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풀 작가의 <26년>은 사연이 많은 소재를 장르적인 그릇에 담아서 그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는 원작에 비해서 호흡은 짧게 가져가야 하니 각색은 불가피하고, 실사화라는 표현적인 제한도 존재한다. 특별한 재해석 능력을 보여준다면 모를까, 원작의 의미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본전 찾기도 쉬운 작업은 아니다. <26년>은 그런 제약들을 뛰어넘은 영화적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긴 어렵다. 압축된 초반 서사는 성기고, 변주된 일부 캐릭터는 비효율적인 경우가 발견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뜨거운 감정이 차고 넘친다. 어떤 식으로든 1980년 5월 18일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자유롭기 힘든 탓이다.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보기 힘들다. 보는 내내 울화가 치민다. 미치도록 죽이고 싶어진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보기 힘들게 만드는 이 놈의 현실이 문제다. 영화 하나가 짊어진 사연이 뭐 이리 무겁고 언제까지 애달파야 하냔 말이냐.
박진희는 배우로서의 삶이 남다르긴 하지만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게 배우 박진희와 자연인 박진희는 한 줄기의 인생을 유영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흐름을 타고.
들고 있는 책은 제목이 뭔가요?
<나한테 미안해서 비행기를 탔다>네요. 여기 놓여 있길래 생각 없이 펼친 페이지에 일탈의 사전적 의미가 나왔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또는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재미있네요.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에서 연기한 선주는 평생 일탈을 꿈꿔보지 못한 여자였거든요.
솔직히 박진희 씨도 일탈과는 거리가 멀어 보여요.
사실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개성 있는 배우들이 많아서 나만 너무 평범해 보이니까. 그래서 일탈을 시도했다가 심장이 떨려서 포기하고, 결국 일탈과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았죠.
일종의 성장통 같네요.
20대 초반에는 항상 20대 중반 정도가 되면, 20대 중반에는 30대가 되면 성장할 거라 믿었어요. 어느 한 순간 어른이 될 거라 생각한 게 아니라 그 나이면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철없는 아이였죠. 그런 탓인지 성장영화를 좋아해요. 그래서 <청포도 사탕>도 좋아요. 서른이 돼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거니까.
어른이 되길 바라는 이유가 있었나요?
좀 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이면 보다 좋은 연기를 할거라 생각했어요. 결국 원하는 만큼 잘되진 않았지만.
예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지 않아요?
옛날에는 작품 외부의 이유를 보기도 있었어요. 상대 배우라던가, 그냥 타이밍이 맞아서라던가. 그런데 이젠 작품 자체만 보게 돼요. 진짜 하고 싶은 걸 알게 된 기분이죠.
선주는 좀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요. 본인은 어때요?
옛날엔 저도 그랬어요. 참는 게 사랑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죠. 그렇게 꾹 참다가 폭발해서 이전 사건까지 생각하며 싸움을 크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말할 거면 확실히 하고, 말하지 않을 거라면 완전히 터는 것이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방법이란 걸 알았죠.
<청포도 사탕>처럼 여배우들이 많은 현장은 어떤가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서인지 여자들과의 작업이 편해요. 어릴 때는 예쁘게 나오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서른 살을 넘기고 나니 현장에서 내 포지션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돼요.
여자들끼리 대화는 많이 했어요?
박지윤 씨와 붙는 신이 많아서 지윤 씨랑 많이 나눴죠. 사실 팬이었어요. ‘성인식’처럼 도발적인 무대를 할 때도 멋있고, 후에 싱어 송 라이터로 변신했을 땐 완전 반했죠. 지윤 씨와 출연 여부를 얘기 중이라고 들었을 때 같이 하고 싶었어요. 선주와 소라는 전혀 다른 아이잖아요. 그래서 저랑 상반되는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지윤 씨의 이미지가 영화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죠.
배우로서 스스로 평범하다 생각하나요?
사실 15년간 배우로 살아온 제가 지극히 평범할 순 없겠죠. 다만 독특한 배우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평범한 배우도 있어야 되니까요.
그런 생각이 정립된 과정이 궁금하네요.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엄마가 예전에 드라마도 찍었다고 자랑할만한 에피소드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활동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엔 인터뷰하면서, “저는 잘할 거에요, 더 잘할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20대 중반까지는 쉴새 없이 바빠서 어떤 위치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자연스레 여기까지 왔죠.
대학원도 졸업했는데, 공부 욕심이 많나 봐요.
공부 욕심은 분명 있었지만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면서 그 욕심을 다 소진했어요(웃음). 수업 듣는 건 좋았는데 논문을 쓰는 1년 동안 나랑 공부는 이제 마지막이구나, 싶을 정도로 힘들었거든요.
얼마 전 존 박 씨와의 스캔들이 있었는데, 워낙 스캔들이 없던 배우라서 되레 신기하더군요.
원래 방송 의도는 작곡을 하는 남자와 작사를 하는 여자가 만나서 곡을 하나 만드는 거였어요. 환경 문제에 관한 가사를 써보겠다는 취지로 수락했죠.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서 제작진이 봄에 어울리는 아련한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데 그냥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첫 주 방송을 보고, ‘어? 이게 뭐지?’ 싶다가 3주쯤 되니, ‘이건 아닌 거 같다’ 싶었지만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죠. 그냥 나만 아니면 된다, 싶기도 했고.
존 박 씨의 볼에 뽀뽀한 것도 불가피한 연출이었나요?
야구장에 간 건 두 번째였는데 그날 너무 추워서 5회까지만 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자꾸 한 회만 더 보자고 하는 거에요. 왜 그러나, 싶었는데 7회 정도가 끝나니 키스타임이란 걸 하더라고요. 갑자기 전광판에 저희가 비춰져서 당황했는데, 계속 비춰지니까 결국 존 박 씨가 ‘누나, 그냥 볼에 하고 끝내죠?’ 그렇게 된 거였어요. 예능을 몰랐고, 좀 순진했죠.
