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려하다가도 몰아치게, 고요하면서도 가열차게, 조 라이트는 특유의 감각적 재능으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초월한다. 사운드와 비주얼의 공감각적인 여정, 조 라이트의 길을 돌아본다.
1972년 런던에서 조 라이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65세였다. 그는 아들이 19세가 되던 해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은 라이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꼭두각시 인형극 극단을 설립하고 극장을 운영했다. 그 극장에서 본 인형들의 연기는 살아있는 라이트의 삶을 흔들었다. 사실 소년 라이트는 책상에 앉아서 교과서를 펴고 공부하는 평범한 학생이 될 수 없었다. 소년에게는 난독증이 있었다. 그럴수록 소년은 슈퍼 8미리 카메라로 세상을 비추며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결국 예술학교에 진학한 라이트는 미술과 영화를 전공한 예술대학에서 첫 연출작인 단편영화 <크로코다일 스냅>(1997)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서 주목을 얻기 시작한다. “나는 카메라맨이나 디자이너, 혹은 배우가 될 수 없었다. 내가 감독이 된 건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것들 덕분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평범한 삶에 어울리는 법을 잘 알 수 없었던 대신 촬영장에 나가서 영화를 찍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나는 몇 년 전부터 행운을 얻고 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 말이다.” 여기서 라이트가 말하는 행운은 2000년 무렵에 시작됐다. TV미니시리즈로 연출 경력을 쌓으며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2003년 BBC에서 방영된 4부작 시대극 <찰스 2세>로 영국 아카데미 2관왕에 오르며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오만과 편견>(2005)이 바로 그것이었다. 유려한 문체로 시대를 풍자한 당대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데 있어서 그는 어떤 구상을 지니고 있었을까. 그는 말한다. “내게 각본이 보내지기까지 그 책을 본 적이 없었다.”놀랍게도 그는 잘 모르는 제인 오스틴을 필사하는 대신 각본을 바탕으로 자신의 감각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했다. 라이트는 대학시절의 수업에 대해서 이처럼 말했다. “매우 이론적이고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를 만들길 원하는 것뿐이다.” 그는 이론 수업에 의지하기 보다 방과후와 주말마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현역 배우들의 강습에 참여하며 경험과 감각에 의지하는 법을 깨우쳐 왔다. 원작에 비해서 자립적인 현대의 여성성이 강하게 투영되고, 보다 로맨틱한 감수성이 안개처럼 내려앉은 <오만과 편견>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이런 자질 덕분이다. 특히 서정적인 음악과 고풍스러운 영상의 결합은 로맨틱한 기운을 한껏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는 결국 원작의 유명세보다도 라이트의 이름을 눈여겨보게 만들었다.
성공적인 필름 데뷔 이후, 그의 두 번째 행보는 다시 한번 유명 원작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속죄>의 영화화 작업은 제인 오스틴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일이었다. 교과서에 등장할만한 고전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과 달리 명성이 자자한 동시대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건 “나는 내 심리의 등에서 뛰어다니는 피해망상을 얻었다”고 할 만큼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심리를 압박하듯 일정한 속도로 반복되는 타자기 소리, 발자국처럼 찍히는 활자의 행렬을 이미지와 사운드로 구현해낸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감에서 출발하는 <어톤먼트>(2007)는 사운드와 비주얼을 융화시키는 라이트만의 공감각이 빛을 발한 작품이다. <어톤먼트>의 오스카 음악상 수상의 공은 일차적으로 음악감독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에게 돌려야 마땅하겠지만 음악과 영상을 능수능란하게 접목시킨 라이트의 재능도 간과할 수 없다. 서정적인 운율의 클래식한 넘버 위가 흐르는 가운데 투명하게 떨어져 분산되는 자연광은 파국적인 로맨스에 깃든 처연함을 더욱 애잔한 여운으로 밀어 보낸다.
과거 시제의 두 작품을 통해서 연출력을 인정받은 라이트는 <솔로이스트>(2009)를 통해서 현대극에 도전한다. 실화에 기반한 이 작품은 정신적 질환으로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을 발견한 <LA타임즈>의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가 관찰자로서 그를 찾아가다가 끝내 그와 교감을 이루고 서로의 치유를 돕는 과정을 기술한 칼럼에서 비롯된 기획이다. 단조처럼 우울한 삶 속에서 무기력과 피로감을 느끼는 탓에 쉼표 같은 삶을 찾던 스티브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착란에서 헤어나올 마침표가 필요한 나다니엘,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그린 <솔로이스트>는 영화와 실화의 협연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사실 라이트의 비범한 전작에 비해서 <솔로이스트>는 상대적으로 범작에 가깝다. 하지만 콘트라베이스의 현 위에 떨어진 몇 줄기의 빛을 포착해낸 감각적인 클로즈업 샷과 결을 따라 흐르는 듯한 현악기의 유리 같은 선율, 베토벤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표현해낸 환상적인 컬러는 라이트만의 진수를 드러낸다.
