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은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다. 그래서 누구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하지만 요즘 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화 이상의 체험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영화를 한편 보기로 했다. 극장부터 골랐다. 코엑스 메가박스에 새로 단장한 프리미엄 상영관 ‘부티크 M’을 찾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예매사이트에 접속해서 영화를 고르고, 두 좌석을 선택한 후 결제를 했다. 5만원이 결제됐다. 그러니까 영화 티켓 두 장의 가격이 무려 5만원이다. 티켓을 금으로 만들었나? 종이였다.
상영관 이름이 스위트룸이라고 했다. 흔한 극장 상영관처럼
1관이라고 부르는 대신 101호라고 했다. 상영관이
아니라 호텔룸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호텔식 서비스를 지향했다.
넓고 편안한 리클라이너 체어에서 다리를 쭉 뻗고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에비앙 생수를 웰컴 드링크로 제공한다. 입구에서 무릎담요를 나눠주고 자리엔 슬리퍼도 놓여있다. 룸서비스도 가능하다. 영화 시작 전에 좌석 측면에 있는 벨을 누르면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팝콘이나 나초 대신 피자를 주문했다. 화덕에서
구운 조각피자로 유명한 ‘피자리움’이 입점해있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와인도 판다. 그뿐만이 아니다. 홍대 부근의 유명한 커피 전문점인 앤트러사이트를 비롯해 타발론 티, 오설록
아이스크림도 상시 판매한다. 어쨌든 2시간 30분에 달하는 영화를 보면서 리클라이너 체어의 안락함을 실감했지만 동시에 영화가 재미없다면 숙면을 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나는 흥미로운 영화를 보고 있었고,
잠들 일은 없었다.
부티크 M과 같은 상영관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유사한 형태의 프리미엄 상영관은 존재해 있었으니까. CGV 골드클래스가
대표적인 모델이다. CGV에선 일찍이 식사와 영화관람을 연동해서 즐길 수 있는 ‘시네 드 셰프’와 같은 시스템을 운영하기도 했다. 롯데시네마 역시 샤롯데라는 프리미엄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메가박스
부티크 M은 후발주자다. 이미 존재하는 프리미엄 상영관 시장에
뛰어든 건 지금의 시장에서 유효한 기획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메가박스에선 지난해부터
다양한 형태의 상영관을 기획해왔다. 과거의 자동차 극장을 연상시키는 드라이브 M과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텐트와 캠핑 의자에 앉아 야외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글램핑 상영관인 오픈 M이 눈에 띈다. 둘 다 영화 관람 외적인 경험을 서비스한다는 공통점이
눈에 띈다. 특히 가족 단위 관객들을 위한 배려가 눈에 띄는데 어린 유아가 있는 부부가 쉽게 극장을
찾지 못하는 환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용한 서비스처럼 보인다. 바비큐나 와인, 맥주와 함께 영화를 즐길 수도 있다. 전통적인 영화관의 관습에서
벗어나 영화 관람과 동반할 수 있는 체험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21세기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의미가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입맛을 돋우는
음악처럼, 영화 또한 감각적 소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CGV에선 멀티플렉스 대신 컬처플렉스란 언어를 동원하며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했다. 컬쳐플렉스는 영화뿐만 아니라 외식이나 쇼핑, 문화체험
등 영화 외적인 다양한 경험과 연계된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성의 연계나 확장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CGV청담시네시티엔 다양한 식당과 커피 전문점,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
층층마다 자리해있다. 기존의 골드클래스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더
프라이빗 시네마’와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 형태로 제작된 커플석만으로 상영관 좌석을 채운 ‘스윗박스 프리미엄’과 같은 상영관은 영화 관람에서 서비스의 형태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대변한다. 롯데시네마 역시 새롭게 문을 연 롯데월드몰의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 ‘시네
파크’라는 광장 형태의 공간을 마련했는데 이는 영화 이외의 문화적 체험을 전달하려는 다른 극장들의 정책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체험적 다양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흐름은 극장산업의 화두인 셈이다.
물론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볼 것인가라는 선택권이 넓어졌고, 관객들은 기꺼이 고민하고 선택하며 기다린다. 이를 테면 최근에 화제가 된 <인터스텔라>의 아이맥스 열풍이 그렇다.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보길 고집하는 배경엔 ‘좀 더 큰 화면에서 보고 싶어서’라는 단순한 욕망을 넘어서 ‘두 영화를 관람하는 최적의 관람 방식이
아이맥스 상영관이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에 따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영화가 주는 감각적 체험을 최대한 극대화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영화관람이란 행위를 엔터테인먼트적인 체험으로서
보다 확실하게 소비하길 원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D 상영 방식의 일반화 또한 궤를 같이
하는 사례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의 전세계적인 흥행 이후로 디지털 상영관이 확대되고 3D 상영이
영화 상영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정착해 버린 건 어떤 체험을 계기로 관객들의 감각적 경험이 확장되고 정착된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 감각에 대한 수요는 새로운 체험적 방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체험의 확장을 통해 훈련된 감각을 고스란히 체감하길 바라는 관객의 정착이 극장 상영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입체적인 사운드로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 돌비 애트모스 음향 시스템도 장착된 상영관을 선호하는 관객이 늘어나고, 개인 좌석마다 설치된 헤드셋을 통해서 영화 사운드를 홀로 독점하는 상영관이 출현한 것도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통한 학습효과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음향에 따라서 좌석의 진동을 체감하도록 하는 비트박스관과 오감을
자극하는 4D 상영관의 공감각적 체험 또한 다르지 않다. 특히
4D는 기존의 영화관람 형태를 롤러코스터적인 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식의 영화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시각적 체험을 넘어서 다양한 감각적 체험이 가능하다는
학습효과를 얻었고, 그런 시장의 수요를 파악한 극장은 진화하고 있다.
21세기의 극장들은 영화의 관람방식을 다양하게 세분화하고, 영화 관람 외적인 서비스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극장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견인해왔다. 동일한 티켓 가격으로 각기 제작비가
다른 영화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콘텐츠이기도 했다. 그만큼
극장 산업이란 대중의 기호에 민감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 극장문화의 변화란 결국 대중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와 달리 이제 영화는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됐다. 또한 IPTV를 통해서 한동안 부재했던 영화의 2차 판권 그러니까 홈 씨어터 시장이 순식간에 정착됐다. 영화란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됐다. 그만큼 극장이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야 하는 건 필연적이다. 커다란 스크린만으로 극장의 경쟁력을 논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관객들은
이제 보다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 영화 그 이상의 영화관을.
무명 배우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변신했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할리우드에선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최근에도 그런 사례가 탄생했다. 크리스 프랫은 지금 완전히 다른 궤도로 진입했다.
사실 크리스 프랫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에 승선하기 전까지 완전한 무명 배우에 불과했던 건 아니었다.
올해로 6시즌까지 진행된 TV시리즈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 연기한 앤디 역으로 적지 않은
인지도를 얻었고, 크리틱스 초이스 TV어워즈에선 코미디 남우조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사실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의 앤디는 유쾌한 유머 감각을 지닌 캐릭터란 점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와 유사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외모만을 놓고 본다면 마치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처럼, 믿을 수 없도록 동떨어진 존재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근육질의 육체미를 자랑하는 스타로드와 달리 앤디는 테디베어처럼 둥글둥글한 곡선미가 눈에 선명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크리스 프랫은 한 TV쇼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이 아내에게 소리쳤던 일화를 밝혔다. “여보! 75파운드나 몸무게를 빼야 되니 빵은 그만 구워!” 반쯤은 농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에겐 일종의 절실함이 있었다. 마블
코믹스의 팬이기도 했던 그에게 마블 유니버스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은 그야말로 꿈 같은 일이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의 경력 안에서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감초 역할에 특화된 편이었는데 그런 역할을 통해서 경력을
쌓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다른 오디션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로 다크 서티>(2012)에 출연한 뒤부턴 연기하고
싶은 배역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매니저를 통해서 새로운 오디션을 찾아갔다.” 바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말이다.