진짜 연애를 해야죠.
만나고 싶다 해서 만나지는 건 아니잖아요. 연애정보회사에 내놓을 수도 없고, 전단지를 뿌릴 수도 없고(웃음).
특별히 요즘 꽂힌 게 있나요?
요즘에는 스님 책들?
네?
작가가 스님인 책들 있잖아요. 최근에 혜민 스님과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라는 책을 쓰신 정목 스님 트위터를 팔로우했다가 그 분들의 책을 읽었어요. 생각이 확장되는 기분이었죠.
불교신자인가요?
무교에요. 그냥 참선이나 수행 같은 과정에서 와 닿는 부분이 있어요. 8월 초에 문경의 수련원에 일주일 정도 다녀왔어요. 명상하고 서로 묻고 답하며 생각하는 게 너무 좋았죠. 새롭게 리셋하는 기분? 지금까지 살아온 35년 안에서 그 일주일은 굉장히 짧은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을 기준으로 지난 시간의 나와 앞으로의 나는 좀 다른 삶을 살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죠.
소라가 유명한 작가가 된 것이 선주와 재회하는 계기가 되죠. 혹시 유명한 배우가 된 덕분에 오랜만에 재회한 사람은 없었나요?
20대 초반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갔다가 현지에서 사람을 소개받았어요. 유학을 갔다가 현지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사는 언니였는데 초행이니까 자기 집에서 지내라고 해서 3~4일 정도 머물렀죠. 벌써 10년 전이네요. 그런데 며칠 전 트위터로 멘션이 왔어요. 너무 반가웠죠. 보고 싶네요.
트위터는 자주 해요?
예전엔 별별 이야길 다 했죠. 요즘은 가끔 환경 이야기나 하는 편이에요.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어머니 덕분인 거 같아요. 어머니는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집에 있는 양동이를 모두 마당에 내놓고 빗물을 받아요. 그걸로 세차하고, 마당 청소하고, 화분에 물도 줘요. 설거지 마지막에 헹군 물은 꼭 다시 쓰고. 어릴 땐 너무 귀찮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몸에 뱄어요. 얼마 전엔 저희 집 주차장에 채송화가 폈는데 어머니께서 채송화를 죽일 수 없다며 주차장을 사용하지 말라는 거에요. 다들 결국 동의했죠.
곧 유학을 떠난다고 들었어요.
첫 번째 목적은 여행이었고, 길게 머물 생각이라 어학공부도 계획했죠. 그런데 주변에서 만류해서 그냥 긴 여행이나 다녀올 거에요.
얼마나 긴 여행이죠?
돌아오는 티켓을 끊지 않았어요. 이러다가 한 일주일 뒤에, ‘저 그냥 돌아왔어요!’할지도 모르죠(웃음).
목적지는 어디에요?
아일랜드요. 자연 경관이 좋은 나라라고 해서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어요. 너무 멀어서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드디어 가게 됐네요. 심지어 혼자서. 이것도 하나의 일탈 아닐까요?
이번 여행에서 특별히 기대하는 건 없나요?
뭔가 기대했는데 얻은 게 없으면 실망하잖아요. 반대로 기대한 게 없는데 뭔가를 얻으면 기쁘겠죠? 그래서 기대 같은 거 잘 안 해요.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쉽진 않네요.
픽사 애니메이션은 통통 튀는 ‘룩소 주니어’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이 꼬마 전구에 불이 켜지기까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한 공주 메리다는 전통적인 혼인 관계를 강요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고자 마녀의 주술을 빌린다. 그 주술은 단순히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대신 어머니를 곰으로 만든다. 메리다는 사람들 몰래 곰으로 변한 어머니와 성을 빠져 나와 주술을 풀 방법을 찾아나간다. 픽사의 13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클리셰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비트는 대신 그 고유의 감동을 과녁처럼 걸어놓고 일일이 적중시킨다. 지극히 순진해서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몇몇 대목도 존재하지만 결국 마음을 울린다. 디즈니의 순수한 세계관과 픽사의 정교한 작법이 어울리며 디즈니 고유의 전통적인 감성을 새로운 기술로 계승한다. 픽사의 최고 브레인 존 래세터(John Lasseter)는 애초에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꿈꿨고, 한때 디즈니 애니메이터였다. 그가 지휘하는 픽사가 그린 그림이 디즈니의 그것과 닮아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2006년 1월 24일, 디즈니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74억 달러 상당의 거액으로 픽사를 인수하겠다는 것. 이 놀라운 소식은 1991년, 픽사의 장편 CG 애니메이션 제작 투자에 대한 디즈니의 결정에서 비롯된다. 당시 디즈니의 셀 애니메이션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CG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일종의 허풍이었지만 픽사의 창립자 에드 캣멀(Ed Catmull)은 오래 전부터 그 날을 준비해왔다. 이미 단편 CG 애니메이션 <틴 토이>(1988)가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수상했고, 디즈니의 <인어공주>(1989)나 <라이온 킹>(1994)의 부분 CG작업에 참여하며 투자 가치를 스스로 증명했다. 처음 두 회사의 관계는 디즈니의 일방적인 권한이 중시되는 주종관계에 가까웠다.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평단의 찬사 속에서 전세계적으로 3억 6천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 <토이 스토리>(1995)로 시작된 픽사의 역사는 곧 CG 애니메이션의 개척사가 됐다.
