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영화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공항에서 손짓을 이용해서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를 마중 나간 모양이다. 친밀한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차 앞좌석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두 사람의 재회가 이혼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그 끝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의 문턱을 넘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예상 밖의 이야기 범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운용 방식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입장을 핵심으로 그와 연관된 주변부의 입장을 끌어들이며 극의 너비를 확장해나간다. 단순명확해 보이던 사안이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확대된다. 평범해 보이던 사연이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과 충돌하고, 그로 인해서 예기치 않게 불거지고 밝혀지는 진실들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평면적인 일상의 기류에 입체적인 변곡점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이야기의 절정이 형성된다. 감독 아쉬가르 파라하디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도 명확해 보이는 사연의 끝으로부터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의 방향성을 살핀 바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끝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는 끝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굴러나간다. 그 예측하기 힘든 방향성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부조리극의 양상 자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그 복잡다단한 이야기 흐름만으로도 감정적인 진통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에게 가능한 화술과 작법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단지 그런 이야기 구조에 대한 흥미만을 안겨주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는 명확한 결말을 묘사하는 대신 카메라를 두고 떠나버리듯 롱테이크 기법의 엔딩 시퀀스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해 보이던 도입부 상황과 대비적인, 어떤 것도 불확실해진 결말부의 상황 자체를 아이러니한 여운으로 각인시킨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상황들의 내면엔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켜켜이 쌓인 오해들이 존재했고 그렇게 방치된 비밀과 오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당사자들의 삶을 휩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의 진실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알았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으로 가닿는다. 인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엔딩 시퀀스의 이미지는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진동시킨다.
<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그녀가 어느 날 말했다. “우리 그만 헤어져.” 아니, 너는 비빔밥 집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하니? 이유를 물었다. 달래도 봤다.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고도 해봤다. 그런데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더라. 언제나 너에게 최선을 다했고, 널 위해서 희생했고, 배려했는데, 이건 배신이야, 배신! 슬픔의 끝에서 파도처럼 분노가 밀려왔고, 분노에 휩쓸려 나가다 보면 망망대해 같은 외로움이 펼쳐졌다. 아, 글쎄, 이소라 누나가 부른 것처럼 바람이 분다니까. 그리고 김동률이 노래합니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아, 정말 어떻게 안될까. 그런데 결국 그녀가 돌아왔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냐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그런데 이 노래가 이별 후 재회하는 노래였던가? 그걸 잘 몰라서였을까. 그 뒤로 우린 네 번 헤어졌고, 다섯 번째에서야 비로소 진짜 헤어졌다.
<연애의 온도>는 장영(김민희)과 이동희(이민기)의 이별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별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난하다 못해 지긋지긋하다. 한때 사랑했던 사이라는 게 어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개차반 같은 공방이 펼쳐진다. 뒤에선 울고 불고 짜다가도 앞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을 듯이 이빨을 내밀고 으르렁거린다. 그런데 그 관계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회복된다. 거짓말처럼 붙어먹는다. “나 너랑 처음 하는 것처럼 떨려.” “나도 그래.” 몇 번이나 함께 뒹굴었던 그 방의 침대에서 마치 처음 자는 것처럼 말하고 진짜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때 우리가 대체 왜 싸웠지?” 아무도 모른다. 그게 뭐 대수인가.
희한한 일이다.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망쳐놓은 뒤에야 풍요로웠던 시절이 간절해진다는 것이. 누구나 러브 스토리를 꿈꾼다. 솔로일 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공자가 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나타나기만 해봐라! 금이야 옥이야 물고 빨며 간도 쓸개도 다 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시작할 때만큼은 귀엽고 예뻐죽겠지. 그리고 점점 변한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가 ‘이 정도도 못 참아?’에서 ‘이 정도로 해줘도 저래?’로 진화한다. 편하다는 것과 막 대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다 이해하고 뭐, 그런 거 아닌가? 결국 그 관성은 이별에 부딪혀서야 멈춰서고 되돌아본다. 그리고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덕분에 헤어진 연인 가운데 몇몇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대부분 다시 헤어진다.