사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크리스 프랫이 특별히 인상적인 역할을 맡았던 건 아니다. 그 이전에 출연했던 <원티드>(2008), <신부들의 전쟁>(2009)이나 <머니볼>(2011),
<5년째 약혼 중>(2012) 등의 작품에서 어떤 배우가 맡았다 해도 상관 없을
만한 역할을 전전해왔다. 그나마 지난해에 제작된 <딜리버리
맨>과 <그녀>에선
각각 극의 중심인물이 지닌 정서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인물로 등장하거나 중심인물의 정서적 결핍을 긍정적인 태도로 수긍하고 이해하는 인물로서
자리하며 나름의 존재감을 어필할 만한 인물로 등장한 바 있다. 다만 편차가 심해 보이는 체중으로 인상이
자주 변화하는 탓에 크리스 프랫이란 배우에 대한 일관성 있는 인상을 꿰어내기가 쉽진 않았을 거다. 어쩌면
앞서 나열한 출연작들보다도 주연 캐릭터의 내레이션을 맡은 <레고 무비>(2014)에서의 존재감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랄까.
무엇보다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를 보며 앞서 열거한 그의 출연작들을 짐작하는 이란 드물 것이다. 단언컨대 그럴 수밖에 없다. 식스팩과 수백 광년쯤은 동떨어진 듯한
체형의 무명배우였던 그의 과거를 연상했을 때 스타로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사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어떤 면에서 크리스 프랫과 처지가
유사한 작품이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또한
마블 코믹스의 역사를 차지하는 작품이지만 <어벤져스>의
세계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크리스 프랫에겐 좋은 기회였다. “시나리오와 감독의 디렉팅을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뭘 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배우로선 도움이 된다.” 대중에게도 낯선 역할인 만큼 자신의 관점이 새로운 기준이 된다 해도 상관없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낯설지 않은 작품이었다. 유년시절 친구를 통해서 우연히 원작 코믹스를 접한 적이 있었고 자신도 그 중
몇 권을 소장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론 운명적이란 의미를 붙일 수도 있을 거다. 게다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그의 기대를 넘어서는,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시나리오를 보지 못했다. 막상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내 생각보다 훨씬 좋은 역이라서 안도했지. 시나리오가 아주 웃긴데, 그게 딱 제임스 건 감독 스타일이다. 그는 실제로도 아주 재미있는
친구다.”
사실 크리스 프랫은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의 칭찬을 곧잘 하는 편인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도 주변 동료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입바른 말을 잘해서라기 보단 그가 실제로 사려 깊고 친절한 동료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그는 <당신은 몇번째인가요?>(2011)라는 영화로 크리스 에반스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는 주연을 맡은 크리스 에반스의 역할에 오디션을 봤지만 작은 역할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크리스 에반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크리스
에반스 또한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크리스 프랫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었는데 두 배우가 모두 마블
유니버스의 히어로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치곤 기묘한 일이다. 언젠가 <어벤져스>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중첩될 가능성도 다분한 만큼 두 배우가 한 스크린에 자리할
가능성도 존재할 것이다.
한편 그는 자상하고 세심한 가장이기도 한데 한번은 동료배우이기도 한 아내 안나 패리스의 머리를 땋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화제가 됐고, 한 영상 인터뷰에서 머리 땋기 실력을 직접 시연해 보이기도 했다. 천연덕스럽게 내년 개봉작으로 예정된 <쥬라기 공원>의 새로운 속편을 홍보하며 1분만에 완벽한 머리 땋기를 선보인
그는 “(머리를 묶을 땐) 고무밴드보단 스크런치라고 불리는
걸 쓰는 게 낫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촬영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운 탓에
아내로부터 생후 13개월이 된 아들이 아빠를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자신을 보고 ‘아빠’라고 불러주는 어린 아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면서 이 날을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크리스 프랫은 우주를 지키는 영웅을 연기하는 배우이기
전에 자신의 가정에 충실한 남자인 것이다.
크리스 프랫에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로 마블 유니버스의 주인공이 됐다는 건 배우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는 최근 LA에 있는 한 아동병원을 방문했다. 자신이 영화에서 입었던 의상들을 입고 스타로드로서 아이들을 찾았다. 그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관련된 인터뷰 중 자신의 촬영
의상을 챙겨놨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영화가 개봉하고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아이들을 찾아갈 거다. 영화가 크게 성공해서 아픈 아이들에게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피터 퀼이나 스타로드가 찾아오는 게 큰 의미가 된다면 그럴 거다. 그럼 이 영화가 내게 진정한 의미가 될 거다. 가장 멋진 건 내
아들이 언젠가 이 영화를 볼 것이고, 어쩌면 내가 어떤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이다. 그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는 거다.” 생각해보면 크리스 프랫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선한 인물로서 자리했다. 때때로
우스꽝스러울지언정 그랬다. 그는 본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배우다. 진정한
영웅의 자격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식스팩보다 그 착한 마음이 진정한 매력이자 재능일 것이다. 그 마음이 그의 경력에 좋은 영감이 될 것이다. 물론 그의 식스팩을
볼 기회는 유효하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속편이 2017년에 공개될 예정이니 말이다. 물론 식스팩보다도
따뜻한 마음이 더욱 매력적인 남자, 크리스 프랫의 유쾌한 행보를 계속 목격하고 싶다.
<카트>는 뜨거운 현실에서 잉태된 영화다. 뜨거움만으로 세상을 바꿀
순 없다. 부지영 감독은 알았다. 공감할 수 있는 온도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영화가 공감의 언어일 수 있음을.
<카트> 개봉이 일주일 남았다
인터뷰를 하도 많이 했더니 이미 끝난 영화 같다.
여성감독으로서의 어려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을 거 같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 대학교 영화과엔 여자가 더 많고 남자보다
성적도 좋다는데 현장 상황은 그렇지 않다. 분장이나 헤어, 의상
쪽엔 항상 여자가 많지만 조명, 촬영, 연출, 제작 분야는 반대다. 그런 걸 보면 남자보다 여자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적은 건 맞는 것 같다.
제목은 처음부터 <카트>였나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제목은 <카트>였다. 너무 딱딱한 제목이라 바꿔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고, 몇 가지 제목을 생각해봤지만 더 나은 게 없었다.
카트는 영화 속에서 중요한 ‘변화’를 대변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카트는 고객들이 쇼핑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다. 마트 직원들 입장에선
카트가 일자리를 유지시켜주는 도구인 셈이다. 그래서 마트 직원들은 카트의 혜택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다. 하지만 파업을 하고 마트를 점거하면서 카트는 저항의 무기가 된다. 카트의
쓰임이 변하듯 사람들도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래서 영화와 맞아떨어지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2007년, 비정규직 보호법 실행 후 일어난 이랜드의 비정규직 대량해고에서 비롯된 파업이 주요한 모티프가 됐다던데
그렇게 알고 있다. 시나리오 각색 과정에서 다른 비정규직 관련 사례를
비롯한 다양한 사건들을 살펴보고, 1년 넘게 시나리오를 만졌다.
각색 과정에서도 추가적인 취재가 필요했나
보다
과거의 사건이 모티프가 됐지만 지금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는 일이니까
현재 상황에서의 리얼리티가 보강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우린 항상 을입니다’란 스티커는 한 백화점의 직원 탈의실 벽에 붙어있던
것을 반영했다. 조직도를 직원 공간에 붙여놓음으로써 암암리에 실행하는 억압된 관리 체제도 보여주고 싶었다.
<카트>의 리얼리티는 사실적 묘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 세상이 원래 이렇다라는 잠재적 인식도 한몫을
거드는 것 같다
이미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일 거다. 굳이 꺼내서 얘기하지 않는 거지. 상업영화로서 의미가 있다는 건 그래서다. 거리감이 느껴지게 ‘비정규직’이란 단어로 설명하는 대신 영화를 보면서 내 처지가 될 수도
있다고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보다 쉬운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거다.
보고 나면 화가 나는데 우울하진 않아서
좋은 영화였다
화가 났다니 인물들의 정서에 깊게 공감한 것 같다. 선희(염정아)도 화를 내고, 태영이(도경수)도 화를 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스컴을 통해서 이런 사건을 접하게 되다 보니 사람보단 사건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거다. 하지만 영화는 사람으로 접근하니까 공감대가 달라진다. 나는 그게 <카트>의
강점이라고 본다.
