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영화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공항에서 손짓을 이용해서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를 마중 나간 모양이다. 친밀한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차 앞좌석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두 사람의 재회가 이혼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그 끝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의 문턱을 넘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예상 밖의 이야기 범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운용 방식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입장을 핵심으로 그와 연관된 주변부의 입장을 끌어들이며 극의 너비를 확장해나간다. 단순명확해 보이던 사안이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확대된다. 평범해 보이던 사연이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과 충돌하고, 그로 인해서 예기치 않게 불거지고 밝혀지는 진실들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평면적인 일상의 기류에 입체적인 변곡점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이야기의 절정이 형성된다. 감독 아쉬가르 파라하디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도 명확해 보이는 사연의 끝으로부터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의 방향성을 살핀 바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끝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는 끝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굴러나간다. 그 예측하기 힘든 방향성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부조리극의 양상 자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그 복잡다단한 이야기 흐름만으로도 감정적인 진통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에게 가능한 화술과 작법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단지 그런 이야기 구조에 대한 흥미만을 안겨주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는 명확한 결말을 묘사하는 대신 카메라를 두고 떠나버리듯 롱테이크 기법의 엔딩 시퀀스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해 보이던 도입부 상황과 대비적인, 어떤 것도 불확실해진 결말부의 상황 자체를 아이러니한 여운으로 각인시킨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상황들의 내면엔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켜켜이 쌓인 오해들이 존재했고 그렇게 방치된 비밀과 오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당사자들의 삶을 휩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의 진실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알았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으로 가닿는다. 인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엔딩 시퀀스의 이미지는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진동시킨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었다고 했다. 마치 자신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오랜 대화라도 나눈 사람처럼, <미생>을 말한다. <미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택시에서 스마트폰으로 <미생>을 보다가 울컥했다. 눈물을 훔치니 택시 기사가 사연을 물었단다. 말해봤자 알겠나 싶었지만 <미생>이란 만화를 보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택시 기사가 ‘허허!’ 웃더니 물었단다. “아니, 그 <미생>이란 만화가 대체 뭐요? 얼마 전에 한 여자도 뒤에서 갑자기 펑펑 우는 거야! 그래서 뭔 일 있냐고 물었더니 아, 글쎄 그 <미생>인가 뭔가를 봤다네? 아니, 그게 뭔데 그리 울어?” 친구의 소주잔을 채우면서 전해들은 경험담이다. <미생>이 연재된 포털사이트의 댓글 게시판엔 이 같은 사연이 차고 넘친다.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한 넋두리를 쏟아낸다. 자신의 이야기 혹은 주변의 이야기를 한다. <미생>을 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미생>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본다.
<미생>은 어느 실패자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바둑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에 바둑연수생이 된 장그래는 입단에 실패한 뒤 7년 만에 프로바둑기사라는 꿈에서 이탈한다. 낙오한다. 돌을 던진다.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던 소년이 고졸의 낙오자가 돼서 사회로 나온다. 바둑판에서 추방된다. ‘열심히 안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안해서인걸로 생각하겠다.’ 아픈 말로 자신을 누른다. 스스로를 합리화시킬만한 핑계는 많지만 그 핑계마저 자신을 찌르는 일이니 차라리 스스로를 짓누른다. 실패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란 대부분 성공으로 역전되는 희망의 송가로 귀결된다. <미생>도 희망을 찾는 작품이다. 하지만 ‘성공’에 관한 드라마는 아닌 것 같다.
어머니의 지인을 통해서 대기업 인턴사원으로 입사한 장그래는 2년 간의 계약직 사원 근무 끝에 정직원이 되지 못한다. 그가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고졸이기 때문이다. 그가 머물렀던 조직의 규격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장그래가 회사에 적응하고,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일 때, 독자들은 뜨거워졌다. ‘이만하면 장그래도 정직원 자격이 있네! 정직원 되겠네!’ 응원했다.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는 단순히 이상에 영합하지 않았다. 되레 현실을 직시했다. 장그래는 ‘정직원이 되기 힘들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말했다. “작품이 리얼리티만을 담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실을 무시하는 것도 기만이다. 특히 <미생>이 많은 지지를 얻은 건 독자들이 당면한 실질적인 고민을 대변했기 때문인데 장그래가 정사원이 되면 그걸 무시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독자에게 말을 건다. 뜨겁기만 한 빈말보단 차가운 척 따뜻하게, 정말로.
<미생>이 그리는 건 이 사회의 전형적인 관료제다. 겉으로 보기엔 언뜻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인 듯하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체계와 질서의 합의와 균형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맹점을 지적하고 질타하기 보단 그것이 합리화되고 안착할 수 있는 배경을 살핀다. 그 끝엔 언제나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이 사람에서 시작돼 사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람을 얻고, 사람을 쓰고, 사람을 통해서 계획이 수립되고, 정책이 시행되고, 결과가 완성된다. 제도가 완전해도 사람은 불완전하고, 결국 체계도 불완전해진다. 오류가 발생한다. 오류를 막기 위해서 제도는 보완되고 방파제처럼 강건해진다. 예외란 좀처럼 사용하기 힘든 단어다.
“이대로 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장그래에게 직속 상사는 답한다. “안 될 거다.” 이유란 이렇다. “세상은 원래 불완전한 거니까.” 불공평이나 불평등이 아닌 불완전함. 본래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말은 절망이다. 하지만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희망이다. 단지 그곳이 당신의 세상이 아닐 뿐이란 말이니까. 거기서 다시 <미생>은 말을 건다. 장그래에게 어쩌면 당신에게. ‘지금의 회사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닐 거야.’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은 대단히 이상적인 팀이다. 직속 팀장인 오차장은 “일은 뺏겨도 사람은 안 뺏겨”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직위에 따라 역할을 수행하고 부조리가 없으며 체계가 원활하다. 서로를 존중한다. 홀로 작은 바둑판 위에 집을 짓고 부수던 장그래는 사회로 나와 바둑알 같은 존재가 돼서 스스로를 구축한다. 자신과 함께 집이 되는 바둑돌들을 마주한다. 기대고, 부딪히고, 마주본다. 사람을 얻는다. 세상을 익힌다. 삶을 내다본다.
<미생>의 끝, 정확하게 1부의 끝에서 장그래는 다시 자리를 찾는다. 불완전한 세상을 가르쳤던 오차장이 둔 포석에 합류한다. 미생이 모인다. 완생을 꿈꾼다. 2부는 거기서 시작된다. 바둑연수생을 포기하고 기원에서 나오던 장그래와 계약직 만료 메시지를 받고 회사에서 나오는 장그래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패배감이 사라졌다. 더 이상 스스로를 짓누르지 않는다. 그것이 패배만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인프라는 나 자신이었다.” 단단하게 여문 장그래를 통해서 당신도 어쩌면 성장했다. 막연한 희망을 품었을 때 현실은 가혹해진다. 정확한 대안을 찾을 때 현실은 생생해진다. 깨닫는다. 깨달아야 한다. 어차피 나도, 당신도 미생이니까. 꿈꿀 수 있다. 살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케이블과 종편 채널에서 공중파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 전파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궁금하다면 채널, 아니, 페이지 고정할 것.
‘빠’들의 힘, <SNL 코리아>
TVN의 <SNL 코리아>는 미국의 간판 라이브쇼 <SNL>의 한국 버전이다. 안상휘 CP가 <SNL>의 국내 도입을 건의했고 일단 8회 정도를 해보고 판단하자는 내부 의견을 얻었다. “1회가 별로였다면 아마 힘들었을 거다. 1회 호스트였던 김주혁이 잘해줘서 할만해졌다.” 안상휘 CP에 따르면 시즌1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호스트에 따라서 기복이 심했다. 시즌 2의 양동근 편부터 감을 잡았다. 19금 개그를 본격적으로 건드리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동엽의 호스트 출연은 <SNL 코리아>의 뇌관을 건드렸다. 잠재력이 폭발했다. 시즌 3에 신동엽을 영입한 건 <SNL 코리아>의 전후를 구분하는 신의 한 수였다. 크루들의 캐릭터가 확실해진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우리 사회에서 음성화된 19금 소재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능수능란하게 주무르고 과감한 정치 풍자와 위트 있는 시사 만평까지 도맡으며 파격적인 포복절도를 선사했다. 그리고 정규 방송으로 편성된 지금까지 <SNL 코리아>는 토요일 11시마다 생방송됐다.
