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시리즈와 한 편의 스핀오프에 이은 프리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낡은 시리즈의 심장을 되살리는 할리우드의 심폐소생술 공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은 시리즈의 갱생을 위한 성공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성장 과정, 그들의 만남, 그리고 결국 그들이 갈라서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창세기적인 서사의 흥미만큼이나 ‘엑스맨’이라는 유닛의 개성과 이 시리즈의 장점이 어디 있는가를 잘 아는 작품이다. ‘페이스오프’되거나 업데이트된 돌연변이 캐릭터들의 신선한 활약상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짜릿해진다. 유머와 서스펜스, 드라마와 액션이 탁월하게 배합된 이 영화의 감각은 매튜 본이 브라이언 싱어 못지 않게 재능 있는 연출가임을 설득시키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이 매력적인 돌연변이들의 근원을 소개하는 근사한 기회가 마련됐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뚜렷한 성과일 것이다. 시리즈를 위한 단단한 뿌리가 생긴 셈이다.
물 밑으로 가라앉아가는 배의 선단에 서서 유유히 뭍으로 착륙하는 잭 스패로우(조니 뎁)의 인상적인 등장은 새로운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성공적인 안착을 알리는 시작점이었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이하, <낯선 조류>)는 이 프랜차이즈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속편이자 새로운 시리즈의 출발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지난 세 편의 시리즈를 이끌었던 고어 버빈스키 대신 새로운 시리즈의 키를 잡은 선장으로 탑승한 롭 마샬과 지난 세 편의 헤로인이었던 키이라 나이틀리 대신 새롭게 이 시리즈에 올라선 페넬로페 크루즈는 이런 야심을 대변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 시리즈의 엔진이나 다름없는 잭 스패로우의 존재감은 대단하며 그의 숙명적인 라이벌 바르보사(제프리 러시) 역시 시리즈를 밀고 나가는 돛과 같다.
팀 파워스의 판타지 소설 <낯선 조류 On Stranger Tides>가 원작이라 알려져 있지만 영화 <낯선 조류>는 소설을 모티프 삼아 제작된 <캐리비안의 해적>의 속편일 뿐이다. 물론 소설이 영화를 위한 껍데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해적의 등장을 통해 작품의 항로를 이어나가던 시리즈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낯선 조류> 역시 검은 수염(이안 맥쉐인)의 등장을 통해서 새로운 물길을 연다. 실존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해적 검은 수염의 등장과 스페인 모험가 폰세 데 레온이 발견했다고 전해지는 ‘젊음의 샘’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소설로부터 이양해온 영화는 가장 기본적인 밑그림을 얻어낸 셈이다. 그리고 이 밑그림은 시리즈의 아이콘 잭 스패로우와 연관된 에피소드로 발전됐으며 전편과의 맥락을 잇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감독의 교체 그리고 시리즈의 얼굴을 이루던 중심 캐릭터들의 유입은 <낯선 조류>가 시리즈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선전과 같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이 시리즈의 아이콘인 잭 스패로우에게 놓여있다. 지난 세 편의 시리즈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줄기처럼 자라난 윌(올랜도 블룸)과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의 로맨스로 인해 잭 스패로우의 무용담은 점차 서사를 장식하는 주변부의 소품처럼 위치를 점해나갔다. 시리즈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레 시리즈의 중심에서 밀려나가는 현상은 분명 기이하다고 할만한 것이었으나 이런 요소는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다 흥미롭게 치장하는 측면이기도 했다. 잭 스패로우는 두 남녀의 로맨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이 시리즈의 볼거리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하는 포석의 역할을 해낸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조류>에서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중심 이동은 시리즈의 변화를 대변하는 주요한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장단이 있다.
시리즈의 팬을 자처하는 관객들의 입장에서 잭 스패로우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춘 시리즈의 변화는 반가울 만한 일이다. 하지만 주변부에 놓인 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잭 스패로우에게 집중한다는 건 그만큼 그 이외의 캐릭터들이 주목 받을만한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새롭게 보강된 캐릭터, 특히 엘리자베스를 대신하는 헤로인 안젤리카(페넬로페 크루즈)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지만 정작 그녀는 <낯선 조류>에서 잭 스패로우와의 로맨스를 위해 고안된 장식품 이상의 기능감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상이다. 물론 잭 스패로우의 라이벌 바르보사의 존재감이 극을 견인하고 일회적인 캐릭터임에도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검은 수염의 포지셔닝도 적절하나 윌과 엘리자베스, 잭 스패로우의 삼각관계로부터 빚어지던 감정적인 입체감에 비하면 <낯선 조류>가 품은 캐릭터의 너비는 상대적으로 협소해 보인다. 또한 지난 서사와 새로운 서사의 맥락을 이어나가기 위해 동원되는 설명이 긴 탓에 초중반부까지 스토리 진행이 더딘 인상도 들지만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속도감이 붙어나간다.