<연애의 온도>는 이별의 과정 이후의 결과를 전시하며 시작된다. 그 이후의 재회를 통해서 이 남녀가 일찍이 어떤 방식으로 헤어졌을지 깨닫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건 동어반복이다. ‘헤어진 남녀가 다시 만나서 잘될 확률은 3%’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로또에서 1등이 될 확률이 814만분의 1이라는데 매주마다 1등이 나온다’니 희망을 갖고 다시 사랑한다 말한다. 미안하지만 관계에서 로또는 없다. 당신의 애인은 복권이 아니다. 그러니 서로를 기꺼이 감내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결국 당신 혹은 내가 변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난 그녀와의 다섯 번째만의 이별에서야 그걸 알았다. 당장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나도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그걸 알 때 비로소 진짜 이별했다. 그날은 잠도 잘 왔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있어도 선명한 금은 남는다. 더 이상 예전의 접시가 아니다. 박살난 관계에서도 금은 선명하다. 단지 망각할 뿐이다. 사실 그 금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봐야 부질 없다는 속설이 돈다. 그렇게 당신도, 나도 이별했다. 이별했었다.
<연애의 온도>에서 배우는 실전 연애 팁
DO 기다림
헤어지자는 그녀 혹은 그를 당장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은 버려라. 즉흥적인 흥분으로 내뱉은 말이라면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준다. 그러니 일단은 시간을 갖고 생각해라.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대에게도 시간을 줘야 한다.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이별이라면 당장의 어떤 노력에도 되돌리기 힘들 거다. 그러니 당신에게도 감내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Don’t 진상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뭐, 여기까진 괜찮다. 하지만 “야!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부터 “남자(여자) 생겼어? 그 새끼 누구야?” 같은 막말을 내뱉는다면 당신 역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잡고 싶으면 당신부터 잡을만한 사람이 돼야 한다. 헤어지겠다는 결심을 정말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깊은 배려라면야 어쩌겠냐마는.
배우는 작품을 선택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훌륭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왕이면 훌륭한 작품을 선택하고 싶은 게 배우의 마음이다. 아니면 아예 스스로 만들어버리던가.
최근 국내에서도 배우 출신 감독들의 활동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꾸준히 단편 연출을 해오다 첫 장편 연출작 <마이 라띠마>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유지태와 최근 연출 데뷔작 촬영을 마친 하정우, 연출 데뷔작을 촬영 중인 박중훈 등이 그렇다. 일찍이 <오로라 공주>로 호평을 얻었고 <용의자 X>로 주목을 받았던 방은진이나 <요술>과 <복숭아나무>의 감독으로 화제를 모은 구혜선도 마찬가지다. 과연 한국에서도 배우 출신의 거장 감독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왜 배우들은 감독을 꿈꾸는가? 이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는 감독이 꾸는 꿈이다. 물론 감독 혼자 꿈꾼다 하여 완성되는 것이 영화란 말은 아니다. 감독이 꿈꾸는 몽타주와 미장센에 숨을 불어넣고자 충실히 복무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존재할 때 그 꿈은 생명을 얻는다. 각각의 컷처럼 나뉜 스태프들의 재능을 하나의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출력이 바로 이런 재능이다. 감독의 할 일이란 그런 것이다. “어릴 때는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스크린이 도화지라면 감독은 화가이고 배우는 붓이다. 배우는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한다. 훌륭한 배우들은 자기 역할을 확실히 인식한다. 완벽하게 작품의 일부로서 투신하고, 때때로 작품의 빈틈마저 메워버린다.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탁월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동선과 리액션을 물론이고 조명의 위치와 카메라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한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부터 워렌 비티, 우디 앨런, 로버트 레드포드, 멜 깁슨 등, 훌륭한 배우가 훌륭한 감독으로 성장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런 명배우들이 감독의 자리를 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사실 배우 입장에선 자신보다 함량이 떨어지는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설 때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을 거다. 그런 경우의 수가 늘어날수록 차라리 카메라 뒤에 서고 싶다는 욕망도 커질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작품 경력을 늘려나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젠 배우라기 보단 감독의 인장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그는 일찍이 웨스턴 무비의 아이콘이란 명예를 멍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 낡아서 그 권좌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배우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감독들에 의해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가 망가지는 꼴을 번번히 목격하게 된 그는 직접 제작사를 차리고 끝내 메가폰까지 잡았다. 