“스튜디오 콩트를 4~5개 정도 준비하고, 야외 촬영되는 뮤직비디오도 2개 정도를 확보하고 오프닝 스테이지와 ‘위크엔드 업데이트’까지 대략 11개 코너를 정리해야 한다. 매주마다 그만한 아이디어를 짜고 대본 작업을 하며 생방송을 대비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래도 한 주 내내 생방송을 준비했던 예전과 달리 이젠 호스트와 크루들의 리딩과 리허설, 생방송은 토요일 하루 동안만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크루들이 스타가 된 만큼 <SNL 코리아>에만 집중해야 한다면 결국 이탈할 수밖에 없을 거다.” 크루 한 사람 한 사람이 <SNL 코리아>의 저력임을 알고 있다. 오전에 대본을 리딩하고, 점심 이후로 무대 리허설을 가진 뒤, 6시 즈음엔 실전에 가까운 ‘런 스루(Run Through)’를 통해서 모든 동선과 진행을 체크하고, 8시 반에 진짜 관객들을 대상으로 1차 공연을 한다. 이 때 안상휘 CP는 직접 객석에서 관객 반응을 체크한다. 이전까지의 리허설이 섀도우 복싱이라면 1차 공연은 최종 스파링이다. 생방송의 컨디션을 짐작할 마지막 기회라는 것. 이는 콩트의 리액션을 살피는 것인 동시에 과감한 표현이나 연기가 불쾌함으로 인식되지 않는지를 판단하는 생방송 이전의 마지막 기회다. “센 걸로 먹히면 더 센 것을 보여줘야 된다. 수위로 승부하면 안된다. 결국 아이디어로 허를 찔러야 한다.”
리딩부터 1차 공연까지 깨알 같은 대본이 수정되고 콩트의 설정도 변하며 캐릭터 자체가 뒤바뀌기도 한다. 신동엽을 위시한 크루들은 서로에게 화기애애한 ‘지적질’을 불사한다. “막내 작가와 선배 작가가 20년 차이가 나는데도 똑같이 대본을 놓고 비교한다.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낸다. 초기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선배 작가들이 많이 나갔다. 지금은 정착이 된 거다.” 어쩌면 그만큼 치열하다는 말이다. 좋은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분위기에선 그만큼 적극적일 수밖에. 결국 <SNL 코리아>는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빠’들의 방송이란 말이다. “시작할 때부터 크루의 힘이 강한 쇼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지금의 크루 진영에 90% 이상 만족한다. 다만 캐릭터들이 확실해지다 보니까 콩트의 성격도 그 안에 갇히는 경우가 늘고 있다.” 확고한 위치를 점한 만큼 새로운 고민도 자라난다. 그리고 그 고민이 <SNL 코리아>의 비전일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회가 끝나면 방송에 못 나간 자료들을 모아서 <시네마 천국>처럼 상영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안상휘 CP의 기약할 수 없는 바람이다.
목소리를 찾아서, <히든 싱어>
JTBC의 <히든 싱어>는 가수들이 도플갱어 같은 성대를 지닌 모창 가수들과 대결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 가수들이 아마추어 실력자들 앞에서 고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조승욱 PD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궁리하던 중 한 작가로부터 아이디어를 들었다. ‘진짜 가수와 모창 가수가 한 무대에 서면 어떨까.’ 그렇게 시작된 것이 <히든 싱어>였다. 일단 연말특집으로 파일럿 프로그램을 2회 정도 제작해보고 반응을 살피기로 했다. 일단 가수 섭외만큼이나 모창 출연자들을 찾는 것도 난관이었다. 모창을 잘해도 방송 무대에 적합한 실력자를 걸러내고 트레이닝까지 시켜서 무대에 올리는 건 그 자체로 강행군이었다. “사실 그 두 편 이후로 더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정규물 편성은 어렵고 시즌제로 진행할 순 있을 것 같았다.” 결국 1월 초에 편성이 확정됐고, 팀이 꾸려졌다. 2달 간의 준비 끝에 3월부터 시즌1이 전파를 탔다.
<히든 싱어>의 첫 번째 고민은 룰의 보완이었다. 2편의 파일럿 제작에서 겪은 시행착오는 결국 중요한 자산이었다. 1회 박정현 편에서 1라운드부터 모창 출연자를 공개했던 걸 2회 김경호 편에서 2라운드로 미뤘다. 모창 출연자들의 얼굴 공개 시점이 빠를수록 관객들의 적응력도 빨라져서 게임의 흥미가 급격히 낮아진다는 판단 떄문이었다. 시즌1 중간에는 2라운드에선 목소리를 가린 채 얼굴만 공개해서 목소리와 얼굴의 매칭에 혼선을 주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시즌1 역시 섭외와의 전쟁이었다.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모창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가수가 많았다는 점이다.” 가수의 섭외도 난관이었지만 모창 가수들을 미리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김건모 씨는 1월부터 예심을 했는데 섭외가 오케이된 건 4월 중순 즈음이었다. 미리 모창 출연자를 축적해놔야 했다.”
이름도 없는 프로그램인 탓에 참가자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작가들은 유투브, 음악 관련 커뮤니티의 동영상을 뒤지거나 보컬 학원이나 대학교 실용음악과로 발품을 팔며 모창의 귀재들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찾은 지원자들 가운데 1차 예심으로 8명 가량을 뽑은 뒤, 2차 예심 때 무대에 오를 5명을 확정한다. 그런데 예심 때만 해도 놀라운 실력을 자랑하던 참가자가 녹화 때 무대 위에선 극심한 긴장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진짜 실력자를 가리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중요했다. 프로 가수와 진검 승부를 벌인 준우승자들의 ‘왕중왕전’을 끝으로 시즌1을 마감한 <히든 싱어>가 남긴 아쉬움은 가수를 꺾고 1천만원의 상금을 거머쥔 모창 출연자가 없었다는 사실. “ 적어도 한 번은 나올 줄 알았는데 어렵더라. 하지만 이룰 게 있으니까 다음 시즌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시즌2는 오는 9월 무렵에 전파를 탈 계획이다.