고어 버빈스키 특유의 기괴한 감각으로 치장된 지난 해적선들에 비해서 롭 마샬의 해적선은 상대적으로 깔끔해 보인다. <낯선 조류>는 상대적으로 지난 시리즈에 비해서 해양에서 펼쳐지는 사연의 비중도 적다. 캐릭터의 변화와 함께 이런 전반적인 변화들로 인해 <낯선 조류>는 <캐리비안의 해적>이라는 프랜차이즈의 특성이 희석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낯선 조류>는 지난 시리즈가 지닌 강점들이 보다 약해진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낯선 조류>는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잭 스패로우로 인해 가능성을 품은 시리즈의 전환점이다. 캐릭터의 강화, 해양 어드벤처 블록버스터로서의 특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이 시리즈의 항해는 보다 멀리 나아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조류>는 시리즈의 방향키를 새롭게 제시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추친력이 대단한 시작은 아니지만 거듭되는 시리즈 안에서 가속력을 발생시킬 동력은 충분하며 무궁무진한 항로의 개척도 기대된다는 점에서 <낯선 조류>는 분명 여전히 외면할 수 없는 볼거리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대단한 잭 스패로우의 존재감은 시리즈를 순항시키는 아이콘의 힘을 증명한다.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은 청나라 초기의 문인 포송령이 집필한 16권 분량의 기담집 <요재지이>에 수록된 단편 <섭소천>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당시 중화권 톱스타로 떠오른 장국영과 왕조현을 앞세운 이 작품은 무협과 느와르를 필두로 한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대변하는 흥행작이었으며 올드팬들에게는 여전히 향수를 부르는 고전적인 아이콘이다. 새롭게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은 이런 전설적인 인기에 영합한 기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품을 새롭게 단장한다는 기획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전작과의 비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메이크된 판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내러티브에 있다. 왕조현이 연기한 소천과 장국영이 연기한 영채신의 러브스토리가 주를 이룬 전작과 달리 새로운 <천녀유혼>은 유역비가 연기하는 소천과 여소군이 연기하는 영채신의 로맨스 이전에 고천락이 연기하는 퇴마사 연적하와 소천의 내밀한 사연을 프롤로그로 삽입한다. 이로 인해서 전반적인 캐릭터들의 비중이나 형태도 변모했다. 소천과 영채신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사연이 소천과 영채신, 연적하가 이루는 삼각구도의 관계로 변모한 것. 또한 과거 연적하와 동료였으나 그에게 실망을 느끼고 대립하게 된 하설풍뢰(번소황)와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도 새롭다. 이처럼 전작에 비해 보다 복잡해진 캐릭터 관계도는 내러티브의 전개에도 영향을 끼쳤다.
연적하와 소천의 관계가 두드러지는 리메이크작에서 영채신은 극을 주도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극의 전개에 있어서 영채신은 여전히 주요한 캐릭터다. 다만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보장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단순히 캐릭터의 중요도가 변화했음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런 변화가 리메이크작에서 일종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리메이크 판본은 영채신과 소천의 로맨스보다도 소천과 연적하의 사연이 감정적 중추를 차지하는 형태로 발전된다. 이런 선택은 두 사람의 로맨스로 귀결되는 원판의 감정선을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잉태한다. 하지만 역으로 리메이크 판본의 선택은 영채신과 소천의 감정선을 중화시키고, 소천과 연적하 사이의 감정선마저 소품처럼 몰락시킨다. 감정적인 구조를 확장시키고 있으나 그 감정에 긴밀함을 불어넣는 재주까지 마련하는데 실패한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들의 매력, 더 나아가서 배우 스스로가 어필하는 매력의 결핍 덕분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리메이크 판본은 원전에 비해서 캐릭터들의 매력이 떨어지는 인상이다. 청순함과 요염함을 오가던 왕조현과 유약하면서도 섬세하고 순정적인 장국영에 비해서 유역비와 여소군은 평범하다. 이는 온전히 배우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에 관한 묘사력과 그들에게 주어진 행동 반경의 제약 탓이기도 하다. 캐릭터 관계가 확장됐다는 건 극의 중추를 이루던 캐릭터들이 자신의 활동반경을 그만큼 잃어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반경을 잃어버렸다는 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새롭게 자신의 공간을 확보한 캐릭터들이 그만큼의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맹점이다. 상황은 보다 분주해졌으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캐릭터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건 감상의 집중력도 약해짐을 의미한다.