소재의 심각함을 끌어안으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었겠다
맞다.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 심재명 대표님을 만났는데 “<카트>를 작은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 사실 독립영화로 이런 이야길 하면 약간 빤해 보이는 인상이
있고, 배급 상황도 열악해질 확률이 크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상업영화로 만들겠단 생각 자체가 멋있었고, 명필름이라면 가능할 거 같았다. 시나리오에 감동했다며 캐스팅에 응해준 배우들도 고마웠다.
배우들의 열연이 영화에 큰 공헌을 했다
빚을 많이 졌다. 눈빛이나 표정만 봐도 잘하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격한 신들이 적지 않고, 겨울에 물대포도 맞았는데 자신들이 나오는
컷이 아니어도 옆에서 열심히 하더라. 40명 정도의 배우들이 한 장소에서 대기하고, 촬영하면서 진짜 유대감이 생긴 것 같다.
본격적인 파업 전후에 따라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컷의 편집이 달라진다
전반부는 차분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마트에서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진상 고객을 응대하거나 연장근무 명령을 받거나 탈의실이나 휴게실에서 불합리한 처우를 받는 모습까지도. 그래서 파업 전까진 광각렌즈로 전체적인 풍경을 조망할 뿐, 카메라가
나서지 않는다. 후반으로 갈수록 인물들의 갈등이 표출되니 개개인의 심리를 드러내고자 망원렌즈로 접근했다. 사람들이 움직이면 카메라도 춤을 춘다. 계산대 점거 신에선 롱테이크로
전체적인 움직임을 쭉 훑었고, 공권력이나 용역과 대치하는 장면에선 컷을 많이 나눠서 격렬함을 드러내고
싶었다.
영화 속 마트는 세트였다던데
용인에 있는 물류창고인데 외관이 마트와 비슷했고, 내부 공간이 700평이라 적당해 보였다. 그리고 세트 현장과 15분 거리에 숙소를 마련해서 배우나 스태프 모두 출퇴근하듯 현장에 갈 수 있으니 편했다. 산 주변에 덩그러니 있는 곳이라 외부풍경은 다 CG로 만들었다. 영화의 반이 CG다.
대형마트의 협조를 얻기 힘든 영화일 거
같긴 한데, 혹시 시도는 해봤나
하긴 했다. 혹시라도 직원들 공간이나마 찍을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촬영 시간 확보가 어려웠다. 지금은 24시간 근무 체제가 아니지만 폐점과 개점 사이에 쓸 수 있는 시간이 일곱 시간 정도에 불과해서 물리적으로 촬영이
힘들겠더라. 물론 시나리오를 보여줘도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엄마인 선희(염정아)의 각성이 아들 태영(도경수)의 각성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처럼 느껴진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엄마로 인해 발생하는 자신의 변화에
갈등하지만 끝내 엄마와 화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이 영화가 희망적으로 느껴진다. 어떤 분들은 가난의
대물림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태영이 엄마와 겪은 갈등과 화해가 어른이 돼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결말이 힘있게
느껴지는 것도 태영의 변화가 희망의 담보가 되는 덕분이다
동의한다. 해고된 마트 직원들이 부당함에 맞서 싸우길 결심한 건 사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인데 결국 가족들과 갈등하게 된다. 그런데 아들인 태영이랑 화해하는
선희에겐 해피엔딩인 거다. 그 싸움이 어떻게 될진 몰라도 아들의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모든 캐릭터에 존재감을 살리는 것도 중요했을
거 같다
그건 배우들이 너무 잘해줘서(웃음)……
사실 나는 도경수만 신경 썼다. 유일하게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신인이었기 때문에 공을 들여야
했다.
<괜찮아, 사랑이야>에 캐스팅되기 전에 <카트> 촬영이 끝났다고 들었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도경수를 캐스팅한 배경이 궁금하다
내가 캐스팅 과정에 관여한 건 아니다. 명필름에선 존재감 있는 인물이
이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이돌 캐스팅을 염두에 둔 오디션을 봤다. 캐스팅 디렉터의 안목으로 도경수를 선택했다. 사진으로 봤을 땐 감이
안 왔는데 직접 보니 기대감이 생겼고, 열정이 보였다. 뭔가를
말해주면 잘 받아들인다. 스폰지 같더라. 잘하는 척하거나
계산하지 않고 자신의 바닥까지 드러내며 최선을 다하니까 부족한 게 보이면 바로 말해줄 수 있었다. 그
친구를 대하는 게 수월했다.
<카트>의 결말은 <델마와 루이스>의 결말과 닮았다. 절망적인 형태의 결말인데 이상향으로 돌진하는
쾌감이 닮았다. 절망적인 상황을 체감하면서도 더 강한 의지를 품는 두 여자의 모습에서 버디무비의 특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전작인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를 비롯한 단편 연출작에서도 두 여자의 관계를
조명한 경우가 많았다
처지나 성격이 다른 여자들이 만나 특별한 관계로 거듭나는 과정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사실 가족도 가족이 아니면 같이 살 이유가 없는 사람들일 수 있다. 성격이나
행동도 다 다르고. 그래서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유사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심이 모텔에서 만난 두 노동자나 아빠가 다른 자매, 같은
일을 하지만 생각이 다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이런 식으로 변주가 되는 것 같다.
관계에 대한 관점이 남다른 것 같다
사실 내가 잘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사귀기만 잘해도 인생이
즐거울 텐데.
못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나이가 들수록 귀찮아진다(웃음). 사실
영화에선 쉽게 보여주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하고 친구가 된다는 건 힘든 일이다. 유유상종이란 말이 왜
있겠나. 그 어려운 일을 영화 속에서 해내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도 같다.
단편 연출작인 <산정호수의 맛>의 주인공은 마트 노동자다. 소재면에서 <카트>와
동일하다
사랑이야기를 연출해 달라는 전주영화제의 제안에 응한 뒤 고민하다가 동네 마트 시식 코너에 있는 아주머니를 봤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멍하게 서있더라. 문득 그 분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마트 노동자가 주인공이 됐다. 우연이었지. 그런데 그 덕분에 <카트>를
하게 됐다.
심재명 대표가 추천했다던데
그 영화를 봤다고 하더라.
<카트>엔 지난 연출작들과 달리 역동적인 신이 더러 있다
파업 신에선 두 가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란 점에서
감정이나 정서를 잘 다뤄야 했고, 역동적인 투쟁 광경도 잘 묘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무술감독이 있었던 현장이기도 했다.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몸싸움을 해야 하니까 합을 짜줄 무술감독이 필요했는데 개인적으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게다가 김우형
촬영감독이 워낙 그런 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서 많이 의지했다.
김우형 촬영감독은 남편이니까 논의도 편했을
거 같다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믿었다(웃음).
개인적으론 다양한 연출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현장이었을 거 같다
지난 작품들에 비해 스케일이 큰 영화다. 스태프 수만 첫 영화의 두
배였으니까. 그래서 허덕인 측면도 있지만 전문적인 스태프들 덕분에 수월하게 작업했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컷, 오케이만 하면 나머지는 각각의 포지션에
있는 스태프들이 알아서 해결한다. 사전 논의를 거친 작업이라 해도 내겐 놀라운 경험이었다. 영화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협업이란 걸 여실히 느꼈다.
혹시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은 봤나? <카트>와 유사한 관점을 지닌 작품이다
시나리오 각색을 마치고 촬영을 준비할 무렵 연재가 시작된 걸로 안다. 4회
정도까지 보다가 <카트>와 비슷한 장면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 뒤론 보지 않았다. 동일한 주제의식에서
출발한 작품이니 비슷한 국면이 있을 순 있지만 그 장면 자체의 느낌이 너무 비슷해서 영향을 받게 될까 봐 안 봤다. 이젠 봐도 되겠지. 작가님과는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 기사가 나가면 아마 <카트>는 개봉 2주차일
거다
일단 손익분기점은 넘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 12세 관람가니까 12세 이상은 다 봤으면(웃음)?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면 좋겠다.
(ELLE KOREA DECEMBER 2014 NO.266 'ELLE interview')
조정석이 처음 무대에 올랐던 것도 어느덧 10년 전 일이다. 그래서 올해엔 데뷔 10년을 기념하는 무대에 올랐다. 그 무대에서 소년이 됐다. 어색하지 않았다. 조정석은 아직 소년이다. 소년처럼 꿈꾸는 배우다.