입심의 파괴력, <썰전>
JTBC의 <썰전>은 제목 그대로 ‘썰의 전쟁’이다. 흔히 ‘썰을 푼다’고 했을 때의 그 ‘썰’ 말이다. 김수아 PD와 정다운 작가가 <썰전>을 기획했을 당시만 해도 부정적인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한주간의 이슈를 토크로 푼다는 청사진을 그렸지만 설명하기 어려웠다. ‘<라디오 스타> 같은 정치 토크’라고 하면 다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김수아) 동아줄을 내려준 것은 유일하게 호감을 표한 여운혁 CP였다.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썰전>은 빛을 볼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일단 방송 후 반응을 보자는 분위기는 <썰전>이 전파를 탄 뒤 호의적인 물살을 탔다. 예능국뿐만 아니라 보도국에서도 흥미를 보였다. 일찍이 <썰전>의 자산은 김구라였다. <라디오 스타>의 작가시절부터 김구라의 토크 감각에 익숙했던 정다운 작가는 일찍이 김구라를 위시한 토크쇼를 구상했다. 김구라가 운전대를 잡은 <썰전>을 굴려줄 단단한 바퀴가 될 고정 게스트들이 관건이었다. “처음부터 섭외가 반이라고 생각했다. 달변도 중요하지만 결코 기가 꺾이지 않고 끝까지 말할 사람들을 구성하는 게 최고의 과제였다.”(김수아)
1부와 2부의 외피는 정치와 문화란 점에서 확연히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결국 썰을 푼다는 것. 방송을 통해서 묻지 않았던, 사실은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를 테면 고위공직자들의 인명을 앞에 두고 던지는 질문이 이런 식이다. “그 중 뭐가 ‘땡보’직인데?” <라디오 스타>를 벤치마킹했다는 토크쇼답게 <썰전>의 파격이란 바로 그 솔직함 자체에 있다. 이는 정치 문외한인 예능 작가들 덕분이기도 하다. “국회의원들이 재래시장 살리기를 한다고 보라카이로 연수를 갔다고 하면, ‘거기서 뭘 배워서 오죠?’ 이런 리액션이 가능하니까. 보통의 인간사에서 일어날만한 일이 근엄해 보이는 정치계에서도 일어난다는 걸 알게 되면 웃기더라.”(정다운) 토크 주제가 잡히면 관련 자료를 게스트들에게 보내주고 작가들이 직접 통화하면서 게스트들의 의견을 대본에 반영한다. 하지만 뉴스는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법. 정해졌던 주제 대신 새 이슈로 갈아타는 건 다반사다. 드라마로 치면 ‘쪽대본’을 쓰는 셈. 개개인의 입담이 좌우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특별한 리허설도 없다. 방송 전에 간단하게 당일의 토크 주제의 흐름과 중점을 정리한 뒤 안부나 묻는 수준이다. 썰을 풀 준비가 된 고정 게스트들이 준비된 덕분이다.
사실 월요일에 녹화해서 목요일에 송출하는 방식은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에선 상상할 수 없다. <썰전>의 평균 녹화시간은 4시간 안팎에 불과하다. 하지만 ‘4시간 동안 쉴새 없이 말하는 게스트들의 입담’을 걸러내기에 이틀은 생각보다 버겁다. 하지만 뜨거운 뉴스를 뜨거운 타이밍에 썰로 푼다는 건 <썰전>만의 강점이다. 그리고 녹화일과 방송일의 간극을 줄이는 건 <썰전>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궁극의 해법이다. 김수아 PD와 정다운 작가는 <썰전>을 통해서 깨달았다고 한다. “콘텐츠가 좋으면 결국 사람들이 본다.” 그래서 밥 먹을 때 엠넷을 봤던 정다운 작가는 이젠 YTN을 보고, 김수아 PD는 <9시 뉴스>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한효주는 욕심이 많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녀가 그랬다.
오늘 촬영한 컷들을 유심히 보던데, 무슨 생각을?
잘 나왔네. 오늘 괜찮네(웃음).
솔직히 한효주라는 배우를 잘 모르겠더라. 이미지가 선명하지 않다.
사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작품에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는 건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자신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불안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감시자들>을 선택한 이유는?
일단 시나리오가 재미있었다. 게다가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가 있더라. 사실 상황을 주도하는 여자 캐릭터는 별로 없다. 남자에게 끌려가거나 영화적으로 필요한 요소 중 하나를 채우는 캐릭터는 있어도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를 찾긴 어렵다. 하지만 <감시자들>엔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가 있었고, 내가 보여주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처음 액션을 시도했는데.
솔직히 액션배우라 불릴 정도는 아니다. 고작 한 신 정도니까(웃음). 물론 그 한 신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액션스쿨에서 보냈다. 짧지만 나올 건 다 나온다. 발차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고(웃음), 핸드폰 액션도 선보인다.
핸드폰이라니?
여자 혼자 맨몸으로 남자 둘을 상대하는데 사실 말이 안되지. 그래서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면 좋겠다고 논의하다가 무술감독님께서 ‘핸드폰으로 한번 해볼까?’라고 하셔서 해봤다. 생각보다 말이 되는 액션이 나왔다.
키도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액션연기에 유리한 체형이다.
시원시원해 보이긴 하지만 반대로 뭐 하나 어설프면 티도 너무 잘 난다(웃음).
기억력이 좋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실제로 본인은?
별로다(웃음). 다만 순간 암기력이 좋아서 대사 같은 건 금방 잘 외운다. 돌아서면 다시 까먹고(웃음).
추억을 되새기는 편인가?
사실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다. 좋은 성격인지 몰라도 힘든 기억은 금방 까먹는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게 된다. 그 당시에 되게 힘들었다는 느낌만 있지, 정확하게 왜 힘들었는지 까먹는다. 가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사람과의 기억조차 까먹고 너무 반갑게 인사해버려서 의아한 눈초리도 받는다(웃음).
낙천적인 편인가?
낙천적이란 말까진 어울리지 않지만 긍정적으로 밝게 살려고 노력한다. 원래 그런 성격이라기 보단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름의 우울함이 있나?
그럼.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함을 갖고 있으니까. 단지 어느 정도 크기인지 모를 뿐이지. 나도 그렇고.
지금까지 연기한 캐릭터들과 닮았다고 느낀 적은?
늘 그렇게 느낀다. ‘얘는 나랑 좀 닮은 부분이 있네?’ 아직까진 아예 동떨어진 캐릭터를 연기해보진 못했다. 내 안에 내 동생들이 좀 많다. 다중이처럼(웃음).
어릴 때 다양한 예체능 활동을 섭렵했다던데.
초등학교 때 이것저것 많이 배웠다. 대부분은 엄마가 시켜서(웃음).
어떤 것들이었나?
피아노, 바이올린, 서예, 구연동화.
초등학교 때 왠 구연동화를?
엄마가 시켰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말고, 무대에 서는데 자신감을 얻으라고. 우리 엄마가 유치원 교사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쓴 거 같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자 하는 욕심도 많았다. 하지만 끈기는 별로 없고(웃음). 3개월 바짝 배워서 조금 잘한다 싶으면 다른 거 배우고 싶다고 엄마한테 조르고, 그럼 엄마는 “하는 거나 잘해!” 이러시고(웃음).
지금도 그런가?
뭔가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사실 얼마 전 탭댄스를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뉴욕에 놀러 갔다가 뮤지컬을 많이 보면서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거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배워볼까 싶어서 알아봤더니 브로드웨이 댄스 센터에서 5회 단기 과정이 가능하더라. 제일 만만하게 할 수 있는 게 탭댄스가 아닐까 싶어서 등록했는데 이게 왠걸, 전혀 못하겠더라. 게다가 영어로 시키니까 더 못하겠고. 심지어 기본 과정이 기본이 아니더라. 다 너무 잘하니까 완전 주눅들어서 자신감도 상실하고. 학원을 나오면서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한국 가자마자 탭댄스 배울 거라고(웃음), 그래서 다시 돌아올 거라고. 한국에 오자마자 다시 시작했다.
정적인 성격 같은데 동적인 분야에 대한 흥미도 있나 보다.
둘 다 있다. 사실 옛날엔 내 성격을 잘 몰랐다. 그리고 연기를 하다 보면 어떤 성격을 하나씩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떤 성격들은 점점 구체화돼서 내 몸 안에 남아있는 느낌도 들고 감정 기복도 심해진다. 밝음과 우울함 간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고 할까.
연기를 거울 삼아 자신을 본다는 말처럼 들린다.
감정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게 많다고 느끼는데 여기 아니면 어디서 풀 수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 소용돌이를 풀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니까 그냥 하면 된다. 결국 연기하는 게 내겐 이로운 일이구나,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겠구나, 생각하게 됐다(웃음).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해볼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한 매력이다. 이 분야, 저 분야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기울이면서 얻어지는 것도 있고. 경찰도 되고, 의사도 되고, 심지어 중전도 되고, 배우가 아니었다면 관심 갖지 못했을 분야를 배우게 된다. 얼마 전, (지)진희 선배가 그랬다. 배우는 늘 배워야 하는 입장이라서 배우라고. 와닿더라. 늘 배워야 한다. 그게 좋다.
새로운 것에 끌리는 편인가?