디즈니와의 계약 만료일인 2005년을 앞둔 2004년 초, 픽사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계약 연장 협상 중단을 발표했다. <토이 스토리> 이후로 <벅스 라이프>(1998), <토이 스토리 2>(1999), <몬스터 주식회사>(2001), <니모를 찾아서>(2003)로 승승장구했던 픽사였다. 그는 그 해 픽사의 4분기 실적 발표에서 픽사의 작품 배급을 바라는 메이저 배급사가 적어도 네 곳은 된다고 밝혔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이 3% 올랐고,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디즈니는 자사 영화 제작비의 45% 가량을 픽사의 수입으로 충당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CG 애니메이션의 반향에 밀려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셀 애니메이션 제작 중단마저 선언한 상태였다. 디즈니는 내부적인 진통 끝에 당시 스티브 잡스와 반목하던 최고경영자를 해고했다. 일종의 신호였다. 인수 합병 논의는 곧 시작됐다. 마침내 미키 마우스는 룩소 주니어를 샀다. 사실상 무릎을 꿇었다.
픽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존 래세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수석책임자로 임명됐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디즈니 셀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복원한 <공주와 개구리>(2009)와 <라이온 킹> 이후로 처음 북미 2억 달러 이상, 전 세계 5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2010)을 기획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가 설립한 캘리포니아 예술학교, 일명 ‘칼아츠’를 수료한 뒤, 디즈니에 입사했다. 그리고 당시 디즈니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덧없는 상실만을 체감하다 끝내 해고당했다. 존 래세터는 디즈니 재직 당시 자신이 구상했던 작품의 일부 배경의 CG 구현이 가능한지 자문하고자 에드 캣멀을 찾았었다. 에드 캣멀은 그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CG에 흥미를 지닌 애니메이터란 점에 주목했고 디즈니에서 해고당한 그를 픽사로 끌어들였다. 자신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각을 존 래세터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에드 캣멀은 일찍이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심취해있었다. 1970년대 초에 이런 생각은 대단히 앞서나갔거나, 그저 헛소리였지만 그는 뜻이 맞는 인재들을 규합해 나갔다. 뉴욕 공과대학 컴퓨터 그래픽스 연구소에서 결성된 팀은 <스타워즈>를 연출한 감독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로 편입됐다. 그곳에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기술을 연구해나갔다. 그들은 회사 입장에선 낭비라 이해될 그 작업을 지속하고자 회사의 눈을 가리기 위한 기능적인 업무들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를 테면, 컴퓨터 그래픽과 관련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CG를 이용한 광고 비주얼 제작 따위의 일 말이다. 그 당시 이는 결코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다. 에드 캣멀은 쓸모 없게 보이는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는 것에 끊임없이 불만을 표했던 조지 루카스를 설득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가능성의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을 수시로 막아야 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애플에서 퇴출당했던 스티븐 잡스에게 인수된 그들은 비로소 ‘픽사(PIXAR)’라는 이름을 얻었다. ‘영화를 찍다’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픽서(Pixer)’를 변형한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 역시 마냥 관대한 투자자는 아니었다. 픽사를 500만 달러에 인수한 스티브 잡스는 10년 간 인수비용의 10배가 넘는 투자금을 쏟아 부어야 했으니 관대해질 수도 없었다. 다행인 건 그가 재능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직관과 인내를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토이 스토리>의 성공가능성을 예견했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동료, 친구, 멘토였던 스티브 잡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엔딩 크레딧에서 떠오르는 이 문구는 “우주를 깜짝 놀라게 하자”고 곧잘 말했던, 픽사의 오늘에 기여한 마지막 조력자에 대한 그리움을 전한다.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존 래세터의 말처럼, 픽사는 기술과 예술이 손을 잡아 이룰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브레인트러스트(Brain Trust)’는 이런 가치관을 대변하는 제도다. 작품을 제작하는 어느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브레인트러스트를 소집한다. 존 래세터, 앤드류 스탠튼(Andrew Stanton), 브래드 버드(Brad Bird) 등 픽사의 브레인들이 모인다. 그리고 토론한다. 의견을 피력할 뿐, 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결정은 소집을 요청한 당사자의 것이다. “예술은 팀 스포츠다”라는 픽사의 캐치프레이즈처럼, 그들은 창조적인 놀이에 창조적인 놀이터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즉흥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 옆의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에 그럴싸한 디테일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다. 소통의 가능성을 마음껏 열어둔다. 우리가 사랑하는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런 사실은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팀이었던 픽사의 오늘을 안도하게 만든다.
<라따뚜이>(2007)에서 봤던 아름다운 파리의 전경, <월-E>(2008)의 황홀한 우주, <업>(2009)의 놀라운 비행, 그리고 <토이 스토리 3>(2010)의 심금을 울린 안녕까지, 우리가 픽사라는 이름 아래 만났던 그 사랑스러운 찰나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건 실로 다행이기 때문이다. 그건 예언자도 몽상가도 아닌,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지를 밀고 나간 현실주의자들의 꿈을 통해서 완성된 현실이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실제로 일이 생길 것이다.” 에드 캣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긋는 대신, 그 선을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토이 스토리>의 그 대사처럼,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마크 월버그의 10대는 심각한 비행의 나날이었다. 그의 듬직한 현재를 생각한다면 낯선 사실이다. 나락에 떨어졌던 오랜 경험은 단단한 현재의 기반이 됐다. 가족이라는 삶의 의지를 깨닫게 됐다.
