곡을 반복적으로 듣는다고 했다. 수많은 화보 스태프들이 스튜디오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에서 전지현의 움직임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눈에
띄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그랬다.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수많은 이들의 시선은 둘 중 하나였다.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그녀를 보거나, 스튜디오 안에 자리한 그녀의 찰나가 연이어 전송되는 모니터를 보거나. 모두가
나름의 시선으로 전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로지 전지현만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주목할 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세상의 수많은 관심에 둘러싸인 그녀의 입장과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전지현은 17년 동안 배우로서 제 자리에 서있었다. 수많은 눈과 입이 모이는 한가운데 서서 수많은 시선과 언어 속에서 모이고 흩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17년 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을 견디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숙성시키며 함께 흘러왔을 뿐이다. 그 자리에 서있던 그녀를 세상이 다시 주목했을 뿐이다. 그녀는 거기 있었다. 그리고 거기 있을 것이다. 스튜디오에선 호세 제임스의 ‘Come to my door’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가 준비해온 두 번째 곡이었다. 세 번째 곡은
없었다.
스튜디오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여기 전지현 씨가 있다’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어요.
사실 아까 창문 틈으로 밖에 있는 사람과 잠시 눈을 마주쳤어요. ‘저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알아봤다면 놀라지 않았을까요?
그럴까요?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어렸을 땐 TV에 자주 나오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것 같지만 <별에서
온 그대>(이하: <별그대>) 이후로 사람들에게 많이 익숙해진 거 같고요.
영화에 비해 TV드라마 출연 횟수가 현저히 적었죠.
사실상 <별그대>가
제 입장에선 첫 드라마라 해도 좋을 거에요.
그렇다면 첫 드라마로 대단한 성공을 경험한
셈이네요. 그만큼 영화와는 다른 파급력을 느꼈을 것 같은데요.
<별그대> 시청률이 30% 가깝게 나왔는데 그게 영화 관객 수치와 비교하면 거의 천만 수준이래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이틀씩 천만 명 앞에 섰던 거니까 영화와 완전히 다른 시장이구나 싶더라고요. 게다가
영화는 극장에 가서 돈을 주고 봐야 하지만 TV는 원하는 시간에 켜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겠죠. 게다가 <별그대>는 아시아에서도 반응이 좋았잖아요. 예전과 달리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시간에 해외반응까지 전해 듣게 되니까 놀랍긴 했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꼭 옛날 사람 같네요(웃음).
영화에 비해서 드라마 촬영 스케줄은 타이트하게
돌아가는 만큼 힘들진 않았나요?
정말 죽겠다 싶으니까 끝나던데요(웃음). 그런데 사람 몸이 신비한 게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그렇게 인체의 신비를 느끼면서 견뎌냈죠(웃음).
어쨌든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엽기적인 그녀>를
찍고 나서 아시아 투어를 돌기도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대단히 큰 기회였고, 그만큼 제가 더 잘했어야
했죠. 우습지만 그때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거든요. 그래서 <별그대>로 다시 아시아적인 관심을 받게 돼서 정말 감사했어요. 두 번 다시 이런 기회가 안 오리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랑을 하나하나 다 느끼고 싶고,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내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더욱 절실한 것들도 생기고요
그만큼 제게 부족한 걸 채워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지난 2월에
최동훈 감독의 <암살> 촬영을 끝냈다고 들었어요. 최동훈 감독과는 <도둑들>에
이은 두 번째 작업이죠. <엽기적인 그녀>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의 곽재용 감독 이후로 두 작품을
연이어 작업한 감독도 처음이었고요. 감회가 남다르진 않았나요?
본래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만큼 감회가
남달랐죠. 그리고 최동훈 감독님과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어요.
확실히.
<도둑들>, <베를린>, <암살>까지 모든 영화의 촬영지가 해외네요. 해외 복이 많네요(웃음).
그런가 봐요. 그 전에 찍은 작품 중에서도 해외 로케이션 작품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런 팔자가 따로 있대요(웃음).
당연히 국내에서 촬영을 할 때와 차이가
있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사실 해외 촬영 중엔 압박감이 심하게 느껴져요. 몸으로 일하는데 몸이 편하지 않으면 힘들잖아요. 해외 나가면 그만큼
불편한 일이 많잖아요. 연기하는 것도 힘든데 스트레스까지 받으면 긴장감도 배로 오고. 그래서 저는 해외 촬영이 별로 반갑지 않아요. 그런데 계속 해외
로케이션 영화만 찍게 되니, 이게 무슨 일인지(웃음).