마치 경력의 전후를 가르듯 라이트는 연이어 현대적인 작품을 선택한다. 그러나 <어톤먼트>로 데뷔한 시얼샤 로넌을 타이틀 롤로 앞세운 <한나>(2011)는 그의 전력을 염두에 둔다면 분명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한나>는 그의 지난 작품들에 비해서 다른 문법을 지닌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한나>는 서사적인 개연성보다는 공간의 변화와 이동을 통해서 극을 전개하고 진전시키는 양상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무엇보다도 원작 소설도, 실화적 모티프도 없는 오리지널 각본으로 완성한 라이트의 첫 영화라는 점에서도 새롭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선택한 건 라이트가 아니었다. 바로 캐스팅이 확정된 로넌의 추천을 통해서 라이트가 보다 늦게 합류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에서 라이트는 자신이 지닌 공감각을 폭발시키듯 분출해낸다. 특히 노이즈와 전자음에 어울리는 만화경 비주얼은 사이키델릭 그 자체다. 현대적인 판본의 잔혹동화라 해도 좋을 <한나>는 라이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악랄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란 점에서도 중요하다. 자신의 한계를 깬다는 것, 이는 가능성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 시대성을 초월하는 공감각적 재능을 지닌 연출가다. 그리고 라이트는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그것이 내게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기회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운명과도 같았던 영화는 여전히 그에게 방향을 가리키는 지표다. 그의 공감각적 여정은 그렇게 새로운 길로 접어들고 있다.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 무스레이크를 지나던 트럭에서 나무 상자 하나가 눈 쌓인 길에 떨어진다. 길을 지나던 소녀 린다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보곤 그 안에 있던 파란 앵무새 한 마리를 발견한다. 추위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몸을 웅크리던 앵무새가 소녀의 손길 앞에서 평정을 되찾는다. 블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앵무새는 그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그 곁에 자리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애완용 새로 길들여진지 오래다. 하지만 블루는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루에 있다는 암컷 마코 앵무새 쥬엘과 함께 지구상에 단 한 종 밖에 남지 않은 희귀종 마코 앵무새라는 사실. 이를 전해 듣게 된 린다는 고심 끝에 마코 앵무새의 멸종을 막고자 블루를 데리고 브라질 행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블루가 만나는 건 블루와 한 쌍을 이룰 쥬엘만이 아니다.
픽사와 드림웍스의 양강 체제로 이뤄진 오늘날의 애니메이션 월드에서 호시탐탐 틈새공략을 노리고 머리를 드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있다. 지난 해 <슈퍼배드>를 내세우며 평단의 호평과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그 중 하나. 하지만 이에 앞서서 20세기 폭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아이스 에이지>시리즈를 성공시킨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리고 <리오>는 바로 그 블루스카이 스튜디오가 꺼내든 새로운 카드다. <리오>의 기획 전략은 <아이스 에이지>와 흡사하다. 고대 빙하기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풍경 안에 특유의 개성이 넘치는 동물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그린 <아이스 에이지>와 마찬가지로 <리오>는 축제 활기로 가득한 리오 데 자네이루의 분위기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동물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채워 넣는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애니메이션들이 그러하듯이, <리오> 역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동물 캐릭터가 주를 이룬 어느 애니메이션들과 같이 <리오>는 저마다의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도 의인화된 행위와 언어를 이식하며 어드벤처의 활기를 구현해낸다. 비행하지 못하는 마코 앵무새 블루가 짝짓기를 위해서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 짝을 찾아 리오 데 자네이루에 도착해 벌이는 모험은 사실상 블루의 혼자 날기, 즉 홀로서기를 위한 필연적 여정과 같다. 그 과정에서 병풍이 되는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경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이루는 동시에, 위트 있는 활력을 채우기 위해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 또한 다채롭게 영화를 장식한다. 