사람은 늘 도전하고 싶어하지 않나? 아니다. 익숙함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많지. 그런데 난 호기심이 많은 거 같다.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낀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똑같은 일을 할 때 지겹다고 느끼는 편이다.
연기는 단순한 흥미로 시작했을까?
사실 처음 시작할 땐 정말 ‘멘붕’이었다. 그냥 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러다가 점점 다양한 캐릭터들을 접하고 다양한 연기 방식을 시도하면서 디테일들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조금씩 연기하는 재미를 느꼈다. 요즘은 정말 연기하는 게 즐겁다. 지금은 그래서 안정적이다. 처음엔 뭘 모르니까 너무 불안정했고.
그런 안정감은 언제부터 느꼈나.
<반창꼬> 때부터 연기 자체를 부담감 없이 즐겼다. 그 전까진 늘 잘해야 된다는 압박과 부담을 안고 연기했는데 그때는 감독님도, 촬영장 분위기도 편안했던 거 같다. 이렇게도 노는 것처럼 연기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유명해진 뒤로 얻어진 스트레스는 없나?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신경을 기울이고 모든 걸 조심할만한 입장은 아니다. 그럴만한 위치가 아니니까. 그래서 솔직히 아직 그런 어려움까진 느끼지 못한다. 다만 일을 오래할수록, 해를 거듭할수록 책임감을 느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진짜 힘들어지니까. 그래서 늘 공식석상에서 무언가를 대변할 때,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는 좀 예민해진다. 진짜 나를 잘 모르면서 자신들만의 기대감을 갖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늘 조심해야 된다.
언제부터 생긴 책임감인가.
처음부터 똑같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 크기가 좀 더 커졌다고 느낄 뿐이다. 항상 잘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욕심이 많다는 소리 같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 좀 더 과했고. 연기를 잘하고 싶었다. ‘왜 저렇게 연기 못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노력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과하면 과부하가 걸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번쯤 걸러지는 과정도 있기 마련이다. 이젠 그런 욕심은 덜어졌다. 물론 지금도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다. 같이 작품을 하는 사람과의 관계나 작품을 하는 동안의 시간이 모두 좋은 추억이 됐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뭔가 여유가 생긴 것 같다.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생기는 여유 같다. 모든 것이 새로울 땐 새로운 걸 하겠다고 바짝 긴장하거나 너무 들떠있게 된다. 그런 과정은 지난 거 같다.
<감시자들>은 청계천, 서소문 등지에서 촬영했다던데, 자주 가는 장소는 아닐 거 같다.
영화관 말곤 사람이 붐비는 곳을 즐겨 찾진 않는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도 싫고, 시끄러운 건 싫다.
특별한 아지트가 있겠다.
주로 집 근처에서 논다.
배우가 된다고 했을 때 어머니 반응은?
아빠는 군인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더 보수적이었다. 아빠가 풀어주는 편이라면 엄마는 잡는 편이었고, 어릴 땐 그만큼 엄마가 무서웠다. 사실 배우가 되겠다고 얘기할 때, 맞을 각오였는데 엄마가 막 가소롭다는 듯이 웃더라. “네가(웃음)? 한번 해봐” 이러면서(웃음).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마. 잠시 추억이나 만들겠거니 생각하셨던 것 같다.
지금은?
대견스러워하신다. 어린 나이부터 제 갈 길을 갔으니까.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많이 하시고.
최근 <감시자들> 제작발표회 때 함께 출연한 정우성, 설경구와 사이가 좋아 보이더라. 남자들과 쉽게 어울리는 편인가?
사실 여자들한테 좀 약하다. 특히 여자 동생들은 보호해줘야 할 거 같고, 매너 있게 대해야 할 거 같다. 하지만 남자들한텐 막하는 편이다. 뭐, 알아서 잘 하니까(웃음).
<오직 그대만>에 함께 출연한 소지섭은 배우 한효주를 ‘스스로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타입’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내 자신에게 많이 인색한 편이긴 하다. 사실 시각장애인을 연기하는 게 힘들어서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즐길 수 없었다는 게 진짜 아쉽다.
자주 보는 사람은 몇이나 되나.
많은 사람을 만나기엔 내 능력이 부족하다. 일단 내가 나를 힘들게 하는 편이기도 하고. 어렸을 땐 사람들에게 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가고, 먼저 웃는 모습으로 대하고, 모든 사람에게 항상 친절했다. 그게 너무 힘들더라. 그리고 꼭 그럴 필요도 없더라.
거짓말하듯 살았다는 말인가?
물론 남을 속이는 건 아니었다. 그냥 그때의 내가 그랬고, 그게 당연히 나라고 생각했다는 거지. 어렸을 때부터 교육방식이 그랬다. 엄마는 항상 사람들한테 잘해주고 웃어줘야 한다고 했다. 이런 주입을 받고 자랐으니까 당연히 그런 성격이 된 거다.
그런 관념에서 어떻게 벗어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도 많이 받고, 차차 자연스럽게 내 스스로를 보호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특별히 공간에 대한 호기심은 없을까? 여행은?
막상 당시엔 몰라도 여행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게 남는 거 같다. 솔직히 여행이 절실한 편은 아니다. 여행이란 새로운 곳에서 에너지를 쏟고 무언가를 담아와야 되는 건데 나는 그냥 집이 좋고, 내게 익숙한 곳에서의 일상이 더 좋더라.
요즘 욕을 자청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욕을 해댈수록 주가가 상승하는 <SNL 코리아>의 헤로인 김슬기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장기는 욕이 아니다. 배우 김슬기의 연기가 제대로 먹혔다는 말이다.
<SNL 코리아>(이하: <SNL>)에 출연한지 1년이 넘었다.
첫 생방송 당시엔 너무 떨려서 헛구역질이 다 났다. 그때는 토요일 생방송을 위해서 일주일씩 준비했고, 나뿐만 아니라 모든 ‘크루’들이 대본 좀 빨리 보내달라고 건의했다.
지금은?
이젠 방송 전날에 리딩하면 왜 당일에 하지 않고 전날하냐고 농담이 나올 정도다. 다들 마음이 편해졌다.
생방송이라서 종종 웃음을 참는 모습도 여과 없이 보여지는데 그게 은근히 웃기다.
신동엽 선배님의 캐릭터가 그게 가능했기 때문에 우리도 조금씩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다. 만약 웃음이 터졌을 때 누군가가 정색했다면 아무도 시작하지 못했을 거다. 일종의 노련한 스킬이랄까.
오픈 스튜디오의 라이브쇼란 점에서 연극 무대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래서 적응하기 편했다. 연극 무대로 조금 먼저 데뷔했으니까.
데뷔한 계기는?
학교 선배님이었던 장진 감독님이 학교 동아리의 큰 공연을 장진 감독님이 연출자였다. 그때 감독님께서 내 연기를 좋게 봐주셨는지 몇 개월 뒤에 부르셔서 연극이랑 <SNL>을 함께 해볼 생각 없느냐고 물어보셨다.
<리턴 투 햄릿>에선 복수할 때 쓰는 칼 역할이었다는데, 이름이 칼은 아닌 것 같은데(웃음).
장진 감독님이 <매직타임>이란 연극을 <리턴 투 햄릿>이라는 연극으로 재구성했는데 중간에 마당극 형식이 변한다. 그때 햄릿을 증언하기 위해서 칼이 등장하는데 내가 커다란 칼 모양 탈을 쓰고 등장하는 식이었다.
뒤집어 쓰는 것과 인연이 있나 보다(웃음).
탈쓸 때만 예뻐 보인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웃음).
탈을 쓰고 등장하는 이미지로 인해서 지나치게 희화화될지 모른다는 경계심은 없었나?
다른 곳은 몰라도 <SNL>이기 때문에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한테 큰 머리와 뚱뚱한 옷, 짧은 다리가 너무 잘 어울리더라(웃음).