<암살>에선 암살단의 대장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어요.
안옥윤이라는 인물인데, 이름에서부터 뭔가 느껴지지 않나요? 군인다운 면이 있죠.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인물이지만
굉장히 순박한 면이 드러나기도 해요.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다방면으로 매력적인 캐릭터였어요. 게다가 <암살>의 홍일점인데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둔 영화는 흔치 없잖아요.
그런 기회를 얻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죠.
그만큼 잘해내야겠다는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을
거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어요. 그래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럴 때마다 정말 안옥윤처럼 모두 다 나를 따라오라고 자신 있게 연기하려고 노력했죠.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서.
혹시 리더십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사실 잘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주도하는 경우도
없죠. 확신이 있어야 주도할 수 있잖아요. 잘하는 게 없으니까
확신할 수가 없고, 결국 따라가는 입장이 되는 거죠. 그리고
사실 어릴 때부터 일만 해서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라 친구들과 모일 일도 별로 없어요(웃음). 그런 의미에서 직업 선택은 잘한 거 같아요. 해야 되는 건 잘해내려는
타입이거든요.
최근 영화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캐스팅하고 싶은 여배우 1순위로 꼽혔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과 캐릭터를 만나기란 쉬운 일은 아닌가 봐요.
1년에 수많은 한국영화가 개봉하지만 기억에 남는 영화는 많지 않을
거예요. 기억에 남는 여자 캐릭터는 더욱 드물고요. 그 와중에 <암살>을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좀 더 어렸다면 이 캐릭터를 맡을 수 있었을지, 좀 더 나이가
들고 나서 이런 캐릭터를 봤다면 얼마나 아쉬울지,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지금 만나서 다행인 거죠.
연기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해본 적도
있나요?
많아요. 그런 생각을 떨쳐낸 건 얼마 안됐어요.
의외의 답변이네요. 그런 의심을 견뎌온 것일까요?
사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어렸을 땐 그냥 했던 거 같아요. 못해도 했고, 좋아하지 않아도 했고. 그래도 그렇게 해왔던 경험이 지금의 자산이죠. ‘어쨌든 해냈다’라는 자신감이 쌓이면 못하는 것도 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니까요. 게다가 시간이 지난 만큼 저도 어느 정도 성숙해졌고요.
10대
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처음부터 이목을 끄는 배우였어요. 이른
나이에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진 않았나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지 못해서 아쉽진 않았는지,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건 다 했어요. 그만큼 추억도 많고요. 대신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촬영장에서의 추억이 더 많죠. 그에
대한 아쉬움은 없어요. 지금도 배우로 잘 살고 있으니까. 물론
어렸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나는 특별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특별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외로워지기 마련이죠. 그래서 그런 생각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전지현 씨가 스스로를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겸손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네요(웃음).
’나는 여배우야. 너와
달라’ 이러고 싶진 않았어요. 그러면 정말 외로워져요. 남들이 봤을 땐 제 스스로 벽을 두르는 거니까요. 그렇게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죠. 나도 너와 똑 같은 사람이라고 알려줘야 해요.
무언가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죠. 화보 촬영 중에 모니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저는 (김)수현 씨 같은
배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한테도 그런 느낌이 드나요(웃음)?
일단 외모만 봐도 평범할 순 없잖아요? 외모 또한 타인의 주목을 끌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선 배우에겐 타고난 재능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외모만으론 오래 갈 수 없어요. 그만큼 노력해야죠.
데뷔한지
17년이 됐다고 들었어요. 배우로서 살아온 긴 시간만으로도 그 노력이 증명되는 건 아닌가
싶네요. 그 긴 시간을 뒤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요?
지금이 시작 같아요(웃음). 어렸을
땐 ‘익숙해지는 게 두렵다’는 생각도 했어요. 나름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계적으로 일하는 것 같아서 걱정됐죠. 하지만 지금은 걱정하지 않아요. 눈 앞에 있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까
일도 즐겁고요. 저는 끝까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타입이 아니에요. 그만큼 시간이 걸려도 사람들이 그 노력을 알아줄 거라 믿고요.
<엘르> 2013년 5월호에서의 인터뷰에서 ‘<도둑들>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그간의 오해가 조금은 사그라지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어요.
여기서 오해란 무엇일까요?