특히 극 중반부에 쥬엘과 함께 비행( 아닌 비행)을 하는 블루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거대 그리스도상을 비껴가며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경을 부감으로 펼쳐 보이는 모습은 장관의 엔터테인먼트다.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완성도라 치켜세울 수는 없지만 <리오>는 자신이 지닌 최고의 장점을 최대로 극화시킬 줄 아는 이들의 최상품이라 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고대 빙하시대의 설원을 현대적인 감각의 애니메이션 소재로 차용한 <아이스 에이지>가 그러했듯이, <리오> 역시 세심하게 창작된 캐릭터들이 저마다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내며 엔터테인먼트적인 흥미와 활기를 배가시킨다는 하나의 영화적 목표로 도달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소소한 뒷골목부터 화창한 해변까지 리오 데 자네이루의 곳곳을 그려낸 <리오>의 풍광은 여행 욕구마저 자극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너무 착해서 합의적인 혐의마저 느껴지는 결말은 조금 아쉽지만 신나게 이륙해서 감동적으로 착륙하는 <리오>가 기술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보는 이의 안구를 정화시키고, 마음을 풍요롭게 채우는 애니메이션이란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등장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는 ‘앵그리 버드’의 출연은 이를 눈치채는 이들을 위한 반가운 서비스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기시감은 대부분 <에일리언>의 그것이다. 미지의 우주가 심해로, 폐쇄적 공포를 야기시키는 우주선을 해양 한가운데의 섬과 같은 석유 시추 기지로, 심지어 시고니 위버는 하지원으로. 우리도 여전사가 등장하는 그럴싸한 괴수물 하나 있으면 어떤가. 문제는 역시 완성도다. 나름대로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를 지향했겠지만 현실은 LA빌딩을 감싸고 올라가던 이무기 등장하던 어떤 영화와 그 영화 감독의 야심이 떠올랐다. 즐길만한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몇몇 시퀀스는 존재하나,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낭비적인 드라마,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든 캐릭터들의 부조화까지, <7광구>에서는 날뛰는 괴물보다도 정신 사나운 내러티브의 무절제가 성가시게 눈에 띈다. 심지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나, 날뛰다가 공격을 받고 죽을 듯 살아나서 또 날뛰는 과정을 반복하는 괴물이나, 노동하듯 피곤해 보인다. <7광구>의 3D는 입체영상이 아니라 노동의 3D를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비꼬는 말이 아니다. 보는 내내 이상했다. 안경은 왜 준걸까. 분명 3D영화라 했는데, 안경 없이도 대부분의 장면을 볼 수 있는 3D영화라니. 안경을 끼는 수고스러움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더냐. 시도는 필요한 일이다. 그 가치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여기서 시도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단지 그 시도를 고무시키기 위한 칭찬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도 그 자체의 순기능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건 보다 나은 원숙함과 단단함을 요구하는 비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7광구>는 지금 칭찬보다 비판을 견뎌내야 할 시점의 영화인 것 같다.
잭 스나이더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세상에 섰다. 최근 주춤한 행보를 보였지만 그는 여전히 주목 받는 감독 중 하나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또 한번 스스로를 증명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저녁은 지옥에서 먹자!’고 외치던 근육질 스파르타 전사들의 결전을 그린 <300>(2007)으로 할리우드 흥행감독 대열에 들어선 잭 스나이더는 아드레날린의 갑옷을 입은 스파르타 마초들의 액션과 반대편에 선 페티쉬적인 취향의 여전사들의 액션을 그려냈다. 시공간을 초월한 걸파이터들의 액션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는 <써커 펀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카타르시스의 이미지로 그득한 판타지 액션물이다. 블루스크린을 등지고 세트로 축조된 테르모필레 협곡 사이에 진을 치며 페르시아 적군을 상대하던 <300>의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써커 펀치>의 여배우들 역시 병풍처럼 둘러쳐진 블루스크린 앞에서 가상의 적들을 향해 대검을 휘두르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뛰고 굴렀다. <300>이 불끈거리는 비장함으로 무장한 근육질 전사들의 액션이 오르가슴과 같은 쾌감을 부르는 작품이라면 <써커 펀치>는 막대사탕처럼 가늘고 길다란 소녀들의 몸놀림이 쿨하게 전시되는 환각의 약물과도 같다.