그리고 히치콕을 연상시키는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0)와 함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편 ‘제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수식어를 얻은 벤 애플렉은 지난 2007년 스릴러 <가라, 아이야, 가라>로 감독 데뷔한 뒤 호평을 얻었고 주연까지 겸한 범죄물 <타운>(2010)을 통해서 호평뿐만 아니라 흥행까지 이끌어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둔 최근작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대가의 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말했다. “배우라는 커리어도 이어가고 싶다. 감독이란 연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니까.” 한때 <굿 윌 헌팅>(1997)의 각본 작업을 하며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던 그에겐 졸작 액션 블록버스터에 연이어 출연하며 배우로서 바닥을 쳤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어쩌면 벤 애플렉에게 감독으로서의 길은 스스로의 연기 경력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노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벤 애플렉이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 그 뒤엔 조지 클루니가 서있었다. 그는 <아르고>의 제작자였다. 조지 클루니 역시 성공적인 배우 출신 감독이다. 폴리테이너로도 유명한 그답게도 근작인 <킹메이커>를 비롯해서 <굿 나잇 앤 굿럭> <컨페션> 등 시대적인 호흡이 돋보이는 정치적 소재의 작품들을 연출해왔고 좋은 평가를 얻어왔다. 결국 배우가 감독이 됐을 때 최고의 장점이란 최소한 자신보다 실력 없는 감독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고, 배우로서의 경력을 확보할 기회 또한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명심할 건 성공적인 족적을 남긴 배우가 성공적인 족적을 남기는 감독으로 살아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 물론 성공한 배우만이 꼭 성공한 감독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보다 큰 건 사실이다. 산수를 잘하는 사람이 수학을 잘할 가능성이 보다 큰 것처럼.
열정적인 폭발력과 훈훈한 외모로 무대를 누비던 조정석은 지금 대중 앞에 한 발 다가섰다. 나약할 리 없는 집념으로, 보다 섹시하고 강렬하게.
조정석을 만난다고 하자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에게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나? 그가 평소와 달리 수염을 길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풋풋한 청년의 얼굴을 지우는 대신 강렬한 남성의 인상을 그려넣었다. 도발적인 여인 앞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남자의 야심. 그렇게 조정석을 위한 화보 밑그림이 완성됐다. 촬영 당일,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촬영 장소를 찾은 조정석은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 시원한 미소의 소유자였다. 잠시 후, 모든 준비가 끝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청년의 얼굴에 강인한 인상이 들어찼다. 역시 배우는 배우다.
조정석은 뮤지컬계의 스타였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만 알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공연장을 찾지 않은 이들에게 조정석이란 이름은 그저 생소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반짝이고 있었다. 단지 가리킬 손가락이 필요했을 뿐이다.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와 <더 킹 투하츠>의 은시경이 가리키는 대로 수많은 이들이 고개를 들어 비로소 별을 봤다. 5:5 가르마를 탄 납뜩이의 정곡을 찌르는 대사에 포복절도했던 관객들은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핏이 딱 떨어지는 제복 혹은 수트를 입은 말끔한 외모와 강직한 성격의 훈남 은시경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대부분 처음엔 몰랐다. 그리고 갸우뚱하다 뒤늦게 놀랐다. “인물 자체가 다르니까 “얘가 얘야?”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더라. 어떻게 두 캐릭터를 같이 연기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보여지는 시기가 비슷하니까 오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일찌감치 촬영을 마친 첫 영화가 그 뒤에 제작된 첫 번째 공중파 드라마와 맞물린 시기에 개봉했다. 영화와 드라마가 함께 주목받았다. 진정한 ‘골든 타임’이었다. 운이 좋았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 하지 않던가.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무대에서 조정석을 눈여겨본 이들이 있었다. 곧 뮤지컬 지망생들의 도전을 그린 드라마 <왓츠업>에 그가 캐스팅됐다. “드라마 촬영 일정상 공연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드라마에 집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막상 편성이 보류되면서 1년 동안 지난한 촬영 스케줄이 이어졌고, 경력에 구멍이 생겼다. 주변에선 시간을 탕진하고 있다며 우려했지만 조정석은 시간을 투자하며 담담하게 때를 기다렸다. “지금이야말로 영화나 드라마를 해볼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 <건축학개론> 오디션으로 기회를 잡았고, 2011년에 방영된 <왓츠업>을 본 이제규 감독은 그를 <더 킹 투하츠>에 불러들였다. 믿음으로 얻은 수익이었다. 더 큰 이윤을 요구할 차례였다.