크루들의 사이가 좋아 보인다. 꽤나 즐거워 보인다.
대체로 화기애애하다. 사실 <무한도전>처럼 <SNL>도 장수하고 나 역시 대표 크루로 장수해서 오랫동안 이것만 하다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행복하다는 거지.
평소에 욕해달라는 사람은 없나?
일상이다. 그런 얘길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니까. 나를 좋아해주는 분들은 대부분 내가 하는 욕도 좋아해주는 분들 같다. 싸인할 때조차 욕 좀 해달라는 분들이 많더라.
고민되는 부분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은 없다. 이런 캐릭터를 하는 것도 행복하고, 이런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의 나도 좋아하니까. 연기할 때는 그런 캐릭터를 끌어내기 쉽다. 하지만 일상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는 분들을 만날 때 조금 힘든 건 있다.
실제 본인의 성격은?
에너지를 금방 소모해서 충전과 방전이 반복된다. 그러니까 충전할 때의 나를 보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김슬기가 원래 저런가?’ 사실 조금 더 차분한 편이기도 하고.
TV 속의 김슬기와 TV 밖의 김슬기의 차이를 확인한 사람들의 반응이란?
내게 다양한 모습이 있음을 좋게 봐주는 분도 있는 반면 자기가 원했던 TV 속의 김슬기가 아니라서 실망하는 분들도 있다. 나를 보는 분들이 저마다 다른 만큼 반응도 다양한 것 같다.
자신의 다양성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나 보다.
사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 오히려 신기하다. 누구에게나 뒷면이 있지 않나. 착한 사람도 나쁜 생각을 할 수 있고, 차분한 사람도 흥분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다양한 면이 있는 사람 같다. 그래서 배우를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고.
긍정적인 편인가.
낙천적일지도.
<SNL>은 보수적인 사람들 입장에선 불편한 방송일지도 모른다.
나도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다.
어느 정도로?
수영장에 한번도 가본 적 없다.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기분이랄까(웃음). <SNL 코리아>에 출연하기 이전까진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SNL>을 선택했을까?
처음엔 19금 프로그램이 아니라 15금 정도였다. 19금 프로그램이 된 이후로도 힘든 부분은 없었다. 시즌2 초반에 잠시 섹시 컨셉트를 연기했지만 특별히 힘들진 않았다. 노출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의 반응은?
경상도 분들이라 표현이 어색하다. ‘잘했다. 챙겨봤다. 못 봤다. 바쁘냐?’ 이게 다다(웃음).
고향이?
부산이다. 스무 살에 대학 진학 때문에 상경했다.
졸업했나.
휴학 중이다.
당연히 연기 전공인가?
연기학과 뮤지컬 전공이다.
뮤지컬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노래도 하고 싶고, 춤도 추고 싶고, 연기도 하고 싶었다. 내 욕심에 하나만 하기엔 뭔가 아쉽더라. 그런데 뮤지컬이란 장르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럼 뮤지컬 배우가 돼야겠다고 막연하게 접근했다. 사실 부산에선 뮤지컬을 볼 기회도 없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꾼 시점은?
고등학교 시절, 연기학원을 다니면서 뮤지컬 배우를 꿈꿨다. 그 이전에 초등학생 시절부터 예술 분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금 쓰는 싸인도 초등학교 때 만든 거다.
노래를 잘한다는 건 언제 알았나?
중학생 때 친구 따라서 가요제에 나갔는데 내가 상을 탔다. 그때부터 기회가 되면 가요제란 가요제는 다 나갔다.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을까?
어렸을 때부터 가수만 하기엔 아쉽다고 생각했고 좀더 특별한 걸 찾다가 뮤지컬 배우를 찾았다, 뮤지컬 배우가 된다면 언제든 가수나 배우로 방향을 틀어도 될 거라 생각했다.
영화 <무서운 이야기 2>로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는 없을까?
그런 기대들이 많아서 너무 부담스럽다. <무서운 이야기 2>의 출연배우는 8명인데 저마다 다 주연이기 때문에 사실 내가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기대만큼 크진 않다. 일단 이번엔 김슬기가 영화도 하는구나 정도를 보여주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촬영 과정은 어땠나.
너무 춥고 힘들었다.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한지 얼마 안됐지만 영화를 찍는 시기가 하필 그 얼마 안된 시기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첫 영화이니 신경 써서 하고 싶었지만 2주간 잠도 못 자고 촬영하다 보니 체력도 딸리고 너무 추웠다. 개인적으론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을 겪었다는 의의가 있었다.
6월부터 뮤지컬 <투모로우 모닝>으로 무대에 오른다. 비로소 그토록 바라던 첫 뮤지컬 무대다.
어렸을 땐 조정석 선배님이나 김무열 선배님처럼 무대에서 인정 받은 뒤에 방송으로 나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방송으로 데뷔하기란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운 좋게 방송으로 데뷔했고 오히려 언제쯤 뮤지컬에 도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점점 부족함을 느끼면서 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회가 와서 생각보다 빨리 도전하게 됐다. 배우로서 욕심이 있다 보니 놓치긴 싫더라.
언젠가 욕심나는 작품의 스케줄로 인해서 <SNL> 출연이 어려워질 수 있다. 고민해본 적 있나?
<SNL>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종종 고민한다. 어떻게든 <SNL>의 스케줄을 끌고 갈 수 없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언제나 미궁 같은 고민이지만(웃음).
배우는 작품을 선택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훌륭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왕이면 훌륭한 작품을 선택하고 싶은 게 배우의 마음이다. 아니면 아예 스스로 만들어버리던가.
최근 국내에서도 배우 출신 감독들의 활동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꾸준히 단편 연출을 해오다 첫 장편 연출작 <마이 라띠마>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유지태와 최근 연출 데뷔작 촬영을 마친 하정우, 연출 데뷔작을 촬영 중인 박중훈 등이 그렇다. 일찍이 <오로라 공주>로 호평을 얻었고 <용의자 X>로 주목을 받았던 방은진이나 <요술>과 <복숭아나무>의 감독으로 화제를 모은 구혜선도 마찬가지다. 과연 한국에서도 배우 출신의 거장 감독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왜 배우들은 감독을 꿈꾸는가? 이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는 감독이 꾸는 꿈이다. 물론 감독 혼자 꿈꾼다 하여 완성되는 것이 영화란 말은 아니다. 감독이 꿈꾸는 몽타주와 미장센에 숨을 불어넣고자 충실히 복무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존재할 때 그 꿈은 생명을 얻는다. 각각의 컷처럼 나뉜 스태프들의 재능을 하나의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출력이 바로 이런 재능이다. 감독의 할 일이란 그런 것이다. “어릴 때는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스크린이 도화지라면 감독은 화가이고 배우는 붓이다. 배우는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한다. 훌륭한 배우들은 자기 역할을 확실히 인식한다. 완벽하게 작품의 일부로서 투신하고, 때때로 작품의 빈틈마저 메워버린다.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탁월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동선과 리액션을 물론이고 조명의 위치와 카메라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한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부터 워렌 비티, 우디 앨런, 로버트 레드포드, 멜 깁슨 등, 훌륭한 배우가 훌륭한 감독으로 성장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런 명배우들이 감독의 자리를 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사실 배우 입장에선 자신보다 함량이 떨어지는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설 때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을 거다. 그런 경우의 수가 늘어날수록 차라리 카메라 뒤에 서고 싶다는 욕망도 커질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작품 경력을 늘려나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젠 배우라기 보단 감독의 인장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그는 일찍이 웨스턴 무비의 아이콘이란 명예를 멍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 낡아서 그 권좌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배우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감독들에 의해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가 망가지는 꼴을 번번히 목격하게 된 그는 직접 제작사를 차리고 끝내 메가폰까지 잡았다. 그리고 히치콕을 연상시키는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0)와 함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편 ‘제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수식어를 얻은 벤 애플렉은 지난 2007년 스릴러 <가라, 아이야, 가라>로 감독 데뷔한 뒤 호평을 얻었고 주연까지 겸한 범죄물 <타운>(2010)을 통해서 호평뿐만 아니라 흥행까지 이끌어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둔 최근작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대가의 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말했다. “배우라는 커리어도 이어가고 싶다. 감독이란 연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니까.” 한때 <굿 윌 헌팅>(1997)의 각본 작업을 하며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던 그에겐 졸작 액션 블록버스터에 연이어 출연하며 배우로서 바닥을 쳤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어쩌면 벤 애플렉에게 감독으로서의 길은 스스로의 연기 경력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노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벤 애플렉이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 그 뒤엔 조지 클루니가 서있었다. 그는 <아르고>의 제작자였다. 조지 클루니 역시 성공적인 배우 출신 감독이다. 폴리테이너로도 유명한 그답게도 근작인 <킹메이커>를 비롯해서 <굿 나잇 앤 굿럭> <컨페션> 등 시대적인 호흡이 돋보이는 정치적 소재의 작품들을 연출해왔고 좋은 평가를 얻어왔다. 결국 배우가 감독이 됐을 때 최고의 장점이란 최소한 자신보다 실력 없는 감독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고, 배우로서의 경력을 확보할 기회 또한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명심할 건 성공적인 족적을 남긴 배우가 성공적인 족적을 남기는 감독으로 살아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 물론 성공한 배우만이 꼭 성공한 감독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보다 큰 건 사실이다. 산수를 잘하는 사람이 수학을 잘할 가능성이 보다 큰 것처럼.