<새벽의 저주>(2004)부터 <가디언의 전설>(2010)까지, 잭 스나이더는 이름난 원작들을 자신의 감각이 담긴 프리즘에 비추어 스크린에 새롭게 투사해내는 작업을 거듭해왔다. <써커 펀치>(2011)가 그의 경력 안에서 특별하게 읽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스나이더가 연출한 장편 영화 필모그래피 중에서 유일하게 원작이 없는, 온전히 그의 머리 속에서 잉태된 첫 번째 영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또한 <써커 펀치>는 그가 연출한 실사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에서 R등급을 받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의 각본으로 연출한, 다시 말하자면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관에서 펼쳐진 작품이 가장 대중친화적인 수준의 이미지로 연출됐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사실 스나이더는 영화감독이기 전에 발군의 감각을 자랑하던 영상가였다. 칸 국제광고제 황금사자상 수상을 비롯해서 전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 받는 CF감독이자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던 그는 와이드스크린을 이용한 영화적인 촬영방식과 역동적인 스타일, 속도감 있는 편집술, 서사적 완결성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이런 그의 경력들은 결과적으로 오늘날 그의 영화들을 위한 예고편과 같았다. 죠지 A. 로메로의 전설적인 고전 호러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79)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는 그런 연출적 감각을 증명하는 신호탄이었다. 숨을 조이듯 천천히 다가오는 로메로의 좀비들과 달리 총구에서 튀어 나오는 탄환처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해 오는 스나이더의 좀비들은 단도직입적인 서스펜스와 압도적인 스릴을 발생시킨다. 무엇보다도 사회정치적인 메타포를 품은 원작의 메타포를 완전히 휘발시키고 롤러코스터적인 긴장감으로 점철된 호러물을 완성해낸 스나이더의 둔갑술은 주목할만하다.
스나이더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장기를 드러낸 건 두 편의 그래픽노블을 통해서였다. 미국 그래픽노블의 대가로 꼽히는 프랭크 밀러와 알란 무어의 걸작을 각각 영화화한 <300>(2007)과 <왓치맨>(2009)은 비주얼리스트로서 스나이더가 지닌 차별적인 스타일을 증명하고 선전하는 작품이었다. 두 작품은 카메라 스피드 램핑 기법을 활용하며 액션 시퀀스의 속도감을 조절하며 감상의 카타르시스를 증폭시키고 과잉된 스타일로 시각적인 현혹을 부른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스나이더가 연출한 이 두 작품에는 보다 근본적인 공통적 특성이 잠재돼있다. 무채색에 가깝게 톤다운된 채도를 입은 <300>의 풍광은 이를 통해 극의 현실적인 감각을 희석시킨다. 이런 비사실적인 색채 감각은 오래된 기록 역사를 기초로 구축된 신화적인 무용담에 보다 환상적인 에픽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반대로 실제적인 냉전시대의 세계사를 기초로 허구적인 창작력을 접목시킨 <왓치맨>은 대비적인 명암을 통해서 보다 과장된 극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대비적인 명암의 이미지를 연출해낸다. 이는 사실적인 세계관을 밑그림 삼아 우울한 자조와 진보적인 관점을 채색한 픽션의 진지한 태도를 견지한다. 이는 스나이더가 두 원작의 스타일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스크린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충실한 답변이었다. 다만 알란 무어의 그것은 일반적인 코스튬 히어로들의 활약 대신 암담한 냉전시대의 분위기와 핵전쟁의 잠재적 공포를 절망적으로 투영해낸 결과물이었다. 스나이더는 이런 원작의 성향을 단순화시키기 보다 그 복잡한 시대적 메타포들을 보다 무게감 있게 완성하는데 주력했다. <왓치맨>에 드리운 기대 이하의 흥행성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를 필두로 전세계에 불어 닥친 3D영화 열풍 이후에 제작된 <가디언의 전설>은 그 유행의 열차에 올라탄 어떤 승객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3D입체에 기대어 롤러코스터적인 체험을 부여하는 작품의 수준에 멈추지 않았다. 판타지 장르 문학에 깃든 신비를 아름답고 황홀한 이미지로 구현한 이 작품에서 3D영상의 입체감은 그 영상미를 돋보이게 만드는 수식의 장치로서 탁월하게 기능한다. 무엇보다도 육박전과 공중전이 난무하는 올빼미들의 전투는 <300>의 전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스나이더는 이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신의 인장을 확실하게 새겨 넣었다.
지금껏 스나이더의 작업 대부분은 어느 작가들이 상상력을 통해 그려낸 허구의 존재들을 스크린에 소환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써커 펀치>는 평단의 비아냥과 참담한 스코어를 봤을 때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재앙이었다. 과연 <써커 펀치>는 스나이더의 실패작인 것일까? 사실 <써커 펀치>는 <인셉션>(2010)과 비슷한 부류의 작품이다. ‘인셉션’과 ‘킥’을 반복하며 꿈의 층위적 구조를 설계하고 그 층마다 종류가 다른 액션 시퀀스들을 채워 넣는 <인셉션>의 전략과 같이 <써커 펀치> 역시 무의식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에 파편적인 액션의 유희를 채워 넣는다. 다만 <써커 펀치>는 <인셉션>과 같은 논리적인 장치들로 관객을 설득시키지 않는다. 이는 서사적 실패라기 보단 고의적인 도발처럼 보인다. 어쩌면 <써커 펀치>는 스나이더의 세계관을 이루는 자질들이 총동원되어 나뒹구는 비주얼의 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놀란 형제의 무한한 신뢰 속에서 <슈퍼맨>의 새로운 시리즈를 찍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모이는 건 여전히 그의 재능에 대한 관심이 식지 않았음을 대변한다. 그러니 이제 다시 새로운 영광을 준비할 때다.