조정석을 쏘아 올린 신호탄이 된 납뜩이를, 조정석이 납득하긴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용주 감독의 주문처럼 관객을 웃길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집에서 TV로 보는 건 대수롭지 않지만 커다란 스크린으로 처음 영화를 보는데 내가 나올 때마다 미치겠더라. 중반부터 긴장이 풀렸다. 납뜩이가 제 역할을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었는데 사람들이 내가 나올 때마다 웃는 거다.” 납뜩이가 없는 <건축학개론>이란 얼마나 심심했을까. “어떡하지, 너?” 같은 납뜩이의 명대사가 조정석의 애드리브였단 사실은 그의 캐스팅이 진정한 신의 한 수였다고 믿게 만든다.
<건축학개론>과 <더 킹 투하츠> 이후로 조정석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코믹한 시대극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의 촬영을 마쳤다. <방가! 방가!>의 감독 육상효의 새로운 연출작으로 80년대 미군문화원을 점거한 대학생들의 에피소드를 그린 이 코미디물에서 그는 ‘민중가요계의 조용필’로 불리며 기타를 치고 노래했다. 조정석은 일찍이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꿈이었다. 하지만 연기자가 되면 어떻겠냐는 교회 전도사의 권유로 한 달간 개인 레슨을 받고 시험을 친 서울예전에 합격했다. 일종의 계시였다. 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중퇴했지만 그에겐 이미 또렷한 길이 열려 있었다. ‘가족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지만 조정석은 ‘자신을 굳건하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결과를 명예처럼 간직한다. “기본적으로 내가 한 작품들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지난 작품들을 모두 기억한다.”
무대에 데뷔한 2004년부터 2010년 초까지 조정석의 시간에는 빈틈이 없었다. “일복이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 작품 끝나면 바로 작품하고, 작품 하면서도 다른 작품을 했으니까.” 단 한 번, 연습도 공연도 없었던 2주를 통째로 쉬었던 걸 제외하면 6년간 최소한 이틀에 한 번꼴로 무대에 올랐다. 6개월간 일주일에 8회 공연 그러니까 200회 가깝게 공연된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모리츠 역으로 단독 캐스팅됐을 때도 6개월간 매일 일정한 시간마다 그 무대에 올라 모리츠가 되어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매일 죽는 남자’다. 조정석의 믿음이란 그런 성실함과 집념을 담보로 둔 것일지 모른다. “하고 싶으면 확실히 해야 된다. 칼을 한 번 꺼냈으면 제대로 휘둘러야 되니까.” 공연이 끝나고 자신이 느낀 문제나 새로운 욕심들을 기록해 둔 ‘배우일지’도 그 칼을 제대로 휘두르기 위한 칼집이다. 그는 단단한 욕심으로 스스로를 단련해왔다.
<건축학개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할 기회는 두 번 정도 있었다. 오디션에 합격했던 <바람피기 좋은 날>과 조승우의 추천으로 캐스팅이 유력했던 <고고 70>이 바로 그것. 하지만 공연 중인 작품들과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 “공연 같은 경우, 오래전부터 공연장 대관을 준비하고, 출연 계약도 일찍 한다. 그 정도 의리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바람피기 좋은 날>은 <헤드윅> 때문에, <고고 70>은 <이블 데드> 때문에 포기했다. 영화를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당장 해내야 할 일을 팽개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공연을 하면서 겪어온 순간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에게 무대란 고향이자 뿌리다. 공연에 입문한 초기 시절 또한 잊을 수 없다. “2005년에 <그리스> 할 때 공연 끝나고 선배들과 술 한잔하다가 택시비가 없으니까 막차 끊기기 전에 뛰쳐나와서 막차를 타거나 막차를 놓치면 찜질발에서 잤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잘 웃고 장난기도 많지만 눈물 흘리는 건 싫어한다.” 강하게 보이고 싶은 게 아니다. 단지 스스로가 약해지는 게 싫을 뿐이다. 1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홀로 지쳐 쓰러져 울면서도 누군가의 앞에선 의연해야 했다. “어차피 앞으로 겪어야 할 경험을 조금 일찍 경험했다. 그래서라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싫었다.” 일흔이 넘는 어머니를 모시면서 기울어가는 가세를 지지해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지 모른다. 2004년, 데뷔작 <호두까기 인형>에서 ‘사람도 아닌 1인 다역’을 연기하는 조정석의 무대를 처음 본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았다. “처음으로 내 공연을 보셨는데 보고 나서 우시더라. 이렇게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버는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데 당황스러웠다.” 그 뒤로 아들의 출연작을 모두 챙겨본 어머니였다. 가끔 촬영이 없는 날 어머니와 함께 <더 킹 투하츠>를 볼 때면 TV 속 아들의 얼굴에 미소를 띄우시는 어머니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은 것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인생의 큰 목표’인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하지만 ‘당장 누군가를 미친 듯이 사랑할 자신이 없는’ 지금은 ‘아직 아닌 거 같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우아한 세계>의 감독 한재림이 연출하는 고려시대 사극 <관상>에서 조정석은 송강호, 김혜수, 이정재와 함께 촬영을 준비 중이다. <건축학개론>을 본 한재림 감독은 ‘괜찮은 배우가 있다’며 조정석을 추천했고 <더 킹 투하츠>를 본 송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오디션을 거치지 않고 선택받았다. 그것도 그가 좋아하는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이제 다시 출격이다. 출격.” 설렘이 가득한 미소로 내뱉는 단단한 각오. 그것 참, 결코 약해질 리 없는 관상 아닌가.