“만약 내가 그 비행기에 아들과 함께 있었다면 그렇게 떨어지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다. 일등석 객실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나서 이리 말했을 걸. ‘됐어요. 이제 안전한 곳으로 착륙합시다. 걱정 마세요.’” 9.11 테러에 관한 마크 월버그의 코멘트였다. 이 발언으로 그는 곧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웅 의식에 젖은 경솔한 발언이었다는 성토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월버그는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이 해프닝은 월버그가 가정적인 남자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켰다. ‘아들과 함께 있었다면’이라는 전제는 할리우드의 소문난 ‘딸바보’이자 4남매의 아버지인 그의 인생을 위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월버그는 보스턴 남부 교외의 도체스터에서 트럭 운전사였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주를 이룬 그곳에서 성장한 월버그는 열악한 경제적 사정 속에서 잦은 불화를 겪던 부모의 이혼을 11세 무렵에 경험했다. 월버그의 유년시절이 불구덩이 한가운데 놓인 폭탄처럼 위태로워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13세 무렵부터 코카인에 손을 댄 월버그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점차 깊은 나락에 빠져들었다. 마약 판매, 절도, 폭행 등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던 그는 결국 한 술집에서 저지른 심각한 폭행으로 교도소에 수감됐다. 16세의 나이였다. 2년 동안의 교도소 생활은 그에게 일종의 전환점이 됐다. “후회할만한 짓을 많이 했다. 그 실수들에 대해서 분명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쩌면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다. 11세 무렵, 친형 도니 월버그와 함께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의 창단 멤버로 발탁됐던 기회를 저버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다만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분명 남다른 끼가 있었으니까. 다시 가정으로 돌아온 월버그는 형의 후원 속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마키 마크라는 이름의 래퍼가 된 그의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첫 앨범의 타이틀곡 ‘Good Vibration’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싱글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드러내며 섹시한 이미지를 어필한 그는 캘빈클라인의 언더웨어 모델로 기용되며 더욱 큰 인지도를 얻었다. 이 모든 과정은 월버그가 진짜 인생에 다다르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나는 스무 번 넘게 보스턴 경찰에게 체포됐고, 그 경험들을 기본적으로 활용했다. 이를 좋은 용도로 쓸 수 있었던 건 틀림없이 축복이었다.”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2006)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월버그는 이와 같은 소감을 밝혔다. 결과론적이지만 그의 이른 일탈은 이른 성숙을 위한 여정이 됐다. 사실 월버그는 배우로서의 꿈을 지녀본 적이 없었다. 월버그를 이끈 건 그의 스크린 데뷔작 <르네상스 맨>(1994)의 감독 페니 마샬이었다. “내가 이미 연기하고 있으며 누구보다 어리석지 않으니 왜 카메라 서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하더라.” 그 이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출연한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에서 자전적인 경험이 투영된 캐릭터를 연기하며 주목을 얻었다.
월버그가 스스로 거물의 자질을 지닌 배우임을 증명한 건 폴 토마스 앤더슨이 연출한 <부기 나이트>(1997)를 통해서였다. 7~80년대 미국의 포르노 산업의 열풍과 몰락을 통해서 당시 미국식 가족주의의 허상을 파헤친 이 작품에서 당대의 포르노 스타로 등장하며 정상과 바닥의 위치를 오르내린 이의 허무를 포착한다. 특히 마틴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1980)의 엔딩을 오마주한 라스트 신에서 거울을 응시하며 내뱉는 나직한 독백은 월버그의 자전적인 열망마저 오버랩되는 듯한 명장면이다. 조지 클루니와 함께 한 이라크전 배경의 코미디 <쓰리 킹즈>(1999)와 해양 재난 영화 <퍼펙트 스톰>(2000), 동명의 SF 고전을 팀 버튼이 리메이크한 <혹성탈출>(2001)과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의 보컬에 대한 전기인 드라마 <록스타>(2001)는 월버그의 입지를 수직상승시켰다.
“아버지가 되면 더 나은 인생에 들어선다.” 월버그는 아버지가 된 뒤, 자신의 삶을 더욱 긍정하게 됐다. 사실 월버그의 캐릭터 대부분은 어두운 성장사와 가족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지니고 있다. <쓰리 킹즈>와 <퍼펙트 스톰>에서의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향한 절실한 감정이 감지되는 캐릭터였으며 무명 미식축구 선수의 성공실화를 영화화한 <인빈서블>(2006) 또한 가난과 이혼의 아픔을 딛고 일어난 한 남자의 열정과 로맨스가 큰 축을 이루고 있다. M. 나이트 샤말란과 피터 잭슨이 각각 연출한 <해프닝>(2008)과 <러블리 본즈>(2009)에서도 붕괴와 상실의 위기 속에 놓인 가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물론 지적이고 터프한 리더의 이미지를 어필한 <이탈리안 잡>(2003)이나 <4 브라더스>(2005)와 같은 작품도 있지만 이들 역시 기본적으로 든든하고 헌신적인 가장의 리더십이 느껴지는 캐릭터들이다. 또한 대통령 암살의 음모 속으로 내던져진 한 남자의 통쾌한 복수를 그린 <더블 타겟>(2007) 역시 그의 진지함과 성실함을 대변하고 있다.
월버그의 최신작 <콘트라밴드>(2012)는 이러한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아이슬란드 영화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에서 월버그는 전직 밀수업자를 연기한다. 손을 씻고 새로운 인생을 살지만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위험한 밀수업에 다시 뛰어드는 남자로 등장한다. 복서 미키 워드의 실화를 다룬 전기적인 작품 <파이터>(2010)에서 주연을 맡았던 그는 역시 가난하고 불운한 가정 속에서도 건실하고 우직하게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을 그려낸다. 무엇보다도 월버그가 직접 제작까지 도맡은 두 작품이니만큼 그의 철학과 잘 부합되는 작품이리라는 건 확실하다.