전쟁은 승패로 기록된다. 하지만 거기 사람이 있었다. 전쟁은 승패보다도 생사의 문제로 기억돼야 한다. 전쟁이라는 명분에 휘말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야 하는 인간들의 존재는 승패로서 기록되는 역사적 명제 아래 손쉽게 지워진다. 전쟁은 영문도 모른 채 생사의 기로로 떠밀린 인간들의 지옥도다. <고지전>은 이를 대사로서 명확하게 전달한다.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다. 그러니 살아남는 게 전쟁으로부터 진짜 이기는 길이다.” 전쟁이 승패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강력하고 확실하게 피력하고 환기시킨다. 물론 이는 숱한 전쟁영화들이 다루고 언급해온 이야기다. 하지만 <고지전>은 사람 죽이는 전장의 비극을 전시하고 눈물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지옥도 속에서 이유도 알 길 없이 서로를 죽이고 죽어나가는 이들의 참혹한 비극에 주목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1년 7월 10일 휴전 협정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휴전선 부근에서 2년여 동안 교착상태의 국지전을 거듭한 후,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휴전을 맞이했다. <고지전>은 남북의 대표가 만나 군사분계선과 포로교환 문제로 탁상공론을 거듭하던 2년 여간의 휴전 협정 기간 속에서 고지 점령을 위해 소모적인 전투를 벌이던 휴전선 부근의 숱한 전투를 펼치던 치열한 전선 가운데 하나로 시선을 돌린다. 후방에 근무하던 방첩대 중위 은표(신하균)는 애록고지에서 전선을 지키는 악어중대 중대장의 죽음을 비롯해서 일부 부대원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애록고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참전했다가 북한군에게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수혁(고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은표는 애록고지를 둘러싼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동시에 참혹한 전장의 진실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매일 같이 약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고지 전투 속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서도 전장의 일상은 흐른다. 그렇게 흐른 일상이 어느새 2년여 시간에 다다라서 어제 봤던 그 놈이 살아있었는지, 죽었었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린 고지의 병사들은 어제 올랐던 그 고지에 또 오르고 내리며 매일 같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고지전>은 치열한 고지 쟁탈전에 나서는 병사들의 일상을 그리며 숙연하게 내리쬐는 전쟁의 비장함 대신 그 아래 드리워진 부조리한 전쟁의 단면들을 채집해 나간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해야 하기에 전장에 끌려 나온 젊은이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전선에서 한 뼘의 땅을 넓히기 위한 하루살이로 소모된다.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윗대가리들이 탁상공론 속에서 시간을 허비할 때, 생존의 본능마저 찢겨 나뒹구는 고지를 기어올라가며 죽어나가거나 죽어나가는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는다.
<고지전>은 전쟁이 숙연하거나 엄숙하게 기념될만한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비극임을 명백하게 전시한다. 그리고 이런 비극을 방관한 채 한 뼘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권력, 더 나아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비호되는 결정권자들의 부조리한 행실을 폭로한다. <고지전>은 아비규환 같은 전장의 풍경을 통해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를 환기시키는 진보적인 전쟁영화다. 생생하게 묘사되는 전투 시퀀스의 프레임이 인간적인 윤리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고지전>은 한국전쟁을 다룬 지난 영화들에서 한 발 나아간다. 이념의 대립이라는 빤한 수식어 대신 그저 생사의 기로 속에 내몰린 인간과 인간의 덧없는 사투가 낳은 명목 없는 비극의 온도를 서서히 가열시킨다.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를 통해서 갈등 노선에 놓인 사내들의 멜로를 그려낸 장훈의 장기는 <고지전>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대립과 연대를 거듭하는 두 인물의 긴밀한 감정선을 그리던 전작들과 달리 전쟁영화라는 스케일 안에서 다양한 인물의 관계도를 그리는 <고지전>은 너르고 보편적인 공감의 영역으로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펼쳐 보인다. 은표와 수혁의 대립적 구도와 함께 북과 남의 경계에서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적으로 대치한 이들이 똑 같은 바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이는 1대1의 관계로 그려지던 장훈의 전작들 속에서 발견되던 등을 맞댄 남자들의 미묘한 연대적 감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박상연은 <고지전>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념이라는 거대한 명분에 짓눌린 개개인의 비극을 환기시켜낸다. 그리고 이제 연출전문 감독이라 불려도 좋을 장훈은 주목할만한 신예 연출가의 수준을 넘어서 진짜 물건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들의 열연 속에서도 신예 이제훈은 비범하게 돋보인다.
