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 애니메이션은 통통 튀는 ‘룩소 주니어’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이 꼬마 전구에 불이 켜지기까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한 공주 메리다는 전통적인 혼인 관계를 강요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자 마녀의 주술을 빌린다. 그 주술은 단순히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대신 어머니를 곰으로 만든다. 메리다는 사람들 몰래 곰으로 변한 어머니와 성을 빠져 나와 주술을 풀 방법을 찾아나간다. 픽사의 13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클리셰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비트는 대신 그 고유의 감동을 과녁처럼 걸어놓고 일일이 적중시킨다. 지극히 순진해서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몇몇 대목도 존재하지만 결국 마음을 울린다. 디즈니의 순수한 세계관과 픽사의 정교한 작법이 어울리며 디즈니 고유의 전통적인 감성을 새로운 기술로 계승한다. 픽사의 최고 브레인 존 래세터(John Lasseter)는 애초에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꿈꿨고, 한때 디즈니 애니메이터였다. 그가 지휘하는 픽사가 그린 그림이 디즈니의 그것과 닮아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06년 1월 24일, 디즈니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74억 달러 상당의 거액으로 픽사를 인수하겠다는 것. 이 놀라운 소식은 1991년, 픽사의 장편 CG 애니메이션 제작 투자에 대한 디즈니의 결정에서 비롯된다. 당시 디즈니의 셀 애니메이션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CG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일종의 허풍이었지만 픽사의 창립자 에드 캣멀(Ed Catmull)은 오래 전부터 그 날을 준비해왔다. 이미 단편 CG 애니메이션 <틴 토이>(1988)가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했고, 디즈니의 <인어공주>(1989)나 <라이온 킹>(1994)의 부분 CG작업에 참여하며 투자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다. 처음 두 회사의 관계는 디즈니의 일방적인 권한이 중시되는 주종관계에 가까웠다.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평단의 찬사 속에서 전세계적으로 3억 6천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토이 스토리>(1995)로 시작된 픽사의 역사는 곧 CG 애니메이션의 개척사가 됐다.
디즈니와의 계약 만료일인 2005년을 앞둔 2004년 초, 픽사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계약 연장 협상 중단을 발표했다. <토이 스토리> 이후로 <벅스 라이프>(1998), <토이 스토리 2>(1999),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로 승승장구했던 픽사였다. 그는 그 해 픽사의 4분기 실적 발표에서 픽사의 작품 배급을 바라는 메이저 배급사가 적어도 네 곳은 된다고 밝혔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이 3% 올랐고,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디즈니는 자사 영화 제작비의 45% 가량을 픽사의 수입으로 충당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CG 애니메이션의 반향에 밀려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셀 애니메이션 제작 중단마저 선언한 상태였다. 디즈니는 내부적인 진통 끝에 당시 스티브 잡스와 반목하던 최고경영자를 해고했다. 일종의 신호였다. 인수 합병 논의는 곧 시작됐다. 마침내 미키 마우스는 룩소 주니어를 샀다.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픽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존 래세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수석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디즈니 셀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복원한 <공주와 개구리>(2009)와 <라이온 킹> 이후로 처음 북미 2억 달러 이상, 전 세계 5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2010)을 기획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가 설립한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일명 ‘칼아츠’를 수료한 뒤, 디즈니에 입사했다. 그리고 당시 디즈니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덧없는 상실만을 체감하다 끝내 해고당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 재직 당시 자신이 구상했던 작품의 일부 배경의 CG 구현이 가능한지 자문하고자 에드 캣멀을 찾았었다. 에드 캣멀은 그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CG에 흥미를 지닌 애니메이터란 점에 주목했고 디즈니에서 해고당한 그를 픽사로 끌어들였다. 자신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각을 존 래세터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에드 캣멀은 일찍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심취해있었다. 1970년대 초에 이런 생각은 대단히 앞서나갔거나, 그저 헛소리였지만 그는 뜻이 맞는 인재들을 규합해 나갔다. 뉴욕 공과대학 컴퓨터 그래픽스 연구소에서 결성된 팀은 <스타워즈>를 연출한 감독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로 편입됐다. 그곳에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기술을 연구해나갔다. 그들은 회사 입장에선 낭비라 이해될 그 작업을 지속하고자 회사의 눈을 가리기 위한 기능적인 업무들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를 테면, 컴퓨터 그래픽과 관련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CG를 이용한 광고 비주얼 제작 따위의 일 말이다. 그 당시 이는 결코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다. 에드 캣멀은 쓸모 없게 보이는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는 것에 끊임없이 불만을 표했던 조지 루카스를 설득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가능성의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을 수시로 막아야 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애플에서 퇴출당했던 스티븐 잡스에게 인수된 그들은 비로소 ‘픽사(PIXAR)’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화를 찍다’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픽서(Pixer)’를 변형한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 역시 마냥 관대한 투자자는 아니었다. 픽사를 500만 달러에 인수한 스티브 잡스는 10년 간 인수비용의 10배가 넘는 투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으니 관대해질 수도 없었다. 다행인 건 그가 재능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직관과 인내를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토이 스토리>의 성공가능성을 예견했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동료, 친구, 멘토였던 스티브 잡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엔딩 크레딧에서 떠오르는 이 문구는 “우주를 깜짝 놀라게 하자”고 곧잘 말했던, 픽사의 오늘에 기여한 마지막 조력자에 대한 그리움을 전한다.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존 래세터의 말처럼, 픽사는 기술과 예술이 손을 잡아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브레인트러스트(Brain Trust)’는 이런 가치관을 대변하는 제도다. 작품을 제작하는 어느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브레인트러스트를 소집한다. 존 래세터, 앤드류 스탠튼(Andrew Stanton), 브래드 버드(Brad Bird) 등 픽사의 브레인들이 모인다. 그리고 토론한다. 의견을 피력할 뿐, 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결정은 소집을 요청한 당사자의 것이다. “예술은 팀 스포츠다”라는 픽사의 캐치프레이즈처럼, 그들은 창조적인 놀이에 창조적인 놀이터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즉흥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 옆의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에 그럴싸한 디테일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소통의 가능성을 마음껏 열어둔다. 우리가 사랑하는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런 사실은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팀이었던 픽사의 오늘을 안도하게 만든다.
<라따뚜이>(2007)에서 봤던 아름다운 파리의 전경, <월-E>(2008)의 황홀한 우주, <업>(2009)의 놀라운 비행, 그리고 <토이 스토리 3>(2010)의 심금을 울린 안녕까지, 우리가 픽사라는 이름 아래 만났던 그 사랑스러운 찰나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실로 다행이기 때문이다. 그건 예언자도 몽상가도 아닌,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밀고 나간 현실주의자들의 꿈을 통해서 완성된 현실이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실제로 일이 생길 것이다.” 에드 캣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긋는 대신, 그 선을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토이 스토리>의 그 대사처럼,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피나>는 피나 바우쉬의 유산에 관한 영화이자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다. 피나 바우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김나영, 그녀가 말하는 피나와 나.
피나 바우쉬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저는 우리 엄마를 제일 좋아해요. 제겐 독일의 엄마였죠. 인자하고 겸손하셨어요. 어느 위치에 있다는 생각보단 그저 자신의 것을 하시는 분이셨죠. 절대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으셨고요. 오히려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수용했어요. 그래서 새 시대로 나아가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바닥에 깔린 물을 흡수하는 스폰지 같은 분이셨죠.
피나가 급작스럽게 타계한 3년 전 기억이 궁금합니다.
당시 피나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했어요. 공연 후 관객 인사에서 보통 가운데 서계시는데 옆으로 빠져 계시더니 무대에서 내려오셔선 자꾸 앉아계셨죠. 피나는 모든 해외 투어에 동행하셨는데 예정된 투어를 앞두고 무용수들을 불러모아서 말씀하셨어요. 사실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휴식을 취해야 하니 함께 갈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요. 저흰 오히려 이 기회에 좀 쉬시라며 투어를 떠났죠. 폴란드 투어 중 어느 점심 시간 즈음이었어요. 무대 디자이너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죠. 1시까지 모여달라고요. 다들 피나가 너무 힘들어했던 걸 아니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긴장하며 모였는데 돌아가셨다더군요.
단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무용수마다 리액션은 달랐지만 굉장한 충격이었죠. 하지만 당일 저녁에도 공연이 있었어요. 무대 디자이너는 말했죠. 주어진 공연을 끝까지 하는 게 우리 책임이고, 피나도 그걸 원할 거라고. 프로답게 공연을 마쳤고 피나를 추모하는 의미로 공연 후 관객 인사는 생략했어요. 무대 뒤는 울음바다였죠. 폴란드와 이탈리아 투어가 있었던 그 2주 동안이 장례식 같았어요. 피나가 기다리는 독일로 돌아와서 진짜 장례식을 했죠.
피나가 이끌던 ‘부퍼탈 탄츠테아터(Wuppertal Tanztheater)’가 지속될 수 있는 힘은 뭘까요?
피나는 각각의 무용수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했어요. 자기 식으로 사랑하는 대신 그 사람의 방식으로 사랑했죠. 그 사랑으로 무용단은 여전히 지속되는 거에요. 피나 혼자 모든 걸 했다면 무용단은 사라졌겠죠. 피나가 무용수들에게 원했던 건 본인들만 알아요. 그래서 공연은 이어질 수 있죠. 그 사랑으로 무용단은 여전히 지속되는 거에요. 40년이 되어가는 무용단이 하루 아침에 확 무너질 리 없잖아요. 모든 무용수들은 여전히 간직한 피나와의 사랑을 공연으로 보여주고 싶어해요. 피나가 무엇을 하고자 했을지 의논하면서 공연하고 있죠.
피나는 <피나>의 촬영 테스트를 이틀 앞두고 눈을 감았습니다. 영화 작업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피나는 항상 함께 해야 될 일들은 단원들과 의논했어요. 피나가 빔 벤더스 감독과 작업을 결정했을 때도 빔에게 저희와 논의하라 말씀하셨죠. 빔은 영화를 어떻게 진행하고 싶은지 저희와도 의논해왔어요. 피나가 돌아가신 뒤 영화를 그만둬야 되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저희는 계속 하길 바란다고 빔에게 전했어요. 빔도 좋아했죠. 그리고 무용수들을 모아서 여러분들이 피나와 맺었던 인연과 인상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고 보여달라 하시더니 그걸 토대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완성된 <피나>를 본 감상은 어땠나요?