1987년에 공개된 <천녀유혼>의 묘사력은 지금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하지만 그 열악함이 발생시키던 재미가 있었다. 이를 테면 소품으로 제작된 시체들이 기어 다니는 광경은 그 자체가 지닌 원초적인 긴장감이 있었으며 영화는 이를 영리하게 이용하며 위트를 발생시킨다. 슬랩스틱의 요소와 함께 고전적인 무협물로서의 매력이 존재했다. 그 열악함이 B급 취향의 흥미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천녀유혼>은 오늘날의 발전된 CG기술을 통해 보다 매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구축했지만 되레 그것이 이 영화를 심심하게 만든다. 진보한 기술이 되레 원작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퇴화시킨 셈이다. 무협물로서 액션의 묘사는 보다 디테일해졌지만 날것처럼 등장하던 소품들의 귀기 어린 기운들은 사라졌으며 영계와 인간계 사이의 신비감도 되레 증발한 것 같다. 거친 단면들을 말끔하게 밀어냈지만 오히려 그것이 <천녀유혼>을 평범한 작품으로 인식시킨다. 깔끔할수록 보기는 좋지만 때때로 그것이 심심할 수 있다는 것, 리메이크된 <천녀유혼>이 증명하는 건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가 아닐까. 장국영에 대한 향수는 덤이다.
유년시절부터 ‘랄프로렌’이나 ‘갭’과 같은 의류 브랜드를 비롯해서 ‘버버리’의 캠페인 모델로도 활약한 바 있는 ‘훈남’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는 건 딱히 놀라운 사연이 아니다. 하지만 알렉스 페티퍼에게서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엿보인다. <트와일라잇>시리즈의 로버트 패틴슨이나 <해리포터>시리즈의 다니엘 래드클래프가 그러하듯이,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은 젊은 배우들은 대부분 특정한 캐릭터의 옷을 입고 태어난다. 페티퍼는 올해 초에 차례로 개봉된, <아이 엠 넘버 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외계인 초능력자로 분한 뒤, <비스틀리>에서 잘생긴 외모를 되찾고자 사랑을 갈구하는 추남으로 변신한 페티퍼는 혜성과 같은 등장을 뛰어넘어 상한가를 달리고 있는 신예다. 현재 후반작업 중인 SF스릴러물 <나우>(2011)에서 아만다 사이프리드,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함께 이름을 올린 페티퍼는 올해 또 한번 새로운 면모를 과시할 전망이다. 어메이징한 영 건, 알렉스 페티퍼를 기억하라.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어머니에게도 ‘소녀시대’가 있었고, 철없는 시절에 함께 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어린 나이에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거듭 겪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어떤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무엇들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다는 상실을 체감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써니>는 우리의 지난 날, 80년대를 지나쳐 보낸 어떤 어른들을 위한 송가다. <써니>는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삶에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던 여인 임나미(유호정)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고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데뷔작 <과속스캔들>로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얻어낸 강형철 감독은 <써니>를 통해서 자신의 취향을 보다 확실하게 어필한다. 미혼모 문제를 대안가족적인 온기와 화합적인 낭만으로 끌어올린 <과속스캔들>의 드라마틱한 정서는 혈기왕성한 젊은 날의 꿈으로부터 멀어진 중년 여인들의 의기투합과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지닌 <써니>로 거듭난다. 자잘한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유효하다. 세심하게 풍경의 근접한 양태들을 유유히 포착해내는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은 <과속스캔들>과 동일한 접근방식이라 할만하다. 또한 윤리적인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낭만성, 즉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털어내고 그 시대에서 발견되던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이를 재현의 도구로서 활용하는 방식 역시 그렇다. 물론 이는 시대적인 공기를 단순히 가볍게 간과한다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느 개인이 지니고 있던 시공간의 개념이 중요할 뿐, 그 시대의 공기를 재현하고자 하는 의욕은 <써니>의 의도와 무관하다.
시대적인 풍경을 재현해낸다는 건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과의 교감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써니>가 재현하는 80년대의 풍경들은 바로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묵은 말들이 살아있는 풍경으로 재생되고, 그 안에서 지나간 날들이 떠오를 때, 그 시절을 건너온 관객들은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영화 속의 인물들과 동화될 수 밖에 없다. <써니>가 자아내는 공감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공감대를 보다 깊고 너르게 완성해낼 수 있는 자질은 영화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의도 안에서 <써니>는 성공한 결과물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그러니까 영화의 두 시점은 이를 감상하는 이들의 시점을 대변하듯 그 시절의 풍경을 온전히 스크린에 전시하고 있다. 다소 과시적이거나 과잉적인 측면도 없는 건 아니지만 추억을 되새긴다는 건 허기보다는 포만이 더 어울리는 법이다. <써니>는 80년대에 향수를 지닌 오늘날의 중년 세대들을 위한 포만의 장이다. 영화가 쏟아내는 오래된 이미지들은 오늘을 향유하지 못하는 과거 세대들을 위한 성찬과 같다.