2년 전, 조정석은 꼭
다시 무대에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난 해 조정석은 팬들에게 약속했다. 내년엔 꼭 무대에서 만나자고. 올해 조정석은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로 무대에 올랐다. 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사실 이는 본인과의 약속이기도 했다. 조정석은 10년 전 서울 양재동에 있는 서울문화교육회관의 무대에
올랐다. 데뷔 무대였다. <호두까기 인형>이란 뮤지컬이었는데 쥐나 깡통로봇과 같은 비인간 1인 다역을
도맡았다. 객석에 앉아 있는 그 누군가였다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한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정석에겐 실로 특별한 순간이었다.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실감났다. 조정석이란 이름을 걸고 데뷔하는 날이었으니 얼마나 떨렸겠어요. 그런데 <블러드 브라더스>
무대에 처음 오를 때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왔어요. 기분 좋은 설렘? 친정으로 돌아왔다는 걸 실감했죠.” 3년 만에 오른 무대에서 10년 전 자신을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에서 자신의 오늘을 이끌어준 무대를 향한 사명감도 잊지 않았다. “내가 즐길 수 있는 공연을 하고 싶었고, 뮤지컬을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쇼의 요소보단 이야기 자체가 훌륭한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블러드 브라더스>였다.”
7살 남짓의 소년으로 무대에 등장해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인물을 연기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등에 업고
3년 만에 무대에 처음 올라섰을 때, 그가 느낀 건 떨림보단 설렘이었다. 세포가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무대 체질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조정석이 무대에 다시 오르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던 건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3년간 조정석은 다섯 편의 영화와 두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건축학개론>으로 시작된 영화 경력은 개봉을 앞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까지 포함해 다섯 편으로 늘었다. 처음으로 상투를 틀고 도포를 입은 <관상>과 처음으로 칼을 휘두르며 액션을 했던 <역린>에선 날고 기는 배우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영화의
흥망과 무관하게 조정석은 반짝였다. 아마 조정석의 ‘화양연화’가 있다면 지금일지도 모른다. 그의 화양연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민아와 함께 주연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이명세 감독이 1990년에 발표한 동명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필연적으로 원작과 다른 시대성과 세태를 담고 있지만 원작이 품고 있었던 결혼에
대한 보편적인 관념과 특별한 성찰을 고스란히 끌어안았다.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의 옴니버스식
설정을 그대로 흡수하며 원작에 경의를 표한다. 특히 조정석에겐 자신이 생각하는 결혼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결혼이란 게 마냥 행복하고 달콤할 거 같지만 막상 해보면 벗어나고
싶거나 구속된다는 기분을 느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충돌과 갈등을 뛰어넘는 새로운 행복도
존재할 거라 생각해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할 동반자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희 영화가 그런 느낌을 전달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조정석이 꿈꾸는 인연이란 어떤 것일까. “저는 운명론자는
아니에요. 스스로 개척하고 일궈나가야 한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어떤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걸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그 여자와의
관계도 새로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가고 개척해나간다고 생각하는 쪽이죠.”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든 조정석에게 결혼이란 막연하면서도
가까운 화두다. “결혼 생각은 하지만 특별히 그런 생각에 쫓기면서 살고 싶진 않아요.” 당장 급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 어울리며 자라온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의 문턱을 넘었고, 그렇게 아버지가 됐다. 지금도
한 동네에 사는 덕분에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들은 애 아빠가 됐어도 그에겐 위안을 주는 존재들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기운을 얻어요. 걔네들도 제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는 것 같고요. 동네에서 소주 한잔 하면서 얘기하다 보면 리프레시된대요. 그런 얘길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죠.” 오랫동안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건 어쩌면 조정석 역시 쉽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일지도 모른다. 그에겐 뚜렷한 주관이
존재한다. “사실 제가 안 좋은 사람은 아닌 거 않아요. 최소한
어리석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할 사람은 아닌 거 같단 말이죠. 주관이
뚜렷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손쉽게 놓을 수 있어요.” 쉽게 포기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갖기 위해 무리하는 대신 정말 자신이 쥐어야 할 것을 확실하게 선택한다는
말이다.
조정석은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어릴 때 태권도를 배웠는데 체육관에서 겨루기를 하다가 다운을 받으면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집에 와선 분해서 울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다음 심사 땐 걔를 꼭 다운시켰죠.” 그는 배우로서의 승부욕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자신만을 위한 승부욕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배우에겐 승부욕이 있어야죠. 다만 승부욕이 드러나는 순간 배우를 그만 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 욕심이 연기에서도 드러나거든요. 연기를 할 땐 그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나을 버리려고 노력해야죠.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캐릭터를 만들어내야지, 배우로서 돋보이려고 하면 그저 욕심이 드러나는 거죠. 그런 욕심이 드러나면 안되죠.” 그러니까 조정석이 말하는 승부욕이란 배우 개인의 머리를 들고자 하는 욕심이 아니라 완전히 작품에 녹아 들어가겠다는,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이다. 자신과의 싸움인 셈이다. “자신감과 자만심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누구보다 자신감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연기할 수 있었을 테고요. 이런 자신감은 열심히 노력했던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봐요. 물론 정말 잘하는 배우들을 보면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도 있죠. 그래서 항상 나를 새롭게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호흡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사실 지금 조정석은 그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블러드 브라더스>의 공연이 끝나면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홍보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고, 차기작인 영화 <시간이탈자>의 프리프로덕션에 참여해야 한다. 게다가 곧 부산국제영화제도 시작된다. 3년째 맡고 있는 대만 홍보대사로서 대만에도 다녀와야 한단다. 혹시 워커홀릭일까.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일이라면 놓치고 싶지 않아요. 만약 흥미가 생기지 않는 일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시나리오만 봤다면 당연히 하지 않았겠죠.” 조정석은 지금 궤도 위에 올랐다. 궤도 위에 올랐으니 궤도 위를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건축학개론>이 2012년에 개봉됐으니까 제대로 이름을 알린 건 사실 얼마 안됐잖아요. 사람들에게 아직 소년처럼 어린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요. 성장기로 보자면 소년의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소년답게 야망을 품어야죠. 배우로서의 야망을 품고 계속 노력해나가는 게 중요할 거 같아요. 그럴수록 저를 아끼는 이들이 많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조정석은 소년처럼 활짝 웃었다. 2년 전에 보았던 것처럼 단단하고 푸른 웃음이었다.
자비에 돌란은 일찍이 게이임을 커밍아웃했다. 그가 자신의 영화
대부분에서 직접 게이로 등장하는 건 아마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리얼리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비에 돌란의 영화를 퀴어영화의 범주에 묶어서 설명하는 건 간편하겠지만 한편으론 나태한 일이다. 자비에
돌란의 영화에 등장하는 성소수자들은 대부분 퀴어영화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살아가기 보단 영화적인 스토리텔링으로 극대화되는 '삶'의 감정선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서 작동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자비에 돌란 스스로 자전적인 영화라고 밝힌 연출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자비에 돌란이 연기하는 후베르트의 어머니에 관한 영화다. 후베르트의 어머니는 타인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는데 이는 모자 관계의 갈등을
점화시키는 불씨가 된다. 하지만 그 갈등은 단순히 아들이 게이라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갈등 국면을 이루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할 뿐이다.
자비에 돌란의 두 번째 연출작
<하트비트>는 특별한 삼각관계 로맨스물이다. 여기서
삼각관계를 특별하게 수식하는 건 자비에 돌란이 연기한 게이 청년 프란시스인데 그의 존재감이 삼각관계의 꼭지점 하나를 차지하면서 이 영화는 삼각관계 로맨스물의 전형성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한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남녀의 갈등이란 특이성은서 우정이란 정서를 통해 보다 특별한 삼각관계의 갈등과 화해를 형성시킨다.
<탐엣더팜>에서도 자비에 돌란이 연기하는
탐이 게이라는 설정은 영화를 지탱하는 서스펜스에 지속적인 미스터리를 불어넣는 장치에 가깝다. 동성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식이 열리는 연인의 고향을 찾는 탐은 현지에서 만난 애인의 친형 프란시스로부터 폭력과 협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엔 가학과 피학이라는 폭력적 작용과 반작용 이상의 기이한 기류가 더해진다. 자신의 폭력성을 통해서 관계적인 결핍을 충족하고 반대로 피해자는 그 폭력성을 통해서 상실감을 채우는 듯한 기이한
상충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관계적 모호함은 결국 이 영화의 미스터리를 강화함으로써 서스펜스의 위력을
더하는데 일조한다.