<도둑들>이
개봉할 즈음에 <베를린> 촬영을 끝냈는데 일단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그래서 <도둑들>이나 <베를린>으로
그 동안 관객들이 느꼈을 실망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던 거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때 대중들이 실망감을
드러냈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들이 연이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전지현 씨에 대한 기대감도
많이 줄어드는 인상이었죠.
배우들은 항상 작품을 통해 관객을 만나고 이야기하잖아요. 관객들은
성공한 작품을 기억해요. 캐릭터도 마찬가지죠. 의도치 않게
국내에서 공백이 생겼지만 <엽기적인 그녀> 이후로
제 영화가 줄줄이 흥행에서 참패했으니 제 작품도, 저도 없어진 셈이죠.
배우가 작품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지 못하니까 좋은 말을 듣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고요. 저도
제 작품이 재미없으면 보지 않는데 관객들이 그런 작품을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잖아요. 당연히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죠.
반대로
<도둑들>과 <베를린>, <별그대>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배우 전지현’에 대한 기대감도 그만큼 커진 거 같습니다. 당사자에게도 고무되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일단 선입견이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편한 법이잖아요. 사실 그 전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죠.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으니까 나를 받아들여줄 수
있을지 조심스러웠어요. 그런 면에서 지금은 좀 편해진 거 같아요.
<도둑들>은 4년 만의 국내 개봉작이었죠. 그만큼 공식석상에 서면 긴장되지 않았을까요?
그렇진 않았어요. 한국에서 오랜만에 개봉하는 제 작품이긴 했지만 제가
오랜만에 작업한 작품인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긴장감은 없었지만 나름의 치열함이 있었죠. <도둑들>엔 캐릭터가 많고, 배우들이 많잖아요. 조금 웃기게 들리겠지만 ‘그 중에서 3등 안엔 들어가야 할 텐데’라고 걱정했어요(웃음).
<별그대>에서 천송이라는 배우를 연기했는데 배우가 배우를 연기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사실 그냥 천송이라는 캐릭터가 재미있었어요. 물론 어떨 땐 좋다고
해놓고, 어떨 땐 매몰차게 외면해버리는 대중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에 대해선 이해가 됐어요. 하지만 그 감정에 호소력이 생기고, 시청자들을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천송이가 기본적으로 사랑스러운 캐릭터였기 때문인 거 같아요. 그런 면에 있어선 같은 배우로서 송이한테
고마웠죠. 다만 제게 있어선 과장된 부분이 더 많게 느껴져서 배우라는 직업보단 캐릭터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도둑들>과 <별그대>에서는
과장된 제스처를 통해서 캐릭터의 개성을 끌어올리는 느낌이었어요. 반대로 <베를린>은 캐릭터의 감정선을 차분하게 유지하면서 극적인
흐름에 철저히 녹아 드는 인상이었죠. 배우 입장에선 어떤 연기가 스스로에게 더 잘 맞는 옷처럼 느껴지는지
궁금하네요.
항상 나와 공통점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보다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저와 닮은 <별그대>의
천송이보다 정반대인 <베를린>의 련정희를 연기하는
게 더 편하게 느껴졌거든요. <암살>의 안옥윤도
그랬고요. 내게 없는 면을 연기할 때 진짜 연기하는 기분이었어요. 물론
인위적으로 연기하는 인상이 느껴지면 안되겠지만 어쨌든 저에겐 그게 편했어요. 사실 <별그대> 천송이는 어려운 캐릭터였어요. 방방 뜨는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해내기가 생각보다 힘들거든요. 계속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느낌임에도 궁극적인 뭔가를 더 보여줘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이 든다고 할까요? 하지만
차분한 역할을 연기하는 건 제가 모르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같고, 그렇게 이해하면서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게 돼요. 그리고 <별그대>를 할 땐 회당 한번씩은 웃겨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기도 했어요(웃음). 그래서 조금 피곤했죠.
<별그대>의 천송이와 닮은 점이 많다고 느끼시나요?
<별그대>를
보면서 남편이 그랬어요. 집에서 하는 걸 다 보여주면 어떡하냐고(웃음).
혹시 ‘치맥’도 즐기시는지?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알코올이 당긴다’는 느낌을 이젠 점점 알 거 같아요. 내일 스케줄이 비었다는 걸 알면
가끔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도 느껴지고요. 그럴 때면 ‘어른이
된 건가?’라는 생각도 들고(웃음).