별일 없이 산다고 노래하면서도 참 별일이 많았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장기하는 얼굴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루고 얻었다. 여전히 그렇고 그런 사이인 그들은 역시 여전한 기대를 부른다. 마치 ‘네가 깜짝 놀랄 얘기를 들려주마!’라고 했던 것처럼.
“솔직하게 내고 가져갑시다.” 무엇을? 장기하와 얼굴들(이하: 장얼)의 신곡 ‘좋다 말았네’ 음원을. 어디서? 현대카드 뮤직 홈페이지에서. 어떻게? 원하는 가격으로, 최저 10원부터. 그래서 ‘백지수표 프로젝트.’ 그렇다면 왜? 장기하가 답한다. “음원 가격 결정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의견은 분분한데 소비자들에겐 직접 가격 책정을 맡겨본 적이 없지 않나. 한시적인 프로젝트지만 음악을 듣는 분들의 생각을 약간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뮤지션들이 직접 자신들의 음원 가격을 책정해서 시장에 내놓고 100% 수익을 가져가는 음원 프리마켓을 운영하던 현대카드 뮤직에서 장얼에게 무언가를 같이 해보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터였다. 장얼이 생각한 게 바로 소비자가 책정한 가격대로 음원을 제공한다는 ‘백지수표 프로젝트’다.
국내에서 360만건의 다운로드를 기록한 ‘강남스타일’로 싸이가 얻은 수익은 6600만원이었다. ‘강남 스타일’의 음원당 가격은 18원이 조금 넘는 수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162건의 다운로드가 기록된 ‘좋다 말았네’의 음원 누적금액은 2644049원. 곡당 1200원 이상을 호가하는 가격이다. 그 수치만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현대카드의 전태영 사장은 트위터에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곡의 가치만 내라는 장얼의 부탁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응원가를 낸 것 같다.” 이는 <백지수표 프로젝트>로 새롭게 정립된 음원가격이 음원 소비자의 객관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장얼의 팬들의 주관적인 애정이 담긴 수치로 보인다는 의견이다. “사실 팬들이 우리 체면을 살려줬다고 봐야지(장기하).” 장얼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겐 팬들과의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직접 현대카드 뮤직 홈페이지에서 우리 음원을 다운로드 받았는데 아무리 간소하게 절차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더라. 그런 귀찮은 과정을 감내하면서 우리 음원을 사주신 분들이 고마웠다(장기하).” 그렇게 장얼은 5년 만에 팬들과 교감했다.
시작은 2008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귓바퀴를 휘감으며 심심찮게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다. 한 음절 툭툭 내뱉듯 또박또박하게 발성하는 가사엔 묘한 맛이 있었다. 랩 같기도 한데, 노래 같기도 하고, 아무튼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는데,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나. 에스프레소를 뽑고,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라떼도 주문할 수 있는 카페에서도 적잖이 ‘싸구려 커피’가 들렸다. 그 즈음 온라인에선 어느 밴드의 라이브 동영상이 적잖이 전파됐다. ‘달이 차오른다, 가자’며 진지하게 노래하는 한 사내의 양 옆으로 선글라스를 낀 두 여인이 무표정하게 팔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는 그 사내란다. 장기하라고 했다.
장기하가 출연한 그 영상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홈레코딩으로 만든 세 곡의 노래가 든 싱글 앨범이 불티나게 팔렸다. 장기하는 혼자서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하고, 편곡도 하고, 연주도 하고, 집에서 직접 녹음도 했다는데 공연만큼은 혼자 할 수 없으니 당장 무대에서 함께할 세션들을 구했고 결국 항상 함께할 멤버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가 좋아하는 ‘토킹 헤즈’를 모티프로 작명된 밴드명이다. 사실 데뷔 초기의 장얼과 지금의 장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얼굴들’이 많이 달라졌다. 라이브 무대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두 여인 미미 시스터즈(코러스, 안무)가 탈퇴하면서, 남자 일색의 밴드로 재탄생했다. 장기하가 인디밴드 ‘눈뜨고 코베인’ 드러머였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원년 멤버 이민기(기타)와 정중엽(베이스)은 여전하지만 2집부터 새롭게 가세한 이종민(건반)과 원년 드러머의 군복무로 최근에 합류한 전일준 그리고 일찍이 장얼의 비밀병기였던 하세가와 요헤이(기타)까지 합세하며 6인의 진영이 갖춰졌다.
‘김창완 밴드’의 일원이기도 했던 하세가와 요헤이는 일본인이지만 한국에서 활동한지 20년에 달하는 기타리스트다. 지난 2집 <장기하와 얼굴들>에선 프로듀서와 기타 파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그 이전부터 장얼의 보이지 않는 멤버였다. “처음엔 기타 두 대가 필요한 곡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멤버가 되기 어려웠지만 함께 작업할수록 마음이나 생각이 잘 맞았다. 점점 하세가와 형의 비중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정식멤버나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그래서 대외적으론 큰 변화처럼 보이겠지만 내부적으로 달라진 건 없다(장기하).” 사실 하세가와 요헤이의 영입에는 장기하의 투병도 한몫 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밝혔듯이 장기하는 국소이긴장증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다. 기이하게도 종종 손이 꽉 쥐어져서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이 불가능해지는 증상인데 장기하의 왼손에도 같은 증상이 생겼고 덕분에 일찍이 드러머의 꿈도 포기해야 했다. 1집 당시만 해도 기타를 연주했지만 이젠 기타 연주도 어렵다. 그래서 사실상 트윈 기타 체제였던 밴드에 기타 파트 하나가 공석이 됐고 자연스럽게 하세가와 요헤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하세가와 형이 나보다 기타를 훨씬 잘 치니까 내 손이 불편해진 덕분에 우리 전투력이 상승할 수 있었던 거죠(장기하).”