어쩌면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로맨스에 주목하는 <로렌스 애니웨이>야말로 자비에 돌란의 연출작 중에서 유일하게
퀴어영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해석될만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칸영화제는 이 작품에 퀴어영화상을 안겼다. 하지만 자비에 돌란은 자신의 영화가 퀴어영화라는 카테고리에서 해석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창작자 자신의 바람과 달리 자비에 돌란의 영화는 퀴어영화의 영역 안에서 언급되고 회자될 것이다. 그것이 손쉽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비에 돌란의 족쇄
노릇만 하는 건 아닐 거다. 그의 영화를 선전하는 날개가 된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퀴어영화라는 정체성이 주목 받을 만한 재능을 알리는 쇼윈도 노릇을 한다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자비에 돌란 자신이 이를 가장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장훈 다운로드 사태를 보면서 생각한 건 사실 그런 잘못을 하는 사람이 지천에 널렀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손쉽게 자신이 다운로드 받아서 본 영화가 어쩌고 저쩌고 쉽게 얘기한다. 불법 다운로드를 받은 주제에 정말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말하고, 언급한다. 불법으로 받은 게 아니라는 위장조차 하지 않는다.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응당 그래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일 게다. 사실 살다 보면 불법 다운로드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다. 다들 매사 일거수 일투족을 칼 같이 공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지 않고서야 타인의 잘못된 선택을 일분일초 단위로 가르치고 훈계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정도는 깨닫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잘못한 게 자랑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지 잘 알지도 못한 다고 자랑해선 안된단 말이다. 김장훈 다운로드 사태에서 배울 건 바로 그 점이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건 아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잘못해도 되는 건 아니다.
<한공주>는 지금 우리가 결코 잊어선 안될 것들을 환기시키는 영화다. 반드시 목격해야 한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소녀가 말했다. 소녀를 에워싸고 서있던 어른들의 인상이 일그러진다. 공기가 무겁다. 대체 그 소녀와 그 어른들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공주>는 이렇게 희미한 물음표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다. 이 물음표는 영화의 중반부까지도 막연해진다. 이 소녀 한공주(천우희)가 썩 좋지 못한 상황에 처했다는 예감만을 흘릴 뿐, 대체 왜 전학을 가고, 일면식도 없는 이의 집에서 얹혀 살며, 이런 딸을 두고 부모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속시원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간혹 전진하는 서사를 잠시 멈춰 세우고 뒤돌아보게 만드는 플래시백을 통해서 모종의 단서들을 하나씩 손에 쥐어준다. 이 단서들은 점차 소녀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있었을 것이란 예감으로 부푼다. 그리고 끝내 그 예감의 실현을 선명하게 목격해야 한다. 멱살을 잡혀서 그 현장에 붙잡히듯 목격해야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과거의 재현보다도 더욱 끔찍한 건 따로 있다.
<한공주>는 실화를 모티프로 제작된 영화다. 영화의 반석이 된 실화는 2004년 밀양에서 벌어졌던, 고교생들의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다.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건 가해자가 고등학생이며 그 수가 수십 명에 달했고, 지속적인 협박과 폭력으로서 어린 여학생을 1년 가까이 유린했다는 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수면 위로 올라온 이 사건이 기이한 방향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가해자에 대한 응당한 처벌은 고사하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심각할 정도로 외면당하거나 되레 가해자나 가해자 부모들로부터 린치를 당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들이 피해자인 소녀들에게 모욕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공분을 일으킨 바 있었다.
이수진 감독은 <한공주>가 실화를 재현한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이 이 영화와 실화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의미는 아닐 거다. <한공주>는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고발을 통해서 객석의 관객을 분노의 도가니로 밀어넣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차분하고 정적인 관찰을 통해서 객석의 관객에게 목격자로서의 어떤 책임감을 짊어지게 만든다. <한공주>를 보고 나서 참담한 기분이 든다는 건 어떤 의미로선 영화가 비추는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막막함을 공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혹한 과거의 재현보다도 더욱 끔찍한 작금의 현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죄를 짓는다. 그리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겐 어떤 식으로든 보상과 회복의 기회가 주어진다. <한공주>에선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이 아무렇지 않게 파괴될 수 있다는, 실제로 산산조각나고 있음을 목격하는 과정이다. 마치 객석에 앉아있다가 멱살에 잡혀 몽둥이로 얻어맞는 기분을 느낀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한공주는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다. 실제로 재능도 있다. 하지만 소녀는 수영을 배우려 한다. 전학간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이유를 묻는다. “왜 그렇게 열심히 수영을 배워?” 한공주가 답한다. “나중에 물에 뛰어들었을 때 혹시라도 살고 싶을까 봐.” 이 대사를 통해서 우린 작은 소녀에게 스스로 자맥질하고 발을 굴려 나아가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현현한 깨달음을 안겨주는 사회에서 살고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해야 한다. 누구나 어른이 된다. 불가피하게도 그렇다. 어른이 됐기 때문에 최소한 우린 아이들에게 좋은 미래를 안겨줘야 할 의무감을 껴안아야 한다. 억울할지라도 그렇다. OEDC 가입국 중 청소년 자살률 1위 국가인 대한민국의 어른들에게 <한공주>는 통증이다. 통증을 전하는 영화여야 한다.
<한공주>의 엔딩신, 다리 위에 서있던 공주는 사라지고, 그 아래의 수면에선 소녀만한 크기의 작은 물거품이 일어난다. 그 물거품이 사라질 즈음 갑작스런 환호와 함께 수면 아래 수영을 하며 나아가는 소녀가 보인다. 어떤 꿈이 발을 구르며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건 해피엔딩인가? 그것보다도 우린 이 결말을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우린 여전히 저 깊은 바다에 수많은 소년과 소녀들을 붙잡아주지 못하고 있다. 우린 <한공주>의 결말을 해피엔딩이라 말할 자격이 없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손쉽게 침몰되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는지, 목격해야 한다. <한공주>를 목격해야 한다. “제가 사과를 받는 건데 제가 왜 도망가야 해요?”라는 소녀의 질문으로부터 달아나선 안 된다. 그리고 기억해야만 한다.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저 수면 아래에 잠겨버린 수많은 꿈들을, 잊지 않겠다.
키스하면 안 된다. 허벅지를 감춰라. 언제부터인가 금지된 것들. 영화 포스터에서 불가능해진 것들. 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최근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의 포스터가 흔히 ‘영등위’라고 일컫는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등급 분류 심의에서 반려됐다. 설마 거칠게 폭발하는 폼페이 화산의 야성미가 위험해 보여서? 그럴 리가. 위험한 건 키스였다. 키스 장면이 선정적이라는 이유였다. 변경된 포스터에선 입 대신 눈을 맞추고 있는 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영등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뇌를 헤집어 봐도 ‘이해’라는 단어를 발굴할 수가 없었다. 이쯤 되면 음모론을 제기해야 한다. 설마 심의에 참여한 이들이 죄다 모태 솔로인 것인가?
사실 영등위의 포스터 심의 기준에 대한 볼멘소리는 하루 이틀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최근 들어서 관계자들의 불만이 더해지는 데엔 이유가 있다. “지난 1년 사이에 지나치게 심사 기준이 엄격해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기준을 잘 모르겠다는 거다. 지난 달까진 별 문제 없었던 기준이 불과 한 달 사이에 불가 판정을 받게 되면 좀 황당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한 영화 관계자의 말이다. 최근 개봉된 <아메리칸 허슬>은 두 가지 이유로 심의에서 반려됐다. 여성이 입은 드레스에서 가슴 부위 노출이 너무 심하다는 것과 ‘개수작’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 ‘선정적인 묘사’와 ‘비속어 등의 표현’에 대한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판단을 무색하게 만드는 전례들이 존재한다. 상반신을 드러낸 채 양 손으로 가슴 부위를 가린 두 여성을 앞세운 <손톱>(1994)이나 전라에 가까운 여인의 상반신이 드러난 <사마리아>(2004)의 포스터는 <아메리칸 허슬>을 반려시킨 ‘선정적인 묘사’라는 기준 안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각각 ‘미친놈’과 ‘엿같은’이란 활자가 눈에 띄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2006)과 <똥파리> 앞에서 ‘개수작’은 좀 무색한 느낌 아닌가. 최소한 일관성 있는 기준이 없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사실 명문화된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식적으로 영등위의 업무는 영화 포스터 ‘심의’가 아니라 ‘등급 분류 서비스’다. 사용 가능한 영화 포스터의 등급은 전체관람가밖에 없다. 사실상 심의인 셈이다. 물론 심의가 불필요한 건 아니다. 공공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선전물의 유해성은 사전에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전체관람가 기준은 영등위의 홈페이지에 명시돼 있다. 세부기준에 따르면 선정성과 폭력성, 반사회성 등이 이에 해당된다.