물론 이는 반대로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체험이다. <써니> 속에서 등장하는 갖은 풍경들은 그 시대를 공유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희귀한 풍경일 것이다. 이를 하나의 볼거리로 승화시키는 건 그 과거적인 소품들 속을 누비는 어린 소녀들일 것이다. 창고에서 꺼내든 오래된 소품들을 추억으로 공유할 수 없는 세대들이 <써니>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죽은 시간을 생동감 있게 재생시키는 극 속 인물들인 셈이다. ‘7공주’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며 시대를 재현하는 소녀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각인시키며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연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때때로 감정적인 활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상도 들지만 <써니>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오늘날의 젊은 날을 뒤돌아보게 될 어린 세대들에게 <써니>는 좋은 지침서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세대 간의 단절된 기억 속에서 지난 세대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시대적 소품의 디테일한 활용 능력, 저마다 개성을 확보한 캐릭터들의 표현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써니>는 그러한 재현성을 단지 향수를 건드리는 자극의 촉매로 장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진짜 감정을 건드리는 간절한 낭만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이러한 감각은 강형철 감독이 지닌 윤리적 중립성과 도덕적 해탈감에서 비롯된 쿨함 그 자체에 있다. <써니>는 <과속스캔들>과 마찬가지로 쿨한 영화다. 이는 소품을 활용하고 비추는 카메라의 양식을 넘어서서 심각한 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완벽하게 탈출해서 자신만의 쾌감을 불어넣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강형철 감독의 상업적 감각은 스토리텔링의 기승전결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김용화 감독과 비견될만하며 앞으로의 행보도 주목할만하다. 또한 <써니>의 일등공신들, 과거와 현재 속에 놓인 전후의 인상을 책임지는 배우들의 존재감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심은경은 <써니>가 전달하는 낭만의 팔 할을 책임지는 일등공신이다.
과거와 현재 속에서 놓인 인물들은 우리가 지나친 것들, 즉 돌아갈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추억을 아련하게 환기시키면서 쿨하게 깔깔댄다. 그게 되레 낭만적이다. 낭만이라는 게 결국 슬픈 일이 아니지 않나. 추억이 있기에 오늘을 버틸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래된 친구가 반가운 것은 그 시절을 환기시키는 유쾌한 수다가 뒤따르는 덕분이지 않던가. 그리고 삶은 그 추억을 먹고 한 뼘 더 자라난다.
도시를 메운 빌딩숲으로 형성된 스카이 라인을 부감으로 비추던 카메라는 서서히 미끄러져 강을 건너고 그 위로 달리는 기차에 다가선다. 그리고 그 기차 속에서 잠에 들었던 듯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한 남자가 갑작스럽게 놀라며 깨어난다. 그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그의 일행인 듯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여자의 정체를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콜터 대위(제이크 질렌할)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는 자신이 거기에 왜 있는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인은 누구인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곧 끔찍한 찰나를 경험한 뒤, 또 한번 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끌려오듯 정신을 차린 남자는 반복되는 8분 간의 동일한 경험을 거듭 체험하며, 그리고 그것이 가상적 체험을 넘어서 실물적인 경험으로서 자신에게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자신의 존재와 상황의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소스 코드>라는 제목은 원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프로그래밍 정보가 저장된 파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의 메인보드에 대비시킨 듯한 상상력을 통해 구상된 작품처럼 보인다.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 속에 보관된 8분 간의 기억적 정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백업된 8분 간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그 기억에 담긴 정보를 탐색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셈이다. 여기서 8분은 보관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량이며 이를 재생하는 방식에 대해 영화는 고난도의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건 이런 논리가 어느 정도의 설득력으로 관객을 현혹시키느냐의 문제다. 어떤 식으로든 고난도 과학 원리를 빌려서 거짓말 같은 상황의 재현이 가능하고, 그것이 과학의 힘을 빌린 사실적인 상황임을 설득한다면 영화의 원리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편차는 중요하지 않다. 죽은 이의 두뇌에 보관된 기억 속에 삽입되어 8분간 재현되는 그 과거 속에서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관객이 믿게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소스 코드>는 성공사례에 가깝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인물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과 리얼리티와 버추얼 사이를 오가는 인물의 선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소스 코드>는 <인셉션>이나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소스 코드>는 전자들처럼 시공간에 관한 특별한 발상을 설득력 있게 포장해낸다. 평행우주론에 입각한 시간여행 이론에 가까운 <소스 코드>의 시공간 개념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양태를 하나의 의식적 세계로 확장해서 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확신이 불가능하나 흥미로운 결과인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의심되는 오류는 있다. 사실 타인이 경험했던 1인칭 시점의 과거로 잠입해서 그 기억을 토대로 둔 시점을 대신 시뮬레이션하고, 그 기억이 펼쳐진 모든 환경들을 롤플레잉으로 운용한다는 영화적 설정에는 분명 의심할 만한 오류가 잠재돼 있는 것이다. 경험자의 경험이 미치지 못한 시공간의 영역까지 대체자가 대신 경험할 수 있다는 설정이란 그렇다. 하지만 <소스 코드>는 이런 설정의 무리수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릴 만한 매력적인 자질이 농후하다.