하나의 메모리 같았죠. 일단 피나도 나오고 저희가 피나와 맺었던 결실 그리고 형제 같은 저희 무용수들과 함께 겪은 과정들을 보면서 빔에게 영화를 찍자고 요청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피나>에서 본인의 솔로 신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무용수들은 피나에게 드리고 싶었던 것을 표현했어요. 제 독무는 무용단에 입단해서 처음으로 피나와 작업했던 도시 시리즈작 가운데 홍콩 작품에서 췄던 솔로였죠. 피나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는 드문데 예전에 한국에 오셨을 때,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춤을 말씀하셨어요. 자신은 그 춤이 너무 아름답고 좋다 하셨죠. 그걸 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얼굴을 칠하는 장면은 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준 피나에게 드리는 마음이었어요. 브라질 작품에서 했던 건데 브라질의 한 원주민 부족 여자들은 우리가 연지 곤지 찍듯이 온몸을 빨갛게 칠해요. 그게 그들에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이래요. 몸 전체를 빨갛게 칠한 남자의 몸에 입과 눈과 얼굴을 갖다 대면서 제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건 결국 당신의 아름다움으로 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됐다는 감사의 표현이었죠.
피나 바우쉬는 어떤 스승이었나요?
피나를 만나기 전에는 춤추기 위해 사는 것 같았어요. 피나랑 작업한 뒤로 춤은 나를 알아가는 도구가 됐죠. 피나 스스로의 물음을 저희한테 주면 저흰 답해나갔죠. 내 안의 것을 보게 하시고 스스로 찾게 만드셨죠. 자신을 표현하려면 진심이 필요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전달하려면 간절함이 있어야 되니까요. 피나도 자신을 알아가는 중이었지만 생각하는 방법을 알았죠. 그걸 제게 일깨워주셨어요.
피나의 사진에는 항상 손에 담배가 들려있어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라 담배가 하나의 돌출 수단이었던 거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피나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정작 당신은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하셨죠. 카멜이란 담배를 피우셨는데 작업할 때 담배만 준비하는 어시스턴트도 있었어요. 가끔 불 붙인 담배를 재떨이에 올려놓고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했죠. 그리곤 ‘어? 담배가 여기도 있었네?’ 하시면서 마저 피셨죠. 처음에는 많은 무용수들이 무용실에서 담배를 함께 피웠대요. 다들 나이가 들면서 담배를 끊고 그런 분위기가 제한됐는데 피나 한 분에게만은 허락됐죠. 물론 공연보실 때는 안 피시죠.
빔 벤더스의 아내이자 사진작가인 도나타 벤더스의 사진전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그 중 본인의 컷도 하나 있더군요.
피나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찍은 사진이에요. 저희 무용단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촬영한 사진가는 거의 없어요. 도나타는 피나의 허락 하에 저희 무대 공연까지 촬영했죠. 피나 무용수들과 함께 한 사진 작업을 책으로 내려는 계획이 있대요. 그 컷은 포트레이트가 필요하다 해서 저희 집에서 촬영했어요.
빔 벤더스와 도나타 벤더스는 피나와의 인연 덕분에 자연히 가까워진 건가요?
빔은 그렇죠. 도나타는 일본에서 빔과 도나타의 사진전을 진행한 일본인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원래 친분이 있었지만 <피나> 작업을 통해서 가까워졌죠. 애기를 많이 나눠보니 공통점도 있었고, 그 계기로 더욱 친해졌어요. 빔에게 한국에 와서 <피나>의 홍보를 돕게 됐으니 전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으니 영화를 찍으면서 경험했던 것을 얘기하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도나타는 전시 때문에 방문하려 했는데 무산돼서 안타깝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했어요.
50세가 다 되셨는데, 육체적인 한계가 느껴지진 않나요?
젊은 시절에는 과격한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피나는 제게 항상 정적인 것들을 요구했어요. 처음엔 불만이었죠. 이런 열정이 있는데 왜 항상 저를 정적으로만 표현하려 하는 것일까, 그래서 작업할 때마다 피나 선생님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했었죠.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제 영혼과 육체의 밸런스가 이렇게 맞아 떨어질 수 없는 거에요. 피나는 각각의 사람이 지닌 에센스를 끌어내셨어요. 제가 지닌 정적인 에센스를 보신 거죠.
만약 독일을 가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전 독일에서 그냥 무용을 배운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의 인생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독일인들은 세련되고 예쁜 멋은 없지만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겸손하거든요. 그리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투자할 줄 아는 사람들이에요. 가졌다 해서 드러내며 살지 않고, 도울 줄 알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처음에는 언어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르니 고생했죠. 철학자가 많이 나올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해서인지 나라가 조용해요. 이 바쁜 나라에서 갔으니 처음엔 외로울 정도였죠. 비도 많이 오고. 그 모든 게 결국 저를 보게 만드는 생각과 계기를 만들어줬어요. 독일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제가 없었겠죠.
Who’s Pina Bausch?
독일 출신의 현대 표현주의 무용의 대가. 4개 대륙의 28개국 105개 도시에서 공연.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문 ‘탄츠테아터’ 장르의 선구자. 전세계 도시들에서 영감을 얻은 <세계 도시 시리즈>로 각광받았다. 2009년 6월 30일 암투병 중 향년 68세로 타계했다.
피로는 간 때문만은 아니다. 밥 말리는 말했다. “악은세상을 망치려고 하루도 쉬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쉴 수 있겠는가." <추적자>의 백홍석도 그래서 뛰고 또 뛰었다.
정의는 승리한다, 라는 말 쉽게 믿을 수 있는가. 승리가 셀프던가. 정의는 우리 주변에서 늘 손쉽게 패배해왔다. 하지만 99번의 패배 끝에 단 한 번의 정의가 승리하면 대부분 정의가 승리했다고 손쉽게 자축한다. 당연히 그리 돼야 할 일에 기꺼이 감격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무력한 일인가. 혹자들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추적자>에서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히는 강동윤은 말했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때서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타납니다. 30억이면 친구의 딸을 죽이고, 총리가 되기 위해선 평생 지켜오던 신념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죠. 난 어쩔 수 없었다고. 백홍석 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잘 알려진 대로 <추적자>는 ‘땜빵’용으로 편성된 작품이었다. SBS는 월화미니시리즈 <패션왕>의 후속작으로 <빅>을 편성하려 했으나 KBS2에게 밀린 뒤, <드라마의 제왕>을 주목했으나 캐스팅문제로 <추적자>를 급히 편성했다. 입봉작도 없는 신인작가에 시청률을 책임질만한 스타배우 하나 없는 <추격자>는 몸뚱이 밖에 믿을 게 없는 백홍석과 같은 신세였다. 7월 19일에 종영된 <추적자>의 시청률은 22.6%를 기록했다. 월화드라마 중 시청률 1위였다. 작품의 힘만으로 건져낸 결과였다. 고무적이다. <추적자>는 힘있는 이야기를 엔진 삼아 스피디하면서 리드미컬한 연출력으로 시동을 걸고, 박근형, 김상중, 손현주, 김성령 등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배우들이 호연으로 핸들링했다. 매회마다 속도감 있는 액션이 발생하는 가운데 반 박자 빠른 내러티브의 대회전을 통해서 한 뼘씩 예상을 빗겨나간다. 선악의 대립을 웅변하기 보단 복잡다단하게 얽힌 관계의 정치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크고 작은 소용돌이의 방향을 주시하며 지극히 현실적인 음모론을 제시한다.
대기업 회장인 장인과 유력한 대권 후보인 사위는 한 식탁에 앉아 식사할 때조차 상대의 빈틈을 생각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체스판이다. 이기기 위한 싸움을 설계함에 있어서 중요한 건 이용할 수 있는 무기를 파악하는 일이다. 모두가 그들의 말이 될 수 있다. 강동윤은 말한다. “큰 마차가 먼 길을 가다 보면 깔려 죽는 벌레도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손을 내미는 정치인은 그 손으로 자신의 말을 고른다. 무엇보다도 <추적자>엔 진짜 거물의 표정이 있다. ‘주판 함 놔볼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서 회장은 결코 손해 보는 승부는 하지 않는다. ‘자존심은 미친 년이 머리에 꽂고 있는 꽃하고 같은’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건설한 제국의 안녕이다. 그는 연기하듯 아버지의 표정을 짓다가, 다시 회장의 자리로 돌아온다. 결코 싸움에서 지지 않는다. 그는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셈할 뿐이다. 자신이 홀로 남는 고독한 순간까지도 그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계산한다. 부지런한 악당은 끝까지 세상을 피로하게 만든다.