문제는 이 기준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다. 명시된 기준에 따라 반려된 포스터 몇 가지를 해석해보자. 폭발하는 화산 앞에서의 키스하는 남녀의 모습은 ‘성행위와 관련하여 방법, 표정 등을 지나치게 묘사한 것’에 해당되는 것일까. 혹은 ‘사회통념상 허용되지 아니하는 성관계를 묘사하는 것’일까. 아니면 폭발하는 화산 앞에서의 키스가 반사회적이거나 폭력적인 것일까. 그렇다면 가슴골의 노출은 ‘가슴을 자세하게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일까. 드레스 상반신으로 선명하게 드러난 가슴골이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반려된 <베일을 쓴 소녀>의 포스터는 단순히 가슴골의 선 일부를 지우고 전체관람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지난 해에 개봉된 <컴플라이언스>라는 영화의 포스터를 검색해보자. 노출에 대한 관계자들의 우려와 달리 전체관람가를 받는데 성공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두 포스터에서 노출된 가슴의 선정성이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전체관람가의 큰 기준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유해성 여부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가 발육이 왕성한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순 있다. 하지만 그 호기심이 유해한가. 그렇다면 해수욕장에서 비키니 입은 여자들도 청소년 입장에선 죄다 선정적일 테니까 청소년들의 해수욕장 출입을 금지시키고 거대한 장벽이라도 둘러야 하는 건가.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섹스를 권장하진 않는 건 섹스가 나쁜 것이라서 아니다. 그 행위를 감당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섹스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가르치는 것 역시 어른들의 의무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것이 되레 잘못된 호기심을 부추기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제도의 확립만큼이나 중요한 건 제도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가치관일 것이다.
사실 유해성의 큰 기준이 되는 건 노출 수위만이 아니다. 피를 비롯해서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을 사용하는 것 또한 철저하게 제한된다. 혹은 생채기나 흉터와 같은 신체 훼손의 흔적이 선명한 이미지도 사용이 제한된다. 흉터가 있는 여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미스좀비>의 포스터도 흉터들을 대부분 지우고 나서야 사용이 가능해졌다. 붉은 핏빛이 선연한 <300: 제국의 부활> 역시 선혈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흉터와 피를 ‘폭력성’의 흔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수입된 두 영화의 포스터는 수입된 일본과 미국에서 사용하는 포스터에 활자만 한국어로 바꾼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일본과 미국에서는 이 정도의 수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인데 두 나라의 아이들은 한국의 아이들보다 폭력적일까. 중요한 건 그 판단의 주체가 어른이란 사실이다. 사실상 믿음의 주체일지도 모른다.
전체관람가라는 기준 아래 집행되는 등급 분류는 때때로 지나치게 모호하다. 지극히 주관적이다. 현재 영화 포스터 등급 분류에 참여하는 건 공모제를 통해서 위촉된 다섯 명의 위원이다. 사실상 세밀한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가운데서 전체관람가 기준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다섯 명의 위원의 결정에 따라 영화 포스터의 유해성이 판단된다. 하지만 ‘청소년에게 끼칠 유해성’이란 기준은 지나치게 모호하다. 때때로 개인적인 관점에 따라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이들은 1년 단위로 교체된다. 매년마다 새로운 관점이 적용된다. 어쩌면 다섯 명의 시각을 통해서 전국민의 관점을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물론 영등위 입장에서도 고심하는 지점이 있다. “아주 세밀한 규정까지 명문화하면 진짜 규제가 될 수 있다.” 관계자의 말이다. 일리가 있다.
사실 한국은 표현에 있어서 대단히 보수적인 사회다. 전체관람가의 대상이란 대한민국 국민 모두다. 그 모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전제란 영화 포스터에서 가능한 예술적 시도를 무시하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기준이란 말이다. 그만큼 위원회 역시 보수적인 시선을 견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당한 시각이 곧 모두를 만족시키는 시각일리도 없다. 영화 포스터상에서 동성애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 자체가 금기시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우린 예술성을 판단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유해성만을 판단하는 셈이다.” 영등위 관계자의 말이다. 그렇다면 유해성에 대한 올바른 판단 기준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관계자들 역시 영화 포스터의 표현 가치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제시해야 한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다만 모두가 납득하도록 추구해야 할 가치관은 존재한다. 그것이 영화 포스터에서도 허락 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민기와 김고은은 ‘괴물들이 사는 세상’을 지나왔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과 내밀한 표정을 품은 채 서로를 응시한다. 피할 수 없는 예감 속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남녀가 만났다. 비극적인 예감 앞에서도 필연적인 이끌림으로 마주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저주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파멸적인 운명으로 한 발을 딛기 시작한 누아르의 연인처럼 이민기와 김고은을 떠올렸다. 두 사람과 마주한 건 저물어 가는 해를 타고 내려오는 어둠이 제 낯빛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오는 3월 13일에 개봉하는 영화 <몬스터>의 제작보고회를 마치고 몇 개의 방송 인터뷰 일정을 소화한 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지금 각기 새로운 출연작의 막바지 촬영에 매진 중이다. <몬스터>의 촬영이 끝난 건 작년 7월이었다. 그들에게도 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기억이다. 하지만 결코 흐릿해질 수 없는, 강렬한 통증이자 선명한 흉터처럼 남아있다. 아프고 흉한 기억이란 말이 아니다. 그만큼 강렬하고, 지울 수 없다.
이민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남자를 연기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고은은 그 남자를 죽이겠다고 쫓는 소녀를 연기했다고 했다. 그야말로 ‘괴물들이 사는 세상’을 지나왔다. 그래서 제목도 <몬스터>인가 보다. 그 남자의 얼굴을 대신한 건 이민기라고 했다. 그 소녀의 얼굴을 대신한 건 김고은이라고 했다. 궁금해졌다. 이민기는 언제나 철없는 소년처럼 웃고 울었다. 하지만 <몬스터>에서 이민기는 웃고 우는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찌르고 내리친다. 그에게 살인이란 그저 12시가 되면 먹어야 하는 점심 같은 것이다. 김고은은 호기심 많은 소녀처럼 해맑고 섬세했다. 단 한번의 등장만으로도 넓은 파문을 남겼다. 하지만 <몬스터>에서 김고은은 해맑고 섬세한 대신 우악스럽고 강인한 얼굴로 내달리고 악을 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충돌한다. 괴물과 괴물이 만난다. 이민기의 ‘변신’과 김고은의 ‘도전’만으로도 <몬스터>는 많은 주목을 받을 것이다.
<몬스터>를 지나온 이민기에게선 왠지 모를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체중을 급격하게 불린 후 감량했다고 했다. 체중은 여전했지만 근육의 밀도가 달라졌다. 눈빛의 밀도도 달라진 것 같다. 날카롭지만 예민하지 않았다.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나열했다.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언어 같았다. <몬스터>를 지나온 김고은에게선 여전히 호기심이 느껴졌다. 두 번째 작품이니만큼 처음보단 잘해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고 했다. 감각은 여전했지만 경험의 질량이 달라졌다. 생각의 질량도 달라진 것 같다. 무겁진 않았지만 가볍지도 않았다. 거침없지만 선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던져냈다. 탄탄한 활시위로 쏘아 올린 언어 같았다. 그리고 각자의 언어를 남긴 두 사람은 저마다 선명해진 어둠의 낯빛 너머로 사라졌다. 해가 저문 지는 오래였다.