시간여행과 평행우주라는 초자연적 과학원리에 대한 이론적 체험은 재난과 로맨스, 미스터리라는 다양한 장르적 묘미와 확대된다. 반복되는 시공간의 이동 속에서 한 꺼풀씩 벗겨지는 미스터리의 묘미는 시공간의 한계를 되레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무대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소스 코드>의 시간여행 원리는 하드디스크에 파일을 복사하는 복제의 특성에 가깝지만 이를 자가적으로 진화시키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동시에 던칸 존스의 전작인 <더 문>과의 연관성도 발견된다. 자아를 잃어버린 복제 자아가 진짜 자아의 꿈을 대신 실현해내듯 복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벗어나 가상의 리얼리티 속에서 삶을 회복시키는 인물의 태도, 이는 현실보다 나은 이상적인 가상을 추구한다는 리얼리즘의 역설을 겨냥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인셉션>의 결론, 즉 팽이가 멈추었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분분한 의견에 대한 진보적인 의견처럼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자질의 성과는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자 <더 문>을 통해서 발견된 던칸 존스는 ‘시공간의 새로운 지배자’로 거듭나며 재능을 확신시킨다. 또한 그가 <소스 코드>의 메가폰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이크 질렌할은 매력적인 배우로서의 성장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또한 어느 영화보다도 매력적인 웃음을 선보이는 미셸 모나한과 특유의 연기력으로 극의 감정선을 고취시키는 베라 파미가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인다.
배우의 얼굴만큼이나 그 표정을 둘러싼 풍경으로 기억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와 그녀의 사연이 담긴, 방이 있는 영화 속 풍경으로 당신을 안내한다.
맘마미아!
<맘마미아!>는 전설적인 스웨디시 팝그룹 아바의 명곡들로부터 모티프를 삼아 기획된 뮤지컬이다. 1999년 런던 초연 이후로 브로드웨이 진출을 거쳐 현재까지 160여 개국에서 공연된 롱런 뮤지컬로 거듭났다. 그림 같은 지중해 가운데서도 백미에 가까운 그리스 해변가를 배경으로 주옥 같은 넘버들이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치장하는 이 작품이 동명의 뮤지컬 영화로 기획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상의 뮤지컬 무대가 자아내는 환상을 살아있는 풍경으로 전시해내는 일이었다. 제작진은 촬영 한 달 전부터 최상의 무대를 찾고자 그리스 전역을 뒤졌고, 스포라데스 제도의 스키아토스 섬과 스코펠로스 섬, 다무하리 섬이 최고의 병풍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 중에서도 스코펠로스 섬은 <맘마미아!>가 선사하는 진경의 핵심지다. 푸른 지중해를 병풍처럼 두른 스코펠로스 타운은 붉은 지붕을 쓰고 하얀 회벽으로 몸을 감싼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능선을 따라 얼굴을 내밀고 앉아 있는 고지대 마을이다. 온화한 아치형 창문으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하는 이 주택들은 춤과 노래의 향연을 위한 천혜의 무대였다.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눈에 띄는 복식 구조의 주택은 경쾌한 가무에 입체적인 동선을 치장한다. 집 안팎 곳곳에 자리하며 일상을 영위하던 인물들은 계단을 오르고 내리거나 창문을 여닫고 때때로 뛰어내리며 스크린을 역동적인 뮤지컬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그림 같은 카스타니 해변을 비롯해서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세 아버지들과 처음 마주하는 아그논다스, 그리고 소피의 결혼식을 위해 긴 계단을 오르던 도나(메릴 스트립)가 옛 연인의 고백을 애절하게 뿌리치는 아기오스 요다니스 성당,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조망하는 영화 속 그 집에 머무를 수 있다면 스스로 인생의 승자가 됐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만 같다. 영화 속 그 노래, “The winner Takes it all”처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한 여인이 행복을 찾아 나서는 3막 3장 여행기다. 영화는 그 일탈의 경험이 기록된 활자를 영상으로 치환하며 일탈의 충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부추긴다. 