“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지. 내가 몇 년 전에 다신 연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처럼.” 4년 전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가 배우로서 출연하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선언을 거짓말로 둔갑시킨 작품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 메가폰을 잡은 건 로버트 로렌즈다. 그의 첫 연출작이다. 로버트 로렌즈는 긴 시간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했다. <블러드 워크>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등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제작하고 기획하며 파트너로서 긴 시간을 공유해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덕분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평범한 드라마다. 늙어가는 한 남자와 그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비범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만으로 유사하게 읽히는 작품이 있다. <그랜 토리노> 말이다. <그랜 토리노>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늙어감에 관한 영화다. 노인에 관한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빌린 두 노인은 완고하다. 자기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는다. 물론 <그랜 토리노> 쪽의 노인이 보다 그렇다. 어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배우로서 남긴 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두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캐릭터와 밀착하는 건, 마치 그의 전기적인 캐릭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처럼 어차피 그 역시 늙어가는 처지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결국 어떤 퇴물에 관한 영화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로 일해온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구단주의 주변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스카우트 일을 이어나가기엔 그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는 이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식이 낡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그 일에 매진한다. 노구를 끌고 먼 길을 운전해간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낡아가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치명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는 자신의 중요한 커리어를 뒤로 밀어내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나선다. 오랫동안 반목하고 지냈던 부녀는 그 길을 함께 하며 갈등과 화해를 경험한다.
빤한 이야기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늙어가고, 퇴물이 된다. 빠른 구속을 자랑하며 자신만만하게 직구를 뿌리던 영건도 어느 순간 정교한 제구와 볼컨트롤에 기대어 맞춰 잡는 노장이 돼야 한다. 새까만 후배가 자신의 마운드에 올라와서 자신을 불펜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언젠가 감내해야 한다. 사람들은 젊다는 것에 투자하길 꺼리지 않는다. 반대로 늙었다는 것에 포기하는 것도 당연하다 믿는다. 관록이나 지혜라는 말은 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봉처럼 유용하게 느끼질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노인의 지혜와 관록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빤한 선악 구조를 내세운다. 패기만만한 젊은 야심가의 빤한 수를 장외로 날려버린다. 역전타가 선명하게 예상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이 빤한 경기를 종종 비범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건 타석에 들어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타 들어가는 듯한 음성, 80세가 넘은 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박력은 대단하다. 주름 하나마다 박력이 새겨진 기분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병약한 노인들과 조금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퇴물로 내몰리는 상황을 본다는 건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기도 하다. 육체의 노쇠와 함께 반비례하게 축적되는 경험 속에서 익어가는 지혜를 팔 곳이 없다. 퇴물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퇴장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겨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의 거스 또한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증명해낼 뿐이다. 아직 자신의 지혜는 쓸만한 것이라고. 거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공을 쳐내는 배트 소리로서 구질과 배트 스피드를 파악해낸다. 거짓말같다.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랜 세월을 그 현장에서 자리하고 지켜본 전문가의 관록이 만들어낸 유산이다. 거짓말 같은 그 연륜은 결국 세월을 소모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어떤 노인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결국 이를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만큼은.