처음 장얼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가 미미 시스터즈의 시크한 퍼포먼스 덕분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장기하가 써내려간 구성지고 알싸한 구어체 가사의 묘미와 반복적인 후렴구가 주는 경쾌한 리듬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중현, 송창식, 산울림, 송골매 등 7~80년대 국내 음악신을 이끌던 대가들의 무드를 버무리듯 얼큰하게 재현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음악적 영역을 구축해내는 저력이 있다. 불과 두 개의 정규앨범을 발매한 밴드에게 과찬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지난 5년 사이에 장기하와 얼굴들만큼 영향력 있는 밴드가 국내에 얼마나 등장했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장얼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지난 2집에서는 큰 음악적인 변화가 발견됐다. 멜로디가 풍요로워지고 사운드의 입체감이 더해졌다. “아마 내 생각엔 키보드 때문인 거 같다(하세가와 요헤이).” 키보드 멤버의 영입은 밴드의 음악 제작 방식도 변화시키는 계기도 작동했다. 장얼의 음악은 대부분 장기하가 가사를 만들고 흥얼거리는 리듬을 통해서 얻어진 대략적인 멜로디를 통해서 시작된다. “1집 같은 경우엔 내가 멤버들에게 악보를 주고 이대로 쳐주라고 부탁했지만 2집에선 곡의 뼈대만 만들고 같이 합주를 하면서 편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연주자들만 생각할 수 있는 플레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좋다 말았네’를 포함한 3집도 그렇게 만들고 있다.” 장기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건 여전하지만 이젠 장기하 안에서 끝나는 밴드가 아닌 셈이다.
무엇보다도 장얼의 가능성은 끈끈한 팀워크에서 찾을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냉면’이 뜬다는 하세가와 요헤이를 따라서 다들 냉면 애호가가 돼버렸다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장얼의 멤버들은 서로의 술버릇을 두고 또 한번 유쾌하게 떠든다. 길게는 5년간 동고동락한 멤버들은 이제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잘 통하며 잘 닮아간다. 그들에게 장기하와 얼굴들이란 밴드는 직업 이상의 즐거운 꿈이다. 그리고 오는 5월 12일, 또 한번 꿈은 이루어진다. 호스트가 돼서 게스트를 모시고 공연을 펼치는 ‘얼굴들과 손님들 1탄’이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열린다. 첫 번째 게스트는 뉴욕의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 ‘텔레비전.’ 이들의 첫 내한 공연을 모시게 된 경위 또한 장얼스럽다. “우리도 지금까지 신기해하는 일이다. 하세가와 형으로부터 텔레비전이 일본 공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도 가서 보자!’ 이러다가 밑져야 본전인데 접선이나 해보자면서 시작된 일이다. 그런데 메일을 주고 받다가 정말 성사돼버렸다(장기하).” 농담처럼 시작됐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놀아보자는 욕심도 생겼다. “우리 멤버들이 좋아하는 밴드 중엔 중에 해외에 비해서 국내 인지도가 낮은 탓에 내한하기 힘든 밴드들이 많다. 그들을 초대해서 ‘얼굴들과 손님들’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졌다. 적어도 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들 중에 그들의 음악을 듣고 좋아할 이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장기하).” 참고로 오는 가을에 발매될 3집 앨범은 심플하지만 강력한 로큰롤을 구상한다니, 기대하시라. 장기하가 부른 그 노래가사처럼. ‘뭘 그렇게 놀래?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지 몰라?’
스타에 관한 말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말엔 대부분 실체가 없다. 그저 떠돌 뿐이다. 그 사이에서 스타가 산다. 말을 타고 건너면서도 빛을 지켜야 한다.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별은 본다. 별이 빛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고 스타를 본다. 스타란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쁘고 멋진 건 자꾸 보고 싶기 마련이다. 그리고 별과 달리 스타란 보다 가까운 존재다. 가까운 곳에서 반짝이는 그들을 더욱 가깝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망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 말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 일상이, 그 일상에 대한 말조차도 팔리는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말이 유통되는 것도 그래서다. A가 B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C가 여자를 엄청 밝힌다던데? D가 사실 결혼도 하고, 임신도 했다던데! 얄리얄리얄라셩 얄라리얄라! 숱한 루머가 전국 팔도 각지를 돌고 도는 와중에 개중의 몇 가지는 진실로 판명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 확실해진 몇 가지 진실이 불확실한 다수의 루머를 압도한다. ‘카더라 통신’이 예언의 서로 등극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스타가 과연 공인인가? 혹자는 말한다.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그들을 공인이라 여겨야 한다고. 그 범위가 크건 작건 모든 일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기자가 기사를 써서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기자는 공인인가. 혹은 방송에 나온 누군가가 일회적으로 대중적인 파급력을 행사했다면 그는 공인이란 말인가. 공인의 사전적 정의는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공적인 일이란 공공의 업무를 대신해서 수행하는 일에 가깝다. 정치나 행정이 그렇다. 스타라는 직업이 봉사가 아니듯 대중의 관심 또한 기부가 아니다. 스타라는 상품성에 대한 지불이다. 정당한 등가교환이다. 스타로서의 영향력에 공인이란 탈을 씌우는 건 결국 불공정거래라는 말이다.
스타들에 관한 말들은 대부분 막연한 동경이나 순수한 관심을 넘어서 대부분 지나친 관음이거나 무분별한 사생활 침해로 발전하며 때때로 폭력성을 띤다. 밑도 끝도 없는 루머나 풍문에 시달렸던 셀레브리티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삶을 고백한다거나 스스로 세상을 등진 톱배우의 주변인들로부터 그가 평소 악플에 시달리며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증언을 듣게 될 때, 우린 그 화려한 삶에 깃든 명암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하지만 대중은 그들의 삶을 긍휼히 여길 수 없다. 그 삶이 너무나 풍요로워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선 마땅히 감내해야 할 운명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스타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아니다. 관심을 먹고 빛을 발하는 존재다. 어떤 형태로든 대중의 관심이 스타의 지위를 가늠하게 만드는 바로미터가 된다. 오죽하면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 필연적으로 말 가운데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 말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스타로선 삶에 드리운 그림자를 밟고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자신의 사생활조차도 상품이 되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자리값을 지불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게 그 자리에서 생존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주목을 받고 다수의 관심을 끌어들인다는 건 그만큼 다수의 입에 오르내릴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이 가짜라고 변호하거나 진짜를 덮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대중에게 중요한 건 그 말의 실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단지 그런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은 진위를 불확실한 말을 끊임없이 유통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렇게 돌고 도는 말들을 주워다가 팔아먹고 시간을 때운다.
스타들을 다루는 언론 매체들조차도 사실상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아류가 되는 시대다. 기이하게도 국내에선 기자라고 명함을 판 사진기자가 파파라치 컷을 찍고 소속 매체에서 보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부 스포츠 일간지에서 시작된 일이 파파라치 컷을 전문적으로 찍고 배포하는 온라인 사이트의 창궐 아니 창간에 이르렀다. 최근 그 사이트는 기사를 통해서 한 톱배우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다. 톱배우는 그 사이트에서 찍은 파파라치 컷으로 오해가 발생했다고 밝혔고 그 사이트에선 그 톱배우가 자신들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있으며 그가 거짓말을 늘어놓을 경우 자신들의 배려로 공개하지 않았던 사진을 공개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들이 그 톱배우 역시 ‘근거 없는 ‘찌라시’의 피해자’라고 두둔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두둔보다도 흥미로운 건 ‘찌라시’라는 단어와 자신들을 격리시키는 그들만의 철학과 기준이지만.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만들지마. 그럼 거기가 끝이야. 사람들이 널 끝없이 동경하게 만들어. 그게 스타야.” 드라마 <온에어>의 대사처럼 스타는 자신을 위장하며 살아야 한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흉하고 보기 싫은 언어들 속으로도 몸을 숨길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에 섞이는 순간 많은 것을 해명하거나 드러내 보여야 한다. 사생활조차도 계산대에 오른다는 걸 아는 순간부터 진정한 자신을 지워야 한다. 가진 게 많아서 부러울 것 같은 삶에 빈곤한 일상이 드리울지라도 그 빈곤한 일상조차 구원할 수 있는 건 그 일상조차 진실과 거짓 사이에 끼워 넣는 일이다. 설사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소문의 일부로 위장하면 된다. 그렇게 진짜 자신의 모습까지도 거짓의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그저 떠도는 말 사이에 숨어서 스스로를 보존하면 된다. 그렇게 완전한 거짓의 보호색을 띄고 스타는 살아간다. 혹은 살아가야 한다. 대중들이 스타라는 환상을 끝까지 소비하도록. 혹은 스타가 군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인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를까. 스무 살 넘은 성인이 클럽에서 만난 이성과 원나잇 스탠드를 즐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물론 법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일만 없다면 말이지.