뉴욕에서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던 리즈(줄리아 로버츠)는 그 편안한 삶이 자신을 서서히 풍화시키고 있다는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결혼을 비롯해서 손에 쥐고 모든 것들을 과감히 놓은 채 1년 간의 순례를 결심한다. 풍요로운 진미가 넘치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먹고, 명상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인도의 아쉬람에서 기도한 뒤, 소박한 일상을 영위하며 새로운 운명을 발견해내는 발리에서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 모든 여정은 영혼의 허기를 채우고자 떠나는 순례나 다름없다. 그 모든 여정의 종착지 발리는 새로운 삶을 위한 약속의 땅이다. 현대적인 물질 문명의 침입이 상대적으로 덜한 발리의 자연적인 경관으로 둘러싸인 리즈의 집은 안온한 인상을 부른다. 목재로 건축된 친자연적인 이 주택 곳곳에 놓인 창과 문은 자연을 향해 마음껏 열려있으며 이는 곧 자신을 놓고, 새롭게 가다듬던 리즈의 여정이 비로소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차례에 놓여 있음을 대변한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더 큰 균형’을 찾아간 그녀는 비로소 발리에서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며 그 앞에서 다시 한번 고민하고 갈등하지만 두려움 속에 머물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새로운 사랑 앞에서 뒤돌아서지 않길 다짐한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치스럽게 보이는 고민이겠지만 쳇바퀴 도는 삶 속에서 지쳐가는 현대인 누구나 한번 즈음은 꿈꿔봤을 진짜 일탈이 담긴 이 영화는 대리만족으로서가 아닌, 당신에게 진짜 일탈을 촉구하는 일종의 안내서다.
언 애듀케이션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닉 혼비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술가 린 바버가 한 잡지에 기고한 짧은 회고록 에세이에 사로잡혔다. 이를 바탕으로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한 그는 끝내 영화 제작까지 관여했다. 바로 그 영화가 <언 애듀케이션>이다. 17세 소녀 제니(캐리 멀리건)는 옥스포드 진학을 기대할 정도로 뛰어난 학업성적을 자랑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보수적인 부모와 엄격한 학교에 갇히듯 살고 있다 여기며 작은 일탈로 숨통을 열어두길 원한다. 딱딱한 라틴어 공부보다는 첼로 연주와 샹송을 즐기고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을 염원한다.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중년남자 데이빗(피터 사스가드)과 만남을 거듭하던 제니는 그로부터 제공 받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학교와 집을 오가던 일상에 대한 필요성을 잊기 시작한다. <언 애듀케이션>은 전통적인 영국드라마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전쟁 직후인 1960년대 영국의 일상적인 풍경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샹송과 재즈, 올드팝을 즐기던, 테일러드 복장의 말쑥한 청년들과 심플한 스타일과 짙은 눈화장의 첼시룩 여성들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의 풍경이 재현된다. 빈티지한 데코와 장식들로 가득한 실내 인테리어들도 눈에 띈다. 오늘날 오랜 멋과 정취를 지닌 스타일로 인식되는 빈티지풍의 실내 정경은 단아하고 소박한 1960년대 영국의 현실을 대변한다. 고리타분한 가치관 속에 갇혀있다 믿는 제니에게 그 모든 것은 벗어나야 할 낡은 풍경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 잘못된 선택으로 삶이 뒤틀린 이후, 제니에게 그 풍경은 곧 새로운 기회를 되찾기 위한 안식처가 된다. <언 애듀케이션>은 안온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자극을 꿈꾸던 소녀가 백일몽과 같이 짧고 강렬한 경험을 거친 뒤 얻게 되는 큰 깨달음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제목에서 명시하는 ‘교육’이란 바로 그 시행착오조차 품어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배려이자 덕목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가르치고 있다.