보스턴 교외의 빈곤한 도시에서 암담한 10대를 관통한 월버그가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배우이자 제작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가족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현재를 살고 있다. 월버그가 아들과 함께 ‘그 비행기’에 존재했었다 해도 그 역사적 비극을 막아냈을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게 느껴지지만 그가 지닌 가족적인 애정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진다. “성공과 결혼으로 인해서 우리가 더 나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한 여자의 아내로서,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마크 월버그는 그렇게 오늘을 산다.
상대적으로 뼈를 드러내며 시작하는 원작의 서사가 강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서사의 축약을 위해 순행으로 전개를 수정한 건지 모르겠지만 가공할 떡밥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에서는 아쉽다.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갈등과 충돌로 발생하는 긴장감은 원작에 비해서 사유화되는 인상인데, 이를 테면 원작은 은교에 대한 두 남자의 감정 발화가 서로에 대한 견제와 의식을 통해서 발전되는 인상인 만면, 영화는 그것이 단순히 나이가 다른 수컷들의 롤리타적 욕망으로 제한하듯 그려진다. 형태는 남아있는데 핵심이 떨어져나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적요 역할의 박해일은 열심히 했다. 톤이 나쁘지도 않다. 다만 70대 노인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깝게 들리는 성대 묘사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김무열의 서지우는 감정을 좀 절제할 필요가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결점과 무관하게 신인 배우 김고은은 지우기 힘든 인상을 남긴다. 동물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신인배우의 출연이란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하지만 상영하는 곳이 없다. 개봉한지 한 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난 2월 27일, LA 코닥극장에서 열린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대에 오른 장 뒤자르댕(Jean Dujardin)의 탭댄스가 생중계됐다.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게리 올드만과 같은 할리우드의 초신성급 배우들을 제치고 헬리 혜성처럼 나타난 장 뒤자르댕은 오스카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스타들은 무대에 오르는 낯선 프랑스 배우의 뒷모습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21세기에 등장한 무성영화 <아티스트>의 출현만큼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었다.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아티스트>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의 주요부문을 휩쓸며 아카데미 5관왕에 올랐다.
이 소식은 한국 관객들의 호기심마저 당겼다. <아티스트>가 재미있다고? 그러나 상영관을 찾기가 힘들다. <아티스트>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태평양을 건너온 건 28일 오전이었다. 전국 58관의 상영관에서 상영되고 있었다. 개봉 당시에는 90관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사이트에 명시된 국내 총 상영관은 2312관이다. 스크린 점유율 약 1.6%. 물론 아카데미의 지원사격으로 <아티스트>는 좀 더 국내상영관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29일 경 95관으로 확대 개봉됐고, 3월 7일 경에는 100여 관 안팎을 오갔다. 개봉 이후, 한 달이 지난 3월 16일에는 29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아티스트>의 북미 개봉일은 2011년 11월 25일이었다. 미국 내 전체 상영관은 36000여 관 정도로 추산된다. 4개관에서 개봉됐다. 점유율로 보자면 한국보다 더욱 심각한 셈.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에서 개봉 네 달에 다다르는 3월 15일경, <아티스트>는 1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개봉작의 상영관 확보 방식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와이드 릴리즈(wide release)와 리미티드(limited). 대규모 단위로 상영관을 확보하는 와이드 릴리즈는 거액을 들여 제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단기간에 최대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 상영관을 대거 포섭해 관객의 선택을 유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리미티드는 그 반대다. 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많은 상영관을 확보할 수도 없고, 한 편으로 그럴 필요가 없다. 영화를 배급한다는 건 상영관에서 영사될 필름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필름을 제작하는 것도 자본의 소요다. 저예산 영화들의 수익구조 안에서 필름 제작에 자본을 소모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리미티드 방식의 배급은 불합리라기 보단 효율적인 선택이다.
한국과 미국은 배급사와 극장주의 수익 배분 구조도 다르다. 한국은 제작사와 극장주가 정확히 반반으로 나눈다. 공평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극장이 온전히 절반을 먹는다면, 제작에 관여한 제작사와 배급사 휘하의 모든 이들이 그 절반을 나눠먹는 구조인 셈이다. 제작사를 도매상으로 보자면 폭리를 취하는 소매상을 만난 격이다. 미국에서는 수익 구조가 유동적이다. 일반적으로 미국 극장들은 흥행이 기대되는 영화에게 80% 가량의 지분을 준다. 블록버스터들이 이에 해당된다. 반대의 경우, 상황은 역전된다. 극장이 8을, 제작사가 2를 가져간다. 흥행 여부가 불확실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주의 입장을 안배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영화가 높은 수익을 올린다면? 상황은 다시 변한다. 수익 배분 구조 또한 역전된다. 2를 가져가던 영화사가 8을 가져가는 구조로 변한다. 그리고 흥행성이 확인된 영화의 상영관 또한 늘어난다. 리미티드에서 와이드 릴리즈로 전환된다. <아티스트>가 그랬다. 1월 20일, <아티스트>는 미국 내 662개 스크린을 확보하며 와이드 릴리즈됐다. 미국의 영화시장은 한국 못지 않게 대자본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다. 하지만 시장의 영향력도 그만큼 막강하다. 영화의 제작과 배급의 구조가 분리된 덕분이다. 국내 상황이 이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고 극장까지 소유한 대기업의 지배 상황이 공고한 까닭이다.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의 위력은 2차 판권 시장이 초토화된 국내 시장에서 더더욱 강력해진다. 익명을 요구한 어느 제작사 대표는 말했다. “만약 DVD 같은 2차 판권 시장이 존재했다면 지금과 같은 불합리한 배급 구조가 이뤄지진 않았을 거다.”