치열한 전투와 전투 사이에서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의 생이 일거에 타 들어가는 클라이맥스는 <고지전>의 본체나 다름없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일시적인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다 이내 꺼져버린 광경은 전쟁기념비 속에 기록된 이들에 대한 감사보다도 분노해야 할 대상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젊은이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기득권들의 행태는 그 시절의 전장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사회에서도 만연한 부조리와 다를 바 없다. 시대는 변했고, 상황도 달라졌지만 몰염치와 몰상식으로 시대를 지배하는 이들의 세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경계심을 부추기는 어떤 이들의 자극적인 멘트처럼 이 땅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그 주적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그 전쟁의 명분을 부추기는 우리 안의 어떤 입이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입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란 승패의 기록이 아닌 생사로 기억돼야 하는 것임을, 승자와 패자가 아닌, 산 자와 죽은 자의 비극임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이 마지막 편은 (원작을 읽었다면) 누구나 아는 그 결말로 나아간다.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필생의 적 볼드모트(랄프 파인즈)가 자신의 영혼을 나눠 숨긴 호크룩스들을 찾아내 파괴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신변의 위기를 느끼는 볼드모트는 자신의 수하인 ‘죽음을 먹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해리 포터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압박해 나가고 그 위협은 호그와트까지 번져나간다. 그리고 해리 포터와 그를 위시하는 마법사들은 호그와트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해리 포터>시리즈는 영웅적인 면모를 타고난 해리 포터의 성장통을 다룬 어드벤처 판타지물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
바야흐로 10년이다. <해리 포터>시리즈가 스크린에 살아 움직이는 실물로 구현되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그 10년 사이, 솜털 보송보송한 소년은 거뭇거뭇한 수염이 제법 눈에 띄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10년이란 세월 동안 어린 마법사들을 성장시킨 호그와트의 풍경도 어둡고 음산한 세기말적인 기운에 지배당했다. 그 호그와트를, 그리고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청년이 된 소년들이 악과 맞선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바로 그 대단원의 결전을 향해 나아가 닿는 시리즈의 마지막 장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해리 포터라는 아이콘을 기다릴 수 없는, 작별의 인사를 던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영화화된 여섯 번째 시리즈까지와 달리 2부로 나뉘어진 마지막 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이 시리즈 안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확보해낸 작품이다. 영화화된 <해리 포터>시리즈가 지닌 최고의 장점이라면 (최소한 원작을 먼저 섭렵한 독자들에게) 스포일러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때때로 단점으로 작동하기도 했는데, 이를 테면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세밀한 요소들의 재미가 서사의 축약 안에서 손쉽게 손실되는 과정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저마다 장대한 서사를 지닌 각 시리즈들이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된 것과 달리 시리즈의 마지막을 상하로 나눈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긴밀한 호흡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야심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상품성이 막대한 이 시리즈의 유효기간을 보다 넓게 확보하겠다는 의도로도 읽힌다.)
지난 시리즈들이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 마지막 시리즈 역시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해내는 작업에 가깝다. 그리고 전작들에 비해서 보다 너른 러닝타임을 확보한 이번 시리즈는 이를 바탕으로 원작을 텍스트를 보다 충실하게 이미지로 세워 넣는다. 결말을 위한 전초전으로 완성된 지난 1부를 잇는 이번 작품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음울하며 비장하게 정해진 결말로 걸어나간다. 그 비장함을 상기시키는 건 어둡고 음울해진 세계 속에서 외롭게 임무를 수행하는 아이들이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데이비드 예이츠는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스크린에 불길한 심리 속에서도 성숙해진 아이들의 비장한 면모를 새겨 넣는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호그와트에서 펼쳐지는 격전은 이번 작품뿐만 아니라 전 시리즈를 관통하는 클라이맥스다. 그 가운데서 볼드모트와의 숙명적인 대결을 벌여야 하는 해리 포터가 자신의 생을 걸고 그와 맞서야 하는 외로운 임무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한 소년의 통과의례적인 통증으로 와 닿는다.