아멜리에
소녀는 어려서부터 특이했다. 아니, 어쩌면 특별했다. 아버지의 손길에 심장박동이 빨라진 탓에 심장병 진단을 얻었고, 소녀는 쉽게 외출을 허락 받지 못한 탓에 자신의 외로움을 함께 견뎌줄 친구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 덕분인지 아멜리(오드리 토투)금붕어의 자살마저 눈치챌 정도로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남다른 재주를 얻게 됐다. 그런 어느 날, 화장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오래된 소지품을 발견한 그녀는 주인을 찾아나선 뒤 결국 그 물건들을 되돌려주는데 성공하며 대단한 보람을 얻게 된다. 누군가의 행복이 자신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체감한 그녀는 주변의 모든 이들이 행복한 감정을 얻을 수 있기를 갈망하며 그들이 모르는 선물을 준비한다. 프랑스가 배출한 귀여운 여인 아멜리는 사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여인이다. 어려서부터 혼자에 익숙한 그녀는 그 외로움을 달래고자 타인의 행복을 위한 대리만족의 일상으로 도피해나간다. 강렬한 레드톤으로 채워진 아멜리의 방은 그녀의 욕구불만을 간접적으로 발산시키고 이를 대리 충족시키는 공간인 셈이다. 화려하고 강렬한 컬러가 방 안에 가득하지만 소박하고 귀여운 도구들로 채워진 그 방의 정경은 아멜리의 마음을 대변한다. 타인으로부터 괴리된 자신만의 공간 속에 숨겨둔 욕망의 도피처이자 사랑 받고 싶은, 혹은 사랑하고 싶은 여자로서의 심리를 유일하게 보관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 결국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 사랑에 다가서길 망설이는 아멜리의 불안은 그 상대를 방 안에 들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진다. 남에게 결코 보여주지 않았던 강렬한 염원 속에 그토록 바라던 사랑이 찾아온다. 이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는 마음의 열쇠를 여는 남녀의 만남에 관한, 판타지 같은 러브스토리다.
어느 기차 속에서 잠을 자듯 창에 기대어 있던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난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여자는 일행인 듯 친근하게 그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콜터 대위(제이크 질렌할)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는 자신이 거기에 왜 있는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인은 누구인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곧 끔찍한 찰나를 경험한 남자는 반복되는 8분 간의 동일한 경험을 거듭하며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며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프로그래밍 정보가 저장된 파일을 의미하는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의 메인보드에 대비시킨 듯한 작품이다.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 속에 보관된, 다시 말하자면 백업된 8분 간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그 기억에 담긴 정보를 탐색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서 8분은 보관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량이며 이를 재생하는 방식에 대해 영화는 고난도의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과학의 힘을 통해서 죽은 이의 두뇌에 보관된 기억 속에 삽입되어 8분간 재현되는 그 과거 속에서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
<소스 코드>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인물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인셉션>이나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연상시킨다. 중요한 건 <소스 코드>가 전자들처럼 시공간에 관한 특별한 발상을 설득력 있게 포장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평행우주론에 입각한 시간여행 이론에 가까운 <소스 코드>의 시공간 개념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양태를 하나의 의식적 세계로 확장해서 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이론적이나 한편으로는 흥미롭다. 사실 타인이 경험했던 1인칭 시점의 과거로 잠입해서 그 기억을 토대로 둔 시점을 대신 시뮬레이션하고, 그 기억이 펼쳐진 모든 환경들을 롤플레잉으로 운용한다는 영화적 설정에는 분명 의심할 만한 오류가 잠재돼 있다. 이를테면 경험자의 경험이 미치지 못한 시공간의 영역까지 대체자가 대신 경험할 수 있다는 설정이 그렇다. 하지만 <소스 코드>는 이런 설정의 무리수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릴 만한 매력적인 자질이 농후한 작품이다.
이런 영화적 설정은 시간여행과 평행우주라는 초자연적 과학원리에 대한 이론적 체험과 함께 재난과 로맨스, 미스터리라는 다양한 장르적 묘미를 전달한다. 반복되는 시공간의 이동 속에서 한 꺼풀씩 벗겨지는 미스터리의 묘미는 시공간의 한계를 되레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재료로 구축되고 있다는 매력으로 승화됐다. <소스 코드>의 시간여행 원리는 하드디스크에 파일을 복사하는 복제의 특성에 가깝지만 이를 자가적으로 진화시키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던칸 존스의 전작인 <더 문>과의 연관성도 발견된다. 자아를 잃어버린 복제 자아가 진짜 자아의 꿈을 대신 실현해내듯 복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벗어나 가상의 리얼리티 속에서 삶을 회복시키는 인물의 태도, 이는 현실보다 나은 이상적인 가상을 추구한다는 리얼리즘의 역설을 겨냥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인셉션>의 팽이가 멈추었는가, 를 두고 벌어지는 분분한 의견에 대한 진보적인 결론처럼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자질의 성과는 바로 ‘시공간의 새로운 지배자’, 던칸 존스라는 이름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학생들이 모인 교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독백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일인칭 시점의 서술로 일관되는 소설의 구어체는 유코의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소설의 화법은 사건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부하도록 유도한다. 동시에 단지 교훈적인 메시지에 접근하기 보다는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목적에 충실한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다섯 인물의 시점을 통해 사건의 양상을 중계하며 결말부를 제외하면 내러티브의 흐름 또한 동일하다. 하지만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는 건조한 톤의 문체로 일관된 원작과 다른 범위의 감상적 접근을 유도한다. 영화는 보다 인위적인 연출적 과장이 두드러지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미끈하게 정돈된 이미지가 유려하게 흐르는 <고백>의 영상은 유코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진실에 다다라 비로소 그것이 이 영화의 분위기와 이질적인 포장에 가까운 결과물이자 위장에 가까운 고의적 연출이라는 진실에 접근한다.