본래 가제는 <아버지>였다. <추적자>의 몸통은 딸을 죽인 진범을 추적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녹록하잖다. 사람 하나 매수하기 위해서 돈 10억 즈음은 아무렇지 않게 쓰는 적을 몸뚱이 하나로 버티는 건 피로하고 고단하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건 ‘수정이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정의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가만히 앉아서 쥘 수 있는 것이던가. <추적자>는 결국 당신을 목격자로 만들고 있다. 당신이 행동하지 않으면 정의란 그저 한낱 2음절 단어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백홍석처럼 달리고 구르라는 말도 아니다. 대선이 올해였던가? 세상을 결정짓는 순간은 마치 도둑의 발걸음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는 법이다.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였다. 말들을 쏟아냈다. 우린 이 고독한 영웅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나? 아니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이제 고담은 부패한 악의 소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전쟁은 끝났다고. 배트맨이 경찰견에 쫓겨 어둠 속으로 달아난 것도 벌써 8년 전 일이다. 고담의 정경유착을 뿌리 뽑고자 했던 청렴한 검사 하비 덴트를 죽인 악당임을 자처한 배트맨은 더 이상 고담의 밤거리를 굽어살피지 않는다.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그 자신이 보존하려 했던 고담의 백기사 하비 덴트의 그 대사처럼, 살아남은 배트맨은 악당이 됐고, 내부자의 배신으로 악당 투페이스로 변절한 하비 덴트는 결국 죽어서 영웅이 됐다. 우리는 <다크 나이트>의 결말 앞에서 엄숙한 물음을 삼킬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진짜 영웅을 보존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그건 마치 유대인의 손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서사와 유사하지 않은가? 이처럼 엄숙한 히어로 무비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다크 나이트>에 열광했던 팬덤이 다시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이름 앞에 줄을 선 건 당연하다. 북미 개봉 첫 주에 극장 총기 난사사건이라는 흉악한 암초에 걸려 주춤했지만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수성하며 전세계 7억불 이상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55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배트맨의 부활을 목격했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포착한 광활한 도시 풍광 아래에서 펼쳐지는 선악의 대결, 고독한 신념으로 분투하는 영웅의 피로한 고뇌, 조커 그리고 멀리 떠나버린 히스 레저……<다크 나이트>의 진풍경을 경험한 이들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복음이었다. 혼돈을 즐기는 조커에 맞서다 끝내 고담을 지키고자 영웅의 지위를 버리고 은둔한 배트맨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강적, 베인에 맞서서 또 한번 고담을 구원해야 한다. 그 무용담 앞에서 다시 한번 관객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서사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이 트릴로지는 유년 시절 고담 뒷골목에서 부랑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부모를 목격한 한 소년이 어른이 돼서도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박쥐 코스튬을 입고 고담의 밤거리를 활보하다 진짜 삶을 회복하기까지의 서사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의 복귀를 겨냥한 제목이자 제 삶을 완전히 내려놓았던 사내가 그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키는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배트맨 비긴스>에선 어린 브루스 웨인이 실수로 우물에 추락해서 자신에게 날아든 박쥐 떼에 질겁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물을 탈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브루스 웨인은 숱하게 악몽을 꾼다. 그 순간으로 거듭 되돌아간다. 고담의 악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될 이미지를 구상하던 중, 집안에 날아든 박쥐를 통해서 모티브를 얻는 건 필연이다. 자신의 공포를 악인들의 공포로 전이시킨다는 건 일종의 복수심에 가깝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법적 체제로서 정당하게 악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하비 덴트의 이상을 지지하는 건 고담의 법 체제 확립을 통해서 고단한 자경단 노릇을 그만 두고 진짜 자신의 삶을 되찾고픈 욕망 때문이다. 그가 브루스 웨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말한 레이첼과의 관계 때문이다. 하비 덴트는 이상이고, 레이첼은 현실이다. 결국 조커의 계략으로 이상도 현실도 지키지 못한 배트맨은 악당이 되어 사라지고,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은둔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제목 그대로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다. 단지 전편에서 사라진 배트맨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커의 광기로부터 구해낸 고담에서, 하비 덴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스스로 악당이 되길 자처하며 악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수감할 수 있는 하비 덴트 법의 기틀을 마련한 배트맨은 그 비틀린 공권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악당의 출연과 함께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완전히 부서진다. 현란한 전술과 압도적인 힘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던 배트맨은 베인 앞에서 샌드백처럼 얻어맞다 끝내 허리가 부서져 일어서지 못한다. 객석에 앉은 당신은 배트맨과 함께 구타당하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스크린 속 허구이고 그 너머의 절망이지만 객석까지 비통한 공기가 흐르는 건 자신들의 강력한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절망적인 목격이자 체험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이 베인에 의해서 감금되는 감옥은 마치 그가 유년 시절 추락했던 우물을 닮았다. 브루스 웨인이 그 곳을 기어올라야 하는 건 고담을 유린하는 베인을 막아서기 위해서지만 결국 그곳이 자신이 홀로 기어오를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우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끌어올려준 아버지도 없는 그 지하 감옥에서 그는 허리에 묶인 끈 하나에 의지한 채 벽을 잡고 기어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기어오른다. 물론 브루스 웨인의 허리가 완벽하게 회복되는 광경 앞에서 그가 평소에 어떤 칼슘 보조제를 먹었는지 의아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 모든 서사에서 중요한 건 그 행위에 깃든 상징적 의미다. 결국 브루스 웨인은 소돔과 고모라가 된 고담으로 되돌아온다. 전쟁을 시작한다. 예정된 수순대로 고담을 구하고자 허리를 펴고 기어오른 배트맨의 역전극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서사의 끝자락에는 보다 성스러운 결말이 대기 중이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도시를 살리고자 스스로 제단에 오르듯 날아오르는 배트맨은 성배가 된다. 비로소 죽어서 영웅이 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슈트를 벗으며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헤어진다. 자신과 닮은 누군가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며, 강력한 상징의 허물을 벗고 진짜 삶을 찾는다.
굳이 <다크 나이트>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몇 가지 의문을 남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3부작의 관점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탁월한 마침표를 찍는 수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에 하이퍼 리얼리즘을 장착했다. 슈트의 제작 과정까지 합리적인 인과를 설계하는 방식은 때때로 편집증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존재 가능한 영웅의 형상을 설득하며 이 트릴로지가 바로 우리 세계와 맞닿은 거울상이라 설득한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모티브가 된 두 작품을 수 차례 언급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한 남자의 기구한 러브스토리를 묘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와 마천루의 위용을 자랑하는 대도시 내부에 잠재된 비인간적인 억압과 착취를 그린 프란츠 랑 감독의 디스토피아 SF <메트로폴리스>. 어느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 놀란은 간절한 희망을 추출해냈다.
이건 어느 영웅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결국 어찌됐건 가능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눠야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결말부에서 비행 직전의 배트맨에게 경찰청장 고든은 묻는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배트맨은 답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부모를 잃은 어린 브루스 웨인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위로하는 고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는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믿어야 한다. 이 도시에는 배트맨도 존재하지 않기에 더더욱.
건축가는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건축가는 집을 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건축가에게 물었다. 건축가가 대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구본준 한겨레 문화부 책지성 팀장. <두 남자의 집짓기> 저자.
구승회 디자인크래프트 대표이사. <건축학개론> 제주도 ‘서연의 집’ 설계.
김찬중 더_시스템 랩 대표. 폴 스미스 플래그십 스토어 설계.
전숙희 와이즈 건축 소장. 다세대 주택 ‘Y하우스’ 설계.
‘건축’이라는 단어가 발견되는 두 편의 영화 <건축학개론>과 <말하는 건축가>에 대한 남다른 감상이 있을 것 같다.
구승회(이하 ‘승’):약간의 의무감으로 <말하는 건축가>를 봤다. 마지막 장면이 짠하더라. 목욕탕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아줌마한테 “이거 지으신 분 아세요?” 물어보니, “그걸 어떻게 알아~.” 대답하는데 그 옆에 정기용 선생님이 앉아 있다. 건축가가 열심히 만들어놓은 공간을 일반인들이 잘 쓰면서도 정작 같은 공간에 있는 건축가의 존재는 모른다니 찡했다. 한때 윗세대 건축가들이 국제적이지도 않고 디자인도 못한다고 폄하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분들만큼의 퀄리티를 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몰랐다는 걸 깨닫는 순간처럼 울컥하더라.
김찬중(이하 ‘찬’): 정기용 선생님께 개인적인 신세를 져서 어떻게 갚아야 할까 생각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영화를 보면서 좀 울었다. <건축학개론>은 건축이 지역과 얼마나 밀접한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감했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공간에 대한 사소한 경험이 기억의 인자로 어떻게 자리잡는지 잘 보여준다. 두 영화는 건축가들이 ‘어떤 기억을 선물할 수 있는가’라는 직업적 소명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았다.
전숙희(이하 ‘숙’): <말하는 건축가>는 실제 건축가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반가웠지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봤다.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정기용 선생님 회고전을 출산 때문에 보지 못했다. 그 이전부터 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단 말을 들었는데 회고전 준비에 관해 듣고 마음이 덜컹했었다. 건축계가 이분을 보내드릴 준비를 한다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회고전이 많은 건축가들을 묶어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살아생전에 메이저 갤러리에서 회고전을 했다는 것도 건축계만의 파티가 아니라 건축계 밖의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했다. <건축학개론>은 아직 못 봤지만 구승회 소장님의 작품이 나온다니 궁금하다.
구본준(이하 ‘본’):사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다른 때보다 높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느낀 건 건축영화제였다. 건축영화제 1회가 1주일이나 더 연장상영을 했다. 지난 2회 때도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왔다. 그래서 두 영화가 절묘해 보인다. <말하는 건축가>는 공공건축을 다루지만, <건축학개론>은 사적으로 건축을 다루니까 두 작품을 같이 보면 좋을 거 같다.
한국에서 건축가란 어떤 존재인가?
찬:만약 집이라는 결과물만 중요했다면 <건축학개론>이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일을 맡겼더니 어느 날 집이 완성됐더라, 이런 건 소위 집장사라면 모를까, 건축가에게 어려운 일이다. 건축주가 집 짓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즐기고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건축가의 역할이다. 의사나 변호사도 그렇지 않나.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의뢰인이나 환자로부터 좀 더 많은 부분을 끌어내는 거니까. 그 과정에 참여시키고 그에 대한 기억까지 함께 넘겨야 된다.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런 과정의 기억 또한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본:예쁜 집을 짓기 전에 하자 없이 지으려면 시공업자가 건축가의 설계를 잘 지키면서 짓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게 감리라는 영역인데, 시공업자가 설계해서 짓고 검사해서 괜찮다고 넘어가는 건, 자기가 문제 내놓고 100점 맞았다는 거다. 건축가가 건축주를 대신해서 튼튼한 집이 나오도록 시공업체를 견제하고 압박을 가해서 완성도를 높여야 된다. 무엇보다도 집을 짓고 나면 건축사가 영세해서 없어진다는 점이 문제다. A/S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 지어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건축가한테 맡겨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 지을 때 복덕방부터 간다.
숙: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건축가가 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 여름에 우리가 만든 금호동 다세대 주택이 보도되면서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의뢰가 있었는데 정작 성사되는 건 없었다. 대부분 건축가가 직접 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건축가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건축주의 요구사항에 맞는 시공자를 만나도록 돕는다. 시공자는 최대 이익을 원한다. 그럼 건축주가 원하는 그림 내에서 최대한 값싼 재료를 쓰고 쉬운 방식대로 짓는다. 건축가들은 그 돈이 제대로 쓰일 수 있게 전체를 봐주는 거다, 그게 돈을 잘 쓰는 방법이다.
찬: 사실 수많은 아이템이 들어가는 큰 덩치의 건축물이 30년 동안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도록 완성한다는 건 어렵다. 재료의 속성도 변할 수 밖에 없으니 분명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누구나 건축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아카데믹하게 접근하지 않아도 생활 속의 공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 대부분 불만을 말한다. 그 불만들을 긍정으로 바꾸긴 힘들다. 사실 문 손잡이가 흔들거려도 건축주는 건축가에게 따진다. 종합적인 책임자로서 건축가의 위치를 인지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들어와서 일 없을 때 아버지 집을 설계했었는데 덕분에 평생의 욕을 먹고 있다. 하물며 전구 나가는 것도 내 탓이니.(웃음)
승: 이사가면서 돈 좀 아껴보겠다고 우리 집 인테리어를 직접 했는데 지금까지도 매일 혼난다. 와이프가 건축주라서.(웃음) 자문 받으러 오시는 분들은 건축가에게 어떤 믿음을 싣는 경향이 있다. 아플 때 찾아가는 의사가 명의이길 바라는 것처럼. 그래서 움찔하다가 ‘저는 공사는 안 합니다’ 하면서 책임소재에서 빠져 나온다. 많이 얽힐수록 힘든 게 사실이니까. 소비자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이가 알아서 잘 해주고, 되도록 싸게 하면서도 좋은 퀄리티를 바라는 건 당연하긴 하다. 요즘은 그런 분들이 바라는 바를 건축가로서 잘 듣고 있는지 고민한다. 단순히 액수를 깎아주는 게 아니라 대안적인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외국도 많이 다녀서 본 것도 많고 좋은 재료나 디테일은 많이 아는데 막상 그것들을 조합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 잘 모른다.