국내에서 영화는 개봉주에 흥행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따라서 완벽하게 명암이 뒤바뀐다. 2차 판권에 대한 이익이 미비한 국내 영화 시장의 상황 속에서 제작사들은 상영관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극장을 소유한 제작배급사들이 저마다의 파이를 꽉 쥐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의 다양성이 확보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전국 곳곳에 극장 체인망을 확보한 제작배급사는 스크린 점유율이 낮은 영화를 장기상영하며 관객의 입장을 유도하고 경쟁 영화들을 교차상영 방식으로 밀어낸다. 가뜩이나 설 자리가 비좁은 작은 영화들은 자연히 도태된다. 한때 독립상영관이 대안의 형태로 제시됐으나 몇 년 사이 수많은 독립상영관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작은 영화들은 집을 잃었다. 시장 구조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을 소비할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어쩌면 그런 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건 대자본을 쥔 영화사를 탓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한국의 시스템을 단순 비교하며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이건 기형적인 시장과 시장 규모의 문제이다. 시장이 넓어야 투자한 자본을 거둬들일 수 있는 경로의 확보도 보다 쉬워진다. 티켓을 살 관객은 모자라고, 흥행을 바라는 영화는 넘친다. 그야말로 바늘구멍에 낙타를 집어넣기. 그런 상황에서 일주일 단위로 영화의 성패가 결정되는 극장에서 제작비의 대부분을 회수해야 하는 수익구조는 심각한 문제다. 극장에서 내려간 영화는 갈 곳이 없다. 어쩌면 당신은 반문할 것이다. 그게 내 입장에서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당장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당신이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을 때, 상황은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대체 <아티스트>를 상영하는 극장이 왜 이리 없단 말인가? 영화가 별로라서? 아니다. 그건 정작 당신이 찾기 쉬운 극장에서 딱히 당기지도 않는 영화가 상영하는 것을 별 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영관을 찾아 발품을 파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 당신의 취향이 존중될 가능성도 희박해진다. 그저 손쉽게 클릭 한번으로 영화를 소유하는데 만족하는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손쉽게 영화를 소유하는 재미에 탐닉한다면, 그 영화들조차 존재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우디 앨런과 함께 필름 뉴요커로 자리해온 마틴 스콜세지는 전세계 영화의 수호자다. 일흔에 다다른 나이에도 녹슬지 않는 열의와 애정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발굴한다. 언젠가 영화가 될 그 삶에 대하여.
“내 모든 삶은 영화와 종교에 머물러 있다. 어쩌겠나. 그뿐인걸.” 마틴 스콜세지의 유년시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뉴욕 맨하튼 동부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스콜세지는 가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밀집한 그곳에서 언제나 죽음과 맞닿은 폭력을 목격하거나 내몰리며 자라났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란 스콜세지에게 일종의 동아줄이었다. 영화란 그 ‘비열한 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꿈이었고, 그는 그 꿈을 향해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할리우드의 6~70년대는 영화광들의 시대를 맞이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와 같은 흥행사들을 비롯해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브라이언 드 팔마 등 작가주의적인 성향의 감독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영화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영화학과 출신 세대들, 즉 아카데믹한 씨네필들이자 테크니션이었다. 뉴욕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스콜세지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단편을 감독하며 연출자로서의 경력에 시동을 걸던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가문 출신의 고백적인 작품으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스콜세지의 데뷔작 <누가 내 문을 두드리는가?>(1968)는 여성을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대하는 카톨릭계 이탈리아 이민자 청년의 잠재적 폭력과 이중적인 심리를 다룬 문제적 수작이다. 스콜세지에게는 시대적인 공기를 파악하고 현상의 근원을 살피는 능력이 있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강압적인 불평등 처우로 가난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무법자가 되어 벌이는 사건을 그린 <공황시대>(1972)를 비롯해서 <비열한 거리>(1973),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 그리고 <갱스 오브 뉴욕>(2002)까지, 뉴욕의 이민자 출신 갱단들과 남루한 뒷골목 소시민들을 비춘 스콜세지의 카메라는 가난과 차별이라는 담보로 상환한 비극적 폭력성을 담아냈다. 무엇보다도 스콜세지는 그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해나가기 위해서 폭력 그 자체를 유전자에 새긴 듯 살아가는 비열한 갱단들의 이미지를 강렬하고 사실적으로 포착한다. 그 특별한 방식의 삶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해나가는 이 세계의 일부로서 편입시킨다.
스콜세지는 이주민들로 채워진 뉴욕에 깃든 폭력의 역사를 탐구해낸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면들을 발췌해온 진정한 필름 뉴요커다. 1920년대 뉴욕의 사교계를 배경으로 그린 은밀한 삼각관계에 관한 <순수의 시대>(1993)는 시대극이란 점에서 이례적이나 유럽과 같은 뉴욕 사교계 문화의 풍경을 들춘다는 점에서 그답다. 무엇보다도 뉴욕 상류층의 향락을 살핀 이 작품은 미국의 근간을 이룬 그들 역시 대서양을 건너온 영국의 이주민이란 사실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주요하다. 또한 스콜세지의 이례적인 작품 <특근>(1985)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밀어붙인다. 우연히 만난 여인에게 끌려서 한밤중에 집을 나선 한 남자가 처음 마주한 뉴욕의 이방인 같은 여성들과 거듭 만나며 미궁과 같은 하룻밤을 보낸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좀처럼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을 만큼 혼란한 도시의 현실 그 자체를 패닉에 가까운 과장된 스토리텔링으로 녹여낸다.
<쿤둔>(1997)과 <비상근무>(1999)로 쇠퇴의 기미를 지적 받던 스콜세지는 다시 한번 폭력의 역사로 들어선다. 혹독한 뉴욕 이민자들의 역사를 그린 <갱스 오브 뉴욕>은 괴물의 탄생을 그린 영화다.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안착한 갱단들의 비열한 정서를 그린 스콜세지의 초기작과 달리 폭력 속에서 생존을 터득하고자 본능적으로 체득해 나가는 폭력성, 즉 폭력의 계승을 그린다. 미국의 미스터리한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의 전기물 <애비에이터>(2004)는 뉴욕의 이주민들이 꿈꾸던 환상, 아메리칸 드림에 근접한 어느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진취적인 도전을 거듭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듯 뛰어난 수완을 거둔 남자는 끝내 스스로의 욕망으로 자신마저 불사른다.