제각각 완성도의 편차를 지닌 이 일곱 편의 시리즈가 비로소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이벤트다. 그리고 해리 포터를 지켜보며 성장한 팬들에게도 이는 남다른 의미를 품게 만든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크린 진출을 가능케 했던 것이 할리우드 자본의 동원이기 이전에 전세계적인 팬덤으로 이뤄진 시장의 형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한다면 이 마지막 편을 목도할 팬들의 심정이란 제 자식을 떠나 보내는 어미의 마음과도 비교할만하다. 호그와트에서 마법에 입문한 아이들은 이제 그곳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로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 스스로 골고타 언덕에 올라선 아이들은 끝내 자신들의 의지로 세계를 구하며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완성해낸다. 비로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영국의 가난한 싱글맘 조앤 K. 롤링을 전세계적인 판타지 작가로 등극시킨, 마법 같은 태생 실화를 지닌 이 소설이 영화화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머글들은 그 세계를 동경하듯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고 자란 이들의 감상이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건 그들이 애정을 담았던 그 세계와 진짜 이별을 고하고 안녕을 기원해야 하는 애틋함 덕분일 것이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는 그 애틋한 안녕을 고하는 팬들을 위로하는, 진정한 유종의 미다. 마법은 끝나도, 추억은 남는다.
<고지전>의 주제는 명확하다.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다. 그러니 살아남는 게 전쟁으로부터 이기는 거다. 전쟁이 승패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거듭 환기시킨다. 물론 숱한 영화들이 해왔던 이야기다. 하지만 <고지전>은 사람 죽이는 전장의 비극을 넘어서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알 길이 없는 전장에서 죽음을 조장하고 방관하는 치들에 관한 분노와 서러움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의미심장하다.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윗대가리들이 탁상공론에 열중하는 가운데 살기 위해서 죽이고 죽는 청년들의 모습은 단순히 전장이 아닌 이 사회에도 만연한 부조리 가운데 하나다. <고지전>은 전장을 통해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적 환기까지 나아가는 진보적인 전쟁영화다. 장훈은 확실히 스스로 물건임을 증명하고, 선배 배우들의 열연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신예 이제훈이 인상 깊게 남는다.
미국과 영국만큼이나 호주 역시 주목할만한 배우의 산실이다. 오늘날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차지한 호주 출신 스타의 새로운 계보를 잇는 건 바로 애비 코니쉬다. 샤를리즈 테론이나 니콜 키드먼을 연상시키는 그녀는 유년 시절 자칭 톰보이였으며 자애심이 강했다. 호주영화협회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아찔한 십대’ 배우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자애심 덕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6년, 코니쉬는 히스 레저와 호흡을 맞췄던 <캔디>와 리들리 스콧의 <어느 멋진 순간>으로 호주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무대를 넓혀나간다. 특히 비운의 시인 존 키츠의 연인으로 등장한 <브라이트 스타>(2009)는 당돌하면서도 우아한 코니쉬의 기품을 발견하는 자리였다. 박력 있는 여전사로 열연한 <써커 펀치>(2011)에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코니쉬는 <리미트리스>(2011)를 통해서 성인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완벽하게 이행한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니다. 반짝이는 별이 새롭게 떠올랐다.
염소를 노려보는 남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눈빛만으로 염소의 심장을 정지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염소가 죽었다. 정말 죽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눈빛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랬다. 하지만 그 문제의 인물 캐서디(조지 클루니)는 이를 진지하게 고백하고 또 경고한다. 누구에게? 애인과 이별한 뒤, 자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이라크로 날아간 미국의 저널리스트 밥(이완 맥그리거)에게 말이다. 우연히 캐서디를 만난 밥은 그렇게 그에게 낚여 그와 함께 이라크 땅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그로부터 문제의 초능력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는 가운데, 황당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정말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자랑하는 국내 정식 개봉명을 얻게 됐지만 <초(민망한)능력자들>은 덜 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다. 미국이 양성한 초능력 부대 ‘제다이 전사’의 일원으로 육성됐다는 캐서디의 말은 영화를 위해 마련된 허풍이 아니라 실화다.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이는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풍자적인 소설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반향을 얻었다. 이런 반응은 이 작품을 BBC의 3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지금의 영화 제작 결정에 이른 것이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실화적인 음모론에 입각한 블랙코미디다. 사실 이 영화가 주는 웃음의 묘미란 정말 그것이 표피로 느껴지는 코믹한 행위의 관찰에 있지 않다. 이 영화로부터 유머를 얻어가기 위해서는 우스꽝스러운 사건의 연속 안에서 거듭 드러나는 어처구니 없는 진실들, 그러니까 투명 망토를 입고 모습을 감춘다거나, 벽을 통과한다거나, 눈빛으로 염소를 죽인다는, 이런 황당한 상황들을 몸소 겪었다는 인물의 진지함에서 드러나는 역설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한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표면의 행위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웃음의 깊이가 존재한다.