본:우리나라 건축가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디자인 감각이 워낙 다르니까.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인테리어에 길들여져서 공간을 꾸며본 적 없는 사람이 90%니까. 솔직히 자기가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다. 취향도 없고. 아파트는 편리한 대신 디자인 감각을 거세시킨다.
숙:어떤 공간을 좀 강조한다면 그 건너편은 조용한 것이 들어가야 되는데 대부분 강조되는 것만 고른다. 종합적인 공간을 보지 못하는 거지.
취향은 삶의 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취향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숙: 최근에 집 짓는 것에 대한 문의가 많다. 시공사들이 공급하는 아파트가 아니라 자신들이 짓는 집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최근에는 한 시공사에서 찾아왔는데 아파트가 아닌 다른 걸 개척해보려 한다는 거다. 적당한 규모의 땅이 있기 때문이라지만 결국 그 수요계층에 대한 판단이 있다는 거다. 주거 문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터닝 포인트라 생각한 게 아파트를 쫓지 않는 세대들이 나왔다는 거다. 사실 집값이 비싸다는 것이 젊은 세대에게 절망을 준다. 특히 아파트는 재산 정도를 파악하기에 용이하다. 어느 건설사가 지었는지, 어느 지역인지, 라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수준을 단정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주거 형식은 다양성의 가치와 깊게 연관돼 있다.
본: 제일 중요한 건 일상에서의 건축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된다. 외국에서 본 골목길은 예쁘던데 우리 동네는 왜 이런지, 쓰레기통 같은 건 좀 더 괜찮은 디자인일 수 없는지, 길에 분전함은 왜 저렇게 많은지, 이런 것들. 가로수길이 좋은 이유는 길에 구조물이 별로 없다는 거다. 그러니까 길 위에서 액티비티가 발생하고 길에 붙어있는 건물과의 상호작용도 좋아진다. 지금까지 한국은 도시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저 내 집이 중요했는데 주택 하나가 예뻐지면 그 동네에 또 예쁜 집이 들어서고, 이런 건 의외로 쉽게 번질 수 있다.
찬: 역사적으로 건축이 선발 산업으로 등장했던 적은 없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건축은 후발 산업에 가깝게 포지셔닝된다. 산업, 문화, 예술을 포괄한 종합적 성격이 강해지는 탓이다. 건축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문화적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다. 그런 시점에서 아까 말했던 두 영화가 때를 잘 맞춘 셈이다. 어쩌면 지금 시점이기 때문에 그런 시장성을 인정받았을지도 모르고.
본: 의사나 변호사는 인생 최악의 순간에 만나지만 건축가는 인생에서 제일 행복할 때 만난다. 일생 동안 집을 두 번 짓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게다가 아직도 대부분 건축가가 아니라 시공업체를 찾아가서 집을 짓는다. 정기용 선생님도 목욕탕이나 마을 공설운동장 같은 걸 만들었는데 건축가가 하니까 확실히 좋다는 걸 알려준다. 2003년에 정기용 선생님께서 순천에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기 이전에는 부모들이 어린애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없었다. 건축가가 하니까 그런 배려들이 생긴 거다. 심지어 순천시청 안에 처음으로 도서관을 전담하는 행정과가 생겼다.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기용 선생님께서 거기까지 의도한 건 아닐지라도 도서관 하나가 굉장히 많은 걸 바꿨고, 공공건축이 이렇게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다. 실제로 건축은 많은 걸 바꿀 수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의 특성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승: 서울의 특성은 아파트다. 어떻게든 안고 갈 수 밖에 없는 독특한 물리적 환경이 아닌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나올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건 안 좋으니 쓸어버리자는 건 결국 지저분한 집들 다 쓸어버리고 반듯하게 짓자고 하는 무대포 마인드와 다를 게 없다. 요즘 가로수길 말 많지 않나. 이제 옛날 가로수길 아니라고, 너무 상업화됐다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게 정상이다. 예술가들이 모여서 좋은 분위기를 형성했고, 사람들이 모이고, 가치가 올라가니, 대기업들이 몰려와서 꼭지를 잡고, 그 사람들이 이동한다. 내 생각이 이상적인 건지 좋아지는 곳이 있으면 쇠락하는 곳도 있기 마련이다. 서울시 모든 곳이 다 좋을 수는 없지 않나. 흥망성쇠가 이어지는 생태계가 있다는 건 도시가 살아있다는 증거 아닐까.
찬:다양성이 인정되는 도시라는 면은 좋다. 다만 흑백논리로 구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사는 동네가 있으면 못 사는 동네도 있고, 지저분한 동네도 있으면 깨끗한 동네도 있다. 이런 다양한 문제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도시가 서울이다. 우리가 성격이 급해서인지 그 각각의 영역들은 정체돼있지 않고 늘 변한다. 적응력도 굉장히 빠르다. 좋은 걸 인정하거나 나쁜 걸 바꾸려는 의지도 강한데, 그런 양면을 잘 순화시켜서 조화로운 관계성으로 정립하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브랜드 파워를 가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숙: 뉴욕은 볼거리가 집중된 맨해튼이 있지만 그 밖은 험악하기 이를 때 없다. 지하철 타면 누군가 뒤통수 후려칠 것 같기도 하고, 다리 밑은 악취도 심하다. 거기에 비하면 서울에는 산재된 풍경들이 있고, 살만한 공간으로 확산된 도시다. 다만 최근에 양산된 건물들이 많아서 아이덴티티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서울의 다이나믹함을 따라올 수 있는 도시가 없다. 뉴욕에서 일할 때는 대부분 인테리어였다. 건축물을 지어볼 기회는 없기 때문에 기회가 생기면 다들 혈안이 돼서 달려든다. 그만큼 서울은 건축가들에게 좋은 영역이다. 다만 오랫동안 계획하고 짓기보단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 건축을 대하는 태도들이 변하는 만큼 개선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본: 서울에는 아파트가 맞다. 서울에서 어떻게 단독주택을 짓겠나. 땅값도 비싸고. 다만 기왕 짓는 아파트라면 조금 더 합리적이어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다세대주택은 단독주택을 헐고 지은 거라서 많은 가구수를 고려하지 못한 도로와 붙어있다. 그래서 차도 많이 밀린다. 좀 걸어 다닐만한 길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는 도시 좀 예뻐해 보자는 생각이 필요하다. 서울의 가장 큰 매력은 제멋대로의 도시라는 점이다. 뭘 해도 이상하지 않다. 얼마나 재미있나? 모든 실험이 가능한데. 나는 서울이 좋다.
특별히 관심이나 애정을 지닌 지역이나 공간을 꼽는다면?
본: 종로는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지역이지만 아직까지 대표할만한 건물도 없고, 분위기도 성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래된 거리의 매력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이런 특징이 거리 특유의 분위기로 발전되면 좋겠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건축이 중첩되며 공존하는, 상업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거리로 발전하길 기대하고 있다.
숙:소년기를 강남에서 보냈고 유학을 마치고 2년 전 강북에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조직이나 경관에 끌리는 편인데, 지리, 지형적으로 자연스레 만들어진 강북의 도시조직이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몽촌토성에서 도시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승: 한강 둔치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답답할 때마다 찾아갔다. 성수동 일대나 홍대, 가로수길, 이태원에 관심이 있다. 문화적 환경이 도시 공간의 변화를 끌어낼 지역이 아닐까 본다.
찬:고등학교 때부터 가로수길의 변화를 경험했다. 물리적인 변화는 크지 않지만 상권과 땅값, 사람들의 인식은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도시의 진화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해외 건축가들의 국내 영입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 모인 분들의 생각은 어떤가?
본: 외국건축가를 들여오는 인식이 문제다. 명품백 사듯이 유명 작가를 부르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성격에 맞는 외국 건축가를 잘 고르면서 국내 건축가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주고 최선의 경쟁을 시켜야 한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프로젝트 등을 보면 외국 건축가의 이름값에만 매달린 느낌이 강하다. 최고의 작품을 철저하게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찬: 해외건축가들의 국내영입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만큼 역동적으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 해외건축가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다만 우리 문화에 대한 단편적 사고로 완성한 결과물을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건 이상하다. 건축은 단편적인 일상의 기억을 유지시켜주는 틀로서의 속성이 있다. 브랜드 파워라는 이유로 우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그들에게 우리의 공간을 맡긴다는 건 잘못된 거다. 국내 건축가들의 수준이 그들보다 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조직적인 대응과 관리는 떨어진다. 고질적인 문화적 사대주의와 국내 건축가들의 소극적인 태도가 연동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승: 건축주의 눈이 확실히 높아졌다. 그러니 해외 건축가에게 의존하던 시기는 지나갈 거라 생각한다.
<말하는 건축가>는 대중들에게 건축가 정기용을 알렸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나 건축물이 있을까?
본:이일훈 씨와 주대관 씨의 사회적 건축. 제한된 조건을 어떤 아이디어로 풀어냈는지, 어떤 생각을 펼치고자 하는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건축가들의 참여가 어려운 저예산 건물과 일상의 건축에서 이뤄낸 작지만 소중한 성과들이 축적되는 것이다.
승: 김성홍 교수가 <길모퉁이 건축>에서 언급한 ‘중간건축’을 만들어내는 건축가들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건축물을 성실하게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숙: 건축가들이 사랑하는 조성룡 선생님의 재생건축도 대중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 선생님의 동료건축가로 등장하시는데 그 정도로는 아쉽다.
찬: 능력 있는 건축가 대부분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인식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나라의 설계비는 창피한 수준이다. 공사비를 아끼면 건물이 나빠지니 설계비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건물은 도면 10장으로도, 100장으로도 지을 수 있다. 다만 고민과 검증의 무게가 다른 만큼 고스란히 공사비의 차이로 연결된다. 고민과 검증이 치열할수록 공사비 운영도 정확해지고 절감 효과와 품질 향상이 따라올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원래 지속적이었지만 요즘에 이르러 보다 활발한 것 같다.