단순한 질문이지만, 외계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구인도 많은데, 굳이 외계인까지(웃음)? 뭐, 운명적인 만남이라면, 수현이처럼
잘 생기고 인물이 좋다면 모르죠(웃음).
하루 정도 쉴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요?
요즘 좀 바쁘긴 하지만 하루도 못 쉴 정도로 바쁘게 사는 건 아니에요(웃음). 쉬는 날이면 보통 여자들처럼 관리를 받죠. 만약 이틀 정도 여유가
생기면 하루는 이렇게 제 몸을 관리하고, 다른 하루는 친구들을 만나서 밥을 먹거나 이런 식이죠. 왠지 죄송하네요. 뭔가 특별하게 답변할 게 없어서(웃음).
사실 이런 질문 많이 받을 거 같았어요. 그래서 그런 질문을 자주 받게 되면 ‘뭔가 특별한 답변을 준비해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도 같아요.
맞아요! 그런 생각이 들죠. ‘쉬는
날 뭐하세요? 촬영하지 않는 날은 뭐하세요?’ 특별히 뭘
하겠어요(웃음). 사실 놀아본 사람이나 잘 놀죠. 맨날 촬영만 하면서 살다 보니 갑자기 놀아보려 해도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쉬는 날엔 다음 촬영을 위해 쉬면서 제 몸을 가다듬는 거예요. 그거라도
해야죠(웃음).
그런 질문을 받다 보면 ‘뭔가 특별한 답변을 준비해야 하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도 같아요.
맞아요! 정말 그럴 때가 있죠. 사실
놀아본 사람이나 놀 줄 알죠. 맨날 촬영만 하면서 살다 보니 갑자기 놀아보려 해도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쉬는 날엔 다음 촬영을 위해 쉬면서 제 몸을 가다듬는 거예요. 그거라도 해야죠(웃음).
<암살>에선 총을 많이 다룬다고 들었어요.
제가 맡은 안옥윤이 독립군 최고의 스나이퍼니까요.
액션연기는 많이 했지만 총을 다룬 경험은
드물지 않았나요?
몇 번 있긴 했지만 이번만큼 실컷 만져보진 못했죠. 정말 원 없이
쐈어요. 기관총 쏠 때는 스트레스가 풀렸죠(웃음).
액션 연기 경험이 많은 편이에요.
자칭 액션 배우니까요(웃음).
여배우로서 액션 연기를 소화해낸다는 게
정말 힘든 일 아닐까요?
당연히 힘들죠. 그런데 저는 몸으로 표현하는 데에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액션배우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어요. 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배우는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제게 그런 강점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재미도 있고요.
기본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 편인가요?
좋아해요. 운동을 하다 보면 몸이 예민해져요.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스스로 느껴야 하니까 몸이 예민해지는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몸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선 운동의 도움이 컸죠.
어떤 의미에선 근육을 단련하는 것도 연기를
위한 방편일 수 있겠네요. 사실 표정도 얼굴의 근육을 쓰는 연기이기도 하고요.
그럼요. 매달려 있을 때 발 끝까지 긴장하지 않으면 자세가 흐트러지게
돼있어요. 그만큼 운동이 많은 도움이 되죠. 하지만 표정은
얼굴 근육만으로 표현한다기 보단 감정으로 표현한다는 게 맞는 말인 거 같아요.
철야 촬영을 해도 다음날 오전엔 꼭 운동을
한다고 들었어요.
<블러드>를
준비하면서 스물세 살 무렵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전까진 운동을 전혀 안 해서 몸이 뻣뻣했어요. 그런데 <블러드>의 사야 같은 여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일단
다리부터 일자로 찢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목표가 생기니까 운동을 하게 됐어요. 처음엔 러닝머신이나 크로스 트레이닝 같은 걸 10분 이상 못했는데
지금은 매일 해야 돼요. 하루라도 거르면 찌뿌둥하거든요. 지금은
완전히 습관이 됐죠.
아무래도 몸매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비결
또한 운동이겠군요.
그럼요. 나이가 들면 살이 많이 찌잖아요. 어렸을 땐 신진대사가 높으니까 걱정 없었는데 지금은 옛날처럼 먹으면 살로 가는 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죠. 운동을 하면 살이 찌지 않으니까.
사실 전지현 씨는 살찔 걱정 따윈 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웃음).