비정상적인 무용담을 전하는 캐서디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끝내 이해하게 되는 밥의 관계는 <초(민망한)능력자들>에서 블랙코미디적인 감각만큼이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폭로적인 비아냥으로 가득한 원작과 달리 영화는 그 황당한 실화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캐릭터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부여한다. 이를 테면 초능력 부대의 일원으로 존재했던 캐서디를 비롯해서 그의 동료들을 단순히 허풍선 같은 얼간이로 활용하며 코미디의 장치로 몰락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신 나간 시대적 이념에 휩쓸려 망상적인 피해자로 몰락한 인물에 대해서 영화는 가혹한 애드립 이상의 역할을 부여한다.
<초(민망한)능력자들>은 외부적으로 정치적 폭로가 담긴 풍자극이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 한 인물의 성장을 그린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영화보다도 더욱 영화 같은 현실을 다룬 이 영화는 이를 영화적으로 영리하게 이용해나간다. 썰렁하기 그지 없는 유머의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영화가 될 가능성도 다분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아이러니한 넌센스의 감각은 영민하게 계획되고 조작된다. 이를 통해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정신 나간 시대를 노려보되, 그 시대 속에 휩쓸린 개인을 애정 어린 송가로서 위로한다. 또한 조지 클루니와 이완 맥그리거, 케빈 스페이시, 제프 브리지스 등 굵직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작품 속에서 거침없이 망가지는 배우들의 열연은 그 자체로 기막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초 민망한 작명 센스를 제안한,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이들이 궁금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링컨 대통령을 지지하는 북군의 승리로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미국에서 승리에 도취된 북부인들의 분노를 부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초유의 대통령 암살을 겪게 된 북부인들은 암살에 가담한 용의자들을 추적해서 체포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내고 재판석에 앉힌다. 그 가운데에는 용의자들의 아지트를 제공하고 그들을 후원했다는 혐의를 얻었으나 이를 부인하는 여인, 메리 서랏(로빈 라이트)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전쟁에 참전한 북군 장교 프레데릭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출신의 장관 리버디 존슨(톰 윌킨슨)의 요청으로 그녀의 변호를 맡게 된다. 덕분에 링컨의 암살자를 변호하게 됐다는 차가운 시선을 얻게 된 그는 개인적인 신변의 어려움을 겪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주변을 조사하던 중 심각한 의문을 품게 된다.
링컨 암살 사건 이후, 그 암살자들을 법적 제도로서 처리하는 과정을 그린 <음모자>는 법정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나 법정 스릴러로서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물론 죄의 유무를 가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젊은 변호사 에이컨이 거짓 증언을 가려내고, 북군 정부의 일방적인 처벌적 음모를 분쇄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리고 이는 법정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보다도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한 인물의 노력에서 새어 나오는 숭고함과 편견이 섞인 관점으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각을 회복하게 되는 인물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흥미를 유발시키는 방아쇠는 바로 진실의 여부에 주목하는 영화의 관점 자체에 있다. 뒤집기 어려운 결과를 향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이의 행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서스펜스가 된다.
<음모자>는 이미 정해진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사건에 얽힌 진실 그 자체를 조명해내는 사실적 진술에 전력을 쏟는 역사물이다. 남북전쟁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것을 시작으로 그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던 일방적인 관점과 그 관점에서 발전된 광기적 현상에 초점을 맞춰낸다. 미국 최초의 여자사형수이기도 했던 메리 서랏이 누명을 쓰고 사형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정해진 결과를 재현하고 있는 이 영화가 법정 스릴러로서의 장점을 얻을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장르적 특성보다도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는 이 영화는 그만큼 정직한 문법과 성실한 기술로서 뚜렷한 형태를 완성하고, 묵직한 무게를 얻어낸다.
무엇보다도 실화의 재현에 주목하고 있는 이 영화가 흥미를 부르는 건 그것이 단순히 그 시대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녀사냥에 가까운, 법치적인 제도를 통해서 이루는 반법치적인 처벌은 <음모자>가 재현하는 그 시대의 전후로도, 미국 이외의 수많은 땅 위에서도, 전세계적으로 종종 발견되곤 하는 인류의 부조리한 역사적 단면에 가깝다. 대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묵살하고, 국가적 명분을 위해서 인간 본연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는 인류가 쌓아 올린 역사 안에서 거듭 발견돼 왔다. 실존인물에 대한 서사와 실제적인 음모론의 풍경을 묘사해온 바 있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음모자>를 통해서 또 한번 거대한 명분에 짓눌려야 했던 어느 개인의 비극적인 역사를 들춰낸다. 특별한 기교보다는 우직한 정면승부처럼 나아가는 이 작품은 시대와 사건을 관찰하는 작가의 관점과 시선을 통해서 나름의 멋을 얻어낸다. 연륜과 패기, 이 빤한 수식어가 잘 맞아떨어지는 로빈 라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조합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준수한 볼거리라 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