숙: 소비자들에게 자기 브랜드에 대한 총체적 경험을 제공하는 장소를 조직하기 위해서 궁리하는 것 같다. 다른 비즈니스 영역으로 넘어가고자 할 때 이미 구축된 브랜드 가치가 보여지는 공간을 이용한 비즈니스가 효과적이다. 패션과 건축을 소비하고 수용하는 방식은 ‘경험의 소비’란 점에서 공통적이다. 기능적 필요를 넘어서 이미지 소비의 영역에서 패션과 건축은 분명 비슷한 양상이 있다.
본:장 누벨이나 안도 다다오, 프랭크 게리, 요즘은 팝스타가 된 건축가가 많다. 그들의 명성이 브랜드에 부여됐을 때 얻어지는 상업적 작용이 있다면 건축가 입장에서는 기능에 구애 받지 않고 럭셔리하게 작업하면서도 조형성이나 파격성, 추상성을 강하게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내구성이야 기본적인 공간의 원칙만 지키면 되지만 데코레이션은 얼마든지 화려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오모테산도와 아오야마에 있는 건물들이 스타 건축가와 럭셔리 브랜드의 욕망이 딱 맞아떨어진 사례다. 일반인들도 오모테산도 프라다 매장 앞에 가서 사진도 찍고 좋아하는 거 보면 그런 화려하고 장식적인 건물이 도시에 필요한 측면도 있다. 그걸 해낼 수 있는 건 바로 그 극소수의 스타 건축가들이다. 건물의 부가가치도 높이면서 대중의 주목까지 끌어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럭셔리 브랜드들은 건축에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찬: 1900년대 중반에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라는 건축가가 남긴 사진 한 장이 있다. 자기가 설계한 집의 공간을 찍었는데 자기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은 와이프의 뒷모습도 나온다. 내가 받아들인 건 공간과 의상, 집기들까지 포괄한 토털 아이덴티티, 종합적인 공감각이었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스페셜리티의 공감대와 종합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다루는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의 전반을 대변한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시너지 효과를 내려는 거다. 사실 인더스트리의 속성에서 건축이 훨씬 오래됐지만 패션은 보다 대중적이다. 그리고 건축에도 트렌디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자하 하디드의 팬시한 폼이 그렇다. 심지어 그녀는 패션 분야에서도 리터치를 하고. 건축물이라는 게 엔지니어링이기도 하지만 표피적으로 트렌디해서 패션과 잘 어울린다. 사실 요즘 건축계에서 ‘서피스(surface)’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질감이라는 고유 영역은 패션에서 영감을 얻을 때가 많다.
본: 사실 오래 전에는 건축이 모든 것이었다. 건축의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라 조각공이었다. 화가라는 개념도 16세기까지 없었다. 외벽을 조각하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건축의 개념에 다 포함돼 있었다. 근대적인 개념 안에서 회화, 아트, 디자인으로 쪼개진 거다. 패션과 건축의 컬래버레이션은 어쩌면 본래의 총합적인 형태로 돌아간 건축일 수 있는 거다.
건축이란 분야가 복합적인 만큼 건축가라면 다양한 분야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둬야 할 것 같다.
중: 학생들에게 늘 건축 외의 것도 많이 봐두라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일상부터 사회현상까지 살펴야 한다. 건축가를 마스터의 개념으로 규정한 교과과정이 있는데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사람이 사는 공간과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아니라 형태적인 관심만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니 실제로 일을 하면 너무 힘든 거다. 실버 하우스를 짓거나 유치원을 짓겠다는 사람이 노인이나 아이들 심리는 모르고 자기 편한 대로 설계해선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자기 영감에 의존해서 혼자 죽여주는 걸 만들면 대중과의 괴리가 생긴다. 그런 엘리트주의로 건축주를 가르치려 드는 악순환들이 있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 건축가들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탈피하고 있다.
본: 건축은 20년 뒤를 내다봐야 한다. 설계부터 미래를 내다보는 거다. 미래 사회의 모습이나 건축주의 이래도 예측해야 한다. 예지력이 필요하다. 이 시대에 필요한 집이 뭔가를 고민해야 된다. 그게 인문학이다. 건축가는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개발된 기술을 조합하는 코디네이터다. 어떤 식으로 기술을 채택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니 인문학이 중요하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철학책 읽으라 한다고 짜증내지만 건축은 항상 사람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건축은 예술적인 기술이다. 자주 쓰는 예인데 추상주의 화가 몬드리안과 유사한 건물을 만드는 건축가가 있었다. 한번은 몬드리안 추상화와 똑 같은 의자를 만들었는데 그 의자 가격이 몬드리안 그림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예술은 쓸모가 없어서 비싼 거다. 쓸모를 초월하는 거다. 건축은 쓸모가 있다. 결국 예술이 될 수 없는 거다.
찬: 건축에서 쓰는 소재 대부분은 건축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다른 산업에서 넘어온 거다. 알루미늄이나 컨테이너 조립식 주택 같은 경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부유물들을 재활용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결과다. 건축이 자체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이끌긴 어렵다. 요즘 등장한 미디어 파사드(Media Façade)도 인터랙티브 아트(Interactive Art)에서 끌어온 방식인데 다른 장르에서 10년 정도 활용된 방식이 건축적으로 전용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단열 개념도 그랬고. 어쩌면 배와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했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그런 인더스트리의 사이클을 잘 알았다고 본다. 이런 사이클을 이해해야 장기적인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다. 트렌드는 영속적이지 않지만 트렌드의 흐름은 긴 방향을 알려준다.
본:실내 건축 같은 경우 차용이 더욱 쉽다. 티타늄 강판을 건축소재로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행기나 안경에 먼저 쓰이고 건축으로 왔다. 건축은 보수적이라 안전하게 검증된 것들만 채택한다.
건축가에 대한 로망을 말하는 여자들을 종종 봤다.
승: 난 잘 모르겠는데. 혹시 내게 호감을 보인 여자들이 단지 직업 때문에?(웃음)
찬: 우리 집사람이 내가 <엘르>에서 토크한다니까, 자기를 하라더라. 피부에 와닿는 말 다해준다고.(웃음) 공대생들 가방에서는 공학용 계산기나 공학 관련 책이 나오는데 건축공학과는 스케치북도 나오고 철학책도 나온다. 로우테크와 하이테크가 결합된 느낌이라 인간적이다. 치명적인 단점은 고집이 세다. 아마 건축가의 DNA가 그런 것 같다. 그 정도 고집도 없으면 프로젝트를 끝까지 끌고 가기 힘들다. 직업인으로 봤을 때는 집중도도 높고 낭만이 있어서 멋있어 보일지 몰라도 생활인으로 봤을 때는 나이 들면서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고생 밖에 없다.(웃음) 고집이 센 반면 어느 순간 탁 놔버리는 경우도 있다. 책임감 있는 남편으로 데리고 살기에는 살얼음 같이 불안한 느낌이 있을 거다. 게을러서 옷도 맨날 까만 색만 입고.
본:그런데 또 말은 그럴싸하게 한다. 원래 무채색은 모든 색에 코디가 가능하다고, 모든 색을 함유한 색이라고(웃음).
운명은 언제나 우연의 탈을 쓰고 나타나 뒤늦게야 필연의 맨 얼굴을 드러낸다. 김고은이 ‘배우 김고은’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그랬다. ‘책 욕심이 많아서 당장 보지 않더라도 일단 사고 보는’ 김고은은 ‘심심하면’ 집 인근의 서점으로 향했다. 그 날도 그랬다. 재미있다는 소문을 들었던 박범신 작가의 소설 <은교>를 집어 들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재학 중인 학교 무대에서 단 한번 자신의 연기를 봤던 학교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김고은은 알고 있었다. <은교>가 영화화될 것이며 은교 역에 어울리는 신인배우 오디션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적도 있다. ‘은교 역할을 맡게 될 여배우 꽤나 마음 고생하겠네.’ 하지만 몰랐다. 마음 고생할 그 여배우가 자신이 될 줄은. <은교>의 의상 감독을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정지우 감독을 만나는 자리로 바뀐 뒤 모든 상황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너무 재미있어서 2시간 만에 읽어버렸던’ <은교>는 탐나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앞길이 창창한 20대 초반의 배우 지망생이 만만치 않은 노출신이 예정된 작품을 데뷔작으로 선택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욕심을 누를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작품을 안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한 거에요. ‘그렇게 밖에 못해?’라는 생각도 들고.” 그만큼의 각오가 필요했다. 부모님의 동의도 필요했다. 아버지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10분 뒤, 방에서 나와 딸의 고민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노출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 작품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어. 하지만 그때 또 다른 두려움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네가 그걸 이겨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 그 한마디에 김고은은 스스로가 우습다고 느꼈다. “이렇게 욕심이 나는데 두려움 하나 때문에 포기할까 생각하는 제가 용서가 안되더라고요.” 의심과 욕심 사이에 놓여있던 김고은이 확고한 의지를 쥐게 된 순간이었다.
원래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그녀는 현장 적응력도 남달랐지만 카메라만큼은 낯설었다. 정지우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눈 끝에 방법을 찾았다. “카메라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엉덩이로 이름도 쓰면서 망가져보는 거였어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었다. “낯선 집을 혼자 둘러보는 신이었는데 카메라가 바로 앞에 있는 게 느껴졌어요. 갑자기 카메라가 무서웠고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그 장면만 20번 정도 갔어요.” 김고은은 8시간의 분장을 마친 박해일이 자신으로 인해서 당일에 계획했던 분량을 촬영하지 못했다는 것에 ‘죄송스러워서 속이 다 문드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집중력을 높여주고자 ‘카메라 밖에서 시선을 맞춰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경험을 전하며 격려하는’ 박해일의 배려는 그녀에게 ‘큰 힘이 됐다.’ “잘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고 배운다는 입장으로 갔어요. 그러다 보니 많이 편해졌죠.”
작품 경력 하나 없는 22살 남짓의 신인배우 김고은은 <은교>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주목 받고 있다. 어쩌면 검증된 배우 박해일과 김무열 사이에서 트라이앵글의 한 각을 차지한 신인배우를 향한 관심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렷하게 자기 주관을 드러낼 줄 아는 김고은에게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은교는 겉으로 봤을 때 굉장히 순수함을 가진 아이다운 아이에요. 천진난만하게 행동하고 이야기하고 잘 웃잖아요, 하지만 자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고민했죠.”