이민기, ACTOR INSIDE ME
<몬스터>를 준비하면서 체중을 급격히 늘리고 줄였다던데, 평소 체중은?
67kg 안팎이다. 사실 체중 자체엔 큰 변화가 없었다. 80kg까지 찌웠다가 다시 고스란히 뺐으니까. 다만 체지방량이 달라졌다. 예전엔 15% 정도였던 체지방량을 4%까지 낮췄으니까. 체질을 바꾼다는 개념이었지. 그래선지 입맛도 변했다. 원래 단 거 안 좋아했는데 요즘은 베이글에 크림이나 잼 발라먹고 그런다.
살이 안 찌는 체질 같은데.
어릴 땐 숨만 쉬어도 살 빠진다고 하더라(웃음). 20대 초반엔 공기밥 세 그릇씩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는데 신진대사가 줄어든 건지 어느 순간부터 먹으면 찐다.
올해 서른이다. 특별한 기분이라도?
20대 후반으로 오면서 조바심이 들더라. 20대 초반엔 자는 시간이 아까웠다. 더 많이 보고, 만나고, 느끼고, 배우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게 좀 식상해지고 지치더라. 그러다가 20대 후반 즈음엔 시간을 쉽게 보내기가 아까워졌다. 20대도 초, 중, 후반이 다른데 30대도 마찬가지일 거 같다. 그때마다 할 수 있는 작품도 다를 거다. 그래서 최대한 할 수 있는 작품들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런 강한 캐릭터를 선택한 것일까?
단순히 싸이코패스 살인마 같은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다면 하지 않았을 거다. 단순히 연쇄 살인마라고 했다면 근육이나 날카로운 인상도 필요하진 않았을 테고. 히스테릭한 성격의 배 나온 살인마도 있겠지. 일단 <몬스터>의 태수에겐 보기 좋은 근육이 아니라 연약해 보이지 않는 탄탄한 몸이 필요했다. 액션신도 좀 있었고.
‘악’ 그 자체에 대한 흥미는 없을까?
그런 캐릭터라면 그런 영화여야 한다. <악마를 보았다>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몬스터>에선 그런 단면적인 살인마라면 의미가 없다. 단지 무서운 분위기가 필요한 게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은 톤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불안하진 않았나.
‘이걸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역할은 없었다. 계속 배우로 살아야 하니까 부딪혀 보는 거다. 만약 실패해서 욕먹는다면 그걸 계기로 열심히 해보거나 내 재능을 고민해야지, 해보기도 전에 포기하는 건 자세가 아닌 거 같다.
원래 생각이 많은 편인가?
연기를 한 뒤로 생각이 많아졌다. 내게 집중하게 됐다고 할까. 어느 순간부터 내 감정이나 상황을 비롯해서 나를 관찰하게 됐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생각이겠지만 그로 인해 생긴 깊이가 있을 것도 같다.
캐릭터로서의 이미지를 벗겨낸 이민기라는 사람의 실체는 잘 모르겠더라. 드러난 게 없다고 할까.
내 자신이 세상에 노출되는 걸 꺼린다. 캐릭터로 나오는 건 괜찮아도 실제로 드러나는 건 별로다. 인터뷰라는 게 대본이나 상황, 감정이 없는 것이라 힘들 때가 있다. 영화를 위한 제작발표회 같은 자리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되니까 괜찮은데 간혹 사적인 질문을 받게 되면 좀 힘들다.
의외로 진지하다는 말 들어본 적 없나?
아무래도 (그렇다). 그 ‘의외로’라는 건 역할이 준 이미지 때문이겠지.
<몬스터>에서 연기한 태수는 자신을 위장하고 사는 인간이다. 배우도 자신을 위장할 필요가 있지 않나?
어떤 감정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있다. 나 자신을 억제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참아야 되고, 눌러야 되고, 감춰야 되는 입장이라서 그런 건지, 원래의 나도 그런 강박이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궁금했다. 물론 그런 고민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아무래도 ‘소년’ 같은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변신’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게 될 거다.
사실 그래서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다. ‘그 아이가 이 역할을?’ 이러면서. 나도 마냥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다른 곳으로 발을 디뎌보는 느낌이었지. 직간접으로도 가늠하기엔 무리가 있는 역할이다. 그래서 그냥 열심히 했다.
살인마라는 캐릭터는 강렬하면서도 식상해지기 쉽다.
악인이라 해도 스크린 안에 있는 인물은 어느 부분에서든 매력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싫은 비호감 캐릭터를 두 시간 동안 따라올 수 있는 관객이 과연 있을까? 어쨌든 살인마라고 해서 하루 종일 살인만 하는 건 아니다. 살인이란 것이 이 인물의 인생에 있어서 한 부분이고, 그 인물의 표현 방식이 살인이 되는 셈이지. 연기가 내 인생의 한 부분인 것처럼. 다만 살인이 너무 비인간적인 행동인 거다. 그러니까 타인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한 공감대가 결핍된 인간인 거다. 이거 잘못 말하면 살인자를 옹호라는 거냐고 비난 받으려나(웃음)? 어쨌든 영화는 영화니까. 그리고 살인이란 건 분명히 이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 자체가 괴물 같은 상황이다. 그런 얘기를 이 영화도 하고 있다. 그저 긴장감을 즐기다가 끝날 영화는 아닐 거다.
참고한 작품은 없었나?
음, 캐릭터를 준비하기 위해서 봤던 건 아닌데 그 당시에 재미있게 본 책이 한 권 있었다. <좀비-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는 책인데 정말 기발했다. 책이 좋은 건 영화와 달리 그 상황과 공간감을 내가 상상하고 그릴 수 있다는 거다. 어쨌든 시간되면 꼭 봐라.
모델 활동 시절엔 경제적으로 힘들었다던데.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차비와 밥값 정도만 들고 왔기 때문에 계속 일하면서 벌어먹고 살아야 했다. 사실 고시원에서 살 땐 마음은 편했다. 짐도 없고, 공과금 낼 필요 없이 월세만 내면 되고, 들어와서 자고 일어나서 일하러 나가고, 그러면 되니까. 그 이후에 친구들과 함께 돈을 모아서 집을 구해서 숙소처럼 쓰기 시작하면서 TV 수신료에 각종 공과금에, 신경 쓰이는 게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가 생기더라(웃음). 소유한다는 게 꼭 그렇게 매력적인 일만은 아닌 거 같다.
소유욕이란 게 없진 않을 텐데.
누구나 불안정한 걸 싫어하듯이 나 역시 안정적인 삶을 바란다. 다만 정도를 벗어난 소유욕은 어깨의 짐과 다를 바 없는 거 같다. 내가 집착하지 않을 정도의 소유만 할 수 있으면 된다.
아무래도 작품은 언젠가 끝나는 거라서 뒤를 돌아볼 필요 없이 달려갔다가 빠져나오면 되는데 삶이란 그렇지 않으니까.
작품을 선택하고 후회해본 적은?
없었다. 싫어서 한적은 없었다. 단순히 일이라는 생각으로 임해본 적도 없었다. 그랬다면 후회가 남았을 거다. 어떤 식으로든 다 남는 게 있었다. <몬스터> 역시 내가 선택한 영화고 그만큼 욕심이 났던 작품이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까? 혹은 상대배우는?
살다 보면 계속 엇나가고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는 있다. 하지만 호흡이 맞지 않았던 상대 배우는 없었다. 사실 <몬스터>에선 (김)고은 씨와 함께 촬영한 신이 별로 없었다. 일주일 정도? 각자 서로를 추격하다가 결국 막판에 맞닥뜨리니까. 그게 좋기도 했다. <연애의 온도>에선 김민희 선배랑 연애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호흡이 중요했지만 <몬스터>에선 감정이 살짝 어긋나더라도 용인될 수 있는 상황이라서 편했다. 나도 물러설 필요가 없고.
점점 선배라고 불리는 일이 많아질 텐데.
책임감이란 게 생긴다. 아마 <퀵>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이 영화에서 제일 처음 걸렸던 거 같은데 너무 긴장되더라. 하지만 현장에선 책임감보단 동료애가 생긴다. 서로 잘해보자고 하는 거니까.
김고은, SECOND COMING
요즘에도 강남 교보문고를 자주 찾나.