그럴 리가요. 운동을 하면 피부도 달라져요. 어쨌든 세월은 흐르고 나이 들지 않을 수 없잖아요. 하지만 운동을
하면 젊어지는 기분이 드니까, 조금이나마 나이가 든다는 기분을 뒤로 미룰 수 있다면 좋지 않아요?
배우로서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의 연령대를
유지하는 것도 어떤 면에선 필요한 노력이겠죠. 그런 면에서 외모를 관리하는 것도 배우로서 필요한 일일
수 있겠네요.
만약 제 나이가 마흔 살인데, 10대 역할을 하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겠죠. 그리고 그저 젊은 역할을 맡기 위해 관리한다기 보단 제가 어떤 역할을 연기하건 일단 저부터 건강해야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거 같아요.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지만 사적으로
특별히 드러나는 바가 없었던 거 같아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정말 배우로서의 삶에 충실했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그만큼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데요.
결코 완벽주의자는 아니에요(웃음).
수많은 관심 속에서 산다는 건 정말 좁은 세상에서 산다는 의미일 수 있겠죠. 그걸 아는
이상 거기서 제가 조심해야 할 건 제가 몰라서 생기는 실수들인 거 같아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몰라서 하는 실수란 어떤 것일까요?
가끔씩 내 선택이 나중에서야 실수였다고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거죠. 인생을 살아가면서, 제 의도와 무관하게 뒤늦게 느끼게
되는 실수가 있잖아요. 끊임없이 조심해야 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사실 어릴 때부터 워낙 일만 해왔기 때문에 제 스스로 사는 법은 잘 아는 거죠.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고 할까?
어느덧 현장에서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졌을
텐데 그런 부분에 대한 책임감이란 게 있을까요?
음, 없진 않은 거 같아요. 분명
어렸을 때와는 다르죠. 그런데 선배든, 후배든, 정말 열심히 하기만 하면 현장에선 인정받을 수 있어요. 무엇보다도
배우가 먼저 인정 받아야 할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스태프들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당장 선배이니까 어떻게
한다는 건 없어요. 그냥 열심히 할 뿐이죠. 저도 아직 부족한
면이 많으니까요.
2000년에
개봉했던 <시월애>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이정재
씨와 <도둑들>과 <암살>에서 다시 만났어요. 오랫동안 세월을 공유하는 동료배우가 있다는 건 반가운 일 아닌가요?
좋은 일이죠. 처음 호흡을 맞출 때보다 두 번째가 훨씬 좋아요. 그만큼 상대가 편하게 느껴지니까요. <암살>에서 정재 오빠와 제가 나이를 먹은 것처럼 분장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서로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는데 정재 오빠가 저를 보더니 “야, 너랑
나랑 이렇게 분장하고 쳐다 보니까 우리가 참 오래 본 거 같긴 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기분이 묘하긴 했어요. 그래서 내가 아는 정재
오빠도 잘 살았으면 좋겠지만 배우 이정재로서 끝까지 배우 생활을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대에서
함께 연기해온 배우가 잘 사는 모습을 봐야 제 마음이 편안할 것 같거든요. 그게 어쩌면 제 모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작품에서 계속 보고 싶어요.
30대가
막연했던 시절도 있었을 거예요.
그럼요. 어릴 땐 ‘30대
되면 죽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웃음).
그렇다면 40대에 대한 기대감은 없을까요?
저는 목표를 세우지 않아요. 그냥 지금에 충실하고자 하죠. 어렸을 땐 되레 앞날에 대한 걱정만 해서 그 좋은 시절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했어요. 그때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았을 텐데. 지금도 마찬가지겠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서 오늘이 제일 젊고, 제일 예쁘고, 좋은 시절일 거예요. 그러니 지금에 충실해야죠. ‘오늘 정말 뭔가 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기대 정도는
있지 않을까요? 여자로서도, 배우로서도.
예전에도 이야기했던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여배우로서 나이 들어가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을 수 있는 외모를 유지할 순 없겠죠. 하지만
감정의 폭은 자연스레 깊어질 테니까요. 그러니 나이 들어가고, 얼굴에
주름이 지는 게 두렵진 않아요. 지금처럼 많은 일을 할 순 없겠지만 그때에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을지 모르고, 정말 모르는 일이죠.
당장 올 한해 동안 이루고 싶은 건 없을까요?
일단 올해엔 <암살>이
개봉할 테니까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한동안 연이어 작품을 해왔으니까 올해엔 좀 쉬어가는 타이밍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어요. 천천히 차기작도 검토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