김고은은 호기심이 강한 소녀 은교를 닮았다. 박범신 작가는 은교의 눈을 이렇게 설명했다. ‘해맑은 재기로 반짝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세상을 보는 것처럼 아득하다. 단순히 젊다고만 할 수 없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눈빛이다.’ 20대 초반의 앳된 외모에서 싱그러운 젊음이 전해지지만 다양한 의문을 머금은 까만 눈동자는 순수와 관능의 파도가 철썩거린다. “제가 호기심이 많다는 걸 몰랐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제 눈 안에 호기심이 가득하대요. 저도 궁금한 거에요. 그 눈이 뭘까.” 이제 갓 연기에 입문한 신인여배우에게 대단한 상찬은 어쩌면 독이다. 하지만 김고은은 만개할 날을 기대하게 만드는 꽃봉오리처럼 눈이 가는 배우다. 가혹한 부담감을 되레 ‘일상적인 연기를 보다 훌륭하게 해내야 한다’는 야무진 각오로 승화시킨 그녀는 <은교>를 관통하며 긴 야심을 품었다. 단단한 줄기를 뻗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꽃은 그렇게 피어 오른다.
그녀는 야구가 어렵다고 말했다. 어려워서 도무지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날, 그녀가 야구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거짓말처럼 그랬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 쿠바와 맞붙은 대한민국 대표팀은 한 점 차 스코어로 승기를 잡은 채 9회말 마지막 수비에 들어갔다. 차세대 국보급 투수로 꼽히는 류현진이 마운드에 올랐다. 승리를 예감했다. 첫 타자로부터 좌전안타를 맞았다. 동점주자가 나간 상황, 두 번째 타자의 희생번트로 주자는 2루까지 진루했다. 안타 하나로도 동점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두 타자 연속 볼넷으로 1사 만루 상황까지 맞이한 뒤 류현진은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의 마지막 투구는 스트라이크에 가까웠지만 볼 판정을 내린 히스패닉계 주심은 담담했다. 포수 강민호는 격렬한 항의 끝에 퇴장 명령을 받고 덕아웃에 포수 미트를 내던졌다. 마운드를 이어받은 건 마무리 투수로 정평이 난 정대현이었다. 투수와 포수 즉 배터리가 모두 교체된 채 맞이한 9회말 1사 만루 상황, 정대현의 손 끝에서 볼이 뿌려졌다. 유격수 앞 땅볼! 유격수 고영민이 이를 잡아서 2루를 밟은 뒤, 1루로 송구했다. 대한민국 야구팀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이었다.
스피드건에 150km는 찍혔을 거라던 강민호의 터프한 미트 던지기 덕분인지, 무심하고 시크한 정대현의 ‘차도남’ 투구 덕분인지 몰라도 52%의 시청률을 기록한 베이징올림픽 야구 결승전의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야구장에 모여들었다. 2009년 프로야구 관중은 520만 명을 넘겼다. 전년 대비 100만 명 이상이 늘어난 수치다. 그게 다가 아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년보다 눈에 띄게 여성관중이 늘었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 이후로 경기당 여성 관객 비율이 30% 수준이라고 밝혔다. 2008년 이전까지는 15% 안팎에 머무르던 수준이었다. 680만 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역대 최다 관중수를 기록한 지난해에는 40%에 육박했다. 롯데 자이언츠 홍보팀의 임채무 씨가 전한 부산 사직구장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
환기되는 사례가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의 ‘축’ 자도 몰랐던 대부분의 여성들이 레드카펫처럼 넘실대는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길거리 응원을 즐겼고, 축구를 알게 됐다. 문제는 월드컵이 끝난 뒤, 그 열기를 이어갈 공간을 찾지 못했다는 것. 프로축구에는 그녀들이 기대했던 월드컵의 열기가 없었다. 쉽게 말해서 프로축구는 인기가 없었다. 프로축구 구장의 텅 빈 관중석에서 월드컵 당시의 열기란 겨울 한파 속에서 떠올리는 한여름 무더위 같았다. 월드컵 무대에서 반짝거리던 태극전사들도 프로축구 안에서는 존재감을 잃었다. 프로야구는 달랐다. 출범 30주년을 맞이한 프로야구는 일찌감치 한국의 국민스포츠 자리를 꿰찼다. 팬덤의 스케일과 문화적 저변이 달랐다. 야구장은 만원이었고, 응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야구장에서 한번 놀아봤다는 여성들은 그 매력에 마구마구 빠져들었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그라운드를 생전 처음 본 그녀들은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파도타기에 합류하기도 하고 입에 붙는 선수들의 응원가에 목청을 높여보다가 야구장에서 먹는 ‘치맥’ 맛을 잊을 수 없어서 야구장의 단골손님이 됐다. 뒤늦게 발견한 놀이터에서 마음껏 놀았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베이징올림픽 야구경기를 지켜본 여성들은 2002년 월드컵 때도 그러했듯이 다부진 선수들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에 열광했다. 스포츠 스타의 탄생은 곧 그 분야의 관심으로 이어진다. 1994년도 농구대잔치 당시, 연세대와 고려대 농구부는 실업팀들을 꺾으며 파란을 일으켰다. 장동건과 손지창 등 당대 청춘스타들이 대학농구선수로 출연했던 <마지막 승부>에 열광했던 소녀팬들은 농구장을 찾아 젊은 농구스타들에게 드라마의 팬덤을 이입할 수 있었다. 스타성은 곧 상품성이다.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에서 태극기를 달고 활약했던 선수들은 스포츠 스타는 스포츠 마케팅의 최전선에 배치된다. 두산 베어스 홍보팀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1년 사이에 여성의 신체사이즈에 맞춰서 출시된 유니폼 판매율이 4배까지 뛰었다. 야구중계 화면에서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여성팬의 이미지가 심심찮게 포착됐다. 야구장에 놀러 갔던 그녀들은 야구팬이 돼서 돌아왔다. 프로야구 신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그녀들에게 각 구단들의 구애가 시작됐다. 여성팬을 겨냥한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고 활발히 진행한다. 두산 베어스의 ‘퀸즈 데이’가 대표적이다. 한 달에 한번 핑크색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하는 두산 베어스 선수들은 그날만큼은 팬들을 위해서 뛴다. 스킨십 전략을 통해서 친밀감을 높여나간다. 야구장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사실 야구는 즐기기 위해서 학습이 필요한 스포츠다. 즉각적인 액티비티가 뚜렷하게 체감되는 축구와 농구 등과 달리 룰을 먼저 숙지해야 비로소 액티비티가 보인다. 그만큼 확고한 흥미가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일찍부터 야구에 흥미를 갖지 못했던 여성들이 견고한 야구팬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그래서 흥미로운 변화다. 본래 한국에서 야구장은 수컷들의 놀이터였다. 1982년,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을 했건 말건, 고교야구의 인기를 이어받은 프로야구는 출범 초기부터 대단한 팬덤을 구축했다. 지역 감정이 팽배하던 1980년대의 정서를 확실하게 긁어댄 덕분이기도 했다. 광주 무등경기장에서는 ‘목포의 눈물’을, 부산 사직구장에서는 ‘부산 갈매기’를 불렀다. 응원하는 팀의 패배로 격분한 어떤 홈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물병을 던지고, 상대팀 선수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다. 야구장은 분리와 단절의 정서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의 병리적 심리가 체감되는 바로미터의 현장이었다. 그만큼 과격했다. 정치적 부조리로 인한 갈등이 스포츠의 팬덤으로 위장한 듯한 불편한 진실.
야구장을 찾는 젊은 여성팬들이 늘어난다는 건 어쩌면 우리 사회가 낡은 시대성을 극복해나가고 있음을 대변하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젊은 남녀 커플이 각자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나란히 앉아있는 야구장의 풍경은 이 사회의 취향과 여유가 한 뼘 늘었음을 증명한다. 서로 다른 취향을 인정하고 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다. 각자 다른 방향을 응원하면서도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그녀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태생적 의무감을 얹지 않는다. 그저 잘생긴 선수의 플레이가 좋아서 응원하는 팀을 결정했다니, 얼마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인가. 지역갈등 따위는 그녀들에게 중요치 않다. 여자는 야구의 미래다.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하지만 상영하는 곳이 없다. 개봉한지 한 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난 2월 27일, LA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대에 오른 장 뒤자르댕(Jean Dujardin)의 탭댄스가 생중계됐다.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게리 올드만과 같은 할리우드의 초신성급 배우들을 제치고 헬리 혜성처럼 나타난 장 뒤자르댕은 오스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스타들은 무대에 오르는 낯선 프랑스 배우의 뒷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21세기에 등장한 무성영화 <아티스트>의 출현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아티스트>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의 주요부문을 휩쓸며 아카데미 5관왕에 올랐다.
이 소식은 한국 관객들의 호기심마저 당겼다. <아티스트>가 재미있다고? 그러나 상영관을 찾기가 힘들다. <아티스트>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온 건 28일 오전이었다. 전국 58관의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개봉 당시에는 90관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사이트에 명시된 국내 총 상영관은 2312관이다. 스크린 점유율 약 1.6%. 물론 아카데미의 지원사격으로 <아티스트>는 좀 더 국내상영관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29일 경 95관으로 확대 개봉됐고, 3월 7일 경에는 100여 관 안팎을 오갔다. 개봉 이후, 한 달이 지난 3월 16일에는 29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아티스트>의 북미 개봉일은 2011년 11월 25일이었다. 미국 내 전체 상영관은 36000여 관 정도로 추산된다. 4개관에서 개봉됐다. 점유율로 보자면 한국보다 더욱 심각한 셈.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에서 개봉 네 달에 다다르는 3월 15일경, <아티스트>는 1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개봉작의 상영관 확보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와이드 릴리즈(wide release)와 리미티드(limited). 대규모 단위로 상영관을 확보하는 와이드 릴리즈는 거액을 들여 제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단기간에 최대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 상영관을 대거 포섭해 관객의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리미티드는 그 반대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많은 상영관을 확보할 수도 없고, 한 편으로 그럴 필요가 없다. 영화를 배급한다는 건 상영관에서 영사될 필름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필름을 제작하는 것도 자본의 소요다. 저예산 영화들의 수익구조 안에서 필름 제작에 자본을 소모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리미티드 방식의 배급은 불합리라기 보단 효율적인 선택이다.