모든 노인이 깊은 지혜와 연륜을 품고 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생이 무르익어간다는 사실일 거다. 결국 퇴물이 되어 세상의 뒷방으로 밀려날 때 그런 가치나마 손에 쥐고 있지 못하면 다시 세상으로 떠밀려나올 기회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나 <그랜 토리노>는 결국 노인들에 대한 영화라기 보단 어떤 노인에 관한 영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온 이에 관한 이야기다. 단지 늙어간다는 것을 노스탤지어로 치환하지 않는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결코 초라한 노인의 얼굴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박력이 넘치는 인상으로 노인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에 마주선다. 퇴물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묵묵하게 살아간다. 마치 원래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끝내 퇴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와 같이 빤한 드라마에 비범한 인상을 새겨 넣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엔 노인을 위한 변명은 없다. 그것이 그 지혜와 연륜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여생을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마치 이 빤한 드라마를 신중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것처럼.
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이건 단순한 영웅전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는 오늘날의 슈퍼히어로 무비들과 또 다른 전형이다. 혼돈과 절망을 건너 끝내 세상을 구원하는 배트맨의 여정은 여전히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장편 연출 데뷔작 <미행>(1998)은 단돈 6천불의 예산과 게릴라 슈팅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이는 미국 내 단 두 개의 상영관에서 개봉된 뒤 4만 8천여 불의 수익을 거뒀다. 최근 놀란이 지휘한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지극히 초라한 규모를 지닌 이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중요한 단서다. <미행>의 파편적인 서사의 운용은 놀란을 세계적인 입지의 감독으로 승격시킨 <메멘토>(2000)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 의식은 <인셉션>(2010)과도 흡사하다. 실제로 <미행>에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하는 <인셉션>의 코브와 동명인 또 다른 코브가 등장하는데 그는 도둑질이라는 행위가 타인의 삶에 관여하고, 어떤 의미로는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는 타인의 꿈에 침투해서 기억을 조작하고 개인의 삶을 조종한다는 점에서 흡사하다. <미행>의 도둑질이 곧 ‘인셉션’인 셈이다.
놀란이 죽어가던 <배트맨> 시리즈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을 적임자로 임명됐을 당시, 화두에 오른 건 문에 붙은 배트맨 로고가 등장하는 <미행>의 한 장면이었다. 그가 일찌감치 배트맨의 팬보이였다는 소문이 전파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배트맨에게 시행한 심폐소생술은 탁월했다. 팀 버튼이 연출한 <배트맨>(1989)이 할로윈의 코스튬 카니발이라면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2005)는 하이퍼리얼리즘의 테러를 주목하는 영화였다. 그러니까 팀 버튼의 그것이 철저하게 악몽 같은 코믹스의 세계관 안에서 복무하며 현실과 괴리된 존재들을 비추는 대신 놀란은 최대한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이 세계의 폭력 위를 누비는 영웅의 고단함을 추적한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 수트의 부품 하나하나의 근원과 기능까지 짚어나간다. 결과적으로 <배트맨 비긴즈>는 <다크 나이트>(2008)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위한 충실한 매뉴얼이다. 반도체의 단자들을 연결하듯 배트맨을 이루는 물리적, 정서적 인과관계에 크고 작은 디테일을 새겨 넣는 과정을 통해서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라는 이중적 자아가 공존할 수 있는 현실적인 장을 마련한다. 이는 단순히 놀란의 고집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명확한 인식이자 철저한 기준, 즉 그가 생각하는 영화적 가치를 대변한다.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일치시킴으로써 상영관을 벗어난 관객이 자신의 영화적 체험을 곱씹을 때, 영화 속 고담과 객석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일치시킴으로써 그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장되고 이로서 완성된다.