스콜세지에게 비로소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긴 <디파티드>(2006)는 홍콩의 <무간도>(2002)를 보스턴의 풍경으로 변환한 그의 탁월한 접근 방식으로 점철된 작품이다. 비정한 정서가 짙게 드리운 <무간도>와 달리 비열한 거리의 물리적 폭력이 체감되는 <디파티드>는 명분을 중시하던 <무간도>의 인물들과 달리 사적인 지배욕으로 팽배한 사내들의 생존 전장으로 변환된다. 무간지옥의 윤회 대신 비열한 거리 위에서의 구원을 행하는 사내들의 정조는 태평양을 건넌 리메이크작의 진수를 드러낸다.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을 영화화한 <셔터 아일랜드>(2010)는 <케이프 피어>(1991) 이후 처음 연출한 장르물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마치 생존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던 스콜세지의 괴물들이 끝내 분열증과 망상증으로 내몰려 자신의 존재적 가치를 되묻는 과정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물의 태도는 폭력을 관찰해온 스콜세지가 보다 적극적인 답변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보다 새롭다.
스콜세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녹을 닦아온 거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가족영화이자 3D로 촬영된 작품인 <휴고>(2011)는 분명 의외의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휴고>는 가족을 위한 영화도, 3D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한 영화도 아니다. 뤼미에르가 촬영한 달리는 기차 이후로 움직이는 그림으로서 관람의 대상이 된 영화에 스토리텔링이라는 영혼을 불어넣은 영화의 진정한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에 대한 내용이 담긴 원작은 스콜세지의 마음을 당길만한 것이었다. 특히 뤼미에르의 달리는 기차 영상을 비롯해서 다양한 무성영화의 레퍼런스들을 3D로 체험한다는 건 진귀한 체험에 가깝다. <휴고>는 움직이는 그림이 영화라는 예술이 되기까지, 무성영화가 오늘날의 디지털 3D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역사를 스크린에 집약시킨다. 영화 그 자체를 오마주한다.
스콜세지는 말한다. “영화는 역사다. 영화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다면, 우리의 문화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 그리고 각자 서로와 자기 자신을 향한 연결고리를 잃게 된다.” 70세에 이른 나이에도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는 스콜세지는 전세계 필름의 발굴과 복원 사업에 힘쓰며 끊어진 필름의 역사를 이어나가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 그 자체를 스크린에 투영하며 대중을 영화라는 마술로 인도하고자 한다. 결코 녹슬지 않는 감각과 애정으로, 영화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영화와 함께 하는 그 삶이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다.
한국의 전주는 다채로운 식감을 자극하는 먹거리들이 가득한 맛의 고장이다. 올해로 13회를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는 각종 식재료들이 어우러진 전주비빔밥을 닮았다. ‘자유, 독립, 소통’이라는 전통적인 슬로건 아래 디지털 영화나 독립영화를 아우르는 전세계의 비주류 영화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스페인의 신예 감독 알베르트 세라의 특별전을 기획한 이번 영화제는 4월 26일부터 5월 4일까지, 전세계 영화의 진미를 한 자리에 차렸다.
분노를 추스르지 못하는 남자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스스로 파괴한다. 그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 동떨어진다.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쓰레기통과 같다. 패악을 자행하는 이들은 역겹고 그들에게 복무하듯 살아가는 약자들의 무기력도 꼴사납다. 그 분노의 뿌리는 개인적인 사연에 닿아 있다.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상실의 뿌리가 그의 화를 부추긴다. 메울 길이 없다. 그런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났다. 울화가 치민 채로 들이닥쳤던 어느 가게의 한 구석에서 무너져있던 그에게 그녀가 말을 걸었다. 조셉(피터 뮬란), 한나(올리비아 콜맨)를 만나다.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던 두 남녀의 만남은 모든 인연과 마찬가지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된다. 좀처럼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던 조셉은 그 모든 화를 스스로 감내하듯 받아들이는 한나를 만나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한다. 한나에게 마음을 열어나가던 조셉은 그녀의 미소 뒷면의 극악한 현실을 대면하게 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종종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해내야 할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디어 한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한 남녀에 관한 사연이다. 자신의 삶을 채우던 절반의 희망을 잃어버린 조셉은 남은 자리에 절망을 한 가득 채우며 살아간다. 자신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폭압으로부터 자유롭길 갈망하는 한나는 매일 같이 그 무기력한 현실을 체감하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이란 언제부턴가 요원해진 단어였다. 두 사람은 거칠고 성기게 조우하지만 결국 애틋하고 절실하게 서로를 당긴다. 거대한 결핍으로 자라난 가시를 세우던 남자와 끔찍한 폭력의 공허에 시달려 텅 빈 삶에 움츠려 들던 여자는 서로를 통해서 가시를 꺾고, 몸을 세운다.
두 남녀의 만남, 비극 속에서 샘솟는 희망의 여지, 이는 사실상 암담한 터널 같은 여정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어줍잖게 희망이나 긍정을 논하지 않는다. 지독한 비극에 내몰린 이들에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범위의 선택을 담담하게 내민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라는 희망만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비극의 질곡으로 인물을 내려 보낸다. <디어 한나>는 비극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희망을 직시하는 영화다. 운명적인 태도로서 희미한 긍정으로 비극을 덮는 대신, 그 비극을 돌파하는 방식으로서 비극을 극복해낼 수 있음을 직시한다.