한국과 미국은 배급사와 극장주의 수익 배분 구조도 다르다. 한국은 제작사와 극장주가 정확히 반반으로 나눈다. 공평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극장이 온전히 절반을 먹는다면, 제작에 관여한 제작사와 배급사 휘하의 모든 이들이 그 절반을 나눠먹는 구조인 셈이다. 제작사를 도매상으로 보자면 폭리를 취하는 소매상을 만난 격이다. 미국에서는 수익 구조가 유동적이다. 일반적으로 미국 극장들은 흥행이 기대되는 영화에게 80% 가량의 지분을 준다. 블록버스터들이 이에 해당된다. 반대의 경우, 상황은 역전된다. 극장이 8을, 제작사가 2를 가져간다. 흥행 여부가 불확실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주의 입장을 안배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영화가 높은 수익을 올린다면? 상황은 다시 변한다. 수익 배분 구조 또한 역전된다. 2를 가져가던 영화사가 8을 가져가는 구조로 변한다. 그리고 흥행성이 확인된 영화의 상영관 또한 늘어난다. 리미티드에서 와이드 릴리즈로 전환된다. <아티스트>가 그랬다. 1월 20일, <아티스트>는 미국 내 662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와이드 릴리즈됐다. 미국의 영화시장은 한국 못지 않게 대자본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다. 하지만 시장의 영향력도 그만큼 막강하다. 영화의 제작과 배급의 구조가 분리된 덕분이다. 국내 상황이 이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고 극장까지 소유한 대기업의 지배 상황이 공고한 까닭이다.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의 위력은 2차 판권 시장이 초토화된 국내 시장에서 더더욱 강력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제작사 대표는 말했다. “만약 DVD 같은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했다면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배급 구조가 이뤄지진 않았을 거다.”
국내에서 영화는 개봉주에 흥행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서 완벽하게 명암이 뒤바뀐다. 2차 판권에 대한 이익이 미비한 국내 영화 시장의 상황 속에서 제작사들은 상영관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들이 저마다의 파이를 꽉 쥐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의 다양성이 확보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전국 곳곳에 극장 체인망을 확보한 제작배급사는 스크린 점유율이 낮은 영화를 장기상영하며 관객의 입장을 유도하고 경쟁 영화들을 교차상영 방식으로 밀어낸다. 가뜩이나 설 자리가 비좁은 작은 영화들은 자연히 도태된다. 한때 독립상영관이 대안의 형태로 제시됐으나 몇 년 사이 수많은 독립상영관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작은 영화들은 집을 잃었다. 시장 구조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어쩌면 그런 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건 대자본을 쥔 영화사를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시스템을 단순 비교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이건 기형적인 시장과 시장 규모의 문제이다. 시장이 넓어야 투자한 자본을 거둬들일 수 있는 경로의 확보도 보다 쉬워진다. 티켓을 살 관객은 모자라고, 흥행을 바라는 영화는 넘친다.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낙타를 집어넣기. 그런 상황에서 일주일 단위로 영화의 성패가 결정되는 극장에서 제작비의 대부분을 회수해야 하는 수익구조는 심각한 문제다. 극장에서 내려간 영화는 갈 곳이 없다. 어쩌면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그게 내 입장에서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당장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을 때, 상황은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대체 <아티스트>를 상영하는 극장이 왜 이리 없단 말인가? 영화가 별로라서? 아니다. 그건 정작 당신이 찾기 쉬운 극장에서 딱히 당기지도 않는 영화가 상영하는 것을 별 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영관을 찾아 발품을 파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 당신의 취향이 존중될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그저 손쉽게 클릭 한번으로 영화를 소유하는데 만족하는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손쉽게 영화를 소유하는 재미에 탐닉한다면, 그 영화들조차 존재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인디밴드 ‘못’의 프론트맨 이이언이 홀로 돌아왔다. 우주를 홀로 유영하듯 외로운 여정을 건넜다는 그가 감내했던 고독들이 나직이 내뱉어졌다.
예사롭지 않은 음표들이 귀에 꽂혔다. 밴드 이름이 ‘못’이라 했다. 벽에 박는 그 뾰족한 못? 그럴싸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듣고 보니 우울함이 대못처럼 가슴에 푹푹 박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해였다. 내 마음은 호수, 아니 연못이오. 일렉트로니카 특유의 기계적인 사운드가 기타 리프에 걸려 심연으로 묵직하게 침전해가는 느낌, 마음을 크게 흔들기 보단 무겁게 잡아 깊이 내려앉는 감성의 음표들. 그것이 바로 ‘못’의 음악이었다. ‘라디오헤드, 포티쉐드, 스매싱 펌킨스를 좋아하고 록, 일렉트로니카 재즈, 트립합을 재료로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할 사람을 찾는다.’ 못은 멤버를 구하는 이이언의 공고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지이가 찾아왔다. 이이언이 만든 음표에 지이가 기타를 치니 이이언이 노래했다. 그렇게 못의 1집 <비선형>과 2집 <이상한 계절>이 완성됐다. 파열하는 기타음의 뜨거움과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의 기계적인 차가움이 공명하는 못의 음악은 인디음악계를 넘어서 한국음악계의 특수한 이정표가 됐다.
2007년에 발표한 <이상한 계절> 이후로 못의 노래가 멈췄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서 소리 소문 없이 메워버린 것마냥 못이 사라졌다. 그리고 2012년, 이이언이 돌아왔다. 더 이상 못이 아니었다. 이이언의 음악은 못의 그것이거니와, 한편으로 못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그는 왜 못에서 나와 혼자가 되길 결심했을까. 스튜디오에서는 김영하 작가의 내레이션이 담긴 이이언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가 담담하게 울리고 읊어지는 동안, 이이언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들고, 뜨거운 증기를 흡입했으며, 이내 말했다. “이전까지는 무리를 해서라도 내 고집과 의지로 내 욕심을 채워내곤 했어요. 그런데 이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되게 무력해지더라고요.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체념도 빨랐던 거 같아요.” 성대 폴립의 발생, 못의 두 번째 유영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이언의 상황과 함께 잠겨버렸다. 일종의 ‘무력감’이 이이언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머뭇거리며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한달 반 정도의 휴가, 음악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이이언에게 그렇게 긴 휴가가 주어진 건 처음이었다. “친한 친구가 미국에 살아요. 동생과 함께 가서 한달 반 동안 낚시를 했죠.” 낚시라니, 추구하는 음악만큼이나 역시 정적인 취미를 즐기는 편이었던 건가. 그가 대답했다. “액티브한 편은 아니에요.” 그의 음표들이 만들어낸 선입견 중 하나가 들어맞았다. 반도체처럼 섬세하게 한 음 한 음을 회로처럼 설계해 넣은 듯한 그의 솔로 앨범 프로젝트 <길트-프리(Guilt-Free)>는 그의 편집증적인 음악 스타일이 더욱 구체화된 결과물이었다. 그만큼 예민한 성격이리라 예감했다. “예민하죠. 다만 혼자 예민한 것과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구는 건 또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노력하는 편이에요. 근본적으로 인생이 비극이라 생각하기에 열심히 반대로 노를 젓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거기에 휩쓸리고 말 테니까.” 그가 말하는 비극이란 단어가 삶에 대한 비관처럼 들리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인생에서 수반되는 고통 그 자체에 대해서 쿨하게 인정하는 태도에 가깝다. “모든 삶이 저절로 행복해지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세상은 제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그것을 바로 갖지 못하도록 막는 성질이 있어요. 음식을 먹고 싶다면 돈을 지불해야 하듯, 즉각적으로 채우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 세상은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니까요.” 그는 그것이 욕구와 충족 사이의 ‘균형’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해하기에 세상은 단순한 낙관이나 밑 빠진 긍정으로 돌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라는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 식의 감언이설을 싫어해요. 이를 테면 김태희는 세상에 단 한 명이죠. 모든 사람이 김태희가 여자친구가 되길 바란다 해도 결코 김태희의 애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나 간절히 원한다 해서 김태희를 다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결국 정말 간절히 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것들이 있고, 사실 대부분은 이룰 수 없는 것들이죠. 돈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외모가 부족하거나.”
균형은 이이언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화두다. 음표들을 기계적으로 찍어대면서도 음의 간극마다 감정을 불어넣어야 했던 <길티-프리>를 작업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끊임없는 균형잡기 싸움이었다. “다시 못으로 복귀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일단 워밍업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처음에는 편한 마음으로 작업하고 싶어서 이 솔로 프로젝트를 구상했죠. 일관성이 없거나 중구난방이라 해도 솔로 프로젝트니까 알아서 감안하고 들어주리라 생각했고요.” 사실 이이언이 계획했던 솔로 앨범 발매 시점은 2년 전이었다. 그때 즈음에는 대부분의 곡도 나와있었다. 그러나 작업을 시작하며 그는 점차 스스로를 압박했다. “정제돼 있지 않고, 일관성이 부족한 걸 견딜 수 없었죠.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2년 동안 다시 균형을 찾아서 미세하게 조정해나갔어요.”
<길티-프리>라는 타이틀의 의미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만약 2년 전에 앨범을 냈다면 나는 죄책감(guilt)을 느꼈을 거에요. 이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길트에 대해서 이처럼 정의했다.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길트가 생긴다고 해요. 그러니까 창피함(shame)은 사회문화적인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즉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짓을 할 때 느끼는 것이지만 죄책감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죄책감을 많이 느낀다는 건 그만큼 그 기준이 높다는 거죠.” 완벽하지 않은 결과물이 죄의식처럼 느껴진다는 비장함, 이이언이라는 뮤지션에 대한 신뢰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둘이었던 ‘못’에서 ‘이이언’이라는 하나가 되는 건 고독한 여정이었다. “혼자 작업하면서 마무리 단계로 갈수록 홀로 우주로 유영하는 기분이 느껴졌어요. 우주복을 입고 산소호흡기 하나를 매달고서 아무도 없는 우주를 헤쳐나가며 간신히 무선 교신 정도만 가능한 그런 정도의 느낌.” 한때 그는 완벽해지기 위해서라면 일생을 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 <이상한 계절>을 발표한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만약 100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100년 동안 작업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번 작업 중에 저는 스스로 저의 고갈된 바닥을 봤어요. 그런 바닥을 보고 나니까 이제 그런 호언장담은 못하겠어요. 이런 작업도 다시 못할 거에요. 제가 지닌 마지막 한 방울까지 총동원해서 정리하는 느낌이었죠.” 결국 그는 한달 간의 휴가를 요청했고, 그 바닥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바닥까지 내려간 이이언의 앨범에서 주목할 수 있는 건 그가 만들어낸 사운드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그의 앨범을 통해서 눈에 띄는 몇몇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앨범의 마지막 트랙에서 발견되는 김영하 작가의 내레이션은 실로 이색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제목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 단편집의 제목을 빌린 것으로 이이언은 원작의 북트레일러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영하 작가의 전위적인 음성이 다시 한번 스튜디오를 채울 때 즈음 두 사람의 인연을 물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트위터를 통해서 서로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대화가 잘 통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열려 있는 편이며 언제나 새로운 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분이셨어요.” 김영하 작가가 직접 소설집의 절반 가까이를 낭독하고 녹음해서 이이언에게 전달했고 이이언은 그 일부분을 선택해서 작업한 결과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다. “약간 공격적이면서도 리듬감이 있고, 음악적인 느낌이 좋아서 저 부분을 썼어요.” 속물적인 삶에 대한 냉소적인 조소에 가까운 가사, 이이언의 선택은 짙은 감수성에 가려졌던 그의 감춰진 취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니컬한 것도 재미있어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아주 못된 농담들, 이를테면 <사우스파크> 같은 애니메이션도 좋아해요.”