<배트맨 비긴즈>가 놀란의 배트맨을 스크린에 세우는 작업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면 <다크 나이트>는 그 완성된 배트맨을 도구 삼아서 고담, 즉 이 세계의 곳곳을 비추고, 살피는 ‘놀란의 본격적인 시선’에 가깝다. 아이맥스 카메라까지 동원된, 전작에 비해서 광대해진 스케일은 <배트맨 비긴즈>에서 어루만진 디테일의 연결을 통해서 보다 손쉽게 확장된다. 물론 히스 레저의 목숨을 건 열연이 <다크 나이트>가 지닌 자질 이상의 성취를 더했다는 걸 간과할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사회를 관통하는 시선과 영웅에 접근하는 방식은 주목할만하다. <다크 나이트>는 ‘이 사회의 대중이 진정한 영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인가?’라는 물음을 품었다. 고담을 유린하던 조커가 배트맨이 가면을 벗으면 자신도 자수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을 때, 시민들은 배트맨을 비난하고 자수를 촉구한다. 조커는 대중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심리를 파고 들어 헤집는다. 이를 통해서 영웅을 끝내 궁지로 몰아넣는다.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 대단원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럼에도 이 사회에 영웅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다. <다크 나이트>에서 스스로 권위의 추락을 선택한 배트맨은 다시 한번 일어서서 고담을 구원할 흑기사가 된다. 배트맨에게 기생하듯 등을 맞댄 숙적 조커와 달리 베인은 철저하게 반체제의 선동가로서 배트맨을 마주보고 선다. 놀란은 말한다. “조커는 확실히 혼돈에 가까운 무정부주의자이자 사악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서 특별한 악당의 전형을 보여줬다. 내게 베인은 이 영화를 위한 밑천이었다. 이번 영화에선 새로운 무언가를 원했다.”조커가 고담을 흔드는 바람, 즉 혼돈 그 자체를 유희하는 악마였다면 베인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절망의 화신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관객 대부분은 베인에게 뭇매를 맞고 나뒹굴던 배트맨이 끝내 허리가 꺾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광경에서 묘한 통증을 공유했을 것이다. 기댈 곳이 없다는 건 세상의 끝으로 몰린 절망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런 세상의 끝으로부터 되돌아오는 이야기다. 물론 이성적인 질서와 규범이 무법적인 폭력에 의해 와해되는 풍경을 초월적인 존재의 등장만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설적인 절망이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비관적인 영화가 아니다. 배트맨이 구원한 고담에서 자라난 누군가는 정의로운 신념으로 영웅적인 채비를 차리고, 세계로 나아간다. 배트맨은 말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배트맨의 탈을 쓴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란, 이 세계의 정의란 그런 것이다. 결국 놀란은 이 세계를 좌우하는 건 배트맨도, 베인도 아닌, 객석의 개개인이라 말하고 있는 셈이다.
놀란의 영화는 항상 진실에 대한 물음을 품고 있다. 그 물음은 일종의 게임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진실을 마주하기까지의 고난과 목도했을 때의 충격을 중요하게 다룬다. <프레스티지>(2006)는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면일지도 모른다. 마술은 트릭이다. 눈속임이다. 진실을 알게 되면 시시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훈련된 눈속임이 아니라 위장된 진실이라면? 최고의 마술을 꿈꾸던 두 마술사가 경쟁 끝에 도달하는 진실은 생각 이상으로 놀랍고 끔찍하다. <프레스티지>는 바로 놀란이 품은 진실게임이다. 놀란은 말한다. “자신만의 세계와 논리를 가진 영화들이 관객이 보는 이미지 이상의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당신이 바라보는 영화적 세계가 스크린 너머의 허구일 때 우린 안전하지만 그것이 때때로 현실로 튕겨져 나올 때, 영화란 더없이 위험한 도구처럼 보인다. 최근 콜로라도 주의 소도시 오로라에서 벌어진 참혹한 총기 사건도 영화의 잠재적 불안을 조커처럼 속삭이고 부추긴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이 세계를 망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이다. 놀란이 전하는 진실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결국 우린 믿어야 한다. 당신이 지켜야 할 모든 가치들을, 그리고 우리 자신 스스로를.
(BOX)왜 아이맥스인가?
“아이맥스가 영화를 위한 최고의 포맷으로 발명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를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한 이유다. 상업영화 최초의 사례였다. 심지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전작의 두 배에 달하는 55분 분량을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70mm 아이맥스 필름에 담긴 광대한 비주얼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다. 하지만 놀란은 단순한 볼거리를 의식한 것이 아니다. “<인셉션>은 그 특이한 풍경을 포착하기보다 꿈의 리얼리티를 묘사하는 게 중요했기에 아이맥스 대신 핸드헬드 카메라의 현장감을 활용했다. 반면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아이맥스의 거대한 캔버스에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그 차이는 영화가 요구하는 방식에 의존한 결과였다.”놀란이 재발견한 아이맥스에 할리우드가 주목하고 있다.내년에 개봉될 <스타트렉: 더 비기닝 2>와 <헝거 게임: 캐칭 파이어>는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됐으며 스티븐 스필버그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중이라니, 3D를 잇는 차세대 영화 플랫폼은 아이맥스가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