시간될 때마다.
최근에 읽은 책은?
부끄럽지만, 없다(웃음). 책을 쌓아놓는 타입이다. ‘언젠가 읽겠지’ 하면서. 책을 사면 지식이 들어오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서점엔 음반점도 있고. 아, 큰 서점엔 문구점도 있다. 필기구 사는 걸 좋아한다. 칠칠치 못해서 하나씩 들고 다니다가 잃어버리거든.
필기구를 꼭 갖고 다니나.
습관이다.
기록하는 습관이라도?
다이어리를 쓰는 걸 좋아한다. 일기도 쓰고 그때마다의 감정을 적기도 한다. 2007년에 썼던 것부터 모아놨다.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던 해였다. 자주 다시 보는데 볼 때마다 웃긴다.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이 있더라.
다이어리로 보는 자신은 어떤 사람 같던가?
독특한 애 같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지 않나? 아마 자기 자신이 들여다 보면 일반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거다. 내가 제일 슬프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고. 아닌가(웃음)?
어딜 가나 내성적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듯이 범상치 않은 사람도 생각에 따라선 평범하게 느껴질 수 있다. 어쨌든 나는 복순이를 연기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만큼 사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예고편을 보니까 잘 뛰더라.
원래 운동 신경이 좋다(웃음).
액션신도 많고, 육체적으로 고된 촬영이 많았다던데.
너무 힘들었다. 살인마와 맞붙는 장면도 힘들었지만 계속 뛰고, 구르고, 소리지르다 보니까 체력이 소진됐다.
정신지체장애를 지닌 인물을 표현하면서도 감정적인 폭발을 보여준다는 점에선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터를 동시에 밟아야 하는 느낌이다.
어느 지점부터 단순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복잡하게 생각할수록 계속 수렁에 빠지는 느낌인 거다. 그래서 그냥 이 친구를 어린 아이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나이는 먹었지만 하는 짓은 애인 거다. 당장 할 일이 있어도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되고, 다리가 아프면 쉬어야 되고, 졸리면 자야 된다. 마치 장난감 안 사준다고 바닥에 누워서 떼쓰듯이.
두 번째 작품치곤 대단한 관심을 얻고 있다.
배우로서 감사한 일이지만 그 관심에 부응하려고 하면 어려워질 거 같다. 게다가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몬스터>를 선택한 것도 아니다. 아직 20대 초반이니까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안전한 작품만 선택할 거라면 <은교>를 할 이유도 없었다. 배우로 살고 싶단 지향점이 뚜렷했기 때문에 <은교>를 선택했던 거니까. 물론 관객들의 반응이 걱정은 된다. 하지만 <몬스터>를 통해서 분명히 성장하는 바가 있었다고 믿는다.
<은교>를 선택할 때 아버지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몬스터>에 대해선 뭐라 하시던가?
시나리오나 캐릭터가 재미있다면서 좋아하셨다. 그런데 포스터를 보시곤 속상해하시더라. 예쁜 역할 좀 했으면 좋겠다고. 배우로 봤다가 딸로 봤다가 오락가락하셨다(웃음).
<은교> 이후로 2년만이다. 두 번재 작품이라 신중했던 건가.
사실 <몬스터>는 <은교> 이후로 처음 받은 시나리오다. 다들 많은 제의를 받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니었다. 그렇게 자연히 쉬게 되니까 견디기 힘들어서 복학도 했다. 공부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웃음). 공연을 하고 싶었다. 단편영화도 찍었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기를 배운 뒤론 쉬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항상 공연을 했고, 공연이 끝나면 다음 공연 연습을 했기 때문에 잠깐의 휴식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몬스터>를 만난 거다.
학교에서 하는 공연이 시시하게 느껴지진 않던가?
언제나 중요한 건 사람들과의 인연이다. 사람들과의 작업이다. 지금 잘해야만 다음도 있다. 만약 학교에서의 공연이 훈련이고 연습이라 생각한다면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니까. 이 사람들에게 이건 실전이고 나에게도 그렇다. 그리고 오랜만에 공연하니까 나 역시 흥분되고 좋았다.
무대에서의 긴장감을 즐기는 편인가.
무대에 오르기 전까진 떨리지만 무대에 올라가면 늘 그 떨림이 희열로 변한다. 물론 촬영현장과 무대는 다르다. 영화는 계속 컷으로 나눠서 촬영하니까 긴장을 조금씩 유지하면서 연기해야 한다.
<은교>에선 감정의 내밀함이 중요했다면 <몬스터>에선 감정의 폭발이 중요해 보인다.
은교는 감정의 밑바닥까지 세세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복순이는 겉으로 다 보이는 친구다. 그래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히려 복순이의 내면이 뭘까 더 궁금했다. 은교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어떤 심리인지 다 이해를 하고 가는데 복순이는 표현을 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빨간 조끼를 입는 건 본인 아이디어였다던데.
여러 착장을 상의하다가 한 착장 정도엔 꼭 저 빨간 조끼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게 감독님 보시기에 좋았는지 매착장마다 입게 됐다.
신인 배우가 당돌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텐데.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물론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도록, 나도 오해할 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하지만 화를 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선 자기 얘기를 명확하게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생길 것 같다. 신인으로서 긴장감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긴장하면서도 노력하는 거다.
캐릭터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사실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진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보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타입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캐릭터가 돼있는 부분들이 있다. 현장에 갔을 때 만들어내야 하는 부분을 최대한 없애는 거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생각하면서 연기하다 보면 자의식이 가득한 연기가 나오기도 하고, 이래저래 연기가 어렵다. 아직 짧은 경험이지만 경험상 그랬다. <몬스터>도 아무 생각 없이 촬영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거다.
욕을 정말 찰지게 잘했다던데.
감독님께서 점점 제지하셨다(웃음). 편집할 때 많이 빠졌다고도 하더라. 그런데 욕을 어색하게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어색하게 욕하는 건 그냥 내숭 같은데. 평상시에 입에 달고 살지 않더라도 해야 되는 순간이 오면 자기 방식으로 잘 할 수 있지 않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을 때는?
참는 성격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참는 편은 아닌 거 같다.
두 번째이기 때문에 달랐던 건?
<은교> 때는 내 연기만 보기 바빴지만 다들 내게 맞춰줬다. 처음이라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그런데 <몬스터> 때는 카메라에 대해선 당연히 알아야 되는 것이었고, 처음보단 잘 해내야 할 것들 것 있었던 게 사실이다. 사실 리허설을 할 때 연기를 못했었다. 슛이 들어가지 않은 이상 부끄럽더라. 그런데 그게 굉장히 이기적인 행동이었음을 알게 됐다. 결국 내가 리허설을 망치는 거니까. 그렇게 좀 더 시야를 넓혀서 보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다들 무엇을 하는지 깨닫는 과정이 있었다.
알아보는 사람도 생겼을 거 같다.
간혹 있지만 달려들진 않는다. 내가 아이돌은 아니니까(웃음). 내가 의식하지 않으니까 사람들도 나를 의식하지 않는 거 같더라.
지금 촬영 중인 <협녀: 칼의 기억>이 크랭크업되고, <몬스터> 홍보까지 끝나면 하고 싶은 건?
여행가고 싶다. 지치거나 뭔가를 꾸역꾸역 채웠다는 느낌이 들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돌아다니고 싶진 않고 안전하게 머물만한 낯선 곳을 찾아가고 싶다.
최동훈의 <타짜>가 해운대 앞바다였다면 강형철의 <타짜-신의 손>은 캐리비안 베이다. 인공 파도에 휩쓸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결국 인공 파도는 인공 파도다. 애초에 기획되지 않았던 속편이란 맹점과 한계를 그나마 강형철이 잘 메우고 이어낸 인상이지만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상. <타짜>의 캐릭터들이 차, 상, 마, 포 같아서 저마다의 파괴력도 있고, 차가 판을 휩쓰는 압도감과 마가 차를 삼키는 쾌감도 있었지만 <타짜-신의 손>은 '졸'의 향연 같아서 실력이 평준화된 선수들의 싸움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졸'전임이 뚜렷해 보여 김이 새는 지점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속편인지라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아서 크게 아쉽진 않았지만 썩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러닝타임에 비해서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는 점에선 본래 품었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