어쩌면 충격적인, 허나 지극히 그러할 수 밖에 없는 결말부의 한 대목에 다다른 대부분의 관객들은 무너져 내린 마음을 쓰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비극이라기 보단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디어 한나>는 비극을 뛰어넘기 위해서 맞불 같은 비극을 선택한 여인의 용기와 그 용기를 북돋아준 한 남자의 새로운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끔찍하게 처연하지만 아연하게 아름다운, 마음을 후려갈기는 힐링 무비다.
“내가 공무원 출신 아입니까!” 그렇다. 원래 그 남자, 최익현(최민식)은 밀수업자들에게 삥이나 뜯는 부산 세관이었다. 물론 혼자 해먹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팀원들의 비리 행위에 총대를 메고 옷을 벗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밀수업자들의 필로폰을 입수한 그는 건달과 손을 잡고 이를 일본에 유통해서 한몫 챙기길 시도한다. 그래서 만난 것이 바로 부산의 내로라는 주먹 최형배(하정우)다. 그리고 경주 최씨 충렬공파 최익현은 직감한다. 그가 자신보다 항렬이 낮은 집안 사람임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그는 세력을 자랑하는 건달 두목의 대부가 된다. 1980년대의 일이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노태우 전대통령이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범죄와의 전쟁’은 그저 영화의 시대상을 짐작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동원된 것에 가깝다. 부산을 배경으로 둔 건달들의 행태를 그린 작품이기는 하나 이 작품을 단순히 갱스터 무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조폭 영화라고 정의하긴 아쉽다. 1980년대, 한국의 근현대사를 헤쳐온 아버지들 가운데 오늘날 일가를 이룬 어느 아버지의 진창 같은 일대기를 조명하는 영화라는 쪽이 보다 유력하다. 족보가 인맥이 되던 시대, 요즘의 관점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시대의 틈새에 손과 발을 끼워 넣고 매달리며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법을 배운 한 남자가 어떻게 한 시대를 관통해왔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세관에서 밀수업자 삥을 뜯었다가 조직에서 팽 당할 위기에서 밀수된 필로폰을 빼돌려 독립한 최익현은 최형배를 만나 그의 대부 노릇을 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든다. 최형배가 지닌 건달의 가오가 자신의 것이기도 한 것처럼 형님으로 군림하려 한다. 하지만 최익현의 가오는 곧잘 무너진다. 나름대로 곧잘 흉내를 낼 뿐, 흉내 이후에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건달의 세계에 출입하지만 결국 건달의 세계를 겉도는 반달, 즉 일반인도 건달도 아닌 박쥐 같은 존재가 된다. 영화의 코미디 감각도 이 부근에서 살아난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의 종친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건달 두목의 대부를 자처하게 된 한 남자가 그 세계에 뛰어들어 벌이는 로비 행위는 오늘날 스크린 너머에서 이 행위를 지켜보게 될 관객에게는 좀처럼 진지해지기 힘든 우스꽝스러운 콩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검사의 수사망을 압박하고자 동원하는 인맥이 종친회에서 만난 노인의 친척 검사이며 그것도 모자라서 빽이 될만한 종친들을 찾아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나가는 최익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또한 당대의 시대에서 나름의 가오를 잡으며 살아가던 건달 최형배와 그 무리들에게 뒤섞인 최익현의 앙상블은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을 보는 것마냥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다 결국 피를 본다. 그들 사이에 어떤 선악의 관점은 필요하지 않다. 어울리지 않는 공생관계에서 빚어지는 어설픈 합리는 때때로 웃음을 야기하지만 덕분에 종종 살벌하게 얼어붙는다.
코미디가 감상의 리듬을 좌우하는 가운데, 노스텔지어로 가오를 잡다가도, 서슬 퍼런 서스펜스가 때때로 쑥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이는 영화를 쥐고 흔드는 최민식의 위력적인 연기 덕분이다. 껍데기 같은 자신의 존재를 포장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사내가 한 순간 쫄아서 무너지는 광경, 희극과 비극을 아우르는 최민식의 연기는 가히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필요조건이다. 반대로 하정우는 최민식이 좌우로 흔드는 영화의 중간중간에 쐐기를 박아 넣으며 순간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일종의 충분조건이랄까. 조진웅과 마동석을 비롯한 전체적인 캐스팅에는 어떠한 거품도 없다. 다들 자신의 위치에서 적절한 그림이 되어 무언가를 해낸다. 무엇보다도 조직의 2인자 박창우 역할을 맡은 김성균과 검사로 등장하는 곽도원은 각각 발굴이며 발견이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결국 한 남자가 구시대의 구멍난 체계를 혈연이라는 담합과 치열한 생존본능을 앞세워 유린하고 착복하며 끝내 생존하여 자신의 일가를 이루는 과정을 살피는 시대극에 가깝다. 가진 것 없이 가문의 이름으로 삶을 연명하던 껍데기 같은 사내는 그 껍데기를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끝내 그렇게 키워낸 후손을 알맹이 삼아서 끝내 껍데기를 채운다. 이는 곧 현재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의 일가를 이룬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자행한 가족사 세탁의 뿌리를 들추고 살피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두 전작을 통해서 리얼리즘적인 연출적 장기를 드러낸 윤종빈 감독은 탁월한 시대 묘사와 서사적 배열을 통해서 현실 같은 영화를 만들어냈고, 배우들은 또렷한 연기로 그 시대적 공기를 채워냈다. 우스꽝스럽게 처연하고, 신랄하게 저린, 그 마지막 인상은 여전히 우리 삶을 좌우하고 있는 어느 아버지들이 채운 알맹이를 감싼 껍데기를 추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