이번 솔로 앨범에는 그가 리메이크한 두 개의 커버곡이 담겨 있다. 하나는 지금은 해체한 미국의 밴드 짜르의 ‘드럭’과 현진영의 ‘슬픈 마네킹’이 바로 그것. 그런데 잠깐, 이이언과 현진영이라니 이 어마어마한 간극이 메워질 수 있는가? 물론 이이언이 토끼춤을 추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이상 걱정도 마시라. “정작 노래를 들었을 때 슬프단 생각을 못했는데 문득문득 가사를 곱씹을 수록 정말 슬프고 쓸쓸한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감성과도 맞는 부분이 있었죠.” 이이언의 ‘슬픈 마네킹’은 현진영의 원곡에 대한 재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또 다른 ‘슬픈 마네킹’이다. 그의 오래된 블로그 주소는 그가 창조한 ‘애시크래프트(ashcraft)’라는 단어를 입력할 때 열린다. 일명 재(ash)의 기술(craft). “재라면 타고 남은 것이죠. 재처럼 타고 남은 어떤 대상이 어쩌면 지나가버린 시간일 수도 있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면 그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바로 재의 기술이에요. 제겐 음악이 그래요.” 그의 리메이크는 바로 그가 말하는 궁극의 ‘재의 기술’이 아닐까. 그는 실제로 리메이크에 관심이 많다. “예전에 못 공연 당시에도 항상 리메이크 커버곡들을 못 스타일로 연주했어요. 심지어 지금 리메이크 앨범도 구상 중이에요. 단지 노래만 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로부터 다시 만들어내는 그런 리메이크.”
록 사운드를 밑그림 삼아서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트립합 사운드를 채색한 ‘못’의 음악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기계적인 사운드 속으로 파고든 그의 솔로 앨범 역시 국내 음악계의 현실 안에서는 지극히 실험적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방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정립된 못의 사운드가 있기에 굳이 못이라는 이름으로 큰 변화를 시도하고 싶진 않아요. 못으로서 할 수 없는 스타일을 솔로 앨범으로 해보고 싶었죠.” 그리고 못을 시작할 때도 그러했듯이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 “어딘가 균형의 중심이 있을 것이기에 그 균형을 찾아가다 보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요.” ‘못’이 아닌 ‘이이언’으로서 가능했던 시도들은 이제 새로운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가수 박정현으로부터 작곡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가수다>의 박정현 말이다. 박정현과 이이언의 결합이 상상이나 되는가.
본래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꿈꾸던 그가 뮤지션의 길로 선회한 건 대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주어진 목표를 만족시키는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직업이잖아요.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주어진 시간 내에 얼마나 효율적인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느냐라는 차이가 있을 뿐,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나니 결과물의 만족도를 떠나서 나만의 유익한 결과물을 내는 일이 보였어요.” 그의 솔로 앨범을 공연하기 위해서 풀셋업을 하자면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랩탑만 세 대가 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한 기계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만큼 컴퓨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한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꿈꾸던 두 가지 꿈을 모두다 이룬 셈일지도 모른다.
이이언은 언젠가 다시 못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다. “이미 곡을 써놓은 것도 좀 있어서 EP로 정리해서 발매하면 지금도 가능해요. 다만 멤버 구성도 재정비해야 하니 빠르면 내년 정도?” 기존 멤버였던 지이가 개인적인 사유로 팀을 탈퇴한 지금, 못의 여백을 채우는 건 이이언의 몫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라디오헤드, 포티쉐드, 스매싱 펌킨스를 좋아하고 록, 일렉트로니카 재즈, 트립합을 재료로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할 사람’을 찾을 것인가. 이이언의 대답은 단호하다. “못 1,2집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야죠.” 어쩌면 당장은 그토록 힘겨운 앨범 작업을 끝냈으니 다시 한번 휴가를 떠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지 않을까. “지금도 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가끔 일정 없는 날은 집에서 쉬어요. 하지만 나란 인간은 어떻게 돼먹었는지, 그런 날이 더 우울해요.” 감성을 쪼개는 남자, 이이언과의 대화가 끝날 때 즈음 다시 한번 김영하 작가의 내레이션 중 마지막 문장이 귓가를 스치고 흩어졌다. “그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마크 월버그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듯 10대를 관통했다. 암담한 어제는 지났다. 다만 결코 잊지 않는다. 이제 그는 가장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족과 함께 오늘을 산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밀수업자였던 크리스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벗고 새로운 삶을 입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가 있다. 가족은 그 남자가 사는 이유다. 그러나 마약밀수업자들의 운반책 노릇을 하던 처남이 얻게 된 큰 빚을 대신 갚기 위해서 다시 밀수를 모색해야 할 상황에 내몰리면서 그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콘트라밴드 Contraband>는 어느 가장의, 아버지의, 결국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마크 월버그는 평범한 삶을 꿈꾸는 그 가장의, 아버지의, 한 남자의 사연을 대변한다. ‘딸바보’로 잘 알려진 마크 월버그(Mark Wahlberg)는 할리우드에서도 가정적인 남자로 손꼽히는 남자다. “아이가 생겼을 때, 미치도록 행복했다. 내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삶이 실현됐으니까.”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스타배우이자 행복한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그의 오늘은 한때 결코 기약할 수 없는 미래였다.
메사추세스주 보스턴 남쪽 교외에 자리한 도체스터에서 태어난 마크 월버그는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10대를 건넜다. 가난한 집안에서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열한 살 되던 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마크 월버그는 열세 살 무렵 코카인에 손을 댔다. 열네 살의 나이로 학업을 중단했고, 열여섯 살에는 교도소에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마약과 폭력은 마크 월버그의 유년시절을 기워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회복시킨 건 가족이었다. 2년 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간 그는 검정고시 자격을 얻었다. 특히 희대의 아이돌 스타로 군림했던 뉴키즈 온 더 블록의 원년 멤버인 친형 도니 월버그는 동생의 삶을 견인하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의 원년 멤버로 발탁됐지만 스스로 기회를 날려버린 적이 있었던 마크 월버그가 후에 마키 마크라는 힙합 뮤지션으로 데뷔해서 성공을 거둔 것도 제작자로서 서포트해준 형 도니 덕분이었다.
결과론에 가깝지만 마크 월버그가 경험한 이른 일탈은 현재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을 위해 마련된 이른 성장통이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이른 나이의 과오는 그만큼 삶의 방향을 일찍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된 셈이다.“후회할만한 짓을 많이 했다.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되기까지 스스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진정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때까지.” 그가 추구하는 ‘제대로 된 삶’은 배우로서 실현됐다. 배우 마크 월버그의 경력에 있어서 방아쇠가 된 건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감독의 <부기 나이트>다. 7~80년대 미국의 포르노 산업의 열풍과 몰락을 살피는 이 작품에서 마크 월버그는 당대의 포르노 스타로 출연하며 남다른 물건으로서의 자질을 드러냈다. 조지 클루니와 함께 출연한 걸프전 배경의 코미디물 <쓰리 킹즈>와 팀 버튼 감독의 리메이크 SF물 <혹성탈출> 그리고 다채로운 출연진과 캐릭터가 눈길을 끄는 범죄물 <이탈리안 잡> 등으로 할리우드에서 확고한 위치를 만들어나갔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로 전미 비평가 협회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유년 시절 온갖 비행을 전전한 콜린 패럴이 야생마 기질의 배우로 성장한 것과 달리 마크 월버그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배우가 됐다. 가족의 불화와 가난으로 인해서 길거리의 비행에 내몰렸던 그가 건강하고 정직한 이미지로 거듭나며 가족적인 가장의 면모를 갖추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길거리에 내몰려 스스로를 망쳐가던 시절에 그가 꿈꾸던 삶이었고, 영화를 통해서 그런 희망을 회복해나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콘트라밴드>는 마크 월버그의 자전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작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연배우뿐만 아니라 직접 제작자가 되길 자처한 그는 자신이 연기한 크리스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얻었다.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상황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많은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각각 다른 상황에서 생각과 행동을 이어나가는 방식이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또한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착하고 성실한 남자다. 문제를 해결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방법을 찾아 나간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의 고단하고 간절한 여정에 마크 월버그는 기꺼이 동참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제작된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 <콘트라밴드>는 원작의 뼈대를 최대한 살리고 할리우드의 효율적인 제작방식으로 새로운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특히 아이슬란드에서 활동하는 감독 겸 배우이자 <콘트라밴드>를 제작하고 원작에 직접 출연한 바 있는 발타자르 코크마쿠르(Baltasar Kormakur)가 연출을 맡았다는 것도 이색적이다. 마크 월버그는 그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배우이기도 한 그는 카메라 앞에서도, 카메라 뒤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굉장히 잘 파악한다. 다른 사람과 소통할 줄 알고, 용기를 북돋워 주는 법을 안다.” 뉴올리언즈와 파나마를 오가며 로케이션으로 진행된 촬영은 단 37일만에 종료됐다.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적지 않은 액션 신이 연출된 이 작품이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됐다는 건 결국 제작진들의 신뢰로 구축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콘트라밴드>는 올해 오프닝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현재 마크 월버그는 발타자르 코크마쿠르의 새로운 코미디 연출작에 출연을 결정하고 덴젤 워싱턴과 함께 호흡을 맞출 준비를 하고 있다.
마크 월버그는 소문난 타투 마니아다. 지난 해 그는 자신의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문신 제거 시술을 받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아이들이 내 문신을 싫어하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그 광경을 목격하게 만든 건 아버지로서 전하고픈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신을 지우는 고통을 보여주면서 어떤 행동에는 책임져야 할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일찍이 삶이 산산조각나는 순간을 체험했기에 그 뼈저린 교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아버지의 진심, 마크 월버그에게 있어서 지금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가 매일 같이 돌아가야 하는 집에 있다. “나는 두 딸과 두 아들이 생기기 전까지 가정적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이 나를 변화시켰다. 영화에서처럼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생각할 여지도 없는 문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마크 월버그는 오늘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