이미숙이 배우라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어쩌면 이미숙이란 배우를 아무도 모른다. 배우이기에 그녀는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그녀 스스로를 위해서.
<최고다 이순신> 1회 시청률이 20%를 넘겼다.
내 복이지, 뭐(웃음).
<최고다 이순신> 1화에 송미령이 자신의 오래된 출연작을 보는 장면이 있다. 자세히 보니까 <겨울 나그네>(1986)던데, 얼마 만에 본 건가?
그 영화가 한 27년 됐지? 사실 내 작품을 다시 볼 일이 없지. 새롭더라. 문제는 그 세월이 실감나지 않는다는 거야. 그저 엊그제 같다. 지금도 그런 감정으로 연기해보고 싶지만 들어오는 건 엄마 역할밖에 없으니까 새삼 현실적인 비애가 느껴졌다.
이젠 특별히 하고 싶은 캐릭터도 없을 것 같다.
맞다. 내게 맡긴 역할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난 사전에 감독이나 작가와 상의하면서 그들과 생각을 조율한다. 이미숙이라면 이 정도는 해줄 거라 생각하는 사람과 작업하면 오히려 내가 나한테 갇히니까 손해다. 내 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내게 있는 거지.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들자’는 각박한 캐릭터인데 밉지 않더라.
항상 강하고 억센 캐릭터에겐 해학이 보여야 미워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삶은 해학이다. 삶의 코드는 유머라고. 힘든 일을 하다가도 누군가의 한 마디에 킥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것처럼. 억척스런 캐릭터에게 유머가 보이지 않으면 너무 뵈기 싫을 거다. 그래서 들자처럼 억척스러운 엄마 역시 나름의 행복을 느끼는 부분이 있을 테고, 그 캐릭터 안에서 웃음을 발휘할 수 있는 게 과연 뭘까 고민했다.
완벽주의자인가?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하지 못하니까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거다. 죽을 때까지 연기해도 완벽이란 건 없을 거다. 그래서 노력하는 거고.
그런 사람이 결국 조직에서 악역을 도맡더라.
살다 보면 인내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형평성이 어긋나는 건 누군가 잡아줘야 된다. 결국 강한 사람이 잡아주고 어떤 체계나 선례를 만들어나가야지. 그냥 한번 하고 마는 건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책임한 거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일만 한다면 그런 상황을 또 만들 수 있다는 거고. 난 그런 상황에서 일하는 방법을 모른다. 할 건 하는 거다. 그건 성질의 문제가 아니잖아.
연기한 걸 후회한적 없나.
후회해본 적 없다. 열심히 연기했고, 연기를 위해서 나름 많은 희생을 치렀다. 배우로서 한 점 부끄럼이 없다. 다만 배우로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선 회의가 있지. 하지만 그 회의감이 연기에 대한 마음을 이기진 못하는 거 같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 거냐고 물어보면 그렇다.
운명적이란 말인가.
연기하길 정말 잘했다. 연기하는 순간 모든 고통과 아픔을 잊어버린다. 그런데 배우가 직업인가? 내겐 그렇지 않은 거 같다. 직업이란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데, 그런 논리로 연기하진 않았다. 30년 넘게 연기했지만 많은 자산을 축적하지도 못했고, 작품을 많이 한 편도 아니다. 그저 캐릭터의 삶이 나를 통해서 어떻게 투시될까 생각만 했다. 그냥 지금의 내가 연기하는 지금의 캐릭터가 중요하다는 거지.
연기하는 캐릭터마저도 당신의 인생이란 말인가.
그렇다.
배우로서 송미령이란 배우를 연기하는 건 어떤가.
흥미로운 부분이다. 사실 송미령의 아웃라인에 대한 소스는 지금의 내게서 얻어낸 부분이 있다. 50대임에도 잘 나가는, 워너비가 될 수 있는 배우.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사건은 달라지겠지. 송미령의 심각함 속에도 부드러운 감정이 있을 거다. 그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
송미령은 배우로서 신뢰해왔던 매니저와 갈등을 겪고 실망하기 시작한다. 사람에게 실망한 경험 없었나.
연예인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 부류다. 이 사람들의 세계가 그만큼 단순하다.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이 단순하고, 이성적이지 못하지. 그런 배우와 가장 근접한 건 매니저 같은 사람들인데 매니저는 이득을 위해서 일을 취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배우는 그들에 의해서 움직여야 되는 사람이다. 그런 관계에서 갑자기 신뢰하던 사람이 돌변하면 대처하는 능력은 배우가 월등히 떨어진다. 그것까지 그 사람들이 해줬으니까.
사실 송미령이란 캐릭터가 최근에 좀 시끄러웠던 송사를 연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캐릭터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놀랍더라.
피할 이유는 없잖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다.
내가 살아온 삶이 지금의 결과다. 지금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법이란 건 지금까지의 경험과 다른 세계더라. 나는 지금까지 감성적으로, 인간적인 관계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살았는데 법이란 종이 한 장 차이로 움직인다. 사실 법을 몰라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법을 들이미니까 당황스럽더라. 결국 내 자신의 떳떳함을 읽어주는 건 대중이다. 물론 대중들은 진위와 무관하게 자극적인 말을 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사생활이 어떻든 간에 내가 배우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확하게 보는 인식은 있단 말이다.
배우로서 충실히 살아왔다는 자신감 덕분인가.
배우니까 기본적으로 연기를 잘해야 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 사실 배우의 사생활을 평가하거나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미는 건 대중의 역할이 아니다. 그건 내가 할 일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가 말미를 주니까 허를 찔리는 거다. 결국 배우로서의 평가가 중요한 거다. 그런 자신감을 얻을 수준이 되지 않는 배우에게 사람들은 간섭하거나 참견하고 방향까지 제시하려 든다. 결국 중요한 건 행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가장 정확하게 있느냐는 거지.
<미라클 코리아>의 MC를 맡았다. 연기 외의 방송활동도 늘어난 것 같다.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 방에서 TV로 볼 땐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분야든 그만의 고통이 있다. 물론 힘들지 않으면 일이 아니겠지.
<기적의 오디션>에서 탈락자를 발표하고 눈물 흘리는 장면에서 이미숙이란 사람을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를 심사한다는 건 이성적인 일인데 나는 너무 감성에 치우진 사람이더라. 조직의 인사개편엔 미흡한 사람이겠구나 생각했다(웃음). 이런 취약점이 있다는 걸 <기적의 오디션>으로 느꼈다. 능력은 없었어도 내 감정만큼은 진짜였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미숙이 자신과 다르다고 느낀 적 없나.
아마 사람들은 이미숙이라면 세고, 냉정하고, 어렵고, 무섭고, 뭐 이런 수식어들을 생각하지 않을까. 사실 일적으론 그렇다. 나는 프로니까 받은 만큼 해내야 하고, 더 받기 위해서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정에 약하고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사실 50세를 넘긴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늙어가는 건 피해갈 수 없을 거다. 그만큼 맡을 수 있는 배역의 가짓수도 줄어들 거다.
순응해야지. 발버둥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면 역효과가 일어난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고. 살짝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면 되는데 사실 그렇기가 조금 힘들더라. 나도 그로부터 편해진 건 불과 2~3년 정도 밖에 안됐다. 그렇다고 나를 놓는다는 게 아니다. 받아들인다는 거지. 그러니까 방법이 생기더라. 내가 해야 할 일이 나타난다. 그래서 지금은 편하다. 다만 배우로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된다는 건 숙제 같다. 어쨌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배우로서 잘할 자신이 있다. 열심히 살아가면 되니까, 정말 그렇게 살 자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