활기찬 교실의 풍경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침전돼 있다는 사실은 곧 그 교실의 안팎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병리적 현상으로 이어지고, 그 모든 과정은 세련된 영상으로 포장된다. 이는 일종의 위장이다. 진실을 폭탄처럼 안고 있는 아이들은 그 불안감 속에 스스로 잠식되고 도피하듯 공격성을 발휘하다 이내 쉽게 폭발의 위협에 꺾이고 만다. 이는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공격성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을 겪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평온한 외형에 대한 은유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작은 괴물들이 자라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고 삶을 유린한 뒤,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의 룰을 완성한다. <고백>은 이 모든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한 학급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압축하고 확대해나간다. 그리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한 현실감으로 구현해낸다.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영상이 감상의 흐름을 막아서는 경우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 냉소적인 영화는 결국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말해도 좋은 결과물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의 지옥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기준조차 깨닫지 못한 악마로 길들여지고, 또 다른 지옥을 함께 만들어간다. <고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동시에 결코 낯설지 않은, 소름 끼치는 경고이자 진단이다. 당신의 아이는 안전한가? 그 전에 당신은 안전한 사람인가? 스스로 장담할 수 있는가?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당신의 무관심까지 집어삼킬 게다.
풋풋한 아이들로 가득한 어느 교실의 풍경, 하나 같이 손에 우유를 들고 마시는 아이들에게서 활기가 넘친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교실의 풍경은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질로 가득하다. 교탁 앞에서, 그리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 아마도 담임선생님처럼 보이는 한 여인의 말이 학생들을 향하고 있음에도 마치 독백처럼 들리는,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교실 속 아이들의 무관심한 소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충격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그녀의 한 마디가 아이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자신의 반 학생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 되는 유코의 일인칭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일인칭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소설은 다소 충격의 강도가 높은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일인칭 화법의 구어체 서술로 진전되며 이런 특유의 분위기는 사건 자체의 놀라움을 감정적인 감상으로 전달하기보단 이성적인 이해로서 응시하고 해부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또한 단순히 충격적인 사건을 사실적으로 전달하고 이를 통해 교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플롯 자체에 충실한 냉소적인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를 영화화한 나카시마 테츠야의 <고백>은 소설과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시점을 통해 사건을 중계한다. 하지만 텍스트로 읽히는 소설과 달리 이미지와 사운드가 동원되는 영화는 두 매체의 형식적 차이가 관점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물론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는 동일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건조한 화법을 유지해나가며 감정의 온도차를 발생시키지 않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가 좀 더 격양된 톤의 분위기를 지닌 결말을 연출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두 작품은 분명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 차이란 기본적인 스토리의 태도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매체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감상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유려한 이미지와 이펙트가 강한 락 넘버로 치장된 영화 <고백>은 건조한 소설과 달리 인위적인 연출 기법이 두드러지는 영화다. 이는 역설적으로 소설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영화적으로 반영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담담한 문체의 저변에 놓인 충격적인 사건과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소설은 활기찬 교실의 풍경을 비추는 유려한 영상의 밑바닥에 끔찍한 진실이 잠재돼 있음을 전해 듣는 과정으로 대체된다. 표면적인 영상의 느낌과 영상 속에 잠재된 분위기가 뒤틀려 있다는 감상은 고백의 시작과 함께 그것이 일종의 위장과 같은 전술적 의도임을 깨닫게 만든다.
<고백>은 이는 개인주의를 넘어선 폐쇄적 관계 회로 속에 매몰된 이들의 출현으로 병리적인 사회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에 관한 의식을 전달한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극심한 세대차, 극단적인 무관심, 공격적인 보호 본능과 충동적인 살해 등, 다양한 병리 현상이 세대의 밑바닥까지 내려오고 있음을 지적하는 충격적인 진단에 가깝다. 관심의 결여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이 타인의 영역까지 침범해서 삶을 파괴하고 사회 전체에 거대한 해악을 형성해 나간다는 진리, <고백>은 이 모든 과정을 단지 단 하나의 학급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속에 온전히 담아내고 그 끔찍한 충격의 강도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다만 종종 인위적으로 조장된 위악적인 플롯과 영상이 자연스러운 감상을 방해하는 단점도 발견된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쩌면 의도적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 냉소적인 영화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온전히 구현해내는데 충실하다. 무엇보다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부조리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 <고백>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나치지 못할, 소름 끼치는 충격에 가깝다. 당신의 사회는 안전한가?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 고백은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괴물은 무관심을 먹고 자란다.